being artist2025-08-17 23:33:38
모든 걸 주었지만 끝내 하늘에 닿지 못한 생에 대하여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리뷰
과거 찰리 채플린의 영화들에는 물론 코미디가 주되지만, 그 안의 미묘한 슬픔과 비애도 엿볼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특히 영화 <모던타임즈>를 관람하면 이를 더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찰리 채플린의 분장을 떠올려본다면 우리가 왜 그의 유머에도 슬픔을 발견할 수 있는지 깨닫는다.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표정 그리고 축 처진 눈과 입은 광대를 모티프로 삼은 캐릭터라기엔 '광대스러움'이 묻어있지 않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 <행복의 눈물>을 생각한다. 분명 웃는 듯한 그녀의 눈망울엔 눈물이 고이다 못해 한 방울 떨어지고 노란색과 붉은색으로 가득한 전체 배경에 눈물의 푸른색은 대비되어 알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렇듯 전체 배경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전체 속 무언가의 존재는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배경이 행복과 환희에 가득 차 있는 반면 슬픔과 비극이 서려 있다면 그 효과는 배가 된다.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각종 빛과 환희, 사랑과 환락이 넘치는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사실상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세계관 속 비극이다. 비극을 조명하면서 단 한 번도 허락되지 않는 희망에 집중한다. 인생에 있어 희망과 빛이 얼마나 모순적인지를 말한다.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것은 선택이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선택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선택할 수 없는 필연(必然)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는 유달리 빛이 많은 것처럼 보인다. 보통의 작품들은 관객의 눈 피로감을 위해 빛의 양을 설정하거나 조명하고자 하는 부위에만 빛을 쬐는 등 조절한다. 그러나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해가 뜬 오전이나 오후 상황이라면 그 배경이 어디든 상관없이 최대의 밝기를 유지한다. 밝기를 유지한 채 마츠코를 집중시키니 관객은 마츠코에게만 집중할 수 있다. 제목에서 누가 주인공이고, 누구의 인생을 조명할 것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듯 영화는 마츠코라는 인물이 그간 밟아온 인생을 추적해 가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중요한 것은 그 밝고 화려한 분위기 속 집중된 주인공은 한없이 외롭고 처연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영화가 이를 의도적으로 연출했다는 점이다. 영화 속 빛은 분명 마츠코를 향하고 있지만 향한 빛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 않고 등지고 있다. 햇빛의 빛이 아닌 술집 네온사인의 빛 혹은 홍등가의 빛 내지는 광고판의 빛이 그녀를 비출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결국 영화의 종반부, 마츠코가 죽음을 맞이한 후 계단을 타고 올라 하늘로 올라가는 순간과 대조된다. 영화의 빛을 항상 등지고 있던 인물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빛을 바라볼 수 있었다는 것은 결국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인생의 아이러니함과 맞닿아 있지 않을까.
하나의 작품에 반드시 단 하나의 장르만이 지배적일 필요는 없듯,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갈래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뮤지컬이다. 영화의 OST가 서사의 한 축이 되어, 특히 음악의 가사가 대사의 일부가 되면 우린 흔히 뮤지컬 장르 영화라고 부른다. 작품 속 마이클 부블레의 <Feeling Good>와 같은 OST가 빈번히 등장한다. 특히 해당 곡 이후에는 제목에서 말하는 '좋음'과는 거리가 먼 상황들만 연출되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 속 OST는 앞서 언급한 빛과 함께 영화의 비극을 고조시킨다. 마츠코의 불행한 인생과 뒷배경으로 깔린 평화롭고 행복을 꿈꾸는 노래 가사들은 대조된다. 마츠코가 조금이나마 사랑과 희망을 품고 부르는 노래에도 아름다움이 있지만 이후의 비극은 역설적이다. 투옥된 마츠코가 사랑하는 이만을 바라며 기나긴 시간을 보내지만, 그마저도 8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 남자는 다른 가정을 갖게 된다. 마츠코의 일련의 비극을 영화는 노래로써 표현하는데 화목한 선율과 대비되는 마츠코의 상황이 속 불균형함은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핵심을 관통한다.
크나큰 난관에 봉착하게 되면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라는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하게 된다. 하지만 늘 답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시작점이 항상 문제가 된다. 영화는 마츠코라는 인물에게 벌어진 모든 비극의 원인을 어떠한 극적인 사건이 아닌 맨 처음, 어린 시절부터 짚고 시작한다. 그렇기에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게는 '인생이란 선택으로 이뤄진다'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선택으로 정해지지 않는 가정의 환경으로 인해 어린 시절부터 사랑이 고팠던 마츠코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교사가 된 마츠코가 학생을 지키려 택한 결정으로 실직되고, 사랑을 주었지만 돌아오는 건 폭행이었던 남자 친구들은 늘 존재했다. 자기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던 이에게서 결국 찾은 건 열등감이었다. 위 세 경우 모두 선택은 물론 마츠코가 내렸지만, 결코 자의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첫 단추가 잘못 끼어진 후에는 어떤 단추를 끼다 해도 정상적인 옷매무새가 나올 수 있을까.
흥미로운 것은 영화는 계속해서 마츠코의 인생에 여지를 줬다가 뺏는다는 것이다. 좋은 사람을 만난 것 같았지만 결국 똑같은 나쁜 놈이었고, 직장을 갖는 듯했지만 곧바로 실직하게 되는 일들의 연속이다. '영화의 종반부쯤 가면 그래도 영화의 주인공인데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겠지'라는 클리셰다운 생각은 마츠코의 허무한 죽음으로 인해 그마저도 부서진다.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 있어 가장 인상적인 것은 마츠코의 생존력이다. 갖은 난관에 봉착해 도망치더라도 결국 그녀는 살아남는다. 또한 어떤 시련이 오더라도, 어떤 남자와 교제하건 혹은 어떤 직업을 갖게 되건 외모만큼은 절대 잃지 않는다. 그러나 일련의 사랑이 모두 끝나고 고향에 내려가 마지막으로 비극의 시작이었던 아픈 동생의 죽음을 확인한 그녀가 다시 올라온 후로 그녀의 생존력마저 무너진다. 마르고 늘씬했던 그녀의 몸은 어느새 걷는 것마저 불편할 지경이 되었고, 어떤 상황이 와도 깔끔을 유지했던 집은 쓰레기장으로 변한다. 중학교 교사로서 중학생의 한 발언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던 그녀의 생은 결국 중학생들의 폭행으로 마감된다. 악착같이 버텨오던 그녀의 삶이 한순간에, 그것도 너무 무기력하게 끝내게 되는 것은 결국 인생의 아이러니함을 떠올리게 한다. 마지막 순간마저 옛 친구가 건넨 명함을 찾아 다시 정상적인 삶을 바라던 그녀의 꿈과 희망은 또다시 허무하게 부진다.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 있어 반복되는 대사로 '인생은 내가 얼마큼 받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큼 주었냐가 중요한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 모두 그렇게 믿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나무에 칭찬과 위대함을 칭찬한다. 마츠코의 일생을 생각한다면 그 나무와 전혀 다르지 않다. 아버지에게 사랑받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연습했다. 좋아하는 남성에게 사랑받기 위해 폭력까지 무릅쓰며 버텼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픈 동생만을 사랑하며 표면적으로 마츠코를 돌아보지 않았던 아버지, 이러한 그녀의 사랑은 몰라주고 이용만 하다 버리려는 남자들뿐이었다. 영화는 우리가 그동안 믿어온 관념에 질문을 던지듯 하다. '다른 이에게 사랑을 퍼다 주었음에도 인생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면, 그땐 인생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래?'라고 반문하는 듯하다. 영화의 종반부 마츠코가 부르던 노래를 영화에 등장한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따라 부른다. 이는 어쩌면 마츠코가 겪은 인생이 결코 마츠코라는 인물이 가진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또한 '어쩌면 내가 저 인물 중 한 명이진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결국 나도 누군가의 인생이 멍들어감에 일조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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