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1-04-28 09:20:34
리뷰 <더 파더> : 그는 엉켜 버린 기억 앞에 서서 울었다
<더 파더>
더 파더 (The Father, 2020)
* 본 리뷰는 영화와 관련된 중요한 사건과 일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를 기다린 가장 큰 이유는 배우 때문이었습니다. 84세의 노장이지만 아직도 건재하며 모든 배역마다 완전한 그 역할 자체가 되는 안소니 홉킨스의 출연이기에 다른 때와는 다르게 영화 내용을 제대로 찾아보지도 않고 영화관으로 향했습니다. 그래서였는지 배우의 연기는 기대 이상이었으나 사전 정보가 많지 않았던 영화 내용에는 기대하지 못한 적잖은 충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좋은 의미에서의 충격입니다.) 장르는 분명 드라마인데 스릴러와 공포를 넘나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으니까요. 영화를 보고 나서 머릿속이 얼얼한 기분은 “곡성”이후로 오랜만이었습니다.
런던에 살고 있는 “안소니”(안소니 홉킨스)는 자신의 자부심처럼 느껴지는 집에서 혼자 노년의 나날들을 보냅니다. 그의 딸인 “앤”(올리비아 콜맨)은 주기적으로 그를 찾아오고 돌보아줍니다. 그러나 그녀는 새로운 사람과의 시작을 위해 곧 파리로 떠나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뜻밖의 이야기에 안소니는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그리고 기억은 점점 더 엉켜서 무엇이 현실인지 알 수 없어져 갑니다. 딸은 어느 시점엔 간병인의 얼굴로 등장하고, 아버지를 떠나서 파리로 간다고 이야기한 적 없다고도 말합니다. 간병인의 얼굴은 세상을 떠난 둘째 딸 루시와 매우 닮아 있기도 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다른 모습의 간병인으로 등장합니다. 커져가는 기억의 오류들 속에서 진짜를 찾기 위해 안소니는 기억을 바로 세우고 싶지만 그것은 그에겐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 이 영화의 장르는 스릴러와 공포인가
안소니에게는 언제가 아침이고 언제가 밤인지 모르는 날들이 계속됩니다. 영화의 소재인 “치매”는 우리에게 익숙한 그 병의 증상을 매우 세밀하고 감각적으로 전달합니다. 안소니에게 그가 알던 딸, 딸의 남편, 간병인은 다른 사람의 얼굴로 등장하기도 하고 알고 있던 인지하던 사실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게 되며 그는 매우 혼란스러움에 빠져가게 되죠. 트루먼 쇼, 예능에서 많이 보았던 몰래카메라를 연상하게 하는 해프닝들이 모여 그에게 굉장한 당혹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관객의 입장에서도 그가 인지할 수 없는 시간들과 사실들이 반복되는 것을 바라보는 게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마주하기 싫은 과거의 트라우마를 마주 해야 하듯 스크린 속 안소니의 모습을 애써 지켜보면서 저 역시 시공간 감각을 상실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런 느낌들이 이 영화의 장르를 드라마가 아닌 심리스릴러로 느껴지게 하는 지점이라고 봅니다. 관객은 등장인물들의 옷, 씬마다 바뀌는 안소니의 아파트의 구조, 가구들을 유심히 살펴보며 무엇이 진실인지를 쫒아가게 되니까요. 그렇지만 영화가 엔딩에 다다를 때까지 안소니에게 실제 일어난 일을 찾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감독인 플로리안 젤러감독은 이런 관객의 경험을 유도했다고 합니다. 관객이 모든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진실과 진실이 아닌 것을 생각하는 경험을 체험하길 원했다고 하죠. 또 이런 것들을 통해 여러 영화에서 치매를 다루는 방식이 아닌 색다른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길 바라는 의도가 정확히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치매는 내가 겪어온 모든 시간을 엉겨버리게 만듭니다. 기억하는 사실이 달라질 때마다 그는 유난히 자신의 손목시계에 집착합니다. 엉겨버린 시간과 진짜 있었던 상황을 바로잡으려는 그의 현재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아마 어느 요양병원 침대에 누워 생각하고 있겠죠). 자신에게 있었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진짜가 무엇인지 찾으려는 그의 고군분투를 시계를 통해 어림짐작할 수 있고, 이는 영화를 함축하는 가장 적합한 장치가 됩니다.
▶ 이 영화의 장르는 결국 드라마였다
반복되는 장면들에서 “대체 이게 뭐지?”라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최대치로 느끼다가, 마침내 마지막에 도달하여 이 모든 일의 대부분이 그저 치매 걸린 그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사실이라는 점을 깨달았을 때 영화의 장르는 공포에서 드라마로 옷을 바꿔 입습니다. 요양병원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마치 아기의 모습을 한 안소니의 모습에서 진실 찾기의 긴장이 끝났다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쓸쓸한 노년을 맞이한 한 사람의 드라마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 시점이 돼서야 편안하게 인물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게 되었는데요, 안타까움과 연민의 감정들이 폭풍처럼 밀려옵니다. 그리고 이건 어쩌면 먼 훗날 나의 모습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들게도 합니다. 나의 모든 잎들이 사라지는 것 같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찬란하게 꽃 피웠을 한 사람의 인생 여정의 마무리가 너무나도 가혹하고 쓸쓸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영화 배역의 이름과 동일한 이름의 안소니 홉킨스의 연기는 안소니 그 자체였습니다. 맡는 배역마다 그 사람이 되어버리는 배우입니다. 그리고 그 점에 있어서 나이 차이는 확연하지만 전 이병헌 배우가 늘 떠오릅니다. 이병헌 배우도 맡은 배역 모두 그 사람처럼 소화해내니까요. 그리고 소재가 소재인만큼 만일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역할을 맡는다면 누가 적합할지 떠올려보았는데 연기백 단의 이순재 배우, 박건형 배우가 떠올랐습니다.
<더 파더>는 감독이 직접 쓴 희곡 “더 파더”가 연극 이후 호평을 통해 영화로 재탄생된 작품입니다. “치매”라는 병을 소재로 차용할 때 주변인들이 환자를 연민과 사랑으로 바라보는 그간의 접근방식과는 다르게 당사자가 겪게 될 혼란과 공포에 맞춘 색다른 각본과 연출이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이런 각본, 연출, 배우의 3박자가 고루 갖추어져서 개봉 전부터 전 세계 영화제에서 노미네이트 되었고, 다가올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작품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각색상, 미술상, 편집상의 총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습니다. (이 글이 쓰여진 이후 4/26 기준으로 아카데미에서 각색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코로나로 인한 영화 가뭄이 이어지는 날들 속에서 믿고 보는 배우들의 명품 연기와 작품성이 곁들여 저 완성미가 돋보이는 그런 영화의 부재들을 <더 파더>가 채워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지 출처 : <더 파더> 스틸 컷
* 본 콘텐츠는 블로거 그린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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