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심2025-08-18 15:03:24
혼자는 외롭고 함께는 버거운 당신에게
<내 말 좀 들어줘> 리뷰
“혼자는 외롭고 함께는 버거워”
어쩌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한 번쯤은 빠지게 되는 딜레마가 아닐까. 홀로 남기엔 지독하게 외롭고, 또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자니 그 누구도 내 상처를 이해하지 못할 것만 같고. 그렇게 세상에 버팀목 없이 나 혼자 남겨진 것만 같을 때가 누구에게나 있다. 영화 <내 말 좀 들어줘>는 이러한 딜레마를 안고 살아가는 인물들을 담담한, 그러나 따듯한 시선으로 비춘다.
영화의 주인공 ‘팬지’는 모든 일에 불만을 늘어놓는다. 가족은 물론 가구점 점원, 의사, 마트 점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까지 그는 분노 어린 불평을 뱉어낸다. 이렇듯 매사에 잔뜩 날을 세우고 있는 탓에 팬지는 만성 두통과 치통, 복통을 동반한 신경증에 시달린다. 그녀는 너무나 지쳐 있고, 또 무언가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그런 팬지를 보며 관객들은 도무지 이 인물과 가까워질 수 없을 것 같다는 거리감과 함께 자연스럽게 의문을 가지게 된다. 왜 그녀는 이렇게 화를 낼까. 왜 가족들은 그녀의 분노에 무심하기만 할까.
영화는 인물들의 가정사나 배경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 주지 않는다. 때문에 우리는 팬지와 여동생 ‘샨텔’의 대화나 자매가 떠올리는 어머니와의 관계, 아들 ‘모지스’가 준비한 꽃다발에 대한 팬지의 반응 같은 것들로부터 인물들이 지닌 결핍과 외로움을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날 팬지가 모지스로부터 꽃다발을 받은 순간, 영화에서 처음으로 그녀가 분노가 아닌 다른 감정을 내보이면서 이 불화는 변화를 예감한다. 기쁨인지 슬픔인지, 혹은 고마움인지 연민인지 모를 의미심장한 웃(울)음의 순간. 그 감정의 동요를 시작으로 팬지는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모지스가 선물한 꽃다발을 정돈해 병에 꽃아 두고, 혹여나 새나 짐승이 들어올까 굳게 닫아두었던 마당 문을 조심스레 열고 바깥공기를 느껴 보기도 하면서.
외부의 침입이 없다면 면역도 생기지 않는다. 병이 낫기 위해서는 내가 환자라는 인식보다 내가 나아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중요하다. 모든 게 끝나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팬지는 그 순간 감정을 표출하면서 자신이 지나온 상처와 상실을 떠올림과 함께 자신의 앞에 놓인 다른 삶의 가능성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녀는 굳게 닫혔던 문을 조심스레 열면서 이제껏 귀 기울이지 못했던 담장 너머 세상의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영화에서 소외와 불통의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은 비단 팬지만이 아니다. 팬지가 이를 분노와 불만으로 표출한다면 커틀리는 무감함으로, 모지스는 우울로 드러낸다. 두 인물 역시 팬지와 마찬가지로 무언가에 몹시 지쳐있고, 불만을 가지고 있는 상태지만 팬지처럼 언쟁을 일으키기보다 조용히 회피하기를 선택한 이들이다. 팬지가 말을 너무 많이 한다면, 이들은 말을 너무 하지 않는다. 이들이 팬지의 말을 묵묵히 듣기만 한다면, 팬지는 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때문에 이 가족에게는 불통의 문제가 드리워져 있고, 이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해소되지 않는다. 다만 영화는 변화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예고할 뿐이다. 모지스는 용기 내 엄마에게 마음을 전하고, 웅크렸던 몸을 펴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한편 커틀리는 허리 부상을 계기로 먼저 팬지에게 진지한 대화를 청한다. 관객은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숨죽여 이들 가족 사이 긴장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이 지난한 과정 속에서 소통에 대한 희망, 또는 불통에 대한 절망 사이를 오가던 나는 문득 현실의 삶이 영화와 비슷하다는 생각에 닿았다. ‘극적’인 갈등의 해결이나 감동적인 가족애의 회복은 현실에서 마주하기 어렵고 오히려 반복되는 관계 속 피로감과 절망을 맞닥뜨리기 다반사니까.
하지만 영화는 한 편으로 또 다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진부할지 모르지만 언제나 옳은 것. 바로 ‘사랑’이다.
영화 속에는 팬지의 속사포 같은 분노와 불만을 유일하게 들어주는 사람이자 팬지의 아픔을 헤아려보는 유일한 혈육인 샨텔이 있다. 샨텔은 어머니의 묘 앞에서 트라우마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팬지를 위로하면서, “언니를 이해는 못 해도 사랑해(I don’t understand you, But I love you.)”라고 말한다. 이해와 사랑은 다른 차원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와 고통, 분노를 이해받길 원하지만 우리는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불가능을 원하기에 우리는 자꾸만 외로워진다. 그러나 이해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빈자리에 사랑이 있다면, 상처는 치유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샨텔이 팬지에게 보여 준 사랑처럼. 그렇게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관객은 끝끝내 팬지를 이해할 수 없지만 처음과 같이 미워할 수도 없게 된다.
<내 말 좀 들어줘>는 이들이 지나온 상실과 결핍을 애써 긍정하며 포장하기보단 담담한 시선으로 그 상실과 외로움을 포착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스크린 위에는 상처받고 외로운, 분노하고 슬퍼하는, 그래서 우리와 닮아 있는 인물들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관객에게 다정하게 위로를 건네는 영화로 <내 말 좀 들어줘>를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영화는 직접적으로 극복이나 나아감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어설픈 위로를 전하기 보다 불편하고 지긋지긋한 삶의 단면을 보여주기를 택한다. 다만 관객은 그 속에서 자연스레 스스로 공감점을 찾아내고, 어떤 이에게는 단지 그것만으로도 영화는 위로가 될 것이다.
*영화 웹매거진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하여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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