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마2025-09-07 19:41:55
좋은 글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영화 <지니어스> 리뷰
좋은 글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영화 <지니어스> 리뷰
얼마 전, 원작 『맥스 퍼킨스 : 천재의 편집자(Max Perkins, Editor of Genius)』를 바탕으로 한 영화 <지니어스>를 다시 보았다. 사실 이 영화를 꺼내 보게 건 서점에서 우연히 집어 든 책 한 권 때문이었다. 추천인은 오랜 세월 편집자로 일해온 사람이었고, 글을 업으로 삼고 싶은 내게 그의 권유는 다른 누구의 말보다 특별하게 다가왔다. 특히 영화를 보며 예전 영화학도 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부분들이 새삼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는 캐릭터들의 고민이 이제야 현실적인 질문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글쟁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글이 어떻게 태어나고 다듬어지는지, 그 지난한 과정을 드물게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그랬듯 아마도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좋은 자양분이 될 것이라.
천재를 알아보는 법
출처 : 네이버 영화 <지니어스> 스틸컷
1929년, 비 내리는 뉴욕. 찰스 스크리브너 선스 출판사 앞.
담배를 문 한 남자가 빗속에 서 있다. 굵어지는 빗줄기에도 미동조차 없는 그의 모습은 누군가를 묵묵히 기다리는 듯하다. 잠시 후, 카메라는 출판사 안으로 전환된다. 소란스러운 빗소리와 달리, 안에서는 연필이 원고를 긋는 소리만이 적막을 채운다. 그런 그의 앞에 새 원고 뭉치 하나가 던져진다. 이미 수많은 출판사에서 외면당한 방대한 원고. 그것이 종이 더미로 버려질지, 아니면 새로운 문학의 시작이 될지는 오직 편집장 맥스 퍼킨스의 눈에 달려 있었다.
집으로 향하는 열차에 오른 맥스는 원고를 펼쳐 든다. 그러나 끝이 보이지 않는 분량에, 출근길 열차 안에서도 계속 원고를 읽는다. 하루 가까운 시간을 통째로 바쳐서라도 붙잡게 된 글.
형편없는 글이었다면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오, 잊혀진 것들’이라는 원고는 단번에 출판사를 사로잡은 글은 아니었지만, 문체는 아름답고 독창적이었다. 다만 지나치게 길고 산만한 단락들은 읽는 맥스를 지치게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속에서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의 빛을 알아본다.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를 발견했던 그의 눈은, 이번에도 새로운 천재를 정확히 포착한다. 토마스 울프. 그의 운명이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사여, 고향을 보라』
토마스의 재능을 알아본 맥스 퍼킨스는 그를 출판사로 불러들인다. 두 사람의 첫 만남에서 토마스 울프는 자신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는 자신의 글처럼 수려한 말솜씨를 가진, 자신만의 세계가 뚜렷한 인물이다.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더라도 글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신념이 그의 태도에서 묻어난다.
“울프 씨, 당신의 책을 출판하고 싶습니다.”
맥스의 그 한마디로, 영화는 다음 챕터로 넘어간다. 극의 전개와 편집은 너무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정제된 템포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차근차근 리듬을 타고 나아가는 듯하다. 드디어 자신의 책을 출판하게 된 무명 작가 토마스 울프. 당장 그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자신의 원고를 교열(편집)하는 일이었다.
울프는 분명 뛰어난 작가였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도 많았다. 그렇기에 교열은 불가피했다. 수천, 수만 문장에 달하는 글을 다듬어내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몇 년간 매달렸던 문장들을 지워야 하는 순간마다
안타까움을 토로했고, 때로는 분노와 불만을 쏟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맥스는 알고 있었다. 좋은 원고가 좋은 책으로 태어나려면 군더더기를 쳐내고 핵심만을 남겨야 한다는 것을. 그는 울프 곁에서 묵묵히 조력자의 역할을 하며,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이 빛나는 보석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도왔다. 마침내 그렇게 다듬어진 첫 작품 『천사여, 고향을 보라』는 출간과 동시에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하루아침에 무명에서 스타 작가로 떠오른 토마스 울프의 삶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화려한 명성과 부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영화는 이 시점에서 관객에게 중요한 사실 하나를 드러낸다. 울프의 연인 알린 번스타인이 사실은 얼굴도 알지 못하는 번스타인 씨의 아내였다는 것을. 울프는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 장면을 통해 관객은 처음으로 그들의 관계가 불륜이라는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복잡한 사생활과 엇갈린 감정 속에서, 울프는 새로운 원고 뭉치를 들고 다시 맥스의 편집실 문을 두드린다.
『때와 흐름에 관하여』
토마스는 다시 원고 뭉치를 들고 맥스의 편집실을 찾았다. 이번에도 원고의 분량은 방대했다. 5천 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다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그들은 가까운 사람들과도 점차 멀어졌다. 맥스는 가족과의 여름 휴가를 포기해야 했고, 아내와의 갈등은 깊어졌다. 톰의 연인이었던 알린 번스타인 역시 점차 그에게서 외면받는 듯한 외로움 속에 불안감을 키워갔다. 톰과 알린의 관계는 어쩌면 시작부터 균열을 내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불륜으로 시작된 사랑은, 설 얼은 강바닥에 번지는 금처럼 보이지 않게 신뢰를 깨트리고 있었다. 바깥의 잡음이 요란했음에도, 맥스와 토마스는 오로지 글을 다듬는 데만 몰두했다.
“우리 편집자들은 밤잠을 못이뤄. 우리가 정말 글을 좋게 바꾸고 있나? 그저 변형시키는 것인가?”
맥스의 이 고백은 글을 쓰는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고민이다. 글을 다듬는 일이 본질을 더욱 빛내는 과정인지, 아니면 오히려 훼손하는 일인지 늘 자문하게 된다. 정답은 없다. 그렇기에 어렵지만, 동시에 반드시 마주해야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지난한 작업 끝에 세상에 나온 신작 『때와 흐름에 관하여』는 뉴욕타임스를 비롯해 수많은 언론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토마스 울프는 연이어 3편의 베스트셀러를 내며 출판계의 스타로 우뚝 선다. 그러나 영광의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급성 뇌질환으로 쓰러져, 너무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다.
예민하고 히스테릭했지만 자유로운 감수성을 지녔던 그는, 그 삶마저 예측불허했다. 그런 성정이 그의 글을 특별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의 삶을 불안정하게도 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눈, 글로 길어 올린 독창적인 문체와 시적 통찰은 수많은 독자를 사로잡았으나, 정작 그가 쓰러질 무렵 그의 곁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작가이자 예술가로서 가장 뜨겁게 타올랐지만, 인간으로서는 누구보다 고독했던 순간이었다.
토마스가 떠난 뒤 맥스의 곁에 남아 준 것은 결국 가족이었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던 아내와 딸들, 변함없는 안온한 보금자리였다. 그리고 그가 다시 안정을 찾아갈 무렵, 스크리브너 선스 출판사로 편지 한 통이 날아든다. 수신인은 맥스 퍼킨스. 그것은 토마스가 생전에 남긴 마지막 편지였다.
죽음이 두렵지는 않지만 여전히 살고 싶다는 간절함
맥스와 다투며 그에게 상처준 일에 대한 후회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이야기들에 대한 미련, 그리고 병을 이겨내 다시 살아가고 싶다는 나약한 희망
그는 마지막 순간, 모든 심경을 글에 담았다. 도시의 풍경을 함께 바라보던 어느 11월의 기억까지, 토마스는 잊지 않았다.
비운의 천재, 토마스 울프. 그는 마지막 순간마저 글로써 친구에게 작별을 고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지니어스> 스틸컷
영화<지니어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만, 연출은 결코 과장되지 않는다. 오히려 담백하고 슴슴하게 흘러간다. 그러나 바로 그 담백함 속에서 글을 둘러싼 치열한 고민이 오롯이 드러나는 영화임이 틀림없다. 만약 토마스 울프가 이 영화를 보았다면, 연극을 싫어했던 그의 성향에 딱이라며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오랜만에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을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자 하는 지금의 나에게 더없이 좋은 자극이자 깊은 여운을 남겼다. 잔잔하고 평범해 보이는 영화도 결국 누가,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 인생 영화가 될 수 있다. <지니어스>는 내게 글에 대한 권태가 찾아올 때마다 다시 꺼내들 수 있는 작품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를 내 취향대로 채워가는 일이란, 늘 가슴이 충만해지는 기쁨이자 희열 넘치는 행위인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