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1-04-30 10:19:02
[킬링 이브 1,2,3]: 싸이코패스 살인마와 MI6 요원의 추격전, 그리고 러브스토리
▶싸이코패스 살인마와 MI6 요원의 추격전, 그리고 러브스토리
서로 다른 조직에서, 서로 다른 목표로 일하지만 소름 끼치게 닮은 이브와 빌라넬. 이브는 MI6 요원이고, 빌라넬은 싸이코패스 살인마다. 점차 서로를 알아가는 둘이 느끼는 감정은 공포, 분노가 아닌 사랑이다. 동료를 죽이고 가족을 해친 살인마에게 끌린다는 것, 자신을 좇는 요원에게 끌린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설정이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 일을 어렵지 않게 해낸다.
핵심은 파괴적 여성 욕망이다. 젠더에 따라 굴절된 불평등한 욕망 구조로 인해 여자들의 솔직한 욕망은 늘 파괴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다. 여자들의 욕망이 기존 질서를 뚫고 나오기 때문이다. 순종하지 않는 여성 욕망, 남자가 아닌 여자를 향하는 여성 욕망이 용납되지 않은 이유다.
살인은 파괴적 여성 욕망의 은유다. 빌라넬은 〈킬 빌〉의 우마 서먼처럼, 애초부터 사회에 순순히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 없는 ‘여왕벌’이다. 여왕벌이 여왕벌로서 존재하려면 자신을 옥죄는 주변을 ‘파괴’할 수밖에 없다.
이브만이 빌라넬의 파괴를 다르게 독해한다. 이브는 빌라넬의 파괴에서 해방감, 흥분, 전율을 느낀다. 기존의 도덕률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빌라넬에게 끌리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동료 대신,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던 남편 대신 빌라넬을 선택한다.
다만 시즌이 지날수록 드라마의 전개가 처진다는 게 아쉬웠다. 이브와 빌라넬의 서로를 향한 ‘기괴한’ 욕망은 어느 순간부터 질질 끌린다. 둘 사이의 강렬함이 소진되니, 불필요한 캐릭터 설명과 개연성 없는 인물이 늘어난다. 시즌제 드라마의 어쩔 수 없는 한계기도 하겠지만 조금 짧더라도, 압축적으로 둘의 사랑을 진득하게 감상하고 싶었다는 아쉬움은 떨쳐지지 않는다.
* 본 콘텐츠는 블로거 률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Relative contents
-
- 하이틴 코미디로 그냥 넘어가기엔 좀 그렇지
난 인기가 있는 사람일까? 내 뒤에 있는 아빠는 인기가 많다. 사진작가로서 잘 나간다. '매사에 겸손해라'라고 하긴 했지만 인기가 많은 건 사실이다. 그러니까 방송 출연도 하고 책도 나오지. 사실 아빠가 부럽다. 나도 내가 미래에 직장을 갖고 싶은 분야에서 전문가 대접받고 싶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하고 또 이런저런 경험치도 많이 쌓았다. 뭐 26살이 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그런 경험과 공부들이 미래의 성공과 직결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긴 했지만. 아무튼 나는 그냥 별 볼일 없는 20대 중반의 평범한 사람이다. 공부할 것 많은데 오늘 4시에 일어났으며 한 일이라곤 이 글을 쓰는 것 빼곤 없다.
가끔 저 인스타그램 안의 사람들이 부러워지기 시작한다. 부럽다. 나도 이 노예생활 끝나고 좋은 직장 가져서 저렇게 살고 싶다. 저렇게 인기가 많으려면 뭐가 필요할까? 나도 저 사람들처럼 무언가 사람들과 나눌 수 있을까? 내 이름 아래에 '인기 많다'는 좀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느닷없이 이불 킥을 유발하는 20대의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으으. 과연 나는 관심받기 위해 어떤 미친 짓까지 했단 말인가. 홍상수의 영화 몇 편이 생각나며 이 모습이 과연 나와 다른 점이 있을까 싶어 픽 웃음이 난다. 그러면서 크는 거라지만 나의 흑역사는 어마 장장하니 오답노트가 필요하다. 37살, 미국의 어느 곳에서 실시간으로 흑역사를 갱신 중인 여자가 있다. 이 여자는 이런 우리에게 자기의 흑역사를 인스타그램 라이브로 생중계하고 싶다고 한다. 넷플릭스로 가보자.
20년이 사라졌다
호주에서 전학 온 10대 여학생 스테프. 스테프는 새로운 학교에서 인기가 많은 학생이고 싶다. 뭔가 열심히 연구하는 스테프. 그녀는 인기가 많아지고 싶었다. 고등학교 4학년이 된 그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교내 치어리더 팀에 들어가게 된다. 그녀의 꿈이 현실로 이뤄지는 데는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이내 원했던 목표들이 점점 이뤄지는 걸 확인하는 스테프. 인싸가 되기 위해 보내왔던 것들이 효과가 있어 나름 뿌듯하다. 스테프의 행보에 화룡정점을 찍는 것은 역시 섹시한 남자 친구다. 블레인을 점찍어 놨었던 스테프. 역시 인생은 말하는 대로 이뤄지는 게 맞다. 스테프는 블레인과의 연애에 성공한다. 그렇게 원하는 것들이 다 만족됐던 10대. 학교 치어리더 팀 단장이었던 스테프는 자신감 풀 충전의 상태로 치어리더 공연을 나선다. 그러나, 사고가 일어났다. 받아주는 사람 없이 뒤쪽으로 떨어져 혼수상태에 빠진 것이다.
그렇게 20년이 지났다. 20년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던 스테프. 17살이었던 그녀가 37살의 몸을 갖게 되었다. 살도 찌고, 운동능력도 떨어졌다. 예뻤던 10대 시절은 이제 없다. 스테프에겐 꿈이 있었고 목표도 있었다. 졸업식의 퀸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스테프. 상큼 발랄한 꿈과 희망이 사라졌다. 새로운 삶을 시작할 법도 했지만 그녀에게 포기할 수 없던 것이 있었다. 스테프는 친구 마샤가 다니던 학교의 고등학교 교장이었던 점을 이용해서 다시 학교생활을 시작한다. 영화는 몸은 37살이지만 정신연령은 17살인 스테프의 학교 생활을 중심으로 전개한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 것 같아
영화는 편하다. 이 영화는 편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영화다. 어려운 메타포도 없고 긴박한 서스펜스도 없다. 톡톡 튀는 주인공의 매력과 코미디가 함께 있어 보기 어려운 작품은 아니다. 또 후반부를 넘어가면 묵직한 메시지까지 안고 있다. 주인공은 내적 성장을 통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삶의 교훈까지 얻게 된다. 이 영화는 쉽게 관객에게 하고 싶은 말을 던지는 영화다. 그러나 영화는 좀 뻔뻔한 느낌이었다. 이 뻔뻔함이 능글맞아서 장점으로 발현되지 않는다. 지나치게 쉬운 영화의 특성이 오히려 마이너스로 작용한 것이다.
2002년과 2022년 사이의 시간 차를 묘사한 거 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비판은 충분히 유효타로도 작용했다. 예를 들어 스테프의 입에서 '게이'라는 단어가 나오며 유머를 하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이어 그녀가 예상하지 못했던 사실이 있어 '미안해'라는 단어가 나온다. 이 장면을 이렇게 구성한 이유를 알 것 같다. '뭐 그리 불편한 게 많아?'라며 흔히 말하는 '불편러'를 비판하고 싶었던 의도는 좋았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이에 대해 반대의 시각까지 보여주기도 했다. 학교 안의 어떤 단체에 대해 특정 셀럽이 혐오 집단으로 규정했다는 말은 영화에서 나름의 균형감각이 있었다는 뜻이 된다고 생각한다. 맹목적인 사람들의 움직임의 허상도 꼬집었으니 영화가 풍자하고 싶었던 것들은 나름대로 합리성이 있다. 그러나..
모호하게 퉁 치는듯한 이야기
영화는 구멍이 많다. 37살이 고등학교를 다시 다닌다? 아무리 교장이 친구라도 해도 설정에 대한 큰 구멍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친구가 교장이라고 37살이 고등학교 생활을 재개한다고 하면 전 세계적으로 난리가 날 것이다. 뭐 이런 식으로 영화의 만듦새를 지나치게 따지는 건 살짝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의 개연성, 핍진성, 현실성을 따진다고 했을 때 내가 최근에 재미있게 봤던 <닥트 스트레인지 2>나 <범죄도시 2>도 말이 안 될 것이다. 마 석도 같은 괴물 형사나 닥터 스트레인지 같은 마법사는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기본 설정의 현실성 문제는 또 다른 부분의 단점을 낳는다. 20년이나 혼수상태에 빠졌던 인물이 며칠 만에 치어리더 팀의 수장이 되어 춤을 춘다. 최소한의 재활훈련도 없이 이 사람은 모든 일들에 무리가 없다. 또 영화 안에서 가장 중요한 갈등은 '스테프의 혼수상태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부분일 것이다. 이 범인의 존재가 굉장히 쉽게 드러난다. 그런데 쉽게 드러나기만 하고 끝나지는 않는다. 이 영화가 보여줬던 문제 해결 방식은 솔직히 동의하기 어려웠다. 내 입장이라면 그렇게 안 했다. 또한 극에서 한 모녀관계가 있다. 이 둘은 근본적으로 모녀다. 모녀로서의 유대감을 묘사도 없이 '그냥 그래야만 한다' 식으로 어물쩡 넘어간다. 그리고 주인공의 친구들 성격 묘사가 좀 지나치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있다. 이 주위 사람들의 성격은 주인공의 개과천선으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중요할 것이다. 친구들에 감정 이입해서 대신 말해주는 사이다가 터져야 극에 집중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런데 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사람들이 착하다. 후반부의 강한 임팩트를 위해 인물이 희생된 것이다. 이런 단점들을 품고 있다 보니 극의 메시지에 강하게 집중이 안 된다. 끝에 하고 싶은 말을 빡 하기 위해서만 이뤄지는 영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이야기했듯 단점이 많은 영화지만 장점도 있다. 이 영화에서 말하는 메시지는 나에게도 적용된다. 아직도 인간관계의 부담감을 느끼는 나. 나름 학습해야 했던 관계에 대해서 10대 때 놀았으니 이 대가는 필연적이다. 그래서 가끔 인스타그램의 누군가들이 부럽다. 내 짝은 누굴까? 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못 받을까? 난 누군가에게 진심이지만 그 사람은 나에게 이 마음이 아닐 것 같다. 이렇게 나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영화는 힘 있는 메시지를 보낸다. 극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긴 하나 어렵지는 않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전해지는 감동이 분명히 있긴 할 것이다. 후반부 어떤 인물의 입에서도 나오듯 현실은 인스타그램 밖에 있다.
또 주인공을 맡은 레벨 윌슨의 열연이 돋보인다. 레벨 윌슨은 미국에서 유명한 개그우먼이자 여배우라고 한다. 코미디/로맨틱 코미디 장르 장인으로 유명한 그녀. 연기라는 주종목을 살린 탁월한 열연은 분명히 효과가 있었다. 또 인스타그램 인기의 허상을 묘사하는 방식은 적절했다. 이것 하나 때문에 좀 많은 게 희생된 것 같긴 하지만 나 같은 유사 아웃사이더들에게 좋은 위로가 될 수 있다. 이외에 이런 코미디 요소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무난하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 안무 짠 배우들이 고생 많았을 것 같다.
-
- 매 번 때리기만 하는 세상에게 어퍼컷 한 방
웩. 몸에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땀이 잘 나는 체질이라 그런가? 오늘 스웻셔츠 하나만 입고 돌아다녔는데 이런 냄새가 나는 건 좀 그랬다. 또 몸에 거북한 느낌이 있다. 위산이 역류하는 따가움이 싫었다. 그래도 책은 읽고 싶어서 도서관에서 꾸역꾸역 읽는다. 이 책을 읽는 이유는 오늘 비상금을 털어서다. 이렇게라도 오늘을 보내지 않으면 완벽한 잉여의 삶이 될 것 같았다. 어찌어찌 곳간을 털어서 3만 원을 갖고 왔다. 밖에 외출하기 위한 보람이 있다. 날씨도 때마침 좋았다. 비상금을 털어 버스를 탔다. 계속 방구석에 박혀서 아무것도 안 하기엔 인생이 아쉬웠다. 모처럼 게임 파일들도 다 지워 하나만 남겨놨다. 좋아. 다시 하나에 집중해보자고. 내가 살아온 갓생이 대학생이라는 허울 아래서만 가능했다면 여러모로 자존심이 상하다. 원래 내 인생은 내가 개척해야 하는 거잖아? 아무도 동의 안 할지도 모르지만 난 그동안 이기고 있는 삶을 걸어왔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이 내가 탄 버스도 승자의 여유 같은 느낌이다. 뭐랄까, 내 또래에 책 읽는 사람 없는 것 같거든.
그럴 리가 있나. 갑자기 오늘 돈이 없어했던 행동들이 떠올랐다. 위에 썼던 곳간은 게임 머니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아끼는 여동생의 생일선물도 없어 '카톡 메시지면 충분하겠지' 싶은 나의 정신승리가 오늘 일상의 발단이 됐다. 금세 하는 게임에 눈이 갔다. 모여있는 게임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이거 팔까? 어차피 모아봤자 디지털 쪼가린 거 이럴 때 써야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7개월 차 사회복무요원 생활. 이제까지는 어찌어찌 버틸 수 있었지만 컴활 예약부터 영화 예매까지 돈 쓸 일이 많아 생활고에 직면했다. 이제는 팔 스니커즈들도 없다. 950원짜리 컵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까지 와버렸다. 와. 그렇게 좋아하는 친한 여동생에게 생일 선물도 못 줘 안달복달하는 하루라니. 금세 내 삶이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열심히 살아 모아놨던 돈이 없는 게 이렇게 돌아왔다. 그러니까 군것질 좀 적당히 쳐하면 될 일인데 역시 나는 모지리가 맞다. 여자 친구도, 넓은 인간관계도, 술과 담배도 하지 않거나 없는데 이럴 때 돈이 없어서 밖으로 못 나가는 처지다. 이기고 살았던 갓생을 산 사람 치고는 과연 궁색하기 그지없다. 아. 내 또래 중에 책 안 읽는다는 생각도 그냥 나의 생각이다. 주위를 들여다봤을 때 책 많이 읽는 사람이 충분히 있을 수도 있다. 에휴. 그럼 그렇지. 내가 만든 나의 기대를 내가 부숴버렸다. 나는 3만 원에 울고 웃는, 그 정도짜리 인간이다. 이런 나의 한 구석도 웃음으로 마무리 짓고 싶은데 말이지. 어떤 노래 가사처럼 지면서 배우는 게 삶이라지만 난 세상에게 너무 자주 지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내가 만든 세상은 참으로 광활해서 현실로 나가려면 긴 시간이 걸린다. 젠장. 언제 한번쯤 이길 수 있을까? 늘 세상에게 지고만 사는 것 같다. 미생의 삶으로 그렇게 가다 끝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근데 이런 나에게, 또 지루한 일상을 버티는 우리에게 아마추어 복싱 선수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딱 100엔짜리의 이야기라고 하는데, 실상 까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왓챠에 절찬 스트리밍 중인 <백 엔의 사랑>이다.
100엔짜리 인생
주인공 이치코는 일본 어느 곳에 사는 32세 여성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쭉 백수인 이치코. 어린 조카가 한 명 있다. 조카는 허구한 날 괴롭힘이나 당한다. 이모가 돼서 이런 조카와 같이 운동을 한다거나 자신감, 자존감을 키워주면 좋겠지만 이치코에게 그런 건 없다. 하는 일이라곤 조카와 게임을 하는 게 전부인 이치코. 맨날 '나 언니처럼 되면 어떡하지'식의 시비 걸기가 전부인 동생과 크게 싸우게 된다. 머리에 케첩을 붓고 식탁을 엎은 꼴에 어머니는 폭발해 이치코에게 독립을 권유한다. 그렇게 반강제로 집에서 쫓겨난 이치코. 다행히 어머니와 절연하거나 그런 건 아니다. 임대주택으로 거처를 옮긴 이치코, 평소에 자주 가던 100엔 숍에 취직하게 된다. 이왕 일자리 구한 거 좋은 곳에 들어갔으면 좋았을 걸 그거랑은 거리가 멀다. 가게 점장은 우울증 환자다. 또 동료직원 노마는 띠동갑인 주제에 이치코에게 치근덕대는 게 일쑤다. 또 말도 더럽게 많아서 여러모로 사람을 귀찮게 한다. 게다가 도둑질을 해서 잘렸던 한 할머니는 유통기한이 지난 도시락이나 가락국수를 지맘대로 가져가곤 한다. 역시 사회생활에 쉬운 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다니는 이치코. 뭔가 큰 임팩트가 있는 사건 없이 그렇게 일상이 흘러갈 것 같았다.
그런데, 한 남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100엔 숍의 단골쯤 되는 사람이다. 스윽 나타나서 바나나만 사 가는 사람이라 '바나나맨'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바나나맨은 말투부터 표정까지 건조한 사람이다. 웃지도 않고 말투도 그렇게 예의가 바른 사람이 아니라 영 까칠해 보인다. 그런데 그 남자가 어쩐지 이치코에게 데이트를 신청한다. 32년의 인생 동안 연애를 해본 적이 없는 이치코. 바나나맨의 정체는 알고 보니 전직 복서였다. 바나나맨과 사랑에 빠진 이치코. 바나나맨이 선수로 뛰었던 복싱 운동장에 등록해 뭐라도 부딪혀보기로 한다. 영화는 잘하는 것도, 재미있는 것도 없었던 이치코가 사랑을 만나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영원히 지고 사는 거니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영원한 건 없다. 이는 사람이 있으면 지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그 뜻은 패자가 되는 일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냥 피하기만 어려우면 그나마 다행인데 이런 경험들은 사람의 마음속에 축적된다. 이런 과정을 안 거치고 싶지만 사실 절대 그럴 수 없다. 그렇게 스스로를 미워하게 된다. 패배자. 루저. 뭐 그런 생각을 스스로에게 품게 된다. 가끔은 '이런 말로도 이 상황의 위로가 될까'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점점 사람이 외로워지는 이유도, 그런 실패의 경험을 타인이 짐작할 수도 없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럴 때 사람에게 뭔가 색다른 위로가 필요하다. 단순히 '그냥 잘 될 거야'식의 위로가 아닌 새로운 시각의 무언가가 있으면 참 좋을 것이다. 그래서 연애를 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내가 사랑하면서 날 아끼는 이에게 기대면 행복해진다. 근데 매 순간 연인에게 기댈 수 없는 노릇이다. 그/그녀가 도라에몽이 아니니까. 항상 내가 원하는 걸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는 이 '색다른 위로'에 관한 영화다. 영화는 여주인공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온갖 방식으로 괴롭힌다. 특히 동료였던 노마 캐릭터는 진짜 한 대 때려버리고 싶은 첫인상을 끝까지 유지한다. 또 바나나맨이나 복싱같이 이치코가 사랑했던 대상들도 한 방씩은 먹인다. 그렇지만 이것들 덕에 그녀가 웃는 날이 몇 번은 오는데, 이게 '이치코가 어떤 걸 바쳐서 이 결과들을 얻었나'를 생각해보면 영화가 하려는 말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 것이다.
솔직히 좀 과하긴 해
극을 보면서 느껴지는 단점은 살짝 과하다는 점이다. 물론 이게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 크게 지장이 가는 정도는 아닐 것이지만 작위적인 설정이 있기는 했다. 일례로 주인공의 100엔 숍에서 유통기한 지난 도시락을 가져가던 아주머니 묘사가 그렇다. 아무리 영화라지만 이 사람이 굳이 이럴필요가 있나? 싶은 구석이 있다. 인물의 귀결을 안 내도 되는데 급 마무리한 느낌? 또 노마 캐릭터도 보면서? 싶은 구석이 있다. 이 사람의 패고 싶은 캐릭터성은 그 값을 충분히 하지만 벌인 일에 책임을 안 지는 느낌이다. 이 둘의 인물 설정이 영화니까! 실제가 아니니까!라고 하면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극의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좀 기능적으로만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의 설정이 어느 정도는 작위적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좋은 편이다. 일단 바나나맨과 이치코의 캐릭터 설정이 좋았다. 바나나맨이 좀 나쁜 놈이긴 해도 이치코에게 동기부여를 심어주는 역할을 제대로 했다. 적당히 나쁜 놈이라 거리감에서 오는 그 매력이 딱 잘 느껴졌다. 자기 이야기라곤 도통 안 하는 바나나맨. 바나나맨에게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그가 복싱선수였다는 점이다. 인물 설정과 여주인공의 각성 계기가 연관이 있어 이 부분의 개연성이 딱딱 맞아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또, 남주인공에게 관심이 생기고 이와 나서도 비슷하다. 복싱이라는 스포츠는 상대방을 주먹으로 때리는 스포츠다. 근데 이치코는 처음 여동생과 싸우고 집에서 쫓겨난다. 개싸움으로는 케첩도 붓고 별의별 짓을 다하지만 이치코는 복싱에 문외한이다. -물론 복싱을 하나둘 씩 배워 엔딩신에서 결투를 벌인다.- 난 비유라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힘을 영 못쓰는 우리 세대에 대한 이야기를 에둘러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무슨 기계도 아니고 늘 잘할 수는 없다. 언제는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애가 됐다가 내일 성숙해지는 게 우리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복싱(실전)에는 약해도 내 만만한 선에서(가족)는 여포가 되는 우리 모습이다. 보통 이런 내 모습을 알게 되면 자괴감이 쓰나미처럼 몰려온다. 챔피언이 될 수는 없어도 100엔짜리 개싸움은 가능한 여주인공.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물은 더 나은 선택지를 위해 미친 듯이 산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이 사람에게 이입이 가능하게끔 극본이 인물 간의 연출과 사건 배치를 잘한 편이다. 즉 영화를 주인공의 매력 하나만으로 재미있게 볼 수 있다는 말씀! 미운 오리 새끼가 되어 백조로 날아오르는 이치코에게 뭔가 정이 간다.
안도 사쿠라의 격이 다른 루저 연기
안도 사쿠라라는 이름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어느 가족>에서 우는 연기가 칸에서 엄청 극찬을 받았다고 알고 있다. 이 사람이 연기하는 건 이번에 처음 봤다. 뭐랄까, 처음에 덩치가 좀 있게 나올 때는 이렇게 미련해 보일 수가 없다. 그냥 눈빛이랑 뒤태만으로도 둔해 보인다. 또 극 중반에 고기를 먹는 신이 있는데 젓가락질도 서투른 사람이다. 아니 젓가락질을 서투른 연기를 하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극도로 섬세한 사람이 아니면 이런 디테일을 포착하지 못할 것 같다. 또 바나나맨에게 지나치게 순종적인 여자 친구 역할도 잘 수행해낸다. 자칫 보면 지 가족에겐 나빠도 남자 친구에겐 착한 이중적인 모습이 밉상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선을 잘 탄 느낌이다. 이 영화에서도 사랑의 힘을 받아 변하기는 했다. 그런데 안도 벚꽃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찌질이 연기를 하면서도 하이라이트의 당당한 모습을 2시간 내내 유지한다. 뭐 루저였던 사람의 성장 서사는 다른 영화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 사람은 뭔가 느낌이 다르다.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자기가 루저였던 시기가 있지 않고 나서 이런 게 가능할까? 싶은 연기다. 일본식 찐따 코미디로도 괜찮은 작품이다.
이게 전부는 아닐 거야 웃는 날 꼭 올 거야
이 영화는 잔인한 현실을 담고 있기도 하다. 사실 이치코의 삶과 우리는 그렇게 다르지 않다. 인생은 원래 지면서 배우는 거라지만 어째 가슴속에 패배 소식이 너무나도 많이 쌓였다. 그러다 보면 이 세상에 난 어울릴 수 없는 걸까, 루저가 되는 기분이다. 이치코도 마찬가지다. 37살에 복싱 시합에 나가 두들겨 맞았던 바나나맨처럼 삶에서 피동적이었던 이치코. 이치코는 마음이 자라 이제 세상에게 반격을 준비한다. 우리 모두 이치코가 하려고 했던 이 '반격'의 한 갈래 안에서 살고 있다. 1인분의 삶을 하고 싶어서가 열심히들 사는 이유 아닌가. 그렇게 세상에게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더라도 뭐라도 미친 듯이 부딪히는 게 우리 모습이다. 영화는 이런 우리에게 글러브 하나를 건네준다. 싸우라는 것이다. 어차피 이 삶에서 이기고 살 수는 없다. 그러려면 이왕에 다 걸어서 뭐라도 얻고 끝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감독이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야 엔딩처럼 좋은 시간이 올 테니까. 다들 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피투성이가 되야 세상이 우리에게 잠깐의 시간을 주곤 했으니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까?
#왓챠영화추천
-
- 라미란에게 제 41회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긴 작품, <정직한 후보>
"코미디 영화여서 노미네이트 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왜 사을 주세요." 지난 제 41회 청룡영화상에서 여우주연상을 탄 라미란의 수상 첫마디였다. 여우주연상을 탈 만큼 영화 <정직한 후보>에서 라미란은 혼신의 코미디 연기를 해냈고, 작품 역시 재밌게 이야기를 잘 풀어냈다.
영화 정직한 후보 시놉시스영화 <정직한 후보>는 거짓말이 제일 쉬운 3선 국회의원 주상숙이 선거를 앞둔 어느 날 하루아침에 거짓말을 못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코미디이다. 2014년에 개봉해 브라질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른 동명의 브라질 영화를 원작으로 한다. 주상숙은 국민들 앞에서는 서민의 일꾼을 자처하는 둘도 없이 청렴하고 믿음직한 국회의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서민을 자신의 일꾼으로 여기며 4선 당선을 위해서라면 거짓말을 옵션이 아닌 필수로 여기는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거짓말을 잃어버렸다는 스토리라인은 ‘만약 내가 거짓말을 못하게 된다면?’이라는 아찔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장유정 감독은 “거짓말쟁이 국회의원이 거짓말을 전혀 못하게 되었다는 설정 자체가 아주 재미있었다. 거짓말을 잃어버린 사람이 과연 어떤 이야기까지 쏟아낼 것인가라는 부분이 이 영화의 관전 포인트”라고 밝혔다. 원치 않게 갖게 된 ‘진실의 주둥이’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주상숙’의 촌철살인 팩트 폭격은 아이러니한 상황이 주는 웃음뿐만 아니라 답답한 현실에 대한 대리만족을 선사하며 복잡한 세상 거짓없이 속 편하게 볼 수 있는 새로운 코미디 영화이다.
사건에 심각하게 몰입하지 않아도 됐던 가벼운 정치 영화정치 영화하면 굉장히 무겁고 느와르 분위기의 엄숙하고 비리가 가득한 그런 류의 작품이라고 자연스럽게 떠오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영화 <정직한 후보>는 굉장히 가벼운 정치 콤디에 해당하는 작품이었다. 그렇다고 씁쓸한 웃음을 남기는 블랙코미디가 아니라 정말 대놓고 웃기는 코미디 작품이었다.
거짓말을 통해 쌓아올린 정치인의 명예를 적당히 풍자하고 정치 선거판을 희화화하면서도 그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은 하지 않도록 그 선을 잘 지킨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비리를 저지른 주상숙에 대해 실제 정치인들의 비리가 폭로됐을 때처럼 실망과 분노의 감정이 들기보다는 뭔가 애처롭고, 당황스러운 감정이 들 수 있었던 것 같다.
진짜 정치인의 속내는 어떨까?
영화를 보는 내내 들었던 생각은 '진짜 정치인의 속내는 어떨까?' 였다. 극 중 주상숙은 선거에 당선되기 위해 비리도 저지르고, 거래도 하며 거짓말을 일삼고 있었지만 거짓말을 못하게 되며 자신의 생각이 그대로 드러날 때에 '부자 동네'라는 단어를 말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자신의 선거구를 부자 동네로 만들겠다는 목표는 진심이었다.
그래서 현실 정치인들의 공약과 그들이 하는 말 중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치인이라는 이미지 국민을 대표하지만 결국 어떤 국민도 대표하지 않는다는 이미지가 강해서 과연 그들에게 진심을 무엇일까?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이미지가 그렇다고 해서 정말 진심 하나도 없이 국회의원 노릇을 할 수는 없을테니 말이다. 그래서 판타지이긴 하지만 현재 내 지역구의원도 어디까지가 현실화 가능한 공약이고, 진심인지 알고 싶게 만들었던 작품이었다.
정치에 관심을 갖게 만들려면 코미디 전략이 필요할 수도
대부분의 정치 영화들이나 드라마 작품들을 보면 굉장히 소재를 무겁게 다루면서 비리의 실상을 보여주며 흑막을 밝혀내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자와 가해자를 이분법으로 그려낸다. 이러한 영화 제박 문법을 통해서 관객들은 대부분 희생자의 피해에 동조하며 그들에게 감정이입이 이뤄지게 된다. 그래서 가해자로 설정되는 정치인들에 대한 이미지는 현실과 맞물려 더욱 안좋아지기 마련이다. 이미지의 타락은 정치인이 국민을 대표하지 못한다는 것으로 이어지고 이는 사람들이 정치에 무관심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하지만 영화 <정직한 후보>를 보면서 느꼈던 감정은 나 스스로 국회의원이라는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전혀 동조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직업군에 감정이입을 하면서 내 지역구 의원을 생각해보기도 하고, 현실 정치를 생각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래서 필자는 정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방법은 함께 웃을 수 있는 코미디 전략이 잘 먹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존재의 의미 마저 희화화 시키지 않는다는 범주에서 말이다.
-
- 할리우드와 다른 독보적인 매력, 북유럽 영화 8선
-
북유럽 영화 보신적 있으신가요? 혹은 좋아하시나요?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영화와는 달리 예술영화가 주를 이루는 북유럽 영화는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시나리오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석권한 <슬픔의 삼각형>, <더 스퀘어> 부터 국내에서 인기를 얻은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까지 매력적인 북유럽 영화 8선 지금만나보아요 ?
+가장 재밌게 본 북유럽 영화가 있다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더 스퀘어
뭘 해도 더-럽게 안 풀리는 이 남자,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더 스퀘어’라는 새로운 전시를 앞둔
스톡홀름 현대 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크리스티안’ 누구보다 완벽했던 그에게 예측불허! 기상천외한 트러블이
빵! 빵! 터지기 시작했다 통제 불가! 짜증 유발! 그럼에도 불구하고, HELP HIM, PLEASE!
램스
설원이 펼쳐진 아름답고 평화로운 아이슬란드의 시골 마을. 이 곳에 살고 있는 ‘키디’와 ‘구미’는 양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키워온 형제이지만 40년 동안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지낸 남다른 사연을 가진 사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서 개최된 우수 양 선발대회에서 ‘키디’의 양이 우승을 차지하며 ‘구미’의 질투가 폭발한 것도 잠시, 갑자기 마을에 양 전염병이 발생하여 키워온 양들을 모두 죽이라는 지시가 떨어진다. 오매불망 양만 바라보며 살아온 형제는 양들을 살리기 위해 40년 만에 침묵을 깨고 비밀리에 의기투합하게 되는데...
더 헌트
이혼 후, 고향으로 내려온 유치원 교사 루카스는 새로운 여자친구를 사귀며 아들 마커스와 함께 하는 행복한 삶을 꿈꾸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루카스를 둘러 싼 한 소녀의 사소한 거짓말이 전염병처럼 마을로 퍼지고,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루카스는 마을 사람들의 불신과 집단적 폭력 속에서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한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의학을 공부하던 스물아홉 율리에는 자신이 진짜 원하는 걸 찾아 세상으로 나온다. 파티에서 만난 만화가 악셀과 사랑에 빠진 율리에, 하지만 삶의 다른 단계에서 만난 두 사람은 각자 다른 걸 원했고 조금씩 어긋난다. “내 삶에서 조연 역할을 하는 것 같아…” 율리에는 인생의 다음 챕터로 달려나간다.
슬픔의 삼각형
호화 크루즈에 #협찬 으로 승선한 인플루언서 모델 커플. 각양각색의 부자들과 휴가를 즐기던 사이, 뜻밖의 사건으로 배가 전복되고 8명만이 간신히 무인도에 도착한다. 할 줄 아는 거라곤 구조 대기뿐인 사람들… 이때 존재감을 드러내는 건, “여기선 내가 캡틴입니다. 자, 내가 누구라고요?”
오베라는 남자
고집불통 까칠남 ‘오베’. 평생을 바친 직장에서 갑자기 정리해고를 당하고,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던 아내 ‘소냐’까지 세상을 떠난 이후, 그에게 남은 것은 ‘소냐’를 따라가는 것뿐이다. 모든 준비를 마친 ‘오베’. 마침내 계획을 실행할 결심을 하고, 마지막 순간을 앞둔 바로 그때! 그의 성질을 살살 긁으며 계획을 방해하기 시작한 누군가가 있었으니 바로!!! 아무 때나, 시도 때도 없이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이웃들! 그의 삶에 제멋대로 끼어든 사람들! 과연 ‘오베’ 인생 최악의 순간은 반전될 수 있을까?
이노센트
이다와 안나는 새로운 아파트로 이사한 직후, 또래인 벤자민, 아이샤와 친구가 된다. 네 명의 아이들은 어른이 개입하지 않는 순간, 특별한 잠재력을 깨워나가기 시작하고 벤자민은 능력을 이용해 사람들을 조정할 수 있게 된다. 단순한 호기심과 장난으로 행해지던 어떤 일들이, 급기야 분노라는 감정과 이어지고 결국 친구들을 비롯해 주변에 위협을 가하기 시작하는 벤자민. 가장 순수하고, 본능적이었던, 그래서 더욱 파괴적이고 잔인할 수 있었던 잔혹한 동심의 세계가 펼쳐진다!
해시태그 시그네
카페 바리스타로 따분한 인생을 살던 '시그네'에겐 행위 예술가로 매거진 표지를 장식한 남자친구 '토마스'가 있다. 점점 유명해지는 '토마스' 옆에서 자꾸만 소외당하던 '시그네'는 인터넷에서 발견한 정체불명의 알약으로 남자친구의 사랑은 물론, 세상의 관심까지 독차지할 황당한 계획을 세운다.
-
- 액션은 좋지만, 이야기는 여전히 아쉬운...
세상을 이끌어가는 건 무엇일까. 현실에서는 많은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이 앞에 서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을 만들고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건 일반 사람들일 것이다. 물론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이 가진 막강한 힘과 자본은 일반인들이 하는 문제제기나 제안을 거부하고 묻어두려 하지만 그런 문제가 계속 지속되면 한 순간에 폭발해버리기도 한다. 그때는 누군가가 영웅처럼 나타난다. 그건 사회운동가일 수도 있고 기업인일 수도 있다. 힘을 가진 사람들에 대항하는 일반인들은 개개인의 힘은 없지만 각자가 가진 힘을 합하면 권력자들보다 더 큰 힘을 가지게 되는 순간이 생긴다.
그럼 어떤 정의가 맞는 걸까. 그건 아무도 명확히 알기 어려울 것이다. 어떤 영웅이 등장했을 때, 그 인물이 정말 옳은 정의를 찾아올 수 있는 인물인지 알 수 없다. 수많은 영웅들이 등장하고 어떤 영웅은 좀 더 과격하게 정의를 실현하는 반면, 어떤 영웅들은 사회로 합의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정의를 실현하려 한다. 그건 개개인의 특성일 수 있지만 그 영웅이 속한 사회에서는 큰 영향을 준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바라는 영웅의 특성도 다를 수밖에 없다.
DC의 안티 히어로 <블랙 아담>
영화 <블랙 아담>에는 다소 어두운 영웅이 등장한다. 블랙 아담(드웨인 존슨)은 아주 오래전 칸다크라는 가상의 국가에 노예로 살다가 어떤 기회에 슈퍼 파워를 얻게 된 인물이다. 그는 갑자기 얻은 힘을 복수에 활용하면서 많은 사람을 살상하게 되고 결국 땅속에 영원히 묻혀 잠드는 저주를 받게 된다. 그러다 아드리아나(사라 샤이)에 주문에 의해 깨어나게 되고 다시 등장한 그를 막으려고 접근하는 모두를 죽여버린다. 그가 아무런 판단 없이 하는 그 행위는 살인이다. 거기에는 아무 판단이 들어가 있지 않다. 그저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곧바로 죽여버리는 행위가 수차례 이어지고, 그건 아주 오래전에 행했던 사적 복수와 연결되어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칸다크라는 국가는 현재 시점에도 갱단의 통제를 받는 여전히 안정되어 있지 않은 국가다. 갱단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반인들을 통제하고 괴롭힌다. 영화 속 아드리아나는 암울한 칸다크의 자유를 위해 아주 오래전에 존재했던 알 수 없는 힘을 지닌 고대 유물을 찾아다니는데, 그 유물은 악마가 만든 것으로 블랙 아담과 대척점에 있는 존재를 불러낼 수 있는 물건이라고 할 수 있다. 아드리아나는 그 유물이 칸다크를 구할 거라 믿지만 그 과정에서 블랙 아담이 깨어나면서 그가 원했던 방향과는 다르게 상황이 전개된다.
영화 초반에 아드리아나가 블랙 아담을 깨우면서 곧바로 이어지는 살육 장면들은 관객이 누구에게 감정 이입하면서 봐야 할지를 혼란스럽게 한다. 그러니까 오히려 악당의 모습에 가까운 영웅에게 바로 감정이입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무 힘이 없는 아드리아나를 응원할 수도 없는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블랙 아담은 다행히 갱단들만 죽여나가지만 그가 일반인들이나 아드리아나의 동료들을 죽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계속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블랙 아담과 저스티스 소사이어티의 액션 대결
블랙 아담이 본격적으로 칸다크 도심으로 오면서 저스티스 소사이어티라는 영웅 집단이 칸다크로 파견된다. 갑자기 등장한 존재인 블랙 아담을 막기 위해서다. 저스티스 소사이어티에 속한 영웅들은 호크맨(알디스 호지), 닥터 페이트(피어스 브로스넌), 사이클론(퀸테사 스윈델), 아톰(노아 센티네오)이다. 이들은 영웅으로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블랙 아담과 전투를 벌인다. 이들의 도심 전투는 꽤 볼만하다. 하지만 저스티스 소사이어티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는 관객들에게는 역시나 누구를 응원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이어진다.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측면과 박진감 넘치는 액션 장면들이 이어지기 때문에 흥미롭게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혼란스러움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블랙 아담이 등장하면서 벌인 살육전과 우리가 잘 모르는 영웅들이 격투를 벌이는 모습이 영화의 중반까지 계속 이어지면서 그 혼란스러움은 계속 해결되지 않고 남는다. 영화 <블랙 아담>에서 아쉬운 부분은 그렇게 새로운 등장인물들이 계속 등장함에도 이야기에서는 그들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아 답답함을 준다는 것이다. 그런 답답함은 빠른 전개와 액션으로 어느 정도 가려지지만 그것도 한계가 느껴진다.
영화 속 저스티스 소사이어티가 블랙 아담과 대치하면서 다른 측면에서 흥미로운 점은 영웅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저스티스 소사이어티의 영웅들은 블랙 아담을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살인자로 규정하고 있다. 아무 판단 없이 바로 죽여버리기 때문이다. 반면 블랙 아담은 자신이 죽이는 인물들은 이미 도적적 흠결이 있기 때문에 바로 죽여도 괜찮다는 입장이다. 다소 과격한 블랙 아담의 생각은 영화의 거의 말미까지 계속 유지되면서 저스티스 소사이어티와 어느 정도의 긴장감과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낸다. 안티 히어로라고 할 수 있는 블랙 아담이라는 영웅을 DC코믹스에서는 그나마 효율적으로 사용한다는 느낌이다. 적어도 소니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베놈> 시리즈나 <모비우스> 같은 안티 히어로 영화들보다는 좀 더 나은 완성도를 보인다.
2019년에 개봉한 영화 <샤잠>의 스핀오프라고도 볼 수 있는 <블랙 아담>은 <샤잠>에 비해서는 유치함을 덜어내고 심각한 분위기를 더 넣었다. 액션 장면들은 꽤 타격감이 있는데, 특히나 닥터 페이트가 보여주는 분신 액션 장면들이 꽤 훌륭하게 담겼다. 그 외에 등장하는 영웅들은 그렇게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주인공인 블랙 아담의 액션도 과거 <맨 오브 스틸>에서 보여줬던 강력한 액션 장면들을 다시 활용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향후 DC코믹스에서 만들고 있는 유니버스 안에서 블랙 아담과 슈퍼맨의 대결도 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영화 <블랙 아담>은 그런 다양한 계산 하에 만들어진 공산품 같은 액션 히어로 영화다.
적당한 완성도로 만들어진 공산품 같은 영화
영화를 연출한 자움 콜렛 세라 감독은 <하우스 오브 왁스>, <오펀: 천사의 비밀> 같은 공포 영화로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언노운>, <논스톱>, <런 올 나이트>, <커뮤터> 같은 작은 규모의 액션 영화 연출에도 재능을 보였다. 이 영화에서 블랙 아담 역을 맡은 드웨인 존슨과 <정글 크루즈>를 연출하면서 보다 큰 규모의 영화를 연출하게 되었고 <블랙 아담>이라는 큰 프로젝트의 감독으로 선택되었다. 아쉬운 점이 많은 영화지만 DC코믹스에서 하고자 하는 것들을 성실히 영화 안에 녹여냈기 때문에 향후 DC 유니버스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 같다. 드웨인 존슨은 이번 출연으로 히어로 장르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 영화 안에서도 큰 근육의 우람한 몸을 이용한 액션이 등장하고 무엇보다 배우로서 좋은 이미지를 쌓아온 그가 안티 히어로가 된 것이 영화에 신뢰도를 높이는 요소로 작용했다.
블랙 아담은 영화에서 큰 힘을 가지게 되었고, 칸다크 라는 국가의 수호자로 거듭난다. 그가 행하는 방법은 정의롭지 못하지만 그가 하려는 일은 정의로운 일이다. 그의 방식대로 행하는 정의가 과연 옳은 것인가는 아마도 향후 DC코믹스의 영화들에서 계속 다루어질 문제인 것 같다. 이 영화의 말미에 존재하는 쿠키 영상 한 개는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게 될지 기대하게 만드는 포인트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구독 할인 행사 중입니다!
주간 영화이야기 뉴스레터!
구독하여 읽어보세요 :)
https://rabbitgumi.stibee.com/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서도 제 뉴스레터를 구독하실 수 있어요.
https://contents.premium.naver.com/rabbitgumi/rabbitgumi2
-
- <라스트 듀얼> 마지막 순간까지 신중히 찾아야 할 진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4세기 프랑스, 유서 깊은 카루주 가의 부인 ‘마르그리트(조디 코머)’는 남편 ‘장(맷 데이먼)’이 집을 비우자 불시에 들이닥친 장의 친구 ‘자크(아담 드라이버)’에게 강간당한다. 자신의 범죄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자크는 그녀에게 침묵을 강요하지만, 마르그리트는 감내해야 할 불명예를 각오하고 용기를 내어 그의 죄를 고발한다. 한때 자크와 친우이자 전우였지만 세금 징수, 영지 소유권, 호칭과 계급 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던 장은 가문과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재판을 요구하며 그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관계가 된다. 그런데도 대영주 '피에르(벤 애플렉)'의 권력을 등에 업은 자크가 강력하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자 마르그리트의 재판은 장과 자크 중 한 명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결투 재판으로 결정되고, 마르그리트는 장이 패배할 경우 함께 사형에 처해지는 운명에 놓인다.
2-3 년에 한 편씩 신작을 내며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리들리 스콧 감독. 비주얼리스트로도 유명한 그는 <블레이드 러너>, <에일리언> 시리즈, <마션> 같은 SF 작품부터 전쟁 영화인 <블랙 호크 다운>, 여성 영화인 <델마와 루이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명작을 만들었다. 그중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글래디에이터>, <킹덤 오브 헤븐>, <엑소더스> 등으로 대표되는 시대극이다. 리들리 스콧의 사극은 과거의 사건과 시대상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항상 현재를 반추할 수 있는 질문들을 던져왔기 때문이다. 그가 선보이는 화려한 볼거리에는 늘 자유의 평등의 가치, 종교의 의미와 기능에 대한 성찰처럼 도발적일 수도 있는 사유가 깃들어 있었다. 이는 에릭 재거의 원작을 영상화한 <라스트 듀얼>이 눈길을 사로잡는 이유이기도 하다.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마지막 결투 재판을 섬세하게 다루며 하나로 답을 단정할 수 없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라스트 듀얼>에서 가장 눈에 먼저 띄는 특징이라면 역시 그 구성을 꼽을 수 있다. 장과 자크가 결투를 준비하는 장면으로 시작된 영화는 이내 시점을 과거로 되돌렸다가 후반부에 다시 결투 장면으로 돌아온다. 이때 과거 시점에서는 한때 절친이었던 두 남자가 왜 결투 재판까지 펼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 과정이 총 세 명의 시선으로 나뉘어 있다는 점이다. 세 명의 주인공은 각자 경험한 진실을 말한다. 1장인 "장 드 카루주가 말하는 진실"은 장의 입장에서 자크와의 불화가 어떻게 마르그리트의 강간으로 이어졌는지를, 2장인 "자크 르 그리가 말하는 진실"은 강간을 저지른 것을 마음 한 켠으로는 인정하면서도 끝끝내 사랑의 표현이라고 합리화하는 자크의 입장을 보여준다. 마지막 장인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은 피해자인 마르그리트의 시점에서 일련의 사건을 복기한다.
이때 영화는 마르그리트의 시점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듯한 연출을 선보인다.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이라는 부제목이 나온 후 글자가 사라지는 가운데 화면에는 "진실"만이 잠시 남는다. 이는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작중 마르그리트가 영주의 부인이라는 신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직접 가축을 돌보거나 세금을 징수하는 등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여성으로 묘사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마르그리트는 자신의 목소리를 찾지 못하던 시대에 구조적 한계마저 극복하며 자신의 권리와 명예, 그 목소리까지도 마침내 되찾은 이상적인 여성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경우 <라스트 듀얼>은 중세의 사건을 통해 근 몇 년간 주목받았고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이끌어 낸 미투 운동의 긍정적인 측면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투가 끝난 직후 마르그리트의 표정을 보면 그녀가 이 작품 속 진정한 승리자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자신이 원하는 결말을 맞이했데도 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데다가 허무하기까지 한 표정을 짓고 있다. 어째서일까? <라스트 듀얼>이 엄연히 사극이기 때문이다. <왕좌의 게임>에서 명예와 충성심을 고집하는 존 스노우의 언행이 이해가 되지 않아도 작중 중세적 세계관에서는 그 언행이 세력을 구축하는 기반이 될 수 있듯이,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인물들의 행동은 표면적인 의미와 다른 함의를 가질 수 있다. 현대적 관점에서는 부당해도 그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또 다른 것이다. 따라서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 역시 반드시 현실이 아닐 수 있고, 장과 자크처럼 자신이 경험한 진실로서 현실의 한 파편에 불과할 수 있으며, 이 경우 그녀의 표정을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
마르그리트가 강간을 당한 직후 장이 "마지막으로 정을 통한 남자가 외간 남자이게 둘 순 없지"라고 말하며 잠자리를 강요한 것이 단적인 예시다. 현재 관점에서 볼 때 장의 행동은 명백한 강간이다. 하지만 중세시대에 장의 행동은 오히려 마르그리트를 보호하는 것이다. 만약 그날 밤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는데 마르그리트가 임신한다면, 장은 그녀를 보호할 방법이 없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기사인 그는 마르그리트의 아이가 자크의 아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마르그리트와 잠자리를 가졌기에 그는 훗날 태어날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이고, 그녀의 명예와 진실을 지킬 명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설령 그것이 보호할 의도였다고 해도, 본래 무뚝뚝한 성정인 것을 감안해도 지나치게 강압적이었던 장의 잠자리 요구는 엄연히 강간이다. 설령 보호라 해도 당사자인 마르그리트를 상처 입힌다는 점에서는 중세의 시대적 한계가 명확히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한 셈이다. 이에 더해 재판을 열기 위해 일부러 강간과 관련해 소문을 내는 것 역시 현시점에서 보면 명백한 2차 가해지만, 봉건제가 유지되던 중세 프랑스에서는 최선이자 동시에 필요악에 가까운 선택이나 다름없다. 이는 부부가 그날 밤을 전혀 다르게 기억하는 이유다.
그뿐만이 아니다. 마르그리트가 장의 영지를 돌보는 장면들도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이 반드시 현실과 등치 되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이는 일견 장의 어설픈 영지 경영을 현명하고 유능한 마르그리트가 잘 챙겨주는 장면 같다. 하지만 중세 시대임을 고려하면 이 역시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다. 마르그리트는 씨암말의 씨를 가려 받으려는 장의 명을 어긴 하인에게 말들을 자유롭게 풀어줘도 된다는, 남편의 말과 반대되는 명령을 내린다. 그런데 중세의 말이 품종, 용도에 따라 급격한 가격차이를 보이는 것을 고려하면, 정해진 용도에 따라 말을 키우려는 장의 선택을 무시한 마르그리트의 선택은 오히려 큰 손실을 초래할 위험한 행동이다. 전쟁에 나선 남편 대신 세금을 거두는 장면도 유사하게 이해할 수 있다. 장은 몇 달간 전쟁에 나가 금화 300닢을 받아오는데, 이는 작중 마르그리트가 살림을 가꾸어 늘린 재정을 상회하는 수치다.
영화는 이처럼 마르그리트의 진실이 현실과 어긋나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마르그리트는 중세의 재판이 얼마나 끔찍한지 모른 채 고발에 나섰다. 자신의 재판이 자신과 남편의 목숨을 담보로 이루어지는 결투로 이루어지는 것 외의 선택권이 없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이는 마르그리트가 분명 영리하고 지혜롭지만, 그녀의 현실 역시 그녀의 주관대로 구성되었던 경우가 많았음을 암시한다. 마치 사건의 전말을 모두 담은 듯했던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조차도 온전한 진실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3장의 도입부 연출은 마르그리트의 진실과 별개인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실이 따로 존재함을 보여준다. 또한 마지막 순간 그저 무기력할 뿐인 그녀의 표정은 그녀가 알고 있었던 진실과 알지 못했던 현실의 충돌로 인한 충격에 압도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영화는 피해받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자, 더 나아가 현실과 진실 사이의 괴리를 시대적 관점에서 조명한 작품이다. 시대적, 사회적, 구조적 한계를 마주한 여성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모든 사람의 진실은 왜곡될 수 있기에 사건의 전모가 쉽게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도 함께 전한다. 이는 세 주인공의 시선에 따라 작중 그 어떤 사건도 동일하게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두드러진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결투 재판 시퀀스는 이처럼 보다 폭넓은 해석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만약 <라스트 듀얼>이 첫 번째 해석대로만 이루어지는 작품이라면, 이 작품이 마지막 결투를 스펙터클로써 보여주는 태도는 꽤나 어색해 보인다. 물론 프랑스 왕의 태도에서도 보이듯 결투 재판이 당시 시대에 유희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 자체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성의 용기를 지지하는 것만이 영화의 주제였다면, 결투를 펼치는 두 남자의 시선에서 현장감을 살리며 박진감 있게 연출하는 대신, 마르그리트의 시점을 중심으로 결투를 건조하게 다루는 것이 더 주제에 부합하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투 장면은 마르그리트의 관점뿐만 아니라 그 결투에 임하는 두 남성의 시선, 그중에서도 특히 장의 시선에서 진행된다. 이는 결투 재판의 처절함과 승리에 대한 의지를 충실히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오락적으로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마지막까지 누구의 시선과 진실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은 채 세 주인공의 시선을 공존시킨다는 측면에서 더욱 인상적이다.
<라스트 듀얼>의 함의는 제작 비하인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영화의 제작 및 각본에는 리들리 스콧 감독 외에도 맷 데이먼, 벤 에플랙, 그리고 여성 감독이자 각본가로도 활동 중인 니콜 홀로프세너가 참여했다. 맷 데이먼은 초기 단계에서부터 데이먼과 애플렉이 남성의 시선을, 홀로프세너는 마르그리트의 시선을 담당해 각본 작업을 진행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한 사건을 둘러싼 당사자들의 시각과 관점, 심정과 그들의 변화를 다채롭게 녹여낼 수 있었던 데는 이처럼 직간접적으로 미투 운동과 성추문 관련 이슈를 경험했던 이들과의 협업이 큰 역할이 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10월에 개봉했던 <라스트 듀얼>은 리들리 스콧이라는 이름값에 비해 초라한 흥행을 기록했었다. 이 작품이 지닌 품격과 가치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부당한 처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비록 극장에서의 흥행은 참패했지만, 다행히도 디즈니 플러스에서 공개되었으니 OTT를 통해서라도 노장의 시선과 사유가 담긴 <라스트 듀얼>이 온전히 공유되고 평가받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시대를 넘나드는 거장의 통찰력이 빛난다
-
- “나를 자식이라고 생각했소?” / 사도 명대사 모음
#사도
-bgm
AshamaluevMusic - Rain-contact
93marvel@naver.com
-
- 멕시코에서 만난 타노스와 콜렉터 #7
환몽(幻夢) CINE 리뷰 7화_ 영화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Sicario, 2015) 리뷰
** 영상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영화 '시카리오 : 암살자의 도시'의 후속작 '시카리오 : 데이 오브 솔다도'가 개봉했습니다. 숨 막히도록 건조하게 설계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시카리오 세계관이 그만큼 인상 깊었다는 의미겠지요.
기념하여 '시카리오 : 암살자의 도시'를 조금 깊게 이야기 해봤습니다!
(공교롭게도 멕시코라는 땅에서 어벤져스의 타노스와 가오갤의 콜렉터의 조우네요!)- 드니 빌뇌브 감독의 연출 특징!
- 정의를 위한 악이란?
- CIA와 FBI 이야기
- 아쉬운 점
- 우리가 꼽은 명장면
- 환줄평 / 몽줄평영화 '시카리오 : 암살자의 도시'를 보고나서 마구 생각하고, 마구 떠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시카리오 #시카리오암살자의도시 #드니빌뇌브
-
- 영화 <최선의 삶> 메인 예고편
열여덟 ‘강이’, ‘아람’, ‘소영’.
더 나아지기 위해서 기꺼이 더 나빠졌던 우리의
이상했고 무서웠고 좋아했던 그 시절의 드라마
최선의 삶
-
- 왓챠 <사막의 왕> 티저 예고편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게 있어. 바로 평범한 삶이야.” 왓챠 오리지널 시리즈 〈사막의 왕〉 티저 예고편 공개! 〈D.P.〉 김보통 작가와 왓챠의 만남! 〈사막의 왕〉은 12월 16일 왓챠에서 공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