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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한2025-09-19 12:39:09

비어 있었던 건

영화 <누가 내 우유를 훔쳤을까>(2017) 리뷰

열두 살 소년 상우에게 매일 아침 배달되는 흰 우유는 하루의 시작이자 생활의 질서다. 반장선거를 앞두고 잔뜩 몸단장을 마친 날, 빈 우유주머니에 실망한 상우는 옆집 남자를 범인이라 의심하고 잠복과 추적에 나선다. 부산 사투리의 생생한 말결, 햇살 번지는 골목과 알록달록한 색감, 촘촘히 배치된 정감 있는 생활 오브제들로 구성된 김정인 감독의 단편 <누가 내 우유를 훔쳤을까>는 ‘누가 가져갔는가’에서 ‘왜 가져가야 했는가’로 시선을 찬찬히 옮긴다.

 

 

한 팩의 생존


© 퍼니콘

어스름한 새벽, 상우는 집 앞에 매복해 있다가 우유를 챙겨 가는 남자를 발견하고 뒤를 밟는다. 그는 요금을 지불하지 않은 채 지하철 개찰구를 무단 통과하고, CU 편의점에 구직을 위한 이력서를 내보지만 이내 “연락 주겠다”라는 말만 들으며 외면당한다. 이곳저곳 일자리를 찾기 위해 열심히 돌아다녀보지만, 식당 구인 공고 앞에서도 사장의 거절을 듣고 돌아설 뿐이다. 그는 오늘도 구하지 못한 일자리에 착잡한 심정으로 공원 벤치에 홀로 앉아 상우의 부산우유를 마신다. 그 한 팩의 우유는 그에게 하루를 버티게 하는 작은 생존이었다.

 

 

범인의 증언


© 퍼니콘

 

집으로 돌아가는 밤거리, 상우는 또래가 부모의 손을 잡고 미소 짓는 모습을 스쳐 보며 홀로 버스에 오른다. 그 순간 포개지듯 떠오르는 기억은 버스를 몰던 아버지, 함께 거리를 누비던 시간, 운전석 룸미러 옆에 걸린 자신의 사진이다. 추적의 끝에 드러난 우유를 가져간 이는 다름 아닌 상우의 아버지다. 한때 버스 운전사였으나 현재 실직 상태인 그는 하루 끼니를 위해 집의 우유 한 팩을 가져가게 된다.

 

아버지는 알았을까, 상우에게 반장 선거날 우유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상우는 알았을까, 아버지가 그 한 팩으로 하루를 견뎠다는 걸. 서로 전하지 못했던 마음은 그날 밤 작은 손놀림들로 증언된다. 저녁 식탁에서 생선 가시를 발라 살점을 집어 건네는 손, 방에 조심스레 들어와 발톱을 깎아주는 손, “아부지가 보기엔 니가 갸보다 훨씬 크다”는 한마디. 우유는 더 이상 추리의 대상이 아니라 관계의 문제로 재구성된다.

 

 

비어 있었던 건

© 퍼니콘


상우는 햄버거를 사 먹으려고 모아 둔 책상 밑의 빨간 돼지 저금통을 꺼내 약과를 사서 우유주머니에 넣어 둔다. 잠시 후 같은 제스처를 하려던 아버지는 우유와 이미 들어있는 약과를 발견한다. 그 순간 확인되는 것은 관계의 온기가 거창한 몸짓이 아니라 사려 깊은 이해와 배려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누가 내 우유를 훔쳤을까>는 빈 우유주머니에서 출발해 관계의 채움에 닿는다. 어쩌면 비어 있었던 건 우유주머니가 아니라, 서로를 진실로 바라보는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작성자 . 려한

출처 . https://brunch.co.kr/@ryeoha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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