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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정2025-09-22 00:49:57

[30th BIFF 데일리] 어떤 종결 그리고 시작

영화 <아르토의 땅에서> 리뷰

DIRECTOR. 타마라 스테파냔(Tamara Stepanyan)

 

CAST. 까미유 코탱(Camille Cotin), 자르 아미르(Zar Amir), 샨트 호바니샨(Shant Hovhannisyan), 호브나탄 아베키디안(Hovnatan Avedikian), 알렉산데르 하차트리안(Alexander Khachatryan), 바브켄 초바니안(Babken Chobanyan), 하스믹 수부리안(Hasmik Suvuryan), 흐라치 모브시샨(Hrach Movsisyan), 드니 라방(Denis Lavant)

 

PROGRAM NOTE.

 

프랑스 여인 셀린은 파리에서 아르메니아인 아르토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두 아이를 낳아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육 개월 전 남편은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그녀가 남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셀린은 아이들의 국적 선택에 필요한 남편의 출생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 힘들게 아르메니아에 도착하지만, 그의 존재를 증명해 줄 서류를 도저히 찾을 수 없다. 남편은 이름과 직업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진실을 숨긴 채, 오랜 세월을 셀린과 함께했다. 미궁에 빠진 셀린은 이제부터 남편이 모든 것을 비밀에 부친 이유를 추적하기 위해 전쟁 한복판에 뛰어든다. 그녀는 끝나지 않는 악몽 속에서 신기루가 돼버린 남편의 정체를 온전히 대면할 수 있을까? (김채희)


 

 

 

<아르토의 땅에서>는 남편 아르토를 잃은 셀린이, 남편 살아 생전에 알지 못했던 남편 '아르토의 땅'을 찾아가면서 시작되는 로드무비다. 이런 경우 흔히 그렇듯이, 주인공은 짧고 가벼운 일정을 생각하며 시작하지만 여정은 깊어지고 길어진다. 마치 내가 오래 전 별 생각 없이 기사로 접했던 영화 <사라진 공화국>을 결국 보게 되고, 아르차흐 공화국에 대해 알게 되고, 아르메니아계 프랑스인 감독이 만든 영화라는 이유만으로 이 영화를 고른 것처럼.

 

셀린이 아르토의 출생 증명서를 원했던 이유는 단 하나, 아이들이 아버지의 나라에 대해서도 알고 본인들이 원한다면 이중국적으로 선택할 수도 있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도 셀린은 아르토의 땅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파리에서 살아 온 여자에게 남편의 국적이란, 아이들이 아버지를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상징 같은 것, 실질적인 필요보다는 패션 아이템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아르토의 땅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 아르토의 땅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제각각 음울한 기운을 풍긴다. 채 거두지도 못한 죽음을 일상 공간에 그대로 두고 살아야 하는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를 "내 이야기"로 부르는 사람이 너무 많은 땅이다. 폐허가 된 곳들을 둘러보면서, 여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된다. 마침내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줄 아르시네라는 여자를 만나면서 비로소 가속도가 붙고, 돌아설 수 없는 여정이 된다.

 

 

 

사랑했던 사람의 몰랐던 시간을 알게 된다는 건 비극인가 아닌가. 그 대답은 아마도 사랑했던 사람이 어떤 시간을 거쳐왔느냐에 따라, 또 내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셀린은 그 길을 할 수 있는 최대치로 씩씩하게 걷지만, 전쟁의 상흔이 가득한 길을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여전히 그 전쟁에서 회복된 이는 없다고 하는 길을.

 

현 시대에 전쟁은 사라진 게 아니라 더 잔혹해졌다. 호외로 신문을 돌리는 대신 무수한 분쟁 소식에 묻어버리고, 총기 대신 드론을 쓴다. 더 짙어진 그림자에서 많은 사람들이 소리없이 싸우고 죽고 아파한다. 희생을 각오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 승리할 수 없는 전쟁, 싸울 기회조차 주지 않고 죽음으로 찾아오는 전쟁이 숱하다.

 

셀린은 그 감각을 익히고 만다. 아버지를 상징적으로 기억하라고 주려던 국적이 어떤 의미인지, 자신이 목격한 나라에서 국적은 곧 국방의 의무로 이어진다는 것도, 조금씩 알게 된다. 그렇게 출생 증명서를 찾으려던 여정은 곧 애도의 여정이 된다. 어쩌면 인생이라는 게 다 그런 여정인 것도 같지만.

 

 

 

 

죽어버린 것들을 다 구할 수는 없다. 죽은 이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내면은 부분적으로 전쟁에서 죽었고, 나머지 부분에서 두려움을 완전히 긁어낼 수도 없다. 아르토의 죽음은 파리에서 아이들을 낳고 잘 살다가 어느 순간 찾아왔지만, 그의 일부는 아르토의 땅에서 이미 죽었을 것이다. 이런 죽음은 뒤늦게 발견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어떤 종결은 필요하다.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더욱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사랑한 이들이 죽은 자리, 그들이 남긴 흔적과 그들의 비밀... 그것들을 장례처럼 품는 영화다. 어떤 형태로든 종결이 있어야만 또 시작할 수 있다. 아르토는 두려움 없는 세상으로 갔길 바라고, 셀린은 이 여정의 전후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또 어디론가 뚜벅뚜벅 걸어가지 않을까. 그리고 어떤 영화들로 모르는 땅의 아픔을 품어 버린 이상, 우리의 걸음도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2025.09.18-26) 상영시간표]

 

2025.09.18 12:3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5관 (상영코드 056)

2025.09.19 16: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5관 (상영코드 124)

2025.09.20 12:3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9관 (상영코드 224)

2025.09.22 09:3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2관 (상영코드 364)

 

 

작성자 . 선이정

출처 . https://brunch.co.kr/@sunnyluvin/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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