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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2025-09-23 00:26:11

[30th BIFF 데일리] 가장 소박하지만 용기 있는 선(善)이 일군 기적

영화 <흐르는 여정> 리뷰

Program Note

춘희는 세상을 떠난 남편 현철과 평생을 살아온 집을 떠나 자그마한 아파트로 이사한다. 남편이 아끼던 그랜드 피아노와 자동차와 함께. 하지만, 새집에 피아노를 들이는 게 여의치가 않자, 이웃 주민 민준의 제안으로 그의 아파트에 두기로 한다. 알고 보니 민준은 지휘자인 데다 엄마를 찾고자 무작정 한국으로 온 사연이 있다. 두 사람의 뜻밖의 만남에 이어 민준이 기특해하는 피아노 꿈나무 성찬까지 가세하면서, 나이도, 경험도, 삶의 경로도 전혀 다른 세 사람의 무해하고 선한 우정의 여정이 시작된다. 이들이 함께하는 얼마간의 시간은 부재하는 이가 남기고 간 과거의 흔적을 가치 있는 미래의 일로 돌리고, 새로이 태어나게 만드는 환원과 재생과 부활의 과정이기도 하다. 시종 품위를 잃지 않고 너른 품으로 생의 반짝이는 순간들을 껴안는 영화는 의연하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참으로 귀한 우아한 세계이다. (정지혜) (©부산국제영화제)

감독: 김진유

출연: 김혜옥, 저스틴 H. 민, 박대호, 공민정, 김종구

 


소박한 선의 관성

 

한날 한시에 함께 가자던 남편은 야속하게도 먼저 세상을 떠났다. 함께 떠나자며 산 스위스행 비행기표도 무색해졌다. 춘희는 이제 세상에 홀로 남았다. 건축가였던 남편이 세심하게 지은 집 곳곳에는 차마 지우지 못할 남편의 흔적들로 가득하고, 춘희는 그것을 견딜 수 없다. 그는 처음으로 아파트로 향한다. 오직 남편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치지도 못하는 피아노와, 타지도 못할 그랜저, 그밖에 남편이 사랑한 몇몇을 데리고서. 누군가는 쉽게 버리고 망가트릴 그 골동품들을 그는 쉬이 놓을 수 없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의 상실도, 망가져 가는 몸도, 낯선 아파트에서의 지켜야만 하는 까다로운 규칙들도 춘희의 선의를 무너뜨리지는 못한다. 남편이 춘희를 위해 기꺼이 된장찌개를 끓였던 것처럼, 그 역시 이웃에게 살뜰함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것은 때때로 의도적이고, 때때로는 그렇지 않다. 그것의 경위가 어찌되었든 간에, 누군가는 오지랖이고 유난이라 여길지도 모를 그 소박한 베풂은 민준과 성찬, 그리고 그밖의 주변 사람들, 그리고 다름 아닌 춘희의 삶을 나아가게 하는 강력한 힘이 된다. 그저 말 한 마디, 그저 작은 도움을 보탰을 뿐인데, 어느새 춘희의 곁에는 몇 달 전에는 알지도 못한 아들과 손주가 생겼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 오직 인간다운 선의와 우정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가족이 탄생한 것이다. 어느 생의 끝자락에서.

 

 

춘희가 내민 선은 지극히 자연스러우면서도 전염력이 강하다. 그는 그저 평소 해 오던 대로, 그가 으레 남편의 그랜저와 피아노를 닦아온 것처럼 의연하게, 순리대로 살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저 얼굴도 모르는 남이 되고 말 수도 있었던 이웃들은 그로 말미암아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차마 이해하지 못했던 다른 누군가의 고충을 배운다. 잊었던 그들 안의 선을 일깨우고, 그로 말미암아 다시금 누군가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선의 확장과 계승이 사람을 살게 한다. 요즘 같이 팍팍한 현대 사회에서 좀처럼 예측하기 어려운, 가장 소박한 기적의 연속이다.

 

 

참, 봄처럼 따뜻한 영화다. 이 영화에는 완전히 나쁜 사람이 없다. 영화 곳곳에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인간애에 대한 견고한 신뢰가 엿보인다. 영화가 꿈꾸는 것은 어떤 낭만화된 이상이 아니다. 삶은 마냥 낭만적이지만은 않으니까. 영화는 그보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과 죽음의 순환과, 차마 거스를 수 없는 만남과 이별을 전제한다. 그러나, 극중 춘희가 강조한 '회자정리, 거자필반'이라는 말처럼, 그것은 영원한 이별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따뜻한 세계에서, 만남과 이별은 아스라히 맞닿아 있고, 어떤 관계의 단절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쌓은 어떤 유대와 애정, 선의로 말미암아 회복될 수 있으며, 때때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어 이별한 이와 재회하게 하는 힘을 가진다. 그래서일까? 이를 지켜보는 나도 춘희와 그의 이웃들이 나눈 그 살뜰한 마음을 가지고 싶어진다. 그것을 베풀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피어오른다.

 

차가운 현실에 지쳤다면, 그래서 완전한 타인이면서 또 완전히 남은 아닌 누군가에게 위로 받고 싶은 기분이 든다면, 이 영화와 함께 <흐르는 여정>에 올라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스케줄]

09-20 20: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3관

09-22 19:30 CGV 센텀시티 6관

09-23 16:00 CGV 센텀시티 5관

09-24 14: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10관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09월 17일 ~ 09월 26일

작성자 . 토리

출처 . https://brunch.co.kr/@heatherjorules/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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