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2025-09-23 19:33:41
[30th BIFF 데일리] 사육곰, 곰 돌봄 활동가, 그리고 지속 가능한 삶
영화 <단지, 우리가 잠시 머무는 곳> 리뷰
Program Note
청주동물원 사람들을 그린 <동물, 원>(2018)과 야생동물구조센터 사람들을 다룬 <생츄어리>(2022)에 이은 왕민철 감독의 세 번째 영화. 이번에는 반달가슴곰 생츄어리다. 곰 농장을 인수받아 곰 생츄어리로 바꿔놓으려는 ‘프로젝트 문 베어’ 팀의 이야기는 소재에서 전작의 연장선상에 놓인 듯 보이지만 이 영화는 좀 다르다. 야생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육 곰을 돌보는 일이 얼마나 수고로운 노동인지를 알아챌 즈음, 우리의 시선은 그 일을 자원한 이들에게로 옮겨진다. <단지, 우리가 잠시 머무는 곳>은 강원도 화천에서 열세 마리의 곰을 돌보며 사는 90년대생 여자 넷의 이야기다. 아마도 이 청춘들은 여기 단지, 잠시 머물렀다가 떠날 것이다. “곰을 돌보는 경험이 내 삶에서 필요할까?” 그렇게 한 사람이 떠나니 다른 사람이 온다. 최단 코스를 검색하는 대신 멀리 돌아가고 때론 멈추어 주변을 둘러보는, 좀 다른 청춘들이 긴 사색을 불러온다. (강소원) (©부산국제영화제)
감독: 왕민철
출연: 강지윤, 구시연, 김민재, 도지예, 이세림, 조아라, 최태규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는 사육곰들을 구조해 곰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보금자리(생츄어리)를 마련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이 사육곰들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지리산 방사 반달가슴곰과는 좀 다른 사정을 안고 있다. 이들 곰은 웅담 채취 등 가축 목적으로 들여 온 짐승들이다. 이들의 삶은 예전에도 끔찍하기 그지 없었지만, '멸종위기 종인 곰들을 학대한다'는 국제적 비난에 직면한 한국 정부가 슬그머니 곰들의 거래, 그리고 동물원 등 전문 시설 밖에서의 사육을 전면 금지하면서 더욱 열악해졌다. 정부가 그 동안 눈 감아온 곰 사육에 대한 이렇다 할 뾰족한 대책도 없이 규제부터 내놓기 시작하자, 곰들은 농장주들에게 이제 돈도 되지 않는 애물단지가 되고 말았다. 자본주의적 목적으로 들여온 곰들은 물질주의적 가치를 상실했다 판단됨과 동시에 방치되었다. 이렇다 할 바닥도 없는 뜬장에서, 차마 먹이라 할 수 없는 것들로 배를 채우면서. 어디 하나 성치 않은 몸으로, 그 한 평 남짓한 그 좁은 곳을 끝없이 빙빙 돌면서. 그들을 구한 것이 바로,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인공은 사육곰들이 아니다. 스크린 너머에 곰 보금자리와, 거기 사는 곰들의 삶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영화가 좀 더 조명하는 것은, 연고도 없는 강원도 화천에 머물며 곰을 돌보는 사람들이다.
곰을 돌보는 사람들
곰을 돌보려면 품이 많이 든다. 곰들의 먹이를 챙기고, 건강을 관리하는 것말고도 신경 쓸 것이 많다. 곰 돌봄 프로젝트가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바가 곰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지속 가능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13마리 곰이 사는 강원도 화천의 곰 생츄어리는 아쉬운 부분이 많다. 많은 비영리단체가 안고 있는 것처럼 여러 현실적인 문제로 이상적인 곰의 삶을 충족시키기에는 한참 모자라다. 제한된 환경과 재정 안에서 곰의 삶을 조금이라도 윤택하게 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합사 과정을 통해 곰들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고, 겨울이 오면 몸 덮을 짚단을, 봄이 오면 노란 개나리를 한아름 베어다 준다. 곰들의 방에 놓인 욕조와 행동 풍부화용 장난감들. 그 중 어느것도 곰 돌봄 활동가들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이렇듯 곰을 돌본다는 것은, 그것도 동물 복지의 사각 지대에 있던 사육곰들을 돌본다는 건, 대단히 세심하고, 또 아주 힘이 많이 드는 일이다.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이 고된 노동의 현장을 지켜보노라면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이야, 저 사람들 정말 대단하다. 대체 어떻게 저런 힘이 나올까? 난 저렇게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다른 누군가의 삶을 책임질 수 있을까? 나는 감히 엄두도 못낼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로구나."라고. 마치 그들이 우리의 평범한 삶과는 동떨어진 삶을 사는, 특별하고, 비현실적인 영웅들일 거라고 섣부르게 넘겨 짚으면서. (내가 그랬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접어두자. 조금 더 스크린 너머를 바라보다 보면, 우리는 우리의 기대와는 좀 다른 평범한 삶들을 발견하게 된다.
"화이팅 넘치지 않아. 그래도 그냥 하는 거야."
영화는 특별한 일을 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비춘다. 각자의 사정으로 이리저리 화천으로 흘러든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원해서 하는 곰 돌봄은 분명 숭고한 일이고, 실제로 활동가들이 보람을 느끼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늘 보람과 기쁨만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무거운 짚단을 나르고, 곰 우리를 청소하고, 곰을 돌보기 위해 연고도 없는 산골에 머무는 것은 현대 사회에 적응한 2, 30대들에게 썩 녹록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기꺼이 감내한다고 해도, 고민할 문제들은 산더미다. 비영리 단체가 돈이 되지 않는다거나, 그곳에서 한 활동을 이력서에 어떻게 써 내려가야할지, 혹은 내가 정말로 이 일에 맞는 사람인지에 대해서까지, 당장 해결되지 못할 골치 아픈 문제들이 이들을 괴롭힌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 앞에 놓인 일을 한다. 곰을 먹이고, 재우고, 보살피면서. 동료들과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나름대로의 '합사 과정'을 거치면서. 누군가는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가고, 또 누군가는 또 다른 이유로 이곳 화천을 찾는다. 곰을 돌본다는 점을 제외하면, 이들은 여느 직장에 다니는 청년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야, 그들도 자기 삶을 사는 평범한 2, 30대 여성들이니까, 당연한 일이다.
단지, 우리가 잠시 머무는 곳
사육곰 생츄어리에 대한 이야기는 2018년부터 어렴풋이 들은 바 있다. 이런저런 굿즈가 탐난다는 불순한 이유로 몇 번인가 단발성 후원을 감행한 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거기서 곰을 돌본다는 것 이외에는 대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 적은 없다. 아주 막연하게, 비겁한 변명해 왔던 것 같다.
"나는 환경과 동물권을 중시하면서도 고기를 좋아하고, 플라스틱이 자연에 끔찍하다는 걸 알면서도 때때로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신다. 그런 내가 감히 환경 보호와 동물권을 논해도 되는 것일까? 이것이 무단횡단 하면서 쓰레기 줍는 일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그런 것은 정말로 뜻 깊은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두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라고.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완벽할 수는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의 권리를 외치는 사람들의 사정 역시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바를 실현하는 데에 있다. 좋은 일을 하는 데에는 언제나 많은 품과 노력이 든다. 그러니 숟가락만 얹는 기분이 들지언정 뭐라도 해 보는 것이, 하지 않는 것보다는 몇 백 배 낫다. 그래서 이 영화가 보고 싶었다. 바쁜 중에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종의 부채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땠냐고? 정말 좋았다. 연고도 없는 곰을 돌보는, 그런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나처럼 아주 평범한 청년들이라는 걸 알고나니 무모한 용기마저 샘솟았다. "그래, 무단횡단을 한들 어떠냐. 어쨌든 누군가는 쓰레기를 주워야 한다면, 내가 줍는 것도 좋지 않나." 하는 뻔뻔한 생각마저 들었다. 이것이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이고, 여러분에게 이 다큐멘터리를 추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당신이 이 사회를 살며 온갖 문제로 고민하는 청년이라면, 곰 보금자리에 관심을 가졌거나, 동물권, 지속 가능한 삶에 흥미 있는 사람이라면, 혹은 나처럼 '무단횡단하며 쓰레기 줍는 일을 하고 있는건 아닐까' 망설이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꼭 감상해보길 바란다. 곰 돌보는 저 청년들의 이야기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단지, 잠시 머물다 가는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을 되돌아보고, 더 나은 삶을 위해 무엇을 꿈꿀 수 있을지를 고민해보게 되리라.
<곰 보금 자리 프로젝트> (일시 후원, 정기 후원을 할 수 있다.)
상영 스케줄
09-21 12:30 CGV 센텀시티 4관
09-22 09:10 CGV 센텀시티 3관
09-23 12:00 CGV 센텀시티 2관
부산국제영화제
09월 17일 ~ 09월 26일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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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가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증명할 때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보고 난 후 너무 많은 것들을 느끼고 배울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 산업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으로서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은 엄청난 계기가 될 지도 모르겠다.
1. THIS IS HOLLYWOOD !
이 영화는 애초에 할리우드라서 만들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해군 소속의 일류 조종사들, 항공모함에서 이착륙하는 수많은 전투기들이 등장하고 엄청난 기술력으로 적들을 피격하는 소재의 영화. 애초에 영화의 소재부터 ‘미국’이라는 국가의 독보적이고 유일한 상징성이 다분히 담겨있다. (감히 미국이 아니면 쉽게 다룰 수 없는 소재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러한 스토리를 영화라는 예술을 통해 풀어내고 구현해 낼 수 있는 할리우드의 자본력과 영화 산업으로서의 힘이 정말 대단하다고 본다. 정말 다른 영화 산업에서는 쉬이 엄두도 못 낼 작품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스토리를 풀어낼 수 있는 훌륭한 전작이 존재하고, 무려 36년 후의 속편에서 같은 역할을 전혀 어색하지 않게 해낼 수 있는 배우로서의 자질을 갖춘 톰 크루즈를 가진 할리우드라니!
이 영화가 정말 미국 영화구나 싶었던 장면이 있었는데, 바로 인물들이 함께 해변에서 도그파이트 럭비를 하는 장면이었다. 전작에서의 해변 비치 발리볼 씬을 오마주 한듯 했는데, 그 장면 자체로 후덥지근한 여름의 열기와 그 속에서 느껴지는 청춘들의 뜨거운 열정이 흘러넘치는 느낌이었다.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미국 브랜드 아베크롬비의 흥망성쇠에 대한 다큐멘터리 작품에 대해 보았는데, 위 장면을 보면서 정말 과거 아베크롬비가 추구했던, 몸 좋고 멋진 젊은 미국 청년들의 자유로움과 여유로움이 이런건가? 싶었다.
엄청난 생동감과 스릴이 느껴지는 비행 장면들과, 이를 더욱 극대화시키는 사운드 구성. 전작을 오마주하듯 연출된 다양한 장면들과, 함께 등장하는 사운드 트랙만 생각해도 이 영화를 ‘극장’ 에서 봐야하는 이유가 성립되는 것 같다. (사실 필자는 처음 음악감독으로 Hans Zimmer 가 뜰 때부터 보러오기 잘했다고 생각했다.) 스마트폰, 태블릿, 노트북으로 어디서나 쉽게 영화를 볼 수 있고 점점 극장 산업이 어려움을 겪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 <탑건:매버릭>은 영화와 극장의 뗄 수 없는 관계성에 대해 보여주며 왜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아야 하는지 소리치는 영화인듯 하다. 감독이 각 장면에서 표현해 내고 싶은 느낌에는 장면 구성과 더불어 사운드의 연출 등 그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진짜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영화를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영화는 극장에서 보자. 거기다 요즘 극장은 아이맥스처럼 진짜 고도의 기술로 발전된 상영관이 너무 많으니, 꽤나 엄청난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내가 평소 좋아하고 즐겨 보는 영화들은 굳이 이 영화를 극장에서? 싶은 영화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번 기회로 다시 느꼈다. 장르 불문하고 영화라는 문화를 즐기기 위해 영화관을 가야 하는 이유를.
2. "Talk to me, Goose"
캐릭터와 배우가 함께 나이를 먹고, 과거의 서사를 온전히 안은 채로 진짜 그 인물이 되어 연기하는 것.
배우와 제작자의 입장에서 그러한 연출을 할 수 있는 작품에 참여한다는 건 엄청난 행운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분명 좋은 시나리오와 좋은 연출가들, 좋은 배우들의 이 삼박자의 완벽한 합이 있을 것이다. 작품 전체적인 플롯은 어찌보면 되게 뻔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스토리 전개를 마냥 뻔하게 만들지 않는 촘촘한 이야기 속의 개연성과 설정 등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난 이상하게도 매버릭이 오토바이를 타고 달릴때부터 마음이 찡했다. 36년 전의 과거의 모습과 오버랩되며, 빠르게 달리는 오토바이의 속도로 그 세월의 간극을 메꾸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상영관에는 꽤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도 계셨는데, 그 분들이 느끼는 감동은 얼마나 더 클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36년 전 영화 <탑건>을 관람했던 기억이 고스란히 떠오르며 그 시절을 추억하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이것 또한 영화라는 문화예술이 갖는 너무나도 값진 가치라고 생각한다.
매버릭은 뜻 정말 단어 뜻 그대로(Meverick) 독보적인 개성과 성향을 갖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만년 대령으로 그 나이까지 아직도 군대에 남아있는 설정부터가 그의 자유로움과 소년같은 순수함, 비행에 대한 열정 등을 잘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살면서 죽을 힘을 다해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을 자신의 커리어로 삼는다면 얼마나 행운일까? 그리고 그 분야의 Top gun이 되는, 최고가 되는 경험은 얼마나 값진 것일까?
이단아같은 그런 인물의 유일한 아킬레스건인 구스와 그의 관계성에서도 많은 것을 느꼈다. 매버릭에게 구스는 그의 유일한 가족이며,상실의 슬픔을 느끼게 하고 동시에 그의 삶의 원동력이 되는 존재이다. 극한의 상황에서 구스에게 그 답을 구하는 매버릭. 마치 인간이 신에게 답을 구하는 장면이 오버랩되었다. 매버릭에게 구스는 그 어떠한 신보다 큰 존재가 아니었을까? 누군가에게 신 같은 존재가 된다는 건 얼마나 큰 의미인지에 대한 생각이 드는 시간이었다.
결국 이번에 <탑건:매버릭>을 보고 톰 크루즈라는 배우에 완전히 빠져,
그의 온갖 필모를 전부 챙겨보았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자, 내 주변 가장 대단한 영화광인 엄마는
왜 이제서야 톰 크루즈의 매력을 알게 된거냐고 날 놀리며
본인은 이미 다 봤다고, <어퓨굿맨>을 보지 않고는그에 대해 얘기를 말라고 한다.
내가 <칵테일>을 봐야겠다고 했더니 옆에서 벌써 사운드트랙을 흥얼거리는 그녀였다.
정말 멋진 배우다. 연기도 열정도.
정말 세대 불문하고 그 매력에 빠질 수 밖에 없는 대체 불가한 배우임을 한 번 더 증명한 그다.
그래서 재개봉이 언제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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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WIFF 데일리] 미래를 부정당한 퀴어, 가능성을 벼려내다
홈그라운드/Home Ground
권아람/한국/2022/78min/‘지금 여기, 한국영화’ 세션
1970년대 명동 ‘샤넬’은 바지씨, 치마씨들의 은밀한 아지트였다. 1996년, 레즈비언 청년들은 한국 최초의 레즈비언 바 ‘레스보스’를 직접 오픈한다. 2000년대 초, 커뮤니티를 찾던 10대 퀴어들은 신촌의 작은 공원에 모여든다. 명우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레스보스를 지키고 있지만, 코로나 위기로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진다. 명우는 레스보스를 지킬 수 있을까?(서울국제여성영화제)
퀴어 이론가 리 에델만은 자신의 책 《미래 없음No Future》에서 퀴어의 ‘미래 없음’을 급진 정치학의 토대로 정초했다. 이성애 규범과 성별 이분법이 공고한 사회는 퀴어의 미래가 ‘없다’고 가정하거나, 존재하더라도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공포와 불안을 끊임없이 생산한다. 에델만은 퀴어를 향한 비난을 전유한다. 생물학적 재생산의 ‘불능’ 혹은 ‘대문자 아이’로 상징되는 미래(‘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와 같은 수사)에 기반한 비난을 ‘지금, 여기’에 초점을 맞추는 퀴어 정치의 상상력을 위한 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인류의 미래가 지구에게는 곧 ‘미래 없음’을 의미하는 시대에 에델만이 제안한 ‘미래 없음’은 퀴어 정치학에 한정되지 않는 복합적인 정치를 펼쳐낼 장이 될 가능성도 품는다. 매력적인 개념이다.
다만 이론적 매혹과 현실을 살아가는 퀴어 삶의 관계에는 조금 더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다. 퀴어의 ‘미래 없음’에 기반해 지금, 여기를 바꿔낼 정치적 상상력을 벼려내는 일과 고군분투하며 현실을 살아가는 퀴어의 삶을 등치시키면, 현실의 삶이 이론의 무게에 짓눌리거나 그 복잡한 맥락이 소거되는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현실을 살아내는 퀴어의 삶에 주목하여 ‘미래 없음’과 동시에 ‘다른 미래’ 역시 말해야 한다.
〈홈그라운드〉는 이를 위한 좋은 참조점이 되어준다. 곧 일흔을 앞둔 명우는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레즈비언 바 레스보스를 운영하고 있다. 1996년 처음 생긴 레스보스는 레즈비언 청소년들의 모임 장소였던 일명 ‘신공’(신촌공원) 근처에서 운영되다 지금은 이태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영화는 레스보스의 이야기와 명우의 이야기를 교차로 엮어낸다. 레즈비언이 ‘부치’, ‘펨’이란 말 대신 ‘바지씨’, ‘치마씨’로 불리던 시절부터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이었던 명우와 그런 명우가 다른 레즈비언들이 편하고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로 운영해온 레스보스. 이 둘에게는 레즈비언들의 역사가 켜켜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이들이 쌓아온 역사는 퀴어 미래를 쌓아가기 위한 주춧돌이 되어준다. 아무도 퀴어로 나이 든다는 것의 의미를 알려주지 않는 사회에서, 상상할 만한 미래가 필요한 다음 세대 퀴어에게 ‘네게도 미래가 가능하다’는 위안을 건네는 것이다.
레즈비언들이 몸과 마음을 부대끼며 쌓아온 역사와 그로 인해 가능해지는 미래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하는 것은 계보다. 공동체, 장소, 기억, 미래 등 정체성의 토대가 될 만한 퀴어 선배들이 꾸려온 정보로부터 차단당한 퀴어들은 고립되는 일이 잦다. 비슷한 경험과 감정을 가진 자가 도처에 있는데도 혼자라고 느끼며 외로워하는 것이다. 요컨대 퀴어들은 집단적 삶의 연속성, 즉 계보를 갖지 못한 채 파편화된 존재로 적대적인 세상에 노출된 상태다. 그러나 명우와 레스보스가 레즈비언의 역사일 수 있다면, 레즈비언에게도 계보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영화에는 레스보스를 오가는 손님들이자 명우의 후배 레즈비언들의 인터뷰가 다수 나온다. 이들의 이야기가 모여 계보의 사전적 뜻인 ‘계승되어 온 연속성’이 구체화된다.
물론 명우와 레스보스가 품은 레즈비언 기억과 계보의 가능성을 낭만화할 수만은 없다. 명우는 여전히 이성애자 친구들에게 자신의 ‘행복’을 증명해야만 하고, 노인의 돌봄을 가족에 위임하는 사회에서 노후를 걱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머리만 길러도 집에서 사업자금을 대준다고 했어.” 명우의 오랜 친구이자 ‘형님’인 꼭지의 말이다. 물론 꼭지는 그 제안을 거부하고 평생을 짧은 머리 여자로 살았다. 명우와 꼭지뿐 아니라 많은 퀴어가 공적 지원이 전무한 상태에서 치열하게 자립을 모색한다. 그리고 레스보스와 같은 퀴어 공간은 자립의 과정이 버거운 퀴어들이 서로에게 위로와 위안을 건네는 장소로 기능해왔다.
명우는 젊은 퀴어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여전히 집회에 참석하고 대화를 나누며 자신이 가졌던 편견을 되짚어보고 반성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미래 없음’의 이론적 가능성을 모색하면서도 미래를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는 일 역시 필요하다는 데 동의한다면, 명우와 레스보스, 그리고 그곳을 거쳐 간 많은 퀴어가 만들어온 궤적이 분명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리라는 데에도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도래할 ‘다른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가 척박한 땅에서 일궈온 기억, 계보, 공동체라는 자산으로부터 시작될 미래를 기다려본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을 통해 기자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제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8월 24일부터 8월 30일까지 진행됩니다. 영화 상영 시간표와 상영작 정보는 영화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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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번째 감옥, 만덜레이
도그 빌에서의 참극을 맞이하고도
인간에 대한 믿음을 벗어나지 못한걸까요.
다소 슬픈 그레이스의 두번째 이야기가 펼쳐지는
만덜레이 입니다.
억압과 동시에 벗어나지 않으려는 딜레마에 갇힌.
도그빌 마을의 사건 이후에 그레이스는 만덜레이라는 마을에 도착하게 됩니다.
노예제가 폐지 되었지만 여전히 악습이 팽배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마을에 말이죠.
이상주의자인 그레이스는 자유가 억압된 그 모습을 두고보지 못합니다.
도그빌에서 겪었음에도 아직 같은 생각인걸까요.
그렇게 그레이스는 주인마님이 사라진 이 곳, 만덜레이에 자유를 쥐어주게 됩니다.
하지만 70년간 없었던 자유에 준비되지 않았던 그들은 기뻐하지도 고마워하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모습인데도, 그 모습은 그레이스에 있어서 당연하지 않은가봅니다.
약간은 몰입감이 떨어지지만 여전히 오만한 영화의 의미가 참 독특했습니다.
비관적이면서도 주인공의 뚝심을 지킨다는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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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법 : 재차의] 초간단 3분 리뷰
줄거리
방법사 '소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어느덧 3년.
사회부 기자였던 '진희'는 3년 전 취재로 알게 된 '필성'과 함께 '도시 탐정'이라는 독립 뉴스채널을 설립한다. 책을 출간하고 인터뷰를 다니는 바쁜 와중에도 진희는 소진을 걱정하며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던 중, 3개월 된 시체가 살인을 저지르는 해괴망측한 사건이 발생한다. 급기야 그 살인사건의 범인이라고 밝힌 자가 공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진희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는 일이 일어나는데...시청 포인트
1. 드라마 [방법]을 보지 않아도 내용은 이해할 수 있지만, 재미를 증폭시키기 위해서는 보는 것이 좋음.
2. 더 강해진 소진과 든든한 팀을 꾸린 진희의 만남.
3. 조종당하는 '재차의'들의 액션.감상평
드라마를 재밌게 봤던 1인이었기에 영화도 기대됐다. 방법 2편을 만들지 말지를 두고 tvN에서 투표를 했었는데, 그때 후속편을 만들어달라는 쪽으로 투표율이 많이 기울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마 그때의 투표가 영향을 미친 결과이지 않을까 싶다.
나의 의문점은 '더 끌어낼 이야기가 있나?'라는 것이었다. 물론 다음 편을 낸다면야 땡큐지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드라마를 끝낸 마당에 더 할 이야기가 뭐 있다고. 애초에 독특한 소재였기에 신선한 이야기일 수 있었으니 재탕도 안 될 것이고. 처음부터 2편을 염두에 두고 만든 건가, 상당히 의아했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는 '재차의'라는 소재만 빼면 전체적으로 특별할 게 없었다.
이전 편의 악당이었던 '진종현'이나 '진경'은 편을 들 순 없어도 매력적인 악역이었다. 게다가 소진과 대적하는 능력을 갖췄기에 대립 구도와 신선한 재미를 동시에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편에서는 '재차의'라는 소재에 집중하느라 인물들이 다소 진부해졌다. '진종현'은 권력자이자 주술사였는데, 이번 편에서는 권력자와 주술사가 두 갈래의 구조로 나누게 되면서 그 매력이 나눠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액션이 무쟈게 좋았냐, 그건 또 애매하다. 재차의들이 단체로 뛰어가고 계단을 오르다 뛰어내리는 장면에선 소름이 돋긴 했지만. 자동차에 달라붙어서 주먹으로 창문을 마구 내리칠 때 맥이 탁 풀리면서 웃음이 나왔다. 사실 아저씨의 원빈처럼 총을 쏘거나, 전우치의 요괴처럼 한 방에 창문을 깨는 게 오히려 비현실적인 건데... 이건 그냥 내가 액션을 잘 안 봐서 그런 걸지도.
사실 이 정도의 스토리를 조금 더 섬세하게 다루려면 드라마가 더 좋았을 텐데. 그러면 각각의 인물들도 잘 살리고 전개에도 긴장감을 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로 이 소재를 살리려니 최소한의 요소만 남기고 다 버릴 수밖에 없었겠지. 아쉽긴 하지만, 영화로 이 정도 살린 건 나름 선방했다고 생각한다.
내 느낌이지만 이번 편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위한 중간 고리라서 힘을 빼고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레딧이 올라가고 끝에 '진경'의 조수였던 '천주봉'이 등장하면서 후속편을 암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오히려 이 장면 하나가 재차의들이 뛰어오는 것보다 훨씬 압도적인 느낌을 주었다. 다음 편은 왠지 드라마로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다.별점
★★★(3.5 / 5.0)
방법을 봤던 사람이라면 재밌게 볼 것이고, 아닌 사람도 무난하게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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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SYNOPSIS.
[성모의 죽음], [메두사], [성 마태오의 소명], [세례 요한의 참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 ‘카라바조’
살해 혐의로 도망자 신세가 된 '카라바조'는
로마 교외로 도피 생활을 이어가는 와중에도 그림을 놓지 않는다
한편, 교황청은 그런 그의 사면 자격을 조사하기 위해
비밀리에 ‘그림자’를 파견해 뒤를 쫓는데…
POINT.
✔️ 카라바조를 아시나요? 바로크 회화 거장. 렘브란트, 루벤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등이 영향을 받은 사람. 이전까지 없던 강렬한 화풍을 가진 독특한 화가의 세계로 안내하는 작품.
✔️ 카라바조 역할을 맡은 리카르도 스카마르치오의 든든한 존재감 뒤로, 이자벨 위페르 & 루이 가렐이 어마어마한 아우라를 뽐내는 작품. 둘 다 프랑스 배우라 그런지 더빙을 했다는 아쉬움은 남지만, 그럼에도 이 둘을 캐스팅한 이유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 만큼... 얼굴로 에너지를 다 드러냅니다.
✔️ 사랑과 예술이 함께하는 길. 종교로 대표된 권력에 맞서 인간적 에너지를 드러내는 카라바조 캐릭터의 매력을 볼 수 있어요.
✔️ 영화를 보고 나니, 마침 진행 중인 "빛의 거장 카라바조 & 바로크의 얼굴들" 전시(~2025년 3월 27일)가 보고 싶어지더라고요!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그가 5살쯤 되었을 때에 흑사병이 터졌다. 유럽 인구의 1/3 가량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병으로 혼란한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견습 생활을 거쳐 화가로 자라난다. 폭발적인 주목을 받은 엄청난 능력치, 다른 의미로 폭발적인... 술과 폭력과 염문으로 절여진 사생활로 숱하게 화제가 된다. 결국 말다툼이 번진 결투에서 살인죄를 저지르고, 로마를 벗어나 몰타로 도피했으나... 몰타에서도 문제를 일으켜 나폴리로 또 도피하게 된다. 도망길에서도 붓을 놓지 않으면서, 마치 당시 상황을 반영하듯 거칠고 어두운 화풍을 남긴다. 혹자는 피살되었다고도 하고 혹자는 풍토병이라고도 하는 모종의 이유로 사망한다.
여기까지가 카라바조라는 화가에 대해 알려진 개략적 사실이다. 영화 <카라바조의 그림자>가 흥미로운 지점은 이 사실들을 크게 비틀지 않으면서도, 카라바조라는 인물에게 전혀 다른 이미지를 덧입힌다는 점이다.
'까'와 '빠'를 다 미치게 만들어야 슈퍼스타라던데,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카라바조는 당대의 슈퍼스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등장인물 대다수가 그를 극도로 좋아하거나 혹은 극도로 싫어한다. 그리고 그 반응들을 보는 것은 꽤나 재미있다. 오늘날 여기저기서 쉽게 재현되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나와 거리감이 있는 시공간에서 익숙한 구도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걸 보고 있자니 알 것 같다. 왜 나는 사랑-예술 사이에 인력이 있고, 사랑-권력 사이에 척력이 있다고 느끼며 살아왔는지를.
사랑과 예술의 대척점에, 권력
천상의 이야기와 지상의 비참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철저하게 구분되어 있던 시대. 성모 마리아 그림은 반드시 특정한 구도와 정물 등 계산된 방식대로만 그려져야 했고,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해서도 안되었다. 하물며 길거리의 매춘부를 모델로 하다니 당시의 '높으신 분들'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르고 봤을 때는 마음을 정돈하기에 도움이 되었던 성모화가, 모델이 매춘부임을 알고 나니 더없이 거슬리는 것이 되었다.
카라바조의 천재적 재능은 '천상의 이야기'를 지상에 전하기에 적합했지만, 그가 펼치는 예술의 방식은 신성모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 그를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 그 조사관(루이 가렐)이 '그림자'처럼 어두운 데 몸을 두고, 카라바조의 '그림자'를 좇으면서 이야기는 진행된다. 카라바조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모두가 각자의 증언을 하고, 카라바조의 삶은 모자이크화처럼 점점 우리에게 다가온다.
카라바조를 싫어하는 사람들 축에, 온갖 권력자들이 있다. 이들은 솔직할 수 없기에 뒤틀린다. 카라바조의 천재성을 인정하면서도 솔직하게 경탄할 수 없어, 권위를 내세운 말들로 그의 그림을 깎아내리는 아카데미의 화가들을 통해, 예술의 진실성이 빛을 잃는다. (그림 뿐 아니라 비평도 함께.)
마찬가지의 양상을 종교 지도자들도 보여준다. (종교) 권력의 속성을 체화해 보여주는 캐릭터, '그림자' 조사관을 맡은 루이 가렐은 직선적인 눈빛으로 위압감 있는 캐릭터를 연기한다. 기다란 막대봉을 땅에 내리꽂으며, 사람들을 협박하다시피 강압적으로 상대의 이름을 묻고 정보를 뜯어낸다. 상대의 양쪽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속삭이는 루이 가렐의 모습은 (진짜 너무 잘생겼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악마적이다. 종교를 수호한다는 캐릭터가 가장 악마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렇게, 종교의 진실성 또한 빛을 잃는다.
권력은 막대봉처럼 오직 파괴적이고 직선적인 방식으로만 내리꽂힌다. 사실 예술가들처럼 당대의 종교인들 또한 카라바조에게 사랑을 보았고 내심 끌렸지만, 그들의 권력을 유지해온 모양과 다른 그 사랑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랑의 속성은 반-권력인가, 생각하다 문장을 바꿨다. 권력의 속성은 반-사랑이구나. 종교가 권력이 되면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여기서 본다. 권력을 탐하는 종교에 사랑이 머물 곳은 없다. 그 자리에선 예술도 거짓될 수밖에 없다.
살아 있기에 가능한, 예술
반대로 예술과 사랑이 빛나는 카라바조의 삶은 자동으로 반-권력적이 된다. 그의 예술은 상대의 눈을 마주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상대가 매춘부든 사형수든, 그가 이름을 묻는 방식은 마치 존재를 알아봐 주는 듯한 모양이다. 그리고 상대가 자신을 직접 서술하게 한다. "당신 대역죄인이오?" 물어 상대가 아니라고 자기 서술을 할 수 있도록. 진정한 예술은 우리에게 1인칭 언어를 피어나게 한다는 점에서 그의 질문들이 인상 깊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밤을 뜯기며 시달리던 창부는 카라바조 앞에서 혼곤한 잠에 들고, 두려움과 용기를 구분 못하겠다며 마지막 밤을 회피하던 사형수는 두려움을 인정하고 심지어 두려움을 넘어서 자신의 신념을 꿋꿋하게 외친다. 카라바조는 사랑의 눈빛과 질문으로 상대의 정체성을 끌어내고, 거기서 본 얼굴을 그려낸다. 권력이 끌어낼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 끌어낸다. 예술가가 탄생하는 지점은 공교한 기술 이전에 시각의 차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
아직 천부인권이라는 말이 발명되기 전이었던 시대, 거리의 약자들은 철저하게 타자화되었다. 상처에 술을 부어주는 신부의 너털웃음, 그가 베푸는 음식과 약품 정도가 이들이 받을 수 있는 최대치의 친절이었다. 여성이 성추행을 당해도, "만지게 두었다고" 즉결 심판으로 채찍질을 당하는 시대.
그곳에서 카라바조의 사랑은 홀로 빛난다. 비록 창부를 표현한 장면들이 다소 필요 이상으로 성적 대상화를 위한 대상화를 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와중에도, 카라바조의 사랑은 난봉이나 염문이라기보다 인류애로 느껴진다. 삶에 진심인 사람,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의 죽음이나 상처를 쉽게 외면하지 않는다는 사실, 역설적으로 그럴 때 우리는 죽음을 준비하며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영화는 카라바조의 캐릭터에 부여해 드러낸다.
이는 카라바조를 경멸한 종교의 속성을 생각할 때 더욱 흥미롭다. 죽음 뒤의 부활로 죽음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는 종교가 미세한 의심의 자국 하나도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오히려 믿음이 약한 모습을 볼 때, 진정한 사랑과 예술은 재갈에 물려 피를 흘리고 두려움을 인정하고 상처를 어루만지는 자리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오는 미묘한 카타르시스가 있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 주는 금실이지." 훗날 자신이 노벨문학상을 수상자가 될 사실을 모른 채, 연필로 꾹꾹 이 문장을 눌러 썼던 여덟 살 아이의 마음. 거기 고여 있는 것을, 이 영화에서도 볼 수 있었다. 사랑이 없을 것 같지만 놓인 곳. 반대로 있어야 하지만 없는 곳. 그 구도를 소실점처럼 현실로 끌어와 본다. 그리고 묻는다.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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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선이 모호한 범죄 스릴러
윈드폴 (Windfall, 2022)
“기준선이 모호한 범죄 스릴러”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범죄, 드라마, 스릴러
러닝타임 : 92분
감독 : 찰리 맥도웰
출연 : 릴리 콜린스, 제시 플레먼스, 제이슨 세걸
개인적인 평점 : 3/5
윈드폴 줄거리
한적한 별장을 무대로 위험한 대치 상황이 벌어진다. 한쪽은 원한을 품은 평범한 사람. 다른 한쪽은 IT 업계의 콧대 높은 억만장자와 그의 아내.
Windfall : 우발적인 소득이나 횡재, 낙과
넷플릭스에 새롭게 공개된 영화 <윈드폴>은 제목 뜻 그대로 꽤나 우발적으로 돌아가는 영화다. 사실 포장하자면 ‘우발적’인 거고 안 좋게 말하자면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정확한 기준선이 없다. 얼마간의 긴장감과 어느 정도의 메시지를 갖췄으나 ‘어느 정도’에서 끝나는것이 못내 아쉽다.
영화의 이름 없는 세 주연은 배우 릴리 콜린스, 제시 플레먼스, 제이슨 세걸이 맡았다. 얼떨결에 시작된 납치 상황 속에서 세 주연 배우는 각자의 파트를 잡고 극을 이끌어간다. 오만방자하고 모든 걸 다 가진 IT 기업의 CEO, 우연한 기회에 그를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 직원이었던 와이프, 그리고 떠돌이로 추정되는 남자까지. 세 사람은 우연히 벌어지는 사건 앞에서 각자의 불편함과 선택에 대해 변명한다.
세 주인공은 부자 백인 남자와 부자가 아닌 백인 남자. 부자 백인 남자의 액세서리처럼 여겨지는 여자로 해석될 수도 있고, 기회를 잡지 못한 사람들을 실패자라 기만하는 기득권층, 조용히 상황이 흘러가길 기다리거나 기다릴 수 밖에 없었던 보통의 사람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윈드폴>은 소리 없이 다가오는 선택의 순간과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지켜야만 했던 선(Line)에 대해 이야기한다. 결국 이 영화는 선택을 억눌렀던 보이지 않는 선을 넘는 영화다. 공평하게 다가오는 선택의 순간과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는 선택지. 그 선택지의 선을 넘는 것이다. 이렇게 느낀 이유는 영화의 엔딩에 가서 알 수 있다. 약간의 루즈함을 참을 수 있다면 말이다.
기준선이 모호한 이야기
<윈드폴>의 장점은 명확하다. 주연 배우 릴리 콜린스, 제시 플레먼스, 제이슨 세걸. 그리고 단점도 명확하다. 이야기의 기준선이 없다. 영화의 처음은 집 없는 남자가 끌고 가는 납치극의 모양새를 하고 있고, 중반은 오만한 CEO의 헛발질, 아내와 남자의 감정적 교류로 채워진다. 그리고 후반부에 가선 약간의 충격을 가미한 누군가의 선택으로 마무리된다. 흐름 자체의 어색함은 없지만 어째 딱 집중할 만한 포인트가 없다. 납치극이 가진 특유의 팽팽한 긴장감보다는 느슨함이 느껴지는 분위기 속에서 집중할 만한 포인트는 릴리 콜린스가 연기한 아내 캐릭터 하나뿐이다.
캐릭터의 특성
이야기의 흐름은 전적으로 세 인물들에게 기대어 진행된다. 이들은 각자의 특성에 맞춰 상황에 대처한다. CEO는 위험성을 고려하지 않고 도움이 될만한 기회를 잡기 위해 배팅을 하고, 아내는 움츠린 채 자극보다는 안전한 길을 찾으려 한다. 남자 또한 그렇다. 이들의 이러한 태도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따라 갈린다. 어쩌다 또는 어쩔 수 없이 선을 지키며 살아왔는지, 아니면 극적으로 쟁취했는지에 따라서 말이다.
등에 과녁을 달고 있다고 생각하며 물불 가리지 않고 일에 뛰어들었던 CEO는 납치가 된 상황에서도 거만하게 남자를 깔보는 모습을 보인다. 어쩌다 CEO의 아내가 되어버린 여자, 그 또한 남자에게 큰 위협을 느끼지 않지만 간혹 남편이 만드는 아슬아슬한 상황을 수습하기 바쁘다. 어쩌다 강도가 되어버린 남자는 이 상황을 크게 키우지 않고 마무리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초조함과 불안감을 숨기지 못한다.
항상 누군가의 윗선에서 살아온 사람의 여유와 오만함,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며 살아왔던 사람이 가진 초조함이 대비되며 극에 어느 정도의 텐션을 만든다.
이야기의 배경
이야기는 깔끔하지 못한 행색의 남자가 억만장자의 텅 빈 별장에서 ‘어쩌다’ 별장의 주인과 마주치면서 시작된다. 식사도 챙겼고, 잠시간의 휴식도 즐겼으니 이제 나가보려는 찰나~에 딱 마주친 거다. 지문까지 닦고 조용히 없었던 일로 묻어두려 했던 상황이 어쩌다 보니 본격 강도 사건이 되는 순간이다. 아름다워 보였던 별장은 그렇게 별안간, 납치극의 배경이 된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겉보기와 다른 현실
납치극의 배경이 되는 초호화 별장의 상황은 CEO와 아내, 남자의 상황과 닮아있다. 지상 낙원 같지만 알고 보면 주인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아 잊혔던 별장은 CEO와 아내의 알맹이 없이 겉만 멀쩡한 결혼 생활, 별장에 침입한 남자의 존재는 CEO와 아내의 사이에서 여자의 속마음을 들어주는 비슷한 처지의 남자로 비유된다.
CEO 부부는 겉으로 보기엔 완벽하다. CEO는 엄청난 부를 축적했고 아내는 남편의 도움을 받아 빚을 갚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회사를 설립했다. CEO는 바쁜 와중에도 아내를 위해 스케줄을 취소하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얼핏 보면 부족할 것 하나 없는 사이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이 두 사람의 사이엔 부부 사이에 가장 중요한, 진실한 감정이 없다.
CEO는 아내와 2세를 계획하고 있지만 아내는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 피임약을 소지하고 다닌다. 별장에 도착했을 때도 CEO는 아내와의 잠자리를, 아내는 별장 구경을 원한다. 아내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꽃, 장미를 발등에 새겼지만 CEO는 그것을 정말 못생긴 타투 정도로 생각하고 제거 시술을 받게 한다. 평범한 직원이었던 아내는 자신의 빚을 갚아준 CEO와의 결혼을 선택했지만 결혼 이후부터는 선택권을 박탈당한 삶을 살게 된다. 행복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 행복해 보이기만 하는 삶으로 이어진 것이다.
CEO는 남자 앞에서도 ‘난 아내가 먼저’라고 외치며 겉으로는 아내를 위하는 척하지만, 알고 보면 보기에만 좋았을 뿐, 바람까지 피우고 있는 상당히 못된 남편이었다. 아내의 타투를 알아보고, 아내의 마음을 들어주는 인물이 남편이 아닌 납치범인 남자인 게 조금 애잔한 부분이다. 어째 남편보다 남자와 더 잘 통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릴리 콜린스는 영화 속 커플을 연기하기 위해 사회 엘리트에 대한 다큐멘터리와 레드 카펫 위에 오른 커플의 사진을 보고 여성이 정말 행복해 보이는지, 그의 감정은 어떠한지 분석하는 연습을 했다고 한다.
선을 넘다. 결말 해석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어떤 것인진 대략 알 것 같다. 선택엔 반드시 결과가 따르고, 스스로 선택한다는 건 일련의 선(Line)을 넘는다는 뜻이다. 영화의 후반부, ‘아무도 다치지 않고, 없던 일처럼 일을 끝내겠다.’고 했던 남자의 다짐은 정원사의 죽음과 함께 깨지게 된다. 이전에도 손과 발을 떨며 초조함을 내비치던 남자는 CEO와 아내에게 총을 들이밀며 고민한다. 억울한 누명을 덮어 쓸 수도 있으니 이들도 함께 죽이는 게 안전할 거라는 생각과 아무도 다치지 않도록 하겠다는 생각. 남자는 훅 다가온 선택의 순간을 두고 고민한다.
고민하는 남자에게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선을 넘지 말아요. 당신은 살인자가 아니잖아요.”
남자는 아내의 말에 설득되어 결국 선을 넘지 않고 조용히 떠나기로 결정한다. 후반부 내내 무언가를 고민하던 아내는 결국 선을 넘는 선택을 한다. 부부를 위협했던 남자의 머리를 치고, 억압된 결혼 생활을 하게 만든 남편을 총으로 쏜 후 아내는 자신의 발을 바라본다. 아내의 발 앞엔 옅은 턱으로 된 정원과 현관의 경계선이 있다. 아내는 죽은 두 사람을 남겨두고 경계선을 넘어 걸어간다. 아내는 그렇게 어떤 선택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만들었던 보이지 않는 선을 벗어난다.
선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나쁘지 않은 상황 속에서 내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있는 선택과 아슬아슬한 상황속에서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선택. 후자에 해당하는 선택만 가능했던 아내는 영화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온전하게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게 된다.
백인 남성으로서 많은 선택지를 가졌던 CEO와 여성으로서 몇 가지의 선택지를 받은 아내. 그리고 아무런 선택지를 받지 못하고 허무하게 하차한 유색 인종 정원사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닥치는 선택의 순간, 선을 넘어설지 보이지 않는 선에 갇혀 어쩔 수 없는 선택을 반복할지는 내가 정하는 것이다. 다만 그 선택지가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지는 않는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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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몰입하고 있는 거침없는 한 사내의 사건![1탄/결말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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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흥신소 - 알고보면 쓸데없이 재밌는 영화리뷰
'이스케이프 룸2 : 노 웨이 아웃' 관람에 앞서 복습하는 '이스케이프 룸'입장료 없다는 말에 덜컥 들어와버린 방탈출게임장
우승하면 만달러의 상금을 받지만
실수하면 목숨을 받아가는 곳#출구가_입구 #원룸_데쓰매치
과연 이들은 이곳을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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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주피터스 레거시>
[2021년 5월 7일, 넷플릭스 공개]
그 어떤 유산도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
100년 가까이 세상을 수호한 1세대 슈퍼히어로들. 이제는 그 아이들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들이 물려받은 전설과 이상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영웅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첫 번째 세대의 슈퍼히어로.이제 그 아이들의 세대가 세상을 밝혀온 횃불을 이어야 한다.
하지만 세상은 조금이라도 나아지긴 했을까.
높아지는 긴장 속에, 오랜 원칙이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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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핸섬가이즈> 1차 예고편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재필’과 ‘상구’가 전원생활을 꿈꾸며 새집으로 이사 온 날, 지하실에 봉인됐던 비밀이 깨어나며 벌어지는 고자극 오싹 코미디 '핸섬가이즈' NEW는 영화, 음악, 드라마, 극장사업 등 다양한 엔터테인먼트의 분야를 아우르는 미디어 그룹입니다. NEW 영화사업부의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시고 NEW 영화 예고편, 미공개 독점 영상 등을 가장 먼저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