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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정2025-09-24 12:56:02

[30th BIFF 데일리] 정중해서 더 애절한 사랑

영화 <사이공의 연인> 리뷰

DIRECTOR. 리언 레(Leon Le)

CAST. 빈 팟 리엔(Binh Phat Lien), 띠 하이 옌 도(Thi Hai Yen Do), 키에우 한 리(Kieu Hanh Ly), 홍 응옥 응고(Hong Ngoc Ngo), 떼 만 짠(The Manh Tran)

PROGRAM NOTE.

전후 10년, 여전히 재건이 한창인 베트남의 사이공. 남편과 사별한 키남은 사이공의 공동주택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중정을 공유하는 거주민들은 서로의 일거수일투족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수라는 베트남-프랑스 혼혈아를 입양해서 키우는데, 어느 날 위층에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베트남어로 번역 중인 청년 캉이 이사 온다. 집안 배경 좋고 매력적인 그에게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캉은 이사 온 첫날,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준 키남에게 시나브로 빠져든다. 한 폭의 로맨틱한 수채화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의 백미는 두 남녀가 밤새워 사이공 시내를 걸으면서 꿈같은 이별 의식을 치르는 후반부 장면이다. 이 시퀀스는 청년의 내레이션으로 연결되면서 두 사람의 서사를 영원한 현재형으로 머물게 한다. (김채희)

 

 

옛 정취를 좋아하고 오래된 물건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사랑에 빠질 것이다. 옛 사이공의 아름다움, 베트남 특유의 그 레트로한 아름다움이 시작부터 묻어나기 때문이다. 영화는 나무에서 수액이 한 방울씩 고여 귀하게 만들어지는 '침향'을 설명하는데, 영화의 여자 주인공 이름인 키남(Ky Nam)이 이 침향이라는 뜻이라고 말한다. 시대의 제한과 아름다움, 억압 속에서 발현되는 사랑의 애절함, 문학의 아름다움까지 한 방울 한 방울 귀하게 아름다운 정수를 모아 만든 영화에 잘 어울리는 제목이다. 원제 Ky Nam Inn은 '키남 식당', 극 중 키남이 운영하는 배달주문 식당 이름이다. 두 사람이 사랑의 말 하나 없이 사랑을 쌓아 올리는 공간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화양연화>의 무드를 떠올렸는데, 두 사람의 사랑은 격정적으로 맞부딪는 게 아니라 향기처럼 음악처럼 퍼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전통 의상을 입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인, 눈빛으로 사랑을 말하는 반듯한 지식인 남성, 음식을 담은 그릇, 계단이 많고 폭이 좁은 건물 등의 공통점도 그런 느낌을 더했겠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살과 살을 맞부딪는 게 아니라 함께 보낸 시간을 타고 조심스럽게 흐른다. 조심스럽게 또 정중하게 그래서 더 애절하게. 여우와 어린 왕자가 서로를 길들이듯이.

 

두 사람의 첫 만남부터 그렇다. 키남은 길거리에서 밤을 보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캉을 도와주지만, 직접 문을 열어주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문을 열도록 해준다. 향기처럼 움직여, 누구라도 알아챌 수는 있지만 스스로의 움직임은 최소화하는 것.

 

 

키남이 그렇게 움직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영화의 배경은 1985년 사이공. 1975년에 북베트남이 사이공을 점령하면서 베트남 전쟁이 끝났고, 남베트남은 사회주의 체제에 통합되었다. 사이공 또한 올드시티의 무드 위로 공산당의 분위기를 덧입게 되었다. 남부 출신 시민들, 남베트남 정부나 미군에 협력한 사람들에게는 불신의 시선이 뒤따랐다.

 

키남의 남편이 노동수용소에 갔다는 언급, 키남이 듣는 비난들을 미루어 보건대 아마 그의 가족들은 남베트남 정부와 관련된 인물이었을 것이고, 지금 여기 없는 이들은 어쩌면 '보트피플'의 이름으로 탈출했을 수 있다. 사이공은 호찌민 시티로 이름이 바뀌었고, 전쟁의 상흔은 천천히 재건되고 있었다. 어려운 시기, 모두가 함께 쥐를 잡는 장면처럼 공산당의 계획경제 안에서 서서히 성장하는 가운데, 키남 같은 인물은 이웃들의 비난을 받기 쉬운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그들이 사는 건물은 중정 형태로 서로의 일거수일투족이 다 눈에 들어온다. 이러한 이웃 관계는 영화 속 관계들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동시에, 서정적인 음악이나 축하 파티만으로도 당국의 엄격한 제한을 받는 상황에서는 억압으로도 기능한다.

 

 

마치 올드시티의 무드를 그대로 가진 사람처럼 보이는 키남은 이 상황에서 꼿꼿함을 유지하려 애쓴다. 스스로 떳떳하고자 애쓰는 자에게 신세를 진다는 건 더없이 불편한 일이지만, 누군가에게 신세를 질 때 사랑이 전달될 틈도 생기는 법이다. 주인공 캉은 특유의 사려 깊은 태도를 동반한 저돌성으로 이 사랑의 이야기를 진전시킨다. 키남의 사랑 또한 향기처럼 번져, 두 사람의 사랑은 일상을 타고 조금씩 축적된다.

 

두 사람의 사랑은 성급하지도 직접적이지도 않다. 탄탄대로가 보장되어 있지만 실력보다도 체제 순응적 태도가 더 중요한 사회에서 캉이 섣불리 사랑을 말할 수 없고, 입지가 위험한 키남이 그런 사랑을 상대에게 감수하게 할 리 없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사랑은 강인하다. 주고받은 눈빛, 서로를 도운 시간, 서로 모르는 존재가 서로 알아가고 가까워지고 서로에게 익숙해진다는 건 그렇게 무서운 일이다.

 

마음의 방향성이 닮은 이들은 결국 같은 문장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서로의 마음이 무엇을 사랑하는지 알고, 그 마음이 아낄 법한 시간을 서로에게 선사하며, 또 때로는 역으로 주지 않음으로써, 사랑은 표현된다. 그렇게 이 사랑은 정중함으로 더 애절해진다. 감정적으로 얽힌 자리가 선명하다.

 

 

두 사람은 사회적 편견을 뛰어넘어 서로를 알아보는 눈을 가졌기에, 서로를 알아보았을 뿐 아니라 주변과도 아름다운 관계를 맺어 간다. 베트남-프랑스 혼혈아라 차별을 받는 아이 수, 오래된 노래의 무드를 사랑하는 접골사 노인 하오와 관계를 쌓는 장면들도 모두 속속들이 아름답다.

 

제약으로 인해 은은할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의 사랑에서 저돌성이 느껴지는 부분이 이 영화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피치 못할 이별을 말하는 장면에서도, 사랑을 말할 수 없는 관계에서도, 두 사람의 사랑은 서로를 향해 직진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 사랑은 마침내 침묵을 깨게 될까. 마지막까지 두근거림을 남기는 향기로운 로맨스 영화를 오랜만에 보았다는 기분이다.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2025.09.18-26) 상영시간표]

2025.09.19. 20: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7관 (상영코드 144)

2025.09.20. 20: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7관 (상영코드 222)

2025.09.23. 19:30 CGV센텀시티 6관 (상영코드 440)

2025.09.24. 11:00 CGV센텀시티 4관 (상영코드 507)

 

 

작성자 . 선이정

출처 . http://brunch.co.kr/@sunnyluvin/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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