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2025-09-25 14:43:20
포착과 저항 뒤편에
<리 밀러: 카메라를 든 여자>, 엘런 쿠라스
<리 밀러: 카메라를 든 여자>는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에서 모두 전기 영화의 형식과 기능에 무척이나 충실한 작품이다. 한 생애를 2시간 내외에 담아보려는 노력은 뭉클하나 때로는 그 생의 주인이 몰두했던 가치를 직접적으로 펼쳐 보여주는 것 외에 특별히 영화적인 감동을 남기지 못한다. 우리가 본 적 없고 상상할 겨를도 없었던 전쟁의 곡절은 때로 매우 얕고 직관적인 대사를 경유해 뇌리에 대고 직접 쏘아진다. 첫 장편 연출작의 사소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반드시 만들어야만 했던 이유와 봐야만 할 이유는 명백하다. 이것이 또 한 명의 ‘잊힌 여자’를 불러오고 그 기록의 어두운 구석을 들여다보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다루려는 인물과 다루는 배우 간 완벽에 가까운 이해 또는 동화가 일어나면 이렇듯 골몰한 연기가 촉발되는 것일까. 제작과 주연을 맡아 8년을 분투한 케이트 윈슬렛의 강한 의지 덕에 우리는 모두 리 밀러라는 지난 세기의 숨겨진 영웅을 한 명 더 알게 된다. 대배우이자 와이파이 발명가였던 헤디 라마만이 뒤늦게나마 재발굴되었을 뿐, 여전히 NASA의 휴먼 ‘컴퓨터’ 여성들, ENIAC의 소프트웨어를 발명한 여성 개발자들, 하버드 천문대의 여성 계산원들 대부분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비상한 재능, 혁혁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남성 고용인과 박사의 명성에 가려 의미있는 인력으로 취급되지 못한 숱한 군인, 예술가, 과학자와 정치인들이다. 리 밀러 역시 커리어의 시작점을 ‘피카소의 뮤즈’란 수식으로 장식했으나, 영화는 의도적으로 그 시절에 대해 과감한 생략을 감행한다. 대신 극중 리 밀러의 입을 빌려 청년기의 초반을 이렇게 표현한다 : “난 사진 찍는 일, 섹스, 술 마시는 일을 아주 잘했어. 그래서 그걸 열심히 했지.”
이즈음 30대 중후반으로 접어들던 리 밀러의 10여년을 그려내는 매개로서의 케이트 윈슬렛은 평소 여성 신체를 평가하는 쇼 비즈니스 업계에 꾸준히 문제제기 해온 이다. 아름다운 모델로 보이기 위한, 젊거나 말라 보이기 위한 어떠한 시술, 식이조절, CG, 후보정도 염두에 두지 않은 듯해 더욱 신뢰가 간다.
물론 파리 보그의 전설적 편집자 솔랑주 공작부인, <자유>의 시인 폴 엘뤼아르의 부인이면서 피카소의 애인이었던 누슈와 함께 리가 상의를 탈의하고 남자들 앞에서 예술과 정의에 대해 논하는 장면은 당대의 진보주의자 여성들이 얻어낸 ‘자유’의 경이와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또 첫 남편과 별거 중인 상태로 롤랜드를 만나 빠르게 사랑에 빠졌던 리는 그에게 말한다. “내가 이 계단에서 떨어져 죽으면 나에 대해 좋은 말만 해줘요. 특히 만 레이가 하는 말은 믿지 말아요!” 바로 그 만 레이는 리 밀러가 사진학을 사사한 스승이자 연인, 종내엔 사바티에 효과를 발견한 성과를 두고 싸우다가 리의 목을 칼로 그었다고 전해지는 남자다. 영화 속에선 헌신적인 남편이었던 롤랜드 펜로즈마저 전후에는 오래된 애인과의 염문으로 리의 우울증과 약물 중독을 더욱 악화시켰다고 한다. 뛰어난 예술가이자 명석한 행동주의자였던 이가 이토록 뻔한 불행에 놓이는 이유란 하나뿐이다. 그가 사랑을 할 줄 아는 여성이었기 때문에.
영국 보그에서 어렵게 일자리를 구한 리는 그의 사진이 무사히 발간되도록 수년간 뒷받침한 편집인 오드리와 함께 “여자가 나이드는 걸 못 견뎌하는 남자들”을 놀려대거나, “여자가 여럿 있으면, 세실 비튼을 다루기 더 쉬워진다는 걸 깨달았을 거”라 회고한다. 여성이 제작, 연출, 집필, 편집을 모두 맡았기 때문일까? 영화는 거의 모든 씬에서 회피 없이 신랄한 블랙코미디의 자세를 취한다. 촬영감독 출신의 엘렌 쿠라스는 얼려진 사진 뒤편의 서사를 새로 쓰고 재현하는 과정에서 강렬한 타격의 목표 지점을 일관성 있게 유지한다. 남성 우월적 사회의 폭력적 에너지가 가장 극적인 형태로 표출되는 것이 바로 전쟁이라는 사실, 전시 성폭력과 탈취와 학살과 그 후유증의 가장 심한 피해자는 여성과 아동이라는 사실은 영화는 절대 놓치지 않고 꼼꼼히 호명하고 있다.
여성 종군기자, 그것도 정지된 사물 같은 모델이었다가 돌연 생동하는 주체가 되어 사진을 찍기 시작한 여자를 두고 어리둥절해진 당시 사람들이 던졌을 법한 질문이 액자 밖 인터뷰에서 첫 순서로 등장한다. ‘명성을 얻으려고 전쟁터에 나간 건가요?’ 처음 리는 전장에서 신뢰받지 못하고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이였다. 남편보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유대계 미국인 동료기자 데이비 셔먼이 군사시설의 내부를 촬영하는 동안 리는 숱한 제약에 가로막힌다. 대신 그는 ‘남성 출입 금지’ 사인이 붙은 여군과 보조원들의 숙소를 촬영한다. 군인 숙소의 낡은 란제리와 스타킹처럼, 승인받지 못한 기록자라서 도리어 유일하게 찍을 수 있었던 사진들이 역사에 남게 된다.
그러나 전장의 한가운데로, 가장 추악하고 노골적인 죄악으로 점점 더 깊숙이 다가가면서 리는 점차 기묘한 표정을 보인다.
“전쟁은 정말 힘든 일이야. 특히 우리 여자들에겐…”
“무슨 말이야? 리, 일단 누워서 쉬어.”
현재가 아닌 과거 어딘가를 헤메는 듯한 리의 이상반응은 그가 전쟁범죄를 추격하고 참상을 기록하면서 영혼에 상처를 입었단 것을, 그로 인해 먼 과거의 가장 깊은 악몽이 수면 위로 다시 떠올랐단 것을 짐작케 한다.
나치 점령 치하 파리에서 ‘사랑한다고 말한’ 독일군에게 야간 군사 계획을 말했다가 배신자, 쓸모 없는 창녀로 낙인 찍혀 머리를 밀린 소녀들. ‘고생했으니 이 정도 포상은 받아야겠다’며 위협하던 미국 군인에게 잡혀 강간당할 뻔한 파리 여자들.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서 긴 머리를 드러내지 않은 리를 남자로 알고 잔뜩 겁먹어 다가오지 못하던 어린 유대인 소녀. 리 밀러는 여자들에겐 손을 내밀고, 여자들을 강제로 취하거나 조롱하거나 누명 씌우던 남자들에겐 칼을 들이대고 욕을 하고 뺨을 때려가며 제압한다. “너희는 이해하지 못할 일이야.” 왜 아니겠는가?
승전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이 힘겨워질 만한 사진을 출판하지 못해 미안해하는 오드리 앞에서 리는 처음으로 아동강간 피해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토록 강경한 보호자로 임했던 이유, 뮤즈가 아닌 사명 가진 기록자로 남고자 했던 이유, 신경안정제와 술로 정신이 망가져가면서도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에 끝끝내 남았던 이유가 비로소 온전히 이해되는 순간이다. 어떤 피해는 너무 깊고 검어서 일생을 다 써도 그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지는 것이다.
영영 바뀐 나의 고통을 견디며 리 밀러는 말년까지 꿋꿋이 투쟁한다. 인류세의 끝을 미리 보고 온 기록자, 온몸으로 잔혹한 폭력에 저항한 이면서도 아들 안토니에게 '좋은 엄마'가 아니었다며 후회하는 리의 모습은 안토니의 회고와 엘렌 쿠라스의 영화가 그에게 새로운 항변의 기회를 주려는 듯해 그마저도 애틋하고 안쓰럽다. 롤라이플렉스로 찍은 사진을 전부 숨겨놓고 훗날 남은 아들이 리의 사후 아카이브를 찾아낼 때까지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은 것은 지난 세대까지의 어둠으로부터 소중한 후세대를 보호하고자 하는 사랑 탓은 아니었을까. 그가 아이들과 여자들에게 언제나 최후까지 방파제가 되어주려 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