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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2025-10-05 11:10:51

나를 잃는 행위가 예술이라는 세상

오기가미 나오코, <동그라미>

사와다가 있었슨

딱히 뭘하진 않았슨

그냥 동그라미를 그렸슨...

으로 시작한 영화는 오기가미 나오코 특유의 평탄한 일상적 리듬을 따라가나 싶었지만, 최근작 <강변의 무코리타>와 <파문>부터 더욱 본격적으로 전념하는 종교적 모티브가 곧장 끼어든다. 이때 종교적이란 말은 신의 존재를 믿는다거나 의지한다거나 나를 미뤄둔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이 험난한 인류세를 수행과 사유 그리고 연대로서 이해하려는 사람의 지극히 인간을 우선한 해법에 가깝다.

 

 

 

“내가... 나라고 확신하기는 어려워요.”

불교의 ‘무아’란 호류사를 짓던 쇼토쿠 태자 시절에도 만쥬를 그리던 선승의 시절에도 유효했겠으나, 나를 비우는 게 아닌 나를 잃어버리는/갇히는 현세의 무아만큼 무심히 가혹한 벌이 또 있으랴. 예술보다 보수가 먼저 눈에 밟히고, 내가 각인하지 않은 의미로 인해 간신히 만들어낸 작은 무욕의 아름다움이 기어이 내 고기를 구워먹을 불이 되는 세상에서.

혁명가가 된 화실 동료, 옆집의 만화가 지망생, 편의점 알바 선배인 이주노동자의 이름들을 영화는 일부러 적극적으로 호명하지 않는다. 조수를 착취하는 화가 아키모토, 화랑주인 와카쿠사, 바이어 츠치야가 이름부터 밝히며 등장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개중 옆집 사람은 가치 없는 자 살아남지도 먹지도 말라는 자본주의 패러다임의 도덕률을 가장 온전히 체화해버린 이. 그는 다른 두 언더독과 달리 자기만의 투쟁을 정립하지 못했고, 그래서 ‘20%의 개미’가 되길 두려워하며 ‘사와다되기’를 가장 적극적으로 갈망한다. 비워내지 못한 자기 그림이 팔리지도 않는다는 역설을 마주한 그는 결국 사와다의 붕대에 이름을 남긴다. 언제나 가능성뿐인, 매일 스시를 먹자고 조르던, 18%까지 온 것 같아서 무서워하던 요코야마. 그가 잔뜩 지친 사와다에게 건네는 밤 인사는 (뻔하지만) 오기가미 나오코가 지난 세월 동안 동료 시민들에게 꾸준하게 건네오던 다정의 즉각적인 증표다.

오츠카레, 오카에리, 오야스미.

 

 

 

두 청년-이라기엔 늙은-의 얼굴이 지난 세대 일본 문화의 아이콘이던 도모토 츠요시(킨키키즈)와 아야노 고의 나이든 얼굴을 경유해 그려진 것 역시 상징적이다. 부흥의 끝물에 태어나 쇠락의 사이클에 갇힌 은둔 고립 세대를 바라보는 감독의 세심한 우려가 전해져온다.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의 원주율을 읊던 ‘센세’가 결말에선 돌연 삼각형의 정의를 읊게 된 것은 왜일까. 단단한 밑변을 딛고 서서 “나누기 2!”를 지향하게 될 사와다의 미래를 꿈꿔보고 싶다.

작성자 . 유해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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