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2025-10-05 11:14:50
가부장이 열심일 때
박찬욱, <어쩔수가없다>
집필부터 제작까지 십여 년이 걸렸다는 <어쩔수가없다>에서 가장 흥미로운 씬은 어쩌면 나무를 벌목하는 마지막 엔딩 롤의 배경일 것이다. 문 제지의 박선출은 앞서 유튜브에서 ‘원래 있던 나무를 베는 것이 절대 아니’고 ‘제지를 위해 새로 심은 나무를 베는 것’이라며 단언했지만, 크레딧이 지나가는 화면 뒤로 푹푹 쓰러지는 나무들은 끽해야 수 년을 키웠다기엔 의문이 들 정도로 키 크고 우람하다. 정말 제지 공장에서 일부러 만든 숲인지 알 수 없을뿐더러, 사실이 그렇대도 인간의 필요를 위해 그만큼의 면적을 매일같이 없애는 일이 합당하고 필요한지를 되묻게 만드는 것이다.
계급적 우화보단 (심지어 계급적 낙차가 선명한 상황에서도) 멜로적 정취를 두른 아슬한 관계 자체를 더 탐닉했던 박찬욱이 왜 돌연 약자끼리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비추었는지를 두고 관객의 평가는 갈리는 편이다. 하지만 이 벌목 장면을 통해 박찬욱은 오히려 인류세의 끝을 모르는 폭식증과 무한 개발 담론이 사랑하는 가족 안팎에서 어떤 파멸을 초래하고 있는지를, 그러니까 결국 다시 관계의 깔깔하고 야릇한 본질에 관한 전언을 전하는 듯하다.
제지맨 범모, 시조, 선출과 만수는 입을 모아 ‘종이도 일종의 예술’이라고 직간접적으로 예찬하지만 사실 제지를 포함한 인류의 모든 창작은 필연적으로 파괴를 수반한다. 인류는 짓기 위해 부수고 비틀고 옭아매고 파묻고 빼앗고 태우고 죽인다. 곧게 자랄 나무를 두꺼운 철사로 칭칭 감고 완력으로 굽혀두어 희한한 모양새로 굳은 채 자라게 만드는 분재도 사실 식물 그 자체를 사랑하는 이들에겐 끔찍하게 다가올 수도 있는 취미다. 화훼, 원예, 조경에 관심을 둔 사람들과 산림, 수목, 생태학의 접근 방식을 취한 사람들이 나무와 꽃을 보는 관점은 굉장히 다르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기에 극중 미리가 만수를 ‘식물을 사랑하는 식물인간’으로 칭하는 부분은 묘한 거부감을 선사한다. 알고 보니 만수의 친아들이 아닌 시원이 돌연 작은 인형처럼 만수의 분재 화분에 앉은 채 거대한 만수의 시선을 받아내는 장면은 박찬욱이 나무를 미학 아닌 나무 자체로 보는 이들과 같은 믿음을 갖고 있다는 옅은 확신을 준다. 자기만의 테라리움을 꾸미기 위해 작은 온실에 틀어박힌 사람이 그린 나무 그림은 과연 얼마나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을까.
분재는 섭리에 반한다. 섭리란 곧 ‘어쩔 수가 없다’고 밀어붙여오는 자연의 무논리적 논리다. 섭리는 재해다. 인간은 여태껏 이 섭리에 반발하고 공격하고 틈입하는 방법으로 천천히 영역을 넓혀 결국 어느 정도 자연을 해치고 정복했다(고, 재해가 일어나지 않는 평소에는 믿는다). 심지어 언젠가부터는 지극히 인간의 필요를 위해 발명된 논리를 가지고 와 이 또한 ‘어쩔 수가 없’는 일들이라며 이기적이고 사악한 선택마저 자연화하고 합리화하려고 든다. 자연의 섭리가 유지되었다면 인간은 이토록 많이 태어날 일도, 오래 살 일도, 아프면서 오래 살 일도, 서로를 죽이고 면죄 받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 자명한 사실을 모른 체하고 눈을 가린 인류는 섭리를 적극 차용함으로써 이를 극복할 방법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래서 <어쩔수가없다>는 그토록 간악하고 애처로운, 다시 말해 인간다운 전유를 최선을 다해 비꼬며 발가벗기려 한다.
영화는 과히 생태주의적, 반자본주의적, 게다가 페미니즘적이라 해도 무리가 아닐 시선을 계속해서 전개한다. 만수가 면접을 보러 가거나 죄짓고 나무를 심을 때마다 강렬하게 내리쬐는 태양빛에 괴로워하는 건 어딘지 신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카인의 후손을 연상시킨다. 만수는 (세간에서 많이 언급된 대로) <기생충>처럼 같은 계급 내 생존투쟁이 아니라 외부의 더 거대한 힘과 승산 없는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섭리’대로라면 인류가 존속시키지 못했을 또다른 발명품은 가부장 제도와 정상가족 신화다. 제가 만들고 따르는 이상적인 가족의 상이 얼마나 허접한지도 모른 채 지키기 위해 애쓰는 만수의 얄팍함은 영화 내내 조롱당하고 있다.
먼저 포카혼타스와 존 스미스 대위를 따라한 부부 댄스복. 댄스파티의 면면은 미장센의 대가 박찬욱이 조형했다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천박하고 난삽하고 유치하다. 대를 이은 부자도 아니고 태생부터 고급진 아비투스를 공유한 것도 아닌 사람들끼리 ‘더 위’를 어설프게 모방한 사교라서 일부러 더 조악한 코스튬 플레이의 꼴을 취한 것일까. 미리에게 호감을 보이는 오진호 원장을 비롯한 병원 동료들이 미리를 따라 원주민 복장을 준비했다는 언급을 고려한다면 영화 속 세계에서 ‘우리’는 만수와 미리가 아니다. 미국인 존 스미스의 제복을 입은 만수는 잘 지내는 선량한 사람들의 평화를 해치러 온 전형적인 남성-이방인-침략자다.
한편 말하는 건 모두 남들의 메아리에 불과하다는 딸 리원은 그리스신화 속 요정 에코의 노골적 은유다. 서번트 증후군의 첼로 천재인 리원은 오빠인 시원보다도 더 조용한 은신처에 숨어 거의 모든 것을 지켜보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상적인 빈도의 버드뷰에 비해 바닥으로부터의 로우 앵글, 열 살 아이인 리원의 시야와 비슷한 높이의 다다미 숏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 덕에 관객은 시원이 지붕 위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는 알 수 있지만, 마지막 장면 만수가 각고의 노력 끝에 얻어낸 새 일자리로 출근할 때 카메라가 비어있는 개집을 구태여 비출 때는 그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없다. 시투, 리투의 보금자리에 성글게 뚫린 구멍으로부터 섬뜩한 상상이 찾아들 뿐이다. 그곳에 자주 말도 없이 숨어버리던 리원이 만약 어느 밤 아빠의 ‘작업’을 보았다면?
어떤 전승에서 에코는 함께 어울려 자란 님프 자매들과 달리 혼자만 인간 아버지를 둔 필멸의 존재였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그의 노래가 다른 이들보다 더 아름다웠고, 그래서 그만이 멍청하게 인간 남자 나르시스를 사랑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모녀의 운명을 대변하는 듯한 전설은 결국 결말에서 그 ‘인간 아버지’가 자리를 비워야만 제 소리의 ‘원본’을 들려주는 에코의 모습으로써 완성된다.
만수의 아버지가 구제역으로 돼지 2만 마리를 생매장한 후 만수의 온실이 있는 자리에서 자살했다는 선대의 가족사도 심상치 않다. 종합해보면 만수는 태생부터 노동 계급이라기보단 지역 유지의 아들이었다가, 아버지의 몰락과 함께 바닥 계급으로 전락해 ‘평균 10달에 한 번씩 이사할’ 정도로 불안정한 삶을 살다가, 다시 어린 시절의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노가다부터 블루칼라 관리직까지 악착같이 기어올라온 사람이다. 한 번 잃어본 적 있기 때문에 그는 도저히 한 번 더 잃을 수는 없다.
더군다나 그의 모든 ‘어쩔 수가 없는’ 악행에도 불구하고 그는 진정성 있는 패밀리맨이다. 보기 드물게 깊은 가족 사랑은 그의 얼토당토않은 범죄마저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는 것처럼 눈을 가리고 있지만, 어쩔 수가 없었던 다른 20%의 태양 제지 노동자들의 선택은 어떠했는가를 만수는 생각지 않는다. 그에게 유일하게 중요한 과제란 자기 아버지처럼 낙담한 나머지 정신을 놓아버리지 않는 일, 가족들을 놔두고 세상을 등지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할아버지가 돼지를 묻고 아버지가 사람을 묻은 것처럼 아들에게 아이폰을 묻고 지나가는 방법을 가르치고 만다. 가장의 원죄란 ‘어쩔 수가 없이’ 덮어버려야 마땅한 것이다. 방치하거나 파내면 그게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테니까.
이 와중 만수는 바로 옆에서 미리가 보낸 아주 분명한 신호를 자연스럽게 무시하고 있다. 사고 친 아들 시원에게 “너랑 내가 우리집 여자들을 지키는 거야”라고 폼 잡으며 선언하지만 실상 미리가 만수와 아이들, 만수의 가장 어두운 비밀마저도 다 알고 지켜주고 있는 것에 더 가깝다. 댄스파티를 파투내더니 엄한 데다 성내는 만수에게, 미리가 철없고 우아하고 순수한 사모님의 외피를 깨고 내지르는 장면이 있다. “너는 내가 얼마만큼 천치로 보이니?” 뒤따른 부부의 행보는 사실 미리가 그런 ‘바보같이 순진한’ 상상 속의 여자가 아니었단걸, (만수를 포함해) 그런 상像을 바라는 사람들을 위한 역할 수행에 충실했을 뿐이라는 걸 손쉽게 증명한다.
미리는 아빠의 뒤 구린 짓을 목격한 시원의 우려에 직접 땅을 파서 확인하기로 한다. 이때 등장하는 버드뷰 숏에서 미리 등 뒤에 놓인 소중한 저택은 만수가 멀리 호이도에 틀어박힌 선출을 찾아가 피운 모닥불과 중첩되어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직접 눈으로 보지 않으면 불안을 떨칠 수 없는 타입인 여자의 실낱같은 희망도 삽 끝에 정말로 ‘무언가’가 걸림과 동시에 좌절당한다. 그는 수습하기와 수습하지 않기 가운데 선택하는 대신, 완전히 이탈해 수습해야 하는 것을 확인하지 않기를 선택한다. 남편의 은폐와 어딘지 닮아있는 이 회피는 그가 만수를 너무나 사랑해서 차마 죄를 묻거나 버리거나 떠나지 못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만수의 곤란한 기색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나 ‘애 딸린 이혼녀’에게 총각이 구애했단 사실을 언급하는 미리, 긴급한 순간에는 시원을 꼭 ‘우리 아들’이 아니라 ‘내 아들’이라고 부르는 미리. ‘애 딸린 이혼녀’는 사실상 만수를 말짱한 맨 정신의 상태에 잡아두기 위한 자학적 포지셔닝처럼 느껴진다. 미리 역시 한 번 더 잃을 수는 없다. 두 번째 이혼은 그가 누리는 모든 것을, 좋은 집과 적당한 지위, 딸애의 천재성을 뒷받침해줄 재력, 바보처럼 순진한 두 번째 남편의 헌신, 무엇보다도 그가 목숨보다 아끼는 아이들을 다 찢어놓고 빼앗아갈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미리도 ‘어쩔 수가 없다’. 그는 숫자를 내려가며 세어야 할 정도로 징그러운 형벌 같아진 포옹도 간신히 버텨낸다. 품에 안긴 남자의 멍청한 분투가 정말이지 괜한 것이었단 진실을 미리만이 알기에 그가 안쓰럽기도 한 것 같다. 그래서 말해주지만 만수에겐 마지막 애정의 표현마저 제대로 닿지 못한다.
“그렇게 열심히 살지 말지….”
이성민이 연기한 범모 역시 마찬가지로 ‘계급적 전락’을 겪었는지는 생각해볼 여지가 많은데, 먼저 그는 실직한지 몇 년이 지나도 장인의 돈과 집으로 어찌저찌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여전히 아라는 연기 수업과 오디션에, 범모는 알코올 중독에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줄 수 있다. 타자기, 필름 카메라, LP와 최고급 음향기기 등 범모가 저를 ‘아날로그 인간’으로 자랑스레 소개하며 내보인 취미들은 단순히 아날로그일 뿐만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돈을 억 단위로 쓸 수 있는 ‘부자 애호가의 취미’다. 그러니 아라의 말마따나 “당신이 실직해서 문제가 아니라, 실직을 대하는 태도가 문제”였던 것이다.
와이프의 말을 따라 음악카페를 하지 그랬냐든가, 자존심 좀 버리라든가 하는 총 든 괴한의 말에 아라가 온 힘을 다해 동의하는 씬은 영화 최고로 슬픈 코미디다. 그에 범모는 화답하고 만수는 후에 이 말의 메아리를 왼다. “난 제지맨이야!” “종이밥 25년 먹었어. 난 그냥 이렇게 난 사람이야.” 쓸모를 입증하고 자리에 걸맞는 이라는 걸 보이기 위해 만들어진 말, 그래서 가장 현대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인간을 설명하는 말 중 하나가 ‘천직’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이렇게 난 사람’은 그런 ‘천직’의 알레고리에 완벽히 부합하는 자기 수식이다. 당연하게도 자리 잃은 만수는 저보다 더 정통 순혈의 모범 제지맨인 범모의 그런 믿음에 재빠르게 매료된다.
집착처럼 귀애하는 부인을 잃을 수 없다는 불안증과, 실은 관심에서 이미 밀려난 것 같다는 의심은 이미 만수를 덮친 지 오래다. 바닥에 드러누워 소리 없이 오열하며 굴러대는 범모의 붕괴를 목격하며 그에게서 자기 미래를 보고 식은땀 내는 만수는 기이한 동지애랄까 연민을 느낀다(그리고 이 극도로 남성스러운 연민은 범모의 단말마 같은 “씨발년”과 함께 순식간에 나와 같은 관객들이 영화로부터 5km쯤 멀어지게 만든다). 기실 고시조와 박선출까지 만수는 제 경쟁자들에게서 어느 정도 다 자신을 읽어낸다. 그건 가부장이 가족을 구한다는 헛된 믿음에 인생을 내맡긴 남자의 주제넘은 공명이다. 그들을 죽일 때 만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제 속성 - 우유부단함, 실속 없음, 허세와 폭력성 -을 하나씩 제거하려는 것처럼 점점 더 과감하고 프로다워진다.
제가 모든 것을 해결해야만 하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었던 남자의 헛된 자신감은 만수뿐 아니라 미리마저 부수고 만다. 미리는 너무 늦기 전에 경고하려 했다. “당신이 뭔가 안 좋은 짓을 한다면, 그건 나도 같이 하는 거야.” 제 부인과 자식들을 자기 삶의 부속 정도로 여기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짓을 만수는 점입가경으로 해댄다. 결말부, 출근하는 만수를 바라보는 미리의 망연한 눈빛은 이제 절대로 전과 같아질 수 없다. “이제부턴 돈 모을 거야.”라는 선언은 언젠가 남편을 두고 아이들과 떠나기 위함이었을까. 그가 얻을 위안은 인간의 언어로 이해할 수 없는 악보를 그리고 연주하는 딸애의 침묵에서, 아빠가 사람 아닌 돼지를 묻었더라는 거짓말에 쉽게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아들의 유예된 성장에서 온다.
리원은 갓난애 때 술 취한 아빠가 다섯 살배기 오빠를 때렸던 일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아빠가 없고 반려견들이 돌아온 집만이 온전한 가족의 구성이라는 듯 아빠 앞에서는 절대 첼로를 연주하지 않는다. 가족을 평안히 해주기 위해 저지른 모든 무리수가 사실 가족을 가장 안쪽부터 천천히 확실히 망가뜨리고 있었다는 것이 만수의 자만이 부른 비극이다. 어쩌면 시원도 ‘엄마를 쉬게 해주기 위해’ 저지른 짓의 대가를 좀 더 톡톡히 치르는 게 좋았을지도 모른다. 겨우 그런 남자로 크지 않기 위해서라면.
“한 명은 남겨두는 거죠?” 마지막 회사의 면접장에서 절박하게 물은 만수는 바라던 대로 바로 그 한 명이 되어 AI 자동화된 제지 공장에 출근한다. 소란스럽고 사람 냄새나던 첫 장면의 비정한 대구인 이 출근 씬에서 만수는 귀마개를 끼고 위험천만하게 절삭기와 운반 로봇 사이를 누빈다. 완성된 한 롤을 자르는 레이저는 수상쩍게 그의 ‘모가지’가 잘리는 평행선과 이어진다. 어느 날 진짜로 만수의 목이 잘려도, 그가 무인 로봇에 깔려도, 장비가 그의 머리를 덮쳐 으깨도 경고하거나 구해줄 이는 없겠지만 어쩔 수가 없다.
“당신들 다 잘리면 나는 혼자 남아서 누구랑 일합니까?”를 잊고 자신과 동료들을 자른 기업이 선심 쓰듯 제공한 심리치료의 자기최면 요법에 굴종한지 오래니까.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업계에서 좋아하는 말, 부인이 전하려고 애쓰던 진심인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한 귀로 흘린 채 싸움에서 이긴 자만 가족을 지킬 수 있다는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논리에 수긍한지 오래니까. 그러니 정말로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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