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훈2025-10-11 16:27:51
<어쩔수가없다>: 저를 믿고, 극장으로 가세요. 네이버 평점은 믿지마요
<어쩔수가없다> 리뷰
네이버영화
박찬욱 감독은 자신이 만든 영화 중에 가장 대중적이면서 웃을 포인트가 많은 영화라고 말했다. 동시에 박찬욱 감독의 영화인 만큼 이번 영화에서도 디테일이 차고 넘친다. 재미있으면서도 곰곰이 생각할 부분이 많은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박찬욱의 연출이 녹아난 뛰어난 작품성을 지닌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네이버 리뷰 기준으로는 매우 박하다.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이에 대해 나름대로 조목조목 이야기하고자 한다.
“당신 할 수 있어! 다 죽여버려”.
만수가 살인에 이르는 계기는 해고라는 사건을 제외하고는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 재취업 시장에서 유리한 고지를 얻기 위해 자신보다 뛰어난 스펙의 잠재적인 경쟁자들을 제거한 것이 가장 쉽게 납득 가능한 설정이자 이유다. 그래서 아무리 먹고살기 위함이라지만 살인은 너무 과한 설정 아니냐며, 일부 관객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뭐,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그렇기에 현실보다 좀 더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장르적 특성이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 만으로는 관객들을 납득시키기 부족할 수 있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은 만수의 아내 미리를 중요한 영화의 장치이자 인물로 그려낸다.
만수가 선출의 유튜브를 소파에 누워서 보는 장면에서, 아내 미리는 만수에게 한마디 한다. “당신 할 수 있어! 다 죽여버려”. 동시에 미리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정말 미세하게 변한다. 마치, 악마가 보통의 인간에게 속삭이는 모습으로. 짧지만 뭔가 모르게 악마의 표정으로 보인다. 만수는 그녀의 말이 장난인 줄 알지만, 만수의 표정 역시 순간적으로 미세하게 굳어진다.
만수가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이 짧은 순간에, 경쟁자를 죽이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만수의 해고가 아닌 미리의 한 마디가 영화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쩔수가없다 유튜브 cj 공식 예고편 캡쳐)
그리고 이 결정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 시키기 위해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어쩔 수가 없다고 자기 최면을 걸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는 동시에 관객들에 대한 최면이라고도 생각한다. 실제로 경쟁자가 불합격을 하든 없어져야 비로소 내 자리가 유지되는 현실이니까. 보통, 선의의 경쟁이라고 부른다. 사람을 직접적으로 죽이지만 않을 뿐이지 실은 정말 잔인한 경쟁이긴 하다.
박찬욱 감독은 영화를 통해서 선의의 경쟁과 이로 인한 결과의 잔인함이 살인과 막상 다르지 않다는 것을 꼬집고 싶었던 건 아닐까. 관객들은 이 지점에 불편을 느껴 더 이상 몰입하기 싫어진 건 아닐까. 그래서 만수에 대한 감정 이입과 영화의 개연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게 된 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나는 영화적 개연성이 충분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레이디버그
어쩔수가없다는 합리화로 만수의 사람으로서의 양심은 썩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이를 표현한 부분이 그의 썩은 어금니이고 그 위로 무당벌레가 오버랩되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아내 미리의 “죽여버려”라는 말과 “어쩔수가없다”라는 만수의 말을 자기 최면이라고 생각하면 무당벌레가 나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무당벌레는 영어로 레이디 버그라고 한다. 그리고 만수는 제지회사를 다녔던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이상하리만큼 만수가 종이를 사용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자신의 손에 글씨를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내용조차 제대로 말로 풀어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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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후반에는 미리가 만수에게 “당신이 무슨 안 좋은 일을 해도 그건 나도 같이 하는 거야”라고 외치는 장면이 있다. 만수의 행동에 확실하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순간으로 역할한다. 곧이어 만수는 썩은 어금니를 스스로 발치한다. 만수뿐만 아니라 만수네 가족의 양심과 도덕성이 완벽히 사멸하는 마지막 순간이다.
그리고 만수가 집에서 경찰의 조사를 받는 장면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만수에 포커스 맞춰져 있고 미리는 뒤쪽 테이블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두 차례 정도 나온다. 만수가 사실을 말하진 않을까 걱정하는 또는 만수에게 실수해서 사실을 말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을 주는 장면으로 보인다. 후자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정말 뜬금없긴 하지만, 이런 모습을 종합해서 생각해 보면 이상하게도 2명이 떠오른다. 무당을 믿은 것으로 보이는 셀 수 없이 많은 정황들과, 2024년 12월 3일 사람들을 죽일 뻔한 일, 손에 글씨를 쓰고 방송에 나왔던 일, 아내의 입김에 휘둘린 것으로 보이는 여러 의혹들이 있는 양심 없는 윤석열과 김건희 말이다. 이 영화에서 박찬욱 감독이 이들을 돌려까려고 했을 것 같진 않은데. 나의 기분 탓인지. 참 공교롭다.
봉테일만 있나, 박테일도 있다니까.
영화의 시작은 배롱나무꽃이 흩날리고 여러 식물이 무성한 집에서 장어 바비큐 파티를 여는 화목한 만수네가 나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만수는 다 이뤘다는 충만하고 행복한 감정을 드러낸다. 하지만 곧이어 하늘이 보라색에 가까운 색깔로 바뀐다. 그리고선 만수네 가족과 종이가 갈리고 세척되는 모습이 동시에 겹치면서 장면 전환이 이루어진다. 앞으로 만수네가 어떻게 될지 복선을 암시하는 장면이 그려진다. 배롱나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주도에서는 무덤에 심는 나무라며 집안에 심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백일홍이라 여름에 오랫동안 핀다고 한다. 그런데 영화 시작부에서 꽃이 지고 있다니. 영화에서 보인 이들의 행복은 백일홍이 아니라 하루살이에 가깝지 않나 싶었다. 무덤에 심는 나무라는 이야기가 무색하지 않게 만수네 집 마당에 사체가 묻힌다. 영화가 처음부터 커다란 복선을 대놓고 보여줬던 것이다.
(네이버영화)
이야기 흐름상 너무 뻔하지만, 범모가 살해당하기 전 입고 있던 회색 상의 이너에는 해골 그래픽이 그려져 있다. 범모의 삶이 곧, 금방 끝난다는 스포일러를 대놓고 했던 것이다. 만수가 온실에서 나무에 철사를 감싸면서 나무가 자라나는 형태를 잡으려다 나무를 부러뜨리고 마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시조에 대한 복선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시조를 살인하고 나서 처리하는 방법과 같고, 탄피를 흘리고 사건 현장을 떠난 건 나무를 부러뜨리는 실수와도 같으니까.
박찬욱 감독 영화에서 색상은 영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단서로 쓰인다. <헤어질 결심>에서 녹색이 주된 색상이었듯 <어쩔수가없다>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기서는 노란색과 빨간색 그리고 보라색까지 중요한 단서로 쓰인다. 만수가 일했던 태양제지 공장에서 안전을 위해 빨간색은 멈춤을, 노란색은 생각함을, 청록색은 행동을 의미하는 색상으로 쓰인다. 단순히 안전과 관련된 주의를 요하는 색상 정도로 쓰이겠지만, 영화 전체로 따졌을 때 이 색상들은 큰 의미를 지닌 단서다.
특히, 녹색과 적색이 중요하다. 해고당한 만수가 바꾼 차량은 민트 또는 청록 계열의 아반떼다. 겉으로는 만수의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의미하지만, 만수가 앞으로 더욱 행동파로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녹색으로 가득 찬 만수의 온실도 마찬가지다. 온실에서는 만수의 행동만이 존재할 뿐이다. 서재 대신 온실은 앉아서(멈춰서) 생각하는 것 대신 나무를 만지고 가꾸는 등 만수의 행동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다. 물론, 만수에게는 온실이 서재의 역할이기도 하겠지만. 만수가 경쟁자들의 이력서를 속아내는 장면에서도 청록색에 가까운 상의를 입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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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록색 못지않게 적색도 많이 나온다. 실제로 중요한 일들이 벌어지는 장소에는 적색과 청록색이 항상 같이 등장한다. 범모가 죽는 장면에서는 만수의 청록색과 빨간색 장갑 그리고 아라가 입은 상하의 색상이 그렇다. 시조가 살해당하는 장면에서는 초록빛의 바다와 적색으로 포장된 도로가 한 화면에 잡힌다. 선출이 살해당하는 장소에서는 선출이 빨간색 상의 이너와 청록색에 가까운 아우터를 입고 있다.
만수가 아들에게 녹색 담뱃갑과 적색 라이터를 넘겨주는 장면도 있다. 적색과 청록색은 만수의 살인 또는 도덕성과 관련되어 있다. 만수의 제지공장에서 나왔던 색상의 의미에 따르면 적색과 청록색이 화면에 같이 잡힐 때 만수의 행동은 ‘멈춰야 될 행동’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살인도 멈췄어야 하고, 아들에게 담배를 건 네는 것도 멈췄어야 될 행동들이다.
보라색은 만수의 행동과 만수네가 버린 양심으로 초래하게 될 암울한 미래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만수가 재취업한 자동화된 제지 공장 내부를 보여준다. 만수의 빨간색 안전모와 보라색 종이가 만들어지는 모습이 보인다. 재취업에 성공한 만수지만, 자동화 시스템에 의해 얼마 지나지 않아 만수의 재취업 생활이 멈출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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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부심 넘치던 25년 제지 경력의 빨간색 마침표가 찍어지는 순간도 의미하지 않았을까 싶다. 태양제지 공장에서 완성된 종이를 나무 몽둥이로 힘껏 두드렸던 모습의 만수는 없고, 자동화 공장에서 허탈한 듯 조금은 힘 빠진 모습으로 완성된 종이를 두드리는 그의 모습도 대조적으로 느껴졌다.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재취업에 목숨을 걸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 만수가 집어 든 빨간 고추 화분은 만수의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엇나간 남성성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각본집에서 볼 것 같은 이야기들.
<기생충> 박 사장네 아들이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렸던 것처럼, 만수의 딸이 알아볼 수 없는 악보를 그린 것. 가족들이 이 둘 각각을 쉽게 이해하지는 못한 것. 각 영화에서 펼쳐진 사건들의 진실을 알고 있을 수도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박 사장네 아들과 만수의 딸은 비슷한 캐릭터로 위치하고 있다.
만수의 집을 보러 왔던 동호 아빠와 미리 사이에 거래 관계가 있진 않았을까. 동호 아빠가 만수의 집을 보러 왔을 때, 미리를 응시하며 침대 매트리스가 좋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때 미리는 마치 잠자리에 대한 대가로 돈을 요구하는 듯한 뉘앙스로 매트리스도 판다고 말한다. (미리는 돈이 필요하니까.) 중후반부에서도 이들의 관계를 암시하는 장면이 있다. 미리가 아들의 휴대폰 도난 사건으로 동호 아빠와 이야기를 할 때, 브래지어를 벗고서 동호 아빠를 만난다. 우리가 일종의 거래 관계를 맺었으니, 한 번만 봐달라는 식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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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만수가 등장하는데, 동호 아빠가 미리의 옷차림 때문에 만수와 벌어질 수 있는 문제를 차단하기 위해 미리에게 어정쩡하게 신호를 준다. 굉장히 밀접한 관계인 듯 말이다. 이들의 대화가 끝나고 미리가 자리를 떠날 때 동호 아빠에게 이제 집은 팔지 않는다고 말한다. 둘의 거래 관계가 이제 끝이라는 듯 말이다. 만수의 실직으로 인해, 가정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아 생활비 명목으로 동호 아빠를 이용한 건 아닌가 의심된다.
미리는 연하의 치과 원장과도 비슷한 관계에 있었을지 모른다. 치과 의사가 만수의 어금니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고, 자녀들의 하교 시간까지 알고 있다. 미리에 대한 스킨십과 아이를 차에 태우는 모습 그리고 무도회장에서 춤도 추지 않았나. 몇 번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지만, 이 둘의 관계를 추측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보통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친밀하지 않는 이상 말하지 않는다. 치과 의사라는 안정적인 돈벌이에 연하니까 동호 아빠와 달리 잠깐 바람을 피진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이런 모습을 기반으로 하면, 미리는 위태로운 가정의 경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부부 관계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게 되는 인물이다. 또는, 불안정한 가정 상황을 핑계로 평소 눌러왔던 자신의 욕구를 어긋난 방식으로 표출한 인물일 수도 있겠다. 마치, 만수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살인을 하면서까지 재취업을 하고자 행동한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의도가 좋고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것일까? 그런 모호함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한 것 같다.
박찬욱이 그린 보드랍고 아름답고 거친 자본주의 제로섬 게임. 뫼비우스 띄라는 자본주의, 인간 벌목의 현장에서 아득바득 살고자 하는 우리들. 노동자. 어쩔 수 없는 걸까, 어쩔 수 없게 된 걸까 아니면 앞으로도,
어쩔수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