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신고

댓글 신고

고미2025-10-15 01:00:32

묻고 자라나는 순환적 비극

<어쩔수가없다> 리뷰

 

‘어쩔수가없다’라는 주문을 외우는 이들 

실업이 문제가 아니라, 실업을 대하는 태도가 문제이다.

 

 

 

사람은 넷, 자리는 하나

25년간 몸담은 회사에서 장어를 선물받자마자 해고당한 만수. 화장실에서 바짓가랑이라도 붙드는 엄청난 굴욕을 맛보기까지 한다. 그렇게 만수는 자신의 경쟁자를 모두 죽이겠다는 결심에 서게 된다. 제지업계에서 잘나가는 선출을 죽이려고 미행을 하지만, 이내 곧 선출만 죽여서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깨닫는다. 그렇게 살해를 위해 들어 올렸던 고추 화분에서 이름을 따와 ‘레드페퍼’라는 가상의 일자리를 만든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경쟁자 범모, 시조, 그리고 마지막 선출을 꼽는다. 부조리한 시스템 위 ‘어쩔수가없다’는 신념에 사로잡힌 가장, 만수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신을 죽이는 행위

범모는 만수와 닮아있다. 특수제지를 만드는 자부심, 펄프맨, 알코올 중독, 아내가 외도 중이라는 의심과 같은 많은 부분에서 도플갱어로 느껴질 정도이다. 살해하려는 목적과 다르게 측은지심을 느끼고, 관찰 도중 ‘뱀’에게 물린다. 범모의 삶을 꾸준히 관음하며 일상생활에서 그의 말을 미러링하여 직접 뱉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어쩔수가없다’를 되뇌이며 범모 앞에서 총을 든다. 이는 만수 자신을 죽이는 행위처럼 보인다. 아라의 외도남으로 오인받으며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미숙하던 살인에서, 얼굴과 신분을 드러낸 채 전문적인 질식사를 꿰하기까지. 범모와 시조의 죽음이 헛된 죽음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아이러니한 신념으로 9년간 지켜온 금주를 깨고 ‘개’가 된다. 선출을 죽이기 전, 고통스러운 치통을 주던 충치를 마침내 뽑아낸다. 세 차례의 살인을 통해 결국 자신의 모습을 죽이고 낙원이 아닌 어둠을 향해 나아간다. 

 

 

 

묻고 그 위에 자라나는

만수가 범죄를 저지를 때, 아들이 휴대폰을 훔치는 장면을 교차 편집된다. 이를 통해, 할아버지 - 만수 - 아들의 사이클이 형성된다. 참전용사인 할아버지는 창고에서 목을 매달아 돌아가셨으며, 만수는 그 자리에 온실을 세웠다. 드넓은 땅에 2000마리가 넘는 돼지를 묻었던 행위, 할아버지가 베트남전에서 가져온 북한제 총구로 경쟁자를 처단하는 현재의 만수. 그리고, 만수가 시체를 처리하는 모습을 본 아들은 친구와 함께 또 어떠한 일들을 벌일까. 비극적인 범죄의 씨앗을 묻어둔 그 집, 그 자리엔 사과나무가 자라난다. 그리고, 만수 네 가족은 자신들을 마치 미니어처처럼 바라보게 된다. 모든 것을 알지만, 아닌 척하며.

 

 

 

영원한 내리막길

만수는 아내를 끌어안으며 1분을 내려가면서 말고, 올라가면서 세어달라고 부탁한다. '다 가진 것 같다'던 만수는 표면적으로 낙원을 복구시켰지만, 다시는 낙원에 발을 들일 수 없으며, 카운트가 내려가듯 끝이 보이는 삶만이 기다리고 있다. 아들과 와이프는 다시는 바비큐를 먹기 싫을 것이고, 딸은 끝끝내 만수에게 연주를 들려주지 않을 것이다. 만수와 미리의 한탄을 앵무새처럼 따라 말하면서.

 

 

 


쓸모있는 인간에서 쓸모없는 인간으로

'나는 기술자다. 종잇밥만 25년이다.‘

그 자부심 하나로 제지회사에 재취업을 하려고 한 만수이지만, 이젠 모든 과정에서 AI, 기계가 대체하고 있다. 완전 범죄로 마무리 짓게 된 만수는 기계를 확인하는 관리자로 취업하게 된다. 예전처럼 봉으로 두드릴 필요가 없는 과정에서도, 지나가며 한 번이라도 두드려 본다. 압도적으로 거대한 공장 속에 자그마한 단 한 명의 인간이 남는다. 어둠은 다시 드리우며, 비극의 미래를 암시한다.

 

 

 

 

박찬욱 감독이 20년간 숙원하던 작품인 '어쩔수가없다'를 지금에서라도 만들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하다. 자본주의의 순환은 세대가 바뀌어도 동일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부조리하고 차가운 현실 위에 놓인, 한없이 연약한 인간에 대한 연민이 바탕에 깔려있다.

작성자 . 고미

출처 . https://brunch.co.kr/@gomi2ya/22

  • 1
  • 200
  • 13.1K
  • 123
  • 10M
Comments

Relative contents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