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별2021-06-03 16:20:12
유년시절 꿈꿨던 환상 속 이야기 영화 《이웃집 토토로》
엄청나게 폭신폭신할 것 같은 영화 《이웃집 토토로》. 어렸을 적 토토로 같은 거대하고 폭식한 생명체 배 위에서 굴러다녀보고 싶은 로망이 있었던지라 영화 《이웃집 토토로》는 언제나 나에게 유년시절을 기억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영화 《이웃집 토토로》 시놉시스
숲속에 살고 있는 특별한 친구를 만났다!
도시를 떠나 시골로 이사 온 ‘사츠키’와 ‘메이’는 우연히 숲속에 살고 있는 신비로운 생명체 ‘토토로’를 만나 신비한 모험을 함께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의 병원에서 위태로운 소식이 도착하고 언니 ‘사츠키’가 정신없이 아빠에게 연락을 취하는 와중에 ‘메이’가 행방불명 된다.
유년시절의 환상을 표현하다
누구나 유년시절 숲속에서 놀아보진 않았더라도 학교 앞 운동장이나 공원에 무언가를 숨겨놓고 보물게임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놀다보면 무엇인가 만나지 않을까 하는 환상을 같기 마련이다. 실제로는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날 수 없겠지만 이웃집 토토로에서는 그 유년시절의 환상을 채워주고 있었다. 이웃집 토토로가 어린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이유는 어렸을 적 자신들의 환상을 채워주는 작품이어서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메이는 정원에서 놀다가 귀여운 작은 토토로들을 만나 쫓아가면서 나무 동굴 속에 들어가게 된다. 이 장면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모습이 생각나는 부분이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평소 루이스 캐럴의 작품을 좋아했다는 것을 보면 아마 이 장면을 통해 오마주를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린 아이들의 불안을 다루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의 일상을 주로 다루고 있지만 영화 후반부에서는 어린아이들의 불안감을 전체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긍정적일 것만 같았던 사츠키와 메이의 모습에서 엄마의 퇴원이 늦어지고 병원에서 엄마의 상태가 나빠졌다는 전보를 듣자 ‘싫어!’, ‘안돼’, ‘무서워’ 등 부정적인 단어를 내뱉기 시작한다.
그리고 엄마와 떨어져 있다는 것에 한계를 느끼는 듯 직접 찾으러 나가는 무모함까지 보인다. 부모의 존재가 어린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것인지 부모의 부재가 아이들에게 분리 불안을 안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언젠가는 부모와 분리될 아이들
메이의 불안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영화를 끝을 맺지 않는다. 메이를 찾은 사츠키는 고양이 버스를 타고 어마의 병원으로 향한다. 엄마의 부재로 불안감을 느끼던 자매는 엄마를 보러 바로 달려갈 것이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토토로와 함께 나무 위에서 엄마와 아빠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엄마가 얼른 나았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꽃을 창가에 선물로 두고 집으로 돌아간다. 엄마의 부재로 분리불안을 느끼지만 그 과정 속에서 성장한 자매들이 언젠가는 부모로부터 독립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렸을 적 봤던 영화 《이웃집 토토로》는 그저 귀여운 토토로를 보면서 어쩜 이렇게도 귀여운 생명체가 있을까 했었는데 다시 보니 어린아이들의 감정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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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락한 것들에 대한 재판
한 남자가 외딴 산장 다락에서 떨어져 죽었다. 처음 발견자는 개와 산책을 나갔던 시각 장애인 아들. 집에는 엄마가 혼자 있었다. 이것은 사고일까 자살일까 살인일까.
일반적인 추리물은 사건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역학관계를 짜 맞춘다. 그러다 보니 종종 '트릭'이 얼마나 촘촘하게 잘 짜여있는지, 또 그것을 어떻게 기가 막히게 파헤치는지에 집중한다. 거기엔 사건에 대한 깊이 있는 사색이나 고찰은 별로 없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어느 가난한 종이 주인의 학대를 이기지 못해 살인을 했고 감옥에 가는 게 두려워 자기가 하지 않은 것처럼 꾸몄다면, 결국 그 종이 어떻게 살인을 했는지 트릭을 찾아내는 것이 대부분의 추리물이다. 그것이 재미있고 자극적이니까. 다 해결하고 나서야 미국식으로는 잠깐 플래시백 해서 범인의 과거를 보여주며 씁쓸한 마무리가 되거나, 일본식이라면 추리해 낸 괴짜 주인공이 범인에게 일장 교훈연설을 하며 범인의 눈물을 쏟게 만들면 끝난다. 거기엔 그 사회는 왜 종과 주인이라는 계급이 존재하는지, 그들은 원래 그런 성격인 건지 다른 이유로 사이가 점점 틀어진 것인지, 사회적으로 해결할 방법은 없었는지, 살인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그 둘의 문제에 관심은 가졌을지에 대한 전방위적인 생각은 할 겨를이 없다. 그럼 스토리가 지루해지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추리 마니아들은 미스터리 커뮤니티나 방탈출 게임 등으로 아예 서사는 없애고, 트릭을 만들고 추리하는 것을 즐긴다. 그렇게 장르물을 즐기는 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모든 장르물은 장르성이 강해지면 사람보단 사건이 두드러지게 마련이니까.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 되면 달라진다.
쥐스틴 트리에 감독의 <추락의 해부>는 처음엔 평범한 추리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부부 사이 이면에 감춰진 몰락한 관계와 감정에 대한 이야기이며 사건을 논리로만 바라보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 남녀의 이념갈등에 대한 은유도 들어있다.
해부
독일인인 유명한 소설가이자 번역가 산드라(산드라 휠러)는 자신이 살고 있는 프랑스 외딴 산장에서 그녀를 찾아온 여학생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다락에서 큰 음악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아들인 다니엘(밀로 마차도 그라너)은 안내견 역할을 하는 개 스눕(메시)과 함께 산책을 나간다. 음악소리는 점점 커지고, 그녀는 남편이 일부러 인터뷰를 방해하는 것 같다고 하며 인터뷰를 중단한다. 잠시 뒤, 다니엘이 산책에서 돌아오자 다니엘의 아빠, 프랑스인 사뮈엘(사뮈엘 테이스)이 집 밖 마당에 쓰러져 죽어 있다. 사뮈엘의 직접적인 사인은 길고 단단한 무언가에 머리를 세게 부딪히게 되어 두개골 손상으로 죽게 된 것이지만, 그 손상이 된 원인을 찾기가 힘들었다.
사건의 초기에는 직접증거를 토대로 추론을 해나간다. 예를 들어 어떤 여성이 교통사고 후 두개골이 골절되어 식물인간 상태로 치료받다가 폐렴에 걸려 사망한 일이 있었다고 하자. 그럴 경우 직접 원인은 폐렴이지만, 폐렴의 원인인 두개골 골절, 두개골 골절의 원인인 교통사고, 그 교통사고의 의도성까지 사망진단서에 기재하며 병인 폐렴으로 죽었지만 사인은 '병사'가 아닌 '외인사'가 된다.
<추락의 해부>에서 산드라가 사뮈엘을 죽였다고 생각하는 검사는, 어떤 방식으로 그녀가 죽여야 사망현장처럼 되는지 시뮬레이션을 통해 사건을 재조립한다. 산드라 측에서는 자살 혹은 사고로 떨어졌을 경우에도 그럴 수 있다며 다양한 증거들과 시뮬레이션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추리로 사건의 원인을 정말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산드라는 유력한 용의자지만 또한 그녀가 범인이라는 증거도 불충분하다. 살해에는 살해의 동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 동기가 부족했다. 그러던 중 다니엘이 사건 당일 산책 나가기 전 부모가 대화하는 것을 들었다는 증언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다니엘이 증언과 다른 지점이 밝혀지며 사건의 해부는 다른 양상으로 흘러간다.
[이하 스포일러 포함]
실험
처음에 다니엘은 집 밖 창문 밑에서 부모가 일상적인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었다. 하지만 경찰들의 실험 결과, 당시에는 음악이 크게 틀어져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일상적인 목소리 톤으로 이야기를 하면 들을 수가 없었고 그건 집 안에서만 가능했다. 그제야 다니엘은 자기가 위치를 착각했다고 말을 바꾼다. 사실 정황을 보건대, 다니엘은 기둥마다 다른 테이프를 붙여놔 구분을 하는데 시각장애인인 그가 테이프를 혼동하긴 힘들어 보인다. 그렇다면, 다니엘은 엄마가 살인자로 몰리게 되지 않길 바랐기 때문에 둘이 언성을 높여 말하는 혹은 싸우는 소리를 일상적인 대화를 했다고 말을 바꿨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에 검찰과 변호사는 다양한 방식으로 부부관계를 해부하기 시작한다. 직접증거는 나오지 않으니, 정황증거, 즉 살인의 동기와 자살의 동기를 각각 파헤친다. 다니엘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줄 것을 우려했던 재판부는 다니엘이 이후의 재판은 참석하지 않기를 권고했지만, 다니엘은 부모 관계의 진실을 듣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 재판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생각보다 그들의 골이 훨씬 깊었던 것이다.
부부싸움을 하는 집은 꽤나 흔하다. 부부싸움은 서로를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상처를 제일 깊게 건드린다. 부부는 위태로운 실로 연결되어 있으며,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너무 쉽게 부서져버릴 수 있다. 하지만 싸운다고 해서 그것이 살인을 했다는 증거가 될까? 사뮈엘의 녹취에 들어있는 둘의 싸움은 관계가 몰락해 가는 끔찍한 과정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이 사람을 죽이는 정도인지는 의문이 든다.
산드라는 다니엘에게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된다'라고 말하지만, 다니엘이 있는 그대로 말한 것들은 다 산드라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결국 아들 다니엘은 마지막 증언을 신청한다. 그리고 그 변론이 있을 때까지 엄마와 떨어져 있는 것을 선택한다.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지만, 이것은 다니엘이 영특하게도 엄마를 구하기 위해 한 행동 같다. 수사 초반 자신의 어설픈 둘러댐이 '경찰의 실험'으로 들통나고 엄마는 점점 살인범으로 몰렸다. 있는 증거 없는 증거 다 끌어모아 변론을 하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무언가 실험을 통해 주장을 확증받는 게 필요했다. 엄마가 가고 난 후 다니엘은 아스피린 10알을 스눕에게 먹이고, 스눕이 쓰러지자 토하게 만들어서 그 냄새와 스눕의 상황이 그때와 비슷하다며 울먹인다. 스눕이 그때도 똑같이 지금처럼 쓰러졌었는데, 아빠의 아스피린이 들어간 토사물을 먹었던 것 같다고.
사뮈엘이 토한 토사물에 아스피린이 10알 정도 있었다는 건 앞에서 볼 때 굉장히 흐릿한 기억 속에서 나온 몇 가지 이야기를 짜 맞춘 느낌이었다. 아스피린은 실제로 수십 알을 과다복용하면 인간에게도 치명적이다. 엄마가 가고 난 후 스눕에게 아스피린을 먹이는 실험을 한 것으로 보면, 다니엘은 처음부터 그날의 증언을 하려고 했다. 그럼 왜 엄마를 내보냈을까. 그날 사뮈엘이 정말로 아스피린을 먹고 토한 것인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그런 심각한 일이 있었다면, 사뮈엘이 죽었을 때 바로 자살시도가 있던 사람이라는 게 생각나야 했다. 지금까지의 '사뮈엘의 자살시도' 증언이 조그만 실제 정황으로 엄마와 변호사가 말을 맞춰서 만들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감시자가 있기 때문에 엄마와 말을 맞출 수가 없다. 그러면 가짜 실험을 위해서 엄마가 주변에 없는 것이 더 낫다.
다니엘은 결국 실험으로 자신의 마지막 증언에 무게를 더했다. 아스피린을 먹고 아픈 스눕을 동물병원에 데리고 아빠와 갔다 오면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자신은 자살이라고 생각한다고. 생각해 보면 조금 이상하다. 사뮈엘이 자살까지 하려고 아스피린 수십 알을 먹고 토할 정도였다면, 그날 스눕보다도 아빠가 병원에 가서 투석 치료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굉장히 멀쩡하게 차를 운전하는 모습으로 회상씬이 나온다. 하지만 지금은 판결을 내리기 직전이고, 다니엘의 증언은 실험을 더해 논리보단 감성으로 참심법관들에게 전해졌다. 결국 산드라는 무죄가 된다.
다니엘은 성경에 나오는 이름인데, 특별한 지혜를 가지고 꿈을 해석하는 인물이다. 그 이름의 뜻은 '하느님은 나의 심판자'라는 뜻이다.
관객
프랑스는 중요 형사사건에서 참심제를 하고 있다. 참심제란, 일반 시민이 단순한 의견을 내는 배심원이 아니라 형량 선고까지 내릴 수 있는 참심법관으로 임명되어 재판하는 제도다. 재판에 참심법관은 9명, 법관은 3명이 참여한다. 법률 전문가에게는 법적인 논리 등이 중요하지만, 참심제에서는 아무래도 일반 시민이 참심법관으로 참여하므로 감정이나 정황에 호소하는 것이 재판에 유리할 때가 많다.
그래서인지,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이 재판은 치밀한 법적 공방보다는 점점 자극적인 내용으로 흘러간다. 검사는 산드라의 과거 소설들이 실제 그녀 주변에 일어났던 사건과 유사하다며, 이와 비슷한 사건이 소설에 있었으니 그걸 그대로 실행하려 한다고 압박한다. 법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지켜보는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흥미로운 데다 일반 시민으로 구성된 참심법관들도 혹할만한 내용이다. 재판을 참관하러 온 사람들은 사뮈엘의 죽음에 슬퍼하거나 산드라의 억울함에 안타까워하는 게 아니라, 마치 재미있는 리얼리티쇼나 미스터리 법정 수사극을 보는 듯 웃으며 관람한다. 이미 산드라의 재판은 프랑스의 구경거리다.
여기서 살인자가 되느냐 아니냐의 갈림길에 놓인 주인공들을 제외한 다른 시민들의 모습은, 범죄 콘텐츠를 대하는 우리들의 모습과 닿아있다. 우리도 어느새, 이 영화를 보면서 산드라가 정말 사뮈엘을 죽였는지, 죽였다면 어떻게 죽였는지에 더 신경을 쓰며 그들의 아픔조차 즐기고 있지 않았던가.
다니엘은 마지막 증언에서 '어떻게'보다 '왜'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이 사건은 산드라가 살인자면 배드엔딩이고 사뮈엘이 자살이면 해피엔딩이 아니다. 그 반대도 아니다. 둘 다 부모사이의 관계가 몰락하면서 생긴 너무나 슬픈 결말인 것이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옭아매긴 했어도, 만약 자살이라면 사뮈엘의 감정이 무너지게 된 것에 산드라의 책임도 있으니까.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 당사자들의 아픔이나 사건이 일어나게 된 큰 원인을 뒤로한 채 사고 자체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나 그 원인이 사회나 정치적인 문제라면 사건의 '왜'를 더욱 축소하고 은폐하고, '어떻게'만 말하려 하기도 한다. 만약 산드라의 변호인 쪽이 '사뮈엘은 사고사였다'라는 걸 가닥으로 잡고 주장했다면, 판결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참심법관인 일반시민이 볼 때 그런 행동은 자신의 책임을 완전히 회피하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가 아니라 왜. 이 말은 이 재판을 지켜보는 침심법관에게, 프랑스 시민들에게, 또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뱉는 따끔한 일갈이다.
이념
영화의 불어 원제인 <Anatomie d'une chute>는 중의적인 제목이다. 프랑스어 Chute는 영어 Fall에 해당하지만, Chute는 여성형 관사 une이 붙은 여성형 명사다. 즉 이 제목을 프랑스어로 들으면 여성인 산드라가 해부당할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을 준다. 하지만 영어인 <Anatomy of a fall>에선 그 느낌이 없다. 게다가 한국어 제목인 <추락의 해부>까지 오면, Chute나 Fall이 가지는 중의적 뜻인 '몰락', '패배', '타락', '죄'등의 뉘앙스가 없어진다.
이처럼 언어가 주는 뉘앙스에 대해서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심지어 재판에서, 산드라의 변호사는 산드라에게 '진실을 전하고 싶을 때는 꼭 프랑스어로 이야기하라'는 식으로 말한다. 하지만 산드라는 프랑스어를 영어만큼 잘하지 못한다. 결국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영어로 이야기하고 법관들은 통역 이어폰을 끼고 듣게 된다. 또 프랑스인인 사뮈엘과 독일인인 산드라는 서로의 언어가 아닌 영어로 소통하는데, 이것은 남녀 서로가 자신의 고유한 언어가 아닌 방식으로 서로 맞춰가며 말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언어에는 철학과 이념이 깃들어있다. 어느 한 언어로 말하는 것은 완벽하지 못하면 그 뉘앙스를 제대로 번역할 수가 없다.
언어와 소통의 어려움, 산드라와 다니엘의 관계나 재판의 과정은 가부장제와 페미니즘 간의 대립을 은유하고 있다. 마치 몰락한 가부장제를 페미니즘이 죽였다고 재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은가?
사뮈엘은 산드라가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고 말한다. 시간, 꿈, 섹스까지도. 그는 산드라가 괴물 같다고까지 말한다. 또 산드라는 산드라 나름대로 억울하다. 산드라는 사뮈엘의 나라인 프랑스에 살기 때문에 내내 모국어인 독일어를 쓴 적도 없다. 다니엘이 시력을 잃어버린 사고는 사뮈엘의 잘못이 있다. 섹스를 거의 하려 하지 않으니 외도를 한 거라고 한다. 둘은 각자 나름대로 배려했지만 상처 입었고, 사회적으로 산드라는 점점 잘 나가고 사뮈엘은 스스로 몰락해 간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랑이다. 산드라는 아들 다니엘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이든 아빠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돌이켜보면 모든 것은 사뮈엘이 좋아서 자처한 일이었고, 소설을 포기하고 아이디어를 넘겨준 것도, 사뮈엘을 돌보겠다고 한 것도, 프랑스에 와서 산장에서 살게 된 것도 사뮈엘이 결정한 일이다. 사뮈엘은 누구의 탓도 아닌 스스로 그런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누구보다 사뮈엘 자기 자신이 그것을 가장 잘 알았을 것이다. 산드라에게 분노를 표출하지만, 그것은 산드라를 향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 자신을 향한 분노이기도 했다.
극단적으로 해석하면 가부장제의 몰락에 대한 페미니즘의 재판처럼 보이지만, 또한 이것은 완벽한 미러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산드라와 사뮈엘은 통상적인 남녀역할이 완전히 바뀌어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보면, 사뮈엘의 외침은 바로 여성들이 외치던 말이다. 여성들은 집안일에 치여, 자신이 원래 하고 싶던 꿈은 하지도 못한 채, 바람이나 피우는 남편 뒷바라지나 하고 살았다. 결국 이 영화는 가부장제를 깔아뭉개거나 페미니즘을 올려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생기는 비극을 이해하자고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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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의 해부>는,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들이 아니라 해부해야 볼 수 있을 정도로 깊은 곳에 감춰져 있다고 말한다. 그곳에 우리가 미처 몰랐던 사건의 이유들이 숨어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 몰락하기 전에, 그 이유들을 조금이라도 바라볼 수 있다면 비극을 피할 수 있을까?
어떻게가 아니라 왜. 다니엘의 말이 자꾸만 귀에 맴돈다.
*개의 이름이 스눕이라고 하면, 사실 바로 떠오르는 이름은 미국 힙합의 전설 스눕독이다. 스눕독 역시 1집이 나올 당시 살인사건에 연루되었고, 살인자라는 비난을 받으며 재판을 몇 년이나 한 끝에 무죄판결을 받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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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와 과거의 다정한 조우
작년 가을. 회사에서 일하다 엄마의 연락을 받았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주섬주섬 상황을 알리고, 며칠 자리를 비울 준비를 했다. 장례식 기간 특별 휴가, 장례식이 끝나면 부모님 댁으로 같이 가기 위해 하루 연차를 더… 자리 비우는 동안 일은 이렇게 저렇게 대신 부탁드려요.
침착하게 처리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화장실 칸에 들어가 아주 잠깐이나마 혼자가 된 순간 목에서 울음이 솟구쳤다. 어떤 울음은 구토처럼,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구나. 아직은 안 돼, 아직 울면 안 돼,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울음을 다시 집어넣고 장례식장으로 갔다. 핸드폰으로 각종 예매와 약속을 취소하면서.
그때 취소한 예매 내역에 <쁘띠 마망>이 있었다. 좋아하는 감독의 신작을 두근두근 기다리고 있었지만, 개봉하고 한참이 지나 보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극장엔 나뿐이었고, 더욱 공교롭게도 영화의 주인공 '넬리'가 처한 상황이 나와 거의 비슷했다. 비로소 울음을 참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었다.
영화는 주인공 넬리의 할머니가 돌아가신 직후의 상황에서 시작한다. 넬리는 할머니가 계셨던 병원의 노인들을 하나하나 마주하며 성실하게 인사를 하고 병원을 떠난다. 넬리의 엄마 마리옹은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넬리를 데리고 할머니의 시골집으로 향한다.
넬리는 인사성이 밝다. 할머니가 계셨던 병원을 떠나면서 한 사람 한 사람과 눈 맞추어 인사하는 모양새로 보아, 일상적인 인사를 제법 성실하게 채워온 것 같다. 넬리는 사려 깊은 아이처럼 보인다. 운전하는 엄마의 입에 과자를 넣어준 후 주스 빨대도 물려줄 만큼.
그럼에도 넬리는 결정적인 작별 인사를 건네지 못했다. 결정적인 순간의 마지막 배려를 할 수 없었다. 매일 최선을 다해도 모든 순간을 다 거머쥘 수는 없다. 사실 마지막 인사를 잘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마지막은 늘 처음일 수밖에 없으므로. 그때가 마지막이었다는 것도 뒤늦게야 알게 되므로. 이별은 예고하고 찾아오지 않으니까.
우리는 이별 후에야 그 평범했던 행위들, 무심코 지나치는 게 당연했던 모든 순간을 안타까워한다. “마지막일 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로 남는 후회의 문장들. 인사를 할걸. 화를 내지 말걸. 손을 잡아줄걸. 전화를 할걸. 가슴 치게 만드는 것들은 언제나 작고 사소한 일들이다. 빈 병실에서 창밖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를 막 떠나보낸 마리옹의 마음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넬리의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인지, 숲의 마법인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시간 속에서 한 채의 집을 두 채로 이어 붙여, 못다 한 작별의 시간을 갖는다. 이 시간은 기적, 어쩌면 꿈, 염원이다. 넬리와 ‘쁘띠’ 마리옹의 만남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영화는 구태여 설명하지 않는다. 기적이란 원래 그렇게 설명할 수 없이 일어나는 거니까.
기적과 이별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이리라. 예고 없이, 설명할 수도 없이 찾아온다는 것. 그 뒤에 붙는 모든 해석은 다 어떻게든 수용해 보려는 노력의 일환이라는 것. 실은 그저 닥쳐온 일을 받아들이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것.
이 기적은 모든 순간 위로가 된다. 훗날 자신에게 탄생을 줄 이의 생일을 친구로서 같이 축하하며 노래를 부르고 케이크 촛불을 부는 것도. 숲속의 집을 같이 지어 올리고, 보트의 노를 같이 저어 가고, 소꿉놀이 같은 연극을 같이 하고, 앞으로 자신을 먹일 어떤 이와 함께 핫케이크를 만드는 일도.
정작 현실에서 못다 하고 왔던 인사는 이곳에서도 스치듯 건네게 된다. 그렇지만 괜찮다. 지금이 마지막 순간이라고 인지한 채로 마지막을 맞이하는 순간 깨닫게 될 테니까. 사실 “마지막인 줄 알았다면…” 뒤에 붙는 ‘~했을 텐데’의 말은 큰 의미가 없었다는 걸. 다시 돌아가도 우리는 케이크 촛불을 불고, 같이 집을 짓고, 같이 보트의 노를 젓고, 그렇게 일상적 행위들로 시간을 살뜰히 채울 것이다.
그러니까 “마지막인 줄 알았다면 그렇지 않았을 텐데…” 그 말 뒤에 붙는 모든 말들은 사실 어떤 행위에 대한 후회가 아니다. 좀 더 같이 있고 싶었다는, 지금이 마지막이 아니길 바랐다는 솔직한 마음이다.
너무 가까워서 불러보지 못한 이름들이 있다. 엄마의 이름처럼. 이 영화는 시간을 이어 붙이는 마법으로 그 이름들을 조명한다. 할머니는 넬리의 이름에서 증조할머니를 떠올리고, 넬리는 엄마의 이름을 마리옹이라고 불러 본다. 이름을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수 있구나. 아주 오랫동안 불러보지 못한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미래와 과거는 그렇게 다정하게 조우한다. 미래가 과거를 닮는 것 같지만 과거도 미래를 닮는다. 이 영화 이후 “안녕 Au revoir”라는 인사는 한층 더 따스하게 기억될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신석정의 시 <푸른 침실>을 떠올렸다. 실제로 영화 속 침실들이 죄 푸른색이기도 했고. 두 아이, 미래와 과거가 함께 있는 모습이 꼭 항해처럼 보이기도 했다.
일림아
너와 나는 푸른 침실의 배를 잡아타고
또
어디로 출발을 약속하여야겠느냐?
( <푸른 침실> 부분)시인이 딸의 이름을 부르며 쓴 시와 함께, 이 영화가 반짝반짝 부려 놓은 마법을 끌어안고, 나 또한 어떤 작별을 되새김질했다.
가끔 삶의 어딘가, 균질하던 순간이 툭 깨지고 그 자리에 마음이 툭 걸리는 순간이 있다. 니트의 올이 어딘가에 훅 걸려 풀어지는 것처럼. 가까운 이의 죽음도 분명 그런 순간일 것이다. 아무리 잘한 사람이라도 후회가 남는, 그런 순간.
그렇게 멈춘 자리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이야기를 통해 다시 이별의 자리에 돌아가, 나의 모든 순간을 되새김질하여 소화하고 내일로 갈 수 있다면.
어느 정도 자전적이라는 이 영화를 보며, 셀린 시아마의 마법을, 또 그 영화에서 새로운 시선을 발견하게 될 수많은 이들을 생각한다.
이별 후 눈물 혹은 한숨으로 잠 못 이루는 어떤 이의 베갯잇에 이야기 하나를 고이 수놓아줄 수 있다면. 이 영화를 종이배처럼 접어 푸른 항해를 내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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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우성 감독의 새로운 시도, 관객에겐 이질적인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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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또 혼자
뚜벅뚜벅 걷는 길. 수혁에게 혼자는 낯선 것이 아니다. 정확히 딱 10년 만에 나왔다. 만기출소일. 누군가가 두부를 들고 교도소 입구 기다렸으면 했지만 수혁에게 혼자는 익숙하다. 가족? 딱히 없다. 조직에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헌신했지만 돌아오는 건 쓸쓸한 수혁 그 자체였다. 혼자 차를 탄다. 뒤에 따라오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타인에게 충성하는 것이 질렸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사랑했던 사람을 찾아가는 수혁.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지만 수혁에게 민서는 냉담하다.
민서의 냉담한 반응은 당연하다. 갑자기 민서의 곁을 떠났던 수혁. 어색하고 불편한 분위기가 수혁의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든다. 하지만 아프기만 한 건 아니다. 수혁을 어떤 사람에게 데려가는 민서. 민서와 수혁에겐 딸이 있었다. 발레를 배우고 있는 인비. 수혁에게 많은 것이 떠나갔지만 이것만은 지키고 싶었다. “인비에게 정말 좋은 사람이 됐다 싶으면 돌아와” 지금 당장 수혁이가 딸 인비에게 가기엔 마음에 걸리는 것이 너무 많다. 조금씩 시작하면 되겠지. 평범한 삶을 다시 꿈꾸는 수혁.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전에 일했던 조직에서 그를 가만히 놔두질 않았다. 과연 수혁은 응국과 성준을 피해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난 응원했어
지금의 충무로를 생각할 때 ‘정우성’이란 이름은 어느 정도 과소평가 된 감이 있다. <비트>라는 영화로 일약 청춘스타로 등극한 정우성. 지난 몇 년 동안 정우성이라는 이름은 해사하게 빛나던 청춘이었다. 정우성이 갖고 있는 청춘스타로서의 카리스마는 많은 작품에서 시너지를 냈다. 이 청춘스타로서의 이미지가 데뷔 이후부터 꾸준했던 탓에 이 배우를 두고 연기력 논란이 일부 있었다. 실제로 정우성 배우의 퍼포먼스가 아쉬웠던 작품이 몇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김성수 감독의 <무사> 같은 영화를 보면 이 사람이 갖고 있는 톤이 변화가 없다. 캐릭터의 입체성이 잘 느껴지지 않았던 아쉬운 퍼포먼스였다. 비교적 최신작인 <아수라>에서는 욕하는 대사가 많았다. 이 영화에서 정우성 배우가 나쁘지 않은 감정연기를 보여주는 것과는 별개로 욕설 대사가 어색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후에 <증인>이나 <헌트>로 훌륭한 퍼포먼스를 보여주긴 했다. 그동안 정우성이라는 배우는 액션 연기만 뛰어나지 예술가로서, 연기자로서는 호불호가 갈렸다.
정우성 배우의 필모그래피 중 좋은 연기를 보여준 작품 많았다. 일례로 <증인>에서의 변호사 연기로 청룡영화상과 백상예술대상으로 수상한 바가 있다. <아수라>에서도 이야기의 템포를 황정민, 곽도원 두 배우가 끌고 간다. 광기 어린 에너지가 영화에서 가장 중요했던 <아수라>. 두 베테랑에 밀리지 않게 한도경이라는 역할을 잘 수행한다. 욕설이 어색하다는 지적도 오히려 그 영화의 톤 앤 매너에 어울렸다. ‘강철비’ 시리즈에서의 연기는 두 캐릭터가 정반대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에서 어디에 방점을 둬야 할지를 분명히 조준한 퍼포먼스였다. 정우성 배우는 최민식, 송강호 배우처럼 화려하게 테크니컬 한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연기는 사람이 하는 일이다. 객관적인 능력치가 있어서 그걸 매 작품마다 일정치만큼 보여주는 건 불가능하다. 정우성 배우는 그만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와 카리스마가 있다. 그리고 그 카리스마를 가장 뛰어난 액션연기로, 또 마스크로 소화한다. 이런 점에서 정우성 배우는 좋은 배우다. 최근작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이나 <헌트>에서 연기자로서의 역량도 뛰어났다.
이 정우성 배우가 이번 작에서는 연출을 맡았다. 정우성 배우에 관련한 자료들을 찾아보면 이 분이 오래전부터 연출에 욕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감독 정우성’에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바로 ‘이정재’의 <헌트>다. 이정재 감독이 처음 메가폰을 잡아 칸에 초청됐다는 기사가 나올 때도 (글쓴이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 말고 감조차 잡기 어려웠다. 뚜껑을 열어본 <헌트>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장르적으로 피 말리는 액션/스릴러물이다. <헌트>가 손익분기를 넘김에 따라 다음 해에 <보호자>가 개봉한다는 사실에 시선이 집중됐다. 정우성 감독이 그 나름대로 만들 액션스타로서의 장르물이 기대됐기 때문이다. 유수의 국제문화제에 초청받았던 것과는 별개로 이 작품이 정우성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연상케 하는 부분이 있다. 캐릭터들의 퍼포먼스도 훌륭했다. 그에 상응하는 단점은 아쉽게 느껴진다.
정우성의 필모그래피
이 영화는 캐릭터로 승부하는 영화다. 일반적으로 빌런 vs 주인공의 대결구도를 따라가는 영화가 아니다. 한 명의 주인공이 나머지 악당 무리를 상대한다. 이 대결구도는 지난 5월에 개봉했던 <범죄도시 3>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주인공 마석도와 주성철, 리키가 각자 대립하며 극에서 서스펜스를 부여한다.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에서도 두 스파이더맨이 등장하지만 다른 빌런들도 그에 상응하는 존재감을 보여준다. ‘그린 고블린’이 영화의 메인 빌런이면서 ‘닥터 옥토퍼스’가 입체적인 캐릭터를 맡은 것이 극의 이야기를 이끄는 좋은 선택이었다. 이 영화는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과 <범죄도시 3>이 취했던 연출 방식과 유사한 태도를 취한다. 주인공 수혁과 대립하는 빌런은 네 명이다. 우진/응국/진아/성준이다. 이 네 명의 캐릭터들은 영화에서 나름의 입체성을 부여하기도 하고 스스로 치고받고 갈등도 일으키며 이야기의 중심으로 기능한다.
이 빌런 캐릭터들을 다수 등장시켜 캐릭터에 개성이 분명하다는 점은 영화의 분명한 장점이다. 하지만 이 인물들이 어디서 다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드는 것은 오히려 단점처럼 느껴진다. 캐릭터를 다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 응국은 ‘끝판왕’, 성준은 자격지심, 진아는 외유내강, 우진은 광기다. 각자 다 다른 톤으로 연기한다. 이 각기 다른 개성들은 정우성 배우의 필모그래피에서 봤던 것들이다. 응국과 성준은 <아수라>에서, 진아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이나 <감시자들>에서, 우진은 <태양은 없다>에서다. 이 위에 나왔던 영화에 등장한 인물들의 내면 묘사가 본작에 이어진다. <헌트>가 견지한 처절함이 이야기의 개성이 되는 것과는 구분된다. 이렇게 기원과 결말이 어디에 향할지 예상이 된다는 점은 신선하지 않은 영화 대사들 덕에 더 두드러진다. 영화를 보다 보면 이 인물이 ‘이런 대사를 할 것 같아’라고 예상하게 되는데, 타율이 낮지 않다. 이렇게 인물이 핵심이 되어 자기들끼리 싸우고 화해하고 이야기를 이끌어야 할 캐릭터들이 식상해진다는 점에서 이야기에 누수가 생기는 이유가 된다.
액션이 있었는데 없었습니다
이 영화가 액션영화로서 장르에 충실한가? 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이 영화는 액션영화이자 누아르영화다. 후자 ‘누아르영화’적인 측면은 박성웅 배우가 제 몫을 해 장르 구색을 맞춘다. 누아르영화 특유의 끈적하지만 처절한 분위기가 작품 내면에 잘 깔려있다. 더 큰 문제는 무려 정우성이라는 액션스타가 주인공이자 메가폰을 잡았음에도 장르적인 쾌감이 덜하다는 점에 있다. 이 영화 자체의 액션 시퀀스들은 아이디어가 빛난다. 이 장면 자체는 여러 영화나 드라마에서 봐왔다. 하지만 이 장소의 특성과 이 도구를 활용했다는 점이나 이후 인물 대 인물의 액션신은 충분히 영화 내적으로 장점으로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의 구성을 보면 이 액션이 영화에서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서사에서 이 액션 신들을 장르로서 보여줘야 하니까, 숙제로 풀어야 하니까 넣었다. 똑같이 정우성 배우가 출연한 <헌트>에서 5 공화국 시절 자유에 대한 갈망을 처절하게 드러냈다는 것이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박력이 극의 서스펜스가 된다는 점이 대비되니 더 단점으로 느껴진다. 액션은 좋다. 그런데 ‘액션 만’ 좋다. 이 예술은 서사라는 영화라는 종합예술이다.
또한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신을 보면 이 작품의 기획의도가 궁금해진다. 이 영화의 포스터를 보고 관객들이 기대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 ‘기대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쓴다면 후반부 전개의 핵심이 되기 때문에 자세히 쓸 수는 없다. 하지만 시퀀스들의 구성이 영화 전체적인 흐름과 어긋난다. 영화 전체적으로 누아르, 액션물이라고 초반부부터 드러내고 있다. 그럼 적어도 그대로 가는 게 좋지 않았을까? 전개 흐름이 이 그대로라면 이 영화가 굳이 주인공이 수혁일 이유가 없다. 반대로 우진-진아 커플이 광기에 찬 인물일 필요도 없지 않을까? 응국 캐릭터는 영화에서 이렇다 할 위기를 주지 않는다. 이 영화의 구멍을 각본 스스로가 이미 만들었다는 느낌마저 든다. 단순히 몇 이미지만을 피상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이 영화가 액션물로 기획됐다면 감독님의 판단 착오라고 보인다. 진부한 이야기가 후반부액션에 힘이 들어가면 분명히 영화가 가진 장점이 됐을 것이다. 영화의 기획력에 아쉬움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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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로 만들어낸 최상의 공포
누구나 삶을 이어가며 몇 번의 성장을 이루어낸다. 갓 태어나 숨을 쉬고 기어 다니다가 첫걸음을 떼면서 성장의 속도는 빨라진다. 말을 하고 또 다양한 것들에 대해 교육받으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받는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무언가를 배우고 자신을 발전해나가는 모습 그 자체는 어쩌면 삶을 이어가는데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성장이라는 것이 꼭 학교에서 배우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앉아서 하는 것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하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혼자 깨닫게 되는 것 또한 사람을 한 단계 성장시킨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 꾸준히 성장의 계단을 밟아 가는 것은 중요하다.
어찌 보면 그렇게 성장해나가는 과정 자체가 인간의 생존에 필요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금씩 개인을 발전시키고 세상을 변화시켜 나갔던 것은 많은 사람의 삶을 바꾸었다. 전쟁이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도, 신체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것을 이겨내고 성장을 이루어내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특히나 신체적 장애는 그들에게 절망을 안긴다. 하지만 그 제약 속에서도 그들 또한 나름의 성장을 이루어 낸다. 그렇게 다양한 개개인들이 성장을 해내는 과정들이 모여 전체 사회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성장으로 만들어진 삶은 그다음 세대의 삶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그것을 이어받은 다음 세대는 또 그들만의 성장을 이루어낸다.
청각장애인 레건의 성장 서사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 2>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 2>는 성장에 대한 서사가 담겨있는 공포영화다. 영화 속 세상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수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 앞을 볼 수 없지만 소리를 예민하게 들을 수 있는 괴수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달려가 모든 것을 파괴한다. 그런 지옥 속에서 살아남은 한 가족이 한 시골 농장에서 그들의 삶을 이어가려다 벌어지는 이야기가 1편에 담겼었다. 1편은 절망적인 상황을 이겨는 과정을 그리면서 가족 중 막내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태어나는 아이를 세상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노력을 보여줬던 영화였다. 한 가족이 슬픔과 공포를 극복하는 과정이었다.
2편은 1편 바로 직후의 이야기를 다룬다. 특히 한 가족 중에서 청각장애를 가진 딸 레건(밀리센트 시몬스)의 모험과 성장이 이야기의 큰 축을 차지하고 있다. 레건 때문인지 모든 가족들은 수화로 대화가 가능하다. 그러니까 소리를 내지 않고도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에 소리에 예민한 괴수들에게 들키지 않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공포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그들이 서로 다독이며 한 동안 특정 공간에서 삶을 이어갈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레건에게도 영화 속 상황이 절망적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작은 힘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가 1편의 마지막에 발견한 괴수의 약점은 그가 가진 장점을 좀 더 부각한다.
엄마인 에블린(에밀리 블런트)은 갓 태어난 갓난아이까지 포함하여 레건, 마커스(노아 주프)까지 총 세 명의 아이를 혼자 보호해야 한다. 아무래도 혼자서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좀 더 레건과 마커스에게 의지하게 되지만, 마커스는 아직 너무 어리고 레건은 청각장애가 있기 때문에 에블린은 자신의 가족을 지키려 좀 더 바쁘게 움직인다. 영화 내내 보이는 에블린의 모습은 그 상황이 너무나 공포스럽고 무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남은 가족을 지켜내려는 의지가 보인다. 1편에서는 그나마 남편 리(존 크래신스키)가 그를 지켜주고 의지할 수 있었지만 이번 영화에서 그가 의지할 곳은 없어 보인다. 새롭게 등장하는 에밋(킬리언 머피)이 있지만 자신의 가족을 잃은 그는 그저 책임을 회피하고 혼자 지내고 싶어 하는 약한 인물일 뿐이다.
영화는 어른인 에블린이나 에밋의 서사에 주목하기보다는 사춘기를 막 지나간 딸 레건의 서사를 보여준다. 청각장애를 가진 인물이기 때문에 관객들은 애초부터 그에게 혼자 모험을 하거나 성장하는 모습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1편에서 괴물의 약점을 발견해낸 것도 레건이었고, 2편에서 상황의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도 레건이다. 어찌 보면 가장 약해 보이는 캐릭터인 그에게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쥐어준 셈이다. 레건이 혼자 길을 떠나고, 또다시 만나게 된 에밋을 설득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만들어내는 모습은 가족을 넘어 전 인류를 구하려는 영웅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침착하게 주변을 이용하고 자신을 돕는 인물들과 함께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은 한 소녀의 성장을 끝까지 지켜보게 만든다.
소리로 만들어내는 효과적인 공포와 스릴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 2>는 소리가 중요한 영화다. 1편과 마찬가지로 아무 소리를 내지 않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소리를 내면 무언가가 튀어나온다는 걸 알고 있는 관객들은 등장인물들이 조용히 행동할 때 같이 숨을 죽였다가 의도치 않게 소리가 나는 순간 주인공들과 함께 입을 틀어막게 만든다. 레건이 보청기를 뺐을 때, 똑같이 무음으로 화면을 같이 보여주는 것을 통해 관객들을 그 상황 자체를 체험할 수 있게 구성되어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다른 어느 곳 보다 극장의 환경에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 사운드가 좋고 어두운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본다면, 주인공들의 상황을 그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시작하면서 괴물이 처음 등장했던 첫 날을 보여준다. 아빠 리와 에블린, 레건과 막내아들이 아들 마커스의 야구 경기를 보러 갔던 그날 겪었던 일을 하나의 시퀀스로 보여주는데, 무척 긴장감이 넘친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는 마을의 모습과 많은 괴수들의 출연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완전히 몰입하게 만든다. 감독 존 크래신스키는 배우 출신으로 <콰이어트 플레이스> 시리즈로 감독 역할을 잘할 수 있는 것을 보여줬다. 그는 영화의 첫 장면을 롱테이크 한 컷으로 촬영을 완료하면서 생동감 있는 재난의 모습을 화면에 담았다.
에블린을 맡은 에밀리 블런트는 1편에 이어 강인한 엄마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 편으론 눈물을 흘리지만 한 편으로는 마음을 다잡고 괴물을 때려잡는 모습은 배우가 가지고 있는 강인하고 감성적인 이미지를 그대로 담고 있다. 새로운 인물 에밋으로 등장하는 배우 킬리언 머피는 이번 영화에서 삶의 의지를 잃은 선한 가장을 연기했다. 악역을 많이 연기했던 그는 눈에서 힘을 뺀 연기로 레건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레건 역할을 맡은 배우 밀리센트 시몬스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그는 실제로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고, 농아학교에서 연극반 활동을 하다 배우로 데뷔했다. 영화 속에서 그가 보여주는 모습들은 실제 그의 삶에서 겪었던 여러 가지가 포함된 연기라고 할 수 있다. 말을 하지 못하지만 눈빛과 몸짓으로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고 수화로 대화를 이어나가는 모습은 영화 속 레건의 모습 그 자체로 보인다. 영화 속 레건이 자신의 의지로 자신만의 성장을 이루어냈던 것처럼, 배우 밀리센트 시몬스도 자신의 연기 경력을 한 단계 성장시켰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유튜브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콰이어트 플레이스 2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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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호실] 다들 당시에는 모르는 마음들이 있으니까
aftersun(2022)
첫 장면부터 관객에게너 이 영화 좋아하게 될 걸? 너 마음에 박히게 될 걸? 하고 통보하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어떤 영화는 러닝타임을 따라갈 수록 그 감동이, 여운이, 감정이 올라오게 한다.
애프터썬은 완벽히 후자의 경우를 따른다.
사실 영화가 시작된 이후로 큰 감동이나 감정이 찾아오지는 않았는데 영화의 중반부에 다다르자 아, 이 영화는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구나가 느껴지고 후반부에 이르면 음악의 힘을 받아 성인이 된 소피의 마음을 따라가게 된다.
이렇게 감정을 고조시키는 데에 사운드트랙이 큰 역할을 했다. 모든 사운드트랙이 다 좋았다! 삽입된 씬과 어우러져 자아내는 분위기도 정말 좋았음. 영어가사에 익숙했던 곡들이 한글 자막으로 스크린에 비춰지고 그 글자들이 화면과 어우러지면서 단순히 화면만 존재할 때보다 감정이 더 큰 파도로 찾아오는거야. 특히 Queen, David bowie의 under pressure. 같은 의미를 갖고 있는 걸 알지만 모국어인 한글로 가사를 읽을 때 느껴지는 직관적인 느낌을 크게 받을 수 있었다고 해야하나. 영화 보고 집 가는 내내 under pressure를 들으며 소피와 칼럼의 불안이 밑에 깔린 행복한 시간을 머릿속에서 돌려보게 되는 그런 사운드트랙이었다 이 음악 때문에 영화가 더욱 좋아지는 그런.
사실 친절한 영화는 아니고 계속 영화에 집중해서 따라가고 또 생각해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영화인 것 같다.그 럼에도 불구하고 좋았던 건 한 시간 반 동안 쌓아온 소피, 칼럼의 이야기와 감정을 마지막 10분 동안 관객들이 마음에서 같이 열어보고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이제 막 커가면서 새로운 것들을 궁금해하고 경험하는 소피. 소피가 이제 막 해가는 것들을 이미 다 해보고 잠깐 흔들리는 중인 칼럼. 서로 이해하는 부분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는 두 명의 여행이 아름답고 행복해보였다.
캠코더로 계속해서 아빠의 모습을 담으려 하던 소피는 열한살에는 몰랐겠지 아빠가 무슨 마음을 갖고 있는지를 성인이 되어 그 영상을 재생해 이미 눈으로 봤던 광경을 다시 한 번 보면서는 그제서야 칼럼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된 것 아닐까. 다들 당시에는 모르는 마음들이 있으니까
그 마음을 되새기며 다시 한 번 더 과거를 재생해 보면 또 새롭게 칼럼과 떠났던 튀르기예 여행을, 칼럼을 생각할 수 있겠지. 여운을 깊게 주는 영화 참 좋다.
해당 리뷰는 씨네랩의 시사회 초청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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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넷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안녕하세요, 씨네픽입니다! :)
주말동안 미세먼지가 정말 심했는데요.ㅠ 주말은 건강하고 안전하게 보내셨는지요?
이번 주는 날씨가 다시 추워진다고 하니,
여러분들 모두 감기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오늘도 씨네픽과 함께 매주 한 주의 주말 박스오피스를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할게요!
많은 관심 부탁드리면서, 이번 주는 11월 19일, 20일, 21일의 주말 박스오피스 관객 스코어 분석입니다!
그럼 시작해볼까요? :)
[국내 주말 박스오피스]
1위. <장르만 로맨스>(▲8)
▶지난 17일 개봉한 한국 영화 <장르만 로맨스>가 이번 주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습니다.
오랜만에 한국 영화의 박스오피스 1위 소식인 것 같은데요. 모처럼 반가운 소식입니다! :)
19일~20일 관객 수 23만 3081명을 동원하며 마블 영화 <이터널스>를 제치고 주말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했는데요,
누적 관객 수는 현재 33만 1653명입니다.
<장르만 로맨스>는 배우 출신 감독 조은지 감독이 연출을 맡아 화제가 된 작품으로
'영화는 평범하지 않은 로맨스로 얽힌 이들과 만나 일도 인생도 꼬여가는 베스트셀러 작가의 버라이어티한 사생활을 그린 작품' 입니다.
과연 <장르만 로맨스>의 정상 질주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기대됩니다!
2위. <이터널스>(▼1)
▶주말 박스오피스 2위는 개봉 이후 줄곧 1위를 지켜오던 마블 영화 <이터널스>입니다.
<이터널스>는 같은 기간동안 22만여명의 관객 수를 동원했으며, 개봉 이후 지금까지 누적 관객 수는 284만 6432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 과연 누적 관객 수 300만명을 돌파할 수 있을까요?
3위. <듄>(-)
▶주말 박스오피스 3위는 전 주 순위와 동일한 <듄>입니다.
같은 기간(19~21일)동안 주말 관객 수 9만 1344명을 동원했으며, 충 누적 관객 수는 134만 4613명입니다.
좌석 판매율은 16.2%로 주말 박스오피스 1,2를 차지한 작품들에 비해서 더 높은 수치를 나타내고 있는데요.
오히려 배정된 스크린 관 수에서는 티켓 판매율이 더 높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씨네픽은 이번 주 75회 예측 이벤트는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 주말 박스오피스 스코어 예측 이벤트입니다.
11월 19일~21일 주말 박스오피스 스코어 수를 예측하고 가장 가까운 숫자로 관객 수를 예측한 정답자분들에게 상금을 드리는 이벤트인데요.
먼저 포털사이트 네이버가 제공하는 이번 주 <프렌치 디스패치>의
실제 관람객의 성별/나이별 관람추이를 보면 여성 63%, 남성 37%로 여성 관객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연령대 별로는 20대 비율이 45%로 가장 많이 비율을 차지하고 있고 다음으로는 30대가 31%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20대와 30대의 합한 비율이 총 76%로 <프렌치 디스패치>의 주 소비자층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프렌치 디스패치>의 주 관람 연령층은 20,30대 젊은 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제75회 씨네픽 예측 이벤트 <프렌치 디스패치> 스코어 게임의 20/30대 참가자 분들이 예측한 관객 스코어는 어떻게 됐을까요?
▶<프렌치 디스패치> 스코어 예측 이벤트의 참가자의 20/30대 비율은 78%로 무려 80%에 가깝습니다.
▶실제 <프렌치 디스패치> 주말 관객 스코어는 24,783명으로 씨네픽 참가자 상위권 예측 정답자 비율(오차범위 +- 10,000)은 16%입니다.
제 75회 예측 이벤트에 참여해주신 모든 참가자분들께 감사드리며, 상금을 받으신 정답자분에게도 축하의 인사드립니다!
다음 주에는 씨네픽 주말 박스오피스 순위 예측 이벤트를 진행하니,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리겠습니다. :)
4위. <강릉>(▼2)
▶주말 박스오피스 4위는 전 주에 비해 두 계단 하락한 <강릉>이 차지했습니다.
<강릉>은 주말 관객 수 4만 2156명을 기록, 총 누적 관객 수는 28만 937명을 기록했습니다.
5위. <디어 에반 핸슨>(NEW)
▶주말 박스오피스 5위는 새롭게 진입한 <디어 에반 핸슨>이 차지했습니다.
주말동안 4만 1027여명의 관객 수, 총 누적 관객 수는 7만 3174명을 기록했는데요.
<디어 에반 핸슨>은 유니버설 픽처스의 배급 작품으로 인생 뮤지컬 영화로 손꼽히는 있는 '라라맨드'와 '위대한 쇼맨'의 음악 제작진이 모든 노래의 작사, 작곡에 참여한 작품입니다. 에미상, 그래미 상, 토니상을 석권한 배우 벤 플랫과 할리우드 명배우 줄리안 무어, 에이미 아담스 등이 출연했습니다.
<디어 에반 핸슨>은 ' 누군가 자신을 돌아봐 주길 바라는 소년 에반 핸슨이 한 통의 편지에 '코너'의 절친으로 오해 받고, 아들을 잃은 코너의 부모님을 위해 추억을 지어내면서 희망을 파장을 일으키게 되는 따뜻한 드라마 영화입니다.
[북미 주말 박스오피스]
▶북미 박스오피스 1위는 11월 19일 개봉한 <Ghostbusters: Afterlife>가 차지했습니다.
주말 동안 $44,000,000(한화 약 522억)의 매출액을 달성했으며, 총 누적 매출액 또한 $44,000,000(한화 약 522억)입니다.
국내에서는 12월 1일 개봉 예정 중에 있으며 빌 머레이, 그리고 앤트맨의 주인공 폴 러드 등이 출연할 예정이라고 하니,
예전의 고스트버스터즈를 추억하고 있는 관객분들에게 좋은 소식일 것 같습니다! :)
▶북미 박스오피스 2위는 여전한 화력을 보여주고 있는 <Eternals(이터널스)>입니다.
주말동안 $10,825,000(한화 약 128억)의 매출액을 달성했으며, 지금까지 총 누적 매출액은 $135,817,163 한화로 약 1,611억원입니다.
<Clifford the Big Red Dog> 박스오피스 3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4위는 새롭게 진입한 <King Richard>입니다.
<King Richard>는 레전드 테니스 플레이어인 세레나 윌리엄스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윌리엄스 자매의 아버지 '리차드 윌리엄스' 그리고 윌리엄스 자매에 대한 이야기로 알려져있습니다.
씨네픽이 준비한 박스오피스 분석 시간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주도 더욱 유익하고 재밌는 콘텐츠로 찾아뵐 것을 약속드리면서,
오늘도 힘차고 행복하게 시작하시고 한 주동안 건강하세요! :)
감사합니다.
씨네랩 에디터 Hez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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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스마트 리뷰 - 학교에서는 배우지 못하는 것들에 대하여
#북스마트 #하이틴 #B급감성
꿈도, 연애도, 다이어트도
모든 것이 완벽할 것 같은 스무 살이
가장 기대되는 나이 열아홉♥아이비리그에 합격한 ‘에이미’와 ‘몰리’는
대학과 스펙이 인생의 전부라 믿는 파워 범생이.춤은 글로, 파티는 책으로 배운 두 사람은
고3의 마지막 졸업 파티에서
잊을 수 없는 레전드 핵인싸가 되기 위해
사상 초유의 일탈을 계획하는데…
‘지금 이 순간 아니면 절대 할 수 없어’이 구역을 뒤.집.어.놓.으.셨.다!
대리 만족 100% 현실 공감 200%
모두가 원하는 Last Night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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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미나리>
2021년 전 세계가 기다린 어느 한국 가족의 원더풀한 이야기
"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라"
함께 있다면,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하루하루 뿌리 내리며 살아가는 어느 가족의 아주 특별한 여정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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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더 파더>
기억이 뒤섞여 갈수록 지금 이 현실과 사랑하는 딸,
그리고 나 자신까지 모든 것이 점점 더 의심스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