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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LAB2021-06-22 09:53:46

고통에 귀를 막고 복수에 홀리다

박찬욱 감독, <복수는 나의 것>(2002)

복수는 나의 것

 

 

 

 

 

 

 

 

청각장애가 있지만 성실하고 착한 공장 근로자인 류(신하균)는 아픈 누나에게 자신의 신장을 이식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류의 혈액형은 누나와 다른 B형이었고, 다른 기증자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류는 일방적으로 해고 통보를 받는다. 


 

때마침 장기 기증자가 나타나 수술비 천만원만 있으면 누나를 살릴 수 있게 되었으나 류는 장기밀매 업자들에게 속아 한순간에 전재산과 신장까지 빼앗기고 만다. 스스로를 '혁명적 무정부주의자'라 칭하는 류의 연인 영미(배두나)는 류에게 '착한 유괴'를 하자고 권한다. 이들은 동진(송강호)의 딸 유선을 유괴하고 2600만 원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들의 착한 유괴는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죽음과 복수의 거센 물살 앞에서 이들의 운명은 속절없이 휘말리고 만다.

 

 

 

복수에 잡아먹히다

 

 

 

완벽한 복수는 가능한 것일까? 내 딸을 죽인 놈, 내 장기를 빼간 놈, 내 애인을 죽인 놈, 우리 리더를 죽인 놈.... 복수할 대상은 언제나 있다. 복수의 성공은 곧 또 다른 복수의 시작이 되어 끝없이 이어진다. 흔히 목표를 달성을 위해서는 구체적인 목표 설정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구체적인 개인을 향한 날카로운 복수는 이따금 성공적으로 수행된다.

 

 

 

 

 

 

가까운 존재의 불가해한 죽음 앞에서 인간은 언제나 책임을 물을 누군가를 찾는다. 상실감의 자리에 가득 찬 분노는 외부를 향해 뻗어나가고, 복수만이 소중한 이의 죽음을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반응처럼 여겨진다. 그렇게 복수는 한 사람의 인생을 건 목표가 된다. 이 맹목적인 목표는 자신의 발밑이 온통 피투성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뛰어들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복수는 스스로 정한 길처럼 보이지만 실은 피할 수 없는 비극적인 운명과도 같다.

 

 

 

감독은 누나의 죽음을 마주한 류의 울부짖는 얼굴은 화면 밖으로 보내고 TV 애니메이션 화면으로 대신한다. 물에 빠져 숨을 헐떡이는 '너부리'의 모습은 류의 최후와 닮아있다. 손으로 얼굴을 장난스레 찌르던 것이 반복되다 마침내 누군가 물에 빠지는 결말의 애니메이션은 사실 영화 <복수는 나의 것>과 같은 이야기다.

 

 

 

류는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은 장기밀매 업자들을 몰살한다. 동진은 딸 유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류를 죽이고자 한다. 이들은 복수할 대상을 찾고 죽이기를 반복한다. 영화 속 복수는 성공의 연속이다. 다만 그 성공을 기뻐할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복수는 나의 것>은 복수에게 잡아 먹히는 인간들의 이야기다.

 

 

 

“백 프로, 확실히”

 

 

 

<복수는 나의 것>에서 삶은 돈과 끊임없이 교환된다. 누나의 수술비, 유선이의 몸값, 굶어 죽은 팽기사의 가족. 이들의 삶은 돈 때문에 위기에 처했으나 복수할 길이 없다. 세상의 부조리, 계급 체계, 시스템의 맹점과 같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대상을 향한 복수는 성공하기 어렵다.

 

 

 

 

 

 

영미는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의 리더로 "미군 축출, 재벌해체"를 외치는 인물이다. 영미는 "백 프로. 확실히" 사과하는 동시에 동진의 죽음을 장담한다. 영미의 예언은 보란 듯이 실현된다. '무산계급의 이름으로 사형을 언도한다'는 판결문은 결국 유산계급인 동진의 가슴에 꽂힌다. '나한테 왜 이러느냐'는 동진의 물음과 자신의 가슴에 꽂힌 판결문을 읽으려 애쓰는 모습은 우습기까지 하다. 우리는 사실 자신의 심장에 칼을 꽂는 게 누구인지조차 모른다.


고통을 듣지 못하는 사회

 

 

 

 

 

 

박찬욱 감독은 고통과 폭력의 행위보다 이어지는 반응에 주목한다. 그 반응은 인물의 감정과 태도이기도 하고 물리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예컨대 칼로 배를 긋는 행위와는 거리를 두고, 배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가까이 보여주는 식이다. 카메라는 시신을 부검하는 모습 대신 동진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다. 동진의 태도는 유선이와 다른 이를 확실히 구분한다. 고통과 죽음의 무게는 누구에게 닿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우리는 사실 가까운 이의 고통에도 귀 기울이지 못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는 귀를 막고 살아간다. 청각장애인인 류는 누나를 아끼지만 누나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소리쳐도 듣지 못한다. 옆집의 남자들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성적 만족감을 채우는데 쓸 뿐이다. 고함소리, 성행위를 나누는 소리, 라디오 소리 모든 소리가 들리지만 이들은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는 류와 무엇이 다를까. 고통을 듣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려고만 하는 태도는 우리 모두를 외롭게 만들었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코두codu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작성자 . CINELAB

출처 . https://brunch.co.kr/@codu/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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