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2025-04-24 12:41:58
시간의 압축 파일을 풀다.
넷플릭스 [소년의 시간] 리뷰
이 글은 넷플릭스 [소년의 시간]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진출처:한겨레
명백하게 내가 '불호'라고 외쳐야 할 작품이었다."왜?"라는 질문에 시원하게 대답하는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데다가 어떻게 타임라인이 꼬이는 것인지도 보여주지 않는다. 게다가 4화에 걸쳐 한 사건을 설명하는 동안 마치 노래방 간주 점프 마냥 겅중겅중 시간을 건너뛰어 버린다.
그런 것만 있다면 내가 억울하지라도 않지(?). 일 진행 속도가 마치 우리 부장님 수기 사인 한 번 받아내는 속도로 진행 되지를 않나(대충 매우 느리다는 뜻), 사건의 다각화는커녕 내 성격만 다각화되나(?) 싶을 정도의 집요한 원테이크로 사건을 따라가니, 이건 뭐 그냥 나라는 사람에게 안 봐도 된다고 말로 해도 충분할 것만 같은 작품이었다.
그러나 덩그러니 내 마음속 저장이 아니라 저장 공간에 덩그러니 다운되어버린 이 방대한 압축 파일은. 자물쇠가 조금씩 열리는 그 모든 순간동안 내 다리를 초조함으로 떨게 하는 대신, 두려움과 숙연함으로 떨리게 했다. 이보다 더한 공포와 숙연함을 담은 파일은 앞으로도 한동안 보기 힘들 것임을 직감한 사람의 심정으로.
사진 출처:매일 경제
네 시간가량의 작품이 던져놓은 화두들 중 나를 가장 괴롭게 했던 것은 어른들로 대변되는 부모의 무지(無知, 존 스노우)가 과연 면죄부가 될 것인가? 였다.
세 명의 도둑이 있는데 한 명은 도둑질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 행했고, 다른 한 명은 옆의 걔를 따라왔으며 나머지 한 명은 도둑질이 나쁘다는 것을 모르고 행동했다 했을 때. 과연 어떤 도둑이 제일 나쁜 놈이냐.라는 문제(?)를 받았던 적이 있었다. 정답(?)은 세 번째 도둑이었으며, 무지라는 것이 얼마나 해로운 것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이 예시가 아니라도 악의 평범성의 대명사가 되어 버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으로도 알 수 있다.
물론 부모 중 자기 자식이 나쁘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저 자식들을 위한다는 이유로 먹고 사니즘에 집중하다 보니. 아이들은 다 커 있었을 것이고. 그런 의도로 키우려 하지 않았음에도 제이미(오웬 쿠퍼)는 "그렇게" 커 버린 채였을 테니까.
게다가 이 작품과 대척점에 있다고 해도 될 법한 영화인 [케빈에 대하여]를 보았을 때. 결과적인 참사는 비슷했지만. 과연 이 두 부모가 모두 똑같이(혹은 유사하게라도) 나쁜가.라고 본다면 당연히 제이미의 나머지 가족, 그중에서도 부모님들이 불쌍하게 보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사진 출처:네이버 블로그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지 못했던 제이미의 갇힌 우주를 상징하는 듯한 벽지로 둘러싸인 아들의 방에서 오열하는 아버지(스티븐 그레햄)를 보면서도 처량함이라는 감정이 불쑥 치고 나오지 못했던 이유는. 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무래도 짧은 이 작품의 모든 시간마저도 가해자를 위해서만 할애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해자라고 해서 이런 사정이 있었습니다.라는 말조차 할 수 없게 만들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피해자는 그저 잔인하게 살해되는 모습으로 CCTV와 수사자료 속 모습에서만 존재할 뿐. 피해자의 부모들에게는 말할 수 있는 기회조차도 허락되지 않는다.
물론 제이미의 아버지가 아들을 범인으로 확정 짓게 한 살해 현장에 가서 추모의 의미로 꽃다발을 놓고 오긴 하지만. 오히려 그 말할 수 없는 심정을 먼저 전달해야 했을 곳은 피해자들의 부모였다. 게다가 제이미 마저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겠다고 했지만. 피해자를 위한 사과 따위는 준비조차 되지 않은 듯 보였다.
무지를 인정하지만 의도는 없었던 부모와. 제이미와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누나는 선택하지 않은 길을 가기로 한 제이미의 결단이 얽힌 복잡하고도 떨떠름한 사건 앞에서. 나는 제이미의 아버지가 마치 스스로가 화를 내며 파란 페인트로 낙서를 덮어버린 그의 회사용 봉고차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덮으면 안 보일 수는 있지만. 신경질적인 페인트 자국 때문에 원래 있던 낙서가 더 궁금해지는 역효과를 낳는 그의 방식. 결국 해결책이 되지 못해 타야 하는 곳이 아닌 반대편으로만 탈 수 있게 되어버린 반쪽짜리 방식. 그의 눈물이 마치 그 정도의 임시방편 정도로만 보일 뿐이었다.
마치면서
사진 출처:맥스 무비
이렇게 복잡한 마음으로 작품을 감상하고 나니. 그제야 제목이 눈에 띄었다.
Adolescence.
한국말로 하면 청소년기, 혹은 사춘기에 해당하는 단어를 [소년의 시간]이라는 한국어로 번역해 냈다는 것이 처음에는 마더퍼커 장인을 효자로 만들어 버린 사건처럼 느껴져서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시간이라는 것에 압축된 모든 감정들을 풀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요소들이 필요한지를 깨닫자 아보다 더 나은 제목은 있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의 흐름은 담백하다 못해 건조하다고 느낄 정도였기에. 이 부조화에서 오는 복잡한 이 마음을 어찌할 바 모르는 채로. 나는 단 한 사람의 관찰자가 되어, 카메라가 인도해 주는 대로 그저 넋을 놓은 채 작품을 감상해야만 했다.
이 시간에 담긴 의미를 풀어내려면. 나조차도 수많은 시간을 들여 이 드라마를 소화해야 할 것만 같다.
다음 리뷰 예고.
아마도 파과가 될 것.
[이 글의 TMI]
1. 크로와상 너무 맛있다... 버터 최고...
2. 갑자기 에어컨 켜야 할 정도로 날씨 덥다
3. 이번 달 용돈 아직 10만 원 남음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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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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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화와 불화하며
살아서도 죽어서도 파파라치와 가십의 대상이었던 프린세스 다이애나를 다룬 영화에서, 마찬가지로 수많은 파파라치와 가십에 둘러싸여 여기까지 온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연기한다. 자연히 이 영화를 기대하는 눈길은 많았지만, 과연 지금은 그 눈길에 파파라치의 시선이 없었을까. 스스로에게 물어보아도, '사건'을 보게 되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이 없었다고는 못하겠다.
그만큼 사건이 많은 삶이었다.
사진 속 프린세스 다이애나의 미소는 지금 보아도 산뜻하다. 지금 보아도 한 컷 한 컷이 화보처럼 보일 만큼 당대 최고의 패션 아이콘이었고, 왕세자의 불륜과 영국 왕실의 '지엄한 법도'에 눌리면서도 누구보다 선명한 존재감을 보인 사람이었으며, 봉사활동을 다니거나 아이들을 돌보는 면에서는 단단한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전 세계의 열광을 받은 사람. 삶의 어느 조각을 잘라내어도 극적인 사건을 찾을 수 있을 듯한 사람.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크리스틴 스튜어트도 다르지 않다. 판타지를 결합한 하이틴 로맨스 <트와일라잇>으로 로버트 패틴슨과 나란히 인기를 끌었고, 두 사람은 반짝 스타처럼 보였다. 연기력이나 외모에 대한 이야기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고, 둘의 연애사는 지구 반대편까지 알려지는 걸로도 모자라서 트럼프 전 대통령의 트위터에 친히 (그것도 몇 번이나) 언급되었다.
그러나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세간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자리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반짝 스타처럼 보였던 이들은 (공교롭게도 둘 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끝까지 끌고 가면서도, 동시에 결이 전혀 다른 작품을 파고들며 자기 자리를 직접 만들어 간다.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최근작만 살펴보아도 <트와일라잇> 때와는 다른 표정을 하고 있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나 <퍼스널 쇼퍼>, 가장 최근에는 <세버그> 등 다양한 작품을 해온 (사이에 트럼프의 트위터를 방송에서 읽기도 하면서)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마침내 <스펜서>에 다다른다.
가십과 파파라치에 둘러싸인 두 존재의 만남이었다. 불화와 불화하며 걸어온 존재의 만남.
그 자리, 영화 <스펜서>는 프린세스 다이애나 삶의 어느 특정한 사건보다는, 그를 둘러싼 분위기와 감정을 공 들여 재현했다. 영화는 크리스마스 휴가 기간 별장에서 왕실 식구들이 머무르는 3일을 배경으로 한다. 그 3일 동안 다이애나는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보여야 하고, 가려야 한다. 시놉시스는 그게 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실존 인물의 삶에 대해 알려진 바에 비하면 기승전결의 낙폭이 큰 영화는 아니다. 대신 촘촘하게 나아가 감정에 사람을 가둔다.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 무엇을 보이고 무엇을 가릴지 엄격하게 정해진 세상에서 다이애나를, 뒤이어 관객을.
다이애나는 그 3일의 휴가를 시작하러 들어가는 길부터 규정을 깬다. 누구의 엄호도 받지 않고 직접 차를 운전해, 길가의 식당에서 여기가 어딘지 묻는다.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여기는 그 감정의 내부. 습도 90%의 무더운 날씨처럼 답답한. 여기에는 다이애나가 처한 상황 못지않게, 3일이라고 시간 배경을 딱 잘랐음에도 시간이 선형적이라 느껴지지 않는 전개 탓도 크다. 영화의 많은 장면은 현실과 다이애나의 상상을 오락가락하여,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상상인지 즉각 파악이 어렵다. 그 여부가 관객에게는 조금 지나고야 도달하게 된다. 진주 목걸이를 힘껏 뜯어버리는 상상, 고풍스러운 복도를 헐떡거리며 걸어가는 모습,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변기 앞에 고개를 숙인 마른 등뼈, 스펜서 저택에서 계단을 밟는 모습.
그런 사람들이 있다. 과거를 덧입고 현재를 사뿐 뛰어넘어 미래로 날아가 버리려는 사람. 그의 고향은 미래가 아니었을까 묻게 만드는 사람. 현재에 들어맞지 않아 불화하지만, 물리적으로 현재를 벗어날 수 없으니 미래에 속할 수도 없다. 현재에 같이 있는 이들의 눈에는 더없이 불안해 보인다. 점멸될 듯 깜빡깜빡 현재를 산다.
대신 그가 죽은 후, 그에게 미래라 불렸을 시간이 도래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먼 훗날, 그의 미래를 현재라 부르는 이들이 돌이켜보면, 그는 과거의 사람임에도 자신이 존재했던 시절에 매이지 않고 현재에까지 유령처럼 남아 부유하고 있다. 그가 날아든 미래가 바로 여기였던 것이다.
다이애나는 그런 사람이다. 잊히지 않고 미래에서도 계속 언급되는 사람이다. 영화 <아멜리에>의 등장인물들이 계속 다이애나 이야기를 하듯이. 사후에도 그의 일부가 살아 있지만, 살아생전에도 그의 어떤 면은 유령처럼 부유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 <스펜서>는 프린세스 다이애나를 둘러싼 사건과 가십들을 걷어내고, 그의 유령을 옷과 목걸이 아래 재생해 놓은 영화다.
그러니 다이애나가 끊임없이 유령을 인식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는 앤 불린에게서 자꾸 자신을 본다. 오래된 방의 먼지에서는 과거의 여왕에게서 탈각된 신체 일부를 느낀다. 훗날 유령이 되는 이들만이 유령을 볼 수 있다. 과거의 유령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것도 이들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물리적으로 매인 몸이 시간을 유영하는 마법은 오직 마음으로만, 연민으로만 이루어진다.
다이애나가 영화 속에서 계속 거부하는 행위들은 철저하게 몸에만 속한 행위들이다. 먹기와 입기. 엄밀히 말해, 정해진 대로만 먹고 정해진 대로 입기. 대신 그는 계속해서 어디론가 움직인다. 걷고 뛰고 운전한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그의 옆에 놓인 패스트푸드 봉지는, 그가 먹는 음식이기도 하지만 그가 자유롭게 움직여 구입한 물건이기도 하다. 그가 운전한 자동차처럼, 그가 뛸 때 흩날리는 모자처럼, 몸 이전에 마음에 속한 행위의 결과물인 셈이다.
유령을 보다가 유령이 되다가 하는 느낌으로, 상상과 현재를 뒤섞어서, 다이애나라는 인물은 어딘가에 갇힌다. 음습한 공기마저 담아내는 클레르 마통의 카메라, 그 습도에서도 팽팽하게 목을 옥죄는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이, 갇힌 자리에 자물쇠를 건다.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다이애나에 가려졌다가, 보였다가, 반복하면서 그 자물쇠를 걸어 잠근다.
갇힌 그 자리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는 유령을 기다린다. 다이애나의 영혼을, 미래에서 기다린 이들과 조우하게 만든다. 사실 다이애나 생전에도 정직한 애정만으로 그를 바라본 이들은 있었을 것이다. 황색 언론 너머에서 호의 어린 미소를 짓고 있었을 것이다. 샐리 호킨스가 연기한 캐릭터 매기처럼, 너무 다정해서 오히려 환상 같고 미래 같은 그런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허수아비가 입고 있던 아버지의 옷을 수선해 준 매기의 손길처럼, 어떤 애정이 다이애나의 어깨에 걸쳐진다.
다이애나가 책을 통해 앤 불린의 영혼을 소환했듯이, 관객이 갇힌 자리에 다이애나의 유령이 현재로-즉 다이애나의 미래로- 소환된다. 이것은 일종의 위령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앤 불린이 다이애나에게 한 것 같은 위로로 누군가에게 다가갈 것이다. 당대와 불화하며, 선대의 유령과 먼지에 자신을 비춰보는 존재들에게. 당신을 환대하는 마음이 미래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당신은 사라져도 아주 사라지지 않는다고.
불화와 불화하며 현재를 사는, 미래에서 다시 만날 누군가를 생각하며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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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계속 걸어가겠지만
내게 <러브레터>는 겨울날 아득히 보이는 오두막, 불 밝힌 창문 같은 영화다. 보는 것만으로도 추운 밤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어주는 이야기다. 인물들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고 느껴서 그렇다. 이츠키에게는 언젠가 반짝이는 사랑을 받았던 기억, 히로코에게는 있는 힘껏 후회 없이 사랑한 기억. 그 힘을 이따금 떠올리며 잘 살아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 마음도 그런 힘을 찾고 싶어 자꾸 들여다보는 건지도 모르겠다. 찬 바람 불면 한번 보고, 겨울 깊어가면 또 보고, 겨울 다 가기 전에 아쉽다고 본다. 더운 여름 날도 눈발 내리는 풍경이 그립다고 보고, 문득 떠올리면 아무 때나 본다. 그 버릇이 10년도 넘었다. 이제는 너무 많이 봐서, 아는 사람들의 옛 사진 앨범을 보는 기분이 든다. 가본 적 없는 공간임에도 가본 듯이 그려보게 되고, 만져본 적 없는 옷의 촉감까지 생생하다. 동시에 딱 그만큼 멀기도 하다. 성에 낀 유리창 너머 들여다보이는 오두막 내부 풍경은 결코 닿지 않듯이. 내쉬는 내 숨결에 성에만 더 짙어지듯이.
그러던 차에 또 한 번 그에게서 편지가 왔다. 이번에는 <라스트 레터>다. 다시 한번, 편지의 마법에 걸리고 만다.
제목에서 예상되듯이 이 영화는 편지를 타고 흘러간다. 언니 미사키의 장례식을 마치고, 유리는 조카 아유미에게 편지봉투 하나를 건네받는다. 동창회 초대장이다. 언니의 부고를 알리려고 참석한 동창회 자리에서 동문들은 유리를 미사키로 착각한다. 그 시절 모두가 사랑했던 미사키, 오랫동안 보지 못한 미사키를 모두가 반가워한다. 유리는 차마 언니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곧 철거될 학교 건물 사진을 보고, 정리하다 발견했다는 테이프 속에서 졸업생 대표 인사를 읊는 미사키 목소리를 들으며 유리는 먼저 자리를 뜬다.
그런데 동창회 장소에서 누군가 유리를 따라 나온다. 유리가 좋아했던, 미사키를 좋아했던 쿄시로. 자신을 미사키로 알고 있을 쿄시로에게 유리는 편지를 한 장 남기고, 두 사람은 편지로 재회를 이어간다. 그러던 중 편지 하나가 미사키의 딸 아유미에게 닿으면서, 이들 모두는 편지를 통해 지금은 죽고 없는 미사키를, 그리고 그 시절의 마음들을, 각자의 오늘을 훑기 시작한다.
잘못 전달된 편지로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시놉시스만 보아도 <러브레터> 냄새가 난다. 감독은 아예 이 영화가 <러브레터>의 쌍둥이 영화라고 직접 밝혔는데, 곳곳에서 데칼코마니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한겨울 눈밭의 추도식으로 시작하는 <러브레터>와 빛 고운 여름날 장례식으로 시작하는 <라스트 레터>, 학교의 사진을 찍는 장면, <러브레터>의 이츠키처럼 <라스트 레터>의 유리도 도서관에서 일한다는 점 등등. 편지가 잘못 닿는 오래된 집의 분위기도 비슷하고, 교복 입은 회상 장면과 현재가 교차한다는 점도 겹친다.
<러브레터>뿐이 아니다. 소위 '화이트 이와이'로 대변되는 영화를 모조리 담은 종합 선물세트 느낌이다. <4월 이야기>에서 선배가 좋아 '사랑의 기적'을 만들었던, 배우 마츠 다카코가 유리 역을 맡았다. 도서관에서 일하며 선배를 좋아했던 과거를 회상하는 얼굴에서, 서점을 서성이다 빨간 우산 아래 말갛게 웃던 얼굴이 절로 떠오른다. 유리의 딸 사야카와 미사키의 딸 아유미가 함께 있는 모습에서는 어쩐지 <하나와 앨리스> 느낌도 난다. 연락처를 주고받는 SNS는 <립반윙클의 신부>에서 사용된 가상 SNS 플래닛이다.
다만 <러브레터>에서 한 발짝 달라진 점은, 오타루까지 가서 이츠키를 만나지 못하고 뒤돌아섰던 히로코와 달리 쿄시로가 로드무비 느낌이 들 만큼 적극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는 여러 모로 히로코와 다르다. 끝의 끝까지 사랑에 최선을 다했던 히로코와 달리, 미사키와의 관계에서 일찌감치 물러나야 하는 입장이었다. 이츠키의 기억을 편지로 받았다가 되돌려준 히로코와 달리, 그는 미사키의 기억을 아예 <미사키>라는 제목의 소설로 펴내기도 했다.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첫사랑에 매여있다는 점에서 남자 이츠키를 떠올리게도 한다. 어떻게 보면 남자 이츠키의 순정은 그의 죽음으로 박제되고 완성된 것이기도 하기에, 처음에는 쿄시로가 미사키의 기억을 되짚어가는 과정을 의구심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미사키> 이후 어떤 소설도 더 쓰지 못한 소설가라서 더욱 그랬다. 자신의 이야기를 위해 미사키를 찾는다면 그 또한 사랑일까? 더 이상 손 닿을 수 없는 사랑을 찾아다니는 그의 마음은 사랑일까 아니면 소재에 대한 집착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그의 마음만큼이나 내 비뚜름한 시선도 흔들렸으나, 끝내 미사키의 영전에 선 그와 함께 눈물을 떨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25년이나 지난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면 믿겠느냐는 질문은 미사키가 아니라 관객에게 던진 것인지도 모른다. 순정이라는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순정을 더 믿지 않게 될 뿐이다. 십대 때 이와이 슌지가 '영원한 십대들의 내부자'라는 말을 어디선가 읽고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는데, 시간이 흐르고 십대들의 내부자가 아니게 되어버린 나는 이제 오랜 사랑 앞에 의구심부터 던진다. 하지만 그는 변치 않았다.
단순하지만 잔잔하게 마음을 파고드는 피아노 선율에, 어쩐지 눈물 날 듯 아름다운 빛. 이전과 똑같은 도구들로 이와이 슌지는 순정을 말한다. 늘 그랬듯 마음을 선물처럼 곱게 담아 전한다. 마음을 담은 상자가 편지일 때도, SNS일 때도 있지만 도구가 어떻든 늘 순정을 간직한 채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상자의 모양이 바뀌어도, 그 안의 것들은 세파에 좀먹지 않고 아스라이 빛난다. 그래서 그의 편지에는 여전히 힘이 있다.
그의 순정에는 한 세월이 묻어 있다. 그의 영화 속 십대들이 애틋한 이유다. 지금 이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가겠다고 말갛게 웃는 그들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아는 우리로서는 애틋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순간의 설렘, 사소한 일상 뒤에서도 삶과 죽음은 아른거리고 있다는 진실을, 우리가 모두 알고 있지만 잊고 사는 사실을 일깨우기에. 이런 점에서 <라스트 레터>는 분명 그의 전작들에서 직선으로 이어진 연장선이다.
그 연장선에서 뜻밖의 한 걸음을 내딛는다. 이후의 이와이 월드가 어떤 색깔로 펼쳐질지 기대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러브레터>에서 이츠키/히로코와 아키바를 각각 맡았던 나카야마 미호와 토요카와 에츠시가 출연하는데, 한때 이야기의 중심에 있던 인물들의 얼굴을 빌어서 하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잠시 눈을 의심해야 할 만큼 폭삭 늙은 토요카와 에츠시의 얼굴로, 조금은 지치고 피로한 나카야마 미호의 표정으로, 두 사람은 말한다. 이야기는 이야기고 현실은 현실임을. 인간은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피아노 선율과 고운 빛으로 구성된 세계에서 가장 먼 이야기를, 온갖 세파에 지치고 닳아버린 얼굴로 건넨다.
그래서 내게는 이 작품이 소위 '화이트 이와이'로 분류되던 영화들에게 안녕을 고하는 작품처럼 느껴진다. 오래 전의 그들에게 인사를 건넬 기회를 준 느낌. 과거가 아닌 앞을 보고 나아가기 위해 가장 아름답게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하나하나 기억을 포개 놓은 느낌이다. 그렇게 그 자리를 떠나라고 다정하게 말하는 느낌이다. 미사키의 기억을 되찾은 쿄시로에게, 비로소 엄마를 떠나보낼 준비를 한 아유미에게, 그의 영화를 내내 돌아보며 살아온 관객인 내게도.
영화가 시키는 대로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넨다. 지금은 잃어버린, 만날 수 없게 되어버린 소중한 사람들을 향한 기억을 고이 갈무리한다. 이제 그 자리를 과거에 내어주고 현실을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도록. 오랜 세월 꾹꾹 담아둔 향기로운 마음이라고 해도, 불가능에 가까운 순정을 누군가의 죽음으로 얼려 잡아두었다 해도, 그 마음은 오래된 편지처럼 접어두어야 할 것이다. 나는 오늘을 뚜벅뚜벅 살아가야 할 것이다. 잘 알고 있는데 여전히 그의 순정은 다정한 유리창처럼, 자꾸 돌아보고 싶게 만든다. 기억의 시공간은 돌아봐도 잡히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계속 걸어가겠지만, 또 계속 돌아볼 것이다. 아직은 떠올릴 때마다 눈물이 날 것 같지만, 슬프고 두렵지만은 않다. 사랑의 잔상은 여전히 어딘가에서 따뜻하게 불 밝힌 유리창으로 존재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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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2021)> 리뷰
《박강아름 결혼하다(2021)》는 정직한 이름표를 단 자전적 다큐멘터리다. 영화를 감상하기 전, 우리는 제목으로부터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주인공이 박강아름이라는 사람이라는 것, 그가 결혼을 했다는 것, 이에 따라 다큐멘터리의 테마는 ‘결혼’이라는 점. 그런데 재미있는 건, 결혼 생활에서 나타나는 일을 기반으로 하하호호 예쁜 프랑스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3유로 커피를 사치라고 부르는) 적나라한 삶의 단편을 엮어낸다는 점일 것이다. 그렇게 감독이자 출연진인 박강아름은 자신만의 방식과 시각으로 왜 자신이 결혼을 했는지를 추적해보고, 결혼이란 대체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거대한 시놉시스가 있는 것은 아니나, 다큐멘터리의 특성상 매분 매 초를 관객이 관람하며 함께 겪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고작 몇 마디 문장으로 다큐멘터리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시도이겠으나, 짤막하게 소개하자면 영화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감독인 박강아름은 남편과 함께 프랑스에서 생활하며, 자신의 학업을 이어간다. 부부 중 불어에 더 능통한 사람인 그가 행정과 경제를 담당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남편인 정성만은 가사를 (그리고 훗날 육아가 추가된다) 맡는다. 성만에게 카메라가 돌아가고, 자기소개를 해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나는 식모입니다, 식몬데 무슨 이름이 있어요, 정도로 대답하는 건 코믹하게 보이나 분명 유의미한 장면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앞날을 위해 프랑스 이주에 참여하였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서 성만의 세계는 자꾸만 좁아지며, 이것이 안쓰러운 아름은 그에게 일주일에 한 번 문을 여는 ‘외길 식당’ 운영을 제안한다. 이 외길 식당은 이사를 비롯한 기타 여러 사유로 인해 시즌제로 운영된지라 두 사람이 프랑스에 있는 내내 운영된 것은 아님에도, 성만에게 분명한 활력소가 되어주었다. 자, 이런 상황에서 아름은 임신한다. 아이가 생겼다. 보리는 귀여운 두 사람의 아이이지만 여전히 성만이 독박 가사와 독박 육아를 지속한다. 이따금 부침이 있긴 하지만 두 사람의 '평범한' 일상은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굳이 엄청난 통계를 들이밀지 않더라도, 우리는 지금까지의 세상에서 보지 못했던 일들이 앞으로 펼쳐지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가부장적 제도 하에서 정상 가족이라 불렸던 시스템이 해체되고 있으며 가족 내 구성원의 권력구도가 기존과는 다르다는 걸, 그리고 이런 변화의 속도는 가속하리라는 것을. 예컨대 아름-성만 부부가 프랑스로 오게 된 것 역시 이주의 여성화(Feminization of Migration)에 부합하는 사회적 현상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다만, 감독이 보다 집중하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래. 결혼 말이다. 남들 다 한다는 결혼, 안 한 사람에겐 왜 안 하냐는 말이 쉽게 따라붙는 이 제도. 결혼은 대체 뭘까?
비혼을 외치는 청년층이 많아진다는 점, 정상가족의 해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점,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외길 식당의 손님들처럼 결혼을 위한 이주 역시 발생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가족 가치관은 분명 예전과 다르다. 다만,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하긴 어렵고, ‘부분적으로 탈전통적으로 변화(최연주, 문정희, 안정신 (2020))’ 했다고 하는데, 아름과 남편 성만의 관계에서도 그러한 요소를 엿볼 수 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기존 성별분업의 단순한 젠더 역전에 기인하고 있어, 기존 시스템의 젠더 관계를 완전히 해체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했듯 성만은 자신을 ‘식모’로 규정하며 돌봄/가사 노동을 담당하는데, 이 과정에서 그의 돌봄/가사노동은 육아휴가 등에서 비롯된 ‘일시적’인 요소가 아니다.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를 전통적인 ‘아버지’로 규정하기보단 ‘어머니’ 포지션으로 인식하는 듯 보인다.
반면 아름은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펀딩을 받는 등 경제적 책임을 이끌고, 프랑스인에게도 어려운 관공서 서류 제출 등을 신경 쓰는 역할을 맡는다. 또한 남편을 위해 외길 식당을 먼저 제안했음에도 좋은 식재료를 쓰는지라 늘 발생하는 적자를 떠올리고, 매 순간 가계부를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며 성만과 싸우기도 한다. 이러한 관계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인 보리가 태어난 후에도 지속된다. 물론 아름 역시 가사노동에 일부 참여하지만, 주 양육자 포지션에 위치한다고 말하긴 어렵다. 이러한 모습에서 나는 김경민(2021)이 인용한 러딕의 구절을 일부 반복하고 싶다. 그러니까,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자녀를 낳는 경험’을 선택적으로 할 수 있으나 ‘자녀 양육자로써 운명 지워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름은 그렇게 전통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답습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난한 일상 속에서 아름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왜 결혼을 하려 했을까? ‘아버지’라는 위치에 더 가까운 – 그러니까 집안의 ‘가장’인 그는 거듭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왜 비혼주의자였던 성만과 결혼했고, 아이 계획을 세울 때 침묵한 성만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을까…….
그가 방황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 일부분은 아름의 과거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최연주, 문정희, 안정신 (2020) 은 개인의 가족가치관은 개인 자신의 성장 경험에서 발생한다 말한 바 있다. 즉, 자라는 동안 매일 봐온 가족/부모의 가치관 등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화하여 미래의 결혼 여부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아름 역시 이러한 부분을 설명하고자 함인지, 영화 내에서 자신의 성장과정을 짤막하게 언급한다. 남동생에게만 집중한 아버지, 아버지에게 관심을 끌고자 애썼던 어린 소녀에 대해서. 하지만 오로지 과거에서만 대답을 찾아야 할까? 어쩌면 일찍 세상을 뜬 아버지의 빈자리를 보며 저도 모르게 안정적인 가정을 꿈꿔왔을지도 모르지만, 아름은 과거에서만 이유를 찾지 않는다. 그는 외길 식당 시즌 2를 계획하고 부족한 시간을 쪼개서 손님들에게 묻는다. 짧은 시간 동안 신선한 시각과 사유가 점차 흘러들어온다. 프랑스의 팍스(PACs)라는 새로운 개념도 그렇게 영화에 등장했다. 그러나 아름은 여전히 자신의 물음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결혼이란 '남녀가 정식으로 부부 관계를 맺'는 것이라지만 사회/문화적으로 결혼은 이보다 더 많은 것을 포괄한다. 아름이 말했듯 입덧이란 미디어에서처럼 우아한 ‘우욱’ 정도가 아니었고 개인마다 다른 신체적 증상이었다. 마찬가지로 결혼 역시 미디어에서 비춰주는 양 매일매일 완벽하고 풍성한 생활을 담보하는 사회 시스템이 아니며 연애시절처럼 매양 낭만적일 순 없다. 주례에서도 알 수 있지만, 결혼을 통해 일상을 공유하게 된다는 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해야 한다는 뜻이다. 즐거울 때야 상관이 없겠다만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건 어쩔 수 없다는 걸 이성적으로 이해한다 해도 어렵고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이런 시간이 연애 시절보다 늘어난다는 것. 그것이 어쩌면 결혼의 단면일 것이고, 《박강아름 결혼하다》는 그런 과정을 미화하지 않았다.혼전 합의서를 통해서든 아니든, 합리적으로 가사를 분담하고 경제적 책임감을 공유하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점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젠더가 단순히 전복된 관계를 살고 있는 아름-성만 부부가 기실, 처음부터 끊임없이 합의하고 민주적인 가정을 이룩하고나 노력했을지라도 아마 이 과정은 어느 순간부터 중단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 시점은 보리가 태어난 이후일 확률이 높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본이 풍부하지 않은 상황에서 아이를 키울 때엔 너/나를 가릴 시간조차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족의 공동체적 특성이 강조되고 가족 구성원 간의 자원 공유가 미덕으로 수용(나성은 (2014))’되는 동안, 가족 내의 권력관계는 쉽게 기울어지기 마련인데, '사랑'과 '협력'이 캐치 프레이즈로 내걸린 이상 구성원의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는 점차 미뤄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적인 결혼(생활)은 그럼 무엇인가? 에 대한 내 대답은 '글쎄'이다. 몇 천년 전부터 인류는 이 물음에 대해 대답하려 했지만 여전히 질문을 하고 있는데, 내가 감히 이것이 정답입니다, 하고 무언가를 내놓을 자신은 없다. 정 안되면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순 있겠다만, 다큐멘터리와 함께 고민하다 보면 관객은 관객 나름의 대답을 찾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다.
너무 비관적인 이야기만 한 걸까? 아마 영화 내에서 아름이 자신이 겪는 결혼의 특수성을 강조하기 위해 어떤 캐릭터성을 강조/축소하고, 일상을 편집한 측면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여튼 결혼에 대해 환상을 심어주는 멋진 드라마와 영화는 이미 많으니까, 그러한 미디어와(마음에 드는 작품 하나를 마음속으로 떠올리고) 《박강아름 결혼하다》를 동시에 펼쳐 놓고 생각해보자. 결론적으로 결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 모든 것의 총체라고밖엔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만나 아웅다웅 삶을 일체화 시키며 추억을 쌓고, 헤어질 수 없는 사이로 변모하는 과정 말이다. 외길식당의 손님이 말했듯 자신의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이게 다 너 때문이라고 원망하는 과정이 수반될 수밖에 없을지라도, 결혼이란, 관계의 한 자락에서 낭만에 취해 이런 선택이 있었기에 내가 네 곁에, 그리고 네가 내 곁에 있나보다 대화할 수 있는 삶의 한 양태가 아닐지.
★★★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한 후, 주관적 견해에 따라 작성되었습니다.
* 참고문헌
김경민 (2021). 베트남 결혼이주여성의 ‘좋은 엄마’ 되기: ‘어머니됨(mothering)’ 인식과 실천에 대한 고찰. 비교문화연구, 27(1), 5-56.
나성은 (2014). 남성의 양육 참여와 평등한 부모 역할의 의미 구성. 페미니즘 연구,14(2), 71-112
최연주, 문정희, 안정신 (2020). 미혼 남녀의 가족건강성과 결혼의향의 관계 : 가족가치관의 매개효과. 한국지역사회생활과학회지, 31(4), 663-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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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MFF 인터뷰] 무채색의 꿈을 채색하는 영화
무채색의 꿈을 채색하는 영화 '오랜만이다'의 이가섭 배우
제18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한국경쟁 부문 영화로 선정된 '오랜만이다'는 같은 꿈을 꾸는 두 남녀 주인공의 이야기를 음악과 함께 담아낸 영화다. 8월 13일, 엽연초하우스에서 이가섭('오랜만이다' 현수 역) 배우를 만나 보았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영화 '오랜만이다'라는 작품에서 현수 역할을 맡은 배우 이가섭입니다.
영화 '오랜만이다'에 대해서 소개해주세요.
‘오랜만이다’라는 영화는 누구나 다 겪었던 꿈이라는 소재에서 출발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속 등장하는 음악의 가사가 굉장히 와닿고, 자신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로 만들어졌습니다. 음악이라는 소재, 꿈이라는 스토리, 색감 등 다양한 매력을 가진 영화입니다.
관객들이 영화에서 주목해줬으면 하는 부분이 있으실까요?
연경의 서사를 조금 주목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른이 된 연경이가 사회를 생각하면서 버스를 타고 있는 장면에서 연경이의 눈을 보면 뭔가 많이 느끼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연경이의 감정선을 따라가시다 보면 자연스럽게 음악 가사와 이런 게 잘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를 통해 청춘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어릴 때는 꿈이라는 게 항상 존재하잖아요. 그런데 점점 커가면서 꿈이라는 단어 자체가 되게 무채색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꿈이라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만 해도 저는 되게 행복한 순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극 중 현수가 하는 말을 듣고, ‘꿈이라도 가지고 있는 게 참 좋은 생각인 것 같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습니다.
영화에서 꿈에 대한 위로를 주는 장면이 많았는데 배우님께서 위로받은 장면은 무엇인가요.
위로보다는 공감을 한 장면이 많았습니다. 내 손 앞에 있는데도 안 잡히는 느낌을 봤을 때, 그것을 보면서 ‘나도 그랬었는데, 나도 그랬었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극 중에서 피아노를 치셨는데 원래부터 피아노를 치셨나요?
아니요. 이번에 역할을 위해 연습했어요. ‘떴다 떴다 비행기’도 한 손으로만 할 줄 아는 실력이어서, 안 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노력하니까 되더라고요. 뭔가 취미가 생긴 것 같아 즐겁고 좋았습니다. 극 중에 ‘비창’을 연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냥 헤드폰 쓰고 혼자서 치고 있으면 괜히 ‘나 좀 뭔가 멋있어 보여’ 이런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웃음).
영화 속 가장 좋아하는 OST는 무엇인가요.
‘너의 말들은’이라는 곡이요. 가사에 ‘내가 나의 말은 나를 좀 무너지게 만드는데 너의 말은 나를 안정적으로 만든다’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과거 연경이가 현수한테, 현수가 연경이한테 해줄 수 있는 말들이었다고 생각해서 더 좋았어요.
마지막으로 관객들에게 한 마디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희 영화 풋풋한 이야기를 담고 있거든요. 웃으면서 볼 수 있는 편한 영화이고, 좋은 음악들이 많이 있는 영화이니 즐겁게 많이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글: 하이스트레인저 김혜지
사진: 하이스트레인저 김민서, 신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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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 레이미, 마블에서 B급 감성을 뽐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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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레이미 감독은 토비 맥과이어 주연의 <스파이더맨> 시리즈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히어로 영화 장르에서 액션과 드라마를 모두 잡은 흔치 않은 케이스였다. 그는 데뷔작인 공포영화 <이블 데드>로 자신이 가진 재능을 보여줬다. 그가 처음 적용했던 악령 시점으로 등장인물들을 따라가는 카메라 워크는 이후에 샘 레이미의 연출작에 거의 매번 다시 재활용되었다. 또한 시체의 팔이 땅을 뚫고 손을 뻗으며 등장하는 장면도 종종 사용된다. 무엇보다 샘 레이미는 그가 좋아하는 B급 영화의 감수성을 포기하지 않고 그가 시도하는 새로운 영화에 잘 녹여 사용하면서 그의 색깔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그가 연출한 작품은 다양하다. <스파이더맨> 같은 히어로 영화, <이블데드>, <드래그 미 투 헬> 같은 호러, <심플플랜> 같은 스릴러 그리고 <사랑을 위하여> 같은 드라마 장르에도 자신만의 색깔을 입혀 완성해냈다.
그가 이번에 택한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마블의 영화다. 마블이 계속 연달아 제작하고 있는 영화들은 각 히어로 별로 고유의 특성을 살린 개별 이야기를 하면서도 전반적 관점에서 영화들을 조망해보면 개별 히어로들의 이야기들이 연결되어 있어 아주 크고 넓게 구축되고 있는 세계다. 그래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히어로 영화들에 새로운 캐릭터나 확장된 세계관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그 범위를 더욱 넓히는 전략을 쓰고 있다. 이렇게 거대하게 구축된 A급 세계관 중 하나를 B급 감성을 뽐내는 샘 레이미가 연출하게 된 것은 꽤 의외다.
B급 감성의 샘 레이미 감독이 다시 선택한 히어로 영화
샘 레이미는 2013년에 연출한 <오즈 더 그레이트 앤 파워풀> 이후 다른 영화를 연출하지 않았다. 그동안 다른 영화 제작에만 간간히 참여를 하다가 <스파이더맨>에 이어 두 번째로 마블의 <닥터 스트레인지>를 택한 것이다. 이번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사실 연출 자유도가 그렇게 높지 않은 편이다. 이미 마블 수장 케빈 파이기와 그의 동료들이 만들어놓은 세계관 속이고 미래의 방향이 어느 정도는 정해져 있는 시리즈에 자신의 색깔이 분명한 샘 레이미가 참여하는 것이 그렇게 썩 잘 어울리지는 않는다. 게다가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캐릭터는 이미 캐릭터의 특성이나 성향이 대부분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재창조하거나 감독의 색깔을 덧붙이는 작업은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샘 레이미 감독의 인장이 강력하게 박혀있는 영화다. 이미 구축된 세계관, 캐릭터에는 손대지 않으면서 감독이 활용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로 드러내면서 이 영화만의 개성이 생겼다. 다른 유니버스로 이동하는 장면, 드림 워킹으로 다른 유니버스로 이동하는 장면에선 샘 레이미가 잘하는 시점 카메라를 활용하고 있고, 그가 <이블데드>에서 활용했던 시체가 땅 속에서 손을 뻗는 장면도 이 영화에 그대로 오마주 된다. 또한 감독 특유의 B급 감성과 유머가 영화 전반에 녹아들어 있어 그 감성을 좋아하는 팬들의 마음을 건드린다.
영화는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지난 <스파이더맨:노 웨이 홈>에서 실수로 열어버린 멀티버스 때문에 스트레인지가 만나는 위험이 담겨있는데, 완다가 흑화 된 스칼렛 위치(엘리자베스 올슨)가 이 영화의 빌런을 맡고 있고 유니버스 간 차원 이동 포털을 열 수 있는 아메리카 차베즈(소치틀 고메즈)가 등장해 마블의 세계관을 더욱 확장시킨다. 차원 이동을 통해 자신의 아이를 찾으려는 스칼렛 위치와 그것을 막으려는 스트레인지의 대결은 두 마법사의 대결이라는 측면에서 독특하고 치열하게 펼쳐진다.
영화의 대결구도는 분명하다. 스칼렛 위치는 다른 차원에 있는 자신의 두 아들을 뺏으려는 인물이고, 스트레인지는 그것을 막기 위해 차원 이동 능력이 있는 차베즈를 지키려고 한다. 두 캐릭터의 싸움은 자신의 아이를 차지하고 보호하려는 대결로 해석할 수 있다. 비록 진짜 자식은 아닐지라도 이들이 공격하고 보호하는 각각의 목적 자체는 일종의 유사 자녀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특히나 스칼렛 위치가 뿜어내는 사악한 기운은 샘 레이미 감독의 연출이 더해지며 더욱 공포스럽고 파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이 영화의 중심인물은 분명 닥터 스트레인지지만, 영화를 보고 기억에 더 남는 건 스칼렛 위치의 모습이다.
화려한 영상에 담긴 스칼렛 위치와 닥터 스트레인지의 대결
스콧 데릭슨 감독이 연출했던 <닥터 스트레인지> 1편에서는 시공간을 뒤트는 마법을 보여주는 시각효과가 인상적이었고, 꽤 많은 분량이 영화에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번 2편에서는 시공간이 뒤틀리는 장면은 줄어들고 다른 유니버스로 이동할 때 순식간에 화면의 질감이나 특성이 변화되는 장면이 등장하고 마법 능력을 이용한 타격 액션이 영화에 주로 담겼다. 특히나 영화 중반 다른 버전의 닥터 스트레인지를 만나 대결을 벌이는 장면에서는 음표를 이용한 독특한 액션 장면을 보여주며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여기에 유머까지 더해져 샘 레이미 감독의 인장을 붙이며 이것이 그의 영화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멀티버스라는 다중우주를 이용하는 영화인만큼 영화는 다른 유니버스의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예고편에서부터 추측 가능했던 여러 캐릭터들이 등장하게 되고 스칼렛 위치와 대결을 벌이게 되는데 애초 생각했던 것보다 그렇게 많은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고 다른 유니버스의 캐릭터를 조금은 보여주기 식으로 활용하고 퇴장시켜버린다. 그런 측면에서는 멀티버스의 다양한 캐릭터에 기대를 했던 관객들이라면 영화가 조금 작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새롭게 등장하는 캐릭터를 활용하면서 긴장감을 극대화시키고 그들의 퇴장 이후 다시 스칼렛 위치와 닥터 스트레인지의 대결에 집중하면서 넓혔던 이야기를 다시 압축하여 제시한다. 그런 방식으로 캐릭터를 이용하면서 영화적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한다.
샘 레이미 감독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적용할 수 있는 범위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이야기나 캐릭터 이외의 부분에서 자신의 색깔과 하고 싶은 것들을 풀어낸다. 이야기가 그렇게 촘촘하지 않았던 <닥터 스트레인지>의 1편이 뛰어난 시각효과로 좋은 평가를 받은 것처럼 이번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역시 시각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 감독 특유의 색깔이 화려한 영상 효과와 결합되면서 영화가 보여주는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닥터 스트레인지를 맡은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나 스칼렛 위치를 맡은 배우 엘리자베스 올슨은 기존 마블 시리즈에서 보여줬던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어 화려한 볼거리에 더욱 빠져들게 만든다. 그렇게 배우들의 시너지를 화면상에 적절하게 표현하게 만든 것도 감독의 좋은 역량이 발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진입장벽이 다소 높은 영화다. 닥터 스트레인지의 전편과 <스파이더맨: 노웨이홈>을 봐야 닥터 스트레인지 캐릭터와 그가 겪는 멀티버스를 이해할 수 있고, 스칼렛 위치의 탄생을 보여주는 시리즈 [완다비전]을 봐야 이번 영화에서 스칼렛 위치가 왜 빌런이 되었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계속 확장되고 있는 마블의 영화들이 이제는 시리즈와 영화를 넘나들기 때문에 새로운 팬들을 끌어들이기에 어려운 환경이 되어가고 있다. 샘 레이미 같은 색깔 있는 감독을 데려다 연출에 활용하면서 공을 들이고 있지만 계속 이어질 마블의 영화들이 과연 계속 힘을 받을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할 것 같다.
Rabbitgumi의 영화이야기 유료 뉴스레터에도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와 관련된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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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키 17>, 미래일까 현재일까, 상상일까 현실일까
‘봉 감독이 돌아왔다.’ 그가 새로운 작품과 함께 돌아온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설레었던가. 회갈색 빛으로 표현할 수 있을 듯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관객들의 마음에 찝찝함을 더하고 현실에 대한 의문과 미래에 대한 고민을 품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재치를 던져줌으로써 자칫하면 질척 질척 무겁기만 할 수도 있는 영화의 분위기를 유하게 이끌어간다. 그렇게 우리는 그가 창조해 낸 이야기를 통해 현실을 바라보고, 우리가 애써 모른 척 해왔던 무언가와 눈을 맞춘다.
그런 봉준호 감독이 로버트 패틴슨과 만났다. <트와일라잇>으로 한국 대중에게 익숙할 로버트 패틴슨은 사실 그간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변화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 그의 다채로운 연기 스펙트럼으로 그를 눈여겨보고 있던 봉준호 감독은 <미키 17>을 구상하며 주인공 역으로 바로 로버트 패틴슨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 <미키 17>을 통해 자신의 연기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영화를 본 박찬욱 감독은 ‘아카데미 위원회는 로버트 패틴슨에게 주연상과 조연상 두 개를 주어라!’라는 평까지 남겼으니 말이다.
오랜만의 봉준호 감독의 작품이 돌아다는 소식에 설레며 개봉일만을 기다려왔다. 그렇게 개봉일 아침 바로 극장으로 달려가 마주한 그의 작품은 우리에게 미래와 사회에 대한 고찰을 하게끔 만들고 있었다.
<미키 17> 한국판 포스터와 주인공 미키(로버트 패틴슨 역) (C) Warner Bros Korea
영화 <미키 17>은 2050년, 미래와 우주를 배경으로 한 공상과학 영화다. 지구에서 사채 빚으로 인해 목숨을 위협당하는 미키(로버트 패틴슨 역)가 새로운 행성의 개척 프로젝트에 지원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무 기술도 능력도 없던 미키가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지원할 수 있던 유일한 직군은 ‘익스펜더블 expendable.’ ‘소모용’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 직군에 지원하기 전 미키는 지원서의 세부사항을 자세히 읽었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 직군의 주요 업무는 수많은 죽음을 겪으며 복제당하고 또 죽음을 겪는 실험체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죽음을 피하기 위해 반복되는 죽음으로 뛰어든 미키는 어느 날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귀환한다. 그런데 힘겹게 몸을 누인 자신의 침대에는 또 다른 미키가 있었다. 둘의 미키가 존재해서는 안 되는 세계에서, 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미키 17>은 그린다.
이번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첫 우주 공상과학 영화, 우주 SF 영화다. 미래와 우주를 배경으로 해서일까, <미키 17>에서는 지구가 미래 직면하게 될 모습과 과도하게 발전하는 기술이 마주할 이슈 등을 그린다. 복제 인간 미키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 또한 바로 그 이슈 중 하나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독창성은 원작소설 《미키 7》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은 원작소설에 그만의 각색을 더해 <미키 17>을 완성해 냈다. 원작이 과학적인 요소를 많이 담고 있다면, 봉 감독은 각색을 통해 인간냄새나는 SF 영화를 탄생시켰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각색 포인트는 바로 원작에서보다 주인공 미키를 10번이나 더 죽였다는 점이
“미키는 불쌍하고 찌질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캐릭터입니다.”- 봉준호 감독 -그럼 영화에 대한 소개는 여기까지 간략하게 하고, 이제는 영화 속 세계를 고민하고 성찰하게 만들 포인트들을 함께 나누어보고자 한다. 부디 여기서부터 등장할 내용을 읽기 전 영화를 만나고 왔기를 바라며 말이다.
*본 게시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죽어도 복사할 수 있는 미키는 '죽어도 또 만들면 그만'인 존재로 취급당한다. (C) Warner Bros Korea
무뎌지는 인간성에 대한 고찰
미키는 실험을 위해 반복해서 복제되는 존재다. 그의 몸은 가장 처음 실험을 위해 스캔해 둔 몸을 복제하여 만들어지고, 그의 기억은 가장 마지막 기억을 데이터로 불러와 새로운 몸에 심으며 이어지게 된다. 그렇게 복제를 통해 죽음과 삶을 반복하는 미키를 대하는 주변인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그를 두고 무생물체보다 못한 취급을 하기도 하며, 인류사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그를 불필요하게 죽음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주변인들의 모습을 통해 봉준호 감독은 발전하는 기술 앞에 점차 무뎌지는 인간성을 그린다. 영화 속 미키는 ‘실험 인간’이다. 주인공인 그의 역할과 감정에 이입하여 영화를 보게 되는 관객들은 자연스레 반복되는 실험의 잔혹함과 상실되어 가는 인간성의 더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인간’이 대상이고 그 실험이 ‘카메라 앞’에 비쳐 우리에게 영화라는 ‘가상의 이야기’로 공개되었다는 점만 다를 뿐, 이러한 실험은 과거와 현재에 존재해 왔다. 물론 그 시간과 장소에는 미키의 곁을 지켜준 나샤 같은 따뜻한 인간 또한 있었으리라. 하지만 정말 이처럼 무뎌지는 인간성은 그저 공상과학 영화, 가상의 이야기 속 상상에 불과하다 할 수 있을까.
지난 날의 '나'가 눈 앞에 있다면, 부끄러울까 안타까울까 자랑스러울까 사랑스러울까 (C) Warner Bros Korea
미키, 같은 듯 다른 나와 나
미키는 같은 형태의 몸으로 복제되지만, 그 기억은 데이터로서 백업되어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렇기에 처음과 같은 미키가 복제되는 게 아닌 지난 미키에서의 죽음을 품은 다음 세대의 미키가 태어난다. 그래서일까 모든 미키는 조금씩 달랐다. 미키 A는 소심했고, 미키 B는 멍청했다. 미키 17은 순한 맛이었으며, 미키 18은 매운맛이었다. <미키 17>에서 주로 등장하는 미키 17과 미키 18은 더 큰 차이를 보여준다. 특히 이 둘은 번갈아 가며 전혀 다른 특성의 대화를 던지는 모습이 마치 천사와 악마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모든 미키는 미키였다. 단지 경험한 죽음과 기억이 조금씩 달라 그 시점의 행동이 조금씩 다르게 드러났을 뿐, 모두가 미키였다. “I hate you. 나는 네가 싫어.” 화가 많고 반골 기질이 강한 미키 18은 모든 걸 좋게 받아들이고 넘어가려는 유순한 미키 17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자신에게 자신이 싫다고 하는 미키의 모습은 꽤나 잔혹하다. 마치 거울 속의 자신에게 말을 걸듯, 과거의 자신을 두고 미래의 자신이 싫다고 하는 미키의 모습은 그가 지난 시간 받은 상처와 자신의 스스로에 대한 연민과 답답함의 표출이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결말에 다다라 미키 17이 미키 18처럼 생각하고 던지는 대사가 있다. 거기서 볼 수 있듯, 미키 18은 기존의 미키들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미키가 아니었다. 미키 17이 살다 보면 마주했을 미래의 미키였다. 사람이 살다 보면 특정 사건을 계기로 책에서 챕터를 넘어가듯 인생의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는 표현을 하지 않는가. 미키는 그렇게 ‘죽음’이라는 다소 강제적인 요소를 통해 자신의 삶에서의 챕터를 넘겨왔다. 물론 그렇게 넘어간 다음 장이 과거보다 나을지, 혹은 많은 걸 포기하거나 놓은 상태로 과거보다 더 못한 미래였을지는 미키만 알 테다. 과거의 자신을 바로 두 눈앞에 두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경험 또한 미키만 할 수 있을 테고 말이다.
감옥 같은 우주선 속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독재자의 모습은 공상과학일까 현실일까 (C) Warner Bros Korea
다른 모습으로 반복되는 과거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논하며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사회에 대해서 또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의 주요 배경 사회는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에서 새로운 인류 공동체를 키우려 하는 우주선 속이다. 이러한 사회를 주도하는 이는 지구에서 정치 활동에 실패한 정치인, 케네스 마샬(마크 러팔로 역)이다. 그가 이끄는 우주선 속 사회에는 그를 쫓아온 열렬한 지지자들과 함께 일자리를 찾아온 사람, 지구를 떠나고 싶어 도망 온 사람 등이 섞여 있다. 그들은 모두 ‘인류 번영을 위한 신 행성 개척’이라는 마샬로 인해 주어진 사명 아래 철저히 통제된 생활을 이어간다. 음식은 칼로리를 채워 살기 위해 주어지는 연료 따위의 수준이며, 조금만 실수해도 심한 질책을 당하며, 우주선 속 환경은 감옥을 연상시킨다.
우주선의 리더 케네스 마샬은 가히 독재자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자신은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나가지만, 일꾼이자 우주선 속 사회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복지와 행동은 철저히 통제된다. 그의 주장과 연설은 허술하고 허황하기 짝이 없으며, 자신의 아내와 비서에게 휘둘리는 허수아비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샬 역의 마크 러팔로 배우는 자신의 캐릭터를 두고 “봉준호 감독에게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 도대체 왜 이런 악역을 나에게 주는 걸까, 내가 뭔가 잘못했나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전했다. 또한 마샬을 두고 세계 각국의 인터뷰에서 각 나라의 특정 독재자가 떠오른다는 평이 많았다. 이에 관해 특정 인물이 모티브가 되었냐는 질문에 봉준호 감독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마샬은 과거 독재자들의 모습을 따와서 만든 캐릭터입니다.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에 현재의 누군가를 지칭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 -영화 속 우주선은 행성 개척을 위한 탐사선이기도, 일터이기도, 감옥이기도 해. 그치, 미키? (C) Warner Bros Korea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에 관해서는 물론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 듯하다. 영화의 서사가 되새기게끔 하는 식민지화의 잔혹함과 독립의 이야기는 한국인 혹은 식민 지배의 경험이 있는 나라 국민이라면 자연스레 떠올렸을 것이다. 죽음을 피해 반복되는 죽음으로 뛰어든 미키의 모습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삶에서의 선택을 되돌아보게끔 했을 것이다. 슈베르트의 마왕을 떠올리게 하는 OST에 미키를 쫓아오는 보이지 않는 마왕은 무엇일까 고민하는 이도 있었을 것이며, <미키 17>을 보며 봉준호 감독의 전작 <옥자>, <괴물>, <설국열차> 등을 떠올리는 이도 있었으리라. 물론 SF 영화라는 점에서 비슷한 요소를 지닌 다른 영화 혹은 소설이 떠오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점에서 우리는 또 깨닫는다. ‘봉 감독이 돌아왔다.’ 그의 짙은 회갈색 빛 거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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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 메인 예고편
20세기 초 프랑스에 위치한 오래된 가상의 도시 블라제
다양한 사건의 희로애락을 담아내는 미국 매거진 ‘프렌치 디스패치’
어느 날, 갑작스러운 편집장의 죽음으로
최정예 저널리스트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마지막 발행본에 실을 4개의 특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당신을 매료시킬
마지막 기사가 지금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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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재개봉 예고편
“오 캡틴, 나의 캡틴”
미국 입시 명문고 웰튼 아카데미,
공부가 인생의 전부인 학생들이
아이비리그로 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곳.
새로 부임한 영어 교사 ‘키팅’은
자신을 선생님이 아닌 “오, 캡틴, 나의 캡틴”이라 불러도 좋다고 말하며
독특한 수업 방식으로 학생들에게 충격을 안겨 준다.
점차 그를 따르게 된 학생들은
공부보다 중요한 인생의 의미를 하나씩 알아가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를 위기로 여긴 다른 어른들은
이들의 용기 있는 도전을 시간 낭비와 반항으로 단정 지으며
그 책임을 ‘키팅’ 선생님에게 전가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