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로진2022-02-08 14:17:49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클리셰
영화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 리뷰
이 심란한 마음을 어디에서부터 풀어나가야 할까. 나는 홍콩, 대만 영화를 좋아한다. 그래서 이번 영화에 대한 사전정보 없이, 아주 기쁜 마음으로 영화관에 입장했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 SNS에 해시태그를 단 리뷰를 써서 당첨되면 대만 고량주를 받을 수 있다고 해서 당연히 해 봐야지 생각했다. 이제 그러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지만, 굳이 한 마디 남긴다면 '일본 영화에서 본 난감한 캐릭터, 중국 영화에서 본 조잡한 CG, 한국 영화에서 본 불필요한 연출'이 마구 섞인, 동아시아 대통합 영화라고 하고 싶다.
영화를 안 봐도 알 수 있는 서사
영화의 시작은 나이 든 동네 아저씨들과 농구를 하던 '샤오룬'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갑자기 비가 오고, 나무 아래에서 사랑을 고백하는데 또 갑자기 번개가 치고, 예상할 수 있듯이 번개에 맞아 죽는다. 그러자 검은색 정장을 입은 저승사자가 샤오룬을 데리고 저승으로 간다. <신과 함께>를 봤다면 대만 저승은 좀 만만하게 느껴질지도.
저승에 가면 몇십 년 된 컴퓨터로 갓 죽은 인간의 삶을 평가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굿플레이스>를 봤다면 저승도 기술발전 속도가 현저히 차이나는구나 싶을 거다. 생의 정보를 이마에 바코드를 대서 알아보는 시스템은 마치 애니메이션 <코코> 같다. 저승에 가면 누구나 염주를 하나씩 받게 되는데, 착하게 살았으면 흰색 염주알, 나쁘게 살았으면 검은 염주알이다. 검은 염주알로는 인간으로 환생할 수 없어 저승에서 일을 돕는다. 염주알이 흰색으로 바뀌어야 인간 환생 확정. 자, 또 떠오른다. 지구에서 사람으로 태어나기 위해 배지를 모으는 <소울>의 아기 영혼들이. 왜 이렇게 비슷한 영화들을 끌어오냐 하면, 무엇하나 놀랍지 않았기 때문이다. 픽션은 상상의 산물일진대 '판타지 로맨스'를 표방하는 영화에서 판타지도, 로맨스도 놀라움을 안겨주지 않는다.
역시 예상할 수 있듯, 샤오룬은 죄가 많아 사람으로 환생할 수 없다. 그리고 옆방에는 죽음을 수용하지 못해서 억울해 미칠 지경인 여자 '핑키'가 있다. 이들은 갑자기 눈이 마주치고, 초면이면서 갑자기 서로를 비난한다. 둘이 욕하며 싸울 때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저 둘이 뭘 하겠구나.
그렇다. 그들은 죄를 갚기 위해 월노(月老), 우리나라에서는 월하노인이라 부르는 일을 같이 하게 된다. 두 사람의 손가락에서 나오는 붉은 실로 맺어주는 인연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아주 임무가 막중한 역할이다. 핑키는 월노가 되기 전 악귀가 되지 않겠냐는 검은 유혹을 받는데, 잠시 자신을 죽인 자에 대한 복수심에 사로잡혔다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샤오룬에 의해 저지당한다. 판타지임에도 저승이라는 배경이 광활하지도 아득하지도 않다.
캐릭터의 존재 이유
귀신도 되었겠다, 핑키는 자기를 죽인 남자를 찾아간다. 남자는 죄책감도 없이 핑키가 죽음으로써(어떻게 챙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챙긴 돈으로 호위호식하며 산다. 샤오룬은 복수를 해주겠다며 그 남자와 밖에 서 있던 오토바이를 묶고, 갑자기 남자는 오토바이와 사랑에 빠져 오토바이에 유사성행위를 한다. 이 영화, 12세 이상 관람가로 해도 될까.
핑키는 자기가 왜 죽어야 했는지도 모르고 죽었으면서, 그렇게 복수의 칼을 갈았으면서 고작 그 정도로 원한이 다 풀린다. 그리고 고작 그 정도로 샤오룬에게 반한다.
번개 맞아 이마에 상처가 생긴 샤오룬은 죽기 전의 삶을 기억할 수 없다. 파트너가 핑키와 샤오룬은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샤오룬이 원래 살았던 동네로 가게 된다. 왜 살았던 동네와 출신 고등학교를 알게 되었는지, 누가 알려줬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다 키우던 개가 샤오룬에게 달려가면서, 별안간 기억이 떠오른다. 세상에...
개를 찾으러 온 여자 '샤오미'를 보며 오열을 하는 샤오룬. 드디어 모든 기억이 떠오른다. 그렇게 쉽게 찾아질 기억이란 말인가. 허무하다.
그때부터 샤오룬은 샤오미 주변을 얼쩡거리는데, 저승의 임무를 맡은 귀신들이 너무 태만하다. 샤오룬에게 빠진 핑키는 샤오미와 다른 남자를 엮어주려고 하지만, 샤오미에게는 인연의 실이 묶이지 않는다. 왜겠나. 관객들은 다 알고 영화 속에서는 아무도 모른다.
여기서 도대체 핑키와 샤오미가 왜 존재하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핑키는 한 남자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여성, 귀신이 된 후 샤오룬을 좋아하는 여성 이외에 아무런 서사가 없다.
샤오미 역시 '샤오룬이 좋아하는 여성' 외에는 특징이 없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첫눈에 반한 여자, 샤오미가 모든 게 변한다는 걸 알아야 어른이 된다고 말할 때, "만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 라고 말하게 하는 여자, 싫다고 싫다고 아무리 거절해도 끈질기게 쫓아다니면서 고백하게 만드는 여자, 모든 기억이 사라졌을 때 갑자기 기억을 되돌려주는 여자, 귀신이 되어서도 지켜야 할 여자. 오직 샤오룬을 위해 존재하는 두 여자. 이들은 성격이라 할 것도, 배경이라 할 것도, 서사라 할 것도 없다.
두 여자주인공이 이런 마당에 남자주인공이라고 특별한 서사가 있겠나. 남자주인공 역시 '한 여자에게 사랑에 빠져 죽을 때까지 한 사람만 사랑하고, 죽고 나서도 한 사람만 사랑하는 동네 까불이' 정도로 볼 수 있겠다. 이따금 일본 로맨스 영화에 등장하는 당황스러운 캐릭터들을 모아둔 것만 같다.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에서의 당황스러움 같은.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주인공인 세 사람에 대한 묘사가 이 정도이다.
불필요한 연출
그러다 또 갑자기, 저승에서 원한을 풀지 못한 악귀가 이승에서 사람으로 환생한 과거 인연들을 죽인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박중헌쯤 된다. '파국이다'를 읊조려야 할 상황이 벌어지는데 저승에서는 손 놓고 구경만 한다.
이 악귀가 원한을 품은 것은 500년 전의 일 때문이다. 수많은 살생을 해 오던 도적떼 출신으로, 환생은 커녕 지옥에나 안 떨어지면 다행인 남자. 그런데 여기에서도 서사의 부재가 여실없이 드러난다. 이 도적떼는 왜 도적질을 하는가. 돈 때문인가? 아니다. 이들은 쫄쫄 굶는다. 의로움 때문인가? 전혀 아니다. 이들은 무고한 이들을 가차없이 죽인다. 나라에 대한 역모인가? 그것도 아니다. 설사 그렇다고 한들, 영화에서는 그 무엇도 말해주지 않는다. 악한 자들에게도 서사를 부여하지 않는 것은 그나마 다행.
원한을 품고 염라 밑에서 일하게 되지만, 자신을 배신한 자들이 줄줄이 환생하는 것을 보고 그들을 직접 찾아가 복수하기로 한다.
첫 번째 타자는 어린 아이다. 어린 아이에게 '너는 500년 전의 일을 잊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기억한다'며 양치하고 있는 아이를 공격하고, 이 아이는 또 수산물 파는 여자를 공격하고, 여자는 또 다른 남자를 공격하고, 남자는 샤오미를 공격한다. 가만히 있다가 샤오미가 공격당하자 그때서야 샤오룬과 기타 저승 인물들이 나서는데, 그 이유도 역시 알 수 없다.
문제는, 왜 보는 사람의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의 잔인함을 연출했는지이다. 목을 꺾고, 칼로 찌르고, 아기가 조개를 생으로 씹어 먹어서 피를 토해야 하는지 전혀 개연성이 없다. 악귀에게 씌인 이들은 죄다 좀비화된다. 좀비 영화, 좀비 드라마가 유행인 건 알겠다. 그렇다고 이 영화에서 그런 장면이 등장해야 했나? '만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은 사랑도 있지만 복수심도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나. 이 징그러운 복수극은 로맨스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투트랙으로 진행된다. 이 영화에서 묘사하는 '악'은 스릴감도 주지 않고, 공포심을 주는 것도 아닌, 징그러움뿐이다.
논외로, '인간의 추악한 본성' 어쩌고 하는 인터뷰들을 몇 편 읽어 보았다.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우리가 왜 영화로 봐야 하는지, 나는 아직 알 수 없다. 우리가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것은 간접경험을 통한 외연의 확장에 있다. 인간의 추악한 본성은 당장 포털사이트를 켜서 아무 기사나 눌러 보면 경험 가능하다. 굳이 간접경험하지 않아도 직접경험이 가능한 영역이지만 우리는 법과 제도와 문명과 문화의 테두리 안에서 서로 조심하며 살아간다. 욕망하지만 차마 입밖으로 꺼내면 욕먹을까 봐 속으로만 생각했던 추악함(약자를 타자화, 대상화하는 등)에 픽션이라는 핑계가 하나 생긴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인연'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서양영화에서 'God bless you'를 말하는 상황에 이 영화는 '아미타불'을 말한다. 대체로 불교적 관점의 영화이다. 윤회와 환생, 극락과 지옥이 주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맨스와 복수극은 테마라고 보기도 어렵다. 감독이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에서 보여주었던 애틋하고 풋풋한 로맨스가 한 스푼 정도 들어가 있다.
왜 샤오룬이 샤오미를 그토록 쫓아다녔는지, 악귀가 왜 여러 사람들을 죽이려고 했는지, 초반에 뿌려놓은 떡밥들이 뒤에서 조금씩 회수가 되는데(물론 납득이 되지는 않지만), 어찌 되었든 모든 생명에는 인연이 있다는 것이 중요한 메시지이다.
악귀는 매미였던 시절 자신을 살려주어서 고맙다는 샤오룬의 격한 감사 인사에 그만 마음이 스르르 풀려서 사라진다. 윤회고 극락이고 필요없다더니,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을 못 들어서 그랬던 건가 싶다.
그나마 이 영화에서 하나 마음에 담아둘 것이 있다면 인연을 소중히 대해야 한다는 것. 내가 함부로 죽인 개미도, 나쁘게 대한 사람도, 나와 친하게 지냈던 사람도 나 나의 인연이니 소중히 대하자. 그들은 어쩌면 전생에 내가 빚진 사람, 나와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이다. 만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인연이다. 너무 많이 미워하지도 말고, 너무 많이 사랑하지도 말고, 미안하다, 감사하다는 표현을 아끼지 말자. 언제 어떤 인연으로 다시 만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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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맛이 없었던 식당을 리뷰하지 않는다. 입맛이 달라서 그렇겠거니 생각하니까. 영화도 마찬가지로, 재미없었던 영화에 악평을 하지는 않는다. 십수년간 <매트릭스> 트릴로지의 열광적인 팬이었지만 <매트릭스4>에 대해서 함구한다.
하지만 시사회에 참석하여 이 영화에 대해 말할 의무가 생겼으니 이 영화를 봐야 할 이유도 안내할 필요가 있겠다.
관람 포인트1.
예쁘고 잘생긴 주인공들. 대만영화 특유의 풋풋한 로맨스 감상 가능.
관람 포인트2.
인연, 사후세계 등의 요소들과 기괴한 장면들을 좋아한다면 재미있을 듯.
관람 포인트3.
떡밥이 하나하나 회수되는 걸 보는 즐거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 받아 시사회에 참석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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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쿨하고 바르게 산화하는 혁명가의 찬란한 해방이라는 착각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만취한 한 여성이 클럽 의자에 쓰러질 듯 앉아 있다. 제대로 몸조차 가누기 어려운 상황에 한 남성이 그에게 다가간다. 택시를 부를 휴대전화도 어디 있는지 모르는 여성에게 착한 사람이라 자부한 그는 집에 가는 길에 그를 내려주겠다고 제안한다. 여성은 차에 탔고, 남성은 자연스레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 저항할 힘도 없어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여성을 침대에 눕혀 놓고 일을 벌이려는 순간, 조금 전까지 정신을 잃었던 여성은 그를 똑똑히 밑에서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그렇지만 분명하게 말한다.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물었잖아?”
카산드라 토마스(캐리 멀리건)는 대학 시절 절친 니나 피셔의 성폭행 사실을 확인하고 진상 파악과 가해자 처벌을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끝내 사건은 흐지부지 묻히고 만다. 그의 이름처럼 ‘카산드라’는 현명한 여성의 예언을 믿어주지 않아 이후 닥친 불행을 막을 수 없는 카산드라 증후군에 빠진다. 세상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명백한 진실을 간직한 채 니나와 캐시는 자퇴를 했고, 니나는 극단적 선택을 한다. 의대에 입학할 만큼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던 두 사람의 삶은 폐허가 되었고, 캐시는 니나의 안타까운 삶을 대신 갚아 줄 비밀스러운 일을 꾸민다. 그는 동네 카페에서 일하며 밤이면 취한 척 연극을 하며 몸을 가누지 못하는 자신에게 접근하는 남성들이 원치 않는 성관계를 시도할 때마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그들을 놀라게 한다. 이는 니나의 강간 피해를 곁에서 지켜본 친구로서 도와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분노가 폭발한 계기는 가해자인 알렉산더 먼로(크리스 로웰)의 결혼 소식을 듣고 나서다. 피해자는 세상에서 사라졌는데 가해자는 유능한 사회의 일원으로 정상적인 삶을 꾸리기까지 한다는 전언에 캐시는 7년 전 자신들의 인생을 망가뜨린 사람들을 찾아가 복수를 결심한다.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은 7년 전 절친의 성폭행 사건으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주인공 캐시의 복수극이다. 민감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90년대 팝송의 재해석과 힙한 연출로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영화에는 치명적인 실수가 있고, 이는 영화가 위태롭게 유지한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 캐시의 복수의 방법론에 드는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반추하다 결말에 이르렀을 때 관객은 여러 생각을 하게 되며, 굳이 내보이지 않아야 할 영화의 교묘한 속임수를 발견한다.
정기적으로 무방비 상태로 클럽에서 늦은 밤 만취 상태를 연기하는 캐시는 언제나 다음 날 아침 가족과의 식사에 참여한다. 불특정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연기에 필연적인 위험을 느낄 법도 한 캐시는 그에 개의치 않고 늘 같은 방법을 활용한다. 물론 영화 중반을 지나면 절친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과 분노를 동력 삼아 자신의 일상을 포기하면서까지 채우고 싶은 그의 의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캐시의 협박에 나가떨어지는 남성들에 비해 캐시의 ‘복수’는 상대적으로 온건하다. 유부남이나 명망 있는 남성을 대상으로 한 영화 속 ‘사냥감’은 하나같이 유약하고 머뭇거리며 한심하며, 지질하고도 ‘무해하다’. 접근한 남자들은 언제나 자신을 착한 사람이라고 포장하고, 속인 것을 알아차린 후에는 그에게 분노의 욕설 정도를 날리는 것으로 상황은 종료된다. 이름도 나이도 모른 채 그저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밖에 취급하지 않는 남성의 아둔함을 강조하지만, 노트 한 권을 빼곡히 채울 정도로 많은 남자를 겁박한 그가 물리적 협박과 위해나 남성 커뮤니티의 가십거리 혹은 ‘복수’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게 오직 그 이유일 수는 없어 보인다. 아무리 캐시의 서늘한 아우라에 기가 눌린 남성들만 만났다 하더라도 수많은 남성과의 위험한 만남을 이어간다는 설정은 그에게 보호막이 드리워져 있지 않은 이상 우연을 넘어선 작위적 연출로 보인다. 물론 이것이 영화 전체에서 피해자의 복수를 이끄는 사회적 여성성의 전형이라면 관객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흐름이다.
그렇다면 이 입만 산 남성들에게 통쾌한 한 방을 날리는 복수 활극으로 영화가 전개되는가 하면 그것은 또 아니다. 캐시의 복수는 당한 대로 갚아주는, 폭력의 피로 흥건한 과거 마초적인 복수극의 패턴과 다르다. 직접적 혹은 간접적 가해자에게 죄책감과 두려움을 심어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되돌아보게 만드는 방식은 전형성을 탈피한다. 필요 이상의 자극적인 장면을 삽입하여 불쾌감을 주는 비슷한 영화들에 비해 이 여성 복수극은 자극적인 앙갚음의 과정이 아닌 대사를 통해 끔찍한 상상을 불러일으켜 가해자를 고통받게 한다. 가해자의 변명은 한결같다. 촉망받는 한 청년의 삶을 지켜줘야 했고, 기억나지 않는다는 뻔한 거짓말에 입증할 증거는 부족했고, 술을 먹고 같이 놀러 간 피해자의 탓이 컸다는 말의 향연은 이들의 한심한 작태를 정면으로 비춘다. 대상화된 굴레를 퍼뜨려 입을 막고 주홍글씨를 남겼던 가해자에게 행하는 복수가 아쉬울 수 있겠으나 여성의 시각에서 이룩한 이 성과는 피해자의 고통을 전시하는 쪽보다는 훨씬 이성적이며 윤리적인 방법으로도 보인다.
응징은 세련되고 복수는 쿨한 캐시의 방법론을 따라가다 보면 영화 내내 그의 안위를 걱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하지만 그는 무해한 남성들을 응징하며 때로는 아파하고 혼란을 느끼는 현실적인 면모도 보여준다. 친구의 죽음 이후 자신을 가둔 죄책감과 슬픔을 이겨내고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성장일기로 끝나는가 싶던 영화는 후반부에서 그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가 버린다. 그리고 앞서 영화적 설정으로 넘어갈 수 있던 모든 것들은 한 방에 무너진다. 강간의 장본인인 알 먼로의 총각파티에 스트리퍼로 찾아간 캐시는 그에게 마지막 복수를 감행한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로 끝나고 캐시는 니나를 죽였던 바로 그에게 똑같이 죽임을 당한다. 그 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일상을 포기하며 캐시가 얻으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캐시의 죽음으로 이 복수의 끝은 혼돈으로 가득 찼다. 클럽에서의 남자 사냥에서도, 자신의 커리어를 걸고 행했던 가해자를 향한 복수의 과정에서도 불안하지만 꽤 깔끔하게 해결하던 주인공은 이 계산된 복수의 방법론을 불쾌하고 황망하게 마무리한다. 3분이 넘는 롱테이크 신으로 강간 가해자로부터 죽어가는 여성의 모습을 관객에게 들이미는 이 잔인한 마무리는 그간 영화가 지켜 온 톤과 매너를 붕괴하고 과거 남성들이 자행한 폭력을 대물림한다.
캐시는 자기 죽음을 예상한 듯 속죄한 변호사에게 모든 증거를 남겼고, 알 먼로의 결혼식 날 마지막 복수가 이뤄진다. 그 과정을 목격한 방관자인 라이언에게 예약 문자로 ‘쿨하게’ 알리는 엔딩은 기괴하고 잔혹하다. 완벽히 통쾌한 복수는 없다는 사실은 10여 년 전 이금자의 처절한 속죄를 지켜보며 경험한 바 있다. 그러나 〈프라미싱 영 우먼〉이 죽음으로 모든 복수가 완성되는 결말을 의도했다면, 이제 관객은 캐시가 영화 전반에서 자초한 과거의 위험으로부터 ‘어떻게’ 살아남았는가가 아닌, ‘왜’ 살아남았는가를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감독은 영화의 절정, 그러니까 깔끔하고 힙한 복수의 자기만족적인 완성을 위해 아껴놓고 캐시를 살려놓은 것이다. 영화는 피해자의 입장과 여성의 죽음이 갖는 의미는 차치한 채, 피해자의 복수를 위해 제 몸을 바치는 소꿉친구라는 진부한 설정을 두고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강조하며 파스텔 톤 색상과 펑키한 분위기의 영화적 오락성을 강조하는 패착을 저지른다. 우정을 위해 열렬히 복수하고 산화하는 삶을 애초에 블랙코미디로 상상했다면 피상적인 인식의 발로이자 얕은 위로에 불과하다. 이는 여성 혐오를 대처하는 캐시의 대사만큼이나 평면적이고 일차원적이다.
캐시라는 캐릭터는 하나의 인물로 기능한다기보다는 감독이 원했던 극의 주제의식을 의인화한 전형이라는 인식을 지울 수 없다. 여성의 비극과 복수를 연출하는 에머랄드 펜넬 감독의 스타일은 그가 참여했던 전작 드라마처럼 펑키하고 화려하다. 그 안에서 캐시의 장렬한 희생은 여성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니나에서 캐시로, 다시 점장 게일에게 전달되는 목걸이는 죽음으로 대물림하는 고통의 악순환이다. 고통받는 이들은 잊지 않기 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살아남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캐시의 이름은 다르게 들린다. 여성의 이야기가 부정되고 사회로부터 침묵당하는 모습이 트로이 전쟁을 예측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못한 카산드라의 비극과 겹쳐 보였던 잠깐의 순간은 사라진다. 대신 윤리적이고 세련된 여성영화라는 외면에 이용당한 희생양인 캐시라는 인물이 '기꺼이' 적진으로 뛰어드는 트로이 목마로 전용되는 장면만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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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애하는 나의 화양연화(花樣年華)에게
친애하는 나의 화양연화(花樣年華)에게.
영화 해피엔드(HAPPYEND) 리뷰
네오 소라 감독의 첫 장편영화 《해피엔드》를 극장에서 본 지 몇 주가 지났건만, 그 여운은 여전히 잔잔하게 마음에 머물러 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이 영화를 자꾸만 떠올리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사운드트랙의 매혹적인 힘 덕분이다. 평소 1960~80년대 영국 밴드 음악이나 재즈를 즐겨 듣는 편이라 테크노 장르엔 익숙하지 않은 편이지만, 《해피엔드》는 그런 개인적인 음악 취향을 순식간에 무장해제시켰다. 사실 음악이 좋다면, 장르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신의 흐름과 감정선에 따라 클래식과 테크노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사운드트랙은 각 장면을 더욱 풍부하게 채워주며, 영화의 정서와 이야기를 고조 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래서 아직 이 영화를 만나보지 못한 이가 있다면, 꼭 극장에서 경험해보시길 권하고 싶다. 단순히 보는 것 이상으로 사운드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누적 관객 수 10만 명 돌파를 축하하며, 미뤄두었던 리뷰를 남겨본다.
하나, 꽃 화(花): 음악으로 피어난 열정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미성년자인 유타와 코우는 출입이 제한된 클럽 앞을 서성인다. 그러다 작은 잔꾀를 부려 클럽 안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한다. 사실 이들에게 다른 유흥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클럽에 몰래 들어온 이유는 오직 하나 음악 뿐이다. 점멸하는 스트로브 조명 속, 무대를 장악한 DJ를 천진하면서도 동경 어린 눈빛으로 바라본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시선은 DJ가 아닌 그가 빚어내는 사운드, 그 마법 같은 리듬에 닿아 있다. 지금 이 순간 음악은 이들의 전부다. 그리고 그 열정은 클럽 안을 넘어 현실의 공간으로 이어진다.
둘, 모양 양(樣): 음악연구동아리라는 울타리
음악이 아이들의 가슴에 뜨거운 열정을 지폈다면, 음악연구동아리는 그 열정을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아이들은 이 울타리 안에서 함께 어울리고, 때로는 갈등을 겪기도 하며 그럭저럭 즐거운 학창 시절을 보낸다. 영화 초반, 유타와 코우를 비롯한 친구들에게 음악은 곧 서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세계의 전부다. 하지만 그 아늑하고 안정적이던 울타리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건, 그 너머의 사회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면서부터다.
영화는 가까운 근미래의 일본을 배경으로 삼는다. 이 사회는 기존보다 훨씬 노골적인 방식으로 소수자와 약자를 분리하고 배제한다. 재일 교포 4세인 코우, 미국인 아버지와 떨어져 일본에 사는 톰, 중국어를 잘하지 못하는 대만계 혼혈 밍, 또래보다 왜소한 체격의 아타, 그리고 무관심한 부모 아래 자란 유타까지. 이전까지는 음악이라는 공통의 열정이 아이들을 하나로 묶었지만, 각자의 배경을 기준 삼아 서열을 매기는 사회에서 동아리는 온전한 울타리가 될 수 없었다. 그렇게 아이들이 몸담고 있던 작은 세계는 사회의 기준 앞에서 점점 위태로워진다.
재난을 빌미로 한 감시와 억압
일본 사회는 오랜 시간 지진이라는 재난을 반복적으로 겪어왔다. 그 경험은 내진 설계나 대피 요령 같은 현실적인 대응을 가능하게 했지만, 사람들 마음에는 언제 또 재난이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이 깊이 뿌리내렸다. 이 불안은 사회 전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고, 혼란이 커질수록 권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그러나 권력은 그 불안을 해소할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 정부는 근본적인 문제를 외면한 채 감시를 강화하고, 사회적 약자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이는 물리적 폭력을 앞세운 전통적 공포 정치와는 방식이 다를 뿐,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는 재난에 대한 불안을 조장하고 이를 관리하는 방식으로 지배를 유지한다. 공포는 정권을 향하기보다는, 약자를 향하도록 유도된다. 형태만 달라졌을 뿐, 공포를 통한 지배는 여전히 유효한 정치 수단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코우는 어느 순간, 차별을 너무도 당연하게 수용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마주한다. 그 순간, 그는 처음으로 차별이라는 감각에 대해서 곱씹게 된다.
셋, 해 년(年): 시간의 흐름과 관계의 변화
둘의 시간을 잇던 빨간 대교
다섯 명의 멤버 중에서도 유타와 코우의 관계는 유독 애틋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주관적인 인상일지도 모르지만, 누구나 이런 친밀함이 어떤 감정인지 잘 알고 있다. 우리 역시 청소년기,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이 가장 즐겁고 유쾌했던 시절을 보냈으니까. 그리고 그 무리 속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더 각별하게 마음이 통했던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다.
까무룩 밤이 새도록 일탈을 벌인 뒤, 동이 트는 새벽 대교 위에서 유타는 장난스레 “사랑해”라고 외친다. 그 말에 진저리를 치며 웃던 코우. 결국 유타는 끝내 코우의 입에서도 “사랑해”라는 답을 받아낸다. 짧은 시퀀스지만, 두 사람의 다정하고 친밀한 관계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가장 가까웠던 관계에도 서서히 틈이 생긴다. 청소년기에는 흔히 겪는 변화다. 특히 코우는 오래전부터 자신에게 너무도 자연스럽게 가해졌던 차별과 배제에 점차 의문을 품기 시작한 듯하다. 다만 그동안은 너무 어렸고, 친구들과의 관계가 더 중요했기에 그런 문제를 깊이 고민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으로 사회적 자각과 일련의 성장통을 겪으며, 우정보다 더 큰 질문들이 고개를 든다.
나는 왜 학교에서 소외되어야 하는가?
학생들은 왜 학교라는 모든 공간 안에서 감시받아야 하는가?
나의 어머니는 왜 차별을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가?
학교는 왜, 사회는 왜?
이런 부조리함에 온점이 아닌 물음표를 찍기 시작하면, 문제를 더 이상 간과할 수 없게 된다. 코우가 자신의 급우이던 운동권 소녀 후미와 교류를 시작한 것도, 학교의 불순한 감시 체제와 시스템에 대하여 묵과하지 않고 교장과의 대립을 세우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넷, 빛날 화(華) : 화려함, 빛남, 번성함
아이들은 졸업을 앞두고 각자의 갈림길에 선다.
톰은 미국에 있는 아버지를 찾아 일본을 떠나고, 코우는 자신이 겪어온 차별에 맞서 함께 저항할 새로운 이들과 만나며 삶의 동력과 시위의 효능감을 발견한다. 대학 장학금을 받는 경사도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유타와의 관계는 서서히 멀어진다. 한편 유타는 교장의 차 사건을 계기로 퇴학당하고, 삶의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서로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주어진 환경과 삶의 방향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이들은 각자의 길을 향해 나아가며 어른이 되어간다.
영화 해피엔드(HAPPYEND)의 의미
네오소라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큰 세계와 작은 세계.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로 보면 끝(END)이지만, 주인공들의 우정은 행복(HAPPY)이지 않나. 서로 다른 두 개가 맞물리는 감각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 출처: 맥스무비 인터뷰어른이 된 그들이 살아갈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자연스레 영화 이후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된다. 어쩌면 학교 안의 디스토피아보다 더 숨 막히는 현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학교 밖의 세상은 결코 보드랍지 않다. 특히 소수자와 약자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부끄럽지만, 우리는 아직 그런 사회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코우는 안다. 세상을 바꾸는 움직임과 연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것이 개인에게 얼마나 깊은 잔상을 남기는지를.
이미 몸으로 겪고, 마음으로 배워온 진실이다. 그래서 그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살아갈 미래와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갈 가능성을.
끝(END)이 진짜 끝이 되지 않도록, 그는 앞으로도 목소리를 낼 것이다.
다섯, 화양연화(花樣年華) 그 찬란한 기억
지치고 힘든 순간이 찾아올 때면, 행복(HAPPY)을 떠올리자.
우리는 언제 가장 뜨겁고 빛났을까?
어떤 순간은 찰나였지만, 영원처럼 기억된다.
삶을 살다 보면 곤혹스럽고 고단한 시간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들에겐 돌아볼 수 있는 찬란한 기억이 있다.
오로지 좋아하는 것만을 쫓고,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함께했던 시절.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은, 그들의 가슴속에 오래도록 살아남아 위안이 되어줄 것이다.
그래서 그들만의 그 추억만큼은 분명, 해피엔드(HAPPY END)라는 말로 남겨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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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이민자 철수씨가 남긴 유산
삶을 우리의 선택대로만 살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 우리 모두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지만 태어난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준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 일단 살기 위해 발버둥 친다. 어린 시절엔 부모님과 친지들이 살 수 있는 도움을 주고, 조금씩 자의식이 생기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표현한다. 그렇게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얻고 싶은 것을 취한다. 그렇게 자유의지가 생긴 우리는 주변의 상황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겠지만 최대한 자신이 할 수 있는 자유를 최대한 누리면서 살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주변 상황이 강력하게 개인을 흔들기 시작하면 당사자의 삶은 크게 바뀐다. 새로운 환경과 조건에서 다시 적응하면서 스스로 일어서야 하지만 그건 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주변에 도와줄 존재가 많지 않을 때, 같이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땐 그저 삶의 위압감에 압도되어 그저 방관하고 있게 된다. 그렇게 삶은 흘러가고 몸은 서서히 나이가 들어간다. 그 삶에서 우리는 자유를 찾을 수 있을까. 삶은 어쩌면 완전한 자유를 찾기 위한 여정일지도 모른다.
억울하게 감옥에 가게 된 미국 이민자 이철수의 이야기
다큐멘터리 영화 <프리 철수리>는 197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살인사건 용의자로 몰린 이철수 씨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실화인 이 영화의 이야기는 사실 현재까지도 한국에 그렇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 당시 한때 한국에서 이슈가 되긴 했지만 이후 꽤 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잊혀간 사건이다. 영화는 그 당시의 철수 씨가 미국으로 가게 된 과정을 시작으로 감옥에 갇혔다가 다시 풀려나 삶을 이어나가는 과정이 담겨있다.
철수 씨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삶을 계속 살아왔다. 한국 전쟁 중에 태어난 그는 엄마가 누군가에 성폭행 당해 가지게 된 아이였고, 결국 엄마는 그를 친척에게 맡기고 혼자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다 철수 씨가 12살이 되던 해 엄마는 그를 데리고 미국으로 간다. 하지만 철수 씨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었고 제대로 교육을 받기도 어려웠다. 당시 미국 사회는 이주 한국인이 많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철수 씨는 차이나타운에서 중국인이나 일본인들 속에서 살아갔다.
그러다 어느 날 차이나타운 거리 한복판에서 중국 갱단이 저지른 살인 사건에 용의자에 오르고 빠른 속도로 구속되어 재판에 넘겨진다. 그때 거리에 철수 씨가 있지 않았고 선뜻 나서서 증언할 수 있는 용기 있는 목격자도 없었기 때문에 그를 도와줄 한국인이나 아시안계 지인이 거의 없었다. 그의 선한 모습과 성향을 알고 있는 일본인 친구 랑코만이 유일하게 그를 도우려 애썼지만 결국 그는 폭력의 세상인 감옥에 갇혀버리고 만다. 억울한 상황에서 그는 서투른 영어와 주변의 도움을 받지 못해 소명할 기회를 거의 얻지 못했고, 그저 그 상황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철수 씨의 개인적인 상황과 초기 이민자들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미국 내 한국 이민자가 많지 않은 시기, 그들이 겪었을 어려움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영화 초반에는 미국 이민자들이 이민 초기 겪을 수 있는 어려움을 보여준다. 그러다 중반이 되면 한국 이민자들이 사회적인 운동을 만드는 과정이 등장한다. 바로 ‘프리 철수 리’라는 구호를 내세운 이철수 씨 구명운동이다.
미국 이민자 사회에 처음 등장한 사회운동
이 사건을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지고 미국 이민자 사회에 알린 사람은 이경원 기자다. 그는 철수 씨 재판과정이 엉터리로 진행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 사건을 신문사 새크라멘토 유니언에 톱기사로 세상에 폭로한다. 그 이후 한인 교회를 중심으로 한국 이민자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조금씩 늘어난 이민자들의 운동은 그 이전에 보지 못했던 최대 규모로 조직되어 진행되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그들의 구호가 문구 그리고 사람들의 절실한 표정에서 그 당시의 생생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결국 이 구명 운동은 철수 씨에게 큰 힘이 된다. 하지만 그에게 다시 불행한 상황이 이어진다. 감옥에 갇혀 갱단의 위협 때문에 상대를 살인하게 되어 다시 재판을 받는 상황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과 변호인단은 철수 씨가 감옥에 가게 된 자체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그 살인은 일종의 정당방위라고 주장한다. 그렇게 다시 긴 재판이 이어지고 원래 차이나타운의 살인사건에 대한 재심도 진행하게 된다.
초반은 철수 씨가 예상하지 못한 사건에 휘말려 감옥에 가는 과정, 중반부는 한국 이민사회의 이철수 구명운동이 일어나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이 흥미롭게 진행되고, 후반부에는 감옥에서 나온 이후의 철수 씨가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를 보여준다. 평생을 걸쳐 그는 자신이 주도적으로 선택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 엄마 때문에 미국으로 왔고, 엄청난 불행으로 억울하게 감옥에 적응해야 했다. 그러다 우연히 한인들에 의해 영웅이 되어 엄청난 기쁨의 순간들을 맞는다.
그래서인지 그는 삶의 후반부에 제대로 된 선택을 하지 못하고 방황했다. 그 과정에서 보이는 철수 씨의 얼굴은 무척이나 외롭고 괴로워 보인다. 젊은 시절 철수 씨의 얼굴이 영상에 등장할 때, 그가 무척 좋은 인상을 가졌고 선한 인물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인생 후반부의 모습은 왠지 지쳐 보이고 힘이 없어 보인다. 그의 얼굴에 있는 화상 자국이 그의 지친 얼굴을 더욱 우울하게 보이게 만든다. 그는 죽음이 그를 찾아오기까지 진정으로 자유로운 느낌을 받았을까. 영화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자꾸만 그의 삶을 되짚어보게 만든다.
철수 씨는 과연 자유를 얻었을까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이야기 전체를 다시 돌아보면 희망적인 느낌이 든다. 적어도 철수 씨 주변에 그를 도우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원해서 미국에 간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 불운의 상황에서 그는 그 자신을 도울 방법이 없었다. 대신 그의 주변에 그를 적극적으로 돕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경원 기자가 대표적이다. 그는 아버지가 없는 철수 씨에게 아버지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그는 기꺼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철수 씨에게 도움을 주려 애쎴다.
그다음으로 그의 일본인 친구 랑코가 있었다. 철수 씨는 랑코에게 이성적으로 호감을 느꼈지만 실제로 그 사랑이 성사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랑코는 철수 씨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는 모습을 보고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실제로 변호사가 되어 몇 년 후에 진행된 철수 씨의 재심재판에 변호인단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철수 씨가 풀려나기 전까지 진심이 가득 담긴 선의로 그를 도왔던 진정한 친구다.
영화는 지금 이 이야기에 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되는지 이야기한다. 현재까지 우리는 비슷한 사건을 수없이 봐왔다.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감옥을 간 사람들, 그리고 한국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이민자 역시 철수 씨와 비슷한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누군가 억울한 상황이 생기면 도움을 주고 싶은 사람이 하나 둘 모이고 그것이 어떤 사회운동으로 번져간다. 우린 이런 일을 무수히 봐왔다. 어쩌면 <프리 철수 리>가 보여주는 미국 내 한국 이민자들의 구명 운동은 가장 극적인 과정과 결과를 가져온 사회운동일지도 모른다.
이 다큐멘터리를 완성하기 위해 6년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실제로 영화는 대역을 이용한 재연장면 없이 과거에 찍어둔 화면을 최대한 이용한다. 단지 내레이션은 세바스찬 윤이 맡았는데, 그는 한인 2세로 그 역시 감옥에 생활한 경험이 있다. 그는 철수 씨의 상황을 이해했고 그 역시 내레이션에 참여하길 원했다. 그렇게 탄생한 1인칭 시점의 내레이션은 실제 철수 씨가 이야기하는 듯 영화에 사실감을 더한다.
비록 지금 이철수라는 인물이 살아있지 않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여전히 현재에도 유효하다. 그가 완전히 프리해졌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이 영화로 인해 미국 한인 사회의 변화와 철수 씨의 삶이 많은 관객들에게 닿을 수 있길 기원한다. 그의 삶의 궤적은 충분히 영화 속 이야기처럼 흥미롭다. 많은 관객들에게 추천하는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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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렌필드>가 드라큘라의 가스라이팅을 극복한 방법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드라큘라’(니콜라스 케이지) 성을 방문했다가 그의 감언이설에 속아 직속비서가 되기로 결심한 ‘렌필드’(니콜라스 홀트). 인간을 뛰어넘는 괴력과 반사신경을 갖게 된 것도 잠시, 그는 밤낮없이 찾아오는 흡혈귀 사냥꾼을 격퇴하고, 드라큘라 입맛에 맞는 순결한 제물을 찾으며 정신없이 살아간다. 어느 날, 드라큘라는 사냥꾼과 싸우다가 햇빛에 쬐여 큰 부상을 입고, 렌필드는 그를 미국으로 옮겨 간호한다. 여느 때처럼 술집에서 제물을 찾으며 시간을 보내던 렌필드는 마피아의 협박에 주눅 들지 않는 경찰 ‘레베카’(아쾨피나)를 만나고, 한 가지를 결심한다. 자기도 레베카처럼 당당하게 살겠다고. 드라큘라와의 관계를 마침내 끊겠다고.
드라큘라가 주인공 아닌 드라큘라 이야기
흡혈귀 중 가장 유명한 캐릭터라 해도 과언이 아닌 드라큘라 백작. 그는 소설에서 처음 등장했고, 100개가 넘는 영화로 재해석됐다.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토드 브라우닝 감독의 1931년 영화 <드라큘라>다. 이 작품에서 그는 '깃을 세운 망토를 입은 채 여자를 꼬시는 흡혈귀'와 같은 이미지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고정된 이미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도 많았다. <드라큘라: 전설의 시작>처럼 진중한 다크 판타지 장르로 각색하거나, 넷플릭스와 BBC가 협업한 시리즈 <드라큘라>처럼 그를 현대로 불러왔다.
크리스 맥케이 감독은 <렌필드>로 더 과감하게 드라큘라를 재해석했다. 드라큘라를 현재 시간대로 불러왔고, 배경도 루마니아(왈라키아)나 영국이 아닌 미국으로 선택했다. 하지만 이번 주인공은 드라큘라가 아니다. 원작 소설 속 정신병자, 렌필드가 주인공이다. 그는 다른 생명을 먹으면 장수할 수 있다는 생각에 벌레를 잡아먹는 기괴한 인물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드라큘라를 돕는 부하 역할로 자주 등장한다. 영화는 아랫사람인 그의 시점에서 드라큘라를 묘사한다. 그러다 보니 한 번도 생각하거나 기대하지 않았던 드라큘라의 면모가 드러난다. 아랫사람을 교묘히 조종하는 악덕 상사의 모습이다. <렌필드>는 이 기괴한 갑을관계에 주목해 고전을 현대적으로 세련되게 재해석한다.
드라큘라의 '가스라이팅'
영화는 드라큘라에게 붙잡힌 채 그의 뒤치다꺼리를 맡은 렌필드를 보여주며 시작한다. 고성(古城)을 파는 부동산 거래로 큰돈을 벌기 위해 드라큘라에게 접근한 렌필드. 그는 큰 힘을 주겠다는 드라큘라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그의 비서가 됐다. 벌레를 먹으면 괴력이 생기는 능력을 얻은 후, 렌필드는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온갖 허드렛일을 맡았다. 뱀파이어 사냥꾼으로부터 드라큘라를 지키는 건 기본이다. 드라큘라가 햇빛 때문에 크게 다친 후로는 깨끗한 피를 가진 사람을 제물로 바쳐 회복을 도왔다.
물론 렌필드도 고민한다. 자기가 하는 일이 옳은 건지. 드라큘라를 떠나 새로운 삶을 살 수는 없을지. 하지만 그의 고민은 항상 같은 곳으로 귀결한다. 그는 드라큘라를 거스르지 못한다. 그에게서 능력을 얻었기 때문은 아니다. 렌필드에게 드라큘라는 생명줄이기 때문이다. 드라큘라는 렌필드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제물을 데려오면 그를 일부러 공격한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렌필드가 용서를 구하면 그제야 자기 피로 치료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렌필드는 드라큘라의 요구나 명령을 거절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이처럼 의존적이고, 또 자기 파괴적인 인간관계는 사실 낯설지 않다. 데이트폭력, 학교폭력, 가정폭력 사례에서 '가스라이팅'이 활개 치는 뉴스는 언제든지 접할 수 있다. <렌필드> 속 드라큘라와 렌필드의 관계에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유다.
어딘가 씁쓸한 갑을관계 탈출기
그런데 <렌필드> 속 피해자 모습은 단순하지 않다. 렌필드는 단순히 조종당하는 게 아니다. 자기 처지가 당연하다고 자조하며 동조한다. 드라큘라에게 의존하는 악순환을 렌필드 본인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와 아이를 저버린 채 드라큘라를 만나러 떠났다. 부와 권력을 원했기 때문에. 드라큘라의 제안도 받아들였다. 더 강한 힘과 능력을 탐냈기 때문에. 이 찰나의 선택 때문에 그는 스스로 퇴락했다. 즉, 자발적인 굴종이 렌필드와 드라큘라의 진짜 관계인 셈이다. 이는 렌필드만의 문제도 아니다. 영화에는 다른 악역도 있다. 마피아가 활개를 치고, 경찰은 그들로부터 돈을 받고 눈감아준다. 그런데 이들과 렌필드는 크게 다르지 않다. 힘을 쫓아 권력자에게 스스로 굴복하고 의존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굴복이 드라큘라보다 더 위험한 악인 셈이다.
실제로 영화가 자기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한다. 자기가 시작한 악순환과 인간관계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본인뿐이니까. 렌필드에게 레베카와의 만남이 전환점인 이유이기도 하다. 작중 레베카는 마피아의 외압과 회유에 굴하지 않는 몇 안 되는 경관이다. 그녀는 마피아에게 아버지를 잃었지만, 아버지처럼 마피아와 싸우겠다는 경찰다운 소신을 잃지 않는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렌필드는 큰 충격에 빠지고, 자기 합리화를 그만두고 드라큘라와의 관계를 다시 맺으려 한다.
드라큘라에게 데려갈 제물을 물색하려고 나가던 집단 심리 치료 모임이 기회다. 렌필드를 비롯한 참석자는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고 외치며 서로를 격려한다. 말로만 그치지 않는다. 패션이나 헤어 스타일, 집 인테리어처럼 세세한 것까지 직접 바꿔주며 서로 자존감을 높여준다. 하지만 렌필드의 탈출기는 어딘가 씁쓸하다. 그 안에도 갑과 을이 있기 때문이다. 모임을 주도하는 강사는 피해자에게 자기 책을 판다. 그 책이 마치 성경 마냥 구원을 약속한 것처럼. 이 또한 낯설지 않다. 피해자를 이용하는 두 번째 가해자도 손쉽게 접할 수 있으므로. 이처럼 <렌필드>는 인간관계로 인한 현대인의 고민을 정확히 지적한다. 주인공을 바꾼 고전의 재해석이 인상적인 이유다.
장르를 넘나드는 피 칠갑 코미디
이러한 메시지와 주제 의식은 영화 전반에 넘쳐흐르는 B급 정서 덕분에 더욱 빛을 발한다. 액션이 대표적이다. 영화 속 액션은 단순한 눈요기가 아니다. 원래 렌필드는 드라큘라를 보호할 때만 자기 능력을 활용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는 다른 목적을 위해 자기 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액션이 과격하고 피가 많이 튈수록 드라큘라와의 관계를 끊으려는 의지는 더 잘 전달된다. 만화처럼 뻔뻔하게 피를 튀기다 보니 오히려 거부감이 덜한 셈이다. 실제로 절단된 팔과 다리를 무기처럼 활용하거나, 시체 위에서 키스하는 장면은 잔인하거나 기괴하지 않다. 그저 유쾌하다.
액션 외의 대목도 다르지 않다. 사실 <렌필드>에는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거나 불편한 점이 있다. 과거 이야기가 현대 배경으로 옮겨오면서 필연적으로 모순이 생기기 때문이다. 일례로 드라큘라가 렌필드에게 '순수한 여성의 피'가 필요하다고 닦달하는 장면은 지금의 젠더 관점에서는 이상한 뉘앙스로 전달될 수 있다. 드라큘라에게 제물로 바쳐지는 사람들도 어색하다. 현대 사회에서는 과거와 달리 추적이 용이하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여러 의문점이 떠오르는 까닭이다.
<렌필드>는 B급 감성을 한껏 활용하면서 위와 같은 의문점이 뇌리조차 스치지 못하게 한다. 노예 계약과 싸우는 렌필드의 모습을 제4의 벽을 깨는 연출을 통해 보여주며 B급 코미디를 선사한다. 마피아와 부패된 경찰조직을 등장하면서 누아르처럼 보일 때는 돌연 분위기를 바꾼다. 망상에 빠진 드라큘라를 활용해 호러와 스릴러적 요소는 코미디로 전환하는 게 대표적이다. 드라큘라의 설정을 역이용한 장면도 웃음을 자아낸다. 기독교적 요소가 가미된 퇴마의식을 정작 마약 가루를 이용해 치르거나, 치유력이 있는 드라큘라 피를 이용해 드라큘라가 죽인 사람을 되살리는 식이다.
물론 <렌필드>에도 여러 단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마무리가 성급하다는 인상이 짙다. 호러, 코미디, 액션, 누아르 등 워낙 많은 장르가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데 러닝 타임은 93분으로 꽤 짧다. 달리 말해 레베카 가족과 마피아 간의 악연처럼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생략하거나 일부러 지나칠 수밖에 없다. 결말로 갈수록 캐릭터가 편의적으로 퇴장하는 이유다. 그러다 보니 영화가 속도감은 빠르되, 다소 급하게 전개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에 더해 호불호도 극명히 나뉠 수밖에 없다. <데드풀>과 같은 작품처럼 미국식 유머가 워낙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만약 일반적인 한국 영화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나 톤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익숙한 소재를 설득력 있게 재해석한 <렌필드>의 매력도 장점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Acceptable 무난함
가장 세련된 형태의 재해석 중 하나. 취향만 맞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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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 베를린 국제 영화제 경쟁부문 한눈에 보기
독일의 국제 영화제이자 세계 3대영화제 중 하나인 베를린 국제 영화제가 지난 15일 베를린 국제영화제가 개최되었습니다
경쟁부문에서 선정되면 황금곰상, 은곰상의 영예를 안게 되는데요! 5년째 초청된 홍상수감독님의 작품도 올라가있다는 사실~! 에디터 AMY가 모아온 경쟁장 모음 쉽고 빠르게 확인해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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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구야 공주 이야기
가구야 공주 이야기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만든 애니메이션은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넷플릭스에 올라온 지브리 작품을 보다가 '가구야 공주 이야기'를 발견했다. 언듯 보기에 '이웃의 야마다군'과 비슷한 그림이어서 꽤 오래 전 만든 작품일까, 했지만, 몇 년 전에 만든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일본의 문화와 생활을 잘 드러내고 있어서, 외국사람이 볼 때, 일본에 관한 역사와 전통, 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구야 공주 이야기'의 원전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전래동화, '타케토리 오키나 모노가타리(竹取翁物語解)'다. '대나무를 파는 노인 이야기'인데, 전래동화와 이 작품의 줄거리는 거의 같다. 다만, '가구야 공주 이야기'에서는 '가구야공주'의 탄생과 성장, 생활을 전래동화보다 핍진하게 그리고 있어 관객이 '가구야공주'에게 감정적으로 동화하도록 만드는 과정이 길게 이어진다.
작품의 서사는 매우 불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전래동화가 나타난 시기가 9세기에서 10세기 무렵이라고 하니, 그때는 일본에도 불교가 한창 번지고 있을 때였다. 660년에 백제에서 건너간 불교는 상대적으로 후진 문화였던 일본 사회에 놀라운 사상으로 받아들여졌고, 문화선진국이던 백제에서 왕인이 직접 불교를 전파하니, 일본의 토호, 영주들은 물론 일반 백성들도 불교에 호감을 갖고 받아들였다.
물론 불교가 일본에 들어간 초기에는 일본 황실과 귀족 세력이 반대하고 거부했지만, 이미 일본 민중 사이에서는 불교가 상당한 호감을 갖는 종교였고, 이때 일본의 서쪽 지방을 중심으로 고려 때 일본으로 건너간 고려인들과 이후 백제인들을 중심으로 일본에서 불교는 안정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가구야공주 이야기'가 불교를 바탕으로 한 전래동화라는 건 작품 내용에서도 나타나는데, 가구야공주가 대나무에서 태어나기 전, 전생에서 살았던 곳이 '달'이었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때, 가구야 공주를 맞이하려 달에서 오는 사람을 보면, 선녀와 보살과 함께 부처님이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것은 불교의 '윤회'를 상징하며, 삶과 죽음이 결코 다르지 않고, 인간은 윤회를 거듭한다는 걸 말하고 있다.
대나무를 잘라 도구로 만들어 파는 노인 부부가 있었다. 하루는 노인이 대나무를 자르고 있을 때, 대나무 하나에서 빛이 밝게 비추는 걸 발견하고, 그 나무를 베어보니 대나무 안에서 아주 작은 아이가 나왔다. 이런 탄생 설화는 고대 영웅에게 흔히 있는 장면이다. 알에서 태어난 주몽, 처녀 임신으로 태어난 예수 등이 그런 설화의 주인공이다. 손바닥보다 작은 아이는 금새 쑥쑥 자라서 동네 사람들이 '대나무순'이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아이가 자라는 동안 노인은 대나무숲에서 다시 빛나는 대나무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황금과 비단을 발견한다. 노인은 대나무에서 태어난 아이가 예사롭지 않은 아이라는 걸 깨닫고, 공주처럼 고귀하게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인은 수도-천황이 있는 도시-로 나가 저택을 마련하고 아이를 도시로 데려와 공주처럼 키운다. 그때까지 아이는 산골에서 동네 아이들과 마음껏 뛰놀며 더 없이 즐겁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는데, 도시로 오면서 친구를 모두 잃는다.
노인은 예사롭지 않은 아이를 고귀한 공주처럼 키워 귀족이나 황제에게 시집 보내는 것을 꿈꾸고, '가구야 공주' 또는 '공주(히메)'라고 부르며 극진하게 모신다. 가구야 공주가 성년이 되는 해, 사흘에 걸친 성대한 잔치를 하고, 그 소문을 듣고 양반, 귀족의 자제들이 몰려와 가구야 공주에게 청혼한다.
하지만 가구야 공주는 그들과 결혼하기를 원치 않고, 산골에서 살았던 그 아름다운 추억을 생각하며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는데, 고대광실에서 호의호식하면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며, 스스로 불행해서 더 이상 이런 삶을 살고 싶지 않다고,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간절히 소원을 빌자, 가구야 공주가 전생에 살았던 곳이 '달'이었고, 그곳에서 다시 자기를 데리려 온다는 걸 알게 된다.
가구야 공주는 이승을 떠나기 전, 자기가 어려서 살았던 산골을 두 번 찾아간다. 첫번은 산골 마을이 황폐하게 변해 있었고, 함께 어울려 살던 마을 주민들과 아이들 모두 사라졌다. 대나무가 자라지 않아 물건을 만들 수 없게 되자 다른 지역으로 떠난 것이다. 그리고 다시 8년의 세월이 지나 두번째 찾아간 산골에서 떠났던 마을 주민이 돌아오고 있는 걸 발견한다. 그 사람들 가운데는 도시에서 만났던 사랑했던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이미 결혼해 아이가 있었다.
가구야 공주는 고귀한 신분이어서 구중궁궐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아가지만, 그가 어려서 자란 곳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자연과 함께 살았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가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는 시간 역시 산골에서 동무들과 어울려 자연 속에서 뛰놀던 시기였다. 도시에서 고대광실에 살며, 호의호식하는 삶은 생기가 없는, 몸은 살아 있어도 더 이상 살아 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박제된 삶이라는 걸 가구야 공주는 깨닫고 절망한다.
어느 시기나 가난한 민중은 먹고 살기 위해 떠돌았는데, 이 작품에서도 산골마을에 살던 주민들은 대나무로 물건을 만들지 못하자 먹고 살기 위해 흩어진다. 그렇게 도시로 나와서 도둑질을 하다 잡혀 맞기도 하고, 빌어 먹기도 하면서 삶을 유지하는데, 결국 삶의 터전인 산골마을로 돌아오면서 다시 행복을 찾는다는 결론에 이른다.
가구야 공주는 삶을 옥죄는 도시에서의 삶-정형화되고, 격식에 얽매이며, 통제된 삶-에 질식할 것 같았고, 더 이상 이승에서의 삶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간절히 이승을 떠나겠다고 결심한 원인은, 자신이 귀족 또는 황제에게 팔려간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였다. 귀족이나 황제가 자신을 선택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그들의 얼굴도 본 적이 없지만, 그들이 말한 조건에 따라 혼인을 해야 하며, 황제의 후궁으로 선택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야 하는 비참한 삶이 싫었던 것이다.
가구야 공주는 고대광실에 살면서도 예전 산골에서의 삶을 그리워하며, 궁궐같은 저택의 한쪽에 작은 시골집을 짓고, 밭과 정원을 만들어 산골에서 살던 환경과 비슷하게 생활한다. 그가 이승을 떠나기 전, 고통스러운 기억보다 더 간절했던 것은 산골에서 살았던 행복했던 추억이었다. 그가 지금 살고 있는 땅(지구)으로 내려오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도, 지구에 살던 사람이 간절하게 부르던 노래 때문이었다. 자연 속에 살며 꾸밈없이 소박하고 즐겁게 지내는 것이 곧 행복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으면서, 가구야 공주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만, 이미 결정된 귀환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가구야 공주는 본디 달에 사는 보살(신선)이었으나, 이승의 삶을 동경해 선계(달)에서 쫓겨나 대나무 속에서 아이로 태어난다. 아이 없이 사는 늙은 부부에게 맡겨져 지극정성으로 돌봄을 받으며 자라고,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꾸밈없고, 거칠 것 없이 살아간다. 이것은 '자연'이라는 '신'이 본래는 무소무위, 어디에도 걸리는 것 없는 자연 그 자체라는 걸 말한다. 그러다 인간이 만든 '문명'에 갇히면서 '자연'은 힘을 잃고, 생기를 잃게 된다. 인간의 문명은 도식적, 형식적, 인위적, 이기적, 파괴적 속성을 가졌기에, 자연은 인간의 문명이 두렵고 무섭다.
인간이 만든 문명은 자연(신)을 쫓아내고, 거부하며, 외면한다. 자연(신)은 더 이상 인간과 어울리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자연으로 살고자 하지만, 그마져도 인간이 파괴한다. 결국 자연(신)은 피폐, 황폐하게 변하고, 인간이 살지 않는 먼 곳-달-으로 떠난다. 이 작품은 사람의 관점이 아닌, 가구야 공주 -자연(신)- 의 관점에서 쓰였기에, 인간을 사랑하면서도, 인간의 배신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자연(신)의 입장을 드러낸다.
주인공이 여성이고, 전생에 살던 곳이 '달'이라는 건 이 이야기가 만들어진 시기, 민중의 의식을 반영한다. '여성'은 우주만물을 만든 신이자, 자신-일본 민중-을 만들고 돌보는 어머니 자연의 존재를 '여성'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다. 즉, 자연은 여성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이 바뀌고, 씨 뿌리고, 수확하는 일련의 생산이 땅을 통해 이루어지는 걸 보면서, '생산'을 하는 것은 곧 어머니, 여성이라는 의식과 맞닿게 되기 때문이다.
'달'은 동양에서 신비로운 믿음의 대상이었다. 중동과 서양이 '태양'을 유일신으로 믿었던 것처럼, 동양에서는 '태양'보다는 '달'을 숭배했는데, 그 믿음의 근거에는 '농업'이 자리하고 있다. 농사를 짓는 것은 절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절기를 가장 정확하게 드러내는 것은 '양력'이 아닌 '음력'이라는 걸 이미 이 시대 이전부터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에, '달'이 숭배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달'과 관련한 많은 설화와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따라서, 가구야 공주가 여성으로 이승에 내려와 자연과 함께 어울리다 도시-인간의 문명-에 살지 못하고 다시 원래 살던 곳 - 달 -로 돌아가는 것은 당시 민중의 삶과 생각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설화가 된다. 여기에 불교적 장치 -윤회-가 개입하면서, 가구야 공주는 언제든 다시 이승으로 내려올 수 있다는 희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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