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2-07-07 13:46:25
대중이 바라보는 이효리, 대중이 바라는 이효리
영화 <사람냄새 이효리> 리뷰
꾹 참았던 숨을 몰아쉬듯 담배 연기를 뱉어내는 영화는 우는 것인지 아닌지 모를 표정만이 그 이유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코피로 인해 죽을지도 모르지만 생계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는 코피로 살아간다. 사소한 꿈으로 살아가지만 노란 텐트만이 그들을 반긴다. 그러던 중 그들은 이효리의 혈서 요청을 받고 설레는 마음으로 이효리의 집으로 들어간다. 곳곳에 피를 묻히며 들어가는 교환, 그 뒤를 따라가는 달기와 시영은 사람 냄새나는 이효리를 집 안에서 직접 마주한다. 그리곤 혈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교차된다. ‘코피’를 말하지만 달기는 ‘커피’로 알아듣는 장면에서 볼 수 있는 복선은 과거의 효리가 햄스터라는 손을 보여주는 그런 장면에서 이어지는 것이 모든 선한 의도가 선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의미까지 전달한다.
직접적인 피해를 준 건 아니지만 자신의 일이 아니기에 펼칠 수 있는 친절이 대중의 입장으로 옮겨 갔을 땐,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 냈다. 방송에 나간 후에 펼쳐진 현실에 고통받아야 했던 삼 남매는 원망을 바탕으로 과거에 머물러 있었지만 이효리는 ‘사람’으로서 진정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과한 친절과 위선에서 조금은 벗어나 진정으로 ‘사람 냄새 이효리’가 된다. 축축한데, 서늘하기까지 한 영화의 연출과 의도적인 관찰자적 시점을 통해 영화의 의미를 극대화한다. ‘연예인’으로서의 모습이 아닌 ‘사람’으로서 드러낼 수 있는 감정을 후회 없이 영화에 쏟아낸 것 같아서 참 인상 깊었다. 자신이 행한 잘못이 아님에도, 기억조차 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단지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비난받아야 하는 감정이 조금 더 짙게 느껴졌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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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실라 | 별의 중력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궤도를 찾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군인 아버지를 따라 서독에서 학교를 다니는 평범한 고등학생 소녀 ‘프리실라 볼리외’(케일리 스패니). 그녀는 우연한 기회로 서독 미군 기지의 파티에 참석하게 되고, 당대 최고의 팝스타인 ‘엘비스 프레슬리’(제이콥 엘로디)를 만난다. 군 복무에 치이고, 어머니와도 사별해 스트레스를 받던 엘비스는 평범하게 자기만 바라봐주는 프리실라와 대화를 나눌수록 점차 마음을 뺏긴다.
결국 나이 차이도, 부모님의 반대도 극복하고 엘비스와 연인이 된 프리실라. 전역한 뒤 미국으로 돌아간 엘비스와의 장거리 연애에 만족할 수 없었던 그녀는 성인이 되기도 전에 엘비스의 집에서 살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부터 프리실라의 인생은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엘비스에게 프리실라는 '오직 자신만 바라보고 기다려야 하는' 소중한 여자친구였으니까.
유명인의 아내에 주목하라
여성 서사의 핵심은 제도의 모순과 비합리성의 부각이다. 시대와 사회의 한계 안에서 바스러진 여성들의 비극을 보여주며 변화를 촉구해야 하니까. 그런데 최근 여성 서사 영화에서는 한 가지 색다른 트렌드를 볼 수 있다. 단순히 여성 주인공을 내세우는 대신, '유명인의 아내'를 주인공으로 선택한 작품이 많아졌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속 펠리시아, <차이콥스키의 아내>의 안토니나 등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들의 접근법은 기존 작품과는 다소 다르다. 관음증적 욕구를 적극 활용한다. 마치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대중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연예인의 가십을 생산하듯이 유명인의 개인적이고 은밀한 이야기를 먼저 내세우며 관객의 시선을 끈다. 그 후에야 비로소 유명인의 아내가 겪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명인의 아내가 겪은 비극을 소비하기 쉽게 만들어 메시지의 파급력을 높이려는 시도인 셈이다.
사랑이 아닌 관계에 주목하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와 <매혹당한 사람들>을 연출한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신작 <프리실라>도 이 조류를 타고 있다. 작년에 개봉한 <엘비스>가 엘비스 프래슬리의 음악 세계와 영향력을 펼쳐 보였다면, <프리실라>는 그 대척점에 있다. 엘비스의 아내 프리실라가 직접 쓴 회고록을 바탕으로 여성을 옭아맨 일방향적인 관계를 드러내려 한다. 그 이야기가 설령 현실과는 다소 다른 모습이더라도 개의치 않은 채로.
<프리실라>는 구성부터 그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영화는 로맨스로 시작한다. 최고의 팝스타 엘비스 프레슬리를 동경하는 소녀 프리실라. 그녀가 서독에서 군복무 중이던 엘비스를 어떻게 만나고, 연애를 시작하고, 사랑을 키워 나가는지를 훑는다. 인간 소녀 벨라가 뱀파이어 에드워드를 만나 사랑을 키워나간 <트와일라잇>을 연상시키는 하이틴 로맨스다.
하지만 <프리실라>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프리실라가 미국으로 건너간 다음부터다. 엘비스의 명성을 빌리되 정작 아내의 이야기가 중심이듯이, 달달한 로맨스로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후 본론으로 넘어간다. 로맨스와 멜로의 외양을 취했지만, <프리실라>를 정작 로맨스나 멜로 영화라고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작부터 어긋난 관계
그래서 <프리실라>는 프레슬리 부부가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 자체를 묘사하기보다는 두 사람의 관계 변화에 주목한다. 사랑이라는 관점보다는 한 여성이 결혼 생활에서 겪은 여러 풍파와 심리적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누가 힘을 갖고 우위를 점하는지를 드라마틱한 사건 대신에 미묘한 변화를 통해 드러낸다. 그 끝에서 영화는 두 사람의 일방향적인 관계를 폭로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엘비스는 프리실라를 철저히 통제했고, 그 과정에서 프리실라는 서서히 자신을 잃어간다. 어찌 보면 시작부터 어긋난 관계였다. 타국 땅에서 군복무 중에 어머니를 잃은 엘비스는 마음의 평화가 필요했다. 때마침 앞에 등장한 평범한 여학생 프리실라는 바로 그 쉼터였다. 온갖 소문에 시달리고, 팬들의 기대치를 충족시킬 커리어를 쌓기 어려운 가운데 자기만 바라봐주는 프리실라와 함께하면 안식을 누릴 수 있으니까.
그래서 그는 그녀를 자기가 원하는 이미지에 가둬버렸다. 아르바이트도 하지 못하고, 친구를 사귀거나 초대하지도 못하도록. 그러면서 정작 프리실라가 필요로 하는 것은 주지 않았다. 평범한 부부 생활도, 데이트도, 일상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를 위해 대기하고 자기 욕구에 맞춰주기를 바랐다. 때로는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행동과 언사, 다른 여자 연예인과의 스캔들까지도 묵묵히 견뎌내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관계
이러한 비대칭적 관계는 그들의 부부 생활에만 국한되지 않아서 더 흥미롭다. 왜냐하면 프리실라를 통제하는 엘비스 역시 통제받고 있었으니까. 엘비스가 매니저인 파커 대령과 통화할 때 그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는 장면처럼. 프리실라를 시작으로 연쇄적인 통제와 일방향적 관계를 드러내는 이 대목은 감독 본인의 자전적인 경험을 투영한 대목 같기도 하다. 소피아 코폴라는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명문가, 코폴라 가문의 일원이니까.
그러면서도 <프리실라>는 중심을 잃지 않는다. 사유를 확장할 수 있는 암시와 복선을 제공하면서도 스포트라이트를 언제나 프리실라에게 맞추기 위해 명확히 선을 긋는다. 의도적으로 인간 엘비스만을 부각해 프리실라의 비극에 더 힘을 주려 한다.
그 일환으로 <프리실라>는 엘비스의 화려한 무대 매너나 공연을 딱 한 시퀀스에서만 등장시켰다. 엘비스의 음악도 철저히 외면했다. OST로도 활용하지 않는다. 스타 엘비스가 등장하면 그의 이야기에 더 힘이 생기고, 당대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대한 이야기로 가지가 더 뻗어 나갈 테니 그 싹부터 자르는 셈이다.
말하지 않고 보여주기
이에 더해 <프리실라>는 이야기를 애써 극적으로 꾸미지 않는다. 등장인물의 명성에 비해 영화의 톤은 의외로 건조하다. 프리실라가 이혼을 결심하는 순간까지의 감정 변화는 직접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 엘비스의 가스라이팅 속에서 주체성을 잃어가는 프리실라의 모습을 외양의 변화만으로 보여준다.
패션이 대표적이다. 프리실라의 옷은 엘비스의 취향대로 나날이 화려해진다. 화장도 진해지고, 머리에도 힘이 잔뜩 들어간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모습은 갑갑해진다. 철저히 엘비스에게 맞춰진 채로 그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함과 공허함만이 강해진다. 반면에 청바지에 흰 티를 자연스럽게 입은 그녀는 엘비스에게 이혼을 당당히 요구한다. 스타의 화려함을 벗어던지자 마침내 자기만의 궤도를 찾은 셈이다.
또 감독 특유의 세련된 연출을 적재적소에 활용해 ‘프리실라 프레슬리’가 아닌 ‘프리실라 볼리외’가 되겠다는 그녀의 선택에 힘을 실어준다. 엘비스와의 행복한 한때를 보여줄 때는 옛날 필름 효과를 활용하고, 라스베이거스 여행 장면은 감독의 전작인 <블링 링>을 순간 연상시킬 만큼 화려하다. 하지만 이 장면들은 매번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는 엘비스의 저택과 대조를 이루면서 프리실라의 심경을 시각적으로 전달해 준다.
마지막 순간 드는 의문
다만 부작용도 있다. 우선 극적인 사건이 많지 않고, 프리실라의 불안이 점진적으로 누적되는 과정을 다루다 보니 영화가 전반적으로 심심하다. 미묘한 감정선을 잠시라도 따라가지 못하면 전개가 급하다는 느낌도 받을 수 있다. 그들의 결혼이 본격적으로 삐걱거리는 대목이 후반부에 집중되어 있으니까. 영화를 보고 나면 미끼여야 할 두 사람의 연애시절이 본론보다 뇌리에 더 많이 각인될 정도다.
무엇보다 <프리실라>가 프리실라를 활용하는 방식 역시 의문이다. <프리실라>는 의도적으로 현실의 맥락을 외면한다. 프리실라의 일생 중 비대칭적 관계, 일방향적 관계라는 모티브에 충실한 장면만 취사선택했다. 일례로 프리실라도 이혼 전에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은 누락됐다. 이혼 후에도 엘비스 프레슬리의 자산을 활용해 회사를 경영했다는 점 역시 마찬가지다.
이 대목은 양날의 검이다. 명확한 주제를 보여줄 수 있어서 장점이지만, 그로 인해 영화의 메시지와 화법이 충돌할 수 있으니 문제다. 엘비스가 프리실라를 자기가 원하던 여자친구와 아내의 이미지에 가두었듯이, <프리실라> 역시 실제 프리실라를 보여주는 대신 가상의 프리실라 안에 그녀를 가둔 것은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이는 후반부를 다소 성급하게 전개한 이유로도 볼 수 있다. 그녀와 엘비스의 관계에서 이혼은 온점이 아니라 쉼표였는데, 영화는 쉼표 다음의 이야기를 안 보여주려고 일부러 페이지를 빠르게 넘겨버린 셈이다. 만약 이혼 후 프리실라가 엘비스와의 관계를 영리하게 활용하는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엘비스의 새장에서 벗어난 그녀의 주체성을 더욱 강조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형식과 내용의 충돌 가능성 또한 없었을지 모른다.
Acceptable 무난함
첫사랑에 유명인을 더한 대인관계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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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질라 VS. 콩 / Godzilla VS. K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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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번에는 편안하게 보고 싶었습니다.
이번 <고질라 VS. 콩>의 개봉이 있기 전에도 큰 제작비가 들어간 영화 일명, "블록버스터"가 개봉을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 이 헛헛함이 채워지지 않았는데요.
그렇게 4DX로 먼저, 만난 <고질라 VS. 콩>은 그런 비어있던 마음을 채워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생각 없이 모든 것들을 다 때려 부수는 단순한 영화를 간절하게 기다렸거든요.
4DX로 "고질라"와 "콩"이 되어 사정없이 머리를 흔들고 나서야 이들의 대결을 크게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런 점에서 "IMAX"가 생각났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최대의 스크린"이 "IMAX"이니까 뭐든지 큰 이들의 대결을 두 눈을 크게 뜨지 않아도 크게 보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머리를 흔드는 게 힘들었기도 했고요.
과연, "IMAX"로 보는 영화 <고질라 VS. 콩>은 어땠는지? - 해당 영화의 2회차 후기는 "IMAX"로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거대 몬스터들로부터 세상은 한때 위태로운 적도 있었지만, "고질라"로 인해 지켜지게 되면서 세상은 어느 때와 별반 없이 평화롭기만 합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위태롭기만 합니다.
어느 날, "고질라"가 "에이팩스"를 공격하며 인간들에게 처음으로 위협을 가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원인을 찾지 못하고 인간들은 또다시 공격할 "고질라"의 위협에 맞서 유일하게 대적할 수 있는 "콩"의 필요성이 거론하게 됩니다.
먼 고대로부터 "알파"의 자리를 두고서 싸운 "고질라"와 "콩"이기에 "모나크"는 이 둘을 멀리 격리시키고 있었기에 애써 이들의 마찰을 피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나 세상은 "콩"을 필요로 하고, 결국 처음으로 맞닥뜨리게 되는데...
직관 때 앞자리들 앉지 않나요?
1. 애당초 이유가 있을까?
일반 스포츠와 다르게, "프로레슬링"은 경기력만으로 풀어가는 스포츠가 아닙니다.
이를 대표하는 명사 "WWE"의 "E"는 "오락"을 뜻하는 'entertainment'인 것을 생각하면, 어떤 의미인지 보일 겁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 <고질라 VS. 콩>은 어떤 경기에 펼쳐야 하고, 어떻게 준비를 펼쳐야 할까요?
대다수의 경기에는 이들의 싸움을 붙이는 이야기 즉, "프로모"를 찍어 감정적인 동기를 이끌어내는 것이 맞습니다.
근데, 이런 한 덩치 하는 선수들에게 이야기라는 준비 동작이 필요할까요?
빅 쇼가 사각링을 부셨습니다?
그중 이번 영화 <고질라 VS. 콩>의 구도는 2004년 "레슬매니아 20"에서 "골드버그"와 "브록 레스너"의 경기를 떠오르게 만듭니다.
당시 "골드버그"는 173연승의 사나이이며, "브록 레스너"는 20대 젊은 나이에 브랜드를 대표하는 챔피언에 오른 만큼 이들의 경기는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건 당연한 결과이었을 겁니다.
그렇게 시작된 이들의 경기는 정작, 힘겨루기만을 반복한 채 관객들의 질타만을 받고 끝났습니다.
어째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2. 생각보다 상대가 안 맞나?
이런 반응으로 살펴볼 수 있는 건 이들의 이야기보다는 경기력에 좀 더 방점을 두었다는 것을 확인되는데요.
부실한 "프로모"였다고해도 향후 전개될 경기력이 이를 충분히 가려낸 것인데, 정작 경기가 맥없이 끝나니 이에 대해서도 지적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고질라 VS. 콩>에게 관객들이 기대를 거는 건 이들의 화끈한 경기력인데 영화는 이에 대한 기대를 분명하게 충족시킵니다.
이전 시리즈들을 통해서, 쌓아온 이들의 위상이 엇비슷하더라도 그 상대들이 달랐기에 이들의 대결은 기대가 되었습니다.
이거, 상대가 맞나?
이런 차이를 보여주듯이 이들의 경기는 서로의 장·단점을 보여주는데, 첫 번째로 바다에서 싸우는 모습은 미처 다하지 못한 설명이 보입니다.
물에서 빠르게 헤엄치고 숨 쉬는 것이 가능한 "고질라"와 그렇지 못한 "콩"의 모습에서 이미, 결과는 어느 정도 예측이 됩니다.
물론, "콩"이 "고질라"의 턱에 강력한 어퍼컷도 날리는 호쾌한 모습도 보여주지만 이내 죽은척하는 모습으로 꽤 싱겁게 마무리를 짓습니다.
그렇기에 다음 2차전에서 보여주는 기믹 매치는 "콩"의 학습이 엿보였습니다.
3. 망치 앞에서는 누구나 한 방이니까
앞서 말했듯이 "프로레슬링"은 이야기가 있는 스포츠이기에 다양한 기믹 매치들이 존재합니다.
서로 번갈아 링에 들어가는 "태그팀", 무기 및 반칙이 허락되는 경기, 철창에서 싸우는 것까지 다양한 경기 방식이 존재합니다.
그런 점에서 "도끼"를 들고 나타나는 "콩"의 모습은 "오함마"가 가장 잘 어울리는 레슬러 "트리플 에이치"가 연상되는데요.
그렇기에 이들의 2차전은 비슷하면서도 한층 달라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이길 것인가?
싸우는 곳이 바다에서 도시로 바뀐 것이 먼저, 눈에 띄겠지만 여러분들이 주의 깊게 바라봐야 하는 건 "콩"의 손에 뭔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타고난 신체적인 조건으로 싸우는 "고질라"와 다르게, "콩"은 "도끼"를 사용함으로 도구를 쓸 줄 안다 즉, 머리를 쓸 수 있는 것이 확인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공격하는 모습과 첫 번째 대결에서 "고질라"가 물에서 유리한 것을 배운 "콩"이기에 이번에는 물이 아닌 곳에서 싸우는 "콩"의 모습까지 "고질라"와 확연한 스타일의 차이를 보여주는데요.
그저, 비슷한 장면이 반복된다고 말하는 건 정말 서운한 이야기입니다.
4. 캐싱인, 3자간 매치
여기에 "WWE"를 오래 본 팬들에게 "머니 인 더 뱅크"라는 단어는 낯설지 않을 겁니다. 자그마한 서류 가방으로 여기에 들어있는 서류는 언제 어디든지 챔피언십 경기를 가질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데요.
그리고 이를 행하는데 흔히, "캐싱인"이라는 표현을 쓰는데요.
그런 점에서 마지막 3차전에 등장하는 "메카 고질라"는 "챔피언 벨트"를 노리고 야비한 기회주의자로 보일 겁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건 "메카 고질라"의 등장으로 달라지는 경기에 있습니다.
보통 1 대 1로 진행되는 경기에는 너 아니면 내가 쓰러지는 것이 경기의 승패이지만, 3자간 경기는 내가 쓰러지지 않아도 경기에서 질 수 있거든요.
2명에서 3명으로 늘어났는데, 경우의 수가 늘어났다.
여기에 무기와 반칙 사용도 가능해지니 하나의 경기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비약적으로 늘어납니다.
그런 점에서 "메카 고질라"는 이전 "고질라"와 "콩"과 다르게, 설명이 쌓여있지 않는 문제가 있지만, 영화는 이에 관객들이 잊고 있던 사실을 알려줍니다.
사실, <고질라 VS. 콩>이 "몬스터버스"의 시리즈 영화라는 것을 말이죠.
제목처럼 영화가 "고질라"와 "콩"의 싸움에 초점을 두어 전개했기에 이야기의 필요성을 못 느꼈지만, 이 영화 그래도 시리즈가 있는 영화입니다.
시리즈 영화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낮은 진입장벽을 가지고 있지만, 엄연하게 전작들이 있는 영화입니다.
5. 그래도, 시리즈이고 배우들인데...그런 점에서 영화 <고질라 VS. 콩>은 "메카 고질라"의 설명에 시리즈만이 할 수 있는 장점을 보여줍니다.
그건,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영화는 이에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에서 나왔던 "기도라"와 <콩: 스컬 아일랜드>의 "스컬 크러셔"로 장활한 설명도 할 필요 없이 관객들을 납득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이렇게, 괴수들과의 대결에서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게 보여주는데 성공하지만 정작 이야기에서는 아쉬운 점들이 많습니다.
그래, 시리즈이기는 한데...
전작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에서 주인공격으로 활약한 "매디슨"과 "러셀"의 관계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이야기해주지 않는데요.
여기에 이번 영화에서 새로이 나온 "네이선 - 아일린", "시먼스 - 세리자와"까지 모든 인간 캐릭터들은 "콩"과 "고질라"를 위한 도움말로 활용해 이전 시리즈들보다 확실히 축소된 느낌인데요.
무엇보다 이에 <기묘한 이야기>의 "밀리 바비 브라운"이라는 배우가 필요한지 와 "알렉산더 스카스가드", "레베카 홀", "에이사 곤살레스", 그리고 "오구리 슌"까지 캐스팅되었어야만 하는 이유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6. 마지막 챔피언 벨트는 누구에게?
그나마, <고질라 VS. 콩>에서 "피터 잭슨"의 <킹콩2005>을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여럿 있습니다.
극 중 "콩"이 빌딩에 올라서는 장면도 있지만, 아름다운 여인과 교감하는 모습도 기억에 남을 겁니다.
영화는 이를"수화"로 직접 의사소통을 함으로 보다 직접적인 관계로 꼭 이들이 여망하는 이유와 함께 <고질라 VS. 콩>만의 장면으로 진화시키는데 성공합니다.
그렇게, 누가 이겼을까?
한창 떠들다 보니 "콩"과 "고질라"의 세트 스코어가 1:1이었고, "메카 고질라"가 참가한 3차전의 결과에 대해 말하지 못했네요.
이에 대해서 보는 시각 차이가 존재하겠지만, "몬스터버스"의 규칙에 적용돼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리즈에서 이름있는 괴수들이 그들에게 패배로 머리가 잘려나간 것처럼 누구의 손에 목이 잘렸는지가 명백한 승자를 가려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기에 이 결과를 보고 싶다면, 여러분들이 직접 두 눈으로 극장에서 확인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IMAX"의 느낌은 '왜, 꼭 앞자리에 앉아야 하는지'라는 말이 이해가 될 정도입니다.
뭐가 되었든 두 눈으로 꽉 차게 보는 게 가장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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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한 하루를 음미하는 미식가와 그 하루만을 원하는 결식자 사이
주요 내용
- 영화 소개, 줄거리
- 퍼펙트한 미식가가 아닌 퍼펙트함을 간절히 원하는 결식자
- 카세트테이프, 필름 카메라, 소설책의 의미
- 히라야마가 화장실 청소, 집 정돈을 깔끔하게 하는 이유
- 니코, 여사장의 남편. 그림자 밟기의 의미
- 엔딩 결말 해석
퍼펙트 데이즈 (Perfect Days, 2024)
평범한 하루를 음미하는 미식가와 그 하루만을 원하는 결식자 사이
개봉일 : 2024.07.03.
관람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드라마
러닝타임 : 124분
감독 : 빔 벤더스
출연 : 야쿠쇼 코지, 에모토 토키오, 나카노 아리사, 다나카 민, 미우라 토모카즈, 이시카와 사유리
개인적인 평점 : 4.5 / 5
쿠키 영상 : 없음
도쿄 시부야의 공공시설 청소부인 히라야마는 부지런하고 구김 없는 사람이다. 히라야마는 해가 뜨기 전에 이불에서 일어나 집과 몸을 단장하고 일터로 나선다. 그는 커피 한 캔, 좋아하는 노래가 담긴 카세트테이프로 출근길을 채우며 행복하게 하루를 시작한다. 밤새 더럽혀진 화장실을 최선을 다해 치우고 점심을 먹으며 살랑이는 바람과 햇살을 느끼고, 퇴근 후엔 따끈한 온욕. 마지막으론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인사를 건네는 단골 식당에서 반주를 하고 나면 그의 하루는 끝이 난다. 히라야마는 아침에 단정하게 게어 놨던 이불을 그대로 다시 펼치고 책을 읽다 잠에 든다. 그리고 또 비슷한 하루를 살아간다.
<퍼펙트 데이즈>는 평범하지만 충만한 히라야마의 일상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과묵한 그는 이런저런 말 대신 깊은 눈을 통해 감정을 표현한다. 햇살을 볼 때, 신호등을 건너는 작은 아이들을 볼 때, 아이가 손을 흔들어 줄 때, 나무 사이로 바람이 스칠 때. 히라야마는 부드러운 웃음을 보인다. 흔히 잘났다고, 내가 주인공이라고 말하는 삶과는 거리가 있지만 그는 매일 작은 행복을 찾으며 충만한 삶을 살아간다.
가끔씩 히라야마의 일상에 끼어드는 주변인들은 아름답고 평온해 보이는 그의 삶에 궁금증을 가진다. 청소부일을 왜 이렇게 열심히 하는지, 왜 청소부 일을 하고 있는지, 그 나이에 혼자 살면 외롭지 않은지, ‘다음’이란 어떤 의미인지. 히라야마는 이에 정확히 답하지 않는다. 그가 남긴 공란은 이야기에 작은 틈을 만들었고 나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여러 상상을 해보았다.
- 아래 내용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퍼펙트한 미식가가 아닌 퍼펙트함을 간절히 원하는 결식자
카세트테이프, 필름 카메라, 소설책의 의미
<퍼펙트 데이즈>는 소소하고 평범한 하루를 완벽하게 음미하는 미식가 히라야마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런데 나에겐 히라야마가 미식가임과 동시에 그 완벽한 하루만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배고픈 결식자처럼 느껴졌다.
히라야마는 건강한 삶의 루틴을 가진 사람이다. 처음 이 하루를 봤을 땐 평범하면서 아름다운 하루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히라야마의 동료와 가족들이 그의 일상에 몇 개의 질문을 던지고 그의 일상이 바뀌기 시작한 이후엔 내 감상도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다.
히라야마는 자연스레 반복되는 삶을 완벽하게 즐기는 사람이라기보단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어떠한 상처를 받고 그걸 외면하기 위해 시간을 돌려 자신이 생각하는 ‘완벽한 하루’에 안착하여 버티고 있는 사람 같다.
히라야마가 어떤 아픔을 겪었고 어떤 시절을 그리워했는진 알 수 없다.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히라야마가 아이들을 눈에 담고 예뻐하던 모습, 다카시가 결혼, 가족에 대해 물어보던 대사. 그가 7-80년대가 깃든 물건들(카세트테이프, 20세기 중후반부 소설들)을 애용하는 걸 보면 사고로 가족(아내나 자식)을 잃었거나 모종의 이유로 가족(아버지와 여동생)에서 제외되고 그걸 부정하기 위해 문제가 생기기 전, 그가 젊었던 시절로 돌아가려 한 건 아닐까 싶다.
어제의 흔적을 지워내고 오늘을 사는 히라야마
히라야마가 화장실 청소, 집 정돈을 깔끔하게 하는 이유
그는 카세트테이프를 되감듯 시간을 되감아 자신의 완벽한 하루에 안착한다. 그리고 그 하루가 어제가 되지 않도록 노력한다. 반복적인 삶을 살다 보면 가끔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어제 출근길에 본 것이 오늘 출근길에 본 건지 어제 본 건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고 시간의 흐름이 헷갈리는 그런 순간. 히라야마는 이런 착각을 통해 자신이 현재 즐기고 있는 완벽한 하루. 그 하루에만 머문다.
히라야마의 하루는 새 파일을 여는 느낌보단 똑같은 백업 파일을 다시 여는 느낌에 가깝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자신이 누워있던 이부자리 주변을 정리하고 간밤에 자란 수염을 깎고, 화장실을 깨끗이 청소하며 어제가 남긴 흔적을 지워낸다. (이때 다카시는 ‘어차피 더러워질 건데 왜 그렇게 열심히 청소하냐’고 묻는다. 젊은 그는 히라야마와 반대로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인다. 그는 미래를 위해 일을 그만두고 미래의 여자친구가 될 아야를 위해 수중에 있는 돈을 탈탈 턴다.)
세월의 흐름을 외면했던 히라야마
니코, 여사장의 남편, 다카시가 깨놓은 히라야마의 하루. 그림자의 의미
히라야마는 변화와 새로운 날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 그는 오래된 카세트테이프가 큰돈이 될 거라는 다카시의 제안도 거절하고 ‘다음 약속이 언제냐’는 니코의 물음에 그저 ‘다음은 다음’이라고 흥얼거리며 답을 피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큰 변화가 생겼을 때 크게 흔들리거나 분노한다. 갑자기 조카 니코와 동생이 찾아왔을 때, 다카시가 일을 그만두며 자신의 하루 루틴이 깨졌을 때, 주말마다 들리던 가게가 갑자기 사라졌을 때, 단골 술집의 여사장이 장사를 쉬고 헤어진 남편을 만나는 모습을 목격했을 때. 이 변화들은 히라야마에게 세월의 흐름이라는 커다란 충격을 선사한다.
니코의 성장, 아버지와 술집 여사장 남편이 겪는 노화와 병, 오래된 건물의 철거, 평소보다 길게 일한 탓에 확실하게 느껴진 어제와 오늘이라는 차이. 초침만 달린 아날로그시계를 고집했던 히라야마에게 24시간 그 이상의 흐름은 낯설고 무거운 것이다.
여러 변화가 생긴 하루. 히라야마는 단골 술집에서 술을 먹는 것 대신 강가에서 담배를 피우는 걸 선택한다. 그때 술집 여사장의 남편이 다가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삶을 대화로 한 주제들. 그러다 여사장의 남편이 히라야마에게 묻는다. “그림자는 겹치면 더 어두워질까요?” 히라야마는 바로 직접 그림자를 겹쳐보면 알 거라며 남편을 이끈다. 그리고 촉촉해진 눈으로 이렇게 말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림자 두 개가 겹쳐지면 더 진해지듯 하루에 또 다른 하루가 겹쳐지면 이틀이고 그것이 모이면 세월과 인생이 된다. 지금까지 세월의 흐름을 외면해왔던 그가 드디어 모든 걸 인정하는 순간이다. 히라야마는 그다음날, 어제와 같은 하루가 아닌 새로운 하루를 맞이한다. 두려움, 회한, 떨림이 뒤섞인 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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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혐오시대 속 오렌지한 깜빵생활
종북좌파, 보수꼴통. 정치적 성향으로 좌우가 갈린 서로를 향해 혐오하는 발언들이다. 특정 인물과 세대를 향한 혐오가 가득한 대한민국 현실. 나이, 성별, 지역, 학력, 빈부, 성향, 기질, 나라, 정치 등 혐오의 대상과 범위가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 인문학자 박민영은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에서 우리 안에 스며든 혐오 바이러스로 인해 일상적으로 혐오하고, 혐오당하는 이 시대를 향해 결국에 가해자이자 피해자는 바로 ‘나’라고 경고하고 있다.
오늘날의 넷플릭스를 있게 한 작품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Orange is the New Black”이다. 무려 1억 번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한 이 작품은 배경 자체도 아주 독특하다. 바로 여자 교도소 이야기. 일반인이라면 잘 그려지지 않는 여자 교소도. 그곳에 주인공 파이퍼 패프먼이라는 백인 여자가 15개월을 복역하며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뤘다. 사실 내게 넷플릭스 세계를 인도한 친구가 있었는데 드라마 “설국열차”을 권했다. 그런데 눈이 잘 가지 않았다. 우선 영화 설국열차를 정말 재미있게 본 상황이고, 이미 이야기를 알게 된 입장에서 생각만큼 손이 가 질 않았다.
당시 엄청나게 화제를 모이던 대한민국의 넷플릭스의 자존심 “킹덤” 역시 흔한 좀비물이라 생각하였기에 식상했다. 그런데 조금 검색하다가 넷플릭스에서 가장 많이 조회된 드라마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지금의 넷플릭스가 있기에 엄청난 공헌을 한 작품을 사람들이 추천했다.
바로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 무려 시즌 7까지 진행되는 거대하고 기나긴 길이었지만, 모든 이야기가 끝나서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 의 의미를 찾아보았다.
여기서 오렌지는 죄수복을 의미한다. 한국의 죄수복은 회색이나 푸른 계열로 알고 있는데 미국은 오렌지 색이다. 그리고 ‘New Black'이란 말은 실패 없는, 또는 대세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매 시즌마다 유행이 될 무언가를 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 나무위키 참고
그래서 개인적으로 내가 이해한 것은 오렌지 색을 입고 있는 죄수인 우리가 새로 떠오르는 대세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오렌지는 단순하게 여자 죄수들을 의미할까?
드라마는 워낙 탄탄한 캐릭터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캐릭터의 이야기를 연기자들은 충분히 몰입을 가져오도록 역할을 다해낸다. 중요한 것은 내용의 전개 과정 가운데 한 여자의 인생 가운데 교도소라는 곳에 들어오기까지의 이야기들을 디테일하게 다루고 있고, 그것이 주인공만이 아닌 굉장히 넓은 범위의 인물들까지 이해하게 만든다. 이러한 전 이해를 통해, 나는 어느덧 그 여인들을 향해 연민을 느끼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인종도 다르고, 성적 취향도 다르고, 범죄도 다르고, 살아온 환경도 다른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며 하나의 사회를 구성하며 그 안에서 작은 기쁨들을 발견하며 살아가는 걸 볼 수 있다.
자신을 향한 세상과 시스템의 혐오의 벽은 허물어지고, 혐오를 당하던 그녀들은 감옥이라는 상황 속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교도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잘못된 구조와 시스템에 대항한다. 그래서 오렌지가 뉴 블랙 즉, 새로운 대세가 되는 것이다. 이 시대에 살아가며 잘못된 구조와 시스템을 알면서도 여전히 대항할 수 없는 무력한 우리에게 이 드라마는 이야기하고 있다.
“오렌지가 바로 뉴 블랙이다.” 그리고 이 드라마는 말한다.
혐오를 넘어선 오렌지들의 모습을 간파한 당신이야 말로 바로 “뉴 블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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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사이의 공기
나에겐 청각장애인 사촌언니가 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낼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아빠와 큰아버지는 꽤 나이차이가 큰 편인데다가, 아빠가 당시로써는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한 편이라, 나의 큰아버지의 자녀들(세명의 딸과 한 명의 아들) 과 아빠의 자녀인 우리 남매 또한 나이차이가 많이 났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막내 언니가 이미 대학생이었으니까. 아빠와 큰아버지는 애틋한 형제지간은 아니었던지, 사촌형제들은 명절에나 겨우 만났다. 차례를 준비하느라 부산했지만, 집 안의 막내였던 어린 나는 언니들의 방에 숨어들어 대학생들이 보는 멋진 책을 펼쳐 놓고 구경했다. 그러면 세상과 동떨어진 듯, 아무말 없이 구석에서 책을 보던 큰 언니가 초등학생도 볼 만한 이런 저런 책을 꺼내 내 옆에 놓아주곤 했다.
유달리 말이 없고, 방에서 책만 보던 큰언니가 청각장애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건 유치원 때 쯤이었다. 어쩌면 더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해줬을 수도 있지만, ‘들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해 내가 정확히 인지한 게 그 즈음일 지도 모르겠다. 후천적인 장애라고 했다. 열병이라고 했던가… 일년에 한 두번 가는 큰 집은, 현실과 다른 공간처럼 느껴지곤 했다. 적막과 무거운 공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어린 내가 가늠할 수 없는 어떤 감정들이 공기 속에 쌓여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막연히 눈치를 보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청력을 잃은 딸을 둔 큰 어머니는 아이들의 작은 일에도 예민한 것 같았고, 상실을 겪은 큰 언니는 슬퍼 보였다. 어쩌면 장애를 가진 사람은 불행할 것이라고 마음대로 생각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장애를 가진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금기된 것 처럼 입 밖으로 꺼내지 않던 분위기였다. 어느날 막내 언니와 큰 언니가 수화로 격렬하게 (아무 말이 없는데도, 저렇게 격렬할 수 있구나. 하고 엄청 놀랐던 기억이 선명하다) 대화하며 낄낄거리며 웃던 모습을 보고,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지만 나도 모르게 같이 웃었던 기억이 있다. 어쩌면 다음 명절엔 큰언니와 얼굴을 맞대고, 나도 낄낄 웃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다음 만남은 오지 않았다. 언니는 그 사이 같은 장애를 가진 형부와 이른 결혼을 했고, 자신의 가정을 이루게 된 것이다. 언니가 큰 집으로 오는 날 나도 외갓댁으로 가니, 언니의 결혼 이 후엔 거의 보지 못하였다. 그러다 몇년 후 큰언니네 가족이야기가 친척들 사이에 화두에 오르게 되었다. 언니는 결혼하고 바로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는 청각 장애가 없었던 이유였다. 둘이서만 아이를 돌보던 때였는데, 이 아기의 말을 어떻게 배우게 할지 온 가족이 모여 고민했다고 한다. 지금 처럼 어린이집이나, 놀이방 같은 기관에 마음껏 보낼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고, 언니네 가족은 많은 시간을 농인들 커뮤니티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큰어머니는 자주 언니네 집에 머물렀고, 가끔 막내 언니가 다니러 갔고, 친가의 가족들이 함께 아이를 돌보았다. 조카는 여러 가족의 도움으로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해 지나지 않아 아이는 영재 판정을 받게 되었다. 아니 거의 천재에 가깝다고 했다. 주변에서 들썩이기 시작했다. 아이를 농인 부모와 계속 살게 하는게 맞나? 더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에 보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지만, 아이와 부모를 떼놓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쩌면 언니도…조금 고민했을 지도 모른다. ‘내가 이 아이의 미래를 망치는 것은 아닐까?’ ‘누구네가 맡아서 키우면 어떠냐.’ ‘그래도 할머니가 그냥 같이 사는게 낫지 않나?’ 백 가지 경우의 수들이 가족들 간에 논의 되었다.
하지만 이제 겨우 초등학교를 입학한 어린 그 아이는 그냥 엄마아빠와 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엄마 아빠의 목소리가 되어줄거라고.’
영화 <코다>를 보며, 나는 조카를 생각했다. CODA는 농인 부모 사이에 태어난 청인 자녀를 뜻한다. (Children of deaf adult) 이영화는 베로니카 폴랭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작된, 프랑스 영화 ‘미라클 벨리에’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농인인 부모와 역시 농인인 오빠 사이에 유일한 청인인 영화 주인공 루비 로시는 새벽 3시에 아빠와 오빠와 함께 배에 올라타 귀가 들리지 않는 그들의 귀와 입이 되어주며 물고기를 잡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어느 날 루비는 짝사랑 하던 마일스를 따라 자기도 모르게 합창단에 지원한다. 루비가 합창단에 가입 한 후, 음악 선생님은 루비의 재능을 알아보고, 버클리 음대를 목표로 도움을 주지만, 루비는 자신의 부재로 힘들어질 가족때문에 고민한다.
노래를 부른다는 것, 노래를 듣는다는 것의 행복과 기쁨을 모르는 가족. 그리고 가족이 이해 하지 못하는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루비. 아빠를 위해 간절히 노래하는 루비의 목을 손으로 감싸고 노래를 듣는 아빠는 목청의 진동과 떨림으로 , 루비의 노래를 느낀다. 들리는 사람들과 들리지 않는 사람들 사이의 공기와 이해, 그리고 사랑에 대한 이 영화를 보며, 각자 나름의 행복을 찾아 살아 가고 있을 나의 먼 가족을 떠올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누구나 청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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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카엘 하네케 - 피아니스트
미카엘 하네케 - 피아니스트
개인의 뒤틀린 내면과 욕망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욕망과 권력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들여다볼 수 있는 영화. 에리카는 경쟁률이 높은 음악대학의 교수로, 그의 실력과 명망은 자타가 인정한다. 겉으로 보이는 에리카는 음대 교수로 번듯하지만, 그의 내면은 황폐하고 메말랐으며, 뒤틀려 있다.
에리카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 할퀴고, 헐뜯으며, 비난하면서도 한 침대에서 잠을 잔다. 이 대목은 매우 상징적인데, 에리카와 그의 엄마는 애증으로 엮인 관계다. 이성적으로 보자면, 에리카는 독립해서 혼자 사는 것이 마땅하다. 그럴 이유도, 경제적 여유도 충분하다. 그럼에도 엄마와 함께 사는 것은, 엄마에 대한 애정이 많아서가 아니라, 엄마와 쉽게 분리되지 못하는 정신적 미성숙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엄마와 한 침대에서 잠을 자는 것 역시, 에리카가 엄마와의 관계에서 분리불안을 겪고 있는 증거이며, 다른 의미로 엄마가 자신을 지켜주는 '남성'의 역할을 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에리카는 마음에 들지 않는 제자의 옷에 유리병을 깨서 집어 넣어 그 제자가 심각한 부상을 입게 만들고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싸이코패스다. 그런 그에게 친구가 있을 수 없다. 그에게 유일한 친구는 엄마이며, 그의 취미는 포르노 가게에서 혼자 포르노를 보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에리카의 현재 모습만 보이기 때문에, 그녀가 왜 그렇게 비틀린 욕망을 갖게 되었는가 알 수는 없다. 현재 엄마와의 관계를 미루어보면, 에리카의 엄마 역시 '정상'의 삶을 살아온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부터는 내 상상이다.
에리카의 엄마가 젊었을 때, 에리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리카의 아버지는 다른 여자를 만나 집을 나간다. 에리카의 엄마는 자존심이 강해서 남편을 찾지 않았고, 에리카를 혼자 키운다. 하지만 남편이 자기를 버렸다는 생각에 자존감은 무너지고, 생활을 위해 굴욕적 상황을 감수하면서 근근이 살아왔다. 그 사이 에리카에게 피아니스트의 재능이 보이자, 엄마는 에리카를 피아니스트로 키우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에리카의 엄마는 자신의 낮은 자존감에 대한 보상심리, 남편에 대한 복수심 등이 뒤섞인 감정으로 에리카를 닥달하고, 에리카는 그런 엄마의 기대에 따르기 위해 노력한다. 어린 에리카에게 엄마는 유일한 세계였기 때문이다.
에리카는 변변한 연애조차 해 본 적 없는, 그래서 남자와의 관계가 무엇인지, 사랑의 감정이 어떤 건지 알 수 없는 여성이다. 그가 보는 것은 포르노 속의 남성이고, 관념 속의 남성이다. 그런 그녀에게 한 청년, 클레메가 나타난다. 공대에서 공부하는 학생이지만, 피아노에 천부적 재능을 가진 청년, 집안도 훌륭하고, 큰 키에 잘 생긴 외모까지,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청년이었다.
그 청년 클레메가 에리카의 연주를 듣고 그녀의 수업을 수강 신청한다. 에리카는 반대하지만, 다른 교수들의 찬성으로 클레메는 에리카의 수업에 참가해 피아노 교육을 받고, 에리카에게 애정의 감정을 드러낸다. 처음에는 젊고 잘 생긴 클레메의 구애를 거부하던 에리카도 어느 순간 클레메를 받아들인다.
나이는 많아도 연애 경험이 없는 여성과 젊고 잘 생긴 청년의 연애는 처음부터 뒤틀리기 시작한다. 에리카는 클레메에게 편지를 쓰는데, 그 편지는 온통 변태성욕자의 욕망을 충족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클레메는 화장실에서 처음 만나 섹스를 할 때부터, 뭔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하지만, 에리카는 피아노를 가르치는 교수로서 권력을 가졌고, 그녀의 재능에 대해 존경과 애정을 동시에 갖고 있던 클레메는 에리카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에리카의 욕망에 순순히 따르는 듯 하던 클레메였지만, 정도가 지나친 변태성욕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클레메는 에리카의 요구를 거절한다. 뿐만 아니라,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에리카의 태도를 확인한 클레메는 에리카를 비웃고, 천박한 여자라고 비난한다. 클레메 역시 에리카가 드러내는 변태성욕에 호기심을 갖지만, 자신의 존재, 사회적 위치, 집안의 명예 등을 생각해 일정 수준에서 에리카와 깊은 관계를 맺지 않고 청산한다. 에리카는 클레메에게 집착하고, 자신의 연주회가 있던 날, 관객으로 들어오는 클레메가 아는 척도 하지 않자, 칼로 가슴을 찌르고 공연장 밖으로 나간다.
욕망을 제어할 수 없게 되어, 욕망이 자아를 잡아먹기 시작하면, 개인의 자아와 본능은 분열하기 시작한다. 에리카의 내면은 제어할 수 없는 욕망으로 가득 찼고, 그것은 현실의 삶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음대 교수로서의 정체성보다 변태적 섹스에 집착하는 중년의 여성, 생리가 끝났지만, 면도칼로 자신의 음부를 베어 피를 흘리며 '유사 생리'를 해야만 하는 비참한 집착, 포르노 가게에서 혼자 포르노를 보며 성욕을 해소해야 하는 고독한 상황 속에서 에리카는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채 존재한다.
에리카가 여성이라는 점이 성적 욕망의 억압과 뒤틀린 발현에서 특별한 이유가 될까. 여성이 겪는 사회적 억압과 성적 억압의 압력이 남성과 비교해서 훨씬 크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 영화에서 에리카는 이미 '엄마'의 존재로 인해 어려서부터 미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한다. 엄마의 욕망을 투사하고, 엄마의 욕망을 대리 구현하는 존재로서 딸은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삶을 대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에리카가 칼로 자해하고 공연장 밖으로 사라지는 것은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립적 존재로 나가기 위한 몸부림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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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랑종」리뷰ㅣ쫄보기자들과 바이럴에 낚였습니다...ㅣ랑종 후기ㅣ
? "랑종" 리뷰(*스포없음)
- 랑종 정보
장르: 공포, 미스터리, 스릴러, 드라마, 페이크 다큐멘터리, 오컬트
감독: 반종 피산다나쿤
각본: 나홍진, 반종 피산다나쿤
제작: 나홍진, 반종 피산다나쿤
원안: 최차원, 나홍진
- 랑종 스토리 시놉시스
태국 북동부 ‘이산’ 지역 낯선 시골 마을.
집 안, 숲, 산, 나무, 논밭까지,
이 곳의 사람들은
모든 것에 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가문의 대를 이어 조상신 ‘바얀 신’을 모시는 랑종(무당) ‘님’은
조카 ‘밍’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다.
날이 갈수록 이상 증세가 점점 심각해지는 ‘밍’.
무당을 취재하기 위해 ‘님’과 동행했던 촬영팀은
신내림이 대물림되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밍’과 ‘님’, 그리고 가족에게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현상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다.신내림이 대물림되는 무당 가문
피에 관한 세 달간의 기록
#랑종 #랑종리뷰 #랑종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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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새로운 팀' 예고편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텐 링즈’의 힘으로 수세기 동안 어둠의 세상을 지배해 온 ‘웬우’
'샹치’는 아버지 ‘웬우’ 밑에서 암살자로 훈련을 받았지만 이를 거부하고 평범함 삶을 선택한다.
그러나 ‘샹치’는 목숨을 노리는 자들의 습격으로 더 이상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어머니가 남긴 가족의 비밀과 내면의 신비한 힘을 일깨우게 된다
벗어나고 싶은 과거이자, 그 누구보다 두려운 아버지 ‘웬우’를 마주해야 하는 ‘샹치’
악이 될 것인가? 구원이 될 것인가?
마블의 새로운 시대,
세상에 없던 힘이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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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355> 런칭 예고편
미친 캐스팅 & [블랙 위도우][본 시리즈] 제작진 참여까지! 2022년 첫 초대형 액션 블록버스터! [355] 런칭 예고편 대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