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end Choice Movie2022-08-08 17:05:52
8월 2주 최신 개봉영화
8월 2주 최신 개봉영화
2022년 8월 2주 개봉영화!
헌트 HUNT , 2022
배우 이정재의 감독 데뷔작
영화 "헌트"는 조직 내 숨어든 스파이를 색출하기 위해 서로를 의심하는 안기부 요원 '박평호'와 '김정도'가
'대한민국 1호 암살 작전'이라는 거대한 사건과 직면하며 펼쳐지는 첩보 액션 드라마입니다.
세계적인 배우 반열에 올라선 이정재의 감독 데뷔작으로 4년간 열정을 쏟아부은 각본 작업부터
연출, 연기까지 소화해낸 그는 배우를 넘어 연출까지 스펙트럼을 확장해 전 세계 영화 팬들의 기대를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특히 이정재와 정우성의 23년 만에 조우한 작품으로 기대와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정재 감독 '신세계', '공작' 제작진의 의기투합!
첫번재 추천영화 "비상선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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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 Good Luck to You, Leo Grande , 2022
엠마 톰슨 연기 40년차, 인생 62세 첫 노출 연기
영화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는 단 한 번도 섹스에 만족해 본 적 없던 은퇴교사 '낸시'가
'리오 그랜드'의 퍼스널 서비스를 경험하며 인생 최고의 해방을 시도하는 굿 럭 무비 입니다.
제38회 선댄스영화제와 제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연이어 초청되며 일찌감치 작품성을 인정 받은 작품으로
데뷔작 '52번의 화요일'로 제30회 선댄스영화제 감독상과 제6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수정곰상을 받으며 주목받은 소피 하이드 감독 신작입니다.
섹스가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삶의 태도, 섹스 포지티브를 몸소 보여줄
엠마 톰슨 그녀의 인생 62세 첫 노출로 가장 용감한 도전을 한 작품 기억될
두번재 추천영화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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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세계 すばらしき世界 , UNDER THE OPEN SKY , 2020
봉준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극찬한 일본의 화제작
영화 "멋진 세계"는 일본 개봉 전부터 일찌감치 전 세계 유수 영화제에 초청되어 작품성을 인정받은 수작입니다.
제45회 토론토국제영화제 월드 프리미어, 제56회 시카고국제영화제 관객상,
최우수 연기상 2관왕, 제47회 시애틀국제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하며 영화에 대한 완성도와 작품성을 인정받았습니다.
멋진세계는 13년 만에 출소한 전직 야쿠자가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담은 작품인데요
세계적인 작가 사키 류조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실존 인물을 모델로
13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전 살인범의 일생과 삶의 방식을 그린 '신분장'이 원작입니다.
타인과 사회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들이 보고 느껴야 하는 주제!
세번재 추천영화 "멋진세계" 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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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관계는 찬란한 꽃처럼 아름답다
모든 관계는 찬란한 꽃처럼 아름답다
영화 <클로즈> 리뷰
감독] 루카스 돈트
출연] 에덴 담브린, 구스타브 드 와엘, 레아 드루케, 이고르 반 드셀
시놉시스] 서로가 세상의 전부였던 레오와 레미는 친구들에게 관계를 의심받기 시작한다. 이후 낯선 시선이 두려워진 레오는 레미와 거리를 두고, 홀로 남겨진 레미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빠져들고 만다. 점차 균열이 깊어져 가던 어느 날, 레오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스포일러 주의#자신의 감정을 애써 외면하려던 한 소년
레오와 레미는 어렸을 때부터 한 동네에서 함께 자라며 친구처럼, 형제처럼 때로는 연인처럼 서로를 아껴왔다. 중학교 진학 전까지는 어떠한 문제도 없던 그들의 관계는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성’이라는 사회적 개념과 부딪히기 시작한다. 친구들은 그들에게 사회의 편견을 무기로 놀리기 시작하고, 결국 그 둘의 관계에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결국 레미는 레오의 무관심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해버리고, 남겨진 레오는 상실감과 죄책감에 하루하루를 더 바쁘게 살아가면서 소용돌이 치는 자신의 감정을 애써 외면한다.
자신의 마음이 너무나도 힘든 상태지만 이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던 어린 소년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아이스하키장에 매일같이 나가 훈련을 하고, 부모님이 운영하는 꽃밭에서 자신의 상체만한 꽃 모종들을 옮기는 등 육체적으로 자신을 몰아치면서 최대한 그 감정이 자신을 지배하지 않도록 애를 쓴다. 그 모습을 보는 내내 어찌나 짠하던지. 레미를 자신이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과 함께 지내왔던 절친한 친구가 이제 옆에 없다는 상실감으로 인해 레오는 피폐해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충분한 시간은 레오를 변하게 만들었다. 자신 나름대로 레미에 대해 외면도 해보았다가, 다시 생각을 해보았다가, 레미의 엄마를 만나보기도 하면서 레오는 ‘솔직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레오는 레미의 엄마가 일하는 병원으로 달려가 자신이 레미와 관계를 끊어내려 했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처음에 화를 냈던 레미의 엄마도 솔직하게 고백을 했지만 두려움에 덜덜 떠는 레오에게 다가가 안아주면서 달래준다. 결국 레오의 주변 어른들은 레오가 스스로 깨닫고 솔직하게 말해줄 때까지 기다려 준 것이었다. 이를 통해 아마 레오는 자신이 앞으로 맺을 모든 관계에서 솔직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꽃, 그리고 관계영화 클로즈는 레오와 레미가 흐드러지게 핀 꽃밭을 내달리며 시작한다. 그 형형색색의 꽃밭을 달리는 두 소년을 보면서 영화관에 가만히 앉아있는 나에게도 자유와 해방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고민 따위는 없어보이는 그 두 소년을 보면서 순수했던 과거의 시절이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둘의 관계는 중학교에 그들이 진학하면서 점차 깨어진다. 유달리 붙어지내는 그들에게 같은 반 친구들은 게이가 아니냐며 의심을 하기 시작하고, 레오는 이를 강력하게 부정하며 자신의 남성성을 부각할 수 있는 아이스 하키팀에 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레오는 레미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점차 꺼리게 되고, 이에 상처를 받고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던 레미는 결국 죽음을 택하고 만다. 결국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과 아이들의 편견으로 인해 그동안 의심받지 않아왔던 레오와 레미의 관계는 틀어지고, 한 생명이 세상을 뜨는 비극을 초래해버린 것이다.
우리는 꽃을 볼 때 이 꽃은 다른 꽃과 달라서 별로라는 생각을 하진 않는다. 다만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기에 선호하는 것이 생길 뿐이다. 다양한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들판을 두 소년이 달린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관계를 규정하고, 가치 판단하여 무엇이 옳고 그른지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모든 관계에는 그만의 아름다움이 있고, 나름의 매력이 있으며 각자의 선호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레미의 죽음을 통해 성장한 레오가 혼자서 다시 그 찬란하고도 아름다운 꽃밭을 내달린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맺을 다양한 관계에 희망을 가지며 말이다.
영화 클로즈는 아름다운 색감과 뛰어난 연기력,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잔잔한 주제까지 3박자가 잘 맞았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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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트 레이더스>, 결국 그들을 구원해 낸 것은 그들 자신이었다.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나이트 레이더스> 시사회를 관람한 후 작성한 리뷰글입니다.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
나는 디스토피아 영화를 좋아한다.
현실에서 만나볼 수 없는 세상, 그리고 그 세상 속에서 어떤 억압이나 규제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하지만 이러한 삶들 속에서도 항상 희망과 구원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어떤 한 개인에 의해서, 혹은 개인이 여럿 모인 단체에 의해서 이 디스토피아적인 세상에는 균열이 일어나고, 결국은 희망이 온 세상을 뒤덮게 된다.
이런 이유들로 디스토피아 영화를 꾸준히 찾곤 한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해 버석하고 어둡게 변한 세상이 다시 인간으로 인해 구원받게 되니까.
서기 2043년, 캐나다 북부는 독재국가 '에머슨'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이 독재국가는 새로운 전쟁을 일으켜 대제국을 세우려고 한다. 대제국을 세우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시민권이 없는 어린 아이들을 납치하여 '인간병기'로 양성하고자 한다. 이에 반대하며 '니스카(엘레 마이아 테일페데스)'는 딸 '와시즈(브룩클린 르텍시에 하트)'를 데리고 외딴 숲에서 숨어 지낸다.
하지만 독재국가의 감시자 역할을 하는 드론을 도망쳐 다니다가 와시즈는 다리를 다치게 된다. 감시는 점점 더 그들을 옥죄어오고, 와시즈의 상처는 깊어져만 가서 결국 니스카는 딸 와시즈가 독재국가 에머슨에 끌려가도록 내버려둔다. 독재국가 에머슨에 끌려가면 강제로 군사교육을 받고, 인간병기로 길러지지만 그곳에서는 안전하게 치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딸을 잃은 뒤, 스스로를 자책하며 살아가던 니스카는 독재국가에 대항하며 숲에서 지내던 캐나다 북부의 토착민 '크리족'을 만나게 된다.
크리족은 그녀를 구원자, 수호자라고 믿었고, 그녀는 크리족의 도움을 받아 '아카데미'에서 인간병기로 길러지고 있는 딸을 구출하고자 한다.
같은 시간, 딸 와시즈는 아카데미에서 아이들에게 '하나의 국가, 하나의 언어, 하나의 국기'라는 애국강령을 매일 반복하여 외우게 하는 등의 군사교육과 정신교육을 주입받고 있었다. 이 독재국가는 어린 아이들을 전선에 투입시키기 위해 강제로 학교에 소집하고, 남은 어른들에게는 바이러스가 담긴 음식을 유포하여 죽게 만들고 있었다.
이 장면들을 보며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이 땅에 살고 있던 기존 토착민들의 전통과 역사는 무시해버리고, 자신들의 사상만 주입시키려는 모습.
가치관을 형성해나가는 중요한 시기의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어긋난 교육을 하고 있는 모습.
지난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다.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모든 권리를 장악한 나라가 자기들만의 구실을 내세워 '교육'을 식민지 지배의 수단으로 삼던 모습. 우리나라의 역사를 무시한 채 자신들의 역사만 주입시키려던 모습.
이 영화는 이렇게 유난히 더 현실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니스카도, 와시즈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니스카는 딸 와시즈를 구하기 위해 크리족과 함께 아카데미를 찾아갔으며, 와시즈 또한 함께 갇혀 있던 아이들을 데리고 아카데미를 빠져나가려고 했다.
독재국가 에머슨에 맞서 싸우겠다는 일념 하에 이들은 모두 용맹하게 움직였고, 결국 와시즈와 아이들을 구출하는 것에 성공해냈다.
이는 단순히 한 어머니가 자신의 딸을 구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독재국가가 그렇게 용을 써서 어린 아이들을 모으려고 했던 이유는 아직 덜 성장한 이들을 대상으로 획일화된 주입식 교육을 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한 가치관을 형성해내기 위해서였다. 더불어 어린 시절부터 군사훈련을 받아 '자신들만의 인간병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였다.
결국 니스카와 크리족은 이렇게 미래사회의 주역인 아이들을 구출해냄으로써 독재국가의 계획을 무너뜨렸다.
뿐만 아니라, 이는 토착민의 문화와 역사, 삶을 지켜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영화의 초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와시즈는 남들보다 드론에 대해 더 잘 안다. 그리고 이는 영화의 후반부, 토착민들을 공격하기 위해 투입된 독재국가의 여러 드론들을 조종하는 와시즈의 모습과 이어진다. 와시즈는 자신의 능력으로 드론을 토착민들에게 유리하게 움직이도록 조종했으며, 토착민들은 이런 니스카와 와시즈를 보호하며 국가에 맞서 싸우고자 한다.
'그 아이를 데려온 건 그의 어머니였다.
그들은 북쪽에서 부족을 지키기 위해 온 것이다.
우리는 그녀를 수호자라고 부른다.'
결국 이 땅의 원래 주인인 토착민들을 구원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었다.
드론을 조종하는 와시즈와 그녀를 데려온 엄마 니스카를 통해 사람들은 희망을 목격했고, 다함께 힘을 합쳐 단결하는 과정을 통해 결국은 그 희망을 스스로 이루어내기 시작했다.
영화를 곱씹다보면 현재 국제사회의 모습이 계속 떠오르곤 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한 나라를 망가뜨리고, 그 나라의 사람들을 고통에 몰아넣는 모습.
오히려 이 영화보다 현실이 더 고통스러울 정도이다.
하지만 내가 이런 영화를 다 본 후에 항상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맞서 싸워야 한다.
실제로 영화에서 한 토착민은 이런 대사를 한다.
'식민 지배자와 싸우다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지배를 강요하는 국가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우리들의 굳은 의지와 용맹하게 맞서 싸우고자 하는 태도'이다.
현재의 나를 위해, 우리 가족을 위해, 그리고 먼 훗날 이 나라에서 살아갈 아이들을 위해 지켜내야 한다.
이 영화는 이렇게 치열하게 싸워나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결국은 희망을 마주하는데 성공한 사람들의 희열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섬세한 감정선과 스릴감을 지닌 <나이트 레이더스>는 이전까지 우리가 자주 접한 디스토피아 영화와 닮은 부분도 있지만, 그 결이 조금은 다른 영화이다. 현실과 맞닿아 있는 부분도 많은 이 영화를 꼭 영화관에서 관람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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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웅을 기다리며
영웅을 기다리며
6일에 개봉한 <드래곤 길들이기>가 3주째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흥행 중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15년 전 개봉한 애니메이션 <드래곤 길들이기>의 인기에 힘입어서일까? 비행 장면을 실사로 멋지게 구현해냈기 때문일까? 주인공 ‘히컵’이 잘생겨서? 반려 드래곤 ‘투슬리스’가 귀여워서?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필자는 이번 작품의 흥행을 서사를 중심으로 분석해보고자 한다.
주인공 히컵은 바이킹의 섬 버크에 살고 있다. 바이킹들은 일곱 세대에 걸쳐 드래곤과 긴 전쟁을 벌여왔다. 바이킹의 사회에서는 드래곤을 쓰러뜨릴 수 있는 공격성과 용맹함이 최고의 덕목으로 평가된다. 히컵은 족장 스토이크의 외동아들이지만 바이킹의 자질을 타고나지 못했다. 스토이크는 히컵이 자신과는 달리 ‘바이킹답지 않다’는 사실에 실망한다. 히컵은 ‘아버지의 인정’을 욕망하고 그로 인한 결핍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히컵은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드래곤을 사냥하고, 계속된 도전 끝에 자신이 만든 무기로 미지의 드래곤 ‘나이트 퓨리’를 맞힌다. 그러나 이는 히컵이 본격적으로 보통 세계를 벗어나는 계기가 된다. 히컵은 드래곤을 자신과 다른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드래곤에게서 두려움이라는 공통 정서를 발견하고, 드래곤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나’ ̄‘세계’의 이항 대립 구조에서 벗어난 히컵은 ‘자기와 같은 존재’를 죽일 수 없다. 그에게 모든 ‘세계’는 결국 ‘나’와 같기 때문이다. 히컵은 자신의 비범함을 깨닫고 ‘아버지의 인정’을 스스로 포기하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스토이크는 히컵에게 보편 규범 안으로 들어올 기회를 다시 내민다. 히컵이 그토록 원하던 드래곤 트레이닝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히컵은 더 깊은 갈등의 단계로 들어선다.
히컵은 친구가 된 ‘나이트 퓨리’에게 ‘투슬리스’라는 이름을 붙이고, 둘만의 유대를 쌓아간다. 히컵은 투슬리스와 함께할 때 진정한 ‘나’를 발견한다. 히컵이 드래곤 트레이닝에서 두각을 드러낼수록 주민들과 훈련생들은 그에게 동조한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히컵에게 위협이 되기도 한다. 히컵과 그들이 꿈꾸는 이상 세계는 같지 않기 때문이다. 히컵과 투슬리스의 연대가 강해지고 버크 섬 내에서 히컵의 입지가 커질수록 두 세계의 간극은 더욱 벌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히컵은 결정적인 시련에 직면한다.
‘투슬리스’의 정체가 발각되자 스토이크는 히컵을 감옥에 가두고 ‘투슬리스’를 드래곤 둥지를 찾는 일에 이용한다. 하지만 영웅에게는 언제나 조력자가 있는 법. 히컵은 짝사랑하던 아스트리드를 든든한 동료로 얻고, 다른 훈련생들도 히컵을 도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나선다. 아버지가 지키려던 이상 세계는 더 큰 폭력의 논리 앞에서 무너지고, 히컵은 힘의 논리를 뒤집어 연대로 맞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를 구해낸다. 히컵은 이렇게 ‘아버지의 인정’이라는 결핍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극복한다.
바이킹 부족은 최후의 적인 레드 데스를 물리친다. 히컵은 죽음의 위기를 겪고, 다리 하나를 잃지만 살아 돌아온다. 히컵은 버크 섬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다. 바이킹들은 이제 드래곤을 더 이상 적으로만 보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하나의 공동체로 받아들인다. 히컵은 내면적으로 완전한 성장을 이룬다. 다리를 잃은 그는 더 이상 예전의 히컵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아버지의 인정’, ‘아스트리드의 사랑’, ‘마을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며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난다.
<드래곤 길들이기>는 전형적 영웅 서사이며, 주인공 히컵은 ‘평범 속의 결핍’, ‘용기와 모험심’, ‘남다른 운명’, ‘조력자와 동료’, ‘내면적 성장’, ‘희생과 책임’, ‘초월성’을 두루 갖춘 전형적 영웅이다. 우리가 이토록 전형적인 이야기에 열광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는 언제나 영웅을 필요로 한다. 세계의 폭력과 갈등 속에서, 자신만의 비범함으로 낡은 질서를 깨뜨리고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영웅을,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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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모순 속에서 피어난다, 영화 <토베 얀손>
무민이라는 캐릭터를 좋아해서 무민 책들도 많이 가지고 있고, 만화책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무민을 만든 토베 얀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개본한다고 해서 굉장히 기대를 했던 영화 <토베 얀손>. 사실 무민이라는 캐릭터와 이야기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그 캐릭터를 만들어낸 토베 얀손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에는 완전 무지했던 것 같아서 이번 기회에 접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무민의 탄생비화와 무민에 대한 이야기를 또 다른 방향에서 접근해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영화 <토베 얀손> 시놉시스
“난 인생이란 멋진 모험이라고 믿어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예술가 토베는 삽화 의뢰로 알게 된 연극 연출가 비비카와 강렬한 사랑에 빠진다. 자신의 캐릭터 ‘무민’을 연극 무대에 올리고 시청 벽화를 그리며 인정받기 시작한 토베 하지만 비비카는 파리로 떠난다. ‘무민’ 작가로만 알고 있었던 그녀의 진짜 이야기를 만난다.
가장 가까운 존재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것
영화 말미에서 토베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토베는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고 마음을 가다듬던 중 어머니로부터 책자 하나를 전달받는다. 아버지는 토베가 예술가로서 능력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며, 만화 작가로서 작업을 하는 토베에게 핀잔을 주기 일쑤였다. 그랬던 아버지였지만 토베 몰래 토베가 투고하는 신문사에서 매주 발간되는 토베의 무민 이야기와 토베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하나 다 스크랩을 해두고 보관해오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깨달은 토베. 그간 그토록 아버지에게 듣고 싶었던 말을 이제서야 눈으로 보게 되어 눈물을 흘리고 만다. 이 장면을 보면서 한 사람의 자존감과 자신감을 일깨우는 데 가장 가까운 사람의 인정과 칭찬이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잘 보여준 작품이었다.
놓치 못했던 관계를 끊어내고 성장하다
토베가 늘 불안함에 쌓여있었던 이유도 바로 아버지에 대한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부터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토베는 그런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고 아버지의 길만을 강조하는 아버지 밑에서 충분한 자존감과 자신감을 키워나가지 못했다. 그런 그녀에게 자신을 인정해주는 존재였던 남자 아토스와 여자 비비카. 그들을 놓고 싶어도 놓지 못한 이유는 그들은 토베에게 자신을 인정해준 첫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유품을 받고 자신을 스스로 인정하기 시작한 토베는 드디어 스스로 비비타와의 관계를 끊어낸다. 프랑스에서 재회하고 다시 이어지는 듯 하지만 그 관계를 정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스스로 자립한 느낌이 들어서 인상적이었다.
무민처럼 사랑스러운 인생만을 살아간 것은 아닌 토베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사실 나는 토베 얀손에 대해 무민을 만든 작가라는 사실 외에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귀여운 생명체를 만들어낸 작가이기에 토베 얀손의 작품 역시 사랑스럽고 귀엽지 않을까 하는 시대감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는 굉장히 무겁게 흘러간다. 토베의 불안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흔들리는 카메라 워킹과 자신의 상황에 무서움을 느끼는 듯한 bgm. 내가 기대했던 따뜻함과 귀여움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오히려 우울함이 지배를 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그래서 사랑스러운 캐릭터를 만나보고 싶었던 나의 개인적인 기대와는 영화의 흐름이 달라 이 부분은 조금은 실망스러웠지만 인간으로서, 사람으로서의 토베 얀손에 대한 이야기는 그녀의 감정이 고스란히 잘 전달될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비비카고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당신 아토스라며 당당하게 말하는 토베. 그리고 그 두가지 사랑이 동시에 가능하다는 자유로운 토베. 자신의 삶이 어떻게 될지 무서움을 느끼며 굉장히 유약해보이지만, 그 행동에 있어서는 두려움이 없는 사람 토베. 어찌보면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는 한 인간, 한 여성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풀어내서 인간은 모순을 갖고 살아가는 것임을 그 속에서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성장할 수 있음을 잘 보여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토베 얀손>은 추석 연휴를 맞이하기 전 잔잔하면서도 섬세한 작품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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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기생충' 다르게 보기
이것은 파이프(로 보이는 물체) 아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써놓음으로써 많은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 <이미지의 반역(배반)>이라는 그림이다. 정말 그럴까? 이 그림을 그린 르네 마그리트의 사유를 차용해 물질적 속성을 따지자면, 이 이미지는 '그림'이라기보다는 <이미지의 반역(배반)>이라는 '그림'을 스캔한 '컴퓨터 파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림을 그리는 철학자' 르네 마그리트는 언어와 대상, 대상과 대상을 재현한 이미지, 언어와 이미지의 연결은 자의적이므로 얼마든지 단절되거나 자유롭게 재구성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대상이 통념상 있음 직한 공간을 벗어난 생경한 장소에 위치하고, 현실에서라면 한 프레임 안에 있는 것이 불가능한 대상들이 공존하는 그의 그림들은 나태한 사고를 깨부순다. 생각의 한계를 무너뜨린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 회화는 당대를 뒤흔들었고, 후대의 다양한 예술가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블랙코미디, 스릴러, 가족 드라마 등 하나의 영화 안에서 함께 존재하기 어려운 다양한 장르적 요소가 뒤섞여 장르를 규정하기 힘든 영화 <기생충>을 본 후, 현실의 경계를 파괴하는 파격적 미학을 선보인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반역(배반)>이 떠올랐다. 르네 마그리트가 회화 예술의 관습을 격파했듯이 봉준호 감독은 영화 장르의 틀을 붕괴시켰고, 언뜻 누가 보아도 빈부격차가 핵심인 것 같은 <기생충>에 빈부격차 자체보다 더 중요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가정 형편이 극단적으로 차이나는 두 가족이 등장한다. 두 가족은 사는 곳이 정반대다. 잇따른 자영업 실패로 궁지에 몰린 기택(송강호) 가족은 누추한 반지하집에 살고, 성공한 IT기업 CEO인 박사장(이선균) 가족은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대저택에 산다. 햇빛이 잘 들어올 리 없는 기택의 반지하집은 대낮에도 어둑하고, 채광이 끝내주는 박사장의 대저택은 실내에 있어도 비타민D를 합성할 수 있을 만큼 자연광이 풍부하게 들어온다. 기택 가족은 고기는커녕 한끼 제대로 챙겨 먹기도 힘들지만, 박사장의 부인 연교(조여정)는 짜장 라면에 한우 채끝살을 넣어 먹는다. 박사장 집에 사는 강아지들이 기택 가족보다 영양 상태가 훨씬 더 좋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이 두 가족 간의 극심한 격차는 영화 플롯의 변곡점이 되는 비 오는 밤 시퀀스에서 극적으로 표현된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하염없이 계단을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기택 가족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수직적 계급 사다리가 연상된다. 가난한 자는 달동네처럼 높이 올라가야 하거나, 반지하처럼 깊이 내려가야만 하는 곳에서 자신의 거처를 마련할 수 있다. 물론 부자도 지대가 높은 곳에 사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부자는 가난한 사람처럼 좁은 계단을 걸어 올라가지 않고, 기사가 운전하는 고급 승용차에 앉아 잘 닦인 도로를 따라 집에 도착한다.
이처럼 빈부격차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설정과 상징이 영화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기생충>이 진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빈부격차가 아니라는 생각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기생충>에는 부자와 빈자가 함께 등장하는 영화라면 으레 기대할만한 부자에 대한 부정적 묘사가 없다. 영어를 섞어서 말하는 박사장의 부인 연교와 기택에게서 불쾌한 냄새가 난다고 말하는 박사장이 재수없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은 경제적 계급 격차를 다룬 여느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부자들처럼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해 부를 일군 사람들이 아니다.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폭언이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자신들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에게 정당한 돈을 지급하고, 속마음은 다를지 몰라도 최소한 겉으로는 예우한다. 기택의 부인 충숙(장혜진)이 술에 취해 박사장 가족의 인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돈이 다리미야. 돈이 주름살을 쫘악~ 펴줘.”라고 말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 <기생충>은 빈부격차의 ‘현상’ 자체는 실감 나게 보여주지만, 빈부격차를 타파하고 경제적으로 더 평등한 사회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하는 영화는 아니다.
돈을 매개로 엮인 박사장 가족과 기택 가족의 관계는 빈부격차를 문제시하기보다 빈자와 부자 간의 상호의존성에 주목하게 만든다. 박사장 가족은 굳이 자신들이 직접 하지 않아도 될 출퇴근 운전, 집안일, 자녀 교육을 자신들보다 더 잘 처리해주는 사람에게 기꺼이 대가를 지불한다. 박사장 가족에게 귀찮고 시간 낭비에 불과한 일들을 대신해주는 기택 가족은 요긴한 존재다. 한편, 박사장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임금은 기택 가족이 당장 먹고살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돈이다. 박사장 가족과 기택 가족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다.
이렇게 본다면, 영화의 제목인 '기생충'의 의미가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과연 박사장의 재력에 의지한 기택 가족만 누군가에게 기생한 것일까? 부자의 일상을 누리기 위해 허드렛일을 대신해줄 누군가가 꼭 필요한 박사장 가족도 기택 가족에게 기생한 것인지도 모른다. 가난한 사람 중에 부자가 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기택 가족의 사업이 잘 풀렸다면, 기택 가족이 누군가를 고용해 잡일을 맡겼을지 모를 일이다. 이처럼 <기생충>은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달성하는 데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줄 따름이다. 강한 신분 상승 욕망을 지닌 기택의 아들 기우(최우식)가 자신의 계획대로 부자가 된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기우는 박사장만큼 주름지지 않은 부자로 살 수 있을까? 혹시 나쁜 인간이 되지는 않을까?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내면의 꿈틀거리는 욕망과 콤플렉스를 잘 살펴보라고 영화 <기생충>은 우리 앞에 거울을 들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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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의식, 혐오의 자기합리화
일반적으로 꿈이란, 인간의 무의식을 기반으로 하거나 이러한 무의식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억압된 욕망이 투영되어 만들어진다. 즐겁고 행복한 꿈보다 어딘가 어긋나 있고 이상한, 불쾌하거나 불안한 꿈을 더 많이 꾼다. 불쾌한 꿈은 깨어난 이후 행복한 꿈보다 기억이 더 오래 지속된다. 이런 명제를 두고 보면 무의식은 의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의식이 있을 때 역시 우리는 행복한 기억들보다 불쾌하고 불안한 기억들이 더 자주 상기되고 더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꿈은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고 현실에서는 불가능할 법한 일들을 경험하게 한다. 이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폴이 다른 사람들의 꿈속에 등장해 비현실적인 방법으로 꿈의 주인을 죽이는 것처럼 말이다. 이야기의 초반, 폴은 자신의 딸을 시작으로 주변인들의 꿈에, 더 나아가 얼굴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타인들의 꿈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사람으로 반복해서 등장하게 된다. 그들의 무의식 속 폴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일까? 사실 우리는 이 꿈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 ‘폴’이라는 인물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혹시나’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만약 폴이 사람들의 꿈속에 처음처럼 그냥 가만히 서 있는 사람으로 등장했다면 호기심에서 그쳤을지도 모르겠다. 꿈속에서 자신을 죽이는 사람으로 처음 마주한 폴에 대한 두려움이 형성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할 수 있다. 이 사람이 평소에 어떤 행실을 가지고 살았던 그것은 우리가 상관할 바 아니라는 것처럼 말이다. 강렬한 꿈은 좀처럼 잊을 수 없기에 불쾌함은 오랫동안 지속되고, 꿈에서 나를 죽인 사람이 실제로 눈앞에 나타난다면 불쾌함이 자연스레 표출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는 잘 아는 사람을 좀처럼 증오하지 못한다.’는 윌리엄 해즐릿의 신조는 다르게 말하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증오하기 수월하다는 뜻으로 읽히기도 한다.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상상하는 것은 더욱 쉽다. 그렇다면 현실이 아닌 꿈에 나타나 나를 비현실적으로 죽이는 사람을 현실 속에서 혐오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일까? 즉, 인간의 무의식을 통해 나타난 꿈이 현실 속 혐오라는 폭력의 수단으로 사용되며 과연 이것이 합리화될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대해 우리는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겠다. <드림 시나리오>(2024)는 이렇게 납득이 되지 않는 이유(무의식)를 빌미로 꿈을 이용해 비현실적인 혐오가 난무하는 현대 사회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는 영화다.
영화 속에서도 나왔듯 원래 모든 밈은 꿈이 된다는 말이 있고, 인터넷에 도배가 된 폴의 꿈을 꾸는 건 쉬웠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전부 폴에 대한 꿈을 꾸는데, 어떻게 자신만 꾸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반면 과연 정말 전 세계 사람들이 폴에 대한 꿈을 꾸었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기도 한다. 사람의 욕망과 심리라는 것은 자신은 특별하게 보이고 싶고 유행에 뒤처지는 것을 기피한다. ‘사람들은 꿈의 내용을 의미 있는 어떤 내용으로 대체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낀다.’고 이야기한 프로이트의 말처럼 자신의 꿈이 사람들에게 주목받으며 공감받기를 원하고, 유행하는 것들을 따라가고 싶어 한다. 일명 도파민이라는 핑계로 자극적이면 자극적일수록 세상에 더욱 관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하다. 자극적인 꿈의 내용에 폴을 집어넣어 실제 자신이 꾼 꿈이 아닌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 사람들이 존재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꿈의 유행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역시 트렌드에 합류하여 주목받기를 바라는 욕심에 눈이 멀어 폭력에 가담한 것이 아니겠는가. 허구의 이야기는 누군가를 몰아가기에 아주 적합한 수단이다.
폴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채로 등장했던 이전과는 다르게 몰리의 꿈에 그녀의 무의식 속 잠재되어 있던 성적 욕망을 드러내 보이는 역할로 나타난다. 이는 폴이 타인의 꿈속에서 처음으로 ‘행동’하는 순간이다. 이를 시작으로 가만히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폴이 점차 학생들의 꿈을 시작으로 이외 사람들의 꿈에 꿈의 주인을 죽이거나 몰리의 꿈과 비슷하게 성적인 욕망의 사람이 된다. 트라우마가 트렌드라는 폴의 말에 수긍하는 듯 트라우마라는 원인을 내세워 폴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사회의 암묵적인 룰이 된 셈이다. 현실에서는 아무런 짓도, 타인에게 해를 가하는 짓도 하지 않은 폴은 꿈으로 인해 가해자가 되어있다. 현실에서는 그를 죽이기 위한 조증 환자가 집에 침입하여 피해자가 된 폴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꿈속에서는 꿈의 주인을 죽이는 가해자가 된다는 말인가. 이는 다수의 사람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보다 한 명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 더욱 쉽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한 사람을 평가하는 말이 같다면 실제의 ‘나’는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그런 사람이 되어 있다. 악몽의 시작인 동시에 폴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합리화하는 것의 시작일 것이다. 입소문은 빠르고 꿈만큼이나 왜곡되기 쉽다. 꿈을 검열하고 왜곡하도록 강요하는 심리 상태 역시 무의식에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매주 수업에서 보는 교수가 꿈속에서 자신에게 위협을 가한다면? 나를 죽이려고 달려든다면? 꿈의 주인은 불안하고 실제로 ‘나’를 죽일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인다. 이러한 꿈을 꾼 학생이 친구에게 꿈 이야기를 전파했다면 ‘혹시나’하는 불안으로 인해 다른 학생들에게는 자신을 죽이는 꿈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점차 다수의 사람 꿈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실제로도 폴은 위험한 존재가 된다.
앞서 이야기한 과연 정말 전 세계 사람들이 폴에 대한 악몽을 꾸었을까에 대한 궁금증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자신을 죽였다는 정확한 꿈의 내용이 주변인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존재하지 않고 대부분 그저 ‘죽이는 꿈’을 꾸었다는 허황된 말들뿐이다. 정확한 근거가 없다는 뜻이다. 꿈에 근거가 어디 있겠는가. 자신이 꾸었다고 하면 꾼 것인데. 누가 이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까. 이로 인해 꿈으로 인한 선동은 다른 것들보다 선동되기 훨씬 수월하다. 개인의 말이 곧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질투는 타인의 성취나 유리한 입장에 배가 아프거나 괴로워하는 마음이다. 특별해 보일 것 없는 사람인, 존재감 없고 제대로 된 연구 논문 하나 내지 않은 채 여전히 명성 없는 대학교수인 폴이 갑자기 사람들의 꿈에 나타나게 되고 인기를 얻게 되는 것은 몇몇 사람들 입장에서는 질투가 나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고작 많은 사람들의 꿈에 나왔다고 해서 한순간에 인기를 얻은 폴이 어떻게 눈엣가시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얼룩말처럼 무리에서 벗어나 혼자 튀었기 때문에 타깃이 되기도 쉬웠다. 어째서 사람은 현실이 아닌 가상의 꿈을 통한 개인의 상상과 생각을 가지고 한 사람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는가? 우리는 왜 이렇게 쉽게 혐오에 휩싸이는가. 꿈이라는 가상을 현실까지 끌고 와 상대방에게 해를 가하는 것에 대해 그 누구도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이때 그로테스크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학생들의 악몽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해 정서적 격발 기제를 푸는 심리 치료를 진행하지만, 트라우마를 치료하기는커녕 오히려 트라우마가 더욱 악화한다. 꿈으로 인한 불쾌감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도 지속되기 때문에 학생들은 폴에게 자신들과 같은 불쾌감을 쥐여 주고 싶었다. 이후 폴의 차에 학생들은 낙서를 해 두고, 폴에게 욕설을 날리는 등 폴에게 실제로 위협을 가하며 이 상황을 핸드폰으로 찍거나 구경한다. 마치 이런 폴의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학생들을 향해 격분하는 모습이 폴의 실체임을 이미 알았다는 듯 비아냥거리기에 바쁘다. 인간은 악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어서 나쁜 짓을 하며 이를 통한 만족을 얻게 된다는데,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방법은 혐오밖에 없다는 말일까. 어쩌면 학생들은 트라우마를 옳은 방법으로 치료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 혐오가 그들이 원했던 치료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악몽으로 인해 폴은 교수로 있던 학교에서 정학을 당하고, 가족의 불화가 생기고, 학생들에게 조롱을 당하는 등 폴의 주변 사람들이, 심지어는 폴이 모르는 사람들 모두 폴에게 등을 돌린다. 더 이상 폴은 꿈과 상관없지 않다. 꿈속의 ‘남자’가 자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폴과 달리 사람들에게 꿈속의 ‘남자’는 ‘폴’이 되었다. 누가 폴을 피해자라고 생각하겠는가. 사람은 자신이 피해자가 되는 건 쉬우며 가해자가 되는 것은 어렵다. 자신이 가해자의 입장에 설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한다. 어떤 경우에서든 자신을 보호하고 싶어 하며, 심지어 자신이 실제로 타인에게 해를 가하고 있음에도 자기합리화를 하기에 바쁘기 때문에 진짜 피해자를 구별해 낼 인지가 부족하다. 이렇게 폴은 무의식으로 인한 의식의, 피해자의 의견은 묵살되는 사회의 완벽한 피해자가 되었다.
사람의 상상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누군가를 벼랑 끝으로 내몰 수 있는 것도 전부 사람의 상상이다. 타인을 조롱하고 혐오하는 것은 끝이 없다. 심지어 다수의 사람이 한 사람을 향해 같은 비난을 쏟아내면 그것을 오롯이 받아내는 폴은 어떻게 될까. 폴은 자신이 자신을 죽이는 악몽을 꾼다. 폴이 현실에서 손가락질받으며 가해자라는 인식이 지속되고, 결국 폴마저 이러한 인식 속에 잡아먹힌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자기 내면이, 그 내면의 어두운 부분이 있지 않을까에 대해 스스로 의심하게 되고, 이는 무의식 속 잠재되어 있던 불안이 폴의 꿈을 통해 나타난다. 결국 폴은 이런 사회적 혐오에 처참히 무너진다. 그리고 이는 겉잡을 수없이 번져 끝내 자기혐오로 다가온다. 자기혐오는 자신을 죽이는 일이고, 자신을 죽이면서까지 자기를 혐오하는 무리에 들어가기 위해 애쓴다. 상상이 상상에서 그치지 않고, 무의식이 무의식에서 그치지 않은 결과인 셈이다.
꿈속 누군가를 위협하는 존재로 등장했던 폴은 결국 현실에서마저 자신을 포함한 타인에게 위협을 가하는 존재가 된다. 단 한 번의 사고로 폴은 완벽한 피해자에서 예정되어 있던 완벽한 가해자로 변한다.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위협을 가하는 존재가 된 폴은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사라져 버린다. 꿈에서 사라진 폴이 점차 잊힐 때쯤 그렇게 혐오했던 폴을 다시 마케팅 수단으로 사용하는 ‘노리오’가 개발된다. 긍정적인 꿈을 꾸게 해 줄 수 있는 제품이고, 폴 없이는 존재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의 꿈에 나타나는 힘을 사람들을 겁주는 데 사용해 안타깝다는 말을 통해 여전히 폴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폴이 타인의 꿈에 나타나 꿈의 주인을 죽인 것이 폴의 자의였다고 확정 짓는 대목이다. 사람들의 상상은 더 이상 바꿀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되어 버렸다. 예전의 감정은 되살릴 수 없듯 인생 역시 되돌릴 수 없기에 더 이상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완벽한 혼자가 되어버린 폴은 무중력 상태가 되어 여전히 공중을 떠다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드림 시나리오>는 이러한 무의식이 현대 사회 속 혐오와 폭력이 ‘자기합리화’에 이를 수 있다는 결론을 낸다. 하지만 사실, 무의식에 근거한 혐오와 폭력이 자신에게만 합리화될 뿐 모두에게 실제로 합리화되지 않는다. 무의식에서 폭력을 당하는 것과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 당하는 것은 너무나 큰 차이다. 폴에게 폭력을 가한 사람들은 전부 무의식 속의 ‘누군가’가 아닌 의식이 명확히 존재하는 ‘인간’이다. 자신이 폭력을 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다. 피해자를 제외한 그 누구도 그것이 잘못되었다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 모두가 자기 행동에 동조하기 바쁘다. 세상은 변하지만, 사람의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의 근본이 변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수 있지만 세상이 변함에 따라 혐오를 대하는 방법은 변해가는 세상에 맞게 달라져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는 혐오가 난무하는 사회 속에서 혐오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누군가를 먼저 앞서서 혐오하기에 바쁘다. 누군가가 선동을 시작하면 개인 속에 잠재되어 있던 혐오가 기어 올라와 기어코 폭력을 휘두른다. 폭력을 휘둘러야 만족하고 만다.
꿈만큼 현혹되기 쉬운 것도 없다. 우리는 꿈을 꾸면 그 꿈에 대해서 의미를 해석하기에 바쁘고, 불쾌한 꿈을 꾼다면 그 무의식 속 불쾌함이 의식까지 영향을 미치며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지속된다. 하지만 이러한 ‘불쾌감’이 누군가를 혐오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는 없다. 그 누구에게도 혐오 받을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혐오 받을 권리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혐오할 권리는 존재하는가.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가. 생각이란 무엇이고, 또 이런 생각에 기초한 상상이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생각과 상상을 끊임없이 타인을 포함한 자신의 혐오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을까. 생각이 혐오의 수단으로 흘러가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인가? 생각은 사실 단순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기에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혐오로 흘러가지 않도록 막을 힘이 충분히 존재한다.
우리는 혐오가 유행이 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혐오가 밈이 된다. 우리는 정말 살면서 한 번도 타인을 혐오한 적이 없을까. 내가 사용하는 밈이 누군가를 혐오하는 문장이지는 않을까. 제삼자의 시선으로 본다면 그것이 명백한 혐오임에도 불구하고 혐오가 아니라고 자기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비판이라는 명목하에 비난이나 혐오를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어떻게 타인을 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혐오가 혐오라는 것을, 혐오를 그만둬야 한다는 사실을 더 많은 사람들이 소리 낼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어쩌면 이런 용기를 내기 위해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누군가를 혐오하기보다 우선 이러한 현상이 합리화되는 사회를 충분히 의심하고 경멸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이 더 이상 폭력적이지 않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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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계+인 1부] 감상평 - 팝콘무비로써는 합격이지만, 어딘가 헐거운 l 아주 약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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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팀업무비의 특성상 관객들이 공통적으로 원하는 몇가지 요소들이 있습니다. 매력적인 빌런, 혹은 적대자일 것, 각각의 등장인물들의 능력들을 최소 한 번이상 임팩트있게 연출할 것. 작품이 그려내는 세계관이 관객들에게 충분히 납득이 될 것. 그밖에 많은 요소들이 있지만 제가 말씀드린 이 세가지만 갖춰져도 분명 작품을 보는 관객들은 일정 부분 긍정하게 만들 수 있을겁니다.
그렇다면 이번 최동훈 감독의 외계+인 1부는 어땠을까요? 오늘 영상은 스토리보다는 전체적인 감상평으로 이뤄져있으나, 리뷰의 특성상 캐릭터, 혹은 개연성에 관한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리기 때문에 작품을 감상하시는데 큰 무리가 없는 선에서 작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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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놈2 vs 듄 흥행예측!! 과연 어떤 영화가 흥행할까? 토론 배틀(feat.댓글 이벤트)
영화 드라마 모두 마사지하듯 시원하게 이야기로 풀어드립니다! 씨네마사지 ? 10월 초대형 기대작 베놈2와 듄이 개봉을 앞두고있습니다. 씨네랩과 씨네마사지가 만나 어느 영화가 흥행할것인지 토론을 진행하였습니다. *이벤트 알림 10월 20일까지 어느 영화가 흥행할지 댓글로 달아주시면(각 영화 개봉 후 1주차 국내 관객수) 정답을 맞추신 분들중 추첨하여 '프리미엄 영화관람권 2매'를 보내드립니다!! 많은 댓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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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즈니+ <피터팬 & 웬디> 티저 예고편
피터 팬과 함께 떠나는 미지의 세계 네버랜드! 모두가 사랑한 마법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디즈니+ 오리지널 영화 [피터팬 & 웬디] 티저 예고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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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사다 가족> 메인 예고편
아버지를 닮아 어릴 적부터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던 마사시는 사진전문학교에 진학하고
졸업작품으로 가족들과의 행복한 시간을 재현한 사진을 찍는다.
독특한 가족사진으로 주목받게 된 마사시는
타카하라 가족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를 돌며 특별한 가족사진을 찍어주는데
어느 날, 타카하라 가족이 사는 마을에 쓰나미가 덮쳤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들을 찾기 위해 마을로 간 마사시는 버려진 사진을 세척하는 봉사를 통해
마을 사람들과 소통하며 가족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