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니엘2022-11-24 10:59:39
타이베이의 청춘들의 사랑과 집착의 결과물
영화 <청춘시련> 리뷰
유팡은 타이베이의 천 의원의 딸이다. 자신의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다가 기차역에서 칼을 든 괴한의 습격을 받는다. 다행히 유팡을 밀쳐낸 남자친구는 다치지만 그 괴한은 이미 사라졌다. 알고 보니 괴한의 이름은 밍량이였고 현실과 게임을 구분하지 못하며 조용한 성격의 남자이다. 사실은 유팡의 집에서 같이 사는 밍량은 말도 한마디도 하지 않으며 게임만 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키키의 유혹에도 밀쳐내며 오직 자신의 세계에 빠져 산다. 그리고 유팡은 자신의 집에서 포르노 배우인 모니카와 사랑을 나눈다. 그 장면을 몰래 동영상을 찍은 밍량은 자신이 한 짓이 어떤 파급력을 가질지 생각해야 되는데...
유팡은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친구가 있음에도 포르노 배우인 모니카와 동성애인 관계였다.
청춘 그 속에 스며든 무언가
유팡이 자신의 전 여자친구라고 여긴 밍량은 자신이 했던 짓들이 CCTV에 드러나게 되고 경찰서로 자백하러 간다. 그리고 유팡이 포르노 배우인 모니카와 성관계를 나눈 동영상을 경찰들에게 보여준다. 그 동영상이 방송으로 유출되자 유팡은 구토를 하고 천 의원은 자신의 딸이 모니카와 동성애를 하는 관계였다는 것 때문에 기자들의 질문 폭격을 받는다. 그러나 그 사실이 알려지자 남자친구는 충격을 받는다. 결국엔 천 의원은 자신의 딸인 유팡과 함께 이란으로 가고 그곳의 기차역에서 자신의 남자친구와 만난다. 이 영화는 타이베이에서 청춘들이 겪는 사랑과 집착같은 주제를 다루며 자신들이 겪는 시련에 아픔이 있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몇몇 장면들이 청소년 관람 불가로 판정될 만큼 강렬한 사랑을 다루는데 그 속에서 삶의 걱정을 잊게 만드는 안정제가 된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청춘이 위험하면서 과감하기도 한게 아닐까?
타이베이의 청춘들이 겪는
사랑과 집착 이야기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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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파트 공화국의 지옥 같은 현실 우화!
“대한민국은 아파트 공화국이다”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아파트 공화국에 살고 있다. 10명 중 6명은 아파트에 살 정도로 타 국가에 비해 거주자 수가 많다. (필자도 아파트에 산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아파트에 몰리는 건 주택, 빌라 보다 더 나은 편의성 때문일 수 있지만, 알고 보면 그 놈의 돈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는 곧 돈이자 권력인 셈. 이로 따라 차별과 계급, 집단 이기주의라는 사회적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상황 속 무너지지 않은 아파트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피부에 와닿는 아파트 공화국의 지옥 같은 현실을 그린다.
대지진이다. 거짓말처럼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거짓말처럼 유일하게 황궁 아파트만 멀쩡하다. 아파트 주민은 기적과도 같은 현실에 기뻐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다. 재난에 살아남은 이들이 이 아파트로 몰려왔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자신의 보금자리와 식량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외부인들을 쫓아낸다. 이때 본의 아니게 피 흘리며 선봉장 역할을 한 영탁(이병헌)은 대표로 추대된다. 평범한 공무원인 민성(박서준)은 아파트 주민을 위한다는 목적으로 영탁과 함께 일하고, 그의 아내 명화(박보영)는 그런 남편의 모습에 불안감을 내비친다. 안정적이면서 폐쇄적인 자신들의 왕국을 만들어가는 도중, 과거 이 아파트에서 살았던 혜원(박지후)이 들어온다. 그리고 영탁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쌓인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의 재난은 설정에 불과하다. 영화가 보여주고 싶은 건 폐허가 된 상황 이후, 살아남은 이들의 행동에 있다. 겉으로 보기에 황궁 아파트 주민들은 자신들의 공동체 사회를 견고하게 가져가기 위해 똘똘 뭉친다. 폭력을 쓰면서까지 어떻든 자기 마을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첫 행동이 바로 외부인을 몰아내는 것이다. 가족과 마을을 위한 일로서 이해되지만, 한편으론 그 행동에 다른 의도가 섞여 있다.
황궁 아파트 주민들은 재난 이전 옆에 있던 고급 아파트 드림팰리스 사람들에게 무시당해 왔다. 아파트도 다 같은 아파트가 아니니까. 그러다 황궁 아파트만 남게 된 상황에서 부녀회장 금애(김선영)는 이때가 기회라 생각하고 드림팰리스에 살았던 이들을 몰아낸다. 차별은 차별을 낳고,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는 걸 잊어버린 채 이들은 폐해가 된 곳에서 자신들만의 사회를 재구성하려고 한다.
문제는 주민 모두가 잘사는 사회를 만들고자 노력했지만, 결국 이전 사회의 폐단을 반복하는 것에 있다. 극 중 금애는 다 평등해졌고, 리셋된 거라고 말하지만, 아파트 내에서 참여도와 공헌도에 따라 계급이 나눠지고, 그에 따른 생필품과 식료품이 차등 지급된다. 열심히 일한 자에게 더 많은 것을 주는 게 나름 이성적인 판단이고, 다수결을 통한 주민들의 선택은 옳아 보이지만, 결국 이 결정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향한 차별을 낳는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생각으로 범죄 행동을 일삼는 주민들은 그 자체로 집단 이기주의 늪에 빠지고, 비극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간다.
이처럼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상 속에서도 반복되는 한국 사회의 단면은 우리의 현실을 자각하게 만든다. 결은 다르지만, 주민들의 행태를 보면 단지 내 외부인 출입을 금한다는 명목하에, 택배, 배달원을 향해 갑질을 하고, 집값 떨어진다는 이유로 노인요양원 건립을 반대하는 이른바 님비(NIMBY:not in my backyard) 현상을 떠올리게 만든다. 영끌해 집 한 채를 소유하는 게 평생 과제로 삼은 이들의 행동은 한편으로 이해가 되면서도 씁쓸함을 남긴다.
아파트 공화국인 현실 사회를 비판하는 영화는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관객에게 질문한다. 만약 같은 상황이라면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공동체를 지키는 영탁이처럼 행동할 것인지, 그 대척점에 서서 인류애를 실천하는 명화처럼 행동할 것인지, 아니면 이도 저도 선택하지 못하고 기류에 휩쓸려 공동체를 지키는 행동이 옳다고 믿는 민성이처럼 행동할 것인지 말이다. 영화가 끝나도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다.
다만, 영화는 주민과 외부인으로 나눠버리는 이분법적 사고를 지향한다면 황궁 아파트의 비극은 현실에서도 일어날 것이라고 전한다. 명화의 마지막 모습과 그 대사는 이 메시지에 힘을 실어주며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계속해서 관객에게 딜레마를 안기는 건 김숭늉 작가의 웹툰 원작을 각색해 재난 장르에 한국 사회의 현실을 녹여낸 엄태화 감독의 연출력에 기인한다. 간간이 클리셰가 느껴지는 장면들이 있지만, 아파트 층을 올리듯 켜켜이 쌓은 밀도 높은 이야기는 그 자체로 흡입력이 강하다. 여기에 이병헌, 박서준, 박보영, 김선영 등 극한에 몰린 다양한 인간군상 연기가 강한 인상을 남긴다. 특히 선과 악을 넘나들며, 한국 사회 속 괴물이 되어버린 한 평범한 사람의 페이소스를 확실히 전한다.
극 중 황궁 아파트 주민들은 자신들을 선택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 선택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유토피아가 될 수 있는 공간은 사람들의 욕심으로 디스토피아가 되었기 때문이다. 부자도 아니고 딸랑 집 한 채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라 이타심보단 이기심이 더 앞설 수 있다. 우리 또한 평범한 사람들. 과연 나라면 그들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사진 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평점: 4.0 /5.0
한줄평: 아파트 공화국의 지옥 같은 현실 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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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에이트 쇼 | 메시지도 이야기도 놓쳐버린 불상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한 후 평범하게 살아가던 '진수'(류준열). 하지만 그는 지인을 따라서 주식에 손을 댔다가 투자한 돈을 다 잃고, 사채업자에게 쫓기던 중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릴 결심을 한다. 그 순간 갑자기 도착한 입금 문자와 게임 참가를 종용하는 메시지. 계좌에 꽂힌 엄청난 액수의 돈에 놀란 진수는 그 자리에서 게임 참여를 결정한다.
3층 카드를 골라 방에 입주한 그는 1분에 3만 원씩 버는 규칙에 놀라고, 다른 참가자 7명, '8층'(천우희), '7층'(박정민), '4층'(이열음), '6층'(박해준), '2층'(이주영), '5층'(문정희), '1층'(배성우)과 안면을 튼 후 게임을 가능한 오랫동안 지속할 규칙을 만들어 간다. 그러나 우연히 갈린 층수에서 비롯된 불평등이 가시화되자 참가자 8명은 서로를 짓밟고 더 많은 돈을 쟁취하기 위한 경쟁에 돌입한다.
감독이 작품보다 우선될 때
거울. 영화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할 때 흔히 사용하는 비유다. 거울을 보면 안 보이던 외적인 문제를 찾을 수 있듯이, 영화도 관객이 미처 깨닫거나 생각 못했던 사회적 문제를 일깨워줄 수 있으니까. 봉준호의 <기생충>과 <설국열차>가 그랬듯이.
한재림 감독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에이트 쇼>를 자기만의 거울이라 생각한 듯싶다. 배진수 작가의 웹툰 '머니게임'과 '파이게임'을 각색한 이 드라마는 한국의 사회적, 경제적 구조를 비판, 풍자, 고발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전작인 <관상>, <더 킹>, <비상선언>에서 선보인 연출력과 스타일을 적극 활용해 메시지를 펼쳐 보이고, <오징어게임>의 아류작이라는 이미지를 탈피하려고도 한다.
그러나 <더 에이트 쇼>는 한재림의 <기생충>도, <오징어게임>도 되지 못했다. 우선 거울에 비춰 보여주려는 문제점을 영화적으로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못했다. 다른 작품과 차별화되는 지점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감독 자의식이 과하게 반영된 마무리는 시청자가 작품을 소화할 여지를 없앴다. 그 대가로 8부작 드라마의 화려한 볼거리는 단순한 기교에 불과해지고, 의도도 메시지도 가학성과 자극성에게 잡아먹혀 버렸다.
명확한 목적
<더 에이트 쇼>의 목적은 확실하다. 8개 층으로 이루어진 시스템에 한국 사회를 빗대어 그 모순점과 불평등함을 비판, 풍자하려 한다. 우연히 1층부터 8층까지 선택한 8명의 주인공. 그들의 운명은 순전히 운에 달렸다. 가장 이상적인 비율의 피보나치 수열로 1층부터 8층까지의 상금이 주어지지만, 시간이 갈수록 권력과 부의 격차는 벌어진다. 금수저론, 코인과 주식 열풍이 불었던 원인을 유비적으로 드러내려 한다.
어떻게 보면 <기생충>과 <오징어게임>의 만남이다. <기생충>이 계단을 활용해 계층 관계를 보여줬듯이, <더 에이트 쇼>도 위아래로 움직이는 동선 속에 1층부터 8층까지의 위계를 녹여냈다. 바삐 움직이는 캐릭터들도 한국인의 대표적인 모습을 집약한 듯하다. 위로 올라가려 발악하는 1, 2, 3층. 이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4, 6, 8층. 그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5층과 7층. 주변에서, 또 뉴스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인물상이다.
이에 더해 윤리적인 선도 함께 건드린다. 8층을 장악한 이들은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아래층을 잔인하게 찍어 누른다. 인간의 기본적인 3대 욕구인 식욕, 성욕, 수면욕을 통제하거나 자극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시험한다. 이때 <더 에이트 쇼>는 '모든 악행의 책임은 권력을 악용한 개개인의 몫인가? 아니면 그렇게 환경을 조성한 시스템의 문제인가?'라는 질문을 함께 던진다. <오징어게임>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한재림이 한재림 한 전반전
한재림 감독 특유의 스타일은 <더 에이트 쇼>가 목적에 다가서는 원동력이다. 특히 한재림 감독의 장점이 빛나는 전반부가 유도 인상적이다. 그는 다양한 코미디를 다룰 때도 탁월한 역량을 보여준 바 있다. <더 킹>에서는 검사 주인공을 내세워 한국 현대 정치사를 비꼬았다. 계유정난에 개입한 관상가의 비극 속으로 관객을 자연스럽게 초대한 <관상>의 전반부도 인상적인 코미디였다.
<더 에이트 쇼>의 전반전도 마찬가지다. 블랙 코미디 느낌이 짙다. 노동 소득만으로는 부를 늘릴 수 없는 가운데, 주식과 코인 대박을 꿈꾸지만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평범한 2030의 모습을 진수에게 투영한다. 그 덕분에 <더 에이트 쇼>는 별다른 설명 없이도 극의 몰입도를 빠르게 끌어올릴 수 있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를 연상시키는 여러 장치는 풍자의 화법으로서도, 블랙코미디라는 신호로서도 탁월하다. 과거 무성영화 스타일의 자막, 필름 화면, 영화 비율을 활용한 대목이 대표적이다. 진수가 슬랩스틱을 여럿 보여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모던 타임즈>가 비인간적인 공장 노동에 시달린 노동자의 피폐한 삶을 꼬집었다면, <더 에이트 쇼>는 약 1세기가 지나자 그 노동 자체가 무가치해졌다고 일깨우는 셈이다.
자가당착에 빠진 후반전
문제는 후반부다. <더 에이트 쇼>는 앞서 던진 비판점을 강조하기에 충분한 전개를 보여주지 못한다. 사회 시스템에 대한 비판의 끝은 냉소와 자조에 가깝다. 어떻게든 꼭대기층으로 올라가려던 1층의 발버둥을 잔인하게 짓밟으며 열심히 살면 언젠가는 계단 위에 설 수 있다는 희망을 지워 버린다.
그런데 1층을 제외한 게임 참가자들의 삶은 정작 희망적이다. 비록 게임 속에서 겪은 충격적인 일 때문에 피폐해진 듯 보이지만, 거액의 상금을 챙겨 바라던 삶 또는 더 좋은 삶을 누린다. 즉, 현실에서 층수를 바꿀 수 있는 사다리를 제대로 챙긴 셈이다. 1층은 영원히 1층, 8층은 끝까지 8층이라는 게임의 끝과는 거리가 멀다.
자연히 <더 에이트 쇼>는 무슨 이야기인지 알기 어렵다. "모두가 용이 될 수 없으며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라고 말하는 듯하지만, "개천에서 붕어·개구리·가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과는 거리가 먼 결말을 보여준다. 빈부격차와 사다리 걷어차기라는 문제를 비판하려는 건지, 시스템에 순응한 채 조용히 살아야 한다는 건지, 인간성을 버리면서까지 상금을 타내는 참가자들의 노력과 인내심을 본받자는 건지 혼란스럽다.
이 단점은 감독의 전작인 <비상선언>과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처음에는 화려한 스펙터클로 눈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캐릭터들이 군상극을 펼치기 시작하자 메시지와 개연성, 캐릭터는 모두 흔들리기 시작한다. 더 나아가 주제 의식마저도 공감되지 않고, 억지스러운 해피 엔딩은 실망감을 키운다. 말하고 싶은 메시지는 있겠지만, 정작 그 메시지를 담아낼 이야기를 만드는 데 실패한 전철을 답습하고 말았다.
허망한 마지막
어떤 면에서는 <비상선언>보다도 더 큰 실패다. <비상선언>에서는 못 본 단점이 드러나기 때문. '7층' 캐릭터가 대표적이다. 7층은 자기가 경험한 게임을 토대로 '더 에이트 쇼' 시나리오를 쓴다. 한때 흥행 감독이었던 7층이 이제는 현실적이고 예술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는 감독의 자의식이 투영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7층이 쓴 시나리오 제목을 비추는 엔딩은 인상적이지 않다. 허세에 가까워 보인다. <더 에이트 쇼>의 내용이나 문제의식은 결코 날카롭거나 새롭지 않기 때문. 경제적, 정치적 기득권이 나날이 발전하는 기술을 활용해 하위 계층을 더 촘촘히 감시하고, 착취하는 현상은 이미 <설국열차>, <오징어게임>, <헝거게임> 등 숱한 작품이 다룬 바 있다.
또 다른 작품들과 달리 문제의식을 제시할 뿐, 그 대안이나 비전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설국열차>에서는 기차가 전복됐다. 캣니스는 헝거게임 경기장을 부수고, 성기훈은 프론트맨을 잡으러 간다. 반면에 <더 에이트 쇼>는 게임을 끝낸 참가자들이 상금 덕분에 해피엔딩을 누리는 것 다음 이야기가 없다. 그저 영화감독인 7층의 입을 빌려 사회 모순을 통찰했고, 그 비판을 드라마(영화)에 담아냈다는 도돌이표에 그친다.
만약 <기생충>처럼 아예 새로운 문제의식을 보여줬다면 다른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기생충>은 기득권은 악하고, 빈곤층은 선하다는 고정관념을 깨면서 관객의 시야를 넓혀 버렸으니까. 그런데 <더 에이트 쇼>는 그 정도의 통찰력까지는 못 보여줬다. 권력자는 악하고 타락하고, 빈자는 선하지만 고통받는다는 오래된 도그마를 답습하기 바쁘다. 자연히 메타적인 결말은 더욱 허망하고 실망스럽다.
<더 에이트 쇼>가 <오징어게임>이 될 수 없는 이유
주제 의식과 의도에 공감하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게임 자체를 보는 재미도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이는 <오징어게임>과 <더 에이트 쇼>의 결정적인 차이다. 두 게임의 참가자 모두 돈을 원한다. 하지만 전자는 예상치 못하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수동적인 플레이어였다. 반면에 후자는 능동적인 주체다. 자기 의지로 상대의 존엄성을 가능한 잔인하게 짓밟는다. 그 결과 계속해서 연장되는 게임 시간은 쾌감 대신 거북함으로 가득해진다.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극단적인 참가자도 몰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특정한 인물상을 대변하는 장기짝에 불과하다. 정신병자, 천재, 선인, 악인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티끌만큼도 변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속고 속이는 후반부에서는 속는 사람의 아둔함에 탄식이 나올 정도다. 캐릭터 간의 관계와 심리 변화를 쫓는 <오징어게임>의 재미는 찾아볼 수 없다.
마지막으로 영화 대신 드라마를 선택한 결정도 악수다. 드라마는 영화에 비해 전개가 느리다. 그러다 보니 <더 에이트 쇼>는 중간마다 가학적인 장면을 의도적으로 전시할 수밖에 없다. 왕게임이나 숨바꼭질처럼 특별하지 않은 게임이 등장하다 보니 필요 이상으로 자극적인 상황을 조성하기도 한다. 수면 고문 장면처럼.
결국 <더 에이트 쇼>는 거울이 아니라 빈 깡통이다. 감독과 출연자의 명성은 요란하고, 볼거리는 화려하다. 하지만 정작 그 내용은 특별하지도, 새롭지도, 놀랍지도 않다.
Poor 형편없음
<더 킹> 마냥 이륙해서 <비상선언>처럼 착륙한 한재림표 <오징어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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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시크릿가든'엔 어른보다 용감한 아이들이 있다
풀 한 포기의 질긴 생명력에 위로 받는 날이 있다. 말 못 하는 동물의 온기가 백 마디 말보다 나은 날이 있다. 때때로 자연은 인간을 치유한다. 그 힘에 이끌려 아름다운 정원을 묘사한 영화 ‘시크릿 가든’을 선택했다.
<영화 ‘시크릿가든’>
‘시크릿가든(2020)’은 미국의 소설가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비밀의 화원(1911)’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전염병으로 부모님을 잃은 소녀 ‘메리(딕시 에저릭스)’가 이모부 ‘아치볼드(콜린 퍼스)’의 대저택에 오게 되고, 숨겨진 비밀의 정원을 찾으면서 생기는 일을 다룬다. 그리고 ‘아치볼드’의 아들이자 ‘메리’의 사촌 ‘콜린(이단 헤이허스트)’과 또 다른 친구 ‘디콘(아미르 윌슨)’와 우정을 쌓아가는 내용이다. 국내에서는 ‘해리포터’의 시각 효과 전문가들이 참여한 점과 ‘킹스맨’으로 유명한 ‘콜린 퍼스’의 출연으로 화제가 되었다.
<소설 '비밀의 화원'과 영화'시크릿 가든'>
잘 알려진 소설을 영화로 제작할 경우, 탄탄한 줄거리와 유명세를 활용한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위험부담도 따른다. 소설을 아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영화와 비교하면서 보게 된다. 글로 읽을 때 상상력으로 채웠던 부분이 화면과 다르게 구현될 경우 아쉬움이 생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제작자는 등장인물과 배경 정도 유지한 채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지, 원작을 그대로 화면 구현할지 결정해야 한다.
‘시크릿가든’의 선택은 전자에 가깝다. 소설의 4번째 리메이크 영화라는 점에서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다. 판타지 장르를 강조했고 굵직한 설정부터 세부사항까지 수정했다. 예를 들어 소설 원작에서 핵심이 되는 동물이 울새였다면, 영화에서는 주인 잃은 강아지가 등장한다. 아이들이 만나는 순서가 조금씩 다르다거나, 저택에서 일하며 ‘메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마샤(아이시스 데이비스)’의 비중이 크게 줄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비밀의 화원의 모습이다. 소설에서 비밀의 화원은 현재는 황폐하지만, 가능성을 품은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상처 받은 아이들이 메마른 정원에 씨앗을 심고 새싹을 가꾸며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그린다. 아이들은 정원의 변화에 맞춰서 가랑비에 옷이 젖듯 조금씩 바뀐다. 반대로 영화는 ‘메리’가 저택에 숨겨진 아름다운 정원을 발견하고 아이들이 모르고 있던 부모님의 사랑을 깨닫는 과정을 그린다. 세 아이를 연결하는 부분도 정원이라는 공간보다 사랑하는 부모님을 떠나 보낸 아픔이다.
제가 직접 그린 인물관계도 입니다
이런 설정은 영화의 양날의 검이라고 생각한다. 제작진들은 정원을 활용해서 화려한 영상미를 표현할 수 있었다. 푸르른 숲과 다채로운 색감의 꽃은 눈을 즐겁게 한다. 인물의 감정 변화에 따라 식물이 피고 지는 모습만 봐도 이 영화가 얼마나 화면에 공들였는지 알 수 있다. 정원뿐만 아니라 물, 빛, 불이라는 요소를 시각적으로 극대화해서 이야기에 영향을 주도록 활용했다.
정원이 색을 입자 아이들은 색을 잃었다. 특히 ‘마샤’의 동생 ‘디컨’은 영화에서 굳이 필요 없는 존재가 되었다. 원래 소설에서 ‘디컨’은 마을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만큼 넓은 마음을 가진 인물이자 자연에 능숙해서 정원 관리를 적극적으로 돕는 역할이다. 초반에 ‘마샤’의 이야기로만 드러나며 ‘메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런데 영화에서 ‘마샤’의 비중이 줄어들고 완벽한 정원이 생기면서 그의 가장 큰 매력을 잃었다.
‘메리’는 어른의 아픔을 이해하는 성숙한 아이가 되어야 했다. 정원 관리가 빠진 영화 줄거리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연이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메리’는 전쟁으로 부모님을 따라 인도로 갔으며 어머니의 무관심 속에서 성장했다. 전쟁이 마무리되고 전염병이 퍼져서 부모님을 모두 잃는다. 그리고 영국의 대저택에서 아빠의 과거 대사를 회상하거나 우연히 발견한 편지로 인해 엄마가 무관심한 이유를 깨닫는다. 엄마의 부족한 행동을 자매(메리의 이모)를 잃은 아픔으로 정당화하고 아직 어린아이가 엄마를 이해하도록 만드는 상황은 모순적이다. 어른의 관점에서 쓴 아이의 이야기라는 느낌이 든다.
<당신은 용기내고 있나요?>
소설과 영화가 다르지 않은 부분은 아이들의 용기이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고 대담하게 비밀의 화원에 들어간다. 울새의 도움으로 열쇠를 찾는 소설과 달리 영화에서는 ‘메리’가 비밀의 화원으로 가기 위해 담장을 넘으며 훨씬 적극적으로 표현된다. 신비롭고 웅장한 노래와 함께 아름다운 색감의 정원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에 저절로 벅찬 감정이 든다. 아이들은 흙 속에서 구르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서 뛴다. 친구들과 다투고 언제 그랬냐는 듯 화해한다. 다시 말해서 상처 받아도 다시 도전하고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을 용기가 있다.
소설부터 이어진 아이들의 용기는 저택의 주인 ‘아치볼드’가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동안 문을 닫고 숨겼던 비밀의 정원에 들어온 ‘아치볼드’는 이렇게 말한다.
“어른이 아이들한테 배움을 얻게 되다니.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우리에겐 마음껏 뛰어 놀 정원은 없지만, 영화를 보고 마음속 비밀의 정원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당신에게 그곳에 들어갈 용기가 충분히 있으리라 믿는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Jadeinx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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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홋카이도의 봄을 가로지르는 진심과 결심
기후 위기는 변덕스러운 날씨의 얼굴을 하고 우리를 찾아오는 불청객인 모양이다. 3월 초만 해도 예년보다 빨리 봄이 오는가 싶더니 봄은 갑작스레 훌쩍 멀어졌고 3월 마지막 주말에는 때아닌 눈까지 휘날렸다. 그래도 기어이 봄이 왔고, 꽃이 피었다. 순식간에 여름에 자리를 내줄지라도 봄은 봄의 흔적을 남긴다. 마음은 왠지 몽글몽글해진다.
4월 2일(수)에 개봉하는 영화 <행복의 노란 손수건>은 봄의 감성이 듬뿍 담긴 작품이다. 1977년에 일본에서 개봉했던 영화를 리마스터링한 덕분에 영화의 배경인 홋카이도의 봄이 또렷한 총천연색으로 재현되었다. 많은 영화 팬들에게 일본의 홋카이도는 영화 <러브 레터>의 겨울 설경으로 뚜렷이 각인되어 있는 곳이다. 제1회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무려 8관왕을 달성한 영화 <행복의 노란 손수건>은 홋카이도의 봄 풍경을 충실히 담아내 생경하면서도 친숙한 미감을 선사하는 로드 무비다.
실연의 아픔을 훌훌 털어 버리고자 여행길에 오른 두 젊은 남녀 하나다 킨야(타케다 테츠야)와 오가와 아케미(모모이 가오리)는 로드 무비에서 어느 정도 예상되는 조합이어서 두 사람이 주인공이었다면 이야기가 밋밋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갓 출소한 시마 유사쿠(다카쿠라 켄)가 두 청춘의 여정에 합류하면서 이야기는 풍성해지고 흥미로워진다(시마 역을 맡은 다카쿠라 켄은 영화 팬들에게 영화 <철도원>의 주인공으로 익숙하다.) 과묵한 시마는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목적지를 자꾸 변경하면서 좀처럼 자신의 속사정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던 시마가 마침내 직접 입을 열어 자신의 과거를 체념적 어조로 토로하자 하나다와 오가와는 시마의 진심에 완전히 공감해 자신의 일인 것처럼 시마를 도와준다.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서 갈팡질팡하던 시마는 하나다와 오가와의 응원에 힘입어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의 진심을 받아주었는지 확인하러 가겠다고 결심한다. 홋카이도의 봄은 푸른 생기를 잔뜩 내뿜으며 시마의 진심과 결심을 뒷받침한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은 갱생, 구원, 사랑과 잘 어울리는 계절이다. 영화 <행복의 노란 손수건>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나면 경칩에 개구리가 깨어나듯이 사라진 줄만 알았던 사랑의 감정이 돌연 싹을 틔울지도 모른다.
- 끝 -
* 씨네랩의 초청으로 3월 25일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진행된 <행복의 노란 손수건>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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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각의 제국 - 강렬한 섹스로 보여주는 제국주의의 허무
포르노와 영화의 경계는 무엇일까. 단순히 정사씬의 수위 문제일까? 아니면 예술성인가? 예술성이라면 어디까지가 예술성인가? 영화 심의를 받을 때 에로 영화랑 예술 영화가 같이 심의를 받는 마당에 이러한 질문은 답하기 힘들것이다. 비록 필자가 영화를 많이 봤다고 자부하기는 어렵지만, 어느 정도 받을 도출해냈다고 생각해 짧게 이야기해본다. 포르노와 영화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메세지'가 어떠한가. 포르노는 단순히 보는 이의 성적 흥분을 목표로 두고 있을 뿐이고, 영화는 섹스, 정사를 통해서 전해야만 하는 어떠한 메세지가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필자가 생각하는 차이이다. 그렇기에 이번에 리뷰하는 영화, "감각의 제국"도 포르노가 아니라 '영화'라는 예술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 영화를 운 좋게 제작년에 CAV 기획전을 통해 스크린으로, 그것도 무삭제판으로 처음 접하게 되었다. 이 영화를 봤다는 것을 지인들에게 말하자 대부분의 지인들은 줄거리나 스틸컷을 보고 단순한 포르노로 평했는데, 필자는 이러한 사실에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분명 이 글을 읽는 이 중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길 바란다. 이 영화가 단순 포르노라면 왜 이 영화가 여러 매체에서 걸작 영화로 뽑히고, 죽기 전에 봐야하는 영화 리스트 같은데에 왜 들어가겠는가? 그것을 고른 평론가들이 전부 변태라는 것인가? 이 영화는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있다. 바로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아예 모르고 영화를 본다고 깨닫기 어렵다. 필자도 사실 영화를 보기 전에 미리 칼럼을 읽어보고 봤기에 깨달은 사실이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대놓고 제국주의에 대한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기치조가 길을 지나가는 곳에 일본군들이 행군하고, 사람들은 일장기를 흔드는 장면이다. 실제로 감독 본인이 관객들이 눈치채게 일부러 넣은 장면이라고 언질했다.
여기에서 은유를 한번 해보려한다. 감각의 제국이라는 제목에서 감각은 성적인 의미이다. 제국은 일본 제국을 뜻한다. 이 영화에서 성욕은 부정적으로 다뤄진다. 즉, 여기에서 성욕은 삐뚤어진 욕망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다가 그렇게 갈망하는 기치조의 남근은 일본의 삐뚤어진 욕망이다. 그 당시 일본은 어긋난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서양의 강대국처럼 거대해지고 싶다는 욕망. 그 욕망은 과거 대한민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들에게 향했다. 바로 식민지배라는 모습으로 말이다. 사다가 그렇게 남근을 갈망하는 모습은 마치 강대국이 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일본 제국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사실 나라가 강해지고 싶은 욕망은 성욕이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 처럼 악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른 나라를 식민지배한다는 어긋난 욕망이라는 것이 문제되는 것이다. 마치 영화에서 처음에는 그냥 섹스를 하지만, 나중에는 브레스 컨트롤(강제적으로 저산소증을 유발하여 거기서 오는 쾌감을 즐기는 BDSM 플레이)를 하면서까지 섹스를 하는 것 처럼, 그 욕망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최후에는 성기를 자르고, 그것을 손에 쥔다. 이러한 모습은 결국은 파멸에 이르는 제국주의의 허무를 보여주는 아름답고도 숭고한 미장센처럼 보인다. 결국 일본 제국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였듯이 말이다.
이 영화는 사실 지금 기준으로도 매우 높은 고수위의 영화라 아무한테나 추천하기는 힘들다. 영화가 나올 당시 뿐만 아니라 지금도 많은 논란을 일으킬 영화라 생각한다. 하지만 현대에서도 걸작으로 불릴만한, 한번은 봐보기를 권하는 영화이다.
*이 글은 원글 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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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불한당>, 아마도 그건 사랑이었을 거야
*<불한당>과 <무뢰한>의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고품격(?) 막장 드라마 <부부의 세계>를 두고 누군가가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불륜이 선빵이면 그 정도는 해줄 수도 있지 않겠냐고 농담조로 말하자 상대방은 부부, 아니 인간관계에서 믿음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보여주는 드라마가 아니냐고 진지한 답을 내어놓았다. 동감하며 답했다. 맞다. 그런 메세지는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믿는 게 얼마나 비효율적인 짓인지를. 안 믿고 있다가 믿을 만한 사람이란 걸 확인하는 게, 믿었다가 못 믿을 놈이란 걸 확인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데 말이다. 그런 인생의 교훈을 일찍 깨달아서 도움이 되었겠다는 말에 웃으며 답했다. 아뇨, 알면서도 당했다고. 이번은 다르겠지. 이 사람은 다르겠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결국 결과가 똑같았다고. 알면서 당하면 진짜 바보인데. 안 그런가?
현수 曰 "(어휴) 촌스러워요"
<불한당>은 촌스러운 듯하면서 까리하다. 시작과 끝에 등장하는 빨간 스포츠카 같은 영화다. 맛깔나는 대사나 장면도 많다. 다년간의 드라마와 영화 학습으로 쌓인 우리의 기대와 예지력을 조금씩 벗어난다. 처음부터 생선 눈이 무서워서 회를 못 먹는다는 둥, 사람 눈을 보면서 어떻게 사람을 죽이냐는 둥 이상한 소리를 하더니 최후의 만찬처럼 회를 사주고 머리에 총알을 박질 않나, 사람 죽이는 건 안 무서운데 여전히 생선 눈은 무섭다고 깻잎을 덮질 않나. 그러다간 또 푼수 떼기처럼 허세를 부리다가 삼촌에게 얻어맞고 차에 가서 훌쩍거린다. 그 눈물이 어찌나 새롭게 느껴지던지. 덩치가 작은 현수가 덩치 큰 수감자와 뺨 때리기를 하면서 주먹을 쓰는 반칙을 하면서도 당당하고, 재호는 그걸 보며 '혁신적인 또라이'라며 마음에 들어하기도 한다. 그런 현수에게 열광하는 당신도 두말할 것 없이 압도적인 또라이 아니겠어.
숨겨둔 카드를 빨리 보여준다. 아니, 벌써? 살짝 당황스럽지만 별로 걱정되진 않았다. 재호는 현수가 위장 경찰인 걸 일찌감치 알고 있고, 현수는 심지어 순진무구한 얼굴로 "형, 나 경찰이야"라고 자백을 한다. 이쯤 되면 누구나 알아차리게 된다. 무간도 같은 언더커버 전개가 아닐 거라는 것. 실제로 영화는 나쁜 놈인 건 둘째치고 등장인물들이 어지간히 또라이들이다. 이상하게 순정파 같은 또라이들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사실 재밌어서 도와준 거 같기도 하고
재호와 현수의 영화이다. 좀 더 치자면 재호와 현수, 병갑과 천 팀장이 남는다. 현수의 행동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차피 재호는 잘해야 미끼 혹은 돌다리다. 검거해야 할 타켓 중 일부에 불과했다. 어지간해선 칼을 가지고 재호를 얼마나 다치게 할 수 있을까 싶은데 기를 쓰고 그렇게 말리고선 대신 다친다. 재호를 구하지 않았어도, 다치지 않았어도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있진 않았을까. 목숨은 어머니 말씀처럼 박애주의적인 입장에서 구할 수도 있다 쳐도 교도소에서 남은 기간 동안 모든 힘을 다시 찾을 수 있게까지 해준 게 제법 과하게 느껴졌다. 목적을 위해 마음을 얻는 일이 이렇게 정성이 가득한 일이었나 싶었다. 재호에게 든든한 믿음을 얻으려는 전략이었을까, 그 사이에 진심이 있었던 걸까.
게임 끝나버렸는데요
재호가 왜 현수를 아까워하고 아꼈는지는 분명하다. 고아원부터 함께한 병갑과는 다르다. 병갑은 무조건적으로 재호를 좋아하고 무해하다. 하지만 그라고 뒤통수를 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재호는 늘 뒤통수를 조심하라고, 뒤를 돌아보며 살라 하지 않았나. 병갑이 현수를 꼬마 새끼, 짭새 새끼라며 부르며 질투하고, 회장 자리에 앉아보면서 히히덕거리는 순진한 힘에 대한 로망은 빤히 보이니까 괜찮다. 병갑이 정말 재호를 아끼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던 건 삼촌이 재호를 죽이려고 하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놀라지 않았을 때였다. 별스럽지 않게 면회를 와선 뒤늦게 삼촌이 널 죽이려고 했다며 재호의 뒤통수에 대고 말하는 장면. 아, 이래서 병갑이와는 안 되겠구나 했다. 만약 재호가 잘못됐어도 지금처럼 침착할 수 있었을까. 훌쩍거리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현수가 재호의 뒤통수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진 것과는 대조적이다. 병갑은 늘 한 박자 늦고 어딘가 빈틈이 있다. 재호는 병갑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야속하게도 마음이 수평을 이루는 사이는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병갑의 마음이 재호보다 훨씬 깊고 무거운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이나 상황이냐, 앞통수냐 뒤통수냐
<불한당>은 내게 믿음에 관한 영화다. 그 안에 사랑이 있음을 모르지는 않지만 <무뢰한> 이후에 믿음의 씁쓸한 얼굴이 떠오르는 영화다. 누구나 거짓말을 하고 누구나 뒤통수를 칠 수 있다. 신뢰가 필요하다는 말은 역으로 현재 세상의 기본값이 거짓말과 뒤통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무뢰한>은 <불한당>과 비교하면 그나마 해피엔딩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비참한 삶을 살고 있지만 재곤과 해경은 살아있다. 둘 중 어느 누구도 서로를 완전히 믿진 못했다. 재곤은 해경을 속일 힘과 집요함이 있었고 혜경은 속일 수는 있지만 끝까지 모질지 못했다. 그에게 칼을 꽂아도 치명상에 이르지 못한다. 재곤은 혜경을 찾아가 변명도 하고 믿음을 저버린 걸 나름의 방식대로 속죄할 수도 있다. 물론 그게 일반적인 방식은 아니다. 해경의 복수는 바들바들 떨면서 그에게 칼을 꽂는 것이고, 재곤의 속죄는 그 칼을 그대로 맞고서도 그녀의 새해 복을 챙기는 것이다.
그러나 <불한당>은 다르다. 현수와 재호는 둘 다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힘과 의지가 있다. 인정사정없이 칼을 꽂고 목을 조르고, 얼굴을 뭉개고 총을 쏜다. 재호의 배신은 순순히 넘어가기 힘들다. 다른 건 몰라도 부모님은 건드리는 게 아니지 않나. 재호가 현수를 감는 방법을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었다. 하나뿐인 어머니를 아끼는 현수를 알고도 완전히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기려면 어머니의 죽음쯤은 감수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오열하는 현수를 보던 재호의 얼떨떨한 표정이 인상 깊다. 마치 "그렇게까지 괴롭고 슬퍼할 일인가" 싶으면서 약간은 잘못했나 싶은 표정.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의 죽음으로 현수가 심지어 신분을 드러내는, 평생 재호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믿음을 눈앞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모든 비밀과 속내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게, 가족을 그렇게 아낄 수 있다는 게 재호에게는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재호의 마음도, 어깨도 무거워진다. 우리만 생각한 건 아니었겠지. 그게 최선이었을까 하는 그 생각.
이렇게 어려운 건 현수 네가 처음이야
재호는 착실히 판을 짜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서 원하는 것들을 이뤘다. 수많은 사람들이 곁에 왔다 가면서 세워놓은 방법이었다. 이제 현수도 곁에 있고 고병철 회장도 사라졌다. 살기 위한 일이었을 뿐 지겹고 피로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현수에게는 마지막까지 그 방법이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현수의 목소리가 여느 때와 다른 게 분명한데도, 주변의 공기도 날씨도 다른데도 함정에 걸어 들어갔다. 병갑을 직접 명패로 때려죽이면서도 현수가 복수를 하고 있구나, 내 손으로 복수를 하게 하는구나 했을 것이다.
묘하게 밉고 묘하게 미워할 수 없다
재호의 병 주고 약 주고(어머니는 돌아가시게 하곤 장례식 비용과 마무리는 도와주는) 식의 행동을 알게 된 후, 현수는 재호를 이상하게도 많이 배려해 준다. 일찌감치 어머니를 죽인 사실을 얘기해서 자신을 죽일 기회도 주고, 경찰들로부터 피할 수 있게 작전을 모조리 바꿔버린다. 재호 역시 자기 한 몸 지키기 바쁜 와중에도 현수가 곤경에 처하자 다가와서 도와주고. 가까스로 빠져나온 재호를 천 팀장이 차로 받아버릴 때는 순간 이 영화의 악역이 천 팀장이었나 싶게 느껴질 정도다. 하긴, 천 팀장이 제일 못된 사람은 아니지만 제일 야멸찬 사람이긴 하다. 모든 걸 알고도 원하는 걸 위해서만 움직이는 사람. 죄책감 같은 건 스스로 괴롭기만 하고 당하는 놈이 바보라고 하더니 그럼 이제 누가 바보인가. 얼마나 악역인지는 재호의 웃음소리 뒤에 현수가 천 팀장에게 박아 넣은 총알 소리를 세어보자.
현수가 될 수도 있었지
재호와 현수를 보면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안타까워진다. 재호가 현수의 어머니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아니 현수가 원하는 대로 감방으로 입학하지 않고 취직을 했다면, 재호가 오세안 무역 사람이 아니고 현수가 경찰이 아니었다면, 재호가 가족애라는 걸 공감하거나 현수가 좀 더 솔직하지 않았다면 많은 게 달라졌을 것이다. 현수가 바라던 대로 취직을 했다면 회를 먹으면서 영화 시작과 동시에 머리에 총알이 박혔을 것이고 오열하면서 홀로 남은 쪽은 어머니였을 수도 있다. 재호가 현수의 어머니를 알뜰히 챙겨줬다면 어머니를 핑계로 현수를 움직이게 했던 천 팀장이 무슨 짓을 했을지도 알 수 없다. 만약 뭔가 달라졌다고 해도 결과가 과연 안타깝지 않았으리란 보장은 없다.
처음에는 현수 입장에서 재호를 원망했다. 하고많은 방법 중에 꼭 어머니를 죽이는 방법이었어야 했을까. 좀 더 솔직할 순 없었을까. 어머니를 죽이지 않았으면 너를 죽였어야 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한 번도 누굴 믿어본 적 없는 사람이라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말이다.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마다, 나를 믿는다고 말할 때마다 괴로웠다고도. 천 팀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본인이 이야기했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을 입도 이해는 간다. 경찰인 걸 속이는 것과 어머니를 죽였다는 점을 속이는 것은 다른 문제다. 말했다 하더라도 현수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재호가 밝히는 순간 현수는 세상에 홀로 버려지게 된다. 차라리 끝까지 몰랐으면 했을 것이다.
오랜만에 다시 영화를 보고 나선, 현수에게 좀 더 시간이 있었다면 과연 현수가 재호의 숨을 끊었을까 싶었다. 총도 맞고 차에도 치어 치여 움직이지도 못하는 재호의 고통을 줄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는 끈질기니까 살아남을 순 있겠지만 어차피 이젠 함께할 수가 없다. 현수와 재호는 정말 모든 걸 그만두고 버리고 떠날 용기는 없었다. 재호가 다시 감방에 잡아넣는다고 치면 지난날처럼 감방을 주무르며 지낼 수 있을까. 또 나온다 한들 다시 이 일에서 손을 뗄 수 있을까. 현수는 이 일을 계기로 경찰을 그만둘 수 있을까. 현수는 모든 것을 재호에게로 돌린다. 이 모든 상황도, 사람들도, 시간도. 사람들도 역시 상황을 믿을 테니까. 재호의 손에 쥐여준 그 총을 믿을 테니까.
마지막 장면의 현수의 표정은 춥다. 늦은 후회와 밀려오는 공포와 두려움에 허여멀건 하게 질려있다. 굳이 손으로 재호의 숨통을 막을 필요가 있었을까. 여태까지 잠입을 위해 때리고 죽였던 수많은 사람들과 재호는 다르다. 의미가 생기고 믿어버리게 됐다. 차라리 그가 알아서 고통받도록 그대로 두었다면 적어도 죽음은 현수의 탓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죽이고 믿음을 저버린 복수는 현수를 스스로 세상에 홀로 버려진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현수가 재호를 덮었던 손을 늦지 않게 놓아버리고 뒤도 돌아버리지 않고 걸어갔으면 어땠을까. 그 빨간 스포츠카가 비어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리고 들이마시는 재호의 숨은 인셉션의 팽이처럼 마지막 숨인지 계속되는 숨인지 알 수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영화는 불한당이고, 나쁜 놈들의 세상이다. 현수는 재호를 죽게 함으로써 불한당이 되고, 재호의 마음을 이해한 채로 살아가게 됐다.
여담이지만 <무뢰한>에서 목적을 위해 믿음을 뒤로했던 형사 재곤은 <열혈 사제>에 가서는 신부가 되어 "너에게 말한다. 77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역대급으로 성장한 인내심과 믿음을 보여주었다. <불한당>의 피와 눈물, 배신감과 불안, 슬픔과 두려움에 젖은 경찰 현수는 재호와의 사이에서 용서가 물 건너가 버린 게 마음 아프기도 하다. 인생이 그런 걸지도 모른다.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되었다가 용서를 하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내 안에 살아있던 그 사람을 죽은 사람처럼 사라지게 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부정할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건 사랑이었을 것이다. 언제 봤다고 대뜸 자기라고 부를 때였는지, 처진 어깨로 등 뒤에 칼이 있는지도 모르고 감방 복도를 걸어갈 때였는지, 출세하기 한참 전에 낡아빠진 사무실에 데려가 사람을 믿지 못하는 변명을 구구절절 늘어놓을 때인지, 알면서도 자기가 불러들인 죽을 자리로 들어오는 초연함 때문인지, 혹은 언제든 총을 쏠 수 있던 사람이 자신 앞에서는 결국 총을 제대로 겨누지도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인지. 다만 현수는 알아차렸을 것이다. 자신이 죽을 걸 알면서도 차마 총을 쏘지 못하고, 손을 떼지 못하는 그 순간에 여실히. 그 마음이 미안함 뿐만이 아니었다는 걸. 어둠 속에서 느낀 모든 것들이 날이 밝아오면서 밀려올 때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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