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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작가2023-01-15 23:14:34

우린 모두 다른 모양의 솔방울

넷플릭스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왜 전쟁이었을까. 왜 하필 피노키오를 전쟁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은 것일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간단했다. 줄에 묶여 꼭두각시처럼 춤을 추는 피노키오의 모습이, 바로 전쟁터로 뛰어드는 사람들의 모습과 같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어린아이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배우고, 삶에 대한 이유를 찾아야 할 나이에 전쟁터에 가기 위한 준비를 한다. 어른들조차 견디기 힘든 전쟁의 고통을, 왜 고통스러운지도 모른 채 그저 익숙해져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마치 줄에 묶인 꼭두각시처럼 보인다.

 

파시즘에 젖은 시장의 아들, 캔들윅은 아버지의 명령대로 움직인다. 의문이나 불만은 입 밖에 내서는 안된다. 꼭두각시는 줄을 조종하는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만 살 수 있으니까. 줄이 끊어졌을 때 처참히 버려진 자신을 대신할 꼭두각시는 많다. 전쟁이 모두를 똑같은 꼭두각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전쟁은 삶의 목표를 단일화 시킨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 외에 다른 목표를 가지는 순간, 죽임 당하거나 괴로움에 못 이겨 생을 마감할 테니까.

 

 

꼭두각시 조종자들에게 줄이 없어도 움직이는 피노키오는 존재 자체만으로 위협적이다. 피노키오는 전쟁이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을 거부한다. 전쟁의 무의미함을 꼬집으며 삶의 가치를 찾아내려는 피노키오를 보며, 상처 입은 자들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다.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학대당했던 원숭이 스파차투라와 소년 캔들윅은 피노키오로 인해 해방을 얻는다. 이는 굉장히 슬프지만 어찌할 수 없는 수순이다. 인생을 돌아보면, 내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으로 인해 치유되는 경험은 거의 없다. 우리는 대게 나와 비슷한 슬픔을 가진 사람과 만나 나의 아픔을 치유한다. 슬프지만 당연한 일이다.

 

피노키오는 자신 역시 무거운 짐을 이고 있으면서도, 남들에게 베푸는 일에 인색하지 않다. 기꺼이 남을 위해 위로를 나누어주는 피노키오의 모습은 용감하면서도 강인하다. 이는 쉽게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위로를 내어주는데 인색한 현대사회 속에서의 내 모습을 돌아보게 만든다.

 

"피노키오, 내 아들. 내가 널 다른 아이로 만들려고 했구나.

이제 카를로가 되지도, 다른 누군가가 되지도 마라. 네 모습 그대로 살아.

난 널 사랑한다. 있는 그대로의 너를."

피노키오는 영생을 포기하고 죽음이 있는, 단 한 번뿐인 삶을 선택한다. 죽음의 신은 반복해서 말한다. 인간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그 순간이 매우 짧기 때문이라고. 모든 순간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야 한다. 단 한 번뿐인 나의 삶을, 내가 아닌 남으로 살면서 시간을 허비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카를로가 처음 솔방울을 가져왔을 때, 제페토는 그것이 완벽하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모난 솔방울도, 상처가 있는 솔방울도, 땅에 심고 충분히 물을 주면 제각각의 모양으로 훌륭한 소나무가 된다. 어떤 솔방울이든 나무가 될 기회는 있다. 그 누구도 솔방울에게 완벽함을 운운할 자격은 없다. 우리는 모두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완벽함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린 언제나 전쟁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 전쟁은 누가 만든 것인가? 진정 그 전쟁이 내가 원했던 것인가? 우리는 남들과 똑같은 목표를 가지는 것에 너무 익숙해졌다. 한 번뿐인 삶을 나라는 특별한 존재를 위해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때론 그런 사회의 총격에 피를 흘릴 때도 있다. 그럼에도 우린 꿋꿋이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나만의 길을 가야 한다. 나라는 존재만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을 향해.

 

작성자 . 담작가

출처 . https://blog.naver.com/shn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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