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록2025-04-23 03:00:26
어둠 속 빛을 담는 여성들의 두 눈,
영화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내 안에서 영화의 개념화는 서양, 특히 유럽과 미국의 작품들로 이루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학생 시절 영화를 제대로 전공해보자고 결심한 이후 처음 수강한 강의가 프랑스, 미국, 영국 등의 영화들로 모든 역사적 자취를 설명하는 커리큘럼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영화 발전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세계적인 흐름 속에서 어떤 위치에 존재했는지, 하다 못해 아시아 영화의 세부적인 내용조차 알 수 없었다. 그 수업을 탓할 수는 없다. 영화가 설명되는 방식이 으레 그랬으며, 눈을 돌려 관심을 가지더라도 그 범위를 벗어나는 정보는 알기 어려웠다. 서양 국가를 주제로 한 발표와 그 외 국가들에 대한 발표는 분량부터 차이가 났다. 유수한 영화제라 불리우는 국제영화제들은 모두 일부 국가들에게 집중되어 있으니 그럴 만했다.
영화를 더욱 넓고 깊게 소비하게 되었다고 자부하는 지금의 나 또한 변함 없이 몇 국가의 작품들과 그 방식에만 익숙해져 있었고, 다양한 국가영화를 접하고 싶던 차에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을 만날 수 있었다. 여성감독이 여성 주연들과 함께 연출한 작품이었기에 더욱 눈이 갔다. 한 번도 가본 적 없으나 그들의 녹록치 않은 삶을 멀리서나마 접해왔기에 영화로 만나는 인도 여성들은 어떤 모습일지 하루 빨리 알고 싶었다.
“어둠 속에서는 빛을 상상하는 게 어려워요” 시간을 훔치는 대도시 뭄바이,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프라바, 아누, 파르바티에겐 해결되지 않는 사정들이 있다.
그러나 세 여자의 우정은 작은 빛을 만든다.
미리 말해두겠다.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여성영화는 아니다. '세 여자의 우정은 작은 빛을 만든다'라는 문장을 보고 당신은 무엇을 떠올릴 수 있는가? 여성들이 모여서 함께 주거공간을 꾸려 나가거나, 기혼/미혼/비혼 여성들의 각 가치관들이 모여 건강한 일상을 공유하는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라 감히 예상해본다. 그렇다면 해당 작품을 관람하고 조금 실망할 수도 있다. 오히려 남성과의 연애와 결혼이 자연스럽게 스토리의 주축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도 내에 만연한 종교에 따른 가치관과 여성을 억압하는 뿌리 박힌 것들에 맞서는 요소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관점에서 벗어나 '인도 여성'들에게 동일시되어야 조금 더 잘 보이는, 하지만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그럴 수 있는 섬세한 작품임은 명확하다.
* 뭄바이를 느낄 수 있는 오프닝 시퀀스
극의 첫 장면은 누군가가 인터뷰를 하는 듯한 나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뭄바이'라는 도시에 대해서 겪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다른 목소리들이 짧게 풀어낸다. 그리고 배경은 분주히 움직이는 도시의 밤을 그대로 담아낸 샷들이 나온다. 빠르게 이동하는 차량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그 가운데 수많은 빛들이 어둠을 밝히고 있다. 자동차 전조등, 조명, 기차 혹은 지하철이 뿜는 빛. 고스란히 빛을 받는 사람들은 어쩐지 지쳐보인다. 이렇다 할 주인공 없이 도시 그 자체를 담으며 꽤 긴 시간동안 이어지는 오프닝 시퀀스는 흡사 다큐멘터리 영화 같기도 하다.
그만큼 도시의 모습을 충실하게 담아냈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복잡한 도로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오토바이의 행렬은 베트남 하노이가 떠오르기도 했다. 나는 하노이에서 잠깐 머물렀던 적이 있다. 언어를 공부하며 영상도 제작하고자 했던, 도시를 마음껏 즐기다 떠나면 되는 여행자의 입장에서도 문득 외로움이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실제로 그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버거운 마음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을까. 이렇게 상상만 하던 현지인의 삶을 가까이에서 마주하게 된 느낌이었다. 눅눅한 공기와 도로의 소음, 즐비해 있는 길고 얇은 건물들 사이를 지나가는, 도시의 오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샷들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인도 여성들의 사소한 일상 또한 상세하게 묘사된 덕분에 그들이 주체가 되어 이끌어 가는 극을 경험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컸다.
** 감각적인 이미지와 사운드
초반부가 다큐멘터리 같았다면, 중반부는 실험영화 같은 면모를 보인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프라바'와 '아누'의 일상이 리드미컬한 사운드와 함께 독특한 편집으로 표현된다. 하루종일 좁디 좁은 사무실에서 고객 응대를 하고 있는 '아누'가 종종 나누는 문자 텍스트가 자막으로 화면에 보이는 호흡은 여느 극영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힙한' 연출이었다고 생각한다. 직관적으로 보이는 이미지와 장난기 서린 음악이 본능적인 호감을 자아냈다. '아누'가 단독으로 나오는 사무실 몽타주는 아주 귀엽고 익살스러운 연기가 매우 돋보인다.
시간을 훔치는 대도시는 주로 밤으로 표현되었지만 모든 걸 뒤로 하고 바닷가 마을로 모인 세 주인공의 시간들은 대부분 낮으로 구성된다. 어둠에 잡아먹힌 도시와 달리 한적한 바닷가는 눈부신 빛으로 가득 차 있다. 푸른 나무들 사이로 뻗어 나가는 빛줄기를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게 화면에 담아냈다. 그리고 마지막, 세 주인공이 모인 장면에서는 ㅡ 알게 모르게 쌓아 두었던 마음 속 응어리가 풀린 채 ㅡ 새까만 하늘과 밤바다 속에 별과 조명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비로소 그들의 주변 환경을 이루던 모든 빛이 한 데 만난 것이다.
다만, 극영화로서의 힘은 약하다. 각 등장인물의 서사는 미약하며, 접점은 모호하다. 현재진행형의 일상을 제시하는 방식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거 같다. 연락이 오지 않는 남편을 기억하는 '프라바'와 사랑하는 이가 있음에도 숨겨야 하는 '아누', 일평생 살아왔던 공간을 집이라고 인정 받지 못하는 '파르바티'. 각 사건들의 앞뒤상황이 제시되지 않는 만큼 그들의 감정선에 이입하기도 쉽지 않다. 심지어 플롯 자체는 느리고 차분하게 진행된다. 명확한 대사보다는 주어가 분명하지 않은 비유적 표현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스토리의 흐름에 탑승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스토리텔링이 가미된 다큐멘터리 영화였다면 수작이라고 판단했을 거 같다.
*** 어둠 속 빛을 담는 여성들의 두 눈
극중 '빅 클로즈업' 샷이 자주 사용되는 특징이 눈에 띄었다. 특히 얼굴, 그리고 얼굴 중에서도 눈 주위를 중심으로 샷을 잡는다. 눈은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사물의 상을 담는다. 그리고 그 눈은 항상 빛이 있다. 주인공 자체가 빛이기에 바라보는 모든 사물들에도 자연스럽게 빛이 옮기는 건지, 눈이 향하는 모든 곳에 빛이 있었고 그대로 담아냈을 뿐인지 알 수 없다. 정확한 건, 빛은 어둠이 있기에 인식될 수 있다. 어둠 속에서는 빛을 상상할 수 없다고 하지만, 사실 나자신 혹은 어둠 속에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빛 그 자체였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감독이 바라보는 인도, 여성들이 자신을 이해하고 드러낼 줄 알고 그들의 우정이 존재하는 한, 그곳은 애써 빛을 상상하려 하지 않아도 애초부터 희망이 함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해당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되었습니다.
백록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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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여름 개봉 예정, 숨겨진 기대작 5편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2020년 겨울 극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여, 역대급 박스 기록을 갈아치울 거라 전망되었는데요. 특히 1월, 최고의 골수팬을 지닌 시리즈 <스타워즈: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에 이어, 전쟁 영화 <1917> 그리고 윌 스미스 주연의 <나쁜 녀석들: 포에버>까지 잇달아 흥행에 성공하였고, 2월에도 역시 DC의 <버즈 오브 프레이>, 짐 캐리의 <수퍼 소닉>, 그리고 공포 스릴러 <인비저블맨>까지 박스 기록을 이어나가며 2019년 대비 10% 정도 높은 매출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국내를 비롯한 전 세계 영화 시장이 역대급 불황 속에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요. 그러던 4월, 한국의 윤여정 배우가 <미나리>로 오스카 시상식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극장에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윤여정 배우의 수상 소식에 CGV를 비롯한 크고 작은 극장에서 곧바로 기획전을 진행하는 등 확실히 활기차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그리고 드디어, 오래 기다려온 액션 블록버스터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가 5월 19일 개봉을 확정 지으며 극장 부활의 신호탄을 쏘았고, 뒤이어 공포 스릴러 <콰이어트 플레이스 2>와 팝콘무비 <킬러의 보디가드 2> 그리고 디즈니의 <크루엘라>까지 개봉을 확정 지었지만, 아직 국내 대작들은 개봉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상황입니다.
연중 가장 높은 관객 수를 보이는 여름 시장에서 국내 상업 영화의 빈자리를 숨겨진 기대작들이 채우며 극장을 다채롭게 해줄 예정이라고 하는데요. 올여름! 극장을 찾아줄 다양성 영화 중,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숨은 기대작들을 씨네픽이 엄선하여 준비해 보았습니다!
잇츠 CINE PICK!!
트립 투 그리스 (The Trip to Greece, 2020)
코미디, 드라마 | 영국, 그리스 | 103분 | 15세 관람가
감독 : 마이클 윈터바텀 | 출연 : 스티브 쿠건, 롭 브라이든
IMDB : 6.6/10 | Rotten Tomatoes : 87%그리스에서 맛있는 음식과 유적지를 찾아다니며 각자의 인생철학을 공유하고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 두 남자의 여정을 그린 로드 무비
씨네pick :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에 이은 그리스 미식여행. 시리즈 지속이 어려운 다양성 영화임에도 꾸준히 관객을 유지하며 무려 11년을 이어온 작품인 만큼 기대되는 영화인데요. 유서깊은 그리스의 역사부터 오감자극 음식은 물론, 가슴 뻥 뚫리는 자연 풍광까지. 역시 시리즈 피날레는 놓치면 안 되겠죠?팜 스프링스 (Palm Springs, 2019)코미디, 멜로/로맨스 | 미국 | 87분 | 등급 미정
감독 : 맥스 바르바코우 | 출연 : 앤디 샘버그, 크리스틴 밀리오티, J.K. 시몬스
IMDB : 7.4/10 | Rotten Tomatoes : 95%‘팜 스프링스’에서 열리는 결혼식에 참석한 남녀 ‘나일스’와 ‘세라’가
매일이 반복되는 타임루프에 갇히면서 벌어지는 로맨틱 코미디
씨네pick : 믿고 보는 “선댄스 영화제" 진출작이자 <기생충>의 북미 배급을 맡은 제작사 Neon의 작품입니다. ‘폭력과 외국어, 그리고 논픽션에 대해 반감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를 만들겠다는 설립 목적에 맞게 다양성 영화 중에서도 개성 넘치는 작품들을 배급해왔는데요. 타임 루프 로맨스물을 절대 뻔하지 않게 만들어낸 올해 가장 통통 튀는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웬디 (Wendy, 2020)드라마, 판타지 | 미국 | 111분 | 등급 미정
감독 : 벤 제틀린 | 출연 : 데빈 프랑스, 야슈아 막
IMDB : 5.7/10 | Rotten Tomatoes : 38%어른이 되기 싫어했고 언젠가 피터팬이 찾아와 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었던 벤 제틀린 감독의 어린 시절 추억과 어느 순간 이미 어른이 된 것을 깨닫게 되며 순수했던 동심을 그리워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색다른 판타지 영화
씨네pick : 믿고 보는 '선댄스' 작품이 또 있습니다. 어른들을 위한 환상 동화 <웬디>는 명작 [피터팬]을 재해석한 작품으로, 데뷔작부터 칸 영화제 '카메라상'을 수상한 감독 특유의 색채가 아주 돋보이는 영화입니다. 유명 배우가 아닌 아이들을 주연으로 내세웠기에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레타 툰베리 (I Am Greta, 2020)다큐멘터리 | 스웨덴 | 101분 | 등급 미정
감독 : 나탄 그로스만 | 출연 : 그레타 툰베리
IMDB : 6.7/10 | Rotten Tomatoes : 79%기후 변화 법안 마련 촉구를 위해 금요일마다 학교를 결석하며
의회 앞에서 홀로 시위를 시작한 15세 소녀 ‘그레타 툰베리’.
그녀가 쏘아 올린 ‘미래를 위한 금요일’ 운동은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데…
평범한 10대 소녀에서
어른들의 무감각한 환경 의식에 일침을 가하는
세계적인 청소년 환경운동가가 되기까지! 700만을 움직인 그녀의 외침에 주목하라!
씨네pick : 2019년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른 10대 환경 운동가 '그레타'의 다큐멘터리로,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 추천 기대작이기도 합니다. 현재 진행 중인 인물과 문제를 다룬 극인 만큼 더욱 기대되는 작품입니다.너의 결혼식 (가제) (My Love, 2021)멜로/로맨스 | 중국 | 115분 | 등급 미정
감독 : 티안 한 | 출연 : 허광한, 장약남
IMDB : 5.3/10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공식에 관한 영화로, 한 남자와 여자의 첫 만남부터 15년 간의 이야기를 다룬 로맨틱 코미디 영화
씨네pick : 한국에서 대히트를 거둔 첫사랑 멜로 영화 <너의 결혼식> (2018)의 중국 리메이크작으로, 요즘 최고 주가를 달리고 있는 배우 [상견니]의 배우 '허광한'이 주연을 맡은 작품입니다. 개봉과 동시에 예매율 1위를 달성하고, 노동절 연휴 5일 동안 1100억의 매출을 올렸다니 기대를 안 할 수가 없는 작품입니다.다섯 편 중 특히 기대되는 작품이 있으신가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최고 기대작은 어떤 작품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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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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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CFF 데일리] 눈보라를 이긴 따스한 사랑의 교감
감독: 박재범
배역: 이윤지, 김서영, 강길우, 김예은, 이관목, 송철호, 이용녀 外
러닝타임: 69분
“북극성을 따라서 붉은 곰을 찾아가렴” 툰드라의 그리샤, 엄마를 살리려면 숲의 주인을 만나야 한다.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은 툰드라 배경에 스톱모션으로 제작한 애니메이션이다. 3년 3개월이란 제작 기간인 만큼 스톱모션의 섬세함을 보인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평원 속 순록의 피를 마시는 장면과 오로라가 비추는 하늘을 구현한 장면은 툰드라 지역의 현실성을 보인다. 순록의 피를 마시는 장면이 자칫 아이들에게 잔인하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툰드라 민족에게는 일상이고, 어린이들의 새로운 지식과 시야를 넓히게 만들 수 있다. 예이츠의 딸이자 장녀인 그리샤는 엄마가 갑작스레 원인 모를 병에 걸리고 무당으로부터 숲의 주인을 찾으라는 조언을 듣는다. 아버지는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다”라고 말하며 도시로 나가 현대의 약을 구하러 간다. 문명에 타협한 태도를 보이는 아버지와 달리 그리샤와 남동생 꼴랴는 숲의 주인을 찾기 위해 여정을 떠난다. 한편, 숲의 주인을 없애기 위해 떠나는 러시아 연방군 블라디미르도 숲의 주인은 찾기 시작한다. 마침내 만난 숲의 주인은 천년을 산 거대한 붉은 곰이었고, 천 년을 살아갈 수 있었던 비밀은 신비스러운 장소 바위 아래 조그맣게 자라는 월귤나무 열매의 힘 덕분이었다. 블라디미르로 인해 다친 숲의 주인을 그리샤가 도와주며 열매를 얻는다. ‘숲의 주인’이라는 점과 치유의 힘과 같은 민담이나 소설의 구상을 영화화로 만들어 신비로움을 선사한다.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은 좁게는 그리샤와 엄마와의 관계를 보이고, 넓게는 생물을 포용하는 자연을 엄마라고 빗대어 표현해 자연의 위대함을 선보인다. 어머니의 헌신과 어머니를 향한 따스한 사랑이 차가운 눈보라를 이겨낸다.
상영일정: 9/15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9/13~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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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CFF 데일리] 차별과 아픔을 공감해 주길 바라며...
1. 여름의 아이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우크라이나의 많은 국민들은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간다. 피난처를 찾은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건 전쟁이 멈추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푸틴은 살인을 중단하라는 도보에 새겨진 문구가 눈에 띄는데 전쟁이 지속됨으로써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피해를 본다. 그렇기에 이 단편 영화는 전 세계에 우크라이나의 국민들이 겪는 불편함에 대해 호소하고 있다.
2. 내 방
지안은 삼 남매 중에 장녀인데도 자신의 방이 없다. 동생들과 방을 같이 쓰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안에게도 고민이 있으니 학교 스터디 그룹에서 소외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친구들은 혼자 방에서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공부를 하는 영상을 찍어 공유하지만 정작 지안에게는 동생들이 어질러놓은 방을 치우느라 바쁘고 공부하기도 힘들다. 그런 지안은 소외감을 느껴 짜증 나기만 하는데...
자신의 방이 없다는 건 어쩌면 괴로운 일이다. 그렇기에 지안의 입장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어쩌면 지안에게 중요했던 건 자신의 친구들처럼 과외도 받고 싶고 집도 넓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안타깝게 느껴졌다.
3. 오늘만 재워줘
정훈은 누나와 함께 빨래방을 가다가 교복을 입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현아를 발견한다. 현아는 정훈에게 한 번 만이라도 재워달라고 부탁하지만
정훈은 거절한다. 그런데도 현아는 계속 부탁을 하면서 따라와 정훈의 방 장롱에 몰래 들어간다.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란 정훈이 현아를 보고 자신의 방에서 나가라고 하지만 현아는 말을 듣지 않는다.
사실 현아는 가정폭력의 피해자이다. 현아의 아버지는 교도소에서 출소해 현아의 어머니에게 폭력을 일삼았고 현아는 자신의 어미니에게 폭력을 대물림 당했다. 그래서 정훈에게 한 번만 방에 재워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정훈은 자신과 일면식이 있는 남자도 데려와 잠을 재워준다.
그렇게 자신도 누나에게 너무 착하면 사람들이 얕본다고 말을 듣는다. 그렇지만 정훈도 우울하고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건 바로 자신도 좋지 못한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현아가 자신에게 그러한 말로 상처를 줬고 희망도 꿈도 없는 공시생의 하루는 그렇게 끝이 나버린다.
이 단편 영화는 감독이 말하길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했다고 한다. 자신의 아는 지인이 부모에게 가정 폭력을 당했는데 그걸 영화로 만들고자 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배경이 서울 강동구인데 여러 가지 사정이 있는 사람들이 방황하고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걸 잘 표현한 단편 영화가 아닌가 싶다.
4. 가을바람 불르면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종수는 한국말이 서툴다. 그런 종수를 좋아하는 같은 반 친구인 지희는 종수에게 한국말을 가르치고 시 쓰는 법도 가르쳐 준다. 지희는 시를 잘 쓰는 덕분에 상도 받았지만 종수는 시 한 편도 서툴게 쓰는 아이이다.
그래서 지희의 시 쓰기 수업에 참가한다. 지희는 일단 시를 잘 쓰기 위해서는 체험을 해보고 사물을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종수에게 알려준다.
종수는 애들에게 놀림받고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거에 슬픔과 분노를 느끼지만 어머니가 연애할 때 받았던 아버지가 쓴 러브레터를 보고 서울로 이사를 가는 지희에게 시 한 편을 주려고 밤새 시를 쓴다.
다문화가정에 태어난 아이의 외로움과 차별을 받아야 하는 현실을 이 영화에서는 관객들에게 어김없이 보여준다.
2023.09-19 (화) 14:30 롯데시네마 은평(롯데몰) 7관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기간: 09월 13일 - 09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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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스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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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은선이라는 친구가 두 명 있었다. 있었다고 하는 이유는 한 명이 개명을 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한 명밖에 없다. 나는 은선이들을 볼 때마다 실버라이닝을 생각했다.
구름에 가려진 햇빛이 만들어내는 가느다란 은색 선은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이 곧 갤 거라는 희망이다.
보통 이름에 쓰는 '은'자는 은혜 은(恩)자가 많을 테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레이스 라이닝이든 실버 라이닝이든, 아무튼 실제로 아직까지 은선이인 은선이는 먹구름 뒤 실버라이닝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조금 다른 아이였다. 다르다고 말하니 나에게 무척 관대한 기분이 든다.대학생활을 하면서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던 취업 준비나 스펙 쌓기 같은 유익한 것에는 하등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내일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아무렇게나 사랑하고, 쉽게 상처받으며 휘청거리며 걸었다.
그때 은선이가 있었다.
팻은 정신병원에서 퇴원한다. 아내와 불륜 관계였던 학교 선생을 시원하게 패버리고 아내인 니키에게 접근금지 및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병원에서 긍정적인 태도로 최선을 다 하면 한 가지 빛을 얻을 수 있다고 들었으니 긍정의 힘을 믿으며 다시 아내와 만날 거라고 생각한다.
감정 통제가 되지 않는 그에게 아내를 만나게 해줄 리가 없다. 불륜도 폭력도 문제이니 어느 쪽 편도 들기 어렵지만.
친구 로니의 저녁식사에 초대된 팻. 친구의 처제 티파니도 그곳에서 만난다.
(로니의 아내 베로니카 역으로 나오는 줄리아 스타일즈의 모습과 목소리가 반갑다. <너를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에서 본 캣의 얼굴 그대로에, 나이만 들었다. 매력적인 배우다)
식사 중 언니의 말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티파니, 집에 데려다준 팻에게 나한테 마음 있는 거 다 안다, 같이 자자고 하지만 팻은 거절한다.
팻의 뺨을 후려치는 티파니의 감정기복을 보통 사람들은 따라가기 어렵다.
그런데 이런 사람 제법 봤다.
영화여서 극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별 생각 없고 뜻도 없이 남자들을 만나고, 자는 사람들. 표면적으로만 보면 욕 먹기 쉽고, 욕 하기도 쉬운 사람들이다.
티파니도 자신을 "미친 과부 걸레"라 부른다.
그 말을 들은 남자, "나중에 술 한잔 할래요?"라는 말은 한번 자보겠다는 거다. 티파니는 아마 왕왕 그랬을 터.
그들의 기저에는 사랑으로 인한 상처가 있다. 그 전에는 손에 쥐면 부서질까 두려울 만큼 소중한 사랑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외부적 요인으로 깨지는 순간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사랑이 이렇게 가치없는 것임을 증명해야만 덜 상처받는다.
아무튼 티파니도 남편과 사별했다. 팻은 굳이 티파니에게 남편이 죽은 이야기를 계속 한다.
팻은 저돌적으로 접근하는 티파니에게 절대 넘어가지 않는다.
비닐봉지를 덮어 쓰고 달리기를 하는 또라이지만 아내를 향한 사랑은 일관적이다.
이 또한 일반적인 사랑은 아니다. 아내는 이미 떠났고, 그는 아내와 떨어져 지낸 지 1년이 다 되어 간다.
형태도 없고 목소리도 들을 수 없는 아내를 마냥 기다리고 사랑하는 팻. 집착도 사랑이라면 사랑이다.
옛날 집과 직장을 찾아갔다가 경찰이 오기도 하고, 아직도 결혼식 음악이나 아내와 관련된 것들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결혼식 비디오가 없어졌다고 새벽 3시에 온 집을 뒤지고 난리를 치며, 아내는 이용당한 거라고 피해망상에 빠진다.
난리를 치고는 또 미안하다고 울먹이는 것까지 너무나 핍진하다.
여기서 이웃 사는 남자애는 진짜 끔찍한데, 과제를 한다며 조울증 환자를 인터뷰하려고 하고 소동이 벌어졌을 때도 카메라를 가지고 나타난다.
우울증 환자를 보는 사회의 여러 가지 반응 중 하나다. 동정, 공포, 호기심 등등.
그런 팻에게 티파니가 불쑥 나타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지 않아도 감정을 통제하고 흥분하지 않아야 하는데, 우울증이나 감정조절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변수를 통제하기 어려워한다.
티파니도 오기가 생긴다. 다른 남자들은 자자고 꼬시면 오케이였는데, 이 남자는 안 된다. 무슨 짓을 해도 안 된다.
결국 이 남자의 트리거인 아내에 포인트를 맞춘다. 아내에게 편지를 전해주겠다는 것.
하지만 조건이 있다. 자신과 함께 댄스 대회에 나가는 것.
자기를 아내 니키라고 생각하고 춤추라는 티파니, 춤이라고는 춰 본 적도 없는 팻.
처음부터 스텝이 엉키지만 둘은 감정의 교감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춤을 맞추어 나간다.
한편, 강박증 환자인 팻의 아버지는 팻이 있어야만 풋볼팀 이글스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글스에 배팅을 하기 때문에 더욱 예민하다.
겨우 팻을 설득해서 직관을 가지만 팻은 결국 거기서 도발하는 상대팀 팬을 또 시원하게 패버린다.
우리의 팻. 팰 때는 가차없다. 정신을 놓고 팬다.
집으로 돌아와서 가족들에게 사과하는 중에 제대로 열받은 티파니까지 찾아온다.
팻은 티파니와 만나기로 해놓고 말도 없이 약속을 어겼다.
티파니는 그의 탓을 하는 팻의 아버지에게 미신과 징크스에 대해 조곤조곤 반박하는 데 그치지 않고, 노름쟁이 팻 아버지의 돈을 다 따간 영감에게 '묻고 더블로' 배팅을 하자고 한다.
풋볼 대회에다가 댄스대회 점수까지. 10점 만점에 5점을 받으면 팻 아버지의 승리다.
누구라도 이기기만 하면 대박날 이중 배팅이다.
12월 28일, 댄스대회에 출전한 두 사람. 예상했듯이 그 대회에 팻의 전부인 니키도 온다.
팻과 티파니는 무대에서 지금까지 갈고닦은 기량을 선보인다.
심사위원 의점수는 정확히 5.0. 이글스도 이긴다.
가족과 친구들의 응원과 티파니와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시, 팻은 니키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니키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인다.
티파니는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티파니를 쫓아 나간 팻은 티파니에게 편지를 건넨다.
팻은 지금까지 니키가 쓴 답장이라고 줬던 편지들을 다 티파니가 썼다는 걸 알고 있었다.
드디어 두 사람은 피해망상의 구름 위에서 현실로 무사히 착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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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는 팻이 니키의 귀에 대고 무슨 말을 하는지 나오지 않지만 아마도 "티파니가 나를 이렇게 멋지게 바꾸어주었다"는 내용이 아닐까 싶다.
우울증은 흔한 병이다. 누구든 상처를 받으면 마음을 다칠 수 있다. 상처를 안 받아도 기질적으로 그럴 수도 있다.
우울증이 있거나 우울증이 있는 가족이 주위에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정답을 아는 사람은 없다.
팻의 주치의 말처럼 약을 꾸준히 먹고 계획을 세우는 것. 그것도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함부로 말할 수는 없으나 우울증은 일부 유전적인 면도 있다.
문제가정처럼 비치지 않아도 도박중독에 강박증(아마도 도박 중독으로 인한 강박증이겠지만) 아버지, 영화 내내 수동적인, 겁먹은 듯한 어머니 아래에서 팻이 감정적으로 조금 미숙할 수도 있다.
가정에서부터 우울증의 토대가 깔린 시나리오였다면 가정을 조금 더 극적으로 보여주었겠지만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환자에 집중한 영화이다.
악화일로였던 팻과 티파니의 상처는 상처받은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극복된다.
사랑이 남녀간의 사랑일 필요는 없을 테고,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사랑은 사람을 바꾼다.
"우리가 제일 잘 하는 게 사랑"이라는 영화 <마미>의 대사가 나를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쉽게 많이 사랑해버릇하고 쉽게 다치고 상처받는 내 사랑도 이제는 특기라고 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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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위적이라 더 인간적인, 짐작으로부터의 이별
"진짜라는 게 뭘까요. 전 다 솔직했는걸요."
〈최악의 하루〉의 은희는 온종일 거짓말을 하다 하루가 간다. 하지만 영화 속 저 연극 대사 장면 속 은희만큼은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상한 일이다. 남자친구 현오 앞에서는 적극적인 청춘의 발랄함을, 운철 앞에서는 비극적 사랑에 가슴을 졸이는 애달픔을 연출하던 그가, 유독 남이 써 놓은 대사를 그저 연기할 뿐인데 그게 진짜 같다니. 남산 벤치 건너편에 그럴듯한 소품이나 상대 배우는 없다. 오로지 혼자서 극의 상황에 몰입한다. 어쩌면 일상이 연기이고, 연기가 진실인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지 않나 생각을 해 본다. 내 앞에 거를 것 없는 바로 그 순간 오롯이 등장하는 나의 모습은 이 모든 게 연기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숨길 수 없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사회에서는 때에 걸맞은 가면을 챙겨야 한다. 그게 나쁘다기보다는, 일부 불편함을 감수한 채 모두와 공생하는 방법은 종종 자신에게 거짓말을 해야 할 때가 있다는 당위적 명제다.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굳이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약간은 편하게 대해도 되는 상황에서 본래의 모습은 튀어나온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면을 벗을 수 있는 때는 언제인가. 혼자일 때가 아니라면 아마 가족과 함께일 때였을 것이다.
다시 은희에게 돌아가서, 이렇게도 생각해 보자. 은희의 대사가 모두 진실이라면, 자기 전 죄 없는 이불만 연거푸 걷어찼을 그날의 은희는 다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진실은 뭘까.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거든요. 당신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는."
정신을 집중해야만 상대방을 속일 수 있다는 그 어려운 퀘스트를 은희는 실패하고 만다. 왜냐하면 영화 속 남자들이나, 바깥의 관객 모두 은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의 심사에 ‘백 퍼센트’란 없다. 오직 가능성과 짐작만 있을 뿐. 은희는 거짓말을 했지만, 그 안에는 다소간의 진실이 담겨있다. 우리는 모두 진실이면서 거짓인 삶을 산다. 똑 부러지는 이분법은 적어도 사람 사이에는 없어 보인다.
길었던 서론을 마치며, 영화 〈페어웰〉의 거짓말은 가족이라는 가능세계에서 지극히 인위적인, 그리고 인간적인 사흘간의 모험을 장식한다.
거짓말의 거짓말에 대하여
〈페어웰〉은 오프닝 크레디트부터 ‘Based on an actual lie’를 전제한다. 룰루 왕 감독은 자전적 이야기이자 그 소재가 거짓말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친절한 설명으로 영화를 풀어나간다. 할머니의 시한부 사실을 숨긴 채 마지막 가족 모임을 준비하는 가족들의 고군분투와, 생각의 차이가 만드는 다각적인 갈등의 스토리는 거짓말이 초래한 진땀 빼는 장면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것만이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영화 속 거짓과 노골적인 거짓말을 해 보겠다는 앞선 선언조차도 실은 거짓말이다. 〈페어웰〉이 정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란 ‘거짓말의 거짓말’, 즉 가족과 정에 대한 이중부정의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가족에게는 내 본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가족만큼이나 진실한 나를 보여주기 힘든 존재도 없다. 그래서 서로의 감정은 쉽게 토라지고 상처 받는다.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는 우리 역시 명절마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과 묘한 기싸움이나 고부간의 갈등을 보고 자랐으니, 영화의 장면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멀리 있으면 신경 쓰이고, 가까이 보면 또 다투고 마는 가족의 모습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서로 다른 가치관 앞에 혼란스러운 빌리의 시선에서 더욱 이질적이다. 유교 문화권에서는 미덕인 행위가 뉴욕 출신 빌리에게는 불법이 되어 버리는 상황은 낯선 충격이다. 다만 감독은 가치나 성격, 입장의 간격에도 불구하고 진실은 어디에나 있고, 심지어 거짓의 상황에도 유효하다고 말한다.
출처: 다음 영화
〈페어웰〉은 거짓말과 진실을 적절히 섞은 끝에 따뜻하며 엇나간, 진심 어린 소동극을 만들어낸다. 영화 초반 식사 장면에서는 빌리의 아버지가 전하는 죽음에 관한 짧은 농담이 등장한다. 그 내용이란 한 가족이 죽음이라는 소재를 돌려서 말하려 노력하다가 벌어지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인데, 이는 영화에서 할머니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합심하여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과 일치한다. 거기에 어머니가 이미 그 농담을 들고 먼저 웃는 장면은 부모를 먼저 떠나보낸 비슷한 경험을 먼저 겪은 어머니의 상황과도 들어맞는다. 이렇듯 실없이 던지는 장난이란 의미의 농담에도 진실은 반드시 숨어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창춘의 할머니는 뉴욕의 손녀에게 염려의 말을 건넨다. 이런저런 거짓말로 할머니의 걱정을 둘러대며 전화통화를 하던 빌리는 길을 가다 잠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 통화 중에 누구와 얘기했냐는 할머니의 질문에 빌리는 ‘친구와 대화를 했다’라고 말한다. 이는 거짓말이지만 또한 진실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난 관객은 빌리에게 누구보다 온 마음을 주고, 빌리 역시 가득히 담은 사랑을 보냈던 친구는 할머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모할머니가 언니의 병명을 숨기기 위해 지어낸 ‘양성 음영’은 현재의 심각성을 알려주는 ‘양성’과 별것 아닌 거짓 병명인 ‘음영’의 합성어이다. 아프긴 하지만 또 그렇게 아프지는 않다는 복합적 의미처럼, 영화 곳곳에는 이렇게 수많은 거짓말 속 진실이 담겨있다.
진심의 역설, 짐작하는 우리
할머니 한 명을 속이기 위해 빌리의 가족이 실행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는 가족의 진심을 전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가족과의 식사 자리에서 고모와 어머니 간의 신경전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생활환경의 차이와 함께 자녀 교육으로 이어진다. 자식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타국에 보내는 부모의 심정은 부모의 죽음 앞에서도 애써 밝아야 하는 자식의 마음과 연결된다. 하지만 그 안에 정작 할머니는 없다. 슬픔을 감추고 행복한 여생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무지의 상태로 두는 것은 좋은 의도지만 당사자가 빠진 당사자의 삶이다. 모르는 척하며 슬픔을 인정하지 않는 가족의 선택은 오히려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편의주의적인 사고다. 아무것도 모르고 정리도 못 한 채 삶을 마무리해야 하는 할머니의 생각을 누구도 물어봐 주지 않는다. 오직 빌리만 할머니의 입장에 관심을 두고 함께 눈을 맞춘다. 할아버지의 묘 앞에서 마치 살아 돌아온 것처럼 대하듯 영화의 가족은 죽어가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에게 더 신경을 쓰고, 점차 모인 이유보다 모임 자체에 더 몰두한다. 그 과정에서 관객은 산 사람의 일상보다 기계적인 예식 절차에 주인공이 될 사람들은 뒷전으로 치이고 마는 관혼상제의 역설을 마주한다.
논리학의 가능세계에서는 단언할 수 없는 명제에 새로운 진리의 양상을 적용한다. 형식적으로 참과 거짓을 정하던 기존의 추론이 들어맞지 않은 경우가 생겨서다. 우리의 현실은 여러 가능성이 담긴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그곳에는 할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을 세계도 있으며 빌리가 미국인이 아닌 세계도 있을 것이다. 단언하기 어렵다면 더 넓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흔히 참이면서 거짓인 것은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우리의 삶이 언제는 뜻대로 돌아간 적이 있던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 시공간에 사는 인간은 높은 확률로 가족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우를 범한다. 할머니의 삶이 삼 개월 남짓 남았다는 확률을 단언할 수 없듯 말이다. 어디든 완벽한 것은 없다. 행복도, 거짓말도, 사람도 활짝 열어둘 필요가 있다고 영화는 말한다. 그리고 섣불리 짐작하지 않아야 한다고도. 하지만 빌리의 가족만 보아도 그렇게만 살기 어렵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무언가를 결론 내려고 하는 사람의 노력조차도 참으로 인간적이지 않을 수 없다.
어두운 밤길에 은희와 료헤이는 거짓 같은 ‘최악의 하루’를 지나 해피 엔딩을 꿈꾼다. 걱정하지 말라는 마지막 말조차 거짓말로 들리는 건, 완벽한 것은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어서일까. 그러니 거짓과 진심이 얽힌 서로에게 구십 구 퍼센트의 가능성을 들고도 YES OR NO를 판단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어 보인다. 그래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곁에 있다면, 모든 가능성의 끝에서 단언해도 좋다. 어쩌면 이 세계에서 가능한 행복이란 복잡한 계산보다 단 한 번의 기함으로 탄생할지 모를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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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가로되 사랑이더라
"When you eat together, you stick together."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흔하디 흔한 것
동시에 최고의 것
가로되 사랑이더라
— 고은, 순간의 꽃작년 여름 <바비>를 두고 컨셉트가 영화를 압도했다고 말한 중년 남성 평론가에 열광하는 남성들을 보며, 켄 로치와 다르덴 형제와 그 옛날 채플린부터도 ’컨셉트를 위한’ 영화, 정치적 캠페인에 가까운 영화를 만들어 왔는데 그 남성 거장들엔 불만 갖지 못하면서 젊은 여성 감독의 페미니즘 컨셉트만 쥐 잡듯 패는 건 너무 속 보이지 않냐고 비꼰 적이 있다.
말하자면 오로지 심미성과 예술적 비장미에만 집중할 수 있는/집중해야 하는, 마치 일본 버블시대 같은 영화적 황금기는 지나갔다는 것.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지 않고, 시대적 부름에 총대 메고 나서 어려운 역할에 충실히 임하는 그레타 거윅이나 켄 로치, 다르덴 형제를 위시한 ‘캠페인’ 전문가들에겐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역시 감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로부터 반 년 후. 놀랍게도 그이들은 이제 아예 켄 로치의 컨셉트 - 노동자 정치와 난민에의 연대 -마저 부인하려고 하는 듯하다.
영화의 ‘구조’는 물론 단순하다. 80년대 광부 파업 이후 결국 폐쇄된 (구) 탄광 마을로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집도 친구도 다 버리고 도망쳐온 시리아 난민들이 섞여든다. 국가에 의해 생계형 노동이 중단된 폭력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폐광촌의 가난한 영국인들은 이 ‘수용’ 조치에 아주 예민하게 반응한다. 나 살기도 팍팍한데 ‘두건 대가리’들을 마을에 들이지 말라고 아우성치고, 어떤 이들은 난민이 받는 구호물품을 보며 탐내거나 그들이 자기들의 공적 공간을 침범한다며 적개심을 품고, 일상적 언어폭력을 넘어 실제로 손괴에 준하는 행위를 저지르기도 한다. 물론 오래된 바 주인 토미 조 발렌타인이나 그의 친구 로라처럼 적극적 앨라이가 되는 이들도 있고 처음엔 경계하다가 마음을 여는 주민들도 적게나마 있다.
TJ 발렌타인과 야라는 꼴통 대표 청년이 망가트린 야라의 카메라를 계기로 가까워진 후, 마을에서 고립되거나 굶주리는 사람들을 집 밖으로 끌어내 함께 식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이런저런 역경을 겪으며 서로의 지난 삶을 다 알게 되며 진짜 친구가 된다. 결말에서 시리아에 남아 억울하게 구금됐던 야라의 아버지가 감옥에서 사망했단 소식에 TJ와 로라뿐 아니라 온 마을 사람들이 조문을 오며 마을/노동자 공동체의 부활을 암시한다.
상호 연대를 말하는 이 서사가 이토록 쉽게 쓰인 원인은 뭘까. 60년 동안 영화를 만들어온 켄 로치가 영화를 잘 못 만드는 사람이라서일까? 아니면 조금이라도 어려워지는 순간 짜증내며 쉬운 말로 세 줄 요약해달라고 조르는 반지성주의자들 때문일까?
<공산당 선언>의 장엄한 문장은 한 줄 한 줄 낱낱이 아름답지만 바로 그 복잡성 때문에 그걸 정말 읽었어야 하는 노동자 계급을 전부 포섭하지 못해 실패했다. 켄 로치는 그 딜레마를 잘 아는 노장이고 우리보다 먼저 난민 거부라는 현실을 맞닥뜨려본 유럽인이다.
그는 우리가 최근 몇 년간 봐온 모든 혐오를, 앞으로 보게 될 더 심각한 백래쉬를 이미 전부 목격했다. 그래서 그는 사실상 자신의 유작이 될지도 모를 이 영화를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쉽게 만들어서, 미음처럼 곱게 갈아 떠먹여 주기로 결심한 것 같다. 가장 최근작인 <나, 다니엘 블레이크>나 <미안해요 리키>보다도 직설적인 화법으로 직관적 대사와 사건들을 배치한 그의 의도는 약간 절박해보이기까지 한다.
여기서 극 중 사건들의 핍진성을 의심하거나 너무 극화된 선악 이분법이라며 중립을 자처하는 건, 자긴 아무리 생각해도 살면서 난민 될 일은 없을 것 같고 오로지 그들을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권을 지닌 편에만 속하다 죽을 것 같으니 끝까지 모르고 살겠다는 외면을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다. 얼마나 우습고 편협한 착각인가. 얼마나 기계적인 사유 없음인가.
게다가 이 마을의 난민 거부자들이 보이는 폭력성은 실제 난민들이 유럽 사회에서 겪어온 바에 비하면 아주 순하기 짝이 없다. 켄 로치가 폐광촌의 빈곤하고 여유 없는 사람들을 완전히 악인으로 그리지 않고 이해의 여지를 적재적소에 충분히 배치하기 위해 너무나 애쓴 것은 지구 반대편의 관객에게도 분명하게 보이는데, 예를 들면 린다의 엄마가 린다를 집까지 부축해 온 야라가 냉장고를 여는 장면을 보고 냅다 성을 낸 장면이 그렇다.
초라한 냉동실을 보고 야라도 잠시 멈칫할 만큼 그 집의 사정은 좋지 않다. 아마도 소아 당뇨를 겪는 듯한 딸과 게임에만 몰두하는 아들을 홀로 키우는 듯한 린다의 엄마는 미용실 청소 등 저임금 고강도 저퀄리티의 비정규 노동으로 삶을 꾸린다. 부박함은 사람을 여유 없게 만들고, (나보다 불쌍한 사람일 거라 예단했던) 남이 그것을 제대로 목격하고 나를 연민할 때의 수치심은 거의 죽음으로 가는 카운터펀치다. 그 순간 린다의 엄마가 민망함과 슬픔을 분노로 착각해 야라에게 빽 소리지르기는 쉬운 일이지만, 그 후 길 가는 야라를 멈춰세워 자신이 오해했다며 사과하고 친구가 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는 그 놀랍고 어려운 일을 해내고 만다.
TJ의 죽마고우 찰리의 사정 역시 만만치 않다. TJ는 반려견 마라가 죽고 몸 가눌 수 없는 슬픔을 다시 겪다가 겨우 난민 공동체와의 식사 연대를 통해 자신을 지탱하던 중이고, 그렇기에 가게의 수도 밸브를 의도적으로 터트려 그 연대를 저지한 40년 단골 일당 벡과 에드 등을 용서할 수가 없다. 그 범죄에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찰리까지 끼어있었다는 사실은 TJ를 미치도록 슬프게 만들지만, 찰리가 TJ에게 거부당한 데에서 분노를 넘어 모욕감과 서운함까지 느꼈단 점, 그리고 그가 휠체어 탄 부인 메리를 돌보는 주 간병인이었단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는 마냥 ’우리 부류‘ ’우리 사람‘들을 강조하며 ‘내 것을 뺏겼다’는 한 꺼풀의 박탈감에만 집중하던 다른 일당과 달리 ’올드 오크는 교회도 보건소도 닫은 후에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공적 공간‘이라는 사회적 의미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던 이이기도 하기에 더 복잡한 인물이다.
아주 무심하고 당연한 도리를 한다는 듯 야라와 로라의 작당에 동참할 뿐만 아니라 친지들의 적극적 혐오에 가담하지 않고 내부고발을 시도한 청년 토니, 역시 가게 수리를 함께해준 노인 자파와 올드 오크의 직원 매기, 이들이 납작한가. 이들이 너무 단순한 선인 같고 반대편의 비열한 혐오자들은 너무 단순한 악인으로 그려진 것 같아서 억울한가. 이상하게 벡과 에드 편에 이입되고 그 마음이 찔려서 너무 편향된 서사라고 비판하고 싶어진다면 거기 내포된 자기의 믿음을 다시 파보는 게 낫지 않을까.
켄 로치의 놀랍도록 세심한 묘사를 또 꼽자면 사회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 이들이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그릴 때 성별 요인의 영향을 잊지 않았단 점이다. 영화 속 젊은이들 중 적극적 배척의 주동자/공모자들은 대부분 오프닝의 로코 같은 남성들이고 TJ에게 아버지가 보내준 것 같은 상징성을 갖던 반려견 마라(Marra, 광부들 언어로 단순한 친구보다 깊은 의미의 용어라고 한다)를 물어죽인 개의 주인들 역시 책임감 없는 젊은 남자애들이었다. 반면 그 나이 또래의 여자애들은? 세이디의 딸 조시, 린다의 언니 케이티와 또 이름 없는 무수한 젊은 여자들은 집으로 숨어들고 있고, 엄마들의 ‘우리 딸들’ 걱정을 빌려서만 세상에 드러나는 존재들이다.
꿈도 희망도 자신감도 없고, 자기를 수치스러워하고, 한창 빛나야 할 때 남들 앞에 나서지 못해 히키코모리가 되는 여성들의 양상은 남성들의 타인에 대한 극도의 폭력성과 완전히 구분된다. 이건 영국에 한하지 않은 우리 눈앞의 현실이기도(근 10년 꾸준히 가파르게 오른 20대 여성의 자살률/자살 시도율이나 팬데믹 전후 ‘조용한 학살’을 떠올려보라).
켄 로치가 전 유럽의 청년층 우경화를 거의 반 세기 동안 관찰한 후 형성한 무의식인지, 혹은 의도가 있는 구분인지 정말 궁금한데,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일 때 폭력성을 외부로 발산하는지 내부로 폭발시키는지 그 방식은 분명하게 성별화된다(또 오인할까봐 굳이 당연한 소리를 덧붙이자면 이건 물론 생물학적 차이가 아니라 사회적 구조적 차이, ‘어떻게 키워졌느냐’의 차이).
책이나 뉴스는 전혀 안 보고 오로지 영화만 보는 인물이라 해도, 근 몇 년간 가장 화제였던 디아스포라 서사 <사마에게>와 <가버나움> 또는 <소년 아메드>와 <토리와 로키타> 중에 한 편 정도는 알지 않을까. 난민의 몸에 체화된 공포를, 애써 도망쳐 도착한 사회에서 매 순간 거부당하며 위축되는 감정을 모를 리 없다. 난민을 만드는 내전과 정치적 탄압이 어떤 시절 어느 나라들에서 발원했는지, 강력한 종교적 규제, 소수자 배척과 구금 및 고문 등이 얼마나 잔혹하게 사람을 망가트리는지는 공교육만 제대로 받았다면 더욱이 모를 리 없다.
그래서인지 난민-빈민은 인권을 두고 제로섬으로 경쟁할 대상이 아니란 점을 매우 명시적으로 얘기하는 <나의 올드 오크>를 바로 그 경합(을 넘어 거의 적대)의 구도로만 읽어내거나, 영화가 너무 망상적이고 편향적이라며 투정하는 사람들이 종종 보일 때마다(걱정보다는 적지만) 21세기의 공론장이 얼마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한 지 오래됐는지 자꾸 상기하게 된다. 이건 모두 우리 사회가 공론장에 올리면 안 될 것을 - 안티 페미니즘을, 난민 ‘수용 거부’론을, 퀴어와 장애 혐오를 - 마치 하나의 대등한 주장처럼 링 위에 올려주고, ‘의견’으로 고려하면 안 될 것을 의견으로 쳐주고, 논쟁의 대상이 아닌 것을 ‘00 논란’으로 체급을 키워주는 바람에 초래된 전 인류의 비극. 모두가 일제히 그 '의견'을 받아들이기 거부해도 모자랄 판이었는데 말이다. 어쩌면 조금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절망하는 와중에 87세의 켄 로치는 침착하게 사태를 정상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의견 내지 않기를 선택했던 대다수의 방관자들이 하나하나 ’난민 편‘으로 돌아설 만한 사건들이 여기저기 배치됐다며 너무 ’부자연스럽다‘고 느낀다는 사람도 있던데 그거야말로 너무 억지스러운 거부를 위한 거부 아닐까. 이 영화의 전제 자체를 총체적으로 부정하고 싶은 내심을 스스로 못 깨달았든지, 아님 부정하고 싶은 마음까진 분명히 인지했는데 그런 자신이 도덕적 사회적 인간이 아니란 점을 인정 못하는 건 아닐까 싶다. 정말이지 얼마나 주류의 규율이 지향하는 디폴트 인간형과 어긋남 없이 살아왔으면, 나와 다른 타인의 존재를 얼마나 상상을 못해보고 살았으면 난민 수용에 반대하는 나 자신도 악하지 않다고 해달라고 투정을 부릴 만큼 철이 없는 걸까.
'원주민 공동체에 대한 설득이 없었다'? 모든 설득이 공청회처럼 자리 만들어주고 오실 분 와서 들으라고 권유하는 형태로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닐 뿐더러, 어차피 혐오할 사람은 어떤 노력이 선행했든 답을 정해두고 혐오한다. 과연 빅과 에드와 로코 같은 사람들이 시리아 난민 도착 전에 어떤 설명을 들었다면 차분히 환영해줬을까? 버스에 불 지를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기다렸을 거라고 예상한다.
‘부자연스럽다’? 원래 대부분의 사람은 부대끼고 살면서 밥 몇 끼 같이 먹다보면 놀랄 만큼 빠르게 타인에게 적응하고 친밀감 갖고 애정하게 된다. 초대 교회들이 파산 직전으로 가난할 때도, 진짜 죽어나가는 수준으로 핍박받던 로마 왕정 하에서도 이 악물고 ‘같이 밥 먹기’ 강조해가며 교인들 일요일 식사 다 챙겨먹였던 이유 역시, 커뮤니티로서의 식사 공동체가 수행하는 물리적 친교의 역할이 얼마나 중대한지 알기 때문이겠다.
어차피 못 받아들일 빅과 같은 사람은 ‘떼어놓고’ 갈 때, 나머지 다수에게 선 밖의 사람들을 보여주고 ‘이 사람들도 사람이다’란 사실을 납득시키고 싶을 때 ‘함께 밥 먹기’라는 건 켄 로치가 판단하기에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사람 냄새나는 방법이었을 뿐이다.
그런 <나의 올드 오크>가 영화답지 않게 너무 교조적이거나, 너무 ‘편향된’ 것 같거나, 너무 망상적이고, 난민 혐오자를 너무 단편적인 악으로 그린 것 같은가? 그래서 너무 유치하고 납작하게 느껴진단 이유로 영화의 사회적 제언 자체를 거부하고 싶은가? 축하합니다. 당신은 바로 이 쉽게 떠먹여주기 위한 영화의 정확한 타겟입니다. ‘난민 수용 여부를 떠나’ 영화를 영화로만 사고하고 싶은가? 떠나면 안 될 논제를 굳이 떠나고 싶어하는 건 강자가 여유 부리며 무지한 상태에 남아있고 싶어할 때의 전형적인 증상이다.
켄 로치 감독은 선한 사회주의자라 이 '난민 반대론자'들의 반지성과 혐오까지 사회 구조적으로 이해해보려 애를 쓰며, 또 하나의 영화적 희망을 심어둔다. 바로 야라의 카메라다.
사진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야라의 카메라는 남성화/보수화/반지성화/구조화된 현대의 폭력에 대응하는 매우 시네마틱한 장치다. 난민 가족들을 실은 셔틀이 마을에 도착하고 어리둥절한 주민들이 이들을 위협하려 몰려드는 오프닝, 셔틀 밖에 있는 그들을 함께 밖에서 찍은 영화적 영상 대신 셔틀 안에서 밖을 찍은 야라의 사진 슬라이드가 전개된다. 여기서부터 영화의 원류 - 모션 픽쳐에 대한 켄 로치 나름의 야심이 드러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즈음 올드 오크의 뒷방(이란 공간이, 이 말이 주는 울림은 왜 이렇게 늘 두근대는가)에 모인 마을 사람들이 야라의 사진 슬라이드를 다같이 숨죽이며 시사하는 장면에선 이 영화적 야심이 기어이 폭발하는 것만 같다. <플라워 킬링 문>의 드 니로가 무심하게 관망하던 바로 그 모션 픽처. <파벨만스>의 어린 스필버그가 비명을 참고 첫 작품을 찍어냈던 바로 그 매체.
야라의 사진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야라라는 경계인이 담은 폐광촌의 사람들, 아직은 외부인이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연대체가 되어가고 있는 난민들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다. 켄 로치는 이 아름다운 야라의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허투루 다루지 않고 정직하게 3초씩 꾸벅이며 넘어가게 둔다. 아마도 그것이 그의 우직함. 아마도 그것이 그의 연대, 그의 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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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쟁이는 산돌구름에게 폰트를 지원 받았습니다"
2021. 04. 16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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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9 예상했던 짭틴아메리카
02:26 캡틴의 향수를 뿌린 샘
04:16 5화 카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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