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05-05 18:35:06
[JIFF 데일리] 단편영화의 맛
전주국제영화제 온라인 상영 단편 3편
코로나19가 우리에게 남긴 것이 하나 있다면, 극장에서 누군가와 부대끼지 않는 영화제도 가능하다는 확인이다. 완전히 축제 분위기를 되찾은 전주국제영화제지만, 주요 단편들은 온라인 상영을 열어두었다. 전주에서 돌아온 후 여운과 함께 즐길 수도 있고, 전주에 가기 전 예열하는 느낌으로 즐길 수도 있으며, 전주에 가지 못한 아쉬움을 달랠 수도 있다.
단편영화는 단편영화만의 맛이 있다. 온라인 상영으로 본 단편에 짧은 리뷰를 남겨 본다.

<나는 피아노를 버렸다> / 박건 감독
피아노와 꿈에 대해 속삭이는 목소리에 이어, 피아노를 버리기 위해 낑낑대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압류 딱지 위로 붙인 스티커의 흔적만으로도 대강 유추가 가능한 상황 속에서, 주인공이 피아노를 버리느라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깨닫는다. 모든 것의 무게는 옆에 있을 때가 아니라, 버릴 때 알게 된다.
피아노를 버리고 도서관에서 일하는 주인공을, 카메라는 그의 삶처럼 불안불안 흔들리며 담는다. 주인공은 소리를 차단하고, 그 자리에 바코드 소리를 메우고, 현실과 타협하려 애쓰지만 그럴수록 버릴 수 없는 마음은 선명해진다. 피아노를 버리는 행위와, 결코 버릴 수 없는 어떤 마음들이 대조되어 빛난다.
다만 아쉬운 점은 꿈과 현실을 다룬 영화치고 '현실'이 너무 모호했다는 점이다. 꿈을 포기한 주인공이 일하는 곳이 도서관이라는 점에서. 정숙을 강요하는 자리에 키보드 커버조차 깔려 있지 않다는 점에서. 보통 도서관의 일자리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 점을 생각할 때 더더욱. 차라리 도서관에서 공부를 한다면 이해가 되었을 만큼, 꿈을 포기한 주인공이 밟고 선 책도 누군가에겐 너무 꿈에 가까운 물질이어서.
그래도 꿈과 현실의 대비 그리고 음악과 침묵의 대조가 매력적이다.

<매달리기> / 박지인 감독
이 영화를 고른 이유는 딱 하나. 감독의 전작 <전학생>을 정말 좋아한다. 박수연 배우가 표현하는 인물의, 세상에서 유리된 듯한 상황에서 짓는 아슬아슬 불안한 미소가 인상 깊었고, 그에게 푸근한 얼굴로 인사하며 미소 짓는 이주영 배우의 얼굴은 또 왜 그렇게 안심이 되었던지. 그들의 출신을 생각할 때, 박지인 감독이 애정을 갖고 담는 인물이라면 앞으로도 궁금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에는 자립 준비 아동이다. '보호 종료' 이후 자립을 준비해야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그동안 워낙 사각지대에 놓였던 만큼 최근 국내 아동보호 관련하여 부쩍 화제가 되었던 단어이기도 하다. 영화 속 아이들도 불안하게 흩날리지만, 그 흩날리는 기분 속에서도 끝내 생에 매달리기를 계속한다.
짧은 러닝타임에도 깊게 스민다. 눈물 짓고, 조용히 웃고, 그러면서도 뒷모습을 응시하는 인물들의 감정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박지인 감독의 다음도 기대된다. 어디든 가서 보겠어.

<늦은 산책> / 손지환,김병규 감독
이건 온라인이 아니라 극장에서 봤어야 했는데... 여백이 많은 영화라서, 온전히 극장에서 그 공기에 휩싸여 보았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아쉬웠다. 하지만 이렇게 온라인으로 보아도, 아름다운 영화였다. 스틸 사진처럼 펼쳐지는 이미지, 울려 퍼지는 트로이메라이.
어긋나다, 라는 단어를 ㅇㅓㄱㅡㅅㄴㅏㄷㅏ라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펼쳐내어 보여주는 기분이었다. 대단한 사건 없이도 어긋나는 것들이 있다. 차라리 소리칠 수 있는 계기라도 있다면 편안할 텐데. 이런 느리고 진득한 어긋남이 더 답답하고 힘들지. 다 그대로일 수가 없다. "그걸 내가 일찍 알았다면 달라졌을까? 모르겠어."라는 대사가 어긋난다는 단어의 본질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긋난다는 건 그런 것이다.
다만 아름답기에 더더욱, 서사와 사건의 과도한 여백이 아쉬웠다. 시작부터 유난히 힘이 없던 두 사람의 대사를 보며, 무엇이 남자를 저렇게 만들었는지, 두 사람 사이엔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아니 애초에 두 사람은 어떤 인물들인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뭔데, 왜 관객한테도 비밀인데. 모든 인물이 꼭 홍상수 영화 속 인물들처럼 말할 필요는 없다. 여백이 조금만 더 칠해졌더라면, 그래서 두 사람의 맞잡은 손에 좀더 공감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온라인 상영]
온피프엔: https://onfifn.com/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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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없는 사람들의 말’, 어느 다큐멘터리스트의 집념
딸이 묻는다. 왜 엄마는 영화를 어렵게 만드느냐고. 알기 쉽게, 친절하게 만들 수는 없느냐고. 엄마가 화내며 답한다. 그럼 내가 영화를 만들 필요가 없다고. 영화는 내가 목격하고 기록한 것을 담아내는 것이라고.
딸의 질문에 화를 내는 재일조선인 다큐멘터리스트 박수남은 아마도 자신이 겪고 기록한 시대가 결코 쉽고 친절할 수는 없는 시대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치열하고 집요하게, 종종 ‘어렵고’ ‘불친절하게’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10만 피트의 길이, 50시간 분량의 필름이 남았다.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박수남과 그 딸이 남겨진 기록과 박수남의 삶을 교차로 엮어 만든 영화다.
차별받는 재일조선인의 문제에 천착한 박수남이 최초에 선택한 무기는 ‘펜’이었다. 그러나 ‘한계’를 마주했다. 박수남이 만난 재일조선인은 침묵하는 일이 많았다. 누구보다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이었지만 몸을 부르르 떨 뿐 그 세월을 어떻게 다 이야기하겠느냐며 고개를 떨궜다. 박수남은 그때 결심했다. 감히 짐작할 수 없는 무수한 아픔이 만들어내는 이 떨림을 온전히 담아내는 영화에 투신하겠다고. 말 없는 사람들의 말을 영상으로 담아내겠다고.
1935년생 박수남이 어떻게 기록할 것인지를 고민했다면, 그와 다른 세대인 나는 영화를 보며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를 생각했다. 박수남을 일평생 사로잡은 재일조선인의 그 무수한 떨림이 관객의 신체에까지 도달하고 새로운 물음을 촉발한 것이다. 영화가 주장하듯 기억이 보존되는 한 가해 책임은 사라지지 않는다면, 이 영화를 통해 되살아나는 목소리들은 기억의 수명과 가해 책임의 기한을 넉넉히 늘린다. 박수남의 기록은 후대의 기억이 되었다.
영화는 지난 100여 년간 재일조선인이 겪은 문제를 폭넓게 다룬다. 고마쓰가와 사건, 침묵과 가난에 시달리는 피폭 재일조선인과 한일 양국 피폭 피해자의 갈등과 연대, 제암리 학살의 유일한 생존자 인터뷰, 위안부 공론화, 군함도……. 딸 박마의가 갈무리한 박수남의 기록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차별과 오욕으로 굴곡진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그려낸다. 더불어 그 한복판을 살아낸 박수남의 삶이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교차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부당하게 차별받는 집단의 당사자로서 차별에 맞서고 차별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서서히 깨닫는다.
148분의 긴 상영 시간 동안, 나는 박수남의 집요함에 압도당했다. 불합리한 구조적 모순과 그로 인해 생성되는 소수자 정체성에 대한 최초의 강렬한 각성이 어떻게 개인을, 집단을 추동하는 거대한 힘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생생히 목격할 수 있어서였다. 이 힘은 박수남이 자신의 집념을 타인의 아픔을 기록하는 데 썼다는 점에서 또 한 번 증폭된다. 박수남의 작업은 자기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한 타인의 목소리에 꺼지지 않는 생명력을 부여해 결국은 되살아나게 한다. 치열한 기록이 윤리와 정치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정작 박수남은 과거 자신이 촬영한 영상을 보지 못한다. 건강 문제로 시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딸이 들려주는 소리를 듣고는 당시의 장면을 기억해낸다. 그녀가 과거 기록한 것이 더는 보지 못하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때의 감정과 기억을 되살려낸다. 이것이 기록의 힘이다. 박수남은 스스로 기록의 의의를 증명해낸다. 시대를 관통해 세대를 잇는 집요한 기록 의지가 내내 놀라운 힘을 뿜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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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밀한 타자, 혈육
6★/10★
“선생님들은 뭐 하셨어요?” 첫 번째 질문은 적확하다. 대학병원 간호사 유정은 동생 기정이 학내에서 미숙아를 출산한 후 유기했다는 연락을 받고 학교에 방문한다. 유정은 선생님들이 모인 회의에 참석한다. 누군가는 모범생인 기정이 이런 일을 벌였다는 데 안타까움을 표하고, 누군가는 그저 걱정만 하며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러나 결론은 같다. 기정이 형사 처벌을 받으면 퇴학 조치하겠다는 것. 간호사인데도 왜 동생의 임신을 알지 못했느냐는 은근한 책망이 이어진다. 이때다. 한동안 침묵하던 유정이 첫 번째 질문을 던진 것은. 유정이 동생의 신체적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한 데 책임이 있다면, 그 책임은 마찬가지로 학생을 돌보는 게 일인 선생님들의 것이기도 하다. 유정의 첫 번째 질문은 본연의 책무를 외면한 채 책임지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향한다. 유정이 죄송하다며 연신 머리를 조아리고 죄인이라도 되는 양 굽신거리지 않고 오히려 되묻는 장면이 좋았던 이유다.
“너가 그런 게 맞아?” 그러나 두 번째 질문은 틀렸다. 유정 역시 이 사건이 힘들다. 기정은 처벌 위기에도 입을 열지 않고, 부모 없이 동생을 양육한 유정의 속은 타들어간다. 무엇보다 유정은 기정이 ‘이런 일’을 할 아이가 아니라고 여긴다. 자기가 아는 동생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정을 마주한 유정은 질문을 쏟아낸다. 네가 그런 게 맞는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지, 왜 그런 일을 겪고도 내게 알리지 않았는지……. 그러나 기정의 답은 간결하다. “언니가 생각이 안 났어.”
혈연은 가족 관계를 구성하는 절대적인 근거로 간주된다. 하지만 서로를 돌보고 북돋는 가족의 절대적 근거일 순 없다. 가족은 명사가 아닌 동사다. 관계 호칭에 걸맞은 육체적‧정신적‧감정적 실천이 동반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유정이 마주한 과제다. 이제 유정은 동생과의 관계를 처음부터 새로 만들어가야 한다. 이전에 알던 기정은 없다. 〈언니 유정〉은 당연하게 주어진 혈연 관계를 넘어 유정이 진정한 의미의 언니가 ‘되어가는’ 과정을 담는다.
동생 기정을 알아가는 언니 유정의 여정에는 또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있다. 먼저 유정이 담당한 환자와의 관계다. 임신 중독 증세로 입원 중인 환자와의 관계를 통해 유정은 기정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동생인지를 되새긴다. 유정의 엄마는 기정을 낳다가 죽었다. 그래서 유정은 기정을 볼 때마다 동생에게서 엄마를 겹쳐 본다. 동생이 엄마를 앗아갔다는 원망은 아니다. 기정은 유정에게 동생인 동시에 엄마이기도 한, 곱절로 소중한 사람이다. 두 번째는 기정의 친구인 희진과의 관계다. 희진은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데 시원하게 털어놓지는 않는다. 그러나 희진의 단편적인 말만으로도 유정은 자신이 기정을 여태껏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이렇게 유정은 담당 환자를 통해서는 기정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고, 희진을 통해서는 기정의 현재에 다가간다. 누군가는 영화가 꼭꼭 숨겨둔 기정이 사건의 비밀이 밝혀질 때 커다란 임팩트를 남기지 않는다는 데 아쉬움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마지막쯤에야 드러냄으로써 일정 부분 미스터리 장르의 몰입감을 선사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기정과의 관계를 복원하겠다는 유정의 의지와 실천으로 바라본다면 어떨까? 담당 환자, 희진과의 관계에 깊이 몰입한 결과 얻은 통찰로 기정이 사건을 해결하고, 자매간 상호적 관계 실천의 토대를 기어이 마련해내는 유정에게서 가깝고도 먼 혈육과의 관계를 돌아볼 실마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아는 혈육의 모습과 실재 혈육의 삶은 일치하지 않는다. 〈언니 유정〉은 어떤 맥락에서는 그 간극을 마주했을 때 '절망'하는 것이 폭력일 수 있음을 환기한다. 이 절망이 자기 기준에 맞춰 상대의 현재를 철저히 부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혈육은 관계의 출발 조건일 뿐 그 자체로 절대적 조건인 것은 아니다. 혈육은 관계의 의지와 실천으로 공들여 유지해야 할 친밀한 타자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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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배종인 인간의 존재의미를 묻는다
진화한 유인원(Ape)과 퇴화된 인간들이 살아가는 디스토피아 행성. 유인원은 세상의 지배종이 되었고 인간들은 사냥의 대상에 불과하다. <메이즈 러너> 시리즈의 웨스 볼 감독이 연출하고, <아바타: 물의 길> 조쉬 프리드먼이 각본을 썼다. 제작비는 1억 6천만 달러, 한화로 약 2200억 원이다. 평균제작비 약 100억(홍보비 추가 총제작비는 약 125억)이 드는 한국 상업 영화를 20개 이상 만들 수 있는 대작이다.
혹성탈출 시리즈는 리부트(Reboot) 영화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리부트 영화의 유행을 가져왔다. 놀런 감독은 오래되어 폐기 수준에 있던 배트맨의 캐릭터에 새롭게 스토리를 입혀 대박 흥행을 가져왔다. 이후 많은 리부트 영화 시리즈가 시도되었고 혹성탈출 시리즈도 그중 하나다.
혹성탈출 시리즈처럼 한국에서도 마동석의 <범죄도시> 성공으로 시리즈 영화에 관심이 많아졌다. 개별 독립된 영화는 유명감독의 대작 영화일지라도 흥행을 장담할 수 없다. 시리즈 영화의 장점은 예측가능성이다. 경험을 토대로 제작비 규모와 개봉 시기를 정하기가 쉽다.
캐릭터를 관객에게 설명하는 시간 등 영화 초반의 빌드업 과정을 과감하게 줄이고 바로 본론에 들어가 관객을 몰입하게 할 수 있다. 충성도 높은 팬덤이 형성되면 흥행의 강력한 엔진이 된다. 시리즈 영화는 스핀오프(번외 편)와 프리퀄(전사) 등 다양한 형태로 변주할 수 있어 확장성도 크다.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는 인간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망할 수 있는 지의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태양계 행성의 지배종이 된 유한한 존재인 인간. 영화는 인간의 욕망과 교만으로 결국 문명을 잃어버리게 될 디스토피아 세상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화면 크기가 감동을 다르게 한다.’는 아내의 말에 동의한다. 영화를 방구석 1열이 아닌 극장에서 보는 주된 이유다. 우리는 용산 CGV 아이맥스 관에서 영화를 보았다. 마치 실제 유인원들이 영화에 출연한 듯 얼굴에 나타나는 섬세한 감정표현, 거대한 숲이 된 고층 빌딩, 프록시무스 군단의 거처인 폐기된 크루즈선 등을 큰 화면에서 실감 나는 영상으로 즐겼다.
러닝타임은 다소 긴 145분이다. 이 정도의 상영시간이라면 놀라운 영상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야기(Story)와 서사(Narrative)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관객이 중간에 피로도를 느끼게 됨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굳이 옥에 티를 찾자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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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이트 클럽> - ‘세계의 끝에서 끈덕지게 주먹을 뻗다’
파이트 클럽 (Fight Club)
개봉일 : 1999.11.13 (한국 기준)
감독 : 데이빗 핀처
출연 : 브래드 피트, 에드워드 노튼, 헬레나 본햄 카터, 미트 로프, 자레드 레토
‘세계의 끝에서 끈덕지게 주먹을 뻗다’
1999년, 새로운 숫자 2로 시작되는 2000년이 도래하기 직전, 세기말에 발표된 영화 <파이트 클럽>. ‘반항’과 ‘주먹’이 하나의 멋으로 통하던 그 시절의 감성이 그대로 담겨 있는 이 영화엔 세기말 감성과 그 시절의 멋, 그리고 새롭게 시작되는 천년에 대한 기대와 그에 대한 두려움이 뒤섞여 있다. 실제로 2000년을 앞둔 시기에 ‘2000년이 오면 지구가 멸망할 거다’라는 식의 괴담이 떠돌았다고도 하니.. 새로 다가올 시대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 사람들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새로운 세기가 도래하고 산업은 점점 빠르고 거대하게 발전한다. 우후죽순 생겨난 공장들은 정해진 틀에 찍어낸 물건들을 빠른 속도로 사람들에게 공급했고, 그것은 새로운 문화가 되어 우리의 생활을 바꿔놓았다. <파이트 클럽>은 이런 획일화된 사회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한 남자가 입안에 고인 피를 뱉어내며 끈덕지게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영화다.
공장에서 찍어져 나오는 물건들과 똑같은 구조로 지어지는 아파트. 그리고 비슷하게 생긴 빌딩 숲 안에서 똑같은 컴퓨터를 바라보며 주어진 일을 해내는 하루. ‘남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에 딱 어울리는 하루다. 자동차 리잭 심사관으로 일하고 있는 주인공 ‘잭’은 나름 괜찮은 수준의 월급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 그는 열심히 모은 월급으로 번듯한 아파트를 샀고, 고급 가구들을 사 모으며 자신의 집을 채워가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잭은 언제부턴가 이유 모를 답답함을 느낀다. 특별할 것 없는, 부드럽다 못해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하루의 끝엔 아무것도 없었다.
인생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던 잭의 앞에 갑작스러운 사고와 함께 야생동물 같은 매력을 가진 ‘테일러 더든’이 나타난다. 누군가와 싸우기보단 피하기를 선택하던 잭과는 상극인 마음가짐을 가진 남자. 피하기보단 주먹 한 번을 휘둘러봐야 나를 알게 된다고 말하는 남자. 잭은 테일러를 통해 생애 처음으로 주먹다짐을 하며 엄청난 해방감을 느낀다. 사회에선 금기 또는 피해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행동을 통해 느끼는 쾌감. 그것은 한 남자의 일상을 확실하게 뒤엎어버린다.
정해진 사회 규칙에 반항하고 싶은 날. 그런 날을 한 번쯤은 겪어보지 않았는가. 큰 건 아니더라도 에스컬레이터 거꾸로 오르기라든가.. 정해진 출근시간이 아닌 더 여유로운 시간에 유유히 출근하기라든가! 가끔 세상에 반항하고 싶어질 때, 중2병을 겪던 그때처럼 욕망을 주체할 수 없을 때 <파이트 클럽>을 추천한다. 리즈시절의 빵오빠 비주얼을 감상하며 괜히 나도 그처럼 쿨하고 야성적인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보는 것도 나름 좋은 감상법이 될지도 모른다.
파이트 클럽 시놉시스
비싼 가구들로 집 안을 채우지만 삶에 강한 공허함을 느끼는 자동차 리잭 심사관 ‘잭’.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거친 남자 ‘테일러 더든’과의 우연한 만남으로 본능이 이끄는 대로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어느 날, “싸워봐야 네 자신을 알게 된다”라는 테일러 더든의 말에 통쾌한 한 방을 날리는 잭. 두 사람은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파이트 클럽’이라는 비밀 조직을 결성하고, 폭력으로 세상에 저항하는 거대한 집단이 형성된다. 하지만, 걷잡을 수 없이 커진 ‘파이트 클럽’은 시간이 지날수록 의미가 변질되고, 잭과 테일러 더든 사이의 갈등도 점차 깊어져 가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모두 복사본의 복사본의 복사본 같다.”
똑같은 외관과 구조로 지어진 아파트. 똑같이 생긴 티비속에서 흘러나오는 똑같이 생긴 보급형 가구에 대한 광고. 잭은 가구 광고를 보고 있는 자신을 “이케아 제품으로 보금자리를 꾸미는 노예 대열에 합류했다.”고 표현한다. 똑같이 굴러가는 사회 속에서 자연스레 정해진 표준에 맞추기 위해 일을 하고, 집을 사고 집을 꾸민다. 하지만 잭은 공허함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공허함 뒤에는 괴로운 불면증과 무기력함이 뒤따른다.
잭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병으로 인해 진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의 위로 모임에 참석한다. 잘빠진 가구가 아닌 커다란 사람의 품에 안겨 눈물을 토해내는 건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위로에 중독된 잭은 여러 모임을 전전했고, 그곳에서 또 다른 거짓말쟁이 말라 싱어를 만난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이고, 죽지 않는 것이 비극이라 외치며 도로를 거침없이 가로지르는 이상한 여자. 만약 그녀를 지금이 아닌 다른 시간대에 만났다면 위로 모임을 나누는 사이가 아닌 아름다운 연인 사이가 될 수 있었을까-하고 잠시 생각해보지만, 눈앞에 서 있는 까만 머리의 여자를 다시 보니 그건 절대 아닌 것 같다. 말라 싱어는 강하게 잭의 시선을 잡아끌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말라 싱어보다 더 흥미로운 존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잭이 테일러 더든을 만난 건 높은 하늘 위였다. 출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잭의 옆인 비상구 좌석에 앉아 안전카드를 읽고 있는 남자는 비상구 좌석 승객이 맡게 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며 표정을 구긴다. 뒤이어 테일러는 남들은 모두 따르겠다고 말하는 안전 수칙이 알고 보면 위험을 순응하게 만드는 규칙이라며 이상하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순응하는 것들을 다시 들춰내 의심하는 사람이라니. 잭은 그런 테일러를 매우 흥미롭게 바라본다. 비행기에서 잠시 만나는 일회용 친구치고는 꽤나 흥미로운 남자였다.
“소유물에 지배당하지 말라”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한 잭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소중한 그의 아파트가 불에 타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망연자실한 상태로 홀린 듯 테일러에게 전화를 건다. 테일러는 흔쾌히 잭과 술 한 잔을 하고, 자신의 집에서 함께 지내도 된다고 말한다. 그 후 잭은 테일러를 따라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일탈을 하나씩 경험해나간다. 사회적 규범, 정상적인 범주, 남들과 같은 삶을 의미하는 잭의 아파트가 불에 타던 날, 잭은 테일러와 함께 틀을 벗어나게 된다.
테일러는 이렇게 말한다. 아파트와 고급 가구들은 소유물이고, 소유물은 사람을 지배한다고. 그는 있는 그대로 흘러가는 영사기 속 릴 테이프를 가만두지 못했고, 정해진 코스대로 흘러가는 고급 호텔의 음식에 테러를 저지른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다수에 의해 기본이라 정해진 것이라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따르지 않는 인물이다.
“싸우고 나선 모든 것의 소리가 작아지고, 모든걸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쾌감이 사람의 원초적 본능이란 것, 무의식중에 남들과 다른 것을 원한다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다. ‘파이트 클럽’은 싸우면서 쾌감을 느끼고, 사회에서 규제한 금기를 어기며 색다른 클럽활동으로 추앙받는다. 잭과 테일러는 결국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안정적인 것이 아닌 쾌감과 특별함이란 사실을 모아 ‘파이트 클럽’이라는 이름을 만들게 된다.파이트 클럽의 위치는 식당 밑 지하. 활동 시간은 손님들이 모두 나간 후 늦은 시간이다. 다른 이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난 후, 땅밑에서 뒤늦게 열리는 파이트 클럽은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자 나의 밑바닥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테일러는 아직도 망설이고 있는 잭의 손에 흉터를 남기며 “모든 걸 잃었을 때만 모든 걸 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다”고 말한다. 잭은 테일러가 남긴 상처를 통해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게 된다.
잭은 지원자들을 받아 군대를 양성하고 대혼돈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테일러와 잭이 동일 인물이란 것이 밝혀지기 전엔 ‘(상상 속)테일러의 군대’라고 표현되지만, 애초에 잭(진짜 테일러)이 소집한 군대다.) 잭은 지원자들에게 여러 가지의 테러 계획을 하달하며 도시를 휘저어 놓다가 고환암 환자 모임에서 만난 짝꿍 밥을 잃고 충격을 받는다. 큰 덩치로 잭을 폭 감싸 안아주던 눈물 동지의 죽음은 테일러를 만나기 전에 존재했던 본성을 불러온다. 잭은 뒤늦게 경찰서에 계획을 자수하러 가지만, 대혼돈 프로젝트 팀원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자신이 테일러 더든이라는 혼란함만 안은 채 경찰서를 빠져나온다.
“우린 같은 사람이니까.”
잭과 테일러는 같은 사람이다. 테일러는 삶을 바꾸고 싶어 하던 잭이 찾아낸 탈출구였고, 그 사실을 인지하게 된 순간 영화의 릴이 교체되듯 한순간에 대혼돈 프로젝트의 주인공이 바뀌어버린다. 집에 불을 지른 것도, 말라와 사랑을 나눈 것도, 군대를 소집한 것도, 파이트 클럽을 만든 것도 모두 잭, 진짜 테일러 더든이었다. 영화 초반엔 잭이 테일러와 처음으로 주먹질을 하며 아드레날린을 느낀 것으로 표현되지만, 그것 또한 잭이 홀로 벌인 싸움이었다. 잭이 지부장의 사무실에 들어가 지부장에게 폭력을 당한 것처럼 혼자 싸움을 연출해내던 장면은 이 반전을 위한 복선이었을지도 모른다.
“난 눈뜨고 있어.”
잭은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테일러의 모습이 환영이란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진짜 테일러는 자신이라는 것도. 잭은 테일러의 존재를 없애기 위해 자신에게 총을 발사한다. 건물은 계획대로 폭파되고, 잭은 말라와 손을 잡는다. 잭은 자신이 누군지, 어떠한 욕망으로 가상의 테일러 더든을 만들어냈는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깨닫게 된다.
정해진 사회규범 속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던 진짜 테일러 더든(잭)은 자신이 원하는 모습의 거친 테일러 더든을 만들고, 그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파이트 클럽을 만든다. 가상의 테일러 더든이 존재하고 ‘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그는 처음엔 테일러를 무조건적으로 따르며 그의 말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파이트 클럽 회원들 사이에서 ‘테일러 더든’이라는 이름이 전설처럼 떠돌기 시작하자 “나도 파이트 클럽의 창시자인데..”라며 자신도 절반쯤의 공이 있음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이것은 더 이상 잭(진짜 테일러)이 가상의 테일러 더든에 기대는 것이 아닌 본체 자체의 삶을 바꾸고 싶다는 욕망이 커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잭은 대혼돈 프로젝트의 계획을 말해주지 않는 테일러에게 섭섭함을 나타내고, 이내 테일러가 집에서 사라진다. 더 이상 가상의 테일러 더든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잭의 욕망이 커졌기 때문이다.
잭, 아니 진짜 테일러 더든은 자신이 가진 자아 중 한 가지인 ‘평범한 회사원 테일러 더든’의 모습으로 살아가다가 현실의 권태가 정점을 찍은 순간 숨겨놔야만 했던 자아 ‘파이트 클럽의 창시자가 될 테일러 더든’을 불러온다. 왜 이런 모습을 숨겨야 했냐고 묻는다면, 현 사회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고급스러운 물건을 사며 행복을 느껴야 하고,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다수가 정한 평범함에 물들어야만 했던 남자의 공허함이 끌어낸 또 다른 자아는 자신의 고통을 명확하게 비추는 거울이 된다. 건물이 무너지고 도시에 잠깐의 혼란이 찾아온다 해서 견고하게 조직된 사회가 흔들릴 거란 보장은 없다. 하지만 아주 잠깐이라도 완전한 해방감을 누릴 수 있었다면 테일러의 ‘대혼돈 프로젝트’는 성공한 것이라 봐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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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그보다 늦게 태어난 것은 행운이었다
7★/10★
영화만큼이나, 때로는 영화보다 더 유명한 영화 음악(혹은 음악 감독)이 있다. 영화를 본 후 누가 연출했는지보다 음악 감독이 누구인지가 궁금해질 때도 있다. 그리고 엔리오 마리꼬네야 말로, 이 두 사례의 가장 적합한 예다. 〈엔리오: 더 마에스트로〉는 2020년 타계한 전 세계적인 영화 음악가 엔리오 마리꼬네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고백하자면, 1960년대에 본격적으로 명성을 쌓기 시작해 2017년까지 엔리오가 음악 작업을 한 영화 중 내가 본 것은 〈시네마 천국〉, 〈헤이트풀 8〉 두어 편에 불과하다. 내겐 곱씹다 보면 여운을 자아내는 그와의 추억이 없다. 그러나 156분의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현대 영화 음악이 그에게 빚진 것이 너무나도 많고, 우리가 익숙하게 소비해온 음악이 그의 성과라는 점을 새로이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의사가 되고 싶었던 엔리오는 트럼펫 연주자였던 아버지의 권유로 음악을 시작했다. 이후 현대 음악의 거장으로 불리는 고프레도 페트라시에게 작곡을 배웠다. 엔리오가 ‘순수 음악’의 테두리 아에서 음악을 배웠다는 건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장점은 탄탄하고 체계적인 기본기를 바탕으로 영화 음악을 작업해 다채로운 작업물을 내놓을 수 있었다는 것이고, 단점은 동료들이 엔리오의 영화 음악 작곡을 하찮게 대했다는 것이다. 영화 음악은 순수 음악보다 한참 격이 떨어지는 장르로 여겨졌다. 엔리오가 동료들에게서 고립된 이유다. 더불어 그는 늘 예술적 정체성과 ‘순수성’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배신자’, ‘매춘’, ‘천박하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순수 음악계 출신으로 이와 같은 시선을 어느 정도 내면화할 수밖에 없었던 엔리오는 오랜 세월 이 문제로 괴로워했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 음악 쪽에서는 놀라운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당시의 영화 음악은 천편일률적인 배경 연주곡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엔리오는 전통적인 사운드에 실험적인 요소를 결합해 영화 음악을 별 의미 없는 부가 요소로 취급하는 현실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캔 소리, 첨벙거리는 소리, 휘파람 등을 음악에 더해 독특하고도 매력적인 사운드를 만들었고, 영화는 그 덕에 더 큰 몰입감을 가질 수 있었다. 〈엔리오: 더 마에스트로〉에는 그가 작업한 영화 음악과 해당 음악이 사용된 장면이 여럿 소개된다. 본 적도 없는 영화의 짧은 장면이, 마찬가지로 짧은 음악과 함께 소개될 뿐인데도 배우의 감정과 영화의 분위기가 생생히 느껴졌다. 엔리오의 음악이 화면 속 여러 요소와 만나 극적인 시너지를 내기 때문이다. 미처 영화 음악인지 몰랐던, 귀에 익숙한 곡도 꽤 많다. 엔리오의 작업이 얼마나 큰 문화적 파급력을 지녔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그의 음반은 전 세계에서 7,000만장, 한국에서는 200만 장 이상 팔렸다고 한다).
작업한 영화마다 자신의 인장을 새긴 엔리오. 엔리오는 이내 영화 음악계의 스타가 되었다. 보통 음악 감독이 영화를 먼저 보고 그에 맞는 음악을 작업하는 데 반해, 엔리오의 음악을 먼저 들은 몇몇 감독은 자신이 미처 알아보지 못한 요소를 그로부터 찾아내 이를 보완하는 연출을 하기도 했다. “영화 음악은 감독의 역량 바깥에 있다”, “곡 자체가 의미가 있어야 영화에 기여할 수 있다”라는 엔리오의 말에서 자기 일에 대한 그의 자부심과 프로 의식을 엿볼 수 있다. 늘 혁신의 전위이기를 멈추지 않은 엔리오. 그의 이런 면모가 ‘영화 음악에 관한 영화’를 가능케 한다. 때로는 관객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분야에서도, 누군가는 장인정신을 발휘해 영화에 기여하고 있고, 〈엔리오: 더 마에스트로〉가 입증하듯 이런 헌신은 그 자체로 하나의 드라마가 된다. 영화를 아끼는 동시대 관객이 이 위대한 장인보다 뒤늦게 태어나 그가 이뤄놓은 것들을 누리는 것은 분명 행운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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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맨틱 코미디에서의 '현실감'이란?
〈여름날 우리〉는 2018년 개봉해 호평을 받았던 〈너의 결혼식〉을 리메이크한 영화다. 고등학생 때 처음 만난 요우 용츠와 저우 샤오치가 서로 엇갈리며 사랑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여름날 우리〉 역시 잘 만든 로맨틱 코미디물이다. 원작과 리메이크작의 같고 다름을 비교하며 보는 재미도 있다.
〈너의 결혼식〉, 〈여름날 우리〉의 주인공들은 모두 사랑에 실패한다. 누구보다도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중하지만, 주변 상황과 내면의 혼란으로 해피엔딩에 다다르지 못한다. 〈너의 결혼식〉이 제목 그대로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첫사랑의 결혼식장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장면으로 끝나듯, 〈여름날 우리〉 역시 가을이 오면 과거가 될 수밖에 없는 여름의 비애를 주인공들의 서사와 연결 지어 첫사랑의 실패를 그린다.
사실, 사랑의 실패를 다루는 웰메이드 로맨스 영화는 이전부터 있었다. 해외 영화 중에서는 〈500일의 썸머〉, 〈라라랜드〉, 국내 영화로는 〈건축학개론〉 등을 꼽을 수 있다. 관객들이 이 영화들을 좋은 로맨스 영화로 꼽은 이유에는 공통점이 있다. 많은 사람이 앞의 영화가 사랑을 ‘현실감’ 있게 보여준다고 말한다. 운명적으로 만난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진 후, 위기를 겪다가, 끝내 행복하게 산다는 로맨스 영화의 공식을 거부하는 ‘리얼함’을 무기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는 것이다.
왜 실패한 사랑을 다룬 로맨스 영화를 향한 찬사에는 언제나 ‘현실적’이라는 말이 따라다닐까? 기존 로맨스 영화가 다루던 낭만적 사랑이 불가능해졌다는 감각이 대두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여성들이 젠더 ‘갈등’이라 표현되는 성별 간 권력 격차에 민감해졌다는 점이다. 여성들이 평등한 관계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남성 권력에 대해 더 많이 말하고 공론화될수록, 무턱대고 낭만적이기만 한 로맨스 영화의 각본은 현실성을 잃는다. 엉망인 사랑을 아름답게만 묘사하는 로맨스 영화는 '판타지 영화'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로맨스 영화가 사랑의 실패를 다루는 것은 여성들이 행복한 사랑이라는 기존 로맨스 영화의 공식이 거짓말임을 자각한 이후에 등장한 자구책이다. 이제 여성들은 현실을 미화하는 로맨스 영화에 더 이상 자신의 환상을 투사하지 않는다.
두 번째는 경제적 조건의 파탄으로 사랑 자체가 불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위에서 언급한 영화에는 경제적 결핍에 시달리는 남자와 경제활동을 시작한 여자의 간극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여성의 경제활동이 더 활발해질수록 남자는 더 의기소침해진다. 괜히 마음에 없는 못된 말을 하며 여자를 괴롭힌다. ‘능력’ 있는 다른 남자가 여자 주위에 어슬렁거릴 때면 이런 일은 더 잦아진다. 여자는 그런 남자에게 점점 지쳐가고, 결국 그를 떠난다. 남자는 자신이 얼마나 못나게 굴었는지를 깨닫지만, 여자는 이미 다른 남자와 사랑을 시작한 후다.
남자는 호소한다. 우리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함께했는지, 너를 향한 나의 마음이 얼마나 진실한 것인지를. 하지만 여자는 조금은 슬퍼 보이는 멋쩍은 웃음을 짓고 그를 거절한다. ‘찌질한 남자’와 ‘이해할 수 없는 여자/비밀을 품고 있는 여자’라는 구도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이해하지 못함’의 주체가 남자라는 게 중요하다. 경제력 파탄으로 사랑할 수 없게 된 청년 세대의 아픔이 여자에게 버림받은 남자의 혼란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로맨스 영화는 청년의 고통을 남자의 고통으로 만들었다.
어쨌든 핵심은 사랑의 실패가 ‘현실’이 되었다는 점이다. 남녀 주인공이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로맨스 영화는 이제 더 이상 ‘현실적’이지 않다. 새로운 로맨스 영화는 기존 장르물의 공백을 섬세한 감정으로 메꾼다. 정통 멜로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섬세한 감정 묘사가 로코물에도 나오는 건 이 때문이다. ‘현실적인’ 재현을 위해 로맨틱 코미디가 기존에 다루지 않았던 것들을 장르 내부로 가져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 감정들은 낭만적으로 채색된다. 이제 낭만적인 건 행복한 사랑의 결말이 아니라 사랑의 과정에서 겪는 감정이다. 사람들은 사랑의 성공에 행복해하는 대신, 실패했더라도 여전히 내 마음에 따뜻하게 남아 있는 무언가를 상기하며 위로받는다. 이것이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불가능해진' 사랑을 다루는 방식이다. 사랑에 실패했음에도, 너의 감정까지 실패한 것은 아니라는 메시지.
이런 류의 로맨스 영화는 애틋한 첫사랑이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 있음을 확인시켜준다는 점에서는 아릿한 달달함을 자아낸다. 하지만 사랑이 불가능해진 조건(젠더, 계급의 문제)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다는 점에선 문제적이다. 과도기에 있는 로맨틱 코미디가 앞으로 어떻게 자기 영역을 만들어 갈지는 아직 조금 더 두고 봐야 한다. 로맨틱 코미디물이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어떻게 비틀고 조정해 나갈지 궁금하다.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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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틱> 메인 예고편
비행기 추락 사고 이후, 북극에 조난된 ‘오버가드(매즈 미켈슨)’.
그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무전을 치고, 북극의 지형을 조사하고,
송어를 잡고, 죽은 동료의 무덤에 가서 인사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추락한 헬기 속 생존자를 발견한다.
심각한 부상으로 인해 이대로 구조를 기다릴 수는 없고,
자칫 이동하면 함께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
하지만 홀로 지내면서 잊고 있었던 생명의 온기.
그녀를 살리기 위해, 지도 한 장에 의지한 채 임시 기지를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 속 선택의 순간…
살리기 위해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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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왓챠 <스테이션 일레븐> 메인 예고편
세계가 멸망하면, 생존만 하면 되나요? 세계 멸망 20년 후, 여전히 아름다움을 찾아 떠도는 이들의 이야기가 찾아옵니다. 맥켄지 데이비스, 히메쉬 파텔 주연의 ⟨스테이션 일레븐⟩ 2월 23일 수요일, 왓챠 독점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