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05-06 12:53:06
착취하지 않는 단 한 사람
영화 <토리와 로키타> 리뷰
영화를 보기 전, 다르덴 감독이 한국 관객에게 남긴 메시지를 먼저 접하게 되었다. “<토리와 로키타>를 보는 한국 관객들이 한국에 도착하는 또 다른 ‘토리’와 ‘로키타’ 같은 이주 아동들의 친구가 되어주길 바랍니다.”라는 문장을 읽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나온 ‘특별 기여자’들과 그 아이들을 떠올렸다.
‘난민’이라는 단어는 그동안 건강한 담론보다는 혐오 표현으로 이어지기 일쑤였지만, 그때만큼은 그래도 여론이 갈린다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우리와 함께 일해 온 ‘특별 기여자’들인데 팽해서는 안 된다는, 한국인의 의리가 불안을 이겨낸 목소리가 있었다. 여론이 이 정도라면 그래도 다행이다, 생각하며 무사 귀환에 안심한 후로는 나도 크게 관심 갖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달 친구들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독서모임을 하다가 알게 되었다. 당시 특별 기여자 자녀들이 학교에 갈 때, 기존 학생들에게 전달할 선물을 하나씩 들려 보냈다고. 이것이야말로 아이히만의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모르는 무능’과 무엇이 다르냐며 분개했다. 차라리 옛날 반장 엄마들처럼 햄버거나 쫙 돌리는 게 낫지, 기존 학생들이 시혜를 베푼 것이 아닌데 마치 그런 것처럼 저자세로 들어가게 만드나? 아이들은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경계를 넘어설 텐데 어른들이 먼저 선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뒤늦게 들은 내가, 토리와 로키타 같은 이주 아동의 친구라 말할 수 있나. 지긋지긋한 내 안의 아이히만을 인지하며, 다소 무거운 감정을 안고 영화관으로 들어섰다. 토리와 로키타의 행복과 무운을 비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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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불안한 눈빛의 로키타에서 시작한다. 몇 마디 이야기가 오고 갔을 뿐인데, 관객은 금방 로키타의 거짓말을 눈치챌 수 있다. 로키타의 뒤를 따르는 카메라와 함께 가다 보면, 로키타의 상황은 점입가경이다.
토리와 로키타는 각자의 이유로 아프리카 어딘가를 떠나 온 아이들이다. 벨기에에 정착해서 함께 살고자 하지만, 진작에 체류증을 받은 토리와 달리 로키타의 서류 발급은 계속해서 지연된다. 두 사람은 남매임을 증명해서 체류증을 받고자 하지만, 삶은 녹록하지 않다.
두 사람은 식당에서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돈은 모이지 않는다. 잊어버릴 만하면 나타나서 입국 비용을 내놓으라고 하는 브로커들이 있고, 고용주 또한 여러 모로 아이들을 착취하며, 심지어 로키타는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끊임없이 돈을 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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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피자도 배달하고, 식당에서 노래도 한다. 프랑스어로 노래하고 이어 이탈리아어로 노래한다. 이국의 언어로, 서사를 부여하면서 불러야 하면 노래도 노동이 된다. 이들의 일은 점차 위험해진다. 위험한 밤의 거리에서, 마약 배달까지 하고 있다. 아직 어려도 야무진 토리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야무지게 챙겨 받을 줄 안다.
노동이 되어야 하는 노래와 대조적으로, 두 사람의 지친 밤을 위로하는 노래가 있다. 토리가 따라 부르는 로키타의 자장가. 실제 카메룬 언어로 된 자장가라는데, 내 귀에는 어쩐지 자꾸 익숙한 찬송가처럼 들렸다. “사랑의 주 사랑의 주 내 맘 속에 찾아오사 내 모든 죄 사하시고 내 상한 맘 고치소서”라는 한 구절처럼. 아무리 뒤져봐도 찬송가라는 말은 없던데. 그러나 진짜 찬송가였다고 해도 그 노래는 로키타를 구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브로커들이 로키타에게 만남을 요구하는 장소는 언제나 교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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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어린 어깨에 책임이 너무 많다. 스스로를 보호하기에도 어린데, 자기 세상을 지켜야 한다. 그 세상에서 유일하게 서로 힘이 되어주는 존재가 로키타에게는 토리, 토리에게는 로키타이다. 두 사람이 어떤 서사를 통해 여기까지 왔는지, 어떻게 이런 유대 관계를 쌓게 되었는지 영화에서 밝히지 않는다. 다만 유독 힘든 날 보고 싶은 사람도 서로이고, 학교에서 ‘아는 사람’ 그리기를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도 서로일 뿐이다. 겁먹고 숨을 헐떡일 때 약과 물을 건네주는 한 사람, 대신 문을 두드려 따져 물어주는 사람, 착취의 세상 속에서 착취하지 않는 단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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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깊은 우정에는 이유가 있다. 아이들은 피부로 감각하여 정확히 알고 있다. “우리는 환영 못 받잖아.” 로키타가 시시각각 처하는 상황은 분명 비극이지만, 세상이 로키타를 그전까지 대해온 방식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끌고 가고, 무슨 일이 생겨도 탈출구가 없는 건물에 들어가야 하고, ‘원한다 je veux’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 사람이라면 응당 가지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 로키타는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히 아는데도, 흥청망청 사는 어른보다도 훨씬 똑똑하게 삶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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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많은 장면에서 카메라는 아이들의 노동하는 등을 따라간다. <로제타> 때부터 일하는 누군가의 등을 다정하게 따르던 그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 자체로 조금은 안심이 된다. 그러나 알고 있다. 다르덴 형제가 만드는 영화의 감각에 안심할 수 없는 현실을 우리는 살고 있다는 걸. 영화 속에도 친절한 개인은 있었다. 기꺼이 제 자리에서 자기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는, 잘 곳 없을 때 오라고 주소를 주는 쉼터 선생님도. 그러나 개인의 친절로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실마리를 풀어야 하는 문제를 우리는 알고 있다.
다르덴 형제는 말했다. 영화를 보고 돌아가는 길, 토리와 로키타의 이야기에서 조금은 마음에 남은 것이 있길 바란다고, 그래서 주변과 이야기를 나눠 주길 바란다고.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 왜 다르덴 형제가 토리와 로키타의 친구가 되어 달라 말했는지 알 것 같다. 아이들이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 세상만큼은 아니었으면, 사라지지 않도록 아이들이 그 자리에만 있을 수 있도록 아주 작은 변화라도 이루어 갔으면.
그런 마음으로 잠을 자고 아침을 맞으니, 세상은 어린이날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아이들을 얼마나 환대하고 있을까. <토리와 로키타>가 던진 질문을 계속 입 안에서 굴려 본다. 담담하여 다정하며, 더 깊은 담론을 끌어내는 이 영화는, 아마 남은 오월 내내 '오월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이라는 해맑은 노래와 함께 잔상처럼 남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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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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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하루의 총합
전쟁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굉음이 터지고 피가 터지고 시체가 터지고 마음이 터지는, 뭔가 많은 것들이 팡팡 터지는 영화를 보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반대쪽이다. <덩케르크>도 "이것은 전쟁 영화가 아니다"라는 카피가 아니었으면 보지 않았을 테고, <1917>도 그다지 볼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취향이 비슷한 친구가 <1917>을 보고 너무 좋았다고 할 땐 좀 놀랐다. 자꾸 같이 보러 가자는데 거절할 수도 없고, 친구 얼굴 봐서 한 번 보러 갔다. 그리고... 같이 미쳤다. 용산 아이맥스에 출근 도장을 찍고 포토티켓을 뽑아대는 우리는 누가 봐도 과몰입 오타쿠였다. 아무리 정상인인 척 리뷰를 써보려고 해도 잘 안 된다. 그래서 또 <러브레터> 때처럼 과몰입 오타쿠답게 구구절절 써보려 한다. 스포일러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영화 전체를 서술하고 있으니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은 참고해 주시길.
영화 <1917>의 수식어는 항상 "원 컨티뉴어스 숏" 이야기다. 2시간짜리 원테이크처럼 보이게 촬영했다는, 물론 당연히 2시간을 원테이크로 찍은 건 아니고 그렇게 보이게끔 잘 연결한, 즉 "원 컨티뉴어스 숏"이라는 기법을 활용한 것이라는. 최신 기술을 집약한 영화라는.
어마어마하긴 하다. 그렇게 찍기 위해 모든 세트장을 직접 제작하고, 그 세트장 동선에 맞춰 대사 길이까지 세밀하게 조정했다고 한다. 실제로 6개월의 리허설 끝에 찍었다니 부분적으로 연극 같은 느낌마저 든다. 자본과 기술의 냄새가 물씬 나는 설명에 압도되어서인지, <1917> 이야기는 평론부터 리뷰까지 기술 이야기 일색이었다.
그러나 <1917>은 기술 이야기만 하고 떠나보내기엔 너무 아깝다. 과시하기 위해 기술을 사용한 영화가 아니라 시나리오가 탄탄한 영화다. 풀어가고 싶은 이야기에 가장 적합한 기법이라 그렇게 찍은 것뿐이다. 배우들의 세밀한 연기, 탁월한 연출, 감정 머리채를 잡는 음악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가 가진 장점 중 하나지 전부는 아니다. 이 모든 장점들을 모아 더없이 주제에 집중한 영화다.
영화는 노란 꽃과 흰 꽃이 섞여 산들거리는 들판에서 시작한다. 관 속의 시체 같은 자세로 누워있는 블레이크와, 나무에 적당히 기대 눈을 감은 스코필드. 블레이크를 부르며 누구 한 명 데려오라는 목소리를 듣고, 블레이크는 스코필드에게 손을 내민다.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른 채.
두 사람은 참호로 들어가 장군에게서 임무를 받는다. 적진이 후퇴했으며, 데번셔 제2연대가 후퇴한 적군을 총공격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항공사진을 보면 적군은 작전상 한 발 물러난 것뿐이라, 위기에 빠진 건 오히려 데번셔 제2연대라는 것. 적군이 통신망을 끊고 갔기 때문에 인편으로 공격 중지 명령을 전해야 한다는 것. 해당 연대의 1,600명 중에는 블레이크의 형도 있고, 블레이크는 지도를 잘 보기 때문에 선택되었다는 것. 그리고 얻어걸린 스코필드도 함께 간다는 것.
참호를 빠져나가 허허벌판을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 자체에 스코필드는 경악한다. 그도 그럴 것이 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이었다. 대량 살상 무기가 고도로 발달하면서 말 타고 창 찌르고 칼 휘두르던 전쟁은 종말을 맞았고, 공격을 피하기 위해 참호를 파는 것이 당시 전쟁의 기본 포맷이 되었다. 영화는 두 사람의 어깨와 등을 따라가면서 좁은 참호를 지나가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일인지 시작부터 보여주고, 짐짝처럼 참호에 몸을 기대어 죽음의 냄새를 맡는 병사들의 얼굴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시체가 그대로 썩어 지저분해진 진흙, 시체를 파먹고 자란 큰 쥐들을 보면 적군의 공격 못지않게 비위생적인 환경 또한 1차 세계대전 당시 병사들의 생존을 위협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도 그 참호 밖으로 빠져나가는 건 상상 못 할 일이었다. 아직 애티를 벗지 못한 블레이크에 비하면, 솜 전투에도 참전했다는 스코필드는 전쟁의 참상을 좀 더 겪어보고 그만큼 노련해진, 동시에 내상도 더 깊게 입은 병사로 보인다. "정말 적군이 후퇴했다면 보급품에 수류탄을 왜 줬겠냐"라고 꼼꼼히 따져보지만, 형이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씩씩거리고 있는 블레이크를 막을 수는 없다. 결국 참호를 벗어나기 전 그는 "Age before beauty," 장유유서라고 억지로 웃어 보이며 블레이크보다 앞서 미지의 위험에 발을 딛는다.
스코필드도 높은 직급은 아니지만, 무자비한 살육 현장이었다던 '솜 전투'를 경험했고, 거기서 훈장도 받았다. 목숨이 오가는 장면을 많이 보았고 또 겪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순간순간 구체적인 두려움과 싸우고 있고, 말을 아낀다. 아직 순진한 블레이크에 비해 그가 좀 딱딱해 보일 수 있지만, 그가 참 좋은 사람임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들이 있다. 이 장면도 그랬다.
두 사람은 아군의 참호와 적군의 참호 사이 무인지대를 지나간다. 질척한 진흙에 썩어가는 시체들만이 가득한 곳. 나무와 철조망이 기이한 형태로 뒤틀려 있는 공간. 시체가 마치 지형지물처럼 늘어져 있는 이상한 광경이다. 총검을 세우고 엄폐물을 찾으며 그들은 적진의 참호로 천천히 다가간다.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말 시체를 한 번 더 뒤돌아보는 표정을 봐도, 철조망에 쉽게 걸리거나 미끄러운 진흙을 올라갈 때 손 잡아달라고 이름 부르는 걸 봐도 블레이크는 전쟁터에 있기엔 아직 너무 어린 소년이다.
스코필드는 그런 블레이크를 알게 모르게 잘 챙긴다. 철조망을 잡아주다 손을 찔려도, 그 손을 썩어가는 시체에 푹 담그게 되어도 블레이크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블레이크가 앞만 보고 가면 그 뒤에서 총으로 엄호하고 있다. 두 배우의 섬세하고 탁월한 연기가 돋보이는 대목들이다.
정말 비어 있는, 그러나 적군이 떠난 지 오래되지는 않은 적진의 참호는 반파되어 있다. 땅굴로 들어서니 곰팡이 냄새 날 것 같은 병사 숙소가 보인다. 누군가 미처 챙기지 못한 흑백 가족사진 앞에 잠시 멈춰서는 스코필드와 침대에 앉아 방방 스프링을 튕겨보는 블레이크. 두 사람은 부비트랩을 발견한다.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처음부터 거슬렸던 커다란 쥐 때문에 목숨의 위기를 맞는다.
사실 둘이 출발했으니 하나는 죽거나 다치겠구나 싶긴 했다. 두 사람이 이 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는 단순한 플롯이면 분명 중간중간 위기를 맞고 그 위기를 해결하고 그러면서 더듬더듬 나아가는 이야기일 것이고, 그러는 동안 두 사람 모두가 무사하리라고는 기대하기 힘들다. 영화니까. 그럼 여기서 죽나, 하는데 블레이크의 발 빠른 대처로 스코필드는 목숨을 구하고, 첫 위기는 다행히 벗어난다.
전쟁터의 긴장감은 사람을 순식간에 옥죄었다 풀었다 한다. 사지를 벗어나고 블레이크의 농담으로 풀어지는 것 같았던 공기는 하늘을 가르는 정찰기 소리로 단숨에 다시 굳어진다. 블레이크는 때마침 나타난, 다 뭉턱뭉턱 베어졌지만 아직 꽃이 하늘거리고 있는 체리나무로 다시 분위기를 풀어본다. 5월이면 형과 함께 어머니의 과수원에서 체리를 딴다는, 아마도 가족에게 다정하고 싹싹한 둘째 아들일 그는 전장에 비현실적으로 나부끼는 꽃잎 사이를 거닐며 몇 마디 대사만으로 자신의 전사를 풍성하게 풀어놓는다.
영화가 사용한 기법 상, 그리고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가는 로드무비 느낌을 전쟁에 버무려놓은 배경 상, 게임 스테이지를 하나씩 넘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참호의 위기를 체리 꽃잎으로 마무리하고 꼭 '2단계, 버려진 농가' 같은 느낌으로 눈앞에 집 한 채가 나타난다. 젖소 한 마리와 우유 한 통이 있을 뿐 별스러울 건 없는 공간이었다.
퇴각하던 독일군은 협상국 군대의 식량 확보와 진로를 방해하기 위해 나무도 베고 젖소도 죽였는데, 한 마리가 비현실적으로 살아남아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 한 연대가 이런 젖소를 발견했고, 암소를 연대 상징으로 삼았다고 한다.) 스코필드는 어쩐지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 예감은 현실이 된다.
공중전에서 패한 적기가 추락하고, 몸에 불이 붙은 독일인 파일럿을 "편히 가게 해주"려던 스코필드와, 안 된다며 물을 가져오라고 하던 블레이크. 사제가 되는 걸 고민했던 만큼 자연스러운 반응일지 모르지만 전쟁은 나이브한 선의를 봐주지 않는다. 스코필드는 자신이 폭발에 쓰러졌을 때 블레이크가 그랬듯, 칼에 찔린 블레이크를 들어올려 보려 하나 이번에는 되지 않는다. 블레이크는 결국 눈을 감는다. 힘없이 떨군 그의 손 옆에 마지막 노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다.
아무나 한 사람 골라잡은, 처음부터 이 작전에 반대할 수 있었다면 반대했을 이는 그렇게 유일한 전령이 된다. 동시에 군사적인 사명뿐 아니라 친구의 유언을 건네받은 개인적인 사명까지 그의 어깨에 얹힌다.
블레이크의 시체를 움직여보려 할 때 아군이 나타난다. 여태까지 두 명에 몰입해 따라가고 있다 보니 아군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이건 전쟁이고, 블레이크와 스코필드뿐 아니라 어딘가에서 모두가 다 각자의 전투를 치르고 있을 것이다. 그 상대가 적군이든, 시간이든, 죽음이든, 부상이든, 적막이든.
스코필드의 사정을 들은 스미스 대위는 가는 길이니 태워주겠다며 스코필드를 사병 트럭에 태운다. 자조 섞인 농담을 주고받는 사병들과 어깨를 부딪혀 가며, 스코필드는 혼자서만 다른 곳을 멀거니 바라본다. 멀어져 가는 블레이크의 시체를, 죽음으로 넘어가는 그를 생각하며 전해야 할 편지를 틴케이스 안에 소중히 집어넣는다.
트럭을 타고 가는 길도 쉽지만은 않다. 독일군이 길을 막도록 베어놓은 나무를 치우고, 진흙탕에 빠진 차를 밀어가며 스코필드는 시간과 싸워야 하는 간절함을 드러낸다. 그를 이상히 여기며 묻는 사병들에게 사정을 설명하자 그들의 태도가 묘하게 바뀐다. 다들 말을 아끼지만, 실패할 확률이 너무 높은 작전과 무의미하게 터덜터덜 실려가는 그들의 현실은 곧 1차 세계대전 자체의 현실이다.
무너진 다리 때문에 다른 길로 에둘러갈 사병 트럭에서 내려, 스코필드는 조심스레 무너진 다리를 건넌다. 그 앞 버려진 저택에 있는 저격수와 맞붙게 되고, 명중 확인을 위해 들어간 곳에서 저격수와 대치하며 그도 죽음 코앞까지 다녀오게 된다. 영화가 잠시 암전되는데, 인도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면 아마도 여기서 인터미션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노골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끊어냈다. 다시 눈을 뜬 스코필드는 뒤통수에서 피를 흘리고 있고, 시계가 깨져 더 이상 시간을 알 수 없게 되었으며, 어느덧 세상은 어두워져 있다.
카메라는 죽은 저격수를 넘어 창문으로 쭉 내려가고, 음악은 서서히 고조되면서, 반쯤 무너진 마을로 스코필드가 천천히 들어가는 장면. 살아있는 적군을 찾아 끝까지 말살하려고 적기가 조명탄을 쏘며 날아다니고, 조명탄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한 번씩 낮처럼 밝아지는 광경, 적기의 움직임에 따라 건물 그림자가 유유히 자라나듯 펼쳐지는 광경은 너무나도 초현실적으로 보인다. 보이는 것과 음악이 어우러져 가슴을 쥐어잡게 하는, 놀라운 장면이다.
평화로웠던 시절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하게 만드는, 분수대와 커다란 교회가 있는 광장. (저 장면을 조명으로 만들었다니 놀랍다.) 역시 무사한 시절에 붙였을 서커스 공연 포스터. 그러나 구석에 피 묻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곳. 이 뒤틀리고 모순적인 공간에서, 그만큼이나 반대되는 상대들을 마주치게 된다. 얼굴도 나오지 않지만 금방이라도 닿을 듯 추격해 오던 독일군과, 그를 피해 들어가다가 만난 프랑스 여성과 아기.
이 영화에 나오는 단 두 명의 여성이자, 체리나무 장면 이후 처음으로 평온하게 숨 고르기를 하는 장면이다. 짤막한 프랑스어와 영어를 섞어 두 사람은 대화한다. 독일군이 아님을 설명하며 여성을 안심시키고, 여성은 스코필드의 뒤통수에서 피를 살짝 닦아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던 스코필드가 고개를 든 건 아기 울음소리가 났을 때였다.
그는 아기를 보고 가방에 있던 부식과, 이렇게 쓰일 줄 모르고 담아뒀던 우유까지 모두 꺼내준다. 조심스럽게 아기의 손을 어루만지고 시를 읊어주는 걸 보며, 아마도 그가 "집에 가는 게 더 괴롭다"라고 할 만큼 괴로워한 데에는 후방에 아이까지 두고 떠나온 이유가 있겠거니 느끼게 된다. 더불어 이 시는 무모해 보이지만 단단한 의지가 돋보이는, 블레이크와 스코필드 같은 시이기도 하다.
They went to sea in a Sieve, they did,
In a Sieve they went to sea:
In spite of all their friends could say,
On a winter’s morn, on a stormy day,
In a Sieve they went to sea!
그들은 바다로 갔네 체를 타고
체를 타고 그들은 바다로 갔네
모든 친구가 말려도
폭풍우 치는 한겨울 아침이었어도
체를 타고 그들은 바다로 갔네!
And when the Sieve turned round and round,
And every one cried, ‘You’ll all be drowned!’
They called aloud, ‘Our Sieve ain’t big,
But we don’t care a button! we don’t care a fig!
In a Sieve we’ll go to sea!’
체가 빙빙 돌고 돌아갈 때
모두가 "너희 다 익사할 거야!" 소리칠 때
그들은 외쳤네 "우리 체는 크지 않지만
신경 안 써! 하나도 신경 안 쓴다고!
체를 타고 우리는 바다로 갈 거야!"
Far and few, far and few,
Are the lands where the Jumblies live;
Their heads are green, and their hands are blue,
And they went to sea in a Sieve.
저 멀리 점점이
머리가 초록빛이고 손이 푸른빛인
점블리 사람들이 사는 땅으로
체를 타고 그들은 바다로 갔네(영화에서는 1연의 처음 5행과 마지막 5행만 읽는다. 가운데 5행은 읽지 않는다.)
때마침 시계탑 종이 울리고, 시간을 가늠한 스코필드는 단꿈에서 서둘러 일어난다.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르는, 이름을 모르는 아기를 거둬 기르고 있을 만큼 인간애 있고 단단한 프랑스 여인은 스코필드를 걱정하지만 그는 고마운 마음을 유감으로 전하고 단호하게 일어선다. 그리고 독일군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강에 뛰어든다.
힘이 빠진 나머지 본인이 읽(지 않)은 시 구절처럼 익사할 뻔했지만, 때마침 거짓말처럼 하얀 벚꽃 잎이 흩날리고 새 소리가 들린다. 그를 여기까지 오게 한 원동력의 큰 축인 블레이크를 떠올리며 그는 다시 한번 힘을 낸다. 아름다운 벚꽃잎과 퉁퉁 불어 터진 시체들까지 건너 그는 목숨을 건졌지만, 이미 사위는 밝아져 있다. 참아온 눈물을 터뜨리는 것도 잠시,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따라간다. 꿈인 듯 현실인 듯, 이승인 듯 저승인 듯한 모습으로 앉아 장송곡을 듣는다.
그들이 데번셔 2연대 후발대라는 사실을 알고 그는 마지막 전력을 다해 뛴다. 몸을 웅크린 이들, 정신을 놓고 울음을 터뜨린 이, 동료를 붙드는 이들... 다양한 군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지나치다가, 이렇게 가서는 시간 내 닿을 수 없음을 깨닫고 참호 위로 올라서 평야를 달린다. 포탄 소리에 어깨를 움찔거리면서도, 부딪혀 넘어지면서도, 병사들과 종횡을 달리해 그는 뛰어간다.
관객 입장에서는 그가 내게로 뛰어온다. 전쟁의 내상과 외상을 모두 가진 이가, 전쟁을 막기 위해 달린다. 모두가 무의미하고 적막하게 괴로워하며 앉아있다가 우르르 뛰어가야 하는 상황에 내몰릴 때, 그 흐름을 끊고 달리는 사람이 된다.
영화 내내 궁금해하게 만들었던, 이전의 대사들을 통해 어쩌면 답 없는 전쟁광일 수도 있겠다 싶었던 인물 매켄지 또한 이 무의미한 전쟁을 끝내고 싶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희망을 품었지만 희망은 위험한 것이라며 머리를 쓸어내리고, 전쟁을 끝내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라고 말한다. Last man standing. 그리고 그 말과 함께 스코필드는 고개를 든다.
자막에는 "마지막 단 한 사람까지 죽는 것"이라고 번역되었다. 매켄지의 캐릭터를 감안하면 맞는 번역이지만 사실은 중의적인 문장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이 전투를 끊어낸 이가 고개를 꼿꼿하게 들어 반듯하게 서는 순간. 전쟁을 끝내는 방법은 몰살도 있지만, 이건 아니라고 고개를 들고 일어서는 인간 그 자체도 있다.
전투를 막았다고 그의 사명을 마친 것은 아니다. 그는 블레이크의 형을 찾아 유품을 건넨다. 이제 다시는 두 형제가 함께 체리를 딸 수 없겠구나, 슬퍼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블레이크의 형은 인사를 나누며 스코필드의 이름을 묻는다. 윌리엄. Thank you, Will. 고맙다는 인사를 짧게 건넨다. Will은 의지의 이름이었다. 시작부터 형에게 갈 거라고, 내가 할 거라고 단단하게 말하던 블레이크의 의지가 스코필드의 이름에도 들어있었다.
모든 사명을 마친 그는 더 이상 노란 꽃이 없는 들판에 혼자 앉는다.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올 때마다 열어보던, 소중해진 것을 집어넣던 틴 케이스를 열어본다. Come back to us. 꼭 우리에게 돌아오라는 말과 함께 담긴 가족의 사진. 일상은 비일상이 되고, 비현실은 현실이 되고 만 전장에서 그는 잠시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눈을 감는다.
이 영화는 샘 멘데스 감독의 할아버지 알프레드 멘데스를 비롯한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일화에서 따와서 만들었다. 특정 실화를 모티프로 하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실화의 가닥가닥을 엮어 만든 것이다. 참호 속에서 담배를 피우고 부식을 먹고 개를 쓰다듬고 서로의 상처를 싸매는 사람들의 시간, 이름도 모르는 아이를 거둬 기르고 낯선 군인의 상처에서 피를 닦아주는 사람들의 시간으로.
이들은 생각보다도 많고, 다양한 곳에 있다. 심지어 인도계와 아프리카계 사람들이 곳곳에 보인다. 참호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사람 중엔 인도 남부 출신임이 틀림없어 보이는 사람이 있었고, 스코필드가 노래를 들으며 나무에 몸을 기댈 때 그 자리에는 흑인도 있었으며, 사병 트럭에는 터번을 쓴 시크교도 병사가 등장한다. 가볍게 억양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딱히 희화화하는 경향이 보이지 않는다. 2차 세계대전에 비해 철저하게 유럽 중심이었던 1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영화 속 이들의 존재는 놀랍다.
(실제로 1917년은 인도 남부에 있는 하이데라바드 토후국에서 영국군에 전투기를 선물한 해다. 토후국의 왕 니잠은 엄청난 부와 탄탄한 사회를 이룬 군주였다. 그는 1차 세계대전이 패권 다툼이라는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그 싸움에 가담하여 자신도 당당히 패권국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영화에 인도계나 아프리카계 사람들이 종종 보이는 것은, 실제로 그들이 참전했음을 고증하는 것임인 동시에 자본의 영향이라는 느낌도 받는다. 인도 최대 기업인 릴라이언스의 엔터테인먼트사가 이 영화 제작에 참여했으므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세상 곳곳에서 찾아와 뜻밖의 만남을 가진 이들이 실은 각각 고립되어 있다시피 한 것. 각자 자기의 죽음과 싸우고 있다는 것. 그게 전쟁의 무의미한 본질이다. 그러나 전쟁은 보통 큼직한 것들로만 기억된다. 솜 전투, 인천 상륙 작전, 한산도 대첩 같은 웅장한 이름들로. 수많은 전쟁 영화도 그런 순간들을 많이 담곤 했다. 일반인들의 미시사는 전쟁의 본질이 아니라 전쟁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 전쟁이 깨뜨린 일상의 대조점으로 주로 담기곤 했다.
그러나 전쟁 자체를 이루는 것은 거대한 전투와 군함, 장군보다 그냥 수많은 보통 사람들임을 이 영화는 담는다. 스코필드는 그중 한 사람이다. 참호 속 혹은 트럭 속의 다른 병사들은 블레이크와 스코필드 같은 사람들이 무수히 존재했으리라는 것을 보여주고, 시계가 깨져도 잔혹하게 흘러가던 스코필드의 하루는 그런 여상한 하루하루의 총합이 전쟁임을 알려준다. 그냥 보통 좋은 사람들의 얼굴로, 그들의 하루하루의 총합으로 전쟁은 이루어진다. 스코필드의 어떤 하루는 전쟁이라는 전체를 닮은 프랙탈이었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선이정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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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묘하지만 균형 잡힌 캐릭터, 크루엘라
삶을 살아가며 경쟁은 필수적이다. 어린아이일 때도 뭔가를 먹거나 얻기 위해 다른 친구들과 작은 경쟁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 그것이 가족이나 형제자매일지라도 그 안에서 경쟁이 벌어지는 순간이 있다. 청소년 시기가 되면 학교에서 여러 가지를 배우며 공부의 성적으로 경쟁을 한다. 내가 몇 번째이고 친구는 몇 번째인지 순위를 알게 되고 모든 사람이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앞으로의 진로에 꽤 많은 영향을 준다. 그렇게 유년기의 경쟁이 끝나고 성인이 되면 각자의 직업을 가지고 그 커리어를 발전시키기 위해 더 큰 경쟁의 시장으로 나가게 된다. 그런 상황을 개인이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상관없이 그런 경쟁 상황은 끊임없이 다가오고 또 도전하게 만든다.
그런 경쟁에서는 늘 라이벌을 만나기 마련이다. 좋은 경쟁 관계가 형성되면 상대방보다 앞서기 위해 계속 신경 쓰며 노력하게 된다. 일종의 공생관계처럼 서로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고, 반대로 완전한 경쟁관계가 되어 자신의 부족함을 없애려는 노력을 하며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기도 한다. 자신의 경쟁자들을 어떤 방식으로 대하고 처리해 나가는지는 한 사람의 성공과 밀접히 연관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경쟁자를 인정하고 좀 더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경쟁자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방법으로 성공을 얻는 사람도 있다. 배타적으로 사람을 택하는 사람들은 경쟁자뿐만 아니라 자신을 돕는 사람들도 쉽게 제거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성공에 방해되거나 작은 의견 차이가 있으면 바로 그 상대방을 제거해 버리며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독특한 기질을 가진 크루엘라의 이야기
영화 <크루엘라>는 주인공 크루엘라(엠마 스톤)의 유년기 삶을 보여주면서 성인이 되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해 경쟁상황으로 뛰어드는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다. 1996년에 개봉한 <101마리 달마시안>에 등장했던 악당 크루엘라를 재해석한 영화는 검은색과 하얀색 머리가 함께 자라고 있는 크루엘라라는 인물이 남다른 상황에서 성장해나가는 젊은 시절 이야기를 원작 영화와는 다른 시각으로 보여주고 있다. 크루엘라의 원래 이름은 에스텔라다. 엄마 캐서린(에밀리 비샴)과 보냈던 유년기를 보여주는 영화의 초반 20분은 에스텔라로서의 삶을 보냈던 크루엘라의 모습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엄마는 늘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생활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 말대로 에스텔라는 노력하지만 그가 원래 가지고 있는 기질은 숨길 수 없으며 학교생활을 하며 지속적으로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게 된다. 엄마와 그가 ‘크루엘라’라고 지칭하는 그 성격은 직설적이고 대범하고 또 지기 싫어하는 어찌 보면 엉뚱한 문제적 아이다. 그래서 남자아이들과 다투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똑 부러지게 말하지만 그로 인해 학교에서는 퇴학을 당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은 크루엘라의 지기 싫어하는 성향 때문이다. 크고 작은 놀림을 견디기 어려워하고 일단 한 번 다툼이 일어나면 꼭 상대방을 밟고 이겨야 하는 성향이다. 또한 호기심이 강해서 이런저런 일에 참견하고 참여하게 되는데, 영화 초반에 벌어지는 파티에 참석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사건은 어찌 보면 필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크루엘라는 일반적인 아이와는 완전히 차별화된다. 머리카락의 반은 검은색이고 나머지 반은 흰색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기이한 모습이겠지만, 딱 반반씩 나누어져 있는 머리는 영화 속에서 묘하게 균형 잡힌 것처럼 느껴진다. 학교에서 그는 그 자신의 머리와 자신의 성격을 일부러 애써 감추려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엄마를 잃고 아이가 다른 색깔로 머리를 염색하는 모습에서는 보이지 않는 시선에 의해 억압받아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길을 택해 그간 가지고 있던 균형을 잃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고아로 같이 살아가는 제스퍼(조엘 프라이)와 호레이스(폴 월터 하우저)는 크루엘라에게 유일하게 남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한 편으로는 바보 같아 보이지만 그들과 함께 지내며 크루엘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자유롭게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엄마의 빈자리를 이 두 명의 친구가 대체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제스퍼와 호레이스는 비록 모자라 보여도 그들이 가진 순수함은 크루엘라가 가지고 있는 두 개의 인격, 즉 에스텔라와 크루엘라의 성향을 균형 있게 삶에서 드러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크루엘라의 경쟁자로 등장하는 남작 부인(엠마 톰슨)은 감정이 전혀 없는 인물처럼 보인다. 유명한 디자이너인 그는 자신의 경쟁자가 등장하면 상대방을 완전히 밟아버려 시장에서 퇴출시켜 버린다. 그리고 그 남은 시장 내 명성과 부를 혼자 독식한다. 그렇게 자신의 명성을 쌓고 자신감을 만들어낸 그는 자신을 위해 일하는 고용인들을 마음껏 부리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생기면 바로 해고를 시켜 버린다. 심지어 사소하게라도 방해되는 사람을 완전히 처단해야 할 일이 생기면 그 일이 살인이라 할지라도 주저하지 않을 성향을 가졌다. 그가 가진 이런 특성과 그가 가진 과거의 비밀은 크루엘라가 그의 경쟁자 반열에 올라갈 수 있게 만드는 도화선을 만들어준다.
모두 뛰어난 재능과 남다른 성격을 가졌지만 남작부인과 차별화되는 크루엘라
영화 <크루엘라>는 크루엘라가 전면적으로 남작부인에게 다양한 형태의 옷과 이벤트로 대중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는 장면부터 두 사람의 대결을 본격적으로 보여준다. 마치 두 사람이 가진 머릿속의 패션 아이템들을 비교하는 런웨이가 어느 장소에서나 펼쳐지는 느낌이 드는 비교 장면들은 굉장히 매력적이고 신선하게 다가온다. 디즈니 영화답게 재해석된 이 영화에는 화려한 화면이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지만 그것보다 더 흥미로운 포인트는 닮은 듯한 두 주인공의 대결 장면이다. 남작 부인과 크루엘라는 모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조금은 괴팍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가진 유년기 시절의 기억은 다른데 특히 크루엘라가 만난 엄마라는 존재와 그가 알려주었던 삶의 팁은 이 두 사람의 삶과 방향성을 크게 차이 나게 만든다.
남작 부인에게는 가족이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없다. 그저 자기중심적으로만 사고하고 판단하는 그에게 다른 이들은 그저 성공을 위한 부속품 정도로 보인다. 친한 친구나 친지도 전혀 없어 보이는 그는 극단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고 관계를 만든다. 그리고는 가차 없이 필요 없는 사람을 내친다. 그것은 그를 가장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로 만들었고 오랜 시간 동안 그 자리를 유지하게 만들었다. 뒤늦게 등장한 크루엘라는 사실 남작 부인과 같은 성향을 가지려 하지만 그에겐 가족이라는 존재가 있다. 돌아가신 엄마로부터 받은 기억과 추억들, 그리고 유년기를 함께 했던 제스퍼와 호레이스는 크루엘라가 제2의 남작 부인이 되지 않도록 영향을 준다. 그래서 크루엘라는 괴팍하지만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즉, 남작 부인은 극단적으로 무너지기 쉬운 아슬아슬한 길을 자신만의 강력한 힘으로 지탱해 왔지만 자신의 힘이 느슨해지는 순간, 금방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크루엘라 역시 아슬아슬한 길을 가지만 그가 떨어질 순간순간에 그의 손을 잡아 떨어지지 않게 해 줄 주변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마치 크루엘라의 검은색, 흰색 머리처럼 그가 삶에서도 균형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들도 크루엘라의 관계나 행동에서 묘한 균형을 느끼게 만든다.
디즈니 영화답게 다른 의미, 다른 이미지의 공주 탄생을 보는 것과 같이 구성된 영화는 전형적인 악당이었던 인물을 완전히 새롭게 재해석하여 흥미로운 캐릭터로 탄생시켰다. 특히나 크루엘라를 연기한 엠마 스톤은 완벽하게 크루엘라와 맞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괴팍하지만 따뜻함도 가지고 있는 그는 큰 눈으로 경쟁상대를 제압하고 강렬한 이미지를 이용해 영화 전반을 압도한다. 특히나 크루엘라가 다양한 패션 센스를 뽐내는 영화 후반부는 그의 매력이 더욱 도드라진다. 또한 남작 부인을 연기한 엠마 톰슨의 연기도 훌륭하다. 성공했지만 괴팍한 패션 디자이너를 얄밉게 연기하고 있다. 그가 먹던 점심 그릇을 차장 밖으로 우아하게 던질 때나, 후식 디저트를 먹고 이쑤시개를 떨어뜨리는 모습 등 다양한 행동을 하는 장면을 통해 그 캐릭터의 오만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영화는 흑과 백이 대비되는 것처럼 묘한 균형을 보여준다. 남작 부인과 크루엘라, 크루엘라와 에스텔라의 대비는 궁극적으로 크루엘라의 발전을 이루는데 큰 영향을 주는데 한쪽으로 치우치기보다는 둘의 특성의 균형점을 찾아서 그 발전점을 향하게 된다. 그래서 영화 후반부의 크루엘라는 일그러진 괴팍한 인물이 아니라 어떤 적절한 균형점을 스스로 찾아내 자신의 길을 만들어낸 인물로 재탄생하게 된다. 크루엘라는 주변 사람을 챙기며 협력하면서도 자신이 잘하는 것을 매우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그렇게 사람들의 호응까지 얻는 그는 일약 스타로 발돋움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든 그 길은 남작부인이 갔던 길과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감독 크레이그 길레스피는 직전 연출작인 <아이, 토냐>(2018)에서 악녀로 취급받는 피겨스케이팅 선수 토냐 하딩(마고 로비)의 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다. 어떤 방법으로든 이기려고 노력하는 토냐의 모습에서 남작 부인의 모습이 보이니도 한다. 어쩌면 전형적인 악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온전히 자신의 성공만을 생각하는 인물이고 주변 관계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 캐릭터이기 때문에 감독이 추구하는 악녀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디즈니와 손을 잡은 감독은 꽤 매력적인 이야기를 매력적인 캐릭터와 함께 만들어냈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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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엘라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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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이 된 두 번의 도둑질
7★/10★
두 번의 도둑질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예술이 되었다. 영화 〈킴스 비디오〉 이야기다. 킴스 비디오는 1980년대 뉴욕 이스트빌리지에서 운영되었던 비디오 대여점의 이름이다. 한창일 때는 회원 수가 25만 명에 달했고, 7개의 지점이 있었으며, 그중 한 지점의 소장 비디오 숫자는 5만 5천 점이나 됐다. 5만 5천이라는 숫자는 여느 대여점이나 가지고 있던 비디오로 채워진 것이 아니다. 킴스 비디오의 컬렉션은 특별했다. 직원을 전 세계 영화제에 파견해 정식으로 유통되지 않는 영화를 수집해왔기 때문이다. 즉, 그 어떤 비디오 대여점도 킴스 비디오의 소장품을 갖고 있지 못했다. 때문에 킴스 비디오는 영화광들의 성지였다. 그리고 동시에 경찰의 표적이었다. 저작권 계약 없이 불법으로 비디오를 대여했기에 경찰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FBI가 찾아온 적도 있다. 여기까지가 첫 번째 도둑질에 관한 이야기다.
킴스 비디오는 어느 날 소리소문없이 문을 닫았다. 직원조차 폐업 사실을 몰랐다. 문제는 소장품이었다. 사장인 김용만 씨는 이들을 이탈리아의 살레미로 보냈다. 수년이 흘렀다. 킴스 비디오가 있던 곳을 지나는 뉴욕 시민 중 몇몇은 그 자리에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킴스 비디오〉의 두 감독은 결심한다. 킴스 비디오의 소장품이 현재 어떻게 보관되고 있는지, 그리고 김용만 씨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추적하기로. 여기서부터 두 번째 도둑질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김용만 씨는 살레미를 예술 도시로 조성하겠다는 제안을 듣고 소장품을 이탈리아로 보냈다. 그러나 시장이 바뀌고 마피아가 깊숙이 연루된 복잡한 지역 정치 상황 속에서 처음의 사업 계획은 뒷전으로 밀렸다. 수만 점의 비디오는 열악한 환경에 그대로 방치됐다. 이에 두 감독은 두 번째 도둑질을 계획한다. 엉망으로 보관된 소장품을 다시 뉴욕으로 가져올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일부 소장품을 미국으로 반출한 이들은 김용만 씨를 찾아 자신들의 계획을 알리고, 결과적으로는 살레미 당국 역시 여기에 동참하기로 하면서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김용만 씨에게 자신들이 한 일을 설명하며 설렘과 두려움, 긴장이 가득한 목소리로 카메라 뒤에서 헐떡대는 감독의 목소리가 인상적이다. ‘비디오/영화가 원해서 이 일을 벌였다’라는 감독의 변명에는 진정성이 있다. 심지어 두 감독이 비디오를 빼돌리는 과정마저 영화적이다. 두 감독은 영화적 환영에 사로잡혀, 그러니까 ‘예술’을 근거로 두 번째 도둑질을 벌였다.
이처럼 〈킴스 비디오〉에서 도둑질과 예술의 경계는 흐려지고 포개진다. 김용만 씨와 두 감독은 ‘모든 창작은 이전 창작물에 빚지고 있다’는 일반적인 수준에서가 아닌, 실제 범죄를 통해 예술을 구축했다. 〈킴스 비디오〉의 잘못을 고발하겠다는 게 아니다. 결국 중요한 건 예술과 법이 서로 다른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술과 법에는 각각의 논리와 체계가 있다. 그리고 이 둘은 종종 충돌한다. 〈킴스 비디오〉가 보여주듯, 때때로 우리는 이 충돌에서 슬쩍 예술의 손을 들어줘야만 한다. 예술은 법의 세계를 담아낼 수 있지만, 법은 예술의 세계를 담아내지 못한다.
영화는 예술에 관한 또 다른 질문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수많은 영화를 스트리밍으로 감상할 수 있는 시대에, 왜 두 감독은 킴스 비디오의 컬렉션을 다시 뉴욕으로 가져와 그것에 공적 가치를 부여하려는 것일까? 소장품의 가치가 단지 희소성에만 있을까? 김용만 씨는 살레미에서 자신의 컬렉션이 방치된 상황을 접하고는 “슬프지만 그들은 자신이 뭘 가졌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이는 두 감독 역시 공유하는 생각이다. 〈킴스 비디오〉가 던지는 질문은 여기에 있다. 무엇이 예술인가, 예술은 무엇을 해왔고 앞으로 해나갈 것인가, 우리가 지키고 보존해야 하는 예술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다양할 것이다. 누군가는 그들의 열정에 박수를 보내며 그들이 옹호하고자 하는 것에 큰 가치를 부여하겠지만, 누군가는 스트리밍의 시대에 그런 소장품은 보관소 자리를 그럴듯하게 차지하는 것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질 수 없다고 단정할 것이다. 어찌 됐든 영화의 경계와 정의가 근본적으로 재구성되는 시대에, 〈킴스 비디오〉는 영화와 예술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신의 답을 내놨다. 그것도 꽤 매력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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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적 사랑의 풍경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멜로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들은 대개 진득한 사랑 이야기를 기대하기 마련이다. 〈타이타닉〉의 잭과 로즈, 〈이터널 선샤인〉의 조엘과 클레멘타인,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의 철수와 수진, (멜로 영화는 아니지만 터무니없을 정도로 낭만적이어서 매력적인) 〈베이비 드라이버〉의 베이비와 데보라 등등. ‘운명’으로 엮인 두 개인이 여러 역경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랑을 쟁취해내는 이야기 말이다. 이들 영화는 현대인들이 사랑을 통해 갈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대변한다. 서로에게서 최후의 위안을 얻는 두 개인의 관계에는 사랑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지친 현대인들의 욕망이 깃들어 있다. 영화적 재미의 측면에서도 낭만적‧운명적 사랑이 더 매력적이다. 어딘가 심심한 사랑은 각본가가 이야기를 전개하기가 어렵고, 드라마틱한 구석이 없는 멜로 영화는 관객에게 어딘가 찜찜한 구석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멜로 영화가 그리는 사랑과 현실의 사랑이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저 영화의 소재가 되지 않았을 뿐, 현실 속 사랑의 빛깔은 영화보다 훨씬 더 다채롭다. 영화 〈파리, 13구〉는 그동안 영화가 담아내지 않은/못한 현대적 사랑의 풍경을 그린다. 중심 없이 부유하여 혼란스럽기에 사랑이라 부르기는 뭐하지만, 그렇다고 사랑이 아닌 것도 아닌 그런 두루뭉술한 감정의 모습을 띠는 사랑 말이다.
영화가 주목하는 현대적 사랑의 풍경은 청년들이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못하는 시대 조류와 관련이 있다. 그 이유에 관한 자세한 분석은 차고 넘치니 생략하자. 핵심은 불안이다.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사회적 존재로 생존하기 위해, 삶에서 의미를 길어내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동안 사랑이 사치가 되었다는 것이다. 경제적 조건이 가장 심층에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 불안은 정신적 공황으로 이어지고 그럴수록 사랑은 점차 멀어진다. 영화의 네 주인공 에밀리, 카미유, 노라, 앰버도 마찬가지다. 접촉하지만 깊이 있는 관계를 형성하지는 않고, 미련은 있지만 사랑이라 부르기는 머뭇거리며, 그마저도 복잡하게 뒤엉키는 감정들. 〈파리, 13구〉가 ‘낭만의 도시’라 불리는 파리를 흑백의 질감으로 담아냄으로써 전달하고자 하는 건 바로 이 혼란스러운 감정의 궤적이다.
아시아계 여성인 에밀리는 프랑스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대학을 졸업했지만 콜센터에 다닌다. 콜센터에서 일하기로 결정하자 오히려 부모님이 좋아했다는 그녀의 말은 유럽에 거주하는 아시아계 여성이 마주한 현실을 단적으로 포착하여 전달한다. 그러나 자그마한 반전이 있다. 에밀리는 알츠하이머로 요양원에 있는 할머니 집에서 생활한다. 게다가 그녀의 언니는 의사로 일한다. 즉, 에밀리가 가난 때문에 콜센터에서 일하는 게 아니란 소리다. 그녀는 어떤 공허, 외로움의 상태에 있다. 어쩌면 콜센터도 이 감정을 달래기 위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콜센터는 '대화'가 가능한 공간이니 말이다. 이는 에밀리가 룸메이트를 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적극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모색하지는 않지만 혼자 있고 싶지는 않은 상태. 아마도 파리의 에밀리뿐 아니라 전 세계 곳곳의 수많은 청년의 모습이 이와 같을 것이다.
룸메가 되고 싶다고 에밀리를 찾아온 사람은 카미유라는 이름의 남자다. 에밀리는 남자와는 룸메이트가 될 수 없다며 거절하지만, 카미유의 사정을 듣고는 그를 룸메로 받아들인다. 사실 카미유가 여자인 줄 알았다는 에밀리의 말도 의심쩍은 구석이 있다. 이왕 친밀성을 나눌 사람을 찾는다면 육체적 친밀성까지 나눌 수 있는 남자가 더 적합할 수도 있다. 그녀가 적극적으로 카미유를 욕망한다는 점도 정말 에밀리가 카미유의 성별을 몰랐는지를 의심케 한다. 어쨌든 둘은 동거를 시작하고 종종 섹스를 하며 조금씩 관계를 맺어간다.
그러던 중 화면이 바뀐다. 새로운 주인공은 노라다. 늦은 나이에 대학에 들어간 그녀는 공부를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난처한 상황에 처한다. 그녀를 인터넷 성인방송 진행자로 착각한 사람들이 이를 악용해 엉뚱한 소문을 퍼뜨렸기 때문이다. 결국 노라는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학교를 그만둔다. 에밀리의 공허함이 그러하듯, 노라의 경험 역시 ‘보편적’인 데가 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여성이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심지어 자신이 피해자인 섹스 스캔들로 조직을 떠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밀리에게 그러했듯, 노라에게도 반전이 있다. 노라는 호기심과 분노, 체념이 뒤섞인 상태에서 자신의 닮은꼴이라는 인터넷 성인방송 진행자 앰버의 방송을 시청한다. 그러고는 홀린 듯 돈을 내고 일대일 영상통화를 시작한다. 앰버는 동성 고객을 자주 만나봤다는 듯 원하는 것을 말해달라며 능숙하게 노라를 대한다. 그러나 노라가 고객으로 자신을 찾은 것이 아님을 알고는 조금씩 대화를 이어가며 에밀리‧카미유처럼 관계를 쌓아 나간다.
따로따로 진행되던 두 이야기가 만나는 건 파리의 한 부동산에서다. 학교를 나온 노라는 부동산에서 일을 시작하는데, 그곳은 박사 준비 중 돈을 벌기 위해 친구의 부동산을 대신 맡아 운영하는 카미유가 일하는 곳이었다. 에밀리와 몸을 섞으면서도 마음을 주지는 않았던 카미유는 노라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녀에게 다가간다. 노라 역시 카미유에게 끌린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장벽이 있다. 노라는 카미유와 만날 때마다 분위기에 맞춰 억지로 자신의 몸과 감정을 연출한다. 앰버와 대화를 나누며 진정한 위안을 얻기 시작한 그녀에게, 카미유와의 인위적 만남은 점점 매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어느새 카미유를 사랑하게 된 에밀리, 에밀리와는 쾌락을 나누고 싶을 뿐 마음은 노라에게 가 있는 카미유, 그런 카미유에게서 답답함을 느끼는 노라,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가까워진 노라와 앰버. 이것이 세 명의 여성과 한 명의 남성이 맺은 관계의 지형도다. 저게 사랑인가 싶을 정도로 가볍지만 무시할 만한 무게는 아닌 감정, 인터넷으로 만난 관계는 진지할 수 없다는 통념을 조금씩 벗겨내는 감정, 희미한 호감이 있지만 적극적 구애로 전환하기는 애매한 감정. 이것이 바로 〈파리, 13구〉가 포착한 현대적 사랑의 풍경이다. 이 영화를 해피엔딩을 곁들인 로맨틱 코미디로 소개한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인터뷰*도 인상적이다. 그는 자칫 가볍고 무의미해 보이는 청춘의 감정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그 안에도 행복의 가능성이 있음을 절제되었으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영화에는 넘치도록 강렬한 여성‧퀴어 캐릭터를 창조해온 셀린 시아마 감독이 각본에 참여한 흔적도 잘 묻어난다. 청년이 사랑하는 방식이 궁금한 사람 혹은 내 경험이 사랑이 맞는지 헷갈리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에서 날카로운 통찰이 전하는 잔잔한 위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다시 한번, 파리는 낭만의 도시가 되었다.
*http://www.segye.com/newsView/20220428514629?OutUrl=naver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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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진 필름에는 무엇이 담기는가
사라진 필름에는 무엇이 담기는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셔커스 Shirkers>
우리는 흘러가는 순간을 붙잡기 위해 노력한다. 동영상, 사진, 그림, 글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순간이 담겨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록 이상의 가치가 생긴다. 우리가 붙잡으려 하는 것은 비단 당시의 풍경, 소리, 감정 같은 것뿐만이 아니다. 그 순간의 '나'와 '나의 에너지'다.
창작자는 자신의 에너지를 유형의 형태에 담아내는 전문가다. 모든 창작물에는 창작자의 영혼이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 창작물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셔커스 Shirkers>
싱가포르에 살고 있는 18살의 '샌디 탄'은 영화에 엄청난 열정을 가지고 있다. 샌디는 미국에서 온 '조지 카도나'라는 묘한 카리스마를 가진 남자의 영화 제작 수업을 듣게 된다. 재스민과 소피 그리고 조지는 각별한 사이가 된다. 샌디와 친구들은 영국과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조지는 싱가포르에 남는다. 조지의 제안으로 샌디는 그와 단둘이 미국 로드 트립을 다녀오게 된다. 그 후 싱가포르의 로드 무비를 찍기로 결심하고 대본을 쓴다. 조지가 감독을 맡고 재스민과 소피가 주요 스태프가 되어 영화 <셔커스>이 제작이 진행된다. 촬영이 모두 끝난 뒤 조지는 영화 <셔커스>의 필름을 가지고 종적을 감춘다. 25년 후 조지의 사망 소식을 들은 샌디는 잃어버렸던 필름을 되찾게 된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뒤로 가야 했다”
소꿉친구인 샌디 탄과 재스민 응은 세상에 저항하는 반골 기질이 다분한 학생들이었다. 당시 싱가포르의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들의 자유분방함과 열정은 더더욱 빛났다. 그리고 이 열정은 조지 카도나로 인해 더욱 커진다.
'조지 카도나'라는 사람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비밀스럽고 묘한 구석이 있다. 그에게는 사람들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 그 매력은 스토리텔링을 통해 발산됐고, 이 이야기는 젊은 창작자들의 꿈을 부추겼다. 편지나 메일이 아닌 본인의 목소리가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를 보내는 것도 자신의 힘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목소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조지의 제자들은 그를 좋아했고 그에게 끌렸다.
조지는 다른 사람을 이용해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자신을 위해 일하게 할 수 있었다. 조지는 꿈꾸는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처럼 만든 뒤 성취가 가까워져 오면 방해했다. 조지의 제자이자 피해자 중 한 명은 스티브는 '조지가 영적 지도자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라고 말한다.
스스로 신화의 주인공이 되고자 했던 남자의 민낯은 열등감과 허풍으로 똘똘 뭉친 도둑이었다. 꿈과 영혼이 담긴 물리적인 뭔가를 취해 종적을 감추는 악랄한 도둑 말이다. 조지는 자신이 되고자 했던 인물상에 닿지 못했다. 존경받고, 천재적인 인물이 되고 싶은 욕망은 자신보다 빛나는 젊은이들의 꿈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우린 다시 만나야 했다”
샌디는 2011년 조지가 죽고 25년 만에 <셔커스>의 필름을 되찾게 된다. 70통의 필름에서 사운드가 전부 사라진 채 무성영화가 되어 돌아왔다. 25년 전에 사라진 <셔커스>는 싱가포르의 타임캡슐과 같았다. 소리는 없지만 25년 전의 풍경, 사라진 건물과 거리 그리고 사람들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샌디가 쓴 영화 <셔커스>의 주인공 S는 16살의 살인자다. S는 다른 세상으로 데려갈 사람을 구한다. 죽일 만큼 좋아하는 사람으로. 샌디의 세계관에는 행동하는 자와 흔드는 자 그리고 도망자인 셔커스가 있다. <셔커스>를 만드는 동안 샌디는 열정으로 앞만 보고 내달렸다. 현장에서 대부분의 일을 책임졌던 소피와 재스민은 조지를 완전히 믿을 수 없었지만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 <셔커스>의 세계관은 현실 세계에서 그들이 겪은 일로 확장된다. 행동하는 자 샌디, 흔드는 자 소피와 재스민, 그리고 도망자 셔커스인 조지. 보기에 따라 조지는 샌디의 세계관을 완성시켜 준 인물이기도 하다.
주인공 S의 카메라에는 필름이 들어 있지 않다. S는 카메라를 통해 보고, 셔터를 누르면 마음으로 잡을 수 있다고 말한다. 조지가 대본에 없는 장면을 필름이 없는 카메라로 열심히 찍었던 상황을 생각하며 샌디는 S의 대사를 떠올린다. 우리의 기억에 남는 것은 필름이 아닌 행동이다. 조지는 S의 대사를 그대로 실현해 보였다.
조지와 <셔커스>는 함께 사라졌다. 삶의 거대한 부분을 잃어버렸다는 감각은 샌디와 친구들을 감쌌다. 하지만 <셔커스>는 각자의 머리와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있다. 지금 다시 샌디가 카메라를 들어 완성해 낸 동명의 다큐멘터리인 <셔커스>는 이 오래된 프로젝트의 마침표다. 어떻게든 찍어야 했던 이 마침표는 사라진 <셔커스>를 기리며 동시에 새로운 <셔커스>를 완성해냈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코두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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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과 1로 이뤄진 디지털 세상이 이렇게 귀여웠던가?
전작을 보지 않아서 이해를 할 수 있을까 조금 걱정스러웠던 영화 <주먹왕 랄프2: 인터넷 속으로>. 하지만 그런 우려는 필요 없었다. 캐릭터만 가져왔을 뿐 내용은 완전히 다른 것이어서 충분히 이해하고 감동을 받았던 작품이었다.
영화 <주먹왕 랄프2: 인터넷 속으로> 시놉시스
오락실 게임 세상에 이어 이번엔 인터넷 세상이 발칵 뒤집힌다?! 각종 사고를 치며 게임 속 세상을 뒤집어 놨던 절친 주먹왕 ‘랄프’와 ‘바넬로피’는 버려질 위기에 처한 오락기 부품을 구하기 위해 와이파이를 타고 인터넷 세상에 접속한다.
얼떨결에 올린 동영상으로 순식간에 핵인싸에 등극한 ‘랄프’와 룰도 트랙도 없는 스릴만점 슬로터 레이스 게임에 참여하게 된 ‘바넬로피’. 지금껏 경험한 적 없는 엄청난 스케일과 새로운 재미에 흠뻑 빠진 ‘랄프’와 ‘바넬로피’는 랜섬웨어급 사고로 인터넷 세상을 혼란에 빠뜨린다. 과연, 이들은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주먹왕 랄프2 : 인터넷 속으로>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디지털 세상을 아날로그로 표현하다
오락실 게임방의 캐릭터들이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캐릭터로 표현된 영화 <주먹왕 랄프2: 인터넷 속으로>. 그래서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0과 1로만 이뤄진 디지털 세상을 나의 분신들이 돌아다니는 설정으로 구현한 것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네이버나 구글에 검색을 할 때 성가셨던 자동완성 검색기능을 리셉션에 있는 안내원이 안내를 해주는 것처럼 묘사를 하다니,,, 기발했다. 그런 상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 지금 이 리뷰를 쓰는 와중에도 컴퓨터 속 나의 분신이 꼭 영화 <주먹왕 랄프2: 인터넷 속으로>에 나오는 것처럼 행동을 할 것만 같아 귀엽게 느껴진다. 그래서 아무리 내가 디지털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아날로그적 시스템에 가장 최적화 되어 있고 그 기능에 굉장한 향수를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돈많은 우리의 디즈니
트레일러와 티저가 올라왔을 때부터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포털사이트 이름들이 아주 대놓고 등장한다는 것이다. 구글, 이베이, 유튜브를 보면서 랄프가 구글을 고글 파는데냐고 물어보는데 간접광고 아주,,, 아름다웠다. 현실에서 접하던 인터넷 사이트가 그대로 등장을 하나보니 랄프와 바넬로피가 훼방놓고 다니는 인터넷 세상이 내가 이용하는 세상처럼 더 사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싶었다. 그리고 요새 트렌드인 인플루언서가 랄프를 통해 잘 드러나서 애니메이션이지만 현실 반영이 참 잘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그런데 랄프, 돈을 너무 쉽게 버는 게 아닌가,,,, 얼마나 그 시장이 레드오션인데,,, SNS 가지고 돈을 벌려면 시간과 돈, 노력을 얼마나 퍼부어야 하는데!! 하면서 지난 날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오르며 질투가 나기도 했다. 랄프가 귀엽다가 듬직했다가 질투가 나가다 아주 감정이 복합적이었다.
우정에 대한 집착 = 랄프 바이러스
영화 <주먹왕 랄프2: 인터넷 속으로>의 배경은 인터넷 세상이지만 주제는 아름다운 우정이다. 참 디즈니스러운 주제다. 뻔한 내용이지만 사람을 울리는 디즈니는 참 매력적인 것 같다. 겨울왕국 이후로 개봉한 디즈니 작품들을 보면서 울지 않았던 작품이 없었던 것 같다. 바넬로피를 집착적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랄프가 약간 바이러스처럼 복제되어서 랜섬웨어처럼 인터넷에 엄청 빠르게 퍼져나간다. 그래서 바넬로피가 보면 칭구~~~~? 이러면서 쫓아다닌다. 컴퓨터 속에 있는 바이러스들이 저러고 돌아다닐 것 같아서 귀여운데 무서웠다. 심지어 내 노트북이 저런 친구를 두질 않길 바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 였다. 랄프가 스스로에게, 자신의 분신인 바이러스 랄프에게 ‘네가 하는 행동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야’라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며 떨어져 있어도 행복할 수 있고, 바넬로피의 꿈을 응원하는 모습에 기특하면서도 슬픈 감정이 들었다.
영화 <주먹왕 랄프2: 인터넷 속으로>는 인터넷 세상을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풀어내면서 그 속에 우정도 함께 그려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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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야와 마녀> 메인 예고편
마녀지망생 ‘아야’의 신비롭고 미스터리한 모험이 시작된다!
‘동료 마녀 12명을 완전히 따돌리면 아이를 찾으러 오겠다’는 수수께끼 같은 편지와 함께 성 모어발트의 집에 맡겨진 아야.
10살이 된 어느 날, 아야는 갑자기 찾아온 마법사 벨라와 맨드레이크를 따라 미스터리한 저택에 발을 들이게 된다.
순간이동할 수 있는 문부터 비밀의 방까지 신비로움으로 가득 찬 그곳에서의 생활이 시작되고,
아야는 벨라를 돕는 조건으로 마법을 배우기로 한다.
하지만 마법은 알려주지 않고 잔심부름만 시키는 마녀 벨라.
벨라를 골탕 먹이기 위한 마녀지망생 아야와
말하는 고양이 토마스의 아주 특별한 주문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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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그레이 맨> 공식 예고편
라이언 고슬링이 그레이 맨으로, 크리스 에반스가 사이코패스 기질의 적수로 출연하는 <그레이 맨> 넷플릭스 제작의 스릴러 영화로 앤서니 루소와 조루소가 연출을 맡았다. 7월 22일, 넷플릭스에서 전 세계 공개 예정. 그 외에도 아나 데 아르마스, 레게장 페이지, 다누시, 바그네르 모라, 알프리 우다드가 출연한다. 마크 그리니의 소설 <그레이맨>을 원작으로 하며, 조 루소와 크리스토퍼 마커스, 스티븐 맥필리가 각본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