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05-06 12:53:06
착취하지 않는 단 한 사람
영화 <토리와 로키타> 리뷰
영화를 보기 전, 다르덴 감독이 한국 관객에게 남긴 메시지를 먼저 접하게 되었다. “<토리와 로키타>를 보는 한국 관객들이 한국에 도착하는 또 다른 ‘토리’와 ‘로키타’ 같은 이주 아동들의 친구가 되어주길 바랍니다.”라는 문장을 읽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나온 ‘특별 기여자’들과 그 아이들을 떠올렸다.
‘난민’이라는 단어는 그동안 건강한 담론보다는 혐오 표현으로 이어지기 일쑤였지만, 그때만큼은 그래도 여론이 갈린다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우리와 함께 일해 온 ‘특별 기여자’들인데 팽해서는 안 된다는, 한국인의 의리가 불안을 이겨낸 목소리가 있었다. 여론이 이 정도라면 그래도 다행이다, 생각하며 무사 귀환에 안심한 후로는 나도 크게 관심 갖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달 친구들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독서모임을 하다가 알게 되었다. 당시 특별 기여자 자녀들이 학교에 갈 때, 기존 학생들에게 전달할 선물을 하나씩 들려 보냈다고. 이것이야말로 아이히만의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모르는 무능’과 무엇이 다르냐며 분개했다. 차라리 옛날 반장 엄마들처럼 햄버거나 쫙 돌리는 게 낫지, 기존 학생들이 시혜를 베푼 것이 아닌데 마치 그런 것처럼 저자세로 들어가게 만드나? 아이들은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경계를 넘어설 텐데 어른들이 먼저 선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뒤늦게 들은 내가, 토리와 로키타 같은 이주 아동의 친구라 말할 수 있나. 지긋지긋한 내 안의 아이히만을 인지하며, 다소 무거운 감정을 안고 영화관으로 들어섰다. 토리와 로키타의 행복과 무운을 비는 마음으로.

영화는 불안한 눈빛의 로키타에서 시작한다. 몇 마디 이야기가 오고 갔을 뿐인데, 관객은 금방 로키타의 거짓말을 눈치챌 수 있다. 로키타의 뒤를 따르는 카메라와 함께 가다 보면, 로키타의 상황은 점입가경이다.
토리와 로키타는 각자의 이유로 아프리카 어딘가를 떠나 온 아이들이다. 벨기에에 정착해서 함께 살고자 하지만, 진작에 체류증을 받은 토리와 달리 로키타의 서류 발급은 계속해서 지연된다. 두 사람은 남매임을 증명해서 체류증을 받고자 하지만, 삶은 녹록하지 않다.
두 사람은 식당에서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돈은 모이지 않는다. 잊어버릴 만하면 나타나서 입국 비용을 내놓으라고 하는 브로커들이 있고, 고용주 또한 여러 모로 아이들을 착취하며, 심지어 로키타는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끊임없이 돈을 보내야 한다.

아이들은 피자도 배달하고, 식당에서 노래도 한다. 프랑스어로 노래하고 이어 이탈리아어로 노래한다. 이국의 언어로, 서사를 부여하면서 불러야 하면 노래도 노동이 된다. 이들의 일은 점차 위험해진다. 위험한 밤의 거리에서, 마약 배달까지 하고 있다. 아직 어려도 야무진 토리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야무지게 챙겨 받을 줄 안다.
노동이 되어야 하는 노래와 대조적으로, 두 사람의 지친 밤을 위로하는 노래가 있다. 토리가 따라 부르는 로키타의 자장가. 실제 카메룬 언어로 된 자장가라는데, 내 귀에는 어쩐지 자꾸 익숙한 찬송가처럼 들렸다. “사랑의 주 사랑의 주 내 맘 속에 찾아오사 내 모든 죄 사하시고 내 상한 맘 고치소서”라는 한 구절처럼. 아무리 뒤져봐도 찬송가라는 말은 없던데. 그러나 진짜 찬송가였다고 해도 그 노래는 로키타를 구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브로커들이 로키타에게 만남을 요구하는 장소는 언제나 교회다.

아직 어린 어깨에 책임이 너무 많다. 스스로를 보호하기에도 어린데, 자기 세상을 지켜야 한다. 그 세상에서 유일하게 서로 힘이 되어주는 존재가 로키타에게는 토리, 토리에게는 로키타이다. 두 사람이 어떤 서사를 통해 여기까지 왔는지, 어떻게 이런 유대 관계를 쌓게 되었는지 영화에서 밝히지 않는다. 다만 유독 힘든 날 보고 싶은 사람도 서로이고, 학교에서 ‘아는 사람’ 그리기를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도 서로일 뿐이다. 겁먹고 숨을 헐떡일 때 약과 물을 건네주는 한 사람, 대신 문을 두드려 따져 물어주는 사람, 착취의 세상 속에서 착취하지 않는 단 한 사람이다.

아이들의 깊은 우정에는 이유가 있다. 아이들은 피부로 감각하여 정확히 알고 있다. “우리는 환영 못 받잖아.” 로키타가 시시각각 처하는 상황은 분명 비극이지만, 세상이 로키타를 그전까지 대해온 방식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끌고 가고, 무슨 일이 생겨도 탈출구가 없는 건물에 들어가야 하고, ‘원한다 je veux’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 사람이라면 응당 가지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 로키타는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히 아는데도, 흥청망청 사는 어른보다도 훨씬 똑똑하게 삶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영화의 많은 장면에서 카메라는 아이들의 노동하는 등을 따라간다. <로제타> 때부터 일하는 누군가의 등을 다정하게 따르던 그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 자체로 조금은 안심이 된다. 그러나 알고 있다. 다르덴 형제가 만드는 영화의 감각에 안심할 수 없는 현실을 우리는 살고 있다는 걸. 영화 속에도 친절한 개인은 있었다. 기꺼이 제 자리에서 자기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는, 잘 곳 없을 때 오라고 주소를 주는 쉼터 선생님도. 그러나 개인의 친절로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실마리를 풀어야 하는 문제를 우리는 알고 있다.
다르덴 형제는 말했다. 영화를 보고 돌아가는 길, 토리와 로키타의 이야기에서 조금은 마음에 남은 것이 있길 바란다고, 그래서 주변과 이야기를 나눠 주길 바란다고.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 왜 다르덴 형제가 토리와 로키타의 친구가 되어 달라 말했는지 알 것 같다. 아이들이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 세상만큼은 아니었으면, 사라지지 않도록 아이들이 그 자리에만 있을 수 있도록 아주 작은 변화라도 이루어 갔으면.
그런 마음으로 잠을 자고 아침을 맞으니, 세상은 어린이날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아이들을 얼마나 환대하고 있을까. <토리와 로키타>가 던진 질문을 계속 입 안에서 굴려 본다. 담담하여 다정하며, 더 깊은 담론을 끌어내는 이 영화는, 아마 남은 오월 내내 '오월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이라는 해맑은 노래와 함께 잔상처럼 남아 있을 것 같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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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가 vs 시민’ 구도에 관한 홍상수의 관찰
8★/10★
내가 본 첫 홍상수 영화는 2023년 작품인 〈물안에서〉였다. 그가 예술의 의미를 도출해내는 방식에서 긍정적인 의미의 큰 충격을 받았다. 예술, 현실, 윤리의 경계를 지우며 포개는 그의 솜씨는 정말 대단했다. 그러나 ‘예술가 vs 시민’의 익숙한 구도를 고루하게 반복한 〈여행자의 필요〉는 실망스러웠고, 예술가로서의 자신에 대한 혐오와 변명이 뒤섞인 〈수유천〉은 아리송했다. 최근 개봉한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는 이 계보의 연장에서 다시 한번 예술가, 예술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삼십 대 중반의 시인 동화가 애인 준희를 집에다 바래다준다. 낡디낡은 중고 프라이드를 타고서. 동화는 교외에 번듯하게 자리 잡은 준희의 집에 놀라고, 얼결에 준희의 가족을 마주하게 되어 집으로 초대받는다. 이러저러한 탐색의 시간이 전개되는 동안, 영화의 핵심 구도가 서서히 부상한다. 유명한 변호사의 아들이지만 독립한 채 가난하게 시를 쓰는 동화, 웨딩 촬영 아르바이트를 하며 최소한으로 필요한 돈만 버는 동화, 준희와 결혼하고 싶지만 경제적으로 준비가 안 된 동화……. 동화와 준희 가족 사이에는 긴장감 넘치는 대화가 흐르고 결국 갈등은 폭발한다. 동화가 준희의 가족에게 ‘삶에 필요한 기술’을 갖추지 못한, ‘책에서 읽은 내용’으로 삶을 사는 사람으로 판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술에 취해 언성을 높인 다음 날, 동화는 도망치듯 준희의 집을 빠져 나가다 결국 차가 퍼져버린다. 동화는 작게 혼잣말한다. “이 차는 좀 팔아야겠다….”
동화가 기른 수염은 준희의 가족에게 그가 ‘일반적’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 표지다. 한편 동화는 시력이 좋지 않은데도 안경을 쓰지 않는다. 준희의 아버지는 왜 앞이 흐릿하게 보이는데도 그가 안경을 쓰지 않는지 의아해하고, 준희의 언니는 동화가 잠깐 안경을 쓰자 안경이 잘 어울린다며 칭찬한다. 동화의 좋지 않은 시력은 동화가 세상 물정 모른다는 의미고, 안경은 이를 교정해주는 도구다. 세상을 또렷하게 보지 못해 안경이 필요한 사람. 시인(예술가)에게 따라오는 숙명적인 평가일 터다. 결국 처음에는 점잖게 경제생활에 관한 질문을 우회적으로 던지던 가족들은 준희 언니가 동화에게 ‘변호사 아빠 빽’ 발언을 건넨 이후 술에 취한 동화가 언성을 높이자 표면적인 예의마저 거둔다. 동화는 자기의 세계관을 지키기 위해 항변하지만 술에 취해 예의를 어기고, 술 취한 채 산책하다 넘어져 상처가 생기며, 도망치듯 빠져나와 가는 길에 차마저 퍼진다. 준희네 집에서 나오기 전, 동화는 준희에게 몇 번이나 사랑한다고 말하며 그녀를 꽉 끌어안는다. 동화는 어젯밤 일로 준희에게 버림받을까 무서운 것 같다.
그리하여 차를 팔아야겠다는 동화의 혼잣말은 세계에 대한 예술가의 패배 선언일까? 예술가와 시민의 대립 구도에서 비교적 명확하게 예술가의 편에 선 전작들과 달리, 이번 작품은 어느 한쪽의 편에 분명하게 서지 않는다. 이 긴장감이 이 영화를 특별하게 한다. 예술가와 시민이라는 길항하는 두 세계에서 때로는 성공적으로(〈물안에서〉), 때로는 실망스럽게(〈여행자의 필요〉) 예술가를 옹호하던, 그리고 〈수유천〉에서 아리송해서 매혹적인 방식으로 자신이 갇힌 덫을 그려낸 홍상수가 이번에는 이 구도 자체를 한 걸음 물러나 관찰함으로써 또 하나의 완성도 높은 작품을 내놓은 느낌이다. 영화에서 무척이나 자주 나오는 뒷모습 대화 씬도 ‘관찰자’로서 예술가와 시민의 대립 구도를 살펴보겠다는 그의 의도가 반영된 게 아닌가 싶다. 제75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상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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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 옆에서 피워내는 예술
해당 리뷰는 씨네랩의 시사회 초청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사진작가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들이 으레 그러하듯 이 영화 역시 낸 골딘의 사진에 어느 정도 빚을 지고 있다. 낸 골딘이 자신의 과거를 담담히 풀어놓는 동안 스크린 위로 사진 슬라이드 쇼가 펼쳐진다. 한 장 한 장의 사진이 갖는 에너지는 음악과 음성이 더해져 시대의 저항이 들끓었던 그곳으로 관객을 오롯이 데려간다. 낸의 유일한 언어는 사진이었고, 소외와 배척은 예술로 향하는 길이 되어 주었다. 낸 골딘의 삶은 세상과의 부딪침으로 이루어져 있다. 불안정한 가정환경과 언니 바버라의 자살, 성소수자, 폭력, 약물 중독. 사회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던 골딘의 주위에는 친구들과 예술이 흘러넘쳤다. 모두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소리 높여 외치던 그곳에서 낸 골딘은 자신을 믿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다. 사회와의 충돌과 투쟁 그리고 우정은 빛과 필름을 투과해 이미지로 온전히 남았다.
영화는 과거의 사진들과 현재 낸이 속한 시위단체 ‘P.A.I.N (처방 중독 즉각 개입)’의 활동을 병치한다. 낸 골딘은 2017년부터 옥시 중독 문제인 ‘오피오이드 위기‘에 목소리를 높였다. 옥시콘틴 약물의 위험성이 대두되지 않았던 시기 낸 골딘은 약을 처방받고 중독되어 죽음 직전에서 살아 돌아왔다. 약물 중독 문제를 방조한 제약사 퍼듀와 그 배후에 있는 새클러가의 기부를 받고 그들의 이름을 드높이고 있는 미술관들이 P.A.I.N의 무대다. 약통과 처방전 그리고 피 묻은 돈을 흩뿌리며 죽음을 재현하는 시위는 또 다른 예술이다. 골딘은 카메라를 들지 않고 직접 약통에 스티커를 붙이고 바닥에 누우며 육신으로 메시지를 전한다. 이런 낸 골딘에게 카메라를 비추는 이는 로라 포이트라스 감독이다.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스스로 예술이 되기로 한 예술가를 담아낸다.
P.A.I.N은 미술관에 걸려 있는 새클러의 이름과 평판이 끌어내리려 한다. 옥시콘틴의 중독 위험성을 알면서 판매와 마케팅을 지속한 새클러가에 대항해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높이는 활동은 과거에 낸 골딘이 해왔던 투쟁들의 연속선상에 있다. 그러나 낸 골딘의 슬라이드 쇼를 영화화한 것 같은 과거 부분에 비해 현대 P.A.I.N의 활동은 지닌 의미에 비해 다소 밋밋한 인상을 남긴다. 성기게 나뉜 P.A.I.N의 활동은 낸 골딘의 사진 한 장에 담긴 압축된 에너지에 부수적이거나 밀려나는 것처럼 보인다. 낸 골딘이라는 개인과 그의 시각이 아니라 P.A.I.N이라는 단체로 시야와 집중력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매’라는 소제목을 가진 마지막 챕터는 흩어졌던 집중력과 힘을 다시 가져온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바바라의 의무기록과 그가 세상을 등졌던 공간에서 관객은 낸 골딘의 그리움과 슬픔, 애증을 목격한다. 언니의 죽음으로 시작한 낸 골딘의 이야기는 투쟁과 죽음을 지나 다시 이 기찻길에 다다른다. 기찻길은 3개의 화면으로 분할되어 나란히 놓인다. 낸 골딘이 촬영한 과거의 푸티지가 이어지며 언니의 유품 중 조지프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 한 구절을 어머니가 낭독한다.
영화는 다시 시간을 넘어 현재로 돌아온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을 비롯하여 많은 미술관들은 새클러의 이름을 끌어내렸다. 80년대에 에이즈 전시를 큐레이팅하고 국가기금의 반대에 부딪혔던 낸 골딘은 이제 자신의 권위와 명성을 이용해 미술관을 압박할 수 있는 독보적인 예술가가 되었다. P.A.I.N의 활동은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다. 여전히 누군가는 부조리한 죽음에 맞닿아 있고 사회는 시리도록 무관심하다. 그러나 그곳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언어와 예술을 꽃피우는 이들이 있다. 가장 개인적이고, 정치적이며 역사적인 한 예술가는 그렇게 낮은 곳에서 자신을 언제나 드높인다. 자신의 언어인 사진과 예술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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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무지 - 테렌스 맬릭
황무지 - 테렌스 맬릭
많은 영화 목록을 들여다보다, 우연히 보게 된 영화. 영화에 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로 보기 시작했는데, 이 영화를 '클라이테리온'에서 배급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느리게 움직이는 화면. 단조롭고 물기 없이 메마른 화면의 나열, 미국중북부의 평범한 주, 사우스다코타의 가난한 동네는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한국(남한)보다 두 배나 넓은 면적의 땅에 인구는 70여 만 명에 불과한 곳으로,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는 가난한 지역이다.
이른 아침, 쓰레기 청소차가 골목을 지나가면서 두 사람이 집앞마다 쓰레기통을 들어 차에 옮긴다. 청년 키트(마틴 쉰)는 무심한 표정으로 쓰레기통을 옮기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홀리(씨씨 스페이식)의 나레이션으로 진행한다. 홀리는 고등학생이고, 여기 사우스다코다주로 오기 전에 텍사스주에 살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텍사스를 떠나 사우스다코타주로 이주하는데, 홀리의 아버지는 간판을 그리는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먹고 사는 문제에 큰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보이지 않고, 집도 비교적 깨끗하다.
홀리는 학교에 다니지만, 아직 친구도 없고, 혼자 집에서 곤봉 연습을 하거나 책을 읽는다. 홀리와 키트는 우연히 만나고, 두 사람은 홀리의 아버지를 피해 점점 깊은 관계를 갖는다.
지루하고 심심할 것만 같은 영화는 키트의 돌발적 행동으로 급변한다. 홀리의 아버지는 키트에게 경고하고, 두 사람이 만나지 말라고 말한다. 키트는 홀리의 집에 몰래 들어가 홀리의 가방을 싸고, 홀리의 아버지와 맞닥뜨리자 그를 살해한다. 첫번째 살해다.
놀라운 것은 홀리의 태도다. 자기 아버지가 키트에게 총맞아 죽었지만, 홀리는 놀라지도, 비통하게 울지도 않는다. 다만, 죽은 아버지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걱정한다. 키트는 집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지른다. 그리고 자신의 범행을 녹음한 싱글 LP판을 집앞에 놓고 홀리와 함께 도망한다.
영화의 모티프가 된 실제 사건이 있었다. 1957년 미국 네브라스크주 링컨에서 연쇄살인을 하던 커플이 있었다. 찰스 스타크웨더와 카릴 앤 퍼게이트가 그들인데, 나이가 19살, 13살이었다. 이들은 약 10여 명의 사람을 살해했고, 1959년 찰스는 전기의자로 사형, 카릴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 영화의 흐름도 실제 찰스의 범행과 매우 비슷하게 진행한다. 이 영화가 놀라운 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두 주인공의 태도가 비정상적으로 차분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람을 죽이면서 감정의 흔들림이 없다는 것은, 두 가지 경우로 추측할 수 있다.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지 못하는 싸이코패스이거나, 사회적 관계를 맺지 못한 비정상적인 인물일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이들의 사랑을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랑'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들의 행위가 비정상인 상황에서 두 사람이 갖는 감정 역시 '정상'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키트가 사람을 마구 죽이는 것을 보면서도 홀리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두 사람은 그런 점에서 매우 닮았다.
감독 테렌스 맬릭의 데뷔작이기도 한 이 영화는, 이후 테렌스 맬릭의 작품들을 보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는 하버드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으로 석사, 박사 학위를 마쳤으며, 서른 살이 되기 전에 MIT에서 철학과 조교수로 강의를 할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서른 살에 저예산으로 이 영화를 만들어 감독 데뷔를 하자, 헐리우드에서는 천재 감독이 나타났다는 반응이었다. 영화와 관련 없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놀라운 영화를 만들면서 등장한 것이다.
데뷔 작품부터 테렌스 맬릭 감독의 영화는 영상으로 철학을 드러내는 작품을 만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만든 모든 작품은 뛰어난 영상 이미지와 그 속에 함축되어 있는 철학적 의미를 모색하는 장치를 내재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두 주인공의 극단적 무심함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를 생각하면, 영화가 단순히 미장센으로서의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사회를 관통하는 시대적 상황에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사건에서도 그랬지만, 영화에서도 두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심한 태도를 보인다. 열정도, 의욕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좀비'같은 인물인 것이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엄청나게 성장하고, 물질문명의 첨단을 달려왔지만, 70년대의 미국은 심각한 딜레마에 놓이게 된다.
베트남 전쟁을 일으켜 그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고, 극심한 자본주의의 폐해에 저항하는 히피운동이 일어나고, 이때부터 미국에는 남미에서 들어오는 마약이 급증하면서 마약중독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너는 왜 노력도 하지 않고 절망하며, 분노하는가'라고 충고하는 건 꼰대가 하는 말이거나, 자본의 비웃음일 뿐이다. 70년대 미국의 청년들 가운데 특히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은, 평생 다른 주로 넘어가지 못한 채 자기가 살던 마을에서 죽는 경우가 많았다.
미국의 '부'는 고르게 퍼지지 않았고, 일부 대도시를 중심으로 커졌으며, 욕망의 대상은 주로 대도시에서 발생하고, 집중했다. 발버둥쳐도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에 갇힌 것같은 답답한 상태의 청년들 가운데 일부는 대도시로 떠나고, 일부는 체념하며 주어진 삶을 살아가고, 극히 일부는 범죄자가 된다.
미국의 평범한 하층민은, 하루 노동을 마치면 집에 돌아와 맥주를 마시며 텔레비전을 본다. 주급을 받으면 월세를 내고, 일주일치 식량을 구입하고, 다시 주중에는 노동을 하고, 주말에는 비 새는 지붕을 고친다.
평생 이렇게 살 것이 뻔하다는 걸 아는 청년들은, 이 삶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고향을 떠나야 한다. 그곳이 어디인지,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어도, 무조건 이 낡고 더러운 고향을 떠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한다.
키트는 극단적 방법으로 고향을 떠난다. 그는 영화에서는 보여주지 않았지만, 아마도 자기 부모를 먼저 살해하고 홀리의 집을 찾아온 것일 수 있다. 그렇기에 홀리의 아버지를 아무렇지 않게 살해한 것이고, 계획적으로 홀리를 데리고 떠난 것이 아닐까.
이후, 그가 보여주는 행동은 일관성이 있다. 그를 추적하는 현상금 사냥꾼들을 살해하고, 자기와 함께 쓰레기 청소부로 일하던 동료의 집을 찾아가 그를 죽이고, 그 동료를 찾아온 남녀를 지하실에 가두고 총을 쏜 다음 도망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두 사람은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은 평범한 사람을 살해한다.
하지만 키트가 죽이지 않은 두 사람이 있는데, 부잣집에 들어가 주인과 하녀를 감금하고 나올 때, 이 두 사람은 살려둔다. 왜 죽이지 않았을까. 부자가 키트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었기 때문에? 저항하지 않고, 신고도 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찰스와 홀리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모두 죽었다. 오직 부자와 부자의 하녀만 살려두었다. 이것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 키트가 살해하는 대상이 특정 계층이나 계급에 있지 않다는 걸 말하는 것일 수 있다.
즉 키트는 20대 청년이지만 대단히 어리석고 무지한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냉혹한 싸이코패스가 아니라, 시골 구석에서 배우지 못하고, 사회적 윤리와 도덕에서 비껴 있는 소외된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외'는 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키트는 자신이 '소외'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것을 자각한다는 것은 사회와 자기의 위치를 인지하고 있다는 것인데, 키트는 그럴만한 지적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가 '내셔널지오그래픽 매거진'을 읽으면서 키득거리는 것을 보면, 그가 문맹은 아니라는 것이고, 어느 정도 학교 교육을 받았다는 걸 의미하지만, 그것이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자각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증거로 보긴 어렵다.
건조하고 냉담한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테렌스 맬릭의 관점은 키트가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감정을 드러내거나 이입하지 않는 것, 그래서 오로지 인물의 행위만을 관찰하면서 인물과 상황을 객관화하고, 관객으로하여금 인물의 감정을 판단할 수 있도록 한 장치는 이후 짐 자무시 감독의 '천국보다 낯선'과 같은 작품에서도 나타나는, 철학적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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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칸토>, 대들 수 있는 자녀가 온 집안을 구한다!
# 뭘 해도 부족하기만 한, 전혀 특별하지 않은 자녀
<엔칸토 : 마법의 세계>가 제기하는 문제제기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어떤 자녀가 진짜 영웅이 될 수 있는가
자녀는 언제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가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주인공,
뭘 해도 늘 가족들 기준에 못 미치는, 가문의 '아픈 손가락', '미라벨'!마법의 힘이 유전되는 '마드리갈' 패밀리 중에서 유일하게 마법 능력을 받지 못한 '미라벨'
마법의 힘으로 만들어진 마을 '엔칸토'와 그 엔칸토를 이끌고 가는 '마드리갈 가문'.
마드리갈 가문에 태어난 아이들은 어느 시점이 되면 모두 자기만의 '마법의 힘'을 갖게 된다.
이런 대단한 가문에서 유일하게 '마법의 힘'을 전해 받지 못한 '미라벨'.
미라벨의 두 언니, 엄청난 힘을 가진 '루이사'와 손으로 온갖 아름다운 꽃과 식물을 만들어내는 '이사벨라'
특히 미라벨의 친언니 '루이사'와 '이사벨라'는 특출 난 마법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언제나 미라벨의 비교 대상이 된다. 친언니들뿐 아니라 미라벨은 대단한 마법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엄마, 친척들과 끊임없이 비교를 당하며 집안의 아픈 손가락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의 멋진 미라벨! 언제나 기죽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씩씩하게 살아간다!
이렇게 씩씩하고 당찬 미라벨이 유일하게 눈치를 보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마드리갈 집안의 가장, '아부엘라', 할머니다!
마드리갈 가문의 가장, 할머니 '아부엘라'
오래전 갓난아이 셋을 안고 남편과 함께 강을 건너 피난길에 올랐던 '아부엘라'(할머니).
도망가는 피난민들을 위한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아부엘라의 남편이 군인들을 막아섰고,
군인들은 아부엘라의 눈앞에서 남편을 죽인다.
절망에 빠진 순간, 아부엘라는 강에서 '마법'을 선물 받는다.
그 마법으로 '엔칸토'라는 마을이 세워지고, 그때부터 아부엘라는 마법의 힘으로 마드리갈 가문과 마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하며 살아간다.
마드리갈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일정 나이가 되면 모두 특별한 '마법의 능력'을 받게 되었고,
마법의 능력을 받는 의식은 할머니 아부엘라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그 의식에서 마법을 받는 것에 실패한 자녀가 바로 '미라벨'.
할머니 눈에 미라벨은 '가장 약하고, 부족하며, 전혀 특별하지 않은 자녀'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할머니에게 만족감을 주지 못하는 미라벨은, 할머니 앞에만 서면 작아지곤 하였다.
# 강력한 권위에 유일하게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자녀!
그러던 어느 날, 마법으로 지어진 마드리갈 가문의 집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집에 금이 가면서, 가족들의 능력도 약해진다.
마법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집에 금이 가고 있다는 것, 마법이 점점 사라진다는 것을 눈치챈 유일한 사람이 바로 미라벨!
미라벨은 할머니와 가족들에게 경고하지만, 아무도 미라벨의 말을 믿지 않는다. 믿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할머니는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주는 미라벨을 비난한다.
하지만 마법은 정말로 사라지고 있었고, 미라벨만이 그 사실을 직시하고 해결 방안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미라벨이 가족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일은 꼬이고, 집은 점점 망가져 갔다.
마법이 사라지면서 점점 무너지는 마드리갈 '집'과 '엔칸토'
할머니는, 마법이 사라지는 이유가 바로 '미라벨'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미라벨의 삼촌 '브루노'는 앞으로 일어날 안 좋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예지력이 있었다.
오래전 '브루노' 삼촌은 마법의 능력을 통해 언젠가 마드리갈 집이 무너지고,
그 무너지는 집 가운데 '미라벨'이 서 있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가족들에게 늘 안 좋은 소식을 전하며 미움을 사던 브루노도 그 예지를 본 이후 집안에서 사라진다.)
그러한 <브루노 삼촌의 예지 + 미라벨의 설치고 다니는 모습>이 결합하여,
미라벨은 마법을 파괴하는 주범으로 여겨지며, 할머니의 비난을 받게 된다.
미라벨 때문에 집이 무너지고 마법이 사라진다고 믿는 할머니
할머니는 모든 것을 미라벨 탓으로 돌린다.
벽의 금들은 너와 함께 시작됐어.
브루노도 너 때문에 떠났어.
루이사는 힘을 잃었고, 이사벨라는 통제불능이야. 너 때문에.
네가 능력을 못 받은 이유는 모르겠다만,
그게 가족을 괴롭힐 핑계는 안 되는 거야!할머니는, 미라벨이 자격지심으로 가족들을 괴롭힌다고 몰아세운다.
집이 무너지는 것도, 마법이 사라지는 것도, 다 미라벨 때문이라고!
미라벨은 그때 깨닫는다!
끝까지 제가 못마땅하신 거죠?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할머니 눈에 루이사는 힘이 모자라고,
이사벨라는 늘 완벽하지 않겠죠.
브루노 삼촌도 할머니가 나쁜 면만 봐서 떠났어요.
삼촌도 저도 우린 이 가족을 사랑해요.
가족을 생각하지 않는 건 할머니라고요.할머니는 늘 자녀의 '부족한 모습, 모자란 모습'에 더 집중했다는 것!
힘이 센 루이사도, 완벽한 이사벨라도, 나쁜 미래를 보던 브루노 삼촌도..
가족을 위한다며 가족에게 행한 할머니의 행동은, 사실 진짜 가족을 위한 사랑이 아니었다고!
그래서 미라벨은 외친다!
할머니가 집을 부수고 있어요. 기적은 할머니 때문에 죽어가는 거라고요!!
그 누구도 할머니에게 한 번도 하지 못했던 말,
어느 누구도 감히 할머니에게 꺼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말,
미라벨은 유일하게 할머니에게 대들었다!
# 부모의 잘못에 맞서고 다시 부모를 감싸안는 자리, 마법의 탄생!
집은 무너진다.
철저하게.
집도 사라지고, 마법도 사라진 후, 할머니는 깨닫는다.
그리고 미라벨에게 고백한다.
난 기적을 받았다. 두 번째 기회라는 기적을.
그걸 잃을까 봐 너무 두려워서 누굴 위한 기적이었는지 잊어버리고 말았지.가족을 지키기 위해 얻었던 마법의 힘,
그 마법의 힘을 지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정작 그 마법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잊어버렸다는 고백.
할머니는 깨닫는다.
기적은 자녀들이 받은 마법이 아니라 바로 자녀들 그 자체라는 것.
미라벨은, 할머니의 고백을 조용히 듣고 깨닫는다.
이제야 알겠어요. 할머니는 집을 잃고 모든 걸 잃으셨죠.
모든 괴로움을 혼자 견뎌오신 거예요.
우린 할머니 덕분에 구원받았고,
할머니 덕분에 기적을 받았고,
할머니 덕분에 가족이 됐어요.
그 어떤 게 무너져도 함께라면 고칠 수 있어요.어느 순간 집안의 '빌런'이 되어버린 할머니,
그러나 그러한 할머니는 혼자 모든 괴로움과 책임감을 짊어지고 평생을 살아왔으며,
가족의 탄생과 유지, 평화를 지켜왔다.
미라벨은 할머니의 상처를 알아보고, 할머니의 마음을 위로한다.
할머니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는다. 할머니를 감싸 안는다.
마법을 잃은 마드리갈 가문은, 엔칸토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다시 집을 세운다.
그리고 다시 세워진 집에 미라벨이 문고리를 거는 순간, '마법'은 되살아난다!
이것이 미라벨이 가진 진짜 마법의 힘이었다!
모두가 기존의 권위에 억눌려 눈치만 보고 있을 때,
유일하게 나서 그 강력한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고,
부모의 잘못을 모른척하지 않고,
그 잘못한 것을 넘어서 감춰져 있던 부모의 진심을 알아차리고,
그 마음을 감싸안는 용기.
이것이 가장 어렵고 힘든 마법.
세상의 법칙이 가진 부정적 모습에 의문을 제기하고 탓할 수 있는 용기,
거기에 더해 그 너머의 긍정적 가치를 놓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미라벨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의 힘을 보여주었다!
그 마법은 무너진 한 집안을,
마을을,
세계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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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돌, 수백 만의 우주를 건너
묻고 싶다. 그럴 때 없냐고.
끊임없이 자극적인 걸 찾아다니는, 멈추지 못하는 나를 발견할 때. 새롭다는 건 다 해보고, '요즘 이게 유행이래' 하면 뭔지 보지도 않고 '그래? 얼마나 재미있기에?' 하면서 일단 기웃거려 보는 나를 발견할 때.
물론 이런 일련의 행위들이 즐겁지 않다는 건 아닌데... 사실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즐거워서 움직이기보다, 그렇게 끊임없이 따라다니지 않으면 도태될 것 같은 두려움이 더 큰 동기로 작용하고 있음을 깨달을 때. 심지어 그 실패감조차 콘텐츠로 뽑아내야 한다는 ("유튜브를 해! 유튜브를!") 목소리 틈바구니에서, 부단히 발버둥 치는 기분이 들 때.
그러다 문득 깨달을 때. 그 모든 발버둥은 결국 내 마음 하나와 싸우는 거였구나. 단지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 그 하나가 필요했구나. 그걸 놓쳐서 자꾸 이렇게 허덕이면서 사는구나. 안정이란 인간의 환상이 아닐까?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놓치는 균형 같은 것, 공중그네 타는 유니콘이나 외줄타기를 하는 인어공주 같은 것. 그 환상을 찾아 허우적거리는 내가 덩그러니 있는 게 아닌가? 그냥 이게 환상임을 인정하고 불안정을 받아들이면 될 것을.
이 두 가지 느낌이 은유적으로 완벽하게 들어간 영화가 있다. 더없는 혼돈으로 키치하게 반짝거리는 정신없는 세상, 그 안에서도 묵직한 돌처럼 단단하게 나를 붙들어주는 무언가까지 다 들어 있는 종합 선물 세트 같은 영화가.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그 제목만큼이나 얼핏 복잡해 보이는 영화다. 양자경이 분한 주인공 에블린은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세탁소를 운영하면서 살고 있다. 모셔야 하는 아버지, 기대기엔 너무 나약해 보이는 남편, 자꾸 엇나가면서 멀어진다고만 느껴지는 딸, 빡빡하게 숨통을 죄어 오는 세무의 늪... 에블린은 하루하루를 지친 표정으로 살고 있던, 평범한 중년 여성이다.
그러나 세무 조사를 받으러 간 자리에서 갑작스럽게 멀티버스를 맞닥뜨리게 된다. 멀티버스라는 단어도 들어보지 않고 살았을 에블린에게, 세상은 너무 갑작스러운 속도로 무한 확장된다. 살아오면서 무수한 가능성으로만 존재했던 모든 선택의 가지들이, 내가 내리지 않은 그 선택을 했다면...으로 시작되는 수백만 개의 평행 우주로 존재한다. 그 다른 에블린들은 쿵푸 고수가 되기도 하고, 결혼을 포기한 대신 근사한 커리어를 이루기도 했으며, 심지어 손가락이 핫도그로 이루어진 사람들의 세계에서 지금과는 다른 사랑을 하며 살고 있기도 하다.
우왕좌왕하다가 갑자기 쿵푸 고수의 일면을 보이고, 괴로워하며 세파에 지친 얼굴을 드러내다가도 새로 들은 정보들을 척척 얽어내는 에블린의 모습은 우리 주변의 수많은 중년 여성들을 떠올리게 한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그러나 세상이 흔히 측정하지 않는 가치들을 품은 사람들을. 그들이 가지 않은 길, 지금과 많이 달랐을 수도 있는 다양한 삶의 가닥들, 거기서 엄마이자 아내이자 딸 외에 그들이 받았을 호칭들을.
여기서 때로는 능청스럽게 코믹하고, 때로는 자차분한 얼굴로 깊은 감정을 끌어내는 양자경의 연기가 빛을 발한다. 원래 성룡을 주인공으로, 양자경은 아내이자 조력자 역할을 하는 캐릭터로 세우려 했다던데 좋은 변경이었던 것 같다. 유려한 무술을 펼치는 성룡의 모습이 궁금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역시나 빼어난 무술 배우이자 오랜 세월 '조력자'의 위치에 놓여 있던 그가 할리우드에서 첫 주연작을 맡았다는 사실 또한, 세상에서 측정되지 않았던 어떤 가치들을 떠올리게 한다.
다소 복잡해 보이는 세계관에 대한 정보 값이 0인 것인 에블린이나 관객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친절한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에블린의 세상을 둘러싼 갈등이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딸과 아버지, 아내와 남편, 어머니와 딸로서 존재하면서 그 사이에 놓여 있던 각양각색의 갈등과, 이를 우선시하느라 덮어두었던 자신의 존재까지 떠오른다. 멀티버스까지 가져와 엄청 거대한 이야기로 펼쳐지는, 수백만의 우주를 건너 이루어지는 그 갈등은 결국 가장 가깝고 내밀한 충돌과 닮았다.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아연실색해지는 그 충돌의 모습은 가히 불꽃놀이를 방불케 할 만큼 다채롭다. 형형색색의 화려한 충돌(심리적 충돌이든 물리적 충돌이든)의 양상을 보고 있더라면 어이가 없어서 자꾸 웃음이 비실비실 나오는데,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순간. 이 영화의 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쉬운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만듦새가 매우 좋은 영화이고, 엔딩 크레딧에 어떤 동물도 촬영 과정에서 다치지 않았다는 문구를 보기는 했지만, 하루가 멀다고 잔혹한 동물 학대 소식이 들려오는 땅에서 비록 허구일지언정 강아지가 이리저리 휘둘리는 장면을 보는 것은 편치 않았다. 픽션이고, 만들어낸 장면이고, 실제 강아지가 다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는 영화의 문제라기보다 내가 밟고 선 땅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내가 밟고 선 땅을 인식하면서 볼 수밖에 없다.
같은 이유로, 국세청의 악명이 높은 미국에서는 세무 조사 장면이 강력한 기능을 했다고 들었다. <나이브스 아웃> 린다의 깔끔한 표정을 싹 감춘 제이미 리 커티스가 국세청 직원 데어드리 역할을 맡았는데, 타성에 젖은 얼굴로 서류를 꼼꼼히 보며 날카로운 눈빛을 쏘는 모습도 충격적이고, 이후로 멀티버스에서 그가 보이는 모습 또한 어마어마하다. 에블린 못지않게 다채로운 평행우주를 가졌을 것 같은 인물로, 개인적으로는 에블린의 거울 너머 또 다른 주연이 아닐까 싶을 만큼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 * *
이 영화는 단조롭고 관성적인 일상을 한 꺼풀 벗긴 자리에 무엇이 있는지 보게 한다. 에블린과 데어드리, 남편 웨이먼드와 딸 조이, 할아버지 공공까지 모두 '가지 않은 길'에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존재들이었고,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는 존재들이었다.
더불어 이들과 맺는 관계, 때로는 남편이 구운 쿠키나 따뜻한 말 한마디처럼 너무나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얼마나 힘있게 사람을 잡아주는지 깨닫게 한다. 결국 사람을 구하는 건 사람을 통해 나오는 무언가 아닐까. 마셔도 마셔도 목마른, 계속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할 것 같은 조급한 의무감이 세대를 구원하지 못하는 것처럼.
반짝이지 않는 소박한 모습으로, 우직한 돌처럼 항상 옆에 있는 그 어떤 마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수백만의 우주를 건넌 충돌이 무엇이든, 어디서든, 단번에 가르고 들어올 것이다.
ㅁ '씨네랩'에서 시사회 티켓을 제공받아 감상한 후 작성하였습니다. 영화 개봉일은 10월 12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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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이 상상했던 빛
*본 리뷰는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시사회를 바탕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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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발리우드'라는, 인도 영화에 대한 어떠한 선입견이 있었다. 과장된 연기와, 뮤지컬식 구성 등등... 흔히 그런 것들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은 그러한 선입견을 뛰어넘음과 동시에 세계적으로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이하: 우빛상모)>의 예술적인 가치와 이 영화의 아름다움을 진심으로 소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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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은 현대 인도의 뭄바이와 작은 해변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인도라는 나라와 그 문화에 대해 사전 지식이 없으면 이 영화를 충분히 깊게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인도는 아직도 신분제가 작동하는 나라이며 결혼 제도 또한 초기의 대한민국 내지는 조선의 제도와 닮아있을 정도로 보수적이다. 가족의 기대와 사회적 규범 즉, '결혼은 어떠해야 한다'를 두고 그 관습이 강하게 적용되는 나라라는 것이다. 그 규범은 여성들에게 더 심하다. 여성들의 결혼은 마치 '인생의 역전'처럼 인식되고, 남편이 무엇을 하든 여성은 남자를 서포트해주어야 한다는 문화적인 배경이 있다. 또한, 인도의 종교적 배경도 주목해야 한다. 인도는 힌두교가 약 80%, 이슬람교가 약 15% 정도로 이루어져 있는 다종교 국가이다(출처 : 위키백과). 특히나 인구 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도시인 '뭄바이'에서는 여러 종교들이 한데 모여 (물론 힌두교가 비율상으로는 훨씬 많을 것이다) 삶을 살아가는 도시이다. 특히 결혼과 연애에 대해 관습적이고 보수적인 인도 내에서 힌두교와 무슬림교 신자들 간의 사랑은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도 '뭄바이'에 살고 있는 두 여성이 <우빛상모>의 주된 인물이다.
'프라바'는 결혼 직후 남편이 독일로 떠나 1년째 연락이 끊긴 간호사다. 겉보기엔 안정적인 직업과 결혼 생활을 가진 듯하지만, 남편의 부재로 인해 내면의 공허와 외로움을 겪고 있다. 그녀의 직장 동료 '아누'는 무슬림 남성과 비밀 연애 중인데, 인도 사회의 종교적 장벽과 가족의 맞선 강요로 인해 사랑과 결혼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이다. 병원에 파견 나온 남성 의사에게 미묘한 감정을 느끼지만, 결혼이라는 제도에 얽매여 자신을 억누릅니다. '프리바'보다는 자유로운 연애관을 갖고 있다. 아직 결혼이라는 제도에 묶여있지 않아서일 수도 있지만, '프리바'가 같은 병원의 파견 의사에게 설렘의 감정을 느끼지만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 독일에 있는 남편과 자신은 유부녀임을 생각하며 자책한다. '아누'는 반대로 무슬림 남자친구와 연애를 하는 것에 갈등을 느끼지만 '프라바'보다는 적극적으로 사랑을 찾으려 하는 인물이다.
*
두 인물 모두 인도라는 사회 속에서 '사랑'이라는 것 때문에 고뇌하고 또 행복해한다. 스포일러가 될까 봐 자세히는 설명하지 못하지만, 둘의 사랑 이야기를 진득하게 따라가다 보면 '인도'라는 '한국'과는 많이 달라 낯선 곳의 인물이 사실 인류 전체가 공감할 수 있는 그 문제를 건드린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남편이 있지만, 1년 넘게 돌아오지 않아 외로운 와중에 새로운 사람이 눈에 띄는 것, 종교적 문제로 금기시되는 위태로운 사랑을 하는 것은 비단 뭄바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빛상모>는 사랑에 대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마치 시를 그려내듯 섬세하고 진득하게 묘사하고 있다.
'프라바'가 독일로 간 남편이 자신에게 선물해 준 것으로 '추정되는' 전기밥통을 끌어안고 없는 온기를 느끼는 장면, 그 장면에 희미하게 비치는 창 밖의 달빛과 밤에도 들려오는 기차 소리는 그녀의 감정을 극대화시킨다. 그리고 영화의 중반부부터 시작되는 해변 마을에서의 이야기는 마치 환상처럼 진행되고, 꿈인 듯 현실인 듯 모호한 그 경계에서 각자의 사랑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하는 두 여성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비주얼적으로도 아름다운 부분이 많았는데, 그 비주얼은 분명 서사의 미학이 뒷받침되어 나온 결과였으리라.
*
<우빛상모>의 크레디트가 올라간 후, 이 영화가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게 되었는지 여실히 이해가 갔다. 영화는 도시의 어둠과 여성들의 고독,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연대와 희망을 몽환적이고 시적인 영상미로 담아낸다. 세 여성의 여정은 인도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여성의 현실을 드러내면서도,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랑과 우정이 결국 어둠 속에서 빛이 됨을 보여준다. 척박한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한 편의 아름다운 꿈을 꾼 것 같은 메시지와 희망을 건네준다. 이 영화는 두고두고 간직하고 싶어진다.
4/23(월) 극장 개봉
- 추천 점수 : 5.0 / 5.0
- 이럴 때 보면 좋아요! :
외부적인 요인으로 나의 사랑을 진지하게 고민 중일 때 이 영화의 빛을 보고 용기를 얻어가세요!
- 추천 점수 : 5.0 /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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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가 실화라는 사실에 할 말을 잃었습니다. 보시면 압니다.[결말포함]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영화: 헌팅 오브 힐하우스
이 영화는 원 저작권자(배급사)의 사용 허가를 받은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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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파벨만스> 2차 예고편
아카데미 7개 부문 노미네이트 & 골든 글로브 작품상, 감독상 수상작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파벨만스] 2차 예고편 대공개❇︎ 자, 이제 우리의 모든 순간이 영화가 될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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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드라이> 메인 예고편
불미스러운 일로 고향을 떠났던 '에런'은 친구 '루크'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20년 만에 고향을 찾는다 가족을 죽이고 자살한 것으로 보이는 '루크' 유가족의 요청으로 사건을 파헤치던 '에런'은 여자친구였던 '엘리'의 죽음에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되는데... 묻혀있던 두 개의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