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단념해야 하는 두 사람이 있다. 둘의 차이는 전 연인이 살아있느냐, 살아있지 않느냐 정도에 불과해 보인다. 당연히 살아온 시간과 환경이 다르니 다른 점은 더없이 많겠지만, 동네 주민들에게 둘은 그저 ‘이상한 사람’ 일뿐이다. 한 명은 새벽에 결혼식 비디오를 찾다가 난동을 피우기도 하며, 다른 한 명은 처음 보는 손님이 있는 저녁 식사 자리마저 순식간에 망쳐놓는 재주를 지녔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팻(브래들리 쿠퍼)은 이별의 계기가 썩 좋지 못했음에도 자신과 그가 천생연분이었다는 사실을 신봉한다. 접근금지 처분을 빠르게 극복해 불륜을 저지른 아내와 재결합하여 서로를 완전케 할 사랑에 다시 빠질 수 있으리라 철썩같이 믿는다. 그렇다면 티파니(제니퍼 로렌스)는 어떤가? 그는 사별한 남편을 잃은 후 느낀 허망함과 우울에 자신을 세상에 내던졌던 나날을 느리게 갈무리하는 중이다.
사실, 영화의 장르가 로맨틱/코미디인 만큼 결론은 뻔하다. 두 사람은 두 시간 동안 여러 굴곡을 겪을 테고, 서로가 자신에게 완벽한 짝이라는 것을 발견하며 끝날 것이다. 하지만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의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수많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들과 결이 다소 다르다. 남녀 주인공이 서로를 포용하는 과정은 그들이 겪은 상실과 우울의 치유 여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상異常: 보통과 다른
이상하지 않은 상태란 무엇일까? 일상에 파문을 일으키는 일이 전혀 없다는 걸 의미할까? 그렇다면 사랑에 빠진 상태도 어떠한 의미에선 이상한 일일 테고, 누군가와 결별하는 것 역시 안전한 보통의 나날을 영위하는 이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일 것이다. 그러하므로 이상과 정상은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수용 가능한 경계가 있을지라도, 개개인의 세계관에 따라 달라지는 유동적인 상태라 볼 수 있을 터다. 물론, 그의 아버지인 패트리치오(로버트 드 니로)가 전 재산을 거는 도박 행위 역시 마냥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단 걸 생각해보면, 사회가 관용을 베푸는 이상과 정상의 경계조차 뚜렷하게 말하기 어렵겠지만.
어쨌든 영화 초반의 가장 큰 문제는 팻의 이상행동이 타인에게 위협적일 수 있다는 점이며 조울증으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는 점이다. 프로이트는 상실과 애도의 과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랑을 쏟아부은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할 때, 우리는 대상에게 투여한 리비도를 회수해야 하는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고. 또, 이 과정은 대개 순탄하지 않고, 현실 부정이나 대상에 대한 집착과 같은 강력한 반작용을 겪을 수도 있다고. 프로이트가 말한 애도에 대한 이론을 생각한다면 영화 초반의 팻을 조금 더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동네 주민에게 팻은 이미 오래전에 깨어져 돌이킬 수 없게 된 사랑을 어떻게든 붙여보려 하는 이상한 사람일지라도, 팻에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자신이 안전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데에 집착하는 것이 당연하다. 팻은 어머니 때문에 일찍 집에 돌아왔을 뿐, 여전히 주기적으로 의사를 봐야 하는 환자이며 여전히 전처 니키와의 완벽한 사랑이 가능하리라는 환상 속에 사는 남자니까.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흔히 떠올리는 '이상하지 않은' 사람보다는 극단적인 기질을 지닌 인물이 여럿 등장하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팻의 상실감 -혹은 상실에서 비롯된 우울이라는 일탈-을 이해하는 이는 극소수다. 팻의 어머니인 돌로레스(재키 위버)나 친구인 로니(존 오르티즈)는 친절하지만 사랑을 잃은 이가 유지하는 참담한 환상을 없애주진 못했다. 팻의 형인 제이크(셰어 위검)는 간만에 본 동생 앞에서 되려 우월감을 느끼기만 할 뿐이고, 아버지 패트리치오는 팻이 말썽을 피우지 않도록 집 안에 있을 것을 거듭 권하는 정도에 그친다.
그러나 상실한 사랑, 토미로부터 벗어나던 티파니는 팻에게 거침없이 다가간다. 댄스 대회 파트너가 되어달라는 요청은 팻에게 이끌림을 느낀 티파니가 시간을 벌기 위한 방법이었던 게 분명한데, 그는 팻의 언어를 반복하며 유인한다. '니키를 위해서, ' '니키에게 당신이 더 좋아졌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니키에게 편지를 전하고 싶다면': 당신은 댄스대회에서 나의 파트너가 되어야만 해. 타인의 언어를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다는 건 그 사람의 세계를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다. 동시에 티파니는 팻의 손에서 니키가 읽는다는 책을 앗아가고 춤을 가르침으로써 팻에게 자신의 언어를 체화시키기까지 한다.
이상理想: 완전하고도 궁극적인
티파니가 아마추어 댄서였던 것은 팻에게나, 티파니에게나 큰 행운이었다. 실제로 우울증을 개선하는 데에 신체활동이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상에서 하지 않는 몸짓 언어를 개발시키는 과정에서 신체뿐만 아니라 정서/인지적 측면의 개발이 가능하다고 한다. 당장 니키에게 편지를 전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팻은 주기적으로 티파니와 댄스 연습을 하며 거부감 없이 우울증을 치료했던 셈이다. 특히 초반에는 연습만으로 기진맥진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영화 속에서 자세히 묘사되진 않았으나 체력적 요소 등으로 오로지 춤에만 매달려야만 했던 연습 초기엔 팻이 전처 니키를 떠올릴 겨를이 없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아마 이러한 부분 역시 그가 상실한 대상에게서 벗어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반면 티파니는 팻이라는 사람을 통해 토미라고 하는 옛 연인에게 집중되어 있던 자신의 감정, 혹은 옛 연인에게 쏟아부었기에 이젠 오갈 길 없게 된 자신의 애정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었다. 특히 춤이라는 예술이 비언어적 표현에 기반한 소통 행위라는 것과 티파니가 날 선 말을 잘하는 캐릭터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팻과 다양한 감정을 나누며 서로를 알아가는 데에 춤보다 더 좋은 수단을 찾긴 쉽지 않았을 듯하다.
이렇듯 팻과 티파니는 최초의 끌림이 바로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고 지연된 덕분에, 둘은 더욱 어울리는 한 쌍으로 거듭났다. 다만, 이데아란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기에, 현실을 사는 우리가 최선의 세상을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하는 것처럼, 둘의 사랑이 영원토록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토미와 티파니의 사랑 역시 한때엔 이상적이었을 테고 니키와 팻 역시 그림 같은 커플이었던 시절이 존재했지 않은가. 그렇기에 영화의 결말부에서 둘의 행복한 결합이 그려졌다 해도 이 아름답고도 이상적인 사랑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우리는 모른다. 치유 과정 속에서 서로에게 상대방이 단 하나뿐인 사람이었을지라도 다시금 세상에 나갔을 때, 둘의 심경이 어떤 방향으로 변화할지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이 둘이라면 영화 필름 밖에서도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으리라 믿게 되는 건 왜일까. 팻의 아버지가 말했듯 티파니가 팻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깊은 사랑이 느껴졌기 때문일까? 단지 그 이유 때문은 아닐 것이다. 둘은 댄스 대회에서 다른 경연자처럼 규격화된 음악과 안무를 택하지 않는 과감함을 지닌 이들이며, 5점에 아쉬움을 내비치지 않고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호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다듬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던 팻과 티파니 개인의 어떠한 부분은, 두 사람이 함께 하자 긍정적인 시너지로 탈바꿈하였다. 타인 앞에서 굴하는 일이 없던 티파니에겐 팻이 비뚤어진 채로 서 있을 때 다가가 바로 설 수 있도록 돕는 힘이 있었고, 완전한 사랑을 믿던 팻에겐 티파니가 거짓으로 써준 답장을 모른 척 눈감아주는 이해심이 있었지 않은가. 심지어 로니 부부로 끝날 수 있었던 공동의 지인 역시 늘어나 단단하고도 따뜻한 안전망까지 넓어졌으니, 팻과 티파니는 타인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자신들의 리듬에 맞춰 '이상한' 사랑을 별 탈 없이 이어나갈 것만 같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가 세상에 나온 지도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다양한 변주로 관객을 기쁘게 하듯, '만남'이라고 뭉뚱그려지는 단어조차 유심히 살펴보면 동일한 사례는 하나도 없다. 손쉽게 둘의 마주침을 허용하는 운명도 있겠으나 일정 거리 밖에서 서성이며 자신이 안전한 사람임을 부단히 증명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한 만남도 세상 어딘가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꼭 그만큼, 누군가에겐 멀리서 애써 찾아오는 인연이 있을지 모른다. 티파니가 팻의 동선을 알기 위해 그의 집에 전화를 걸고 똑같이 달려 나간 것처럼.
그러니 필연적인 우울이 길어져 힘겨워도 그대, 가끔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는 여유를 가질 수 있기를. 찬란한 한 줄기 햇빛은 오로지 당신만을 만나기 위해 일억오천만 킬로미터를 달려왔다. 다시는 똑같이 반복되지 않을 찰나의 위로, 어쩌면 당신의 짐을 덜어내고 당신을 바꿔놓을 가능성조차 외면하기엔 우리의 삶이 너무도,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