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07-05 00:19:50
[BIFAN 데일리] 찌개와 어항의 소리
영화 <독친>

감독] 김수인
출연] 장서희, 강안나, 최소윤, 윤준원 외
프로그램 노트] “대학 가면 다 할 수 있댔지?” “알았어, 알았어.” 학교에 데려다주던 엄마의 잔소리를 적당히 웃어넘기는 듯하던 고등학생 딸은 그날 세상을 영원히 등지는 비극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 학교폭력, 랜덤채팅 어플리케이션 등 통상적인 청소년 문제를 중심으로 사건을 조사하던 경찰은 주변인 증언을 확보하면서 처음에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오묘하게 뒤틀린 모녀 관계를 발견하게 되는데…. 6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 장서희가 딸 인생의 성공을 위해 그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표독스러운 엄마 역을 맡아 실감 나는 연기를 펼친다. 고생스러웠던 지난 삶에 대한 보상심리로 자식의 인생을 통제하고드는 폭압적인 부모의 행동이 얼마만큼 큰 비극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는 현실 밀착 스릴러로, 관객에게 묵직한 경종을 울린다. (박꽃)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란 참으로 기묘하다. 코앞에서 싸우지 않아도 갈등은 감지되고, 통화의 일면만 듣거나 인사치레 같은 말만 들어도 상대와 관계의 거리감을 쉬이 가늠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펼쳐지는 엄마 혜영과 딸 유리의 대화처럼, 유리와 함께 둘러앉은 사람들의 대화처럼.
혜영은 일에 바쁜 와중에도 자녀 교육을 끔찍하게 챙기는 엄마다. 학원 마치고 귀가하는 시간에 맞춰 따뜻한 찌개를 보글보글 끓여 밥상에 내놓는다. 딸이 끔찍하게 싫어하는 꽁치찌개를, 두뇌 발달에 좋다는 이유로 늘. 꽁치찌개가 끓는 소리는 어쩐지 거실 어항의 산소 발생기에서 나는 소리와 비슷하게 들린다. 기른다는 것과 잡아먹는 것의 소리가 같아진다는 것,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독친은 그 소리가 들리는 지점을 포착한다.

*이하로 영화 <독친>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배우 장서희는 얼굴 가득 표정을 잘도 담아낸다. 피로와 짜증, 노력과 애착, 불안과 추궁, 아집과 독선 같은 것들을 덕지덕지 붙인 혜영의 얼굴을 하고, 그 감정들의 농도를 세밀하게 조절한다. 그 얼굴은 인간의 모든 것을 수치화해 등급을 매기는 일터에서 듣는 닦달을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쏟아내는 지친 노동자의 것인 동시에, 자식을 향한 지독한 마음이 뒤섞인 것이다.
호러 영화가 아님에도, 엄마 혜영의 표정에서, 딸 유리의 표정에서, 냉한 기운이 자꾸 읽힌다. 그건 아마도 우리가 이 영화에서 목격한 것이 애정을 가장한 폭력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놓고 펼쳐지는 폭력도 소름 끼치지만, 애정을 가장할 때 더욱 교묘하게 피부 바로 아래 끼치는 소름이 있다.
애정을 가장한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상대를 직시하지 않고 변죽만 울리면서, ‘너를 위해’라는 말로 칭칭 동여맨 폭력에 몇 번 타격감을 느끼다 보면, “내가 잘못된 건가?”라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 폭력의 가해자를 탓하지 못하는, 그러다 또 그런 스스로를 탓하는, 생각의 굴레에 빠지다 보면 어느새 거미줄에 걸린 작은 곤충처럼 무력해지기 쉽다.

그럴 때 무심한 말들은 아프게 와 닿는다. 무심하다는 건 깊이 들여다보지 않는다는 뜻이므로, 거기에 진심 어린 애정은 없으므로. 담임 기범과 주변 친구들이 유리를 볼 때 집에서 사랑 많이 받고 자란 애, 비뚤어질 이유도 없고 우울할 이유도 없고 그냥 반듯하고 행복한 애일 거라고만 봤듯이. 그러나 친구들은 이후 형사들의 질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가 이상했다고 말한다. 학교에 찾아와 예나를 찾는 혜영을 보며, 불쾌를 기민하게 감지하고 자리를 피했던 아이들이다. 결국 갈등은, 아픔은 어렴풋하게나마 감지될 수 있다. 누구도 유리를 그렇게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을 뿐이다. 이후에야 유리에 대한 기억들을 조각조각 모으다 보면, 사랑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다면 거기서 인간이 죽어가도 우리는 모르겠구나 통감하게 한다.

영화 속 아이들은 버티다 무너지기도 한다. 라이터로 마시멜로를 구워 먹을 수도 있고 속눈썹을 올릴 수도 있는 아이들에게 다짜고짜 담배를 의심하는 시선을 던지는 것은 어른들이다. 의구심의 시선이 오히려 아이들에게 짐을 얹었다. 글만 보면 다 안다던 국어 교사는 결국 끝내 아무 것도 몰랐고, 정작 영화 후반부 유리의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는 것은 철저한 타인의 몫이다.
사랑은 결국 직면하는 일이다. 예나는 직면했다. 유리를, 그리고 자신을. 그 결과 깨닫는다. 내가 주는 사랑이 상대에게 행복을 줄 거라는 오만,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은 반드시 행복할 거라는 편견. 예나는 그 결론에 이르게 한 마음을 “믿음”이라 표현했지만, 나는 그 믿음이라는 말은 사실 “속단”이 아닐까 생각한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깊이 들여다보기 전에 섣불리 내린 결론을 믿은 것이므로. 예나는 속단의 위험을 깨달았고, 속단하지 않고 깊이 애정을 품으며 앓기도 했으니, 앞으로도 잘 살아갈 것이다. 공교롭게도 예나가 지망하는 직업 세계에서 꼭 필요한 깨달음이기도 하다.

유리에 대한 기억을 털어놓는 친구들 사이, 영화과 입시생이라며 옛날 영화에서 흰 우유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말하는 아이가 있었다. 분위기를 가볍게 털고 넘어간 일화지만, 어쩌면 그의 말에도 일말의 진실은 묻어 있다. 영화에는 생각보다 많은 진실이 들어있다. 이 영화에도 그럴 것이다.
극화되긴 했지만 혜영의 초상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헬리콥터맘’이라는 단어가 신조어라며 신문에 나왔던 것도 옛날 일이 되었으니까. 사실 요즘은 혜영과 정반대 유형, 그러니까 자식에게 모든 걸 허용하는 방식의 양육자들이 세간의 화제가 되곤 한다. 인터넷에는 10년 이상 교사 혹은 강사로 살아온 사람들의 고충담이 넘쳐나고, 전문가들은 그렇게 ‘건강한 거절’을 경험해보지 못한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서 작은 거절에도 위축될 것을 지적한다. 아이를 잘 양육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사랑이라는 단어는 우상이 될 수 없다.
유리의 행적을 담은 CCTV 속 날짜는 2024년 6월, 지금으로부터 1년가량 남은 시간이다. 그 안에서 유리는 ‘빅 스튜던트’라는 애칭의 커다란 백팩을 메고 움직인다. 항공모함처럼 물건이 많이 들어가고 그만큼 무거운 가방이다. 학생 유리의 가방이 그렇게 무거워지기 전에, 민준이가 힘차게 동화책을 읽는 걸 끊지 않아도 될 기회가, 아직 1년은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혜영과 유리처럼 달려가는 현실 속 수많은 곳에, CCTV 속 숫자가 작은 희망의 이스터에그가 되길 바랄 뿐이다. 끝까지 사랑의 시선 하나로 버티던 아이들의 마음이, 어딘가에는 가 닿길 바랄 뿐이다.
2023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6/29~7/9) 중 상영일정
7월 1일 19:30-21:14 CGV소풍 4관 (상영코드 338)
7월 4일 19:30-21:14 CGV소풍 4관 (상영코드 634)
7월 6일 11:00-12:44 CGV소풍 10관 (상영코드 809)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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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와 함께 했던 영화는 환한 꽃이었어
나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사람이 나더러 '쟤는 아쉬운 애'라고 말할까? 이불킥 뻥뻥 흑역사를 만들어나가고 있을 때, 누가 나더러 그런 이야기를 내 뒤에 했을까? 내가 아는 한 난 욕먹은 게 전부지만 왠지 모르게 그런 사람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내가 모르는 재능이 나에게 있었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공부하는 쪽으로. 공부머리가 좋으면 엄청 편할 것 같다!
그러나 역시 살아본 결과 난 공부머리보다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는데 숙련도가 있다는 결론이다. 뭐 공부머리가 좋을 수는 있겠지만 이제까지의 삶을 반추했을 때 그렇지 못할 확률이 높다는 건 너무나도 잘 안다. 매일 두 편씩 쓰는 수기. 이 수기야 말로 나의 재능일지도 모른다. 누가 보면 성실한 축에 속하기 때문이다. 근데 이런 글쓰기도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있을까?라는 마음이 든다. 사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내가 좋아하는 취향과 비슷한 수다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느 부분에서 웃었고, 화가 났나 하는 일들이다. 주변인에게 미주알고주알 털어놓기엔 내가 봐도 쓸데없어서 싫을 것 같다. 이 잡듯 뒤져도 만나기 어려웠던 그 사람. 언젠가 나도 그를 위해 할 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 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무도 모르는 이방인처럼
여자는 누군가의 책방에 도착한다. 스카프를 꼼꼼하게 두르고 나타난 여자. 이 가게의 주인과 잘 아는 사이인 것 같다. 안에 있는 것들을 몇 번 뒤적거리다 밖의 테라스로 나온다. 전자담배를 피우는 여자. 가게 직원이 나와 ‘필요한 건 없나요?’라고 묻는다. 담배를 피우러 왔다고 대답하는 여자. 직원이 다시 가게로 들어서고 이곳의 주인이 나타난다. 언니! 두 여자는 오랜만에 만난 것 같다. 서로의 근황을 묻는 두 사람. 같은 직원이 어떤 사람이냐 묻는다. 동생이에요. 아는 동생. 아. 너 글은 쓰니? 아뇨. 아마 앞으로도 안 쓸 것 같아요. 너 살찐 것 같아. 맞아요. 저 10kg 쪘어요. 너무 쪄서 맞는 옷이 없네요. 그렇게 서로의 근황을 묻다 책 이야기로 향한다. 가게 주인은 손님에게 “얼마 전에 낸 책 읽었어요”라고 답한다. 그 질문을 듣고 본론을 물어보는 손님. “너, 왜 연락을 안 하니? 연락하는 게 부담스러웠어?”
책방 주인은 숨어 지내고 싶었나 보다. 사람을 만나는 게 어려웠던 주인. 주인은 손님이 어떻게 왔을까 궁금해졌다. 손님은 주인에게 ‘너 보러 왔다’고 답한다. 그렇게 솔직해진다. 솔직한 마음은 금세 책으로 옮겨간다. 이제 내가 읽고 싶은 것에 집중하게 됐다는 가게 주인. 세 사람의 대화는 직원의 수어로 이어진다. 날이 아직 밝지만, 날은 곧 저문다. 날이 좋을 때, 실컷 다녀보자. 금세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손님. 그렇게 우연처럼 만나 새로운 말을 배웠다.
저도 여기 처음 왔습니다
여자는 다시 이방인이 되어 전망대에 도착한다. 망원경으로 무언가를 관찰하는 여자. 갑자기 어떤 사람이 스윽 나타나서 인사를 한다. 저 모르세요? 영화감독이랑 같이 사는 사람. 우연 덕에 아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여자는 같이 사는 영화감독인 남자를 소개한다. 진짜 카리스마 있으세요. 뭔가 영혼이 없어 보이는 말 몇 마디를 한 후에 카페로 향한다. 저기서 뭐 마시도록 하죠. 손님은 영화감독의 영화를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같이 온 여자는 감독의 영화가 달라졌다고 한다. 맑아졌다고 한다. 뭐가 맑아졌어요? 영화 만드는 마음이 달라졌어요. 그게 영화로 나타나는 것 같아요. 제작에 대한 강박을 떨쳐냈다고 말하는 남자. 사는 태도를 고쳐야 영화를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다. 사는 걸 달라지게 한다라.. 말은 쉽지만 역시 어렵다.
감독은 여자가 썼던 소설을 가지고 영화로 만들고 싶었나 보다. 무기력하게 엎어졌던 지난 이야기를 꺼낸다. 왠지 모르게 영화 만드는 데 영화 외적인 것이 작동하는 것 같다. 이야기가 무르익고 남자에게 무언가를 배우는 손님 준희. 준희는 카메라 작동법에 대해 배우고 직접 써보기까지 한다.
소설가가 만든 영화
일행은 밖으로 나온다. 어? 저 사람 누구였더라? 그 사람 아냐? 그 배우? 우연히 영화감독과 배우, 소설가와 감독의 부인이 만나고 있다. 여배우 길수와의 근황을 이야기하는 중이다. 길수는 이제 더 이상 영화를 찍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나라 독립 영화 몇 편 나오다가 이제는 그 바닥을 떠나려고 하는 것 같다. 길수 씨가 아까워요. 감독은 한 명의 팬으로서 아쉬움을 토로한다. 길수 씨가 아까워요. 근데 준희는 감독의 이런 말이 듣기 싫었나 보다. “뭐가 아까운데요?” 답답해 돌아가실 것 같은 네 사람. 우연히 사람들을 만나 이상한 주제로 말싸움하고 있다. 이 꼴이 웃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거죠.” 이죽거리는 답을 내놓자 두 사람은 후다닥 도망친다. 두 명만 남았다. 어색한 분위기의 두 사람. 한, 두 마디 대화를 하다 또 지인을 만난다. 그 사람은 영화를 공부하는 사람이다. 준희와 길수는 경우와 영화를 만드려고 한다. 난 있는 그래도를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그럼 다큐멘터리가 되겠네요? 아니오. 그런 건 아니에요. 아. 그럼 뭘 만들지 기대가 되네요.
비스듬히 겹쳐 보이다
비교적 순한 맛의 홍상수다. ‘그 일’이 공개된 후의 홍상수는 매웠다. 아예 죽음이 소재였던 <강변 호텔>이나 <풀잎들>과는 다른 소재를 갖고 왔다. 그 소재는 창작론이다. 영화 전반적으로 ‘하고 싶은 일’과 ‘어떻게 창작할 것인가’가 끝까지 반복된다. 소설가 준희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으려고 하고 있다. 근데 갑자기 불현듯 이상한 느낌이 들면 그건 맞는 것 같다. 이 ‘소설가’라는 직업을 ‘영화감독’으로 치환하면 누가 봐도 홍상수 본인의 이야기다. 영화감독이나 소설가 둘 다 뭔가를 창작한다는 점이 이에 대한 근거다. 있는 그대로를 묘사하려고 하는 준희의 말이나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의 인물의 모습은 겹쳐 보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의 러닝타임의 1시간을 투영해서 자기가 하고 싶었던 말을 한다. 나, 영화 만드는 방식을 달라지게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 인위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던 자기의 모습을 극 안에 투영하기 시작한다. 이런 영화의 화법은 준희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영화감독은 길수에게 '아깝다'라고 답한다. 길수는 이에 대답한다. '시나리오는 들어오지만 그냥 독립영화 몇 편 나왔어요. 사람이 귀찮아서요.’ 이건 김민희 배우의 현재 입장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어느덧 그녀가 홍상수 이외의 영화에 나온 지가 꽤 됐다. 김민희 배우는 <화차>와 <아가씨>로 만개했던 포텐을 뒤로 한지 오래다. 이런 나는 김민희 배우를 보며 솔직히 아깝다고 생각했다. 천우희 배우만큼이나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뭐 자의 반 타의 반 이런저런 여론 때문에 복귀가 성사될 때 반응이 쉽게 예상이 된다. 전국적인 대스타가 되어 우리나라 충무로를 반으로 쪼개기 충분한 김민희 배우. 그녀의 현실은 평단의 호평과는 별개다.
그게 실패한 삶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아닐 수도 있다. 적어도 홍상수는 이 연인의 처지와 입장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넌 재능이 있어. 근데 단순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것뿐이니까. 이런 위로 아닌 위로는 영화의 후반부로 향할수록 처연해진다.
단 한 명의 사람에게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아요. 생일. 뭐 그런 걸 소재로 영화로 만들 수도 있어요. 소설가는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준희는 생일을 소재로 한 이야기를 쭉 말한다. 길
수는 ‘저 진짜로 그런 일 있었어요’라고 답한다. 그리고 길수는 남편이랑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 술자리에서 내면의 이야기를 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길수 부부는 더 이상 술자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 같다. 누가 봐도 소원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는 영화에서 일어나는 내면의 이야기(<소설가의 영화>에서, 길수 부부가 내면의 이야기 '술자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과 이제 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말과 유사하다. 그동안 포기할 수 없었던 내면의 욕망, 그러니까 세상이 허락하지 않았던 로맨스를 품고 작품을 찍어내던 예술가의 입장이다. 시간이 지나며 멀어질 수밖에 없어. 그런데 이젠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외면하지 않는다. 감독이 ‘준희’고 배우가 ‘길수’라고 가정하면 홍상수는 이제 외면하면 안 될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비유가 성립된다.
이 비유는 사실 후반부로 갈수록 노골적이다. 간단하다.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누가 들어갈 수 있었음에도 관객은 단 한 명이다. 여배우 길수뿐이다. 또 다른 두 인물의 대화에서 ‘이 영화를 꼭 시간 지나고 나서 봐라’라고 말한다. 그니까 관객 길수가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길 바란다’고 말하는 셈이다. 그리고 단 한 장면에서 흑백이던 색감이 컬러로 바뀐다. 꽃을 든 길수. 화장을 안 한 맨 얼굴로 렌즈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슬픈 음악과 함께 길수는 행인과 함께 길을 건넌다. 그렇게 영화 크레딧이 올라간다. 순서 상 단편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가도 무방한데 이 영화 전체가 끝났다고 알린 셈이다. 자기가 하고 싶던 이야기가 끝이 났다. 준희는 자기의 작품 세계를 오롯이 반영한 영화를 끝냈다. 그리고 길수는 혼자가 됐다. 심지어 영화관 스태프와 가는 길마저 다르다. 카메라는 길수가 떠난 곳을 비춰준다. 같이 올라가지 않는다. 또 이 길수가 사람들과 함께 있는 모습까지 비쳐주지 않는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로 만든 영화가 끝나고 여배우는 혼자가 됐다. 영화는 그렇게 감독의 전부였다. 그런데 이제 정말 하고 싶었던 삶에 관한 이야기가 끝나니 길수는 혼자가 됐다. 우리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한 사람의 미래다. 이제 그녀는 인지도가 너무 높아졌다. 기라성 같은 배우들과의 연애. 두 편의 영화에서 만개했던 연기력. 빼어난 미모까지. 우리나라 영화판이 만든 슈퍼스타인 그녀. 이 여배우는 다시 슈퍼스타로 돌아가기에 너무 멀리 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즐거웠던 일상이, 이젠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 마저 끝나 영화의 제작진 자막이 올라가고 있다. 그리고 실질적인 엔딩이 한번 더 나온다. 굳이 혼자가 된 길수를 조명하는 감독. 그는 이제 인정하는 것 같다. 내가 외면할 수 없는, 이 시간의 끝자락에 서서,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며 웃고 떠들던, 첫 만남의 술자리가 끝나가고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속에서 너와 함께했던 시간은 꽃과 같이 웃는 얼굴이었다는 걸. 언젠가 날이 저무는 걸 맞이했을 때 이 영화를 봐달라는 것을. 네 삶은 절대 아까운 인생이 아니고, 나는 그런 너를 아름다운 색감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찾았고 이제야 보이는 것
영화는 홍상수의 창작론을 소재로 이끌어간다. 물론 홍상수가 어떻게 영화를 만들어 왔는지에 대해서도 공부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가 한 명의 연인에게 바치는 영화라고 보는 것이다. 확실한 근거는 앞에서도 쓴 것들이다. 혼자서 보는 영화. 환하게 웃는 미소의 색감. '삶의 이야기'를 끝내고 올라가는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 감독 홍상수는 이제야 예술가로서의 창의성이 넓어진 것 같다. 그리고 이 성장을 어두운 환경과 대비시키는 것이야 말로 그가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사람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이 후반부에 있다고 보는 쪽이다. 환하게 웃는 얼굴.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오래 기억에 남았다. 물론 누군가의 마음에 대못을 박는 일이 절대 잘하는 짓을 아닐 것이다. 내가 뭐 제 3자의 입장이지만 이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는 나쁜 인간이다. 그는 머지 않아 상처준 사람에게 반성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것들을 떠나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연인에게 바치는 감사함의 표시는 큰 반향으로 남을 것 같았다. 이것이야 말로 감독 홍상수의 연출력이 아닐까? 잔잔히 집중하게 만들어 후반부의 터트리는 힘, 그게 그가 가진 장점이 집약됐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가의 영화가 아니라 홍상수의 영화다. 이제 보내야 할 것에 대해 당신얼굴 앞에 대고 기억할, 그와 그의 연인을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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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의 질주> 없는 할리우드는?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 <분노의 질주> 시리즈 제9편인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가 5월 19일 국내에서 최초로 개봉됨과 동시에 공휴일 효과에 힘입어 개봉일 관객 수만 40만 명을 끌어모으며 흥행 초대박을 예견했는데요. 역시나, 개봉주 주말 관객 수 62만 명을 모으며, 개봉 5일 만에 관객 수 100만을 훌쩍 넘겨 오랜만에 코로나 이후 최고 흥행작인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를 뛰어넘는 흥행을 기대해 볼 작품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분노의 질주 9> (이하 F9)의 흥행 돌풍은 비단 한국에서만의 일이 아니라고 하는데요. 5월 19일, 한국과 동시에 개봉한 홍콩과 더불어 5월 21일 개봉을 택한 중국까지 총 8개의 시장에서 1억 6200만 달러 (한화 약 1830억 원)을 끌어모으며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최고 흥행을 일궈내 할리우드의 체면을 살려주었습니다.
이번 F9의 흥행은 극장 최대 성수기인 여름 시장을 시작함에 있어 굉장히 고무적인 일인데요. 특히, 팬데믹 이전의 <분노의 질주> 전작의 개봉주 박스오피스 성적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해외 수익 전체 162만 달러 중 135만 달러의 수익을 낸 중국 시장의 경우, 2017년의 <분노의 질주 8>이 세운 개봉주 수익 185만 달러에 이은 시리즈 2위에 달하는 기록이고, 최근 2년간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100만 달러 수익을 돌파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작품이라고 하는데요. 아시아 시장을 시작으로, 6월 25일 자국인 북미 개봉과 60개국에서의 개봉을 앞둔 F9는 할리우드 내 여타 대작들이 디즈니+ 등에서 동시 개봉을 택한 것과 달리, 극장에서 단독으로 개봉하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아직 F9가 상륙하지 않은 할리우드 시장은 새로운 공포 시리즈를 써 내려갈 영화 <스파이럴>이 개봉 2주 차인 현재까지 총 150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요.
이로써, 공포 대작 <쏘우> 시리즈는 전세계 10억 달러를 넘긴 시리즈 반열에 당당히 오르게 되었습니다. 2004년, <쏘우> 제 1편과 창대한 시작을 함께한 ‘제임스 완’ 감독은 F9의 전작인 <분노의 질주: 더 세븐>의 감독이기도 한데요. 제임스 완 감독이 연출한 시리즈 제7편은 어벤져스를 뛰어넘는 전세계 수익을 올린 대작입니다. 그런 제임스 완 감독이 써내려간 또다른 공포 세계관, <컨저링> 시리즈 제3편 또한 6월 개봉을 앞두고 있다는 점 또한 주목해야 할 것 같습니다.
국내와 해외 박스오피스 시장이 이를 기점으로 더욱 살아나길 바라며,오늘도 영화로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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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적 이성’ vs ‘이성적 종교’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좁디좁은 창문, 겉보기보다 넓고 깊은 집 구조, 음습한 지하실, 전파를 차단하는 벽, 장치를 달아두어 열 수 없는 문. ‘사이비’ 혹은 ‘이단’의 딱 들어맞는 은유다. 흥미로운 건 영화가 이 은유를 비틀어 종교와 이성의 ‘적대적’ 관계를 재현하는 방식이다.
영화는 오프닝 시퀀스부터 모르몬교 신자인 두 젊은 여성 반스와 팩스턴이 종교에 ‘속고’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매그넘 콘돔이 실은 일반 콘돔과 사이즈에서 별 차이가 없다는, 남자의 허세와 마케팅의 흔한 거짓말이 합쳐진 무수한 거짓말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두 사람의 대화는 그들의 현재와 다른 듯 닮았다. ‘콘돔’이라는 성적 상징물은 (적어도 교리의 측면에서는) 정반대에 있는 두 여성의 보수적 삶과 대비를 이루지만, 동시에 그들의 종교적 ‘확신’이 실은 마케팅 회사의 거짓말과 닮은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암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믿음으로써 속고 있다.
반스와 팩스턴은 ‘누가 봐도’ 모르몬교고, 사람들은 대개 두 사람을 무시하며 종종 모욕적인 방식으로 두 사람을 조롱한다. 그런 그들에게 교리에 관심이 있다며 방문을 요청한 중년 남성 리드의 존재는 반갑고 귀하다. 그러나 따뜻하고 온화한 미소를 가진 리드와의 몇 마디 대화에서, 반스와 팩스턴은 본능적으로 불안을 느낀다. 리드는 한때 일부다처제를 허용한 모르몬교의 교리, 유일신을 숭상하는 종교의 난점 등을 두고 두 사람과 토론하고자 한다. 그는 주제에 관한 깊이 있는 식견과 분명한 입장으로 그저 호의를 갖고 교리를 설명해주러 왔을 뿐인 두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다. 리드의 정중하고 부드러운 태도는 불안을 상쇄하는 알리바이가 되어주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게 금세 판명난다. 그러나 이미 문은 잠겼다. 두 사람은 갇혔다.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전화도 되지 않는 집. 리드는 여전히 정중한 태도를 잃지 않지만 점점 더 거세게 두 사람을 몰아붙인다. 반스와 팩스턴은 완전히 겁에 질린다. 리드의 논거는 분명하다. 기독교뿐 아니라 모든 유일신 종교가 여러 지역의 신화를 갈무리해 신비화한 것일 뿐이다, 이러한 특징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그리고 모르몬교까지 반복되어왔다 등등. 여러 신화의 짜깁기와 변형이 유일신 종교의 근원이라는 주장이다. 뒤이어 정교하게 설계된 리드의 반反신앙 실험이 이어지고, 두 사람 그리고 그들의 믿음은 탈진해 소진할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극한에 몰린 순간, 세 사람 사이에 반전의 계기가 싹튼다.
리드의 주장은 타당하다. 종교의 사회적 필요성에 관한 논의와는 별개로, 여러 역사 및 문헌 연구로 입증된 내용이다. 그러나 이성으로 무장한 리드는 이성을 ‘믿는’ 듯 보인다. 그것도 ‘종교적’인 방식으로. 그는 자신의 종교 비판에 심취해, 이를 종교적 믿음의 대상으로 구축했다. 한편, 반스와 팩스턴은 리드와 맞서는 방법이 신실한 믿음이 아닌 논리적 반박이라는 점을 깨달아간다. 힘으론 못 이겨도, 머리로는 이길 수 있다는 자각이다.
그러니까 ‘이성적’ 인간인 리드는 거짓 신화에 기댄 통제가 종교의 근원이라는 주장을 ‘종교적’으로 신봉하고, 그에게 대항하는 두 명의 ‘종교적’ 인물은 ‘이성적’ 추론을 무기 삼아 맞선다. 이 구도에서 폐쇄적 믿음에 갇힌 건 오히려 이성의 소유자 리드다. 그는 자기가 비판하는 사이비, 이단의 폐쇄성을 그대로 구현한 듯한 집에 살며 그 집에서 자기가 옳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 여성 종교인을 고문, 감금해왔다. 반면 모태 신앙인 반스와 팩스턴은 자신의 종교와 닮았다고 할 수 있는 폐쇄성을 지닌 리드를 피해 그의 집(즉 ‘사이비’ 혹은 ‘이단’)에서 빠져나가고자 한다. 영화는 이성과 종교의 통념적 구도를 뒤집어, 스릴러·공포 영화의 오랜 무대인 집을 폐쇄적 믿음의 상징물로 변환하여, 과연 누가 ‘이단(heretic)’인지 묻는다.
젠더 역학의 측면에서, 종교와 이성에 대한 영화의 비틀기는 더한층 깊어진다. 확신에 찬 중년 남성과 그가 설계한 세계에서 두려움에 떨다가도 상대의 무기를 탈취해 자기 자신들을 가둔 감옥의 설계도를 조금씩 깨달아가는 젊은 여성. 이들이 만들어내는 젠더·연령의 권력 구도는 이 영화가 종교와 이성에 관한 통념을 다른 각도에서 조명해 장르 영화의 재미를 생산한다는 점을 넘어, 통제와 자유라는 더 넓은 주제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인다. 〈콰이어트 플레이스〉 시리즈 등에서 호흡을 맞춰온 스콧 벡, 브라이언 우즈의 기교가 돋보이는 장르 영화의 재미에 충실한 영화다. 동시에 장르 영화의 문법과 소재 곳곳에 전통적 상징을 비트는 것들을 배치한 익살과 통찰이 돋보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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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 죽음의 두려움에 관한 SF
우리는 누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간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식물이 죽음이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다치거나 아픔을 겪어야 하는 순간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인간은 그런 사고나 질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의학기술을 발전시켰다. 다친 사람을 치료하고 질병을 치료하거나 예방할 수 있는 약을 개발하여 수명을 길어지게 했다. 그래서 인간의 수명은 조금씩 길어져 길면 100세까지 살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의학이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래 산다는 것은 정말 좋은 것일까. 삶을 오랜 시간이어가려는 욕망은 과거 진시황의 이야기로 대표된다. 진시황은 장수하기 위해 명약을 찾아내려 애썼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늙고 죽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 헤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삶이 계속 이어졌을 때를 상상해 본 적이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삶이 계속 지속되고 인생에서 겪는 희로애락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하나의 생을 살면서 매일 행복한 시간만 가질 수는 없다. 누군가가 죽으면 그 마음의 아픔을 감당해야 하고 몸이 아프면 그것을 치유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죽지 않는 삶에도 고통과 두려움이 따른다.
영화 <서복>은 복제인간을 등장시켜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과거 정보국 요원이었던 기헌(공유)은 어떤 병으로 인해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 그때 정보국에서 복제인간 서복(박보검)을 안전한 장소로 이동시켜 주면 서복에 대한 실험으로 추출한 기술로 병을 치료해준다는 제안을 받는다. 과거 같이 일했던 파트너의 목숨을 잃게 했다는 죄책감에 빠져있는 기헌은 자신을 치료하기 위해 그 일을 받아들인다. 복제인간 서복은 실험실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계속 실험을 당하는데 실험실에서 그는 물건 취급을 받는다. 세상에 나가본 적 없는 그는 기헌과 함께 외부로 나가게 되고 서복을 죽이려는 어떤 세력의 공격을 받고 도망자 신세가 된다.
영화 속 기헌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죄책감이라는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삶에 대한 두려움도 같이 느끼고 있다. 그래서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어떤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야 할지 잘 모르고 방황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사실 그도 자신이 어떤 것을 더 두려워하는지 어떤 선택을 하며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가 서복을 만나고 그의 질문을 받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지, 삶에서 느끼는 고통이 죽음과 비교했을 때 얼마나 두려운지를 자기 자신에게 묻기 시작한다.
서복은 정상적인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다. 엄마라고 부르는 임 박사(장영남)에 의해 만들어졌고 그에 의해 교육받고 자랐지만 그가 만들어진 목적은 인간의 수명을 늘리는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실험과 주사의 고통을 견디며 삶을 이어가야 한다. 특별한 사고가 없다면 죽지 않는 서복도 기헌과 마찬가지로 살아가는 것이 고통이고 두려움의 시간이다. 기헌과 차이점이 있다면 서복은 삶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영화 내내 기헌에게 묻는다. 죽음이 왜 두려운 것이고 피하고 싶은 것인지.
세상의 일반적인 생활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서복이기 때문에 서복을 쫒는 사람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과정에서 기헌은 서복에게 자잘한 삶의 정보나 재미들을 알려준다. 이를 테면 컵라면 먹는 법 같은, 서복이 과거에 경험해 보지 못한 정보들을 전달하면서 서복의 호기심을 채워준다. 즉 기헌이 삶에 대한 감정이나 지식을 서복에게 알려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가 조금씩 진행될수록 이 관계는 뒤집어진다. 서복이 던지는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들은 기헌에게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하고 고민에 빠지게 한다. 기헌이 단순한 삶의 정보를 전달한다면, 서복은 철학적인 화두를 전달한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정보국의 안부장(조우진)도 흥미롭게 느껴진다. 그는 복제인간 기술로 인간의 수명이 연장되는 순기능보다는 인류 자체가 줄어들거나 멸망할 수 있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죽지 않고 특별한 능력이 있는 복제인간의 탄생이 결코 인간에게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이 그의 두려움을 극대화시켰다. 극 중에서 그는 기헌과 서복과 대척점에 서서 싸우는데 그의 두려움은 인류 말살에 대한 두려움이어서 안부장의 시선으로 영화를 보면 그는 사악한 악당의 기질을 가진 것만은 아니다.
즉, 기헌과 서복 그리고 안부장, 그리고 연구에 투자한 김 회장(김재건) 등 모든 인물을 움직이게 하는 두려움이다. 서복이 끝이 없는 삶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면 나머지 인물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크게 느낀다. 그리고 기헌은 그 중간 어딘가에서 고민하는 인물이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감정 이입할 수 있는 캐릭터다. 서복이 던지는 새로운 질문들을 듣고 기헌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처럼 관객의 마음도 움직인다. 그런 이유에서 영화 말미 서복의 눈빛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SF 액션이라는 외피를 쓴 영화 <서복>은 복제인간을 등장시켜 서복과 기헌이 이끌어가는 드라마를 차분히 보여준다. 그래서 간간히 이어지는 액션이 크게 눈에 띄지 않고 서복에 의한 일방적인 타격만을 전달하기 때문에 서로 주고받는 전투 장면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액션을 통해 긴장감이 올라가기보다는 다소 김이 빠지는 느낌이 다소 강하게 든다. 반면에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굉장히 명확하다. 서복이 던지는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은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전달됨으로써 각자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이 어떤 쪽으로 기울어있는지를 저울질하게 만든다. 즉, 볼거리 측면에서는 아쉬움이 크지만 자신이 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확히 전달하는 영화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메시지가 명확해서 성공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꽤 큰 제작비가 들어갔고 관객들이 기대했던 볼거리가 하고자 하는 서사와 잘 섞이지 않으면서 액션과 서사가 따로 노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명확한 메시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굳이 이렇게 큰 규모의 액션 장면이 들어갈 필요가 있었을까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메시지와 연기를 제외하고는 아쉬움이 많이 느껴진다. 공유와 박보검의 연기가 모두 좋은데 특히 박보검은 천진난만하고 순진한 서복과 굉장히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불신지옥>, <건축학개론>을 연출한 이용주 감독의 세 번째 연출작이다. 공포나 멜로 장르 안에서 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명확히 담아냈던 전작들은 공포와 멜로 장르에 적절하게 그런 메시지를 녹아내어 감정을 움직였다. 하지만 이번 <서복>은 SF 액션 장르에 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잘 어우러졌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어쩌면 영화 속 기헌이 조금 덜 두려운 쪽을 선택한 것처럼 감독 자신이 조금 덜 두려운 쪽을 선택해 집중한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유튜브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서복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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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애가 가득한 영화 <레슬리에게>
*스포일러 유의
아내와 함께 용산 CGV에서 영화 <레슬리에게>의 시사회에 참석했다. 마이클 모리스 감독의 영화 <레슬리에게>는 인간 생에 존재하는 모든 감정을 롤러코스트의 드라마틱한 움직임처럼 보여준다. 로또 당첨으로 세상을 모두 가진듯한 희열, 알코올 중독으로 파멸을 겪은 아픔과 후회, 버린 어린 아들이 성장하여 엄마를 멀리하는 현실에 대한 고통,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에서 오는 자책.....
돈벼락으로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한 레슬리. 지역방송과 인터뷰에서 아들 제임스와 함께 나와 마음껏 기쁨을 표현했다.
“이 돈으로 무엇을 하고 싶으신가요?”
“아들이 가지고 싶어 하는 기타도 사주고, 식당도 차리고....”
6년 후, 술에 빠져 수억의 복권 당첨금을 몽땅 탕진한 레슬리. 올데 갈 데가 없어 장성한 아들 집을 찾는다. 하지만 알코올중독을 뿌리칠 수 없어 술을 멀리하겠다는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아들 제임스(오웬 티그역)는 룸메이트의 돈을 훔쳐 술을 마셨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엄마를 멀리한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하고 실수를 반복하기도 한다. 영화는 자신의 그릇된 행동으로 나락에 떨어진 사람이 변화하여 일어서는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담고 있다. 주인공 레슬리의 알코올 중독과 함께 모텔의 젊은 주인 로열도 마약중독자이다. 중독은 삶을 파괴하고 관계를 무너뜨린다. 중독은 또한 의존을 불러온다. 알코올에 중독이 되면 알코올 의존을 벗어나기 힘들고, 마약에 중독되면 마약에 손을 떼기 어렵다.
의지를 가지고 중독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엄청난 고통의 금단현상이 따라온다. 로열이 마약이 생각나면 밤중에 괴성을 지르고 밖으로 뛰어나가 옷을 벗고 춤을 추며 마약에 대한 생각을 돌리려고 몸부림치는 이유다. 레슬리는 오로지 아들에게 괜찮은 엄마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통스러운 술의 유혹을 뿌리친다.
나락에 떨어진 인생에도 눈을 들어 보면 분명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 그들의 존재와 호의가 망한 인생에 온기를 돌게하고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
호텔 관리인 스위니(마크 마론역)의 관심과 사랑은 중독된 두 사람을 치유하고 중독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구원자가 된다. 잘못된 과거에서 벗어나 새 삶을 사는 영혼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은 이 영화는 비평가협회상을 받아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촬영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촬영감독 라킨 세이플이 맡아 영화를 더욱 빛냈다. 레슬리의 역을 맡은 안드레아 라이즈보로의 연기는 빛났다. 영화의 깊이를 더한 그녀의 연기는 아카데미에서도 인정하여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렸다.
영화의 러닝타임 대부분을 인간사의 어두운 내용들이 펼쳐져, 보는 내내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다. 2시간 러닝타임이 3시간 정도로 느껴졌다. 다행히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끝나 카타르시스가 되었다. 옆에 앉은 여성관객도 억눌린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서인지 참지 못하고 소리 내며 훌쩍이며 엔딩에 감동했다. 2시간 내내 인간사에 등장하는 모든 감정이 파도치는 보기드문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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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앳된 얼굴의 청년이 교도소의 왕이 되기까지
8★/10★
어느 범죄자 소년이 감옥에서 ‘갱생’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담은 느와르, 범죄 영화 〈예언자〉(2010)를 보며, 자크 오디아르가 영화적 재미와 정치적 메시지를 배합하는 데 정말 탁월한 능력을 가진 감독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했다.
주인공 말리크는 부모가 없다. 어릴 때부터 감옥을 들락거렸다. 아랍계이긴 하나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프랑스어와 아랍어 모두를 말할 줄 안다. 그러니까, 말리크의 정체성은 ‘혼종적 백지 상태’다. 그래서 감옥의 왕으로 군림하는 또 다른 수감자 세자르의 심부름을 하면서도 이너서클에는 들지 못하고, 아랍계 죄수들에게서는 동포를 팔아먹은 자라고 비난받는다.
그러나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말리크의 정체성은 바꾸어 말하면 어디 한 곳에 속하지 않고 두 세계를 오고 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비록 완전한 ‘내부인’은 되지 못할지라도, 즉 확고한 정체성은 갖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말리크는 타고난 순발력과 대담함으로 이를 자신의 무기로 만들어 스승, 아버지, 교도관 등의 역할을 종합해 폭력적으로 군림하던 세자르를 잡아먹고 새로 왕좌에 오른다.
영화에는 세자르와 그 수하들이 감옥에 점차 아랍계 죄수가 많아지는 데 불만을 표하는 장면이 몇 번 나온다. 유럽계 간수들이 자기들 편이라 감옥을 장악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아랍계 죄수들을 자신들 통치하에 두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세자르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말리크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상황과 맞물린다. 동료들이 다른 감옥으로 이송되고, 아랍계 죄수들은 점점 늘어나면서 세자르는 서서히 몰락한다. 그리고 말리크는 ‘타고난’ 인종적 정체성으로 아랍계 죄수 무리에 스며들어 그들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한다. 지금까지도 프랑스에 횡행하는 인종주의적 극우의 공포 속에서 ‘백지’ 상태이던 말리크를 아랍계의 수장으로 만든 건 뭘까? 프랑스인을 우대하고 아랍계를 차별한 (감옥) 시스템 그 자체다. 말리크는 다른 모든 죄수와 마찬가지로 시스템 안에서 생존을 도모했고, 특출나게 성공해 왕좌를 대체했을 뿐이다.
앳된 얼굴의 청년 말리크가 몇 년의 수감 기간 중 ‘갱생’ 및 ‘교화’되는 과정, 그리고 마침내 ‘예언자’로 등극하는 과정은 어떠한가? 말리크는 수감되자마자 세자르의 강압적 요구로 아랍계 죄수 레예브를 살해한다. 이후 레예브의 유령과 말리크가 대화하거나 함께 있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 말리크의 성장은 그가 레예브의 환영을 ‘불태우고’ 자신의 모호한 정체성이라는 약점을 강점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이뤄진다. 혼란스러운 정체성에서 죄책감을 거쳐,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던 한 남자가 강력한 남성 주체로 우뚝 선다.
말리크의 성장은 극우와 인종주의를 둘러싼 감정 역학과 더불어 젠더 정치의 측면에서도 흥미롭다. 세자르가 그에게 레예브를 죽이라 했을 때, 말리크는 동성애자 레예브의 성기를 애무해주다 입안에 숨긴 면도칼로 그의 목을 공격하려 한다. 계획이 어그러져 그 방법으로 죽이진 못하지만, 세자르가 말리크에게 알려준 살인의 방법은 말리크가 남자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갓 입소한 말리크는 세자르가 아랍계 남성의 성기를 빨다 살해하라고 명령할 수 있는 존재, 즉 ‘호모’ 혹은 ‘여성’이었다. 말리크에게 규범적 의미의 남성성은 부재했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말리크는 죽은 동료 리야드의 아내, 아이와 함께 걷는다. 가장의 죽음으로 위기를 맞은 이성애 핵가족의 구원자로서 행진한다. 그리고 그 뒤로는 수많은 남자가 뒤따른다. ‘여성’이자 ‘호모’였던 그는 수컷 무리의 우두머리이자 한 가정을 책임질 수 있는 ‘남자’로 거듭난다. 〈예언자〉는 이처럼 여러 정치적 주제를 종횡무진 망라하며 장르의 재미를 구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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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시내가 사라졌다 리뷰 - 이미테이션 가수 연시내의 진짜 윤시내 찾기 어드벤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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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리뷰영상은 홍보마케팅사를 통해 저작권 협의가 진행되어 제작된 영상입니다
영원한 디바 `윤시내`가 고별 콘서트를 앞두고 사라졌다?!
전설적인 가수의 실종으로 대한민국이 떠들썩한 가운데,
20년 간 이미테이션 가수 `연시내`로 활동해온 순이(오민애)는
`윤시내`와 함께할 뻔한 꿈의 무대도, 일자리도 잃어 좌절에 빠진다.
한편, 사람들의 관심이 고픈 유튜버 `짱하`(이주영)는
라이브 방송 중 우연히 찍힌 엄마 `연시내` 영상의 조회수가 떡상하자
대박 콘텐츠를 꿈꾸며 `윤시내`를 찾는 여정에 따라 나서는데…
동료 가수 `운시내`(노재원)와 함께 가시내, 윤신애, 윤사내까지 모두 만나며
사라진 `윤시내`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시작한 동상이몽 두 모녀는 과연 `진짜`를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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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토르 : 러브 앤 썬더> 티저 예고편
위대한 신의 계획이란..? ❤️+⚡️ [토르: 러브 앤 썬더] 티저 예고편 최초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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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왓챠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런칭 예고편
음식을 먹기 힘들어져가는 워킹맘, 그리고 그녀를 위한 남편의 마음이 담긴 한 그릇. 애틋한 마음이 담긴 우리 가족만의 특별한 레시피가 올겨울 찾아옵니다.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온 스크린' 섹션 공식 초청작! 왓챠 오리지널 드라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12월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