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07-05 00:19:50
[BIFAN 데일리] 찌개와 어항의 소리
영화 <독친>

감독] 김수인
출연] 장서희, 강안나, 최소윤, 윤준원 외
프로그램 노트] “대학 가면 다 할 수 있댔지?” “알았어, 알았어.” 학교에 데려다주던 엄마의 잔소리를 적당히 웃어넘기는 듯하던 고등학생 딸은 그날 세상을 영원히 등지는 비극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 학교폭력, 랜덤채팅 어플리케이션 등 통상적인 청소년 문제를 중심으로 사건을 조사하던 경찰은 주변인 증언을 확보하면서 처음에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오묘하게 뒤틀린 모녀 관계를 발견하게 되는데…. 6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 장서희가 딸 인생의 성공을 위해 그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표독스러운 엄마 역을 맡아 실감 나는 연기를 펼친다. 고생스러웠던 지난 삶에 대한 보상심리로 자식의 인생을 통제하고드는 폭압적인 부모의 행동이 얼마만큼 큰 비극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는 현실 밀착 스릴러로, 관객에게 묵직한 경종을 울린다. (박꽃)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란 참으로 기묘하다. 코앞에서 싸우지 않아도 갈등은 감지되고, 통화의 일면만 듣거나 인사치레 같은 말만 들어도 상대와 관계의 거리감을 쉬이 가늠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펼쳐지는 엄마 혜영과 딸 유리의 대화처럼, 유리와 함께 둘러앉은 사람들의 대화처럼.
혜영은 일에 바쁜 와중에도 자녀 교육을 끔찍하게 챙기는 엄마다. 학원 마치고 귀가하는 시간에 맞춰 따뜻한 찌개를 보글보글 끓여 밥상에 내놓는다. 딸이 끔찍하게 싫어하는 꽁치찌개를, 두뇌 발달에 좋다는 이유로 늘. 꽁치찌개가 끓는 소리는 어쩐지 거실 어항의 산소 발생기에서 나는 소리와 비슷하게 들린다. 기른다는 것과 잡아먹는 것의 소리가 같아진다는 것,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독친은 그 소리가 들리는 지점을 포착한다.

*이하로 영화 <독친>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배우 장서희는 얼굴 가득 표정을 잘도 담아낸다. 피로와 짜증, 노력과 애착, 불안과 추궁, 아집과 독선 같은 것들을 덕지덕지 붙인 혜영의 얼굴을 하고, 그 감정들의 농도를 세밀하게 조절한다. 그 얼굴은 인간의 모든 것을 수치화해 등급을 매기는 일터에서 듣는 닦달을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쏟아내는 지친 노동자의 것인 동시에, 자식을 향한 지독한 마음이 뒤섞인 것이다.
호러 영화가 아님에도, 엄마 혜영의 표정에서, 딸 유리의 표정에서, 냉한 기운이 자꾸 읽힌다. 그건 아마도 우리가 이 영화에서 목격한 것이 애정을 가장한 폭력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놓고 펼쳐지는 폭력도 소름 끼치지만, 애정을 가장할 때 더욱 교묘하게 피부 바로 아래 끼치는 소름이 있다.
애정을 가장한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상대를 직시하지 않고 변죽만 울리면서, ‘너를 위해’라는 말로 칭칭 동여맨 폭력에 몇 번 타격감을 느끼다 보면, “내가 잘못된 건가?”라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 폭력의 가해자를 탓하지 못하는, 그러다 또 그런 스스로를 탓하는, 생각의 굴레에 빠지다 보면 어느새 거미줄에 걸린 작은 곤충처럼 무력해지기 쉽다.

그럴 때 무심한 말들은 아프게 와 닿는다. 무심하다는 건 깊이 들여다보지 않는다는 뜻이므로, 거기에 진심 어린 애정은 없으므로. 담임 기범과 주변 친구들이 유리를 볼 때 집에서 사랑 많이 받고 자란 애, 비뚤어질 이유도 없고 우울할 이유도 없고 그냥 반듯하고 행복한 애일 거라고만 봤듯이. 그러나 친구들은 이후 형사들의 질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가 이상했다고 말한다. 학교에 찾아와 예나를 찾는 혜영을 보며, 불쾌를 기민하게 감지하고 자리를 피했던 아이들이다. 결국 갈등은, 아픔은 어렴풋하게나마 감지될 수 있다. 누구도 유리를 그렇게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을 뿐이다. 이후에야 유리에 대한 기억들을 조각조각 모으다 보면, 사랑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다면 거기서 인간이 죽어가도 우리는 모르겠구나 통감하게 한다.

영화 속 아이들은 버티다 무너지기도 한다. 라이터로 마시멜로를 구워 먹을 수도 있고 속눈썹을 올릴 수도 있는 아이들에게 다짜고짜 담배를 의심하는 시선을 던지는 것은 어른들이다. 의구심의 시선이 오히려 아이들에게 짐을 얹었다. 글만 보면 다 안다던 국어 교사는 결국 끝내 아무 것도 몰랐고, 정작 영화 후반부 유리의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는 것은 철저한 타인의 몫이다.
사랑은 결국 직면하는 일이다. 예나는 직면했다. 유리를, 그리고 자신을. 그 결과 깨닫는다. 내가 주는 사랑이 상대에게 행복을 줄 거라는 오만,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은 반드시 행복할 거라는 편견. 예나는 그 결론에 이르게 한 마음을 “믿음”이라 표현했지만, 나는 그 믿음이라는 말은 사실 “속단”이 아닐까 생각한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깊이 들여다보기 전에 섣불리 내린 결론을 믿은 것이므로. 예나는 속단의 위험을 깨달았고, 속단하지 않고 깊이 애정을 품으며 앓기도 했으니, 앞으로도 잘 살아갈 것이다. 공교롭게도 예나가 지망하는 직업 세계에서 꼭 필요한 깨달음이기도 하다.

유리에 대한 기억을 털어놓는 친구들 사이, 영화과 입시생이라며 옛날 영화에서 흰 우유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말하는 아이가 있었다. 분위기를 가볍게 털고 넘어간 일화지만, 어쩌면 그의 말에도 일말의 진실은 묻어 있다. 영화에는 생각보다 많은 진실이 들어있다. 이 영화에도 그럴 것이다.
극화되긴 했지만 혜영의 초상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헬리콥터맘’이라는 단어가 신조어라며 신문에 나왔던 것도 옛날 일이 되었으니까. 사실 요즘은 혜영과 정반대 유형, 그러니까 자식에게 모든 걸 허용하는 방식의 양육자들이 세간의 화제가 되곤 한다. 인터넷에는 10년 이상 교사 혹은 강사로 살아온 사람들의 고충담이 넘쳐나고, 전문가들은 그렇게 ‘건강한 거절’을 경험해보지 못한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서 작은 거절에도 위축될 것을 지적한다. 아이를 잘 양육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사랑이라는 단어는 우상이 될 수 없다.
유리의 행적을 담은 CCTV 속 날짜는 2024년 6월, 지금으로부터 1년가량 남은 시간이다. 그 안에서 유리는 ‘빅 스튜던트’라는 애칭의 커다란 백팩을 메고 움직인다. 항공모함처럼 물건이 많이 들어가고 그만큼 무거운 가방이다. 학생 유리의 가방이 그렇게 무거워지기 전에, 민준이가 힘차게 동화책을 읽는 걸 끊지 않아도 될 기회가, 아직 1년은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혜영과 유리처럼 달려가는 현실 속 수많은 곳에, CCTV 속 숫자가 작은 희망의 이스터에그가 되길 바랄 뿐이다. 끝까지 사랑의 시선 하나로 버티던 아이들의 마음이, 어딘가에는 가 닿길 바랄 뿐이다.
2023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6/29~7/9) 중 상영일정
7월 1일 19:30-21:14 CGV소풍 4관 (상영코드 338)
7월 4일 19:30-21:14 CGV소풍 4관 (상영코드 634)
7월 6일 11:00-12:44 CGV소풍 10관 (상영코드 809)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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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만큼은 맘껏 웃고 싶을 때, <패딩턴>
오늘의 영화는 바로,
맘껏 웃고 싶을 때 보는 영화 <패딩턴>입니다.
ⓒ 네이버 영화
정보
개요 코미디 | 영국 | 95분
감독 폴 킹
출연 벤 위쇼, 니콜 키드먼, 휴 보네빌 등
등급 전체 관람가
줄거리
폭풍우에 가족을 잃은 꼬마곰 ‘패딩턴’은 페루에서 영국까지 ‘나홀로’ 여행을 떠난다.
런던에 도착한 ‘패딩턴’은 우연히 브라운 가족을 만나게 되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가족을 찾아 나선다!
한편, 말하는 곰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악당 박제사 ‘밀리센트’는 호시탐탐 ‘패딩턴’을 노리는데…<패딩턴>의 T.M.I
ⓒ 네이버 영화
<패딩턴> 원작은?
1958년, 영국의 문학작가 마이클 본드의 '내 이름은 패딩턴'이 영국에서 첫 출간되면서 인기를 얻었고,
지금까지 패딩턴 베어 시리즈는 3,500만부 이상 판매, 40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패딩턴 속편
2015년에 패딩턴이 개봉한 후, 2017년에 패딩턴 2가 개봉했고,
현재 패딩턴 3 제작 중에 있습니다.
"맘껏 웃게 만들다!"
ⓒ 네이버 영화
<패딩턴>은 페루에 살던 꼬마곰이 런던에 오면서 벌어지게 되는 일을 담았습니다.
꼬마곰이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이 상황 자체도 너무 재밌긴 하지만,
꼬마곰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런던의 모습 또한 유쾌하게 담아냈습니다.
칫솔이 어떤 용도를 쓰이는 물건인지 모르고 귀를 닦기도 하고,
안내 문구를 잘못 이해하고 하는 행동, 패딩턴의 행동 하나하나가 웃음을 띄우게 만들었습니다.
"화려한 출연진"
ⓒ 네이버 영화
벤 위쇼, 니콜 키드먼, 휴 보네빌, 샐리 호킨스, 다들 한 번씩은 들어본 이름들이죠?
세계에서 가장 다재다능한 여배우 중 한 사람으로 떠오르는 니콜 키드먼은
자신의 딸을 위해 출연을 결정했다고 하는데, 냉정하고 집착이 강한 박제사 역을 너무나도 잘 소화해냈습니다. 주인공 '패딩턴' 목소리는 가디언의 Hot List 2007에 주목해야 할 배우로 선정된 벤 위쇼가 맡았습니다. 밝고 천진난만한 패딩턴 그 자체를 보여줘 극의 재미를 더해줬습니다.
"이런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영화를 보고싶다?
- 가족과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를 찾고 있다?
- 코미디 영화를 좋아한다?
귀여운 캐릭터와 유쾌함이 더해져 큰 재미를 선사하는
지금까지 영화 <패딩턴>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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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랩 에디터 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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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5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장편 경쟁부문 발표
제75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장편 경쟁부문 초청작이 발표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홍상수 감독의 작품이 초청되었고,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과 미셸 프랑코 감독의 신작도 경쟁 부문에 올랐습니다. 마리옹 꼬띠아르, 마가렛 퀄리 등 우리에게 친숙한 배우들도 보이는데요 .
더 많은 작품과 스틸컷은 하단의 사진은 확인해 보세요!
[제75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장편 경쟁부문]
<Ari>, Léonor Serraille
<Blue Moon>, Richard Linklater
<La cache>(The Safe House), Lionel Baier
<Dreams>, Michel Franco
<Drømmer>(Dreams (Sex Love)), Dag Johan Haugerud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 홍상수
<Hot Milk>, Rebecca Lenkiewicz
<If I Had Legs I’d Kick You>, Mary Bronstein
<Kontinental ’25>, Radu Jude
<El mensaje>(The Message), Iván Fund
<Mother’s Baby>, Johanna Moder
<O último azul>(The Blue Trail), Gabriel Mascaro
<Reflet dans un diamant mort>(Reflection in a Dead Diamond), Hélène Cattet, Bruno Forzani
<Sheng xi zhi di>(Living the Land), Huo Meng
<Strichka chasu>(Timestamp), Kateryna Gornostai
<La Tour de Glace>(The Ice Tower), Lucile Hadžihalilović
<Was Marielle weiß>(What Marielle Knows), Frédéric Hambalek
<Xiang fei de nv hai>(Girls on Wire), Vivian Qu
<Yunan>, Ameer Fakher Eld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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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이 부모를 고소한 이유.
소년은 자신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다는 이유로 부모를 고소한다. 왜 이 소년은 부모를 고소한 걸까. 기적이 일어났지만 몰락한 곳, 가버나움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열악한 좁은 공간에 아이 6명이 방치된 이곳은 자인의 집이다. 또래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때, 자인은 생계를 위해 어린 동생들과 함께 나가 매일 매일 일한다. 이렇게 고단한 삶 속에서도 주변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아직 어려서 한없이 작은 자인의 힘은 역부족이다. 동생만큼은 꼭 지키고 싶던 자인은 부모에 의해 팔려 가는 동생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사하르가 감자야? 토마토야? 꽃을 피우게?” 더 이상 희망을 품을 수 없는 곳에서 나와 어린이들의 꿈과 희망을 외칠 수 있는 장소에 도달한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마법처럼 그 공간에 가만히 앉아있던 자인은 아이들의 공간과는 거리가 먼 곳으로 이동한다. 일할 곳을 찾지만, 어린아이를 채용하는 곳은 없었고 그곳에서 라힐을 만난다. 불법 체류자이지만 아르바이트하며 아들 요나스와 함께 살고 있었다. 라힐은 자인을 데려가 씻기고 요나스를 봐달라는 부탁을 한다. 하지만 등록되지 않은 삶을 지속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게 돌고 돌아 집에서 자신의 서류를 챙기러 왔건만, 그토록 지키고 싶었지만 지키지 못했던 동생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나고 자란 것과는 다르게 살 수 있다. 앞으로 어떻게 살고 어떻게 행동하는 가에 달렸다. 어른보다 책임감 있게 살아가는 자인은 쭉 자라온 환경과 비슷하게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려고 노력한다. 또한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자신을 돌보아준 사람의 아이를 돌보아 주기도 한다. 그와 반대로 아이들을 방치/학대하고 11살인 딸을 돈으로 팔아 출생신고가 안되어 있어 수술도 못받고 죽음에 이르게 했음에도 또 아이를 가진 부모의 모습을 보면 그저 웃음만 나온다. 부모로서의 책임감과 인간다움을 저버리고 이런 삶에서의 선택지가 이것뿐이라는 변명만 늘어놓는다. 극심한 빈부격차와 분열의 땅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에서는 집이라는 공간과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신분증이 누구든 가질 수 있지만, 누구나 가질 수는 없다는 사실이 아프게 다가온다.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식을 팔아넘긴 부모와 자식을 위해 불행을 끌어안은 부모를 옆에서 본 자인은 나고 자란 것이 다르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등록되지 못한 삶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기본적인 생활도 영위할 수 없는 자인이 부모를 고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모에 의해 유령이었던 자인이 범법자가 되고 부모에게서 벗어나고 나서야 비로소 자인이 된다.
자인은 그저 사랑받고 싶었을 뿐이다.
그저 평범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랐던 자인은 이제야 웃는다.
자인의 웃는 모습만으로도 충분해진다.
자인, 행복해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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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명의 배우가 전하는 가지각색의 이야기
나는 위로를 잘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이유는 그냥 멋있어서. 난 사람들을 울릴 줄 아는 사람들이 너무너무 멋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항상 무언가 말을 해도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앞뒤 다른 사람들이랑 친해지는 건 그 누가 와도 싫겠지? 나는 그런 것들이 엄청 싫어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하곤 했다. 사람을 사귀는 것도, 어떤 말을 하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다 내가 재밌지 않으면 하지 않았다. 영화 리뷰를 써서 올리는 것도 대중적인 픽들을 골라 쓰는 것, 그러니까 홍상수의 작품보다는 <라라 랜드>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같은 걸 써서 올려야 사람들이 더 많이 본다고 믿고 있다. 아니면 최근에 개봉했던 작품을 쓰는 거지. 모두의 시간은 소중하기 때문에 나름 객관적인 시선으로 글을 쓰면 사람들이 극장 가기 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 나름대로 뿌듯하겠지? 근데 나는 이게 어느 정도는 일반 대중들에게 먹힌다는 걸 앎에도 불구하고 말을 듣지 않는다. 여러모로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쓴 세상들을 읽게 만들려면 사람들이 어떤 걸 궁금해야 할지를 알면서도 내가 진정성을 담아 쓸 수 있는 글만 키보드에 적는 것이다.
그런 태도에서 오는 강점은 여러 가지가 있다. 첫 번째. 글 쓰기가 쉽다는 것이다. 없는 내용을 만들어서 쓰기보다는 있는 생각들을 와다다 쓰는 게 쓸 때 편하다. 두 번째. 몰입이 잘 된다는 것이다. 4초당 1번꼴로 휴대전화를 보는 나는 집중이 잘 돼야 다음 문장을 쓸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내 가치관이 담겨 누가 읽든 글의 힘이 느껴지게 하는 것 같다. <완다 비전>을 보고 느낀 후반부의 처연함이나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를 느낀 인연의 감사함도 다 내가 직접 보고 경험해서 쓴 글이다. 이는 비단 나에게만 적용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어떤 씨네 아티스트들은 자기의 이야기를 결합해서 생생한 이야기를 만들곤 하는데, 그런 식으로 극을 만들면 확실히 하고자 하는 말을 진정성 있게 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이 교훈을 며칠 전에 다시 한번 느끼게 됐다. 지난 8일 왓챠에 박정민-손석구-최희서-이제훈 네 명의 배우가 각본과 연출을 맡은 단편영화가 공개됐다. 아무 생각 없이 본 단편영화 4작품이지만 난 이번 해에 봤던 한국영화 중 가장 큰 감동을 받았기에 여러분에게 소개해보고자 한다. 각 배우들이 가진 진정성이 너무나 잘 느껴져 좋았다.
1) 반장선거(박정민)
반장선거는 아이들이 나오는 영화다. 한 초등학교 반에서 반정 선거를 하는데, 세 명의 후보가 나와서 각자의 선거운동을 펼친다. 사실 돌아보면 '초등학교 반장이 별건가' '고등학교 학생회장이 별건가' '대학교 ~장이 별건가'라고 생각하기 쉽다. -나 역시 그랬기 때문에- 물론 그 시간으로 돌아가면 나름대로 치열하게 했을 것이다. 이를 보여주듯 트와이스 섭외부터 시작해 가지각색으로 공약을 펼치는 아이들. 마치 2022 대선을 앞두고 있는 양 당의 후보를 보는 듯하다. 보통 이렇게 반장선거에 나갔던 아이들은 학생들의 주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은 흔히 말하는 '아싸'에 속하는 것 같다. 아이들에게 그렇게 인기가 많지 않은 주인공. 사랑받고 싶고 어울리고 싶어 하는 마음에 반장선거를 나서는데, 여기서 오는 코미디와 서스펜스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나도 저랬지'하는 공감을 일으킨다. 아마 <벌새>를 재미있게 봤다면 이 작품 역시 좋다고 느낄 것 같다. <벌새>의 은희는 인간관계로 인해 고통받는 인물인데, 이때 여기서 얻었던 따뜻한 포옹을 기억한다면 이 작품이 선사하는 뒤틀린 코미디가 인상 깊을 것이다. 아이들을 동정이나 이해의 대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같은 인격체로 바라보는 박정민 감독의 시선이 돋보인다.
2) 재방송(손석구)
재방송은 무명배우에 관한 영화다. 아마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를 봤던 분들이라면 유이(박정민 역) 옆에서 '너 이 나라 감옥에서 인기 많겠다'라고 말하던 역할을 기억할 텐데, 이때 통역사를 맡았던 배우가 주연을 맡았다. 임성재 배우는 이모와 함께 사는 그냥 평범한 남자다. 피지컬은 좋아서 배우로서의 재능은 충만한 것 같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무명 배우들이 그렇듯 그는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 설정과 함께 이모와 함께 병원을 들렸다 결혼식장에 가는 이야기가 영화의 전부다. 두 주인공 이모와 수인은 거대한 결핍이 있다. 이에 대해 수인은 아무래도 예측하기 쉽지만 이모는 말하는 순간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더 이상 적으면 안 될 것 같다. 이모가 겪고 있는 심리적 부침이 영화의 주요 메시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위로가 필요할 때가 온다. 내 옆에 소중한 사람이 울고 있을 때 같이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따뜻한 손 한 번을 건넨다던가 할 때가 그 예시가 될 것이다. 이 마음의 이면에 깔려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 진정성일 것이다. 겉으로는 툴툴대도 용기 내 손 한번 건네보는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는데, 손석구 감독은 이런 우리에게 '어떤 마음으로 손을 건네어야 하는가'와 함께 그가 제시한 방식으로 따뜻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후의 <블루 해피니스>의 이제훈 감독처럼 수인 캐릭터가 손석구 배우의 무명배우를 연상케 하는데, 이때 겪었던 '묵묵한 위로'가 얼마나 중요한지 감독은 아는 것 같다.
3. 반디(최희서)
'없다'라는 단어는 참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든다. 늘 하던 것이 없고. 돈이 없고. 헬스장 이용권이 만료되고. 익숙하던 것이 날 떠나고 나서야 드는 슬픔은 사람을 괴롭게 만든다. 이 영화는 이 상실과 부재에 관한 영화인데, 우리가 떠나보낸 것들에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난 아직도 사라지는 게 두렵다. 내가 사랑하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서, 또 나이가 들어서 날 떠나간다면 앞이 캄캄하다. 요즘은 이런 두려움을 말해 타인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드러내긴 했지만 그게 그렇다고 해서 불안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필연적으로 우리를 따라오는 어두움에 대해 최희서 감독은 어떤 태도로 이것들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중반부 주인공의 어머니가 주인공에게 하는 대사나 딸이 엄마에게 하는 말은 우리로 하여금 따뜻한 위로를 건네주는 것이다. 상실에 대한 최희서 감독의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나는 4편의 단편영화 중 가장 좋았다. 나는 아직 보내기 싫은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어서 그랬던 것 같다. 아마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 우리, 이별하지 말자. 사랑했다면 그 나름대로 영원히 그들을 기다리며 살자. 그게 우리의 전부가 될지도 모르니까.
4. 블루 해피니스(이제훈)
난 지금 25살이다. 대학생과 사회 초년생이 주위에 많은 요즘, 주위에 주식이나 비트코인 하는 사람들 진~짜 많다. 부동산 정책이 어쩌니 코로나가 어쩌니 원인은 여러 가지가 제시된다고 듣는 것 같다. 근데 사실 이런 걸 떠나서 돈 벌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다 똑같을 것이다. 그거 했다고 이상한 사람도 아니고 뭐 멘탈이 약한 사람도 아닐 것이다. 이렇게 평범한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취업준비생인 주인공을 내세워 어떻게 주식에 빠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훈 감독의 속내를 다 알 수는 없지만 퍽퍽한 현실에 놓인 우리들을 보여주기 위해 이런 시나리오를 쓴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바쁜 세상 속에서 돈 문제로 속 썩는 우리는 이런 실패들에 자연스레 노출될 수밖에 없는데, 이런 현실을 사는 각자에게 '그럴 수도 있지'라며 격려를 보낸다. 지금의 스타 이제훈이 아닌 무명 배우 때 겪었던 고민과 딜레마를 현재에 잘 녹아든 작품이다. 자기의 이야기를 훌륭하게 내면화했기 때문에 상황이 더 구체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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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워즈의 반대편에서 쓴 불완전한 SF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류를 이롭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AI가 LA에 핵폭탄을 터뜨린 후, 인간은 AI와의 전쟁을 선언한다. 전쟁 끝에 AI를 뉴아시아 지역에만 고립시키는 데 성공하자, 미군은 아예 AI를 만든 창조주 '니르마타'를 죽여서 전쟁을 끝내기로 결심한다. 이에 특수부대 요원 '조슈아'(존 데이비드 워싱턴)는 니르마타의 딸로 알려진 '마야'(젬마 찬)에게 접근한다. 그러나 조슈아는 되려 마야와 사랑에 빠지고, 작전 중 그녀가 실종되자 실의에 빠진다.
이후 몇 년이 지나도 니르마타를 찾지 못한 미군은 다시 한번 조슈아를 작전에 투입하기로 결정한다. 마야를 찾을 수 있는 단서를 주기로 약속하면서. 아내를 찾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작전에 합류한 조슈아는 니르마타와 인류를 위협할 강력한 신무기를 찾아 나선다. 그러던 중 그는 신무기가 아이 모습의 AI 로봇 '알피'(매들린 유나 보이스)란 사실을 알게 되고, 아내 마야의 비밀도 깨달으면서 새로운 선택의 기로에 선다.
가렛 에드워즈의 <스타워즈> 뒤집기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이하 <로그 원>)의 감독 가렛 에드워즈와 각본가 크리스 와이츠가 의기투합한 SF 영화 <크리에이터>. 소재나 주제만 놓고 보면 새로운 작품은 아니다. SF 영화사에서 고전으로 기억될 작품이 보여준 이야기를 되풀이한다. 인공지능과 인류의 미래 전쟁은 <터미네이터> 시리즈가, 인공지능과 로봇의 인간성에 대한 고찰은 <블레이드 러너>, <A.I.> 등이 다룬 바 있다.
달리 말해 <크리에이터>는 의도와 목적을 찾기 쉬운 영화다. 유사점을 지우고 나면 지향점이 곧바로 모습을 드러낸다. 특히 가렛 에드워즈의 전작이 <로그 원>이라는 점에 주목하면 <크리에이터>의 성취와 한계를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로그 원>은 디즈니가 루카스필름을 인수한 이후 가장 호평받은 <스타워즈> 영화다. 클래식과 프리퀄 시리즈 간에 연결고리를 더했을 뿐만 아니라, 제다이가 아닌 일반인의 관점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선보이기까지 했다. 그를 두고 <스타워즈> 세계관을 가장 잘 이해한 감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유다.
하지만 그렇기에 가렛 에드워즈는 <스타워즈>를 가장 확실히 전복할 수 있는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그 세계의 모순과 약점을 뼛속까지 알고 있을 테니까. 실제로 <크리에이터>는 <스타워즈>의 정반대 편에서 자기만의 SF 세계를 '창조'하고픈 야심으로 가득하다. 단지 그 욕망이 스크린 위에 온전히 구현되지 못했을 따름이다.
프런티어 정신의 그림자
<스타워즈> 시리즈는 미국의 신화라고도 불린다.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프랜차이즈이고, 첫 편이 나온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스타워즈>가 미국의 정체성을 가장 잘 반영한 작품이라는 점을 빼놓을 수는 없다.
<스타워즈>에서 가장 돋보이는 미국의 정체성은 바로 프런티어(Frontier) 정신이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항상 팽창하는 국가였다. 루이지애나, 뉴멕시코, 서부, 알래스카, 하와이, 필리핀, 전 세계, 심지어 달과 우주까지 개척했다. 서부극이 가장 할리우드다운 장르였던 것도 우연이 아닌 셈이다. <스타워즈>도 마찬가지다. 배경이 우주일 뿐, 새로운 행성과 은하에서의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 이야기였기 때문.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크리에이터>의 전체적인 갈등 구도는 프런티어 정신의 이면, 그림자를 비추는 거울이라 할 수 있다. 극 중 전쟁은 외견상 A.I. 와 인류의 전쟁이다. 하지만 덧대어진 여러 이미지와 내러티브를 고려하면 미국의 여러 대외 분쟁에 대한 비유임이 분명하다. 실제로 <크리에이터>는 전지구에 영향력을 투사하려던 미국의 실패 사례를 망라해서 보여준다.
예를 들어 계단식 농업을 하고, 정글이 가득한 곳에서 인공지능 게릴라와 공습 위주로 전투를 벌이는 미군의 모습은 1960~70년대 베트남에서 싸우던 미군을 닮았다. 인공지능 창조자를 찾는다며 온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건 '테러와의 전쟁'을 다시 보는 듯하다. 인공지능을 활용하지 말라며 뉴아시아를 압박하는 장면에서는 탄소 감축을 위해 개발동상국의 산업을 제재하는 현실을 볼 수 있다.
<스타워즈>의 오리엔탈리즘에 도전하다
심지어 <크리에이터>의 고발은 단순히 영토나 대외 분쟁에 머무르지 않는다. 타 국가나 인종의 고유한 문화와 정체성을 무시하고, 탈취하고, 마음대로 재단하는 미국의 오리엔탈리즘도 꼬집는다. <스타워즈>도 문화적 프런티어 정신의 악영향에서 기실 자유롭지 않다. 핵심 설정인 '포스 The Force'만 해도 동양 사상의 '기氣'를 가져간 셈이고, 포스를 수양하는 제다이도 도사라는 개념을 취한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가렛 에드워즈는 이처럼 동양의 정신문화를 표면적으로 활용해 쌓아 올린 미국의 신화를 부수려 한다. 타 문화권의 유산을 입맛대로 재단하는 대신, 스크린 위에 온전히 살려내어 <스타워즈>로 대표되는 SF 세계의 전형에 도전한다. 그 중심에는 조슈아가 있다. 그는 니르마타를 추적하기 위한 첩보원이다. 얼핏 보면 그가 아내를 만난 것도, 잃은 것도, 다시 그녀를 찾아 나서는 것도 다 인공지능 창조주를 찾는 추격전의 일부다.
하지만 <크리에이터>는 조슈아의 서사를 뒤집는다. 그의 첩보극을 개인적인 성찰과 발견의 서사로 다시 쓴다. 니르마타를 찾는 첩보극은 이제 고통의 원인을 찾는 정신적 여정이다. 그는 추격전 끝에 결국 아내와 재회한다. 아내의 모든 비밀도, 아내를 놓아주어야 자기 아픔이 끝난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대신 자기 아들의 모습을 한 로봇 알피와 모든 AI를 구해내면 아내를 향한 사랑과 자기 아픔을 승화할 수 있다는 사실도 배운다.
동양의 진짜 정신문화를 살리다
이러한 조슈아의 여정을 동양적으로 보면 수행과 득도의 과정과도 같다. 특히 티베트 불교에서 가장 강조하는 가르침인 보리심(菩提心)이 조슈아의 서사에 반영된 듯 보인다. 보리심은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모든 중생이 고통을 여의기를 바라는 대비심(大悲心)에서 비롯되는 마음이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이를 실천하는 사람을 보살이라고 부른다.
이 관점에서 보면 조슈아라는 인물은 보살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다. AI와 가족과 관련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그 과정에서 모든 AI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실천에 옮겼으므로. 이는 과거 오리엔탈리즘에 기반해 차별적으로 수용, 생산한 동양의 문화를 새로이 직시하고 그 정수를 살리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네팔, 티베트 같은 고산지대에서 AI가 승려 복장을 한 모습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더 나아가 이는 <크리에이터>가 나름 색다른 SF 영화로 보이는 이유다. 영화 속에는 AI와 인간의 차이를 결정짓는 기준에 관한 여러 윤리적, 철학적 질문이 등장한다. "인간은 AI와 공존할 수 있는가, 아니면 AI를 파괴해야 하는가?" "AI도 인간처럼 공감하고 사랑할 수 있는가?" 등. 다른 SF 영화에서도 볼 수 있는 뻔한 질문이다. 하지만 <크리에이터>는 이전까지의 영화와 확실하게 구분되는 차별성을 갖추는 데 성공한다. 동양 철학에 기반해 AI도 인간과 다르지 않다는 확실한 대답과 당위성을 내놓기 때문이다.
미처 피하지 못한 자기모순
그러나 <크리에이터>의 도전은 절반의 성공이다. <스타워즈>가 범했던 잘못을 똑같이 반복한다. 중국과 일본, 베트남이 뒤섞인 듯한 '뉴아시아'의 지형과 도심만 봐도 실책은 명백하다. 극 중 뉴아시아의 도심은 도쿄나 상하이 같은 대도시, 외곽 지역은 베트남이나 중국 남부의 농촌 모습으로 설정돼 있다.
사실 한중일 관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동아시아 국가는 국가별로 정체성도, 개성도 확연히 다르다. 이는 한국과 일본이 대외적으로 한 팀이 되길 바라는 실수를 미국이 반복하는 이유다. 베트남 역시 수백 년에 걸쳐 중국으로부터 독립한 바 있다. 그런데 <크리에이터>는 '뉴아시아'라는 이름 하에 상이한 국가의 정체성을 합쳐 버렸다. 이는 아시아 국가를 단순히 '동양'으로 범주화하는 오리엔탈리즘의 발현으로 보일 여지가 충분하다.
<크리에이터>의 핵심 요소인 종교를 활용하는 방식 또한 실수와 몰이해의 연속이다. AI 창조주의 이름인 '니르마타'(निर्माता)는 네팔어로 창조주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다. 문제는 불교의 창시자인 싯다르타가 네팔에서 태어나기는 했으나, 정작 네팔은 힌두교 인구가 90% 이상인 국가라는 점. 이는 티베트 불교의 가르침을 핵심으로 품은 영화에서 간과하기에는 작지 않은 실수다.
또 고산 지대에 위치한 불교 사원은 티베트를 배경으로 한 듯 보이지만, 정작 뉴아시아에 거주하는 AI들은 힌두교 방식으로 장례를 치른다. 이는 불교와 힌두교의 차이와 아시아 지역의 종교사에 대한 이해 부족이 탄로 나는 대목이다. 물론 영화의 지향점을 고려하면 악의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다만 시각적인 요소가 빚어내는 오해로 인해 영화의 메시지나 의도에 설득력이 부족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제대로 써먹지 못한 맵시
이에 더해 시각적인 장점도 제대로 써먹지 못한다. 가렛 에드워즈는 <고질라>나 <로그 원>에서 압도적인 힘 앞에 무력한 인간의 시점으로 스펙터클을 보여줬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웅장한 자연 풍광, 강력한 미군의 공습이 대표적이다. AI 로봇이 농사를 짓고 절에서 생활하는 모습도 SF 영화의 본분에 충실하다. 하지만 독특한 세계관은 점점 모습을 감춘다. 관객의 눈을 사로잡은 후, 영화의 초점이 멜로드라마로 옮겨 가기 때문.
그 결과 장르 간에 불협화음이 생긴다. 멜로드라마에 집중하다 보니 마야의 비밀, 니르마타의 진짜 정체와 관련된 미스터리는 별다른 효과가 없다. 더 나아가 영화의 결말도 아쉬움이 크다. 윤리적, 철학적, 종교적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려야 할 순간에 로맨스가 부각되다 보니 스스로 잠재력을 제한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마지막으로 액션씬도 디테일이 부족하다. 일례로 미군이 AI 마을을 탱크로 습격할 때 미군과 인공지능은 순서대로 한 번씩 공격을 주고받는다. 전투 중 극대화되어야 할 절박함이나 긴장감은 크지 않고, 오히려 템포가 끊긴다는 느낌이 크다. 물론 할리우드 기준으로 적은 제작비(약 8천만 달러)를 고려해야겠지만, 초중반부 좁은 공간에서의 액션씬이나 <로그 원> 속 전투 시퀀스를 떠올려 보면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결국 <크리에이터>는 거대한 야심을 지녔고, 그 야심 자체는 시의적절했으나, 야심을 현실화하는 과정에서 길을 잃은 미완의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히 누군가는 감독의 야심이나 새로운 도전에 박수를 보낼 것이고, 누군가는 레퍼런스 활용이나 블록버스터로서의 미흡함을 지적할 것이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걸 간과해서는 안 되겠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다.
Acceptable 무난함
뒤집고 되짚는 과정에서 길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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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곳적 복수 신화를 지금 소환하는 이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서기 895년, 해외 정복을 마치고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온 '아우반디르(에단 호크)' 왕은 왕비 '구드룬(니콜 키드먼)'과 어린 암레스 왕자와 재회한다. 그러나 막 성인식을 치른 아들에게 본격적인 후계자 수업을 해주기도 전에 그는 동생 '푤니르(클라에스 방)'의 반란으로 목숨을 잃는다. 푤니르는 구드룬 왕비와 왕국을 차지하고, 암레스는 바다 건너로 도망간다. 이후 세월이 흘러 바이킹의 일원이 된 '암레스(알렉산더 스카스가드)'는 왕국을 잃은 푤니르가 망명지인 아이슬란드에서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에 노예로 신분을 위장한 그는 노예선에서 만난 마녀 '올가(안야 테일러 조이)'의 도움을 받아 푤니르의 땅으로 들어가고, 아버지의 복수를 준비한다.
로버트 에거스 감독의 신작 <노스맨>은 바이킹 왕자 암레스의 사랑과 복수를 노래하는 영화로, 중세 시대극이자 근래 할리우드에서 보기 힘들었던 에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피비린내 나는 10세기 북유럽의 모습이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는다. <그린 나이트>처럼 상징적이고 시각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며 신화적 영웅의 비현실적 여정을 압도적인 분위기와 미장센으로 녹여낸다. 주술사가 이끄는 암레스의 성인식이나 피 튀기는 바이킹의 전투 장면은 거칠고 잔혹하다. 폭풍이 몰아치는 북대서양의 거친 바다부터 아이슬란드의 화산에 이르는 웅장하면서도 잔인한 자연의 풍광이 더해지면 그 시대의 야만성이 눈앞에서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심심찮게 등장하는 절단 장면은 '이 정도로 잔인할 필요가 있나?'라는 의문을 자아낸다.
하지만 강렬한 영상에서 눈을 돌려 주인공 암레스의 여정에 빠져들다 보면 그 의문은 자연히 답을 찾는다. 특히 중세 스칸디나비아 전설 속 영웅인 암레스 왕자가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 햄릿의 원형이라는 점, 하지만 암레스와 햄릿의 이야기가 사뭇 다르다는 점에서 그 답은 더욱 명확해진다. 덴마크의 왕자인 햄릿은 삼촌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에게 복수하려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분노와 슬픔을 다 풀어내지도 못한 채 예기치 못한 사건사고에 휘말린다. 혼란 속에서 그는 미친 듯 보이는 현실과 미쳐 가는 자아를 화해시키지 못하고, 복수마저도 온전히 끝내지 못한 채 죽는다.
햄릿의 복수는 허망하다. 복수심이 도리어 파국을 가져온다는 것을 복수가 결코 건강한 선택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듯 보인다. 사실 복수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작품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당장 <일리아스>만 해도 그렇다. 친구를 죽인 헥토르를 향한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한 <일리아스>는 헥토르의 아버지를 만난 후 그의 용기와 부성애에 감동한 아킬레우스를 비추며 헥토르의 장례식으로 끝난다. 분노에 가득 찬 야수였던 아킬레우스가 복수심을 버리고 사랑, 희생, 용기를 아는 고결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이야기인 것이다. 비록 그 끝은 조금 달라도 햄릿과 아킬레우스는 모두 복수의 무용함을 이야기한다.
<노스맨>과 암레스는 다르다. 영화는 햄릿, 아킬레우스와는 달리 복수의 완성을 통해 생명력을 되찾고 한 명의 인간으로 거듭나는 암레스를 보여준다. 복수와 삼촌의 죽음을 다짐하며 바다를 건넌 간 암레스는 바이킹의 배를 탄 채로 다시 등장한다. 배에서 내려 한 마을을 공격하는 바이킹들 사이에서 암레스는 다른 바이킹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그저 사람을 죽이는 데 몰두한다. 적군을 죽이고 그 몸을 입으로 물어뜯으며 울부짖는 그의 모습에서는 목적 없이 배회하는 한 마리의 외로운 늑대가 보일 뿐이다.
그러나 마녀의 환시를 보고, 자신이 복수를 완수할 운명이라는 예언을 들은 후 그는 새롭게 태어난다. 삼촌의 땅인 아이슬란드로 향하기 위해 인간 대우도 받지 못하는 노예로 위장한 암레스는 가장 낮은 계급이지만 오히려 가장 살아있어 보인다. 집을 나가 떠돌던 외로운 늑대는 이제 무리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눈이 이글거린다. 복수를 통해 암레스의 인생이 죽음에서 삶으로 전환되는 이야기는 영화의 결말이 가장 단적으로 드러난다. 용암이 치솟는 화산에서 삼촌을 죽임으로써 마침내 꿈꾸던 복수를 하는 데 성공한 암레스. 그는 삼촌과의 결투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클로즈업되는 그의 표정은 환희와 평화로 가득하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지켰고, 아버지와 자신의 왕통을 이을 아이들도 남겼으면, 응어리 진 분노도 온전히 터뜨린 후 해소하여 온전한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다른 인물들의 서사 역시 복수의 긍정적인 면을 드러내 보인다. 당장 푤니르만 하더라도 그는 단순히 복수의 목표물이 아니다. 왕의 배다른 동생이자 사생아인 그는 자신의 삶을 무시한 이복형에게 복수한 인물로, 비록 영지를 잃어버리기는 하지만 가족들과 따뜻한 삶을 영위한다. 그래서 암레스에게 가족을 한 명씩 잃어가는 그의 모습에서는 간악함보다는 인간적인 연민이 느껴진다. 그의 어머니인 구드룬 왕비가 마찬가지다. 삼촌 푤니르에 인해 강제로 결혼하여 비극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던 그녀는 알고 보니 푤니르를 추동한 만악의 근원으로 밝혀진다. 그녀는 노예로 팔려와 강제로 결혼하고 후사를 낳아야 했기에 증오 가득 찬 결혼 생활을 끊기 위한 복수를 감행한 것이다. 그래서 구드룬은 분노하는 암레스 앞에서 자신의 선택에 후회가 없었고 지금의 삶이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고 일갈한다.
이에 더해 올가와의 관계도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신화 속 여성은 남성의 성장을 위한 도구로 활용되어 왔다. 여성과의 사랑을 통해 남성은 상처를 치유하고 질적으로 다른 인간으로 거듭나는 반면, 여성은 분기점 외의 특별한 역할을 맡지 못한 채 해피 엔딩 속에서 존재감을 잃는 경우가 많다. <노스맨>은 다르다. 암레스는 올가를 만나 사랑을 나눈다. 복수를 함에 있어서 적잖은 도움도 받고, 또 서로의 목숨도 구해준다. 하지만 올가는 암레스의 운명에 종속되지 않는다. 암레스는 사랑을 통해 복수심을 잊고 성숙한 인간이 되는 대신 목숨을 걸고 복수하는 늑대로 남을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사랑은 쌍둥이를 잉태한 채 그 관계가 끊어질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암레스는 온전히 마음의 평화를 얻을 기회를 잡고, 올가는 노예에서 벗어나 위대한 왕통을 이어갈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 나간다. 이처럼 <노스맨> 속 복수는 단지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싸움이 아니라 바람직하고 정당하며 옳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싸움이다.
물론 혹자는 <노스맨>의 복수극이 그리 특별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햄릿과 암레스가 복수에 성공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를 제외하면 이 영화의 각본은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을 떨쳐내지 못한다. 이는 2시간을 넘는 137분의 러닝타임 동안 느린 템포로 진행되기에 꽤나 지루한 인상이 남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멋지게 복수하는 쾌락을 선사한다는 특징은 고전 중의 고전인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특출 난 게 아닐 수 있다.
이에 더해 신화 원전의 분위기를 재현하는데만 집중한 것도 비판의 여지가 있다. 일례로 작년에 개봉한 <오필리아>는 햄릿을 원작으로 하면서도 햄릿의 아내인 오필리아를 전면에 내세워 햄릿의 비극을 여성의 시선에서,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이들의 시선에서 재해석한 바 있다. 그에 반해 죽음과 폭력, 예언과 마법으로 가득한 <노스맨>의 세계는 굳이 이 신화를 지금 이 시점에 만나야 할 이유가 있는지 의문을 남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암레스의 세계를 잘 살펴보면 <노스맨>에 숨겨진 시의성이 그 모습을 찬찬히 드러낸다. 화산을 배경으로 암레스는 복수를 위해 목숨을 바쳐도, 싸우다 죽어도 좋다는 마음가짐으로 마지막 결투에 임한다. 바이킹에게 정당한 복수를 위해 싸우다가 죽는 것은 그들의 천국인 발할라로 갈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죽을힘을 다해 속에 가득한 울분을 온전히 표출하면, 전장에서 죽은 후 발할라에 들어가 라그나로크가 올 때 오딘의 옆에서 함께 싸우는 영광을 누릴 수 있다. 즉, 이 세계는 복수를 긍정하며, 오히려 되갚아주지 못하는 이들이 손해를 본다는 믿음이 지배적인 세상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노스맨>의 현대적 맥락을 볼 수 있다. 지금의 사회는 외관만 다를 뿐 암레스의 세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SNS 상에서 오가는 설전, 리벤지 포르노의 등장,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적을 제거하려는 정치인들과 지지자들의 모습까지.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이 모든 현상은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과거의 수많은 전쟁과 갈등의 변주일 따름이다. 범죄자들에 대한 형량을 강화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엄벌주의에 대한 갈망 역시 국가나 사법 제도가 복수를 대신한다는 믿음이 약해졌음을 방증한다. 암레스처럼 직접 당한 만큼 돌려주고 정의를 바로잡는 복수의 욕구가 나날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지나치게 충실한 재현 같아 보이는 <노스맨>의 접근법은 결코 과하지 않다. 태곳적 복수 신화를 성공적을 소환하는 심장 박동을 닮은 북소리와 극한의 현실 고증을 통해 신화에 설득력을 더하는 비주얼이 인상적이다. 암레스의 세계와 그의 행적이 가능한 사실적으로, 그리고 실감 나게 느껴질수록 관객 역시 영화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 커져가지만 실천에 옮기기 어려운 욕망을 분출하는 공간을 경험할 수 있으므로.
암레스가 발할라에 들어가는 결말이 대표적이다. 화산에서 죽어가는 그의 앞에 하늘이 열리고, 발키리가 날개 달린 말을 타고 내려와 그를 발할라로 이끄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환상이다. 하지만 이는 복수를 통해 평화를 찾은 암레스의 심정을 그 어떤 방식보다도 훌륭하게 반영하는 연출이기도 하다. 성인식부터 전설 속의 검을 얻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복수에 미친 그가 다양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습을 이미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나치게 재현적이고 현대적 맥락에서는 동 떨어져 있는 듯 보이는 <노스맨>에서는 원형적인 복수 신화를 통해 현대 사회를 반추하게 만드는, 단순한 영화적 재현 이상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A(Acceptable, 무난함)
태곳적 복수 신화를 재소환하는 현대의 야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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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코다> 파이널 예고편
24/7 함께 시간을 보내며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가족을 세상과 연결하는 코다 '루비'는
짝사랑하는 '마일스'를 따라간 합창단에서 노래하는 기쁨과 숨겨진 재능을 알게 된다.
합창단 선생님의 도움으로 마일스와의 듀엣 콘서트와 버클리 음대 오디션의 기회까지 얻지만
자신 없이는 어려움을 겪게 될 가족과 노래를 향한 꿈 사이에서 루비는 망설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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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미스> 메인 예고편
"미스 프랑스에 나갈 거예요"
동네 복싱장에서 청소부로 일하며 지긋지긋한 매일을 보내던 알렉스.
우연히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고, 자신의 오랜 꿈을 기억해낸다.
좌충우돌 미스 프랑스 도전기!
한계를 뛰어넘은 당당한 발걸음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