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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wr2025-03-31 08:02:29

‘종교적 이성’ vs ‘이성적 종교’

영화 〈헤레틱〉

브런치 글 이미지 1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좁디좁은 창문, 겉보기보다 넓고 깊은 집 구조, 음습한 지하실, 전파를 차단하는 벽, 장치를 달아두어 열 수 없는 문. ‘사이비’ 혹은 ‘이단’의 딱 들어맞는 은유다. 흥미로운 건 영화가 이 은유를 비틀어 종교와 이성의 ‘적대적’ 관계를 재현하는 방식이다.     

 

  영화는 오프닝 시퀀스부터 모르몬교 신자인 두 젊은 여성 반스와 팩스턴이 종교에 ‘속고’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매그넘 콘돔이 실은 일반 콘돔과 사이즈에서 별 차이가 없다는, 남자의 허세와 마케팅의 흔한 거짓말이 합쳐진 무수한 거짓말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두 사람의 대화는 그들의 현재와 다른 듯 닮았다. ‘콘돔’이라는 성적 상징물은 (적어도 교리의 측면에서는) 정반대에 있는 두 여성의 보수적 삶과 대비를 이루지만, 동시에 그들의 종교적 ‘확신’이 실은 마케팅 회사의 거짓말과 닮은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암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믿음으로써 속고 있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반스와 팩스턴은 ‘누가 봐도’ 모르몬교고, 사람들은 대개 두 사람을 무시하며 종종 모욕적인 방식으로 두 사람을 조롱한다. 그런 그들에게 교리에 관심이 있다며 방문을 요청한 중년 남성 리드의 존재는 반갑고 귀하다. 그러나 따뜻하고 온화한 미소를 가진 리드와의 몇 마디 대화에서, 반스와 팩스턴은 본능적으로 불안을 느낀다. 리드는 한때 일부다처제를 허용한 모르몬교의 교리, 유일신을 숭상하는 종교의 난점 등을 두고 두 사람과 토론하고자 한다. 그는 주제에 관한 깊이 있는 식견과 분명한 입장으로 그저 호의를 갖고 교리를 설명해주러 왔을 뿐인 두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다. 리드의 정중하고 부드러운 태도는 불안을 상쇄하는 알리바이가 되어주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게 금세 판명난다. 그러나 이미 문은 잠겼다. 두 사람은 갇혔다.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전화도 되지 않는 집. 리드는 여전히 정중한 태도를 잃지 않지만 점점 더 거세게 두 사람을 몰아붙인다. 반스와 팩스턴은 완전히 겁에 질린다. 리드의 논거는 분명하다. 기독교뿐 아니라 모든 유일신 종교가 여러 지역의 신화를 갈무리해 신비화한 것일 뿐이다, 이러한 특징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그리고 모르몬교까지 반복되어왔다 등등. 여러 신화의 짜깁기와 변형이 유일신 종교의 근원이라는 주장이다. 뒤이어 정교하게 설계된 리드의 반反신앙 실험이 이어지고, 두 사람 그리고 그들의 믿음은 탈진해 소진할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극한에 몰린 순간, 세 사람 사이에 반전의 계기가 싹튼다.     

브런치 글 이미지 3

 

  리드의 주장은 타당하다. 종교의 사회적 필요성에 관한 논의와는 별개로, 여러 역사 및 문헌 연구로 입증된 내용이다. 그러나 이성으로 무장한 리드는 이성을 ‘믿는’ 듯 보인다. 그것도 ‘종교적’인 방식으로. 그는 자신의 종교 비판에 심취해, 이를 종교적 믿음의 대상으로 구축했다. 한편, 반스와 팩스턴은 리드와 맞서는 방법이 신실한 믿음이 아닌 논리적 반박이라는 점을 깨달아간다. 힘으론 못 이겨도, 머리로는 이길 수 있다는 자각이다.    

 

  그러니까 ‘이성적’ 인간인 리드는 거짓 신화에 기댄 통제가 종교의 근원이라는 주장을 ‘종교적’으로 신봉하고, 그에게 대항하는 두 명의 ‘종교적’ 인물은 ‘이성적’ 추론을 무기 삼아 맞선다. 이 구도에서 폐쇄적 믿음에 갇힌 건 오히려 이성의 소유자 리드다. 그는 자기가 비판하는 사이비, 이단의 폐쇄성을 그대로 구현한 듯한 집에 살며 그 집에서 자기가 옳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 여성 종교인을 고문, 감금해왔다. 반면 모태 신앙인 반스와 팩스턴은 자신의 종교와 닮았다고 할 수 있는 폐쇄성을 지닌 리드를 피해 그의 집(즉 ‘사이비’ 혹은 ‘이단’)에서 빠져나가고자 한다. 영화는 이성과 종교의 통념적 구도를 뒤집어, 스릴러·공포 영화의 오랜 무대인 집을 폐쇄적 믿음의 상징물로 변환하여, 과연 누가 ‘이단(heretic)’인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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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젠더 역학의 측면에서, 종교와 이성에 대한 영화의 비틀기는 더한층 깊어진다. 확신에 찬 중년 남성과 그가 설계한 세계에서 두려움에 떨다가도 상대의 무기를 탈취해 자기 자신들을 가둔 감옥의 설계도를 조금씩 깨달아가는 젊은 여성. 이들이 만들어내는 젠더·연령의 권력 구도는 이 영화가 종교와 이성에 관한 통념을 다른 각도에서 조명해 장르 영화의 재미를 생산한다는 점을 넘어, 통제와 자유라는 더 넓은 주제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인다. 〈콰이어트 플레이스〉 시리즈 등에서 호흡을 맞춰온 스콧 벡, 브라이언 우즈의 기교가 돋보이는 장르 영화의 재미에 충실한 영화다. 동시에 장르 영화의 문법과 소재 곳곳에 전통적 상징을 비트는 것들을 배치한 익살과 통찰이 돋보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작성자 . rewr

출처 . https://brunch.co.kr/@cyomsc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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