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3-08-30 16:36:33
제2의 전성기, 40-50대 씬스틸러 여배우 특집
최근 #마스크걸 에서 김경자역의 염혜란 배우가 자식의 사랑을 넘어 광기로 변한 소름돋는 연기를 보여줬는데요 ! 이외에도 부드러움과 카리스마를 겸비한, 배역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씬스틸러 배우분들을 소개시켜 드리려합니다. 40-50 대의 전성기를 맞이한 배우분들의 앞으로 맡을 작품들과 배역들이 기대되지 않나요?
1994년 극단 목화에 입단한 단원이자 극단 목화의 간판배우로 1998년 <남자충동>으로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신인상과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2000년 <춘풍의 처>로 백상예술대상 최우수 여자연기상 수상을 수상했습니다.
드라마, 영화 출연한 작품마다 좋은 성과를 거두는 씬스틸러 이정은 배우는 <기생충>의 국문광 역으로 여우조연상을 휩쓸며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데요. 처음 연극 조연출로 시작해서 영화, 드라마의 조,주연까지 올라온 배우입니다.
이미 연극 무대에서 연기를 잘하기로 정평이 난 김선영 배우
응답하라 1988에 출연하여 얼굴이 많이 알려지게되면서 이후 명품 조연으로 입지를 단단히 굳히며 수많은 여우조연상을 석권하였습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단역 ‘소현 엄마’로 영화 데뷔를 알린 염혜란 배우는 단역임에도 불구하고 봉준호 감독님이 단편영화를 본 후 직접 오디션을 제안했다고 하는데요. 이후 <도깨비> 은탁의 이모이자 악역인 ‘지연숙’으로 대중들에게 가장 얼굴을 알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대학로 이영애라는 수식어가 붙을정도로 아름다운 미모와 더불어 정확한 발음과 비음이 섞인 청아한 목소리로 엄청난 연기력까지 보유한 배우입니다. <사이코지만 괜찮아>에 수간호사 ‘박행자’ 역으로 인생 캐릭터를 탄생시키면서 믿고보는 배우로 자리잡았습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한선영 역으로 널리 알려졌고, 이 외에도 <멜로가 체질> <안나>등 드라마 명품 조연을 섭렵하며 존재감을 톡톡히 알리고 있는 배우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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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방관 | 폐허 위에 클리셰로 쌓은 애환과 사명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화재 현장, 교통사고, 자살 소동 등 끊이지 않는 사건 현장에서 하나의 생명도 놓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119 구조대 반장 '정진섭'(곽도원)과 그의 팀원들. 여느 때와 같이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그들 앞에 신입 소방관 '최철웅'(주원)이 등장하고,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 구조 대원에게 답답함과 애정이 반씩 담긴 질타를 날리며 다시 사고 현장으로 향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진섭과 철웅, 그리고 그의 팀에 돌연 위기가 닥친다. 한 화재 현장에서 철웅의 실수로 인해 선배 '안효종'(오대환)이 등 전체에 화상을 입은 것. 여기에 더해 진섭의 절친한 후배이자 철웅의 가장 친한 동네 형인 '신용태'(김민재)도 무리해서 어린아이를 구하려다가 현장에서 사망한다. 이에 진섭과 철웅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충격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그들 간의 갈등의 불씨도 커지기 시작한다.
뻔한데, 다르다
실화를 다루는 작품은 언제나 달콤한 유혹에 흔들린다. 영화적 재미 대신 실화의 힘을 선택하기 쉽다. 영화화해도 되겠다고 판단되는 실화는 그 자체로 감동적이거나 충격적인 사건인 경우가 많기 때문. 이처럼 쉬운 길을 걷는 작품은 공통점이 있다. 누가 죽고 살 지 뻔한 클리셰의 향연. 운과 우연에 의존한 전개. 대부분의 캐릭터가 기억나지 않는 평면적인 묘사. 사건의 사회적 함의보다는 일차원적인 감정 분출에 집중한 각색까지.
곽택 감독의 신작인 <소방관>도 마찬가지다. <소방관>은 홍제동 방화 사건에서 화재 진압을 위해 건물 내부로 진입했다가 사망한 소방관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소재에서 예측할 수 있듯이 쉬운 길을 선택했다. 클리셰로 가득하다. 누가 사망할지, 각 캐릭터가 어떤 인물인지, 누가 방화범이고 피해자인지 등을 영화 시작 10분 안에 전부 알 수 있다. 각 소방관의 개인사, 가족사를 부각하며 눈물을 흘리게 하는 신파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방관>은 클리셰로 가득하지만, 마냥 뻔하지는 않다. 신파는 많지만, 일반적인 한국 영화의 신파와는 결이 다르다. 모든 캐릭터가 스트레오 타입이지만, 최소한의 생동감은 있다. 이유가 있다. 주인공이 아닌 구조대원 전원에게 스포트라이트를 골고루 돌리면서 독특한 분위기를 조성한 덕분이다. 그 결과 <소방관>은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고, 마냥 실화에만 의존한 신파극이라는 오명을 피하는 데 성공했다.
클리셰 범벅
겉보기에 <소방관>은 특별할 게 없다. 한국 영화 특유의 클리셰로 가득하다. 주인공 최철웅의 서사만 보더라도 예측가능한 범위를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군대를 전역한 후 소방관이 되기로 결심한다. 소방관이 되기 전부터 어머니와도 알고 지낼 정도로 각별한 형 신용태의 권유로. 하지만 함께 출동한 화재 현장에서 용태가 사망하고, 철웅은 PTSD에 시달리며 방황한다. 재난 영화 등에서 손쉽게 만날 수 있는 인물상이다.
다른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사실상의 주인공인 정진섭은 하필이면 소방관 근무 마지막 날에 홍제동 화재를 진압하다가 건물에 깔려 사망한다. 아빠를 기다리는 초등학생 아들, 은퇴한 남편과 함께 운영할 치킨집을 막 오픈한 아내를 남겨둔 채로. 철웅의 선배 구조대원인 안효종도 마찬가지다. 그는 곧 매제가 될 후배 '송기철'(이준혁)과 그의 아이를 임신한 여동생을 남겨둔 채로 사망한다. 가족관계가 나오자마자 예측가능한 결말이다.
주인공 따로, 중심인물 따로
그러나 <소방관>에는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 바로 주인공과 중심인물이 다르다는 것.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최철웅이다. 카메라는 그의 시점에서 소방관의 일상을 비춘다. 그런데 정작 그는 러닝 타임 내내 주인공다운, 영웅적인 활약을 거의 못한다. 사고 치고, 덤벙대고, 혼자 괴로워하고, 막말하기 바쁘다. PTSD를 떨치지 못해 구조 대원 복귀도 망설인다. 거칠게 말해서 이보다 찌질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덕분에 관객들은 소방관들의 내면을 깊이 살펴볼 수 있다. 관객에게 신입 구조 대원인 최철웅은 소방관의 세계를 들여다 보고, 이해하는 과정을 돕는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첫 등장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이등병처럼 곧장 사고 현장에 투입되어서 실수를 남발하고, 선배들에게 온갖 꾸지람을 들으면서 소방관들의 일상과 업무에 녹아든다. 이때 관객은 최철웅의 눈을 통해 그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공유할 수 있다.
이처럼 주인공의 눈을 통해 다른 대원들을 살피면서 관객들은 그들이 소방관으로서 지닌 고민과 책임감에 서서히 공감할 수 있다. 특히 정진섭은 그중에서도 중심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사명감 하나만으로 무장한 채 불길 속에 뛰어드는 베테랑 구조대원이다. 요구조자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가장 아끼는 동료도, 자기 목숨마저도 언제든 내려놓을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진섭의 주변을 보면 소방관이 견뎌야 하는 딜레마를 명확히 느낄 수 있다. 그의 아내는 생명보험에도 가입 못하는 그를 걱정하면서도 원망하고, 아들도 아버지의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면서도 같이 시간을 못 보내서 미워한다. 그는 가족을 이해하면서도 쉽사리 일을 포기하지 못한다.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 이는 진섭이 철웅을 미워하는 듯 챙기는 이유다. 그가 보기에 철웅은 이 딜레마를 버텨낼 준비가 안 된 햇병아리이니까.
과한데, 억지스럽지 않은
진섭 외의 다른 소방관들도 비슷하다. 곧 가족이 될 효종과 기철이 서로 구조대원을 그만두고 행정직에 지원하라고 떠미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한 집에 구조대원이 둘이나 있으면 다른 가족들이 편히 잘 수 없다는 공감대가 무겁지 않게 새어 나온다. 이처럼 자칫 철웅에게만 쏠릴 법한 분량을 적절히 조정한 덕분에 각 캐릭터에게는 예상보다 더 많은 분량이 분배되고, 그들의 삶과 고뇌는 더 풍부하게 느껴진다.
긴장감 가득한 화재 진압 장면은 진정성을 더해준다. 극 중 화재 시퀀스는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초반부와 후반부에 하나씩 있을 뿐이다. 그러나 두 시퀀스만으로도 소방관이 감내해야 할 위험은 명확히 전달된다. 소방관의 시점에서 화재 건물 내부를 들여다보는 드문 경험을 세밀히 묘사한 덕분이다. 갑자기 무너지는 계단과 벽, 폭발하는 가스통, 급격히 줄어드는 산소량 등은 관객들의 두려움을 극대화하기 충분하다.
그 덕분에 <소방관>의 신파는 과할지언정, 억지스럽지 않다. 눈물은 흘려도, 눈물을 짜내는 장치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일상 속 소방관의 사명감과 그들의 애환을 비추는 거울에 가깝다. 담담한 연출 덕분에 <소방관>의 신파는 더 인상적이다. 소방관이 사망하는 순간을 슬로 모션을 길게 끄는 식의 연출은 없다. 그저 필요한 장면만 담백하게 전달한다. 자연히 결말을 장식하는 철웅의 오열도 작위적이지 않다.
더 나아가 엔딩 크레디트도 전형적이라는 인상이 옅다. <소방관>은 여러 실화 기반 작품처럼 실제 영상과 사진을 보여주면서 자막으로 부연 설명을 말미에 덧붙인다. 사실 이러한 마무리는 사건 자체를 조명하는 효과와는 별개로 영화 자체의 재미나 완성도를 감추려는 듯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소방관들의 노력과 사투를 깊이 있게 묘사하기 위해 충분한 시간을 투자했기 때문에 본말이 전도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부족한 디테일과 불운
다만 아쉬움도 적지 않다. 우선 홍제동 화재 사건 그 자체보다는 사건 이후를 다루면 어땠을까 싶다. <소방관>은 결국 소방관의 여건을 개선해야 한다는 공익 메시지에 힘을 주는 영화다. 불법 주차 때문에 소방차 진입이 어렵거나, 사비로 보호 장비 등을 갖추는 묘사가 반복되는 이유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사건 이후 소방관 처우 개선 과정을 집중적으로 묘사하는 게 소방관의 헌신과 희생을 더 돋보이게 하는 방법일 수도 있다.
자막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 화재 상황을 묘사할 때는 필연적으로 주변 환경의 소음이 크게 들릴 수밖에 없다. 또 소방관들도 산소마스크를 끼고 있기 때문에 대사가 전달되는데 한계가 명확한다. 따라서 전투 시퀀스에만 자막을 삽입한 <한산: 용의 출현>이나 <노량: 죽음의 바다>처럼 화재 진압 장면만이라도 자막을 통해 대사를 보여주는 게 관객 입장에서는 더 편리하지 않았을까 싶은 측면이 있다.
이에 더해 영화 개봉도 밀리게 한 주연 배우 이슈도 안타깝다. 상술했듯이 곽도원이 연기한 정진섭은 주원이 연기한 최철웅보다 더 중요한 캐릭터다. 소방관들이 어떤 생각으로 자기 직업을 대하는지가 주로 곽도원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 그의 목소리로 되새겨지는 소방관의 기도가 대표적이다. 또 주인공이라기에는 매력이 부족한 철웅을 한 단계 성장시키는 데도 정진섭의 역할은 지대하다.
그런데 하필이면 해당 배우가 물의를 빚다 보니 영화의 메시지나 연출 의도가 어쩔 수 없이 곡해되는 측면이 있을 수밖에 없다. 영화 몰입을 방해하는 부분이 있고, 자연히 완성도를 낮추는 요인으로도 작용한다. 뻔해 보이는 겉모습 뒤에 의외의 울림과 매력을 지닌 작품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소방관>은 분명 불운한 작품이다.
Acceptable 무난함
어쩔 수 없이 눈물이 흐르는 다큐멘터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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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크리스마스는 12월 21일인 걸로
올해는 유난히 눈이 잦다. 아침에 눈을 뜨면 소복이 내려앉은 흰 풍경을 보기도 했고, 길을 거닐다가 바람에 흩날리는 진눈깨비를 만났으며 우산이나 모자 없이는 한 발 내딛기도 힘든 때도 있었다. 눈. 대부분 어린이가 그러하듯 나 또한 눈을 아주 좋아했는데 어느 때부턴가 골칫거리라고 느꼈다. 희게 날리는 눈발을 보아도 이것들이 쌓여서 생길 질퍽대는 까만 흔적들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혹 땅이 얼기라도 하면 불편은 가중되었으므로 겨울의 눈 소식만큼 듣고 싶지 않은 소식이 없었다.
그런데 올해엔 무슨 바람이 들었나. 11월 초, 같이 일하던 사람이 튼 크리스마스 캐롤 때문이었을까. 출퇴근 길, 귀에 항상 꽂힌 이어폰에서는 일찌감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가 흘러나왔다. 특정날을 기다리는 시간이 이렇게 행복하다는 걸 처음 느낀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감흥이 없다. 캐롤도 거의 듣지 않고. 아마 이른 크리스마스를 맞이했기 때문이겠지.
12월 21일. 꼭 데칼코마니 같은 이 날은 닮은 듯 다른 캐롤의 두 주인공이 처음으로 약속을 잡고 만난 날이다. 때마침 21일엔 눈이 내리다 못해 쌓였고, 그런 날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볼 수 있단 게 어찌나 행복하던지. 왠지 모를 떨림과 함께 자리에 앉았고, 불이 꺼지며 영화가 시작되었다.
* 아래부터는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언젠가 그런 평을 보았다. 이 영화가 감독인 토드 헤인즈의 최고작이라고. 물론 2016년 개봉작임을 감안하면 지금은 또 다른 이야기일 수 있지만, 오프닝 시퀀스를 보고 동의했다. 집에서 작은 화면으로 두어 번 보았던 이 영화가 얼마나 위대하게 시작했는지.
녹슨 쇠창살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벽지 패턴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배우들 이름이 그 위에 하나씩 얹어졌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서정적인 배경음악이 잠시간의 지루할 시간을 달래려는 듯, 영화의 전체 분위기를 들려주려는 듯 이어졌고. 영화 제목이자 주인공 이름인 'carol'이 뜨자 약간 부산스러운 소리가 새로 등장했다. 이윽고 카메라가 위로 올라가더니 문인지 창문인지 모를 그 쇠창살의 정체를 보여준다. 하수구. 이제부터 기나긴 테이크다. 하수구에서부터 도로변,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신호등.
구체적인 위치나 시대는 몰라도, 사람들의 옷차림과 북적한 분위기만으로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힌다. 여긴 도시이고, 지금보다 1900년 중반쯤을 다루는 듯하고, 미국인 것 같다. 카메라는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거리 전체를 보여주는데 처음으로 배경음악보다 커다란 목소리가 들린다. 가판대에서 책을 사는 남자. 카메라가 다시금 움직이고, 택시를 부르는 또 다른 남성의 음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드디어 다음 컷으로 넘어갔다.
책을 손에 든 남자가 계단을 빠르고 가볍게 오른다. 손에 쥔 책을 보고 관객은 예감한다. 아, 좀 전에 책 샀던 남자구나 하면서. 그는 한 레스토랑에서 바텐더와 대화를 주고받다가 아는 사람을 발견했는지 걸음을 옮긴다. 앞으로의 여정을 함께 할 캐롤이 보인다. 하지만 남자는 캐롤과 마주 보고 있는 뒤통수의 주인공, 테레즈에게 아는 체한다. 둘 사이의 오묘한 분위기는 테레즈의 친구가 끼어들며 자리가 아예 파하는 것으로 끝난다.
궁금증을 한껏 유발하더니 영화는 테레즈의 좀 더 앳된 시절로 전개된다. 백화점 판매원으로 일하는 테레즈.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이해 경영진이 필수로 착용하라는 모자를 느지막이 쓰고, 손님을 응대한다. 그러다가 문득 한 곳에 그의 시선이 콕 박혔다. 눈을 떼지 못한다는 표현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이, 눈도 안 깜박이며 뚫어지게 쳐다본다. 시선의 끝엔 캐롤이 있었고.
둘의 눈이 마주치고, 잠깐 손님의 시야로 가려진 캐롤은 사라졌나 싶더니 손에 쥔 장갑을 턱 내려놓으며 테레즈에게 말을 건다. 자신의 딸 린디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려는데 뭘 줘야 할지 모르겠다며. 그에 테레즈가 캐롤이 보고 있던 장난감 기차 세트를 추천한다. 이름, 주소, 연락처를 적은 빌지를 끝으로 둘은 손님과 점원 간의 짤막한 만남으로 끝나는가 싶었다. 그런데 캐롤이 두고 간 장갑. 이 장갑을 기차 세트에 함께 보내며 테레즈는 그 연결을 이어가고자 한다.
분실물을 고객에게 전달하는 건 점원으로서의 당연한 행동이지만, 캐롤에게 제대로 기차 세트가 도착했는지 거듭 확인하는 그 목소리엔 분명한 기대감이 있었다. 고마움을 표하는 전화가 한 번쯤은 걸려 오지 않을까 하는. 내색하지 않아도 은근히 캐롤을 기다리던 테레즈에게 곧 반가운 목소리가 찾아왔다. 수화선 너머의 캐롤. 고마운 마음에 점심을 사고 싶다며 둘은 약속을 잡는다.
12월 21일 오후 2시.
테레즈는 공책에 캐롤의 이름과 만날 장소, 시간까지 천천히 적어 내려 간다. 한 획을 긋는 그 손길은 조심스러움이 묻어났고, 그게 참 소중해 보였다.
먼저 도착한 테레즈. 캐롤은 약속에 늦어 미안하다는 사과로 첫인사를 건넨다. 곧 메뉴를 고르는데 능숙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문하는 캐롤과 달리 테레즈는 곁눈질을 하다가 같은 걸로 달라고 한다. 캐롤과 같이 있는 동안 테레즈는 늘 그래 보였다. 캐롤이 "Would you?" 하며 무언가를 제안하고, 테레즈는 넙죽 "Yes"로 답한다. 그렇게 크리스마스이브에 뉴욕 외곽에 있는 캐롤 집에 가게 된 테레즈.
테레즈는 꽤 들떴던 것 같다. 새하얀 눈을 보면 몽글몽글해지는 우리네 마음처럼. 집안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기도 하며, 나름 캐롤을 중심으로 린디, 테레즈가 조용하고도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캐롤의 불청객이 찾아온다. 캐롤과 이혼 소송 중인 하비. 분위기는 폭삭 무너진다. 테레즈가 피아노 치던 화기애애한 순간이 한순간에 꿈같은 일로 뒤바뀌고, 캐롤과 하비의 날카로운 음성들을 들으면서도 듣지 않는 체하며 테레즈는 멀찍이 서성였다. 하비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테레즈를 추궁하며 무례하게 묻는다. 캐롤이랑 무슨 관계냐고. 또 무슨 짓을 벌인 거냐며.
하비의 폭주는 테레즈를 당혹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 캐롤의 자존심이 다칠 만한 행동이었다. 캐롤은 힘겹게 상황을 수습해 간다. 크리스마스는 절대 양보하고 싶지 않았지만 린디를 하비 품에 보내고, 테레즈 또한 집으로 돌려보낸다.
결국 기차 안에서 눈물을 흘리던 테레즈. 분명한 상처였다. 대신 담배를 사 오겠다는 말에 캐롤이 이 밤에 주위가 얼마나 위험한지 아느냐는 분노 섞인 답변이 그를 아프게 했던 것도 있겠지만, 자기 자신에게서 느끼는 실망감으로도 보였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함. 알 수 없는 이야기로 언성을 높이는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 보다가 하루가 끝났다. 크리스마스트리를 고르던 캐롤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누르던, 처음으로 인물 사진을 찍어보기 시작한 변화의 날이 이렇게.
침착함을 되찾은 캐롤이 테레즈에게 사과를 건네고, 테레즈는 이를 받아들였다. 캐롤의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것일지, 혹은 좋아하는 마음으로 상처를 덮어버린 것인지. 린디와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없게 된 캐롤은 접근 금지까지 받게 된다. 크리스마스 기간 동안 자신의 가족들과 보내자는 하비의 말을 완강히 거절한 캐롤에게 벌을 주듯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느낌은 캐롤 또한 똑같이 받는다. 하지만 그는 가만히 있거나 슬퍼하기보다는 뭐라도 말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다. 서부 여행을 가려는데 테레즈에게 동행을 제안한다. 이번에도 역시, YES.
이 말에 엄청난 분노에 휩싸인 남자가 있었으니, 그의 연인 리처드다.
사실 명목상 연인이라고 할 정도로 테레즈와 그 사이엔 별다른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리처드는 유럽 여행을 가자며 오랫동안 테레즈에게 졸랐고, 캐롤의 모든 말에 좋아요를 외치던 테레즈는 대답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그런데 그런 테레즈가 캐롤과 여행을 가겠다니. 자신이 정체 모를 사람에게 밀렸다는 인상을 받은 리처드가 난폭한 말을 퍼붓는다. 2주 뒤면 자신에게 만나달라며 빌게 될 거라는, 바람 섞인 말을 뱉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여행은 순조로웠다. 캐롤이 운전하고, 중간중간 식사를 하고, 가끔은 차에서 간단히 먹기도 하고. 스탠더드 룸 2개를 쓰던 둘은 할인을 핑계로 스위트룸에 묵으며, 더 가까워졌다. 여행을 하며 점점 확신에 차던 테레즈와 달리 캐롤은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하비에게 전화를 걸었다 끊기도 하며. 와중에 테레즈 앞에선 의연하게 굴었다.
그러나 숨긴다고 해서 숨겨질 게 아니다. 서로에게 아주 깊어졌을 무렵 일은 터지고 만다. 호텔에 딸린 카페에서 만난 외판원. 그는 외판원이 아니라 하비가 고용한 사람이었다. 둘의 옆방에서 그들의 음성을 녹음한 테이프를 하비에게 보낸 걸 알자 캐롤은 거의 이성을 잃는다. 총을 그에게 겨눌 정도로.
테레즈는 캐롤이 지닌 불안을 감지했었다. 그의 캐리어 속 총을 이전에 보았기에. 슬쩍 그에게 물어봤지만 캐롤은 두렵지 않다고 답했다. 캐롤이 말하지 않는 이상 이때에도 테레즈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장전하지 않은 총은 빈 탄창 소리만 냈고, 캐롤이 운전하는 차 안은 테레즈의 울음 섞인 말로 뒤덮인다. 이 모든 게 자신 때문이라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조건 좋다고 따라왔다며. 캐롤은 그게 아니라고 테레즈를 달랜다.
그렇게 둘은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문제는 캐롤이 혼자 정한 마지막이었다는 것. 아침, 잠에서 깬 테레즈를 맞이한 건 캐롤의 오랜 친구이자 한때 만났던 사이인 애비였다. 테레즈는 넋 나간 사람처럼 먹지도 않고 가만히 앉았다. 딱 실연당한 모습으로. 실연이 맞긴 하다. 제 인생을 뒤흔들어 놓고선 어느 날 눈 뜨자마자 홀연히 사라졌다니.
테레즈는 애비 더러 묻는다. 왜 자신을 싫어하냐고. 주어와 목적어가 바뀐 것 같았다. 테레즈는 캐롤이 애비에게는 솔직한 얘기를 하며 의지한다는 걸 충분히 느끼고 있었고, 둘이 만났던 사이란 것도 알기에. 그 마음을 아는지 그게 사실이라면 아침 댓바람에 서쪽까지 비행기 타고 왔겠냐는 말부터 애비가 열 살부터 알고 지낸 소꿉친구라는 이야기까지 덤덤히 들려준다. 그리고 캐롤의 편지를 건넨다.
캐롤은 불같으면서도 물 같다. 화르륵 타올랐다가 금세 차분해지며 자신이 무엇을 할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찬찬히 생각하고 행동한다. 테레즈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불쾌하고 화가 날 테지만, 캐롤이 생각하기에 이건 최선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최선. 이번에도 테레즈는 아무것도 선택해보지 못한 채로 어떤 상황에 놓였다. 그리고 돌아온 집.
눈에 보이는 건 똑같은데 모든 게 달라졌다.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고, 테레즈는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기 시작한다. 사진. 캐롤이 선물한 최신형 카메라도 있지 않은가. 포트폴리오를 착착 준비해 가며 사진을 엄선한다. 현상한 사진 중에 불쑥 캐롤이 나와서 멈칫하더라도, 동요하지 않고 할 일을 할 뿐이다.
캐롤은 무얼 하고 있는가. 감옥에 갇힌 사람처럼 하비네 가족 틈에 둘러싸였다. 심리 상담사를 꾸준히 만나며 '동성애 치료'를 받는 중이다. 1950년대 뉴욕에서는 동성애가 정신병 취급받았으므로, 그들에겐 당연한 처사이긴 하다. 일련의 노력은 두 사람을 위한 것이다. 린디, 캐롤 자신.
본인은 얼마나 의식할지 모르겠지만, 실은 한 사람 더 있다. 테레즈. 자신이 아닌 사람인 척 연기하는 똑같은 일상에 숨 막혀하는 캐롤에게 애비는 테레즈 얘기를 꺼낸다. 잠시 간의 정적. 소식 뭐 알고 있느냐는 은근한 물음. 퍽이나 진지한 상황인데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제 손으로 놓았는데 정작 놓지 못한 사람은 누구인가. 잘 모르겠는데 뉴욕타임스에 입사한 것 같다고 답하는 애비도 참. 서로 어깨동무하며 계단을 내려가던 뒷모습이 힘들 때 의지해가며 버텼을 그들의 세월을 느끼게 해 주었다.
캐롤은 하비와 자신의 변호사들과 만난 공적인 자리에서 처음으로 모두를 배제한, 자기 자신을 위한 선택을 내린다. 자신의 성 지향성을 인정하고, 테레즈와 있었던 일도 인정하며. 린디 양육권은 포기하되 한 달에 최소 한 번은 만나야겠다고. 여기까지 최대한 양보한 건데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법정까지 갈 거고, 그러면 정말 추해질 거라고. 그리고 하비에게 말한다. 우리 그렇게 추한 사람은 아니잖아.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한 테레즈, 자기 자신을 선택한 캐롤. 둘은 알게 모르게 한 뼘 자라난 상태로 만난다. 이번엔 캐롤이 기다린다. 그가 약속 시간에 보이지 않자 전화를 건다. 테레즈가 일하는 곳에 전달한 편지가 제 주인을 잘 찾아갔는지. 그렇다는 답을 듣고 다시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반대편 의자가 찼다. 테레즈가 온 것이다.
캐롤은 가구 바이어로 일하고 있다며 근황 얘기를 늘어놓는가 했더니 집이 꽤 큰데 텅 비었다고. 괜찮으면 함께 살자는 제안을 꽤나 대뜸 던진다. 단숨에 뱉는 그 말이 의아하기도 하면서 지금처럼 디지털로 순식간에 연결되는 세상이 아니니까, 오히려 이 전개가 당연한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테레즈는 생전 캐롤에게 하지 않던 답을 들려준다. NO.
캐롤은 반쯤 예상한 답이 아니었을까. 이따 저녁 약속에 가는데 마음이 바뀌면 와 달라는 말과 함께 분위기는 오묘해진다. 이 오묘한 분위기로 책을 든 남자가 테레즈를 부른다. 맞다, 이제 영화 초반 장면과 맞닿았다. 캐롤과 테레즈는 각자의 모임 장소로 흩어진다. 테레즈는 파티 장소에서 시간을 잘 보내면서도 한 편으로는 계속 고민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캐롤의 시점은 보여주지 않았지만, 그도 똑같지 않았을까. 똑같았을 거다.
어떻게 알 수 있냐 하면, 영화의 마지막. 결국 테레즈는 캐롤을 찾아간다. 테레즈가 멀리서 캐롤을 보고, 서서히 다가선다. 캐롤이 테레즈를 발견한다. 둘의 눈이 짧게 마주쳤던 백화점에서의 첫 만남과 달리 이번엔 서로를 뚫어지게 본다. 그렇게 눈빛이 계속 이어지다가 영화가 먼저 끝난다.
이제 테레즈도, 캐롤도 두렵지 않다.
너무 좋았다. 좋았다는 모호한 표현이 가장 정확하다고 느낄 만큼 좋았다. 끝나고서는 이번 영화를 더욱 특별하게 해 줄 이야기가 이어졌다.
영화 속 소품 등을 굿즈로 만들어 판매하는 '클로저'다. 첫 상영회 기념으로 캐롤과 관련된 몇 가지 선물을 받았다. 테레즈가 사용한 노트를 본떠 만든 수첩, 편지지, 스티커들을 받았다. 은근 묵직한 선물을 품에 안고 완벽한 마무리를 지었다. 12월 21일 오후 2시, 그들의 점심 약속에서 곁들인 마티니를.
뒤에 일정이 있어 음미하고 가진 못했지만, 이런 경험 자체가 좋았다. 사실 12월 21일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며칠 전일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그런데 코끝 시린 겨울과 딱 맞는 영화를, 영화 속 뜻깊은 날짜와 정확히 같은 날에 보며 영화에서 나온 음식을 맛보며 마무리 짓다니. 그들이 담긴 장면들을 다시금 떠올리며 내게도 소중한 날이 하나 더 생겨 기뻤다.
다가올 25일보다 더 좋은 기억이 생긴 것 같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12월 21일이었던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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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2주 최신개봉영화
위드코로나 시대의
영화관의 부활을 시작하며
11월 2주차에는 어떤 영화가 개봉을 하는지 한번 볼까요?
11월 2주 개봉영화 5편!
강릉 Tomb of the River , 2021
믿고 보는 두 배우의 연기 열연
영화 "강릉"은 강릉 최대의 리조트 건설을 둘러싼 두 조직 간의 대립을 그리는 작품으로
개발의 우선순위에서 밀려있었던 도시 강릉이 올림픽을 계기로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 들었던 양가적 감정을 영화에 담았는데요
정통 범죄 액션 누아르의 매력을 물씬 느낄 수 있는 영화의 탄생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특히 6년 만에 다시 호흡을 맞추는 장혁과 유오성 두 남자가 선보일 강렬한 카리스마는
범죄 액션 누아르 장르의 매력을 듬뿍 느끼고자 하는 관객들의 기대치를 100% 충족시켜줄 것입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신세계', '범죄도시' 흥행 계보 잇는 범죄 액션 누아르!
첫번째 추천영화 "강릉"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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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움직이지않는다 太陽は動かない , The Sun Stands Still , 2020
후지와라 타츠야, 타케우치 료마, 변요한, 한효주
영화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전 세계에서 극비 정보들을 조사하는 AN통신 요원들의 이야기를 담은 논스톱 스파이 액션 영화입니다.
역대급 글로벌 로케이션 촬영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데요.
배우 후지와라 타츠야, 타케우치 료마, 변요한, 한효주 등이 한·일 스타들이 함께 출연합니다.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베스트셀러 작가인 요시다 슈이치의 동명의 작품을 포함한 타카노 시리즈 3부작을 원작으로,
6부작 드라마와 영화가 동시에 제작된 대형 프로젝트입니다.
제한된 시간 내에 보고하지 않으면 심장 속의 폭탄이 터지는 기발한 소재를 바탕으로
일본, 중국, 불가리아 등 전 세계를 무대로 펼쳐지는 압도적인 스케일로 많은 관심을 받았죠.
'분노', '악인' 등을 집필한 베스트셀러 작가 요시다 슈이치의 첩보 소설 타카노 시리즈!
두번째 추천영화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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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최동원 1984 CHOI Dong-won , 2020
무쇠팔, 부산의 심장, 최고의 투수, 등번호 11번, 불꽃 투혼, 금테 안경
영화 "1984 최동원"은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극적인 한국시리즈,
1984년 가을 그야말로 기적 같은 우승을 이끈 롯데 자이언츠 무쇠팔 故 최동원의 투혼을 담은 최초의 다큐멘터리입니다.
최동원은 1983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프로에 데뷔, 한국 스포츠사를 빛낸 인물이죠.
‘가을의 기적’이라 불리는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시리즈 7차전 중 5경기에 등판,
만화 같은 4승 1패를 기록하며 롯데 자이언츠를 우승으로 이끈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이기도 합니다.
특히, 올해가 故 최동원의 10주기로
그의 첫 번째 다큐멘터리 "1984 최동원"이 개봉해 그 의미가 더 깊습니다.
1984년 가을의 전설로 남은 최동원의 기적 같은 4승 1패의 활약상!
세번째 추천영화 "1984 최동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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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오더 Nuevo orden , New Order , 2020
<기생충>의 익스트림 버전! 올해 가장 강렬한 문제작!
영화 "뉴 오더"는 202X, 머지않은 미래,
마리안의 호화로운 결혼식을 앞두고 멕시코 사회의 질서가 완전히 뒤바뀌면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사건을 담은 디스토피아 스릴러입니다.
칸영화제 3관왕에 빛나는 거장 미셸 프랑코 감독의 신작이자
도발적이면서 날카로운 문제 제기로 전 세계 평단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뉴 오더"의 놀라운 반전과 결말은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간 전쟁에서 결코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하며
작품의 메시지를 한층 더 과감하게 전달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폐부를 꿰뚫어 본 통찰력 있는 문제 제기와 날카로운 연출로 빚어낸 마스터피스!
네번째 추천영화 "뉴 오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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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스패밀리2 The Addams Family 2 , 2021
<슈렉><마다가스카> 제작진의 NEW 시리즈
1930년 대, 미국 만화가 찰스 아담스가 ‘뉴요커’에 그린 신문 만화로 시작한 '아담스 패밀리'는
이후 ABC 방송국에서 코미디 드라마로 제작되었고, 1991년에는 동명의 작품으로 영화화되었죠.
그리고 2019년 '슈렉', '마다가스카' 제작진의 애니메이션 버전으로 제작되며
전 세계적으로 다시 한번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전편보다 더 흥미진진한 모험담과 거대해진 스케일로 아담스 패밀리2가 개봉을 하는데요
사춘기에 접어든 ‘웬즈데이(클로이 모레츠)’와 ‘퍽슬리(제이본 워너 월튼)’,
권태로운 가족 분위기에 위기를 느낀 아빠 ‘고메즈(오스카 아이삭)’와 엄마 ‘모티시아(샤를리즈 테론)’,
트러블 메이커 삼촌 ‘페스터(닉 크롤)’까지 여전히 독보적인 매력으로 중무장한 아담스 패밀리의 특별한 가족여행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웬즈데이’를 시작으로 가족 간의 보편적인 여러 문제를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다섯번째 추천영화 "아담스 패밀리2"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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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주 넷플릭스 추천작 - <푸른 눈의 사무라이>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번 주 넷플릭스 추천작은, 지난 11월 초에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푸른 눈의 사무라이>. 장편 영화 각본 작업과 시리즈 작업으로 국내에도 제법 알려진 마이클 그린과 앰버 노이즈미가 제작과 각본을 맡은 작품이다. (여담이지만 마이클 그린은 넷플릭스와 최근 전속 계약을 체결해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들을 작업 중이다.) 미국과 프랑스에서 제작된 작품이지만 그 배경은 일본을 소재로 하고 있고 사무라이 소재이기에, 성우진들은 랜달 파크, 마야 어스킨, 마시 오카 등의 아시안 계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다. 총 8부작의 다소 짧은 호흡의 시리즈로, 제인 우를 비롯한 다섯 명의 감독이 번갈아가며 에피소드별로 연출을 맡았다.
일본의 에도 시대인 17세기, 혼혈 검사 '미즈'의 복수를 다룬다. 미즈는 일본인 어머니와 백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푸른 눈을 물려받았으나 눈빛의 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놀림과 차별을 당하고 '악마'라는 수식을 얻는다. 어머니와 일찍 헤어진 후, 야유를 피해 도망치다가 외딴 곳에 기거하는 한 맹인 도공과 함께 살며 검에 대한 기본기를 익힌다. 미즈의 목적은 자신과 어머니를 버리고 떠난 아버지, 그러니까 자신이 태어날 시기 즈음 일본에서 머물렀던 백인 유럽 남성을 모두 죽이는 것이다. <푸른 눈의 사무라이>는 미즈의 복수가 시작되는 지점부터 일단락되는 지점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출생의 비밀과 복수가 가미된 로드 트립 등 일반적인 사무라이 물이나 소위 말하는 '찬바라'(검이 부딪히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 장르가 갖춰야 할 기본이 잘 녹아있다. <푸른 눈의 사무라이>의 첫 번째 화에서는 '미즈'라는 검객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설명하며 절대 권력 아래 제멋대로 흘러가는 가공된 에도 시대의 어두운 면을 다루는데, 이 이야기의 진짜 시작은 이 첫 번째 화가 끝나면서 비롯된다. 앞서 말했듯 일반적인 사무라이 장르인 듯하지만 주인공 미즈가 남장 여자라는 신분이 말미에 드러나고, 그 이후부터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말하자면 뻔한 찬바라 장르가 주인공의 성별을 치환했다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로 인해 '뻔하지 않은' 장르가 되어버린 것이다.
남성들이 군림하는 싸움의 세계에서 남장 여자라는 컨셉의 애니메이션은 <뮬란> 등을 통해 알려지고 전파된 바 있지만, <푸른 눈의 사무라이>는 단지 그 소재를 적극적으로 캐릭터에 입히는 것에 그치지 않아 주목할 만하다. 백인 남성과 일본인 여성 사이에 혼혈로 태어났고, 백인의 눈과 피부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어디서든 차별받는 사람이 되었으며, 자신에게 입혀진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검기를 익힌다는 설정이 자칫 평범해질 수 있는 캐릭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푸른 눈의 사무라이>의 두 제작자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의 아이를 바라보며 <푸른 눈의 사무라이>가 시작되었다고 밝힌 그들은, 누구도 튀어보이고 싶지 않고 튀는 자를 억압하려 노력한 답답하고 절망적인 시대를 다뤄보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미즈를 비롯한 이 시리즈의 주인공들은 자신을 억압하고 정형화하는 굴레를 벗어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결국 그것을 스스로 이루게 된다. 갇힌 새장에서 날아가듯 자유를 찾아 각자의 사명과 신념을 향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캐릭터들의 매력이 매 에피소드마다 흘러 넘친다.
입체적이고 주체적인 캐릭터성도 장점이지만, 무엇보다 8부작 내내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 동시에 갖가지 변주를 꾀하는 연출이 가장 인상적이다. 2D/3D 하이브리드 기술로 제작되어, 3D를 사용하더라도 2D의 수작업을 연상케하는 애니메이션의 제작 방식은 이런 화려하고 회화 같은 분위기의 연출을 기술적으로 충분히 뒷받침해준다. 특히 5화의 인형극의 형식으로 설명되는 과거와 현재의 교차 플롯 연출은 압도적. 실화와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기 위해 전체 애니메이션 등급을 18세 이상으로 수위 상향을 꾀한 선택은 신의 한 수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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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돌, 수백 만의 우주를 건너
묻고 싶다. 그럴 때 없냐고.
끊임없이 자극적인 걸 찾아다니는, 멈추지 못하는 나를 발견할 때. 새롭다는 건 다 해보고, '요즘 이게 유행이래' 하면 뭔지 보지도 않고 '그래? 얼마나 재미있기에?' 하면서 일단 기웃거려 보는 나를 발견할 때.
물론 이런 일련의 행위들이 즐겁지 않다는 건 아닌데... 사실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즐거워서 움직이기보다, 그렇게 끊임없이 따라다니지 않으면 도태될 것 같은 두려움이 더 큰 동기로 작용하고 있음을 깨달을 때. 심지어 그 실패감조차 콘텐츠로 뽑아내야 한다는 ("유튜브를 해! 유튜브를!") 목소리 틈바구니에서, 부단히 발버둥 치는 기분이 들 때.
그러다 문득 깨달을 때. 그 모든 발버둥은 결국 내 마음 하나와 싸우는 거였구나. 단지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 그 하나가 필요했구나. 그걸 놓쳐서 자꾸 이렇게 허덕이면서 사는구나. 안정이란 인간의 환상이 아닐까?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놓치는 균형 같은 것, 공중그네 타는 유니콘이나 외줄타기를 하는 인어공주 같은 것. 그 환상을 찾아 허우적거리는 내가 덩그러니 있는 게 아닌가? 그냥 이게 환상임을 인정하고 불안정을 받아들이면 될 것을.
이 두 가지 느낌이 은유적으로 완벽하게 들어간 영화가 있다. 더없는 혼돈으로 키치하게 반짝거리는 정신없는 세상, 그 안에서도 묵직한 돌처럼 단단하게 나를 붙들어주는 무언가까지 다 들어 있는 종합 선물 세트 같은 영화가.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그 제목만큼이나 얼핏 복잡해 보이는 영화다. 양자경이 분한 주인공 에블린은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세탁소를 운영하면서 살고 있다. 모셔야 하는 아버지, 기대기엔 너무 나약해 보이는 남편, 자꾸 엇나가면서 멀어진다고만 느껴지는 딸, 빡빡하게 숨통을 죄어 오는 세무의 늪... 에블린은 하루하루를 지친 표정으로 살고 있던, 평범한 중년 여성이다.
그러나 세무 조사를 받으러 간 자리에서 갑작스럽게 멀티버스를 맞닥뜨리게 된다. 멀티버스라는 단어도 들어보지 않고 살았을 에블린에게, 세상은 너무 갑작스러운 속도로 무한 확장된다. 살아오면서 무수한 가능성으로만 존재했던 모든 선택의 가지들이, 내가 내리지 않은 그 선택을 했다면...으로 시작되는 수백만 개의 평행 우주로 존재한다. 그 다른 에블린들은 쿵푸 고수가 되기도 하고, 결혼을 포기한 대신 근사한 커리어를 이루기도 했으며, 심지어 손가락이 핫도그로 이루어진 사람들의 세계에서 지금과는 다른 사랑을 하며 살고 있기도 하다.
우왕좌왕하다가 갑자기 쿵푸 고수의 일면을 보이고, 괴로워하며 세파에 지친 얼굴을 드러내다가도 새로 들은 정보들을 척척 얽어내는 에블린의 모습은 우리 주변의 수많은 중년 여성들을 떠올리게 한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그러나 세상이 흔히 측정하지 않는 가치들을 품은 사람들을. 그들이 가지 않은 길, 지금과 많이 달랐을 수도 있는 다양한 삶의 가닥들, 거기서 엄마이자 아내이자 딸 외에 그들이 받았을 호칭들을.
여기서 때로는 능청스럽게 코믹하고, 때로는 자차분한 얼굴로 깊은 감정을 끌어내는 양자경의 연기가 빛을 발한다. 원래 성룡을 주인공으로, 양자경은 아내이자 조력자 역할을 하는 캐릭터로 세우려 했다던데 좋은 변경이었던 것 같다. 유려한 무술을 펼치는 성룡의 모습이 궁금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역시나 빼어난 무술 배우이자 오랜 세월 '조력자'의 위치에 놓여 있던 그가 할리우드에서 첫 주연작을 맡았다는 사실 또한, 세상에서 측정되지 않았던 어떤 가치들을 떠올리게 한다.
다소 복잡해 보이는 세계관에 대한 정보 값이 0인 것인 에블린이나 관객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친절한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에블린의 세상을 둘러싼 갈등이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딸과 아버지, 아내와 남편, 어머니와 딸로서 존재하면서 그 사이에 놓여 있던 각양각색의 갈등과, 이를 우선시하느라 덮어두었던 자신의 존재까지 떠오른다. 멀티버스까지 가져와 엄청 거대한 이야기로 펼쳐지는, 수백만의 우주를 건너 이루어지는 그 갈등은 결국 가장 가깝고 내밀한 충돌과 닮았다.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아연실색해지는 그 충돌의 모습은 가히 불꽃놀이를 방불케 할 만큼 다채롭다. 형형색색의 화려한 충돌(심리적 충돌이든 물리적 충돌이든)의 양상을 보고 있더라면 어이가 없어서 자꾸 웃음이 비실비실 나오는데,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순간. 이 영화의 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쉬운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만듦새가 매우 좋은 영화이고, 엔딩 크레딧에 어떤 동물도 촬영 과정에서 다치지 않았다는 문구를 보기는 했지만, 하루가 멀다고 잔혹한 동물 학대 소식이 들려오는 땅에서 비록 허구일지언정 강아지가 이리저리 휘둘리는 장면을 보는 것은 편치 않았다. 픽션이고, 만들어낸 장면이고, 실제 강아지가 다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는 영화의 문제라기보다 내가 밟고 선 땅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내가 밟고 선 땅을 인식하면서 볼 수밖에 없다.
같은 이유로, 국세청의 악명이 높은 미국에서는 세무 조사 장면이 강력한 기능을 했다고 들었다. <나이브스 아웃> 린다의 깔끔한 표정을 싹 감춘 제이미 리 커티스가 국세청 직원 데어드리 역할을 맡았는데, 타성에 젖은 얼굴로 서류를 꼼꼼히 보며 날카로운 눈빛을 쏘는 모습도 충격적이고, 이후로 멀티버스에서 그가 보이는 모습 또한 어마어마하다. 에블린 못지않게 다채로운 평행우주를 가졌을 것 같은 인물로, 개인적으로는 에블린의 거울 너머 또 다른 주연이 아닐까 싶을 만큼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 * *
이 영화는 단조롭고 관성적인 일상을 한 꺼풀 벗긴 자리에 무엇이 있는지 보게 한다. 에블린과 데어드리, 남편 웨이먼드와 딸 조이, 할아버지 공공까지 모두 '가지 않은 길'에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존재들이었고,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는 존재들이었다.
더불어 이들과 맺는 관계, 때로는 남편이 구운 쿠키나 따뜻한 말 한마디처럼 너무나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얼마나 힘있게 사람을 잡아주는지 깨닫게 한다. 결국 사람을 구하는 건 사람을 통해 나오는 무언가 아닐까. 마셔도 마셔도 목마른, 계속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할 것 같은 조급한 의무감이 세대를 구원하지 못하는 것처럼.
반짝이지 않는 소박한 모습으로, 우직한 돌처럼 항상 옆에 있는 그 어떤 마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수백만의 우주를 건넌 충돌이 무엇이든, 어디서든, 단번에 가르고 들어올 것이다.
ㅁ '씨네랩'에서 시사회 티켓을 제공받아 감상한 후 작성하였습니다. 영화 개봉일은 10월 12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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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새처럼 왔다 가는
SYNOPSIS
재능 있는 조각가인 리지는 새로운 전시를 준비하며 예술가로서의 삶과 가족, 친구 등 일상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문제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애쓴다. 리지는 사는 집의 주인이자 예술가 라이벌이기도 한 조와 사소한 사건들로 갈등을 겪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오빠 숀의 상태도 살펴야 하는 상황이다. 전시 개막일은 점점 다가오는데, 리지는 과연 무사히 전시회를 열 수 있을까? 〈웬디와 루시〉(2008),〈퍼스트 카우〉(2019) 등 미국 사회의 현재적 삶을 내밀한 시선으로 다뤄 온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신작. 2022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화제작을 아시아 프리미어로 선보인다.
PROGRAM NOTE
〈쇼잉 업〉은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삼지만 굴곡진 서사나 드라마틱한 사건과는 거리가 멀다. 전시를 앞둔 리지는 사소한 일들로 골머리를 앓는다. 예술가 동료이자 리지가 사는 집의 주인이기도 한 조는 보일러 고장 문제를 나 몰라라 하고, 흩어져 사는 가족은 저마다 리지에게 근심과 걱정을 불러일으킨다. 전시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작업에 집중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짜증과 불안이 쌓여가지만, 주변에 그걸 알아채 주는 이는 없다. 켈리 라이카트의 주인공들이 줄곧 그랬듯 리지도 꽤나 고독한 인물이다. 오리건과 몬태나의 풍광 속을 확신 없이 지나던 이들처럼 리지 또한 삶의 어느 시기를 천천히 지나는 중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 이들에게는 곁을 내주고 돌봐야 할 동물이 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여성감독 중 하나인 라이카트는 〈퍼스트 카우〉로 19세기 미국의 풍경을 바라본 뒤, 오리건의 작은 도시 포틀랜드를 배경으로 지역 예술가들의 활동과 끊임없이 무언가 만드는 삶의 모습을 포착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쇼잉 업〉에서 두드러지는 건 찰흙, 직물, 실 같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재료를 계속해서 만지는 손짓이다. 영화 속 인물들에게 예술이란 그처럼 매일의 반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단하고 유명한 대가가 아니라, 매일 끈기 있게 작업대에 앉는 평범한 예술가의 이야기가 전하는 단단한 울림은 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슬로건 ‘우리는 훨씬 끈질기다’와 공명한다. 〈쇼잉 업〉을 통해 매일 무언가 만지고, 걷고, 돌보고, 일하는 움직임들로 지켜지는 소박하고도 경이로운 일상의 시간을 마주할 수 있길 바란다. [손시내 프로그래머]
*영화 <쇼잉 업>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보는 동안 ‘한동안 내가 피곤했군…’ 깨달으면서, 너무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눈이 살풋 감기는 걸 참지 못하는 영화들이 있다. 성격상 푹 잠들지는 못하고 아주 잠깐 졸다 깨다 반복하면서, 그래도 흐름을 놓치지는 않을 만큼만 눈을 감았다 뜨면서 보게 되는 영화들. 공교롭게도 그런 영화들이 내게는 다 참 좋은 영화들이었다. <애프터썬>의 주인공들이 침대에서 숨을 쉬는 박자에 맞춰 같이 눈을 잠깐 감기도 하고,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전작 <퍼스트 카우>도 주인공들이 부지런히 걷고 움직이는 동안 그 소리를 베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둘 다 내 마음 속 명예의 전당에 붙어 있는 영화들이다.
<쇼잉 업>도 그렇다. 영화가 시작되면 벽면 가득,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다채로운 색상의 여성 상들이 있다. 그리고 책상 위에서 흙을 주물러 이 여성들의 모습을 현실로 데려오느라 바쁜 예술가, 리지가 있다. 일도 해야 하고, 사료가 떨어졌다고 역정을 내는 고양이 리키(연기를 진짜 잘하는 천재 고양이이다)의 사료 그릇도 채워 주어야 하고, 제각각의 삶을 살고 있는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대단하게는 못해도 기본 할 도리는 또 해 주어야 한다. 그 와중에 집에 온수는 안 나오는데, 집 주인이자 동료인 조는 온수를 고쳐줄 마음이 없으니, 온수로 샤워를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또 헤매야 한다. 결국 전시회를 코앞에 두고 부랴부랴 연차를 낸다.
(으레 그렇듯) 모처럼 작정한 하루는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고양이 리키의 습격을 받은 새를, 죽더라도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죽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집 밖에 내보낸 새를 친구 조가 구조할 줄이야. 전시를 두 개나 앞두고 있는 조의 부탁에 따라, 엉겁결에 떠맡은 비둘기 한 마리를 돌보는 것이 그 날 가장 주요한 일이 되어 버린다. 심지어 비둘기를 위한 최적의 환경을 만드느라, 작업실을 두고 2층에 올라가서 고양이를 가둬 둔 채로 작업을 한다.
결국 작업의 속도나 방향은 삶에 생겨나는 일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술가도 인간이니까, 어떤 상황이든 아랑곳 않고 작업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마감이 코앞이어도 고양이와 비둘기에 둘러싸인 하루를 보낼 수도, 그럴 수도 있다.
어찌 보면 비효율적인 태도일 수도 있다. 사무실 동료가 낄낄거리며 말했듯이, 비둘기를 병원에 데려가고 비둘기가 스트레스를 받았다며 조심하는 것이 이상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이 마음이 예술가를 예술가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어딘가에 묻혀 있는, 세상에 가시적이지 않았던 느낌과 마음과 감정과 에너지를 가시적인 형상으로 이 세계에 끌어오는 일이다. 다른 데 가서 죽었으면 생각할 수는 있어도, 끝내 외면하지는 못하는 시선 끝에 그 형상이 걸려 있는 건 아닐지.
마음은 마음이고, 손은 손이다. 바삐 작업하는 리지의 손, 그리고 리지가 일하는 학교 곳곳의 학생들이 작업에 몰두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손을 움직여서 무언가를 그리거나 만들고 싶어진다. 그리거나 오리거나 붙이거나 칠하거나 짜거나 뜨는 그 모든 일에 단 한 순간도 재능이 있어본 적 없는 나지만, 그럼에도 자차분히 손을 놀려 보고 싶어진다. 고되지만 행복한 일일 것이다.
책상 위의 작업물과 나, 둘만이 존재하는 시간의 느낌을 안다. 고되고 행복한. 외롭지는 않지만 고독한. 기쁘지만 덜컥 겁이 나는. 동시에 그 모든 것이 마음 같지 않은 답답함도 안다. 그래도 리지는 직업인이 될 만큼 익숙하고 실력이 좋은 예술가니까, 가마에서 잘못 타버린 것을 제외하면 자신이 만들어가는 세계에 있어서는 더없이 초연하지만, 나는 그렇지도 못해서 하나하나 동동거리기만 한다. 그런데, 이거 죄다 행복한 고민이다. 인생은 절대, 작업물과 나 둘만 존재하는 시간으로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직업인이자 예술가로 어엿하게 인정받는 리지에게도 신경 쓸 게 많은 남루한 일상이 있다. 파티에 빠져 온수기를 모른 체하는 친구에게 화가 나는 날들. 가뜩이나 가족이며 전시회의 치즈까지 신경 쓰이는 게 한두 개가 아닌데 비둘기의 건강까지 신경이 쓰이고. 예술가의 삶이라 해서 예술로만 채워지지는 않는다. 답답한 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터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인간의 삶은 으레 그렇다.
그러나 푸드덕거리는 힘찬 날갯짓으로 그 모든 답답한 대화를 탁 끊는 비둘기처럼, 그런 새처럼 나에게 왔다 가는 것들이 있다. 예술가의 삶이든, 예술가가 아닌 나의 삶이든.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의 반복 위로, 사뿐 날아올라 반짝 빛나는 것. 내겐 영화가 그렇다. 어두운 영화관에 나를 틀어박아 두고 잠시 빛나는 생각들로 나를 채우고 나오면, 복잡했던 마음이 위로를 얻기도 하고 답답하던 감정의 맥락이 끊겨 있기도 하니까.
그리고 나서도 또 걸어가는 리지와 조의 뒷모습을 본다. 작업은 계속되고 인생도 계속된다. 오고 가는 것들과 답답한 것들 사이, 인생은 그렇게 계속된다. 그 모든 것들 안에서, 우리는 계속 끈질길 것이다. 앞으로도 쭉.
2023.08.24 17:30-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 2관
2023.08.27 20:00-21:48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MX관
2023.08.29. 13:30-15:18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MX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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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오브 인터레스트] 끝장리뷰 | 벽, 담벼락, 담장(wall) 상징 | 결말해석 | 헨젤과 그레텔 분석 | 사운드와 이미지, 옆모습(측면 숏), 열화상카메라 의미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4)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벽, 담벼락(wall), 결말해석
Chapter 2 사운드와 이미지, 옆모습(측면 숏), 헨젤과 그레텔
00:00 존오브인터레스트
01:07 닮은 영화들
03:01 wall
06:43 결말해석
07:50 사운드, 이미지, 옆모습
08:59 핸젤과 그레텔
10:52 별점 및 한 줄 평
11:15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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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bbitgumi 입니다!
오랜만에 리뷰를 업로드 합니다.
지난 주 개봉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볼륨3의 반응이 무척 좋습니다.
이미 많은 리뷰어와 관객들이 좋은 평가를 하고 있죠.
다양한 관점의 리뷰도 이미 보셨을 거에요.
저는 영화의 완성도 보다는 로켓이 가지고 있었던 감정과 그가 겪었던 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영상에서 확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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