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09-18 23:30:17
[SICFF 데일리] 기울어진 세상을 헤엄쳐
영화 <나의 수호신>
SYNOPSIS.
위험에 빠진 아이, 이상하고 귀여운 수호 동물과 마주치다
PROGRAM NOTE.
절친 타이스와 함께 수영 대회를 준비 중인 열한 살 소녀 아마. 아마는 스스로 네덜란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세네갈 출신인 아마의 부모님은 망명 신청을 거절당해 더이상 합법적으로 네덜란드에 거주할 수가 없다. 어느 날 남동생과 엄마가 불시에 잡혀가고, 도망친 아마는 아빠를 찾아 헤매던 중 거대한 호저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나의 수호신>은 네덜란드에 있는 수많은 불법 이민자들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현실에서 착안한 판타지 영화다. <나의 수호신>은 자신의 집이라 생각했던 곳에서 쫓겨나는 상황에 직면한 아이의 이야기를 통해 ‘집의 의미’를 묻는다. 이민자 이슈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큰 논란 중 하나이지만, <나의 수호신>은 인권이라는 큰 틀 안에서 우정과 연민의 힘으로 해피엔딩을 맞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기를 소망하는 작품이다. (최은영)

우리가 사는 도시를 집어들고 가방 털 듯 탈탈 털면, 거기서 후두둑 떨어지는 동물들은 개, 고양이, 햄스터… 같은 것만이 아닐 거라는 이야기를 어디에서 읽었더라. 생각지 못한 동물들이 후두둑 떨어질 거라는, 정글에서나 볼 거라고 생각했던 동물들이 실은 우리와 같은 도시에 살고 있다는 그 말을.
그렇다면 사람은 어떨까. 나와 비슷한, 아주 닮지는 않았어도 대충 엇비슷한, 그리고 나와 다르지만 대충 예상했던 사람의 범위, 그 바깥의 누군가를 분명 마주하게 되지 않을까.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도시 한복판에서 마주칠 거라 생각하지 않듯이.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익숙한지 아닌지 고작 그 문제다. 누군가의 상상력 하나로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진 것처럼.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그려 본다면, 우리 모두 똑같이 그릴 수 있을 것처럼.
우리의 주인공 아마는 그렇게 도시를 탈탈 뒤집으면 조금 당혹스러울 법적 지위를 가진 채로,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살고 있다. 성격도 밝고, 공부도 잘하고, 네덜란드 최고의 수영 선수를 보며 꿈을 무럭무럭 키우고 있는 될성부른 수영 유망주 어린이이기도 한데, 대회 하나를 나가려고 해도 ‘써도 될 것’과 ‘써서는 안될 것’을 신중하게 골라내야 하는 처지에 있다.
아마가 사는 집은 그 자체로 하나의 마을 같다. 아이들을 씻기고 자신도 씻기를 즐겨 하는 이웃이 샤워기를 틀면 계단참으로 물이 주르륵 흐르는, 그만큼 연결되어 있는. 그러나 아마의 가족은 이런 상황에 불평을 일삼기보다 자연스러운 생활의 풍경으로 받아들이면서 살고 있다. 아빠와 장난칠 때나 썼던 소금 통 하나를 사러, 그 심부름 하나로 아마의 생활이 영영 달라질 때까지는.
집에 있던 아마의 어머니와 동생은 “불법 이민자”여서 잡혀 가고, 아마는 놀이터에 숨어서 일을 나가신 아빠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아마의 세상이 전체적으로 기울어 있음을 관객은 이내 깨닫게 된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앵글이 항상 기울어 있다. 학교도, 경찰서도, 집 바깥도, 전부 다 기울어 있다. 아마가 아빠를 찾아 들어간 “드 로테르담” 건물, 아빠의 일터 또한.
이 기울기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것이다. “불법 이민자”에 대한 편견은 말할 것도 없고, 아마는 스스로가 네덜란드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자랐기 때문에, 자신이 불법 이민자이고 그 편견 속에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사무직과 청소 일에 대한 편견도 가지고 있다. 아버지가 일한 업체의 이름은 Sunshine services이지만, 역설적으로 선샤인이라고는 전혀 빛나지 않는 밤에만 일하고, 밤으로 취급받는다. 세계가 기울어 있는 것이 사실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서글픈 현실에 갑자기 거대한 호저가 나타난다. 영화 자막에서는 고슴도치로 번역되었지만, 호저는 고슴도치와 다르다. 꿀벌과 말벌 정도의 차이랄까. 고슴도치가 가시를 있는 힘껏 세워도 멀리서 (그러니까 그 가시가 나를 공격하기 않을 거리에서) 보면 귀엽겠지만, 호저가 가시를 세우는 모습을 멀리서 보면… 그로테스크하다.
나는 호저라는 생물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호저를 처음 봤는데, 심지어 인도의 동물원에서 야행성 동물들을 모아 놓겠다고 조명을 있는 대로 침침하게 해 둔 어둠 속에서 그 가시가 파르르 서는 모습으로 처음 보았다. 뭔데 저거. 뭐야. 왜 무서워. 무서움을 익히 아는 다른 동물보다, 전혀 모르는 생물의 가시가 더 무서웠다. 알고 보니 호저는 정말 만만치 않은 생물이었다. 호저의 가시에 공격을 받으면 맹수도 배겨낼 재간이 없다.
그러나 이 영화, <나의 수호신> 원제인 ‘토템’답게, 이 영화 속 거대한 호저는 귀엽기만 하다. 도시 속의 사람은 내지 못한 위로의 울음소리를 호저가 낸다. 제목이 <나의 수호신>인데 자막에는 ‘토템’으로 나와, 수많은 어린이 관객들이 엄마에게 “토템이 뭐야?”를 물어야 했음은 아쉬운 포인트지만… (참고로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토템은 “부족 또는 씨족과 특별한 혈연관계가 있다고 믿어 신성하게 여기는 특정한 동식물 또는 자연물. 각 부족 및 씨족 사회 집단의 상징물이 되기도 한다.”)
커피 머신도 사랑이 필요하다며 쓰다듬는 사람이 있는 도시에서, 아마는 그저 호저와 함께 걷는다. ‘상상 속의’ 존재가 아니라면 같이 걸을 상대도 없는, 대도시 속 외로운 아이의 삶. 집이었던 곳은 경찰과 개의 손에 마치 범죄자의 소굴처럼 취급되며 서슴 없는 수색의 대상이 되지만, 호저는 깡통 차기 놀이 상대가 되어 준다. 마치 전통 속 여우 사냥의 한 장면처럼, 아마가, 사람이, 개에게 쫓기는 장면이 현실에서는 연출되지만 호저는 파르르 가시를 세워 아마를 지켜준다.
극중에서 호저를 볼 수 있는 인물은, 아마와 마음의 결을 같이 하는 이들뿐이다. 애초에 아마의 옆에 서 있었던 이들을 제외하면, ‘그리오grio’ 그러니까 가수이자 시인인, 노래로 이야기를 전해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게 하는 일을 사명으로 품은 이들밖에 없다. 이는 영화를 포함한 예술의 기능 중 주요한 한 지점을 짚는다. 기울어진 세상에서도 노래는 계속되어야 함을.
‘온 세계가 당신의 조국’이라는 네온사인이 무의미하게 빛나는 거대한 도시에서, 정작 도시 안에서 평생을 자란 사람을 밀어내는 도시에서, 아마는 호저의 등에 올라 기울어진 세상을 걷는다. 이 차가운 현실에, 이야기 하나를 놓는다. 그 순간 세상은 변한다.

기울어진 세상에서도 ‘상자 바깥에서, 틀을 깨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그들이 그리오grio의 후예, 그러니까 이야기가 잊히지 않도록 하는 이들인지 모르겠다. 아마가 외로운 여정을 걷는 내내 곳곳에서 아마를 먹이는 손길이 있었듯이, 이 외로운 도시를 가방 뒤집듯 탈탈 털면, 생각지도 못한 동물들이나 사람들과 함께, 환대의 손길 또한 함께 후두둑 떨어질 것이다.
아마는 앞으로도 기울어진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아마의 정체성은 ‘네덜란드인’에서 ‘경계인’으로 달라졌을 것이다. 사실은 우리 모두 경계인임을 우리는 언제 깨달을 수 있을까. 여기 계속 사는 거냐는 질문, 아마와 타이스 두 아이의 물음에 부모님의 대답은 동일했다. “그래, 당분간은.” 이사를 가든 추방을 가든, 결말이 어떻든 우리 여기서 당분간은 살아갈 존재들임은 동일하다. 도시를 뒤집어 탈탈 털면 후두둑 떨어질 존재들이라는 사실만큼은 동일하다.
그게 다르게 취급되는, 기울어진 세상을 우리 살아가지만, 이 기울어진 세상에서 노래와 환대의 손길은 계속되니, 새처럼 날아드는 그 손길과 멜로디를 따라 계속 헤엄쳐갈 일이다. 씩씩하게!
9월 15일 20:00-21:37 롯데시네마 은평 5관
9월 17일 16:00-17:37 롯데시네마 은평 6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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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월 3주차 두 번째 최신 씨네뉴스
📮 6월 3주차 두 번째 씨네뉴스가 도착했습니다!
📢CGV, 웹·앱 개편 위해 7월 7일 전국 극장 임시휴업?
CJ CGV는 7월 6일 밤부터 8일 오전까지
차세대 시스템 도입을 위한 웹사이트·앱 이전 작업을
진행 예정이며 임시 휴관일은 7월 7일 월요일이
유력한 것으로 전해져졌는데요.
하루동안 전국 모든 상영관 운영을 중단한다고 합니다. 🗓️
임시 휴업은 영화계에 큰 변수가 될 수도 있겠네요…!
또 한 가지 반가운 소식!
첫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쥡니다.
영화 제작 공동체와 스턴트 커뮤니티에
대한 헌신을 인정받아 공로상을 수여받는다고 하네요.
1981년 데뷔 이후 연기상 후보 세 번,
작품상 후보 한 번 지명됐지만 수상은 없었는데,
🗞️
❶ CGV, 웹·앱 개편 위해 7월 하루 전국 상영관 휴관
❷ ‘톰 크루즈, 생애 첫 오스카 트로피...‘아카데미 공로상’ 받는다
❸ 블룸하우스, ‘쏘우’ 프랜차이즈 권리인수, 제임스 완 복귀 전망
❹ 넷플릭스 시리즈 ’마인드헌터’, 영화 삼부작으로 부활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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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대가 너무 크면 '쿵' 소리 납니다
-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 '쿵'... 소리가 났겠는가 안 났겠는가."평화로웠던 보금자리에 누군가가 돌을 던지면서 예상치 못한 파동이 생겨났다.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개구리'가 등장한다. 이들은 "왜 하필 나야?"라고 묻고, 돌을 던진 이는 "나는 그냥 내 길을 가고 있었고 그 길 위에 네들이 있었던 거지. 그러니 남탓하지 마"라고 답한다. 개구리의 삶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린다.넷플릭스 드라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조용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인물인 영하(김윤석), 상준(윤계상)에게 예고 없이 날아온 '살인'이라는 돌로 인해 일상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이야기를 그린다.드라마는 2021년 펜션을 운영하는 영하와 2001년 레이크뷰 모텔을 운영하는 상준, 두 인물의 이야기를 번갈아가면서 전개하는 이중플롯 구성을 선보인다. 두 이야기의 구분이 모호하고 불친절하게 설명하고 자잘 자잘하게 쪼개고 있지만, 두 사건을 맛깔나게 대비해서인지 끊임없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또한 두 인물이 처한 상황이나 감정들이 대체적으로 비슷해 스토리를 따라가는 데 있어 많은 것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전반적인 분위기를 잡는 연출도 눈길을 끈다. 효과 만점 배경음악과 자연광을 100% 활용한 기가 막힌 미장센, 강렬한 비주얼의 살인마들의 등장신, 자극적인 살인까지 몰입도를 확 끌어당긴다. 극 흐름이 느리다는 단점을 상쇄시킨다.5회에 들어서면서부터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두 개의 시점이 하나로 이어지는 실마리가 등장한다. 이를 토대로 후반부에 의문이 플리면서 점점 극으로 치닫는다. 하지만 초반부에 깔아 두던 미스터리함이 반감이 되고, 보는 이에 따라 후반부는 다소 황당하거나 허무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이는 진행될수록 빈약함을 드러난 서사의 한계점 때문일 것이다.'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연기력은 서사의 단점을 충분히 메꾼다. 김윤석과 윤계상은 가해자가 무심코 던진 돌에 맞은 개구리가 되면서 느끼는 슬픔과 공포, 분노, 좌절 등의 감정을 현실적으로 표현했다. 이들의 깊은 감정선은 몰입감을 높였다.이번 작품에서 파격적으로 변신한 고민시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극에서 서스펜스를 담당한 그는 미스터리한 인물 성아를 매력적으로 소화했다. 과감한 의상과 진한 메이크업, 묘한 미소 사이 어딘가 모르게 소름 끼치는 얼굴이 보인다. 특히 후반부에 보여주는 광기 어린 모습이 잔상을 남긴다. 다만 성아 캐릭터의 기행을 받쳐줄 지지대가 약하다 보니 어떤 이들은 성아의 행동이 너무 뜬금없고,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다.공개 전 평론가들이 남긴 추천평처럼 장점이 도드라지는 부분이 있으나,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당신의 높아지는 기대치가 '쿵'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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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낙엽은 연말연시의 애피타이저(appetizer)다. 승모근을 움츠리게 만드는 늦가을과 초겨울의 바람을 타고 낙엽은 땅 위에 부드럽게 착륙한다. 그때쯤 머라이어 캐리의 'All I Want for Christmas'가 아주 미미한 음량으로, 어렴풋한 환청처럼 들리기 시작한다. 옆을 둘러본다. 아무도 없다. 고독한 마음을 달랠 방도가 없어 길가의 낙엽을 툭툭 찬다. '올해는 다를 줄 알았는데...' 매년 예외 없이 떨어지는 낙엽은 올해도 작년과 다를 바 없음을 무심하게 일러준다.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쓸쓸함의 대명사인 낙엽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릴 작품이다. 낙엽 쌓인 헬싱키를 배경으로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의 설렘을 포착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시간적 배경은 2024년. 일하면서도 술을 홀짝이는 일용직 노동자 '홀라파(주시 바타넨)'와 심드렁하게 단순 노동을 반복하는 '안사(알마 포이스티)'가 주인공이다. 알코올 중독자인 홀라파는 다른 인부들과 함께 컨테이너 숙소에서 생활하고, 안사는 물려받은 작은 집을 소유하고 있긴 하지만 하루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끼니를 해결하기 어려운 처지다. 매우 가난한 두 사람의 마음에 사랑이 깃들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그런데 언제 사랑이 당사자들의 입장을 숙고하여 적절한 시기와 상황에만 찾아온 적이 있던가? 사랑은 미운 4살처럼 자기 멋대로다. 어느 금요일 밤, 가라오케에서 처음 만난 홀라파와 안사는 서로 인사도 하지 않고 눈빛만 몇 차례 주고받지만 두 사람의 메마른 마음에는 해일이 들이닥친다.
홀라파가 말한다. “그럼 또 만날까요? 근데 이름도 모르네요” 안사가 대답한다. “다음에 알려줄게요” 안사는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를 홀라파에게 건넨다. 홀라파는 고작 담배를 피우려다가 그 종이를 홀랑 잃어버린다. 큐피드는 홀라파의 엉성한 행동을 보고 얼마나 답답했을까? 다행히 큐피드는 거기서 포기하지 않는다. 홀라파와 안사가 재회할 수 있도록 우연의 다리를 놓아준다. 안사는 홀라파에게 "당신은 좋지만 술주정뱅이는 싫다."라고 분명하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한다. 이제 관건은 홀라파가 술을 끊을 수 있을지 여부다. 술을 입에 달고 살던 홀라파는 혈중 알코올 농도를 0으로 만들 수 있을까?
핀란드를 대표하는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충실한 관찰자가 되어 안나와 홀라파의 관계를 조심스레 지켜본다. 감정을 끌어올리는 화려한 카메라워크나 절절한 연기가 없다. 무표정하게 재밌는 말을 내뱉는 등장인물들 덕분에 극장에는 몇 차례 웃음이 가득했다. 영화에 삽입된 노래 가사들은 말없는 인물의 심정을 대신 전달한다. 안사가 키우는 강아지는 신 스틸러(scene stealer)다.
다시 낙엽으로 돌아온다. 걸리적거리고 거추장스럽기만 한 것 같은 낙엽은 사실 보온 효과가 있다고 한다. 겨울 산에서 혹시나 조난당했을 경우에 낙엽으로 몸을 덮으면 생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어쩌면 안사와 홀라파는 서로에게 겨울 산의 낙엽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노래 -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의 마지막 3행은 다음과 같다.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를 보고 난 후 이렇게 바꿔 주고 싶었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 가난하더라도 이것들을 / 이 모든 것들을 간직해야 한다는 것을."
(끝)
* 12월 13일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진행된 <사랑은 낙엽을 타고> 시사회에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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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으로 점철된 봉준호식 살아남기!
<기생충> 이후 약 5년 만의 신작이다. 시간이 흐른 만큼 세상은 변했다. 그리고 사회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달라졌다. 봉준호 감독의 시선도 그러한 듯하다. <기생충>을 통해 한 줌의 빛도 행복도 허락하지 않았던 감독은 <미키 17>을 통해 희망을 얘기한다. 그것도 사랑으로 점철된 희망을. 물론, 그 도착 지점까지 가는 과정은 다수의 작품에서 보여준 세상의 불합리함이 가득하다. 그 속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힘 없는 사람들도 등장한다. 하지만 달라졌다. 이게 관객들에게 덜컹거림으로 작용할 듯 하지만 어쩌면 이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건 희망이라는 감독의 메시지는 더 확고해보인다.
인생은 한 번 꼬이기 시작하면 매듭을 풀기 어렵다. 미키(로버트 패틴슨)의 인생이 그렇다. 친구 티모(스티븐 연)의 꼬드김에 마카롱 사업을 하다가 폭삭 망한 그는 무서운 사채업자를 피해 티모와 함께 지구를 떠나려 한다. 외계 행성 개척 우주선을 타기로 마음먹은 것도 잠시, 미키는 자신에게 특별한 재능이 없다는 걸 깨닫고, 가장 고된 일을 도맡고, 죽으면 다시 프린트되는 익스펜더블로 지원한다. 이 비인간적 기술로 반복 재생되는 미키는 부속품처럼 우주선 내 노동자로 살아간다. 17번째 복제로 태어난 미키는 얼음 행성 생명체인 ‘크리퍼’를 만나 죽을 위기에 놓인다. 다행히 살아 우주선으로 복귀한 안도감도 잠시, 왓더~~ 자신의 옆에 미키 18이 떡하니 있는 게 아닌가. 행성 당 1명만 허용된 익스펜더블이 법규를 위반한 ‘멀티풀’ 상황.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 그럼 누가 죽어야 할까? 17? 18? 에잇 신발~~
| 이름 없는 노동자의 이름(실존)찾기미키!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
수없이 등장하는 이 질문. 어쩌면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미키는 이 질문을 매번 듣지만, 대답을 피한다. 정확히 말하면 대답하지 못한다. 그는 죽음을 반복하는 복제인간이기 때문이다. 이 운명을 가진 이에게 죽음의 개념은 우리와 좀 다르다.
그런 그에게 미키 18이 나타나고 처음으로 실존에 대한 고민을 한다. 미키 17은 큰 범주안에서는 본인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객체로 받아들인 미키 18을 본 후, 자신의 삶이 빼앗길까봐 두려워한다. 특히 멀티플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누군가는 죽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자 미키 17은 자신의 생존권을 주장하며 어떻게든 살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동안 바보처럼 수동적인 삶을 택했던 미키 17은 이 상황을 통해 비로소 능동적인 삶을 취한다. 그는 장대한 미래를 위한 목적으로 실험 쥐처럼 쓰이고, 부속품처럼 사용됐던 자신의 삶이 정작 자신을 위한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나의 삶은 어떤 의미고, 나의 죽음은 존중받고 있는가에 대한 자문이 그것.
극 중 되풀이되는 그의 죽음은 존중받고 있지 않다. 죽는 게 직업이지만, 다수의 이익과 생명을 위한 목적에 사용되는 일회용품 취급을 받는 건 참혹할 따름이다. 복제품임에도 생명을 갖고 태어났지만, 독재자 케네스(마크 러팔로)는 보란 듯이 그 생명을 박탈까지 한다. 일말의 존중 없이 그게 직업이니 그 본분을 다하라는 말뿐이다. 이는 위험하고 질 낮은 노동 현실에 놓인 이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고, SF 장르를 뚫고 현실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촉매제로 작용한다.이처럼 지난한 과정을 통해 펼쳐지는 후반부는 존중받아야 마땅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미키 17의 이야기로 귀결된다. 복제 인간이지만, 어엿한 생명체로서 인간으로서 인정받기 위한 몸부림. 그 노력과 결단의 값은 다행히도 긍정적이다.
| 봉준호 필모그래피의 집대성, 복제품?<미키 17>은 봉준호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집대성한 작품이기도 하다. 우주선 안에서 벌어지는 사회는 <설국열차>의 사회와 비슷해 보이고, 행성의 원래 주인인 크리퍼는 <옥자>의 슈퍼 돼지를 연상시킨다. 나사 빠진 듯한 미키의 모습은 <괴물>의 강두(송강호)를, 크리퍼와의 대화를 위한 통역기는 <설국열차>의 통역기의 초기 버전처럼 보인다.
그동안 쌓아 올린 봉준호 감독의 이력, 그리고 영화 속 장치들이 이 영화 곳곳에 보이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감독 자신의 모든 걸 갈아 넣어서 만든 게 영화라면, 제목처럼 이 영화는 ‘봉준호 8’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키 17>은 봉준호 감독의 장편 8번째 작품이다.)
그만큼 <미키 17>에는 그동안 감독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불합리한 사회 시스템 비판, 계급에 따른 불평등, SF 설정을 가져와 희망 없는 현실을 빗댄 이야기 등이 들어있다. 이런 소재와 주제 이곳저곳에 섞여 있는데, 이를 찾는 재미는 쏠쏠하다. 하지만 그 활용 면에서는 물음표다.
<기생충> 정도는 아닐지라도 이번 영화는 사회 문제로 깊게 들어가지 않는다. 들어가다 보면 한도 끝도 없이 깊은 구렁텅이에 빠질 것 같은 우려 때문인지, 웃고 넘어간다. 때때로 깊이 들어가도 될 듯한 부분도 살짝 발만 담근다. 물론, 이 부분이 크게 모난 구석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기생충>을 생각하고 온 관객들이라면 아쉬운 지점인 건 맞다.
| 서구 사회에 일침을 가하는 봉준호식 일갈, 흘러넘치는 건 흠!아쉬움을 메우는 건 동양인으로서 서구 사회에 일침을 가하는 비판 의식에 있다. <미키 17>은 우주선 내 개척 사회를 이끄는 케네스와 일파(토니 콜렛) 부부를 통해 멍청한 독재자의 민낯을 보여주고, 정치와 종교(특히 개신교)와의 결탁이 얼마나 잘못된 길로 사람들을 인도하는지를 오롯이 보여준다. 이는 현 미국 사회는 물론, 유럽을 포함한 서구 사회를 비판하는 요소로 활용한다. 물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얼굴 마단인 케네스와 뒤에서 조종하는 일파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어떤 부부가 생각난다.
우주 행성을 개척한다는 목적으로 모인 독재자와 그를 신봉하는 이들의 모습, 그리고 행성 주인인 크리피를 열등한 벌레로 보고 이들을 말살하려는 모습은 개척이라는 목적 아래 영토 및 물적 확산을 위해 식민지를 단행했던 서구 사회의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생김새가 다르다고 해서 존중 대신 하대하고, 약탈하고, 이용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매스껍다. 특히 크리피 꼬리를 잘라 믹서기에 갈고 최고의 소스라 칭하는 일파의 모습은 혀를 내두를 정도. 중요한 건 이들의 만행을 정작 자신들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3자의 시선이자, 동양인의 시각으로 서구 사회를 그린 영화는 객관성을 확보하며 비판 어린 시선에 무게감을 더한다. 이에 때때로 고민과 통쾌함을 번갈아 갖는 재미가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이런 이야기들이 흘러넘친다는 것이다. 앞서 미키를 통해 하위 계층 노동자의 현실과 권력과 종교의 결탈, 독재자의 만행, 서구 사회의 어두운 역사 등 다양한 이야기를 137분에 넣다 보니 과부하가 걸린다. 보기보다 인풋이 많고 그에 따른 생각이 번지다 보니 순간순간 집중력이 떨어진다. 그동안 감독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너무 많았던 탓일까?
| 파워 오브 러브, 사랑만이 살길이다!그럼에도 이 영화가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한 줄을 남길 수 있는 건 ‘사랑’ 덕분이다. 영화에서 ‘사랑’은 그 중요성이 크다. 먼저 감독의 첫 번째 멜로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미키와 나샤(나오미 애키)의 사랑은 그 위력을 발휘한다. 많은 이들에게 소모품처럼 여겨지는 미키지만, 오로지 나샤에게는 중요하고 사랑스러운 한 사람이다. 복제 번호는 다르지만 그 또한 미키로 인정하는 유일한 사람, 시험체로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그 옆을 지키는 사람이다. 어쩌면 미키보다 자신을 더 사랑해 주는 이가 바로 나샤다.
이들의 멜로 라인을 견고하게 쌓는 건 이 힘든 시기에 필요한 건 ‘사랑’이라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극 중 관계를 맺는 이들은 각자 필요에 의해서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서로를 이용하고, 착취한다. 하지만 미키와 나샤는 무조건적인 관계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한다. 독재자 및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없는 그 마음이 이들에게는 있다.
후반부 크리퍼와 전쟁을 치를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 어떻게든 이를 면하기 위해 노력하는 건 미키 17, 18과 나샤 등이다. 마음속에 사랑과 존중이 있는 이들이기에 비로서 크리퍼와 소통을 할 수 있고, 참혹한 전쟁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감독이 극 중 산재한 문제를 ‘사랑’이라는 단어로 손쉽게 해결한다는 생각을 뿌리치기는 힘들다. 하지만 혼란스럽고 혼탁한 현실 사회가 더 심화되고 있는 세상 속에서 ‘사랑’의 의미는 위대하고 더 커 보인다. 사랑 또는 존중이 실종된 시대에 살고 있어서 더 그런 느낌이 크다. 이 잔혹한 사회 실상이 염세적이었던 감독의 마음마저 바꾼 듯하다. 그만큼 사랑은 위대하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덧붙이는 말: 극 중 미키의 삶을 바꾼 매개체로 빨간 버튼이 나온다. 그 버튼을 누른 후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 그는 오롯이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다. 누구나 자신만의 빨간 버튼이 있을 터. 그 버튼을 또 한 번 누를 때가 오기 마련인데, 두렵지만 막상 누르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자아가 보인다. 미키처럼 말이다. 생존 자체가 힘든 세상에서 자신만의 빨간 버튼을 찾고 눌러보면 어떨까! 사랑도 하고!사진 제공: 워너브라더스
평점: 3.5 / 5.0
한줄평: 사랑으로 점철된 봉준호식 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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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치게 정직했던 뮤지컬의 영화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머니 ‘조마리아(나문희)'와 가족의 품을 떠나 일제와의 전투에 나선 대한제국 의병대장 ‘안중근(정성화)'. 몇 차례의 전투에서 패전을 맛본 후 그는 다른 동지들과 한가지 맹세를 한다. 네 번째 손가락을 자르며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3년 이내에 처단하지 못하면 자결하기로 결의한 것.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를 찾은 안중근은 오랜 동지 ‘우덕순(조재윤)', 명사수 ‘조도선(배정남)', 독립군 막내 ‘유동하(이현우)', 독립군을 보살피는 동지 ‘마진주(박진주)'를 만나 이토를 죽일 거사를 획책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안중근은 이토에게 접근한 독립군의 정보원 ‘설희(김고은)'로부터 이토가 하얼빈에서 회담을 가질 예정이라는 첩보를 입수한다. 1909년 10월 26일,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긴 안중근은 이토를 사살하는 데 성공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 법정에 선다.
<영웅>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일본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아 순국한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를 그려낸 작품이다. 본래 2019년에 촬영 후 2020년 3월 개봉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의 영향 때문에 개봉이 연기되었고, 3년 만인 2022년 12월에 마침내 관객과 만날 수 있었다.
근본적으로 원작이 있는 영화는 언제나 같은 시험에 빠진다. 영화의 작법과 다른 예술의 작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 간과하면 욕심이 너무 과해지고, 영화로 재해석된 결과물로 인해 원작의 매력을 잃을 수 있다. 반대로 지나치게 원작을 의식하면 그저 아류작에 불과해진다. 원작의 가치는 느껴질지 몰라도 굳이 영화로 만든 이유를 알 수 없다. JK 필름에서 제작한 윤제균 감독의 <영웅>은 후자에 부합하는 영화다. 가지고 있는 장단점 모두 원작 뮤지컬의 연장선상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영화라는 매체로 극을 옮기는 과정에서 붉어진 문제점도 적지 않다. 결과적으로 <영웅>은 클리셰를 남발하고 수많은 웃음과 눈물 포인트를 삽입하는 JK 필름의 익숙한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시아주의자 안중근을 조명하는 입체성
<영웅>에는 분명한 장점이 있다. 안중근의 의거가 목표한 바와 배경, 그리고 의의를 전달하는 기본적인 목적에 충실하다. 예를 들어 그가 의병 전쟁에 참전한 군인이었으며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 군사 작전의 일환이었음을 강조한다. 특히 이 작전의 의의를 설명하는 데 예상보다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는 게 눈에 띈다. 흔히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독립투사로만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의거는 의외로 더 큰 목적을 지닌 작전이었다. 안중근은 단순히 조선의 독립을 바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협력을 희망하는 아시아주의자였다. 그는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 한중일 3국이 동등한 자격으로 협력하여 동양의 평화를 일구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일환으로 마치 지금의 유럽 연합과 비슷한 형태의 공동체를 이루어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협력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이토 히로부미의 존재감 덕분에 '아시아주의'라는 이상을 둘러싼 두 인물의 사상적 대립은 더욱 부각된다. 이토가 부르는 넘버 '출정식'과 안중근이 노래하는 '동양평화'의 대조가 단적인 예시다. 이토는 하얼빈 시찰이 "극동의 평화와 문명을 여는 최선의 길이 될 것"이라면서 "평생을 바쳐왔던 꿈 아시아는 낙후되었다. 아시아는 위태롭다. 막강한 일본을 만들어 아시아를 통일하는 것. 그것이 나의 꿈, 대동아공영!"이라고 노래한다. (비록 '대동아공영'이라는 표어 자체는 태평양 전쟁 당시부터 사용되었지만) 이는 일본이 아시아를 무력으로 통합하여 서구 열강에 대적해야 한다는 제국주의자 이토의 사고를 잘 보여준다.
반면에 안중근은 "서로서로 인정하며 평화롭게 사는 것. 서로 자리를 지키며 조화롭게 사는 것. 그게 바로 동양 평화 모두가 더불어 사는 지혜"라고 읊조린다. 현실에서 아시아주의를 실천하는 것만이 한중일 모두의 이익을 위한 길이라고 믿었던 셈이다. 즉, 안중근의 시각에서 보면 이토 히로부미는 진정한 아시아주의를 왜곡해 조선 침략의 수단으로 사용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이토는 죽어야만 했다. 조선의 독립은 물론, 진정한 동양의 평화를 위협하는 인물이기에 처단 대상이었다. 이처럼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길을 걷지 않은 덕분에 영화의 전반적인 흐름에는 강력한 당위성과 설득력이 생긴다. 평범한 반일 영화나 평면적인 프로파간다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렇기에 일본인이나 일본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일본의 일부 제국주의자가 싫다는 안중근의 말은 100여 년이 지난 현재에도 충분히 곱씹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뮤지컬과 영화의 차이를 간과한 결정적인 실수
하지만 <영웅>의 장점은 온전히 빛나지 못한다. 뮤지컬의 배경을 확장, 확대하는 데 그친 전반적인 구조와 구성이 <영웅>의 매력을 가리기 때문이다. 거사 직전, 등장인물 모두의 감정선이 고조되는 "그날을 기약하며"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안중근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마진주 등 작전에 참여할 인물들은 차례대로 거리에 등장한 후 각자의 심경을 노래한다. 마치 어벤져스처럼 원을 그리며 노래하는 그들 주변에는 수많은 한인이 등장한다. 그렇게 그들은 다 함께 거리를 행진하면서 거사의 성공과 조국의 독립을 염원한다. 이때 영화의 카메라는 뮤지컬 관객들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노래하는 배우들의 담아낼 뿐이고, 도시의 거리 역시 뮤지컬 무대 배경이 넓어진 것에 불과하다.
분량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다른 시퀀스도 마찬가지다. 오프인 시퀀스인 "단지동맹" 장면이나 또 다른 하이라이트인 "영웅" 시퀀스에서도 배경인 설원과 자작나무 숲은 그저 인상적인 배경에 불과하고, 무대장치의 확장일 따름이다. 클라이맥스인 "장부가" 시퀀스도 뮤지컬을 재현하고 카메라에 옮겨 담는 데에만 주력한 영화의 지향점을 재확인시켜준다. 이 대목에서 카메라는 교수대에 올라선 안중근을 그저 정면에서 담아내며, 사형집행을 지켜 보는 이들은 뮤지컬 객석 관객들처럼 느껴진다. 영화 관객들도 뮤지컬 관객의 연장선상에 위치할 따름이다.
따라서 <영웅>이 원작 뮤지컬 무대를 영상화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영화는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영화'로서의 특이점이 없다는 점이다. 넘버의 연속으로 구성된 뮤지컬은 근본적으로 노래마다 응축된 감정이 터져 나와야 한다. 하지만 영화는 다르다.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도 중요하지만, 그 지점에 다다르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따라서 뮤지컬 영화는 뮤지컬의 한계를 영화적 내러티브 구조나 다른 방식의 장치들을 더해 해결해야 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영웅>의 한계점은 명확하다. 어색한 화면분할이나 조악한 추격전, 하얼빈역 전경이나 설원처럼 과장된 CG의 활용 등으로는 이야기 사이 사이의 공백을 메우지 못한다. 즉, 뮤지컬의 영화화에 실패한 <영웅>은 '뮤지컬' 영화일지언정 뮤지컬 '영화'는 아니다.
장점마저 퇴색시킨 수많은 의문점
결국 <영웅>은 곳곳에서 문제를 노출하며 무너진다. 노래 전후로 시퀀스와 시퀀스, 장면과 장면이 좀처럼 연결되지 않는 까닭이다. 안중근과 설희, 동지들의 넘버는 그들의 기개를 보여줄 뿐, 이야기 전개를 위한 디테일을 담지 못한다. 실제로 하얼빈역과 채가구역으로 나누어 작전을 준비하는 것 외에 거사를 위한 계획이나 이토의 눈앞에서 정보를 캐내는 설희의 활약 등은 자세히 묘사된다고 보기 어렵다. 일례로 설희가 민비의 죽음 때문에 이토를 향한 원한을 키웠다면, 원한 자체는 노래에 담더라도 이토에게 접근하고 그의 신임을 얻는 과정은 더 정교하게 구성할 필요가 있었다. 하다못해 이토가 당시 일본인들도 비판할 정도로 여색을 밝히는 인물이었다는 점만 언급했어도 설희의 스토리가 더 입체적이고 구체적일 수 있었을지 모른다. 대신 영화는 그저 일어날 일이 일어났을 뿐이라는 입장을 취한 채 빈자리를 윤제균 감독 특유의 유머로 채운다.
이에 더해 자기 손으로 자기 장점을 퇴색시키기도 한다. 영화는 안중근이 조선의 독립보다 더 원대한 이상을 좇게 된 이유를 전혀 말해주지 않는다. 그가 함경도 지역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펼치다가 크게 다치는 장면 이후로 영화의 배경은 블라디보스토크로 전환된다. 이 시점부터 안중근은 거리 연설에서 아시아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드러내며 이토를 죽이기 위한 작전에 몰두한다. 하지만 다시 등장한 안중근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인물처럼 느껴진다. 안중근이 어떻게 동양평화론을 생각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이 생략되다 보니 괴리감을 피할 수 없다. 변화의 연속성을 부각할 수 있는 시퀀스를 중간에 하나 추가하는 스토리텔링의 디테일이 부족한 결과인 셈이다.
스토리의 한쪽 기둥을 맡고 있는 설희를 다루는 방식도 아쉽다. <영웅>은 안중근과 동지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와 설희가 각기 한 축을 이루는 영화다. 특히 설희의 경우 단독 넘버를 두 개나 가져갈 정도로 주역인 안중근과 이토와 맞먹을 정도로 비중이 크다. 그런데 그녀가 다른 캐릭터들과 호흡을 맞추지 않는다는 본질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설희의 비중은 조금 조절되더라도 전개에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설희의 비중을 줄이고 안중근의 비중을 좀 더 늘려 주인공의 내면을 더 깊이 묘사하는 게 어떨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빈약한 스토리를 음악과 배우의 열연으로 덮는 것보다는 영화적으로 더 적절한 선택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영웅>은 공간적 한계를 뛰어넘은 무대 뮤지컬 같다는 인상을 좀처럼 깨지 못한다.
부족한 디테일이 낳은 신파
이처럼 허술한 만듦새는 끝내 감정의 과잉과 신파로 이어진다. 그래도 안중근 의사의 죽음을 다루는 대목에서는 신파가 적절히 활용된 듯 보인다. 조국의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항소와 아들의 목숨을 포기하는 어머니의 아픔과 그 결정을 온전히 이해하는 아들의 고통을 애절한 선율 속에 담아내는 데 성공한다. 또 지극히 인간적이고 사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아내와의 갈등과 사별은 모든 독립 운동가의 숭고함을 오히려 감정적으로 부각해 준다.
반면에 안중근을 제외한 다른 인물은 대부분 신파를 위해 희생되고 만다. 당장 진주의 오빠인 '마두식(조우진)'의 운명이나 진주와 동하의 로맨스에서는 관객을 울음바다에 빠뜨리기 위한 목적이 강하게 느껴진다. 앞서 보았듯이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디테일이 부족하다 보니 그 허술함을 신파로 대신한다는 인상이 진하게 남는다. 그러면서 정작 신파적 연출이 일관되지 않은 것도 문제다. 또 다른 조력자인 우덕순과 조도선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웃음을 위해 단편적으로 활용되고 소비될 뿐 진중하게 조명될 기회를 잡지 못한다. 채가구역에서 거사를 준비하던 이들이 안일하게 작전을 철회하다가 일본군에 체포되는 개그성 장면이 대표적이다. 안중근과 달리 법정에 선 우덕순과 조도선의 모습이 어색할 정도다.
<영웅>의 기술적 성취는 본작의 장단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영웅>은 기존 한국 영화에서 시도된 바 없는 촬영 방식이 도입된 영화로 알려졌다. 촬영 현장에서 직접 배우들이 노래를 부르는 라이브 녹음 방식을 채택해 70% 이상의 분량을 현장 녹음 버전으로 담아냈다. 이 대목은 뮤지컬을 단순히 촬영했을 뿐인 영화의 본질을 상징하는 듯 보인다. 가상의 현실감을 살리되, 더 커지고 정제된 형태로 다시 태어난 뮤지컬 영화 <영웅>의 필연적인 장점이자 한계가 고스란히 노래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P(Poor, 형편없음)
뮤지컬 '영화' 대신 '뮤지컬' 영화를 선택한 안일함의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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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토록 정치가 재밌을 줄이야
항상 정치를 다루는 뉴스는 엄청 딱딱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넷플릭스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에는 이렇게 묘사되는 딱딱한 정치판을 재미와 스릴이 가득한 공간으로 바꿔버리는 신기한 재주가 있다. 이 마약 같은 정치 드라마는 2013년에 넷플릭스에서 처음으로 만든 오리지널 드라마다. 마이클 돕스라는 영국의 전 정치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했는데, 첫 오리지널 작품인 만큼 힘을 팍 준 게 느껴진다. <파이트 클럽>과 <조디악>을 연출한 거장 데이비드 핀처가 제작자로 참여한 덕인지는 몰라도 드라마의 결은 유려하면서도 차갑다. 그 속에는 미국 정치의 민낯이 생생히 반영되어 있다. 빌 클린턴 미국 전 대통령도 이 드라마를 보고 실제 미국 정치와 거의 비슷하다고 언급까지 할 정도다.
<하우스 오브 카드>의 주인공은 냉혹한 정치인 프랜시스 언더우드(케빈 스페이시)다. 그는 시즌 1 ~ 시즌 2 내내 워커(마이클 길) 대통령과 대립하며 그를 끌어내고 대통령이 되려 한다. 그 야심을 안 모양인지 다양한 정치적인 장애물들이 프랜시스를 괴롭히지만, 정치, 경제, 언론 등 다양한 수를 동원해서 그것들을 하나하나 물리쳐간다. 심지어는 자신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죽이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그럼에도 괜히 거기에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이유? 최소한 나는 나에게 프랜시스가 발휘하는 냉혹한 술수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대리만족이다. 이런 점에서 프랜시스가 관객에게 말을 거는 장면은 이 감정을 극대화시켜주기 위한 연출적 묘수로 받아들여진다.
한편 프랜시스의 냉혹한 모습은 현실 정치 속 정치인들이 부리는 술수, 발언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예방주사 같은 역할도 한다. 실제 예방접종도 사람의 몸에 약화시킨 바이러스를 주입시켜서 면역력을 키우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처럼 말이다. 아마 <하우스 오브 카드>가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은 유권자들의 각성일 것이다. <웨스트윙>과 반대로 정치판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최악의 모습을 시뮬레이션해줌으로써 유권자들이 남발되는 가짜 뉴스에 휘둘리지 않고 좀 더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정치판을 바라볼 수 있도록, 그리고 유권자의 뜻을 제대로 대리해주는 사람에게 투표할 수 있도록. <하우스 오브 카드>가 단지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라고 생각되는 이유다.
프랜시스는 시즌 3부터 이런 반면교사의 역할을 본격적으로 맡게 될 것 같다. 현재 시즌 3를 정주행하고 있는데, 거기서 대통령이 된 프랜시스가 여러 실책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즌 1 ~ 시즌 2 내내 발휘된 지혜가 무색하게 말이다. 내가 이러한 변화를 <하우스 오브 카드>의 약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이러한 역할 변화로 비롯된다. 그리고 이는 드라마를 보는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할 것이다. 계속 이야기했듯 시즌 3 이전에는 프랜시스의 모습에 대리만족을 느끼면서 봤다면, 그 이후에는 절대 악인이 된 프랜시스가 자신이 부당하게 얻은 왕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몰락하는 모습을 키득거리며 지켜보면 되니까. 과연 시즌 3가 끝나면 어떤 평가를 남길지 기대된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지네마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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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저링》 시리즈와 《기묘한 이야기》의 제작진이 전하는 이야기. 고등학교 졸업반 소녀(시드니 박)와 친구들에게 가면을 쓴 살인마가 접근한다. 이들의 가장 어두운 비밀을 알고 있는 살인마. 그 비밀을 하나씩 폭로하며 목숨을 위협해오기 시작한다. 스테퍼니 퍼킨스의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원작. 패트릭 브라이스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