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09-18 23:30:17
[SICFF 데일리] 기울어진 세상을 헤엄쳐
영화 <나의 수호신>
SYNOPSIS.
위험에 빠진 아이, 이상하고 귀여운 수호 동물과 마주치다
PROGRAM NOTE.
절친 타이스와 함께 수영 대회를 준비 중인 열한 살 소녀 아마. 아마는 스스로 네덜란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세네갈 출신인 아마의 부모님은 망명 신청을 거절당해 더이상 합법적으로 네덜란드에 거주할 수가 없다. 어느 날 남동생과 엄마가 불시에 잡혀가고, 도망친 아마는 아빠를 찾아 헤매던 중 거대한 호저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나의 수호신>은 네덜란드에 있는 수많은 불법 이민자들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현실에서 착안한 판타지 영화다. <나의 수호신>은 자신의 집이라 생각했던 곳에서 쫓겨나는 상황에 직면한 아이의 이야기를 통해 ‘집의 의미’를 묻는다. 이민자 이슈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큰 논란 중 하나이지만, <나의 수호신>은 인권이라는 큰 틀 안에서 우정과 연민의 힘으로 해피엔딩을 맞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기를 소망하는 작품이다. (최은영)

우리가 사는 도시를 집어들고 가방 털 듯 탈탈 털면, 거기서 후두둑 떨어지는 동물들은 개, 고양이, 햄스터… 같은 것만이 아닐 거라는 이야기를 어디에서 읽었더라. 생각지 못한 동물들이 후두둑 떨어질 거라는, 정글에서나 볼 거라고 생각했던 동물들이 실은 우리와 같은 도시에 살고 있다는 그 말을.
그렇다면 사람은 어떨까. 나와 비슷한, 아주 닮지는 않았어도 대충 엇비슷한, 그리고 나와 다르지만 대충 예상했던 사람의 범위, 그 바깥의 누군가를 분명 마주하게 되지 않을까.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도시 한복판에서 마주칠 거라 생각하지 않듯이.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익숙한지 아닌지 고작 그 문제다. 누군가의 상상력 하나로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진 것처럼.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그려 본다면, 우리 모두 똑같이 그릴 수 있을 것처럼.
우리의 주인공 아마는 그렇게 도시를 탈탈 뒤집으면 조금 당혹스러울 법적 지위를 가진 채로,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살고 있다. 성격도 밝고, 공부도 잘하고, 네덜란드 최고의 수영 선수를 보며 꿈을 무럭무럭 키우고 있는 될성부른 수영 유망주 어린이이기도 한데, 대회 하나를 나가려고 해도 ‘써도 될 것’과 ‘써서는 안될 것’을 신중하게 골라내야 하는 처지에 있다.
아마가 사는 집은 그 자체로 하나의 마을 같다. 아이들을 씻기고 자신도 씻기를 즐겨 하는 이웃이 샤워기를 틀면 계단참으로 물이 주르륵 흐르는, 그만큼 연결되어 있는. 그러나 아마의 가족은 이런 상황에 불평을 일삼기보다 자연스러운 생활의 풍경으로 받아들이면서 살고 있다. 아빠와 장난칠 때나 썼던 소금 통 하나를 사러, 그 심부름 하나로 아마의 생활이 영영 달라질 때까지는.
집에 있던 아마의 어머니와 동생은 “불법 이민자”여서 잡혀 가고, 아마는 놀이터에 숨어서 일을 나가신 아빠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아마의 세상이 전체적으로 기울어 있음을 관객은 이내 깨닫게 된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앵글이 항상 기울어 있다. 학교도, 경찰서도, 집 바깥도, 전부 다 기울어 있다. 아마가 아빠를 찾아 들어간 “드 로테르담” 건물, 아빠의 일터 또한.
이 기울기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것이다. “불법 이민자”에 대한 편견은 말할 것도 없고, 아마는 스스로가 네덜란드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자랐기 때문에, 자신이 불법 이민자이고 그 편견 속에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사무직과 청소 일에 대한 편견도 가지고 있다. 아버지가 일한 업체의 이름은 Sunshine services이지만, 역설적으로 선샤인이라고는 전혀 빛나지 않는 밤에만 일하고, 밤으로 취급받는다. 세계가 기울어 있는 것이 사실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서글픈 현실에 갑자기 거대한 호저가 나타난다. 영화 자막에서는 고슴도치로 번역되었지만, 호저는 고슴도치와 다르다. 꿀벌과 말벌 정도의 차이랄까. 고슴도치가 가시를 있는 힘껏 세워도 멀리서 (그러니까 그 가시가 나를 공격하기 않을 거리에서) 보면 귀엽겠지만, 호저가 가시를 세우는 모습을 멀리서 보면… 그로테스크하다.
나는 호저라는 생물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호저를 처음 봤는데, 심지어 인도의 동물원에서 야행성 동물들을 모아 놓겠다고 조명을 있는 대로 침침하게 해 둔 어둠 속에서 그 가시가 파르르 서는 모습으로 처음 보았다. 뭔데 저거. 뭐야. 왜 무서워. 무서움을 익히 아는 다른 동물보다, 전혀 모르는 생물의 가시가 더 무서웠다. 알고 보니 호저는 정말 만만치 않은 생물이었다. 호저의 가시에 공격을 받으면 맹수도 배겨낼 재간이 없다.
그러나 이 영화, <나의 수호신> 원제인 ‘토템’답게, 이 영화 속 거대한 호저는 귀엽기만 하다. 도시 속의 사람은 내지 못한 위로의 울음소리를 호저가 낸다. 제목이 <나의 수호신>인데 자막에는 ‘토템’으로 나와, 수많은 어린이 관객들이 엄마에게 “토템이 뭐야?”를 물어야 했음은 아쉬운 포인트지만… (참고로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토템은 “부족 또는 씨족과 특별한 혈연관계가 있다고 믿어 신성하게 여기는 특정한 동식물 또는 자연물. 각 부족 및 씨족 사회 집단의 상징물이 되기도 한다.”)
커피 머신도 사랑이 필요하다며 쓰다듬는 사람이 있는 도시에서, 아마는 그저 호저와 함께 걷는다. ‘상상 속의’ 존재가 아니라면 같이 걸을 상대도 없는, 대도시 속 외로운 아이의 삶. 집이었던 곳은 경찰과 개의 손에 마치 범죄자의 소굴처럼 취급되며 서슴 없는 수색의 대상이 되지만, 호저는 깡통 차기 놀이 상대가 되어 준다. 마치 전통 속 여우 사냥의 한 장면처럼, 아마가, 사람이, 개에게 쫓기는 장면이 현실에서는 연출되지만 호저는 파르르 가시를 세워 아마를 지켜준다.
극중에서 호저를 볼 수 있는 인물은, 아마와 마음의 결을 같이 하는 이들뿐이다. 애초에 아마의 옆에 서 있었던 이들을 제외하면, ‘그리오grio’ 그러니까 가수이자 시인인, 노래로 이야기를 전해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게 하는 일을 사명으로 품은 이들밖에 없다. 이는 영화를 포함한 예술의 기능 중 주요한 한 지점을 짚는다. 기울어진 세상에서도 노래는 계속되어야 함을.
‘온 세계가 당신의 조국’이라는 네온사인이 무의미하게 빛나는 거대한 도시에서, 정작 도시 안에서 평생을 자란 사람을 밀어내는 도시에서, 아마는 호저의 등에 올라 기울어진 세상을 걷는다. 이 차가운 현실에, 이야기 하나를 놓는다. 그 순간 세상은 변한다.

기울어진 세상에서도 ‘상자 바깥에서, 틀을 깨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그들이 그리오grio의 후예, 그러니까 이야기가 잊히지 않도록 하는 이들인지 모르겠다. 아마가 외로운 여정을 걷는 내내 곳곳에서 아마를 먹이는 손길이 있었듯이, 이 외로운 도시를 가방 뒤집듯 탈탈 털면, 생각지도 못한 동물들이나 사람들과 함께, 환대의 손길 또한 함께 후두둑 떨어질 것이다.
아마는 앞으로도 기울어진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아마의 정체성은 ‘네덜란드인’에서 ‘경계인’으로 달라졌을 것이다. 사실은 우리 모두 경계인임을 우리는 언제 깨달을 수 있을까. 여기 계속 사는 거냐는 질문, 아마와 타이스 두 아이의 물음에 부모님의 대답은 동일했다. “그래, 당분간은.” 이사를 가든 추방을 가든, 결말이 어떻든 우리 여기서 당분간은 살아갈 존재들임은 동일하다. 도시를 뒤집어 탈탈 털면 후두둑 떨어질 존재들이라는 사실만큼은 동일하다.
그게 다르게 취급되는, 기울어진 세상을 우리 살아가지만, 이 기울어진 세상에서 노래와 환대의 손길은 계속되니, 새처럼 날아드는 그 손길과 멜로디를 따라 계속 헤엄쳐갈 일이다. 씩씩하게!
9월 15일 20:00-21:37 롯데시네마 은평 5관
9월 17일 16:00-17:37 롯데시네마 은평 6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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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아이가 마주한 이 사회의 파열음
두 아이가 마주한 이 사회의 파열음
영화 <수연의 선율> 리뷰감독] 최종룡
출연] 김보민, 최이랑, 김현정, 진대연
시놉시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남겨진 열세 살 ‘수연’은 보육 시설을 가지 않기 위해 스스로 보호자를 찾아 나선다. 우연히 한 부부의 유튜브에서 ‘선율’이라는 일곱 살 아이를 입양해 행복하게 생활하는 완벽한 가족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의 추가 입양 계획을 알게 된 ‘수연’은 이들의 새로운 가족이 되기 위해 ‘선율’에게 일부러 접근한다. 그런데 ‘선율’의 행동이 어딘지 좀 이상하다.
#스포일러 주의#최악과 차악 사이에서
영화 수연의 선율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법적인 이유로 쉼터에 갈 것인지 보호자를 찾아 그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갈 것인지 그 사이에서 생존전략을짜야 한다. 그러나 그 어떤 선택도 수연이의 안전이나 회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부재한 상황에서의 아이의 선택지는 구조적으로 왜곡되어 있고, 실제로는 선택이 아닌 회피에 가까운 반응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당연히 보호 받아야할 존재라고 여기는 어린이는 현실 속에서 너무나도 쉽게 열악한 조건으로 내몰린다. 수연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현실 속에서 선택 불가능한 상황 속에 놓여져 있는지 보여주는 거울이다. 그리고 수연이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는 정말 아이들을 지켜줄 준비가 되었는가?를 돌아보게 해준다.
아이들을 위한 제도의 주어가 아이들일까?수연의 선율은 영화 속 2명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매년 뉴스와 거리에서 이들을 마주한다. 하지만 이들을 향한 법과 제도는 여전히 느슨하다. 쉼터와 보호소는 부족하고, 보호체계는 파편화되어 있다. 특히 보호자의 부재나 학대로부터 벗어난 아이들이 국가로부터 받을 수 있는 지원은 극히 제한적이다. 촘촘하게 설계되어야 할 아동 보호망은 현실에서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있다. 영화가 끝난 뒤 남는 먹먹함은 수연과 선율의 서사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놓인 상황을 현실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연의 선율은 우리에게 묻는다. 보호 체계는 누구를 위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법과 제도는 있지만, 그 안에 정말 '아이'가 있는가?
가족이라는 보호막이 없는 상황에서 수연은 선율이라는 존재와 조우한다. 하지만 그 만남은 위로와 연대의 선율이라기보다는 현실 속에서 파열음처럼 삐걱거리는 관계의 긴장을 담고 있다. 이 두 인물의 선율은 조화롭지 않다. 그리고 바로 그 불협화음을 통해 이 영화는 현실의 어두움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어 더욱 쓸쓸하고 먹먹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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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지적 독자 시점 | 엉뚱한 방향으로 열심히 달린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웹소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의 유일한 독자, '김독자'(안효섭). 그가 계약직으로 일하던 회사를 퇴사하는 날, 10년 동안 연재된 소설도 마침내 을 맺는다. 오랜 기간 애정을 쏟았던 소설의 결말을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었던 김독자는 작가에게 날카로운 피드백을 남기고, 예상치 못한 답장을 받는다. 바로 직접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서 결말을 바꿔보라는 것.
김독자가 답장을 확인한 순간, 그의 눈앞에는 세계가 멸망했다는 상태창과 소설 속 도깨비가 등장하고 소설에서만 봤던 미션들이 사람들에게 주어지기 시작한다. 그 순간 김독자는 깨닫는다. 자신만이 이 시나리오의 전개와 결말을 알고 있으며, 더 나아가 소설 속 주인공인 회귀자 '유중혁'(이민호)을 찾아야만 자기 목숨과 이 세계를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패로 귀결된 올인
<전지적 독자 시점>(이하 <전독시>)의 영화화 소식은 기대보다는 걱정이 큰 뉴스였다. 이유는 여럿이지만, 장르의 속성이 특히 문제였다. 영화와 웹소설, 두 장르는 본질적으로 접점을 찾기 어렵다. 극장에서 개봉하는 상업 영화는 대중을 공략해야 하는 상품이다. 심지어 손익분기점이 관객 600만 명인 영화라면 특정 세대나 성별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갖춰야만 한다.
그에 반해 웹소설은 본질적으로 대중적이지 않다. 인기작, 흥행작이라 해도 웹소설이라는 장르는 기본적으로 웹툰보다도 더 특수한 틀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웹소설은 주인공의 사회적 성공을 통한 대리만족을 추구하고, 즉각적인 성장과 복수를 통한 '사이다' 전개를 보여주는 데 주력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상태창'을 비롯한 특유의 클리셰가 적극 활용된 게임 판타지의 문법이 더해지면 특수성은 배가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전독시>는 필연적으로 한 가지 과제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바로 웹소설의 특수성과 영화의 보편적인 감성을 화학적으로 결합야 한다는 것. 이에 <전독시>는 <신과 함께> 시리즈를 전략적으로 벤치마킹한 듯하다. 몇몇 세계관 설정이나 캐릭터들의 기본적인 특성만 남겨둔 채, 메시지와 이야기는 익숙한 형태로 바꿨다. 이는 설령 원작 팬들에게 비판받더라도, 대중성을 잡겠다는 선택과 집중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전독시>의 해답은 그저 미봉책에 그치고 말았다. 정작 일반 관객마저 설득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서사로 탈바꿈한 김독자의 이야기는 매끄럽고, 그 안에 담긴 메시지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문제는 굳이 김독자가 아니어도 쉽게 보고 들을 수 있는 이야기로 117분을 채웠다는 것. 그 결과 <전독시>는 볼거리만 빼면 다른 사회 비판 작품과 다를 게 없는, 관객으로서는 선택할 이유가 없는 영화가 되어버렸다.
독자(讀者)에게 독자(獨自)의 길을 묻다
<전독시>의 핵심 서사는 김독자와 유중혁의 갈등이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하 <멸세법>)의 유일한 독자인 김독자는 알고 있다. '성좌'들의 놀이터가 되어 버린 이 세계의 운명이 유중혁의 목숨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멸세법'의 주인공인 유중혁은 주어진 미션에 실패해도 회귀해서 다시 미션을 수행할 수 있지만, 그가 실패했을 때 존재하던 세계는 소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김독자는 유중혁을 도우려 한다. 소설 상으로는 충무로역에서 화룡과 전투를 벌이다가 죽을 예정인 유중혁의 운명을 바꿔야 한다. 그래야만 본인도 생존할 수 있고, 지하철에서부터 동고동락한 동료들도 살릴 수 있다. 김독자는 자기 도움을 받아서 화룡을 물리치라고 제안하며 유중혁에게 접근한다. 자신이 예지력 비슷한 능력을 지녀서 주요 시나리오와 미션, 장소 및 아이템과 같은 온갖 정보를 알고 있다고도 어필한다.
하지만 유중혁은 김독자의 제안을 거절한다. 필요한 정보를 주면 알아서 화룡과 싸우겠다고. 더 흥미로운 것은 그의 역제안이다. 그는 김독자가 금호역에서 충무로역까지 살아서 오면 조건부로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며 여지를 남긴다. 실제로 김독자가 충무로역에 기어코 도달하자 그는 이렇게 제안한다. 무작위로 생성되는 초록색 타일 위에 서야 괴물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그린 존'에서 살아남으라고.
단순히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설령 동료들이 목숨을 잃어도 그들을 돕지 않고 홀로 살아남으라고도 요구한다. 즉, 유중혁은 혼자서 움직이는 걸 선호하는 자기 방식을 따를 수 있는지 증명하라면서 김독자를 시험에 빠트린다. 자기 목숨과 이익부터 먼저 챙길 것인지, 아니면 남을 돕다가 같이 죽을 것인지. '멸세법'의 유일한 독자(讀者)였던 김독자에게 독자(獨自)가 될지 말지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셈이다.
독자(獨自)가 될 수 없는 이유
이 선택의 갈림길에서 김독자는 흔들린다. '멸세법'의 원래 전개대로라면 유중혁의 말을 따를 때 생존 확률이 높아지니까. 또 세계가 멸망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으려고 타인을 속이고 짓밟는 광경을 이미 목격했기에 현실을 비관하기도 한다. 그러나 초록색 타일 위에 가만히 서 있는 자신과 달리 다른 시민들까지도 구하기 위해 괴물들과 혈투를 벌이는 동료들을 보면서 김독자는 과거를 떠올리고, 결심한다. 독자(獨自)는 되지 않기로.
왜냐하면 그는 이미 유중혁이 제시한 길대로 살아봤고, 그 끝에서 비극을 맛봤기 때문이다. 학교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또 다른 피해자 친구와 싸워야만 했다. 그 친구가 자살하자 죄책감과 절망이 그를 덮쳤고, 그로부터 도망치고 위안을 얻기 위해 그는 '멸세법' 속 세계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소설의 결말은 김독자의 트라우마를 건드렸고, 그의 절망을 심화시켜 버렸을 뿐이었다.
모든 미션을 완료한 유중혁 외에 다른 인간은 모두 죽은 '멸세법'의 결말은 김독자의 인생을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으니까. 김독자는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에서 줄곧 피해자였다. 학교 폭력에 시달리고, 성인이 되어서는 비명문대 출신이라고 무시당하고, 계약직의 설움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왔다. 그렇기에 단 한 명의 강자, 곧 독자의 삶과 이야기 외에는 무가치하다는 소설과 유중혁의 길을 김독자는 결코 긍정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혼자라도 확실히 살아남을 길을 포기한다. 그 대신 알고 있는 전개도 아니고, 죽을지 살지도 모르지만, 동료들과 함께하는 길을 선택한다. 유중혁과 같은 독자(獨自)의 길도, 주어진 전개를 따르기만 하는 독자(讀者)의 길도 아닌 새로운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즉, <전독시>는 경쟁과 약육강식의 원칙, 본능적인 이기심의 길 외에 이타적으로 공존하는 삶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자 한다.
독자도, 독자도 아닌 주인공의 삶
김독자의 선택에 담긴 함의는 다른 캐릭터의 사연을 만나 확장되고 강화된다. 예를 들어 수류탄 투척 훈련 중 수류탄을 놓친 훈련병을 구하지 못했다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부사관 '이현성'(신승호)은 혼자 살아남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아는 캐릭터다. 금호역 바깥으로 정찰을 나갔다가 '천인호'(정성일)의 속임수에 당해서 친구를 잃은 '정희원'(나나) 또한 혼자 생존한 삶의 무의미함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이지혜'(지수) 또한 김독자와 유사한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교실에서 세계의 멸망 소식을 들은 뒤 옆자리 짝꿍을 교살하고, 같은 반 친구 중 유일하게 살아남는 데 성공한 지혜. 그녀는 유중혁처럼 독자적으로 움직이며 자신의 안위만을 챙기지만, 몸을 던져서 일행을 살리려는 김독자의 끈질긴 설득에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렇게 이들은 도깨비들이 만든 규칙에 도전해서 승리를 거두며 함께 살아남는 삶의 의미를 새삼 깨닫는다.
이처럼 <전독시>는 모두가 주인공으로서 한 장을 차지할 수 있는 삶을 이야기한다. 진화한 화룡을 제압하는 클라이맥스의 구성만 보더라도 의도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유중혁 혼자서는 화룡에게 아무런 상처도 내지 못한다. 하지만 김독자, 이현성, 정희원, 이지혜, '유상아'(채수빈), '이길영'(권은성)가 한 팀으로 뭉쳐서 잠재된 능력을 모두 발휘하면 화룡도 제압할 수 있다. 액션의 구성으로서 메시지를 온전히 시각화한 셈이다.
메시지가 낳은 기시감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지점에서 <전독시>는 매력을 잃는다. <전독시>의 메시지는 이 IP만의 특색이 아니기 때문이다. 승자 독식, 이기적 경쟁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공동체의 중요성과 타인과 함께 사는 이타적 삶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서사는 굳이 <전독시>가 아니더라도 여러 사회고발물에서 접할 수 있다. <오징어 게임>과 비교하더라도 휴머니즘의 상징이 된 성기훈과 김독자의 캐릭터성은 큰 차이가 없다.
이 기시감은 생존 게임과 같은 <전독시>의 구조로 인해 극대화된다. 지하철 칸에서 살아남으려면 생명 하나 이상을 죽여야 하는 미션은 <오징어 게임>에서 등장한 구슬치기나 숨바꼭질과 다를 게 없다. 금호역에서 더 많은 코인을 차지하기 위해 피해자를 만들어 내는 군상극은 오징어 게임 참가자들이 숙소에서 서로를 죽고 죽이며 패거리를 이루는 정치극과 그 메커니즘이 동일하다.
충무로역에 만들어진 그린존은 그 정점이다. 사람들은 매번 숫자와 위치가 달라지는 초록 타일 위에 서기 위해서 서로를 끌어내리며 악전고투를 벌이는데, 이 장면은 <오징어 게임 2>가 선보인 짝짓기 게임과 절대 다르지 않다. 사회적 메시지도 그 자체로는 특별하지 않은 가운데, 메시지를 전달하는 형식조차 익숙한 결과 <전독시>는 예상치 못하게 <오징어 게임> 열화판 혹은 게임 판타지 버전 <오징어 게임>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불친절해서 이질적인
만약 <전독시>가 차별화된 볼거리를 보여줬다면 이 기시감을 효과적으로 가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독시>는 그러지 못했다. CG로 구현된 스펙터클이 화려하지만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환상 속의 배경과 괴물 캐릭터는 눈요깃거리로서의 역할은 해낸다. 상태창이 뜨는 게임 판타지 세계관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마치 RPG 게임을 스크린 위에 구현한 듯한 느낌도 있다.
문제는 CG로 만들어진 화면만 볼 때와는 별개로 정작 배우들이 카메라에 잡힐 때는 배경과 인물이 따로 논다는 것. 자연히 CG를 즐기기에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CG로 구현한 판타지 세계관을 받아들일 심적인 여유를 주지 않아서 더 어색한 감도 있다. <전독시>는 받아들여야 하는 정보량이 많은 영화다. 갑자기 멸망한 세계, 도깨비와 괴물의 존재, 느닷없는 시나리오와 코인, 회귀자라는 또 다른 주인공과 판타지운 아이템 등등.
그런데 관객이 모든 설정을 이해할 틈도 주지 않고 영화가 빠르게 진행되니 몰입도는 현저히 낮을 수밖에 없다. 심지어 청각적 요소도 상황을 악화한다. <전독시>는 상황이나 설정 설명을 온전히 대사에 맡겼다. 이런 상황에서 폭발음 등에 대사가 묻히는 경우가 잦다 보니 관객은 영화가 불친절하다고 느끼기 쉽다. 이 또한 CG의 화려함보다는 이질감과 같은 단점이 먼 눈에 띄는 이유 중 하나다.
그로 인해 마땅히 주목을 받아야 할 장점조차도 빛을 잃는다. 충무로역 액션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초반에는 일직선의 역사 구조를 활용해서 한 방향으로 내달리는 움직임을 반복하며 역동감을 선사한다. 화룡이 진화하는 순간 지하철 역사의 벽면이 붕괴하서 우주 공간이 펼쳐질 때부터는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입체적인 동선을 보여줌으로써 쾌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영리한 발상과 구성은 이질감과 불친절함에 의해 가려져 버린다.
<전독시>가 보여준 현재와 미래
제작자인 리얼라이즈픽쳐스 원동연 대표는 <전독시>가 개봉 직후 600만 명이라는 손익분기점을 달성하기 어려운 흥행 추세를 보이자,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초반 타점이 별로 안 좋다. 그리고 원작 팬들이 계속 공격을 하고 있어서 힘들지만 겪어야 할 일이다." 안타깝게도 이 발언은 <전독시>가 흥행하지 못한 현재를 방증할 뿐만 아니라 한국 영화계의 어두운 미래를 예고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특수성이 무기인 웹소설을 보편적인 감성으로 재해석한 이상 이미 <전독시> 영화는 원작과 선을 그은 작품이다. 즉, 흥행 부진의 책임은 일반 관객에게 굳이 다른 작품 대신 <전독시>를 선택할 이유, 오랜만에 영화관을 찾아야 할 이유를 제공하지 못한 영화 자체에 있다는 의미다. 이런 상황에서 흥행 부진의 책임을 원작 팬들에게 돌리는 것은 실패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지 못했거나 일부러 외면한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설령 <전독시>가 영화 소비 쿠폰과 문화의 날 효과에 힘입어 극적으로 흥행에 성공한다 해도 마냥 기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원인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다면 유사한 문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으니까. 더 나아가 <전독시>와 같은 실수를 다른 작품도 하지 말라는 법이 없고, 그럴수록 일반 관객이 영화관을 찾을 이유는 사라지기 마련이므로.
Poor 형편없음
방향성도 만듦새도 설득력 없는, 공허하게 화려한 블록버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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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산과 낙하산과 시간
나는 홍콩을 딱 한 번 가보았다.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기내식을 4번씩 먹으며 두 번의 경유를 거쳐 아프리카 남단을 일주일 만에 왕복하는, 짧고 굵은 여정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경유 시간이 떠서 홍콩 시내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동안 홍콩 공항을 종종 경유했지만, 공항 바깥으로 나가 본 것은 처음이었다.
별유천지가 따로 없었다. 왜 '별들이 소곤대는 홍콩의 밤거리'라는 가사가 나왔는지 피부로 이해했다. 시간이 먼지처럼 소복소복 쌓인 골목은 어디를 툭 쳐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스며 나올 것만 같았다. 금방이라도 양조위나 장국영이 고개를 내밀 것만 같은, 바라보면서도 더 바라보고 싶은 골목들이었다. 꼭 다시 와야지 생각했다. 밀크티 마시며 이 골목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해도 참 좋을 것 같아서.
그리고 몇 달 후. 홍콩은 당분간 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페이스북 담벼락 기본 문구를 바라보는 기분으로 깜빡깜빡, 빈 곳을 응시했다. 바라보고 싶었던 골목 대신. 삶의 아귀가 맞지 않는 기분이 들 때마다 열어보던 홍콩 영화들 대신. 우산과 까만 마스크, 거리에 나서면 누구나 닮아 보이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영화제마다 다큐멘터리에 홍콩 이야기가 있는지 둘러보며, 조각조각 찾아 헤맸다.
같은 질문을 품어 본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가 있다. 2022년 10월 13일 국내 개봉한 다큐멘터리 <시대혁명>이다.
주제의 무거움에 한 번, 152분이라는 러닝타임에 또 한 번 멈칫하게 될 이들을 위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당신을 무거운 감정 안에 혼자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끔찍한 폭력을 목도하게 될까 봐 멈칫하겠지만, 내가 이 영화에서 본 것은 오히려 희망이었다. 홍콩에 대해서도, 시대에 대해서도.
시대혁명 속으로
거친 상황을 담은, 강렬한 포스터의 영화지만 당신에게만큼은 참 친절한 영화일 것이다. 152분의 러닝타임은 여러 챕터로 나뉘어 있어, 그다지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매우 적절한 소제목과 함께 각 장이 똑똑하게 분절되어 있다. 홍콩 상황을 잘 몰라도 충분히 씹어 삼킬 수 있도록, 한입 크기로 잘라 준다. 친절한 가공을 잔뜩 거쳤음에도 너무나 생생해서, 잠시 2019년 홍콩으로 시공간 이동을 하는 기분마저 들게 만든다. 연대하는 마음 외에는 큰 기대 없이 본 영화였는데, 너무나 훌륭해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2019년 홍콩에서 '범죄인 인도법'을 계기로 일어난 시위를 담았다. 홍콩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면 중국으로 송환되어 재판받게 된다는 조항은, 당시 들려오던 수많은 의문사와 실종 사건들과 맞물려 공포를 자아냈다. 홍콩 사람들은 최루액에 우산으로 맞섰던 2014년 '우산 혁명'을 기억하며 다시 거리로 나선다. 영화는 2019년의 거리와 홍콩 사람들을 촘촘하게 담아낸다.
지도부가 없음에도 시위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역할을 착착 찾아낸다. 마치 온라인 게임에서 각자의 직업을 선택하듯이. 시위가 진행하면서 변해가는 상황에 이들이 얼마나 유동적으로 움직이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얼굴과 이름을 가리고 나오지만, 그들의 생각과 역할과 의미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던 이들을 한 명씩 만나게 된다.
버스도 지하철도 끊긴 도시에서 시위 참석자들을 집에 들여보내는 '승용차 부대', 시위 최전선에 서는 이들을 돌보는 '엄마'와 '아빠', 전경의 위치와 최루탄 정보 등을 파악해 전달하는 '감시 부대'... 시위 안에서의 역할 차이는 물론 시위 바깥에서도 체계적으로 각자의 싸움을 이어가는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만약 모든 것이 죽는다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 중, 누구의 행동과 말에 당신의 시선이 가장 깊게 머물렀을지 궁금하다. 돌아보면 나는 세 사람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70대 노인 '찬 아저씨Uncle chen'. 그는 수십년 째 농부로 살아왔는데, 아이들이 죽어가고 끌려가는 걸 더 볼 수 없어 길을 나섰다. 경찰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너희가 들어가야 나도 들어간다"며 아이들을 들여보내고, 다른 노인들과 손을 맞잡고 경찰의 폭력을 막는다. 종내에는 경찰이 그의 노구에까지 손을 올리면서 더 이상 시위에서 '전력'이 되지 못하지만, 당연하고 상식적인 말을 하는 노인의 존재에는 큰 울림이 있다. 더불어 홍콩을 향한 중국의 야욕이 얼마나 오래전부터 존재했는지도 살짝 보여준다. 중국은 주민들이 농사짓던 땅을 아무 합법적 절차 없이 집어삼키고 쫓아냈던 것이다.
14살 소년 모닝Morning. 그는 알레르기가 있어 최루 가스를 조금만 맡아도 기침이 나오는 몸이고 아직 어리지만, 구조대로 시위 현장을 뛰어다닌다. 최루 가스 때문에 제대로 말도 잇지 못하는 사람 앞에서 결연한 얼굴로 제 방독면을 벗어 씌워주고 함께 안전한 곳으로 뛰어가는 모습은, 아직 어리지만 곧고 힘차다. 한국 웹사이트에도 영상이 퍼졌던, 경찰이 지하철 속의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때리던 그 현장에도 그는 달려갔다. "총을 쏘든 때리든 다 맞겠으니 사람만 구하게 해달라"고 엉엉 우는 그의 모습을 보기 괴롭고 속상했다. 구조대를 막는 것은 국제법상 불법이지만, 홍콩 경찰은 국제법과 관례를 어긴 지 오래다. 그러나 다시 그는 여전히 올곧은 눈빛이다. 그는 아마도 조슈아 웡처럼 자랄 것이다. 단단한 신념을 뿜어내는 눈으로
마지막으로는 영화에서 많은 인터뷰를 했던, 사회복지사 중년 여성 재키. 상황을 차분하게 조망하고 움직인다. 얼굴이 벌게진 백인 남성이 삿대질하며 "너희가 홍콩을 다 망치고 있다. 부동산도 경제도 망치고 있다!"고 천박한 욕 섞어가며 소리치는 앞에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다. 법 없이도 살 사람 같은 표정이지만, 시위 현장에 늘 서 있다. 그 차분한 시선으로 본질을 진작에 꿰뚫었기 때문이다. 정치가 죽고, 자유가 죽은 땅에서는 사회복지사도 없다고. 그 땅에는 인권이란 게 없을 테니까. 자유가 없는 땅에서는 돌봄도 죽는다. 그 지적은 '좋은 것이 좋은 것' 식으로 바라보는 마음을 찌른다.
써놓고 보니 나는 '맞서 싸우는 힘'보다 '살리는 힘'에 마음이 기우는 사람인 것 같다. 그러나 결국 살리는 힘은 싸우는 힘과 연합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죽은 땅에서는 아무것도 살릴 수 없을 테니까. 죽이는 힘에 맞서야만 살릴 수 있을 테니까. 바로 그 마음으로, 흙을 바라보며 살아온 노인이, 단단한 눈빛의 소년이, 법 없이도 살 얼굴의 사회복지사가, 시위 현장에 서 있다.
우리의 무기, 기록과 희망
승산이 높지 않았다. 2019년의 시위는 결국 끝났다. 다만 흔한 역사 속 시위들처럼 '지도층의 내분' 같은 건 없었다. '지도층'조차 없이, 물방울 같은 각자가 모여 강처럼 흘렀을 뿐이다. 화염병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몰라서 가방에 넣어 들고 다니던 (당연히 기름이 다 흘러 못 쓰게 되었다) 아이가 화염병을 던지게 하고, 구글 맵을 볼 줄도 모르던 아이가 지도로 경찰 정보를 보내는 첩보 작전을 펼치게 만든 홍콩 경찰은 마침내, 시민들을 전쟁 상대처럼 여기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캐리 람을 죽여도 또 다른 캐리 람이 나타날 테니 결국 보통 선거권을 쟁취해야 하는 싸움임을 똑똑하게 인지하고 있는데.
경찰은 횡단보도 한복판에서, 아무 무장도 하지 않은 사람의 심장을 겨누어 총을 쏘았다. 시위를 무력 진압하다 못해, 일반적인 국제관례를 어기고 퇴로까지 차단하고 정말 몰살시킬 각오로 공격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을 만큼 잔인하게 짓밟았다. 영화가 잔인한 장면을 자주 보여주지 않았음에도 홍콩 경찰은 정말 잔인했다. (여담이지만 SNS에 홍콩 경찰 지지 의사를 올렸던 수많은 중국인 아이돌들이 떠올라 또 화가 났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돈 벌면서 최소한의 상도덕도 없는 행위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걔네가 지지한 게 이거라고요?)
시위의 마지막 순간은 홍콩 이공대를 배경으로 한다. 퇴로를 차단하고 시위대를 몰아세우는 홍콩 경찰 앞에서, 시위대에게 남은 길은 죽음 혹은 10년 징역형밖에 없다.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시민들이 움직이고, 수많은 사람이 목소리를 내지만, 경찰은 동일한 스탠스를 유지한다. 수천 발의 최루액과 물대포로 사람을 날리고, 총을 쏘고, 끝내 아이들을 무릎 꿇리고, 구타하고, 질질 끌고 가고...
그렇게 홍콩은 국제 사회에서 조금 잊힌다. 미얀마에서도 괴로운 일이 생겼고, 우크라이나에도 전쟁이 났으며... 중국의 굴기는 계속되었다. 2020년에 홍콩에서 국가보안법을 시행했고, 가까운 시일 내에 대만을 무력으로라도 통일하겠다는 말도 서슴없이 내뱉고, 한국 문화와 역사에도 자꾸 손을 대서 우리를 불편하게 또 긴장하게 한다. 이 상황에서 우리 뇌리에 마지막으로 남은 홍콩의 인상은, 진압되기 전 마지막으로 홍콩 이공대 벽에 누군가 남겼다는 짧은 편지다.
세상 사람들에게
중국 공산당은 당신의 정부에 침투할 것이고
중국 기업은 당신의 정치적 입장에 간섭할 것이다
위구르족에게 한 짓처럼
당신네 나라를 털어먹을 것이다
정신을 똑똑히 차려라
그렇지 않으면 다음은 당신 차례가 될 테니까그렇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훗날 홍콩 역사에 아마 2020년에서 2022년 사이는, 2019년이나 우산 혁명의 2014년보다 고요하게 기록될 것이다. 사실 그래서 본 영화였다. 어둠 속에서 연대하는 마음으로. 최루액에 맞서는 우산을 함께 받치는 마음으로, 의문의 추락사로 사라진 이들에게 낙하산을 달아주고 싶었던 마음으로.
그런데 정작 내가 등장인물들의 우산 아래 들어간 느낌을 받았다. 10년 징역형을 받고 나와도 아직 이십 대 혹은 삼십 대라고 말하며 웃는 얼굴들. 또 싸워야 하는 상황이 오면 더 잘 싸울 거라고 말하는 이들의 목소리들. 변조와 모자이크를 뚫고 여기까지 전해지는 그들의 생생한 에너지가, 젊음이, 푸른 꿈이 기묘한 희망을 주었다.
하긴 그렇다. 비루하고 추레하게 제국을 바라는 이들은, 푸른 자유를 꿈꾸는 이들보다 먼저 죽을 것이다. 아무리 경찰이 총을 쏘고 쇠봉을 휘둘러도 모든 시민 모든 아이를 죽일 수는 없으므로. 모든 관례를 부술 만큼 비겁해지지 않고서는 싸울 수도 없었던 그들과 달리, 시위대에 있던 이들은 모든 희생과 고민과 절망을 다 끌어안고도, "우리를 기록해 주세요"라고 울먹이면서 말하고도, 여전히 싸울 마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은 모든 것이 끝난 어둠 속이 아니라, 신발 끈을 다시 매면서 장기전을 바라보는 휴지기의 어둠 속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홍콩에 우산을 받쳐줄 수도, 낙하산을 달아줄 수도 없는 우리지만, 단 하나 희망의 시간만큼은 함께 보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시간 안에 있으므로. 힘들어하면서도 함께 지켜볼 것이다. 우리의 무기는 기록과 희망이고, 그 두 가지의 공통점이 있다면 공유를 통해 힘이 부여된다는 점이니까. 전작에서 우중충한 향후 10년을 상상하며 <10년>을 만들었던 감독이 앞으로 새로운 <10년>을 상상해 펼칠 날을 기대하며, 촛불에서 촛불을 옮기듯, <시대혁명>으로 작은 힘을 함께 나누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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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와 안식을 찾아 떠나는 마지막 여정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윈스턴'(이안 맥쉐인)의 총을 맞고 추락한 '존 윅'(키아누 리브스)'. '바워리 킹'(로렌스 피시번) 덕분에 간신히 살아난 그는 최고 회의에 복수하고, 완전히 자유로워질 방법을 모색한다. 그러나 최고 회의로부터 처분 권한을 위임받은 '빈센트 드 그라몽 후작'(빌 스카스가드) 덕분에 그는 다시 한번 위기에 빠진다. 한 때 동료였던 킬러 '케인'(견자단)과 현상금을 노린 '추적자'(셰미어 앤더슨)가 그라몽 후작의 사주를 받아 존의 목을 노리기 때문. 이들은 존을 쫓아 '코지'(사나다 히로유키)와 '아키라'(리나 사와야마)가 운영하던 오사카 콘티넨탈 호텔까지 습격한다. 존도 앉아서 당하지는 않는다. 그는 완전한 평화와 안식을 가져다줄 마지막 반격을 준비한다.
<존 윅> 시리즈의 명과 암
"그런 거 할 시간에 존 윅은 한 사람이라도 더 죽입니다." <존 윅> 시리즈를 가장 잘 설명하는 문구다. 오로지 복수를 향해 내달리는 단순한 서사와 셀 수 없는 사람이 죽어나가는 액션의 향연은 <존 윅>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1편에서 존 윅은 강아지와 자동차를 잃은 그 순간부터 한 명이라도 더 확실하게 죽이는 데 총력을 다했다.
하지만 이 문구는 <존 윅> 시리즈의 그림자이기도 했다. 시리즈가 점차 커지고 화려해지면서 단순한 매력이 옅어진 까닭이다. <존 윅 3: 파라벨룸>이 대표적이다. 일단 액션이 기대 이하였다. 총격전과 주짓수가 조합된 이른바 '건짓수'의 분량은 줄었다. 대신 나이프나 연필을 사용한 액션이 빈자리를 대신했다. 날렵한 닌자에 맞서는 키아누 리브스의 느린 액션은 허술해 보였다. 내용 면으로도 이질감이 강해졌다. 최고 의회, 장로, 패밀리, 심판관 같은 낯선 고유명사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존 윅의 복수와 도주에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
따라서 <존 윅> 시리즈의 잠정적인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영화 <존 윅 4> 앞에 놓인 과제는 명확했다. 단순해질 것. 본래 매력인 건짓수의 미학을 보여주고, 존 윅의 이야기를 군더더기 없이 매듭 지을 것. 결론부터 말하면 <존 윅 4>는 두 과제를 훌륭히 완수한다. 총성과 비명소리는 시작부터 끝까지 영화를 도배한다. 자유와 안식을 갈망하는 존 윅도 더 바라기 어려울 정도로 깔끔하게 퇴장한다.
존 윅의 액션을 망라하다
<존 윅 4>의 러닝타임은 2시간 49분. 대부분 액션이다. 전편을 봤다면 익숙한 장면이 가득하다. 문짝이 떨어진 차, 귀를 때리는 클럽 음악 사이로 퍼지는 총소리, 계단에서 구르고 또 구르는 존 윅, 일본도를 든 사무라이까지. 무의미한 반복은 아니다. 4편의 배경인 '파리' 덕분에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된다. 마르스 광장에서 마주 앉아 마지막 '결투' 조건을 정하는 담판. 개선문을 빙 돌며 펼쳐지는 살육. 미술관과 예술 작품 앞에서 이뤄지는 대화... 이전 시리즈에서 비슷한 장면을 봤다 해도 무언가 다른 인상을 받기에 충분하다.
새로운 요소도 있다. 일 대 일로 총을 겨누는 '결투'다. 낯설지는 않다. 서부극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설정이기 때문이다. 존 윅의 작중 첫 등장 덕분에 더욱 그렇다. 사막에서 말을 타는 존 윅. 그는 양복만 입었을 뿐 카우보이나 다름없다. 새로운 인물도 눈길을 잡아 끈다. 케인을 연기한 견자단은 전편에 등장한 닌자 액션과는 다른 현대적인 쿵후 액션을 자랑한다. 특수분장을 한 스콧 애드킨스의 액션도 인상적이다. 외관은 마블 영화의 킹핀 못지않은 거구인 킬라. 그러나 그는 체구에 걸맞지 않게 날렵한 몸놀림을 자랑하면서 존 윅을 위기로 몰아간다. 새로움과 익숙함의 조화는 화려한 피날레로 손색없다.
기술적으로도 뛰어나다. <존 윅 4>는 화면을 흔드는 셰이키 캠을 많이 쓰지 않는다. 대신 격투를 화면 중심에 놓으면서 어떤 상황이 펼쳐지는지 정확히 알 수 있게 한다. 덕분에 모험적인 시도가 빛난다. 건물 안에서 존 윅이 '용의 숨결'이라는 탄환을 사용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존 윅에게 달려드는 킬러들은 총에 맞아 터져 나간다. 영화는 하늘에서 바라보는 '탑 뷰(top-view)' 시점으로 액션 장면을 보여준다. 연이은 폭발의 향연 덕분에 관객은 강력한 타격감을 느낄 수 있다. 분위기는 다소 다르지만 <킹스맨> 1편에서 사람들의 머리가 터지는 장면과 유사한 쾌감이다.
액션이 보여준 존 윅의 지옥
<존 윅 4>의 액션은 훌륭한 조력자 덕분에 더욱 빛난다. 단순하면서도 우직한 복수 서사 덕분이다. 1편에서 존은 아내가 남긴 마지막 선물을 파괴한 이들에게 복수했다. 킬러의 삶을 그만두고 아내와 살겠다는 소박한 꿈. 아내가 죽은 후로는 살인을 하지 않고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겠다는 꿈이 깨졌으니까. 그 꿈을 되찾기 위한 복수 외의 이야기는 없었다.
2편부터는 전편 내용을 계승하되 살짝 변주했다. 존 윅의 복수는 물론 존에게 죽은 이들의 복수가 함께 펼쳐진다. 복수를 끝내고 싶은 존은 자기가 과거에 저지른 살인 때문에 자유를 찾지 못한다. 그는 복수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계속해서 살인을 저지르지만, 바로 그 살인 때문에 다시 굴레에 얽매인다.
4편에서도 마찬가지다. 장로를 만나 초반부 장면이 이를 잘 보여준다. 존은 사막에서 장로를 찾아 그를 죽인다. 하지만 장로는 그가 무슨 짓을 해도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오사카 컨티넨탈 호텔도 안식처는 될 수 없다. 복수의 칼날이 존을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개선문을 배경으로 한 40여 분의 액션 시퀀스가 감정적으로도 인상적인 이유다. 존 윅의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는 지쳤다. 그에게는 병으로 죽은 아내를 온전히 애도할 자유만 있으면 됐다. 하지만 그는 상심을 미처 달래지도 못한 채로 온갖 이들에게 쫓긴다. 몇 안 되는 휴식처는 사라졌고, 최고 회의는 친구와 동료까지 이용해 그의 목을 노린다. 그러니 파리 시내에서 총성과 신음, 비명이 이어질수록 관객은 자유와 안식을 갈망하는 존 윅에게 공감할 수밖에 없다. 존의 지옥을 두 눈으로 목격한 이상.
서부극으로 시작해 서부극으로 끝나는 이유
그렇다면 존 윅에게 완전한 자유와 안식은 무엇일까? 영화는 두 장면을 통해 그 끝을 암시한다. 하나는 양복을 입은 존 윅이 요르단 사막에서 말을 타고 펼치는 추격전이다. 다른 하나는 '결투'다. 둘의 공통점은 하나다. 서부극에서 빠지면 아쉬운 상징적인 장면이라는 것. 실제로 <존 윅 4>는 웨스턴 영화다운 피날레로 나아간다.
많은 서부극은 피카레스크 장르가 섞인 이야기, 복수극의 형식을 띤다. 작품 속 주인공은 악인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숱한 악행을 저지른다. 그리고 그 대가를 결코 피하지 못한다. <로건>이 인용한 영화 <셰인>의 대사만 봐도 알 수 있다. "사람을 죽이면 고통 속에 살게 돼. 되돌릴 방법은 없어. 그게 옳든 그르든 낙인이 되어 지워지지 않지. 이제 어머니한테 가서 괜찮을 거라고 전하렴. 이제 이 계곡에 총성은 없을 거라고..."
존 윅도 마찬가지다. 그의 끝은 울버린, 로건과 다르지 않다. 그에게 죽음은 슬픈 일이 아니다. 킬러로서의 삶, 영원히 손에 피를 묻혀야 하는 삶, 복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삶에서 완전히 벗어난 안식처다. 아내의 무덤에서 시작한 시리즈가 그의 무덤으로 끝나는 이유다.
새로이 등장한 인물들의 관계는 <존 윅 4>의 깔끔한 수미상관에 당위성을 더한다. 케인과 아키라의 악연이 대표적이다. 딸과 함께 살고 싶은 그는 옛 동료인 존을 죽이라는 그라몽 후작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 과정에서 오사카 컨티넨탈의 지배인 코지를 죽인다. 결투를 끝낸 케인은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되어 딸을 만난다.
하지만 그의 앞에는 코지의 딸, 아키라가 나타난다. 그녀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다. 아버지의 복수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존 윅처럼 악행의 대가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복수의 굴레를 끊을 방법은 없다. <존 윅 4>의 이야기가 지극히 서부극스럽게 끝나야 하는 이유다.
<존 윅 4>는 거의 흠잡을 데 없는 영화다. 액션도 서사도 기대한 것 이상을 보여준다. 시리즈의 결말로서도, 한 편의 독립된 작품으로서도 준수하다. 작별을 고하면서도 존 윅과의 재회를 기대할 여지를 남긴 마무리도 재치 있다.
다만 한 가지 단점이 있다. 너무 길다. 전편(131분)에 비해서도 169분은 과하다. 긴 러닝타임을 액션으로 꽉 채우다 보니 지치는 대목도 있다. 물론 존 윅의 액션도 이야기도 후회 없이 쏟아내겠다는 채드 스타헬스키 감독의 야망은 잘 전해진다. 그러나 조금만 더 압축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는 없다.
이에 더해 너무나 깔끔한 마무리 역시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여러 정황으로 미뤄 봤을 때, 키아누 리브스의 <존 윅> 시리즈 본편을 만나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존 윅 4>의 완벽에 가까운 결말은 다음 타자인 스핀오프 영화 <발레리나>와 드라마 <콘티넨탈>의 어깨를 짓누르는 듯 보인다. 과연 그들이 <존 윅>을 넘어설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될 수밖에 없으므로.
Exceeds Expectations 기대이상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마침내 자유와 평화를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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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가장 씁쓸한 방식으로 ‘한국적인’ 가족 이야기
보통의 가족/A Normal Family
한국영화의 오늘: 스페셜 프리미어
Korea/2023/109min
*시놉시스
두 쌍의 부부가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성공지상주의자 변호사 재완(설경구)과 원리원칙주의자 소아과 의사 재규(장동건)는 형제다. 재완의 아내 지수(수현)와 재규의 아내 연경(김희애)까지 네 사람은 아이들의 범죄 현장이 담긴 CCTV를 보며 고민에 빠진다.
〈보통의 가족〉은 어쩌면 가장 씁쓸한 방식으로 ‘한국적인 것’을 포착했다고 할 수 있을 영화다. 두 엘리트 가족이 있다. 형 재완은 잘 나가는 로펌 변호사고, 동생 재규는 대형 병원 의사다. 재완의 두 번째 아내 지수는 재완의 사무실에 떡 배달을 갔다가 결혼까지 하게 된 ‘젊고 예쁜’ 여성이고, 국제 봉사 NGO에서 일한 재규의 아내 연경은 올바름과 정정당당을 강조하는 재규에게 어울리는 짝으로 보인다.
이들의 관계는 묘하게 뒤틀려 있다. 재완은 동생 재규가 원리원칙주의자처럼 보여 답답할 때가 있고, 재규 역시 종종 형 재완이 돈만 아는 속물이라 생각한다. 지수는 상류층에 어울리지 않는 자신의 출신 때문에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콤플렉스를 가졌고, 치매인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연경은 어쭙잖게 형님 행세를 하려 드는 지수가 같잖기만 하다.
어느 가족에게나 있을 법한 뒤틀린 관계 역학을 지닌 이 엘리트 가족에게 사건이 생긴다. 고등학생인 재완의 딸과 재규의 아들이 술을 마신 후 노숙자를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이다.
이제 두 가족은 시험대에 든다. 법의 허점을 악용해 승승장구하던 변호사 재완은 과연 딸이 연루된 살인사건까지 무마하려 시도할까? 형 부부를 비웃으며 ‘선하게’ 살고자하는 재규와 연경은 과연 자기 자식 일에서도 지금껏 견지해온 삶의 원칙을 유지할 수 있을까? ‘새엄마’라는 지위에 늘 불안을 느끼던 지수는 오히려 이번에는 그 거리감에 안도하지는 않을까? 무엇보다, 살인을 저지른 아이들은 이 사건을 어떻게 인지할까? 그리고 그들은 부모의 사회적 영향력을 어떤 방식으로 계승하려 하는가?
〈보통의 가족〉은 설득력 있는 캐릭터들이 빚어내는 앙상블이 인상적인 영화다. ‘멜로 장인’, ‘멜로 거장’이라 불리는 허진호 감독의 재능, 즉 관계성을 탁월하게 감각하고 드러내는 재능이 가족이라는 뒤틀린 이익 공동체에 적용되자 또 다른 빛을 발한다. 허진호 감독이 새로이 천착한 가족 관계는 동시대 한국에 관한 여러 물음을 파생한다.
-자본주의에서 경제적 엘리트는 ‘신분’이 되었다. 상류층과 하층민의 목숨 값은 다르다.
-가족이라면 다른 가족의 ‘허물’을 덮어줘야 한다.
-각자도생의 원칙이 가족 내부에까지 침투했다. 즉 자기 이익에 반하면 자식까지 버린다.
-뼛속까지 신자유주의의 능력주의, 경쟁주의를 학습한 청소년들에게는 보편적 윤리와 도덕이 없다. 이들에게는 자기 생존만이 윤리이자 도덕이다.
-‘선함’은 본질적으로 위선과 허영이다.
〈보통의 가족〉을 보고 우리가 논쟁할 수 있는 명제들의 대략적인 목록이다. 결이 비슷한 것들도 있지만 상호 모순적인 것들도 있다. 관객의 관점과 문제의식에 따라 이는 얼마든지 더 다양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가 던지는 도발적인 물음들은 문제를 빙글빙글 돌리지 않고 직선적으로 나아간다. 관객은 매 순간 ‘나라면?’이라고 질문해봄으로써 멜로 장인이 선보이는 ‘기괴한 가족 멜로’의 현장에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와 메시지가 마찬가지로 설경구 배우가 출연한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2022)를 연싱시키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완성도와 몰입도가 더 높게 느껴졌다. 함께 보며 논쟁할 만한 시의성과 오락성을 고루 갖춘 영화다.
*영화 상영시간
10-03/16:00/롯데시네마 센텀시티 4관
10-04/09:00/CGV센텀시티 6관
10-07/09:00/CGV센텀시티 3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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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
1984년 동독, 개인의 삶은 존중 받지 못했다. 사회주의 체제 아래, 개인을 억압하기 위한 비밀경찰의 감시는 날로 심해졌고, 당시 국민의 3~5%가 비공식 정보원으로 활동했다고 추정될 만큼 이웃, 친구, 연인, 심지어는 가족까지도 신뢰할 수 없는 사회였다. 비즐러는 대학교수이자 비밀경찰로 일하는 인물이다. 그는 사회주의에 대한 강한 신념이 있으며, 그 신념을 바탕으로 세워진 국가 체제에 철저히 복종한다. 그에게 있어서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이는 '사회주의의 적'일 뿐, 하나의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드라이만을 감시하게 되면서, 비즐러의 삶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드라이만은 동시대의 다른 예술인들에 비해 비교적 체제에 순응하는 편이었다. 국가를 노골적으로 찬양하지는 않지만, 정치적 탄압에 대해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가 적극적으로 체제에 저항하게 되는 계기가 생긴다. 드라이만의 친구 예르스카는 국가로부터 위험인물로 간주되어 연출가로서 활동을 금지당한다. 자신의 자유 의지를 빼앗긴 예르스카는 삶의 의지 또한 잃고, 결국 자살을 택하다. 정확히는, 국가에 의해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린 것이다.
또한, 드라이만의 연인 크리스타는 배우로서의 경력을 안정적으로 이어가기 위해 문화부 장관의 도움을 받는다. 예르스카는 억압된 사회에서 스스로 벗어난 인물이라면, 크리스타는 원치 않는 성적 관계를 감내하면서까지 예술을 통한 생존을 꿈꾼다. 드라이만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허위적인 신념 아래 고통받는 개인의 삶을 고발하기 위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글의 내용은 이러하다. 1977년 동독은 자살 관련 통계 공개를 중단하였다. 그해, 유럽에서 동독보다 자살률이 높은 나라는 헝가리뿐이었다. 이는, 개인의 삶을 안전하게 보호해야 할 사회 체제가 오히려 폭력을 휘두르고 있음을 드러낸다.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자신이 복종하던 사회 체제의 허구성을 점차 깨닫는다. 그의 동료 그루비츠는 이미 신념에 지배당하여 당 서기 호네커와 전화를 동일시하는 모습에서 보이듯 인간을 사물화하고 타인을 억압한다. 문화부 장관 헴프 역시 허구적인 신념 위에 군림하며 타인의 삶을 훼손한다. 체제의 모순성과 허구성을 느끼기 시작한 비즐러는 드라이만에 대한 감시를 중단한다. 그때, 그는 드라이만의 삶과 연결되기 시작한다. 예술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술은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다. 따라서 예술에 진정으로 마음을 바친다면 결코 개인주의적인 인간이 될 수 없다. 비즐러가 크리스타의 삶에 연민을 느끼고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예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술은 더욱 강력하게 비즐러의 마음을 흔든다. 동독은 예술이 가진 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집착했을 것이다.
생존과 개인의 존엄 사이에서 갈등하던 크리스타는 결국 자신의 연인인 드라이만을 배신하게 되지만, 끝내 생존하지 못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신념에서 벗어나 타인을 인간으로 마주하게 된 비즐러에게 타인의 삶은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실현된다. 크리스타의 죽음 앞에서 비즐러는 진정으로 슬픔과 죄책감을 느낀다. 타인을 체제의 적으로 규정하고 비인간적으로 고문하던 초반의 모습에서 변화하여 신념에서 해방되고 주체적인 삶을 찾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다. '추구하고 싶은 이상과 혁명할 대상이 사라진 사회'에서 신념에 지배당한 사람들은 과거를 그리워하지만 비즐러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살아나간다.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는 비즐러와 같이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개인 주체에게 주어진다.
어떠한 신념도 개인의 삶을 앞설 수 없다. 신념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허구적인 개념이며, 온전하지 못하다. 아름다운 영혼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삶을 생생하게 경험해야 한다. 타인과의 연결이 희미해질 때, 예술에 취해보는 것도 좋다. 타인과 공존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주체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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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복」 제목의 뜻 그리고 영화 속 숨겨진 이야기ㅣ서복 예고편ㅣ서복 영화리뷰ㅣ박보검ㅣ공유ㅣ서북
?'서복' 영화 예고편 리뷰
서복 제목 의미 그리고 스토리 정리 및 예측CJ 엔터테인먼트 제공/배급
스튜디오 101, CJ 엔터테인먼트 제작
TPS 컴퍼니 공동제작감독 : 이용주
출연 : 공유, 박보검, 조우진, 장영남, 박병은
인류 최초의 복제인간 ‘서복’
그와의 특별한 동행이 시작된다!과거 트라우마를 안겨준 사건으로 인해
외부와 단절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전직 요원 ‘기헌’은 정보국으로부터
거절할 수 없는 마지막 제안을 받는다.줄기세포 복제와 유전자 조작을 통해
만들어진 실험체 ‘서복’을 안전하게
이동시키는 일을 맡게 된 것.하지만 임무 수행과 동시에 예기치 못한 공격을 받게 되고,
가까스로 빠져나온 ‘기헌’과 ‘서복‘은
둘만의 특별한 동행을 시작하게 된다.실험실 밖 세상을 처음 만나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한 ‘서복‘과 생애 마지막 임무를
서둘러 마무리 짓고 싶은 ‘기헌’은
가는 곳마다 사사건건 부딪친다.한편, 인류의 구원이자 재앙이 될 수도 있는
‘서복’을 차지하기 위해 나선 여러 집단의 추적은
점점 거세지고 이들은 결국 피할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는데…*소개된 서복 역사는 학계의 주장 중 하나일 뿐,
지나친 맹신은 금물입니다
#서복 #서복_리뷰 #서복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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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서유기 : 재세요왕> 메인 예고편
삼장법사에 의해 오행산 기슭에서 구출된
‘손오공’은 과오를 뉘우치고 경전을 배우기 위해 서역으로 길을 떠난다.
긴 여정의 길, 배고픔을 주체하지 못한 ‘손오공’과 친구들은
만년의 한번씩 열린다는 인삼과 열매를 몰래 따먹게 되고
설상가상 신선수라 여기는 인삼과 나무를 파괴해 버리자
나무 아래 봉인되어 있던 요괴의 왕 ‘원체’가 깨어나고만다.
세상은 혼란에 휩싸이고, 요괴들은 날뛰기 시작하는데..
‘손오공’, 전설에 맞서 세상을 구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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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재개봉 예고편
기차가 서로 스쳐 지나갈 때 ‘기적’이 일어난대~
그래서 소년이 바라는 건.. 화.산.폭.발?!!나는 엄마랑 할아버지랑 할머니랑 삽니다. 동생 류랑 아빠는 저기 멀리서 따로 삽니다. 엄마랑 아빠랑 맨날 싸우더니, 이런 꼴이 될 줄 알았습니다. 나의 소원은 우리 가족들이 다시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저기 저 위에 있는 화산이 폭발해서 아빠랑 류가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가면 됩니다. 형은 화산이 꼭 폭발하게 해달라고 매일매일 기도하는데 철부지 내 동생은 가면라이더가 되고 싶다고나 하고, 정말 어린이 같은 소원입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하는 말이 새로 생기는 고속열차가 반대편에서 서로 달려오다가 스쳐 지나가는 순간에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아싸~ 그럼 거길 가서 소원을 빌면 되겠네! 그래서 좋아하는 선생님이랑 결혼하고 싶은 친구랑, 야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친구랑 거길 가려고요. 동생도 오라고 해서 나랑 같은 소원을 빌라고 해야겠어요. 난, 우리 가족이 꼭 같이 살았으면 좋겠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