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09-18 23:30:17
[SICFF 데일리] 기울어진 세상을 헤엄쳐
영화 <나의 수호신>
SYNOPSIS.
위험에 빠진 아이, 이상하고 귀여운 수호 동물과 마주치다
PROGRAM NOTE.
절친 타이스와 함께 수영 대회를 준비 중인 열한 살 소녀 아마. 아마는 스스로 네덜란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세네갈 출신인 아마의 부모님은 망명 신청을 거절당해 더이상 합법적으로 네덜란드에 거주할 수가 없다. 어느 날 남동생과 엄마가 불시에 잡혀가고, 도망친 아마는 아빠를 찾아 헤매던 중 거대한 호저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나의 수호신>은 네덜란드에 있는 수많은 불법 이민자들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현실에서 착안한 판타지 영화다. <나의 수호신>은 자신의 집이라 생각했던 곳에서 쫓겨나는 상황에 직면한 아이의 이야기를 통해 ‘집의 의미’를 묻는다. 이민자 이슈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큰 논란 중 하나이지만, <나의 수호신>은 인권이라는 큰 틀 안에서 우정과 연민의 힘으로 해피엔딩을 맞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기를 소망하는 작품이다. (최은영)

우리가 사는 도시를 집어들고 가방 털 듯 탈탈 털면, 거기서 후두둑 떨어지는 동물들은 개, 고양이, 햄스터… 같은 것만이 아닐 거라는 이야기를 어디에서 읽었더라. 생각지 못한 동물들이 후두둑 떨어질 거라는, 정글에서나 볼 거라고 생각했던 동물들이 실은 우리와 같은 도시에 살고 있다는 그 말을.
그렇다면 사람은 어떨까. 나와 비슷한, 아주 닮지는 않았어도 대충 엇비슷한, 그리고 나와 다르지만 대충 예상했던 사람의 범위, 그 바깥의 누군가를 분명 마주하게 되지 않을까.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도시 한복판에서 마주칠 거라 생각하지 않듯이.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익숙한지 아닌지 고작 그 문제다. 누군가의 상상력 하나로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진 것처럼.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그려 본다면, 우리 모두 똑같이 그릴 수 있을 것처럼.
우리의 주인공 아마는 그렇게 도시를 탈탈 뒤집으면 조금 당혹스러울 법적 지위를 가진 채로,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살고 있다. 성격도 밝고, 공부도 잘하고, 네덜란드 최고의 수영 선수를 보며 꿈을 무럭무럭 키우고 있는 될성부른 수영 유망주 어린이이기도 한데, 대회 하나를 나가려고 해도 ‘써도 될 것’과 ‘써서는 안될 것’을 신중하게 골라내야 하는 처지에 있다.
아마가 사는 집은 그 자체로 하나의 마을 같다. 아이들을 씻기고 자신도 씻기를 즐겨 하는 이웃이 샤워기를 틀면 계단참으로 물이 주르륵 흐르는, 그만큼 연결되어 있는. 그러나 아마의 가족은 이런 상황에 불평을 일삼기보다 자연스러운 생활의 풍경으로 받아들이면서 살고 있다. 아빠와 장난칠 때나 썼던 소금 통 하나를 사러, 그 심부름 하나로 아마의 생활이 영영 달라질 때까지는.
집에 있던 아마의 어머니와 동생은 “불법 이민자”여서 잡혀 가고, 아마는 놀이터에 숨어서 일을 나가신 아빠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아마의 세상이 전체적으로 기울어 있음을 관객은 이내 깨닫게 된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앵글이 항상 기울어 있다. 학교도, 경찰서도, 집 바깥도, 전부 다 기울어 있다. 아마가 아빠를 찾아 들어간 “드 로테르담” 건물, 아빠의 일터 또한.
이 기울기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것이다. “불법 이민자”에 대한 편견은 말할 것도 없고, 아마는 스스로가 네덜란드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자랐기 때문에, 자신이 불법 이민자이고 그 편견 속에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사무직과 청소 일에 대한 편견도 가지고 있다. 아버지가 일한 업체의 이름은 Sunshine services이지만, 역설적으로 선샤인이라고는 전혀 빛나지 않는 밤에만 일하고, 밤으로 취급받는다. 세계가 기울어 있는 것이 사실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서글픈 현실에 갑자기 거대한 호저가 나타난다. 영화 자막에서는 고슴도치로 번역되었지만, 호저는 고슴도치와 다르다. 꿀벌과 말벌 정도의 차이랄까. 고슴도치가 가시를 있는 힘껏 세워도 멀리서 (그러니까 그 가시가 나를 공격하기 않을 거리에서) 보면 귀엽겠지만, 호저가 가시를 세우는 모습을 멀리서 보면… 그로테스크하다.
나는 호저라는 생물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호저를 처음 봤는데, 심지어 인도의 동물원에서 야행성 동물들을 모아 놓겠다고 조명을 있는 대로 침침하게 해 둔 어둠 속에서 그 가시가 파르르 서는 모습으로 처음 보았다. 뭔데 저거. 뭐야. 왜 무서워. 무서움을 익히 아는 다른 동물보다, 전혀 모르는 생물의 가시가 더 무서웠다. 알고 보니 호저는 정말 만만치 않은 생물이었다. 호저의 가시에 공격을 받으면 맹수도 배겨낼 재간이 없다.
그러나 이 영화, <나의 수호신> 원제인 ‘토템’답게, 이 영화 속 거대한 호저는 귀엽기만 하다. 도시 속의 사람은 내지 못한 위로의 울음소리를 호저가 낸다. 제목이 <나의 수호신>인데 자막에는 ‘토템’으로 나와, 수많은 어린이 관객들이 엄마에게 “토템이 뭐야?”를 물어야 했음은 아쉬운 포인트지만… (참고로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토템은 “부족 또는 씨족과 특별한 혈연관계가 있다고 믿어 신성하게 여기는 특정한 동식물 또는 자연물. 각 부족 및 씨족 사회 집단의 상징물이 되기도 한다.”)
커피 머신도 사랑이 필요하다며 쓰다듬는 사람이 있는 도시에서, 아마는 그저 호저와 함께 걷는다. ‘상상 속의’ 존재가 아니라면 같이 걸을 상대도 없는, 대도시 속 외로운 아이의 삶. 집이었던 곳은 경찰과 개의 손에 마치 범죄자의 소굴처럼 취급되며 서슴 없는 수색의 대상이 되지만, 호저는 깡통 차기 놀이 상대가 되어 준다. 마치 전통 속 여우 사냥의 한 장면처럼, 아마가, 사람이, 개에게 쫓기는 장면이 현실에서는 연출되지만 호저는 파르르 가시를 세워 아마를 지켜준다.
극중에서 호저를 볼 수 있는 인물은, 아마와 마음의 결을 같이 하는 이들뿐이다. 애초에 아마의 옆에 서 있었던 이들을 제외하면, ‘그리오grio’ 그러니까 가수이자 시인인, 노래로 이야기를 전해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게 하는 일을 사명으로 품은 이들밖에 없다. 이는 영화를 포함한 예술의 기능 중 주요한 한 지점을 짚는다. 기울어진 세상에서도 노래는 계속되어야 함을.
‘온 세계가 당신의 조국’이라는 네온사인이 무의미하게 빛나는 거대한 도시에서, 정작 도시 안에서 평생을 자란 사람을 밀어내는 도시에서, 아마는 호저의 등에 올라 기울어진 세상을 걷는다. 이 차가운 현실에, 이야기 하나를 놓는다. 그 순간 세상은 변한다.

기울어진 세상에서도 ‘상자 바깥에서, 틀을 깨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그들이 그리오grio의 후예, 그러니까 이야기가 잊히지 않도록 하는 이들인지 모르겠다. 아마가 외로운 여정을 걷는 내내 곳곳에서 아마를 먹이는 손길이 있었듯이, 이 외로운 도시를 가방 뒤집듯 탈탈 털면, 생각지도 못한 동물들이나 사람들과 함께, 환대의 손길 또한 함께 후두둑 떨어질 것이다.
아마는 앞으로도 기울어진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아마의 정체성은 ‘네덜란드인’에서 ‘경계인’으로 달라졌을 것이다. 사실은 우리 모두 경계인임을 우리는 언제 깨달을 수 있을까. 여기 계속 사는 거냐는 질문, 아마와 타이스 두 아이의 물음에 부모님의 대답은 동일했다. “그래, 당분간은.” 이사를 가든 추방을 가든, 결말이 어떻든 우리 여기서 당분간은 살아갈 존재들임은 동일하다. 도시를 뒤집어 탈탈 털면 후두둑 떨어질 존재들이라는 사실만큼은 동일하다.
그게 다르게 취급되는, 기울어진 세상을 우리 살아가지만, 이 기울어진 세상에서 노래와 환대의 손길은 계속되니, 새처럼 날아드는 그 손길과 멜로디를 따라 계속 헤엄쳐갈 일이다. 씩씩하게!
9월 15일 20:00-21:37 롯데시네마 은평 5관
9월 17일 16:00-17:37 롯데시네마 은평 6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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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태일, 그리고 이름없는 여자들
<미싱타는 여자들>은 다큐멘터리 영화이나, 본문에 영화 전체 내용을 포함합니다.
*1.
올해도 훌쩍 가버렸다. 크리스마스를 보름 조금 넘게 앞두고, 청계천변에는 오색찬란한 등을 밝힌다. 일 년에 한 번, 청계천변은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한다. 종교에 대해 말하는 건 아니고, 나는 언젠가 가장 낮은 자의 모습이란 뭘까 생각했다. 마굿간에서 태어났을지언정 백인 남성의 지위는 너무 높은 자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소설가 박태원의 작품 <천변풍경>에서는 한국전쟁 직후 대규모 판자촌을 이루며 살아갔던 청계천변 사람들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박태원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로도 유명하지만, 이제는 봉준호 감독의 외조부로 더 유명해진 듯하다.
그리고 시인 김종삼의 시 <장편2>에서도 청계천변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주 짧으니 인용해본다.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십전 균일상 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 짜리 두 개를 보였다.
이야기가 다른 길로 빠졌는데, 하여튼 청계천은 그런 곳이다. 복개된 청계천을 따라 동대문에서 시청을 거쳐 광화문까지 이어진, MB의 업적으로 칭송되는 바로 그 하천. 그 하천이 시작되는 동대문 평화시장은 아직도 뜨개며 자수, 캔들, 커튼, 봉제 등등 오만가지 부자재들을 사러 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더 지난 시절에는,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나비 담장 위를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돌았던 평화시장 피복공장이 있었다.
2.
우리는 전태일을 기억한다. 노동자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해달라고 요구했으나 빈번히 거절당한 그의 몸에는 휘발유가 뿌려졌다. 불 붙은 그의 몸을 그 누구도 덮어주지 않았다. 불에 타들어가며 평화시장을 뛰었다. 결국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치료도 못 받고,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에게 후일을 맡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 이후 무엇이 바뀌었을까. 전태일이 분신까지 해가며 외쳤던 '근로기준법 준수'가 지켜졌을까?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안다. 그러나 그 뒤에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나도 그중 하나이다.
한강의 기적을 말할 때, 흔히들 중공업과 국가기간사업을 떠올리지만 그전에 가발공장과 봉제공장이 있었다. 여자는 공부시키는 게 아니라는 말이 통용되던 시절, 어린 여자아이들은 공장으로 향했다. 아들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딸들을 갈아넣는 일은 특별하지도 않았다. 우리 엄마와 이모들도 그랬다. 그렇게 공부한 아들들은 사무원이 되고 은행원이 되고, 대학에 가고, 판검사가 되는 동안 공장에 다니면서 살림 밑천을 대고, 달러를 벌어들이던 딸들의 이름은 지워졌다.
3.
청계피복노조는 전태일의 죽음 이후 결성되었다. 노동교실을 만들어 어린 시다와 미싱공 등을 교육시켰다. 그들은 교복 입고 학교에 가지는 못했지만, 노동교실에서 배움을 이어간다. 그러나 지배계층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피지배층이 똑똑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것도 몰라야 돈을 떼먹어도, 최저임금을 준수하지 않아도, 사람 취급을 안 해줘도 아무 말도 못하니까.
결국 노동교실을 지원하기로 한 사업주는 9월 10일까지 짐을 싸라고 통보한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 노동교실을 지키기 위해 9월 9일에 농성을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죽고, 다치고, 구치소에 갇히고, 구속되는 일들이 발생한다.
<미싱타는 여자들>은 청계피복노조의 노동교실을 지키고자 했던 어린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이다. 신순애, 이숙희, 임미경은 구속까지 당했다. 아주 오랜 세월 가슴에 묻고 살았던 이야기를 영화를 통해 세상 밖으로 풀어낸다. 세 인물은 각각 그시절에 함께했던 인물들과 대화 방식으로 그때를 회상한다. 회상의 단서는 주로 편지, 사진과 같은 사적인 기록물들이다.
이제와 돌아보는 사진 속 그들의 모습은 너무도 어리다.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소녀들은 공장에서 잠도 못 자고 밥도 겨우 먹으며 일했다. 근로기준법은 개나 줘버린 시절이다. 전태일이 분신까지 하며 세상을 바꾸어보려 했지만 세상은 바뀐 게 없다. 그것도 모자라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까지 구속되기에 이른다.
여공들은 이소선 여사가 구속되었던 구치소 앞에서 밤마다 "어머니!"를 외친다. 어머니를 풀어달라고. 그런데 어머니, 어머니 소리 한다고 빨갱이란다. 이북에서는 김일성을 아버지라고 하는데, 이소선 여사에게 어머니라고 하니 빨갱이가 아니겠냐고.
거기다 9월 9일에 농성을 하니 빨갱이란다. 9월 9일이 무슨 날인지 아냐고. 누가 알겠나. 학교도 못 다닌 어린 여자아이들인데. 김일성 생일이란다. 그리하여 그들은 별안간 빨갱이가 된다. 빨갱이라고 이름붙이는 순간, 모조리 잡아넣는 건 일도 아니었던 시절이다.
4.
여자의 일은 너무도 쉽게 지워진다. 얼마 전 계단청소를 하다 돌아가신 노동자가 '고된 노동으로 인한 산재'를 인정받지 못했던 일이 있었다. 결국 한 남성변호사가 노동체험을 하고, 그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증명해낸다. 독립운동을 했던 수많은 여성들이 있고, 노동운동, 인권운동을 한 여성들이 분명히 존재하나, 그들의 존재는 미미하다.
가발공장인 YH사건은 부마민주운동의 불씨를 당겼다. 그 역시 여성노동자들의 일이다. 그러나 누가 그들을 기억하는가. 뼈 빠지게 일한 아버지는 불쌍하지만, 그 집안을 돌보아온 어머니의 노동은 쉽게도 잊힌다.
<미싱타는 여자들>의 미덕은 과거를 재현하거나 동정하기 보다, 그동안 이름 불리지 않았던 이들의 이름을 호명하고 기억하는 데 있다. 그시절 여공들은 그토록 뜨거웠던 젊은 날의 자신을 기억해낸다.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고생 많았다고, 잘 했다고.
얼마 전 한 대선후보가 최저임금보다 낮은 조건으로도 일할 사람 널렸다는 발언을 해서 뭇매를 맞았다. 국가의 역할이란 최저임금보다 적게 받아도 돈을 벌어야만 하는 절박한 사람과, 최저임금도 주기 싫은 업주가 매칭되지 않게끔 하는 것이 아닐까.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싸워온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아주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니고, 고작 30년 전 이야기이다. 그들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인물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미싱타는 여자들>을 보는 관객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더불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태일이>도 12월 1일에 개봉을 했다. 잘 되었으면 좋겠다.
캐롤도 없고 거리두기로 모임도 없는 조용한 연말이다. 가장 낮은 자의 모습이란 어떤 모습일까 다시금 생각해본다. 올겨울도 청계천에는 빛초롱축제가 문전성시를 이루고, 청계천을 따라 반짝반짝 빛나는 등불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씨네랩으로부터 초청 받아 시사회에 참석한 후 남기는 개인적인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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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연한 두려움이 일으킨 불안감의 파도.
- 500일의 썸머에 나왔던 그 영화를 보았다. 그 문제작(?)인 '졸업'은 1967년 마이크 니콜스의 미국 영화인데, 원작 찰스 웨브의 '졸업'을 바탕을 두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나니 썸머가 인상 깊게 보았던 장면과 톰이 인상 깊게 보았던 장면이 겹치지 않는 모습이 확연하게 보였다. 톰이 이 영화를 오해하며 자랐다는 말이 이를 뒷받침한다. 썸머는 '졸업'이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며 울고 톰은 우는 그런 썸머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 영화의 결말은 정말 톰이 생각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극복한 운명적인 사랑의 영화일까.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벤자민은 주변의 기대와 막연함으로 인해 내면의 불안감이 휘몰아친다. 그렇게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던 그는 고민에 빠질 새도 없이 1차원적인 쾌락에 빨려 든다. 잘못됐다는 생각은 어느새 그 욕망에 잠식되어 소거된다. 대화 없이도 충분한 잘못된 만남은 언젠간 거리를 두어야 할 테지만 익숙해진 시간으로 인해 전과 다를 바 없는 수동적인 삶의 형태는 지속된다. 금단의 관계는 그의 일부분이 얽히게 만들며 동시에 벗어날 수 없게 한다.
허비한 시막 간으로 인해 삶의 방향성을 잃고 물 위에 부유하던 벤자민은 일레인을 만나며 서서히 변화를 맞이한다. 매번 선택의 순간의 기로에 놓이며 '사랑'과 연관된 일레인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의지를 통해 표현할 수 있었다. 끝내 쟁취하고도 벤자민의 공허한 표정과 그를 바라보는 일레인의 모습을 통해 계속해서 펼쳐질 흔들리는 불안함을 500일의 썸머의 '썸머'는 그 감정을 느꼈기에 눈물을 쏟았을 것이다. 수동적으로 자라왔던 이들에게 처음으로 졸업이라는 묵직함으로 다가온 순간을 목도한다.
그의 방황에 휩쓸린 이들에게 밀려오는 불안감의 파도는 청춘이라는 막연함으로도 덮을 수 없었다. 세대를 막론한 진정한 '졸업'은 불안감과 두려움이 동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인생은 정해진 답이 없는 큰 시험지 같다. 영화의 동화같은 이야기와 현실적인 이야기가 잘 버무려진 영화였다. 약간의 아쉬움은 분명히 있지만 청춘의 막연함을 물에 비유한 방식이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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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선지와 은막을 수놓은 불멸의 음악가에게 바치는 헌사
- 고흐의 죽음에 얽힌 허구적 이야기를 그려낸 영화 <러빙 빈센트(Loving Vincent)>.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한 고흐를 기리는 이 영화는 캔버스 위의 고흐 작품을 영화의 프레임으로 치환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표현했다. 100명이 넘는 화가가 완성한 고흐 스타일의 그림들을 스크린으로 옮긴 것이다. 은막이 캔버스가 되고, 영사기가 붓이 되었다. 위대한 예술가에 대한 헌정 작품이 형식과 내용 면에서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영화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를 보는 동안 영화 <러빙 빈센트>만큼의 벅찬 감동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영화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오선지와 은막을 수놓은 불멸의 음악가 엔니오 모리꼬네에게 바치는 아름다운 헌사다.영화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영화인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사상 최고의 영화음악가 엔니오 모리꼬네의 삶과 예술을 회고하는 다큐멘터리다. 영화 <시네마 천국>으로 유명한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이 연출한 영화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엔니오 모리꼬네의 진솔한 인터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축 처진 피부, 숱이 적은 성성한 백발만 보면 영락없는 90세 노인이지만 그의 맑은 두 눈, 명철한 기억력, 꼿꼿한 허리, 음악에 대한 변함없는 호기심과 열정은 그를 20대 청년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가 평생을 바쳐 몰두한 영화음악과 음악이 그의 정신에 늘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은 것이 틀림없다.
재능이 있는 예술가가 부지런한 것도 놀라운데 그는 끝없이 실험하기까지 했다. 손쉽게 모방하지 않고 어렵더라도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했다. 자신이 관철하고자 마음먹은 음악이 있다면 영화감독과의 언쟁도 불사하고 어떻게든 영화감독을 설득했다. 동시대 트렌드 속에서 안주하지 않고 부단히 새로움을 추구한 덕분에 그가 작곡한 영화음악은 영화의 수준을 높여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어떤 영화를 대변하기까지 한다. <황야의 무법자>,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미션>, <시네마 천국>, <헤이트풀8> 등의 걸작을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 없이 떠올리기는 어렵다. 지미 폰타나의 'Il Mondo(세계)', 영화 <기생충>에도 나왔던 잔니 모란디의 'In Ginocchio Da Te(당신 앞에 무릎 꿇고)' 등 그가 편곡한 수많은 대중가요 히트곡들은 기존의 관습을 깨면서도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영화감독, 배우, 가수, 음대 동창, 영화음악가들의 인터뷰는 엔니오 모리꼬네의 예술적 성취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영화계와 음악계의 명사들이 모두 입을 모아 최고의 음악가로 꼽는 엔니오 모리꼬네. 그가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삶과 예술을 해설한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영화와 음악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의 예술가에게 큰 선물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2020년 7월은 영화사와 음악사 모두에서 중대한 기점이 될지도 모르겠다. (끝)* 6월 15일 메가박스 코엑스 돌비 시네마에서 진행된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프리미어 시사회에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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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뜻한 혁명’과 공공재의 우화
이 ‘조용하고’ 따뜻한 로맨스 혹은 우화에서 곤돌라는 사랑의 장소이자 우정의 장소, 연대의 장소, 전유의 장소, 연결의 장소다. 영화에는 대사가 없다. 그래서 자막도 없다. 우리는 외화를 보고 있지만, 시선은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그 자유로움의 틈새로 동화 같은 어느 유럽 시골 마을의 풍경이 들어온다. 아니, 곤돌라를 타고 스크린에서 관객에게로 도달한다.
이바는 마을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곤돌라의 새로운 승무원으로 일한다. 곤돌라에서 일한다는 건, 마을의 모든 연결망의 중심에 선다는 의미다. 곤돌라가 없다면 윗마을과 아랫마을의 교류는 없다. 곤돌라를 타고 내려가는 관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이 조의를 표할 수 있는 건, 곤돌라가 가능케 한 위와 아래의 연결 덕분이다.
이바가 곤돌라를 타고 내려오거나 올라갈 때, 가운데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이 있다. 또 다른 승무원 니노다. 두 사람이 곤돌라의 승무원으로 일하는 한, 이 마주침은 강제된 것이다. 피할 길이 없다. 몇 번의 수줍은 혹은 어색한 교차 이후 두 사람은 이 무료한 반복을 조금씩 다르게 채워나가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체스를 둔다. 체스판은 곤돌라의 위쪽 정류장에 있다. 곤돌라가 한 바퀴 돌아야 이바와 니노가 말을 움직일 수 있으므로, 체스 게임은 한없이 길어진다. 두 사람의 체스를 매개로 연결된 시간도 그만큼 길어진다. 체스를 하며 두 사람은 무료하기만 한 곤돌라에서 다음 수를, 서로의 얼굴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곤돌라의 ‘강제된’ 마주침이 설렘으로 변한다.
곤돌라에는 아이들이 탄다. 농부와 마을 주민이 탄다. 가축과 와인도 실어 나른다. 이 다채로운 승객들은 이바와 니노가 맺은 관계성을 더욱 확장한다. 차가운 기계일 뿐이던 곤돌라가 인간의 온기를 품는다.
이 변화가 싫은 사람도 있다. 곤돌라를 운영하는 남자는 곤돌라의 목적이 변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에게 곤돌라는 이윤을 안겨주는 생산수단이어야만 한다. 돈을 낼 수 없는 사람은 당연히 승차가 거부된다. 사장은 이바와 니노가 곤돌라로 온 마을을 연결하는 게 불만이다. 그래서 체스판을 발로 차버린다. 또 하나의 불만이 있다. 사장은 이바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한다. 그래서 날로 친밀해져가는 두 사람과 마을 사람들이 더 눈꼴사납다. 이바와 니노의 곤돌라는 이윤 축적과 이성애 욕망 충족의 두 영역 모두에서 곤돌라의 ‘소유주’를 배반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바와 니노의 관계는 점점 깊어진다. 온갖 상상력을 발휘해 반복되는 일상에 차이를 기입하고, 서로를 즐겁게 해주기 위한 사소한 행동들에서 깊은 친밀감이 피어난다. 니노가 남몰래 항공사 승무원이 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 위기를 맞기도 한다. 이바가 배신감을 느끼는 이유는 니노의 비밀이 두 사람이 곤돌라에서 차근히 형성한 친밀한 관계의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곤돌라의 반복되는 회전 속에서 만들어온 두 사람의 관계성은 그새 위기를 넘길 만큼 충분히 단단해져 있었다. 서로를 향한 분명한 마음을 확인한 이바와 니노는 사장에게서 곤돌라를 탈취, 전유해 이를 오롯이 두 사람을 위한 것, 나아가 온 마을을 위한 공공재로 바꿀 계획을 꾸민다. 두 사람을 비롯한 온 마을 사람이 함께한 이 작전에서, 마침내 이바와 니노의 친밀성은 결실을 이루고 곤돌라는 자본주의적 용도를 박탈당한 채 공공의 것이 된다. 〈곤돌라〉는 기계의 차가운 속성에 다채로운 정치적 상상력을 곁들인다. 그리하여 의미 없는 반복에 지친 사람들에게 일상의 공허함을 잠시나마 잊게 해줄, 혁명의 따뜻함을 품은 산뜻한 공공재의 우화로 거듭난다. ‘따뜻한 혁명’이라는 형용모순은, 적어도 이 영화에서만큼은 현실성을 잃지 않는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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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극과 안톤쉬거의 동전
예술은 꾸준히 변화해 왔다고 생각한다. 미술, 시, 소설, 건축, 조각 등 옛 과거부터 존재했던 예술들이 꾸준히 발전하고 시대에 맞게 변화하며 현대적인 예술들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가장 복합된 예술은 바로 영화라고 생각한다. 시각적인 미를 부여할 수도, 청각적인 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극문학을 좀더 현실성있게 실감나게 만들 수도 있고, 대사 하나하나만으로도 인간의 감정을 표현 할 수 있다. 가장 복합적으로 감독이 의도함에 따라 많은 것들을 시사하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림, 시, 극문학, 영화 등의 형태는 단지 예술을 표현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수단이 변한다고 해서 시대를 거슬러 일맥상통하는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 속의 '이야기'는 그 예술이 만들어진 시대를 반영하고 그 시대의 흐름을 끌고 간다. 가장 강력한 형태의 이야기는 바로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비극은 대부분의 시대에 존재해 왔다. 위에서 말했듯이 시대를 거슬러 일맥상통하는 가장 강력한 이야기가 비극이라는 뜻이다. 디테일은 조금씩 다를지 몰라도 시대의 아픔과 불안함을 표현하는 방식이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수 많은 비극들이 뛰어난 평가를 받아왔다. 나는 그 중 '멕베스'를 가장 선호한다. 가장 고전적이고 통상적인 요소들을 가지면서도 인간의 심리들을 여러 캐릭터들이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가장 이상적인 비극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현대로 와서 가장 최근의 작품들 중 최고의 비극은 이제부터 이야기 할 코엔형제의 2007년도 작품,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생각보다 단순하다.연쇄살인마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과 우연히 마약상들의 돈가방을 발견한 사냥꾼 르웰린 모스(조쉬 브롤린)의 돈가방을 향한 추격전과 그 흔적을 쫓으며 사건을 조사하는 보안관 에드 톰 벨(토미 리 존스)의 액션 스릴러 및 추격극 정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한 상업적 목적의 추격극이 아니라는 것을 이 영화의 제목에서부터 그리고 영화의 첫 나레이션과 살해 장면에서 주는 압박감에서 부터 느낄 수 있다. 나는 이 영화를 사냥감과 사냥꾼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안톤 쉬거는 동기없는 살인마이다. 그는 소 도축기와 비슷한 작동을 하는 공기총을 들고 자신만의 규칙에 맞춰서 자신의 길 앞에 놓인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해해 나아간다. 그의 사냥감은 무작위로 자신의 앞에 놓이게 되고 그는 '동전 던지기'라는 자신만의 규칙 속에서 하나하나 사냥해 나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안톤 쉬거 본인 또한 자신이 누구를 죽이게 될지 모르는 혼돈 속에서 산다. 반면, 르웰린 모스는 전통적인 사냥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수 많은 무리의 가젤 중 자신이 고른 한 마리만을 선택해서 사냥하고 그 사냥감을 놓쳤을 때도 피의 흔적을 따라서 끝까지 추적한다. 그는 영화의 초반 자신이 쫓던 사냥감을 따라가다가 마약상들의 전투 흔적을 보고 거기서 돈가방을 찾게 된뒤 한순간에 자신이 이제는 사냥감임을 직감했다. 르웰린은 과거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으로서의 경험들을 살려서 자신을 쫓는 누군가에게서 달아나기 위한 움직임들을 보인다. 그는 나름 변칙적이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생각했지만 사실 쉬거에게 항상 추격을 당하고 있었다. 러닝 타임 두시간 동안 별것 없어보이지만 숨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고요한 추격전이 이어지고 우리는 충격적인 결말을 마주하게 된다.이 영화 최고의 장면을 뽑으라고 한다면 누구나 주유소에서의 쉬거와 한 노인의 대화와 동전던지기를 뽑을 것이다. 그 장면은 연출, 촬영 등등 정말 많은 부분에서 완벽하지만 가장 완벽한 부분은 대사라고 볼 수 있다. 단 한장면으로 안톤 쉬거가 어떠한 법칙에 따라서 행동하는 살인마인지를 소개해낸다. 그는 모든 것을 운에 맡긴다. 마치 영화 다크나이트 속의 투페이스가 던지는 동전과도 비슷하다. 운명 그 자체를 동전의 양면에 비유하면서도 전혀 예측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다크나이트 속의 투페이스의 동전등 다른 영화 속 동전던지기에서는 사실 결과를 어느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상황의 맥락을 통해 자신의 무엇이 걸린 동전 던지기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톤 쉬거의 동전은 다르다. 영화를 보는 우리와 쉬거 본인은 무엇이 걸린 동전 던지기인지 알지만, 게임에 참가하는 타인은 그 동전이 무엇때문에 돌고 있는 것인지 자신 인생에 중요한 무엇이 걸린 건지 전혀 알 수 없다. 감독은 이런 무작위성의 동전이야말로 정말 인생과 같다는 것을 말한다. 종종 운명은 무심결에 찾아온다고들 한다. 하지만 자신의 운명이 결정된 순간까지도 우리는 운명이 찾아왔는지 인지 못할 때가 있다. 아마 극중의 주유소 캐셔는 나중에 현상수배전단지에 찍힌 쉬거의 얼굴을 보고 자신이 던진 동전던지기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한 동전 던지기 였으며, 자신은 운명적으로 목숨을 건졌음을 그제서야 깨달을 것이다. 운명은 불규칙적으로 찾아온다. 안톤 쉬거 본인 자체가 동전 던지기와 같은 사람일 수도 있다. 불규칙적으로 행동하고 예측이 불가능한 그렇기에 르웰린, 에드 등 과거의 예측 가능한 범위의 범죄만을 생각하고 그 시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쉬거를 쫓을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는 내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의 의미를 쉽게 알아차리기가 쉽지 많은 않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에서 노인이란 실제로 나이들고 나약한 노인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과거의 영광에만 젖어 시대를 따라오지 못하는 이들을 모두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과거 텍사스의 광활한 벌판을 혼자서도 통제하던 회상에 젖은 보안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첫 살인 장면또한 불규칙적이고 신세대적인 살인 동기를 지닌 쉬거를 자신이 통제 가능하다고 믿은 한 보안관의 죽음이었다. 영화 속에서 수많은 노인들은 나태하고 나약하게 비춰진다. 과거 드넓은 황야에서 말한마리 타고 다니면서 강도 혹은 도둑을 잡던 시대와는 많이 달라졌다. 그 시대에 위대한 보안관들덕에 얻은 평화에 안주한채 늙어버린 노인들은 심지어 현역 보안관인 에드마저도 상황을 쫓으며 사건을 재구성할 수는 있지만 앞서가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며 그저 신세대의 희생양이 될 뿐이었다. 실제 노인이 아니더라도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저격총으로 가젤 사냥을 즐기는 퇴역군인 르웰린 또한 구시대적인 미국의 추종자일 뿐이기에 영화의 끝에 그런 결말을 맞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박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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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구야 공주 이야기
가구야 공주 이야기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만든 애니메이션은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넷플릭스에 올라온 지브리 작품을 보다가 '가구야 공주 이야기'를 발견했다. 언듯 보기에 '이웃의 야마다군'과 비슷한 그림이어서 꽤 오래 전 만든 작품일까, 했지만, 몇 년 전에 만든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일본의 문화와 생활을 잘 드러내고 있어서, 외국사람이 볼 때, 일본에 관한 역사와 전통, 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구야 공주 이야기'의 원전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전래동화, '타케토리 오키나 모노가타리(竹取翁物語解)'다. '대나무를 파는 노인 이야기'인데, 전래동화와 이 작품의 줄거리는 거의 같다. 다만, '가구야 공주 이야기'에서는 '가구야공주'의 탄생과 성장, 생활을 전래동화보다 핍진하게 그리고 있어 관객이 '가구야공주'에게 감정적으로 동화하도록 만드는 과정이 길게 이어진다.
작품의 서사는 매우 불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전래동화가 나타난 시기가 9세기에서 10세기 무렵이라고 하니, 그때는 일본에도 불교가 한창 번지고 있을 때였다. 660년에 백제에서 건너간 불교는 상대적으로 후진 문화였던 일본 사회에 놀라운 사상으로 받아들여졌고, 문화선진국이던 백제에서 왕인이 직접 불교를 전파하니, 일본의 토호, 영주들은 물론 일반 백성들도 불교에 호감을 갖고 받아들였다.
물론 불교가 일본에 들어간 초기에는 일본 황실과 귀족 세력이 반대하고 거부했지만, 이미 일본 민중 사이에서는 불교가 상당한 호감을 갖는 종교였고, 이때 일본의 서쪽 지방을 중심으로 고려 때 일본으로 건너간 고려인들과 이후 백제인들을 중심으로 일본에서 불교는 안정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가구야공주 이야기'가 불교를 바탕으로 한 전래동화라는 건 작품 내용에서도 나타나는데, 가구야공주가 대나무에서 태어나기 전, 전생에서 살았던 곳이 '달'이었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때, 가구야 공주를 맞이하려 달에서 오는 사람을 보면, 선녀와 보살과 함께 부처님이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것은 불교의 '윤회'를 상징하며, 삶과 죽음이 결코 다르지 않고, 인간은 윤회를 거듭한다는 걸 말하고 있다.
대나무를 잘라 도구로 만들어 파는 노인 부부가 있었다. 하루는 노인이 대나무를 자르고 있을 때, 대나무 하나에서 빛이 밝게 비추는 걸 발견하고, 그 나무를 베어보니 대나무 안에서 아주 작은 아이가 나왔다. 이런 탄생 설화는 고대 영웅에게 흔히 있는 장면이다. 알에서 태어난 주몽, 처녀 임신으로 태어난 예수 등이 그런 설화의 주인공이다. 손바닥보다 작은 아이는 금새 쑥쑥 자라서 동네 사람들이 '대나무순'이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아이가 자라는 동안 노인은 대나무숲에서 다시 빛나는 대나무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황금과 비단을 발견한다. 노인은 대나무에서 태어난 아이가 예사롭지 않은 아이라는 걸 깨닫고, 공주처럼 고귀하게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인은 수도-천황이 있는 도시-로 나가 저택을 마련하고 아이를 도시로 데려와 공주처럼 키운다. 그때까지 아이는 산골에서 동네 아이들과 마음껏 뛰놀며 더 없이 즐겁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는데, 도시로 오면서 친구를 모두 잃는다.
노인은 예사롭지 않은 아이를 고귀한 공주처럼 키워 귀족이나 황제에게 시집 보내는 것을 꿈꾸고, '가구야 공주' 또는 '공주(히메)'라고 부르며 극진하게 모신다. 가구야 공주가 성년이 되는 해, 사흘에 걸친 성대한 잔치를 하고, 그 소문을 듣고 양반, 귀족의 자제들이 몰려와 가구야 공주에게 청혼한다.
하지만 가구야 공주는 그들과 결혼하기를 원치 않고, 산골에서 살았던 그 아름다운 추억을 생각하며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는데, 고대광실에서 호의호식하면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며, 스스로 불행해서 더 이상 이런 삶을 살고 싶지 않다고,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간절히 소원을 빌자, 가구야 공주가 전생에 살았던 곳이 '달'이었고, 그곳에서 다시 자기를 데리려 온다는 걸 알게 된다.
가구야 공주는 이승을 떠나기 전, 자기가 어려서 살았던 산골을 두 번 찾아간다. 첫번은 산골 마을이 황폐하게 변해 있었고, 함께 어울려 살던 마을 주민들과 아이들 모두 사라졌다. 대나무가 자라지 않아 물건을 만들 수 없게 되자 다른 지역으로 떠난 것이다. 그리고 다시 8년의 세월이 지나 두번째 찾아간 산골에서 떠났던 마을 주민이 돌아오고 있는 걸 발견한다. 그 사람들 가운데는 도시에서 만났던 사랑했던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이미 결혼해 아이가 있었다.
가구야 공주는 고귀한 신분이어서 구중궁궐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아가지만, 그가 어려서 자란 곳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자연과 함께 살았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가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는 시간 역시 산골에서 동무들과 어울려 자연 속에서 뛰놀던 시기였다. 도시에서 고대광실에 살며, 호의호식하는 삶은 생기가 없는, 몸은 살아 있어도 더 이상 살아 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박제된 삶이라는 걸 가구야 공주는 깨닫고 절망한다.
어느 시기나 가난한 민중은 먹고 살기 위해 떠돌았는데, 이 작품에서도 산골마을에 살던 주민들은 대나무로 물건을 만들지 못하자 먹고 살기 위해 흩어진다. 그렇게 도시로 나와서 도둑질을 하다 잡혀 맞기도 하고, 빌어 먹기도 하면서 삶을 유지하는데, 결국 삶의 터전인 산골마을로 돌아오면서 다시 행복을 찾는다는 결론에 이른다.
가구야 공주는 삶을 옥죄는 도시에서의 삶-정형화되고, 격식에 얽매이며, 통제된 삶-에 질식할 것 같았고, 더 이상 이승에서의 삶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간절히 이승을 떠나겠다고 결심한 원인은, 자신이 귀족 또는 황제에게 팔려간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였다. 귀족이나 황제가 자신을 선택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그들의 얼굴도 본 적이 없지만, 그들이 말한 조건에 따라 혼인을 해야 하며, 황제의 후궁으로 선택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야 하는 비참한 삶이 싫었던 것이다.
가구야 공주는 고대광실에 살면서도 예전 산골에서의 삶을 그리워하며, 궁궐같은 저택의 한쪽에 작은 시골집을 짓고, 밭과 정원을 만들어 산골에서 살던 환경과 비슷하게 생활한다. 그가 이승을 떠나기 전, 고통스러운 기억보다 더 간절했던 것은 산골에서 살았던 행복했던 추억이었다. 그가 지금 살고 있는 땅(지구)으로 내려오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도, 지구에 살던 사람이 간절하게 부르던 노래 때문이었다. 자연 속에 살며 꾸밈없이 소박하고 즐겁게 지내는 것이 곧 행복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으면서, 가구야 공주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만, 이미 결정된 귀환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가구야 공주는 본디 달에 사는 보살(신선)이었으나, 이승의 삶을 동경해 선계(달)에서 쫓겨나 대나무 속에서 아이로 태어난다. 아이 없이 사는 늙은 부부에게 맡겨져 지극정성으로 돌봄을 받으며 자라고,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꾸밈없고, 거칠 것 없이 살아간다. 이것은 '자연'이라는 '신'이 본래는 무소무위, 어디에도 걸리는 것 없는 자연 그 자체라는 걸 말한다. 그러다 인간이 만든 '문명'에 갇히면서 '자연'은 힘을 잃고, 생기를 잃게 된다. 인간의 문명은 도식적, 형식적, 인위적, 이기적, 파괴적 속성을 가졌기에, 자연은 인간의 문명이 두렵고 무섭다.
인간이 만든 문명은 자연(신)을 쫓아내고, 거부하며, 외면한다. 자연(신)은 더 이상 인간과 어울리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자연으로 살고자 하지만, 그마져도 인간이 파괴한다. 결국 자연(신)은 피폐, 황폐하게 변하고, 인간이 살지 않는 먼 곳-달-으로 떠난다. 이 작품은 사람의 관점이 아닌, 가구야 공주 -자연(신)- 의 관점에서 쓰였기에, 인간을 사랑하면서도, 인간의 배신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자연(신)의 입장을 드러낸다.
주인공이 여성이고, 전생에 살던 곳이 '달'이라는 건 이 이야기가 만들어진 시기, 민중의 의식을 반영한다. '여성'은 우주만물을 만든 신이자, 자신-일본 민중-을 만들고 돌보는 어머니 자연의 존재를 '여성'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다. 즉, 자연은 여성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이 바뀌고, 씨 뿌리고, 수확하는 일련의 생산이 땅을 통해 이루어지는 걸 보면서, '생산'을 하는 것은 곧 어머니, 여성이라는 의식과 맞닿게 되기 때문이다.
'달'은 동양에서 신비로운 믿음의 대상이었다. 중동과 서양이 '태양'을 유일신으로 믿었던 것처럼, 동양에서는 '태양'보다는 '달'을 숭배했는데, 그 믿음의 근거에는 '농업'이 자리하고 있다. 농사를 짓는 것은 절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절기를 가장 정확하게 드러내는 것은 '양력'이 아닌 '음력'이라는 걸 이미 이 시대 이전부터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에, '달'이 숭배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달'과 관련한 많은 설화와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따라서, 가구야 공주가 여성으로 이승에 내려와 자연과 함께 어울리다 도시-인간의 문명-에 살지 못하고 다시 원래 살던 곳 - 달 -로 돌아가는 것은 당시 민중의 삶과 생각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설화가 된다. 여기에 불교적 장치 -윤회-가 개입하면서, 가구야 공주는 언제든 다시 이승으로 내려올 수 있다는 희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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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차티드」 플스 게임이 제작비 1,500억의 넷플릭스 영화로?? | 언차티드 예고편 게임 비교 영상 | 언차티드 영화 게임 | Uncharted |
? 언차티드(Uncharted) 영화 예고편 분석 영상(*스포없음)
- 소니 픽처스와 넷플릭스의 계약으로 극장개봉 후, 넷플릭스에서 독점 스트리밍 예정
- 플레이스테이션 프로덕션의 첫 번째 실사영화
- 플레이 스테이션 게임 언차티드 비교
- 플스 게임 언차티드 플레이 영상 비교
- 게임 제작사 너티 독의 게임 언차티드 시리즈의 게임 원작 실사영화로 소니 픽처스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
언차티드 시놉시스
'네이선(톰 홀랜드)'과 '설리(마크 윌버그)'가 함께 트레저헌터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미스터리와 보물을
찾아나서는 액션 어드벤처 블록버스터 영화
언차티드 영화 정보
감독: 루벤 플레셔
제작: 아비 아라드, 찰스 로븐, 알렉스 가트너
각본: 아트 마컴, 맷 할로웨이
출연: 톰 홀랜드, 마크 월버그, 안토니오 반데라스
장르: 액션
제작사: 컬럼비아 픽처스, 플레이스테이션 프로덕션, 너티 독, 아라드 프로덕션, 아틀라스 엔터테인먼트
배급사: 소니 픽처스 릴리징, 소니 픽처스 코리아
촬영 기간: 2020년 3월 16일 ~ 2020년 10월 29일
촬영 감독: 정정훈
개봉일: 미국 2022년 2월 18일
원작: 너티독의 언차티드 시리즈
제작비: 1억 2,000만 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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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빅 피쉬 후기 / 팀 버튼 감독 영화 맞아?! / 이완 맥그리거의 영한 모습을 보고 싶다면.. / 감동 있는 판타지 드라마 / 부자가 같이 보기 좋은 작품
영화직관하는 남자 영직남의 “빅 피쉬”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습니다.#넷플릭스, #왓챠, #팀버튼, #판타지,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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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십개월의 미래> 30초 예고편
만성 숙취를 의심하던 미래는 자신이 임신 10주라는 사실을 알고 당황한다.
아무 예고 없이 찾아온 변수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사이,
가족과 연인, 국가는 각기 다른 방향을 제시하고 미래의 십개월은 빠른 속도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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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고양이들의 아파트> 메인 예고편
서울 동쪽 끝, 거대한 아파트 단지.
그곳은 오래도록 고양이들과 사람들이 함께 마음껏 뛰놀고
사랑과 기쁨을 주었던 모두의 천국이었다.
하지만 재건축을 앞두고 곧 철거될 이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 고양이들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계속 살고 싶냐고"
고양이들과 사람들의 행복한 작별을 위한
아름다운 분투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