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저2023-09-20 13:18:24
다른 모양의 사랑
'아빠와 딸'에 대한 영화
어제는 아빠의 일흔 일곱번째 생일이었다. 지난주말에 부모님을 뵈러 대구에 다녀왔는데…불과 몇달만에 갑자기 기력이 쇠한 느낌이 들어 코 끝이 시큰해졌다. 아빠는 요즘도 새벽 6시에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쓸고, 아빠의 작은 이발소 문을 연다. 성실히 하루 하루를 꾸려 가는 분이고, 늘 일을 하고 있기에 이렇게 갑자기 늙으신 것 같은 얼굴을 마주 하는게 믿기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아빠는 나에게 특별한 분이다. 40년대에 태어나셨는데…요즘 MZ같은 마인드로 80년대생인 나를 키웠다. 내 나이 또래의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감정적인 결핍이 없도록 나를 키웠다. 엄마 뿐 아니라 아빠에게도 충분히 사랑하고, 사랑받는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많은 대화를 나눴고, 나를 믿어주셨다.
경상북도 깊은 시골에서, 자주 술에 취하고 폭력적이었던 할아버지로부터 도망 나와 서울로 간 게 중학교쯤이었다 하니, 아빠의 학력도 아마 그 즈음에서 끝이 났을 것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어른이 되어 자수성가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지금’ 당장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가족을 떠난 사람.“아빠 그렇게 어렸는데…어떻게 혼자 살았어?” 겨우 열몇 살이었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면. 아빠는 “ 뭐어. 잘 먹고 잘 살았어.” 하고 이야기를 끝내버렸다.
아빠는 그랬다. ‘오늘 뭐 하고 놀았니? 무슨 책을 읽었어? 기분은 어때?’ 학교를 다녀와 이발소로 뛰어 들어오는 나에게 백가지 질문을 퍼붓고, 온갖 수다를 받아주고, 장난을 걸고, 대화를 하면서도 ‘아빠가 옛날에는 말이야…’하는 영웅담이라던가, ‘내가 어떻게 너를 키웠는데…’같은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당신의 고단함과 괴로움을 자식이 알아 주지 않아도 상관없이 온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
꽤나 이기적으로 살아온 터라 아이를 낳기 전엔 잘 몰랐다. 나의 마음 보다, 상대방의 마음과 상황을 들여다 보게 되는 일. 내가 아닌 타인에게 마음이 쓰여서 때때로 나의 일상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되는 일도 생긴다는 것을. 그런 일은 거의 대부분 모두 내 배에서 탯줄을 끊고 태어난 아이 때문이었다. 배 속에 품어 낳은 것이 아닌 아이를 사랑하여 모든 것을 내어 주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모든 가정은 다르기에 ‘아빠의 사랑’ 역시 수십만 개의 모양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름답고, 기쁨의 감정이기도 할 것이고, 때로는 애틋하거나, 적당한 무관심을 가지고 있거나, 장난기가 가득할지도 모르겠다.
여자로 태어난 나는 결코 알지 못할 다른 모양의 사랑을 늘 궁금해 왔다. 이런 영화의 좋은 점은 내가 아빠가 될 수 없기에 과한 감정이입을 배제하고 적당한 거리에서 담담하게 지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식의 입장에서, 혹은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서 내내 마음을 아리게 했던 아빠의 영화들 중 많은 영화가 평범하기 보다는 조금 부족한 아빠에서 시작한다. 영화<아이엠 샘>에서 샘은 지적장애로 7살의 지능을 가진 아빠로 나온다. <파더 앤 도터>의 제이크는 아내의 목숨을 앗아간 교통사고 이후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소설가이며, <더 웨일>의 찰리는 아내와 이혼 후 동성연인의 죽음을 겪고 그로 인해 270kg의 거구의 몸집으로 살아가고 있다. <애프터 썬>의 캘럼은 어린 나이에 소피의 아빠가 되었지만 이혼을 했다. 딸과 함께 튀르키예 여행을 떠나왔지만 어딘가 불안하고 슬픈 감정에 쌓여 있는 느낌이 든다.
그러고 보니 언급한 영화들의 자녀는 모두 딸이다. 영화 속 아빠는 경제적으로 부족하거나, 정신적으로 부족하거나, 마음이 아프다. 자신의 이런 결핍과 상황이 딸을 지키는 못하는 일이 될까 두려움을 느끼는 일들이 생긴다. 영화는 아빠의 지능이나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해서 사랑을 줄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아이에게 돈과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한한 사랑이라고. 아빠들은 입양을 보내는 쪽보다 끝까지 딸과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찰리는 죽음이 가까워 왔음을 느끼며, 딸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 캘럼은 위태로운 마음과 어려운 상황에서도 (영화가 딸의 시선이라 짐작만 할 뿐이지만) 딸에게 즐거운 시간이라는 선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피가 물보다 진하기 때문일지…혹은 작고 연약한 존재를 지켜주고 싶은 인간의 본능인지… 잘 모르겠지만 사랑이라는 것은 그 속을 들여다 보면 받는 사람 뿐만 아니라 주는 사람이 더 큰 위로가 되기 마련이다.
이토록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모든 것을 내어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때로 나의 존재의 이유가 되기도 하니까. 아빠는 딸을 살게 하고, 딸은 아빠를 살아가게 하는 이유가 된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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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이 구역 빌런이다.
이 글은 넷플릭스 [지금 우리 학교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좀비물의 특성상 첨부된 사진이 거북할 수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영화에 등장하는 괴생명체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뱀파이어였다.
그들은 영원불멸에 가까운 삶을 피를 통해 연명해야 했지만, 이성을 잃지 않고 인간에 섞여 존재하기를 택했다. 무의미할 정도로 무한정한 시간은 뱀파이어들에게는 부질없는 부를 축적하게 했고, 인간은 둘 중 하나도 얻지 못해 아등바등하는 삶을 가엾게 지켜보는 그들의 눈에는 언제나 가을바람 같은 쓸쓸함이 가득했다. 이 모든 생활이 진절머리 난 뱀파이어들에게 끝을 선사할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자신들을 타들어가게 할 햇빛뿐이었다.
이들이 가진 고고함과 불사의 몸은 영화를 철학적으로도, 때론 스타일 있는 액션물로도 만들 수 있었지만. 영화는 조금 더 원초적이며 복잡하지 않은 크리처를 원했다. 이성이 있는 뱀파이어들은 넘어갈 수 없는 영역에 존재해 제작자들의 도덕적 부담을 조금은 덜어줄 법 한.
그렇게 좀비가 등장했다.
피에 대한 본능과 소리에 대한 감각만 남았을 뿐 그 어떤 생각도, 계획도 세우지 않은 채 앞뒤 재는 것 없이 뜀박질만 할 수 있는 괴력의 존재. 이렇게 단순하고 파괴적인 "좀비"는 생물과 무생물의 특성을 지닌 바이러스 마냥 빠르게 뱀파이어들을 쓰러뜨리고 영화계에서 무자비한 지배종의 자리를 틀어쥐게 되었다.
마치 오랫동안 일본과 중국에 가려져 저평가 받고, 때로는 주류의 문화가 아닌 것처럼 여겨지던 한국 문화가 넷플릭스의 노른자위 땅에 당당히 깃발을 꽂은 것처럼.
[지금 우리 학교는](이하 지우학)은 넷플릭스에서의 지배종 자리를 노리는 한국 콘텐츠의 저력을 시험하는 자리에 다시 한번 올라있다. [지옥], [오징어 게임]에 뒤지지 않는 명성을 이어 구독자들의 목덜미에 치명적인 이빨 자국을 남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인가.
신선함 반 식상함 반;그리고 빌런의 중요성
사진출처:YTN STAR
[지우학]에 나오는 좀비들도 "좀비물"이라 불리는 영화에서 약속한 암묵적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빛에는 그다지 민감하지 않다는 점과 감염이 전파되는 속도가 한국인의 성질머리만큼이나 빠르다는 것이 조금 도드라질 뿐이다.
널리 알려진 좀비의 특성상, 영화의 구성이 새로울 리가 없다. 전반부에 휘몰아치듯 벌어지는 추격전을 빙자한 살육전과 가까스로 살아남은 소수(Minor)의 생존자들이 한자리로 모이는 과정. 본능 외엔 껍데기뿐인 그들의 약점을 이용해 작은 탈출을 감행하는 데서 오는 카타르시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 필수 요소처럼 녹아있는 크고 작은 분열과 드러나는 비열한 인간의 본성들.
이미 한국 영화에서도 다섯 손가락을 넘길 만큼의 좀비물이 존재하고 있는 시점에, [지우학]이 레퍼런스로 참고한 작품은 놀랍게도 좀비물보다는 같은 넷플릭스 식구인 [지옥]이나 [돈 룩업]에 에 가깝다는 지점이 조금은 새롭다.
도륙에 가깝다시피 한 시각적 영화에서 머물기보다 최근의 트렌드인 사회적 풍자와 근원적인 고민에 대한 뉘앙스를 가미하는 것으로 비슷비슷한 좀비 영화"류"에서 벗어나고자 한 셈이다.
하지만 이 [지우학]이 다른 좀비물과 가장 차별화되는 시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요즘 트렌드를 따르지 않은데 있다. 바로 치가 떨리도록 무섭고 집요한 빌런 윤귀남(유인수)의 등장.
여태 봐 온 좀비 영화의 전형적인 빌런은 나연(이유미)에 가까운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가뜩이나 급박한 상황에 짜증을 잔뜩 끌어올려 살아남은 자들의 신경을 있는 대로 긁어대다 잔인하게 죽고 만다. 보는 순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안에서는 일회용품에 지나지 않을법하다는 것을 관객들이 알아채기 쉽지만, 그러려니 하며 용인하고 넘어갈 만큼의 역할. 딱 그만큼에 머무르기 쉽다. 단지 그 악랄함의 차이 정도만 있을 뿐.
그러나 귀남의 경우는 다르다.
좀비의 특성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이성도 잃지 않는다. 또한 시즌제를 관통하게 될지도 모르는 바이러스의 변이나 면역과 관련된 인물이라는 점 또한 이 최종 빌런의 중요도를 높여준다.
시리즈 자체가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우학이 가진 매력을 배가 시키는 데는 귀남이 큰 역할을 하고 있음에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그리고 결국 이것이 시리즈를 살리는데 일조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왜 하필 학교인가?;그리고 왜 학생인가.
사진 출처:서울 경제
영화에는 안정적으로 보이는 공간인 학교 안에 있는 불안정한 존재인 학생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지우학]에서 보여주는 학교는 학생을 전혀 보호해 주지 않는 곳임을 아이러니하게 드러낸다.
단지 좀비의 근원지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학생들을 학교 폭력에서도. 빈부 격차에서 오는 차별에서도, 그 어떤 것에서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
아이들에게는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이, 가장 지옥 같은 곳이 된 것이다. 그것도 매일매일 마주해야만 하는. 그들은 교복이라는 갑옷 단 하나로 스스로를 무장한 채 한숨 한 번 쉬며 교문 문턱을 넘어야만 했다.
작품이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 또한 그들이 학교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 알려준다.
수많은 학생들이 등장하지만. 그 누구도 처음부터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 명찰을 비추는 카메라 앵글로 대체되거나 누구누구의 친구 정도의 언급이나 존재감에 머무른다. 극중 남라(조이현)역시 자신이 맡은 반장이라는 역할에 가려져 이름이 무엇인지 친구들의 입에서조차 몇 번 듣지 못한다.
또한 목숨이 빛의 속도로 왔다 갔다 하는 와중에도 이들은 한때 선생님들이었던 어른들의 호통에 움찔할 수밖에 없다. 단지 자신보다 어린 학생이라는 존재의 정체성 만으로. 그들은 핍박받고 어리다고 무시당해야 한다.
가장 씁쓸한 부분은.
그 아무리 허울뿐인 학교라 해도, 학교의 담벼락을 넘는 순간 보호받아야 할 학생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로 전락해버린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학교 밖으로 나갔을 때의 그들은 이 나라의 희망도 아니요, 보호해야 할 미성년자도 아니다. 그저 나보다 먼저 넘어져 나 대신 좀비의 밥이 될 수도 있는 후보군 들 중 한 명이거나 대충 소리치고 윽박질러 자신이 유리한 대로 이용할 수 있는 대상 중 하나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생존자들은 학교에 갇혀 있는 시간을 필연적으로 갖게 된다. 아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른도 아닌 희한한 존재가 가진 본질적인 두려움 때문에. 영화의 후반부에서 다른 학생들은 사복을 입지만, 남라는 여전히 교복 차림이라는 것에서도 이 차이를 잘 느낄 수 있다.
이 복잡한 존재들이 겪어야만 하는 현실 속에서도, 학생이라는 불완전한 생명체는 웃고 장난을 치며 무려 내일을 기약한다. 이 혼돈 속에서도 간직하고 있는 그들의 변하지 않은 정체성에 괜히 미안하고 고마울 뿐이다.
과연 좀비만이 무서울까.;방관자들이 큰소리치는 현실
영화는 많은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그것도 너무 가깝고 생생한 "지금"이라는 현실을 말이다. 점점 영화와 현실의 구분이 되어가지 않는 지금을 살고 있음이 이 작품을 통해서도 느껴진다.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 헛소리를 침착하고 밝게 내뱉는 안내방송이나, 현재의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데에만 급급한 높으신 분들, 왕따 피해자 학생들에게도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선생님들.
사실 학생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방관자에 가깝고, 이 방관자들의 헛소리 덕에 좀비 사태는 좀 더 빠르고 심각하게 퍼져나간다. 그 와중에 방관자들이 예측한 이 일의 심각성마저도 과소평가된 것이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
마치 좀비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모든 사회적인 문제들이 심각해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는 것만 같다. 좀비는 폭탄으로 끝낼 수 라도 있는 존재였겠지만. 방관자들의 의식 깊숙한 곳에 박혀 있는 이런 태도들은 효성시를 다 날려 버리는 것만으로는 모자랄 것이다.
마치 영화 [돈 룩업]이 보여준 것처럼, 최후의 1인마저 모두 좀비가 되어야만이 가능할지도 모르는 문제일 것이다. 죽은 자와 좀비 모두 그때가 되면 모두 말이 없을 것이기에.
마치면서
사실 [지우학]은 거슬리는 점 또한 꽤나 많은 영화이다.
선정성(을 암시하는 장면의 삽입)이나 폭력성 면에서도 그러하지만 시즌제를 염두에 둔 결말도 아쉽다. 6화를 넘어서면서 급격히 긴장감이 떨어지거나 형사 역을 맡은 이규형 배우의 뜬금없는 인류애도 완벽히 이해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이 [지우학]의 다음 시즌을 기다리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런 단점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장점을 더욱 잘 살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뭐니 뭐니 해도 다시 한번 박사 학위 있는 사람은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작품이었다(?)
[이 글의 TMI]
언제부터인가 식상하고 기본적이며 때론 인사치레처럼 여겨지던 모든 문장들을 달리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안에 있는 진심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건강하라.
돈 아껴 써라.
자기를 먼저 챙겨라.
등등의 말에 무게가 실린다는 말은 그 말들에 대해 생각해 볼 계기가 많이 생기는 삶의 터전 속에서 내가 살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의 나이가 다르고 현재 상황이 다르겠지만. 내가 말하는 이 문장들의 단 하나의 단어 만이라도 그들의 마음에 있는 저울에 좀 더 진중한 무게를 올릴 수 있기를.
2022년 올해는 몸과 마음이 다치지 않는 선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모든 일이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은 더 순조롭게 완료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결과보다는 과정 안에서 더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늘 감사합니다.
#지금우리학교는 #넷플릭스 #지우학 #영화추천 #넷플릭스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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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뷰티풀 데이 인 더 네이버후드(A Beautiful Day in the Neighborhood/2019/미국, 중국)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이미지)<선택의 자유>어렸을 때 AFKN-TV를 통해서였나, 미국에서 잠깐 살 때였나. 영어공부 삼아 프레드 로저스가 진행했던 TV 프로그램, <미스터 로저스의 이웃(Mister Rogers' Neighborhood)>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자극적인 배경 음악이나 음향효과 없이 고요하게 진행되던 차분한 어린이 프로그램이었다.톰 행크스가 연기한 프레드 로저스는 실제로 방송인이자 장로교 목사였다고 한다.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는데 유능한 잡지사 기자 로이드 보걸(매튜 리즈)이 '영웅' 특집 인터뷰 기사를 쓰게 되어 프레드와 만나게 되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로이드는 냉정하고 매운 필치로 명성이 자자한 르포라이터였는데 갑자기 인터뷰 기사를 쓰라는 상관의 지시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아버지 뻘의 프레드와 거듭 만나게 되면서 로이드는 친절하고 자상하며 진심을 담아 커뮤니케이션하는 프레드를 위선자가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로이드 자신은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의절하다시피 한 사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최근에는 그의 누나 결혼식에서 어쩔 수 없이 만났지만 치고받았을 정도로 둘의 사이는 최악이었다. 그런 그에게 프레드라는 인물의 인품은 가식으로 다가왔던 것이다.병석에 누운 어머니와 남매를 버리고 달아났다가 자녀들이 장성한 후에야 나타나 화해를 바라며 접근을 하는 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인물을 만나려니 로이드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프로그램을 함께 제작하는 출연자와 제작진들은 물론 길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에게까지 진심을 다하고 그의 아내에게서도 존경받는 프레드의 여러 모습을 지켜보며 로이드의 얼어붙었던 마음은 점차 녹는다. 그리고 그토록 증오했던 아버지를 용서하게 된다. 결국 프레드의 인품이 '가짜'가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에서 비롯된 '진짜'임을 깨달은 로이드는 상관과 독자의 기억에 남을 '영웅' 특집을 완성한다.만나는 대상마다 한결같이 집중하고 상대방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며 듣고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대답하는 프레드의 모습은 타인의 말을 대충 듣고 설렁설렁 대답하며 섣불리 판단하였던 오랜 직장생활을 반성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바빠도 그리고 아무리 급해도 그렇게 하면 안되는 것이었다.로이드의 부자관계에 대해 묻고 답할 때 집중하던 프레드의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십대 자녀들과 갈등을 겪어 방송을 중단했던 시기도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은 최근까지 그를 아버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했다.분노했을 때 자신과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며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는 오로지 '선택'에 달려있다는 프레드의 말은 짧지만 여운이 긴 대사였다. 그의 인품을 쌓아올린 노력이 얼마나 치열했으며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었다.프레드의 인품에 영향을 받아 로이드의 강퍅했던 마음이 부드러워져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었듯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강한 힘을 지녔다. 비록 요즘 코로나19로 만남이 줄어들어 진심어린 인간관계를 만들 기회도 줄긴 했지만 나 자신을 포함하여 이 영화를 보는 모든 이들이 프레드처럼 아름다운 영향력을 갖게 되기를 소망한다.(©2020.최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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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의 운명성 속에서 흩어지고 제자리를 찾아가는 진심
해당 리뷰는 씨네랩의 초청을 받아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3편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영화 <우연과 상상>은 그 제목에 걸맞게 생각지도 못한 우연에 기대어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우연한 사건’은 영화에서는 물론 실제 삶 속에서도 종종 중요한 구심점이 된다. 다만 이야기 속의 우연은 압축된 시간의 흐름 안에서 필연적인 운명의 속성을 띤다. 대화와 우연을 동력으로 흘러가는 3개의 이야기 속에서 진실 혹은 진심은 흩어지는 듯하나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간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우연과 상상>을 통해 진실과 소통에 대한 낯익은 주제의식을 가볍고 다채롭게 변주한다.
비밀에 부친 진심의 유출
영화 속 인물들이 숨기고자 했던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드러나고 공개된다. 공개되는 대상과 방식은 저마다 다르지만 어떤 이야기에서도 꼭꼭 숨겨진 비밀은 없다.
<제1화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에서 패션 모델인 메이코(후루카와 코토네)는 함께 일하는 츠구미(현리)에게 한 남자와의 이야기를 듣고 기시감을 느낀다. 츠구미와 애무와도 같은 깊은 대화를 나눈 상대는 메이코의 전 남자친구 카즈아키(나카지마 아유무)였다. 메이코가 숨기고자 한 진심은 영화 속 인물이 아닌 관객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나고야 만다.
<제2화 문은 열어둔 채로>. 아이를 낳고 뒤늦게 대학에 입학해 동성 친구가 없는 나오(모리 카츠키)는 사사키(카이 쇼우마)와 비밀리에 섹스파트너 관계를 맺고 있다. 깐깐한 세가와(시부카와 키요히코) 교수 때문에 장래 계획에 차질이 생긴 사사키는 나오에게 세가와 교수를 함정에 빠트리라고 지시한다. 나오는 세가와 교수의 아쿠타가와 수상을 핑계로 교수실로 향한다. 교수실의 문은 열려 있었지만 꽤 선정적인 이들의 대화는 나오의 휴대폰에 고스란히 녹음된다. 이 녹음 파일은 작은 실수로 잘못 전해지고 만다.
<제3화 다시 한 번>은 20년 동안 전하지 못했던 진심에 관한 이야기다. 20년 만에 동창회에 나간 나츠코(우라베 후사코)는 도쿄로 돌아가려는 찰나 보고 싶었던 사람을 우연히 만난다. 하지만 20년 동안 전하지 못했던 감정과 진심 어린 말은 당사자에게 도달하지 못한다.
여기저기로 흩어져 버리는 진심들을 보고 있자면 안타깝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이미 <해피 아워>(2015)와 <드라이브 마이 카>(2021)를 통해 진실한 소통의 어려움을 이야기한 바 있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지만, 이번 영화 <우연과 상상>은 소통과 이해의 주체가 사람이 아닌 진실 혹은 진심 그 자체인 듯하다. 세상에 비밀이 있을 수 있을까. 진심을 숨길 수 있을까. 비밀에 부치고 싶었으나 본의 아니게 드러나게 되는 진실 혹은 진심들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우연과 상상을 통해 진심들은 그들이 가야 할 곳을 향해 움직인다.
우연의 운명적 속성
앞서 말했듯이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이번에도 인물들 간의 대화를 통해 극을 이끌어 간다. 메이코와 츠구미는 택시 뒷좌석에서 바에서 나눈 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교수실에서 나오와 세가와 교수는 소설에 대한 대화를 한다. 나츠코는 친구와 손을 마주 잡고 대화한다. 두 인물 간의 대화에 정신없이 빠져들다 보면 사건은 어느새 일단락 된다. 세가와 교수는 자신의 소설에 대해 설명하며 이렇게 말한다. “말이 그것을 원했”다고. 말이 말을, 글이 글을 불러오는 말과 글의 영화다. <우연과 상상> 속에서 말은 그 자체로 힘을 갖고 있다는 듯이 움직인다. 말과 글로써 퍼지고 흩어지는 비밀들로 우연은 예정된 예언처럼 한발 앞서 이들을 기다린다. 그리하여 관객은 우연의 몇 발자국 앞에서 이를 예감하게 된다.
각 이야기의 인물들은 자신이 바라던 것과는 사뭇 다른 결말을 맞이한다. 기대했던 상상은 수많은 우연으로 인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메이코는 말한다.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을 믿어볼 생각 있”느냐고. 그건 본인조차 종잡을 수 없는 메이코 자신의 마음이기도 하고, 우리 앞에 펼쳐진 우연이기도 하다. 우연은 그렇게 운명처럼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우연이라기보다 운명에 가까운 관계들이 나오지만, 영화 속 인물들은 이를 우연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눈앞의 우연을 운명이라고 명명하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관객처럼 제3의 눈으로 보아야 마침내 그것이 운명이었음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영화를 보는 이들은 말 그대로 전지적 시점으로 우연이라는 것의 움직임을 가늠할 수 있게 된다.
영화 속에서 진심과 진실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기록된다. 기록은 인간이 순간을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메이코는 자신의 마음을 사진을 찍음으로써 기록한다. 나오는 녹음으로 둘의 대화를 기록한다. 아야와 나츠키는 일종의 역할극을 통해 기억에 각인한다. 어찌 되었든 진심을 담을 곳을 찾아 남기는 것, 그것이 기록이다. 기록은 순간을 포착하고 남김으로써 물질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사람의 마음에 남는다.
세번째 이야기 <다시 한 번>은 ‘제론’이라는 소프트웨어 바이러스에 의해 인터넷상의 모든 정보가 유출된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이 이야기 속 두 사람은 역할극을 통해 기억을 새롭게 재현한다.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추억을 새롭게 기록하는 것이다. 두 사람의 기록은 앞선 기록과는 사뭇 다르다. 모든 것이 아날로그 시절로 회귀한 시대에서 두 사람은 진심이라는 정보를 서로에게 공개해 버린다. 물질의 힘을 빌리지 않고 서로의 마음에 기록한 진실은 마침내 마음의 깊은 구멍을 메우게 된다. 우연에게 길을 내어주고 진심을 막지 않고 손을 맞잡음으로써 끝내 자유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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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비 체험으로 태어난 다중인격 히어로의 의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런던 대영 박물관의 이집트관 기프트샵에서 일하는 온순한 성격의 직원 '스티븐 그랜트(오스카 아이작)'. 이집트학과 고대 이집트의 신전, 그리고 신들에 대해 공부했지만 끝내 박물관 도슨트가 되지 못한 그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스티븐은 갑작스럽게 고대 이집트의 달의 신 ‘콘슈(F. 머레이 에이브러햄)’를 만나고, 그로부터 또 다른 자아이자 콘슈의 명령을 따라 그의 아바타인 ‘문나이트’로 활동해 온 '마크 스펙터'의 존재를 깨닫는다. 자신에게 해리성 정체감 장애가 있으며 마크와 몸을 공유하고 있음을 깨달은 스티븐은 마크의 아내인 '라일라(메이 칼라마위)'의 등장과 함께 죽음의 신 '암미트'의 힘을 빌리려는 빌런 '아서 해로우(에단 호크)'를 막기 위해 이집트로 향한다. 그렇게 마크와 스티븐은 자신의 복잡한 정체성 문제를 풀어감과 동시에 강력한 이집트 신들의 미스터리를 파헤칠 여정에 나선다.
등장한 히어로만 30명을 훌쩍 넘긴 가운데, 디즈니+를 통해 공개된 MCU의 새 히어로 '문나이트'가 유달리 큰 관심을 모을 수 있었던 데에는 그가 다름 아닌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지닌 히어로라는 이유가 커 보인다. 이는 다중인격 연기를 선보인 오스카 아이작의 퍼포먼스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유이기도 하다. 영국식 억양과 미국식 억양을 자유로이 오갈 뿐만 아니라 불과 몇 초 사이에 전혀 다른 과거를 지닌 두 인격을 오가는 그의 연기는 극의 흡입력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오스카 아이작 연기보다도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작품이 스티븐과 마크의 자아 분열을 다루는 방식이다. 그들의 해리성 정체감 장애는 극적 긴장감을 조성하는 핵심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스티븐의 관점에서 진행되는 초중반부 에피소드에서의 팽팽한 긴장감과 급박한 템포 덕분에 마크의 시점으로 전환되어 스티븐이라는 인격이 탄생하게 된 계기를 설명하는 후반부 반전과 그 임팩트가 극대화되는 것이 대표적이다. 콘슈를 만나는 이 모든 이야기가 진실인지 아니면 그저 마크/스티븐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인지를 두고 극 중 등장인물들과 시청자들을 모두 안갯속에 던져 놓는 구성 역시 극에 집중하게 만드는 용도로는 일품이다. 하얀 정신병원 시퀀스처럼.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마크와 스티븐의 서사에 이집트 신화의 요소가 더해졌다는 점이다. 사실 서로 다른 두 인격의 화해를 통해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하나 된 자아로 성장하는 이야기는 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어떤 MCU 작품보다도 종교와 신화의 분위기가 짙은 덕분에 <문나이트>는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되는 개성을 뽐내고 있다. 단순히 이집트 신화의 신들이 등장하고, 피라미드와 왕가의 계곡 등이 배경으로 등장하기 때문은 아니다. <문나이트>는 모든 종교적 체험의 근원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신비 체험'과 마크와 스티븐의 이야기를 연결 짓고 있으며, 이때 이집트 신화는 가장 오래된 종교적 내러티브로서 모든 신비 체험을 상징하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종교학자인 윌리엄 제임스에 따르면 인간 의식은 고정불변의 단일체가 아닌 다양한 상태들로 구성된 일련의 ‘흐름’이다. 이때 평상시의 자아가 아닌 변형된 의식 상태에서 인간은 존재의 궁극적 원인, 궁극적 실재, 자신의 참된 본성 등을 체득하는 '신비 체험'을 할 수 있다. 갑작스럽게 신과 같은 존재를 만나거나 그와 하나 되는 경험을 통해 이전까지 알 수 없었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관상 기도, 만트라와 같은 진언 수행 등의 수행법은 자아의 경계를 무너뜨려 또 다른 의식 상태를 경험하게 한다. 또 신비 체험으로부터 체험적 앎과 지상적 삶을 연결시키고, 보이는 차원과 보이지 않는 차원의 관계를 깨달을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마크와 스티븐의 경험은 그 자체로 신비 체험이자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의 종교와 신에 대해 끊임없이 공부하는 스티븐의 인격은 수행의 측면을, 콘슈와 직접 만나고 계약을 맺은 후 콘슈의 힘과 갑옷을 얻어 그의 아바타가 된 마크의 인격은 체험의 측면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마크가 입는 슈트와 스티븐이 입는 슈트가 각기 다른 모습을 지니는 이유다. 특히 스티븐의 풍부한 지식 덕분에 암미트의 무덤을 찾을 수 있고, 콘슈와 하나 되어 수천 년 전의 밤의 모습으로 하늘을 되돌리는 장면은 마크와 스티븐이 콘슈와 한 몸이 되는 신비 체험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마크와 스티븐이 콘슈가 말하는 정의에 동의하여 암미트의 정의를 실천하려는 아서 해로우와 대립하는 것은 신비 체험으로 말미암은 사상적, 이론적 측면을 보여준다. 심판과 죽음의 신인 암미트의 저울을 이용해 세상에서 정의를 이루겠다는 아서 해로우는 사람들의 운명이 이미 결정되어 있으므로, 모든 악인과 악인이 될 가능성을 지닌 이들을 제거하여 세상에 균형을 가져와야 한다고 믿는다. 반면에 콘슈와 스티븐 그랜트, 마크 스펙터는 모든 사람에게는 미래에 어떤 선택을 내리고 행위를 할지 결정할 자유가 남아있기에, 오직 악행을 저지른 이들에 한해서만 단죄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들의 차이는 "콘슈가 복수의 주먹으로 벌할 때, 사람들은 이미 다친 뒤야. 암미트님은 이걸 너무 잘 알고, 나쁜 행동을 하기 전에 심판을 내려. 악의 근본부터 잘라내시지"라는 해로우의 대사에 집약되어 있다.
또한 마지막 에피소드의 클라이맥스도 문나이트와 아서 해로우의 대결이 단지 히어로 대 빌런의 가치관 대립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신과의 경험으로부터 말미암은 전쟁임을 환기시킨다. 문나이트는 카이로 시민들의 영혼을 일괄적으로 심판하여 암미트의 힘을 강화하려는 해로우 앞을 막아서는데, 이때 이들 뒤에서는 거대해진 콘슈와 암미트 역시 치열하게 싸움을 펼치기 때문이다. 이 혈투의 끝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암미트가 깨어날 기회조차 다시 주면 안 된다며 해로우를 단죄하라는 콘슈의 명령을 스티븐과 마크는 거부한다. 그들은 사람들의 미래를 단정 짓지 않고 그들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악인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상을 스스로 파괴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본인들도 콘슈로부터 자유의 몸이 된다. 즉, 콘슈와의 만남을 통해 신의 이상을 현실에서 실천하고, 스스로도 한 단계 성숙해진 인격으로 거듭난다.
이때 마크와 스티븐이 콘슈와 하나 될 뿐만 아니라 현실 너머에 실재하는 저승이라는 초월적 세계를 체험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어릴 적 동생을 잃은 비극에 아파하고, 그로 인해 어머니에게 학대당한 마크. 그는 즐겨 보던 모험 영화의 주인공인 스티븐이라는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 스스로를 보호해 왔다. 그러나 현재의 세계가 아닌 오시리스의 저승을 마주하며 마크와 스티븐은 마침내 서로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고, 두 인격이 몇십 년 간 이어온 갈등을 끝낸다. 그렇게 그들은 신을 매개로 한, 죽음과도 같은 신비적 체험 안에서 하나 된 존재로 거듭나며 자유로이 두 인격을 오가며 히어로의 역할을 완수한다. 이는 가톨릭의 성녀인 '아빌라의 데레사'가 저서인 <내면의 성>에서 "신의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가느라 영혼은 육체를 떠난 듯한 감미로운 죽음"을 겪었고, 신과 하나 되는 체험 이후 "모든 일에 있어 스스로 나아가는 것을 느꼈고, 아무리 일을 많이 하고 고생을 하더라도" 영혼의 본질이 분열되는 일이 없었다고 고백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나이트>에서 엿보이는 신비 체험과 종교적 맥락은 단지 종교적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인격을 오가며, 인격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경험하는 스티븐과 마크의 모습은 현대 사회의 구성원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그 정도만 상이할 뿐, 여러 개의 자아가 내재해 있는 ‘멀티 페르소나(Multi Persona)’ 현상을 공통적으로 겪는다. 고대 그리스 가면극에서 배우들이 착용한 가면인 페르소나는 사회가 요구한 도덕, 질서, 의무를 따르기 위해 타인에게 보일 이미지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마치 본캐 대신 부캐로 살아가는 것과 같다고 볼 수도 있다. 반대로 보면 페르소나는 자신의 본성을 숨기거나 억압하는 기제로, 곧 정신분열의 한 양상을 야기할 수도 있다. 본캐인 마크가 엄마로 대변되는 사회적 질서와 억압으로부터 틈을 내서 부캐인 스티븐을 통해 트라우마와 스트레스를 풀고자 하지만, 그 결과 마크는 자신의 정체성 자체를 잃을 위기에 처하는 것처럼. 그는 자신의 삶의 목표와 육체를 스티븐에게 빼앗기고, 거울 속에 갇혀서 진정한 자신의 인생이 아닌 삶을 구경하는 처지가 된다.
‘도구적 이성’과 근대 합리주의에 힘입은 물질적 풍요를 향유하면서도 그 피로감에 괴로워하는 현대인들도 마찬가지다. 문수영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빠른 변화 속에서 표면적 자아를 가지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사잇 사람'"이고, 이들은 본질적인 '나'와는 다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수많은 자아를 가진 것과 같이 분열된 삶을 산다. 따라서 현대인의 정신분열적 측면에 대한 경각심과 그로 인한 문제 및 해결책도 제시하는 마크와 스티븐의 서사는 신화와 종교의 내러티브를 빌렸을 뿐, 그 본질은 지극히 현대적인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겪은 콘슈와의 합일 경험, 그리고 저승과 이승을 오가는 경험은 통합되어 성숙해진 자아로의 성장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도구일 따름이다. 콘슈라는 신과의 만남 역시 분열된 인격 간의 인식과 소통을 가능케 한 계기일 뿐이다. 그보다 마크와 스티븐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종교적 방식이든 아니든 분열된 자아를 통합해야만 온전히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특히 쿠키영상에 드러난 세 번째 인격인 '제이크'의 존재가 미리 암시하는 장면이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나이트>의 액션 시퀀스에서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카메라 워킹과 순간적으로 단절되는 장면 전환 이후 마크와 스티븐이 모두 의식을 잃은 사이 유혈이 낭자해진 싸움의 현장을 비추는 장면을 접할 수 있다. 이처럼 마크, 스티븐, 제이크 사이의 남은 이야기를 암시하는 편집과 연출, 그리고 쿠키영상의 조합은 분열된 인격의 위험성을 드러내기에 매우 효과적이며, 시청자들에게도 서로 다른 인격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과제의 중요성을 귀띔해주는 듯 보인다.
이처럼 <문나이트>의 주제의식과 메시지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의의를 갖고 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액션이라는 영역에 한해서는 <팔콘과 윈터솔져> 혹은 <호크아이>와 같은 MCU 드라마들처럼 낮은 퀄리티를 보이기 때문이다. 거대해진 몸집으로 콘슈와 암미트가 육박전을 펼치고 있는데, 마치 옛날 괴수물을 보는 것처럼 지나치게 느리고 단순한 주먹싸움 식으로 연출되어 박진감이 부족한 게 대표적이다. 다양한 능력을 구사하는 문나이트, 라일라, 그리고 해로우 간의 액션씬과 교차되기에 더욱 그러하다. 다만 이 아쉬움이 매번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연출, 예측 불가능한 스토리, 다른 작품들과의 적은 연계로 인한 낮은 진입장벽이라는 장점보다 크지는 않다. 그래서 단독 드라마로 <문나이트>의 완결성에는 호평이 아깝지 않다.
<이터널스> 개봉 당시 케빈 파이기는 MCU를 현대의 그리스 로마 신화로 만들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물론 그 포부는 진정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를 대신하겠다는 말이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수천 년간 수많은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던 것처럼 마블 역시 오랜 기간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살아 숨 쉬는 고전이 되어 길고 큰 문화적 영향력을 끼치고 싶다는 의미가 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문나이트>의 등장은 케빈 파이기의 포부에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간 MCU에는 다양한 영웅들이 있었다. 사익만 쫓았던 방탕한 인물은 대의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고(아이언맨), 국가의 도구에 불과했던 이는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찾아갔으며(캡틴 아메리카), 타고난 신분과 운명의 무게에 짓눌리던 이(토르)는 개인의 자유로운 삶을 찾아 우주를 여행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마냥 비장하거나 엄숙하지만은 않은 영웅상은 알렉산더 대왕이 트로이의 성문 앞에 선 아킬레우스를 동경했듯이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제각기 삶의 롤모델이 될 수 있다. 마크와 스티븐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성장 이야기는 분열된 자아 때문에 괴로워하는 현대인들에게 희망이 있음을 말해준다. 그렇게 <문나이트>는 수많은 히어로들의 활약상으로 가득 채워진 마블 스튜디오의 로고, 곧 현대의 판테온에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문명, 종교, 신화의 시작점에서 과거의 활기와 신선함을 보여주는 데 성공한 마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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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산이란 무엇인가
임신과 출산은 인간에게 엄청난 사건이다. 생명으로 태어나 삶을 누리다가 나와 비슷한 생명을 낳고 주검으로 돌아가는 것, 그게 삶의 순환이다. 우리의 몸은 생명을 낳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인간은 임신과 출산을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동물이다.
임신과 출산은 세포의 관점에서도 엄청난 사건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터지는 우주적 재난을 이겨내고, 끝없는 시련을 거쳐 다세포생물인 하나의 아기로 탄생한다. 우리는 임신과 출산을 인간의 입장으로만 바라보았지, 세포 입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생각해보진 않았다. 이전에 <마이키 이야기>와 같은 영화에서 정자를 의인화해서 표현한 적이 있으나, 그것은 완전히 나이브하게 연출되어 있다.
그렇다면 실제 세포의 관점에서는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이 벌어질까? 영화 <그래비티(Gravity, 2013)>는 임신과 출산을 세포의 관점에서 경험할 수 있는 재난 영화다. 그리고 한 인간이 고통을 이겨내고 성장하는 과정을 임신과 출산으로 비유해, 단순하지만 절대 단순하지 않은 영화를 만들어냈다.
안락한 세계로부터 이탈 - 사정
영화 <그래비티>는 허블 우주 망원경이 돌고 있는 궤도인 지상 600km의 고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리고 있다. 지구의 대기권은 대략 100km 정도로, 600km까지 올라가게 되면 거의 공기가 없다. 인간은 지구의 표면에서 살기에 적합하도록 진화했다. 따라서, 공기나 산소가 없는 곳에서는 살 수가 없다. 인간이 지표를 떠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임무전문가 라이언 스톤(산드라 블록)은 허블 망원경을 수리하러 허블 망원경 궤도에 우주왕복선을 타고 올라왔다. 임무 사령관인 우주비행사 맷 코왈스키(조지 클루니)는 수리하는 라이언 스톤 옆에서, 괜히 우주 유영시간 기록을 늘리고 있다가 전문 우주비행사가 아닌 그녀를 옆에서 도와준다. 그러다 갑자기 사고가 터진다. 러시아가 자국 인공위성을 미사일로 폭파시킨 잔해-데브리스들이 연쇄반응(케슬러 신드롬)을 일으켜 라이언 박사와 코왈스키 일행을 덮친다. 재미있게도, 이 사건들은 인간이 사정하는 과정을 정자의 입장에서 보는 것과 아주 유사하다.
그럼 정자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정자는 고환에 있는 세정관에서 만들어진다. 세정관 속에 정원세포가 있고, 이것이 제1정모세포, 제2정모세포, 정세포를 거쳐 정자로 성숙한다. 이렇게 몸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하나의 정자가 만들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74일이다. 영화 시작 때 코왈스키는 이번 임무가 기분이 좋지 않다며 자신의 아내가 바람피우던 이야기를 하는데, 결국 74년형(!) GTO를 몰고 떠나 버렸다고 한다. 이 밖에도 코왈스키는 계속해서 성과 관련된 잡담을 계속한다.
사정한다는 행위는 인간에겐 쾌락일지 몰라도, 정낭에 잘 있던 정자의 입장에서는 난데없이 벌어지는 우주적 재난이다. 정자는 사정하지 않고 몸속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부고환에서 흡수해 사라진다. 그러나 몸 밖으로 배출되면 급격하게 수명이 줄어든다. 특히 혐기성 세포인 정자는, 인간이 산소가 없으면 죽는 것과 반대로 산소와 닿는 것이 치명적이다. 질 안으로 배출되면 정액과 질액이 있으므로 3일 정도는 생존할 수 있지만, 몸 밖으로 사정해 공기에 노출되면 1시간 안에 죽는다. 마치 <그래비티>에서 공기가 없는 광활한 우주로 조난당하는 라이언 스톤과 정반대지만 같은 이야기다. 자신이 태어난 세계로부터 타의에 의해 이탈하는 것이다. 정자의 안락한 세계는 부서지고 외계로 던져진다. 그것이 사정이다.
이제 라이언 스톤과 코왈스키는 지구와의 교신이 완벽하게 끊어졌다. 몸 밖으로 배출된 정자도, 자신을 만든 몸과 교신을 할 수 없다.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 라이언 스톤과 코왈스키는 하얀 우주복에 긴 끈으로 연결된 모습을 하고,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우주정거장을 찾아간다. 정자 역시 긴 꼬리를 가지고 헤엄치며, 자신들이 살기 위해 난자를 찾아간다. 그곳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다.
[아래부터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주 속 새로운 보금자리 - 수정
라이언 스톤이 우주정거장에 있는 소유즈 호에 들어가기까지 다른 우주비행사들의 희생이 있었다. 사고 당시 희생된 우주왕복선의 승무원들부터, 그를 우주정거장까지 데려다준 코왈스키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왈스키는 전문 우주비행사답게, 전혀 멘탈이 흔들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생존을 계산해 라이언 스톤을 살린다. 우주정거장에 겨우겨우 도착한 라이언 스톤은, 에어락에서 자신의 우주복을 벗어던지고 에어락에서 웅크린 채로 공기의 안락함을 잠시 느낀다. 이 일련의 과정들은 마치 수많은 정자들이 죽음의 어려움을 이기고 난자에 도착해, 자신의 꼬리를 자르고 단 하나의 정자만 난자 속에 들어가 수정하는 것과 같다.
예전에는 정자가 활동성을 가졌기에 수정되기 전 인간을 정자에 비유하는 컨텐츠가 많았지만, 사실 정자에 비해 난자가 훨씬 크고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세포다. 그리고 난자가 꼬리가 없다 하여 수동적으로 차례차례 하나씩 나온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난자 역시 수많은 난포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 끝에 최종 성숙한 난자가 배출된다. 가장 먼저 성숙한 난자는 다른 난자가 성숙하지 못하도록, 난포자극 호르몬을 억제해 다른 난포들의 성숙을 방해한다. 난자는 인간의 세포 중 가장 큰 세포이며, 정자는 인간의 세포 중 가장 작은 세포다. 참고로, 알도 난자이므로 알은 하나의 세포다.
원래 <그라비티>의 재난 상황에서는 라이언 스톤보다 코왈스키가 생존할 가능성이 더 컸다. 우주유영을 할 수 있는 장치를 가지고 있고, 무중력 상황에 훈련되어 있고 아주 익숙했기 때문이다. 자신도 자신이 당연히 살 줄 알았기에, 라이언 스톤을 구할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고, 우주정거장에 도착했을 때 겨우 매달리게 된 끈이 버티기엔 둘의 합쳐진 운동에너지가 너무 컸다. 코왈스키는 그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했고, 질량을 줄여 운동에너지를 줄임으로써 라이언스톤을 살렸다. 이 과정에서 훈련받은 우주인인 코왈스키의 냉정하고 합리적이며, 평온하게 결정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보통의 우주영화에서는 이런 장면에서 눈물 콧물을 흘리며 훈련받은 대원 답지 않게 감성적이 되어버린다. 특히 작품성이 낮은 SF에서 이런 장면에 '신파극'을 넣어 관객의 감성을 자극하려는 연출이 자주 나온다. 그러나 그런 영화는 이미 시대가 지났고, 실제 우주인들도 그렇지 않다. 굉장히 담담하고 냉철하다. 아폴로 13호와 지상 나사 기지의 통신 "휴스턴, 문제가 생겼어(Houston, we have a problem)"은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사고에도, 얼마나 우주인들이 냉정하게 기지와 교신하는지 보여주는 예시다. 코왈스키는 그처럼 농담을 섞어가며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맞이한다. 오히려 그래비티는 우주인의 감정을 극도로 절제해, 주인공 라이언 스톤과 관객의 감정을 더 극대화시켰다.
하나의 생명이 만들어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필요한가. 마치 라이언 스톤이 우주정거장 에어락에 안착하기까지 코왈스키의 희생이 필요했던 것처럼. 정자 하나가 난자와 수정하기 위해, 수억의 정자들이 동시에 출발해 죽음을 쌓아간다. 정자의 죽음이 많아야 수정이 되는 이유는, 먼저 도착한 정자들이 효소를 방출해 난자의 방어막인 난구세포를 없애고 죽기 때문이다. 생명은 수많은 죽음 위에 만들어진다.
외계로부터의 교신 - 태교
라이언 스톤은 우주정거장 ISS로 피했지만, 우주정거장에선 화재와 폭발이 일어나 급하게 소유즈 호를 타고 탈출한다. 그러나 소유즈호는 펴진 낙하산에 걸려 표류하고, 지구를 한 바퀴 돌고 다시 날아온 파편들에 의해 우주정거장은 산산이 부서진다. 그 탈출과정에서 소유즈호는 몇 안 남은 연료마저 다 써버렸다. 그리고 라이언 스톤은 절망한다. 라이언 스톤은 중국의 우주정거장인 톈궁과 AM주파수를 통해 교신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 교신은 톈궁이 아니라, 지상에 있는 영어를 못하는 남자 '아닌강'이 받게 되고 둘은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 각자의 이야기만 하게 된다. 그리고 그 후, 라이언 스톤은 우주 멀리 사라진 코왈스키의 환영을 보게 된다.
라이언 스톤이 외부세계(아닌강, 코왈스키)와의 대화로 인해 마음의 안정을 찾거나 살 길을 찾는 모습은, 마치 태아가 자궁 외부에서 오는 소리나 산모의 영양과 호르몬에 영향을 받아 자라나는 '태교' 유사하다. 정자와 난자가 수정하게 되어 수정란이 되고, 태아가 되면 산모와 분리된 생명체가 된다. 산모와 태아는 태반을 통해 임시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그 속에 태아는 양막에 둘러싸인 채 양수 속에서 몇 개월의 삶을 살아간다. 태아는 엄마나 외부의 세계나 외부의 존재를 알 수 없다.
태아가 16주부터 외부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태교열풍이 불기도 했지만, 사실 태교가 얼마나 태아에게 영향을 끼치는지는 아직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다. 태교가 실제로 태아를 교육하는 효과가 있거나 성장하는데 직접적인 형향을 준다기보다는, '태아를 잘 키우고 있다'는 마음을 주게 해 산모를 안정시키는 데 더 효과가 있다고 보인다. 어떤 것에서 안정을 느끼는지는 평소 산모의 생활에 따라 다르므로, 사람마다 태교의 방법도 달라진다. 꼭 남들이 하는 것처럼 모차르트 음악을 듣거나, 교육적인 동화책을 읽거나 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양수 속에 있는 태아는 <그래비티>에 라이언 스톤처럼, 우주공간에 있는 우주인과도 같다. 온 우주에 자신만이 고독하게 있고, 외부의 소리는 이해하기 힘든 소리들로 들린다. 외부의 사람들은 태아가 자신의 말소리를 알아듣는다며 좋아하고 불러보곤 하지만, 태아는 라이언 스톤이 아닌강의 말을 듣는 것처럼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안정감 정도를 느낄지도 모른다.
<그래비티>에 나온 아닌강의 교신내용은, 감독 알폰소 쿠아론의 아들이자 <그래비티>의 공동 각본가이기도 한 조나스 쿠아론이 만든 단편 <ANINGAAQ>에 잘 나와있다. <ANINGAAQ>은 라이언 스톤이 듣던 목소리가 어떤 상황에서 나온 것인지, 그때 들리던 개 소리는 어떤 거였는지 알게 해 준다. 이 역시 생과 사에 대한 여운을 남기는 단편영화이다.
중력의 세계로 - 출산
코왈스키의 말을 듣고 각성한 라이언 스톤은 지금까지와는 달라진다. 두려워하고 포기하고 싶어 하는 상처 입은 인간에서, 냉정하고 용기 있게 살려는 의지를 불태우는 인간으로 바뀌었다. 살려고 하는 그녀의 몸부림엔 거칠 것이 없다. 라이언 스톤은 소유즈호의 착륙장치를 발사시켜 중국의 우주정거장인 톈궁으로 다가가고, 소화기를 써서 톈궁의 가까이로 간다. 톈궁도 이미 데브리스에게 많은 손상을 입어, 속력이 떨어져 대기권으로 진입하는 중이었다. 라이언 스톤은 전혀 개의치 않고 톈궁으로 들어간다.
라이언 스톤은 ISS와 동일한 역할을 하는, 톈궁에 도킹하고 지상으로 내려갈 수 있는 우주선인 중국의 선저우호를 찾는다. 영화 상에서 선저우호와 소유즈호는 같은 모델로 만들어졌다고 나오지만, 모두 중국어로 쓰여있어 쉽지 않다. 점점 톈궁은 지상으로 떨어진다. 지구의 중력 때문이다. 우주의 궤도를 안정적으로 돌던 우주선은 대기권과의 마찰로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고 망가진다. 우주에서 라이언 스톤과 같은 우주인을 자궁 속 태아처럼 감싸고 지켜주던 우주 정거장과 우주선은, 이제 분해되기 시작한다. 중력이 없던 세계에서 중력의 세계로, 생명이 없던 공간에서 생명의 세계로. 출산이 시작된 것이다.
출산은 더 큰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내 안락한 세계를 파괴하는 과정이다. 출산을 하지 못한다면 태아는 산모의 영양분을 계속해서 빨아먹고 사는 기생생물일 뿐이다. 태아를 감싸고 있는 양막은 일종의 알껍질이다. 이 알껍질을 깨지 못한다면 산모도 태아도 죽을 수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누구든지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로 유명한 소설 데미안의 한 구절처럼.
라이언 스톤은 딸이 사고로 죽은 것을 계속 자책하며, 그 고통 속에 자신을 가둬버렸다. 상처받은 인간이 고통과 우울 속에 자신을 가두는 것은, 그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안락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죄책감으로 감싸고, 그 안에 숨어버린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주에 홀로 떨어져 나와 고립되었던 라이언 스톤처럼, 세상과 단절된다. 상처를 외면하면 치유되지 않는다. 상처는 들여다보고, 벌리고, 약을 발라야 치료된다. 라이언 스톤은 이도저도 아니고, 하염없이 드라이브를 하며 그냥 되는대로 살아갈 뿐이었다. 그때 코왈스키의 환영이 한 말은 라이언 스톤이 고통으로 자신을 감싼 세계를 깨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당신의 선택이야.
계속 가기로 했으면 그 결심을 따라야지.
편하게 앉아서 드라이브를 즐겨.
두 발로 딱 버티고 제대로 살아가는 거야.
집에 갈 시간이야."
편하게 있을 수도 있다. 세상을 외면하고 혼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죽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살아야 한다. 집에 갈 시간이다. 딸의 죽음을 보내 줄 시간이다. 그리고 살기로 마음먹었으면, 제대로 살아야 한다. 그렇게 라이언 스톤은 죽은 사람들을 뒤로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로 결심한다. 딸의 죽음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고통 속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깨고 나오기로 한다.
톈궁은 대기권 진입으로 모든 것이 불에 타며 녹아내린다. 라이언 스톤이 알던 세계는 장엄한 음악과 함께 산산이 부서진다. 그것은 바로 숭고한 출산의 광경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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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의 세계인 지구로 떨어진 라이언 스톤은 마치 양막을 찢고 나오듯 선저우 호의 문을 열고, 양수 가득한 우주선에서 밖으로 나온다. 중력은 사물을 끝없이 중심으로 떨어트린다. 하지만 라이언 스톤은 그것에 굴하지 않았다. 두 발로 땅을 딛고 일어서, 흔들거리는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선다. 그녀는 고통을 깨고 나와 새로 태어났다. 고통을 이겨내고 일어선 인간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내 고통을 들여다 보고, 그 고통을 깨고 나와 떠나보내고 다시 태어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하기로 했으면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삶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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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스 오브 막시> 여성 영화의 자기 파괴적 발전
<걸스 오브 막시>
여성 영화의 자기 파괴적 발전
새로운 학년을 맞이한 '비비안(해들리 로빈슨)'은 절친인 '클라우디아(로런 차이)'와 등교 첫날부터 학기마다 여학생들을 품평하는 리스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불쾌한 기분을 애써 떨쳐내려고 한다. 그런 그녀 앞에 전학생 '루시(알리시아 파스칼 페냐)'가 나타난다. 자신을 포함해 여자라면 일단 집적대는 미식 축구부 주장 '미첼(패트릭 슈왈제네거)'에게 명확히 거부의사를 표하는 루시. 그런 그녀를 보면서 비비안은 왜 여태까지 쌓이던 분노를 당당히 표현할 용기를 내지 못했는지 생각에 잠기고, 여성 운동을 펼쳤던 엄마의 과거를 알게 된 후 교내 여성 운동, '막시 Moxie(용기)'를 시작한다.
2010년대 중후반부터 할리우드는 물론 국내 영화계 주류를 강타한 트렌드가 있다. 바로 페미니즘이다. 여성 인권 향상의 기치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들은 <스타워즈>나 <터미네이터>처럼 오래된 프랜차이즈를 리모델링하고 <원더우먼>과 <캡틴 마블>처럼 영역을 넓혀가며 많은 관객들의 환호를 받았다. 언론사의 성 불평등을 고발하는 <밤쉘>, 능동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여성상을 조명한 <작은 아씨들>과 <벌새> 같은 작품들은 평단의 호평 속에 시상식을 휩쓸었다.
그러나 모든 빛에는 필연적으로 그림자가 따르듯이, 영화계의 새로운 방향성은 짙은 어둠을 만들기도 했다. 여성 인권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그 여성에는 백인이나 중산층만 포함하며 여성이라는 범주 안에 존재하는 사회적, 경제적 차이를 무시하거나, 역으로 남성 차별을 정당화하는 작품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메시지 전달 방식에 있어서는 페미니즘을 '영화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걸캅스>와 같은 몇몇 영화는 개연성이나 장르의 문법과 같은 최소한의 설득력을 갖추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페미니즘 철학을 전달하는 데 급급했다. 그 결과 여성 영화에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전달 내지는 강제하는 프로파간다라는 이미지가 덧입혀지는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제니퍼 마티유의 소설을 영상화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걸스 오브 막시>의 초중반부는 이러한 여성 영화의 부정적 전철을 착실히 뒤따라간다. 미국의 한 고등학교에서 발생한 여성 운동을 다루는 이 영화는 상당히 작위적이고 직접적인 연출로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유도한다. 예를 들어 교내 모든 여학생들에 대한 품평이 전체 메시지로 뿌려지고, 남학생들은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전학생 루시는 이유 없이 미첼로부터 조롱을 당하고, 이 문제를 알고도 교장은 무조건 사건을 덮으려고 애쓴다. 운동 장학생 선거를 앞두고서는 여성 후보인 '키에라(시드니 박)' 대신 미첼에게만 교내 방송 출연이 허가된다. 이러한 장면들은 개연성과 설득력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한 판단 이전에 무조건적으로 영화의 메시지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장치다.
이에 더해 페미니즘에 동의하는지 여부를 도덕적인 선악의 범주로 치환시키며 영화의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주입한다. 비비안이 막시 운동에 소극적인 클라우디아를 일방적으로 다그치는 장면이나, 미첼에게 독립적인 서사를 주는 대신 필요한 모든 악역을 떠안기는 연출이 대표적이다. 영화의 메시지에 동의하지 않으면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고, 동의하면 도덕적으로 선하다는 이분법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출은 결코 효과적이라고 할 수 없다. 왜 백인 중년 남성이 쓴 <위대한 개츠비>를 읽어야 하느냐는 루시의 질문이 그 사례다. 이 질문은 그녀의 의견에 설득력을 더하기보다는 소설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젠더의 이분법으로 무리하게 치환한다는 비판을 낳으며 연출 상의 한계를 드러낸다.
등장인물들을 설정, 활용하는 방식 역시 인종 차별을 방패 삼아 페미니즘의 메시지와 전달 방식에 대한 비판을 도덕적으로 봉쇄하는 듯 보인다. 백인 남성 교사는 여성 운동을 지지한다는 표현을 하지 않지만, 비비안의 애인이자 동양계 남학생인 세스는 적극적으로 교내 여성 운동인 막시를 지지하며 대조를 이룬다. 운동 특기생 장학금을 두고 경쟁하는 미첼과 키에라의 구도, 가장 먼저 교내 성차별 이슈로 대립하는 루시와 교장의 구도가 모두 흑인과 백인으로 짜인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비비안 외에 막시를 주도하는 캐릭터의 다수는 유색인종으로 설정되어 있다. 따라서 <걸스 오브 막시>는 언뜻 보기에 일부 여성 영화들이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답습한다.
그러나 <걸스 오브 막시>는 멋진 반전을 선사하면서 점점 짙어지던 그림자를 단숨에 빛으로 전환시킨다. 절친인 비비안이 익명으로 팸플릿을 만들고 캠페인을 계획하며 막시 활동을 이끌고 있음을 눈치챈 클라우디아는 그녀를 돕기 위해 막시를 교내 단체로 정식 등록한다. 그러나 막시를 좌시할 수 없었던 교장은 클라우디아를 비비안 대신 정학시킨다. 소식을 뒤늦게 듣고 찾아온, 자신이 적극적으로 막시 운동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던 비비안에게 클라우디아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백인이라서 내 입장을 몰라." 뒤이어 미국으로 이민 온 동양인의 입장에서 교육과 대학 진학은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며, 따라서 학교에서 쫓겨날 각오를 하고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이 대화를 기점으로 비비안은 큰 충격을 받고 자신의 신념과 행동이 잘못되어 있었음을 반성한다. 본인이 옳다고 믿었던 일이 모두를 위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자신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배운다. 그리고 불의에 저항하는 일은 같은 여성이라 할지라도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정작 익명 뒤에 숨은 자신이 가장 용기를 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녀는 익명을 벗고 사람들 앞에, 연단 위로 당당히 나서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저항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공간을 열어준다.
그녀의 변화와 함께 영화의 스탠스도 180도로 달라진다. 앞서 보여줬던 일방적이고 고압적인 상황과 분위기 연출, 여성 운동은 무조건 옳다는 신념에는 제동이 걸린다. 인종과 젠더의 대립 구도도 허물어진다. 그 빈자리는 정체성에 관계없이 자신이 받은 차별에 함께 저항하는 연대의 정신이 자리 잡는다. 일부 여성 영화가 초래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답습하던 초반부 연출과 설정을 역이용한 결과 여성 운동과 미투 운동이 현실에서 보여줬던 영향력은 영화 내에서 성공적으로 재현된다.
사실 <걸스 오브 막시>가 반전을 선사할 것이라는 점은 오프닝에서부터 암시된다. 숲에서 쫓기다가 쓰러져 버린 비비안은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하려는 찰나에 악몽에서 깨어난다. 이후 영화는 하이틴 영화의 클리셰를 충실히 재현하며 예상치 못한 오프닝을 잠시 잊게 만든다. 방학 동안 몰라보게 달라진 이성을 향한 호감과 관심, 운동부 주장과 치어리더 팀 주장 간의 연애와 같은 가십, 전학생의 등장과 그로 인한 기존 친구들과의 갈등, 주인공들의 인생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교사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모범적인 하이틴 영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비비안이 여성 운동과 시위를 펼쳤던 엄마의 과거를 알게 되고, 'Rebel Girl'이라는 노래를 들으며 막시를 만들기로 결심하는 대목에서 오프닝은 잊혔던 의미를 되찾는다. 꿈이 무의식의 통로라는 고려 하면, 숲에서 헤매는 비비안의 악몽은 모든 여성들이 직접적인 피해를 경험하지 않아도 공통된 불안함을 느끼다는 것, 그리고 그 악몽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묻어두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클리셰처럼 평범하게 이어지는 일상의 이면에 항상 불안함이 숨어 있고, 이를 직시하고 고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다소 갑작스럽다고 느껴지기도 하는 비비안의 변화에 설득력을 더한다. 이는 홀로 어두운 숲 속에 쓰러져 있던 비비안과 대낮의 밝은 학교에서 친구들 앞에 나서 목소리를 높이는 비비안의 모습이 멋진 대조를 이루는 이유다.
이처럼 <걸스 오브 막시>는 영화 앞 뒤로 예상을 벗어나는 모습을 보이면서 자신에게 쓰인 여성 영화의 부정적인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난다. 여성 영화들의 잘못된 선례를 바로잡고, 자칫 일방적인 프로파간다로 전락할 위험을 영리하게 피해 가며, 이를 원동력 삼아 영화를 접하는 모든 이들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을 보여준다. 여성과 남성, 백인과 유색인종이라는 이분법 대신 여성 문제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각자 처한 상황 안에서 최선을 다해 함께 연대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그 결과 <걸스 오브 막시>는 여성 영화의 몇몇 부정적인 전철과 이미지를 직접 파괴하면서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데 성공한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모든 이들을 설득할 수 있을 법한 반성, 공감, 연대의 여성 영화
* 본 콘텐츠는 브런치 DAY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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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포함 영화리뷰? 구타로 숨진 해병대 군인의 억울한 죽음ㅣ결말포함 영화리뷰ㅣ어퓨굿멘ㅣ방구석1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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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을 때 봐야하는 영화들" : 명품영화 고품격 영화리뷰 시리즈각본: 아론 소킨
감독: 롭 라이너
출연: 톰 크루즈, 잭 니콜슨, 데미 무어, 케빈 베이컨#결말포함 #영화리뷰 #결말포함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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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 있지만 허세 가득한 사회부 기자 ‘임상진’ 대기업 ‘만전’의 비리를 취재하지만 오보로 판명되며 정직당한다. “기자님 기사 오보 아니었어요. 다 저희들이 만든 수법이에요” 그러던 어느 날, 의문의 제보자가 찾아온다. 자신을 온라인 여론 조작을 주도하는 댓글부대, 일명 ‘팀알렙’의 멤버라고 소개한 제보자는 돈만 주면 진실도 거짓으로, 거짓도 진실로 만들 수 있다고 하는데… “불법은 아니에요. 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제보, 어디부터 진실이고, 어디까지 거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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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쿠오바디스, 아이다> 메인 예고편
전 세계가 눈 감아버린 그 날의 이야기
1995년, 세르비아군이 마을을 공격하자 보스니아 사람들은 안전지역인 UN 캠프로 피신한다.
UN군 통역관으로 일하는 아이다는 남편과 아들이 캠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자
그들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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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홈런: 야구소년> 메인 예고편
각자의 사연을 안고 전국에서 모인 10대 불량 청소년들.
70대 감독 ‘할배쌤’과 코치들의 지도 아래 포니 야구 월드시리즈에 도전을 준비한다.
철거 예정인 훈련장부터 추운 날씨까지, 환경조차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
매일 싸우고 부딪히는 말썽꾸러기 아이들까지!
이들은 힘든 과거를 극복하고 평범한 아이들처럼 자신의 ‘홈’을 갖게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