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리2023-12-07 21:48:45
낙엽처럼 건조해도 사랑이야
<사랑은 낙엽을 타고>
헬싱키의 빈티지 로맨스라는 문구와 Fallen Leaves라는 제목에서 꽤나 궁금증이 생기던 영화였다. 칸 수상도 하고, 로튼 토마토의 평가도 매우 좋은 편!
로튼 토마토 신선도지수 99%
제76회 칸영화제 심사위원상
제96회 아카데미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 핀란드 출품작
2023 국제영화비평가연맹 그랑프리
빈티지함 물씬한 포스터도 너무 매력적이고요
그 누구보다 무미건조한 일상을 보내는 두 남녀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술과 담배 없이 못 사는 홀라파, 그렇지만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상남자 중에 상남자. 금요일 밤에도 평소와 다르지 않게 고독한 밤을 보내려고 하지만 직장동료의 꾐으로 오랜만에 가라오케를 간다. 술만 홀짝 거리며 무심히 공연을 보다가 우연히 안사를 보게 되는데, 안사 또한 홀라파에게 강렬한 끌림을 느낀다. 그렇지만 그날 둘은 보는 사람이 짜릿할 정도의 시선만 나눌 뿐,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다.
운명은 이 둘을 이어주다가도, 운명의 장난처럼 갈라놓기도 한다. 중간중간 나오는 핀란드식 특유의 유머는 생각도 못했는데, 나도 모르게 피식피식 하고 있었다. 이 영화 특징은 대사보다 노래가사가 더 많은 느낌이었는데, 중간에 두 사람의 타이밍이 안 맞을 때 나오던 노래가 그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위 사진 속의 밴드의 노래) 노래가 매우 슬픔.
분명 시점은 현재인데, 10년, 20년 전 영화를 보는 느낌이 든다. 이 영화에는 특유의 버석함이 매력이다. 모든 사람들이 감정이 절제되어 있는 편이고, 당연히 이 둘도 별 말을 안 한다. 근데 이렇게 로맨틱하고, 이렇게 잘 통한다고? 싶고.
이때 안사가 윙크를 하는데 너무 사랑스럽다. 그렇게 무미건조하게 일만 하던 사람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참고로 저 강아지는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반려견이라고 한다. 여기서 감독 특유의 개그 코드가 묻어 나온다. 드라이한 일상 속에서 달콤한 사랑에 취한 남녀의 이야기, 12/20(수)부터 개봉한다고 하니 친구와 연인과 함께 보는 것을 추천!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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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 직전 북극에 남겨진 과학자의 회한
죽음 직전 북극에 남겨진 과학자의 회한
-<미드나이트 스카이>(2020)
이 리뷰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젊은 시절 그저 앞만 보고 달려간다. 취업을 하고, 커리어를 더 발전시키기 위해 자신의 일에 몰두한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겨 가족도 챙겨야 하는 상황이 오면 자신의 일을 잠시 멈추고 가족을 바라본다. 아이가 성장하는 시간을 함께하고 가족에게 문제가 생기면 커리어보다는 가족의 일을 먼저 보살피는 등 앞만 보고 달려가던 젊은 시절보다는 여러 가지를 더 보기 시작한다. 그건 대부분의 삶의 한 부분이고 마땅히 서로를 챙겨야 할 의무가 있기도 하다. 그런 시기는 향후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자신의 일을 발전시켜 나가는데도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기꺼이 가족을 돌보고 또다시 일터로 돌아온다. 그렇게 일과 가족은 삶에서 중요한 선을 그리며 나란히 나아간다.
사람들 중 일부는 좀 더 세상의 무언가를 위해 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그런 사람들에게 자신의 성공도 중요하겠지만 그 일 자체를 즐기며 그곳에서 받는 성취감이 그들을 일에 몰두하게 만든다. 그들은 일에 집중하며 오랜 기간 동안 가족과 떨어져 살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가족의 일을 거의 돌보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가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가족과 있을 때 안정감을 느끼고 좋은 감정을 받는다. 하지만 그들은 가족과의 시간을 최소화하고 무언가 이루어내기 위해 애쓴다. 그러한 노력은 그들에게 대단한 업적으로 돌아오지만 그 업적 뒤에는 나이가 들어 죽음에 가까워질 때 그들이 느끼는 회한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지구의 재앙 속 북극에 혼자 남는 과학자 오거스틴의 이야기
영화 <미드나이트 스카이>는 북극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권위 있는 과학자 오거스틴(조지 클루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재앙으로 지구에 생명이 살 수 없는 환경이 되었고, 북극은 그 영향을 가장 늦게 받지만 결국 그곳에서 조차 결국에는 살 수 없게 된다. 모두가 지하 등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떠나고 암 말기 환자인 오거스틴은 북극 기지에 남아 조용히 삶의 마지막을 마무리하려 한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던 그는 이전에 인간이 살 수 있는 행성이 있는지 우주 탐사를 떠났던 여러 우주 비행선 중 마지막으로 남은 탐사선의 지구 귀환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된다.
영화가 공들여 전달하는 것은 바로 고독이다. 혼자 남겨진 오거스틴이 아무 소음도 나지 않는 곳에서 밥을 먹고, 암세포의 확대를 억제하는 시술을 받는다. 또한 북극의 청명하고 깨끗한 밤하늘을 바라보는 오거스틴의 모습에서도 외로움과 고독을 볼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이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전반적인 정서라고 할 수 있는데, 다르게 보면 그것은 병든 노인이 되어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는 오거스틴의 회한에 대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우주 비행선 에테르호의 존재는 그의 삶에 작은 목표를 만들어준다. 그 적막이 흐르던 북극 기지에 여러 가지 알람의 소음과 분주해진 오거스틴의 모습이 화면으로 비춰진다. 삶의 끝에 서서 사람들과 멀어지는 길을 택했던 그는 누군가와 교신하기 위해 무척 애쓴다. 그런데 그 교신의 목적은 에테르호를 지구에서 다시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오거스틴의 젊은 시절은 거의 모든 시간을 연구에 소비했다고 볼 수 있다. 몇 번의 짧은 플래쉬백으로 볼 수 있는 젊은 오거스틴은 그의 연구에 있어서는 총명하고 미래가 밝은 사람이었지만 사랑하는 연인에게는 그러지 못했다. 그를 떠나는 연인과 그의 아이일지 모르는 자동차 속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저 말없이 바라만 보고 뒤돌아설 뿐이다. 그는 삶에서 굉장한 연구적 업적을 발견해 냈고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지만 평생 고독 속에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그 자신이 선택한 길이긴 하지만 그건 고독이라는 문안에 자기 자신을 가둔 것이다. 그래서인지 조지 클루니가 연기한 현재 속 오거스틴의 얼굴에 기쁨은 말랐고, 눈에는 외로움이 가득하다.
에테르호를 지구에서 멀리 밀어내려 애쓰는 오거스틴의 시도
에테르호의 선장인 설리(펠리시티 존스)는 인류가 살 수 있는 행성을 발견하고 돌아오는 길에 지구와 교신을 시도하는 인물이다. 그는 또 다른 비행사 아데웰레(데이빗 오에로워)와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 주변 인물들과 큰 문제없는 보통의 인물로 그려지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두고 간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건 일종의 본능 같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그것이 자신의 동료들에게 더 애착을 하게 되는 이유이자 삶을 이어나가게 만드는 동력이 된다.
오거스틴과 설리 외에 북극기지에 몰래 숨어 지내던 아이인 아이리스(키얼린 스프링올)도 등장한다. 말을 못 하는 그는 부모 몰래 북극 기지에 남아 오거스틴과 함께 생활해 나간다. 둘은 특별히 대화를 이어나가지는 못하지만 아이리스는 늘 오거스틴의 곁을 따라다닌다. 오거스틴은 과거의 딸을 돌봐주지 못했던 책임을 대신하는 것처럼 아이리스를 끝까지 지켜내려 애쓴다. 아이리스는 어쩌면 오거스틴의 죄책감을 풀어주는 존재이자 그를 끝까지 삶을 이어가게 만들어 결국 외부에 있는 비행선 에테르호를 구하게 하는 존재다.
영화 속 오거스틴이 말없이 북극의 밤하늘을 바라보는 뒷모습을 비추는 장면이 있다. 에테르호와 교신이 되지 않아 답답한 마음에 한참을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뒷모습은 그가 느꼈던 평생의 고독감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렇게 하늘을 바라보다 에테르호와 교신하기 위해 북극 내 다른 전파 기지로 이동하기로 마음먹는다. 오거스틴의 삶은 평생 누군가를 밀어내는 삶이었는데, 그가 죽기 직전에 해결해야 하는 임무도 다른 사람을 외부로 밀어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마지막 밀어냄은 타인과의 연결이 선행되고 희생이 이어지는 것으로 과거의 밀어냄과는 조금 다르다. 그 마지막 임무 이후 오거스틴은 비록 고독하게 삶의 마지막을 맞이하겠지만 그가 가진 회한을 어느 정도는 덜어낼 수 있는 임무였다. 그건 에테르호의 선장 설리와 오거스틴의 마지막 교신을 대하는 오거스틴의 반응으로 세세하게 전달된다.
잔잔하고 감성적이지만 잘 맞물리지 않는 오거스틴과 설리의 이야기
사실 영화는 마지막에 큰 반전이 있다. 그 반전은 오거스틴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에테르호가 단번에 연결되어 감정을 고조로 이끌게 되는데, 영화의 이 세 이야기가 사실 적절하게 잘 맞물려 돌아간다고 보기는 어렵다. 에테르호의 이야기와 오거스틴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따로 흘러가고 교신이 된 이후에도 오거스틴의 고독과 에테르호의 위기가 잘 융화되지 않는다. 그래서 후반부의 반전 이후 클라이맥스에서도 감정적인 반응이 쉽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연구자가 가진 회한과 평생의 고독감, 그리고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감정은 조지 클루니의 얼굴과 몸을 통해 잘 전달된다. 에테르호의 장면들이 녹아들지 않아 조금 아쉽지만 오거스틴이 혼자 북극에 남아 모든 것을 쏟아부어 하나의 우주선 그리고 그 안의 생명들을 지켜내는 모습은 영화의 결말까지 지켜보게 만든다. 영화가 끝나고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영화는 가만히 설리가 비행선에서 일을 마무리하는 과정을 오래도록 지켜보게 한다. 마치 오거스틴이 흐뭇한 표정으로 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가만히 지켜보는 것처럼 따뜻함이 느껴진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Rabbitgumi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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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틱, 틱... 붐!' 리뷰
**영화는 넷플릭스에 있습니다. 스포일러가 조금 있습니다.
왜 창작을 할까? 왜 손에 잡히지 않는 글자를 매만지는 걸까. 왜 그 험난한 과정을 인내해가며 버티는 것일까. 글이 잘 써지지 않는 날이면 이빨에 치석이 낀 것처럼 상당히 찝찝하다. 여기선 찝찝하다는 표현이 적절할까? 상쾌하지 않은 상태, 그렇지만 불쾌하다고 표현하면 지나치게 감정적이다. 나는 내 상태를 명쾌하게 진단했으니 좀 더 이성적인 표현이 어울린다. 갑갑한 마음에 아무런 단어나 덧붙일 수는 없다. 글은 오차를 줄이는 방향으로 흘러가야 한다. '치석이 낀 것처럼 잡념이 뇌의 시냅스를 막는다.' 흠, 시냅스를 막는다는 말은 적절한가? 의학적으로 용인될 수 있을 비유인가? 이렇게 한 문장이 막혀버리면 어떻게 남아있는 이 광막한 여백을 채우지?
글을 쓴다는 건 저런 생각들의 반복이다. 나는 저런 생각의 흐름으로 글을 쓴다. 저 과정이 온전히 자판 위에서 벌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만 자정을 넘어서 두드리는 키보드는 대부분의 조용하다. 책상 위에 너저분하게 놓인 손목시계는 제 모양과는 상관없이 움직인다. 새벽 언저리에 들리는 시곗 소리는 그 웅장함이 천둥 같다. 초침이 분침을 밀어내고, 분침이 시침을 밀어낸다. 주기적으로 울리는 초침 소리는 둔탁하다. 초침이 부추기는 소리에 힘겹게 손가락을 자판에서 떼고 나면, 내가 글을 쓰는지 손가락이 지맘대로 움직인 건지 알 길이 없다.
조너선 라슨도 그랬다. 도저히 2막에 들어갈 곡을 써 넘길 수가 없다. 10분 앉아있다가 집에 날아온 고지서를 확인하고 시리얼을 먹고, TV도 좀 보다가 '자 이제 써볼까~' 하면 쓸 수가 없다. 아무 상관없는 설탕 노래는 그냥 영감이 솟아나서 세 시간 만에 뚝딱 만들었는데 정작 극에 들어갈 곡은 써내질 못한다. 그렇지만 멈출 수는 없다. 8년을 준비했으니까. 열심히 얻어먹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버틴 세월이 있으니까. 재능이라도 없다는 걸 미리 깨달으면 어떻게 포기라도 쉬울 텐데 말이다. 먹구름이 짙게 끼어서 비가 오겠거니 싶어 우산을 들고나갔더니 햇빛 한 줄기가 따라오는 모양새다.
전문가의 한 마디나 주변 친구들의 응원과 기대, 재촉하는 시간은 선택으로 밀어 넣는다. 삶에 대한 전방위적 압박에서는 선택의 순서를 매길 수가 없다. 순서가 사라지니 균형은 박살 난다. 과도하게 집착하며 시간을 투자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1초도 내어줄 수 없는 일도 생긴다. 판단의 기준은 이기적으로 바뀐다. 내 시간을 내 일에 투여하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 한다. 바로 앞에 놓인 길도 걷지 못하는데 주변을 살펴볼 수는 없으니까. 그렇지만 시간을 들인 노력이 정량적인 결과치를 보장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궁지에 몰리면 초인적인 기운을 낼 수도 있겠으나 확신할 수는 없다.
조너선은 웃음을 잃어간다. 예전에 친구들과 함께할 때는 웃을 수 있었다.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있어도 조너선의 농담은 먹혔다. 그때는 모두가 같이 웃었다. 서로의 인생을 이해할 수 있었다. 대장정의 마무리가 눈앞에 보이기 시작하면서 조너선은 초조해진다. 마지막 스퍼트를 올리지 못하면 무너질 것을 알았고, 지난 세월이 무상해질 것을 알았기에 웃을 수 없었다. 점점 웃음을 잃어가던 조너선이 그나마 웃을 수 있는 건 철저하게 물질적인 순간들 뿐이었다. 능력이 발휘된다고 믿던 때뿐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렀다. 그래서 그는 홀로 웃는다. 친구들은 모든 걸 쳐내고 몰두하는 조너선을 공감해줄 수 없었다. 그때의 그는 시간의 주인이 아니었기에.
앤드류 가필드의 연기도 놀랍고 온도가 그대로 느껴지는 화면도 환상적이었다. 빽빽하게 사람들로 구성을 짜서 느껴지는 압박감과 그걸 노래로 발산해내는 장면도 너무 좋다. 농담과 인생의 접점과 인간관계라는 저울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비유가 좋았다. 조너선의 선택 중에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없었다. 촘촘하게 꾸며진 장면들을 통해 묘사는 설득력을 더한다.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마무리되는지는 반드시 직접 봐야 한다. 창작 활동과 일상생활은 별개의 선로를 달리다 의외의 접점에서 만나 교차한다.
작가는 기획 의도를 다듬어내는 것 이상으로 준비할 것이 없다. 거창한 이유를 늘어놓기 시작하면 만드는 작품들이 교조적이게 된다. 좋아해야만 하는 이유로 가득 찬 작품들만 만들어진다. 당위로 가득 찬 작품은 관객의 시선을 통제한다. 그런 것보다는 실패할 수 있는 작품이 훨씬 낫다. 왜냐면 작품은 언제나 작가의 삶 일부분을 떼어내서 만들어지니까. 주관적인 느낌에서 자신의 창작물이 비루해 보일 수 있어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각자의 인생 트랙을 완주해내려는 것처럼 걸어가야 한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틱, 틱... 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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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한 몰락과 사소한 구원
이 글은 씨네랩에서 초대 받아 작성한 영화 시사회 리뷰입니다.
* 스포일러 주의
누구나 한번쯤은 처절한 비참을 경험한다. 더 내려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는데도 비극은 해일처럼 밀려오고, 밑바닥이 없는 것처럼 끝없이 추락하는, 그런 우울한 날들을. 나 자신의 다른 이름이 패배자, 실패자인 것만 같은 그런 순간들. 그 내용은 제각기 다를 테지만, 어쨌든 '밑바닥을 찍는다'는 것은 꽤나 보편적인 경험이다. 그런 지극히 '평범한 몰락'의 한복판에 있을 때, 우울의 파도는 사람을 집어 삼키고 그는 언제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더 나아질 길은 요원할 것만 같고 스스로의 무력함에 몸서리친다. 그러나, 그 비참이 우리의 마지막이 되지는 않는다. 밀물이 왔다면 썰물이 가는 법이며 고통스러운 우울이 지난 길에는 환희가 싹트기 때문이다.
물론, 운명이 우리에게 짊어지우는 과업들은 적지 않은 경우 혼자 힘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설령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버거운 비극은 우리의 눈과 귀를 가려서 그러한 힘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잊게 하곤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응달 밖으로 걸어나갈 수 있을까? 해답은 간단하다. 도움을 받는 것이다.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 설 힘이 있음을 속삭여 줄, 아주 사소한 구원자로부터.
1. 어느 평범한 몰락
영화 <레슬리에게>의 주인공, 레슬리는 복권 당첨자다. 한순간에 일확천금을 얻었고 친구들과 메스컴은 이제 '팔자 펼' 일만 남았다며 축하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레슬리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그 막대한 돈으로 말미암아 행복을 살 수 있으리라 믿었다. 사랑하는 아들과 가게를 내겠다는 소박한 꿈도 손쉽게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짜릿한 행복 뿐일 것이라고.
그러나 손쉽게 얻은 돈은 손쉽게 떠났다. 술과 도박이 그를 장악했고, 그 손쉬운 쾌락을 쫒는 사이, 레슬리는 사랑하는 아들과 친구들마저 저버리고 말았다. 촌구석에서 난 '행운아'는 상종하기 힘든 '밑바닥 인생'으로 전락하는 것은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2. 구제 불능 알콜 중독자의 방랑
레슬리는 몇 년 동안 모든 것을 잃었다. 돈도, 사람도, 그 자신을 지탱하는 어떤 힘조차도. 현실은 비참했다. 술을 마시면 잠시라도 그 비참을 잊었고, 레슬리는 더더욱 그것에 매달렸다. 그것이 그를 망가트린다는 것을 그도 모르지 않았을테지만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그것에 길들여진 지 오래였으리라. 술을 끊겠다는 숱한 다짐은 그 자신의 충동으로 인해 깨지고 말았을 것이다.
갈 곳이 없고, 잘 곳도 없다. 그에게 남은 것은 아들과의 추억을 담은 작은 분홍 가방 하나 뿐.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장성한 아들을 찾지만, 그마저도 잘 풀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는 기여코 고향으로 돌려보내진다. 그의 행운과 불행이 싹텄던 가장 원점으로.
3. 갈 곳 잃은 자를 구한 사소한 관심
고향 사람들은 레슬리의 몰락을 모두 알았다. 그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잘나가는 젊은이였는지를 아는 만큼, 그가 얼마나 형편없는 벗이요, 엄마가 되었는지도 모르지 않았다. 소위 '막나가는' 알콜 중독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조소 뿐이다. 레슬리도 나아지고 싶지만 그게 쉽지 않다. 정신 차리고 보면 술을 사 마셨다. 얼큰하게 취하고 나면 그가 조금이나마 쌓아올린 것들이 무너져 내렸다. 마치 쳇바퀴 돌듯이.
고향 땅에서조차 부랑자 신세를 면치 못한 레슬리에게 손을 내민 것은 일면식도 없던 남자, 스위니였다. 친구와 함께 변변찮은 모텔을 운영하던 그는 충동적으로 레슬리에게 제안하고 만다.
"좋아요, 당신을 채용하겠어요. 일당은 7달러, 숙식도 제공하는 조건으로요."하고.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알콜 중독자에 부랑자이기까지 한 사람을 아무 조건 없이 채용하는 것은 그리 현명한 일이 아니다. 스위니도 그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레슬리를 채용했다. 차마 그를 내버려 둘 수 없었으므로. 어쩌면 그건, 스위니가 '자기도 모르게' 레슬리의 결함 너머에 있는 어떤 진실됨을 발견하고 말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4. 레슬리의 홀로서기
알콜 중독의 관성으로부터 벗어나려면 타인의 호의에만 기대는 습관을 벗어야만 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레슬리는 온갖 실수와 만행을 반복했다. 스위니는 그런 여자를 채용한 것을 수없이 후회했다. 둘 사이는 삐걱거렸다. 스위니의 구원은 얼마든지 무색해질 수 있었다. 다행히 레슬리는 변하고자 했고 스위니는 그런 그에게 다시금 기회를 주었다. 레슬리는 아들 제임스와의 행복했던 추억을 연료 삼아 오래도록 벗했던 술과 결별하고 소위 '착실한' 삶을 살고자 했다. 여전히 그를 둘러싼 시선들은 따갑고 매섭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서 몇 번이고 그 지독스러운 술에 다시금 입 댈 뻔 했지만, 레슬리는 그럼에도 그 가시밭길을 나아갔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아들에 대한 절실한 애정과 그를 보통 사람처럼 대하는 스위니의 평범한 관심이었다. 레슬리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구했다.
레슬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까? 글쎄, 그것은 장담할 수 없다. 그는 이제 막 지옥으로부터 걸어나왔고 인생에는 언제나 부침이 있는 법이니까. 그러나 레슬리는 그것을 이겨낼 것만 같다. 그는 이제, 자기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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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슬리에게>는 마냥 우울하게 치달을 수도 있는 '알콜 중독자'의 이야기를 때론 덤덤하게, 때론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풀어나간다. 영화 속 인물들은 아주 입체적이다. 완전한 악역도, 완전한 선역도 없는 그 세계는 우리의 세계의 한 부분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만 같다. 인물들은 선을 베풀면서도 고뇌하고, 악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때때로 그것을 후회한다. 그런 것들이 반복되는 사이 그들은 무언가를 깨닫는다. 어떤 형식으로든 변한다. 카메라는 그런 사람들의 성장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명백하다. 누군가가 나락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아주 평범한 관심의 한 조각과, 그 관심으로 말미암아 일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 그 용기란 쉬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군가의 재기는 더욱 눈부시다는 것. 이건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한 교훈일 것이다.
혹시라도 당신 자신이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여겨진다면, 이 사실을 꼭 알아주길 바란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당신은 사실 꽤 괜찮은 사람'이다. 눈가리개를 풀고 당신 안을 들여다보라. 변화의 씨앗은 언제나 그 안에 있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걸 싹틔우는 것은 온전히 당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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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직하게 끌고 온 진심이 후반부까지는 감당하지 못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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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개의 귀환
이 영화의 주인공은 2016년의 대한민국에 사는 경찰관 황준철이다. 다시 전주로 돌아왔다. 누가 그를 환영하든지 말든지 중요한 게 아니다. 오랜만에 부인과 딸을 다시 만날 생각에 신났다. 기분 좋은 준철. 하지만 금세 기분이 변한다. 배를 타고 이동하는 준철. 복잡한 생각에 빠진다. 하지만 지금은 2016년이다. 17년 전 일은 과거일 뿐이다. 가서 일 잘하면 되는 일이다. 황준철이 가족들과 재회한다. 그런데 이런 준철을 전 직장 동료들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 “성! 이제야 오셨소!” 16년 전 부하 직원이었던 박정규가 반긴다. 술 한잔 들이켠다. “성은 예전 일 기억납니까?” 예전 일? 황준철의 머릿속에서 ‘미친개’였던 시절이 재생된다.
수사반장이 됐다. 실적 하나만은 기가 막힌 황준철. ‘미친개’에게 눈에 보이는 건 없다. 일단 잡고 보는 준철. 하지만 바늘 찔러서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냉혈한은 또 아니다. 동료들에게 고기 쏘는 법 정도는 아는 준철. 구수한 사투리를 쓰는 박정규가 ‘당신의 부사수’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여기가 새로운 직장인가? 적응 중인 준철. 하지만 거슬리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최우성이 준철에게 다가간다. 건들거리는 우성. 준철은 애써 무시하기로 한다. 그런데 막상 무시할 수만은 없던 사건이 있었다. 1999년의 어느 날. ‘삼례슈퍼’라는 곳에서 강도치사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은 10대 소년 3명이다. 이상한 사건에 ‘미친개’ 황준철이 개입한다.
실화바탕 영화 다수
이런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를 만들 때 지켜야 할 윤리가 몇 있다. 그중 하나는 ‘무엇을 주인공으로 삼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표면적으로는 황준철(설경구)과 최우성(유준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영화가 정말 다루고자 했던 바는 다른 부분이다. 이 영화가 극의 진짜 주인공을 보여주기 위해 썼던 방식은 이야기의 시점을 엇갈리는 것이다. 두 상황을 비교, 대조하며 관객들이 ‘무엇이 달라졌는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만약 주인공이 영웅적인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긴박한 서스펜스를 극의 원동력으로 삼았다면 전하고자 하는 바에 이야기가 응집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원래부터 목표가 정해져 있던 듯이 영화는 두 시점동안 공통적으로 일어난 일들을 묘사한다.
다음으로 영화가 지킨 선은 카메라가 어떤 것을 담고자 했는가? 에 대한 부분이다. 이 영화에서 폭력은 무조건 들어가야 하는 요소다. 강도치사라는 사건의 성격 자체만 봐도 그렇고, 이 영화에서 어떤 인물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폭력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1차원적인 분노를 이끌어내고 싶었다면 폭력의 수위를 높이는 것이 방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진짜 다루고 싶어 하는 폭력은 따로 있다. 이 폭력을 전적으로 앞에 내세우고 불필요한 것들은 최대한 자제하는 대신에 다른 이야기를 끌고 와 영화로 만들었다. 바로 소년들 3인방에 대한 서사다. 이 부분이 올드하다고 느낄 여지는 충분하지만 작품의 핵심인 ‘약한 사람들의 일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적절한 선택으로 보인다.
묵직한 진심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든 생각은 이 작품을 만드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진심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이 영화가 전달하는 이야기의 흐름은 유려하다. 딱히 모난 구석이 없다. 이야기를 모호하게 전달해서 관객의 참여를 유도한다던가 하는 식의 연출이 없다. 카메라가 담은 장면도 이 영화의 선한 의도를 충분히 뒷받침한다. 뿐만 아니라 진경 배우가 맡은 역은 두 시점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이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묘한 연기를 보여주고, 설경구 배우는 주인공이 17년의 세월 동안 급작스럽게 나이가 들었다는 설정을 무리 없이 소화한다. 영화의 미술이나 조명 같은 부분도 역시 마찬가지다. 정지영 감독은 이런 부분 하나하나 세밀하게 손가락이 닿았던 흔적을 보여준다. 특히 최우성 캐릭터를 비추는 조명과 카메라는 영화가 ‘이 인물은 이런 인물이다’를 쉽게 보여주는 연출이었다. 대표적으로 이 인물이 욕설을 하는 장면은 뭔가 심심하다. 이는 이 영화에서 묘사하는 검경의 속성과도 겹쳐 보이는 지점이다.
하지만 이 진정성에는 투박함이 묻어있다. 글쓴이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아쉽다고 느꼈던 부분은 최우성 캐릭터다. 이 인물이 황준철과 대립구도를 보여주는 이유와 상황이 그렇게 와닿지 않았다. 두 사람의 갈등이 영화의 핵심을 보여주는 것 이전에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최우성은 설정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수상할 정도로 조직의 수호를 받기 때문이다. 일을 잘해서? 하지만 황준철도 실적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이라고 묘사된다. 이것 외의 설정을 중후반부에 보여주긴 하지만 이 한 줄이 과연 모든 이야기의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것이다. 이는 영화의 플롯과도 관련이 있다. 현재와 과거를 번갈아가며 보여주기 때문에 앞으로의 미래가 예상이 된다. 영화가 기획의도로서 고른 것들이 후반부의 동력을 떨어트리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또 영화의 일부 설정은 영화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지점이다. 대표적으로 황준철을 ‘미친개’로 부르는 설정이 그렇다. 또 후반부 소년들 3인방의 로맨스 요소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에 적합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장면이다. 글쓴이는 이 로맨스가 영화에서 그 어떤 비유, 의미를 찾을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억지 재판
영화를 본 분들 중 거의 대다수가 이 법정신에 대해 코멘트할 것으로 보인다. 글쓴이 역시 이 장면에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았다. 우선 3인방 중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인물의 동선이다. 그냥 정석적인 재판으로 묘사했어도 이 영화가 제기하고자 하는 사회문제를 충분히 지적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영화가 당시 검/경이 얼마나 문제가 많았는지를 다 보여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년들>은 그렇지 않다. 인물이 등장하는 방식이 부자연스럽다고 느낄 정도로 극적인 긴장감을 과다 투여한다. 또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실 중 하나는 2016년의 재심을 통해 소년들이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법정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냉정하고 사실에 기반한 인물들이 등장해야 한다. 이 장면에서 피고 원고 증인 가릴 것 없이 모두 다 감정적이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해야 할 장면에서 뜨거운 이야기를 만든 것이다. 이는 이 영화와 전적으로 대치되어 엔딩의 뒷맛을 씁쓸하게 만든다.
베테랑의 클래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을 맡은 설경구 배우는 최근작 중에서 가장 자유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강철중’이 연상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영화가 이를 의도한 바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의 집착은 소시민들의 연대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이 집착이 장점/단점으로 발현되는 부분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단편적으로만 캐릭터를 해석하지 않았다는 점이 스크린에 그대로 드러나는 좋은 연기였다. 그동안 <더 문>이나 <유령> 같은 영화에서는 속삭이는 발성 때문에 손해를 본 것이 많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황준철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행동한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 또 이 영화에서 설경구 배우의 상대역이라고 볼 수 있는 특별출연(조연)이 있다. 이 배우는 물리적으로 긴 분량이 아님에도 강한 인상을 준다. 설경구 배우와 마찬가지로 최근 지지부진한 성적표에 비해 훨씬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이 영화의 조연을 맡은 허성태/염혜란 배우의 연기도 훌륭하다. 허성태 배우는 내내 씁쓸한 영화의 분위기에서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극을 이끈다. 이 인물은 적당히 소시민스럽지만 그중에서도 정의로운 성격이 유달리 강한 인물이다. 이 배우가 필모그래피동안 선한 역을 맡은 적이 거의 없었다는 걸 기억해 보면 새로운 모습을 기다린 팬들을 충분히 만족시킬 것이다. 반대로 염혜란 배우는 이번에도 어머니/아내 역을 맡았다. 하지만 이 배우는 <마스크걸>에서 보여준 광기 어린 모습과는 정반대의 어머니상을 보여준다. 이 캐릭터만 가질 수 있는 뭉클함을 화려한 방식이 아닌 덤덤하게 보여준다는 점이 인상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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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실의 슬픔에 줌 인(zoo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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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 이후, 적절한 추모 기간은 얼마일까? 언젠가부터 사건사고, 재난에 희생된 사람들을 다루는 뉴스를 볼 때마다 마음을 졸이게 된다. 당장은 모두가 가족‧동료‧친구를 잃은 슬픔에 공감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이제 그만하라’고 손가락질하는 모습이 상상되기 때문이다. 나만의 피해의식은 아닐 것이다. 일베 회원들이 세월호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단식투쟁 중인 유가족 앞에서 ‘폭식 투쟁’을 전개한 이후부터였을까? 우리 사회가 슬픔에도 유통기한을 부여하기 시작한 것은.
영화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상실이 우리에게 남긴 흔적과 그 흔적이 나의 일부가 되어가는 과정을 천천히 좇는 영화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어린 사야카는 우연히 동네 펫숍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개 ‘루’를 발견한다. 루는 ‘믹스견’이라 품종이 분명치 않다는 이유로 버림받은 상태였다. 우여곡절 끝에 함께하기로 한 사야카와 루는 자신들만의 공간에서 추억을 쌓아 올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든든한 파트너가 되어준다. 루가 수개월 만에 심장병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다시 혼자가 된 사야카. 그는 루가 떠난 후에도 일상의 모든 공간에 남은 루의 흔적과 마주하며 우울한 기분에 빠져 지낸다. 루와 행복했던 만큼, 그 공백도 크게 느껴져서다. 그러던 중 오래전 아들을 잃은 동네 할아버지 후세와 친구가 된다. 둘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상실이 남긴 흔적이 무엇인지를 차근히, 느린 속도로 마주해나간다.
속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수개월 전 루를 떠나보낸 사야카와 수십 년 전 아들을 먼저 보낸 후세가 느끼는 슬픔의 크기는 같다. 오랜 시간이 후세의 슬픔을 덜어주지 않았다는 소리다. 이제 마을에서는 아들을 잃은 후세의 이야기가 슬픔이 증발한 건조한 소문으로만 떠돌지만, 후세는 여전히 수십 년 전에 머무르며 아들을 그리워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후세의 슬픔을 '과거'로 흘려보내는 동안, 후세는 그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채 홀로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상실의 슬픔은 진정 어린 공감과 연대의 마음으로 승화될 수 있다.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후세와 사야카가 끝내 미소 지을 수 있었던 건 이 때문이다. 서로의 슬픔에 공감해주는 사람을 만난 후에야 사야카와 후세는 상실한 존재를 떠나보낼 수 있었다. 공감과 연대가 어렵다면 상대가 ‘이제 괜찮다’고 말할 때까지 마냥 기다려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다. 무엇이든, 타인의 슬픔에 유통기한을 정해놓고 그만하라 닦달하는 것보단 낫다.
영화에는 성인이 된 사야카의 내레이션과 어린 사야카의 목소리가 겹쳐지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이는 사야카가 루를 잃은 상처와 ‘함께’ 성장했음을 의미한다. 슬픔은 ‘극복’되어 ‘사라져야 할’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상실로 인한 슬픔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받아들이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이를 바탕으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성숙한 존재가 될 수도 있고, 타인의 슬픔을 존중하는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 수도 있다. 다시 한번, 상실의 슬픔에는 유통기한이 없다.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루를 떠나보낸 사야카의 슬픔과 사야카가 이 슬픔을 마주하는 과정을 아주 천천히, 그리고 가까이서 보여준다. 내게는 이 영화가 상실의 슬픔에 줌 인(zoom-in)함으로써 슬픔마저 ‘죄’로 몰아가는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영화로 읽혔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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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아이들은 자란다
“모든 아이들은 자란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소설 <피터 팬>의 유명한 첫 문장이다. 영원히 자라지 않는 소년 피터 팬은 탄생 1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풋사과 같은 동심의 표상으로 사랑받고 있다.
아무도 어른이 되지 않는 환상의 나라 네버랜드, 그곳을 인도하는 악동 피터 팬의 이미지는 다양하게 각색되고 변주되어 왔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뮤지컬, 온갖 노래 가사에까지 녹아들었음은 물론이고, 기존의 해석을 뒤집는 시도도 이어졌다. 피터 팬의 대칭적 인물인 후크 선장을 통해 피터 팬을 이해해 보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 6월 30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웬디>는 웬디의 입장에서 네버랜드와 피터 팬의 세계를 펼쳐낸다.
이야기의 중심에 웬디를 두는 순간 우리는 피터 팬과 네버랜드의 매력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던 사실들을 마주하게 된다. 110년의 세월 동안 인류가 이뤄온 진보의 시선까지 감안하면, 피터 팬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재구성하는 것이 과연 매력적인 결과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의심스러워진다. 그래서인지 벤 제틀린 감독은 이야기의 뼈대만 남겨놓고 완전히 해체해,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가장 태고적인 그림들로 피터 팬의 세계를 재조립했다.
*시사회에 참석하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국내 개봉일은 6월 30일입니다. (문화가 있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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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피터 팬>을 읽다 보면 어쩐지 도망치고 싶어 진다. 정확히는 웬디에게 피터 팬을 떠나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 진다. 피터 팬은 웬디를 엄마 역할로 데려왔고, 웬디는 엄마라는 단어와 거의 동의어처럼 묶인다. 그러나 동시에 피터 팬과 웬디 사이에는 서로를 독점하고 싶어 하는 애정도 엿보인다. 그래서 <피터 팬>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같은 측면이 엿보인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웬디뿐 아니라 팅커 벨, 타이거 릴리까지, 피터 팬을 사랑하고 서로를 질투하며 맴도는 위치에만 놓여 있다. 상대가 원하는 마음을 주는 단계로는 나아가지 않고, 유아처럼 그저 애정을 배부르게 받아먹고만 싶어 한다.
네버랜드에서는 누구도 자라지 않는다는 말만큼은 명확히 지켜지고 있어서, 후크 선장조차도 어린아이 같다. '엄마'가 있는 소년들을 부러워하고, 가장 암울한 순간에 스스로를 3인칭으로 칭하는 것 또한 피터 팬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가 악행을 행하는 방식은 기묘하게 모범생 아이 같은데, 사립학교 시절 배운 올바른 품행을 기준 삼아 그 역방향으로 달려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사망하는 순간까지 피터 팬의 품행을 지켜보고 있는 후크는 대칭을 이루는 또 하나의 피터 팬이자, 피터 팬에게 집착하는 또 하나의 인물이다.
다시 말해 모든 캐릭터가 피터 팬만을 맹목적으로 향하고 있다. 물론 주인공을 중심으로 서사가 굴러가는 것이 당연하기는 하지만, <피터 팬>에서는 유독 모든 인물들이 피터 팬의 부수적인 존재로만 기능하는 느낌이다. 특히 웬디는 받아주고 챙겨주며 양육하는 모성의 이미지만을 끊임없이 요구받는다. 피터 팬과 소년들만의 요구가 아니다. 원작 소설에서는 후크 선장과 해적 일당조차 피터 팬 무리를 무찌르고 웬디를 데려와 엄마로 삼고 싶어 한다.
영화 <웬디>는 웬디라는 캐릭터에서 우선 엄마의 이미지를 걷어내어, 웬디가 제 발로 설 수 있게 한다. 그 결과 이야기는 웬디가 아주 아기였을 때부터 시작한다. 기찻길 옆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엄마의 품에 안겨 달걀도 같이 깨고 손님맞이도 하면서 자라는 아주 작은 아이. 디즈니 삽화에서 보던, 허리 선을 강조한 드레스나 머리 리본 같은 건 없다. 이 영화 속 웬디는 맑은 색 귀걸이 정도를 제외하면 장식이라곤 하나 걸치지 않은, 잠옷에 가까운 티셔츠 차림이다. 원작에서보다 훨씬 공상적이고, 자기 세상이 뚜렷한 아이가 되어 있다.
웬디에게서 끊어진 단어, 피터 팬과 소년들이 집착하던 ‘엄마’, ‘모성’은 이제 대자연으로 갈음된다. 대자연도 한없이 부드럽고 품어 주기만 하는 공간으로만 묘사되지는 않는다. 아이들은 화산을 터뜨리고 물에 뛰어들며 자연의 품에서 마음껏 뛰어놀기도 하지만, 화산 폭발이나 거친 파도를 피해 뛰기도 한다. 게다가 네버랜드의 대자연에도 쓰레기는 쌓여 있다.
팅커 벨과 타이거 릴리는 아예 극에서 사라졌다. 피터 팬을 사랑하고 허영심을 부리면서 웬디를 질투해 이야기에 곤경을 더하곤 했던 팅커 벨은 등장하지 않는다. 아메리칸 원주민 전사 캐릭터인 타이거 릴리는 훌륭한 전사라고 묘사되면서도 부여된 역할은 고작 피터 팬 손에 목숨을 구하는 것, 그 후로 피터 팬의 대사 속에서 ‘엄마가 아닌, 의미 있는 누군가’가 되고 싶어 한다고 언급되어 팅커 벨과 웬디의 질투심을 자극하는 것이 전부였다. 피터 팬을 돋보이기 위한 장식적인 기능만 수행하던 캐릭터들은 과감히 잘라냈다.
뿐만 아니라 네버랜드 한켠에 사는 아메리칸 원주민과 인어들 모두 사라졌다. 후크 선장과 해적들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등장시켜 이야기를 전개해 간다. 원작 소설에서는 110년 전이라는 시대의 한계 때문에 원주민과 해적을 설명할 때나 소년들이 영국 이야기를 할 때 기묘하게 제국주의적 냄새가 풍기는데, 이를 걷어낸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피터 팬을 비롯한 몇몇 소년들을 유색인종 캐릭터로 만들었다.
다 뜯어진 신발에 낡은 재킷을 걸친 채로 기차 위에 앉아, 어둠 속에서 눈을 희번덕거리며 웃는 피터 팬의 존재는 단연 새롭다. 풀잎 같은 초록색 옷을 입고 소꿉놀이 같은 생활을 하던 피터 팬의 이미지를 기억하고 좋아했던 사람들에게 다소 충격적인 비주얼이다. 공통점을 찾자면 진주 같은 젖니가 빛나고 있다는 정도.
이렇게 걷어낼 것을 모두 걷어내고 완전히 새롭게 지어 올린 <웬디> 속 네버랜드와 웬디, 피터 팬은 원작에 비해 다소 야생적인 색깔을 띤다. 네버랜드뿐만이 아니다. 켄싱턴 공원과 반듯하게 정리된 침실 대신 지나가는 기차에 덜컹거릴 만큼 위험해 보이는 웬디의 집, 빛나는 요정 가루 대신 금방이라도 쇳내가 날 것 같은 화물 열차와 바닥에 구멍이 난 조각배로 이동하는 피터 팬은 분명 우리가 알던 피터 팬의 세계에 비해 거칠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지만, 성장이라는 주제만 놓고 본다면 원작보다 조준점이 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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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장은 반드시 상실을 동반한다. 어린 날 공상으로 지어 올린 세계가 처참히 부서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때론 그조차 잊어가면서 아이는 어른이 된다. <피터 팬> 원작은 이를 격렬히 거부한다. 사실 성장을 거부한다기보다 책임과 의무를 거절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가깝다. 소년들이 웬디의 집에 하나씩 안착해 학교에 다니고, 나는 법을 잊고, 직업을 갖는 동안 피터는 줄곧 아이로 남아 있다. 그리고 웬디의 딸을, 또 그 딸을, 계속해서 네버랜드로 데려간다.
원작의 웬디는 가볍게 날아가는 딸과 피터 팬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나이 들었다는 당연한 사실에조차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반면 팅커 벨이 죽었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해 웬디를 경악하게 했던 피터 팬은, 결국 아무 감정에도 책임지지 않으면서 ‘엄마’를 이용한다. 봄맞이 대청소 때마다 웬디가 네버랜드를 방문하겠다는 약속은, 그렇게 무책임하게 승계된다. 결말까지 철저하게 피터 팬만을 위한 방향성이다.
원작과 달리 영화 <웬디>는 성장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영화 속 웬디는 피터 팬뿐 아니라 모든 캐릭터들의 성장을 주도해 낸다. 대자연 ‘엄마’의 힘을 이끌어 내고, 추억을 뒤져 기쁨을 끄집어내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성장이라는 모험을 긍정하면서. 웬디와 피터 팬은 원작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결말을 맞는다.
영화 <웬디> 속 피터 팬과 네버랜드는 안전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지만, 기묘한 위계가 역할을 부여하는 원작과 다르다. 모험으로 가득 차 있을지언정 끝내 잘 될 거라는 막연한 안정감이 있던 디즈니 버전과도 다르다. 불안정하지만 변화에 열려 있고, 그래서 현실적이고 현대적이다.
이러한 세계에서라면 우리는 영화 속 웬디와 아이들처럼 자기 세계를 공고히 하고, 그 위에 찾아오는 도전을 받아들이며,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것을 성장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한때 아이였던 우리도 여전히 한 뼘씩 마음의 키를 키우며 이 세상을 건너고 있다. 영화는 그런 우리를 직면하고 긍정한다. 그렇게 모든 아이들은 자란다. 단 한 아이도 빠짐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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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돌구름 #팔콘앤윈터솔져 #2대캡틴아메리카
"마블쟁이는 산돌구름에게 폰트를 지원 받았습니다"2021. 03. 23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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