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두codu2024-02-28 08:38:31
무엇이 우리를 지켜줄 것인가?
장재현 감독, <파묘>(2024)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 <파묘>의 초반부를 이끄는 동력은 미국 한인 재벌의 핏줄에 흐르는 저주다. 저주를 따라 이름 없는 묘를 파헤치며 증오에 찬 혼령을 깨운 영화는 의미심장한 대사를 기점으로 장르적 변환을 시도한다. 한국의 오컬트 영화를 책임지고 있는 장재현 감독은 무덤과 혼령의 공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무덤이 위치한 범의 허리를 팔수록 묻혀있던 한반도의 뿌리 깊은 역사가 드러난다.
핏줄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상황에 따라 이 사실은 축복이기도, 저주이기도 하다. 미국과 한국에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으로 큰 부를 이룬 LA의 한인 재벌에게 유전병이 발병한다. 가문에 이어진 부유함은 축복이지만 핏줄을 타고 내려온 광기와 죽음의 그림자는 피할 수 없는 저주다.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박지용(김재철)은 불신을 무릅쓰고 무당 화림(김고은)에게 의뢰를 부탁한다.
보이고 만질 수 있는 환한 빛의 세계와 그림자에 숨어있는 어둠의 세계. 그 경계에 무당 화림이 있다. 불신이 놀라움으로 바뀌는 얼굴을 보며 속으로 비웃음을 감추는 이 젊은 무속인은 빛의 세계로 삐져나온 어둠의 것들을 능숙하게 다루고 해결한다. 지용의 아기를 보고 묫바람, 즉 대대로 이어진 유전병의 원인이 선대의 묫자리에 있다고 진단한 화림은 지관 상덕(최민식)을 찾는다. 돈 있는 자들의 묫자리를 봐주며 “땅을 팔아먹고” 사는 상덕은 하늘과 땅의 이치와 만물의 순환을 읽는 풍수사다. 죽은 사람의 자리가 좋지 않다면 묘를 이장해야 한다. 막대한 돈이 걸린 이장을 위해 장의사 영곤(유해진)까지 합세해 무속인 화림과 조수 봉길 그리고 풍수사 상덕은 힘을 모은다.
산 깊은 곳, 산세가 탁 트여있지만 여우가 많고 어쩐지 그늘이 진 곳이 의뢰인 박지용의 조부가 묻힌 자리다. 친일로 부와 지위를 얻은 박지용의 조부는 “악지 중의 악지”에 묻혀 있었고, 그 한은 젖과 꿀이 흐르는 미국에 사는 후손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화림과 봉길 그리고 상덕과 영근이 힘을 합쳐 굿과 이장을 동시에 진행하지만, 관은 열리고 증오만 남은 혼은 현실에 손을 뻗친다. 나라를 팔아 100년 넘게 부와 명예 그리고 조부의 증오에 찬 저주를 이어받은 후손들은 목숨으로 대가를 치른다.
조부의 관 아래 묻혀 있던 수직으로 세워진 거대한 관이 드러나며 범의 허리를 자른 여우의 정체가 밝혀진다. 두 번째 관의 등장은 영화가 다루는 시간의 범위를 500년으로 확장시킨다. 신기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진저리를 칠만큼 께름칙한 위용을 자랑하는 관에 봉인돼 있던 것은 일본의 정령 ‘오니’다. “험한 것”의 존재가 구체적으로 드러날수록 초자연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미스터리에서 오는 공포는 줄어든다. 조부의 혼이 유리창을 통해 흐릿한 형상을 인지할 수 있는 무언가였다면, 500년 이상 묵은 장군의 정령은 그림자와 육체를 지니고 간을 빼먹는 구체적인 형상의 괴물이다. 장재현 감독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아닌 압도적인 무언가로 두려움을 자아내기 시작한다. 자신을 ‘전쟁의 신’이라 부르는 이 존재는 ‘두려움’ 그 자체다. 원한을 품고 성불하지 못한 혼이 아니라 죽음을 먹고 자란 두려움의 실체화다. ‘오니’는 자신의 부하가 될 것을, 두려움에 무릎 꿇고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한번 두려움에 굴복했던 화림은 봉길을 잃을 뻔한 위기를 겪고 자신의 지켜줄 존재를 대동한다. 무당 화림이 모시는 ‘할매’ 앞에서 오니는 승탑에서 그러했듯 불의 형상이 되어 도망간다.
<파묘>는 끊을 수 없는 연결과 순환의 고리 위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핏줄, 신 그리고 땅과 하늘의 모든 것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며, 과거부터 쌓아 온 역사는 미래로 이어진다는 것을 주지 시킨다. 신내림을 받아야만 하는 무속인에게 신이란 거부할 수 없는 핏줄과도 같다. 하늘과 땅의 이치를 아는 풍수사는 순환의 원리를 외면할 수 없다. 화림이 할매의 비호를 받고 상덕이 음양오행의 이치에서 길을 찾듯, 일본의 두려움에 굴복해 영혼을 바친 박씨 가문은 저주에 떠안을 수밖에 없다. 이들이 선택한 것은 곧 일본 오니와의 연결이기 때문이다. <파묘>는 한반도라는 땅과 연결된 애국지족의 마음이 민족을 배반한 반역자와 침략자들을 뿌리 뽑는 영화다. 땅에 새겨진 역사는 잊혀지지 않는다.
범의 허리, 즉 한반도의 허리를 끊으려는 일본의 책략을 막기 위해 ‘철혈단’은 땅의 말뚝을 뽑는다. 상덕은 그들의 이름이 새겨진 나무와 자신의 피로 불타는 칼을 격퇴하는 데 성공한다. 땅의 기운을 읽는 자의 피와 역사를 지켜낸 이름들로 불타는 철이 자아내는 두려움은 격파된다. 작은 태양 같은 동그랗고 빨간 도깨비불의 모습은 일장기를 연상시킨다. 그러니 상덕이 음양오행의 이치로 오니를 물리치는 것은 일장기를 음양이 조화된 태극기가 베어내는 것과 다름없다. 현대 한국 영화사의 맥락에서 보면 <명량>의 이순신(최민식)과 <영웅>의 설희(김고은)가 (윤)봉길과 함께 일본 장군을 격퇴하는 것이다.
영화를 본 뒤 ‘우리 조상님들은 잘 묻혀 계신지’ 걱정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땅과 하늘의 기운을 살피고 망자에게 예의를 다하는 한국인이라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음을 무의식 중에 알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지금 이 땅을 딛고 선 우리도 언젠가는 역사의 일부가 된다. 수 천년 이어진 민족의 역사뿐 아니라 미래로 이어질 역사도 잊어서는 안 된다. <파묘>의 시작과 끝에는 새로운 시대의 생명이 있다. 박씨 가문의 갓난아기에서 시작한 여정은 상덕의 딸과 배 안의 아기를 축복하는 결혼식으로 끝난다. 장재현 감독은 역사에 축적된 불의를 심판하며 미래의 세대로 희망을 넘긴다. 박씨 가문의 장손들과 악한 역사를 함께 해 온 어머니는 죽었지만 며느리와 아이만은 살아남았다. 어쩔 수 없이 이어져 내려온 친일의 역사를 이어받은 아이를 용서한다. 이제 아이는 무엇과 연결될지 선택해야 한다. 과거의 사람들은 새로운 세대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현재의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어떤 선택을 내리든 거대한 역사와의 연결을 피할 수 없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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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툴지만 그만큼 절실했던 우리들의 이야기 <우리들>
초등학생 시절의 나에게 ‘친구’란 어떤 존재였을까? 어린 시절, 내게 ‘친구’는 때로는 부모님보다도 더 소중하다고 느껴질만큼 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존재였다. 지금은 꽤 많은 시간이 흘러 어렴풋한 기억만 남았지만, 친구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꽤나 치열하게 살아왔던 내 모습만큼은 자주 떠오르곤 한다. 어쩌면 성인이 되어버린 지금보다도 더 예민하고, 위태롭고, 흔들리기 쉬웠던 시기였기에 그 친구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내내 전전긍긍하곤 했다. 이러한 기억들의 색깔은 내가 커가면서 점점 흐릿해졌지만, 이 영화를 본 순간 다시금 선명한 원색으로 돌아왔다.
<우리들>은 ‘선(최수인)’과 ‘지아(설혜인)’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친구 사이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이다. 초등학교 여름방학을 맞이하고, 항상 혼자이던 선에게 ‘전학생 지아’라는 새 친구가 생긴다. 둘은 금방 친해져서 여기저기 같이 돌아다니고, 서로의 집에도 놀러가며 행복한 여름의 시간들을 보낸다. 하지만 여름방학이 끝난 뒤, 선은 지아에게 밝게 인사하지만 지아는 그런 선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다. 방학 동안 학원을 다니면서 지아는 새 친구 ‘보라(이서연)’를 사귀었다. 보라와 보라의 친구들은 타인의 말을 자신들의 의도대로 오해해서 듣고, 만만하다고 생각되는 친구에게 함부로 말하곤 하는 아이들이었다. 그렇게 지아는 보라와 어울리며 선과 멀어진다. 하지만 이 관계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보라와 보라 친구들의 다음 괴롭힘 ‘타겟’은 지아였다. 무리에서 ‘낙오’된 지아는 선을 화나게 하는 행동을 하였고, 결국 감정이 쌓이고 쌓인 지아와 선은 몸싸움까지 벌인다.
피구
이 영화는 피구 경기로 시작해서 피구 경기로 끝난다. 영화의 첫 장면은 피구 경기를 위해 각자의 팀을 뽑는 상황 속에서의 선의 모습이다. 선은 자신이 뽑히길 기대하는 눈빛으로 팀원을 뽑는 두 아이를 계속 번갈아 쳐다본다. 다른 친구들이 뽑히는 것을 보고 부러워하고, 자신이 마지막까지 뽑히지 않는 것에 대해 아쉬워하고, 입술을 뜯으며 초조해하면서 선은 조용히 기다린다. 그런 선을 향해 반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선 못한단 말이야’라는 말을 꺼내곤 한다. 아이들은 나쁜 의도로 말한 게 아니라고 해도 초등학생의 아이에게 이 말은 마음 한 구석에 꽤 오래 남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 어린 시절의 ‘우리들’은 지금보다 더 예민하곤 했다. 이런 말 하나에도 금방 위축되곤 했다. 그렇게 피구 경기가 진행되던 중, 선은 갑자기 상대편으로부터 ‘금을 밟았다’는 오해를 받게 된다. 선은 금을 밟지 않았다고 주장해보지만 ‘너 아웃이야’, ‘빨리 나가’라는 등쌀을 견뎌내기는 어려웠다. 실제로 선이 금을 밟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반에서 외톨이인 선의 상황과 선을 대하는 반 아이들의 반응을 통해 이러한 말과 행동들은 선을 향한 심술에서 비롯된 것임을 짐작해볼 수 있다.
두 번째로 나오는 피구 경기는 지아가 전학 오고 선과 멀어진 이후에 이루어진 경기이다. 지아는 상대편인 선을 주저없이 공으로 맞춘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보라는 피구를 잘하는 지아를 의식하고 경계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세 번째 피구 경기를 보여주며 끝이 난다. 지아와 보라가 멀어지고, 지아와 선의 관계가 틀어진 이후 이루어진 경기이다. 첫 번째 피구 경기에서 아무도 자신의 팀에 데려가려고 하지 않던 선의 상황이 이제는 지아에게 일어난다. 결국 맨 마지막으로 뽑힌 지아는 앞선 선의 상황과 똑같이 ‘금을 밟았다’는 오해를 받게 된다. 지아는 금을 밟지 않았다고 주장해보지만, 주변 아이들은 지아를 둘러싸며 빨리 나가라고 재촉한다. 이런 지아를 향해 선은 ‘한지아 금 안 밟았어. 내가 봤어.’라는 말을 꺼낸다. 그리고 지아와 선은 조금은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용기를 내서 서로를 바라본다. 날이 서 있는 눈빛이 아닌 조금은 누그러진 눈빛으로.
‘피구’는 우리들 모두 학창시절 체육시간에 빠짐없이 해 본 경기이다. 반 친구들이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스포츠 경기이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꽤 폭력적인 경기였다. 팀을 정할 때에는 자연스레 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거나 체력이 조금 약한 친구가 남게 된다. 마지막까지 남게 된 그 심정은 생각보다 더 속상하다. 경기를 진행할 때에도 선과 지아가 처한 상황과 유사하게 대뜸 금을 밟았다는 오해를 받게 되는 일도 종종 일어나곤 한다. 이렇게 ‘개인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행동들은 선과 지아의 상황에 처한 아이들에게 상처가 된다. 이렇듯 피구는 몇몇 아이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남기곤 하는 폭력적인 경기였다.
김밥
자신의 집에 놀러온 지아를 위해 선은 지아가 좋아하는 오이김밥을 만들어 달라고 엄마를 재촉한다. 서로에게 장난도 치고, 다정해보이는 이들의 모습을 우연히 지아가 목격한다. 지아의 부모님은 이혼했고, 엄마는 떠났다. 그래서 지아는 엄마를 보고 싶어도 당장 볼 수가 없는 상황이다. 선과 선의 엄마의 모습을 보고 약간 심술이 난 지아는 선이 권하는 오이김밥을 거절하고 옆에 있던 과자를 먹는다. 평소와 조금 다른 지아의 모습을 눈치챈 선은 더 이상 김밥을 권유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도 우리들은 자신을 대하는 친구의 미묘한 변화를 종종 쉽게 눈치채곤 했다. 어쩌면 성인이 된 지금보다도 더 쉽게 그런 상황들을 눈치챘고, 그래서 더 걱정하곤 했다.
한편, 방학이 끝나고 더 이상 자신과 놀지 않는 지아에게 선은 섣불리 다가가지 못한다. 이후 소풍날, 선은 혼자 있는 지아에게 다가가 엄마가 싸 주신 김밥을 함께 먹자고 한다. 김밥을 먹는 지아를 보며 선은 조금은 안심한다. 자신과 함께 놀지 않던 지아가 자신이 건넨 김밥을 먹는 모습을 본 지아는 약간의 희망도 얻었을 것이다. 우리가 다시 예전처럼 함께 여기저기 놀러가며 친하게 지낼 수 있다는 희망. 그 시절의 예민했던 우리들은 이런 사소한 친구의 변화에 또 금세 행복해지곤 했다. 하지만 선의 의도와는 다르게 날선 말이 오가고, 결국 흥분한 지아는 선에게 ‘그러니까 네가 친구가 없는 거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그리고 동시에 선이 가져온 김밥은 바닥에 떨어진다. 흙으로 더럽혀진 김밥처럼 친구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싶었던 선의 마음도 상처를 입게 된다.
"그럼 언제 놀아?"
선의 동생 ‘윤(강민준)’은 친구 윤호와 놀다가 자주 맞곤 했다. 선은 이런 동생을 보며 답답하다는 듯이 너에게 상처를 주고 장난도 심하게 하는 친구랑 왜 계속 같이 노는 것이냐고 질문한다. 선은 동생에게 ‘윤호가 너를 때린만큼 너도 똑같이 때려야 바보가 아니다’라는 말을 한다. 이를 들은 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럼 언제 놀아?
연호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또 연호가 때리고. 그럼 언제 놀아?
나 그냥 놀고 싶은데.”
이 상황이 선의 상황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선은 지아에게서 모진 말도 들었고, 지아에 대한 사실을 반 친구들 앞에서 말함으로써 의도치 않게 지아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했고, 친구라고 생각한 지아가 자신의 곁을 떠나 다시 홀로 지내기도 했지만 여전히 지아를 신경 쓰고 있다. 지아가 자꾸 눈에 밟히고, 지아에 대한 말들이 함부로 오고 가는 것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지아는 자신의 친구이기에. 내가 좋아하는, 그리고 함께 많은 추억을 쌓은 나의 친구이니까. 지아와 계속 갈등하던 선은 그냥 친구와 놀고 싶다는 동생의 말을 들은 뒤, 피구 경기에서 곤란한 상황에 처한 지아를 도와준다.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민 것이다.
봉숭아물과 매니큐어
여름방학 중에 선은 지아에게 봉숭아물을 들여준다. 봉숭아를 빻아서 손톱에 하나하나 올리고, 비닐로 묶은 뒤 물드는 동안 기다리면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눈다. 진하게 물든 손톱의 봉숭아물처럼 둘의 관계도 오래오래 지속될 줄 알았다. 하지만 방학이 끝난 뒤 보라와 친해진 지아는 그 손톱 위에 보라의 매니큐어를 칠한다. 그렇게 선과의 추억이 담긴 봉숭아물은 매니큐어로 인해 가려졌다. 여름방학 동안 보냈던 선과의 추억들도, ‘선’이라는 소중한 친구도 잠시 잊혀졌다.
이후 학원에서 울고 있는 보라에게 손수건을 건넨 선은 보라의 매니큐어를 받게 된다. 선의 손톱에 남아 있던 봉숭아물도 보라의 매니큐어로 인해 가려졌다. 선도 지아가 미웠다. 친구인 자신과 함께 어울리지 않으려는 지아가 미웠다.
그리고 영화의 끝부분, 피구 경기를 하며 난감한 상황에 처한 지아를 도와준 선의 손톱에는 어느덧 매니큐어가 모두 없어지고, 끝에 봉숭아물만 조금 남아 있다. 손톱 끝에 아주 조그맣게 남겨진 봉숭아물처럼 선과 지아의 관계는 거의 끝에 다다른 상태였다. 누군가의 선택으로 인해 이 관계가 회복될 수도, 혹은 영영 틀어질 수도 있는 상태였다. 이때, 선이 지아를 도움으로써 먼저 용기를 내서 손을 내밀었다. 이제는 지아가 이 용기에 화답해줄 차례다. 선이 먼저 지아의 손톱에 예쁜 빛깔을 선물해준 것처럼, 지아가 선의 손톱을 예쁘게 물들여주면 된다. 서로에게 남긴 상처를 또다른 소중한 추억으로 그렇게 뒤덮으면 된다.
우리들
영화 속 대부분의 장면에서 선의 눈빛은 마구 요동치고 있다. 친구들의 눈치를 살피고, 어정쩡하게 웃어보이고, 혹시 자신에게 화난 게 있는 거냐며 조심스레 물어보는 동안 계속 그 눈빛은 흔들리고 있다. 반면 방학 동안 지아를 바라보는 눈빛은 참 밝고 맑다. 오랜만에 생긴 자신의 친구가 그저 좋다. 지아의 눈빛은 보라를 만나기 전과 후가 확연히 대비된다. 방학 동안은 선을 다정하게 바라보지만, 보라와 어울리면서부터는 선을 쌀쌀맞게 바라보곤 한다. 보라의 눈빛은 항상 무언가를 꿰뚫어보는 것 같다. 동시에 가장 종잡을 수 없는 눈빛이다. 지아와 친해졌을 때는 마냥 다정하다가도 피구를 잘하는 지아를 바라볼 때와 자신을 제치고 1등을 했다는 지아를 바라볼 때는 또 한없이 날카롭다. 이 영화는 이렇게 배우들의 눈빛을 따라가다보면 그 감정선을 매우 섬세하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처음에는 나는 ‘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며 마주한 지아와 보라의 몇몇 모습들을 통해 나는 선이었고, 지아였고, 보라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어른들의 세계보다 더 예민하고 급격하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때로는 친구들의 눈치를 보며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조심스러워했고, 때로는 새로 사귄 친구가 더 좋다는 이유로 불과 어제까지 친하게 지내던 다른 친구와 거리를 두기도 했고, 때로는 살아남기 위해 영악해지기도 했다. 영화를 보며 이런 과거의 내가 계속 생각났고, 잠시는 잊고 지내던 선과 지아, 보라의 모습을 띈 몇몇 친구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조금은 부끄러워졌고, 슬퍼졌다.
선과 지아, 보라를 마냥 질책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말과 행동에서 나, 그리고 ‘우리들’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에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그랬다. 그때는 그게 우리들의 모든 세상이었다. 녹록하지 않은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한 서툰 우리들의 최선의 선택이었다. 누군가는 선이었고, 누군가는 지아였고, 또 누군가는 선과 지아의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나처럼 선과 지아, 보라의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우리들’은 선이었고, 지아였고, 보라였다. 이 영화는 서툴지만 절실했던 ‘우리들’의 이야기를 건네는 작품이다. 그리고 선, 지아, 보라의 이야기를 먼저 건넴으로써 자연스레 관객들이 어린 시절의 자신들을 기억해내고, 잠시 넣어두었던 이야기를 꺼내게 만드는 그런 작품이다.
영화의 시작부터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그리고 영화가 러닝타임 내내 나의 마음 한 구석에 항상 남아있던 어릴 적 기억을 계속 쿡쿡 쑤셨고, 자칫 방심하면 그 기억을 금방이라도 끄집어낼 것 같아서, 그럼 바로 눈물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뒤 ‘우리들’이라는 영화의 제목을 다시 마주했을 때 한꺼번에 몰아치는 감정은 주체할 수 없었다. 온 마음을 다 주고, 그로 인해 상처받아도 다시 또 내 마음을 주곤 했던 어린 시절의 나와 너, 우리들이 생각났다. 이 영화를 보고 서툴고 간절했던 그 시간들을 보낸, 어쩌면 힘겹게 버텨냈던 우리들에게 그저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조금은 아픈 기억들이 떠오른 이들은 꼭 안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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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 불이 꺼져도 멈출 수 없는 사랑의 힘
자신의 모습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살갗을 파고들듯 마음에 상처를 끊임없이 되새겨야 하기에 더욱 고통스럽다. 그 순간을 이들만의 사랑의 화법으로 이때까지 본 적 없었던 상상 이상의 로맨스를 펼쳐낸다. 사랑의 의미를 잃어가는 요즘과 딱 어울리는 이 영화는 어떤 색의 사랑을 띌지라도 함께하고 싶었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담아내어 더욱 강렬하게 느껴진다. 티모시 샬라메와 테일러 러셀이 출연하는 영화 '본즈 앤 올'은 11월 30일에 개봉했다.
평온한 풍경과 그림, 그리고 적막과 함께 흐르는 피아노 소리 속 잔잔한 목소리가 들린다. 모두가 잠든 밤, 몰래 빠져나와 친구들을 만나러 간 자리에서 자신도 모르게 내면에 자리 잡아 있는 미지의 존재와 마주하게 된 매런이 본능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홀로 남게 된 매런은 그동안 숨겨왔던 비밀을 알게 되며 내면에 휘몰아치는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떠난 아빠의 목소리를 노래 삼아 들으며 사라진 엄마를 찾아 떠난다. 매런은 자신과 비슷한 존재의 '이터'를 알게 된다.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 매런은 같은 종족의 사람들을 만나며 그동안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알게 된다. 종족의 이름은 ‘이터’이며 일종의 규칙으로 같은 종족이지만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과 함께하며 비밀을 공유함과 동시에 이유도 없이 찾아오는 식인성을 마주한다. 기억에 남지 않던 욕망의 기억을 떠올리며 죄책감을 느낄 새도 없이 모든 것을 공유하게 된다.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다른 규격의 공간을 명확하게 했다. 서로 다른 영향력이지만 장면 장면 겹치는 사랑과 살해의 기억이 매런으로 하여금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바로잡게 한다.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했지만 그가 느꼈던 따뜻한 온기는 피로 번져가도 놓을 수 없는 명확한 사랑의 형태로 바뀌고 뼈째로 집어삼켜도 괜찮을 사랑은 앞으로의 여정이 어떤 형태를 만들어갈지 궁금해지게 만든다.
카니발리즘을 통한 이야기 전개가 다소 낯설고 징그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받아들이는 순간을 넘어 그 존재 자체의 인식에 초점이 맞춰지며 개연성을 충족시킨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에 대한 물음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핏빛으로 얼룩진 배경과 대치되는 아름다운 풍경이 대비되며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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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동키가 아닌 EO의 시대
출처 : 네이버 영화
귀여운 포스터로 관객을 사로잡은 <당나귀 EO>
당나귀 하면 '슈렉'의 동키만 떠올렸다면, 이제 당나귀 EO가 생각날 겁니다! 강렬한 포스터로 "제 이야기를 들어보실래요?"라고 말하는 EO. 이 참을 수 없는 귀여움. 못참고 영화관으로 달려갈 여러분들을 위해 EO의 후기 및 기대 포인트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영화관에서 봐야만 하는 영화
이 영화는 꼭, 무조건 영화관에서 봐야 합니다. 왜 이렇게까지 강조하냐면, <당나귀 EO>는 제75회 칸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후 심사위원상과 사운드트랙상을 석권했어요. 영화는 풍부한 사운드로 보는 내내 EO에게 더 감정이입을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뛰어난 영상미도 한몫 합니다. 가끔 현실인지 구분이 안가는 듯한 영상 연출이 영화 중간 중간 나오는데, 이는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눈과 귀가 동시에 환상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을 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영화를 보고 난 뒤
영화는 "제 이야기를 들어보실래요?"라는 말에 걸맞게, EO의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폴란드에 있는 서커스단에서 '카산드라'와 함께 연기하는 당나귀 EO. '카산드라'와 EO는 단순히 같이 일하는 동료, 그 이상이죠. 하지만 그런 카산드라와 EO에게 생긴 비극인 사건. 그들은 동물보호단체에 의해 강제 이별을 하게 됩니다.
EO는 서커스단에서 나온 뒤 많은 일들이 생겨요. 길을 잃어 어두운 숲길을 걷기도 하고, 맛있는 당근을 먹기도 하고, 축구장에 들려 강제로 마스코트가 잠시나마 되기도 하고, 트럭에 갇히기도 하고.
EO는 마치 길 잃은 '사람'처럼, 여러 방황 끝에 결말을 맞이합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수상 후보였던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을 제치고 국제장편영화상 후보에 발탁되어 화제의 중심에 오르기도 한 '당나귀 EO'는 오는 10월 3일(화) 개봉한다고 합니다. 꼭, 영화관에서 관람하시길 추천드립니다!
에디터 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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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이 아닌 일제강점기를 다루다,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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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논문을 쓰던 무렵 예능프로그램인 <선을 넘는 녀석들>을 보다가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이 일제강점기 만주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당시에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을 패러디한 것만 보고 영화를 제대로 보지 않아서 작품의 시대상이 일제강점기라고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제대로 한 번 봐야지 하며 영화를 시작했다.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시놉시스
딱 한 놈만 살아남는다!
1930년대, 다양한 인종이 뒤엉키고 총칼이 난무하는 무법천지 만주의 축소판 제국 열차에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격동기를 살아가는 조선의 풍운아, 세 명의 남자가 운명처럼 맞닥뜨린다.돈 되는 건 뭐든 사냥하는 현상금 사냥꾼 박도원, 최고가 아니면 참을 수 없는 마적단 두목 박창이, 잡초 같은 생명력의 독고다이 열차털이범 윤태구. 이들은 서로의 정체를 모르는 채 태구가 열차를 털다 발견한 지도를 차지하기 위해 대륙을 누비는 추격전을 펼친다.
정체 불명의 지도 한 장을 둘러 싼 엇갈리는 추측 속에 일본군, 마적단까지 이들의 레이스에 가담하게 되고… 결과를 알 수 없는 대 혼전 속. 과연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한국영화에서 서부극이라니
한국영화에서 서부극은 살펴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카우보이들이 말타고 돌아다닐 황야도 없을뿐더러 그 영화의 분위기가 한국 정서와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라는 배경은 영화 속에서 많은 것을 허용해줄 수 있는 시대적 배경이라는 생각이 이번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을 보면서 느껴졌다.
너무나도 뼈아픈 시대인 것은 사실이지만 서부극의 배경조차 되지 않는 한국에서 시선을 만주로 조금만 돌려서 그곳에서 서로를 죽이는 총잡이들의 이야기를 다룰 수 있는 시대적 배경이 되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은 그 영화 자체보다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일제 강점기라는 시기가 어떻게 활용되는지 그 궁금증이 생기게 만들어준 작품이었다.
일반적으로 국내 미디어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 소재인 재즈 음악이라던지 중세풍 귀족 사회의 모습이라던지 심지어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과 같은 서부극의 배경처럼 과도기적이었던 그 시기에서만 유일하게 발견되는 다양한 사례들을 연구해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절 타령을 여기서도 해볼까?
우리나라 영화에 항상 바라는 점은 겨울이라는 영화적 문법에 갇히지 않는 다양한 계절감의 영화를 보고 싶다는 것이다. 무너가 암울한 시기의 작품을 볼 때면 비슷한 계절감에, 비슷한 내용에 소재와 주인공만 약간씩 달라지는 느낌이어서 뭔가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있다.
그런데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작품은 서부극을 표방하다보니 그간 일제강점점기 작품들 중에서 보지 못한 이 건조함을 보고 굉장히 새로운 시도에 좋게 다가왔다. 다른 역사 작품들에 비해서 그 무게감이 확실히 떨어지고 말도 안되는 컨셉으로 맥락과 개연성이 왜 저러나 싶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새로운 계절감으로 시대적 배경을 표현한 그 첫 시도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OST가 영화의 반은 살린 작품
한국판 서부극을 표방했기에 서부극이 사실 개연성이 없긴 하다. 갑자기 총들고 찾아와서 총격전을 벌이고 잠시 한 눈 팔면 사람들이 다 죽어있고, 저 남자들의 가오는 무엇이며,, 그래서 서부극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 볼 때부터 나는 이 영화에 개연성은 기대하지 않는다! 하며 다짐을 굳건히 하고 봤지만 사람 마음이라는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보는 내내 이 맥락없음은 무엇인가? 너무 영화가 캐릭터 빨인데? 이러면서 되게 지루하다가 갑자기 흘러나오는 OST! OST가 영화를 살렸다. 영화 자체에서는 딱히 긴장감이나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데 OST가 순간적인 몰입도를 굉장히 높여주는 역할을 제대로 해주고 있었다.
솔직히 내용만 보면 볼게 없었던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하지만 일제강점기라는 시기가 영화라는 미디어에서 얼마나 다양성을 제공하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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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임씨가 발견해낸 온기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어간다. 젊은 성인기를 거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서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바쁘게 삶을 이어가던 부모들은 아이가 성인이 되어 독립을 시작할 시기가 되면, 문득 자신이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그때부터 아이가 독립하여 잘 지내는지 멀리서 지켜보면서 작은 도움이라도 주려고 애쓴다. 그리고 자신의 자녀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한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부모 세대들에게는 성인기 부모로부터 독립된 이후 맞는 두 번째 독립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제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자녀에게 의존하고 싶은 욕구도 강해지고 실제로 자녀들에게 도움받는 일들도 맞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것들은 스스로 해결해나가야 한다.
건강 문제도 신경 쓰이게 되고, 과거에 가뿐히 했던 집안일들과 외부활동이 조금 더 힘들게 느껴지면 의존적이 되기 쉽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가는 부모 세대는 자녀에게 의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의 일을 느리기만 하나씩 해결해가고 가능하면 자녀들이 자신에게 너무 신경 쓰지 않게, 부담스럽지 않게 하려고 노력한다. 비록 사는 집이 조금 좁아도, 몸이 조금 불편해도 먼저 자녀에게 전화를 걸어서 부탁하지 않는다. 그렇게 노년기에 스스로 만들어가는 삶의 모습은 비록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조금은 보잘것없어 보여도 자신에게는 그래도 꽤 편안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노년기의 독립은 소소한 온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노년기의 삶을 만들어가고 있는 말임의 이야기
영화 <말임씨를 부탁해>는 노년기를 보내고 있는 정말임 여사(김영옥)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방에서 혼자 살고 있는 그는 서울에 살고 있는 아들 종욱(김영민)에 의지하지 않고 혼자 큰 문제없이 생활하고 있다. 아들의 전화에 퉁명스럽게 받고, 집에 내려온다는 아들의 말에 내려오지 말라며 전화를 툭 끊어버린다. 그렇게 몇 번의 통화를 반복하다가 결국 내려와서 인사드린다는 아들의 마지막 말에 알았다며 전화를 끊고는 천천히 일어나 집안 청소를 하기 시작한다. 비록 말임이 자신의 아들에게 퉁명스럽게 이야기했더라도 그의 속마음엔 아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 영화에서 말임과 종욱은 말임의 생활을 어떤 방식으로 할 건지에 대한 논쟁으로 계속 부딪힌다.
말임의 모습에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이제 노인이 된 부모 세대의 모습이 비친다. 말임은 자신의 문제로 아들과 며느리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아들 종욱은 혼자 있는 자신의 엄마가 무척 신경 쓰인다. 영화 내내 종욱은 엄마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들을 제시하고 실제로 반강제로 도움을 주려고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번번이 엄마와 부딪힌다. 영화는 어떤 것이 효도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자녀의 입장에서 부모의 편함을 생각해서 무언가를 해주려고 하지만 그건 진정으로 부모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 속 말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그냥 아들이 신경 쓰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하지만 몸까지 다쳐 불편한 모습은 더욱 아들의 심기를 건드린다. 겉으로 보기엔 엄마를 생각해 효도하는 자식으로 생각되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그건 엄마 말임이 원하는 효도의 모습은 아니었다.
서울로 올라와서 같이 지내자는 아들과 며느리의 설득에도 말임은 거절한다. 계단에서 넘어져 팔이 불편한 상황에서도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 스스로 생활을 이어나가려 애쓴다. 하지만 결국 아들과 며느리가 고용한 요양보호사 미선(박성연)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영화에서 말임과 미선은 아들 내외와는 다른 긴장감이 느껴진다. 아들과 며느리가 서로에 대한 이해와 오해로 인해 자주 다투게 되는데, 미선은 완전한 타인으로서 그들을 바라본다. 미선 역시 자신의 엄마를 병원에서 직접 요양하고 있는데 여러모로 말임과 종욱의 상황보다는 좋지 않아 보인다. 경제적인 점과 미선 엄마의 건강문제가 좋지 않은 미선은 영화 내내,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를 정확히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영화 말미까지 긴장을 만들게 된다.
영화 속 인물들은 대체적으로 공감받을 수 있는 인물들이다. 아들의 입장에서 엄마에 대한 걱정을 하는 종욱이 여러모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엄마를 챙기려고 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며느리 유진(김혜나)도 종욱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말임을 챙기는 것을 막지 않지만 경제적인 문제 등으로 인해 힘들어한다. 그리고 여러 가지 문제를 혼자 감당하고 있는 요양보호사 미선에게도 안타까움과 공감을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영화의 중심 캐릭터인 말임은 영화에서 가장 독립적이고 용감한 인물이다. 아들 내외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최선을 다해 아들을 밀어내는 그 모습에는 우리 부모세대의 마음과 진심이 가득 담겨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들은 여러 입장의 세대들에게 공감을 느끼게 만들기 때문에 조금은 색다른 가족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가족의 입장을 보여주며 온기를 전달하는 영화
영화 <말임씨를 부탁해>는 말임이라는 인물이 주변의 도움을 밀어내다가 우연히 주변에 있던 따뜻한 온기를 발견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스스로 일어나 독립할 수 있는 그 온기는 어찌 보면 말임이 가진 의지가 발견해낸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아들 내외와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여러 번의 다툼과 대화의 과정은 그들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준 것 같다. 말임의 가족들이 겪는 모든 과정이 따뜻하게 영화에 담겼다.
말임 역을 맡은 배우 김영옥은 이번 영화에서 65년 연기 인생에서 첫 주연을 맡았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나 [신사와 아가씨]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줬던 그는 스크린 현역 최고령 주연배우로 당당히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무엇보다 현실적인 엄마 연기로 보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아들 종욱 역을 맡은 배우 김영민은 과거 드라마 [부부의 세계], [나의 아저씨]나,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 출연해 좋은 연기를 보여줬다. 이번 영화에서도 엄마 역할의 배우 김영옥과 좋은 모자 케미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종욱의 부인 유진 역할의 배우 김혜나도 모자 사이에서 힘들어하는 며느리 역할로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고, <82년생 김지영>, [마인]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준 배우 박성연도 요양보호사 역할로 영화의 긴장감을 높였다.
영화 <말임씨를 부탁해>를 연출한 박경목 감독은 밴쿠버 국제영화제,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시체스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등 여러 영화제에서 큰 관심을 받았다. 특히나 <써니>, <부산행>이나 [오징어 게임]의 촬영감독이었던 이형덕 촬영감독과 여기에 모두 출연했던 김영옥 배우와 같이 작업하면서 보다 자연스러운 이미지를 영상으로 담담히 담아냈다.
본 포스팅은 소정의 비용을 받아 작성되었으며, 내용은 주관적인 평가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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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을 빼앗긴 레즈비언은 기억과 몸짓으로 말한다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언론시사회에 참석한 후 쓴 리뷰입니다.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말은 가장 손쉬운 자기 선언의 수단이다. "나는 남자입니다." "나는 30대입니다." "나는 게이입니다." 등의 말을 통해 우리는 각자의 정보를 상대에게 빠르고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다. 하지만 말이 전부는 아니다. 말이 없어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릴 수 있다. 때로는 말보다 더 선명한 방식으로. 영화 〈우리, 둘〉(원제: 'Two of Us')은 '말할 수 없는' 레즈비언들이 스스로의 존재를 강렬하게 선포하는 일에 관한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은 노년의 레즈비언 커플인 니나와 마도다. 둘은 복도를 가운데 두고 마주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은퇴한 둘은 로마로 이주해 한 집에 같이 살 계획을 꾸린다. 그런데 니나와 마도가 갈등을 겪기 시작한다. 마도가 자녀들에게 자신이 레즈비언이고 애인인 니나와 함께 살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니나는 '말하지 못하는' 마도를 답답해한다.
둘 사이의 갈등이 심해지던 때, 마도가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관계에 기묘한 변화가 생긴다. 이제 '말하지 못하는' 건 니나다. 니나는 매일 마도를 보고 싶고, 항상 마도의 곁에 머물고 싶다. 그러나 마도의 간병인은 그런 니나를 이상하게 여긴다. 니나는 간병인에게 자신이 마도의 레즈비언 애인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니나는 자신이 마도의 이웃, 친구로만 여겨지는 상황이 너무 답답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영화의 절정, 어머니가 레즈비언임을 알게 된 마도의 딸 앤은 그 사실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마도를 니나와 분리하려고만 한다. 그럼에도 마도가 계속 니나를 찾자 '제발 자신과 대화를 하자'고 울부짖는다. 하지만 마도는 이중적 의미에서 말할 수 없다. 뇌졸중에 걸려 언어능력을 잃은 게 첫 번째 이유고, 이성애규범적 세계가 레즈비언의 발화를 허용하지 않는 게 두 번째 이유다. 앤이 애타게 소리쳐봤자, 대답은 오지 않는다. 엄마와의 대화를 막는 건 이성애중심적 체제와 그에 안주하는 앤의 편견이지만, 앤은 끝내 무엇이 자신과 엄마의 대화를 막는지 알지 못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말'이 중요한 소재임을 암시한다. 영화는 두 여자아이가 숨바꼭질을 하다가 한 명이 사라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술래인 아이는 사라진 친구를 애타게 부르지만, 그 목소리는 까마귀 울음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는다.' 애타게 부르짖어도 들리지 않는 아이의 목소리는 자신들이 레즈비언 커플임을 말하지 못하는 니나와 마도를 닮았다.
하지만 말이 없다고 니나와 마도가, 그들의 관계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말이 아니어도 그들의 존재와 사랑을 증명할 수단은 있다. 말의 강제적 부재라는 상황에서, 니나와 마도가 스스로를 증명하는 방식은 기억과 몸짓이다.
먼저 기억의 문제를 보자. 앤이 아무리 부정해도, 마도의 옛 앨범에 담긴 건 그녀의 아버지가 아닌 니나다. 마도의 모든 걸 제일 잘 아는 사람도 니나다. 오랜 기간 서로가 서로의 가장 친밀한 존재였던 둘은 동성애 친밀성을 배제한 가족제도와 규범이 알지 못하는 내밀한 경험들을 쌓아왔다. 니나와 함께 쌓아온 내밀한 경험은 '말을 잃은' 마도에게 가장 분명한 언어가 되어 둘의 과거를 소환하고, 현재를 구성하며, 미래를 꿈꾸게 한다. 니나와 마도는 오랫동안 함께 쌓아온 기억으로 소통한다. 이들의 소통이 앤을 비롯한 타인에게 '들리지 않는' 건 이 영화의 가장 큰 비극이다.
두 번째는 몸짓이다. 영화의 마지막, 니나는 요양 병원에 있는 마도를 몰래 자기 집으로 빼돌린 후 함께 블루스를 춘다. 밖에서는 앤이 문을 쾅쾅 두드리며 마도를 돌려달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마도와 니나는 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듣지 않는 건' 앤이 아닌 마도와 니나다. 세계가 그들을 거부하자, 그들만의 세계를 만든 것이다. 사랑을 속삭이는 말은 들리지만, 사랑에 손가락질하는 말은 들리지 않는 세계를. 서툴고 경직된 그들의 블루스가 무엇보다 단단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다.
이렇게 말을 빼앗긴 늙은 레즈비언 커플은 기억과 몸짓으로 자신들을 증언한다. 〈우리, 둘〉은 '말'의 은유를 통해 존재에 대한 윤리의 문제를 다루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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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나리 감독 정이삭 / 역대급 블록버스터 재난영화 / 4DX관 연속 매진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트위스터스" 후기입니다.
*엔드크레딧 전에 캐릭터들의 후기를 담은 쿠키영상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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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섀도우 앤 본>
[2021년 4월 23일, 넷플릭스 공개]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유일무이한 희망. 빛의 힘을 지닌 소녀여, 어둠의 공포를 몰아내라. 그리샤버스로 들어갈 준비를 하라.
전쟁과 어둠으로 찢긴 세계. 그곳에 빛의 힘을 지닌 소녀가 나타난다. 평범한 고아 알리나는 세상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하지만 사악한 힘이 그녀의 길을 가로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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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벚꽃 같은 나의 연인> 공식 예고편
"그래서 난 봄이 오면 늘 당신을 떠올려요, 벚꽃 같은 나의 연인을" 70만 부 이상 판매된 인기 연애소설, 마침내 영화가 되다! 사진작가 지망생 하루토와 남들보다 몇십 배 빠르게 늙는 난치병에 걸린 미사키 사이에 덧없이 흘러간 사랑 이야기. 벚꽃처럼 짧게 피고 졌지만 소중했던 두 사람의 사랑. 하루토의 필름에 새겨진 미사키의 미소는, 벚꽃이 지고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의 가슴 속엔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출연: 나카지마 켄토, 마츠모토 호노카, 나가야마 켄토, 사쿠라이 유키, 오이카와 미츠히로 주제가: 'Eien', 미스터 칠드런 원작 소설: 우야마 케이스케 《벚꽃 같은 나의 연인》(슈에이샤 분코 출간) 넷플릭스 영화 《벚꽃 같은 나의 연인》, 곧 공개 예정.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