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두codu2024-02-28 08:38:31
무엇이 우리를 지켜줄 것인가?
장재현 감독, <파묘>(2024)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 <파묘>의 초반부를 이끄는 동력은 미국 한인 재벌의 핏줄에 흐르는 저주다. 저주를 따라 이름 없는 묘를 파헤치며 증오에 찬 혼령을 깨운 영화는 의미심장한 대사를 기점으로 장르적 변환을 시도한다. 한국의 오컬트 영화를 책임지고 있는 장재현 감독은 무덤과 혼령의 공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무덤이 위치한 범의 허리를 팔수록 묻혀있던 한반도의 뿌리 깊은 역사가 드러난다.
핏줄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상황에 따라 이 사실은 축복이기도, 저주이기도 하다. 미국과 한국에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으로 큰 부를 이룬 LA의 한인 재벌에게 유전병이 발병한다. 가문에 이어진 부유함은 축복이지만 핏줄을 타고 내려온 광기와 죽음의 그림자는 피할 수 없는 저주다.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박지용(김재철)은 불신을 무릅쓰고 무당 화림(김고은)에게 의뢰를 부탁한다.
보이고 만질 수 있는 환한 빛의 세계와 그림자에 숨어있는 어둠의 세계. 그 경계에 무당 화림이 있다. 불신이 놀라움으로 바뀌는 얼굴을 보며 속으로 비웃음을 감추는 이 젊은 무속인은 빛의 세계로 삐져나온 어둠의 것들을 능숙하게 다루고 해결한다. 지용의 아기를 보고 묫바람, 즉 대대로 이어진 유전병의 원인이 선대의 묫자리에 있다고 진단한 화림은 지관 상덕(최민식)을 찾는다. 돈 있는 자들의 묫자리를 봐주며 “땅을 팔아먹고” 사는 상덕은 하늘과 땅의 이치와 만물의 순환을 읽는 풍수사다. 죽은 사람의 자리가 좋지 않다면 묘를 이장해야 한다. 막대한 돈이 걸린 이장을 위해 장의사 영곤(유해진)까지 합세해 무속인 화림과 조수 봉길 그리고 풍수사 상덕은 힘을 모은다.
산 깊은 곳, 산세가 탁 트여있지만 여우가 많고 어쩐지 그늘이 진 곳이 의뢰인 박지용의 조부가 묻힌 자리다. 친일로 부와 지위를 얻은 박지용의 조부는 “악지 중의 악지”에 묻혀 있었고, 그 한은 젖과 꿀이 흐르는 미국에 사는 후손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화림과 봉길 그리고 상덕과 영근이 힘을 합쳐 굿과 이장을 동시에 진행하지만, 관은 열리고 증오만 남은 혼은 현실에 손을 뻗친다. 나라를 팔아 100년 넘게 부와 명예 그리고 조부의 증오에 찬 저주를 이어받은 후손들은 목숨으로 대가를 치른다.
조부의 관 아래 묻혀 있던 수직으로 세워진 거대한 관이 드러나며 범의 허리를 자른 여우의 정체가 밝혀진다. 두 번째 관의 등장은 영화가 다루는 시간의 범위를 500년으로 확장시킨다. 신기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진저리를 칠만큼 께름칙한 위용을 자랑하는 관에 봉인돼 있던 것은 일본의 정령 ‘오니’다. “험한 것”의 존재가 구체적으로 드러날수록 초자연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미스터리에서 오는 공포는 줄어든다. 조부의 혼이 유리창을 통해 흐릿한 형상을 인지할 수 있는 무언가였다면, 500년 이상 묵은 장군의 정령은 그림자와 육체를 지니고 간을 빼먹는 구체적인 형상의 괴물이다. 장재현 감독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아닌 압도적인 무언가로 두려움을 자아내기 시작한다. 자신을 ‘전쟁의 신’이라 부르는 이 존재는 ‘두려움’ 그 자체다. 원한을 품고 성불하지 못한 혼이 아니라 죽음을 먹고 자란 두려움의 실체화다. ‘오니’는 자신의 부하가 될 것을, 두려움에 무릎 꿇고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한번 두려움에 굴복했던 화림은 봉길을 잃을 뻔한 위기를 겪고 자신의 지켜줄 존재를 대동한다. 무당 화림이 모시는 ‘할매’ 앞에서 오니는 승탑에서 그러했듯 불의 형상이 되어 도망간다.
<파묘>는 끊을 수 없는 연결과 순환의 고리 위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핏줄, 신 그리고 땅과 하늘의 모든 것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며, 과거부터 쌓아 온 역사는 미래로 이어진다는 것을 주지 시킨다. 신내림을 받아야만 하는 무속인에게 신이란 거부할 수 없는 핏줄과도 같다. 하늘과 땅의 이치를 아는 풍수사는 순환의 원리를 외면할 수 없다. 화림이 할매의 비호를 받고 상덕이 음양오행의 이치에서 길을 찾듯, 일본의 두려움에 굴복해 영혼을 바친 박씨 가문은 저주에 떠안을 수밖에 없다. 이들이 선택한 것은 곧 일본 오니와의 연결이기 때문이다. <파묘>는 한반도라는 땅과 연결된 애국지족의 마음이 민족을 배반한 반역자와 침략자들을 뿌리 뽑는 영화다. 땅에 새겨진 역사는 잊혀지지 않는다.
범의 허리, 즉 한반도의 허리를 끊으려는 일본의 책략을 막기 위해 ‘철혈단’은 땅의 말뚝을 뽑는다. 상덕은 그들의 이름이 새겨진 나무와 자신의 피로 불타는 칼을 격퇴하는 데 성공한다. 땅의 기운을 읽는 자의 피와 역사를 지켜낸 이름들로 불타는 철이 자아내는 두려움은 격파된다. 작은 태양 같은 동그랗고 빨간 도깨비불의 모습은 일장기를 연상시킨다. 그러니 상덕이 음양오행의 이치로 오니를 물리치는 것은 일장기를 음양이 조화된 태극기가 베어내는 것과 다름없다. 현대 한국 영화사의 맥락에서 보면 <명량>의 이순신(최민식)과 <영웅>의 설희(김고은)가 (윤)봉길과 함께 일본 장군을 격퇴하는 것이다.
영화를 본 뒤 ‘우리 조상님들은 잘 묻혀 계신지’ 걱정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땅과 하늘의 기운을 살피고 망자에게 예의를 다하는 한국인이라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음을 무의식 중에 알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지금 이 땅을 딛고 선 우리도 언젠가는 역사의 일부가 된다. 수 천년 이어진 민족의 역사뿐 아니라 미래로 이어질 역사도 잊어서는 안 된다. <파묘>의 시작과 끝에는 새로운 시대의 생명이 있다. 박씨 가문의 갓난아기에서 시작한 여정은 상덕의 딸과 배 안의 아기를 축복하는 결혼식으로 끝난다. 장재현 감독은 역사에 축적된 불의를 심판하며 미래의 세대로 희망을 넘긴다. 박씨 가문의 장손들과 악한 역사를 함께 해 온 어머니는 죽었지만 며느리와 아이만은 살아남았다. 어쩔 수 없이 이어져 내려온 친일의 역사를 이어받은 아이를 용서한다. 이제 아이는 무엇과 연결될지 선택해야 한다. 과거의 사람들은 새로운 세대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현재의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어떤 선택을 내리든 거대한 역사와의 연결을 피할 수 없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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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백 공간에 가득 담긴 유년의 설렘과 아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69년의 벨파스트. 날이 좋으면 골목에서 함께 춤추며 놀고, 해 질 녘엔 가족들이 다 함께 모여 저녁을 먹으며, 거리의 모두가 서로의 가족을 알고 아끼며 지내던 도시. 어느 날, 종교를 이유로 폭력 사건과 격렬한 충돌, 대립, 갈등이 시내에서 발생하자 9살 소년 '버디(주드 힐)'의 세계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런던에서 일하는 '아빠(제이미 도넌)'와 혼자서 육아를 책임져 온 '엄마(케이트리오나 발피)'는 정치, 경제적 이유로 이전과 달리 계속해서 싸우기 시작하고, 재미와 환상이 가득한 공간이었던 벨파스트의 골목에는 장벽이 세워지고 전과 다른 긴장감이 맴돈다. 그저 평범하게 하교를 가고 좋아하는 소녀와 데이트를 하고 가족과 함께 즐겁고 싶었던 버디의 일상과 공간은 그렇게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케네스 브래너 감독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려낸 자전적 이야기인 영화 <벨파스트>는 아카데미 시상식 즈음에 개봉하는 작품답게 화려한 문구들로 수식된다. 당장 <벨파스트>는 제75회 영국 아카데미 영국 작품상을 수상했고, 제94회 아카데미에서도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등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그러나 1시간 반 가량 밖에 되지 않는 흑백 영화가 관객과 비평가의 눈을 모두 사로잡을 수 있었던 힘은 이처럼 화려한 수식어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1969년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의 평화로운 일상과 예기치 않게 발생한 내전 상황을 담아낸 <벨파스트>의 진짜 힘은 당시 '공간'에 깃들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9살 아이의 시선으로 차분히 담아내는 '진솔함'이다.
<벨파스트>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역시나 오프닝 시퀀스다. 브래너 감독은 현시점 벨파스트의 다양한 공간을 그 어떤 부연 설명도 없이 카메라에 담는다. 가장 먼저 현대적인 조선소 일대를 비춘 카메라는 '타이타닉 호텔'의 표지판을 거쳐 오래된 배 건조장의 흔적을 담고, 고풍스러운 건물과 다양한 유적지를 비춘 후 서서히 아기자기하게 주택이 모여 있는 마을의 모습을 비춘다.
이때 카메라는 주택가 거리마다 위치한 벽들과 그 벽에 그려진 강렬하면서도 상흔이 느껴지는 그림을 보여준 후, 거리를 가로막고 있는 그 벽 너머에서 펼쳐지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흑백으로 소개한다. 이러한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의 태도와 접근법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듯 보인다. 벨파스트라는 공간에 얽히고설킨 역사를 자세히 설명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체감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가 묻어 나오는 것이다. 특히 오프닝에서 비추는 공간과 건물 하나하나가 벨파스트의 긴 세월을 모두 품고 있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우선 가장 먼저 등장한 조선소는 벨파스트의 영광을 보여준다. 벨파스트는 북아일랜드 정치, 경제, 문화의 최대 도시로, 라간(Lagan) 강을 끼고 있어서 조선업이 발달했다. 20세기 초에는 아일랜드 섬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였고, 그 당시에 타이타닉 호가 벨파스트의 할랜드 앤 울프 사에서 건조되기도 했다. 반면에 주택가를 가로지르는, peace line이라 부르는 벽들은 도시의 상처들이다. 1960년대 말 이후부터 가톨릭교도(친아일랜드) 주민과 신교도(친영국) 주민 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폭력 사태가 발생하면서, 충돌 소지가 있는 거주 지역 사이에 장벽이 쳐진 것이다. 그래서 이 장벽에 그려진 정치적, 역사적 벽화와 조선소는 강한 대비를 이룬다.
또한 영화는 시작처럼 마지막도 벨파스트의 공간과 함께 한다. 클로징 시퀀스는 도시를 떠난 이들, 남은 자들, 그리고 길을 잃은 모든 이들에게 바친다는 자막과 함께 시작점으로 되돌아가 벨파스트의 조선소를 비추면 끝난다.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다시 그 건축이 우리를 만든다(We shape our buildings, thereafter they shape us).”는 윈스턴 처칠의 말처럼, 1969년 벨파스트 거리마다 생겨난 장벽들과 그 장벽들로 인해 만들어진 이야기들이 50여 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도시에 깃들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북아일랜드 분쟁'처럼 역사적인 네이밍이 아니라 벨파스트라는 단순하나 명료한 표현이 영화의 제목이 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영화를 보다 보면 당시 거리의 모습과 분위기를 스크린으로 고스란히 옮겨 오려는 브래너 감독의 노력이 유달리 절실하게 느껴진다. 실제로 브래너 감독은 <오리엔트 특급 살인>, <아르테미스 파울>, <나일 강의 죽음>을 함께 한 프로덕션 디자이너 짐 클레이와 협업해 언덕과 시골, 부두와 맞닿은 벨파스트의 공간감을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다. 특히 팬데믹으로 인해 도시에서의 촬영이 어려워지자 영국 햄프셔에 있는 ‘판버러(Farnborough)’ 국제공항의 활주로 끝에 세트를 지어 벨파스트를 실제로 옮겨오기도 했다.
이때 <벨파스트>는 공들여 그려낸 도시 안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9살 소년의 시선으로 담아낸다. 이를 알 수 있는 영화적 장치는 여러 가지가 있다. 버디는 가족의 이야기를 언제나 부모의 대화를 훔쳐 듣거나 그들의 싸움을 몰래 보는 식으로 알게 된다. 또 당시 북아일랜드를 둘러싼 영국 내의 정치적 이슈, 또 역사적인 이슈에 대한 정보도 제한적으로 제공된다. 티비 속 뉴스를 통해 단순히 배경과 현황만 알려주며, 당시 격렬했던 북아일랜드 갈등의 원인을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 간의 갈등으로 단순화한다. 교회에서 들은 목사의 설교를 버디가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하나, 영화는 버디에게 굳이 그 답을 찾지 않으려는 식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덕분에 <벨파스트>가 모든 관객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상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북아일랜드의 분쟁은 단순히 종교 갈등이라고 볼 수 없다. 영국의 아일랜드 식민지배가 길어진 결과 개신교도들을 중심으로 한 이주민이 영국 잔류를 희망하고, 가톨릭교도가 다수인 랜드인은 독립국 아일랜드와의 통일을 바라는 것이 기본적인 갈등 구도다. 달리 말해 영화는 어떤 측면에 주목하느냐에 따라 종교 분쟁이 될 수도 있고, 식민 지배를 둘러싼 이념의 싸움이 될 수도 있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거대한 사건을 가장 미시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접근하여 풀어낸다. 처음으로 폭동을 마주하는 순간이 대표적이다. 영화는 폭동을 일으킨 사람들의 구호와 외침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저 슬로 모션으로, 또 360도 회전하는 카메라 속에 버디의 반응을 온전히 담아내려고 한다. 그가 인생 처음으로 맞이한 삶의 전환점을 강조한다. 이 장면은 잉글랜드로 이주하자는 부모님의 말에 격렬하게 반응하는 버디의 모습과도 이어진다. 그는 잉글랜드로의 이사를 격렬하게 반대한다. 사촌들과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학교에서 썸을 타고 있던 여자 친구와의 관계를 깰 수 없다는 것이다. 버디에게는 폭력과 갈등의 현장이 내전의 공포보다는 그저 일상의 파괴로 다가왔던 것이고, 이는 드라마틱하면서 보편적인 공감대를 이끌어 내는 힘이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벨파스트>는 유머만 조금 부족할 뿐,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의 <조조 래빗>과 비슷한 인상을 준다.
또한 <벨파스트>는 흑백 연출을 통해 위기에 빠져드는 사람들의 감정선을 가능한 진솔하게, 자극적이지 않게 담아낸다.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과 분위기에 포커스를 맞추면서 직관적으로 그들의 감정선을 느끼게 하고, 누군가에게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 도시의 역사에 불과했던 사건 속으로 잠시나마 온전히 빠져들 수 있게 한다. 비록 실제 세상과 다른 옛날 신문 기사 속 흑백 사진에서 오히려 많은 진정성이 느껴지듯이, 흑백이라는 시적인 효과로부터 더욱 현실적인 효과를 이끌어 내는 셈이다.
특히 무엇보다도 영화가 집중하고 있는 평범한 가족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평범한 가족의 모습을 보다 화려하고 서사시적인 느낌으로 보여주고 싶었다"던 브래너 감독의 의도가 적중한 것이다. 혼자서 두 아이를 키울 정도로 강인한 엄마는 그 누구보다 따뜻하면서도 엄격하게 버디를 키우고, 런던에서 목수로 일하는 아빠는 함께 지내지 못하지만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려고 노력한다. 현실적인 유머가 빛나는 '할머니(주디 덴치)'와 반대로 낭만이 넘치는 '할아버지(시어런 하인즈)'는 버디에게 삶의 지혜를 전해준다. 흑백 필름은 이러한 관계성에 담긴 진솔함을 그 어떤 방식보다도 효과적으로 끄집어내고, 강조해주는 듯 보인다.
이에 더해 순간적으로 등장하는 흑백 외의 색채는 그 진솔함에 깊이를 더해준다. 벨파스트의 풍경을 비추는 오프닝과 클로징 장면을 제외하면, 영화에서 색채가 덧입혀지는 순간은 버디가 가족과 함께 연극이나 영화를 보는 순간뿐이다. 이는 담담하고 차분하게 쌓아 올라가던 버디네 가족 간의 관계성과 감정선에 방점을 찍는 순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가족들이 다 함께 영화를 보는 장면 다음에 가족과의 이별을 그려내는 후반부는 눈물 흘리는 이 하나 없이도, 구슬프다.
그간 케네스 브래너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사실 들쑥날쑥한 평가를 받아왔다. 본작에서도 버디가 받는 크리스마스 선물 중 하나인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오리엔트 특급 살인>과 <나일 강의 죽음>은 흥행에는 성공했으나 평가는 미묘했다. 동명의 소설을 영상화한 <아르테미스 파울>은 극장 개봉도 하지 못한 채 디즈니+ 로 직행했다. MCU 페이즈 1에 속한 <토르: 천둥의 신> 역시 독립된 작품으로서는 긍정적인 평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그는 자신의 인생 시작점으로 되돌아가 그 공간에 가득한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마침내 그 결실을 보는 듯하다. 즉, <벨파스트>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라는, 또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이라는 익숙한 명언이 1승을 추가하는, 그런 영화라고 할 수 있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삶은 공간이고 그 공간은 삶의 거울이다. 영화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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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우 같은 호러에 침수된 미스터리
<오리엔트 특급 살인> <나일 강의 죽음>에 이어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까지 애거사 크리스티의 원작을 꾸준히 영화화하고 있는 케네스 브래너의 집념은 대단하다. 고전의 힘을 믿고 이를 복원하는 그는 과거 <햄릿> <헨리 5세> <헛소동> 등 셰익스피어의 고전을 길어 올린 바 있다. 그가 연출한 <토르> 시리즈에서도 <햄릿>의 느낌이 강하게 느껴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닐터. 하지만 고전의 맛을 살리는 유일무이한 연출자로서 그의 노력은 예상 가능한 지점까지만 빛난다. 그 문제점은 이번 영화에서도 반복된다.
과거엔 명탐정, 하지만 지금은 은퇴자! 에르큘 포와로(케네스 브래너)는 현직에서 물러나 베니스에서 꿀맛 같은 평범한 삶을 산다. 물론 집 밖에는 하염없이 그를 기다리는 의뢰자들이 있지만. 그러던 어느 날 오랜 친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아리아드네 올리버(티나 페이)가 찾아와 부탁 하나를 한다. 다음 책 집필을 위해 심령술사 조이스 레이놀즈(양자경)의 실체를 밝혀달라고. 이를 승락한 포와로는 올리버와 함께 핼러윈 밤 로웨나 드레이크(켈리 라일리)의 저택에서 열리는 교령회에 참석한다. 죽은 딸 알리시아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엄마 드레이크의 소원에 의해 레이놀즈는 이곳으로 오고, 곧이여 교령회가 시작한다. 하지만 왕년의 명탐정 포와로는 수상한 낌새를 느낀다. 그리고 어김없이 의문의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이 집에 있었던 모든 이들은 유력한 용의자. 또 한 번 포와로의 추리는 시작된다.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은 확실히 전작들과 다르다. 이전 두 작품에서 보이는 멋진 배경과 공간은 찾아보기 힘들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인 베니스는 어둠으로 가려져 오로지 공포로 점철된 무대로서만 활용한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번 영화의 주요 소재는 유령이다. 포와로처럼 극강 T이고 트릭이 전혀 통하지 않는 이에게도 그 서늘함이 느껴질 정도의 어둠과 공포의 공간, 그리고 밀실 살인은 그 자체로 흡입력을 갖는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 <핼러윈 파티>가 원작인 이번 영화는 포와로에게 큰 시련을 안겨준다. 그건 바로 ‘죽음’. 극 중 시간적 배경은 세계 제2차 대전 이후이고, 탐정이란 직업으로 인해 죽음의 그림자가 언제나 그의 곁을 따라오는 것에 정신적으로 시달렸던 그였기에 이번 작업은 그 자체로 고난도다. 내적 아픔으로 진실을 보지 못하는 그는 부상을 입고 실전 경기에 뛰는 선수처럼 이 밀실 추리에 참여한다. 물론, 포와로 실력은 녹슬지 않았다. 하지만 그도 인간이기에 죽음은 물론, 나이듦에 대한 공포는 그를 계속해서 괴롭힌다.
전작과의 차별화 포인트를 주기 위한 공포는 영화 전체 분위기를 압도한다. 호러 영화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점프스퀘어나 샹들리에가 갑자기 떨어지고 원혼들의 소리 등의 효과음, 비틀어진 숏 구도 등 갖가지 효과와 카메라 앵글로 공포감은 조성된다. 이를 통해 포와로는 물론, 주변인들의 불안감을 증폭시키며 그 자체로서 긴장감을 배가 시킨다.
하지만 호러의 강도가 커서인지 추리와의 불균형을 이룬다. 후반부로 갈수록 미스터리가 강조되어야 하는데, 호러가 추리를 집어삼키는 듯한 느낌이 다분하다. 극 후반부, 포와로의 예리한 추리력과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는 귀신인 그의 능력이 튀어나오며 미스터리의 방점은 찍지만, 전작에 비해 추리의 재미는 덜하다. 마치 추리 보단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망자의 살풀이 같은 느낌이 더 강하고, 망자를 잃은 자들의 슬픔을 위로하는 부분이 더 깊게 보여진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전작 보다 범인은 쉽게 유추되는 건 아쉬운 부분이다. (전작과 더불어 이 작품의 원작을 읽지 않았다는 점 참고 바란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케네스 브래너의 고전 되살리기 영화는 그 자체로 의미는 있다. 이런 고전이 가진 힘을 영상 매체로 전하는 건 계속되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고전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복원하는 것에 그치고 만다. 그러니까 이 고전을 작금의 시대에 왜 길어올렸는지에 대한 접점이 약하다. 아마 코로나19를 겪은 후 내놓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죽음’의 키워드를 활용하고자 이 원작을 선택했을 것으로 유추되지만, 좀 더 설명적인 부분이나 직접적인 부분이 더 가해졌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노력에 비해 낮은 평가는 관객으로도 아쉬운 입장이다.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은 새로운 추리 영화를 만나고 싶은 분들이라면 좋은 선택이다. 단, 원작을 읽지 않으면 더 좋을 것 같다. 원작을 읽은 분들이라면 추리적인 부분의 재미는 확실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케네스 브레너 감독의 포와로 시리즈가 계속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만든다면 고전과 현실의 다리 역할을 견고히 하길 바란다. 그래야 고전의 맛은 계속될 테니까.
사진제공: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평점: 2.5 / 5.0
한줄평: 호러와 미스터리의 불균형 속 평이한 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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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렬히 응원하고 싶은 '우정'과 '사랑'
내 인생에 윤슬처럼 반짝반짝 빛났던 그 시절, 모든 걸 나눠주며 나를 빛나게 해 주던 나의 '1번'이 있다면 얼마나 부러운 일일까.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은 이들의 우정과 사랑을 사랑스럽게 담아내면서 동시에 열렬히 응원한다.
박상영 작가가 집필한 동명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 삼은 '대도시의 사랑법'은 원작에 포함된 단편들 중 '재희' 챕터만 따로 떼어내 영화화하였다. 그래서 주인공 재희(김고은)의 이름은 그대로 사용하고, 영은 흥수(노상현)로 바뀌었다.
원작 소설처럼 성소수자인 흥수의 시선으로 20살부터 33살까지 13년 간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흥수의 연애사와 커밍아웃 고충, 흥수의 비밀을 다루는 방식 때문에 재희와 벌어지는 갈등, 수많은 남자들과 사랑하고 이별하는 과정을 겪으며 성숙해지는 재희의 성장 서사들을 118분에 담아낸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두 사람은 함께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돌아서고, 화해하고, 의지하면서 더욱 단단해지고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을 현실감 있게 그린다.
영화 속에서 수위 높은 장면들이나 불편한 상황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도 억지스럽지 않고 매우 현실적이다. 아직 여물지 않은, 사회적 관념을 깬 두 청춘의 성장 과정은 아슬아슬하며 때로는 거칠다. 연출을 맡은 이언희 감독은 이를 담백하고 용기 있게 정면승부를 펼친다. 상업적 측면에서 리스크가 될 수도 있는 면면들을 타협하지 않고 우직하게 표현한다. 그 과정을 겪었기에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까지 색깔을 유지하면서 무사히 완주한다.
영화로 공개되기까지 원작 독자들이 궁금해하고 상상해 봤을 재희 캐릭터를 김고은이 연기하면서 통통 튀는 러블리한 캐릭터로 발전됐다. 제멋대로지만 미워할 수 없고, 자기감정에 솔직한 캐릭터 본연의 매력을 유지하면서 관객들을 무장해제 시키는 미소와 개성 있는 스타일링으로 입체감을 더했다. 자칫 작위적으로 보일 법한 캐릭터성이나 에피소드도 김고은의 연기가 더해지면서 몰입도를 높인다.
애플 TV+ '파친코' 시리즈로 눈도장받은 노상현 또한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관객들의 이목을 사로잡는다. 아픔이 있는 흥수의 내면 및 감정선은 물론이며, 김고은과의 앙상블까지 매우 훌륭하다. 백이삭을 잇는 새로운 인생캐릭터 갱신이라고 해도 좋다.
두 배우의 현실 연기를 바탕으로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서사에 과몰입하다가 하이라이트인 재희의 결혼식에서 폭발한다. 축가를 맡은 흥수의 어딘가 모르게 뻣뻣한 댄스가 웃음을 유발하면서도 울컥하게 만든다. 미스에이의 'Bad Girl Good Girl'이 이렇게 눈물버튼을 누르는 노래일 줄이야.
원작 소설이 퀴어 작가가 쓴 퀴어물로 잘 알려져 있으나, 홍보 단계에선 퀴어 요소는 쏙 빠진 채 '사랑법'이라는 중의적인 표현으로 소개되다 보니 잘 모르는 관객들은 김고은, 노상현 주연의 청춘 러브스토리로 오해할 수 있다. 심지어 예고편까지 우정과 사랑 사이에 놓인 남녀 캐릭터처럼 표현해 낚시성 아니냐며 온라인에서 논란되기도 했다.
아무래도 퀴어 요소가 아직까지 국내에선 대중적이지 않다 보니 헤테로 마케팅으로 미끼를 던졌을 것이다. 그 미끼에 낚여서라도 이 영화는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다. 영화를 접하면 소수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존중을 충분히 무게감 있게 담아냈고, 동성애의 비밀을 나눈 두 친구의 우정과 성장 서사도 함께 버무려져 있으니 '퀴어 지우기' 아니냐는 오해는 넣어두고 극장에 오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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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단어를 안 외우고 보는 토익 시험처럼
살아있는데 죽었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바지사장계의 슈퍼스타 이만재(조진웅)이다. 그냥 평범한 월급쟁이었던 만재. 갑자기 돈이 급한 일이 생겼다. 한 집안의 가장인 만재. 분투를 벌이나 쉽지 않다. 좌절하는 만재.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일어설 구멍은 있다. 어디선가 날아든 '바지사장' 공개 구인 명함을 본 만재는 바지사장 시장에 발을 들인다. 잘 나가는 만재. 바지사장 일을 하며 어느 정도 모은 돈을 가지고 사업을 기획하려고 한다. 이 일만 잘되면 아내와 아내 몸에 있는 아이 셋이서 함께 살 수 있다. 행복감에 부푼 만재. 하지만 만재에게 큰 위기가 들이닥친다. 어느 날, 만재가 외국으로 떠났다. 숙소에 들어가서 습관처럼 튼 TV. 만재는 아연실색한다. '벤처기업가 이만재 씨가 1000억을 횡령하고 사망했다'는 뉴스를 본 것이다. 동시에 어떤 남자들이 숙소에 침입해서 만재를 납치한다. '데드맨'이 된 만재. 과연 만재는 재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바지사장 처음 들어봐
이 영화는 ‘바지사장의 세계’라는 배경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리고 이 바지사장이라는 세계를 나름 경제적으로 잘 활용한다. 바지사장이 뭘까? 바로 이름만 사장이라는 뜻이다. 이 ‘이름’이 한국사회에서 주도적으로 사용되는 곳이 어디일까? 정치권, 돈을 버는 일(경제권), 매체에 등장해서 이름과 얼굴이 유명해지는 일이 그렇다. 이런 여러 상황 속에서 이름이라는 모티브를 성실하게 구현한다. 대표적으로 영화의 주인공 김희애 배우 맡은 심여사 캐릭터가 정치 컨설턴트다. 정치 컨설턴트? 어디서 이름은 들어봤는데 누구 잘 생각이 안 난다. 이는 곧 이름이 팔리지는 않지만 존재감은 세다는 의미다. 그리고 정치의 단면 중 하나는 ‘신뢰가 갈 만한 이름에게 지지를 보내는 것’ 아니겠어? 이 정치를 두고 컨설턴트 심여사를 중심으로 정치권에 대한 내용을 전개한다. 이 정치권에서 카메라를 재계로 옮겨가는 이야기 흐름도 아예 다른 차원으로 옮겨 다니는 수준(?)은 아니다. 나름 근거가 있는 전개를 통해 이야기를 보여준다. 적어도 이 <데드맨>이 흥미진진한 스릴러물이라는 것에는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름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나름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은 있다.
그중 글쓴이가 이름이라는 소재를 잘 활용한 경우로 뽑고 싶은 것은 존재라는 것의 탐구다. 영화는 이 수많은 이름의 의미들을 스쳐 지나면서 감정적으로 중요한 장면마다 중점을 둔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선 인물의 동기로도 활용하면서 캐릭터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글쓴이는 이 감정전달이 중요한 장면이 감독의 진심이 담겨있는 것 아닐까 싶었다. 정치인의 세계가 됐건, 돈을 버는 세계가 됐건 결국 이름의 의미에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관객에게 묻는 것이다.
할 말은 없는
이렇게 이야기를 전개해도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우리 인생을 살다 보면(전적으로 당연하지만) 이 <데드맨>의 이야기 전개가 빈번히 일어난다. 하지만 이 영화의 많은 장면들은 단계를 생략하고 겅중겅중 뛰어다닌다. 가령 이만재의 사무실에 관한 부분이 대표적이다. 시놉시스 단계에서 ‘1000억 먹튀범으로 지목된다’라는 말이 있고 제목이 ‘데드맨’이니까 이런 부분은 스포일러가 아니겠지? 원래 입주한 사무실 주인이 ‘데드맨’이 된다면 당연히 이 건물은 빈자리다. 그럼 빈 건물이 되면 일반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반대로 이만재가 있던 집도 마찬가지다. 방을 빼겠지? 그럼 방을 빼면 이 주위에 물건들을 다 치우는 게 인지상정이다. 근데 ‘방을 뺀다’라는 우리 일상의 법칙은 둘째로 치고 이 사무실에 대한 두 가지 설정이 있다. 이 두 설정을 모두 고려하면 이곳에 대한 이 영화의 설정이 과연 현실성이 있는가 의문이 든다. 이 의문점은 ‘이 영화의 기획의도와 부합하는가’와 모순되는 지점이다. 기본 설정이 판타지 같더라도 ‘이런 이야기가 진짜 일어날 것 같아!’라고 몰입하는 게 이런 기획 의도를 가진 영화들의 과제 아닌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도 한 집안의 지하실에 누군가가 산다라는 비현실적인 전개를 강력한 박력과 디테일의 힘으로 전개한다. 하지만 <데드맨>은 이런 측면에서 게으르다. 섬세하지 못한 것이다.
결정적으로 글쓴이는 이 영화의 토대가 빈약하다고 하고 싶다. 이 영화의 제목이 뭘까? ‘데드맨’이다. 제목에서부터 이만재가 가짜로 죽었다는 게 핵심인 걸 알려준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이 기본 전제 자체가 무의미하다. 이 기본 전제만?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어떤 것도 중요도에 비해 빌런들이, 주인공이 안일하게 행동한다. 이 것은 <데드맨>의 모티브 하에 속하는 것이라는 점, 또 이야기 내적인 관점에서 더 자세한 설명이 붙었어야 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줄거리에서 이 물건은 방치된다. 이러다 보니 영화에서 플롯을 전개하는 데 있어 도움닫기가 되는 몇 설정들이 빈약하다는 것이 체감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기본적인 설정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그냥 볼만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게 누군가가 글을 써서 형상화시킨 무언가라고 보기엔 아쉽지 않나?
모순에 빠진 주인공들
이 영화의 인물들은 흐름을 잃고 방황한다. 대표적으로 심 여사와 희주가 그렇다. 심 여사는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하다. 이를 뒷받침하듯 영화는 이 능력을 묘사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통일성이다. 이 능력이 과연 통일성이 있었나? 만재와 직간접적으로 소통하면서 영화를 이끄는 인물치고 중반부 이후의 사건들은 낡았다. 심지어 글쓴이는 후반부 전개를 위해 이 인물이 스스로 모순 속에 항복하고 들어갔다고 느꼈다. 그리고 다른 측면에서 이 정치인이라는 소재를 생동감 있게 살렸나? 그것도 아닌 듯하다. 왜? 심 여사와 마찬가지로 정치인이라는 직업인이 가진 역량이 디테일하게 서술된 건 또 아니다. 이수경 배우가 맡은 공희주 캐릭터는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돼도 감정적으로 공감되는 캐릭터는 아니다. 글쓴이 개인적으로는 이 캐릭터가 편집이 너무 많이 돼서 그랬다고 생각한다. 생략된 게 너무 많다 보니 캐릭터 자체가 기능적으로 변했다. 물리적인 분량에 비해 중요도가 체감이 덜 되는 것이다.
자기주장 강한 연출
글쓴이는 장면만 있고 이음새는 없다는 점에서 <더 마블즈>를 떠올렸다. 영화 자체가 어떤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그 나머지를 위한 장면들을 넣었다. 이는 영화에서 대사들을 보여주는 방식에서 그렇다. 가령 심 여사가 고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다. 이 대사들은 분명히 인생의 단면 하나를 공격하는 지점이란 건 여지가 없다(글쓴이도 야한 영화 봤다고 말하기 좀 어려울 때가 있긴 했다). 하지만 이 대사들을 둘러싼 이 영화의 상황이 중요하다. 이 상황이 통렬하게 관통하지는 못한 것 같다. 왜? 사실 이 대사와 이 영화는 그렇게까지 잘 달라붙은 문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름의 모티브를 떠나 그냥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한국사회의 정치현실에 대해 덤덤하게 말만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 문장이 최동훈 감독의 전성기가 떠오르는 말 맛난 대사인 건 맞지만 사실 굳이 이렇게까지 보여주고, 또 이런 류의 단어를 김희애 배우의 입에서 나올 건 또 아닌 것이다. 이런 류의 강약조절 템포 조절에 실패한 연출로 인해 어떤 장면들은 좀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하다. 장면들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의 관점에서는 근거가 부족한 영화가 된 것이다.
이렇게 자기주장이 강한 연출을 보여주다 보니 영화의 기술적인 부분에서 느껴지는 허점이 아쉽다. 바로 사운드다. 한 때 한국영화에 대해 가장 많은 비판거리였던 ‘대사가 잘 안 들려요’가 이 영화에서 (글쓴이는) 느낄 수 있었다. 김희애, 조진웅 같은 배우들은 원래 대사 전달력이 굉장히 좋은 편인데 말이다. 이런 사운드의 완성도는 영화가 듬성듬성하다고 느끼는 강력한 이유 중 하나로 작동한다. 여러모로 아쉬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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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만 되면 생각날, 이터널 션샤인.
아무리 기억을 지워도 사랑과 추억을 지울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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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마이 달링 오 마이 달링 클레멘타인"
어떻게든 지우려고 했던 기억이 부메랑처럼 날아와 사랑으로 그들을 더 꽁꽁 묶어 놓는다.
괴로웠든 행복했든 그것마저 사랑이 였음을 시간이 지날수록 서글픔이 밀려옵니다.
그런 행동을 지켜본 조엘은 지도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지만 역부족이죠.
클레멘타인도 조엘처럼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 지도를 벗어나려 했을까요?
클레멘타인이 머리색을 여러번 바꾸고 마침내 파란머리로 물들었을때조차 사랑에 다시 빠지게 된 건 여전히 그들이 사랑한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습니다.
가장 뜨악스러웠던 장면은 기억을 지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타나는 비윤리적인 행태 였습니다.
의뢰인의 속옷을 훔치고 그 물건으로 그와 가까워져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한 행동들은 '세상에 믿을사람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는데요. 과연 온전한 기억삭제는 가능한걸까 하는 의문이 남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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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임과 회피, 장손의 선택
운전면허를 딴 지 어느덧 1년이 지났다. 보통은 수능이 끝난 뒤나 군대에 가기 전에 따는 경우가 많으니 나는 상당히 늦게 딴 편인데, 당장 운전할 일이 없다는 이유로 혹은 왠지 자신이 없다는 핑계로 면허 취득을 오랫동안 미뤄왔기 때문이다. 어쨌건 지금은 여러모로 운전의 편리함을 느끼고 있다. 특히 보람을 느끼는 때는 아버지를 대신해 내가 운전대를 잡을 때다. 그것은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가족들을 태우고 이동시켜야 했던 아버지의 자리에 잠시나마 내가 앉아보는 일이다. 어디까지나 잠깐 동안의 일이지만.
금동현 영화사연구자는 오정민 감독의 <장손>(2023)을 이야기하며 가부장 사회에서 운전이 남성에게 지우는 책임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장손>에서 운전은 집안 기성세대 남성의 몫이고, 장손인 성진은 홀로 기차나 택시를 탄다. 이를 성진이 자신에게 부여되는 책임을 (의도했든 아니든) 유예하거나 외면하려는 태도로 본다면 언뜻 이해되지 않던 몇 장면을 함께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진은 장손으로서 가족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바로 그 사실을 불편해 한다. 그가 가족 간의 자리에 항상 늦게 등장하고, 일찍이 퇴장하려는 건 가족에 적극적으로 섞이기를 거부하고 외부자의 입장을 택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두부공장을 이어받지 않겠다는 건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호기로운 선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업이라는 이름의 책임과 부담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는 때로 두려움이나 비겁함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가령 고모-고모부와의 관계에서는 어떤가. 성진은 입원 중인 고모부를 보러 가자는 고모의 제안에 응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고모부와의 만남을 기약 없이 지연시킨다. 이것이 성진이 가족애가 없거나 냉혈한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고모부의 사고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있지만, 그것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보인다. 우여곡절 끝에 병원을 찾아가지만 입원실에는 들어가지 않고 고모부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다. 복도 의자에 앉아 꽃바구니만 고모에게 전하고 돌아설 뿐이다. 고모와 고모부를 부모님같이 생각했다는 말이 무색하게.
가족사진을 찍은 김에 조부모의 영정 사진을 따로 찍어 달라는 아버지의 요청을 성진이 거부한 것 역시 두려움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영정 사진은 지금의 얼굴에 죽음을 포개어 보는 일이고, 앞으로 다시 못 볼(지도 모르는) 얼굴을 마주하는 일이다. 성진은 그 죽음에 맞닿지 않기 위해 영정 사진을 찍지 않지만, 예상치 못한 할머니의 이른 죽음으로 결국 할머니의 영정 사진은 그날 성진의 카메라로 찍은 가족사진이 된다. 성진은 자신이 찍은 그 사진을 직접 액자에 담아 기차를 타고 장례식장에 도착하는데, 고모부의 입원실에서와 마찬가지로 빈소에 들어가기 직전 망설인다. 그 잠깐의 머뭇거림 역시 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자신이 직접 놓아 드려야 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 그로부터 나온 유예와 지연의 리액션이 아닐까. 함께 언급해야 할 장면이 있다. 성진의 마지막 장면이기도 한, 두 번째 택시 장면. 할아버지가 그의 손에 쥐여 준 통장엔 매달 백만 원 씩, 오천만 원이 입금된 내역이 적혀있다. 성진은 그것이 고모가 매달 백만 원씩 모은 돈, 돌아가신 할머니가 관리했다던 고모의 돈이라는 것을 안다. 그때 성진의 얼굴 위로 눈부시게 내리쬐는 햇빛은 그 돈의 출처를 알고 있는 세상(영화 밖 관객)의 응시에 다름없다. 그러니까 성진이 눈을 찡그리고 손으로 막아도 막아지지 않을 응시. 어떤 유예와 지연의 리액션으로도 그가 떨쳐내지 못 할 책임. 부채의식. 성진은 그 택시를 타고 서울로 갈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언젠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한다. (아마도 할아버지의 장례식 때?) 그때까지 성진은 그 책임과 응시로부터 얼마나 멀어질 수 있을까. 할아버지가 준 비밀을 언제까지 지킬 수 있을까. 성진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다음 장면, 할아버지 승필이 계속해서 산 깊은 곳으로 들어가 사라지는 마지막 시퀀스가 더 서늘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어쩌면 그렇게 성진의 비밀도 깊은 곳으로 들어가 끝내 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씁쓸함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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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푸른 호수> 메인 예고편
내 이름은 안토니오 르블랑입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입양돼 ‘안토니오 르블랑'이라는 이름을 얻은 한 남자.
그에게는 누구보다 자신을 믿어주는 아내 ‘캐시'와 사랑스런 딸 ‘제시’,
그리고 곧 태어날 아기가 전부다.
“나는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닙니다.”
어느 날, 억울한 상황에 휘말려 경찰에 붙잡힌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이민단속국으로 넘겨지고,
시민권이 없다는 사실을 난생처음 알게된 그는 강제추방 위기에 처하는데…
가족을 지키고 싶은 그의 뜨거운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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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허슬> 공식 티저 예고편
운이 다한 농구 스카우트(애덤 샌들러)가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엄청난 실력에 험난한 과거를 가진 선수를 외국에서 우연히 발견한다. 결국 그는 팀의 허락도 받지 않고 독단으로 이 천재 선수를 미국에 데려가는데. 두 사람은 난관을 무릅쓰고 NBA에서 성공할 자질을 갖췄음을 입증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에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