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란2024-03-12 19:05:39
우리가 하필 인간이라서, <팟 제너레이션>
나와의 분리, 조건 없는 수용, 맹목적인 믿음, 그리고 애쓰는 인간
* 본 리뷰에는 영화의 자세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팟 제너레이션 The Pod Generation, 2023
영국 / 109분
감독: 소피 바르트
우리가 하필 인간이라서, <팟 제너레이션>
적당한 공포와 적절하게 배합된 연민과 침묵은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이다. 섬세하고 감각적인 장치로 사람들이 향하는 방향이 순뱡향이든 역방향이든 상관없이, '멈춰 있는 순간'에만 발동한다. 절대 피할 수 없으며, 강제적으로 작동해 기어이 멈춰 선 이의 발을 지면에서 떼게 한다. 인간에게 '정지' 행위는 죽음이 다가오는 걸 알면서도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겠다는 어리석은 결정이기 때문이다. 내가 암묵적으로 합의한 이 필수조건은 철저한 계획하에 만들어진 거창한 방책이 아니다. 직접 경험으로 얻은 교훈과 지식을 축적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고 믿게 된 이른바 생존 본능이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인간을 위해 비극을 적극적으로 생산하며 사는 일이 자연의 순리와 같다는 점에서 우린 매 순간 죽음을 향해 가지만 절대 죽지 않기 위해 애쓰는 존재다.
인간은 단순하다. 생존을 우선시하는 본능이 나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고, 우린 각자 자기만의 방법을 정립하며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여러 방식이 존재하지만, 그중 세 가지 방식이 공통적으로 포함되어있다. '나와의 분리', '조건 없는 수용', '맹목적인 믿음'. 앞서 언급한 공포와 연민, 침묵이 인간의 내면에 박힌 생존용 고정핀이라면 분리와 수용, 믿음은 생을 향한 원초적인 욕구가 실행되는 길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 덕분에 인간인 우린 계속 길을 걷는다.

소멸을 부정하기 위해 시작된 인간의 생존 본능은,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개인의 가치관, 신념, 취향, 일상으로 파고들었다. 단순히 숨이 끊어지는 순간만이 아니라 현재 내가 누리고 바라고 원하는 것이 불가능해질 때도 죽음은 물론이고, 죽음이 주는 극단적인 감정까지 느끼게 됐다. '어떻게 죽음을 피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가 중요해졌고, '앞으로 있을 죽음'보다 '지금 당장 없는 무언가'를 더 갈망하게 됐다. 흥미로운 건, 삶의 태도와 관점이 변화되었어도 고정핀은 여전히 박혀있으며 공통 방식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떠한 위협 속에서도 온전히 '나'를 따로 분리해 보호하고,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에 적응하며, 그 선택을 진실하다 믿는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린 어떠한 상황에도 머뭇거리지 않고 더 적극적으로 스릴 있게 투쟁하는, '격렬하게 애쓰는 존재'가 됐다.
어쩌면 당연한 흐름이다. 인간은 더 이상 살고 죽는 간단한 문제에 속한 동물이 아니니까. 자연의 순환 속에서 경계 없이 자기 세상을 확장하면서 그에 따른 온갖 난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활용까지 하며 살고 있으니까. 그렇게 보면, 우린 참 뭐라 설명하기 힘든 존재다. 예측불허하면서 충분히 예측할 수 있고 정말 단순하면서 그만큼 복잡한 인간. 죽음과 생존을 같다고 여기며 끊임없이 삶을 욕망하는 인간. <팟 제너레이션>은 이 모든 걸 담고 있다.

레이첼은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회사에서 똑똑하고 능력이 뛰어난 여성 임원이다. 아침에 눈을 떠 저녁에 눈을 감기까지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의 힘을 사용하며 합리적으로 편하게 산다. 하지만 앨비는 다르다. 그는 자연을 사랑하는 식물학자다. 인간이라면, 인간이 만든 과학 기술적 세계가 아닌 자연 속에서, 자연과 상호작용하며 진정한 인간다움을 가꾸며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두 사람은 다르다. 인공지능이 실시간으로 체크해 주는 행복 지수가 말해준다. 앨비는 늘 낮거나 측정 불가이지만 자기만의 자연(섬에 있는 집)을 갖고 있어 진짜 미소를 지으며 산다. 레이첼은 인공지능의 행복 지수 관리를 신뢰한다. 적당한 지수를 유지하면서 간혹 높지 않은 날엔 거짓 미소를 짓기도 하지만 지금의 삶에 만족한다. 아침마다 무슨 옷을 입을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바다가 보고 싶으면 대중교통으로 귀중한 시간을 허비할 필요 없이 공원에 설치된 '네이처팟'에 들어가면 된다. 굳이 자연을 현장 체험으로 가지 않아도 되는 현재, 레이첼이 사는 곳은 쓸모보다 편리함이 더 귀한 가치로 여겨지는 아주 좋은 세상이다.
레이첼에겐 '이 환경'이, 앨비에겐 이 환경이 아직 정복하지 못한 '생존한 자연'이 존재하기에, 부부의 삶은 안정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첼이 인지능력이 더 높은 인공지능 '마샤'를 성공적으로 출시하면서부터 상황은 달라진다. 회사가 그녀에게 승진 혜택으로 인공 자궁(팟) 서비스를 이용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부부에게 인기몰이 중인 페가수스의 자궁 센터는 팟이란 플라스틱 알 모양의 기기로 임신과 출산을 가능하게 하는 서비스를 운영 중이고, 사실 레이첼도 아기를 갖고 싶은 마음에 남편 몰래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려놨었다. 예상대로 자연 임신을 원했던 앨비는 아내에게 논의 없이 아기가 알에서 나오게 하는 대가를 지불했다며 화를 낸다. 그러나, 결국 그는 사랑하는 아내의 선택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한다.

선택. 앨비와 레이첼이 함께 쌓아온 규칙이 다시 재정립되는 순간인데, 그 공은 두 사람이 아니라 레이첼의 심리치료사 일라이저, '인공지능'에 있다. 거대한 눈, 일라이저는 훌륭한 아이를 갖는 것뿐이라며 레이첼이 내면 깊숙이 원했던 말을 대신해 줬고, 인공지능이기에 인간의 영혼을 못한다고 믿는 앨비에겐 최고 등급의 사생활 보호 서비스를 제공했다. 남편의 반대와 자연을 반하는 행위를 한다는 죄책감에서 해방된 레이첼과 자연만을 믿고 살면서도 혼자 남모를 속앓이를 했던 앨비는 일라이저의 한 마디 처방에 그동안의 문제를 '나'에게서 분리하고 누구보다도 빠르게 생각을 전환한다. 이제 두 사람의 목적은 혼란스럽고 낯설어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는 우리의 팟을 잘 돌보는 일이다.
팟은 정말 엄마 배 속에 있는 것처럼 그들의 혼을 쏙 빼놓는다. 영양분을 달라며 알람을 울려대고, 자기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이며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앨비와 레이첼은 각자의 속도로 팟을 받아들인다. 팟을 먼저 품기 시작한 건 예상과 달리 식물학자 앨비다. 팟 캐리어(유모차 같은)를 메던 친구를 이해하지 못했던 그는 어느새 캐리어 달인이 되어 팟을 자기가 일하는 온실에 동행한다. 나아가 집 밖에서도, 집 안에서도 끊임없이 팟과 교감한다. 팟은 자연을 사랑하는 그의 예외적 선택으로 자연이 됐다. 임신과 출산에서 자유로워진 후 계속 똑똑하고 능력 있는 여성으로 살던 레이첼은 백팔십도 달라진 남편의 모습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아빠가 어떻게 엄마보다 더 아기와 가까워질 수 있지? 그도 그럴 것이 자연대로라면 태아와의 강력한 교감은 엄마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이다. 엄마만이 체감할 수 있는 감정들을 인공 자궁을 선택한 레이첼이 무슨 수로 경험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레이첼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임산부의 배에 손을 올리고 태동을 느끼며 자신도 임신 중이라고, 당신처럼 아기를 품고 있다고, 아무리 되뇌어도 '나'의 임신과 '그녀'의 임신은 절대 같을 수 없다는 진실을 말이다. 더는 견딜 수 없었던 레이첼은 팟과 남편을 데리고 다시 일라이저를 찾아간다.

레이첼은 팟 서비스를 이용하기 전부터 볼록하게 나온 자기 배를 만지며 평화로운 모래사장을 걷는 꿈을 꿨었다. 팟이 생긴 이후엔 조그만 알을 출산하는 섬뜩한 꿈을 꿨었는데, 일라이저는 꿈은 자의적이며 구시대적인 산물일 뿐이라며 더 이상 인간은 꿈을 해석하거나 이해하지 않는다고 그녀를 안심시켰었다. (자궁 센터 원장도 인간은 꿈을 꾸지 않는 게 정상이라고 당당히 말했고, 한술 더 떠서 아기에게 부모가 원하는 꿈도 꾸게 할 수 있다며 신제품 드림팟을 선전한 바 있다) 즉, 자연과 여자의 자궁, 이젠 인간의 꿈까지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세상에서, 엄마가 될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며 걱정하는 레이첼의 우려는 불필요한 고민이었다. 그런데도 쉽사리 고민을 떨쳐내지 못하는 그녀에, 일라이저는 팟 안에 든 태아와 자신을 연결해 달라고 말한다. 그 순간 레이첼과 앨비는 처음으로 멈칫하며 거대한 눈에게서 빠르게 도망친다.
그동안 그들은 숱하게 합리화를 해왔다. 여성의 자궁 대신 팟에서 태아가 자라는 것뿐이며, 자연임신으로 부모가 된 부부와 똑같은 경험을 하는 건 아니지만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경험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레이첼의 말처럼, 중요한 건 플라스틱 알이 아니라 태어날 '우리 아기'니까. 분명 자연의 선물로 받은 축복이라 생각했는데, 인간의 기술로 태어나 조작으로 만들어지는 뭐라 정의할 수 없는 '정체불명의 무언가' 같은, 이 불쾌감과 거북스러움이 그들을 덮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동안 해왔던 분리와 수용, 믿음 방식을 계속 유지한다. 레이첼은 남편처럼 회사에 팟을 들고 다니면서, 아기와 유대관계를 만들어 나간다. 오로지 자신에게 올 '아기'만을 생각하면서.
팟의 대기 명단이 길어지자, 자궁 센터는 부부에게 유도분만을 제안한다. 광고할 때만 해도, 아기가 스스로 나오고 싶은 순간에 신호를 주면 출산 과정을 돕는다며, '자연이 결정'한다고 온갖 위대한 척은 다 하더니 결국 자본의 흐름에 아기를 다루고 있던 것이다. 레이첼과 앨비는 거부한다. 팟은 페가수스의 자산이지만, 그 안에 든 아기는 우리 전부니까. 앨비는 곧바로 팟을 몰래 집으로 데려오고, 아기를 백화점에서 골라 사는 꿈을 꾼 레이첼은 섬에서 가정 분만을 하자고 선언한다. 부부는 진짜 자연 속에서 진짜가 된 팟을 품고 자연과 온전히 동화된 시간을 보낸다. 원격으로 팟의 기능을 꺼버린 페가수스의 저급한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아기를 믿고 기다린다. 드디어 온 아기의 신호. 앨비는 플라스틱 알을 강제로 개봉해 아기를 꺼내 품에 안는다. 감격스러워하는 앨비와 레이첼 그리고 그들의 축복, 팟 제너레이션의 탄생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분리, 수용, 믿음. 두 사람은 부단히 노력해 아기를 얻었다. 그럼 된 것일까? 해피엔딩인가? 태어난 아기는 부부의 사랑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레이첼은 내가 정말 듣고 싶은 말을 듣기 위해, 더 편한 선택을 하기 위해, 자신의 복제품(일라이저)을 만들었다. 그리고 일라이저를 통해 팟 서비스가 좋은 선택임을 객관적으로, 이성적으로 확인받았다. 그러나 부부가 사는 세상이 오직 지금, '현재에 사는 이들만'을 위해 만들어진 세계인 것처럼, 그들의 선택 역시도 우리 가족의 미래를 위한 결정이 아니라 '아기를 욕망하던 오늘의 나만'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 결과 꿈꾸지 않는 팟 제너레이션을, 아니 '꿈꿀 수 없는 인간'을 탄생시켰다. 꿈은 영화 속에서 인간이 인간임을 확인시켜 주는 유일한 장치였다. 꿈이 인간다움이라면, 팟 제너레이션 이후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들의 아이는 정말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 그 아이들이 계속 태어난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미래엔 무엇이 살아남을까.
<팟 제너레이션>은 우리가 얼마나 변덕을 부리면서도, 카멜레온처럼 나란 존재를 끊임없이 긍정하며 사는지 다시금 확인하게 한다. 나아가 이를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는다. 그저 부부의 새로운 도전을 평범한 일상 안에 평이하게 녹여내는 데 집중한다. 인간의 생존 본능과 변화무쌍한 능력들도 악인의 횡포처럼 풀지 않는다. 단지 잔잔하게 흘러가는 부부의 개인사가 끝을 향해 갈수록 우리가 스스로 알아차리게 되는 것뿐이다. 점점 더 무겁게 짓누르는 위기감과 섬뜩함에 생존 본능이 발동되는 순간, 페가수스 사장이 쿠키 영상으로 등장한다. 그는 자궁 센터의 고객은 부모가 아닌 아기임을 확인시키며 언젠가는 아기가 부모를 선택할 수 있는 시대가 올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부디, 그들이 현명한 부모를 선택하길 바란다며 인터뷰를 마친다. 결코 해피엔딩이 될 수 없는 이유다. 분명 팟으로 합리적으로, 더 안전하게 아기를 얻으려는 부부의 이야기가 전부일뿐인데, 물음 하나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역시 어쩔 수 없겠지? 우리가 하필 인간이라서."
참신하고 흥미롭지만, 여러모로 행복 지수를 높이는 영화는 아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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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독한 현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플로리다 프로젝트]
드라마 | 미국 | 111분 | 2018
감독 션 베이커
최근 <아노라>로 황금종려상을 받고 올해 오스카 작품상 후보에 오른 감독 션 베이커. 아노라 이전, 그의 대표작이라고 불렸던 영화는 바로 2018년 연출작인 <플로리다 프로젝트>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본 후 션 베이커 연출작은 믿고 찾아 보게 되었다. 영화를 처음 봤을 당시 간만에 인상적인 영화를 봤다고 느꼈다. 배우들도 연출도 신선했으며 특유의 시각적 구성도 인상 깊었다.
내가 션 베이커를 좋아하는 이유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꾸준히 하면서 영화적인 연출 감각도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적 특징을 꼽는다면 사회 계층 문제를 자주 다룬다는 것, 아름다운 색감을 쓴다는 것, 그리고 실험적인 화면 구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황망한 이야기로 이토록 아름답게 스크린을 채울 수 있을까? 그 역설이 주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때면 종합예술이라 불리는 영화를 경탄하게 된다.
- 커다란 대형마트와 그 앞을 지나가는 무니, 젠시, 스쿠티.
첫 번째로 인상 깊었던 건 위 장면처럼 뒤 배경과 아이들의 대비를 사용한 샷이 많았다는 것이다. 고정된 카메라에 광각렌즈를 사용한 넓은 화각으로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더 작아 보이게 연출했다. 커다란 배경은 변하지 않는 상태에서 아이들은 소리치고 움직이니, 대비가 극명하다. 그들이 소리를 질러도 딱히 세상은 반응하지 않는다.
참 재밌는 영화다. 극의 초반에는 다큐멘터리 같은 호흡을 보인다. 샷의 길이도 길고, 넓다. 어떤 인물을 강조하기보다는 장소와 상황을 객관적으로 담는다. 연출은 굉장히 담담하고 연기는 극히 사실적이지만 사건과 인물들은 굉장히 입체적이고, 자극적으로 느껴진다. 감독은 그 자극적인 인물과 사건이 지극히 현실적인 일임을 말하고자 했던 것 같다. "영화니까라고 생각하지? 근데 이거 지금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야. 니들이 모르는 세상엔 저런 일상이 있어." 라고 말하는 느낌이었다. 다큐멘터리처럼 서서히 하나씩 정보를 준다. 처음엔 장소, 그리고 그를 지키는 관리인 보비, 각각 아이들과 그 보호자들. 그리고 그들이 누구인지를 서서히 이해하게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헤일리와 무니의 삶에 몰입해있다. 그들의 행동에 화가 나다가도 그들이 겪을 일들이 괴롭다. 나는 보비와 눈을 같이하는 기분이었다.
- 무니의 시선에 맞춰 쪼그려 앉은 보비. 그리고 무니에 맞춰진 카메라 앵글
보비는 가장 큰 맥을 이끌어가는 인물이라고 본다. 사건에 중심에 있진 않지만 항상 그곳에 있고 관찰자로서 관객과 함께 한다. 중반부까지는 보비에 입장에 가장 몰입해 있다가 바로 뷔페 장면. 무니의 클로즈업과 연달아 나오는 헤일리의 클로즈업에 나는 헤일리와 무니의 마음 사이 어디쯤으로 몰입이 바뀌었다.
- 사랑스러운 무니의 정면 클로즈업
이 장면이 내가 느낀 영화의 첫 번째 정면 클로즈업이었다. 뒤 포커스를 날려서 촬영한 걸 보니 의도된 것 같다. 이때 관객은 처음으로 무니와 헤일리에게 눈을 마주치게 된다. 위태롭지만 사랑스러운 모녀를 보며 그들을 위한 삶은 대체 무엇인지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몰입하고 싶지 않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한 기분이었다. 이 장면 뒤부터 급격히 감정이입이 되었고, 무니가 우는 장면에서는 정말 참을 수 없었다. 무니를 바라보는 보비와 무너지는 헤일리, 도망치는 무니. 감정들이 소용 쳤다.
- 비슷한 사이즈이지만 전혀 다른 표정의 무니.
자신의 가족인 엄마와, 매직 캐슬을 잃게 된 무니는 진짜 아이가 되어버린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어른들의 사정을 읽는다. 극 초반 자신은 어른들이 울 것 같을 때를 안다는 무니의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감당하기 벅찬 일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아이처럼 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아이들을 위해 무얼 할 수 있을까. 포스터나 예고편과는 다르게 굉장히 담담하지만 슬픈 영화이다. 관객을 울리려고 끼워 맞춰 만든 신파극들과 비교되었다. 제작진이 울면서 만든 영화 같았다.
가장 좋았던 장면은 헤일리가 훔친 입장권을 팔아 돈을 벌고 무니와 함께 장을 보고 카트를 가지고 차들 사이의 횡단보도를 건너는 장면이었다. 사진을 찾고 싶었는데 못 찾아서 카트 사진으로 대체. 수많은 차들이 빠르게 지나가는 가운데 헬리가 밀어주는 카트에 탄 무니는 깔깔거리며 웃고 있다. 무니는 가장 초라한 네바퀴 속에서 가장 행복해했다. 물론 객관적으로 보면 헤일리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최악의 보호자이다. 온갖 나쁜 짓은 다하고 무니랑 같이 물건을 팔기도 한다. 극 초반 자기는 그딴 짓은 절대 안 한다며 아무도 날 일하게 해주지 않는다던 헤일리는 누구를 위해 그런 일을 했을까. 집도, 직업도 없는 그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을까.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 안에서는 선과 악이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션 베이커 영화를 보면 늘 그러하다. 이 영화를 통해 상을 받은 무니 역의 브루클린 프린스의 수상소감처럼 저건 현실이고 세상엔 수많은 헬리와 무니가 있다. 그들이 행복하기 위해 혹은 저런 일들이 사라지기 위해서 정부나 사회가 말하는 것이 정말 최선인지, 그게 아니라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만드는 영화인 것 같다. 첫 연기였다던 배우들과 그들을 완벽히 디렉팅 한 션 베이커에게 박수를 보낸다. 좋은 영화를 봐서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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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우리는 오렌지 태양 아래
SYNOPSIS
갑작스러운 사고로 남편 도경을 잃고 폴란드 바르샤바로 떠난 명지, 같은 사고로 동생을 잃은 지은, 단짝 친구와 이별한 해수. 남겨진 사람들은 서로를 돌보며 몸과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진다. 상실의 슬픔 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따뜻한 희망의 이야기. 김애란 작가의 동명 소설 원작.
PROGRAM NOTE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문학적 기품을 바탕으로, 언어가 중요한 영화다. 이는 설혹 원작 정보를 알지 못한 채 작품을 접한 관객일지라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는바, 중심인물들부터가 글쓰기 혹은 책과 관련된다. 하지만 그들조차 좀처럼 언어화하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편지라는 형식으로나마 그들이 가까스로 발화에 이르는 과정이 영화의 얼개를 이룬다. 여기에 마비 내지 부동의 자세에서 활강에 성공하기까지 점증하는 신체들의 이미지가 대구 된다. 허리께에서 시작해 몸 전체로 퍼져 나가는 발진 역시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이처럼 일견 관념적으로도 느껴지는 이야기의 배경으로 광주와 바르샤바라는 구체적 지명과 풍경이 제시되고, 마침내 인물들의 트라우마가 발화되는 순간이 도래한다. 지난 10여년 간의 한국 상황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특정한 어느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터, 관객과 영화 속 인물들 간의 연결이 감정이입을 넘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장소와 시대와 디에게시스의 경계를 넘어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트라우마들의 아픔을 공유한다는 감각이 뚜렷하게 환기되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태양을 바라보는 인물들이 교차편집되며 서로 간 동시성이 확보되고 이를 목도하는 관객 또한 그들의 애도와 회복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연대라는 것은 이렇게 생겨나는지도 모른다. [이유미]
명지(박하선)가 사는 아파트로, 두 개의 소음이 동시에 날아든다. 전화를 알리는 휴대전화의 진동 소리와, 아파트 바깥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도난 경보음. 경고음과 함께 들려온 소식은 부고를 알렸다. 경고음은 사건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 소리 또한 인생에 갑자기 날아들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지금까지의 세상을 무너뜨리고, 전혀 다른 곳이 되게 한다.
남편의 생명을 삼킨 물을 욕조에 받았다가 흘려보내기도 하고, 시어머니가 챙겨주시는 반찬은 냉장고에 그냥 쌓이기만 하면서, 명지의 세계 또한 달라져 있다. 영화 초반의 이러한 장면들은 짧은 호흡으로 뚝뚝 끊긴다. 이것은 상실 이후의 일상과 닮아 있다. 긴 호흡으로 뭘 하기 어렵다. 아니, 그냥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조차 긴 호흡으로 하기가 어렵다.
아주 작은 연결고리만으로 일상이 툭툭 끊어지기 때문이다. 잔뜩 삭아버린 실처럼. 초코 아이스크림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함께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던 어떤 날을 떠올리고, 테이블 모서리만 어루만져도 따뜻한 기억을 되돌아보게 된다. 영화 내내 명지의 아파트 조명은 꺼져 있어, 따뜻한 빛으로 가득했던 과거와 더욱 대비된다. 불이 꺼져버린 집처럼, 영혼 어딘가의 불이 꺼진 것처럼.
조금이라도 연결고리가 적게 느껴질 곳으로, 명지를 불러낸 사촌언니의 다정한 초대를 받아 폴란드 바르샤바로 향하지만, 명지가 가는 모든 곳에 명지의 상처도 함께 갈 수밖에 없다.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날아들었던 비보처럼, 아무 이유도 없이 원인불명의 발진이 몸에 붉게 자라난다. 우리 삶에 원인불명으로 찾아오는 일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생각해 보면 원인을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것이야말로 놀라운 일 같지만, 우리는 또렷하게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더욱 괴로워한다.
그 괴로움 속에서, 가장 황홀한 꿈은 그만큼 가장 슬픈 꿈이 된다. 부재한 누군가가 등장하는 꿈은 다 그렇다. 그런 세상에서는, 잘 지내냐는 짧은 말이 아프게 다가올 수도 있다. 전화를 해보자는 별 거 아닌 말이, 작고 유쾌한 말이 폐부 깊숙한 곳을 푹 찌를 수도 있다.
이들의 세상은 지독한 상실의 아픔에 둘러싸여 있어서다. 이건 어쩌면 물에 빠지는 것과도 비슷해서, 머리칼 올올이 깊숙한 곳까지 온통 나를 적시고 도저히 숨을 쉴 수 없게끔 괴롭힌다. 도경과 지용이 떠난 세계에 남겨진 이들은, 도경과 지용의 마지막을 앗아간 것과 비슷한 고통을 계속해서 느끼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인물들은 움직인다. 모든 단어에 추억이 묻어 있고, 딱 그만큼의 슬픔이 묻어나는 세상에서도. 명지가 폴란드 바르샤바로 떠났듯, 지용을 잃은 지은과 해수도 자기 자리에서 힘차게 움직이려 애를 써본다. 인물들이 이처럼 상실 너머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영화의 호흡이 조금씩 길어진다. 해일처럼 밀려와 관객을 덮는다.
왜 하필 폴란드 바르샤바였으며, 왜 하필 광주였나? 죽음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은 도시. 죽음을 잘 기억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상실 이후의 삶을 잘 살아가기 위한 방법임을 잘 아는 사람들의 도시. 충분히 위로되지 못한 슬픔은 끝까지 그 눈을 뻣뻣하게 부릅뜨고 살아 나를 따라온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알아버린 사람들이, 여전히 세상의 무수한 슬픔에 시선을 보내는 곳.
그곳에서 만난 현석(김남희)과 명지 사이, 덩그러니 질문 하나가 놓인다. “그때 그 손을 놓지 않았다면 우린 지금 같이 있을까?” 현석이 명지에게 던진 질문이기도, 명지가 도경을 생각하며 던진 질문이기도 하다. 갑작스러운 원인불명의 상황에서, 남겨진 이가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일,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말 중에 이 질문이 있다.
이 질문은 웅덩이가 되어, 인물들이 겪은 제각각의 상실이 여기에 고인다. 그리고 거기서 이들은 만난다. 명지는 이 질문이 도경과 지용 사이에도 놓여 있었음을 깨닫는다. 놓친 손이 있지만, 또 힘차게 움직여 닿으려고 애쓰는 손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편지를 통해 지은과 명지의 손이 마주한 순간, 명지도 손을 움직여 메일을 써 본다. 부치지 못해도 괜찮다. 너무 어려워도,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조금은 괜찮다. <벌새>의 영지 선생님처럼 말해 본다. 아무 것도 못할 것 같지만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다고.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시리가 남긴 그 새삼스러운 질문은 어쩌면, 말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끝에서, 명지는 마침내 햇빛을 마주본다. 밖에서 들어오는 흐릿한 불빛 외에는 좀처럼 밝아지는 일 없는 어둑한 집에서, 오렌지색 노을과 눈을 마주친다. 슬픔은 여전하겠지만, 명지의 아파트가 이전처럼 밝고 따뜻한 빛으로 차오르려면 한참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몸으로 마음으로 상실을 겪어내고 있는 지은도 명지도, 살아서 그 빛과 눈을 마주한다. “우리는 오렌지 태양 아래 그림자 없이 함께 춤을” 추고, “아름다웠던 그 기억에서 만나” 또 손을 뻗어 잡을 수 있을 것이다.
2023.08.27. 16:00-17:44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3관 (상영코드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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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자신에 관한 농담 ‘위 아 40’
<마이너 필링스>의 저자인 시인 캐시 박 홍은 처음 시를 쓸 때 자신의 정체성 떨쳐내며 자유를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데뷔 이후 무슨 글을 쓰든 아시아계 여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이 따라다닌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의 정체성과 시 쓰기 사이의 거리에서 절망을 느끼던 중 스탠딩 코미디언 리처드 프라이어의 공연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리처드 프라이어는 흑인 정체성을 전면에 드러내고 그것을 코미디의 재료로 삼은 최초의 코미디언이다. 시인과 달리 코미디언은 정체성이 없는 척할 수가 없다. 프라이어는 자신의 인종적 트라우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자기 자신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다. 때로는 백인 청중들을 당황시키며 웃기기도 한다. 그러나 프라이어의 공연을 필사한 캐시 박 홍은 프라이어의 말을 글로 적으니 그다지 우습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썼다. ‘프라이어의 익살스러운 이야기 전달 방식이 빠지고 나니, 유머라는 용해제는 증발하고 분노의 소금기만 남은 것처럼 그의 말이 거칠고 둔탁하게 느껴졌다.’
40살에 갑자기 비트를 만나 랩을 하게 된 한물간 극작가의 이야기, 영화 <위 아 40>도 한 편의 스탠딩 코미디 같다. 한때는 30세 이하 30인의 극작가 상을 받을 정도로 주목받았지만 지금 라다를 둘러싼 것은 이런 것들이다. 방음 안 되는 벽 너머 들리는 신음 소리, 창문 밖 노숙자의 볼일 보는 모습을 맞닥뜨리며 시작하는 아침, 체중 때문에 달고 사는 다이어트 음료, 그리고 10년 전 멈춘 라다의 경력을 무시하거나 추파를 던지는 학생들. 여기서 벗어나려면 극을 무대에 올려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유명한 백인 제작자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 흑인의 빈곤 포르노를 상업화하려는 백인 제작자를 들이받고 온 날, 라다는 엉엉 울다 갑자기 창밖에서 들리는 랩 비트에 맞춰 신들린 듯 랩을 내뱉기 시작한다.
나이 40이 되도록 여전히 집세 내기도 빠듯하고 겨우 닿은 기회마저 망쳐버렸는데 갑자기 랩까지 한다. 이쯤에서 나는 이런 결말을 쉽게 상상한다. 라다가 랩으로 인정받고 성공해서 제2의 인생을 사는 이야기. 아니면 <백 엔의 사랑>의 이치코가 서른에 갑자기 프로 복싱 선수에 도전했듯 극작가는 때려치우고 적어도 랩으로 끝장을 보는 이야기. 그러나 영화가 감독이자 주연인 라다 블랭크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것을 감안하면 라다 블랭크는 마치 비트라는 용해제를 사용해 스스로에 대해 농담하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생리는 왜 안 터져?’로 시작하는 라다의 랩은 웃기고도 슬프다. 늘 종아리는 쑤시고 오줌은 자꾸 마렵고 10시만 되면 피곤해 쓰러지는 데다가 젊은 애들이 노인 취급한다. 라다는 ‘이게 40살 인생’이라고 외친다. 흑인이 성공하려면 빈곤 포르노를 팔아야 한다며 인종주의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는 것도, 나중에는 적당히 타협한 스스로를 셀프 디스 하는 것도 랩을 통해서다. 라다에게 랩은 제작자의 검열 없이 자신의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고, 극작가를 하며 맛보지 못한 쾌감이다. 라다를 둘러싼 찌질한 상황과 스스로에 대한 농담이 웃길지언정, 전혀 우습지 않은 건 그 때문이다.
라다를 지켜보고 있자면 다시 <마이너 필링스>의 캐시 박 홍이 떠오른다. 캐시 박 홍은 프라이어의 공연을 접한 후로 시 낭독회에서 스탠딩 코미디를 하기 시작한다. 그는 항상 강연장에서 자신이 유일한 아시안이 아닌 척해왔는데, 사람들이 늘 자신을 아시아인 정체성과 연결 지어 생각한다면 이왕이면 내가 유일한 아시안이라는 사실을 큰 목소리로 말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사람들이 내 농담을 재미없다고 생각한다면, 기왕 망하는 거, 내 삶에 관해 농담하면서 장렬하게 망하고 싶었다. 실패하더라도 그렇게 하다가 실패하고 싶었다.’
라다 또한 자기 자신에 관해 농담하면서 망하길 택한다. 영화 내내 라다와 친구 아치는 40대에 대해 이야기했다. 40대에는 제대로 살아야 하지 않냐고, 비주류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내게도 ‘40’이라는 숫자와 관련해 습관처럼 하는 말이 있다. 40살엔 꼭 자가용 몰아야지. 그때는 돈 좀 만지고 빠듯하게 살지 않겠다는 자기 암시이자 소망이다. 설마 40살의 내가 나를 가난하게 내버려 둘까 싶어 그때까지만 시간을 보류하기로 한다. 그때는 뭔가 달라야만 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는 막연한 두려움과 함께.
그러나 영화는 나를 보란 듯이 비웃고 40살의 라다에게 어떠한 매듭도 지어주지 않는다. 라다는 꿈에 그리던 순간을 눈앞에 두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상황을 바로잡는다. 멈췄던 라다의 랩은 다시 시작된다. “네 목소리를 찾아.” 믹스 테이프도, 반짝이는 성공도 없다. 40살의 라다가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찾은 것.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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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에게도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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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엄마라는 말을 들으면 눈물이 날까. 울 때는 엄마, 하고 울게 될까. 어쩌다 엄마라는 단어에 온갖가지의 감정이 붙어버렸을까.
우리 엄마는 글을 참 잘 쓰는 사람이었다. 초등학생일 때 학교에서 부모님이 편지를 써 오라는 이상한 숙제를 내주곤 했었는데, 선생님들이 하나같이 엄마가 작가이시냐, 시인이시냐 하고 물었다. 정작 나는 "녹음이 짙은 계절이구나."로 시작하는 그 편지가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던 초딩이었다.
엄마의 엄마는 일본에서 유치원을 다녔던 있는 집 귀한 딸이었다. 자수를 끝내주게 놓아서 온 마을 사람들이 엄마의 엄마에게 옷을 지어달라고 했다. 노래를 잘하고 춤도 잘추는, 요즘 말로 예체능으로는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리 엄마가 글재주를 타고났나 보다.
나는 엄마의 비밀상자에서 엄마의 자매들과 나눈 편지를 읽은 적이 있다(자녀가 있다면 비밀상자를 꼭꼭 숨겨두길 바란다). 한 이모가 엄마에게 "언니. 대동강 물이 풀린다는 우수야."로 시작하는 편지를 보냈다. 엄마는 뭐라고 답장을 썼을까. 또 다른 누군가는 "바보에게." 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엄마한테 보냈다. 연애편지인 듯했다. 엄마는 뭐라고 답장을 썼을까.
내가 초등학생일 때 엄마는 피아노를 배워보고 싶다고 했는데, 이제는 열 손가락에 관절염이 생겨 피아노는 물 건너갔다. 영어공부를 하겠다고 나와 동생이 중고등학생 때 보던 영단어장을 항상 거실에 두었는데, 몇 단어나 외웠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무엇이 되고 싶었을까.
엄마는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삶을 살고 싶었을까. 나는 엄마가 엄마라는 것을 빼놓고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서 엄마를 생각하면 슬퍼진다. 한 인간의 삶에서 '엄마'라는 단어를 빼고 모든 것이 지워졌으므로, 나는 엄마에 대해 알지 못한다. 엄마가 아닌 그 사람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엄마한테 남은 것이 자식뿐이라 화가 난다. 일생동안 손가락이 다 휘어지도록 일했는데 엄마한테는 아무런 지위도, 성취도 없다. 그냥 엄마다.
엄마로서의 삶과 주체로서의 삶
엄마는 엄마라는 이유로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한다. 그러나 <로스트 도터>의 주인공 레다는 그러고 싶지 않다. 레다는 자식을 키우고 가정을 꾸리는 것보다, 연구가 더 중요하고 자신의 욕망이 더 중요한 사람이다. 여름 휴가 역시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게 아니라 혼자서 떠난다. 휴가에서도 할일이 많다. 논문도 읽어야 하고 수영도 해야 하고 선탠도 해야 한다.
그런 레다의 고요는 한 대가족에 의해 박살이 난다. 이들은 이모 삼촌 할아버지 할머니 어린 아이까지 섞인 대가족이다. 레다는 어린 여자 아이를 키우는 엄마 니나에게 자꾸만 시선이 간다. 대가족, 특히 여자 아이와 아이의 엄마를 바라보는 레다의 표정이 의미심장하다. 영화는 니나의 모습과 니나 또래쯤 되었을 레다의 과거 회상을 교차하여 보여준다.
레다는 엄마로서의 삶보다는 자기만의 삶을 살고 싶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던 '자기만의 방'이 필요했다. 하지만 집에는 남편이 있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두 딸이 있었다. 레다는 남편과 육아를 분담하면서, 자기의 몫이 아닐 때는 아이들이 울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이들은 너무나 사랑스럽지만 그 사랑스러움만으로 자기 삶을 내팽겨칠 수가 없는 것이다.
비교문학 학자로서 인정받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세월을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했겠나. 그걸 이제와 '엄마'가 되었다는 이유로 버릴 수 있을까. 지금도 수도 없는 여자들이 경력단절을 경험한다. 중고등학생 때부터 대학생, 취업하여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이 노력했고, 또 열심히 살았나. 그런데 단지 엄마가 되었다는 이유로 그 노력들이 물거품이 된다. 다시 돌아갈 자리는 없다.
대가족은 물놀이를 즐기느라 아이가 사라진 것도 모른다. 뒤늦게 아이를 잃어버린 걸 알아채고는 온 해변을 뒤지지만 아이는 보이지 않는다. 레다는 별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숲속에서 혼자 놀고 있던 아이를 발견하고는 니나에게 데려다 준다. 니나는 레다에게 묻는다. 너무 힘들지만, 곧 지나가지 않겠냐고. 그러나 레다는 대답한다. 지나가지 않는다고.
결코 지나가지 않는 괴로움들
갈등은 아이가 가지고 놀던 인형이 사라지고부터 시작된다. 레다는 아이의 인형을 훔쳐가는데, 눈앞에서 아이가 울고불고, 어른들이 아무리 아이를 어르고 달래도 소용이 없다. 레다는 별장으로 돌아가 훔친 인형을 꼭 안고 잔다. 인형 옷도 새로 사서 입힌다.
평화롭던 대가족은 사라진 인형 하나 때문에 혼란에 빠진다. 정말 이 가족은 평화로웠을까? 삼대가 모여 즐겁게 휴가를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니나의 괴로움이 있다. 니나에게는 평화가 없다. 늘 자기를 따라다니는 어린 딸, 눈에 안 보이면 사라지고마는 딸,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 남편, 그리고 내연남.
니나의 내연남은 해변에서 일을 하는 대학생 윌이다. 윌은 누구에게나 다정하다. 그게 윌의 일이기도 하다. 레다와도 한번 저녁을 같이 먹는데, 레다는 윌에게 쉽사리 마음을 터놓는다. 레다가 인형을 돌려주기로 결심하고 니나의 집을 찾아갔을 때, 니나와 윌이 내연관계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레다도 그런 적이 있었다. 학회에서 교수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몇 번의 그런 생활이 반복된 후,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고는 집을 나가버린다. 여기서 혹자는 엄마의 책임감을 운운하겠고, 혹자는 바람난 유부녀의 도덕성에 문제를 제기하겠으나 분명한 건 레다가 삶에 만족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두 딸이 너무 버거워서, 아이들의 뒤치닥거리를 하다 뒤처질 것 같아서, 또는 그밖의 여러 이유로 레다는 우울해한다. 학회에 나가 혼자 있는 것(또는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것)이 레다에게는 유일한 탈출구이다. 가만 보면 엄마들에게는 탈출구가 많지 않다. 나는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문을 쾅 닫고 들어가 잠가버렸지만, 엄마는 쾅 닫고 들어가 잠글 방이 없었다. 엄마에게는 방이 없었다. 나는 그 사실을 얼마 전에 알았다.
레다는 3년간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 3년이 지나고, 아이들이 보고싶어져(영화에서는 그렇게 말하지만 아마도 레다의 우울이 가시고 난 후가 아닐까) 집으로 돌아간다. 그때쯤은 아마 아이들이 커서 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을 테고 엄마보다 친구를 찾았을 것이다.
레다는 인형을 돌려주지 않고, 마치 자식을 돌보듯이 인형을 돌본다. 아이는 어떤 인형을 사주어도 그 인형을 잊지 못한다. 니나 가정에는 작은 틈이 생겼고, 레다는 그 틈을 지켜본다. 니나는 괴로워한다. 인형을 잃어버린 아이는 엄마를 자꾸만 괴롭게 한다. 엄마가 괴롭지 않으려면 아이가 인형을 찾아야 한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레다는 인형을 가지고 있다.
어느 저녁, 윌이 레다를 찾아와 방을 빌려달라고 한다. 무슨 그런 부탁이 다 있는지 모를 일이다. 윌은 예전의 저녁식사에서 레다와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레다는 거절하지만 얼마 뒤 니나가 레다를 찾아온다. 레다는 기꺼이 방을 내어주겠다고 말하며, 인형을 돌려준다.
니나는 도대체 왜 그랬냐며 분노하지만, 레다는 그저 장난이었다고 말한다. 그저 장난이 아니라는 것쯤은 모두가 알고 있다. 레다가 인형을 훔친 건 행복해 보이는 니나에게 '너도 한번 괴로워봐라' 하는 마음이었을까, 딸들을 버렸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레다는 시장에서 니나를 마주친 적이 있다. 니나가 쓴 커다란 모자가 자꾸 바람에 날리자, 모자에 뾰족한 핀을 꽂아 고정시켜준다. 이렇게 하면 바람에 날아가지 않는다고. 그 말은 팁 같으면서도 모종의 조언이나 충고 같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레다가 사는 집에 놀러가겠다고 했던 니나는 레다가 준 건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며 핀을 돌려준다. 핀은 마치 자식을 품을 자격도 없다는 듯이, 레다의 아랫배에 깊이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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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랑이 너무 당연하게 여겨질 때가 있다. 엄마의 사랑은 당연하다고 너무도 쉽게 오해하게 된다. 이 당연한 사랑을 받지 못해 병들고, 당연한 사랑을 주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병든다.
엄마에게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거실이나 주방이 아닌, 엄마만의 방. 너무 힘들고 괴로울 때, 또는 엄마 역할 말고 다른 일을 해야 할 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공간 말이다. 엄마의 방이 없다는 것은 엄마의 사랑만큼이나 당연하게 여겨진다.
레다는 니나와 아이를 보면서 그 시절 자신의 모습을 끝없이 반추한다. 자식을 등지기로 결심했던 레다에게 그 시절은 어떻게 기억되었을까. 니나는 그 여름을 어떻게 기억할까. 어느 쪽으로나 썩 편치만은 않다. 엄마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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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도터(THE LOST DAUGHTER), 2021.
감독 : 메기 질렌할
주연 : 올리비아 콜맨, 다코타 존슨, 제시 버클리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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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월 첫째 주 극장 개봉 & 예정작 ?
임효겸
봉준호 감독이 극찬한 스릴러 영화 <잠>과 프랑스 젊은거장 #미아한센러브 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신작<어느 멋진 아침>까지 9월 첫째주 개봉예정작 같이 알아보실까요?
잠
Sleep
ⓒ 네이버영화
개요: 미스터리 | 한국 | 94분
감독: 유재선
출연: 정유미, 이선균
개봉: 2023.09.06.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
시놉시스
행복한 신혼부부 현수와 수진. 어느 날, 잠들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하는 현수. 깨어나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현수는 잠들면 가족들을 해칠까 두려움을 느끼고 수진은 매일 잠드는 순간 시작되는 끔찍한 공포 때문에 잠들지 못한다.
CINE PICK!
봉준호 감독은 “정말 독특하고 새로운 공포영화, 새로운 괴물 신인 감독의 탄생이다”라며 잠을 극찬했습니다. 제 76회 칸 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 시체스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메인 경쟁 섹션에 초청된 영화입니다.
어느 멋진 아침
One Fine Morning
ⓒ 네이버영화
개요: 드라마 | 프랑스 | 113분
감독: 미아 한센-러브
출연: 레아세이두, 멜빌 푸포 등
개봉: 2023.09.06.
배급: 찬란
시놉시스
여덟 살 난 딸, 투병 중인 아버지와 파리의 매일을 살아가고 있는 산드라는 어느 날 오랜 친구 클레망을 만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일과 가족, 사랑 사이에서 삶은 계속되고 때로는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하지만 아침은 여느 때와 같이 찬란하게 찾아온다.
CINE PICK!
프랑스의 젊은 거장으로 주목받는 미아 한센 러브는 “가장 직접적으로 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영화며 아버지의 존재를 영화로 남겨 기억하고 싶어 만들었다”라고 소개했습니다.
일주일간 친구
One Week Friends
ⓒ 네이버영화
개요: 멜로/로맨스 | 중국 | 106분
감독: 임효겸
출연: 조금맥, 린이, 심월, 왕가휘 등
개봉: 2023.09.06.
배급: (주)올랄라스토리
시놉시스
일주일마다 친구에 대한 기억을 잃는 전학생 ‘린샹즈’ 병 때문에 자발적 아싸가 돼버린 그녀에게 성화 재수학원 최고 인싸 3인방 ‘쉬유수’, ‘송샤오난’, ‘장우'가 다가온다. 세 사람은 샹즈의 단 하나뿐인 ‘일주일간 친구’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샹즈는 그들과의 추억을 일기장에 채워 나가기 시작한다
CINE PICK!
중국의 라이징스타 ‘린이’가 주연을 맡은 영화 <일주일간 친구>에서 학교 최고 ‘핵인싸’ 쉬유수 역을 맡으며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첫눈에 반한 전학생 린샹즈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과 장난기 가득한 매력을 보여줄 예정입니다.
오즈의 마법사
The Wizard Of Oz
ⓒ 네이버영화
개요: 가족, 판타지, 모험, 뮤지컬 | 미국 | 112분
감독: 빅터 플레밍
출연: 주디 갈랜드, 프랭크 모건, 레이 볼거, 버트 리르 등
재개봉: 2023.09.06.
배급: ㈜마운틴픽쳐스
시놉시스
회오리 바람에 휩쓸려 오즈의 나라로 내던져진 도로시는 집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위대한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는 것임을 알고 그를 찾아 긴 여정이 시작된다 . 그러나 도로시 일행을 방해하기 위해 뒤쫓아오는 서쪽 나라 마녀의 검은 그림자.
CINE PICK!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던 277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여 환상적인 화면과 촬영기술을 선보였습니다. 도로시가 회오리바람에 휩쓸려가는 동안 창 밖에 나타난 하늘을 나는 자전거 장면은 훗날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E.T>의 테마와 이미지에 그대로 반영되는 등 후대 판타지 영화에 미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이 큽니다.
이렇게 극장 개봉 영화, 총 네 편의 영화를 소개해 드렸는데 어떠셨나요?
그럼 남은 한 주도 건강하게 보내시길 바라며, 지금까지 씨네랩 에디터 Amy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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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스턴 교살자>, 범죄 수사 영화의 불후의 걸작
<보스턴 교살자>, 범죄 수사 영화의 불후의 걸작
'유명한 무명 감독'으로 알려진 리처드 플레이셔 감독의 <보스턴 교살자>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복수는 나의 것>,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 데이빗 핀처의 <조디악>으로 이어지는 범죄 수사 영화의 원형과도 같은 작품이자 불후의 걸작이다. 실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큐어>를 만들 때 <보스턴 교살자>로부터 막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밝힌 바 있다. 범죄 수사 영화로서 뛰어난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는 말할 것도 없고 탁월한 각본, 능란한 연출, 실험적인 편집, 경이로운 연기, 치밀하게 구성된 미장센에 이르기까지 <보스턴 교살자>는 그야말로 모든 영역에서 최상의 상태를 구현한다.
<보스턴 교살자>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화면 분할로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유도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극의 초반부, 어둠에 가려져 있는 어떤 형상의 실루엣과 우편물을 받지 않는 이웃이 걱정되어 이웃집 문을 열어보는 주민의 모습이 각각 왼쪽과 오른쪽 화면에 분할되어 나타난다. 어둠에 둘러싸인 형상에 대한 미스터리는 그것이 보스턴 연쇄살인범에 의해 살해당한 시체의 발이라는 것으로 드러나면서 충격적으로 종결된다. 이로써 관객들은 살인과 발견이라는 두 화면 사이의 관계성을 학습하게 되는데, 리처드 플레이셔는 이후 그러한 관계성을 다른 차원의 것으로 바꾸어 버린다. 한쪽에는 피해자가 될지 모를 여성을 다른 한쪽에는 범인의 시점 쇼트를 배치하여 두 화면의 합일이 이루어질 가능성을 내포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살인자와 피해자라는 관계성이 성립되는 순간 미스터리 대신 손에 땀을 쥐는 서스펜스가 작동되기 시작한다. 리처드 플레이셔는 화면 분할이라는 편집 기술만으로 미스터리와 서스펜스 양면을 완숙하게 오가며 탄복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들을 거듭 창조해낸다.
살인자와 피해자라는 구도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실험적 연출은 후반부에 드러나는 범죄자의 상태에 대한 은유로도 읽힌다. 경찰에 잡힌 그는 곧 충실한 가장과 사악한 살인자라는 이중 자아를 가지고 있는 환자로 밝혀진다. 선한 인물로 그려지는 전자의 남자는 후자의 행적을 전혀 알지 못하지만, 후자의 남자가 저지른 끔찍한 행적으로 인해 범인이 되고 사랑하는 가족과 완전히 분리된다. 하나의 스크린에 나란히 배치된 살인자와 피해자의 화면 구도는 한 인물에 공존하는 두 자아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 얽혀 있음을 시사한다. 악한 자아는 범죄자이지만 선한 자아는 피해자다.
이러한 전략은 서사 구조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연쇄살인범에 대한 미스터리와 그를 잡기 위한 수사가 주를 이루는 초반부를 지나 중간점에 이르면 영화는 누군가 TV로 정치 뉴스를 보고 있는 오프닝의 구도를 반복함으로써 사실상 영화를 다시 시작한다. 이 두 번째 영화의 오프닝에서 리처드 플레이셔는 미스터리의 대상이었던 범인을 당당하게 등장시키며 서사의 대전환을 이끈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붕괴된 미스터리의 자리를 서스펜스가 충분히 대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범인은 공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허무하게 잡히고 후반부는 거의 그를 신문하는 내용으로만 구성된다. 말하자면 범인을 잡는 것보다 일상 속에 자연스레 스며들어 있는 그의 분열된 자아를 논리적으로 탐구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훨씬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범인의 분열적 상태는 작중에서도 중요하게 언급되는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이 벌어졌던 1960년대 미국의 분열적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리처드 플레이셔는 범인의 정체를 탄로하는 것보다 그러한 사회적 분열 상태를 야기한 원인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 방식을 모색하는 작업이 무엇보다 우선이라는 점을 역설한다.
후반부 신문 장면에서 리처드 플레이셔는 이중 자아 사이의 사투를 고요한 엠비언트와 하얀 벽지, 두 자아의 대립을 보여줄 수 있는 거울 사이에 밀어 넣어 거의 질식할 것 같은 공기를 만들어낸다. 마침내 자기 내면의 악한 자아를 인지하고 그가 저지른 끔찍한 일들을 기억해낸 선한 자아는 내면의 살인자가 행한 범죄를 모노드라마의 형태로 재현한다. 롱 테이크로 촬영된 이 기념비적인 장면은 섞일 수 없는 두 자아가 합쳐지는 끔찍한 혼란과 함께 분열된 두 자아가 하나의 불완전한 인간으로 온전히 완성되는 기이한 안정감을 동시에 담아낸다. 근래에 본 최고의 명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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