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Hyun2024-04-12 10:01:38
이번 연니버스는 후회 없을 선택
드라마 '기생수: 더 그레이' 외 1편 리뷰
시청했던 작품을 한 패키지로 모아서 간단 리뷰를 하려고 한다. 대상은 '기생수: 더 그레이', '삼체'다.
'기생수: 더 그레이'
연상호 감독이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타고난 이야기꾼인 건 동의하나, 그가 구축한 '연니버스(연상호 유니버스)' 인장이 찍힌 작품들에 대한 관객들의 호불호는 극명하다. 하지만 이와아키 히토시 작가의 '기생수'를 드라마화한 '기생수: 더 그레이'는 후회 없을 선택이 될 것이다.
'기생수: 더 그레이'는 설정만 그대로 가져왔을 뿐, 원작 만화와는 다른 방향의 스토리를 들려준다. 판을 키우기보단 충청남도 남일군이라는 가상 지역 내로 의도적으로 축소하면서 동시에 서사, 캐릭터들의 전사 등을 속전속결로 풀어낸다. 여기에 '기생생물과 인간의 공존'이란 주제를 바탕으로 '기생생물을 지키려는 자, 막으려는 자, 공생하는 자'로 단순하게 공식화하면서 '인간성'에 대해 고찰하게 만든다.
'19세 관람가'가 붙었을 만큼, 소름 끼치는 비주얼 재현도 합격점이다. 드라마 전체를 이끌어가는 전소니와 구교환의 합, 시즌 2 여지를 남겼던 마지막 장면 또한 인상적이었다. 만약 시즌 2가 제작된다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사는 조금 더 손을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
'삼체'
SF 소설가 류츠신의 동명소설을 드라마화한 넷플릭스 '삼체'는 흥미롭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400년 뒤에 지구에 도착해 폭격을 가하겠다는 낯선 외계 문명을 대처하는 지구인들의 이야기를 그려내면서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으니 말이다.
한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지우려고 했던 광기의 결정체 문화대혁명의 피해자 예원제(자인 쳉/로잘린드 차오)는 복수를 위해 외계문명을 불러들였으나, 같은 가해자의 길을 걷게 돼 또다시 소중한 이를 잃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게 인상적이다. 또 과학과 이성이 상상치도 못하게 계속 고꾸라져 절망을 안겨주는 광경도 이목을 끌었다. 거듭된 실패와 절망, 비탄 속에서도 더 나은 해답을 찾아 나서려는 태도의 가치를 역설하면서 비과학적인 인물들까지 과학적 사고를 하는 모습도 매우 신선하다.
여기에 넷플릭스의 거대한 제작비를 쏟아부은 화려한 시각효과 및 스케일도 압권이다. VR 세계관과 우주의 윙크는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기도 하다. 심지어 이것이 원작소설의 초반부를 압축해서 담아냈다는 사실이 놀랍다. 시즌 2가 제작된다면 얼마나 더 대단한 스토리텔링과 SF요소들이 나올까 기대감만 높아진다.
★★★★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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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란말이가 없는 평화와 행복의 세상을 꿈꾸며
스포일러 주의!
<미키 17>은 마카롱 사업의 실패로 사채업자들에게 쫓기는 바람에 '니플하임'이라는 외계 행성 이주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된 미키 반스의 사연을 들려주며 시작한다. 딱히 할 줄 아는 게 없었던 미키는 무턱대고 '익스펜더블'에 지원하지만 문제는 익스펜더블이 홀로 위험한 일을 도맡고 혹시나 죽게 되면 다시 프린트되는 일상을 반복하게 만드는 매우 비인간적인 직업이었다. 결국 미키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고 무기력하게 보내지만 우연찮게 만난 나샤 배릿지와 연인이 되면서 그나마 행복감을 느끼는 삶을 이어나간다. 어느 날, 17번째로 프린트된 미키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발아래 크레바스에 빠져 땅 아래 깊은 곳으로 추락한다. 당연히 여느 때처럼 죽을 줄 알았으나 니플하임의 원주민 '크리퍼'가 미키를 구조해 주면서 가까스로 살아남게 된다. 그렇게 미키는 겨우 본부에 도착하지만 이미 18번째 미키가 프린트되어 있는 상황. 두 명의 미키가 서로 조우하고 마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러한 위기 속에서 펼쳐지는 미키의 이야기를 그린 봉준호 감독의 SF 블랙코미디 영화다.
블랙코미디 버전 <아일랜드>로 시작해서 정치적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로 끝나는 영화. <미키 17>은 안타깝게도 봉준호 감독이 만든 여덟 편의 영화들 중 가장 아래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아쉬움이 많은 영화다. 초반에 설정을 줄줄 푸는 미키의 내레이션과 기자의 인터뷰는 대사가 너무 길고 장황해서 지루하다. 전반부에는 복제인간에 대한 윤리적 문제에 대해 다룰 것처럼 하더니 후반부에 가면 그러한 문제의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프린트된 인간도 인간인가?' '설령 합리적이라고 해도 비인간적인 시스템은 옳은가?' '인간은 하나의 인격체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안에서는 자신과의 치열한 갈등을 벌인다.' 이러한 굵직굵직한 질문들이 중반부에서 멈춰버린 채 더 뻗어나가지 못하고 묻히고 말았기 때문이다. 한없이 커지는 스케일, 미키 17과 미키 18의 너무 빠른 갈등 해결, 후반으로 갈수록 정치 풍자가 더욱 강해지는 것이 원인이다.
특히 후반부의 전개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든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대한 기시감을 떨쳐버릴 수 없을 만큼 설정, 상황, 인물들까지 유사한 지점들이 너무나 많다. 크리처의 비슷한 디자인, 인간에게 고문을 받은 새끼 크리처, 그것에 분개하여 인간들을 향해 질주하는 크리처 종족들, 그리고 주인공의 희생으로 마무리되는 엔딩까지 놀라우리만큼 비슷하다. 물론 봉준호 감독의 영화가 미야자키 하야오를 떠올리게 만들었던 적이 한번 있긴 했다. 바로 <옥자>다. 그러나 <옥자>는 스타일의 유사성 정도에 머물렀던 반면 <미키 17>은 표절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오마주가 지나쳐서 흥미로울 수 있는 영화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인상이 강하다. 그러니까, 마치 전반부와 후반부가 각기 다른 영화처럼 보일 만큼 이질적이라고 해야 하나. 인물들도 문제가 있다. 나샤와 티모와 카이, 마샬 부부까지 대부분의 조연 캐릭터들이 다소 기능적으로 그려진다. 티모와 카이는 순간의 위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장치일 뿐, 영화가 어느 시점을 지나고 나면 진작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금세 존재감을 잃는다. 마샬 부부 역시 정치 풍자를 제외하면 딱히 인상적인 행적을 남기지 못한 채 허망하게 퇴장한다.
하지만 이런 치명적인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미키 17>을 마냥 혹평만 하기에는 좋은 지점들이 너무 많다. 첫 번째로 좋았던 점은 시의성 있는 정치 풍자다. 마샬 부부 캐릭터가 빛을 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미키 17>은 기본적으로 하루하루 수명을 갈아가며 살아가는 평범한 노동자들을 다루는 영화다. 영화 속 미키는 문자 그대로 죽어나가면서 마치 공무원처럼 생계를 위해 복무한다. 미키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초상화 같은 존재다. 그리고 그런 노동자를 괴롭히는 존재는 니플하임으로 향하는 우주선을 이끄는 함장, 즉 대통령이다. 여기까지는 봉준호 감독의 세계에서 흔히 봐왔던 노동 계급과 기득권의 단순한 대립 구도로 보인다. 그런데 그런 기득권을 묘사하는 대목이 심상치 않다. 이 영화 속의 대통령은 케네스 마샬이다. 케네스는 무능하고 멍청한 데다 자신의 이익 외에 다른 것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전형적인 뚱뚱한 독재자의 모습을 갖췄다.
그런 케네스의 곁에는 일파라는 아내가 있다. 흥미로운 건 이 부부는 대등한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아내가 대통령인 남편을 조종하면서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도록 통제한다. 심지어 대머리 부하 캐릭터가 한 명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뿔테안경을 썼다. 봉준호 감독은 특정 누군가를 모티브로 삼지는 않았다고 했지만 이렇게 되면 의심을 안 할 수가 없다. 이런 노골적인 상징성 때문에 <미키 17>은 2054년이라는 근미래를 다루지만 오히려 2022년부터 현재까지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를 겨냥하는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영화는 권력자들을 대놓고 조롱하는 방식으로 지금의 무능하고 부패한 기득권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자칫 익숙하다고 여길 수 있는 정치 풍자가 현실과 만나니 굉장히 시의적절해졌다. (물론 촬영은 2022년 12월에 끝났기 때문에 완전히 의도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와 현실이 이렇게나 절묘하게 맞닿은 건 우연을 넘어선 무언가라고 밖에 할 수가 없다.)
두 번째로 좋았던 점은 이전의 봉준호 영화들에서 볼 수 없었던 낙관주의다. 낙관주의는 자칫 영화를 비현실적으로 보이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론 비현실적인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따스한 위로가 되어주기도 한다. 결말부에 미키는 상상으로 추정되는 케네스와 일파의 부활을 목도한다. 다시 프린트된 케네스와 그었던 손목이 다시 회복되어 나타난 일파. 이는 마샬 부부로 대표되는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언제든지 사회를 이끄는 높은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 미키는 이렇게 말한다. "나도 이제 행복해도 괜찮아." 설령 그 불안이 현실이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곁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행복을 나누는 것이라는, 그러한 따뜻한 메시지를 뭉클하게 남기며 영화는 끝난다.
이 영화와 비슷하면서 상반되는 결말이 봉준호 감독의 다른 영화에 있다. 바로 <괴물>이다. <괴물>에서 어둠 속을 응시하던 강두는 시선을 거두고 소년과 함께 밥을 먹는다. 카메라는 이러한 모습을 멀찌감치 떨어져 관찰하는 것으로 끝난다. 어둠이 잠식한 공간 속 희미한 불빛에 의존한 채 덩그러니 남겨진 매점을 비추면서. 반면에 <미키 17>은 드넓은 대지 아래 빛을 받고 있는 미키에게 카메라가 더 가까이 다가가면서 끝난다. <괴물>은 어둠이 다시 닥쳐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주지만 <미키 17>은 낙관적이고 뭉클한 희망을 준다. 마마 크리퍼가 말하는 평화, 미키가 말하는 행복, 뻔하다면 뻔하다고 할 수 있는 주제들이지만 이제 그러한 것들이 없어진 지금과 같은 시대에 이를 외치는 것은 충분히 감동적이고 매력적이다. <미키 17>의 낙관주의는 그래서 좋았다. 부패한 권력자들이 빼앗아간 당연한 것들을 다시 되찾으려는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에.
<미키 17>은 가장 실망스러운 봉준호 영화인 동시에 가장 사랑스러운 봉준호 영화다. 그래서 실망을 했는데도 비판을 하기 망설여진다. 2022년부터 시작된 지난 정치 과정들을 지켜보며 우리는 불안에 떨기도 하고 공포를 느끼기도 하고 참담한 심정을 안은 채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때문에 우리는 평화와 행복이라는 단어와 멀어졌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단어가 있는 곳으로 우리를 가까이 끌어당기며 작금의 현실을 유쾌하게 조롱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위로한다. 이 영화가 사랑스러운 이유는 거기서 나온다.
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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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 영화 추천 5
여러분 ! 벌써 2021년 5월이 왔습니다. 넷플릭스, 왓챠, 디즈니 플러스, 티빙 등 OTT 플랫폼은 늘어만 가는데, 막상 영화를 보려 하면 무슨 영화를 봐야할지 고민이죠. 5월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등 가족의 달이라고 불리는데요. 이에 맞춰서,씨네랩이 가족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장르! 애니메이션 추천작 5편을 가지고왔습니다.
1. 천공의 성 라퓨타 Laputa: Castle In The Sky (1986) - 미야자키 하야오
" 광산촌 슬랙 계곡에서 기계 견습공으로 밝게 살고 있던 고아 소년 파즈는 어느날 빛이 나는 목걸이를 한 채 하늘에서 떨어지는 한 소녀(시타)를 구해준다. 소녀는 집안 대대로 전해져 오던 목걸이(비행석)로 인해 정부의 군대(무스카 일행)와 해적(도라 일당)들에게 쫓기고 있던 신세. 시타가 이들로부터 무사히 도망갈 수 있게 도와주던 중 파즈는 비행석과 하늘에 떠 있는 성 "라퓨타"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영향으로 라퓨타의 존재를 믿고 있던 파즈는 시타와 함께 라퓨타를 찾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파즈와 시타는 그들을 쫓던 군대에게 잡히고, 시타는 정부 비밀 조사관인 무스카에게 파즈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협력을 약속한다. 군대에서 풀려난 파즈는 시타를 구하기 위해 도라 일당에 들어가고, 그들과 함께 시타를 구해온다. 그러나 시타로 인해 봉인이 풀려 라퓨타의 위치를 가리키게 된 목걸이(비행석)는 무스카에게 빼앗기고 만다. 군대와 무스카는 거대한 비행선 골리앗을 타고 라퓨타를 찾아 나서고, 그 뒤를 쫓아 파즈와 시타도 도라 일당과 함께 라퓨타를 찾아 나선다. 갑자기 닥친 악천후와 골리앗의 공격으로 도라 일당과 헤어진 파즈와 시타는 우연히 라퓨타에 도착, 라퓨타의 아름다운 정원에 감탄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도라 일당을 생포한 군대와 무스카 일행도 라퓨타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라퓨타에 도착한 군대는 온갖 파괴행위와 보물을 모으는 데만 급급해 하고, 그 틈을 이용해 무스카는 시타를 잡아 라퓨타 내부로 사라진다. 파즈는 잡혀 있던 도라 일당을 구해주고, 시타를 구하기 위해 무스카를 뒤쫓는다. 시타와 함께 라퓨타 내부의 거대한 비행석이 있는 중추에 다다른 무스카는 시타에게 자신 또한 라퓨타 왕가의 일족이였음을 밝힌다. 그 옛날 지상으로 내려 온 라퓨타 왕가는 시타와 무스카의 일족, 이렇게 두 갈래로 나눠졌던 것. 무스카는 과거 라퓨타의 힘을 부활시킴으로 세계를 지배하고자 한다. 무스카의 수중에 넘어간 라퓨타로 인해 끔찍한 살상이 자행되자 시타는 파즈와 함께 할머니로부터 배운 파멸의 주문을 외운다."
<천공의 성 라퓨타> synopsis지브리 영화 좋아하세요? 저는 참 좋아하는데요, 지브리의 영화는 명작이 너무도 많기에, 어떤 영화를 선정할지 신중히생각하고, 이 영화를 가지고 왔습니다. 애니메이션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 <천공의 성 라퓨타>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기념비적인 영화입니다. 특유의 파란 하늘, 푸르른 나무들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확 뚫리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2.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I want to eat your pancreas (2018)
- 우시지마 신이치로
출처 : 네이버 영화
우리는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나 사실은…
죽는 게 너무 무섭다고 하면 어떻게 할래?”
내가 몰랐던 너, 네가 몰랐던 나
다시 우리의 이야기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synopsis애니메이션 제목 치곤 꽤나 자극적인 제목이기에 망설이는 분들이 계실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영화를 관람하고 나면어떠한 이유로 이런 제목을 지었는지 이해가 됩니다. 제 22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오픈 시네마 부문 초청작으로 공개된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관객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2018년 11월 개봉했고, 많은 이들의 인생 영화로 꼽히기도 했습니다. 마음이 따뜻해 지는 영화를 찾고 있다면,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추천드립니다.
3.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NIGHT IS SHORT, WALK ON GIRL (2017)
- 유아사 마사아키출처 : 네이버 영화
천진난만한 검은 머리 아가씨를 남몰래 좋아하는 선배는
오늘도 그녀의 관심을 받기 위해 우연을 가장한
*최대한 그녀의 눈앞에서 알짱거리기, 일명 최눈알 작전을 이어간다.
봄에는 폰토초에서 여름은 헌책시장에서 매운 음식 먹기 대회,
대학축제가 한창인 가을 그리고 지독한 독감에 시달리는 겨울까지!
단 하룻밤, 그녀의 발자취를 따라간 선배는 점점 기이한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데…
이렇게 만난 것도 어떤 인연!?
<밤을 짧아 걸어 아가씨야> synopsis독특하지만 연출력 또한 뒤쳐지지않는 애니메이션을 찾는다면,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추천드립니다. 영화를 보고만 있어도 마치 동화책 속에 들어온듯한 느낌을 주는 영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독특한 그림체로 호불호가 강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제 41회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 애니메이션 작품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 받은 작품입니다.
4. 슈렉 시리즈 Shrek (2001~) - 앤드류 아담슨, 비키 젠슨
출처 : 네이버 영화
옛날 옛적에 한 아름다운 공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오직 사랑하는 사람의 첫 키스만이 깰 수 있는 저주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녀는 불을 뿜는 무시무시한 용이 지키는 한 성에 갇혀 있었습니다. 수많은 용감한 기사들이 그녀를 구출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용이 지키는 그 성의 가장 높은 탑 꼭대기에 있는 방에서 '그녀의 사랑'과 '그의 키스'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만의 고요한 안식처에 백설공주, 신데렐라, 빗자루를 타고 다니는 마녀, 피리부는 아저씨, 피터팬 등등.. 동화속의 주인공들이 모두 쳐들어온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귀찮은 건 쉴새없이 떠들어대는 당나귀 덩키. 알고보니 얼굴이 몸의 반을 차지하는 1m도 안되는 숏다리 파콰드영주가 동화속의 주인공들을 다 쫓아낸것. 하지만 일은 이상하게 꼬여 결국 파콰드영주 대신 불뿜는 용의 성에 갇힌 피오나 공주를 구하러 떠나게 되는데..
<슈렉> synopsis드림웍스의 슈렉 시리즈는 애니메이션계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2001년, 비록 수상은 못했지만, 애니메이션 영화가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된 것만으로도 엄청난 이슈였던 <슈렉>이었죠. <슈렉 포에버>를 마지막으로녹색 괴물 슈렉은 우리의 곁을 떠났지만, 마지막 시리즈까지 박수를 받았습니다.
5. 미니언즈 Minions (2015) - 카일 발다, 피에르 꼬팽
출처 : 네이버 영화
인류가 탄생하기 훨씬 오래 전, 태초에 미니언이 있었다. 당대 최고의 슈퍼 악당만을 보스로 섬겨온 미니언들!
하지만 의도치 않은 치명적(?) 실수로 인해 보스들과 이별하게 되고, 우울증에 빠진 미니언들을 구하기 위해 용감한 리더 ‘케빈’은 자유로운 영혼 ‘스튜어트’와 무한 긍정 ‘밥’과 함께 ‘슈퍼배드 원정대’를 결성한다.
세계 악당 챔피언십에 참석해 최초의 여성 슈퍼 악당 ‘스칼렛’(산드라 블록)을 보고 첫눈에 홀~딱 반한 이들은 일생일대의 위기가 다가오는지도 모른 채 스칼렛의 특급 미션을 넙죽 받게 되는데…
<미니언즈> synopsis영화 <슈퍼배드>의 신스틸러 미니언즈들은 슈퍼배드에서 조연임에도 많은 사랑을 받았기에, <미니언즈>로 2015년 개봉했습니다. 영화 <미니언즈>는 스토리에선 큰 감동은 없지만, 정말 많은 굿즈들이 많은 만큼, 그들만의 귀여움으로 영화를 꽉채웠습니다.
씨네랩 에디터 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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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파이더맨:노 웨이 홈>거미 소년이 살아갈 익명의 삶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스테리오’의 계략으로 인해 세상에 정체가 탄로 난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톰 홀랜드)’는 영웅으로 포장된 미스테리오를 죽인 살인자로 몰리면서 갑작스레 평범한 고등학생으로서의 일상을 잃어버린다. 문제는 본인뿐만 스파이더맨의 조력자로 알려진 여자친구 'MJ(젠데이아)'와 절친 '네드(제이콥 배덜런)'의 대학 진학까지 막힌 것. 이에 피터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를 찾아가 피터 파커가 스파이더맨임을 온 세상이 잊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실패한 닥터의 마법 때문에 뜻하지 않게 열린 멀티버스에서 피터가 스파이더맨이라는 사실을 아는 빌런들이 속속들이 등장하고, 불시착한 빌런의 처리를 두고 피터는 닥터 스트레인지와 충돌하면서 더 큰 위기 속으로 빠져든다.
MCU로 돌아온 스파이더맨의 세 번째 이야기인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여러모로 어깨가 무거운 작품이었다. 우선 닥터 스트레인지를 등장시켜 향후 MCU가 펼칠 멀티버스의 맛을 보여주고, 다음 영화인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에 대한 기대감을 키워야 했다. 그린 고블린, 일렉트로, 닥터 옥토퍼스와 같은 과거의 빌런들과 추억이 된 두 스파이더맨의 복귀를 통해서는 지금까지 제작된 스파이더맨 프랜차이즈에 대한 헌사도 바쳐야 했다. 또 이른바 '홈커밍' 트릴로지의 대미를 장식할 필요도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 이 수많은 과제를 한 가지 주제 안에서 엮어낸다는 점이다.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바로 익명성이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속 피터의 이야기를 간략히 요약하면 스파이더맨이 피터 파커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어 익명을 되찾고자 하는 사투라고 할 수 있다. 당장 피터의 얼굴이 뉴욕의 모든 전광판에 등장하는 오프닝은 영화 속 모든 사건의 직간접적 발단으로 작동한다. 실제로 익명성의 상실은 피터와 주변 사람들의 실제 삶까지 망가뜨리며, 이에 피터는 자신은 물론 친구들까지 대학 진학이 어려워진 상황을 타개할 방법으로 자신의 익명성을 회복하고자 한다. 닥터 스트레인지의 주문이 실패로 돌아간 후 나타난 빌런들이 공통적으로 스파이더맨이 피터 파커라는 사실을 안다는 점, 또 빌런들을 막을 수 있는 궁극적인 해결책이 더 강력한 익명성의 획득이라는 사실도 이번 스파이더맨 영화가 말하려는 바를 잘 보여준다.
이때 익명성이라는 특성이 현대 사회의 삶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작중 피터의 모습은 마치 현대인의 잔혹동화 같기도 하다. 피터에게 익명성이 뉴욕의 빌딩 사이를 웹(web) 스윙하며 스파이더맨으로서 살아갈 기회이자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패였듯이, 현대인에게도 익명성은 웹(web)을 통해 연결된 인터넷 공간을 열어주고 그 안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방어수단이 된다는 공통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보호막을 잃은 피터가 무차별적인 비난의 표적이 된 것은 이른바 현실 속 '신상 털기'의 히어로 영화적 묘사나 다름없고, 이는 21세기를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악몽과도 같은 상황에 대한 간접 경험이라 할 수 있다. 피터가 학교 복도나 집 앞에서 수많은 카메라와 시선 앞에 서야만 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익명성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노 웨이 홈>을 본다면 영화의 주요 소재인 멀티버스와 빌런들 및 또 다른 스파이더맨의 등장도 팬서비스 이상의 행간을 지님을 알 수 있다. 영화가 익명성의 야누스적 얼굴에 대한 경계심과 책임질 줄 아는 개인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익명성은 본질적으로 무한한 해방감과 동시에 그 못지않은 비도덕성을 내재한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SNS와 커뮤니티, 게임에 존재하는 수많은 익명의 '나'는 자유롭게 행동하는 만큼 수많은 갈등을 빚을 수 있으며, 그 갈등과 충돌은 때때로 인터넷 공간 밖의 현실 공간에 존재하는 '나'에게까지 실질적인 피해를 안기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MCU의 피터는 현실의 '나'이고, 스파이더맨이 존재하는 수많은 멀티버스는 익명의 '내'가 살아가는 수많은 공간이며, 피터가 스파이더맨임을 알고 찾아온 빌런들은 익명의 '내'가 만들어낸 충돌에 대한 메타포라고 할 수 있다. 닥터 스트레인지의 마법이라는 쉽고 매끄러운 해결방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도 피터의 고민과 고난이 현실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결코 동화적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즉, 피터 파커로서의 삶과 스파이더맨으로서의 삶을 모두 살려는 게 문제라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말은 피터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이름들 간에 균형점을 찾지 못해 현실의 삶과 일상이 무너지는 모든 이들을 향한 지적인 셈이다.
또한 영화는 빌런들의 대척점에 서 있는 존재인 스파이더맨을 소환해 해결방안에 대한 힌트를 보여준다. 서로 다르지만 또 같은 존재로서 동질감을 느끼는 스파이더맨들은 공통의 경험을 토대로 위로와 격려, 그리고 조언을 건네며 트라우마의 극복을 돕는다. 이때 멀티버스를 넘나드는 스파이더맨 간의 연대는 인터넷 공간 속을 부유하던 서로 다른 '나', 수많은 부캐들과 본캐 사이의 만남과 일치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삶의 균형을 찾지 못한 뼈아픈 대가를 치러야 했던 피터가 또 다른 피터들을 만나 방황을 끝낼 힘을 얻었듯이, 현실의 '나' 역시 익명으로서의 삶을 포기할 수 없는 세상이라면 내적으로 단단해져서 삶의 주도권을 쥘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의 주도권이 곧 책임감을 뜻한다는 점에서 '큰 힘에 따르는 큰 책임을 깨닫는' 스파이더맨의 성장 서사 역시 새로운 보편성을 갖는다. 본래 고등학생에 불과한 피터 파커가 거미에게 물려 엄청난 근력과 특수한 능력을 지닌 영웅이 되는 것은 청소년기에 누구나 겪어야 하는 신체적 변화를 상징한다. 또 그러한 변화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그 과정에서 아픔과 슬픔을 겪어야 하는 스파이더맨의 모습은 청소년에서 성인이 되어가는 우리 모두의 고단함이 함축되어 있다. 즉,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라는 이 유명한 대사는 슈퍼히어로가 되는 것 이전에 온전한 성인이자 개인이라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덕목을 정의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큰 힘과 큰 책임의 범주를 익명성이라는 맥락 안에서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한 명의 성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보다 현대적인 조건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원래도 성장 영화였던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변화한 시대에 발맞추는 새로운 성장 서사로 탈바꿈한다.
이에 더해 익명성에 따르는 책임감이라는 메시지는 빌런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스파이더맨의 도덕성과 선량함이 영화 내내 강조되는 이유와도 직결된다. 작중 팟캐스트 진행자 혹은 유튜버처럼 묘사된 JJJ의 방향 설정에 따라 많은 이들이 대중이라는 익명에 기대어 스파이더맨을 비난하듯이, 현실에서도 가짜 뉴스 유포와 사이버불링은 더욱더 만연하고 있다. 영화는 이런 상황을 예방하고 고쳐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결국 익명으로 활동하는 개개인의 도덕성과 책임감에서 찾고자 한다. 그래서 개개인의 선량함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 행간을 담아낸 "누군가를 돕는 것은, 모두를 돕는 것이다(When you help someone, You help everyone)"라는 대사는 피터가 진정으로 친절한 이웃이자 익명의 히어로인 스파이더맨으로서 다시금 활동하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또한 MCU의 스파이더맨이 이전의 시리즈들과 달리 스파이더맨답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아온 것을 고려할 때, 익명성에 중점을 둔 이야기 전개는 '홈커밍' 트릴로지를 영리하게 마무리하는 최선의 선택처럼 보인다. 사실 토니 스타크가 선물한 최첨단 나노 슈트와 화려한 어벤져스 인맥을 가진 MCU의 스파이더맨에게서는 가난하지만 친절한 이웃이라는 소시민적 이미지를 찾기 어려웠다. 또 마블의 유일한 고등학생 히어로라는 사실을 고려하더라도, 지난 두 편에서 너무나도 손쉽게 사고를 저질러 버리는 피터는 스스로 책임을 질 줄 아는 영웅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철저히 정체를 감추는 슈퍼히어로라는 정체성도 스스럼없이 통성명하는 스파이더맨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MCU의 스파이더맨은 스파이더맨보다도 아이언맨의 후계자라는 이미지가 더 확고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가운데 마블은 스파이더맨의 본래 특징이기도 한 익명성에 스포트라이트를 맞춰서 두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주제를 계승함과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덧붙이는 데 성공했다. 일관되면서도 현대적인 주제와 메시지를 통해 MCU의 일원으로서, 동시에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일원으로서 어엿한 영웅의 탄생을 그려낸 것이다. 그렇기에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재미와 감동 사이로 쓸쓸함과 짠함이 흘러나오는 복합적인 매력이 넘치는 작품으로 관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
물론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도 인상적인 스토리텔링과는 별개로 몇몇 단점이 존재한다. 일단 수많은 캐릭터의 과거가 철저히 대사로만 언급되다 보니 이전에 나온 총 일곱 편의 스파이더맨 영화를 보지 않았거나 그 기억이 희미한 경우 영화의 전개를 따라가기 어렵다는 본질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또한 <어벤져스: 엔드게임>처럼 닥터 스트레인지의 마법이 실패하는 장면 등 영화의 수월한 전개를 위해 개연성을 포기한 몇몇 대목이 눈에 띈다.
무엇보다도 블록버스터 영화로서의 볼거리가 기대에 못 미치는 인상을 남긴다. 비록 2억 달러가 채 되지 않는 제작비가 블록버스터 영화치고 적은 수준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어설픈 CG 장면이 몰입을 저해하는 경우가 종종 보이기 때문이다. 닥터 스트레인지의 마법으로 인해 뉴욕의 공간이 뒤틀리는 장면은 <닥터 스트레인지> 1편 속 유사한 장면과 비교했을 때 부자연스러움을 숨길 수 없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자유의 여신상에서 펼쳐진 전투도 그 배경이 지나치게 어두워서 어떤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인지를 알아보기 어렵다는 문제를 노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게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평가가 주어지는 것은 결코 과하지 않아 보인다. 이는 프랜차이즈의 일원으로서 서로 다른 제작사의 시리즈를 한 데 묶고, MCU의 일원으로서 멀티버스라는 세계관의 확장에도 한 몫하며, 홈커밍 트릴로지를 마무리 짓는 최종장으로서 그간의 비판점을 해결하는 어려운 미션을 준수하게 엮어낸 것만으로도 정당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현대적이면서도 일관된 익명성이라는 주제와 메시지를 통해 스파이더맨의 성장을 깔끔하게 마무리 지은 만큼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독립된 작품으로서도 호평받아 마땅한 슈퍼히어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익명이라는 거미줄을 잡고 마침내 영웅이 된 거미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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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낙인 찍힌 삶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다큐 두 편
*〈거리의 소년 사니〉
국제경쟁/다큐멘터리
〈거리의 소년 사니〉는 노동계급 남성성이 어떤 길을 걷는지에 관한 놀랍도록 흥미롭고 흡인력 강한 다큐멘터리다. 두 감독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한 소년을 12년 동안 카메라에 담았다. 8살 소년 사니는 거침이 없다. 그와 친구들은 “언젠가 경찰에 체포될 거예요”라는 말을 일상적 농담으로 주고받는다. 머저리, 밑바닥 인생, 부랑자, 쓸모없는 거리의 아이들……. 사니와 그 친구들을 부르는 말은 여럿이지만 이들이 내포하는 의미는 한결같다. 지독히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결국 사회에 해만 끼치는 위험한 존재로 성장하리라는 것. 영화는 이 자기 충족적 예언의 시작점으로 돌아가 그 허구적 빈약함을 폭로한다.
사니는 늘 ‘강함’을 열망한다. 영화에는 그가 강해지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영화가 보여주는 사니의 일상을 보면 그에게 ‘강함’은 ‘거칢’의 다른 이름인 듯하다. 스케이트를 타고 다니며 위험천만한 주행을 일삼고, 도무지 ‘장난’으로 보기 힘든 장난을 일삼으며, 학교 교육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어 보이는 사니와 친구들. 그러나 청소년이 된 사니 무리가 털어놓듯 그들을 강해 보이게 해주는 ‘나쁜 짓’의 의미는 ‘어린아이의 환상’, ‘어른이 되기 싫다’는 불안의 투영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거칠고 투박한 남성성을 과잉 수행하는 데서밖에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강함’을 갈망한다. 이들의 ‘강함’은 실은 사회적 존재로 존중받을 수 없다는 ‘불안’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불행한 것은, 사니가 자신이 뽐내는 거친 남성성의 허약한 이면을 깨달을 때쯤에는 이미 현실의 무게가 그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는 점이다. 불장난을 종종 벌이던 사니 무리는 기숙사에 화재를 일으키고, 이 사건은 사망 사고로 이어진다. 그들에게 허락된 거의 유일한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을 뿐인 ‘비행 청소년’은 이렇게 순식간에 ‘범죄자’가 되어버린다. 사니는 육체노동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고 여자 친구와 결혼을 꿈꾸지만 재판 결과에 따라 순식간에 닥쳐버린 비극적 운명에 꼼짝없이 갇혀버릴 판이다. 그에게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정말 이 모든 게 사니 개인만의 책임인지를 묻고 싶을 뿐이다. 놀랍도록 생생한 방식으로 노동계급 출신 남자아이들이 마주하는 남성성의 비극적 구조를 조망케 해주는 영화다.
*〈데이비 스트리트의 창녀들〉
게스트 시네필/다큐멘터리
〈데이비 스트리트의 창녀들〉은 ‘게스트 시네필: 아르벨로스 필름 데이비드 메리엇’ 섹션 상영작이다. 이 세션은 저명한 영화 복원, 아카이브 활동가가 직접 선정한 영화를 선보이는 섹션으로, 이번에는 캐나다의 영화를 발굴하고 복원하는 캐나다 인터내셔널 픽쳐스의 데이비드 메리엇이 영화를 선정했다. 메리엇은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 전통이 강한 캐나다에서도 최고 다큐멘터리 중 하나로 꼽힌다고 소개했다.
‘캐나다 매춘의 성지’로 꼽히는 밴쿠버의 데이비 스트리트 성노동자의 삶과 노동을 촘촘하고 긴급하게 정치화하는 이 영화의 제작기가 흥미롭다. 애초에 두 감독은 제작사에게서 ‘도덕적 창녀’, 즉 생계 등의 문제로 어쩔 수 없이 성노동에 뛰어든 사람들을 다루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감독은 이를 거부하고 독립영화로 제작해 성노동자들의 날 것 그대로의 삶과 노동을 담아냈다. 영화에는 성 구매자들의 얼굴과 흥정 등 어떻게 촬영했을지 궁금한 장면이 많은데, 성노동자들이 몰래 마이크를 달고 카메라로 촬영하는 등의 기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영화는 당시 데이비 스트리트의 성노동자를 비추며, 경쾌하고 발랄하게 시작한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이 영화에는 성노동자들의 삶에 관해 영화가 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담겼다. 호객과 흥정 장면, 가족 인터뷰, 일하며 겪은 폭력, 그들 사이의 갈등, 일상적인 불인과 미래의 압박, 마약 문제 등등. 영화가 성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제멋대로 재단하지 않는다는 점이 유독 인상 깊다. 서로 다른 성노동자들은 왜 자신이 이 일을 시작했는지 말하는 부분이 대표적이다. 누군가는 그저 돈이 필요해서 이 일을 시작했고, 누군가는 순전히 아빠에게 복수하고 싶어서 이 일을 시작했다. 즉 영화는 ‘동정할 만한’, ‘도덕’을 중시하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사연을 맨 앞으로 내놓지 않는다. 물론 이들의 ‘자발적 선택’에 구조적 맥락이 있다는 점도 깊이 있게 다룬다. 성매매/성노동에 대한 기존 통념을 계속 비껴가면서도 그들이 일터와 삶에서 만들어내는 생기와 활력을 자연스레 담아낸다.
몇몇 인상적인 장면을 살펴보자. 데이비 스트리트에는 크로스드레스, 트랜스젠더, 시스젠더 여성, 게이 등등이 구역을 나누어 일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항상 함께였다. 폭력적으로 구는 성구매자가 있으면 함께 나서 동료를 보호해주고 정보를 공유하는 등 연대하며 서로를 지켰다. “있으면 안 될 존재들이 한데 모여 있죠.” 도덕 분류 체계의 맨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낙인을 비틀며 자신들의 현재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며 재의미화한 말이다. 사회에 ‘불온하다’ 낙인찍힌 존재들의 모든 연대에 적용할 수 있을 만큼 간결하면서도 강력하다.
영화의 또 다른 감동적인 순간은 캐나다 최초의 성노동자 집회 장면이다. 성노동 비범죄화와 미성년자 성매매 금지, 처우 개선,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대안을 요구하며 당당히 행진하는 성노동자이자 활동가들에게서 ‘절망적으로 낙관’하는 태도가 갖는 힘을 분명하게 감각할 수 있었다. 이 영화를 큐레이션한 메리엇에 따르면, 〈데이비 스트리트의 창녀들〉은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아 큰 화제를 모았으나 정작 성노동자들은 86년 엑스포를 계기로 다른 곳으로 쫓기듯 이주했다고 한다.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들이 절망 속에서도 낙관으로 벼려낸 정치적 저항에 접속한 우리가 이를 어떻게 이어받을 수 있을지 고민해볼 일이다.
만약 당신이 영화에 나오는 온갖 ‘도착자’, ‘변태’에 끝까지 마음을 열지 못하겠거든 영화에 출연한 성노동자 어머니 인터뷰를 유심히 보면 좋겠다. 그녀는 한때는 아들이었으나 지금은 트랜스 여성이자 크로스드레서로 성노동하는 미셸이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도, 사람들에게 그들 역시 사람이라는 점을 늘 상기해달라고 당부한다. 성노동자라는 이유로, 규범적 존재론에서 벗어난 자라는 이유로 함부로 대하거나 존중받지 못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를 급진적으로 전복하는 관점이든 포괄적 휴머니즘의 관점이든, 성노동자들이 자기 자신을 위한 정치학을 직접 만들어가는 과정을 좇는 이 영화가 뿜어내는 생기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성노동' '퀴어' 등의 말에 근본적인 거부감을 느끼는 보수적 비타협주의자의 심장마저도 두려움에 떨게 만들 영화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을 통해 제25회 국제전주영화제에 기자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두 영화의 상영 시간은 영화제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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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안의 늪
LA의 유명 코미디언, 헨리 맥헨리는 관객들을 막대하는 시크한 코미디언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유명 오페라 가수 안과의 스캔들로 아주 핫한 위치에 있다. 그의 인생은 그렇게 탄탄대로를 걷는 것처럼 보였는데, 아네트가 태어난 이후부터 눈에 띄게 자신의 인기가 떨어지고, 안과 비교해 유명세가 격차가 나기 시작하면서 그의 폭력적인 성격에 대한 루머가 커지기 시작한다. 그 루머를 증명이라도 하듯, 시간이 흘러, 크루즈 가족 여행에서 안이 안타깝게 죽고, 그가 안을 죽인 용의자가 되는데, 그는 정말 안을 죽인 걸까? 그렇다면, 아네트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걸까?
1. Kill or Save
"How did the show go?
"I killed them."
"I saved them."
공연을 잘 끝냈냐는 말에, 내가 다 죽여버렸지 라고 대답하는 헨리와 내가 다 살렸지 라고 대답하는 안. 똑같이 공연을 잘 끝냈다는 표현이지만 이 두 사람의 삶의 태도가 이 대사에서 드러난다. 헨리는 관객들이 웃으면, 관객들을 굴복시키고,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관객들과 대결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반대로 안은 오페라 가수로서 오페라에 몰입해 감동을 주고, 관객들을 홀리는 연기를 한다. 관객들을 죽여야 할 대상으로 보았던 헨리는 더 이상 관객들이 죽어주지 않자, 약올라하고, 관객들과 싸우는 것도 불사한다. 하지만 안은 관객들을 아끼고, 이 관객들을 내가 어떻게 하면 감동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한다.
헨리는 잘 나가던 시절의 향수에 젖어 이전처럼 관객들이 자신에게 정복당해주지 않음에 분노한다. 그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나이가 들고, 인기가 떨어지는 과정이 그의 몸이 망가져가는 과정으로 표현된다. 열심히 무대 전에 운동하고, 자기 관리하던 헨리 자신은 이제 없고, 아네트의 탄생 이후 육아스트레스에 찌든, 점점 배가 나오는 가장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의 자기파괴적인 성향은 그의 상황을 모두 부정적으로 흘러가게 만든다. 떨어지지 않는 안의 인기에 반해, 자신은 인기가 다 떨어져 집에서 육아나 하고 있다는 삐뚤어진 자존심이 그가 한 때, 너무 사랑했던 피앙세를 질투, 증오의 대상으로 바뀌게 했다. 자기 파괴가 자기 연민, 피해망상으로 커져가는 과정 속에서 그가 질투, 증오, 부러움의 대상인 안와 함께 추는 광기의 왈츠는 한 여자를 이렇게라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표출된 장면이다. 그녀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 그것이 바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심연'이다.
그는 그녀가 그의 심연을 본 사람이고, 그 심연 속에서 끌어내어 빛의 영역으로 이끌어준 사람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심연은 그의 마음 속에 있는 정복욕, 어두운 마음을 형상화한 표현이다. 그의 마음 속에 있는 킬러 마인드에 대해 알고서도 그를 사랑한 안은 그의 인생에 그를 구원할 구원자와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그의 마음 속 심연의 어두움을 구원할 사람은 안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어야 했다. 자기 자신이 그 킬러 마인드를 다스리지 못하면, 그 업보가 다 자기 자식에게 갈 것이었으므로.
2. 심연의 복제품, 아네트
영화를 잘 보다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헨리의 딸로 등장하는 아네트는 puppet 인형 같은 몸과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한 듯한 얼굴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아네트가 '사람같지 않다'는 것이다.
아네트의 사람같지 않아 보이는 것은 헨리가 아네트를 자신의 삶의 인형처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는 데에서 기인한다. 아네트는 헨리의 인생을 장식할 일종의 부품처럼 취급되었기 때문에 헨리가 소유한 꼭두각시처럼 표현하기 위해 아네트의 몸은 인형처럼 표현된 것이다. 이런 헨리와 아네트의 관계성을 보고 있자면, 수많은 부모와 자녀 사이의 가스라이팅을 생각나게 한다. 부모는 자신의 사랑의 결과물로서 아이를 사랑해왔다고 생각하지만 그 점에 대해서 아이의 입장도 들어봐야 한다. 부모가 외치는 자식을 향한 사랑이 정말 자식을 위한 사랑인지 자식을 수단화한 부모 자신을 위한 사랑인지는 아이가 자아가 형성된 이후에 결판이 난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했는지는 자식만이 정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자아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부모가 세상의 전부이지만 그 세상의 전부였던 사람들이 날 이용했다는 생각이 들면, 부모를 향한 무조건적인 신뢰는 증오로 변질된다. 그 증오는 그 아이의 심연으로 치환된다. 고로 이 영화는 헨리의 심연이 대물림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I won't forgive and I won't forget.
아네트는 그를 용서할 수도, 잊을 수도 없을 거라고 했다. 이 대사를 통해 아네트는 자신에게 사랑이라는 거짓말로 상처를 준 아버지를 용서할 수도, 잊을 수도 없음을, 자신에게 대물림된 심연의 어두움을 이미 보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Don't cast your eyes down the abyss"
영화 후반부에 헨리가 아네트에게 던지는 마지막 메시지, 이 메시지는 아네트에게 닿지 못할 것이다. 아네트는 그 심연을 보면, 헨리가 자신에게 했던 행동들이 떠오를 것이기 때문에 이미 그 심연의 존재를 인지한 아네트에게 이제와서 충고랍시고 하는 헨리의 대사는 적반하장의 태도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 대사를 다시 풀어 해석한다면, "내가 너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그 상처를 잊고, 너의 인생을 살렴."
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상처를 준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상처를 받은 사람 입장에서는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헨리의 문제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는, 자신의 심연, 어두운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을 소유하려고 하고, 끊임없이 남을 수단화했던 것이었다. 안을 사랑하는 시간 동안 잠시 위안을 얻었지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불타는 사랑도 결국 언젠가는 끝이 나고, 자식을 위한다는 변명 아래 자식의 유명세로 자신의 인생의 꽃을 피워보고자 했지만 그 작전도 실패한다. 자신의 업보처럼 지니고 있던 심연을 남의 힘을 빌어 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업보였던 심연을 직시하고, 자기 자신이 극복하고자 노력했어야 했다.
이 영화를 통해 부모가 될 자격에 대해 논해볼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단순하게 아기가 예쁘다고,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한다고 아이를 낳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부모라는 사람이 완벽무결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자신의 콤플렉스를 직시하고, 그 콤플렉스를 자식에게 대물림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성숙함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깊이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다. 부모는 한 아이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일종의 창조자이기에.
3. 총평
이 영화를 왜 뮤지컬 형식으로 만든 것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영화가 끝난 순간까지도 왜 이 영화가 뮤지컬 형식이고, 뭐 때문에 이 영화는 난해한 걸까에 대해 고민했다. 고민의 결과, 전체적인 시나리오의 분위기는 아주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인데, 계속 정신없이 몰아치듯이 영화 속 인물들이 끊임없이 노래하고, 대사도 뮤지컬처럼 노래하듯이 진행되기 때문에 시나리오의 분위기와 영화의 형식 사이에서 미묘한 이질감을 느낀 것 같다. 우울하고, 어두운 씬인데, 인물은 계속 노래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이것이 얼마나 낯선 경험인가!
결국 이 영화가 뮤지컬 형식으로 진행된 이유는 이 잔혹동화를 더 잔혹해 보이도록, 관객들이 그 잔혹함을 뼈져리게 느낄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나름대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용과 형식 사이의 이질감 때문인지 그 정신없는 영화를 곱씹는 와중에도 모든 장면들이 하나하나 감정적으로 잘 각인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계속 그러고 있는 중이다.
* 해당 영화의 시사회는 씨네 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참석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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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과라는 서정
올타임 베스트셀러로 잘 알려진 구병모 작가의 소설 <파과>가 뮤지컬에 이어 이번엔 영화로 곧 관객들을 찾아갈 예정이다. 주인공은 60대의 여성 킬러 '조각'으로 철저하게 원칙 아래 세상에 존재하는 쓰레기같은 인간들을 '방역' 하던 중 그녀의 삶에 등장한 새로운 얼굴들에 의해 그 원칙들이 조금씩 깨져가기 시작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원작에 대한 높은 평가와 더불어 국내 영화 시장에서는 좀 처럼 찾아 보기 힘든 60대 여성 킬러를 소재로 하여 잠잠해진 극장가의 새 바람을 불어올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그렇기에 소설을 접하지 않았더라도 보다 <파과>를 즐길 수 있는 몇 가지 포인트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우선 영화는 원활한 영상화를 위해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를 비롯한 디테일들을 구성하여 보다 풍부하게 스토리를 진행시킨다. 122분의 러닝타임 빼곡히 자리한 조각을 둘러싼 새로운 만남들은 오랜 시간 만남을 꺼려왔던 조각의 마음을 뒤흔듦과 동시에 조각이라는 캐릭터가 갖고 있는 성격적 특성을 빠짐없이 보여주게 된다. 특히 원작보다 풍성해진 미스터리한 킬러 '투우'는 조각과 상반된 모습과 시종일관 그런 그녀를 뒤쫓는 인물로 그려지며 궁금증을 더하고 조각의 삶을 위협하는 극적 긴장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여기서 <파과> 만의 또 다른 진면목이 등장하게 되는데, 관객은 중반부부터 어쩐지 투우가 조각을 향해 분노가 아닌 색다른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추측하게 된다. 조각과 투우, 두 인물의 대면씬마다 생겨나는 이 의구심은 영화의 결말까지 주요 관람 포인트가 되어주며 결국 한 명이 그 '진실'을 알아내는 순간 그간 쌓아올린 인물들의 감정선이 덩달아 폭발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투우 못지 않게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강 선생'은 그야말로 조각의 삶에 터닝 포인트가 되어주는 인물로 배우 투우와는 확연히 다른 차분한 어조와 행동 등으로 차이점을 보이며 의해 그간 흔들리지 않았던 원칙이 깨어지는 장치로 작용하게 된다. 소중한 사람을 만들지 않겠다던 조각의 다짐과는 달리 자신을 구해준 강선생을 자신의 삶이라는 영역 안에 두고자 갈등하는 조각의 모습은 서정성을 보이게 되며 과연 그녀의 선택이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일로 향할지 아님 변화의 길로 향할지 궁금증을 남기게 된다.
지금 밝힌 바와 같이 영화는 조각과 투우 그리고 강 선생이라는 묘한 삼각관계를 만들어내는데 이들을 둘러싼 전개가 이전 영화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인물간의 구조일 뿐더러 재차 강조하는 '60대 여성'의 삶 속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변화라는 것에 있어 색다른 관람을 선사하게 된다. 조각이 강 선생과 투우를 어째서 다르게 대할 수 밖에 없으며 투우는 그러한 차이에 왜 분노하게 되는지, 강 선생은 평범한 자신의 삶이 점차 위기 속으로 들어감에도 조각을 신경 쓰는지 등 그 관계성의 뒤를 정신없이 쫓다보면 어느새 영화는 그 끝으로 관객을 인도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강렬한 만남에 간과하게 되는 또 다른 만남이 있다. 바로 강아지 '무용'의 존재이다. 원작에서도 호평을 받았던 이 무용의 등장은 고단했던 조각의 삶을 상징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녀의 변화를 암시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역시 점차 변화하는 조각의 모습을 무용에게 건네는 대화로 확인할 수 있으며 길 위의 상처 받고 버려진 존재가 어떻게 세 인물에게 각각 해당되는지 그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 역시 관람 포인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또한 영화는 일종의 세게관을 형성, 그 이후나 이전에 대해서도 역시 궁금증을 자극하고 흥미를 유발한다. 신성방역이라는 킬러집단의 운영방식과 그 시작은 조각의 회상 등을 통해 보다 구체화 되나 대모 라고 일컫어지는 조각의 무시무시한 존재감에 영화 이전과 이후 역시 상상하게끔 한다. 또한 너무 세계관에 심취하기보다 영화는 과감하게 캐릭텅에게 초점을 맞추는 방식을 택함으로 화려한 액션 외에도 정제된 킬러의 삶을 거쳐온 조각 그 자체에 집중하게 한다. 하지만 이러한 지점이 조각을 둘러싼 세계관은 물론 회상으로써만 등장하는 스승 '류'와 그에게 많은 것을 전수 받은 '어린 조각'의 이야기를 간접 체험하게 해 관객을 더욱 그 안으로 빨아들이는 효과를 빚어내게 된다.
인생은 타이밍 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저기 우스갯 소리로 쓰이곤 하는 말이지만 우리의 삶에 분명한 타이밍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나를 둘러싼 인연이 특히 그러하다. 내 삶을 바꿔놓을 정도의 큰 파장이 사람으로부터 뻗어나온 경험은 다들 하나쯤은 있지 않은가. 여기 조각의 삶이 그러하다. 킬러는 사람들을 죽이는 직업이기에 그 수많은 청소 대상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단 하나 뿐인 사람이 된다. 그렇기에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역시 기억된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그렇게 킬러의 뒤를 바짝 쫓게된다. 이는 살아남은 이들 뿐만이 아니다. 조각 역시 강 선생에게 구해지는 순간, 스승 류에게 구해지는 순간 잊을 수도 없고 돌이킬 수도 없는 시간들을 맞이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영원히 그 시간 속에 살아가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반면 어떤 이는 묵묵하게 그 시간을 가슴에 묻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간다. 그곳에서 비롯된 비극은 극적이나 관객의 가슴에도 크게 남게 된다. 영화 <파과>는 바로 그러한 지점을 놓치지 않고 강조한다. 내 인생을 뒤흔들 만남 그리고 그에 따른 시련 하지만 결국 그 시간을 결코 후회하지 않고 기억하겠다 말하는 그런 영화인 것이다. 하필 지금, 하필 이때 고독하게 살아오던 킬러 조각의 삶에 들어온 이들과 그들이 보여줄 서정. 이 영화 역시 다신의 타이밍에 맞게 찾아간 인연이 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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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주 최신개봉영화(특송, 하우스 오브 구찌,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청춘적니, 클리포드 더 빅 레드 독)
[WEEKEND CHOICE MOVIE] 2022년 1월 2주차 #개봉영화
#최신영화#영화추천 #영화예고편
#특송 #하우스오브구찌 #웨스트사이드스토리 #청춘적니 #클리포드더빅레드독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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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 종료 한 달 전, 갑자기 아버지가 나타났다”
이제 곧 성인이 되어 보육원 퇴소를 앞둔 도윤 앞에 15년 만에 아버지 승원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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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면, 그건 우리가 특별한 사이이기 때문일 거야.
존재조차 몰랐던 우리, 너무 늦은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