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4-05-02 19:45:52
[JIFF 데일리] 독립‧예술영화의 최대 축제, JIFF 개막식 이모저모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 〈새벽의 모든〉
2024년 5월 1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에서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식이 4,000여 명의 관객이 참여한 가운데 공승연, 이희준 배우의 사회로 열렸다. 이번 영화제에는 국제경쟁 부분에 747편, 단편과 장편을 합한 한국영화 부문에 1,513편이 출품되어 역대 최고의 경쟁률을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독립과 대안이라는 가치로 다양한 영화를 선보여왔다”는 민성욱 공동집행위원장의 말에 더한층 무게가 실리는 대목이다.
팬데믹 강타의 후유증이 아직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고, OTT의 등장으로 기존 영화 산업을 관통하던 모든 공식은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여러모로 영화계는 격변의 시기를 통과하는 중이다. 그 와중에도 독립‧예술영화의 기반을 오랫동안 다져온 전주국제영화제에 이토록 많은 작품이 출품되었다는 건 영화인들이 안팎의 위기에도 영화로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의미일 터. ‘우리는 늘 선을 넘지’라는 지난해의 슬로건을 올해도 유지한 이번 영화제가 어떤 영화를 펼쳐낼지가 유독 기대되는 이유다.
개막식에는 민성욱, 정준호 공동집행위원장의 축사와 우범기 조직위원장 겸 전주 시장의 개막 선언, 개막 축하 공연, 경쟁 부문 심사위원들의 심사 기준 언급 등의 순서로 채워졌다. 국제경쟁 부문 심사위원을 맡은 유지태 배우는 누군가 정성들여 만든 영화를 심사위원의 주관으로 평가하는 일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면서도 "이번 영화제가 지금도 골방에서 글을 쓰는 감독과 작가, 예비 배우들을 위한 영화제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히기도 했다. 역대 최대 출품작 중 어떤 작품이 수상의 영예를 누릴지 궁금증이 증폭된다.

한편 개막작으로는 최근 베이징국제영화제에서 예술공헌상을 수상한 미야케 쇼 감독의 〈새벽의 모든〉이 선정되었다. 각각 월경전후증후군인 PMS와 공황장애로 어려움을 겪는 두 남녀가 서로를 도우며 연대와 희망을 벼려내는 영화다. 생리 때만 되면 평소의 차분하고 사려 깊은 성격과는 달리 공격성이 마구 분출되는 후지사와는 이 문제로 난처한 일이 반복되자 새로 들어간 회사를 2달 만에 그만 둘 수밖에 없을 정도로 증세가 심하다. 마찬가지로 어느 날 갑자기 공황장애가 찾아온 야마조에 역시 이 때문에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런 둘이 어린이용 과학 키트를 만드는 자그만 회사에서 함께 일한다. 서로의 어려움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상대가 불편하고 짜증나기만 했지만 우연한 계기로 상대 역시 정신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안 이후에는 조금씩 ‘참견’하는 ‘오지랖’으로 서로를 보듬어나간다. 야마조에의 말마따나 둘 사이에는 이해할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하지만 서로를 도와줄 수는 있다. 〈새벽의 모든〉은 이 사소한 사실을 차근히 펼쳐내 보인다.
두 사람이 벼려내는 연대의 장소가 회사라는 점은 눈여겨볼만하다. ‘회사’는 자본주의의 핵심인 장소다. 회사에서의 끝없는 경쟁과 자기 갱신은 인간의 정신을 소진시키다 이내 탈진시킨다. 모든 정신 질환의 원인이 자본주의일 수는 없지만, 동시대 정신질환의 많은 특징이 여기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후지사와와 야마조에는 회사에서 만나 회사에서 연대한다. 아무도 없는 주말 저녁의 캄캄한 회사에서 서로를 위로하는 순간을 쌓는 식이다. 그들이 하는 노동도 마찬가지다. 밤하늘의 별자리와 관계된 제품을 기획하고 디자인하며, 두 사람은 기존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밤’의 의미를 되새긴다. 밤은 어둡고 깜깜하지만 해가 떠 있을 때는 미처 볼 수 없는 별을 볼 수 있게 해주고, 인간은 별에 대한 호기심으로 지구 밖 세계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영화는 두 사람의 제품 개발 과정에 별에 얽힌 신화적 이야기를 덧대 밤에만 가능한 서사를 탐색하기도 한다.


여기서 밤은 정신 질환자가 침잠하는 세계의 은유다. 지구 밖에도 무한한 우주가 있지만 인간의 내면에도 그만큼 큰 우주가 있다. 때문에 두 사람이 노동하면 노동할수록, 즉 인간을 착취하는 자본주의적 활동에 충실할수록 자본주의가 옥죈 내면의 세계가 깊어지는 역설이 발생한다. 야마조에의 말마따나 두 사람에게는 여전히 미래 전망이 없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두 사람만 알 수 있는 세계를 탐닉함으로써 결코 자본주의가 잠식할 수 없는 자기 내면의 무한한 공간을 마주한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두 사람 회사 사람들이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는 장면을 배경으로 올라가는 것 역시 우리가 자본주의의 일터인 회사를 다른 방식으로 재의미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아기자기하게 관계 맺으며 조금은 여유롭게 일하는, 나의 모든 것을 갈아 넣을 필요가 없는 동시에 일과 삶을 괴리시킬 필요가 없는 그런 일터의 가능성 말이다. 그곳에서는 일할수록 불행해지는 현대인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을 것만 같다. 〈새벽의 모든〉은 정신 질환에 관한 차근하면서도 급진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을 통해 제25회 국제전주영화제에 기자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개막작 〈새멱의 모든〉 상영 시간은 아래와 같습니다. 다른 영화 상영 시간은 영화제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5월 1일 19:30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001)
-5월 2일 13:30 CGV전주고사 3관(120)
-5월 5일 10:30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401)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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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처럼 천천히 잠식당하는 영화
** 씨네랩의 초청을 받아 관람한 시사회입니다.
더 웨일
개봉 : 2023.03.01
감독 : 대런 아르노프스키
등장인물 : 브랜든 프레이저, 세이디 싱크 외
평점 : ⭐️⭐️⭐️⭐️
너무 많은 생각들과 느낌들이 스쳐지나간다.
상처를 낸 건 되돌릴 수 없다.
에세이처럼 고치고 고쳐서 완벽하게, 실수가 없게 만들수가 없는 것이다.
딸인 엘리는 아빠를 증오하고 미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빠를 떠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이기에. 사악하다는 말까지 듣는 엘리이지만 그 안에 채워진 것은 분명히 결핍된 사랑일 것이다. 사회적으로 보이는 엘리는 많은 문제가 있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보이지만 나는 영화 안에서 엘리가 매우 안쓰럽기도 했다. 8살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청소년기를 보냈는데, 가장 가까운 가족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큰 상처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를 사랑하는 것은 변함없다. 사람은 참 신기하다. 관심 없고 아무도 없어도 잘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라는걸 사람들은 솔직히 말하지 못한다. 가족간의 감정이 골이 깊고, 아직까지 셋의 마음 속을 파고들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렇게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이미 상처받은 마음을 풀 실마리조차도 보이지 않는 상황들 속에서 서로는 흘러간다.
더 웨일은 연극이 원작인 영화이다. 그런만큼 영화의 연출도 어딘가 연극같다는 생각이 있었다. 마치 세트장처럼 집 안에서만 진행되는 영화와 카메라 움직임이 원래라면 두 쇼트로 나눌 것 같은 부분들을 의도적으로 이어서 찍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인물들이 이동하면서 자연스럽게 리액션 쇼트가 되거나 하는 부분도 찾아볼 수 있었다.
더 웨일은 기대하고 본 영화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기에 좋은 영화였다. 나도 많이 울었기도 하다. 왜 인생연기라는 수식어가 붙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바다처럼 천천히 잠식당하는 영화였다. 나라면 혼자 볼 것 같다. 혹은 친구들과 이 영화로 대화하는 시간을 가져도 좋을 듯 하다. 왜 혼자 볼 것 같다고 생각했냐면 영화는 옆에 있는 다른 사람을 신경쓰며 보고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혼자 우직히 앉아 솔직하게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충분히 눈물흘릴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더 웨일은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인물의 평가가 천차만별일 것 같다. 딸인 엘리부터, 엘리의 엄마, 전도사(인줄 알았던 남자), 피자 배달부, 심지어 온라인 강의를 듣는 친구들까지 모습이 다양하다. 인물을 잘 만든 영화는 내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더라도 나중에 돌아봤을때 나도 이 인물이었다면 나라도 그랬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가족을 버리고 떠난 점에 대해서는 분명히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나라도 그랬겠다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 위 말은 영화가 충분히 주인공의 이야기를 풀어내어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이 포인트라고 해두자.) 아무튼 그런 면에서는 캐릭터를 외적이든, 내적이든 잘 만든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에 대해 주인공이 후회하고,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하게되는 행동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다양한 생각이 드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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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를 지켜라, 그리고 고통을 넘어 초인이 되어라
※영화 〈지구를 지켜라!〉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병구(신하균 분)는 어느 날 유제 화학 사장 강만식(백윤식 분)을 납치하여 고문하기 시작한다. 병구에 따르면, 강만식은 지구 침입을 획책하고 있는 안드로메다 행성에서 온 외계인이다. 개기월식 전까지 지구를 지키기 위한 병구의 외계인과의 사투는 그렇게 시작된다. 하지만 결국 병구는 지구를 지키지 못한다.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는 병구의 황당한 편집증적 망상과 함께 서사를 따라가던 관객의 불신과 감정 이입을 충격적 반전으로 전복하는 기묘한 영화다. 그리고 <지구를 지켜라>는 니체가 말하는 허무주의와 권력에의 의지, 그 너머의 초월적 인간의 형성 과정을 병구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넌 내가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몰라.”라는 병구의 첫 대사는 자신의 광기에 대한 병구의 자조적 고백이자 관객에게 일러주는 암시이다. 그러면서 영화는 망상에 사로잡힌 병구가 벌이는 황당하고 신체 훼손이 공공연한 장면들을 아무렇지 않게 이어간다. 잔인한 방법으로 강만식을 고문하는 병구와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탈출하려는 강만식의 사투는 영화 종반 자신의 정체를 밝힌 강만식이 (병구가 '믿는' 외계인의 실체) 강릉공장에서 지구의 파괴를 막으려 하나 이를 믿지 않았던 병구는 강만식과의 결투 끝에 결국 죽음을 맞는다. 그렇게 영화가 끝나나 했지만 여기서 감독은 반전의 카드를 제시한다. 실제로 강만식이 안드로메다의 외계인이었고 심지어 왕자였던 것. 병구가 지금까지 겪었던 고통의 삶은 인간이 가진 공격 유전자를 변형하여 지구를 지키기 위한 왕자의 실험이었고, 마지막 희망이었던 '실험 표본 1787호' 병구의 실패로 왕자는 실험을 중단하고 지구를 폭파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출처 | 다음 영화
병구가 보이는 폭력성과 광기의 원인은 과거 그가 겪었던 끔찍한 폭력에 있다. 아버지는 탄광 사고로 한쪽 팔을 잃고 가족에게 지속적인 폭력을 일삼다 병구의 종이우산이 머리에 박혀 죽는다. 같이 일하던 애인은 회사가 고용한 용역 깡패의 몽둥이에 맞아 죽는다. 어머니는 같은 공장(강만식이 운영하는 유제 화학)에서 일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물질에 중독되어 5년째 식물인간이 되어 기약 없는 치료로 연명 중이다. 그 모든 사건을 눈으로 확인하며 납부금을 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생에게 매질을 당한다. 병구에게 이어진 폭력은 곧 병구의 폭력으로 전이된다. 어머니가 시장에서 건달에게 당하는 모습을 본 병구는 우발적인 사건으로 살인자가 된다.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전환된 것이다. 이후 감옥에서도 그는 교도관의 폭행에 시달린다. 강렬한 이미지로 재현되는 병구의 기억은 1980년대가 개인에게 가했던 끔찍한 폭력의 트라우마이다.
니체가 보기에 현대인의 고통의 본질은 염세주의 철학과 과민증이다. 하나같이 고통을 피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더 고통에 빠지고 길을 잃는다. 하지만 고통은 '삶에 이탈'함으로써 오는 것이니 받아들여야 한다고 니체는 말한다. '부정과 거부는 무거운 자들의 정신'이라며 고통에 의연해질 것을 충고한다. 그리고 모두를 위한, 하지만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처방을 내린다.
고통에 대한 처방은 고통이다.
보통의 인간들은 이러한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날 궁리에 낑낑대다가 그만 힘에 부치면 삶을 통째로 부정해 버린다. 니체는 현실적인 고통의 처방도 제시한다. 사상적 열광, 평온한 상황, 좋고 나쁜 추억들, 장래 계획, 희망, 거의 마취제 같은 효과를 지닌 수많은 종류의 자부심과 공감 등. 병구가 먹는 향정신성 약물 역시 이러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는 단기적 해법일 뿐 본질적인 고통의 처방전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병구는 암울한 세상 속 허무주의로 고통을 극복하려 한다. 흔히 현대사회를 허무주의의 시대라고 칭하기도 한다. 니체가 말하는 '신의 죽음'에 누구도 놀라지 않는, 세속화 시대에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신이 죽었다는 의미는 우리가 필연적으로 믿고 있던 절대적 가치가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믿어온 최고의 가치, 즉 신이 사라진 자리에 바로 허무주의가 들어오게 된다. 허무주의는 모든 손님 중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손님이라고 니체는 표현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가가 니체가 원하는 궁극적 삶의 목적이다.
니체는 허무주의를 수동적 허무주의와 능동적 허무주의로 나눈다. 수동적 허무주의자는 ”왜?”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며 무능력한 인간상을 표현한다. 이는 약자들에게 흔히 보이는 징후로서 정신력이 지칠 대로 지쳐버리고 고갈되어 현실을 외면하는 상태이다. 왜 사냐는 질문에 이들은 생존 자체가 이유이자 최고의 목표라고 대답한다. 니체는 이들이 능동적 허무주의로 변화하기를 바란다. 이 세상에는 목표나 의미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적 가치는 전복되어 우리 곁에서 사라져 죽어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능동적 허무주의자들은 이것이 비극적인 사건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Nothing is true.” 그 어떤 것도 진리는 아니다는 말은 동시에 내 삶의 목표와 진리를 스스로 설정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의미 없는 존재인 인간이 의미 있는 이유이다.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질 줄 아는 것, 진리란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며 절대적이 아님을 깨닫는 과정이 능동적 허무주의의 입장이다. 고통과 폭력 속에서 극한의 좌절과 허무 속에 몸부림치던 병구는 자신의 목표를 스스로 설정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외계인으로부터 푸른 별 지구를 지키는 새로운 삶의 목표이다.
아무도 없어, 네가 지구를 지켜야 해.
식물인간인 어머니가 일어나 병구에게 말을 건네는 상상의 장면은 어머니가 대신 전하는 병구의 내면의 소리를 지지하는 자신과의 대화이자 다짐이다.
모든 세상의 고통과 불행은 외계인의 소행이라는 진리를 깨달은 병구는 외계인에게 광적으로 연구하고 파헤친다. 대부분의 일상은 집 안에서 지낸다. 깊은 산속에서 양봉을 하고, 마네킹을 만들며 생계를 이어가고 '외계인'을 잡아 고문하며 연구하는 일이 병구의 일상이다. 관객의 눈에는 그야말로 광인의 집착에 지나지 않는 행위다. 하지만 니체의 입장은 다르다. 진리 탐구의 끝은 자기 삶을 의미 있게 해석하는 것이다. 니체는 진리보다 진실성을 더 높이 평가한다. 위험을 직시하고 자신이 무엇을 하는가를 온전히 알고 따라가는 것이 진실성의 요체이다. 그는 실존에 대한 불쾌가 예전보다 더 크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악, 즉 실존 속에 들어있는 의미에 대해 의심하기 때문에 허무주의가 지금 나타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극단적으로 된다는 뜻은 내가 가진 문제의 뿌리까지 파고듦을 의미한다. 삶의 문제를 내 안에서 찾으려고 노력하며 존재의 고통을 인정하지 않거나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사유하는 것이다. 왜 사는지에 대한 삶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허무주의가 나타나는 것이지 신이 죽었기 때문에 허무주의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병구의 집착은 삶의 실존적 의미와 목표가 있기에 허무주의에서 탈피하게 된다.
맹목적으로 추구하여 온 절대적 가치가 더는 가치가 없다고 인식할 때 비로소 자아를 찾게 된다. 즉 자아를 찾기 위해 병구는 외계인을 믿는 것이다. 여기에 외계인의 존재에 대한 절대적 가치는 없다.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병구는 외계인을 선택했지만, 외계인이 있고 없고는 병구에게 중요하지 않다. 신은 죽었다는 명제는 결국 '자신의 삶의 예술가가 되어라'라는 말로 대치된다. 자신의 삶을 인정하고 충동, 본능, 감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본래의 나로서 존재할 수 있다. 강만식과 병구의 관계는 본래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고용 관계는 갑을 관계를 넘은 지배-피지배 관계로 심화한다. 그를 외계인으로 믿는 이유 중에는 그와의 악연도 포함되어 있다. 병구는 강만식의 공장에서 연인과 어머니를 잃는다. 보상도 제대로 해 주지 않았던 강만식에 대한 증오는 점점 고통과 외계인, 그리고 강만식을 함께 엮는다. 이렇게 둘의 악연으로 이어진 권력관계는 납치와 감금으로 역전된다.
자아탐구의 과정에서 이렇게 극단적으로 고통의 뿌리까지 들여다보면 그 아래 숨겨진 지배계급의 부정한 권력을 쉽게 발견한다. 일반적으로 권력은 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정치적 관점에서 인간은 권력의 유무에 따라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 혹은 명령하는 자와 복종하는 자 둘로 나누어 인식한다. 여기서 소위 '99%'는 지배받는 자, '1%'는 지배하는 자이며 약자는 항상 억압받고 착취당하며 순응하고 복종하는 개체로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은 권력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권력을 추구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 부분에서 니체는 다수가 생각하는 권력의 속성을 전복한다. 권력은 그 자체로 악하냐는 의문에 니체는 살아있는 모든 것에는 권력에의 의지가 있다고 말한다. 니체는 권력은 악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 전체의 생명을 지탱하는 속성이라고 보았다. 그는 권력의 내면적 요소에 주목하였다. 진정한 힘은 내면으로부터 나온다. 권력의 내적 동기인 욕망, 충동, 생존은 삶에의 의지를 달성하기 위한 과정이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권력에의 의지로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세상과 관계 맺고 동화한다. 니체는 생명에의 의지에서 권력에의 의지를 발견한다. 인간 내면의 본질에 담긴 권력은 악하지 않다. 단지 생명의 근본적 속성일 뿐이다.
우리의 의지는 권력을 향해 있다. 약자 역시 권력을 추구한다. 그 가치를 창조하는 방식이 강자와 다를 뿐이다. 니체는 도덕 현상을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으로 나누었다. 주인 도덕은 명령하는 자의 가치 창조이다. 지배하는 자의 발현 방식은 능동적 active 일 수밖에 없다. 인류의 역사는 승자의 역사. 노예 도덕은 복종하는 자의 가치 창조이며 상대적으로 반동적 reactive이다. 실질적인 행동은 하지 않으나 정신적으로는 반란을 꾀하는 것이다. 이때 노예들이 반란을 꿈꾸며 ‘원한’이라는 감정이 생긴다. 원한은 지배받는 사람들의 핍박이 권력에의 의지로 뭉쳐져 창조적인 가치를 창출해 낼 때 실제적인 반응으로서 발현한다, 즉 ‘행위에 의한 반응을 포기하고, 오로지 상상의 복수를 통해서만 스스로 해가 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복수’이다. 병구의 원한 감정은 그의 인생 전체를 통틀어 자신을 지배해 온 주인이자 지배자인 자본주의와 이와 수반된 파편화된 인간성에서 기인한다. 병구는 그 원한을 납치와 감금으로 실현한다. 자신이 목표로 하는 권력, 다시 말하면 생존을 위해 물리적, 정신적 수단을 이용한 것이다. 병구는 강만식을 비롯하여 이전에도 많은 '외계인들'을 잡아 왔다. 영화는 그들의 잔혹한 최후를 보여주며 병구가 가진 원한의 실체를 극대화한다.
권력에의 의지는 그 정도를 확인한 다음 '권력 감정'으로 드러난다. 권력 감정은 저항을 느끼면서도 결국 이를 관철했을 때의 뿌듯함 내지 희열로 나타난다. 감정이 수반되지 않는 권력은 진정으로 이를 소유했다고 볼 수 없다. 병구는 고문을 통해 권력 감정을 느낀다.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린 상징과도 같은 존재들이 하나둘씩 자신에게 비참한 모습으로 생을 구걸하고 때로는 저항하는 모습을 보며 병구가 느낀 권력 감정은 지속적인 외계인 납치의 원동력이 되었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권력의지의 정도를 알고, 그 권력에 대한 감정을 느끼고, 더 나아가 지금의 감정을 넘어 더 큰 권력을 가지려는 권력 증대의 과정을 반복한다. 이는 다시 자신을 넘어서려는 의지가 존재할 때 가능하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병구가 양봉하며 꿀벌이 모아 놓은 꿀을 채취하듯 결국 누군가의 것은 나의 것으로 넘어와야 생존할 수 있고 이것이 생존하는 모든 것들의 정신적, 물리적 운동의 삶이다. 권력은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며 동시에 생명의 근본 현상이기도 하다. 권력은 그 속성에 따라 항상 새롭게 해석되고 생성되며 팽창하는 과정을 지속한다. 그렇다면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자는 어떤 인물인가. 복종의 구조 속 가장 밑바닥에 있는 약자는 항상 자유의지를 추구하고 이를 꿈꾸며 산다. 니체가 생각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사람은 권력이 흘러넘쳐서 상대방이 아무리 저항을 하고 복종을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관용하고 허용할 수 있는 정도의 넉넉한 힘을 가진 사람이다. 다시 말해 사랑하고 포용하는 힘을 가진 사람이 진정한 권력자이다.
이는 지독히 외롭고도 고통스러운 긴 싸움이다. 무수한 수수께끼와 느닷없이 덮친 우연을 '의미'로 재창조하는 것은 무한한 고통을 수반한다. 자기 보존이 아니라 자기 극복의 지난한 과정을 기꺼이 수행하는 것.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한 '창조의 고통'이다. 삶에 대한 최대의 긍정이자, 고통에 대한 최고의 처방이다. 이를 이루는 인간인 초인 Übermensch은 형이상학적 가치와 결별한 사람이다. 그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며, 자신을 넘어서는 가치를 창조하는 능동적인 삶을 살고 고통의 무의미성, 고통마저도 사랑으로 감싸 안는 아모르파티 Amor Pati에 이른다. 하지만 병구는 이 단계에 이르지 못한다.
안드로메다 왕자 강만식은 병구의 삶을 두고 인류의 미래를 담보로 한 실험을 진행한다. 병구에게 내린 고통은 인간의 유전자를 변형시키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이는 니체의 '창조의 고통'과 맥을 같이 한다. 고통을 통해 강만식과 니체는 인간의 생의지를 판단한다. 강만식은 개기월식이 일어나기 직전 병구에게 마지막 실험 과제를 부여한다. 진정으로 생의 의지를 갖고 나의 가치 창조를 믿고 고통마저도 초월한 초인이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단계에서 병구는 자신 설정한 삶의 의지와 목표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고통을 초월하지 못하고 강만식이 외계인임을 부정하며 순이의 죽음이라는 극도의 고통을 이기지 못한다. 영화에서는 인류의 미래를 둔 마우스 버튼으로 표현했지만, 이는 니체의 말을 빌리면 초인의 경지에 오르는 마지막 관문이다. 결국, 병구는 고통을 넘어 사랑하고 관용하지 못한다.
여기서 순이는 병구의 조력자이자 그를 초인과 짐승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영화 초반 순이는 병구의 계획에 눈물을 흘리며 두려움을 표현한다. 하지만 순이는 영화에서 계속 외줄을 탄다. 니체는 평범한 인간과 초인 사이에서 외줄을 타며 인간들에게 '운명을 사랑하라'라고 선언한다. 외줄 위 인간은 두렵고 약한 존재이지만 순이는 인간과 초인 사이 그 긴장을 감수하면서 병구에게 계속 외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순이의 죽음으로 병구는 이성을 잃고 짐승이 된다.
강만식은 병구가 초인이 되어 위태로운 고통의 푸른 별 지구를 지키길 바랐다. 하지만 실패로 끝난다. 영화는 지구 멸망이라는 자극적인 결말로 고통을 받아들이는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그 모든 고통 안에서 진정한 사랑의 중요성을 엔딩 크레디트에서 병구의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며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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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어떻게 살다 갈 것인가
왜 우리는 살면서 잔인한 기억을 한 번쯤 겪게 될까요? 월요일에 들었던 질문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금새 나는 한 가지의 끔찍한 순간이 떠올랐다. 그래서 이번 주의 내가 그 시간에 고통받았냐? 아니다. 지금의 나는 19과 20에 겪은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다. 너무 멀리 돌아왔다는 생각을 한 300번째 한 후, 내가 겪었던 고통은 과연 무엇인가?라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사실 별 것 아니다. 별 것 아니었다는 결론에 달한 것이 나의 트라우마 극복의 전부다. 이겨냈기 때문에 이런 말을 머릿속에 새기는 것일 거다. 근데 이것과 별개로 내가 무언가에 휘둘려 살았던 기억은 나의 행동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대체 왜 그랬지. 이 트라우마가 만든 창피한 경험은 역설적이게도 그 사건과 아무 상관이 없다. 난 누군가를 생각하는 법 자체를 몰랐다. 사랑받는 법도 주는 것도 몰랐기 때문에 방황했던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내가 미쳤지.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바보 같은 순간이 머릿속에 스쳐가는 오늘이다. 그때의 시간은 어리다는 말로 전부 수식할 수 없으니 오늘 밤도 이불을 뻥뻥 차게 생겼다.
다행인 점은 있다. 내가 미쳤지 싶었던 때에서 얻은 건 있으니 말이다. 이 얻은 것은 두 가지다. 사랑받는 인생은 무엇이고, 그걸 주는 삶이란 또 어떤 것인가? 에 관한 것이다. 이건 살면서 굉장히 중요했다. 내 정신연령이 죽을 때까지 10대에 머무를 순 없잖아? 세상의 모든 애정이 이성 간의 사랑과 그것이 아닌 무언가로 나뉜다면 삶이 퍽퍽해질 것이다. 물론 선을 넘는 건 나 역시 부담스럽겠지만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보내는 따뜻한 무언가를 잘 보듬으려고 한다. 살다 보니 정말 사랑이 전부였다. 내가 무언가를 위해 노력할 때는 보통 내가 좋아하는 타인에게 더 당당해지기 위함이었다. 또 언제는 그가 한 말 한마디가 내 동기부여의 전부가 되기도 했다. 이런 시간들을 보내고 나니 이성 간의 무언가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누구에게 진심인 편이 된다는 건 굉장히 어렵다는 걸 알았다. 진정성은 사소한 것에서 왔었다. 내가 지키는 소소한 것에서 섬세함이 생기고 그 사람의 말에 설득력이 만들어진다. 그러면 상대방은 보통 '이 사람이 진정성을 갖고 행동하는구나'라고 느껴 나를 좋아해 준다. 보통 그런 지레짐작은 맞는 말이다. 난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기 때문이다. 진정성이 없이 나 스스로의 이미지를 속이는 것처럼 행동하는 건 싫다. 진실된 사람이라는 말에 유달리 집착했던 나는 앞과 뒤가 다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 태도에는 단점이 있다. 마음이 깊어진다는 것이다. 짝사랑을 심하게 한다는 게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에 취해있으면 그 사람에게 맞춰진다. 그러면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어 진다. 사랑받기 위해서다. 정서적인 무언가를 받기 위해 계속해서 어떤 행동들을 하는 것이다. 언젠가 끝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러다가 크게 다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점점 뒤가 없어진다. 모 아니면 도인 내 방식이 가끔 질린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마음을 막을 수 있느냐. 글쎄. 아마 아닐 것이다. 지극히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나는 진정성을 위해 내 언어로만 행동하고 말한다. 그리고 두려워한다. 이 사람이 언젠가 날 떠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날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떠나간 후의 기분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것이다. 잃고 나서 난 이런 것들을 배웠다고 자위하는 건 이제 질렸다. 점점 나이가 들수록 무서운 게 많아지는 셈이다. 차라리 누군가를 아껴주지 않는다면 다칠 일도 없을 텐데. 난 오늘도 일어나지 않은 일을 무서워한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필연을 운명에 빗댄 영화다. 내가 영화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이유에는 인생에 대한 절묘한 비유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영화는 좀 심각하게 극단적이다. 아버지에게 알맞은 애정을 받지 못한 채로 자란 마츠코. 시크한 아버지가 웃음을 주지 않은 것에 마음이 답답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마츠코는 일찍 취업에 성공해 선생님이 된다.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서다. 교사로서의 일과 도중, 마츠코가 재직하던 중학교 제자가 누군가의 돈을 훔치는 사건이 벌어진다. 마츠코는 이 사건으로 인해 억울하게 학교를 떠나게 되고 작가 지망생인 남자와 동거를 하게 된다.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지도 못했고 믿었던 학교에서까지 배신당한 마츠코. 이번에는 정말 날 사랑해주는 곳을 찾은 것 같았다. 근데 그건 잠깐 뿐이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재림이라는 말과 함께 미래가 밝았던 첫 번째 남자 친구는 예술가의 지나친 우울함 때문인지 자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두 번째 남자 친구는 첫 번째 남자 친구에게 열등감이 가득했던 인물이었다. 마츠코를 얻음으로써 이 열등감을 해소하려 했었다는 이유로 결별을 선언한다. 자기 내적의 무언가 때문에 마츠코를 이용한 것이다. 연이은 이별 후 직장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마츠코. 새로운 일터는 마사지방이었다. 업계 톱으로 잘 나갔던 그녀지만 이내 회사가 무너지게 되고 다시 위기에 봉착한다. 이 시기에 원래 살던 집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일기를 읽고 '마츠코 연락 없음'이란 글을 읽게 된다. 아버지의 애정을 재확인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다시 홀로 집을 나와 독립을 시작하고 세 번째 남자 오노 데라를 만나게 된다. 이 남자의 정체는 사기꾼이었다. 후에 마츠코를 배신하자 결국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네 번째 남자를 만나 삶을 살던 도중 경찰에 잡혀가게 된다. 8년형을 선고받고 만기출소로 나온 마츠코.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 남자는 교사 시절 도둑 누명을 쓰게 만든 제자였다. 제자 류와의 사랑에 빠지는 데는 성공하지만 정작 끝은 좋지 못했다. 범죄자가 되어 감옥에 갔다 온 후 마츠코를 돌보기를커녕 주먹 한대 쳐버리고 류는 도망친다. 결국 버림받게 되는 마츠코. 히키코모리처럼 집에서 은둔하며 TV만 보다가 우연히 본 아이돌에게 빠지게 된다. 하는 거라곤 그 아이돌에게 편지 보내는 것 빼곤 아무것도 없던 마츠코. 감옥 동기가 재기할 수 있을 거라며 건넨 명함에 행복 회로를 돌리다 후반부에 허무하게 객사하게 된다. 그게 영화의 끝이다.
이 영화는 많이 비극적이다. 선생님이란 좋은 직업으로 시작해서 결과적으로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한 여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과할 정도로 사랑을 찾는다. 2021년의 우리가 보기엔 '굳이 저럴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다. 영화의 주인공이 보여준 행보와 같은 질문을 우리의 삶에 던질 수 있다. 과연 사랑이 그렇게나 중요할까? 주인공의 자존심까지 다 팔아가며 받고 싶을 만큼 관심과 애정이 우리 삶에서 중요할까? 정말 중요한 질문은 이거 말고 하나 더 있다. 그거 받는다고 해서 우리 삶이 극적으로 나아진다는 보장이 있는가? 어차피 누군가는 어떤 인물의 삶에서 떠나갈 수밖에 없다. 겉보기엔 오해로 멀어지는 경우는 부지기수다. 누군가는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당연하다. 모든 영화에는 엔딩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필연적인 끝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다. 불륜이든 풋풋한 첫사랑이든 우리는 끝이 어떤 결말로 이뤄질지 뻔히 아는데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 연인이 아니고 친구관계이거나 형이나 누나로 불려지는 사이여도 마찬가지다. 단 한 가지의 예외라도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마지막을 향하고 있다.
잘 알면서도 우리는 운명을 잊어버리며 살아간다. 우리 주변의 누군가를 생각해보자.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된 이유가 단지 섹슈얼한 무언가가 아니라 존경과 우정, 공감의 의미여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 감정이야 말로 우리 인생의 전부다. 내가 느끼기엔 -내 기준- 이성 간의 사랑보다 이 감사함의 표시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어려울 때 도와준 형들이 멋있다고 생각해서 난 게이가 아닌 것처럼 세상은 다양한 감정들로 이뤄져 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때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존경이라는 말이 식상해질 때 누군가에 대해 '내가 어떤 존재가 되어봐야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순수한 동기부여는 이런 것들이다. 나를 믿어주는 존재가 있다면,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내 모습을 사랑해줄 인간이 있다면 그제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가족이 소중한 이유가 이거 아닐까? 거의 대다수에게 가족이란 어떤 일을 겪어도 내 편인 존재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가족들에게 잘하는 것일 테지. 나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근데 난 이기적 이게도 이들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사랑받고 싶다. 가족이 주는 무언가는 항상 고마운데. 나는 그 외에서도 쓸모를 찾고 싶다. 난 개 같던 20대의 일상 속에서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았던 것 같다. 그 뭐 같던 순간에서 제일 찌질한건 나였단 걸 깨달은 후에도 다른 뭔가를 찾았던 것 같다. 이런 인간관계의 결말? 항상 같았다. 난 정말 나밖에 모른다. 친해지는 걸 못해 별것 아닌 것에도 이상한 사람 취급당했던 기억이 생생하고, 또 정신상태가 무너져 있을 때 본능적으로 사랑을 갈구하던 모습이 선하기 때문이다. 알고 있다.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은 나란 걸. 남 탓 열심히 해도 어차피 원인은 나에게도 있다. 정말 타인이 100% 잘못해서 무언가 발생한 경우가 없다고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그 경우가 절대다수라고 하면 그건 추한 남 탓이 될 것이다. 과연 나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인가.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외부에서 우리의 쓸모를 증명받고자 한다. 우리 엄마나 아빠만 해도 자기 직업에 진심인 사람이다. 심지어 아빠는 방송에도 여러 번 나왔고 몇 박사들의 책에도 참여한 바 있다. 단순히 엄마 아빠가 돈을 벌기 위해서 이런 걸 하는 건 아닐 것 같다. 대학생 때 보이는 학생회, 대외활동 뭐 이런 것들도 그 예시다.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회 활동과 여의도 중앙정치는 사실 (물리적으로만) 거리가 멀고, 대외활동과 같이 외부의 일은 끝이 다 정해져 있다. 해단식 하면 자주 못 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활동을 한다고 해서 취업문이 활짝 열리지는 않는다. 이렇게 시시하고 재미없게도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정해져 있는 결말로 향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이 모든 걸 벌였고 또 넘어지며 좌절한다. 같은 행동을 두 번 세 번 반복하게 되고 비슷한 순간을 마주한다. 씨발. 왜 나는 이거밖에 안 되는 인간이지. 나의 출생만으로도 세상에게 사과할 이유가 생기는 것 같다. 아무도 모르게 잠수 타다 죽을 때가 되면 내 머리를 방망이로 쳐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싶다.
근데 우리 거의 대부분은 이 미련을 잊어버린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엔 다를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걸 부정한다는 게 아니라 이제 그런 필연이 중요해지지 않아 진다는 뜻이다. 왜? 그게 행복하기 때문이다. 자주 못 보는 사람이더라도, 애초에 표현하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도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 산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기약하며 말이다. <중경삼림>과 <노매드 랜드>를 봤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난 항상 이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다. 아름다웠던 순간을 다시 돌이키는 것만큼 인생에서 즐거운 건 없다. 토익 공부를 해도, 유럽에 가도, 사고 싶었던걸 사도 항상 무언갈 상상하고 있었다. 현실은 아니었다. 어떤 선택지를 골라서 내 결과 중 아무것이 바뀌었다 하더라도 난 지금과 크게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마음 한편으론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자. 영원한 건 없다. 뭔 선택지를 골라도 나는 아팠을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사랑받을 줄 몰랐고 하는 것도 서툴렀다. 이 문제의 해결책은 간단하다. 영원히 혼자 사는 것이다. 그럼 외롭기만 하지 사람에게 상처 받는 일은 없어 좋을 것이다.
이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이 당연한 정답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건넨다. 과연 그게 맞아?라고 말이다. 아니다. 당연히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한심한 순간을 반복한다. 나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홍상수나 윤종신을 좋아하는 이유 역시 우리 인생에서 이것에 공감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차피 끝이 정해져 있는 생인데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갈 것인가. 우리는 실패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미워하는 경향이 있다. 퍼주지 말걸. 비극적인 사건에 놓인 우리를 위로하기보단 학대한다. 영화는 이런 우리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넨다. 극도로 비극적인 인물 설정? 현실적이지 않은 게 맞다. 근데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이것에 공감한다. 상처 투성이에 그 아무도 찾지 않는 모습이야 말로 우리의 현실이다. 사람에게 상처 받아 사과받으면 그게 다 없던 일이 되나? 또 그 사람들이 사과를 과연 몇 번이나 했나? 또, 뮤지컬을 중심으로 영화를 전개한 이유? 비비드한 색감? 우리에게 이 마츠코의 삶을 비극이라고 재단할 권리가 있을까? 그 때 만큼은 행복했을텐데. '왜 굳이 3자 주인공이 나왔는가'나 '뮤지컬+색감배치'의 이유는 우리의 인생을 대변한다. 우리는 원래 이 모양 이 꼴로 살 수밖에 없다. 근데 이런 영화와 현실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베풀면서 살아야 한다. 왜? 인간의 가치는 무얼 받느냐가 아니라 무얼 주느냐에 따라 달려있기 때문이다. 비록 비극적인 사건이 연이어 겹쳐 좌절하는 삶일지라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극단적인 비극을 보여준다. 근데 어떻게 전개하나? 도 중요하다. 바로 주인공을 따로 설정해 그 인물로 하여금 마츠코의 일대기를 좇게 만든 것이다. 이럼 뭐가 되냐? 어느 정도 객관화가 된다. 극한의 비극적인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면 마츠코가 어떤 인물인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너무 타인의존적인 측면도 있었던 건 맞지만 당연히 좋은 부분도 많이 볼 것이다. 이 사람은 누군가를 품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 원인이 사랑의 결핍이더라도 괜찮다. 마음의 구멍 한 구석을 인정하게 되는 것도 다 좋으니까, 무서워서 숨지는 말자. 그게 우리가 인생을 사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한동안 병의 마수에 빠져 방황하고 나서 얻은 결론도 이와 비슷하다. 어차피 결론이 똑같다면 한 번쯤 또 한 명에게 모든 사랑을 다 가져다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나 자신이 인기가 없더라도 누군가의 인생이 옳다는 증명이 된다면 그 나름대로 성공한 삶일 것이다. 난 나에게 이 말을 해준 사람의 이 문장을 이루기 위해 그 20대를 보내왔고, 한 번도 진정성이 없었던 적 없었으며 나름대로 행복했다. 그래서 난 내가 한 말에 당당하다고 생각한다. 내 인생이 혐오스럽게 느껴지더라도 한 번쯤은 필연에 부딪히는 시도가 필요하다. 그게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겪는 난제를 돌파하는 방식일 것이다. 영원한건 없다 하더라도 그 순간 만큼은 나를 믿고 앞으로 나아가자. 마음이 괴롭다면 병원에라도 꼭 가자. 그것이야 말로 구멍이 난 사람에게 좋은 터닝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400% 확신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모름지기 이 영화가 말해주는 바와 같이, 인간의 가치는 무얼 받느냐가 아니라 뭘 해주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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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사가 된 공주의 평범한 클리셰 도장 깨기!
“공주는 왕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댐즐>은 수동적인 공주가 살아 숨 쉬는 동화 속 이야기에 반기를 든 작품이다. 전사로 거듭난 공주의 이야기인 <댐즐>은 왕자의 도움 없이 위험에 빠진 공주가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역경을 헤쳐 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자신이 잡은 검으로 클리셰의 심장을 찔러버리는 공주의 대찬 모습은 시선을 사로잡지만, 아쉽게도 그 칼날은 평범해 보인다.
엘로디(밀리 바비 브라운)는 도끼질로 직접 땔감을 구하고, 배고픔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안위를 걱정하는 추운 북쪽 왕국의 공주다. 어느 날 생소한 이름의 왕국에서 혼담이 오가고, 엘로디는 백성들을 위해 한 번도 본 적 없는 왕자와 결혼하기로 한다. 결혼 당일 성대한 식을 치른 그녀는 왕자 측 전통에 따라 왕국 뒤편에 있는 산 중턱 동굴에서 기묘한 의식을 치른다. 이상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 법. 엘로디는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히듯 왕자에게 배신당하고 동굴에 갇힌다. 그곳에 사는 용은 그동안 제물로 바쳐진 공주들처럼 그녀를 잡아먹기 위해 혈안이 되고, 엘로디는 도망가지 않고 맞서 싸울 준비를 한다.
<댐즐>의 지향점은 명확하다. 위험에 처한 공주가 자신을 구해줄 왕자를 기다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살아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이를 강조하기 위해 감독은 동화가 가진 클리셰를 전복시킨다. 공주의 손에 검을 잡게 하는 건 물론, 왕자는 공주를 구하기는커녕 낭떠러지에 던져버리고, 엘로디의 계모는 위험을 빠뜨리는 게 아닌 오히려 벗어나게 도와준다. 빌런인 용 또한 공주를 위험에 빠뜨리기를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듯 <댐즐>은 클리셰 도장 깨기를 해나가며, 현시대에 맞게 동화적인 이야기를 재구성한다. 그 중심에는 엘로디가 있다. 첫 장면부터 매서운 도끼질 신공을 펼치는 그녀는 자신의 지혜와 생존을 해서 가족과 백성에게 돌아가겠다는 확고한 의지로 용과 왕자 집안에 맞선다. 특히 거추장스러웠던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이를 생존에 필요한 도구로 사용하는 장면은 자주적인 여성으로서 엘로디의 자아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캐릭터를 완성하는 건 넷플릭스의 딸 밀리 바비 브라운의 연기다. <기묘한 이야기> 시리즈, <에놀라 홈즈> 시리즈를 통해 강한 여성 캐릭터를 선보였던 그녀는 자신의 이미지를 엘로디에게 투영한다. 홀로 동굴에서 탈출하고, 불을 내뿜는 용과 맞서는 과정에서 보이는 그녀의 눈빛은 흡사 <기묘한 이야기>의 일레븐을 연상시킨다.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은 캐릭터의 느낌을 재차 활용한다는 점은 장단이 있지만, 이 영화에서는 단점보단 장점에 무게 중심을 둘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댐즐>은 주체적인 여성이 등장하는 판타지 어드벤처 영화로 인상깊지는 못하다. 클리셰를 전복시켜 얻는 쾌감으로 여성의 이야기를 펼쳤던 <겨울왕국> <말레피센트>를 뛰어넘지 못하고 그 자장 안에 머무는 느낌이다. 너무 안정적으로 가려는 제작진의 의도가 오히려 영화가 가진 힘을 무디게 한 느낌이랄까. 클리셰는 타파하지만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진부한 설정을 가져가는 탓에 결말 부분에서 여성 연대를 이루고, 왕자 집안에 빅 엿을 날리는 사이다 장면에서 쾌감은 반감되고, 결국 아쉬움이 남는다.
<댐즐>은 지난 3월 8일 국제 여성의 날에 공개되었다. 이 기념일에 맞춰 넷플릭스의 기획용으로 공개된 <댐즐>은 재물로 바쳐진 여성들의 모습을 통해 그동안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수많은 무고한 여성들의 희생을 말한다. 이어 엘로디로 하여금 여성들의 힘과 연대를 보여주지만, 킬링타임용으로 그치는 영화의 한계는 의미 있는 기획 작품으로서 그 빛을 발하지는 못한다. 이 작품을 마주한다면 완성도를 떠나 이름 없이 사라져간 여성들을 한 번쯤 생각하면 좋을 듯싶다.
사진 제공: 넷플릭스
평점: 2.5 /5.0
한줄평: 국제 여성의 날 기념 무색무취 넷플용 기획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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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의 과거 현재 미래.
고전 영화를 즐기는 요즘, 현대에서 과거를 빛낼 수 있는 영화를 만났다.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모든 일들이 생각나며 인생에서 빠질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채웠던 그때가 생각났다. 개인도 이렇게 영화에 대한 빼곡한 기억들로 가득한데, 약 130년이라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영화는 얼마나 거대할까. 영화는 경험해보지 못한 경험을 선사함으로써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게 1920년의 할리우드를 완벽하게 재현하기 위해 15년을 준비한 작품 '바빌론'은 화려한만큼이나 거대한 라인업으로 영화 안을 가득 메운다. 영화를 사랑하는 이라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영화의 역사를 영화관에서 마주할 수 있는 기회다. 정해진 주인공이 있지만 이 순간만큼은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영화 '바빌론'을 소개한다.
영화와 관련된 사람들이 모두 모여 즐기는 화려한 파티가 열린다. 어떤 파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방탕스러움으로 가득하다. 화려하지만 위태로운 할리우드의 모습은 마치 고대도시 바빌론을 연상케 한다. 휘향 찬란한 불빛과 공간을 울리는 소리,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가득 메운 쾌락의 향취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영화촬영장으로 시선을 옮긴다. 무성영화가 주를 이루고 있는 그 당시의 촬영장은 정신없는 소음으로 가득하다. 이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탄생하는 좋은 결과물과 대조되는 바깥의 분위기가 그 당시에 암묵적으로 허용되었던 약간의 희생과 맞물린다. 영화의 성공에 눈이 가려져 약간의 희생을 허용했던 그 시대의 할리우드의 잔혹함 또한 담긴다. 그렇게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무성영화의 전성기는 소리가 동시에 담기는 유성영화로 바뀌는 변곡점을 맞이하며 할리우드에도 변화가 찾아온다. 환경이 급격하게 변하면서 찾아오는 갈등은 모두가 감수해야 할 변화의 한 부분이었다. 사랑도, 삶의 방향성도, 변화의 적응도.
그 향락 속에서도 넘쳐나는 끼를 감추지 못하는 넬리의 모습은 캐스팅으로 이어진다. 스타가 될 거라는 그녀의 말처럼 꿈처럼 지나가버린 넬리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는 매니는 그녀와 했던 대화를 떠올리며 자신도 한 발짝 나아가고 싶어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찬다. 그렇게 길었던 파티가 끝나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화려함이 사라지고 현실이 자리 잡아있을 땐 원래 자신의 위치로 돌아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 치열한 밤이 지나가고 많은 것들이 바뀌며 무성 영화의 최고의 배우 잭 콘래드, 떠오르는 신인 배우 넬리 라로이,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 하는 매니 토레즈, 이 세 사람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물론 영화의 중심은 이 세 사람이지만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만 가려진 사람들이 빼곡하게 그려진다.
무성 영화의 시대에서 빛을 발했던 시대는 영원할 것 같았지만 어느새 유성 영화의 시대가 도래한다.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채 도태된 사람들은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다. 변화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했지만 각자의 시간과 속도를 맞추는 순간은 누구도 볼 수 없고 정해지지도 않아서 더 이상 꿈과 열정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기자와 배우의 대화에서도 봤듯이 완전한 매체의 모습으로 관객의 눈을 사로잡았던 그 수많은 영화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우리를 반기고 있다. 시간 속에 남은 영화 속의 사람들은 모습을 감추겠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영화가 대중문화로 자리 잡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이 들어갔는지를 생각한다면 영화에서 안겨주는 화려함은 결코 당연하지 않다. 각자의 자리에서 펼쳐낸 영화는 완전한 매체의 모습으로 탈바꿈하여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그 수많은 영화는 여전히 자리에서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바래지지 않을 우리의 영화는 영원할 것이다. 주어진 시간이 짧은 삶 속에서 모든 감정을 다 느낄 수 있는 삶의 축소판이 또 어디 있을까.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무엇이든 할 수 없는 실제는 아니지만 인생에서 느낄 수 없는 것들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잔혹한 이중적인 영화의 모습을 통해 증오하면서도 슬프면서도 기쁘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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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와 불의의 싸움
줄거리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조선은 한양을 빼앗기며 위기에 놓인다.
왜군은 전주와 한산도를 동시에 공격하여 명으로 가는 길목을 열겠다는 작전을 짠다.
이순신 장군은 이를 꿰뚫어 보고 바다 위에 성을 지어 왜군의 바닷길을 막기로 한다.
감상 포인트
1. 거북선이 등장하는 전투 장면에서 웅장이 가슴해지며 벅참을 느낄 수 있다.
2. 다만 복합적인 상황 속에서 여러 인물을 거치며 전개되기 때문에 집중하지 않으면 흐름을 놓칠 수도 있다.
3. 의와 불의의 싸움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감상평
한산을 보고 나오면 딱 명량이 보고 싶어진다. 그땐 어떻게 영화를 보여줬는지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이 영화가 명량을 뛰어넘는 영화라는 점? 명량은 몇몇 인물에게만 너무 집중한 나머지 전체적인 상황을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해 아쉬움을 많이 낳았고, 그 점 때문에 논란도 많이 일었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전체적인 흐름에 충실하여 한산도대첩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하나의 영화 속에 온전히 녹여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싸움은 의와 불의의 싸움이다."
이순신에게 패한 준사가 이 싸움은 어떤 싸움이냐 묻자, 이순신이 답한다. 이 말에 관객들은 다른 생각을 모두 지우고 영화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이 대사는 영화의 전체적인 메시지다. 대놓고 말을 하지만, 그래서 더 이해가 된다. 임진왜란은 대륙 침략을 위해 조선을 공격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준사가 직접 의병들과 전주성에서 싸우는 장면들도 인상 깊었다. 영화 내에서 준사를 보여준 방식은 단순히 일본 사람이 한국 사람의 편에 선 것이 아니라, 불의에서 벗어나 의로 향하는 마음, 방향을 틀어 의의 마음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의와 불의는 단순히 입장 차이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장수들의 정치 싸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일본군 내부에서는 심각한 분열이 일어난다. 극을 이끌어가는 와키자카를 중심으로 새로운 권력을 잡고 싶은 인물들이 가토의 군대를 처치하고 배를 빼앗는 장면에서는 와키자카라는 인물에 대한 비열함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이기겠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화합이나 의리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 장수들 사이에서도 분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원균 장군은 계속해서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려고 하고 이순신에게 묘한 열등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 때문에 학익진을 제때 펼치지 못해 위기의 상황이 오기도 한다. 하지만 노장인 어영담이 대신 미끼가 되어 위기에 처하자 이운룡이 도우러 가고, 적진에게 붙잡힌 원균이 학익진의 날개로 들어올 수 있도록 구선을 등장시키는 등, 이순신은 절대 낙오된 자를 버리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의’를 가졌느냐, 가지지 못한 ‘불의’냐의 싸움이기도 한 것이다.
더불어 이순신 장군이 학익진의 어떤 위치에 어떤 장군을 배치할 것인지 깊이 고민하는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이 장면에서 굉장히 지략가적인 면모를 잘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이순신 장군이 그저 전술만 잘 짰다면 이토록 후대에 이름을 남기는 장군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임진왜란이란 혼돈 속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있던 조선을 꺼내 전쟁의 판도를 바꾸었던 한산도대첩. 이순신은 단순히 '이기기 위해서' 학익진을 펼친 것이 아니라, '누가 어디에 있을 때 이길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학익진을 펼친 것이다.
아쉬웠던 점은 이순신이 상대방에게 어떤 정보를 주었고, 어떤 정보를 숨겼는가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 장수 와키자카의 조카인 사헤에는 중으로 변장해 이들의 학익진을 전부 지켜본다. 전투 연습하는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가는 것도 모자라 거북선의 도면마저 훔쳐 간다. 이순신은 이걸 노린 걸까? 그런 부분이 명확하게 드러났다면 좋았을걸, 싶다.
이 영화는 한산도대첩이 '정보전'이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순신 측에 왜군의 정보와 상황을 알리는 임준영(옥택연)과 와키자카의 기생 노릇을 하며 첩자를 지키는 정보름(김향기)이 있듯이 왜군에도 첩자가 있었다. 그렇다면 어떤 정보를 내주고, 어떤 정보를 취하는지에 대한 부분들이 부각되어도 좋았을 것 같은데 굵직하고 커다란 것들로 축소했다는 느낌이 든다. 아마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고 깔끔한 처리를 위해서 편집된 것으로 보인다.
"2선에서 무너지면 여긴 끝장이야!"
그럼에도 이순신의 학익진 배치 장면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나라가 어떻게 임진왜란이라는 침략에서 버티는 힘을 가질 수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이순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믿는 결연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내에서는 한산대첩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전주성에서 의병들이 왜구의 침략을 막아내는 장면 역시 비중 있게 다룬다. 서로 보이지 않고 상황도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나라를 지키겠다는 한 마음으로 필사의 노력을 다 한 것이다.
이순신 위주의 영화가 아니라 이순신과 그 주변 인물들, 왜구의 침략을 타파하기 위한 많은 사람들을 조명한 영화라서 어쩌면 진정한 의미의 '국뽕영화'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전작도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훨씬 더 나은 방향성으로 영화를 전개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장에서 만난 영화라서 더 반가웠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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