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4-05-02 19:45:52
[JIFF 데일리] 독립‧예술영화의 최대 축제, JIFF 개막식 이모저모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 〈새벽의 모든〉
2024년 5월 1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에서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식이 4,000여 명의 관객이 참여한 가운데 공승연, 이희준 배우의 사회로 열렸다. 이번 영화제에는 국제경쟁 부분에 747편, 단편과 장편을 합한 한국영화 부문에 1,513편이 출품되어 역대 최고의 경쟁률을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독립과 대안이라는 가치로 다양한 영화를 선보여왔다”는 민성욱 공동집행위원장의 말에 더한층 무게가 실리는 대목이다.
팬데믹 강타의 후유증이 아직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고, OTT의 등장으로 기존 영화 산업을 관통하던 모든 공식은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여러모로 영화계는 격변의 시기를 통과하는 중이다. 그 와중에도 독립‧예술영화의 기반을 오랫동안 다져온 전주국제영화제에 이토록 많은 작품이 출품되었다는 건 영화인들이 안팎의 위기에도 영화로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의미일 터. ‘우리는 늘 선을 넘지’라는 지난해의 슬로건을 올해도 유지한 이번 영화제가 어떤 영화를 펼쳐낼지가 유독 기대되는 이유다.
개막식에는 민성욱, 정준호 공동집행위원장의 축사와 우범기 조직위원장 겸 전주 시장의 개막 선언, 개막 축하 공연, 경쟁 부문 심사위원들의 심사 기준 언급 등의 순서로 채워졌다. 국제경쟁 부문 심사위원을 맡은 유지태 배우는 누군가 정성들여 만든 영화를 심사위원의 주관으로 평가하는 일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면서도 "이번 영화제가 지금도 골방에서 글을 쓰는 감독과 작가, 예비 배우들을 위한 영화제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히기도 했다. 역대 최대 출품작 중 어떤 작품이 수상의 영예를 누릴지 궁금증이 증폭된다.

한편 개막작으로는 최근 베이징국제영화제에서 예술공헌상을 수상한 미야케 쇼 감독의 〈새벽의 모든〉이 선정되었다. 각각 월경전후증후군인 PMS와 공황장애로 어려움을 겪는 두 남녀가 서로를 도우며 연대와 희망을 벼려내는 영화다. 생리 때만 되면 평소의 차분하고 사려 깊은 성격과는 달리 공격성이 마구 분출되는 후지사와는 이 문제로 난처한 일이 반복되자 새로 들어간 회사를 2달 만에 그만 둘 수밖에 없을 정도로 증세가 심하다. 마찬가지로 어느 날 갑자기 공황장애가 찾아온 야마조에 역시 이 때문에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런 둘이 어린이용 과학 키트를 만드는 자그만 회사에서 함께 일한다. 서로의 어려움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상대가 불편하고 짜증나기만 했지만 우연한 계기로 상대 역시 정신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안 이후에는 조금씩 ‘참견’하는 ‘오지랖’으로 서로를 보듬어나간다. 야마조에의 말마따나 둘 사이에는 이해할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하지만 서로를 도와줄 수는 있다. 〈새벽의 모든〉은 이 사소한 사실을 차근히 펼쳐내 보인다.
두 사람이 벼려내는 연대의 장소가 회사라는 점은 눈여겨볼만하다. ‘회사’는 자본주의의 핵심인 장소다. 회사에서의 끝없는 경쟁과 자기 갱신은 인간의 정신을 소진시키다 이내 탈진시킨다. 모든 정신 질환의 원인이 자본주의일 수는 없지만, 동시대 정신질환의 많은 특징이 여기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후지사와와 야마조에는 회사에서 만나 회사에서 연대한다. 아무도 없는 주말 저녁의 캄캄한 회사에서 서로를 위로하는 순간을 쌓는 식이다. 그들이 하는 노동도 마찬가지다. 밤하늘의 별자리와 관계된 제품을 기획하고 디자인하며, 두 사람은 기존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밤’의 의미를 되새긴다. 밤은 어둡고 깜깜하지만 해가 떠 있을 때는 미처 볼 수 없는 별을 볼 수 있게 해주고, 인간은 별에 대한 호기심으로 지구 밖 세계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영화는 두 사람의 제품 개발 과정에 별에 얽힌 신화적 이야기를 덧대 밤에만 가능한 서사를 탐색하기도 한다.


여기서 밤은 정신 질환자가 침잠하는 세계의 은유다. 지구 밖에도 무한한 우주가 있지만 인간의 내면에도 그만큼 큰 우주가 있다. 때문에 두 사람이 노동하면 노동할수록, 즉 인간을 착취하는 자본주의적 활동에 충실할수록 자본주의가 옥죈 내면의 세계가 깊어지는 역설이 발생한다. 야마조에의 말마따나 두 사람에게는 여전히 미래 전망이 없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두 사람만 알 수 있는 세계를 탐닉함으로써 결코 자본주의가 잠식할 수 없는 자기 내면의 무한한 공간을 마주한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두 사람 회사 사람들이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는 장면을 배경으로 올라가는 것 역시 우리가 자본주의의 일터인 회사를 다른 방식으로 재의미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아기자기하게 관계 맺으며 조금은 여유롭게 일하는, 나의 모든 것을 갈아 넣을 필요가 없는 동시에 일과 삶을 괴리시킬 필요가 없는 그런 일터의 가능성 말이다. 그곳에서는 일할수록 불행해지는 현대인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을 것만 같다. 〈새벽의 모든〉은 정신 질환에 관한 차근하면서도 급진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을 통해 제25회 국제전주영화제에 기자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개막작 〈새멱의 모든〉 상영 시간은 아래와 같습니다. 다른 영화 상영 시간은 영화제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5월 1일 19:30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001)
-5월 2일 13:30 CGV전주고사 3관(120)
-5월 5일 10:30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401)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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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회] 구경거리 악동이 아닌,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슈퍼스타
Lord, I'm doing all I can, To be a better man.
Robbie Williams - Better Man
안녕하세요! 지난 3월 20일 씨네랩 크리에이터로 <배러맨>을 개봉 전 관람하게 되어 후기를 작성해보려 합니다.
<배러맨>은 뮤지컬 영화이자 영국의 전설적인 팝스타 로비 윌리엄스의 삶을 다룬 전기 영화로, 국내에서는 <위대한 쇼맨>의 감독으로 잘 알려진 마이클 그레이시(Michael Gracey)가 감독을 맡았습니다. 또한 로비 윌리엄스가 직접 로비 윌리엄스 역의 목소리 연기를 수행했다는 점도 알고 계시면 좋을 관람 포인트입니다.
<배러맨>은 "영국 앨범 차트 역사상 가장 성공한 영국인 솔로 아티스트"라는 타이틀을 보유한 로비 윌리엄스의 인간적인 면모를 조명합니다. 눈부신 조명 아래 선 팝스타의 모습과 동시에 그의 성장, 방황, 중독과 불안의 과정을 비추며 사람들이 알지 못했을 무대 아래에서의 시간들을 보여줍니다.
로비 윌리엄스는 어린 나이에 5인조 밴드 테이크 댓의 보컬로 가수 생활을 시작합니다. 팀의 막내로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리던 그는 갖은 논란과 잦은 갈등으로 인해 결성 6년 만에 팀에서 탈퇴합니다. 이후 도전한 솔로 활동에서 그는 크게 성공했고, 마침내 인생의 목표였던 넵워스에서의 공연까지 성취하게 됩니다. 멋대로 살아도 성공이 따라오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인생 이면에는 끊임없는 자기혐오와의 싸움이 있었는데요. 작중에서는 섬세한 심리 묘사로 이를 다루어냅니다.
<배러맨>에서 흥미로운 것은 주인공인 로비 윌리엄스를 원숭이의 모습으로 연출했다는 점이었는데요. 영화 속 모든 장면이 거의 실제와 유사하게 연출되어 있는데, 오로지 로비 윌리엄스만이 원숭이의 모습을 하고 있어 의문을 자아냅니다. 그를 원숭이의 모습으로 연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영화가 후반부로 달려가면서 그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었습니다. 로비 윌리엄스는 밝은 조명들이 집중된 화려한 인생을 살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어린 나이부터 사람들의 구경거리로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를 둘러싼 수많은 논란과 갈등이 그를 외롭게 만들었죠. 그가 어떤 상태고 무엇을 느끼는지와는 무관하게 늘 동일한 얼굴로 무대 위에 올라야 했으므로, 어쩌면 그는 스스로가 마치 동물원 우리 속의 원숭이처럼 여겨졌을지도 모릅니다.
감독과의 대화에서 이러한 로비 윌리엄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데요. 감독이 로비 윌리엄스에게 스스로 어떤 동물처럼 느껴지냐고 묻자, 그는 스스로가 공연하기 위해 무대에 끌려나온 원숭이 같다고 답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IV1QljKILs
<배러맨>에선 로비 윌리엄스를 그리 대단한 위인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그저 어릴 때부터 노래를 좋아했던, 어디서든 눈에 띄는 끼를 지닌 능청꾸러기로 묘사했죠. 그렇기에 관객들은 그저 작은 소년에 불과했던 그가 스타의 길을 걸으며 느꼈던 거대한 부담감과 불안감에 더 공감하고 이입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시종일관 그를 연민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는 로비 윌리엄스의 반성처럼 느껴지는 장면들을 포함하며, 좀처럼 미화하거나 호소하지 않습니다. 화려한 영상과 대비되는 담백하고 진솔한 스토리. <배러맨>이 매력적인 이유일 수도 있겠습니다.
뮤지컬 장면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죠! 영화를 관람하며 <보헤미안 랩소디>가 떠올랐습니다. 로비 윌리엄스의 히트곡들로 펼쳐지는 뮤지컬의 장면들은, <위대한 쇼맨>을 통해 기대감을 가진 채로 <배러맨>을 관람할 관객들을 충분히 만족시켜 줍니다. “테이크 댓”의 무대 의상을 그대로 구현한 의상들이나 역동적인 장면들이 보는 재미를 더합니다. 긴 설명을 읽는 것보단 역시 직접 관람하는 것이 더 확실히 느껴지겠죠?
로비 윌리엄스의 삶을 다룬 작품은 <배러맨>이 처음은 아닙니다. 2023년 넷플릭스에는 <로비 윌리엄스>라는 이름의 4부작 다큐멘터리가 공개되었습니다. 그의 지난 삶을 돌아보는 작품으로, <배러맨>을 통해 관심이 생기신 분들은 해당 다큐멘터리를 영화 관람 전 미리, 혹은 관람 후에 한 번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영화관에서 볼 때 진가를 발휘하는, 울림이 있는 뮤지컬 영화입니다. 뮤지컬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 90년대 영국 음악을 좋아하시는 분, 로비 윌리엄스에 대해 아시는 분들께 추천하고 싶은 영화, <배러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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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펜데믹 시대, 모두를 위한 음악 선물 <씽2게더>
2022년 새해를 활짝 열어준, 올해 첫 애니메이션 <씽2게더>를 만나고 왔다.
<씽2게더>는 지난 2016년 개봉해 국내 17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 애니메이션’이라는 수식어에 완전히 자리 잡았던 <씽>의 6년만의 속편이며 전편 개봉 당시 매튜 맥커너히, 리즈 위더스푼, 스칼렛 조핸슨, 태런 에저튼 등 화려한 성우진으로 팬층을 두텁게 쌓았었다. 이번 <씽2게더>는 1편의 오리지널 성우진에 더해 가수 퍼렐 윌리엄스와 할시까지 합세하며 최강 성우진 군단을 한층 더 단단하게 구축했다. 이번 <씽2게더>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를 아낌없이 활용을 잘한 작품이다. ‘노래’와 ‘춤’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다채로운 방면으로 승화시키는데, 우리가 흔히 뮤지컬에서 보던 세트와 의상, 특수효과, 무대 장치들에 ‘애니메이션’의 장점을 있는 힘껏 녹였다. 각 캐릭터마다의 설정과 사운드트랙에 맞게 그래픽 효과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어 더욱더 영화의 즐거움을 한층 높여준 느낌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도시 ‘레드쇼어 시티’에 대한 표현도 정말 센스있다. 가지각색의 건물들과 네온사인, 아기자기한 도심 속 풍경들의 포인트들을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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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씽2게더>는 ‘무한한 즐거움’이라는 영화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대중들에게 확실하게, 자신 있게 설득한다. 고로 애니메이션의 ‘비현실적’이라는 의문을 완전히 없애버린다. 개인적으로는 소소하게 드러내는 단점들을 덮을만한 장점 요소들이 더 많은 작품이었다. 사실, 애니메이션에 ‘질주’라는 표현이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질주하는 즐거움’이라는 표현이 정말 알맞다. 눈과 귀가 꽉 차다 못해 벅찰 정도로 신나고, 유쾌하고, 흥겹다. 아무래도 <씽> 시리즈의 장점은 그동안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히트곡들을 다시 재해석한다는 점인데, 1편의 케이티 페리, 샘 스미스, 테일러 스위프트, 존 레전드, 엘튼 존의 노래에 이어 이번 작품에서도 빌리 아일리시, 아델, 숀 맨데스, 콜드플레이 등 다채로운 팝스타들의 노래로 꽉 채워졌다. 평소 팝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노래가 어떤 식으로 재탄생했을지 눈 여겨 봐도 좋을 것이다. 영화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씽2>에서 ‘Gather’이라는 단어가 붙어 <Sing Together>가 되었다. 전 세계적인 펜데믹 시대에 함께 모여 노래한다는 것, 함께 열기를 느낀다는 것에 의미와 그리움을 담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씽2게더>는 ‘공연’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이 넘쳐나는 요즘 같은 펜데믹 시대에 선물과도 같은 영화가 될 것이다. 이제는 ‘음악 애니메이션’의 대표작으로 완전히 자리잡은 <씽> 시리즈의 활약을 계속해서 기대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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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짧지만 깁니다
엔니오 모리꼬네라는 이름은 영화를 좋아하지 않아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하다. 혹여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더라도 몇 곡을 듣고 나면 아, 이 곡이 그 사람이 쓴 거였어? 라는 반응을 들을 수 있다. 영화나 음악에 관심있는 이들이라면 엔니오 모리꼬네가 그 유명한 '넬라 판타지아'를 작곡하고도 오스카를 수상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기도 하다. 본인조차 평생 작곡한 곡의 수를 알지 못했을 만큼 수많은 곡을 작곡한 모리꼬네는 그야말로 20세기와 21세기에 걸친 영화음악계의 대부였으며, 그런 만큼 모리꼬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다. 모리꼬네의 친구이자 동업자였던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은 모리꼬네의 생전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를 기리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 덕분에 관객은 그의 사후에 만들어진 다큐멘터리임에도 모리꼬네 자신의 이야기를 스크린을 통해 만날 수 있게 됐다.
대부분의 다큐멘터리가 그렇듯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모리꼬네의 인터뷰를 제외하고도 모리꼬네를 알았던 이들과 모리꼬네에 대해 잘 알았던 주변인 혹은 영화음악 후배들의 인터뷰로 가득 차 있다. 90세가 넘도록 장수했음에도 죽는 순간까지 영화음악을 놓지 않았던 모리꼬네의 음악은 2시간 36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에도 다 담아낼 수 없을 만큼 장대했다. 영화는 빠른 속도로 모리꼬네를 포함해 수많은 이들의 인터뷰를 통해 숨가쁘게 모리꼬네의 인생을 소개한다. 모리꼬네와 동시대를 살아왔던 토르나토레 감독에게는 모리꼬네의 초창기 작품들이 익숙하겠지만 상대적으로 평균 나이대가 낮을 수밖에 없는 관객에게 영화 초반은 신선한 동시에 지루할 수밖에 없다. 서부영화의 거장 세르지오 레오네와 모리꼬네가 협업을 했다는 사실에(정확히는 그만큼 모리꼬네가 나이가 많았다는 사실에) 놀라는 관객도 많지만 그만큼 레오네의 이름 자체가 생소한 관객도 분명 존재한다. 토르나토레 감독은 모리꼬네의 인생 초반 업적도 소개하고 싶은 욕심에 다양한 관객을 배려하지 못하는 우를 범한다.
28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던 히스 레저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아이 앰 히스 레저>에는 히스 레저의 인터뷰는 당연히 포함되지 않았고, 짧았던 생애를 강렬한 불꽃처럼 살아냈던 그를 자세히 소개할 시간이 있었다. 히스 레저가 배우 이외에도 뮤지션으로도 활동했다는 것과 그가 연출했던 뮤직비디오를 소개하고 무엇보다도 사후 오스카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다크 나이트>의 조커 역을 연기했을 때의 히스 레저를 파헤치며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조커 연기가 사인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짚고 넘어간다. 요절한데다 배우라는 직업 특성상 히스 레저의 필모그래피는 모리꼬네의 그것과 비교도 안 되게 짧기에 영화는 여유를 두고 히스 레저라는 인물 자체에 깊이 다가간다. 반면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모리꼬네 자체보다는 모리꼬네가 헌신했던 영화음악에 더 치중하며, 어느 한 곳에 방점을 찍는 대신 수많은 영화음악을 조금씩 맛보는 전략을 택했다. 그러다보니 관객은 모리꼬네의 수많은 음악 가운데 더 친숙한 음악을 한번 더 만나거나 미처 몰랐던 모리꼬네의 일면을 만나보는 경험은 하지 못한다.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가 다른 곳도 아닌 돌비관에서 시사회를 진행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많은 이들이 아마도 영화를 통해 '넬라 판타지아'를 위시한 아름다운 모리꼬네의 음악을 다시 한번 웅장한 사운드로 들을 수 있으리라 짐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대가 무색하게 영화는 모리꼬네의 기나긴 삶과 수많은 업적을 담아내느라 정작 그의 음악을 한 곡이라도 제대로 다루지는 못한다. 비록 <미션> 속 '넬라 판타지아'가 달성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모리꼬네가 오스카를 수상하지 못했다는 것과 당시 모리꼬네가 느꼈던 심정, 그리고 오스카 회원들이 느꼈던 미안함이 담겼으나 이는 모리꼬네가 '넬라 판타지아'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한 감동에 비할 바는 아니다. 모리꼬네가 순수음악 대신 영화음악을 택하는 바람에 음악계에서 인정받는 데 지난한 세월이 걸렸다는 것이 모리꼬네의 일생에 걸친 업적을 소개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었을까. 이후 영화는 결국 오스카가 모리꼬네에게 공로상을 수상했고, 마침내 그가 <헤이트풀8>를 통해 늦은 나이에 오스카 음악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음을 소개하면서 모리꼬네에게 오스카란 무엇이었을까를 관객에게 의문으로 남긴다.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2시간 36분을 꽉 채운 인터뷰와 자료들로 인해 러닝타임은 숨가쁘게 지나간다. 또한 모리꼬네의 초창기 음악에는 익숙하지 않은 관객에게 평생에 걸쳐 영화음악에 헌신했던 그의 삶에 몰랐던 면이 있었음을 소개하기도 한다. 특히 서부영화에 모리꼬네가 끼친 영향을 영화를 통해 접하고 나면 세르지오 레오네의 영화들을 찾아보고 싶게끔 만든다. 어찌 보면 그가 작곡했던 서부영화 음악들을 통해 쿠엔틴 타란티노와 같은 현시대의 감독들이 성장할 수 있었고, 결국엔 <미션>이 아닌 서부영화의 계보를 이은 타란티노의 영화를 통해 모리꼬네가 오스카를 수상했다는 점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정서처럼 보이기도 한다. 헐리웃뿐만 아니라 본국인 이탈리아 영화계, 때로는 왕가위와 구로사와 아키라를 포함한 아시아 영화의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던 모리꼬네의 종착점이 시작점과도 같은 서부영화였다는 점은 다소 두서없어 보이는 이 영화 속에서 모리꼬네의 삶에 대한 힌트로 작동한다.
많은 위인들 중에서도 모리꼬네처럼 평생에 걸쳐 한 분야의 업적을 수도 없이 쌓고, 또 장수했던 이는 많지 않다. 토르나토레 감독은 한 발짝 떨어져 모리꼬네의 삶을 관망하기보다는 친구로서 모든 면을 조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관객은 조금은 두서없지만 모리꼬네를 향한 애정이 듬뿍 담긴 찬사를 긴 러닝타임으로 만날 수 있게 됐다.
*본 리뷰는 씨네랩의 시사회 초청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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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액션과 드라마의 황금비율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도 마약왕의 아들을 구하다가 죽을 뻔했던 '타일러 레이크(크리스 햄스워스). 그는 동료인 '닉'(골쉬프테 파라하니)과 '야즈'(아담 베사)' 덕분에 간신히 살아난 뒤 고요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누린다.
그러던 어느 날, 미지의 인물인 '앨콧(이드리스 엘바)'이 그에게 구출 작전을 의뢰한다. 조지아 마피아 두목인 '다비트'(토르니케 브지아바)의 아내이자 타일러의 처제인 '케테반'(티나틴 달라키슈빌리)이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 아이들과 함께 감옥에 갇힌 채로 남편에게 학대당하고 있으니 제발 꺼내 달라고.
이에 타일러는 망설임 없이 처제 구출 작전에 뛰어든다. 전 아내인 '미아'(올가 쿠릴렌코)'와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에게 지은 죄를 대신 씻어낼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계승과 변주
죄책감. 타일러 레이크라는 캐릭터의 전부다. 그는 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들 곁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인도 마약왕이 아들을 구출해 달라고 의뢰하자, 자기 아들을 겹쳐 보고는 불가능에 가까운 의뢰를 수락했을 정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긴다. 닉의 말마따나 아들을 지키지 못한 고통 속에서 사느니 죽는 게 났기 때문.
타일러의 캐릭터성은 그가 죽음을 맞이한 듯 보였던 <익스트랙션>의 결말이 특히 인상적인 이유였다. 인질을 구하는 데 성공한 혈투 때문이 아니다. 죽음으로써 아들에게 속죄하고, 몸과 마음을 잠식한 죄의식에서 스스로를 빼내는(Extraction) 구출극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속편 제작 결정이 의아했다. 아버지로서의 서사가 훌륭히 끝난 가운데 속편이 사족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익스트랙션 2>는 영리하다. 화려한 액션 안에 이야기를 녹여낸다. 전편의 서사를 계승하되, 다른 방향으로 완결한다. 아버지 타일러의 서사는 깔끔히 마무리된다. 그는 사투 끝에 깊고 무거운 죄책감을 직간접적으로 떨쳐낸다. 그와 동시에 타일러는 아버지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두 번째 기회를 잡는다. 시리즈도 홀가분해진 타일러와 함께 새로운 임무에 나설 판을 까는 데 성공한다.
지평선과 빌딩이 만나는 액션
우선 <익스트랙션 2>는 액션 영화의 본분에 충실하다. 스턴트맨 출신 샘 하그레이브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만큼 러닝타임 내내 눈을 사로잡는 액션이 가득하다. 액션 시퀀스는 크게 3개다. 조지아 감옥 탈출이 첫 번째 시퀀스다. 조지아 마피아 두목이자 다비트의 형인 '주라브'(토르니케 고그리치아니)의 추격을 피해 오스트리아 빈에서 펼치는 탈출극이 두 번째다. 마지막으로 타일러와 주라브는 비행장과 성당에서 정면으로 격돌한다.
첫 번째 시퀀스는 현란하다. 12분가량 이어진 전편의 원테이크 액션 시퀀스와 비슷하다. 감옥에서 벗어나는 순간부터 기차를 타고 추격을 따돌리는 장면까지 20분에 가까운 원테이크 액션이 연이어 등장한다. 카메라는 자동차와 기차 내외부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속도감 있는 추격전을 담아낸다. FPS 게임을 보는 듯한 1인칭 시점도 역동성을 더해준다.
두 번째 시퀀스는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호텔 건물에서 추격을 다시 한번 따돌리려는 타일러 일행과 주라브 간의 승부가 펼쳐지는 가운데, 앞선 시퀀스와는 다른 접근법을 선보인다. 감옥 탈출 시퀀스는 수평적이었다. 감옥 복도를, 운동장을, 도로와 숲 속을, 철로를 수평으로 가로지른다. 자연히 액션 동선도 앞뒤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호텔 시퀀스에서는 수직적인 움직임이 돋보인다. 주라브는 빌딩 밖으로 탈출하려는 시도를 봉쇄하고, 위아래에서 포위망을 좁힌다. 그러자 타일러 일행은 건물 옥상으로 올라간다. 나가지의 헬기를 탈취해 탈출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헬스장 같은 호텔 내부 시설 혹은 즉석으로 만든 부비트랩을 활용한 다양한 액션이 등장해 눈을 사로잡는다. 방향성이 다르다 보니 액션 시퀀스는 길지만 지루하지 않다.
액션과 드라마의 황금 비율
그런데 세 번째 시퀀스까지 오면 한 가지 의아한 부분이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액션 스케일이 줄어들고 화려함도 덜해지기 때문이다. 마지막 시퀀스의 경우, 타일러가 유탄 발사기를 활용하는 초반부를 제외하면 육탄전으로 가득하다. 앞선 시퀀스에서 등장한 헬기도 없고, 인원도 1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자연히 감옥 탈출 시퀀스 수준의 임팩트는 없다. 다리 위에서의 교전이 클라이맥스를 장식한 전편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액션만 놓고 보면 이 선택은 부적절하다. 전체적인 쾌감을 저하시킨다. 그러나 드라마까지 고려하면 오히려 신의 한 수다. 액션의 강도를 낮추는 대신 타일러의 과거와 아픔이 자세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타일러가 자기 자신을 구하는 또 다른 구출극이 모습을 드러낸다. 전편에서 이어진 죄책감의 서사를 끝낼 기회도 생긴다. 적절한 완급조절 덕분에 자칫 단순할 수 있는 이야기에 매력이 더해진 셈이다.
실제로 감옥 시퀀스 전후로 타일러의 감정선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새 삶을 누리는 그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처제를 구출하라는 미션을 받은 후도 다르지 않다. 그는 살아볼 이유를 찾는 것뿐이라고 닉에게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그나마 아들의 그림이 유일한 단서다. 그림을 바라보는 타일러의 눈빛에서는 새로운 임무가 단순한 구출 작전이라는 아니라는 점을 느낄 수 있다.
구원과 두 번째 삶
반면에 호텔 탈출 시퀀스 앞뒤로는 타일러의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액션에 힘을 뺀 만큼 드라마는 깊어졌다. 그와 ‘산드로(안드로 자파리쥐)’의 대화가 대표적이다. 아들과 비슷한 나이인 산드로에게 타일러는 여러 이야기를 건넨다. 아들이 죽은 이유, 자기가 지은 죄, 아들이 있다면 해주고 싶은 말... 마치 고해성사를 보는 듯하다. 그는 아버지로서 자격 미달이라는 처조카의 힐난도 순순히 인정한다.
아내와의 재회도 마찬가지다. 여동생과 조카를 은신처로 데려가기 위해 타일러의 집을 방문한 미아. 타일러는 그녀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 아들이 투병 생활하는 동안 파병을 핑계 삼아 가족을 떠났던 과거를 자책할 뿐이다.
타일러의 서사는 가장 초라한 액션 시퀀스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처조카를 구하는 사투와 죄책감과 싸우는 혈투가 동시에 펼쳐지다 보니 감흥이 제일 진하다. 배경이 하필 성당이라 더 의미심장하다. 성당은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인간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는 신의 건물이다. 타일러는 그 안에서 자기 죄를 씻어내고, 두 번째 삶을 찾는다.
이는 갠지스 강에 빠져 죽음으로써 속죄하려 했던 1편 결말과 묘하게 대조된다. 미아의 마지막 말처럼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타일러의 모습으로 보여주며 영화는 끝맺는다. 미아는 전 남편에게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들은 파병 간 타일러를 비난하지 않았다고. 오히려 사람들을 구하러 간 영웅이라 불렀다고. 그러니 더 이상 자책하고 괴로워할 필요 없다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맺음과 새 출발
그러다 보니 <익스트랙션 2>는 <007 스카이폴>을 보는 듯한 느낌도 준다. <스카이폴>도 액션을 초중반부에 몰아넣었다. 반면에 후반부에는 상대적으로 스케일이 작은 액션을 배치해 드라마에 집중했다.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와 'M'(주디 덴치)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했고, 빌런 '실바'(하비에르 바르뎀)의 존재감을 부각했다. 그 덕분에 <스카이폴>은 이후 <스펙터>와 <노 타임 투 다이>로 이어지는 가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었다.
<익스트랙션 2>도 마찬가지다. 타일러의 발목을 붙잡던 가족사를 완결하면서 전편의 서사를 능숙하게 마무리지었다. 다음 시리즈의 초석도 단단히 다졌다. 그의 새 삶을 응원하면서 이드리스 엘바와 함께할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예고한다. 산드로나 주라브처럼 완성도가 아쉬운 몇몇 캐릭터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일까? 시나리오를 작성한 조 루소의 이름이 엔딩 크레디트에서 유달리 눈에 띈다.
Acceptable 무난함
액션과 드라마의 탁월한 완급 조절로 시리즈의 토대를 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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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청나게 야심차고 믿을 수 없게 지루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완벽한 세계 바비랜드에서 매일 같이 평화로운 일상을 누리던 '전형적인 바비'(마고 로비). 어느 날 바비는 갑작스럽게 변한 자기 자신을 깨닫는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죽음'에 대해서 고민하고, 하이힐을 신기 위해 까치발이었던 발이 평발은 됐으며, 다리에는 셀룰라이트가 생겼기 때문.
이에 전형적인 바비는 이상한 바비를 찾아가 해결책을 구한다. 현실에서 자신을 가지고 노는 여자아이에게 변화가 생겼으니, 현실 세계로 넘어가 그 아이를 직접 만나라는 것. 이에 전형적인 바비는 현실 세계로 넘어 가 사태를 바로잡고 다시 완벽한 바비가 되려 한다. 그녀 없이는 삶의 목적을 찾을 수 없는 '켄'(라이언 고슬링)과 함께.
영화와 메시지
봉준호 감독은 "영화는 메시지를 담는 도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영화든 메시지가 있으면 좋지만, 메시지는 영화의 아름다움을 통해 자연스럽게 전해져야 한다는 의미다. 그렇지 않은 영화는 선동을 위한 프로파간다와 다를 게 없기 때문. 즉, 영화는 일단 흥미로워야 한다. 그래야 감독, 작가, 배우 등이 심어 놓은 메시지도 가랑비에 옷 젖듯이 잘 전달될 수 있을 테니까.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여성 감독인 그레타 거윅은 위의 예술관에 부합하는 여성 감독이었다. 거윅의 영화는 주로 페미니즘 메시지로 무장했다. 하지만 영화적 재미를 놓치지는 않았다. 전작인 <작은 아씨들>만 봐도 그렇다. 거윅은 고전 소설의 매력을 한껏 살리면서 그 안에 핵심적인 목소리를 물 흐르듯 담아냈다. 어떤 모습의 삶을 살든 여성들의 선택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야 한다고.
그레타 거윅의 신작 <바비>는 반대다. 화려한 분홍빛 바비랜드는 여러 메시지로 가득하다. 가부장제를 깨뜨려야 한다, 현시점 페미니즘은 문제가 있다, 백래시를 극복해야 한다, 남성에 대한 역차별도 해결해야 한다... 제각기 자기주장이 가장 중요하다며 일방적으로 목소리를 높인다. 메시지를 쏟아내기 급급하다. 그 결과 이 야심차고 화려한 영화는 점차 지루해진다. 마치 대학 교양 강의를 듣는 듯한 인상까지 남는다.
바비랜드, 바비가 바꾼 세상
첫 장면부터 <바비>는 야심을 드러낸다. 바비 인형의 명암을 조명하고, 바비의 이상적인 의미를 찾아내겠다고 선언한다. 우선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오마주한 오프닝은 바비의 등장이 끼친 긍정적인 영향력을 상기시킨다. 아기 인형을 가지고 놀면서 엄마라는 꿈만 꿔야 했던 여자 아이들. 그들은 바비를 만난 이후 엄마가 아닌 다른 삶도 살 수 있다고 깨닫는다.
전 세계의 분홍색 페인트를 모두 가져다 쓴 '바비랜드'는 여성의 가능성이 완전히 꽃 피운 세상을 보여준다. 작가, 대통령, 대법관, 우주비행사, 과학자 바비 등 여성이 주도하지 않는 분야가 없다. 바비랜드에서는 인종과 피부색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두 같은 바비일 뿐이다. 그들 스스로도 세계를 더 완벽하게 만들었다고 자화자찬한다.
이는 바비의 역사를 요약하는 대목처럼 보인다. 그간 마텔은 고정된 성 역할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간호사, 항공 승무원 등 여성 비율이 높은 직업뿐 아니라 의사, CEO, 파일럿, 경찰관 옷을 입은 바비도 출시했다. 문화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수용해 히스패닉 계 바비, 아프리카계 미국인 바비, 블랙 바비를 연달아 선보였다. 최근에는 다운증후군 바비 인형도 등장했다.
미처 바꾸지 못한 현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 <바비>는 바비 인형에 내재한 모순을 마냥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형적인 바비를 현실 세계에 던져 놓으면서 전면에 부각한다. 일단 영화는 바비 인형에게 늘 따라붙는 가장 일반적인 비판부터 짚고 넘어간다. 아이들이 바비를 자신의 롤모델로 여기고, 바비처럼 되고 싶어 할 거라는 우려를 투영한다.
전형적인 바비의 몸에 문제가 생기자 다른 바비와 켄이 깜짝 놀라거나 구토를 하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마치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듯이. 이처럼 <바비>는 바비가 젊은 여성에게 비현실적인 신체 이미지를 홍보한다는 비판을 스토리의 시작점부터 수용한다.
이에 더해 바비랜드와 현실 세계를 대조하며 바비의 한계도 지적한다. 바비들 생각과 달리 영화 속 현실은 바비랜드와 많이 다르다. 마텔 본사에 고위급 임원 중 여성은 없고 경찰도 성희롱 발언을 일삼는다. 바비랜드에서 완벽한 여성이었던 바비는 현실에서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 바비 인형의 여러 변화가 현실에서 실제적인 변화로 이어진다고 볼 수 없다는 일각의 지적도 반영된 셈이다.
바비와 켄, 페미니즘과 휴머니즘
바비랜드와 현실 세계의 괴리감은 켄에게도 투영돼 있다. 그의 이야기에는 바비 인형의 모순과 다소 가려져 있던 현실이 깃들어 있기 때문. 바비랜드에서 켄은 바비만 바라보고 사는 부속품이다. 그녀가 말을 걸어주고, 쳐다봐 주는 것만이 삶의 유일한 목적이다. 그런데 현실 세계를 맛본 뒤로 켄은 바뀐다. 말, 자동차, 맥주로 대변되는 남성성의 신봉자가 된다. 가부장제를 도입하고 바비랜드가 아닌 켄덤을 세운다.
켄의 행보는 페미니즘 진영에서 '백래시'라고 규정하는 사회적 반발을 반영하는 듯 보인다. 다만 바비랜드가 바비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극단적인 여성 중심 사회라는 점을 고려하면 켄의 저항은 단순히 치기 어린 반발이 아니다. 오히려 바비랜드도 텐덤도, 어느 쪽으로든 기울어진 사회에서는 누구나 차별 또는 역차별당할 수 있다는 지적에 가깝다. 이는 페미니즘에 대한 자성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비랜드와 같은 이상향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라는 기대는 잘못됐다고.
이에 <바비>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으로 휴머니즘이라는 카드를 꺼내든다. 바비는 완벽한 여성이라는 한계를, 켄은 바비의 부속물이라는 고정관념을 깨자고 말한다. 바비와 켄 모두 원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을 인정하자고 말한다. 또 누가 더 우월하고 낫다고 싸울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능성에 귀를 기울이자고 덧붙인다. 영화는 바비는 바비, 켄은 켄, 또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막을 내린다. 마고 로비가 "완벽히 페미니즘 DNA에 기반하고 있고, 환상적인 휴머니스트 영화"라고 <바비>를 소개한 이유다.
메시지와 메신저의 부조화
문제는 메신저다. 전개와 연출이 메시지와 잘 이어지지 않으면서 영화를 혼란스럽고, 지루하게 만든다. 비중 있게 다룬 켄의 이야기와 충돌하는 후반부 전개가 대표적이다. 종국에 바비랜드는 처음 바비랜드로 되돌아온다. 모든 권력은 바비에게 넘어간다. 켄들은 약간의 권리를 얻어내지만, 이전과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정반합(正反合)이 아닌 정반정(正反正)이라 해야 할 마무리다.
메시지를 보여주는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 그레타 거윅과 노아 바움벡의 명성을 생각하면 의아할 정도로 지나치게 일방적이고 직접적이기 때문이다. 바비랜드를 되찾는 과정에서 바비와 글로리아는 카메라를 똑바로 보며 가부장제의 폐해를 직접적으로 읊는다. 이는 강의를 진행하는 교수처럼 관객에게 모든 메시지를 떠먹여 주려는 듯 느껴진다. 즉, 영화와 프로파간다 사이에서 주객이 전도될 여지를 남긴다.
더 나아가 장르적 기반도 흔들린다. <바비>는 외관과 달리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그런데 <바비>의 풍자는 풍자가 아니라 비웃음이나 조롱차럼 느껴질 위험성을 내포한다. 여성과 남성, 바비와 켄이 갈등을 빚는 가운데 바비의 시점에서 켄만 웃음거리로 만들기 때문이다. 해변에서 켄끼리 전투를 버리는 장면, 남자다운 척하도록 유도해서 켄을 속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블랙 코미디는 민감하고 불편한 소재를 당사자가 자조적으로 풍자할 때 성립되는 경우가 많은데, <바비>는 이 대목에서 불협화음이 들린다.
그러다 보니 영화의 메시지는 정리가 안된다. 내용과 메시지가 따로 논다. 페미니즘과 휴머니즘 사이에서 접점을 찾으려 하지만 정작 결론은 한쪽으로 애매하게 치우친다. 그러니 바비와 켄이 서로를 존중하고 공존해야 한다는 말도 서서히 공허해진다. 바비 인형의 역사와 모순을 파고들다가 스스로 발이 꼬인 형국이다.
빛 좋은 개살구
배우들의 연기력과 그레타 거윅의 개성이 느껴지는 연출도 이 모순과 부조화를 끝내 메꾸지는 못한다. 사실 <바비>는 분명 보는 재미가 있는 영화다. 마고 로비는 이견을 제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전형적인 바비 인형의 이미지를 잘 재현했다. 무엇보다도 라이언 고슬링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예고편에서 마냥 병맛 캐릭터 같아 보였던 켄은 온몸으로 감정 변화를 전달하며 주인공인 바비보다도 더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또 분홍빛으로 가득한 바비랜드의 풍광은 현실과 분리된 인형 세계를 아낌없이 보여준다. 긴장이 풀릴 법하면 등장하는 화려한 뮤지컬, 내레이션을 통해 제4의 벽을 넘나드는 메타적인 요소 역시 재기 넘친다. 마치 아담 맥케이의 <빅쇼트>나 <바이스>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번쩍거리는 이미지와 퍼포먼스는 그저 휘발된다. 메시지 이전에 영화의 재미와 완성도를 잡아야 한다는 전제를 <바비>는 끝끝내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Acceptable 무난함
메시지는 문제없다. 메신저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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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라의 순간해당 행위가 나쁜 짓인지의 여부보다는 비싼 물건을 가지고 싶고, 친구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더 중요하게 작용하는 나이기에 남우는 절도를 한다. 동경하던 친구가 사실은 도둑질을 손쉽게 하고, 자랑하던 것들은 죄다 거짓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희라의 작은 우주는 무너진다. 하루아침에 우주를 잃은 희라는 괜히 애먼 곳에 화풀이를 하기도 하고, 충동적인 행위들을 저지른다. 마음 속 우주가 붕괴되는 장면은 누구나 겪어 봤을 경험들을 떠올리게 하고, 지나온 어린날의 '나'를 돌아보게 한다. 충족이 필요한 마음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모르는 어린이들의 일탈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둘의 조우는 가난을 통한 연대라기보다는 같은 비밀을 가진 어린이들 간의 공감대 형성이 적절해 보인다. 단순한 해피엔딩, 구원서사가 아닌, 나쁜 행위를 통한 연대감을 이루어내는 결말로써 오직 둘만이 서로를 보듬을 수 있을 것이다. 남우와 희라가 내일을 기약하며 함께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교환일기굳게 맹세했던 영원은 이별을 마주하기 마련이고, 내 전부라 생각했던 존재는 사실 드넓은 세상의 일부였음을 알지 못하던 때는 누구에게나 있었다. 미숙했던 그때, 서로를 채워 주는 것은 마찬가지로 미숙했던 친구였고, 단짝이었고, 그것만이 추억의 총체가 된다. 이별은 새로운 만남으로 해소할 수 있다지만, 이를 깨닫기 위해 필요한 것은 타인의 위로가 아닌, 아픈 경험이다. 상실감으로 인해 찾은 놀이터에서 우연한 기회에 새 친구를 사귀게 됨으로써 공백의 채움이 일어나게 되고, 헤어짐을 새로운 만남으로 해소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물을 많이 줄 필요가 없는, 물을 많이 주면 죽어버리는 선인장에 '내 생각이 날 때만 가끔' 물을 주라는 대사가 인상적이다. 떠나간 친구를 마냥 그리워하며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슬픔 없는 매일을 살되 지나간 인연을 잊지 말고 가끔 떠올려 달라는 바람이 드러난다. 소중했던 인연들을 우리는 종종 잊고 살아간다. 물을 자주 줄 필요는 없지만 아예 주지 않으면 시들어버리는 선인장처럼, 가끔은 먼 여행을 떠난 존재들에 애정 어린 그리움이 필요하다.새벽 바다 노을관객은 영화의 막바지 어른들의 대화를 통해 비로소 새벽과 바다가 친남매가 아님을 알게 된다. 배다른 남매인 둘은 관객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지만, 어른들은 새벽과 바다를 다르게 대한다. 어린이들의 세상은 평화롭고, 놀이를 통해 끈끈해지지만 어른들의 세상은 어린이들의 다툼은 신경 쓸 겨를조차 없을 만큼 복잡하고 날이 서 있다. 이런 어른들의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새벽이 유일하다. 세 아이 중 홀로 정신적, 육체적 성숙을 경험한 새벽만이 어른들의 대화 주제가 얼마나 민감한 것이고, 다툼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어 노을에게 빨리 집에 가라며 부추긴다. 새벽은 어른들이 싸우는 장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한참을 집에 들어가지 못하다 생리대를 갈지 못해 결국은 생리혈이 새고 만다. 가혹한 어른들의 세계에 더 큰 균열을 내어 이 싸움을 끝내고 싶은 어린이들의 심리가 잘 드러난다. 어른의 눈으로 마주한 순수한 어린이들의 세계가 너무도 천진해서 아프다.자전거 도둑전체적인 스토리가 고전 영화 <자전거 도둑>과 유사한 구조로 흘러간다. 다만 자전거는 도난당한 것이 아니라, 엄마의 병원비를 내기 위해 시장에 나가게 된 것이었고, 이를 알게 되었을 때 '자전거가 엄마보다 중요하지는 않다'며 본인 대신 대회에 나가게 된 친구를 진심으로 응원해준다. 어린이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돈보다는 우정이 앞서는 때묻지 않은 마음이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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