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지 종류의 눈물
<위대한 개츠비>, <토니 타키타니>, 그리고 <여수의 사랑>, <성경>
어떤 눈물은 느닷없이 흐른다. 다 잠근 줄 알았던 수도꼭지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처럼, 내가 인지하기도 전에 속을 이미 적셔놓고 밖으로 흐르는 눈물이 우리 삶에는 있다. 그런 눈물을 삶의 누수라고 하면 좋을까. 그런 눈물은 그야말로 새어 나오는 것이어서, 눈물이 흐른 흔적만큼 우리 삶에 빈 공간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늘 어리둥절하다가 뒤늦게 알아차린다. 내 삶이 이만큼 비어있던 것이구나. 이 공간만큼 내가 결여를 느꼈던 것이구나. 흘려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내 삶의 여백을, 눈물은 증거한다. 라캉은 이렇게 말한 적 있다. 그는 앎(knowledge, 지식)을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그건 ‘스스로를 알고 있는 앎’과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앎’이 있다는 것.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자신 스스로 ‘알고 있는’ 앎과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모르는’ 앎이 있다. 삶의 누수 같은 눈물을 라캉 식의 구분법으로 해석해보자면, 그건 단연 후자다. 나는 내가 왜 눈물이 흐르는지 모른다. 그러나 안다. 그 순간만큼 나는 그동안 (알면서도) 몰랐던 삶의 진실을 마주했고, 그랬기 때문에 눈물이 흘렀다는 것을.
삶에서 그런 순간은 느닷없이 찾아오므로, 나는 대신 영화와 책에서 그런 사례를 추려봤다. 네 종류의 눈물이 있다. 네 가지 눈물이 흐르게 된 상황적인 요인, 맥락은 제각기 다르지만, 근원은 같다. 그들은 그 순간 자신의 삶에 진실했고 또 그래서 그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그런 눈물은 주체를 수동적으로 만든다) 영화에서 두 편, 문학에서 두 편이다. 영화에서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바즈 루어만 감독의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 2013)와 마찬가지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이치카와 준 감독의 <토니 타키타니, Tonu Takitani, 2004>가 있고, 문학에서는 한강의 <여수의 사랑, 2012>과 오래된 책인 <성경>의 ‘이사야서’의 말씀이다.
<위대한 개츠비>
먼저 <위대한 개츠비>. 첫사랑인 데이지를 잊지 못한 개츠비가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부자가 되어 나타나 다시 사랑을 고백하지만 개츠비의 사랑도, 자신도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토록 바라던 데이지와 재회한 개츠비는 자신의 집에 그녀를 데려와 구경하게 한다. 데이지의 감탄이 터질 때마다 그는 속으로 자신 스스로가 무척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스러운 장면이 나온다. 개츠비는 복층 위로 올라가 자신의 영국제 셔츠 수십 벌을 꺼내 장난스럽게 데이지에게 건네는데, 그녀는 셔츠들을 보면서 돌연 울음을 터뜨린 것. 데이지는 왜 울었을까.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번역한 김영하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요컨대 데이지는 인간 개츠비가 아니라 영국제 셔츠를 사랑하는 여자다. 개츠비도 그것을 알고 있지만 어쩔 수가 없다. 사랑할 가치가 없는 여자를 지독하게 사랑한다는 것, 아니, 그 여자를 지독하게 사랑하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사랑한다는 것.”(김영하, <위대한 개츠비>, 문학동네, 2009, 241쪽) 그러니까 데이지의 눈물은 그야말로 허영에 가까운 눈물이었다는 것. 마치 아름다운 것을 보면 눈을 떼지 못하는 아이의 무구한 반응처럼 데이지의 눈물은 그런 반응의 극치라고 할 수 있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 자체를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허영으로 자신 삶의 허망을 견디고 있으니까.
영화 <토니 타키타니>에는 <위대한 개츠비>를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 있다. 자신을 끔찍한 고독에서 건져내 준 아내를, 사고로 잃은 토니는 아내가 생전에 입었던 옷을 대신 입어줄 사람을 구한다. 간신히 찾은 여자(히사코)에게 아내의 드레스룸을 보여주는데, 그녀는 돌연 울음을 터뜨린다. 울음소리를 들은 토니가 방으로 들어가 왜 우는지 물었는데,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죄송해요.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이렇게 많은 옷을 처음 입어봐서 그런가 봐요.” 이 눈물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데이지의 경우에서처럼, 허영이 깃든 무구한 반응의 극치인 걸까. 무수한 오해로부터 그녀를 구할 길은 먼저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다. 토니가 찾은 여자는 실직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무슨 일이든 해야 하는 곤란에 처해있었다. 하루 먹고사는 고민으로 하루를 버티던 그녀가, 한순간 거대한 아름다움과 대면했던 것이다. 자기 삶의 남루함과 세상의 거대한 아름다움 사이의 차이로부터 오는 기묘한 정서,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이 이렇게 많은데 내 삶은 이토록 남루하구나 라는 쓸쓸한 자기 인식. 그러니까 속에서 얼음처럼 차갑던 감정들이 아름다운 것을 마주하고는 이윽고 응결되어 새어 나온 것은 아닐까.
<토니 타키타니>
굳이 새삼스럽게 적지 않아도, <위대한 개츠비>와 <토니 타키타니>의 유사성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는 여기에다가 하나를 덧붙이고 싶다. 한강의 단편소설 <여수의 사랑>을. 자신의 부모가 누군지, 또 고향이 어딘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로 그저 여러 도시들을 떠돌던 자흔은, 다만 명료한 증거 하나만을 토대해 유추할 뿐이다. 자신이 2살 때, 여수발 서울행 열차에서 발견되었으며 그때부터 보호기관에서 자랐다는 것으로부터. 그러니까 자신의 고향은 여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그녀는 하는 중이다. 그녀는 ‘나’에게 언젠가 자신의 고향(이라 추측되는) 근처를 갔을 때의 일을 말한다.
“여수 앞바다의 해안을 따라 한없이 동쪽으로 가면 소제라는 이름의 시골 마을이 있어요. (중략) 그때가 저녁 무렵이었는데…… 완만한 뒷산 등선에는 해가 지고 있었고 그 주위로 새 깃털 같은 구름이 노다지처럼 노랗게 번쩍이고 있었어요. 그 풍경이 어쩐지 마음에 들어서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대신 마을 길을 따라 올라가 봤지요. (중략) 마을 아래를 내려다보니까 둥그런 만과 다도해 섬들이 파란 바다를 둘러싼 모양이 꼭 가느다란 푸른 실 하나하나를 촘촘히 엮어놓은 것 같이 잔잔했어요. 그런데 이상하지요…… 그냥 ‘아름답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다시 길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자흔은 왜 그 광경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던 걸까. 자흔은 이어 이렇게 말한다. “…… 바로 거기가 내 고향이었던 거예요. 그때까지 나한테는 모든 곳이 낯선 곳이었는데, 그 순간 갑자기 가깝고 먼 모든 산과 바다가 내 고향하고 살을 맞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흔의 눈물은 자신의 고향에 왔다는 아늑함에서 비롯된 것일 테고, 그 아늑함의 이면에는 단순히 고향에 왔다라는 차원을 초월해, 불분명했던 ‘자기 정체성’이 그제서야 비로소 명료하게 인식되는, 자기 존재의 의미마저 거기 배어 있었을 것이다.
<토니 타키타니>
세 가지 목록에 나는 마지막으로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다. <성경>의 ‘이사야서’다. 세 종류의 경우처럼 눈물을 흘린 것은 아니지만 정서상의 감응은 대체로 비슷하다. 이사야서 6장에는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환상을 보여주시는데, 이사야에게는 하나님이 계신 성전과 앉으신 보좌, 그리고 둘러싼 천사들의 모습이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압도적이었을 것이다. 이사야는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부르짖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표준새번역 <성경>, ‘이사야서 6장 5절) 이사야는 눈물 흘리지는 않았지만 세 종류의 눈물만큼이나 선뜻 헤아리기 어려운 종류의 반응을 한다. 어째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과 신성에 감탄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탄식한 걸까.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그는 경이 앞에서 자신의 죄를 마주한 것이라고. 그래서 난감한 사태가 발생했다. 나는 이렇게나 누추하고 얼룩처럼 죄가 묻어있는데, 깨끗하고 아름다운 경이가 내게 찾아오다니. 두 번째의 눈물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반응이다.
나는 네 종류의 반응이, 우리가 예술을 대할 때 대체로 보이던 반응과 비슷하지 않나,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예술을 허영으로 여기기도 하고(데이지), 또 어떤 사람은 아름다움이 각인시켜주는 자신의 남루한 처지를 쓸쓸해하면서(히사코), 누군가는 예술이 나 자신의 존재의 결핍을 깊이 헤아려준다는 느낌에 위로와 안도감을 감각하기도 하면서(자흔), 눈부신 경이 앞에서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절망하기도 하던(이사야), 저마다 흐른 삶의 누수들. 우리는 왜 눈물이 흐르는지 몰랐다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대체로 알고 있던 이유들이기도 하다. 그러니 라캉의 말이 옳다.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스스로 몰랐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겨우 알아간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이정식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