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Hyun2024-05-27 23:26:10
희망의 씨앗이 자라 복수의 열매를 맺다
영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리뷰
조지 밀러 감독의 말마따나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액션에 특화되어 있다면, 9년 만에 선보이는 후속작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이하 '퓨리오사')는 서사에 더욱 힘을 줬다. 그리고 왜 퓨리오사의 과거사를 택했는지도 납득됐다.
'퓨리오사'는 문명 붕괴 45년 후, 황폐해진 세상에 무참히 던져진 퓨리오사(안야 테일러-조이 분)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신의 인생 전부를 걸고 떠나는 거대한 여정을 그린다. 풍요가 가득한 녹색의 땅에서 희망의 씨앗으로 자란 어린 퓨리오사가 한쪽 팔을 잃고 시타델 소속 중무장 트레일러인 '전투 트럭(워 리그)'의 조종사가 되는 과정을 총 다섯 장으로 풀어낸다.
영화는 퓨리오사가 겪는 고통과 슬픔, 빼앗긴 행복과 희망의 서사를 빈틈없이 쌓아가고, 이 과정에서 조지 밀러 감독은 그 어떤 장면도 허투루 소비되거나 낭비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매드 맥스', 퓨리오사 팬들 입장에선 캐릭터에 대한 몰입도를 한층 더 높일 수 있다.
퓨리오사의 이야기에 집중했지만, '매드맥스' 시리즈의 전매특허인 모래사막 속 카체이싱 장면 역시 이번에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황량한 모래 위에서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폭풍을 뚫고 벌어지는 오토바이와 자동차, 트럭 추격전은 긴장감과 박진감을 조성한다. 특히 퓨리오사 일행을 공격하기 위해 패러글라이딩을 띄우는 등 공중전까지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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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리오사로 분한 안야 테일러 조이는 전작에서 퓨리오사 역으로 강렬한 아우라를 발산했던 샤를리즈 테론을 대체할 수 있을지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개다가 이번 영화 설정상 대사가 거의 없어 쉽지 않았음에도 퓨리오사의 내면을 눈빛만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 후반으로 가면서 그는 영화 속 대사처럼 '묵시록의 다섯 번째 기사(암흑의 천사)' 그 자체로 완성시켰다.
퓨리오사 못지않게 반갑고(?) 진한 인상을 남긴 캐릭터가 있었으니 전작의 최종 빌런인 임모탄 조(러치 험). 전편에 비해 지도자로서의 카리스마와 결단력, 독단적이고 강인한 면모가 더욱 부각됐다. 중반부터 퓨리오사와 호흡을 맞추며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잭(톰 버크) 또한 이목을 집중시킨다.
본편 메인 빌런이며 퓨리오사의 삶에 큰 변곡점 역할을 한 디멘투스(크리스 헴스워스) 캐릭터는 보는 이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것이다. 양면적이고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메인 빌런이라고 하기엔 뭔가 무게감이 약하다. 후반부에 디멘투스의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하면서 '복수는 종착점이 없는 행위'라는 것을 일깨워주긴 하나 스케일이 큰 액션을 기대한 이들에게는 김이 샐 수도 있다.
영화 러닝타임상 생략되긴 했으나, 디멘투스의 바이크 군단 대 임모탄 조가 이끄는 시타델의 40일간 황무지 전투가 대사로 넘어간 점도 아쉬웠다. 이외 '퓨리오사'에서 적나라하게 그리는 '야만의 시대'가 불편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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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다양한 인종의 배우들을 후보로 지명한 93회 아카데미 시상식
지난 15일(현지 기준), 총 9명의 유색인종 배우가 아카데미 시상식에 노미네이트 되면서 오스카가 다양성 측면에서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번 성과는 2015년과 2016년 시상식의 남우·여우주연상, 남우·여우조연상 후보가 모두 백인들로만 이루어진 사태를 계기로, 아카데미 측에서 다변화를 위해 수년간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인 데 따른 것이다. 지난해, 영화 <해리엇>에 출연한 신시아 에리보라는 단 한 명의 흑인 배우만 후보에 오르면서 다시 한번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올해는 다행히도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됐다.
영화 <미나리>에 출연한 스티븐 연이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 최초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지명됐으며, <사운드 오브 메탈>의 리즈 아메드 역시 파키스탄계 영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로 오르게 됐다. 또한, <미나리>의 윤여정 배우 또한 한국인 최초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지명됐다. 채드윅 보스만이 속해 있는 남우주연상 후보에 백인이 과반수를 넘지 않은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출처 : Variety
여우주연상의 후보로는 비올라 데이비스(<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 앤드라 데이(<더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vs. 빌리 홀리데이>), 바네사 커비(<그녀의 조각들>), 프란시스 맥도맨드(<노매드랜드>) 그리고 캐리 멀리건(<프라미싱 영 우먼>)이 있다.
국내에 ‘블랙 팬서’로 잘 알려진 고(故) 채드윅 보스만은 사후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최초의 유색인종 배우가 됐다.
배우의 범주를 벗어나서도 ‘다양성’이 가득한 아카데미 시상식이 될 것 같다. 클로이 자오 감독(<노매드랜드>)은 에머랄드 판넬(<프라미싱 영 우먼>)과 함께 감독상 후보로 올라, 93년 아카데미 역사상 처음으로 두 명의 여성이 후보로 오르게 됐다.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그리고 편집상 총 4개 부문에 후보로 오른 클로이 자오는 4개의 후보에 이름을 남긴 최초의 여성이기도 하다. 미아 닐(Mia Neal)과 자미카 윌슨(Jamika Wilson)은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를 통해 분장상 후보에 오른 최초의 흑인 여성이 되었다.
출처 : Variety
이번 아카데미 사상식의 후보자 명단은 지난 해 해외 누리꾼들이 ‘#BAFTAsSoWhite(BAFTA는 백인 중심적)’이라는 해시태그를 달며 비판했던 결과에 대한 피드백과 같다. 논란 이후, BAFTA(영국 영화 텔레비전 예술 아카데미, British Academy of Film and Television Arts)는 회원 자격 구성과 수상 투표 절차를 한 달 동안 검토한 후 120개에 해당하는 부분을 변경했다고 밝혔다.
또한 AMPAS(아카데미 심사 위원회)는 ‘#OscarsSoWhite(오스카는 백인 중심적)’라는 해시태그를 통해 비난받던 2015년과 2016년 이후, 2015년 25%에 불과했던 여성 회원을 2020년에는 33%까지 늘렸고, 2015년 10%를 차지한 소수민족 회원을 2020년에는 19%로 늘리는 자체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출처 : Variety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후보가 다양해졌다고 하지만, 작품상 후보들은 아쉽게도 그렇지 않다.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Ma Rainey's Black Bottom)>와 <Da 5 블러드(Da 5 Bloods)> 그리고 <원 나이트 인 마이애미(One Night in Miami)>는 모두 흑인을 위주로 캐스팅 되었고, 미국 배우 조합상(SAG Awards) 영화부문 앙상블상 후보에도 모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 작품상에는 진출하지 못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2021년이 되어서야 이렇게 다양한 후보들을 인정했다는 사실은, 아카데미를 포함한 영화 산업 전체가 오랫동안 유색인종을 소외시켰다는 ‘깊이 뿌리내린 편견’이 존재했다는 점을 직접적으로 말해준다. 따라서, 아카데미는 이번이 ‘오직’의 해가 되지 않도록 노력을 계속할 필요가 있다.
씨네랩 에디터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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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업에 귀천 없듯 액션 연기에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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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도 스턴트맨처럼 하면 어떡해
이 영화의 주인공은 스턴트맨 콜트(라이언 고슬링)이다.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배우 콜트. 콜트는 좀 특별하다. 바로 스턴트맨이다. 몸값이 비싼 할리우드 배우들의 대역으로 액션 연기를 대신하는 콜트. 하지만 이런 콜트도 사람이다. 옆구리가 시린 콜트. 마땅히 기회(?)가 없으니 그냥 소같이 일만 한다. 그런데 어떤 여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 사람은 이 영화의 여자 주인공 조디(에밀리 블런트)다. 영화 제작 스태프의 일원이었던 조디. 조디와 콜트는 서로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버린다. "끝나고 뭐 해요?" 작업 거는 콜트. 조디와 콜트, 서로 사랑하기 5분 전이다. 마지막 액션 신만 찍고 나면 1일 시작이다. 하지만 사고가 발생했다. 허리를 크게 다친 콜트. 위축된 자신의 처지에 자존감이 급락한 콜트는 이내 잠수이별을 고한다. 화가 난 조디.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다. 콜트가 잘 아는 제작자(해나 매딩엄)가 콜트에게 전화를 건다. "일자리가 들어왔는데. 조디가 감독인 영화야. 팀에 들어올래?" 신발도 안 신고 맨발로 뛰어나갈 기세다. 신난 콜트. 하지만 콜트에겐 문제가 생겼다. X를 구하려다 X 되게 생겼다. 영화 하나 찍는 게 이렇게 힘들 일인가?
고추장 고사리 콩나물 시금치
이 영화를 장르적으로 구분한다면 액션/로맨스물이지만 내실을 따져보면 다양한 재료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선택은 영화의 이야기 줄거리 외/내적으로 좋은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외피로 두르고 있는 로맨스/액션에 대한 이야기. 이야기의 흐름 상 콜트와 조디의 로맨스가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당연하다. 사건의 배경이 두 남녀의 첫 만남이 있었고 콜트가 어떤 사건을 겪고 느닷없이 잠수를 탄다. 이후 ‘잠수를 탔기 때문’에 쌓여있는 인물 간의 오해가 이야기에서 중요하다. 이 오해를 풀고 싶은 것이 콜트의 핵심이다. 그냥 단지 ‘직업이 스턴트맨이니까’라고 보기엔 중반부 찍고 넓어지는 이야기를 감당하지 못하니 영화가 안전장치를 둔 것이다. 심지어 중후반부를 보면 영화의 로맨스적인 특성을 대놓고 드러내기도 하는데 허무맹랑하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넓어지는 플롯을 로맨스라는 장르적인 특성으로 연결했다. 쉽게 말해서 '그래!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고 있으니까!'로 줄거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이야기 상에서 액션이 등장하는 이유도 필연적이다. 직업이 스턴트맨이니까 액션을 보여주는 과정이 당연하다? 물론 제목과 직업에 대한 부분도 크게 작동하지만 중구난방으로 튈법한 영화 속 사건을 잇는 장치가 액션이 된다는 점에서 꼭 필요하다. 이 <스턴트맨>은 영화를 만드는 영화다. 이런 플롯을 설정한 이유?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과정을 보여주면 당연히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겠지? 이 과정에서 스태프들의 노고도 나오고 영화감독과 제작자 사이의 관계도 재미있게 그려진다. 하지만 그중에 더 중요한 것. 이 영화의 제목은 ‘스턴트맨’이다. 스턴트맨은 일종의 대역으로서 액션 연기를 대신하는 존재다. 그러면 영화 안에서 연기를 해야 한다. 하지만 영화 안에서 연기를 하든 뭘 하든 이 직업군들에겐 중요한 제약이 있다. 이 배우들의 목숨은 하나고 역시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는 점이다. 이 점을 보여주려면 ‘목숨이 하나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좋겠지? 그러려면 액션이 들어가는 것이 필연적이다. 연기로 몇 겹을 쳐도 목숨이 하나인 걸 두각한 연출을 보여줬다. 단순히 눈요깃거리로 장르를 소비한 것이 아닌 셈이다.
이 영화의 장르적인 내실을 까보면 온갖 것이 섞여있는 영화 전주비빔밥이라고 볼 수 있다. 글쓴이가 각본을 잘 썼다고 느끼는 지점 중 하나인데 이 영화의 핵심을 드러낼 수 있는 좋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영화는 할리우드의 역사를 영리하게 훑으며 긴 시간 동안 있어왔던 ‘스턴트맨’의 존재를 비추고 있다. 이것은 영화의 핵심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꼭 필요하다. 왜? 할리우드가 어떤 장르를 만들든 간에 스턴트맨의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니까. 이 부분을 강조하듯이 호러, sf, 코미디, 미스터리, 애니메이션, 판타지 등등 여러 장르 가리지 않고 다양한 장르를 포용한다. 그리고 스턴트맨 콜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결하니 안 본 분들 입장에서도 이해하는데 무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장에는 거친 부분이 있다. 긴 시간 동안 존재해 온 어떤 집단의 사람들을 2시간으로 압축시킨다? 당연히 매끄럽지 못하다. 이 부분은 영화의 호불호가 될 수 있다. 가령 주인공의 중요한 과제 톰 라이더를 찾는 부분에서 좀 불필요하다고 생각할만한 장면이 있었다. 그리고 어떤 소재는 영화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모든 것을 해결하는 데 사용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어떻게’에 대해 생각해 보시라고 하고 싶다. 사실 이 영화는 그 이질감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콜트가 직접 겪는 개고생이 영화의 역사가 앞으로 계속 진보되어도 잊히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참기름도 있다구
이 영화는 또 오마주로 가득 찬 영화이기도 하다. 왜 오마주가 필요했을까?를 써보자면, (위에도 쓴 내용이지만) 현재를 넘어 과거의 스턴트맨에 바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의도야 충분히 좋다. 하지만 스턴트맨’만’ 중요하다고 하면 그게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입장으로서 적절하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영화를 만드는 것에 있어 우선순위가 부여된다면 영화감독이 직업인의 윤리에 있어 어긋나는 행동일 수도 있다. <스턴트맨>은 예전 영화들을 끊임없이 호명함으로써 연출가로서의 윤리를 살렸다. 스턴트맨의 헌신도 물론이지만 그만큼 노력했던 선배님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스턴트맨 출신이었다가 영화감독이 된 감독의 당사자성을 살려 이야기를 만든다면 "왜 내가 스턴트맨에서 영화감독이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도 충분히 들어갈 만했는데, 이 영화의 감독이 좋아할 만한 장면을 오마주 했으니 만드는 사람의 진정성이 오롯이 드러나는 좋은 선택이었다.
이런 특징을 살려 영화에는 한 페이지로 적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오마주들이 들어가 있다. 어느 단계에서 어느 장면이 오마주다!라고 쓰면 영화의 재미가 급감하기 때문에 대략적으로만 서술해 본다. 영화 첫 번째 장면이 콜트가 스턴트맨 일을 하다가 사고를 겪는 장면이다. 이 장면 보면 <미션 임파서블> 1편이 연상된다. 그리고 영화 안 극중극은 콜트 역의 배우 라이언 고슬링이 맡았던 영화 중 어느 작품을 연상되게 한다. 시각적인 부분도 이 장르의 역사에서 이것저것 가져온 듯한 걸로 이루어져 있다. 또 조디라는 인물 역시 할리우드의 누군가가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이 부분은 연출로 중요하게 강조시키는데 오마주한 인물이 할리우드에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 보면 확실히 영화가 할리우드의 현재를 보여주려고 했던 의도가 보인다.
<거미집>과의 공통점, 차이점
이 영화와 함께 보면 좋은 작품은 작년에 개봉한 <거미집>이다. <거미집>의 서양판이 이 <스턴트맨> 같을 정도로 공통점이 있다. 우선 주인공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김열/조디)이라 그 내용이 전적으로 들어갔다는 점, 시대적인 맥락(1970년대/2024년 현대의 할리우드)이 들어간다는 점이 그렇다.
이 공통점의 내밀한 부분으로 들어가면, <거미집>의 김열(송강호)과 <스턴트맨>의 조디가 만드는 창작의 의미가 각각의 영화 안에서 표현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 흥미롭다. 가령 <거미집>에서 김열이 방구석에서 보여주는 모든 장면은 이상의 ‘날개’가 연상될 정도로 개개인의 욕망을 더 깊숙하게 투영하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 안의 이야기를 만드는 건 김열이 촬영장의 리더로서 겪는 온갖 개고생이 핵심이다. 웃음도 여기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이끄는 인물은 전미도(전여빈)이다. 전미도는 김열의 창작을 지원하는 인물로 나오는데, 미도가 풍기는 광인의 포스는 이야기가 미진하다고 느낄 즈음에 등장해서 영화를 이끈다. 반대로 <스턴트맨>의 조디가 만드는 영화는 후반부의 장면이 인물들의 상황과 겹치는 되는 지점이 있다. 심지어 기존 영화들의 오마주를 그대로 활용해서 인물의 내면과 감정적인 하이라이트가 겹쳐지게 하는 장면까지 있다(심지어 제목으로도 나온다). 이 장면은 영화 안의 로맨스를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가? 와도 닿아있다. 어느 장면을 넘어서 영화와 현실이 무너지는 분기점이 있는데 이 부분은 감독이 의도한 바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에게 영화는 현실의 업 그 자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둘째로 시대적인 맥락이 들어갔다는 점에서 두 영화의 공통점을 읽을 수 있다. 전자 <거미집>에선 1970년대의 맥락이 등장한다. 당시 김열이 직면한 여러 애로사항 중 하나는 당시 행정부가 예술가들에게 제약을 둔다는 것이다. 이 장애물은 스트레스 한가득이었던 김열의 창작물에 장애물이 되며 인물의 고통을 배가시킨다. 하지만 이 모든 고통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거미집>을 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기억할 카메오가 나오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구성하는 방식을 보면 그 모든 속박보다 창작자에게 깊고 크게 다가오는 장애물이 과연 무엇일까? 생각하게 만든다. 왜? 이 장면이 일어나는 전후맥락에는 문공부라는 시대적인 맥락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 장면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 카메오가 김열에게 창작의 본질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장면이다. 시대적인 맥락이 없다면 이 장면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장면을 어떻게 구성하느냐? 에 대한 문제를 시대적인 맥락도 가져와 보충한 것이다. 하지만 <스턴트맨>은 이것과는 살짝 다르다. 이 영화에는 2020년대 할리우드에 있던 사건 중 가장 인상 깊은 스캔들이 등장한다. 또 특정 소재는 2024년의 현대사회를 암시하는 듯하다. 이 두 요소가 왜 굳이 등장했을까? 바로 2024년 현대를 살아가는 관객들 너희들 봐라!라는 의미다. 영화 외적인 요소를 굳이 안으로 가져와서 이야기의 구분선을 흐린 것이다. 이런 연출은 관객으로 하여금 타겟을 명확히 한다는 점에서 리얼리티를 높인다. 사실 이렇게 영화가 외적인 맥락과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을 병치시켜서 우리에게 와닿게 설정했다는 것 자체는 흔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 왜 스턴트맨일까? 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영화에 나오는 영화배우의 노고에만 감탄하며 액션영화를 보곤 하지만 이들 아래에 수많은 스턴트맨이 있었다. 스턴트맨에서 스턴트 하다 다치면 영화 내적인 사건이 외적으로 향한다고도 볼 수 있다.
얼버무리고 넘어가
이 영화의 단점은 너무 많은 걸 보여주려고 했다는 점이다. 스턴트맨에 대한 헌사도 보여줘야 하고. 성공한 덕후가 된 감독의 덕질 역사도 보여줘야 하고. 주인공과 관련한 메인 플롯도 보여줘야 하고. 조디가 영화 만드는 이야기도 보여줘야 하고. 현재의 할리우드도 묘사해야 한다. 적어도 이 모든 게 하나의 이야기가 되게 하려면 희생돼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어떤 조건 몇 개는 생략해야 한다는 점이다. 글쓴이는 초반 조디와 콜트가 재회하는 장면에서 이 부분을 느꼈다. 단지 그럴 수도 있다고 느끼면 크게 무리는 없다. 하지만 이 장면을 더 길게 늘여도 이야기 흐름에는 큰 문제없지 않았을까? 투박한 이야기 이음새가 인물의 동기를 더 공고히 해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쉽게 느껴졌다.
또 어떤 두 캐릭터는 이 영화의 기획의도에 의해 희생됐다고 생각한다. 아예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캐릭터들은 아니다. 이 영화가 제시하는 배경은 나름 합리적이고 꼼꼼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그것만 있다면 가능할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기 충분하다. 하지만 이 인물이 엄청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냥 영화의 핵심만을 전달해 주는 분량만 있었다. 이 부분은 <스턴트맨>의 뒷맛을 생각하게 하는 지점이다. 그 장면에서 그게 꼭 들어가야 했을까? 사실 그게 굳이 아니더라도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다 전달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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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에야 제자리를 찾은 DCEU의 사모곡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저스티스 리그 막내로 궂은일을 도맡은 히어로 '플래시/배리 앨런'(에즈라 밀러). 플래시가 아닌 배리로 살아갈 때 그의 삶은 고달프다. 어머니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 중인 아버지의 알리바이 증거를 찾아야 하기 때문. 하지만 배리는 '브루스 웨인/배트맨'(벤 애플랙)의 도움을 받고도 쉽사리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에게 시간 여행 능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그는 불행한 가족사를 바로잡기 위해 시간을 역행한다. 그러나 의도치 않게 멀티버스에 불시착한 배리는 '조드'(마이클 섀넌)의 침공 때문에 위기에 처한 지구를 마주하고 충격에 빠진다. 이에 배리는 멀티버스의 배리, 나이 들고 은퇴한 ‘배트맨’(마이클 키튼), 크립톤에서 온 '슈퍼걸'(사샤 카예)과 팀을 이뤄 시간과 공간이 붕괴될 위기에 처한 우주를 구하려 한다.
뻔한 재료로 색다른 맛을 내다
또 하나의 멀티버스, 시간여행 영화가 도착했다. 2013년 <맨 오브 스틸>로 시작을 알린 DCEU(DC Extenede Universe, DC 확장 유니버스)의 14번째이자 마지막 영화 <플래시>다. <플래시>는 DCEU를 마무리하고 제임스 건 주도로 리부트된 DCU(DC Universe, DC 유니버스)의 시작을 알리는 중간 다리다.
근래 들어 멀티버스나 시간여행 영화는 슬슬 지겹다. 단순히 작품 수가 많기 때문은 아니다. 주제나 교훈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일생일대의 회한이 남는 순간을 되돌려 조금 더 나은 삶을 만들려 한다. 그 과정에서 멀티버스의 '나'를 만나고 깨달음을 얻는다. 후회하고 가슴 아픈 매 순간이 모여 비로소 현재의 '나'를 만들었다고. 따라서 과거를 바꾸는 대신 최선을 다해 현재를 살아가야 한다고.
마블의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픽사의 <버즈 라이트이어>, 심지어 크리스토퍼 놀란의 <테넷>까지. 위의 운명론적인 주제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플래시>도 마찬가지다. 과거를 되돌릴 수도 없고 되돌려서도 안된다고 말한다.
흥미롭게도 <플래시>는 익숙하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다. 어디서 본 듯한 이야기를 기가 막히게 포장했기 때문이다. 감정적인 연출은 플래시라는 캐릭터의 매력을 극대화한다. 수많은 카메오는 DCEU, 더 나아가서 DC라는 거대한 세계관의 매력을 스크린에 가득 채웠다. 덕분에 러닝타임 144분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설령 개봉 전 평가만큼 압도적이지는 않을지라도, 히어로 영화로서 최고의 재미를 선사한다.
멀티버스로 써 내려간 사모곡
<플래시>는 가족 영화다. 배리의 활약상을 한바탕 보여준 후, 영화는 곧장 그의 비극적인 가족사를 조명한다. 배리는 어릴 때 엄마를 잃었다. 아빠가 스파게티에 쓸 토마토 캔을 사러 나간 사이 엄마가 살해당했다. 이후 아빠는 아내를 죽인 혐의로 수감됐고, 배리는 그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범죄수사 연구소에 취업하기도 했고, 브루스 웨인의 도움을 받아 아빠의 알리바이가 담긴 CCTV 영상도 복원했다.
그러다 보니 배리의 시간 여행은 구슬픈 사모곡이다. 엄마를 살려내서 세 가족이 함께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은 회한으로 가득하다. 그가 마냥 철없는 멀티버스의 배리에게 화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간절한 일분일초라는 걸 알 수 있다. 과거로 돌아가 만난 엄마에게 안아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에는 십수 년의 그리움이 담겨 있다.
특히 상상을 실현할 능력이 있지만, 그럴 수 없기에 더 가슴 아프다. 과거로 돌아가 엄마를 살려냈지만, 자기 때문에 엉망이 된 멀티버스를 마주한 배리. 그는 과거의 필연적인 지점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달라진 과거 때문에 스파게티처럼 엉켜버린 멀티버스를 정리할 방법은 없으니까. "모든 문제에 답이 있지는 않다"던 엄마의 말처럼. 그의 사모곡은 엄마가 죽어야만 하는 역설인 셈이다.
에즈라 밀러를 포기 못한 이유
하지만 배리는 이 역설을 곧바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멀티버스에서 두 인물을 만난 후에야 가슴 아픈 현실을 인정한다. 우선 그는 능력을 얻기 직전인 18살 배리를 만난다. 두 배리는 함께 다니면서 여러 일을 겪는다. 배리는 플래시의 능력을 잃고, 멀티버스의 배리는 플래시로 각성한다. 히어로 경험은 있지만 능력은 없는 플래시와 능력은 있지만 지식은 전무한 플래시는 그렇게 일종의 버디 무비를 찍는다.
그 과정에서 배리는 한층 성숙해진다. 멀티버스 속 배리는 거울과도 같다. 거울 속 '나'는 거울 앞에 서 있는 나와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결코 같지는 않다. 좌우가 바뀌어 있고, 거울 표면에 의해 형태가 왜곡될 수도 있다. 이처럼 거울에 비친 남 같은 내 모습을 보다 보면 나도 모르던 새로운 '나'를 발견할 수 있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다른 우주의 닥터 스트레인지를 만나고 달라진 것처럼.
배리도 마찬가지다. 멀티버스에서 지구의 멸망을 지켜본 배리는 과거를 바꾸는 일이 무의미하다고 깨닫는다. 반면에 멀티버스의 배리는 같은 상황에서도 시간을 되돌려 과거를 고치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그런 모습을 배리는 개인적인 욕심을 버리지 못했고, 미련 때문에 과거를 놓아주지 못한 자기 모습을 반성한다.
에즈라 밀러의 1인 2역 덕분에 배리의 성장기는 더 설득력 있다. 상대적으로 진중한 배리와 마냥 까불거리는 멀티버스의 배리. 정신적 성장을 이룬 플래시와 아직 미숙한 멀티버스의 플래시. 이 차이를 표정과 눈빛으로 완벽하게 표현한다. 후반부에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루밍 범죄 혐의를 비롯해 폭행, 협박 등 여러 혐의를 받아 논란이 되었는데도 워너와 DC가 에즈라 밀러를 포기하지 못한 사정이 이해될 정도다.
플래시와 함께 성장한 DC
배리는 멀티버스에서 또 다른 인물을 만난다. 마이클 키튼의 배트맨이다. 그는 배리의 아픔을 이해한다. 흡사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도 어린 시절 엄마를 잃었다. 죽은 엄마가 되돌아오기라도 할 것처럼 범죄자를 때려잡았다. 그래서 그는 실제로 엄마를 살려내려는 배리의 용기와 결단력에 감탄하고, 그에게 인간적으로 공감한다.
그러면서도 배트맨은 배리에게 충고한다. 조드와의 전투 중 부상당해 죽어갈 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는 바꿀 수 없는 사건이 있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다고. 트라우마와 평생 싸웠던 배트맨이기만이 할 수 있는 조언이다. 이처럼 <플래시>는 키튼의 배트맨을 활용해 배리의 성장기를 색다르게 포장하는 데 성공한다.
흥미롭게도 배트맨의 조언은 DCEU, 더 나아가 DC 스스로의 다짐처럼 들리기도 한다. DC는 본래 히어로 영화의 명가였다. 1978년 크리스토퍼 리브의 <슈퍼맨>과 1989년 마이클 키튼의 <배트맨>은 히어로 영화의 첫 번째 전성기를 열었다. 물론 그만큼 실패도 많았다. 슈퍼맨과 배트맨 시리즈는 배우 교체와 리부트를 거듭했다. DCEU도 <저스티스 리그>가 실패한 후 표류했다. 결국 반등하지 못하고 10년 만에 문을 닫았다.
<플래시>는 이 모든 성공과 실패, 숱하게 취소된 계획과 기획까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대신 수십 년 간 난잡했던 DC의 역사를 화려한 팬서비스로 승화한다. 실제로 니콜라스 케이지의 슈퍼맨처럼 취소됐던 시리즈나 흑역사로 기억되던 조지 클루니의 배트맨이 모습을 비춘다. 플래시의 기원을 보여주듯이 DCEU의 첫 작품으로 되돌아가서 시리즈를 마무리한다. 이처럼 <플래시>는 DCEU는 물론 DC의 모든 유니버스를 아우르며 DCU의 시작을 준비한다.
훌륭하지만 압도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플래시>는 개봉 전 평가만큼 압도적인 영화로 보이지는 않는다. DC 작품 중에서는 <다크 나이트>에 버금간다거나, 시간 여행이나 멀티버스를 다룬 히어로 영화 중에는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만큼 뛰어나다는 의견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유는 영화 후반부에 있다. 성급하게 결말로 나아가는 전개가 발목을 붙잡는다.
일단 배리의 서사에 일관성이 없다. 배리는 다크 플래시를 만났고, 조드 장군 때문에 지구가 멸망할 위기도 한 번 더 겪었으며, 멀티버스 배트맨의 조언도 들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배리는 어머니를 살리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등 한층 성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배리의 마지막 모습은 다르다. 그는 아버지를 구하려고 과거를 다시 한번 건드렸다. 과거는 과거로 둬야 한다는 규칙을 무시했다. 그 결과 또 다른 멀티버스가 생겼고, 배트맨도 바뀌어 버렸다. DCU가 이 결말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영화 내적으로만 보면 캐릭터의 서사가 무너진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플래시>의 해피 엔딩은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새드 엔딩과 대비를 이룬다.
메인 빌런인 다크 플래시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다크 플래시의 정체가 드러나고, 그와 플래시의 갈등이 해결되는 과정은 지나치게 간략하다. 다크 플래시는 한순간의 실수로 퇴장한다. 이렇다 할 액션씬이나 설득, 대화 장면도 없다. 굳이 영화 초반부터 복선을 던지고, 마지막 순간까지 정체를 숨기면서 아껴둘 필요가 있었나 싶을 정도다.
이는 영화가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를 감당하지 못한 결과로 보인다. 러닝타임이 결코 짧지 않은데도 영화 템포는 점점 빨라진다. 배트맨, 슈퍼걸, 두 플래시로 시점이 나뉘면서 짜임새가 느슨해진다. 멀티버스를 통해 새로운 캐릭터와 예전 캐릭터를 모두 한 데 모으는 과정에서 그 무게를 끝내 이겨내지 못한 셈이다.
실제로 다른 몇몇 캐릭터도 다크 플래시와 마찬가지로 도구적으로 활용된다. 일례로 조드나 슈퍼걸은 배우의 연기력이나 캐릭터의 임팩트와는 별개로 기계적인 역할만 수행하고 퇴장한다. 그들은 필연적인 시점이 있으며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다는 규칙을 보여주는 각본의 도구로 소모된다.
깔끔한 마무리와 기대되는 시작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래시>는 여전히 잘 만든 히어로 영화다. 특히 히어로 영화로서 본분을 다해낸다. 언제나 DCEU의 장점이었던 액션이 어색한 CG도 뚫고 관객의 눈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플래시의 속도와 능력은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된다. <엑스맨> 시리즈가 퀵실버를 활용한 듯한 슬로모션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플래시의 빠른 속도를 활용한 액션을 중간에 삽입해 단조롭지 않도록 리듬을 살렸다.
배트맨도 인상적이다. 마이클 키튼의 배트맨은 활강 장면에서 진가를 보여준다. 화려한 몸놀림을 보여주는 육탄전도 늙은 영웅의 복귀를 화려하게 장식한다. 벤 애플랙의 배트맨도 DCEU에서 처음 등장한 배트포드를 타고 강렬한 추격전을 선보인다. 이에 더해 속도감과 파괴력이 돋보이는 슈퍼걸의 액션도 인상적이다. <맨 오브 스틸> 속 슈퍼맨을 다시 보는 듯한 재미를 준다.
<플래시>는 기대 이상의 방식으로 DCEU를 마무리했다. 복잡했던 DC의 역사를 모두 아우르면서 새로운 미래를 위한 토양을 마련했다. 시리즈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도 사로잡을 수 있는 볼거리도 아낌없이 펼쳐냈다. 비록 결말은 일말의 아쉬움을 남겼지만, <그것> 시리즈를 연출한 안드레스 무시에티는 최선을 다했다. 이제 공은 제임스 건에게 넘어갔다. 과연 그가 만들 DCU는 어떨지.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Acceptable 무난함
시작으로 되돌아가 가슴 벅차게 마무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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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렌시아가와 H&M, 두 세계를 오가는 롤러코스터
2017년, 〈더 스퀘어〉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에게 또 한 번의 황금종려상을 선사한 〈슬픔의 삼각형〉은 한 모델 오디션장에서 시작된다. 상의를 탈의한 채 오디션을 기다리고 있는 남성 모델 무리 사이로 한 방송 진행자가 들어선다. 그는 재치 있는 입담으로 몇몇 모델을 인터뷰한 후, 개중 몇몇을 벽 앞에 세운 뒤 짓궂은 제안을 건넨다. ‘발렌시아가’ 포즈와 ‘H&M’ 포즈를 취해보라는 것. 둘 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류 브랜드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전자는 명품이고, 후자는 저가의 패스트 패션이다. 방송 진행자가 말을 잇는다. 발렌시아가 모델은 다소 거만한 표정으로 거들먹거리며 네가 우리 제품을 사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이 굴어야 하고, H&M 모델은 백인, 흑인, 아시아인이 나란히 서서 밝은 얼굴로 ‘우린 행복해! 우리는 평등해!’라고 외치며 환하게 웃어야 한다는 것. 설명을 마친 진행자가 발렌시아가와 H&M을 번갈아 외치면, 앞에 선 모델들은 그에 따라 오만한 표정과 밝은 표정을 교차로 짓는다. 진행자는 두 브랜드의 이름을 점차 빠르게 바꿔 부르고, 모델들 역시 그에 맞춰 재빨리 포즈와 표정을 바꾼다.
모델들의 몸짓과 표정으로 재현되는 두 브랜드의 교차는 〈슬픔의 삼각형〉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 이 영화는 롤러코스터처럼 두 세계를 오가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힘껏 풍자한다. 오디션에 참가한 모델 칼과 그의 인플루언서 애인 야야는 야야에게 협찬된 티켓으로 호화 크루즈에 탑승한다. 승객은 대부분 큰 부자들이고 승무원들의 서비스는 완벽하다. 돈을 낸 사람과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사람 사이에는 분명한 위계가 있고, 탑승객과 승무원은 모두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탑승객은 발렌시아가의 세계에 살고, 승무원은 H&M의 세계에 산다.
그런데 한 탑승객이 ‘우리는 평등하다’고 주장한다.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승무원이 기뻐했으면 좋겠다며 모든 승무원이 거대한 미끄럼틀 튜브를 타고 놀며 즐기는 모습을 보여 달라는 것. 그리하여 모두가 함께 기쁨을 느껴 ‘평등’해지자는 것. 그러나 H&M의 세계에 사는 우리는 승객의 요구가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안다. 두 집단이 발 디디고 있는 세계를 그대로 둔 채 같은 행위를 하고 감정을 느끼는 것 만으로 평등해지자고 외치는 건 어불성설이다. 요컨대, 발렌시아가가 H&M 홍보 문구를 읊는 우스운 꼴이다. 발렌시아가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황당한 요구는 계속 이어진다. 웃통 벗은 승무원이 불편하다는 탑승객의 말에 해당 승무원이 단번에 배를 떠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바다 한 가운데를 항해하는 크루즈의 돛이 더러워 경관을 해친다며 청소를 요구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H&M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이들의 요구를 모두 충실히 수행한다. 두 세계가 기울어져 있고, H&M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발렌시아가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변곡점이 찾아온다. 선상 파티를 하던 중 폭풍이 찾아와 크루즈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크루즈의 흔들림은 곧 탑승객과 승무원이 자리한 세계의 흔들림을 의미한다. 탑승객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우아하게 고급스러운 요리를 고상하게 먹으려 하지만 욕지기는 점점 더 강해진다. 그리고 도저히 ‘눈 뜨고는 못 볼’ 구토 장면이 연달아 이어진다. 비싸고 화려한 옷을 입은 탑승객들이 자신들이 먹은 일품요리를 끝도 없이 토해내는 장면과 그 옆에서 승무원들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탑승객을 배려하며 서빙과 청소를 이어가는 장면은 무엇을 시사할까? 이 장면은 세계가 ‘뒤집히면’ 누가 혼란을 느끼는지에 대한 대답이다. 구역질 날 정도로 적나라한 구토(심지어 설사)는 발렌시아가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몸속에 무엇이 쌓여 있는지를 폭로한다. 수류탄을 만들어 전 세계에 판매하는 무기회사를 운영하는 한 노부부가 UN 규제 때문에 힘들었다며 불평하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 화려하고 비싼 명품으로 치장된 탑승객들의 외면이 실은 몸속에 쌓인 토사물과 설사(즉 추악한 자본 축적)를 감추기 위한 속임수였다고 고발하는 것이다.
폭풍이 지나간 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해적이 배를 습격하는 사건마저 발생해 일부 탑승객과 승무원이 ‘무인도’에 표류된다. 이제 기존 권력관계는 별 의미가 ‘없다’. 무인도에서는 돈보다 생존 능력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에 맞춰 새로운 위계가 구축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발렌시아가’와 ‘H&M’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조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물건은 이들과 함께 떠내려온 프레츨 스틱과 물, 즉 식량이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죽은 부인에게서 다이아몬드를 뺀 후 몰래 주머니에 넣는다. 무인도에서 건설될 세상은 결코 완전히 새로울 수 없다. 새 세상은 결코 기존 세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도 없다. 영화 전반부에서 신랄하고 날카롭게 활개 치던 계급 사회 풍자가 다소 길을 잃는 듯 맥이 빠지는 건 이 때문이다. 배가 난파당하기 직전, 미국의 공산주의자와 러시아의 자본주의자가 만취해 우리 세계를 두고 토론하던 장면이 보여주듯,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발디딘 곳에 제한된 상상력만을 가질 수 있다. 그 어떤 새 출발도 ‘백지’에서 시작할 수는 없다. 우리의 현실은 우리의 상상력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무인도에서 젠더 위계가 뒤집히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영화의 전반부, 평범한 모델인 칼과 인플루언서 모델인 야야가 데이트 비용을 두고 갈등하는 장면이 있다. 우리 시대는 전통적 남성 부양자 모델이 더는 작동하지 않는 사회다. 그러나 기존 젠더 관념은 현실이 달라졌는데도 우리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칼은 데이트 비용을 하나하나 계산하느라 초조하고, 데이트 비용에 무관심한 야야에게 화가 난다. 반면 야야는 여자라는 이유(임신, 출산 등)로 언제든 자기 경력이 끝장날 수 있는 불확실성 속에서도 자신이 안전하게 기댈 수 있는 남자를 찾는다. 둘의 현실과 현실 인식이 내내 충돌하는 것이다. 젠더 권력의 복잡성은 크루즈에서도 이어진다. 진상 승객과 만취한 선장을 대신해 크루즈를 완벽한 상태로 유지하는 여성 매니저 폴라, 크루즈에서 화장실 청소를 담당했으나 무인도에서는 뒤집힌 세계의 꼭대기에 자리하는 아시아계 여성 애비게일은 세상을 굴러가게 하고 우리를 생존하게 하는 재생산 노동이 ‘여성의 일’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세상이 뒤집혀도 재생산 노동은 여성이 담당하는 현실을 비꼬듯 풍자해 영리하게 활용하기도 한다.
계급과 젠더의 얽힘, 그리고 뒤집힌 세계에서도 완전히 새롭게 출발할 수는 없는 사람들. 영화 제목인 ‘슬픔의 삼각형(Triangle of Sadness)’은 미간의 주름 모양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우리가 슬픔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느껴 얼굴을 찡그릴 때 생기는 주름의 이름인 것이다. 영화는 이 주름을 야기하는 감정이 ‘자연 발생적’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여러 위계가 교차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시시때때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며 미간을 찡그리곤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억눌린 역능을 되찾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 다음의 대사가 말하듯, 〈슬픔의 삼각형〉은 세상이 뒤집혀야 된다고 말한다. “여기선 내가 캡틴입니다. 자, 내가 누구라고요?”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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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추천작] 기억, 기록, 기억
우리 모두가 너무 다른 것 같아도,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인류는 비슷한 보폭을 맞추어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 과테말라에 대해 아는 건 마림바와 향기로운 커피밖에 없던 내가, 과테말라의 젊은 감독이 만든 <스파이의 침묵>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볼 때처럼. 이 영화는 <액트 오브 킬링>을 처음 보았을 때 못지않은 충격으로 내게 강렬하게 남았다.
영화는 한 노인이 법정에 들어서면서 시작한다. 비쩍 말랐고 거동이 불편하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형형하다. 노인은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 감독에게 촬영을 부탁해 둔 자리에서, 반인륜 범죄에 대해 내부에서 목격한 유일한 증인으로서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한다. 이게 생의 마지막 증언이 될 것을 알았기에 촬영을 부탁했던 것일까? 증언 2주 후 그는 세상을 떠난다.
그는 젊어서 기자였다가, 내부무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특이사항이 있다면 그가 일하는 정부는 국민을 학살하는 정부였다는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정부라 부를 수 있는가? 불행히도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소위 "과테말라 내전"이라 부르는 1970년부터의 36년. 내전이라는 말이 적절한지 잘 모르겠다. 말의 온도를 지나치게 낮춰 놓은 것이 아닌지.
대부분의 문제가 그렇듯 뿌리에는 돈이 있다. 미국 유수의 기업을 비롯한 외국계 기업들이 토지를 대부분 소유한 상황에서, 좌파와 빈민, 토착민들의 사회적 불만이 쌓여 반군으로 조직되었다. 군사독재자를 필두로 한 과테말라 정부는 공식 군대 외에 특수군을 창설했다. 이들의 역할은 "반사회적" 인물 제거. 수많은 사람들이 납치와 살해를 당했다. 토착민들이 사는 산간지역이 토벌되고, 바른말을 하던 언론인들도 실종되었다. 이 모든 과정은 정확하게 살해와 도륙의 의도를 갖고 진행되었다.
이 영화의 중심인물이자, 법정에서 증언한 사람, 당시 내무부에서 일하던 사람, 엘리아스는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는 말하자면 스파이였다. 군부독재 정부의 학살에 반대하는 사람임을 숨기고 들어가서, 필요한 정보를 취해 전달했다. 곧 살해당할 사람을 미리 파악하고 피신시키는 일도 있었다. 정보를 얻고 전달하는 과정은 철저하게 익명성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이루어져야 했다. 사람의 생명을 우습게 여기고 짓밟으며 즐거워하는 이들의 농담을 웃어넘겨야 하는 자리에서, 그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다. 스스로를 "두더지 견습생"이라 부르면서.
때로는 잘했다 싶은 일이 있어도 거울 속 자신 외에는 함께 기뻐할 사람이 없고, 자신이 느끼는 압박감이나 괴로움을 토로할 상대도 많지 않았다. 아무도 믿지 않는 것. 모든 것을 철저하게 의심하는 것. 단지 침묵하는 것. 군부독재 사회에서 사는 사람, 특히 스파이로 사는 사람에겐 제1의 생존 원칙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아나이스 타라세나 감독 본인도 아버지가 독재 정권을 피해 망명 생활을 했다고 한다. 법정 증언을 촬영할 때까지도 이를 영화로 만들 생각이 없었다지만, 관련 자료를 좇는 과정에서 점차 이 촬영은 영화로 발전해 간다. 1915년이나 1920년 영상도 남아있는 기록보관소에 1970년대 영상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은 언제나 증거를 파기하고 역사의 망각을 기다린다.
아나이스 타라세나 감독은 기록의 부재에 절망하는 대신, 그 부재마저 기록의 소재로 되살려냈다. 용기와 성실함으로 촘촘하게 채운 결과물이 이 영화다. 당시 엘리아스와 함께 했던 동료들의, 그때 살해당한 언론인의 자식의, 기록자료원 직원의 인터뷰를 차곡차곡 담는다. 끌려가는 사람들이, 항쟁을 외치는 사람들이, 생존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거기 남아 있다.
목숨을 걸고 남기는 작은 마크들. 사력을 다해 남기고 또 없애야 했던 정보의 조각들. 당시 엘리아스가 전달했던 정보도 그랬지만, 지금 카메라 앞에 인터뷰하는 사람들 또한 있는 힘껏 증언하고 있다. 가끔 갱단이 한 짓으로 보도되지만 실상은 그들의 소행이 아닌, "기억하고 지켜보는" 자들의 소행이 여전히 있다고 말을 아낀다. 여전히 익명으로 처리해야 안전한 이름들이 있는 것이다. 감독의 내레이션 또한 "여전히 죽음이 거리를 떠돌고 있다"라고 한다. 과테말라의 현대사에 무지한 사람이 들어도 위협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학살자가 여전히 살아있고, 21세기에도 목격되었으며, 도망자로 남아있다는 사실은 나에게까지 생생한 현실적 공포로 와닿았다. 살아있다는 건, 내가 영화를 보는 지금 이 순간 여기에 나타나는 것까지도 가능한 존재라는 뜻이니까. 이 공포는 아마도 과테말라와 무관한 내 것이라기보다는, 이 영화를 만들고 전하는 사람들이 느낀 공포가 전이된 것은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과테말라 사람들은 여전히 그 시절에 대해 말하기를 꺼린다. "내전"이라는, 한껏 톤을 낮춘, '학살'이라는 거친 단어를 감춘, 용어 선택 또한 그런 공포에 기인한 것일 테다. 당시 엘리아스의 기록에는 물론, 지금이 되어 과거를 회상하는 이들에게도 두려움이 생생하다. 그러나 두려움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싸웠다. 그렇게 공포 속에서도 침묵을 깨야 한다고, 엘리아스의 삶이, 또 나아가 이 영화가 말한다. 살아남아 증언하는 사람들이, 본인에게도 괴로운 기억을 필름으로 되감는 사람이, 기록하는 힘이 말한다.
도시 외곽에는 여전히 그 시절 총탄 흔적이 그대로 남은 차들이 쌓인 채로 녹슬어 썩어 가고 있다. 그 시절 사람들이 납치당하고, 고문당하고, 총에 맞고, 끌려갔던 곳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역사 속 녹슨 금속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우리 안에 파상풍 같은 아픔을 계속해서 남기고 있다. 기록이 하는 일은 아프더라도 그 자리를 되짚는 일이다. 우리가 여기 있었노라고. 여기 있다고. 도시에 고요하게 가려진 전쟁이, 침묵을 강요당하고 살해당한 사람들이 잊히지 않도록.
신념을 가지고 죽은 이를 기억한다. 신념을, 살리는 힘을, 서로를. 그 신념이 누군가에겐 기적이 되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떤 나라를 사랑한다는 건, 그 나라의 명암을 모두 받아들인다는 것. 밝은 면뿐 아니라 어두운 시기가 끝내 아주 어둡게 끝나지 않도록 하는 어떤 힘을 사랑한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는 내내 과테말라 현대사와 엘리아스라는 인물의 일대기에 경악하는 한편으로, 기억과 기록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이따금 "선명한 기억보다 흐릿한 연필 자국이 낫다" 같은 식의 말을 듣는다. 그럴 때 보면 기록은 기억의 반대편에 있는, 그래서 기억의 단점을 보완하는 도구인 듯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역사의 거시적 관점에서 본다면 기억과 기록은 그렇게 다르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형태를 달리 하면서 몸피를 비트는, 거대하고 동일한 하나의 흐름인지도 모르겠다. 기억은 기록되고, 또 기록이 기억되는 것이다. 이 거대한 흐름이 몸피를 비틀 때마다 역사의 비늘은 다른 빛으로 빛난다. 살육에 대한 공포로 기억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침묵 뒤에, 살리기 위해 필사적인 사람들의 침묵이 있었음을. 나아가 그 침묵을 스스로 깸으로써 무겁게 사회를 내리누르던 침묵을 아예 걷어버린 것이다. 이 영화는 엘리아스의 증언의 연장선인 동시에, 언젠가 새로운 기억이 될 새로운 기록이다. 침묵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한 겹 더 아로새기는 작업이다.
학살은 늘 피해자 혹은 가해자를 주목하게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기억까지 눌러 담아, 기록은 더욱 풍성해지고 망각과 두려움에 맞서는 힘은 그만큼 강해진다.
상영 후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 영화는 아직 과테말라에서 일반 상영되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다. 시사회만 2회 진행했고, 해외 영화제 상영으로 안정성을 어느 정도 확보한 다음 6월 중에 4번의 상영이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기대와 긴장이 동시에 있다고. 그리고 다음 날, 국제경쟁 부문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며칠 사이 또 한 걸음이 추가된 이 영화의 여정을, 언젠가 이 영화의 이야기를 다시 듣게 될 날을 기대한다. 그때는 더욱 풍성해진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를.
전주국제영화제 남은 상영 일정
▶ 5월 5일 20:30 CGV전주고사 7관
▶ 자세한 정보는 여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의 초청으로, 전주국제영화제에 프레스로 참석하였습니다.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는 2022년 5월 7일까지 전주 영화의거리 일대에서 계속 진행됩니다.
일부 온라인 상영작도 있어요. 어디 계시더라도 우리 전주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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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카. 귀를 기울이면의 닮은 점?
안녕하세요! 두번째 영화 리뷰로 돌아온 파노라마 이가애 에디터입니다. 이번에는 이번년도 여름에 개봉한 루카 입니다!
픽사의 신작 루카를 보고 왔다! 전부터 루카를 기대해오던 디즈니를 애정하는 사람으로써, 이번 루카도 관람하게 되었다.
루카 영화는 주인공 루카와, 알베르토 바다괴물들이 육지로 올라와 스쿠터를 얻기 위해 경쟁하는 내용이다. 내용도 별로 어렵지 않고 안에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 영화도 아니어서 정말 웃으면서 볼 수 있었다. 루카의 엔리코 카사로사 감독이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는데 정말 영화를 보면서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우연하고 신기하게도, 루카를 보기전날 "귀를 기울이면" 이라는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우연히 보고 영화관에 가게 되었는데, 감독님이 지브리 영화 중 이 영화에서 많이 영향을 받은게 티가 나서 신기했다!
영화 "귀를 기울이면" 과 "루카" 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을 생각해 보았다.
첫 번째로, 고양이의 등장이다.
루카가 개봉하기 바로 전작인 소울에서도 고양이가 등장하는데, 소울의 고양이와 루카의 고양이의 모습이 다르다! 소울의 고양이는 픽사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면 알 수 있는 딱 픽사 느낌의 고양이이다. 하지만 루카의 고양이는 귀를 기울이면의 고양이와 정말 비슷하게 생겼다. 지브리의 2d를 3d로 옮겨놓으면 딱 이렇게 생길 것 같은 모습이다. 정말 비슷해서 되게 이스터 에그를 찾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귀를 기울이면의 고양이
루카의 고양이
두번째로, 중간중간 나오는 상상의 세계이다.
귀를 기울이면에서도 주인공인 시즈쿠도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모습이 종종 등장한다. 루카에서도 루카가 상상하는 세계들이 등장하며 꽃밭을 노니는 모습이나, 물고기 달에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꽃밭 장면은 영상미도 그렇고 영화관에서 보는데 정말 너무 좋았다.
명대사
산타 모짜렐라!
전체적으로 짧은 러닝타임에 이야기가 급하게 전개되는 느낌이 있다고 듣고 영화를 봤지만, 급전개가 엄청 느껴지진 않았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픽사가 만든 여름의 색들을 보고 싶다면 정말 추천하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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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트홈」 회당 제작비 30억(!)의 한국 넷플릭스 드라마 프리뷰ㅣ스위트홈 웹툰ㅣ결말포함 스포주의ㅣ여진구?ㅣ결말포함 영화리뷰ㅣ
? '스위트홈(2020)' 넷플릭스 드라마 보기 전 필수 시청
스위트홈 웹툰 스토리 요약(*결말과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위트홈" 시놉시스1
세상을 차단하고 방 안에 틀어박힌 10대 소년. 현수가 세상 밖으로 나온다. 인간이 괴물로 변했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아직은 사람이니까. 이웃들과 함께 싸워야 한다.- "스위트홈" 시놉시스2
끔찍한 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은 외톨이 고등학생 현수는 그린 홈이라는 낡은 아파트 단지로 이사한다.
절망에 빠진 그는 점차 그린 홈에 관한 비밀을 깨닫는다.
왜곡된 인간 욕망을 여러 가지 형태로 투영하면서 인류를 몰아내려는 괴물이 그린 홈을 둘러싸고 있으며, 자신을 포함해 그린 홈 주민들은 그 괴물들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스위트홈" 정보
공개일: 2020년 12월 18일
화수: 10부작
제작: 스튜디오 드래곤, StudioN
장르: 호러, 크리처, 생존
스트리밍 서비스: 넷플릭스
연출: 이응복
극본: 홍소리, 김형민, 박소정
출연: 송강, 이진욱, 이시영 외
원작: 네이버 웹툰 스위트홈
시청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청소년 관람불가[2]#스위트홈 #스위트홈_웹툰 #스위트홈_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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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겉보기엔 멀쩡한 남자> 공식 예고편
그 좋은 시절, 언제나 일이 우선이었다.
그러다 한 남자를 만난 스탠드업 코미디언.
이렇게 완벽할 수가.
똑똑하고 다정하고 직업 좋고, 부족한 게 없네?
너무 괜찮아서 믿지 못할 지경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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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피넛 버터 팔콘> 메인 예고편
레슬러가 되고 싶은 잭은 보호소를 탈출해 과거로부터 도망쳐 나온 어부 타일러의 배에 숨어 들게 된다.
예상치 못한 만남이었지만 타일러는 레슬러 ‘피넛 버터 팔콘’이 되고 싶은 잭을 동생처럼 보살피며
레슬링 학교가 있는 ‘에이든’으로 향한다. 이 여정에 잭을 찾아나선 보호소 직원 엘리너가 합류하고
거리에서 잠을 자고 뗏목으로 강을 건너는 거친 여행이지만, 셋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희망을 피워간다.
하지만 타일러가 도망쳐온 과거는 다시 그들의 앞을 막아서고 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