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저2024-06-26 09:49:51
알을 깨고 나오는 새처럼
영화 <마거리트의 정리> 리뷰
어디로 보든, 어떻게 보든 문과생이었던 나의 학창시절 가장 어려웠던 과목은 당연히 수학이었다. 수식을 이해하고 아니 외워서 대입해서 푸는 것은 그나마 쉬운 일이었는데 증명문제가 나오면 암담해졌다.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고 하고 싶은데, 그렇게 말 할 수 없는 이상한 문제일 뿐이었다. 특기였던 엄청난 암기력으로 증명의 과정을 모두 통채로 외워서 맞춘 적도 있었지만, 문장 너머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는 한계에 맞딱드리고 나면 ‘이걸 꼭 해야만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엔 지구 온난화나, 부의 재분배, 인권문제 같은 것들이 많은 데, 이걸 왜 증명해야 하는가? 하는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며 수학을 포기하는 나 자신을 합리화 시켰다.
이런 나에게 골드바흐의 추측, 2 보다 큰 모든 정수는 세 소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그러니까 ‘1+1+1 = 3’이 성립한다는 이 당연한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것에 매진하고 있는 주인공 마거리트에 대한 이야기는 수포자의 입장에서 조금 신선했다. “아니 그걸 증명하지 못했다고?” 하는 놀라움과 “그걸 왜 증명해야 하는 걸까?” 라는 궁금증. 그리고 “그걸 증명해내고 싶은 사람은 누굴까?” 라는 호기심 (문과생의 의식의 흐름) 그리고 수학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내가 봐도 괜찮을까. 라는 약간의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영화는 ‘그걸 증명해 내고 싶은 사람’ 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수학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필즈상 수상자를 무려 11명이나 배출한 수학계의명문 ‘파리 고등사범학교’의 수학 천재 마거리트. 지금까지 누구도 증명하지 못한 ‘골드바흐의 추측’을 증명하고자 하는 세미나에서 오류를 제기하는 사람으로 인해, 수학으로부터 도망치고 만다. ‘증명에 실패했다.’ 라는 단순한 이유보다 대학이라는 한정된 사회에서 수학의 세계에만 있던 마거리트에겐 어떤 충격 같은 것이었다. 나보다 더 천재인 것 같은 다른 동료. 나에게 실망하고 나를 놓아 버린 것 같은 교수. 증명에서 오류를 지적 받은 것은, 단순히 마거리트가 증명하고자한 골드바흐의 추측에 대한 부정뿐만 아니라, 어쩌면 내가 맞다고 생각했던 것이 모두 와장창 깨져 버리는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데미안> 중에서’
마거리트는 막 알이라는 세계에서 나오려는 중이다. 알껍질 밖의 세상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이니, 불안과 공포를 가질 법도 한데, 마거리트는 지금까지 단단하게 자신을 보호해 주었던 알껍질이세상으로 가지 못하는 차단막이라고 생각 했던 것일까. 고민없이 망설임 없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냥(!) 해 나간다. 꼭 묶어 두었던 어떤 마음이 터져버린 것처럼.
매 순간의 경험은 우리의 가치를 만들기 마련이다. 수학의 세계, 그러니까 정(正)의 세계에서만 형성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마거리트는 새롭게 만난 반(反)의 세계에서 원나잇, 마작, 클럽…윤리와 가치관이 배제된 것 처럼 거침없이 경험함으로써, 새로운 신념과 가치관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다시 사랑하는 수학을 시작한다. 수학만 탐구하던 삶에서, 수학을 사랑하는 삶으로.
수학은 공식대로만 하면 언제나 명쾌하게 답이 나오는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학의 공식과 법칙을 증명해 나가는 과정이야 말로, 깊이 탐구하고 고민하며 길을 찾아가야 하는 인생과 닮은 학문일지도 모르겠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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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펜하이머> 영화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의 모든 것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에서 놀라운 소식이 전해진다. 독일 물리학자들이 우라늄의 원자핵을 쪼개 엄청난 에너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것. '로버트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를 비롯한 미국 물리학자들은 소식을 듣자마자 원자폭탄을 실제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미국 정부 역시 나치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로브스 대령'(맷 데이먼)을 책임자로 삼고 신무기 개발을 위한 맨해튼 계획을 추진한다.
하지만 맨해튼 계획은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그로브스 대령은 오펜하이머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에 오펜하이머는 뉴멕시코 사막 한가운데인 로스 앨러모스에 연구소를 짓고 가능한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투입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그는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냉전이 시작되면서 과거 공산주의에 경도됐던 오펜하이머 이력이 재조명되고, '원자폭탄의 아버지'는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의 공격에 직면한다.
크리스포터 놀란 필모의 정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열두 번째 장편 영화 <오펜하이머>는 전기영화다.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이 쓴 오펜하이머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스크린에 옮겨 미국 물리학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일생을 다뤘다. 영화는 특히 그가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과정과 전후 수소폭탄 반대 운동을 펼친 뒷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다.
<오펜하이머>는 개봉 전부터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CG 없이 트리니티 실험의 핵폭발 장면을 재현했다고 알려져 주목을 받았다. 1달 전에 개봉한 영화 <바비>와 '바벤하이머' 밈으로 얽혀 이슈였고, 해외에서는 <바비>와 함께 쌍끌이 흥행을 이끌었다. 워너 브라더스가 아닌 유니버설 픽처스가 처음으로 놀란 영화를 단독 배급한 점도 화제였다.
사실 천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3시간짜리 영화로 압축하는 작업은 어렵다. 원작 평전은 심지어 오펜하이머의 삶만 다루지 않는다. 누구나 한 번은 들었을 사건과 정치인, 과학자의 이름도 수두룩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펜파이머>는 더욱 놀랍다. 놀란의 스타일, 기술, 직관, 통찰력이 한 데 모여 모순적인 물리학자의 일생을 긴장감 넘치게 재구성했기 때문. 달리 말해 <오펜하이머>는 영화감독 놀란의 진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자폭탄 같은 영화
<오펜하이머>는 기본에 충실하다. 주인공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사실 그의 내면과 감정선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공산주의에 경도된 좌익 과학자.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미국의 원자폭탄 프로젝트를 지휘한 유능한 행정가. 자기 손으로 만든 신무기를 경계하는 야심 찬 정치인. 모순적인 세 인물이 한 사람이니 당연히 어색하다.
하지만 그의 인생을 마치 원자폭탄처럼 재구성한 놀란의 각본은 그의 내면을 유려하게 보여준다. 핵분열물질의 원자핵에 중성자가 충돌하면 원자핵은 분열되고, 더 많은 중성자가 다른 원자핵과 충돌해 새 핵분열이 발생한다. 원자폭탄은 이 연쇄반응에서 생긴 에너지를 활용한다. <오펜하이머>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트리니티 핵실험이라는 목표까지 거침없이 질주한다. 관객의 시선을 원자폭탄 개발 과정에 헌신하는 오펜하이머에게 집중시킨다. 그러고 나서는 트리니티 실험이라는 클라이맥스가 유발한 연쇄적인 폭발로 시선을 돌린다.
미국 정치권과 과학계는 수소폭탄 개발을 두고 갈등을 빚는다. 오펜하이머의 주변인도 아군과 적군으로 갈라져 계속해서 충돌한다. 오펜하이머는 소련의 스파이로 의심받아 공격당한다. 놀란이 처음 1인칭으로 작성했다는 각본은 이 지점에서 빛난다. 트리니티 실험 전까지는 맨해튼 계획이 주인공이었다면, 이제는 오펜하이머의 내면이 주인공이 된다.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대한 양심의 가책, 매카시즘과 스트로스에게 시달리는 고통 등 오펜하이머의 감정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원자폭타과 같은 구조는 절제미 덕분에 더욱 돋보인다. 트리니티 실험이 성공한 직후, 영화는 순간적으로 완급을 조절한다. 원자폭탄이 터질 때 극장은 순간적으로 고요해진다. 단순히 전쟁에서 승리할 무기를 개발했다는 기쁨에 심취하지 않는다. 인류가 다룰 수 있을지 의문스러운 힘을 손에 넣은 두려움이 정적 속 독백을 통해 전해진다. 그 덕분에 관객은 오펜하이머에게 완전히 동화되어 다음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다.
오펜하이머가 강당에서 연설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흥분한 사람들이 발을 구르는 소리는 폭탄 폭발음과 오버랩된다. 이 장면은 원자폭탄으로 인한 흥분과 열광이 얼마나 무서운지, 또 그가 받은 충격과 죄책감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단번에 납득시킨다. 원자폭탄 희생자 시신을 오펜하이머가 밟는 환상이 나오기도 전에, 관객은 그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영화가 끝날 때, 그의 선택 중 이해되지 않는 결정이 없을 정도다.
양자역학의 인문학
<오펜하이머>는 역사적 인물의 내면을 비추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오펜하이머는 논란의 인물이었다. 그가 소련의 스파이가 아니었다고 미국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복권한 게 불과 반년 전 일이다. 영화는 이 모순적인 물리학자에게 스스로를 변론할 기회를 준다. 동시에 관객이 스스로 그를 판단할 공간도 열어준다.
핵심은 컬러와 흑백의 전환이다. 오펜하이머의 시점에서 흘러가는 'Fission(핵분열)'이라는 제목의 파트는 컬러로, 스트로스가 중심이 되는 'Fusion(핵융합)'이라는 이름의 장면은 흑백으로 묘사된다. 원자폭탄의 원리인 '핵분열'은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의 아버지'가 된 과정을 보여준다. 수소 폭탄의 원리인 '핵융합'은 그가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하다가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몰락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각적 연출은 마치 양자역학의 인문학적 해석 같아 보인다. 양자 역학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관측이다. 양자 세계에서는 전자나 빛이 파동의 성질과 입자의 성질을 모두 가질 수 있다. 이처럼 중첩되어 있는 두 가지 상태는 관측을 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한 가지 성질로 표현이 된다. <오펜하이머>는 이러한 관점에서 주인공을 관측한다.
애국심이 투철한 미국인이지만 동시에 공산주의자이고, 원자폭탄의 아버지이지만 반핵 운동의 중심에 선 정치인이 있다. 그는 자신이 위치한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비친다. 영화는 그의 시점에서 그 모순점을 이해시키고, 타인의 시점에서 그 역설과 중첩을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의 모습을 비춘다. 인간이 그 자체로 얼마나 복잡하고 모순적인 존재인지, 그렇기에 한 사람을 재단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상기시킨다. 이는 제목에 걸맞은 접근법이다. 오펜하이머는 본래 양자 역학 연구자였으니까.
놀란의 <소셜 네트워크>
그래서일까? <오펜하이머>는 마치 놀란의 <소셜 네트워크> 같다. <소셜 네트워크> 역시 페이스북의 창립자 마크 저커버그에 대한 상반된 평가를 모아놨기 때문. 저커버그의 시점과 동업자였던 윙클보스 형제 및 왈도 세브린의 시점을 충돌시킨다. 두 영화가 시각의 차이를 보여주는 방법도 흡사하다. <소셜 네트워크>는 법원 조정 과정으로, <오펜하이머>는 청문회로 서로 다른 시점의 충돌을 보여준다.
<소셜 네트워크>가 받은 찬사를 생각하면, <오펜하이머>는 작가 크리스토퍼 놀란의 역량을 재증명하는 장이기도 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놀란의 통찰력을 제대로 느낄 수 있으므로. 그간 놀란은 캐릭터를 플롯의 장치와 도구로만 사용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오펜하이머>는 다르다.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의 본질적인 모순을 통찰했고, 그 어느 때보다도 입체적인 캐릭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비록 조연 캐릭터가 여전히 수단처럼 느껴지기는 해도 이번만큼은 놀란이 한 발짝 더 나아갔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놀란의 트레이드 마크
그러면서도 놀란은 자기만의 스타일과 색채를 잃지 않았다. <덩케르크>처럼 <오펜하이머>도 시간대가 세 개다. 오펜하이머의 젊은 시절에서 맨해튼 계획까지, 또 그 이후로 이어지는 시간대가 주 재료다. 1954년 원자력 협회의 오펜하이머 청문회와 1959년 루이스 스트로스 청문회는 양념이다. 특히 두 시간대는 철저히 조각난 상태로 삽입된다. 주요 사건에 따라 플래시백과 플래시포워드 형태로 등장한다.
흥미롭게도 시간을 비트는 연출과 구조는 주제의식과 긴밀히 연관된다. 오펜하이머의 현재와 미래를 이어 붙임으로써 과학자의 책임을 논할 공론장을 연다. 통상적으로 과학자는 신기술의 개발자로만 인식된다. 그들의 역할은 기술을 만드는 데서 그친다고 여겨진다. 오펜하이머도 그랬다. 그는 원자폭탄의 오남용과 악영향을 걱정하는 동료들에게 말한다. 새로운 기술을 어떻게 사용할지 결정하는 건 과학자의 몫이 아니라고.
하지만 자기가 바꾼 새로운 세상을 목도한 뒤로 그는 달라진다. 과학자에서 행정가, 정치인으로 변한다. 새 기술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앞장서야 한다고 확신한다. 기술사학자 토머스 휴즈(Thomas P. Hughes)의 표현대로 이제 그는 '시스템 건설자'(system builder)가 되려 한다. 그는 사회 구조와 관계망 안에서 신기술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러나 그의 변화는 충분하지 못했다. 그는 국제적으로 원자력을 평화롭게 이용할 체계를 만들지 못했고, 수소폭탄의 개발도 막지 못했으며, 자기 자신의 삶도 지키지 못했다. 대통령을 설득할 만큼 신중하지 못했고, 앙심을 품은 정치인을 꺾을 만큼 영리하지 못했다. 마치 인간에게 불을 선물했지만, 정작 자기 미래는 지키지 못한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처럼. 이렇게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로서, 기술자로서 성공했지만, 시스템 건설자가 되지 못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빛과 그림자를 가감 없이 들춘다.
SF의 정수를 보여주는 전기 영화
이러한 맥락에서 <오펜하이머>는 외관과 달리 SF 영화 같은 면도 있다. 많은 SF 영화는 과학의 발달이 초래할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대한 우려로 가득하다. 달리 말해 SF 영화는 과학에 근간을 둔 스펙터클을 통해 오히려 인간들이 마주하고 있는 문제를 드러내는 통로나 다름없다.
<오펜하이머>는 이러한 SF 영화의 본질을 품고 있다. 영화는 만약 오펜하이머의 고뇌를 잊는다면, 그의 업적과 과오에서 현명한 길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우리 손으로 전 세계를 초토시킬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설령 0에 가까운 확률이라 해도 인류가 세상의 파괴자가 되는 날이 멀지 않을 거라고.
그렇기에 이 영화의 정점은 멕시코에서 핵폭탄이 폭발한 순간이 아니다.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킬리언 머피의 표정과 지구를 불바다로 만드는 핵 미사일이 교차되는 결말이 정점이다. 오펜하이머와 놀란이 입을 모아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와 경고를 가득 담고 있으니 뇌리에 각인될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오펜하이머>는 테넷의 정신적 속편이자 프리퀄인 셈이다. <테넷>의 주된 플롯은 핵폭탄을 막는 미션이었고, 인류의 존속을 위한 현재와 미래의 전쟁이 시대적 배경이었으니까. 이는 SF 영화에 대한 관심을 <인셉션>, <인터스텔라>, <테넷>을 통해 지속적으로 보여준 놀란스러운 착상이기도 하다.
모두가 좋아할 영화는 아니다
물론 <오펜하이머>는 호불호가 심하게 나뉠 영화다. 천 페이지 분량의 책을 영화화한 만큼 밀도가 높다. 책을 읽은 독자라면 놀란의 꼼꼼한 각본이 반갑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집중하기 어려울 수 있다. 맨해튼 계획 이전의 오펜하이머의 개인사나 초기 생애에 관련한 내용이 결코 짧지 않기 때문이다.
구조적으로도 낯선 영화다. 일반적인 기승전결 구조 대신 트리니티 실험을 기점으로 영화가 다시 시작되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 친절한 영화도 아니다. 1930~50년대 미국 사회를 강타한 정치적, 국제적 이슈에 대한 배경 지식을 요한다. 갈 길이 바쁜 만큼 상세한 설명은 제공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트리니티 실험 장면은 기대에 비해 시각적 임팩트가 약하다. 블록버스터 영화다운 쾌감을 기대한다면 실망이 클 것이다.
그래도 배우 덕분에 진입장벽이 낮아지기는 한다. 우선 킬리언 머피는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놀란 사단 중 하나로만 알려졌던 그는 이제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걸 증명했다. 명배우들의 향연도 인상적이다. 맷 데이먼, 에밀리 블런트, 데인 드한, 라미 말렉, 플로네스 퓨는 앙상블을 이루며 머피 뒤를 단단히 받쳐준다. 특히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아니었다면 후반부는 힘이 빠져 지루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 몇몇 단점은 취향의 문제이지, 완성도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놀란이 의도한 방향성만 정확히 짚어 쫓아간다면 <오펜하이머>는 <인셉션>, <다크 나이트>, <덩케르크> 보다도 강한 흡입력을 자랑한다. 놀란이 그간 자기 필모그래피에서 보여준 스타일과 장점, 통찰력을 한데 모아 만든 폭탄 같은 영화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종합하면, 단언컨대, <오펜파이머>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마스터피스다.
Outstanding 특출함
원자폭탄 섬광과 굉음으로 빚어낸 프로메테우스의 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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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지고 변화하는 게 삶이라면, 우리는
심리적 거리가 먼 것은 평소에 의식하기 어렵다. 당장 오늘 먹고 입고 일하고 잠드는 일에 기민하게 반응하느라 그러한 일상 속에 불쑥 죽음이 끼어들 수 있단 걸 의식하긴 어렵다. 무디기 때문에 얼마나 다행인가. 매 순간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하며 살아간다면, 불안과 동요로 마음이 날뛸 테다. 일상에 치여 산다고들 표현하는데 되려 그 덕에 삶의 근본적인 두려움을 잊고 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영화의 주인공, ‘산드라‘는 두 갈래의 경계를 오간다. 동시 번역 일을 하고, 딸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등 해야 할 일로 꽉 찬 하루. 여기에 죽음과 맞닿은 존재를 돌보는 일도 포함된다. ‘벤슨 증후군’. 명칭마저 생소한 이 질병을 앓고 있는 그의 아버지. 신경 이상으로 시각 정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감각을 서서히 잃어간다. 열쇠구멍을 찾아 한참 헤맬 정도로.
철학 교수로 오랫동안 재임한 아버지는 시각과 기억을 잃어가는 변화에 적응 중이다. 사실 발병은 5년 전이라서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을 거 같지만, 서서히 사라지는 기억과 시력은 언제고 익숙함과 거리가 멀다.
산드라가 사별한 남편도 얼추 비슷한 햇수인데, 그는 어떨까.
홀로 여덟 살 아이를 돌보며 살림을 꾸려나가기에도 충분히 바쁜 하루다. 친절하게 아버지를 찾아뵈며 도움을 건네지만, 아버지의 집에서 벗어난 순간부터는 제게 걸려오는 전화를 애써 무시한다. 마치 일터에서 퇴근한 사람처럼. 하지만 으레 엄마 역할이 그러하듯 끝이 아니다. 아이를 돌보고, 먹이고, 그렇게 살아가고.
와중에 아버지가 더는 요양인의 도움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하자, 비용과 시설이 적절한 요양원 찾는 일도 생겼다. 할 일 투성이인 산드라에게 다른 주제로 떠들 수 있는 사람이 생겼으니, 친구 클레망이었다.
아내와 아이까지 있는 클레망. 그런 클레망과 산드라는 가까워지고, 그 거리는 어느새 입을 맞닿을 정도에 다다른다. 한 번은 손쉽게 두 번, 세 번, 새로운 일상이 된다. 딸은 기묘한 변화를 금세 눈치채고 이러한 변화에 왠지 모를 기대감을 품는다. 놀러 올 때마다 자신과 다정히 놀아주는 존재가 달갑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산드라는 괜한 기대감을 주지 않으려 클레망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하지만, 가장 설레고 기대하는 사람은 그다. 이 사랑이 진실하다고 생각하고, 클레망이 현재 가정을 정리한 후 자신에게로 완전히 정착할 것이라고. 이곳과 저곳을 오가던 클레망은 단언한다. 다 끝내고 돌아오겠다고.
그 말을 믿으며 기다리던 산드라. 기다리는 와중에 아버지의 집안에 가득한 책 일부를 제자들에게 보내고, 원하는 요양원에 자리가 날 때까지 매번 아버지는 머무르는 거처가 바뀐다. 여전히 클레망은 소식이 없다. 서서히 직감한다. 아, 그가 날 떠났다.
아버지는 가끔 기억을 잃는다. 여기가 어디인지, 무엇을 하러 온 건지. 그러다 산드라도 잊어간다. 이혼한 전처를 잊어버렸듯.
숱한 이동과 변화의 반복. 영화는 이 모든 일을 아주 잔잔하게 풀어낸다. 극적인 음향이나 이미지도 없다. 그저 붉고 푸른색을 선연히 드러내고, 클로즈업으로 세밀한 표정을 보여주고, 구체적인 서술 없이 내레이션이나 오가는 짤막한 대화에 맥락을 넣는다.
그래서였다. 산드라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어딘가 모르게 일상적으로 느껴졌던 건. 죽음도, 기억도, 변화도, 새로움도, 기대감과 눈물도,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아 보이던 일상에서 끝없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살다 보면 별난 이벤트도 생긴다. 다 끝난 것 같던 관계, 그러니까 클레망이 정말로 산드라에게 돌아와 머무는 것처럼. 이 새로운 가족이 얼마나 단단하게 형태를 유지할지 가늠할 순 없다. 하루하루가 그러하듯. 익숙한 모습을 띤 채로 조금씩 계속 무언가가 변할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이 살아가는 건 단 하나의 이유 때문임을 영화의 ost가 말한다. 포옹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손을 뻗어 완성하는 것처럼.
모든 망각과 변화와 새로움 앞에서도,
Love will re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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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물>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오마이뉴스에서 [영화 속 감정 읽기] 라는 연재를 합니다. 영화리뷰안에 각 인물이 대표하는 감정을 적고 그에 대한 여러 생각들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 리뷰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을 바라볼 때, 그 안의 모든 것을 다 고려해서 판단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건 불가능할 것이다. 물론 어떤 다툼이나 논쟁이 벌어졌을 때, 제3자의 입장에서 양쪽의 이야기를 모두 듣긴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판단을 한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그리고 지시도 한다. 너는 어떤 식으로 해야 하고 또 너는 다른 식으로 해야 한다는 식의 조언들. 하지만 아무리 모든 것을 이해하고 판단했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우리의 판단에는 빠지는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 자체가 삶의 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어떤 일이 일어나면 내면에 일어나는 모든 전후 사정을 다 알 수는 없다. 오직 그 안에 들어가 있던 당사자만이 그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제3자적 입장에서는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해도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런 한계가 우리가 흔히 오해라고 부르는 판단을 낳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오해는 눈덩이 같이 커져 누군가를 괴물로 만들기도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은 이 영화를 보는 모든 관객들에게 세 번에 걸쳐 묻는다. 과연 누가 괴물인가?
첫 번째 감정 - 엄마의 걱정
미나토(쿠로카와 소야)의 엄마 사오리(안도 사쿠라)는 싱글맘이다. 남편의 사고사 이후 혼자 아이를 키우는 그는 아들을 잘 키우기 위해 무척 애쓴다. 초반에 등장하는 엄마와 아들의 모습은 큰 문제없이 평범해 보인다. 맨 첫 장면에서 멀리 떨어진 한 건물에서 불타는 것을 같이 바라보는 사오리와 미나토의 모습에서 어떤 걱정이나 불안을 느낄 수 없다. 하지만 그 장면 이후, 미나토의 이해하지 못할 행동들이 이어진다.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리거나, 머리카락을 자르는 행동은 엄마 사오리의 걱정을 조금씩 끌어올린다.
사오리의 물음에도 미나토는 특별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냥 조용히 씻거나 앉아 있을 뿐이다. 사오리는 더 캐묻지 못하고 마음속의 걱정을 그냥 쌓아둔다. 그러다 어느 날 사오리는 미나토의 학교에 상담차 방문하게 되고 조금은 이상한 학교 교장선생님과 주변 선생님들의 반응에 걱정이 더욱 커진다. 이런 사오리의 걱정은 그 상황을 선생님들, 그중에서도 미나토의 담임 선생님인 호리(나가야마 에이타)를 의심하게 만든다.
사오리는 왜 이렇게 걱정을 내려놓지 못할까. 혼자 아이를 키우지만 본인의 아이를 잘 알지 못한다는 조바심이 그 걱정을 더욱 크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오리의 걱정이 폭발하는 장면이 있다. 미나토가 다쳐 병원 갔던 날, 병원을 나서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 아들을 대하지만, 아들이 별 반응이 없자 갑자기 폭발하듯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영화 속에서 사오리의 감정이 가장 폭발하는 장면이자 그가 가지고 있던 마음속의 걱정이 겉으로 온전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사오리는 아들에게 직접 답을 찾지 못하자 학교 선생님에게서 그 답을 찾는다. 그 답은 걱정이라는 감정에서 나온 것이고, 엄마 사오리의 관점에서는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여기서 영화는 첫 번째로 묻는다. 선생님은 괴물이 맞을까?
두 번째 감정 - 선생님의 답답함
미나토의 담임인 호리는 미나토의 학교에 새로 부임한 선생님이다. 그의 시점에서도 시작은 화재가 난 건물 근처다. 그는 꽤 좋은 마음을 가진 선생님이다. 아이들에게 다정하고 최대한 이해해 보려 노력하는 모습이 그의 이야기에 담겨있다. 자신의 반 아이들을 모두 세심하게 챙기지만, 그중에서도 미나토와 요리(히이라기 히나타)가 자꾸 그의 눈에 들어온다. 때론 미나토가 물건을 집어던지기도 하고, 요리는 화장실에 갇히기도 한다. 그걸 이해해보려 하지만 아이들은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호리의 시점에서 그는 잘못한 것이 없다. 하지만 미나토와 의도하지 않은 충돌로 그의 엄마 사오리를 만나게 되면서 그는 조금씩 억울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자꾸만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 같은 미나토를 유심히 관찰하고 주변 아이들에게도 물어보지만 그의 답답함을 풀어줄 학생을 만나지 못한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폭력적이고 편향적인 선생님이라는 판단을 받고 학교에서 잠시 떠나는 일이다. 그런 답답한 상황 속에서 그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은 곱지 못하고, 여자친구도 그를 떠난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가장 답답하게 느껴지는 파트가 선생님 호리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는 이 이야기 속에서 걸스바에 다니는 선생님이라는 나쁜 소문의 주인공이 되고도, 특별한 변명조차 할 기회가 없다. 미나토의 엄마 사오리에게도, 교장선생님에게도 이야기를 해보았지만 그의 답답함은 풀리지 않는다. 괜히 미나토나 다른 아이를 다그쳐보지만 아이들은 입을 꾹 닫고 있다. 답답한 그가 학교 건물 옥상에 올라가는 모습에서 그의 답답한 마음이 무척이나 측은하게 느껴진다. 그의 허탈하고 답답한 표정을 짓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두 번째로 묻는다. 호리를 억울하게 만든 학생 미나토는 괴물이 맞을까?
세 번째 감정 - 아이들의 사랑
마지막 파트의 이야기는 두 아이의 이야기다. 미나토와 요리의 감정이 영화의 후반부를 꽉 채우고 있다. 사오리와 호리의 시점에서는 이 두 아이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 영화를 연출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의도적으로 감췄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을 살면서 단편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무언가를 판단할 수밖에 없다. 사오리는 아들에 대한 걱정으로 제대로 된 사실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잃었고, 호리 역시 자신의 답답함 때문에 진짜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영화 속 인물들처럼 우리도 진실이 무엇인지 보단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바탕으로 사안을 볼 수밖에 없다.
이야기 속에서 요리는 여자 아이들과는 잘 지내지만, 남자아이들에게는 놀림의 대상이 된다. 자신을 조금 다르다고 생각하는 요리는 집에서도 아버지에게 나쁜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요리는 특별히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평온해 보이는 그의 표정이 더욱 미나토의 호기심을 자극했는지도 모르겠다. 미나토는 어느 순간부터 요리에게 마음이 가기 시작하고 그 주변에서 맴돌다가 결국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버린다. 두 사람이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그들의 마음엔 친구로서 좋아하는 것 이상의 감정이 시작된다. 그건 미나토에게 엄청난 혼란을 가져온다.
그럼 그걸 보는 관객들은 말할 수 있다. 미나토는 괴물이 아니다. 요리도 괴물이 아니다. 같은 남자인 두 사람은 그저 서로를 사랑한 것뿐이다. 그것이 비정상이라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는 미나토에게 강력한 반발심과 혼란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미나토의 학교 생활과 가정생활에 영향을 주었고, 그것에서 파생된 감정이 바로 엄마 사오리의 걱정과 선생님 호리의 답답함이다. 그 모든 소용돌이 안에서 미나토는 그 모든 감정(걱정, 답답함, 혼란 그리고 사랑)을 홀로 감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는 마지막으로 묻는다. 그럼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
훌륭한 이야기 구조가 만들어내는 강력한 울림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영화가 묻는 질문에 답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쉽게 대답할 수 없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미나토와 요리가 밝은 햇살 아래에서 웃고 뛰어가는 장면이다. 그것이 행복한 결말인지 아니면 그들의 상상 속에서만 있는 일인지는 보는 관객들의 판단에 달렸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모든 이야기를 보고 나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두 아이들의 마음과 사오리의 마음, 호리의 마음을 모두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 자체가 행복한 결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총 세 개의 파트로 구성된 이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은, 관객이 각 인물을 오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도 건물의 화재에 대한 소문이나, 선생님 호리에 대한 소문 등 확인되지 않은 정보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이 종종 나온다. 결국 누구도 그 당사자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쉽게 오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영화 <괴물>은 실제로 관객에게 주는 정보를 이야기에서 조금씩 빼면서, 그런 오해와 잘못된 정보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가지 나쁜 감정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https://www.notion.so/Rabbitgumi-s-links-abbcc49e7c484d2aa727b6f4ccdb9e03?pv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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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역시 자인과 끝까지 함께 하겠다, <가버나움>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있습니다.
<가버나움> Capernaum, 2018 제작
레바논 외 | 드라마 | 2019.01.24 개봉 | 15세이상관람가 | 126분
감독: 나딘 라바키
나 역시 자인과 끝까지 함께 하겠다, <가버나움>
이 영화는 이오아나 유리카루의 <레모네이드>(2018),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2004), <어느 가족>(2018), 션 베이커의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와는 분명 다르게 다가온다. 나열한 영화 속 주인공들을 모두 만났다 자부해도 <가버나움> 속 자인과의 만남을 ‘익숙하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직접 보지 않으면, 미디어에서 떠들어대는 ‘15분의 기립박수’와 ‘각종 영화제에 초청받았다’는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지도 모른다. <가버나움>은 어느 리뷰에서도 완벽히 해석할 수 없는 작품이다.
‘가버나움’은 성서에 등장하는 도시로, 예수가 축복하는 동시에 인간의 욕심에 의해 처참히 무너져 내릴 거라 예언한 곳이다. 성서에서는 ‘축복’과 ‘멸망’을 함께 품고 있는 마을이지만, 자인이 사는 곳은 오직 ‘멸망’만이 존재한다. 감독의 가버나움은 기적보다, 혼돈에 초점을 맞췄다.
<가버나움>에 등장하는 이들은 모두 각자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가난은 그들에게 지독한 굶주림과 끝없는 노동을 강요한다. 대부분은 자신에게 주어진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지만, 유일하게 자인의 부모만이 기구한 인생에 절망하기만 한다. 자식들에게 아무런 힘이 없는 이름을 던져주고 거리로 내쫓는다. 우리가 자인에게서 일말의 희망도 기대할 수 없는 까닭은 함께 사는 부모가 여전히 젖병을 물고 신세 한탄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혼돈 속에 갇힌 자인을 복잡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의 색 바랜 빨간 신발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만 해도 충분히 들여다볼 수 있다.
사하르(여동생)가 생리를 시작하자, 자인은 불안함을 내비친다. 그녀도 떠나간 다른 여동생처럼 남자에게 팔려갈 것이 분명했다. 그 주도권은 자신의 부모가 휘두를 것도 아이는 알고 있었다. 끝내 자인은 여동생을 가게 주인에게 빼앗기고 만다. 지키겠다 맹세한 오빠의 절실함은 부모의 매질로 손쉽게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집을 나와 무작정 버스를 타고 떠난 자인은 바퀴맨 복장을 한 할아버지를 따라 작은 놀이동산에 내린다.
놀이동산, 그곳은 아이에게 주어진 새로운 세상일까? 페인트가 다 벗겨진 놀이기구를 통해 짐작했겠지만, 역시 아니다. 하지만 자인은 새로운 인연을 만난다. 너무나 자신과 똑같은.
아이는 식당에서 일하는 라힐과 그녀의 딸 요나스를 만난다. 요나스를 집에서 돌보는 것으로 자인은 라힐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한다. 나무판자들이 간신히 바람을 견디고 있는 판자촌에서 아이는 또다시 동생을 성심성의껏 돌본다. 비극에 비극이 더해지는 순간에도 그들은 내내 웃고 있고, 우린 말 못 할 고통을 느낀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에는 너무나 익숙한 하루일 뿐이었고 미소마저 사라지게 할 여유가 없었을 뿐이었다.가버나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자인만이 아니다. 불법체류자 라힐 역시, 딸과 안전한 삶을 살기 위해 새로운 신분증을 구해야만 한다. 비극 속에 살고 있지만, 그들은 생을 포기할 수 없다. 그러나 순식간에 라힐이 경찰에 잡히고, 자인은 요나스와 긴 기다림을 함께 하다 결국 불법 신분증을 만드는 어른에게 속아 요나스를 두고 집으로 향한다. 출생신고서를 가지러 집에 온 그 순간, 사하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불행이 끊임없이 두 사람을 덮쳐오지만, <가버나움>은 이를 너무나 태연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만 한다.
그렇게 자인은 법정에 서서 순순히 자신이 한 충격적인 행동을 읊는다.
여동생의 남편을 칼로 찔렸음을.
절망스럽지만, 자인이 간신히 암흑을 찢고 나와 처음 마신 건 엄마의 모유가 아니라 술이었을 것이고, 처음 눈을 떠 본 것은 밤마다 헐떡이는 부모의 옆모습이었을 것이다. 일찌감치 깨달았겠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열두 살로 추정되는 아이는 부모를 고소하기 전까지 그 권리가 자기에게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부모는 아이의 앙상한 신체를 때리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끝내 아이를 자기의 손으로 가버나움에 가둬버린다. 더 충격적인 건, 그들이 끊임없이 가버나움 안에서 새 생명을 갈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자인의 손에 칼을 쥐게 한 건, 가난에 힘입어 현실을 부정하는 법밖에 모르는, 무능력하면서 요란하기만 한 부모의 만행 때문이다. 따라서 자인이 법정에 서서 ‘가난이 아닌 부모를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한 건 당연한 결과다. 모든 걸 통달한 어린아이의 나지막한 선언이 이 작품의 시작과 끝을 책임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교도 다니지 못했던 아이가 스스로 삶의 고난과 슬픔을 터득했음에도 가족은 불완전하다 못해 제대로 형성되지도 않았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품었던 자인에게 가족은 더 이상 가족이 될 수 없었고, 아이는 선택한다. 부모를 버림으로써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하기로.
그렇게 밝은 웃음을 지으며 다시 시작한다.
<가버나움>는 감각적인 장면 전환과 역동적인 스토리, 실제 빈민가에서 캐스팅한 배우들의 열연으로 완성된 수작이다. 그 덕에 필자는 쉽게 감동할 수 없었다. 물론 감동과는 아주 먼 이야기지만, 이 작품을 ‘레바논의 고립된 현실에 직격탄을 날리는 영화’라고만 정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확신한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말은 꼭 하고 싶다.
“나 역시 자인과 끝까지 함께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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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의 모든 이들에게 비치는 이타적 별빛
온기가 차오른다! 차가운 겨울의 공기가 어느덧 따뜻한 봄의 공기로 변할 때쯤 관객은 비로소 스크린을 투영해 전달되는 온기를 오롯이 받아들인다. 그것도 서서히, 그리고 적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새벽의 모든>은 차갑지만 그래서 더 따뜻함을 느끼고 그 소중함을 알게 되는 영화다. 그 계기는 멀리서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서로에게 이타적 별빛을 비추는 두 주인공에게 기인한다.
후지사와(가미시라이시 모네)와 야마조에(마츠무라 호쿠토)는 아동용 과학 키트를 만드는 작은 회사의 선후배 사이다. 옆자리에 앉아 있지만, 절대 친하지 않다. 데면데면하던 이들은 서로가 가진 병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가까워진다. 후지사와는 PMS(월경전증후군)로 인해 한 달에 한 번은 억제할 수 없는 짜증을 표출하고, 야마조에는 공황장애로 갑작스럽게 발작을 일으킨다. 병은 다르지만, 그 아픔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은 일말의 동질감을 느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서로를 도울 방법을 찾는다.
미야케 쇼가 연출한 <새벽의 모든>을 보면 진부한 격언 하나가 떠오른다. “동트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는 말이 바로 그것. 극 중 대사에도 나오는 이 말은 후지사와와 야마조에의 현 상황을 말하는 듯하다. 마음의 병으로 끝없이 짙은 어둠이 깔린 터널을 지나고 있는 이들은 새벽이 오기 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행복보다 절망의 순간을 자주 맛보는 이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도와주며 묵묵히 버텨나간다.
다른 작품이었다면 이런 이들의 다음 단계는 ‘사랑’이겠지만, 영화는 관객의 기대를 저버린다. 미야케 쇼는 로맨스 장르의 관습에 전혀 기대지 않는다. 대신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이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의 동질감 느끼고, 질병으로 힘겨워하는 삶을 이해하는 시선을 유지하며, 관계를 이어나간 다. 사랑보단 연대를 내세우며, 힘겨운 싸움을 해나가는 두 주인공은 마음이 아닌 손을 맞잡는다.
영화만의 차별성은 연대 말고도 두 주인공의 ‘거리감’에 있다. 이들은 가까이도 그렇다고 멀지도 않은 적정 거리를 유지한다. 뭔가 더 나은 삶을 위해 서로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도와주는 게 아니다. 가깝지도 그렇다고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질병으로 삶이 무너질 때 기꺼이 손을 내미는 정도다.
극 중 야마조에는 PMS에 늪에 빠진 후지사와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함께 사무실 밖에 나와 회사 자동차 세차를 함께 한다. 그녀가 짜증을 내도 받아주며, 안정될 때까지 지켜봐 준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한 달에 한 번은 꼭 도와주겠다고 약속한다. 후지사와도 마찬가지로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못하는 야마조에게에게 집에서 노는 자전거를 주거나 직접 머리를 잘라주기도 한다.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최대한 도움과 관심을 전하는 그 거리의 길이는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유지된다.
초반 이들이 숱하게 말하는 ‘미안합니다. (스미마셍, すみません。)’는 그 적정 거리를 찾는 시행착오처럼 보인다. 이 과정을 지나온 주인공들은 비로소 서로에게 미안한 대상이 아닌 이해와 공감, 위로를 전하는 대상이 된다. 감독은 이런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나와 다른 이의 삶을 이해하고 서로가 일상을 평화롭게 유지하는 첫 단계라고 말하는 듯하다.
영화는 이 거리감을 ‘별’로 치환한다. 이름 없는 작은 별이라도 작지만 아름다운 빛을 멀리 떨어진 또 다른 별을 향해 비춘다는 극 중 대사는 마치 두 주인공을 연상케 한다. 그 빛이 오랜 시간이 걸려 도착함에도 그 행위 자체로서 위안과 힘을 얻는다는 점은 영화의 주제와 일맥상통한다. 이는 후반부 이동용 플라네타륨(천체 투영기) 행사장에서 별자리를 관찰하는 장면에서 나오는데, 특별한 사건 없이 담백하게 진행되면서 차곡차곡 쌓인 관객의 감정이 이 부분에서 탁 터진다. 마치 기나긴 겨울을 지나 봄을 맞이하듯 따뜻한 감동이 전해진다.
참고로 이 장면에서 행사 참여자들에게 별자리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는 이는 후지사와다. 이 역을 맡은 가미시라이시 모네는 의 미츠하 역의 목소리 연기를 맡을 정도로 특유의 맑고 깨끗한 목소리가 강점. 이 장점이 이 장면에서 잘 발휘된다.
두 주인공만큼 빛나는 건 작은 별과도 같은 회사 사람들이다. 후지사와와 야마조에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은 물론, 회사 구성원으로서의 단체 생활을 강요하지 않고, 자기 일을 묵묵히 하는 것에 만족해한다.
이들은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과학 키트를 사용할 학생들을 위해 부단히 상품을 조립하고 포장하며 각 학교에 전달하는 일을 한다. 마치 30년 전 똑같은 행사를 준비했던 회사 사장 동생의 음성 기록 및 메모가 두 주인공에게 큰 힘이 된 것처럼, 회사 사람들도 30년 후 자신들이 만든 키트를 접한 학생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맡은 바 일을 멋지게 할 수 있도록 작은 빛을 비추는 일을 한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그 빛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모습은 북극성 보다 더 찬란해 보인다.
<새벽의 모든>은 아름다운 영화다. 비록 두 주인공의 삶이 힘들고 비루할지언정, 전반적으로 깔린 사람의 온기가 숨겨진 아름다움을 빛낸다. 이는 감독의 전작 과 마찬가지로, 16mm 필름과 자연광을 활용한 아날로그 감성을 담아냈기 때문. 연속해서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영화가 주는 공감과 위로, 그리고 희망의 메시지를 가슴에 품길 바란다. 언젠가 어둠이 걷히고 새벽을 알리는 광명을 마주할 그날을 기다리며.
덧붙이는 말: 16mm 필름과 자연광을 활용한 아날로그 감성이 듬뿍 담긴 의 메이킹 영상이다. 극장 가기 전 이 영상을 보며 영화의 느낌을 고스란히 마음속에 저장해 보면 좋을 듯 싶다!
사진제공: 미디어캐슬
평점: 4.0 / 5.0
한줄평: 새벽을 기다리는 모든 이들의 빛나는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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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벨 문> | 차라리 스타워즈 스핀오프였다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변방 행성 벨트의 한 농촌에 마더월드의 군대 임페리움을 이끄는 '노블'(에드 스크레인) 제독이 나타난다. 그는 촌장을 때려죽인 후 다시 돌아올 때까지 군대를 먹일 식량을 준비하라고 협박한 뒤 떠난다. 농촌 주민들이 공포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모르자, 과거 마더월드의 장교였던 자기 신분을 숨긴 채 지내던 '코라'(소피아 부텔라)가 마침내 목소리를 낸다. 어차피 노블 제독이 우리를 모두 죽일 테니, 그전에 그들과 싸울 준비를 하자고.
이에 친구 '군나르'(미힐 하위스만)와 함께 노블 제독에 맞설 전사를 찾아 나선 코라. 그녀는 항구 도시에서 만난 '카이'(찰리 허냄)의 도움을 받아 은하계 각지에 흩어진 숨은 전사들을 발견한다. 노예가 된 왕자 '타라크'(스타즈 네어), 갓을 쓴 검사 '네메시스'(배두나), 임페리움에 반기를 든 전설적인 장군 '타이투스'(자이먼 혼수), 저항군의 리더 '다리안 블러드엑스'(레이 피셔)까지.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나선다. 마더월드의 폭정에 맞서 벨트를 구할 영웅들과 함께.
황새 쫓다 가랑이 찢어진 뱁새, <레벨 문>
<스타워즈>. 스페이스 오페라의 고전. 첫 등장 이후 40년이 지나도 인기를 유지 중인 미국의 신화. 사실 <스타워즈> 이야기는 명성에 비해 그다지 참신하지 않다. 좋게 말하면 왕도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클리셰로 가득하다. 조지 루카스가 조지프 캠벨의 연구를 차용한 결과물이기 때문. 캠벨은 여러 신화가 공유하는 모티브를 정리했고, 그 내용은 루크 스카이워커와 다스 베이더의 서사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대신 <스타워즈>는 다른 영역에서 독자적인 매력을 구축했다. 이야기는 평범해도, 그 이야기가 펼쳐지는 세계관은 특별했다. 다양한 행성과 생명체, 제다이와 시스의 갈등, 현실세계로 역수입된 광선검 결투, 임페리얼급 스타 디스트로이어와 X-윙 같은 전투기, 여러 외피의 드로이드까지. 익숙한 이야기를 따라가면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은하계를 탐험할 수 있는 게 <스타워즈>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이는 넷플릭스의 <스타워즈>를 꿈꾼 잭 스나이더 감독 신작 <레벨 문: 파트 1 불의 아이>의 실수이기도 하다. 본래 스나이더가 <스타워즈> 스핀오프로 기획한 <레벨 문>. 이 프로젝트는 디즈니의 루카스필름 인수 후 취소됐고, 넷플릭스에서 되살아났다. 그런데 이상하다. <레벨 문>은 더 이상 <스타워즈> 세계관에 속하지 않는데, 여전히 <스타워즈>를 답습한다. 그 결과 <레벨 문>은 <스타워즈>의 강점 대신 약점만 노출하고 말았다.
첫 번째 실수: <스타워즈>의 세계를 답습하다
할리우드의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가 <스타워즈>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스타워즈> 세계관을 부정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것인가? 아니면 유사한 세계관 속에서 참신한 이야기를 보여줄 것인가? 가렛 에드워즈의 <크리에이터>는 전자라 할 수 있다.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의 감독인 그는 스타워즈 세계관의 근간인 '프런티어 정신'과 '오리엔탈리즘'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독자적인 세계관을 그렸다.
<레벨 문>은 후자다. 이름과 외양만 다를 뿐, <스타워즈>의 세계관을 이어받았다. 마더월드와 은하 제국은 전 우주를 억압하는 군국주의 권력이다. 왕을 시해하고 권력을 찬탈한 섭정 벨리사리우스는 황제를, 반은 인간이고 반은 사이보그인 노블 제독은 다스 베이더의 변형이다. 그들의 관계도 유사하다. 황제가 다스 베이더를 겁박하고 이용했듯이, 섭정 역시 노블 제독을 장기짝으로 다룬다.
주인공 삼인방인 코라, 군나르, 카이는 루크, 레아, 한 솔로 삼총사를 연상케 한다. 루크와 레아의 성별과 신분을 맞바꾸고, 한 솔로를 더 비열하게 만든 게 전부다. 마더월드에 대항하는 저항군과 은하 제국에 맞서는 반란 연합은 규모도, 위상도, 역할도 유사하다. 일반 함선으로는 맞설 수 없는 함선 '킹스 게이즈'의 존재 역시 <스타워즈> 속 스타 디스트로이어의 대체재나 다름없다.
문제는 <스타워즈>의 본래 장점도 세계관이라는 것. 달리 말해 <스타워즈>가 40년이 넘도록 쌓아 올린 세계관을 답습한다면, 그 작품은 결코 <스타워즈>로부터 차별화될 수 없다. 실제로 <레벨 문>은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스타워즈>와의 비교를 끝끝내 피하지 못한다. 왜 이 영화가 <스타워즈>가 아닌 다른 제목을 달고 제작되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찾기 어렵다.
두 번째 실수: 또 다른 고전을 답습하다
그렇다면 <레벨 문>은 스토리텔링으로 승부를 봐야 했다. <스타워즈>의 도식적인 이야기와 확연히 다른, 참신하고 치밀한 이야기로 관객을 매료해야 했다. <레벨 문>은 그러지 못했다. <스타워즈>라는 클래식에 또 다른 고전, <7인의 사무라이>를 더했다. 자연히 <레벨 문>의 러닝타임 148분은 모두가 이미 알고, 예측할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로 가득 차 버렸다.
물론 잭 스나이더의 의도는 추측할 수 있다. 그의 연출작은 한 가지 경향성이 있다. '에픽'을 좋아한다는 것. 그는 자기 신념을 관철시키려는 인물의 투쟁을 웅장하고 장엄한 서사시로 그려내는 데 관심이 많다. <300>, <맨 오브 스틸>, <배트맨 대 슈퍼맨>, <왓치맨>, <저스티스 리그> 모두 마찬가지다. 바로 여기서 <스타워즈>를 배경으로 <7인의 사무라이>를 보여주려 한 이유를 유추할 수 있다.
사실 명작이라는 점과 별개로 <7인의 사무라이>는 스케일이 큰 영화가 아니었다. 한 농촌을 배경으로 도적 떼와 사무라이 7명이 싸우는 이야기였다. 잭 스나이더는 이 이야기를 서사시로 바꾸려 한다. 자유의 투사들이 정의롭지 않고 부당한 탄압에 맞서는 우주적 대서사시를 꿈꾼 셈이다. 그래서 그는 스타워즈를 빼닮은 세계관을 더해 도적 떼를 마더월드로, 7인의 사무라이도 마더월드에 복수하려는 영웅들로 바꿨다.
문제는 잭 스나이더의 큰 그림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점이다. 선악을 딱 잘라 나눈 이분법적인 구도는 이제 소구력이 없다. 당장 <스타워즈> 시퀄 시리즈도 은하 제국을 퍼스트 오더로, 반란 연합을 저항군로 변형했다가 발전한 게 없다는 비판을 못 피했다. 파시즘, 공산주의 같은 거악과 싸우는 시대가 아닌 상황에서 이분법적 구도는 구시대적이니까. 근래 히어로 영화, 첩보 영화가 괜히 선악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 게 아니다.
세 번째 실수: 허점이 많은 플롯
큰 그림의 매력이 부족한 가운데, <7인의 사무라이>를 차용한 플롯도 안일하다. 벨트의 한 농촌을 구하기 위해 전사를 모으는 게 주된 내용이지만, 정작 코라가 조력자를 모으는 과정이 빈약하게 제시된다. 일례로 코라가 무슨 수로 타이투스 장군과 블러드엑스 남매를 찾을 것인지 그 계획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항구 도시 술집에서 타이투스 장군을 아는 사람을 찾아 헤매는 것 이상의 비전을 못 보여준다.
대신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카이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 우주선도 카이에게 빌리고, 티라크와 네메시스라는 전사도 카이에게서 추천받고, 벨트로 돌아가는 항로도 카이가 정한다. 즉, 마더 월드의 폭정에 저항하는 투사로서도, 섭정의 양녀이자 엘리트 군인으로서도 코라는 걸맞은 능력을 거의 보여주지 못한다. 그러니 우연의 일치일 뿐이고, 연속성도 부족한 코라의 여정에는 재미가 붙지 않는다.
각 캐릭터의 매력도 못 살렸다. 시리즈의 시작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각 인물을 소개하고 그들이 한 팀이 되는 과정만 잘 보여줘도 <레벨 문>은 제 역할을 하는 셈이다. 하지만 <레벨 문>은 그저 캐릭터를 나열할 뿐이다. 그들의 전사, 능력, 심경 변화, 팀에 합류하기로 한 동기 등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노블 제독의 입을 빌려 그들의 프로필을 하나하나 읊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코라와 군나르가 그들을 한 명씩 만나는 내용은 그저 다음 시리즈를 위한 발판 같아 보인다.
마지막 실수: 본연의 장점마저 잃었다
물론 잭 스나이더를 위한 변명이 있기는 하다. 그의 장점은 본래 스토리텔링이 아니다. 분량 제한이 없는 스트리밍 환경에서 공개된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 <아미 오브 데드>도 개연성이나 완급 조절 문제를 못 피했을 정도다. 대신 비주얼과 액션 연출은 특출 난 장점이었다. 그가 기획한 DCEU의 비주얼은 만화책을 찢고 나왔다는 평을 받았고, <300>과 <맨 오브 스틸>의 액션은 다른 블록버스터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레벨 문>에서는 잭 스나이더 본연의 장점을 찾기 어렵다. 비교적 저예산으로 스페이스 오페라에 걸맞은 비주얼을 보여주기는 했다. 렌즈 플레어 효과를 적극 활용한 총격씬과 폭발씬은 시선을 사로잡을만하다. 그러나 몇몇 장면에서는 그린 스크린에서 촬영한 티를 숨기지 못했고, 잭 스나이더의 특징인 슬로 모션도 남발돼 몰입도를 저해한다.
또 합을 맞춘 티가 많이 나는 액션씬도 기대 이하다. 코라가 마더월드 군인들과 싸우는 초반부, 네메시스가 광선검 비슷한 검을 든 채 거미 괴물과 맞서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에 더해 슬로 모션을 남발한 결과 생동감도 살지 않는다. 그나마 타라크가 배누를 길들이는 장면이 인상적이지만, 진부함을 피하지는 못했다. <아즈카반의 죄수>에서 해리가 히포그리프를, <아바타>에서 제이크가 이크란과 교감하는 장면을 빼닮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스타워즈> 스핀오프였다면 어땠을까 싶다. <스타워즈>의 일부라면 익숙하거나 진부한 설정도 '<스타워즈>니까'라는 이유로 용인했을지 모른다. 어쩌면 <로그 원>이나 디즈니+ 드라마 <안도르>처럼 호평을 받았을 수도 있다. 제다이와 시스의 대결, 광선검 액션을 반복하는 대신 색다른 이야기를 보여준 것만은 확실하니까.
애초에 기획과 아이디어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수 있다. <스타워즈> 자체가 서부극에 근간을 뒀고, 조지 루카스도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로부터 영감을 받은 흔적이 많기 때문. 그러니 '초심에 가까워진 시리즈' 같은 식의 평가가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스타워즈>가 아니면서 <스타워즈>를 닮으려 애쓰고 있으니, 모두 무의미한 가정일 뿐이다.
종합하면, <레벨 문>은 넷플릭스의 <스타워즈>라는 야심만 있을 뿐, 야심을 실현할 방법론은 볼 수 없는 영화다. 잭 스나이더에게 과제를 잔뜩 안겨준 듯 보이기까지 한다. 언뜻 흥미로워 보이는 아이디어의 스케일만 키우는 대신, 이야기의 밀도를 높이는 근본적 쇄신이 먼저라는 사실을 증명했기 때문. 그래야 잭 스나이더와 넷플릭스가 각각 삼부작으로 계획한 <아미 오브 데드>와 <레벨 문> 시리즈도 안정적으로 확장될 수 있을 테니.
Dreadful 끔찍한
<스타워즈>를 기대해도, 잭 스나이더를 기대해도 실망스러운 2시간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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