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재학 시절 논문을 쓸 때 찾아듣는 오르골 소리 리스트 중에는 ‘바다가 보이는 마을’이 있었다. 이 음악이 나의 집중력을 최대로 끌어올려주는 bgm이었는데 생각해보니 마녀 배달부 키키를 본 기억이 없어서 허겁지겁 넷플릭스에서 찾아봤었다.
영화 《마녀 배달부 키키》 시놉시스
13살 초보마녀 키키의 아주 특별한 마법 같은 모험! 사랑스러운 초보마녀 ‘키키’는 검은 고양이 ‘지지’와 함께 빗자루를 타고 마녀 수련을 떠난다.항구 마을에 불시착한 키키는 첫날부터 우여곡절을 겪지만, ‘배달’에 재능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본격적인 마법 수련을 시작한다.
*본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옛것의 도움, 그리고 자신의 능력
키키가 마녀수련을 떠나긴 직전 키키의 엄마는 빗자루를 자신의 것으로 들고 가라고 말한다. 이에 키키는 자신이 만든 빗자루가 좋다고 말하지만 엄마는 자신의 것이 훨씬 크고 길이 잘 들어졌으니 타기 편할 것이라며 다시금 추천한다.
이 장면을 보면서 꼭 옛것이 나쁘고 새것만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오랜 세월을 버텨온 것인만큼 축적된 지혜가 있을테니 현재의 상황에 맞게 현재의 사람이 잘 활용하면 된다는 교훈을 주고 있었다.
이 장면에서 좋았던 것은 키키에게 엄마가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것이 좋다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키키에게 선택권을 주면서 키키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끔 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과거의 사람의 강요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판단을 할 수 있게끔 믿는다는 것이 좋았다.
좋아하는 것이 직업이 되었을 때
마녀 가문에서 마녀로 태어난 키키는 태어날 때부터 빗자루를 통해 날 수 있었다. 남들에게는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이 흠모의 대상일 수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키키는 이런 말을 한다. “직업이라서 매일 재밌는 건 아니야.” 이 말을 듣는 순간 다른 말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다라는 말. 그런데 과연 그게 행복할까?
키키의 말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고 그것을 통해 경제 활동을 해야할 때는 당연히 따라오는 책임과 의무가 생기기 마련이다. 나는 그런 의무감이 다가올 때마다 과연 내가 이걸 진짜 좋아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그게 커져가다보면 더 이상 하기 싫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아직까지는 정말 좋아하는 것을 그저 취미로만 남겨두고 싶은 생각이 아직 크다.
부모의 믿음
영화 《마녀 배달부 키키》를 보면서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는 부모의 태도였다. 13살이라면 한국나이로 이제 초등학교 6학년이 된 어린 나이다. 이 아이가 독립을 하겠다고 수련을 떠나는 키키를 향해 전혀 불안해하지 않고 키키가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는 부모의 태도 아직까지도 기억에 선하다.
정확히 어딘지는 모르겠는데 어떤 글에서 부모가 자녀를 위해 할 역할을 자녀가 살아갈 길을 앞에서 진두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힘들고 두려워서 뒤를 돌았을 때 그 자리에서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응원과 지지를 해주는 역할이라고 했다.
영화 《마녀 배달부 키키》에서는 그 모습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어린 아이를 밖에 내보내는 것이기에 불안하지만 자녀에게는 그런 불안함을 티내지 않고 잘 할 수 있다는 지지를 보내는 것. 그리고 작은 일 하나라도 키키 스스로가 해낼 수 있도록 뒤에서 묵묵히 지켜봐주고 닦달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부모들이 이 작품을 반드시 봐야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영화 《마녀 배달부 키키》는 성장을 통해 가족 간의 관계에 대한 교훈을 주는 따뜻한 애니메이션이다.
“1948년, 국악원에서 여성들만이 떨어져 나와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해방 이후 전통적 규범에서 벗어난 새로운 공연 예술이 탄생했으니, 그것이 바로 여성국극이다. 여성국극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남녀 모든 배역을 여성 배우들이 도맡았으며, 남자 주인공을 니마이(二枚), 희극적인 감초 조연을 산마이(三枚, さんまい), 악역을 가다끼(敵, がたき)라 불렀다고 한다. 해방 직후에도 국극 용어는 한글로 정제되지 못한 채 일본어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겼다.
준수한 외모에 노래와 춤은 물론이요 뛰어난 연기력까지. 여성국극단은 당대 최고의 올라운더들이 모인 집합소였다. 그중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은 단연 니마이(二枚) 배역을 맡은 배우들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공연 예술이 대중성을 확보하려면 여성 팬층의 지지가 필수적인데, 여성국극은 니마이(二枚) 배우들의 인기를 기반으로 당대 공연 예술로서의 대중성과 입지를 굳혀 나갔다.
그러나 니마이 배우들의 인기는 단순한 외적 매력에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당시 가부장적 남성상과는 결이 다른, 다정하면서도 책임감 있는 새로운 남성상을 제시하며 여성 관객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성인 남성의 강직하고 무거운 이미지 대신, 섬세하면서도 강한 카리스마를 갖춘 인물로 무대 위에 존재했다. 특히, 검무와 격투 장면에서 보여 주는 신체적 퍼포먼스는 강인함과 우아함을 동시에 부각하며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러한 요소가 결합되면서 니마이 배우들은 단순한 스타를 넘어, 여성국극이 만들어 낸 독자적인 젠더적 판타지와 서사의 중심이 되었다.
여성국극과 티켓 파워: 과거와 현재
여성국극의 1세대 레전드로 불리는 조영숙 배우는 한 다큐멘터리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이 빠지면 공연장 바닥에는 팬들이 두고 간 선물들로 가득했다. 특히 스타킹 같은 생필품을 돈 주고 사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이는 오늘날의 조공 문화와 유사하다. 무대 위 빛나는 스타를 위해 아낌없이 마음을 표현하는 팬들, 그리고 공연장을 가득 채운 관객들. 여성국극이 한때 현재의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지점은 문화 예술계에서 여성 관객의 강력한 티켓 파워가 오랜 시간 이어져 왔다는 사실이다. “지난 2021년 인터파크 데이터에 따르면, 공연 예매자의 75%가 여성이었으며, 20~30대 여성층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무대가 바뀌고 시간이 흘러도, 여성 관객들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공연 예술을 지탱하고 있었다.
여성 관객들이 공연 예술을 소비하는 방식은 단순히 볼거리를 넘어서, 작품과 정서적으로 교감하고 의미를 찾으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이들은 감동적인 서사와 캐릭터에 몰입하며, 예술을 통해 감정을 확장하는 경험을 중시한다. 또한 작품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 단순한 오락보다는 의미 있는 작품에 강한 지지를 보낸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 <더 폴(The Fall): 디렉터스컷>의 흥행과도 맞닿아 있다. 여성 관객의 감수성은 문화적 유산처럼 계승된다고 볼 수도 있다. 여성국극이 한 시대를 풍미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전통과 예술을 지키는 사람들
여성 팬들의 열렬한 지지를 먹고 자란 여성국극의 전성기는 불꽃같았다. 1~2세대를 거치며 배우들의 헌신으로 찬란하게 타올랐지만, 그 불길은 너무나도 빠르게 꺼져버렸다. 높은 인기를 구가하던 여성국극이 급격히 쇠락한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지만, 급변하는 사회 풍속과 보수적인 정책 기조 속에서 국가 지원에서 배제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로 인해 명맥은 단절의 위기를 맞았고, 한때 문전성시를 이뤘던 여성국극은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국극을 되살리기 위해 사활을 걸고 계보를 잇는 이들이 있다. 꺼져가는 불씨를 다시 살리려는 그들의 노력 속에서, 여성국극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이야기로 남아 있다.
"누군가는 여성국극을 해야 하지 않겠어?"
여성국극의 찬란했던 전성기를 회고하는 것만큼, 그 현재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일도 필요하다. 다큐는 과거와 대조되는 여성국극이 직면한 현실을 조명한다. 소규모 지역 축제에서 공연을 올리는 배우들. 그러나 관객들은 흥미를 보이다가도 금세 등을 돌린다. 한때 여심을 뒤흔들었던 1~2세대 여성국극의 전성기를 떠올리면 격세지감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여성국극을 할 수 있을까. 그래도 누군가는 여성국극을 해야 하지 않겠어. 3년만 해보자.”
끊임없이 되묻는 질문들. 예인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나 어려운 일이라서, 작금의 배우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담보하여 고군분투한다. 생계와 예술 사이의 고민, 변하는 시대 속에서 여성국극의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 그러나 이들이 그 시련을 견뎌내는 원동력 역시 ‘여성국극을 해야 한다’는 절박한 신념과 사랑이다. 그 절박함은 1세대, 2세대, 그리고 3세대를 잇는 ‘레전드 춘향전’을 탄생시켰고, “현재 여성국극제작소가 안산에 뿌리를 내리며 제도권 안에서 보호받을 기반을 마련했다.” 다큐 제작 기간 동안3세대 배우 박수빈과 황지영이 주도적으로 이끌어낸 성과이기도 하다. 여성국극은 더 이상 과거의 유산이 아니다. 새로운 2막을 위한 그 시작점에 다시 섰다. 일본의 다카라즈카 가극단처럼, 한국의 여성국극도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아 새로운 전성기를 써 나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