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4-08-29 09:04:57
한국이 싫어서 | 철 지난 신조어를 생생하게 되살리다
<한국이 싫어서>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한 20대 후반 '계나'(고아성). 필사적으로 일해서 학자금 대출도 다 갚고, 남자친구 '지명'(김우겸)과의 미래도 계획 중이던 그녀에게 고민이 하나 생겼다. 바로 한국이 싫다는 것. 회사에서는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부품에 불과하고,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더 큰 꿈을 꾸지 못하는 그녀는 결국 결단을 내린다. 한국을 탈출하기로.
뉴질랜드로 건너 가 대학원 생활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계나. 어딘가 이상하면서도 믿음직한 친구 '재인'(주종혁)도 만나고, 자유롭게 연애도 하며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낸다. 한국을 떠나 마침내 낙원에 도착한 듯 보이는 그녀. 하지만 그녀의 마음 한 편은 여전히 헛헛하다. 이에 그녀는 또 한 번 여행길에 오른다.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
스크린 위에 펼쳐진 스토리텔링 저널리즘
스토리텔링 저널리즘. 근래 몇 년간 해외 언론에서 시도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기사다. 주요 정보를 중요도 순서로 나열한 스트레이트 형식에서 벗어나 독자가 사건에 감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게 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정보의 홍수인 21세기에 정보 전달만으로는 언론사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함의 산물이기도 하다.
스토리텔링 기사의 핵심은 '보여주기'다. 사건을 장기간 관찰한 후 생동감 있는 글로써 보여주는 데에 집중한다. 당사자, 전문가 인터뷰만 따는 게 아니라 취재원의 일상을 같이 따라다니며 그 일상을 소설처럼 긴 흐름에 담는다. 독자 스스로 사건에 대해 판단할 수 있도록 현장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즉, 글로 만드는 다큐멘터리라 할 수 있다. 자연히 분량이 상당하다. 뉴욕타임스의 스토리텔링 기사는 A4 30페이지를 훌쩍 넘는다.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자 장강명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한국이 싫어서>는 스토리텔링 기사 한 편을 스크린에 띄운 것 같은 작품이다. 소재는 새롭지 않다. '헬조선'이라는 말 자체가 2010년대 후반 이후로는 잘 안 쓰일뿐더러, 2030 청년의 고통은 여러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였으니까. 그런데도 <한국이 싫어서>는 흡입력이 강하다. 뻔하지만, 107분이 지루하지는 않다. 그 이유는 '생생함'에서 찾을 수 있다.
철저한 보여주기
사실 <한국이 싫어서>의 첫인상은 좋지 않다.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이 싫고, 한국에서는 못 살겠어서 한국을 떠난다는 계나의 첫 내레이션만 들어도 직설적이고, 상투적이기 때문. 인천에서 강남까지 출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까지만 보면 한국의 흔한 사회 고발 영화를 보는 듯하다. 한국이 서열, 계급 사회라고 비판하는 대목처럼 전체적인 분위기에 맞지 않게 튀어 나가는 순간도 종종 있다.
하지만 장건재 감독은 충실히 '보여주면서' 단점을 상쇄한다. 계나가 한국에서 버터내야 했던 일상의 여러 단면을 생동감 넘치게 묘사한다. 혜나와 엄마는 멸치 똥을 따면서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대화를 나눈다. 참고 견디면 보상이 올 테 결혼해서 안정적인 삶을 꾸리라는 엄마. 미래에 보상이 있을 거라는 희망 자체가 없는 계나. 중간중간 멸치를 집어 먹는 현실적인 대화를 보다 보면 이 모녀의 충돌을 그저 남 일 취급할 수가 없다.
그 외에도 2030 세대라면 누구나 한 번은 겪었을 에피소드가 쏟아진다. 매뉴얼대로 일하는 계나와 그녀가 융통성이 없다며 혼내는 직장 상사. 부유한 남자친구 가족과의 식사 후 서러움과 분노 때문에 눈물을 터뜨리는 계나. <한국이 싫어서>는 그녀의 삶을 다각도로 비추며 관객과의 교집합을 가능한 많이 만든다. 근래 한국 영화 중 가장 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장강명 작가가 기자 출신이라는 사실이 새삼 떠오르기도 한다.
한국은 싫지만, 여전히 한국인이다
균형 감각도 인상적이다. 단순히 한국 사회를 비판하거나 헬조선과 탈한국을 긍정하며 사회 담론을 일차원적이고 단편적으로 소비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더 넓은 시점에서 헬조선이라는 현상을 조망한다. 어휘 너머에 있는 현실을 포착하려 애쓴다. 일례로 영화는 계나의 선택을 무조건적으로 긍정하지 않는다. 뉴질랜드에서 행복을 찾지 못한 사례를 거듭 보여준다.
계나의 정착을 도운 일가족은 정작 본인들이 뉴질랜드에 적응하지 못한 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낙원 같아 보이던 오클랜드에는 갑자기 지진이 발생한다. 인종차별을 비롯해 예상치 못한 사건 사고도 계나를 덮친다. 이처럼 카메라는 한국만 떠나면 행복할 것 같지만, 마냥 달콤하지는 않은 탈한국의 현실을 놓치지 않는다. 즉, 한국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발버둥 치는 일상을 카메라에 담는 셈이다.
물론 차이는 있다. 서울 시퀀스가 무채색톤인 반면, 뉴질랜드 시퀀스는 더 포근하고, 따뜻하다. 그저 버티기 바쁜 서울과 달리, 뉴질랜드에서는 자기 삶을 돌아볼 여유가 있다. 따라서 <한국이 싫어서>는 한국이 싫지만, 한국인이라는 소속감을 놓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어디에도 닻을 내리지 못한 소속감이 어떤 의미인지를 반추하게 만든다.
그래서일까? <한국이 싫어서>는 주인공의 얼굴을 정면으로 자주 담는다. 대화를 나눌 때도, 영상 통화를 할 때도 인물의 표정과 인상을 보여주려 한다. 한국에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막걸리를 같이 마실 관계가 있는 반면, 타지에서는 아무리 행복해도 무언가를 놓친 그 얼굴을 대조하려고 노력한다. 이 지점에서 고아성은 유달리 빛난다. 그녀가 2030 세대 중 누군가의 삶을 자기 얼굴에 모두 녹여낸 것처럼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진짜 탈한국과 행복
그 과정에서 <한국이 싫어서>는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특히 한국을 떠났지만, 뉴질랜드에 끝내 정박하지 못한 계나를 통해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묻는다. 다른 한국인들처럼 대학원 학위를 딴 뒤 취업해서 영주권을 얻을 계획인 계나. 영화는 그 선택조차 정답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지명만 하더라도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둔 대학원을 포기한다. 대신 아르바이트 중 흥미를 붙인 요리를 배워 셰프가 되기로 결정한다.
계나도 마찬가지다. 회계학 학위를 딴 그녀는 뉴질랜드를 떠난다. 뉴질랜드에서 계획한 삶조차도 행복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을 떠나서도 방황을 거듭하는 두 청년을 보다 보면 '한국이 싫어서'라는 제목의 진의가 얼핏 보이기도 한다. '한국이 싫다'는 말은 길이 잘못됐다고 느꼈을 때, 선택한 길 위에서 행복할 수 없다고 직감했을 때, 길을 자유롭게 바꾸지 못하는 '한국이 싫다'는 말이 아닐까 싶다.
계나의 대학 동기인 '경윤'(박승현)이 오리지널 캐릭터로 추가된 맥락과도 맞닿아 있다. 어찌 보면 그는 가장 한국적인 20대의 전형을 보여주기 때문. 특히 계나가 공무원 시험 N수생인 경윤과 꿈속에서 나누는 대화가 가슴에 꽂힌다. 학원가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만난 계나와 경윤. 그는 모두가 불안해하는 이곳에서 벗어나 전망이 탁 트인 곳으로 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한다. 이번 시험이 마지막 기회라고도 덧붙인다.
그런데 계나가 꿈속에서 그를 만날 때 그는 거듭된 불합격 때문에 이미 목숨을 끊은 상태다. 그는 한 번 선택한 경로가 잘못되었을 때 그것을 쉽사리 돌리지 못하는 현실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계나가 뉴질랜드에 정착하는 대신 떠나기로 선택한 것도 꿈속에서나마 그와 나눈 대화를 기억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칫 한없이 비관적으로 흐를 수 있는 현실 인식을 영화적으로나마 치유하려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위화감이 없다는 씁쓸함
사실 <한국이 싫어서>는 끝맛이 씁쓸한 영화다. 만듦새가 마냥 매끈하지는 않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은 일장일단이 있다. 계나의 일상을 극적으로 변모시키지만, 한편으로는 불친절하다. 정확한 시간대를 알려주다가 점차 건너뛰는 대목이 많아지기 때문. 벌린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이 싫어서>의 끝맛이 씁쓸한 진정한 이유는 완성도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영화의 원작이 10년 전이라는 사실 자체가 씁쓸하다. 이 작품은 시간대가 상당히 모호하다. 그나마 계나와 뉴질랜드에서 만나 친구가 트럼프와 김정은에 관해 대화한다는 점에서 2018년이나 19년 언저리로 추정할 수는 있다.
그런데 2024년이 배경이라 해도 영화 내용은 위화감이 없다. 굳이 '헬조선'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아도 10년 전이나, 5년 전이나, 지금이나 청년들이 체감하는 문제점과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2024년인데도 10년 전 신조어와 이야기에 공감하는 아이러니만으로도 씁쓸함이 혀끝까지 가득 맴돈다.
Acceptable 무난함
10년이 지나도 달라진 게 없다는 비극을 마주하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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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토리텔링은 이렇게 하는 것
<행복의 노란 손수건>, 담백한 스토리텔링의 정석
오는 4월 2일, <행복의 노란 손수건>이 재개봉한다. 1977년 개봉한 야마다 요지 감독의 이 작품은 당시 일본 아카데미에서 8개 부문을 석권하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최근 과거 명작들의 재개봉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 작품 역시 그 흐름에 합류했다.
세 인물의 교차된 서사, 그리고 중심이 되는 유사쿠
<행복의 노란 손수건>은 세 인물, '하나다 킨야(타케다 테츠야)', '오가와 아케미(모모이 카오리)', '시마 유사쿠(타카쿠라 켄)'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서사는 킨야가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고 홧김에 신차를 몰고 홋카이도로 떠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는 유쾌하면서도 한심한 모습으로 영화의 분위기를 환기한다.
아케미는 열차 내에서 간식을 파는 일을 하는 도중에 남자친구의 배신을 알게 된다. 배신의 상대가 자신의 지인이었으며, 그 사실조차 또 다른 지인을 통해 듣게 된다는 점에서 그녀의 상처가 더욱 두드러진다. 충격에 빠진 아케미 역시 홋카이도로 향한다.
한편, 유사쿠는 신비로운 인물이다. 자신의 과거를 직접적으로 밝히지 않으며, 영화 역시 관객에게 전지적 시점을 제공하지 않는다. 유사쿠의 서사는 점진적으로 전개되며, 이를 통해 관객은 캐릭터와 함께 정보를 습득하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세 인물의 이야기가 개별적으로 전개되다가 홋카이도라는 공간에서 조우하며 하나의 이야기로 결합된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킨야의 서사가, 이후 아케미의 서사가 더해지며, 마지막으로 유사쿠의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서사의 무게는 유사쿠에게 집중되며, 킨야와 아케미는 비교적 가볍게 그려진다. 그러나 이들의 존재는 단순한 조연이 아니다. 코믹한 장면을 통해 극의 분위기를 조절하고, 유사쿠의 서사가 전개될 수 있도록 보조 역할을 한다.
특히, 카메라의 움직임은 이러한 구조를 효과적으로 뒷받침한다. 유사쿠가 먼저 들어간 음식점에 킨야와 아케미가 들어오고, 카메라는 이들의 대화를 포착하다가 자연스럽게 유사쿠에게 시선을 옮긴다. 인물 간 관계성을 구축하는 동시에, 유사쿠의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강조하는 연출이 돋보인다.
아케미의 서사 부족, 그리고 시대적 한계
그러나 아케미의 서사는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는 그녀를 '남자친구에게 배신당한 여성'이라는 틀 안에 가둔 채, 이후 그녀의 내면을 깊이 탐구하지 않는다. 극 중 아케미는 유사쿠의 과거를 듣고 공감하며, 그의 용기를 북돋우는 역할에 머문다. 그녀의 이야기가 보다 주체적인 서사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점은 아쉽다.
이러한 한계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도 맞닿아 있다. 영화 초반부부터 여성에 대한 경멸 어린 시선이나, 성적 불쾌감을 유발하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당시에는 이러한 요소가 코믹한 장면으로 소비되었지만,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적 요소로 해석될 수 있다.
결국 아케미는 극의 후반부에서 유사쿠의 서사를 지탱하는 인물이 된다. 그는 유사쿠의 행동과 선택을 평가하고, 그의 변화를 돕는다. 그러나 정작 아케미 자신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설명은 부족하다. 그녀가 유사쿠에게 공감하는 이유와, 그의 변화에 동참하는 과정이 보다 설득력 있게 그려졌다면 영화는 더욱 힘 있는 서사를 구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유사쿠의 서사와 자기연민의 문제
이러한 아쉬움을 지적하는 이유는, 결국 영화가 품고 있는 문제의식이 유사쿠의 자기연민과 이를 정당화하는 서사에 있기 때문이다. 유사쿠는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며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극 중 인물들은 그의 변화에 힘을 실어준다. 킨야 역시 이러한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특히, 유사쿠의 연민이 강조될수록 아케미의 역할이 단순한 조력자로 축소된다는 점이 문제적이다. 만약 영화가 그녀의 서사를 보다 깊이 다루고, 그녀가 유사쿠를 이해하는 과정에 대한 서사적 근거를 제공했다면, 결말은 더욱 강한 울림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러한 기회를 놓쳤다. 그 결과, 극의 후반부는 다소 공허하게 느껴진다.
담백한 스토리텔링, 완급 조절이 돋보이는 영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의 노란 손수건>은 담백한 스토리텔링과 뛰어난 완급 조절을 통해 높은 완성도를 갖춘 작품이다. 세 인물의 이야기는 하나의 점에서 만나고, 그 점에서 출발한 선은 '노란 손수건'을 향해 나아간다.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는 영화는 아니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치밀하다. 캐릭터를 쫓는 카메라의 움직임, 노란색을 활용한 색채 연출, 감정을 과하게 조율하지 않는 플롯의 전개 방식 등은 이 작품이 왜 명작으로 평가받는지를 보여준다.
재개봉 이후, 이 작품이 현대의 관객들에게 어떤 울림을 줄 것인지 궁금해진다. <행복의 노란 손수건>은 결국 스토리텔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는 작품이다. 오는 4월 2일, 그 답을 다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 자격으로 초청받은 시사회를 다녀온 뒤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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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하디 흔한 천재의 이야기에서의 포인트
흔하디 흔한 천재의 이야기에서의 포인트
영화 <마거리트의 정리> 리뷰
감독] 안나 노비온
출연] 엘라 룸프, 장 피에르 다루생, 줄리앙 프리종
시놉시스] 명문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가장 인정받는 수학 천재 ‘마거리트’는 세계 난제 ‘골드바흐의 추측’에 관한 연구를 증명하는 세미나에서 오류를 범하고 만다. 그날 이후 충격에 빠져 학교를 그만둔 ‘마거리트’는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며 변화하기 시작하는데... “내가 증명하고 싶은 건 나일지도 몰라”
#스포일러 주의#
사회성 없는 천재를 표현하다
많은 영화에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천재들의 이야기다. 영화 마거리트의 정리 역시 마찬가지다. 마거리트는 수학교사 엄마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수학에 두각을 보이고 할 줄 아는게 수학 밖에 없었던 수학이 인생 그 자체였던 삶을 살아온 소녀였다. 빠른나이에 대학을 졸업하고 25살에 박사과정 졸업반에 들었으니 말이다. 같은 학교를 다니는 많은 이들이 수학 천재 마거리트라며 그녀를 추켜세우고 그녀는 묵묵히 자신의 증명을 열심히 탐구한다.
마거리트 역을 맡은 엘라 룸프의 연기를 보면서 이 배우가 수학과 출신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수학 천재 그 자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인터뷰 시간 조차 아까워하며 수학을 사랑하는 마거리트의 모습, 언제나 정답을 정답을 맞춰왔고, 정답을 찾아온 그녀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많은 이들 앞에서 오류를 범했을 때 밀려오는 자괴감, 그리고 수학 외의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굉장히 서툴고 순진한 모습을 너무나도 과장된 것이 없이 잘 표현하고 있었다.
사실 영화 마거리트의 내용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내용이다. 천재성을 보이는 요소가 '수학'이라는 장르만 바뀔 뿐 천재들이 보이는 양상들은 거의 똑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신선한 마스크의 엘라 룸프가 선보이는 연기는 사회라는 것이 버거운 천재의 어눌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그녀의 삶에 대해 관객이 공감하게끔 만들었다. 관객이 수학자여서 수학을 증명해내는 과정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같이 공감하지 못하더라도 그녀의 감정선을 따라가며서 그녀의 삶을 공감하게끔 만든 것은 그녀의 연기력이 일등공신이었다고 생각한다.
하나에서 둘이 되다영화 마거리트의 정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마거리트가 타인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걸 표현하는 장면이었다. 마거리트는 자신의 논문 주제였던 증명을 세미나에서 발표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자신의 지도교수가 새롭게 영입해온 학생이 상수C를 어떻게 계산하냐며 반문을 던진다. 이에 증명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마거리트는 휘청거리며 칠판에 손을 짚는다. 그 과정에 칠판에는 마거리트의 손바닥 자국이 남고, 그녀를 둘러싼 것은 응원이 아닌 비난만이 남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는 이러한 상황의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지도교수 베르너를 찾아가지만 베르너는 증명이 틀렸다고 해서 세미나를 그렇게 나갔으면 안됐다며 그녀를 질책하고 다른 지도교수와 함께 일하기를 권한다. 이에 충격을 받은 마거리트는 그길로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하고 짐을 싸서 무작정 학교를 나와버린다. 그렇게 수학과 담을 쌓고 지낼 것 같았지만 그녀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마작을 시작하고, 마작의 규칙이 수학과 연관되어 있고, 그리고 자신의 연구 과제였던 골드바흐의 추측과 굉장히 밀접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렇게 다시 열심히 연구에 매진하지만 혼자 힘으로는 무리라는 생각에 자신에게 그 오류를 지적했던 줄리앙을 찾아간다.
그렇게 그 둘은 동료로서 함께 골드바흐의 추측을 연구해나가고, 줄리앙은 마거리트와 천천히 소통하면서 그녀가 사회에 나올 수 있도록, 그리고 사람과 소통하는 방식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받아들였을 때 칠판에 묻은 손바닥은 2개였다. 그렇게 칠판을 통해 소통하는 마거리트가 의지할 대상과 소통할 대상이 생겼다는 것을 영화 속에서는 이렇게 보여주고 있었다.영화 마거리트의 정리는 특별한 소재와 주제는 없었지만 엘라 룸프의 녀기력과 이를 받쳐주는 장치들의 조화가 영화를 지루하지 않게 끝까지 몰입할 수 있게 만들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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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여성 스포츠 영화의 유의미한 변곡점
7★/10★
근래 개봉한 한국의 여성 스포츠 영화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야구소녀〉였다. 여성 야구 선수가 남성들이 절대 다수인 야구판에서 2군 프로 무대에 데뷔하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영화다. 주인공 수인의 진심과 도전, 그녀를 ‘여성’이 아닌 ‘야구인’으로 대하는 소수의 남성 친구와 코치, 그들과 수인의 관계성 등이 매력적인 영화였다. 〈모래바람〉은 한국 여성 스포츠 영화 계보에서 또 하나의 유의미한 변곡점이 될 만한 영화다. 두 영화를 비교해보면 그사이 프로 여성 선수에 관한 우리 사회의 관념과 지향이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다.
〈야구소녀〉에는 계보가 없다. 수인은 늘 최초고, 혼자다. 그러나 〈모래바람〉에는 계보가 있다. 20년간 여자 씨름 선수로 활약해온 선수가 있고(송송화), 모든 선수가 하나같이 ‘우상’, ‘전설’로 꼽는 절대적 강자(임수정)가 있다. 그리고 이들을 목표로 땀 흘리며 도전하는 후배 선수들(양윤서, 김다혜, 최희화)이 있다. 영화는 1999년 여자 씨름 선수 등록이 가능해진 이후부터 쌓여온 여자 씨름 선수의 계보를 담아낸다. 여성 스포츠 영화에서 계보는 대체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과 같은 예외적 선례가 있기는 했지만, 대체로 여성 스포츠 영화는 계보가 없는 상태에서 사회의 편견과 자기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에 몰두하는 선수 한 명에게 주로 카메라의 초점을 맞춰왔다. 그러나 이제 여성들은 홀로 고군분투하지 않는다. 여성들에게도 롤 모델이 있다. 그것도 끝내주는 커리어를 가진 롤 모델이.
계보 ‘있음’은 땀 흘리는 여자들이 맺는 유대의 근거이기도 하다. 역시 〈야구소녀〉에는 없던 것이다. 동료인 동시에 라이벌인 여자 씨름 선수들은 서로를 격려하면서도 경쟁에는 모든 것을 건다. 다른 수많은 남성중심적 언어와 마찬가지로, 스포츠‘맨’십이라는 표현 역시 새로운 대체 용어를 고민해봐야 한다.
나이가 들어 은퇴했거나 은퇴를 앞둔 선수들의 존재도 〈야구소녀〉에는 없고 〈모래바람〉에는 있다. 20년 동안 선수로 활약한 후 은퇴한 송송화는 현재 협회 이사로 활동하며 심판과 코치에 도전하고 있다. 여자 씨름으로의 진입을 꿈꾸는 어린 여성에게 20년간 선수로 활동한 사람의 존재는 그 자체로 용기를 줄 수밖에 없다. 여자 씨름판의 GOAT인 임수정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언제나 당연히 1등이었던 임수정이 후배들의 도전에 왕좌를 빼앗기는 상황에서 그녀가 느끼는 부담과 좌절의 순간을 밀도 있게 담아낸다. 부상과 기량 하락의 악조건 앞에서도 관성에 젖어 운동하기를 거부하고 칠전팔기 끝에 마침내 정상에 다시 오르고 마는 그녀의 이야기는 송송화의 이야기와 어우러져 여성 씨름인들이 꿈꿀 수 있는 다양한 미래의 가능성을 펼쳐낸다.
〈모래바람〉에 〈야구소녀〉에는 없는 요소가 있다는 말이 전자가 후자보다 낫다는 말은 아니다. 각자의 완성도를 갖춘 두 영화는, 다만 그사이에 많은 것이 변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실감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핵심은 더는 ‘독고다이’할 필요가 없다는 것. 계보와 동료가 있는 여성 선수들은 서로에게서 자신이 나아갈 길을 가늠해볼 수 있고, 그 과정에서의 고민을 나누며 함께 성장할 수 있다. 최근 여성 생활 스포츠인이 크게 늘었다. 〈골 때리는 그녀들〉, 〈무쇠소녀단〉처럼 아마추어 여성 스포츠인들이 동료들과 함께 도전하는 방송도 잇따라 제작되었다. 그러니까, 〈야구소녀〉에서 〈모래바람〉으로의 여정은 여성 스포츠인, 나아가 모든 여성이 함께 만들어온 변화를 대변한다.
송송화는 씨름 선수인 동시에 주부, 엄마, 아내, 며느리였다. 임수정은 지금도 ‘시집은 언제 가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여성이자 씨름 선수로서 이들은 종종 모순된 요구를 동시에 받았지만 동료들과 함께 ‘씨름하며’ 자기 길을 만들었고, 그 길은 이제 모든 여성 씨름 선수의 길이 되었다. 〈모래바람〉은 씨름판에 카메라를 줌인하여 사회 변화의 커다란 흐름을 가늠케 해주는 영화다. 스포츠 영화의 쾌감과 시의성을 고루 갖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감각하게 해주는 영화인 것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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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썬더볼츠* | 버려진 부품들이 이뤄낸 MCU의 시네마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레드룸이 파괴된 후 CIA 국장 '발렌티나'(줄리아 루이드라이퍼스) 휘하 비밀 요원이 된 '옐레나'(플로렌스 퓨). 반복되는 임무와 외로움에 지친 그녀는 러시아 슈퍼 솔져이자 양부, '알렉세이/레드 가디언'(데이비드 하버)을 찾아간다. 그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뒤 옐레나는 결심한다. 언니 나타샤처럼 양지에서 활동하기로. 발렌티나도 최근 중단된 프로젝트의 증거를 훔치려는 '고스트'(해나 존케이먼)를 제거하는 임무를 수행한다는 조건으 그녀의 선택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지하 저장고에 잠입한 옐레나는 예상 못 한 상황을 마주한다. 본인과 고스트뿐만 아니라 '존 워커'(와이엇 러셀), '태스크마스터'(올가 쿠릴렌코)가 서로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모인 것. 더 나아가 그녀는 저장고에 남은 자료를 통해 발렌티나가 어벤져스보다 강력한 영웅 '밥/센트리'(루이스 풀먼)를 만들어 냈음을 깨닫는다. 이에 그녀는 다른 이들과 협력해 저장고를 탈출한 뒤 발렌티나의 음모를 세상에 알리려 한다. 하원 의원이 된 윈터 솔져 '버키'(세바스찬 스탠)의 도움을 받아서.
MCU의 꼬리표
역대 영화 프랜차이즈 중 흥행 수익 1위를 기록하며 영화계의 한 획을 그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이하 MCU). 하지만 MCU에는 달갑지 않은 꼬리표가 늘 따라붙었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말을 빌리자면 MCU는 액션과 유머처럼 즉각적으로 휘발되는 쾌감을 먼저 추구하는 '테마파크'이지, 한 인간의 삶과 감정적 경험을 공유하거나 성찰하는 '시네마'가 아니라는 것.
물론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로는 MCU도 비평적으로 인정받은 감독들의 권한을 최대한 보장하며 꼬리표를 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역효과뿐이었다.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클로이 자오의 <이터널스>도, 아카데미 각색상을 수상한 타이카 와이티티의 <토르: 러브 앤 썬더>도, 슈퍼히어로 영화의 거장 샘 레이미의 <닥터 스트레인지와 대혼돈의 멀티버스>도 산만하거나, 유치하거나, 지루하다는 이유로 혹평을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숱한 실패 끝에 MCU는 마침내 '테마파크' 밖으로 한 발짝 내디딘 듯하다. MCU에서 히어로가 될 수 없었던 낙오자들을 모은 팀업 무비, <썬더볼츠*> 덕분이다. 잘해야 MCU 판 <수어사이드 스쿼드> 혹은 지구 버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일 거로 전망한 <썬더볼츠*>는 현대인의 내면을 관통하는 섬세하고 야심 찬 서사를 선보이며 불완전하게나마 MCU의 '시네마'를 선보이는 데 성공했다.
옐레나의 그림자
<썬더볼츠*>는 첫 장면부터 이전 MCU 작품과는 다른 이야기를 보여주겠다는 야심을 드러낸다. 기존 마블 스튜디오 로고가 그림자로 물드는 연출이 대표적이다. 이는 <수어사이드 스쿼드>처럼 '비인가 프로젝트를 숨기려는 첩보 기관이 빌런들을 소집하고, 그들이 하나의 팀을 이룬 뒤 첩보 기관과 감당 못 할 적에 함께 대항한다'라는 전개를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에 가깝다.
이어지는 옐레나의 내레이션은 그 선언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그녀는 쿠알라룸푸르의 한 고층 빌딩 옥상에서 낙하하여 실험실에 잠입한 뒤 증거를 지우는 임무를 수행한다. 이때 그녀는 언니 '나타샤'(스칼렛 요한슨)를 잃은 후의 외로움, 목적 없이 반복되는 삶에 마모되면서 느껴지는 공허함에 대해 내레이션으로 토로한다. 폭탄을 설치한 뒤 실험실에 혼자 남은 기니피그를 챙겨서 나오는 모습도 그녀의 고독함을 방증한다.
액션 시퀀스의 연출 또한 그녀의 내레이션을 시각적으로 치환하여 직관적으로 제시한다. 카메라는 그녀가 얼마나 멋지게 요원들을 해치우면서 실험실에 잠입하는지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긴 복도에서 그녀가 싸우는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옐레나가 아니라 옐레나의 그림자가 움직이는 모습에 집중한다. 그녀가 임무를 수행하고, 사람을 죽이고, 싸우면 싸울수록 점점 그림자가 되어가는 그녀의 상황을 각인시킨다.
이처럼 옐레나의 시점에서 진행된 오프닝 시퀀스는 <썬더볼츠*>의 의도를 명확히 규정한다. 빌런이나 안티히어로가 모이는 이벤트 그 자체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옐레나처럼 외롭고 공허한 이들의 이야기를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다. 이는 인지도가 가장 높은 버키 대신 옐레나를 화자로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발렌티나에게서 받은 임무 외에는 목적이 없고, 가족도 없는 그녀야말로 영화의 메시지에 가장 적합한 캐릭터니까.
버려진 부품들의 공허함
공허함과 외로움에 빠진 주인공은 옐레나뿐만이 아니다. 다른 썬더볼츠 멤버들도 그녀의 같은 상황에 부닥쳐 있다. 캡틴 아메리카 방패를 빼앗긴 이후 아내와 아이와 별거 중인 존 워커, 정보 당국의 체포를 피해 도망 다니기 바쁜 고스트, 러시아가 만든 슈퍼 솔져이지만 리무진 택시 기사로 일하며 보드카에 절어 지내는 레드 가디언까지. 그나마 미 하원 의원이 된 버키가 예외지만, 그의 정신적 고통도 이미 전작에서 다뤄진 바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공허함에 빠진 이유다. 바로 썬더볼츠 멤버들이 낙오자로 낙인찍히고, 버려진 부품이 되어 버렸다는 것. 그들은 주인공들의 서사에 필요할 때 사용되고 버려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MCU라는 세계관에서는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이들. 국가에 의해서, 기관에 의해서, 기업에 의해서. 필요할 때는 부품으로 활용됐지만 가치가 다하자 폐기 처분된 이들이라는 것.
밥도 마찬가지다. 구체적으로는 썬더볼츠가 마주할 수 있는 최악의 미래에 가깝다. 어려서부터 가정 폭력에 시달린 그는 목적 없이 살면서 삶의 의지도, 목적도, 희망도 잃었다. 우울증과 이중인격을 비롯한 여러 정신 질환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런 그에게 발렌티나의 실험은 돌파구였다. 어벤져스를 모두 합친 것보다 강력한 존재 '센트리'로 거듭나서 삶의 목적과 의미를 되찾을 기회였다.
하지만 그의 희망은 다시 한번 짓밟힌다. 본인이 창조한 영웅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려 하자 발렌티나는 그를 폐기해 버린다. 문제는 실험 과정에서 밥의 이중인격이 센트리보다 강력한 존재, '보이드'로 거듭났다는 것. 또 한 번 버려질 상황에 부닥치자 3차원 그림자처럼 생긴 보이드는 폭주하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절망과 공허함 속으로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그렇게 맨해튼 전체가 보이드가 만들어낸 그림자에 점령된다.
외계인보다 무서운 그림자
흥미롭게도 <썬더볼츠*>는 현대적 맥락을 덧붙여 주인공들의 공허함을 집단적 경험으로 확장한다. 그들의 역경은 단순히 허구의 세계 속 인물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대인의 현실적인 일상과 다르지 않기 때문. 무한한 성장과 생산이 목표인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에게 끊임없는 경쟁을 요구한다. 개인은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기 계발을 멈추지 않아야 하고, 시스템의 부품으로써 활용되다가 가치가 떨어지면 버려진다.
이처럼 무한한 생산성과 성장을 요구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성과 사회'라는 형태로 구현될 때, 개인은 성과를 내 위해 스스로를 착취하도록 내적인 압박을 느낀다. 그 결과 사람들은 번아웃에 빠지고, 우울증에 걸리고, 공허해지면서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안으로는 곪아 버린다. 이에 더해 사회가 개개인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 그들로부터 공동체적 맥락을 제거해 버리기에 한 번 공허해진 현대인은 쉽사리 회복하지 못한다.
이는 정확히 옐레나가 겪은 일이다. 존 워커, 레드 가디언, 고스트, 그리고 밥이 경험하는 일상의 모습과도 일치한다. 그렇기에 보이드가 맨해튼을 집어삼키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다. <어벤져스>에서 외계인이 뉴욕을 침공했을 때보다 더 섬뜩하다. 맨해튼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상징임을 고려하면, <썬더볼츠*>는 현대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공허함이 공동체 차원의 경험일 때 생기는 일을 경고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음이 병들고 파편화된 개인들의 폭주는 이미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이다. 진주 아파트 방화·살인 사건을 비롯해 조현병이나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의 범죄 소식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즉, 센트리/보이드는 만화처럼 묘사됐을 뿐, 이미 실존하는 현상을 보여주는 존재인 셈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썬더볼츠*>는 테마파크에서 벗어나 시네마로 나아간다. 그림자에 삼켜진 맨해튼은 옐레나와 밥처럼 속으로 곪은 현대인들의 공허함이 우리 사회를 점령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만국의 현대인이여, 단결하라!
그렇기에 썬더볼츠가 맨해튼과 시민들을 보이드로부터 구하는 방법도 일반적인 슈퍼 히어로 영화와는 다르다. <썬더볼츠*>의 클라이맥스가 주인공들이 각자의 초능력을 발휘해 빌런을 무찌르는 액션 시퀀스로 구성되지 않은 이유다. 그들은 보이드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보이드에게 제압당한 밥이 그를 집어삼킨 공허함으로부터 통제력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 그 과정에서 각자의 공허함과 트라우마를 마주하고, 극복한다.
즉, 썬더볼츠는 타인과 협력하고 연대함으로써 각자의 공허함을 이겨내고, 더 나아가 썬더볼츠라는 새로운 가족과 삶의 의미도 발견한다. MCU에서 부품으로 사용되고 버려진 이들이 하나로 뭉쳤을 때 새로운 목적과 서사가 만들어진다는 것. 이는 현대 사회에서 과소평가되는 공동체와 연대의 힘을 보여주는 전개이기에 파편화되고 부품화된 현대인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절 작지 않다.
더 나아가 공동체의 유대감을 강조하는 클라이맥스는 팀의 이름이 썬더볼츠로 명명된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썬더볼츠는 레드 가디언이 농담 삼아 붙인 이름이다. 옐레나가 데려온 멤버들을 본 뒤 그녀가 어릴 때 속했던 축구팀 이름을 가져다 붙인 것. 하지만 옐레나에게 썬더볼츠는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알렉세이, 나타샤와 함께 지냈기에 혼자가 아니었고, 삶의 의미도 있었던 어린 시절을 일깨워 주는 이름이기 때문.
처음에는 레드 가디언의 말을 비웃던 다른 멤버들. 하지만 그들도 하나둘 자신들을 썬더볼츠라 지칭하기 시작한다. 옐레나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기에 썬더볼츠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발렌티나에 의해 '뉴 어벤져스'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지만, 여전히 썬더볼츠라는 명칭이 그들의 정체성을 더 잘 보여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는 MCU의 부품
다만 <썬더볼츠*>를 특별하게 만드는 메시지와 스토리텔링은 후반부로 갈수록 빛이 바랜다. MCU의 일원으로서, 어쩔 수 없이 하나의 조각으로서 기능하는 과정에서 완성도에 금이 가기 때문. 일례로 많은 캐릭터 중 일부는 허망하게 소모된다. 극초반에 퇴장하는 태스크마스터가 대표적이다. 전작들에서 닉 퓨리를 대체할 흑막처럼 묘사됐던 발렌티나가 갈수록 개그 캐릭터로 전락하는 묘사도 일관성이 부족하기에 실망스럽다.
액션 연출도 시간이 지날수록 임팩트가 약해진다. 지하 저장고에서 처음 조우한 썬더볼츠 멤버들끼리 각자의 능력과 무기를 활용해 육탄전을 벌이는 장면이나 오토바이를 탄 버키의 액션 시퀀스는 오랜만에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센트리 대 썬더볼츠의 액션씬도 부활한 슈퍼맨과 저스티스 리그 멤버들이 맞부딪히는 <저스티스 리그>의 장면을 오마주 하면서 센트리의 압도적인 능력을 충분히 각인시킨다.
그런데 후반부에서는 액션의 쾌감이 약해진다. 밥의 내면에서 보이드가 만든 트라우마의 미로에서 탈출하고, 밥을 설득하는 식으로 클라이맥스가 구성되면서 액션씬의 비중이 덩달아 낮아진 까닭이다. 그러다 보니 각 캐릭터의 서사, 특히 옐레나와 밥의 감정선을 잘 따라간다면 뜻깊은 방점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원더우먼 1984>의 클라이맥스와 비슷한 결의 실망감을 느낄 수도 있다.
물론 MCU라서 인상적인 장면도 많다. 샘 윌슨이 재건한 어벤져스와 뉴 어벤져스 간의 갈등, 판타스틱 4와의 만남을 예고하는 쿠키 영상은 <어벤져스: 둠스데이>를 향한 기대감을 키운다. 버키와 고스트를 제외한 썬더볼츠가 멤버 전원이 페이즈 4 출신이라는 점은 비로소 MCU의 새출발을 선언하는 듯하다. 단지 <썬더볼츠*>가 보여준 예상외의 스토리텔링에 담긴 함의가 다소 가려지는 것 같아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Expected Expectations 기대 이상
마블답지 않은 시작과 마블다운 끝이 만나 이뤄낸 MCU의 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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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번 실패해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어떤 것'
나는 지금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에 끼지도 못한다. 방 한가운데 가만히 앉아서 젤리를 먹고 있다. 아무것도 하기 싫기 때문이다. 그러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한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벌였던 뻘짓거리는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왜 항상 무언갈 수습하기 위해 이상한 행동을 한단 말인가. 의도가 순수하지 못하면 상대방도 다 알게 되어있다. 난 이 이유로 어떤 행동을 해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들어 항상 후회를 한다. 그게 심각한 잘못까지는 아닌 걸 알면서도 말이다. 나는 습관적으로 나 자신에게 솔직하다고 말은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어느 순간 굉장히 멋있는 사람이었다가 줘 패 버리고 싶을 정도로 구린 인간이 됐다.
이런 복잡 미묘한 기분이 들 때면 가끔 누군가가 날 따라오는 것 같다. 언젠가 아이언맨이 되고 싶었는데 현실은 시궁창이었다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아마 그때 언급했던 아이언맨이 내 주위에 있는 것 같다. 그냥 하지 마. 어차피 다 너를 떠나게 될걸. 토익? 그렇게 오래 붙잡으면 실력이 느냐? 너는 그냥 머리가 안 좋지 않아? 걱정을 뭣하려 해. 네가 바라는 거 다 안 이루어져. 온갖 폼은 잡지만 넌 결국 열등감 덩어리일 뿐이지. 그동안 헛짓거리 한 거 기분이 어때? 아이언맨은 비브라늄으로 만든 슈트를 입고 있어서인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 모든 잡념의 시작은 내 이상한 행동에서 왔다. 무슨 글을 쓰고 어떤 방식으로 날 위로해도 많은 게 날 떠났다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는다. 이 미련과 후회를 어떻게 지워버릴 수 있을까? 문득 나 자신을 완벽하게 회복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늘 하는 생각을 다시 하고 있었다. 지워버릴 수 있다면. 미안한 이들이 꼭 행복할 수 있다면. 아예 없던 일로 돌아갈 순 있을까. 창문을 열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멀리 새가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근데 갑자기 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아.
<버드맨>은 자아의 회복에 관한 영화다. 주인공 마이클 키튼이 리건으로 나온다. 리건은 왕년에 히어로 무비의 주인공으로 이름 꽤나 날렸던 인물이다. 그러나 현재 위치는 퇴물 그 자체.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연극으로 세상에게 자기의 가치를 증명해보고자 한다. 당연히 쉽지 않다. 나오기로 한 배우의 머리 위에 조명이 떨어지는 불상사가 발생함에 따라 대체 배우를 구해야 했던 리건. 제레미 레너나 마이클 패스밴더를 호명하지만 사실 이 둘은 할리우드에서 내로라하는 배우들이기 때문에 연극 대타에 호응해 줄 리가 없다. 유명 배우 마이크 샤이너를 섭외한 리건. 샤이너는 메소드 연기를 하는 사람이다. 그는 인성은 파탄이지만 연기력이라면 둘째 가면 서러워 처음 대본 리딩 때도 빼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대타의 연기력이 워낙 훌륭했기 때문에 만족하는 리건. 그러나 연극에서 변수가 생겼다.
연극에 베드신이 있었는데, 갑자기 급발진을 해버린 마이크가 상대 여자 배우에게 연기가 아닌 실제로 해보자!라고 말한 것이다. 술 한 병 마시고 연극에 들어간 게 화근이 됐다. 어쨌든 연극은 잘 끝났지만 상대역 레슬리는 상처를 받았다. 계속해서 벌어지는 돌발변수에 화가 나버린 리건은 마이크를 해고하려 한다. 그러나 마이크가 가진 티켓파워가 있어 그것마저도 쉽지 않고, 이어진 딸과의 말싸움에서 '아빠는 트위터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인간이다'라는 말을 듣는다. 이렇게 멘탈이 무너질법한 상황들이 하나하나 쌓이다가, 뉴욕 한복판에서 팬티만 입고 후다닥 달리는 상황까지 겪게 된다. 쉽게 마무리되지 않는 연극 준비 과정에 무언가 깨달은 듯 리건은 공연 당일날 뭔가를 결심한다.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성공한 그는 결국 마스터피스를 완성해 세상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버드맨. 직역하면 '새(같은) 남자'라는 뜻이다. 새는 날개를 통해 하늘을 날 수 있다. 반대로 인간은 거의 날지 못한다. 비행기 같은 도구를 이용해야 하늘을 날 수 있다. 그건 아마 사람이라는 동물의 특성상 그럴 것이다. 팔로 부채질 몇 번 한다고 해서 그게 감당이 되나? 당연히 아니다. 건장한 팔다리와 뇌가 있으니 뚜벅뚜벅 걸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뚜벅뚜벅 걷는 모습은 사람의 본성과도 관련이 있다. 그거야 당연히 밖으로 걷지 못하면 맛있는 것들을 갖고 오지 못하니까. 이를 반영하듯 난 아닌 밤중에 배가 고파서 세븐일레븐에 허니버터 칩을 사러 갔다. 원래 사람은 배가 고프거나 졸리면 참지 못한다. 되게 당연한 명제이기도 하다. 근데 그 본질적인 욕구만큼이나 중요한 게 있다. 이건 내가 글을 쓰는 이유와도 관련이 있다. 난 가끔 나에게 물어본다. 왜 그걸 쓰고 있냐고. 나는 돈 많이 벌고 싶다. 엄마 아빠한테 효도하면서 내 인생 잘 살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왜 옳은 선택을 하는지 증명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근데 그건 내 개인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40여 편의 글을 썼던 이유에는 또 다른 것이 있다. 이 영화를 찾아보는 사람은 나름대로의 시각이 넓어지고, 또 작품과 관련 없더라도 내가 느낀 감정들에 공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쓰는 것이다. 난 나 자신에게 이 두 가지 이유를 바탕으로 글을 쓴다고 되뇌었고 몇 달 동안은 실제로 그러고 있다. 직업적인 무언가와 정서적인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 이건 별게 아니다. 사실 앞에서 언급한 창작의 동기는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 나 역시 사랑받고 싶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겐 똘똘이, 다른 이에겐 세상 어디에도 없는 멍청이더라도 나는 사랑받고 싶어 하는 인간이었다.
영화 <버드맨>은 인간이 품고 있는 이 감정을 제대로 건드린다. 사랑받는다는 게 과연 쉬운 일일까? 아니다. 사람 마음 얻는 건 손 꼽힐 정도로 어렵다. 근데 막상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아름답지 않다. 무슨 말이냐? 우리는 필연적으로 추한 존재이기 때문에 실패를 거듭할 수밖에 없다.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는 뜻이다. 난 잃은 것에 대해 후회하고 또 무언가를 탓해왔었다. 이는 모두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엇이든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인간관 계고 영화고 예술이기 때문에 좋은 것 나쁜 것 다 각기 개성이 살아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안 좋은 것을 탓하며 시간을 보내다 정신 차려보면 나는 한 꺼풀 성장한 인간이 되어있었다. 내가 얻은 것도 분명한데 잃은 것에 대해서만 자기 자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우리에게 <버드맨>은 제안 하나를 건넨다. 무대에 올라서라는 뜻이다. 겁을 먹었건 원래 대인기피라 사람들 앞에 못 나서건 상관없으니 일단 뒤로 숨지 말라는 말을 전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원래 인생을 살면서 내가 바랐던 것 오 전부를 얻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미완성의 존재라 무언가를 실수할 수밖에 없고 가끔 우리는 이를 실패의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먼발치에서 보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원래 완벽한 사람은 없으며 인생 전부를 근사한 순간으로 채우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뭔가를 잃으면서 살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런 점에서 우리의 삶은 연극과도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연극은 삼라만상의 인간형을 반영하는 예술이기에 나쁜 사람, 안 맞는 사람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하고, 이에 따라 각자의 배역이 다르다는 점에서 유사점이 있다.
이냐리투 감독은 이 연극이라는 소재의 특성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를 만들었는데 연기를 소재로 했다는 건 난 분명히 연기와 현실을 동일시 키고자 했다고 생각한다. 키건이 연극배우로 나서는 극 그 자체나 이 <버드맨>이 누군가의 연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건 분명하게 대칭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근거는 더 있다. 드럼과 롱테이크다. 드럼 연주자는 극에서 시도 때도 없이 막 등장한다. 마치 이냐리투 감독이 '이건 대놓고 허구예요'라고 넌지시 던지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 안에서의 현실고 연극의 구분선이 얕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영화의 롱테이크 역시 '인물이 어떤 선택을 했는가'에 따라 한 갈래로 나뉜다. 현실은 롱 테이크고 숏 테이크고 그런 거 없다. 일단 눈 떠서 태어났으면 죽을 때까지 롱테이크인 셈이다. 마치 이 영화의 카메라 촬영 기법처럼. 영화는 이 두 가지 소재를 뒤섞은 후 이 극과 현실의 공통점을 뽑아내서 우리에게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라고 질문한다. 이는 우리가 우리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와 관련이 있었다. 더 나아가서 나는 이 영화 후반부 리건의 선택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보지 않는 입장이다. 우리는 이를 추론만 할 수 있는데, 나는 감독이 쉬운 답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난 애초부터 이냐리투 감독이 키건의 선택에 대해 스포트라이트를 주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스포트라이트를 주면 그 죽음이라는 것에 관심이 쏠린다. 이 사람이 왜 죽었을까. 우리는 이 선택에 대해 논의할 확률이 굉장히 높다. 명예회복에 성공한 이가 굳이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근데 이냐리투 감독은 처음부터 죽음을 빼버렸다. 아니 사실 누가 봐도 죽을법한 상황에 죽음을 생략하는 과감함을 보여준 것이다. 후반부의 죽음을 생략하는 수를 통해 반사이익을 얻는 건 영화의 메시지다.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에서 내포하는 주요한 메시지는 인생의 역설이다. 세상에게 내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그가 골랐던 선택지가 무엇인가. 연극이 그 선택의 전부였을까? 물론 그의 명예회복에 연극이 좋은 매개체가 된 건 사실이지만 그게 아니다. 팬티바람으로 뉴욕 한복판을 달려가거나 총으로 했던 자살시도가 그의 명예회복을 도운 것들이었다. 완전 대놓고 드러나는 아이러니다. 연극을 통해 사랑받고자 했던 그는 연극 외적인 요소가 내부의 관심으로 환기되는 경험을 했다. 영화는 이 과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생은 연극과도 같다. 싹수없는 후배 놈이 내 연극을 망쳐가며 퀄리티를 떨어트릴 수도 있고, 내가 생각했던 것 외의 요소로 큰 사랑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사랑받는 인생을 위해 우리는 필연적으로 더 넘어져야 한다. 나를 둘러싼 상황은 기본적으로 역겹고 모순적이다. 아닌 사람 있나? 내가 무언갈 얻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대가가 필요하다. 즉 삶에서 간절히 바라는 무언가를 얻는 과정이 무조건 아름답지는 않다는 뜻이다. 영화는 이런 삶의 아이러니를 키건이라는 인물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다. 당신은 어떤 선택지를 고를 것인가요. 창문 밖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같이 스스로의 욕망에 좀 더 솔직해질 것인지, 아니면 실패가 두려워 사람들 앞에 숨을 것인지 물어보고 있다. 우리 인생은 기본적으로 모순덩어리라 사랑받기가 굉장히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도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키건이 그랬고, 당신이 그래 왔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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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OTT 종료예정작 추천
안녕하세요! 씨네랩입니다.
벌써 7월이 끝나가고 있네요.
며칠 남지 않은 7월을 알차게 보낼 수 있도록!
7월이 지나면 더 이상 볼 수 없는, 넷플릭스와 왓챠의 종료 예정작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٩( ᐛ )و
줄리 &줄리아
07.31
넷플릭스 종료 예정작
ⓒ 네이버 영화
synopsis
프랑스로 향한 줄리아는 요리를 통해 힘든 타지 생활을 극복하며 전설적인 프렌치 셰프가 된다.
한편, 뉴욕의 요리 블로거 줄리는 1년간 줄리아의 책 속 524개의 레시피에 도전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하는데...
cine pick!
프랑스 음식을 주제로 다룬 이 영화는 음식을 만드는 그 과정 속에서
관객들에게 용기와 열정을 전한다. 사랑스러움이 가득 담겼으며 편안하게 즐기기 좋은 영화이다.
해리포터 시리즈
07.31왓챠 종료 예정작
ⓒ 네이버 영화
synopsis
이모네 식구의 갖은 구박을 받으며 살아가던 고아 소년 해리포터. 큰 기대 없이 맞이한 11번째 생일 날,
해리는 호그와트 마법학교에 입학 초대를 받고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알게 된다.
cine pick!
전 세계에 많은 팬을 보유한 <해리포터> 시리즈.
국내에서 재개봉도 많이 했을 뿐더러 왓챠에서 독점으로 해리포터를 서비스했을 때
엄청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전 시리즈 모두 내려가기 때문에
왓챠를 구독하는 사람이면 꼭 보기!!
아메리칸 셰프
07.31
왓챠 종료 예정작
ⓒ 네이버 영화
synopsis
일류 레스토랑의 셰프 칼은 유명 음식 평론가의 혹평을 받자 홧김에 트위터로 욕설을 보낸다.
이들의 말다툼은 화제가 되고, 칼은 레스토랑을 그만두기에 이르는데...
cine pick!
배고플 때 보면 절대 안 되는 영화 TOP 3 안에 들어갈 영화이다.
마블 '해피'로 유명한 '존 파브로'가 감독과 배우 두 역할 모두로 참여한 작품이다.
킬링타임용으로 추천하고 싶은 영화이다.
쿵푸허슬
07.31
넷플릭스 종료 예정작
ⓒ 네이버 영화
synopsis
1940년대 중국, 건달 싱은 정장을 빼입고 홍콩을 평정한 도끼파처럼
폼나게 살고 싶지만, 그저 흉내만 낼 뿐이다.
cine pick!
주성치가 감독과 배우 모두를 맡았던 정통 무협 영화이다.
홍콩에서 개봉 첫날 오프닝 수익 신기록을 수립했고, 한국에서도
공개 당시 1위를 하기까지 하였다. 주성치 최고의 무협 영화라고 평가 받을 정도로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마스크
07.31
넷플릭스 종료 예정작
ⓒ 네이버 영화
synopsis
우연히 고대의 마스크를 발견한 평범한 은행원. 호기심에 써보자
초인적 힘이 솟구치고 무한대의 능력이 발휘된다. 감히 넘보지 못했던 여성의 마음도 사로잡게 되지만 짜릿한 경험도 잠시.
마스크가 초래한 소동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진다.
cine pick!
주조연의 뛰어난 연기력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시각효과상 후보작에 선정될 정도로
완성도 높은 CG까지 더해져 그 당시 굉장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킨 작품이다.
유쾌함이 적절하게 섞인 히어로물로,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씨네랩 에디터 H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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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옥만세 리뷰 - 제목은 학교폭력 가해자의 회개라고 짓겠습니다, 근데 이제 사이비를 곁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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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지옥의 정점에서 세상의 종말을 외치는 쏭남 그리고 종말을 외칠 기력도 남지 않은 황구라 두 소녀의 급발진은 박채린의 유학 소식으로부터 시작됐다. 우릴 지옥으로 내몰고 한국을 떠? 그 X 앞길을 막을 수 없다면, 두고두고 거슬릴 기스 정돈 낼 수 있겠지! 그런데… 오히려 우리가 박채린의 구원이라니? 이게 무슨 불온한 소리람? 구원? 누가 누굴? 믿어? 누가 누굴! 복수가 구원이 되어버릴 위기에 처한 쏭남과 황구라의 지옥행 수학여행기! 오키오키! 가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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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더 트래커> 예고편
한계를 넘어선 액션이 시작된다!
이탈리아에서 갱단의 납치로 아내와 딸을 잃은 하칸슨. 10년 후 이탈리아 형사로부터 사건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는 연락을 받은 그는 곧장 이탈리아로 떠난다. 하지만 그에게 연락했던 형사는 이미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같은 시기에 그 도시의 형사로 새로 발령받은 안토니오는 이 사건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하칸슨과 함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갱단으로 침투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