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4-08-29 09:04:57
한국이 싫어서 | 철 지난 신조어를 생생하게 되살리다
<한국이 싫어서>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한 20대 후반 '계나'(고아성). 필사적으로 일해서 학자금 대출도 다 갚고, 남자친구 '지명'(김우겸)과의 미래도 계획 중이던 그녀에게 고민이 하나 생겼다. 바로 한국이 싫다는 것. 회사에서는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부품에 불과하고,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더 큰 꿈을 꾸지 못하는 그녀는 결국 결단을 내린다. 한국을 탈출하기로.
뉴질랜드로 건너 가 대학원 생활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계나. 어딘가 이상하면서도 믿음직한 친구 '재인'(주종혁)도 만나고, 자유롭게 연애도 하며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낸다. 한국을 떠나 마침내 낙원에 도착한 듯 보이는 그녀. 하지만 그녀의 마음 한 편은 여전히 헛헛하다. 이에 그녀는 또 한 번 여행길에 오른다.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
스크린 위에 펼쳐진 스토리텔링 저널리즘
스토리텔링 저널리즘. 근래 몇 년간 해외 언론에서 시도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기사다. 주요 정보를 중요도 순서로 나열한 스트레이트 형식에서 벗어나 독자가 사건에 감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게 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정보의 홍수인 21세기에 정보 전달만으로는 언론사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함의 산물이기도 하다.
스토리텔링 기사의 핵심은 '보여주기'다. 사건을 장기간 관찰한 후 생동감 있는 글로써 보여주는 데에 집중한다. 당사자, 전문가 인터뷰만 따는 게 아니라 취재원의 일상을 같이 따라다니며 그 일상을 소설처럼 긴 흐름에 담는다. 독자 스스로 사건에 대해 판단할 수 있도록 현장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즉, 글로 만드는 다큐멘터리라 할 수 있다. 자연히 분량이 상당하다. 뉴욕타임스의 스토리텔링 기사는 A4 30페이지를 훌쩍 넘는다.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자 장강명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한국이 싫어서>는 스토리텔링 기사 한 편을 스크린에 띄운 것 같은 작품이다. 소재는 새롭지 않다. '헬조선'이라는 말 자체가 2010년대 후반 이후로는 잘 안 쓰일뿐더러, 2030 청년의 고통은 여러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였으니까. 그런데도 <한국이 싫어서>는 흡입력이 강하다. 뻔하지만, 107분이 지루하지는 않다. 그 이유는 '생생함'에서 찾을 수 있다.
철저한 보여주기
사실 <한국이 싫어서>의 첫인상은 좋지 않다.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이 싫고, 한국에서는 못 살겠어서 한국을 떠난다는 계나의 첫 내레이션만 들어도 직설적이고, 상투적이기 때문. 인천에서 강남까지 출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까지만 보면 한국의 흔한 사회 고발 영화를 보는 듯하다. 한국이 서열, 계급 사회라고 비판하는 대목처럼 전체적인 분위기에 맞지 않게 튀어 나가는 순간도 종종 있다.
하지만 장건재 감독은 충실히 '보여주면서' 단점을 상쇄한다. 계나가 한국에서 버터내야 했던 일상의 여러 단면을 생동감 넘치게 묘사한다. 혜나와 엄마는 멸치 똥을 따면서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대화를 나눈다. 참고 견디면 보상이 올 테 결혼해서 안정적인 삶을 꾸리라는 엄마. 미래에 보상이 있을 거라는 희망 자체가 없는 계나. 중간중간 멸치를 집어 먹는 현실적인 대화를 보다 보면 이 모녀의 충돌을 그저 남 일 취급할 수가 없다.
그 외에도 2030 세대라면 누구나 한 번은 겪었을 에피소드가 쏟아진다. 매뉴얼대로 일하는 계나와 그녀가 융통성이 없다며 혼내는 직장 상사. 부유한 남자친구 가족과의 식사 후 서러움과 분노 때문에 눈물을 터뜨리는 계나. <한국이 싫어서>는 그녀의 삶을 다각도로 비추며 관객과의 교집합을 가능한 많이 만든다. 근래 한국 영화 중 가장 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장강명 작가가 기자 출신이라는 사실이 새삼 떠오르기도 한다.
한국은 싫지만, 여전히 한국인이다
균형 감각도 인상적이다. 단순히 한국 사회를 비판하거나 헬조선과 탈한국을 긍정하며 사회 담론을 일차원적이고 단편적으로 소비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더 넓은 시점에서 헬조선이라는 현상을 조망한다. 어휘 너머에 있는 현실을 포착하려 애쓴다. 일례로 영화는 계나의 선택을 무조건적으로 긍정하지 않는다. 뉴질랜드에서 행복을 찾지 못한 사례를 거듭 보여준다.
계나의 정착을 도운 일가족은 정작 본인들이 뉴질랜드에 적응하지 못한 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낙원 같아 보이던 오클랜드에는 갑자기 지진이 발생한다. 인종차별을 비롯해 예상치 못한 사건 사고도 계나를 덮친다. 이처럼 카메라는 한국만 떠나면 행복할 것 같지만, 마냥 달콤하지는 않은 탈한국의 현실을 놓치지 않는다. 즉, 한국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발버둥 치는 일상을 카메라에 담는 셈이다.
물론 차이는 있다. 서울 시퀀스가 무채색톤인 반면, 뉴질랜드 시퀀스는 더 포근하고, 따뜻하다. 그저 버티기 바쁜 서울과 달리, 뉴질랜드에서는 자기 삶을 돌아볼 여유가 있다. 따라서 <한국이 싫어서>는 한국이 싫지만, 한국인이라는 소속감을 놓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어디에도 닻을 내리지 못한 소속감이 어떤 의미인지를 반추하게 만든다.
그래서일까? <한국이 싫어서>는 주인공의 얼굴을 정면으로 자주 담는다. 대화를 나눌 때도, 영상 통화를 할 때도 인물의 표정과 인상을 보여주려 한다. 한국에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막걸리를 같이 마실 관계가 있는 반면, 타지에서는 아무리 행복해도 무언가를 놓친 그 얼굴을 대조하려고 노력한다. 이 지점에서 고아성은 유달리 빛난다. 그녀가 2030 세대 중 누군가의 삶을 자기 얼굴에 모두 녹여낸 것처럼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진짜 탈한국과 행복
그 과정에서 <한국이 싫어서>는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특히 한국을 떠났지만, 뉴질랜드에 끝내 정박하지 못한 계나를 통해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묻는다. 다른 한국인들처럼 대학원 학위를 딴 뒤 취업해서 영주권을 얻을 계획인 계나. 영화는 그 선택조차 정답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지명만 하더라도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둔 대학원을 포기한다. 대신 아르바이트 중 흥미를 붙인 요리를 배워 셰프가 되기로 결정한다.
계나도 마찬가지다. 회계학 학위를 딴 그녀는 뉴질랜드를 떠난다. 뉴질랜드에서 계획한 삶조차도 행복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을 떠나서도 방황을 거듭하는 두 청년을 보다 보면 '한국이 싫어서'라는 제목의 진의가 얼핏 보이기도 한다. '한국이 싫다'는 말은 길이 잘못됐다고 느꼈을 때, 선택한 길 위에서 행복할 수 없다고 직감했을 때, 길을 자유롭게 바꾸지 못하는 '한국이 싫다'는 말이 아닐까 싶다.
계나의 대학 동기인 '경윤'(박승현)이 오리지널 캐릭터로 추가된 맥락과도 맞닿아 있다. 어찌 보면 그는 가장 한국적인 20대의 전형을 보여주기 때문. 특히 계나가 공무원 시험 N수생인 경윤과 꿈속에서 나누는 대화가 가슴에 꽂힌다. 학원가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만난 계나와 경윤. 그는 모두가 불안해하는 이곳에서 벗어나 전망이 탁 트인 곳으로 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한다. 이번 시험이 마지막 기회라고도 덧붙인다.
그런데 계나가 꿈속에서 그를 만날 때 그는 거듭된 불합격 때문에 이미 목숨을 끊은 상태다. 그는 한 번 선택한 경로가 잘못되었을 때 그것을 쉽사리 돌리지 못하는 현실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계나가 뉴질랜드에 정착하는 대신 떠나기로 선택한 것도 꿈속에서나마 그와 나눈 대화를 기억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칫 한없이 비관적으로 흐를 수 있는 현실 인식을 영화적으로나마 치유하려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위화감이 없다는 씁쓸함
사실 <한국이 싫어서>는 끝맛이 씁쓸한 영화다. 만듦새가 마냥 매끈하지는 않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은 일장일단이 있다. 계나의 일상을 극적으로 변모시키지만, 한편으로는 불친절하다. 정확한 시간대를 알려주다가 점차 건너뛰는 대목이 많아지기 때문. 벌린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이 싫어서>의 끝맛이 씁쓸한 진정한 이유는 완성도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영화의 원작이 10년 전이라는 사실 자체가 씁쓸하다. 이 작품은 시간대가 상당히 모호하다. 그나마 계나와 뉴질랜드에서 만나 친구가 트럼프와 김정은에 관해 대화한다는 점에서 2018년이나 19년 언저리로 추정할 수는 있다.
그런데 2024년이 배경이라 해도 영화 내용은 위화감이 없다. 굳이 '헬조선'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아도 10년 전이나, 5년 전이나, 지금이나 청년들이 체감하는 문제점과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2024년인데도 10년 전 신조어와 이야기에 공감하는 아이러니만으로도 씁쓸함이 혀끝까지 가득 맴돈다.
Acceptable 무난함
10년이 지나도 달라진 게 없다는 비극을 마주하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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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모양의 사랑
어제는 아빠의 일흔 일곱번째 생일이었다. 지난주말에 부모님을 뵈러 대구에 다녀왔는데…불과 몇달만에 갑자기 기력이 쇠한 느낌이 들어 코 끝이 시큰해졌다. 아빠는 요즘도 새벽 6시에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쓸고, 아빠의 작은 이발소 문을 연다. 성실히 하루 하루를 꾸려 가는 분이고, 늘 일을 하고 있기에 이렇게 갑자기 늙으신 것 같은 얼굴을 마주 하는게 믿기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아빠는 나에게 특별한 분이다. 40년대에 태어나셨는데…요즘 MZ같은 마인드로 80년대생인 나를 키웠다. 내 나이 또래의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감정적인 결핍이 없도록 나를 키웠다. 엄마 뿐 아니라 아빠에게도 충분히 사랑하고, 사랑받는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많은 대화를 나눴고, 나를 믿어주셨다.
경상북도 깊은 시골에서, 자주 술에 취하고 폭력적이었던 할아버지로부터 도망 나와 서울로 간 게 중학교쯤이었다 하니, 아빠의 학력도 아마 그 즈음에서 끝이 났을 것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어른이 되어 자수성가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지금’ 당장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가족을 떠난 사람.“아빠 그렇게 어렸는데…어떻게 혼자 살았어?” 겨우 열몇 살이었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면. 아빠는 “ 뭐어. 잘 먹고 잘 살았어.” 하고 이야기를 끝내버렸다.
아빠는 그랬다. ‘오늘 뭐 하고 놀았니? 무슨 책을 읽었어? 기분은 어때?’ 학교를 다녀와 이발소로 뛰어 들어오는 나에게 백가지 질문을 퍼붓고, 온갖 수다를 받아주고, 장난을 걸고, 대화를 하면서도 ‘아빠가 옛날에는 말이야…’하는 영웅담이라던가, ‘내가 어떻게 너를 키웠는데…’같은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당신의 고단함과 괴로움을 자식이 알아 주지 않아도 상관없이 온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
꽤나 이기적으로 살아온 터라 아이를 낳기 전엔 잘 몰랐다. 나의 마음 보다, 상대방의 마음과 상황을 들여다 보게 되는 일. 내가 아닌 타인에게 마음이 쓰여서 때때로 나의 일상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되는 일도 생긴다는 것을. 그런 일은 거의 대부분 모두 내 배에서 탯줄을 끊고 태어난 아이 때문이었다. 배 속에 품어 낳은 것이 아닌 아이를 사랑하여 모든 것을 내어 주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모든 가정은 다르기에 ‘아빠의 사랑’ 역시 수십만 개의 모양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름답고, 기쁨의 감정이기도 할 것이고, 때로는 애틋하거나, 적당한 무관심을 가지고 있거나, 장난기가 가득할지도 모르겠다.
여자로 태어난 나는 결코 알지 못할 다른 모양의 사랑을 늘 궁금해 왔다. 이런 영화의 좋은 점은 내가 아빠가 될 수 없기에 과한 감정이입을 배제하고 적당한 거리에서 담담하게 지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식의 입장에서, 혹은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서 내내 마음을 아리게 했던 아빠의 영화들 중 많은 영화가 평범하기 보다는 조금 부족한 아빠에서 시작한다. 영화<아이엠 샘>에서 샘은 지적장애로 7살의 지능을 가진 아빠로 나온다. <파더 앤 도터>의 제이크는 아내의 목숨을 앗아간 교통사고 이후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소설가이며, <더 웨일>의 찰리는 아내와 이혼 후 동성연인의 죽음을 겪고 그로 인해 270kg의 거구의 몸집으로 살아가고 있다. <애프터 썬>의 캘럼은 어린 나이에 소피의 아빠가 되었지만 이혼을 했다. 딸과 함께 튀르키예 여행을 떠나왔지만 어딘가 불안하고 슬픈 감정에 쌓여 있는 느낌이 든다.
그러고 보니 언급한 영화들의 자녀는 모두 딸이다. 영화 속 아빠는 경제적으로 부족하거나, 정신적으로 부족하거나, 마음이 아프다. 자신의 이런 결핍과 상황이 딸을 지키는 못하는 일이 될까 두려움을 느끼는 일들이 생긴다. 영화는 아빠의 지능이나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해서 사랑을 줄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아이에게 돈과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한한 사랑이라고. 아빠들은 입양을 보내는 쪽보다 끝까지 딸과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찰리는 죽음이 가까워 왔음을 느끼며, 딸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 캘럼은 위태로운 마음과 어려운 상황에서도 (영화가 딸의 시선이라 짐작만 할 뿐이지만) 딸에게 즐거운 시간이라는 선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피가 물보다 진하기 때문일지…혹은 작고 연약한 존재를 지켜주고 싶은 인간의 본능인지… 잘 모르겠지만 사랑이라는 것은 그 속을 들여다 보면 받는 사람 뿐만 아니라 주는 사람이 더 큰 위로가 되기 마련이다.
이토록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모든 것을 내어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때로 나의 존재의 이유가 되기도 하니까. 아빠는 딸을 살게 하고, 딸은 아빠를 살아가게 하는 이유가 된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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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인의 뒷모습
*영화 <안녕 미누>에 들어간 미누 씨의 삶 이야기가 들어있습니다.
네팔에 사는 미노드 목탄 씨의 침실 벽에는 목장갑이 액자에 걸려 있다. 그 모습은 여러 의미로 생경하다. 지극히 한국적인 아이템이기도 하거니와, 소중하게 액자에 끼워놓을 일은 더더욱 없는 일상의 물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장면은 미노드 목탄 씨의 인생을 고스란히 담은 풍경이기도 하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20대 초반 어린 나이였던 1992년 한국으로 일하러 떠났다. "미누"라는 이름으로, "1세대 이주 노동자"라 불리던 그는 2009년 어느 날 갑작스럽게 추방을 당했다. 이 영화는 그 미누 씨의 삶을 담았다.
미누 씨는 네팔에서 성실하게 살고 있다. 한국 어학원에서 강의를 하고, 강의를 수료한 후 자격을 갖춘 청년들이 한국으로 일하러 떠날 때 다정한 말로 격려한다. 카페를 열고, 인형 만드는 기술을 가르치고, 판로까지 터 주면서 청년들이 네팔을 떠나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방법도 열심히 찾는다. 그가 처음 한국에 온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함이었을 테니, 이만큼 든든하게 섰다면 성공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의 등에서는 이방인의 뒷모습이 어른거린다. 그는 자기가 나고 자랐을 네팔 시장을 걸으며 "남대문 시장 생각난다"며 웃는다. 네팔 사람이라고 다 히말라야 가본 건 아니라며, 자기 히말라야는 안 가봤다고 웃지만 <목포의 눈물>을 구성지게 부를 줄 안다. 한국에서 일하던 시절, 고향을 떠나 일을 한다는 점에서 동병상련이었던 아주머니들이 밥도 챙겨주고 건강도 걱정해주고 그러면서 가르쳐 주었던 노래란다.
그의 웃음은 어쩐지 씁쓸하고 외롭다. 분명 활짝 웃는데 눈물 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강산이 두 번 바뀔 만큼 긴 시간 동안 살았던 나라에서 추방당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네팔 사람으로 태어나 네팔에서 자랐어도 그를 이루는 것들의 상당수는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일 텐데. 한국에서 찾아온 손님들에게 한국식 밥상을 차려주는 솜씨를 봐도, 나이를 물으면 "한국 나이로"를 접두어처럼 붙여 대답하는 모습을 봐도, 놀라면 "깜짝이야"가 먼저 나온다는 걸 봐도, 그의 어딘가에서 분명 한국 DNA가 느껴진다. 네팔 사람들과 네팔어로 대화하고 네팔의 명절을 챙기고 있어도 그는 네팔에서 오래 산 한국 사람처럼 보였다. 어떻게 보면 한국인보다 더 지독하고 치열하게 한국의 모든 것과 부딪고 얽힌 사람이어서 그런 걸까.
네팔에서 늘 주변 사람들을 챙기고 있듯 그는 한국에서도 그런 사람이었다. 식당에서도 일하고 봉제공장에서도 일했지만, 밴드도 결성했다. 신나고 경쾌한 멜로디인데 "오늘은 나의 월급날 가슴이 두근두근합니다"로 시작한 가사가 "오 사장님 이러지 마세요 그동안 밀린 내 월급을 주세요 날 욕한 건 참을 수 있어요 내 월급만은 돌려주세요"로 흘러가는 <월급날>이나 박노해 시인이 쓴 동명의 시를 모티프로 쓴 <손무덤> 같은 노래들. 이주 노동자들이 줄줄이 자살로 죽어나가던 시절, 밴드 스탑크랙다운("단속을 멈춰라')은 현장의 분위기를 만들고 이주 노동자들과 사회의 중간다리가 되어 주었다. 미누는 자연히 이들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러나 밴드 공연이 잡혀있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 추방을 당한다. 불법 체류자를 추방하는 게 무엇이 나쁘냐 할 수도 있겠지만, 며칠씩 미누를 따라다니다가 집 앞에 있는 그를 잡아간, 말하자면 '표적 수사'였다. 당시에도 게다가 추방 이후 미누의 삶에 일어나는 일들은 "이게 법치국가냐"라고 되묻는 스탑크랙다운 멤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법치국가면 법대로 해야지, 왜 미누는 예외가 되는가. 한국 사는 동안에도 그저 노동을 했고 노동에 당연히 따르는 권리를 말했을 뿐인 그가, 이제는 버젓이 사업가가 되어 한국에 들어오려는 그가 얼마나 체제에 반동적인 인물이라고 법에 예외까지 두는 것일까.
불법 체류와 이주 노동자 문제는 언제나 첨예한 사회 갈등 소재가 되었고, 담론은 나뉠 수밖에 없다. 법은 잘 지키라고 있는 거고 그러니까 지키면 되잖아,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애초에 법을 지킬 만한 여건이 주어지지 않은 이들에게 불법은 선택이 아니었다. 또한 법치국가가 법을 형평성 없이 적용했다는 것은 누구든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는 별도의 문제다.
게다가 미누 씨의 인생을 보고 나면 법과 국적을 다 떠나서 숙연해지는 것을 느낀다. 추방과 격리로 응답한 한국 사회에게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가진 나눔과 연대, 따뜻한 애정만을 주고 떠났다. 이 영화는 그가 남기고 간 마지막 선물이다.
인도로 떠나던 20대 초반의 내게 누군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한 사람이 어떤 사회의 일원으로 완전히 흡수되기까지 2년이 걸린대."로 시작된 그 말은 "그러니까 너 돌아오면 많이 힘들 거야.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덜 힘들 거고. 나중 되면 무슨 말인지 알 거야."로 끝났다. 그리고 그 말은 정말 꼭 맞았다.
인도 산 지 1년 반쯤 되었을 때, 식당에서 김치찌개를 먹고 인도 루피화를 꺼내어 계산을 치르는 꿈을 꾼 적이 있다. 인도 내의 한국 식당은 거의 안 가봤으니까 그건 현실 반영이라기보단 내 상태를 고스란히 비추는 꿈이었을 거다. 더 시간이 지나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더욱 당황스러웠다. 나고 자란 땅에서, 평생을 살아온 내 방에서 나는 남처럼 서성거렸다. 내 자신이 낯설고, 낯설다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예방주사처럼 내게 누군가 넣어준 몇 마디 말을 동아줄 삼아 그 시간을 보냈다.
하물며 1992년에서 2009년, 아이 하나가 장성할 만큼의 시간이 지나도록 한국에 산 그가 그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어떤 친구는 내게 "너 3년 있었지? 그럼 딱 그만큼 힘들 거야."라고 말했고, 실제로 귀국한 지 3년쯤 지나니 인도는 내게 추억이 되었다. 미누 씨에게 한국은 아직 추억이 될 수 없는, 자기 안에서 너무 팔팔하게 날뛰는 기억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네팔 거리를 걷는 그의 뒷모습, 여권 가진 자기의 모국을 걸어다니면서도 이방인의 냄새를 풍기는 그 뒷모습이 너무 슬펐다. "고향에 고향에 이르러도 그리던 고향이 아니러뇨"라는 지용의 시구가 과연 우리만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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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 <테스와 보낸 여름> 눈부신 싱그러움과 흐뭇한 성장기
테스와 보낸 여름 (My Extraordinary Summer with Tess , 2019)
<테스와 보낸 여름>은 어릴 적 가족들과 함께 떠난 바닷가 근처의 휴가지 여행을 떠오르게 합니다. 휴가지의 낯선 풍경과 함께 여름을 간 다양한 사람들, 거기서 만났던 사람들. 그들이 주는 낯선 느낌은 이제껏 겪어왔던 세상과는 달랐던지라 신비스럽기도 하고, 다양한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네덜란드의 아름다운 휴양지 테르스헬링에서 펼쳐지는 조금 엉뚱한 소년 샘과 그보다 더 엉뚱한 미지의 소녀 테스의 이야기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오르게 함과 동시에 성장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흐뭇한 웃음을 짓게 하고, 코로나로 집에 발이 묶여 있던 모든 이들의 마음을 환기 시켜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영화일 것입니다.
포스터의 색감만 봐도, 눈이 정화되는 기분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휴가를 온 샘은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공룡이 어떤 심정이었을지를 궁금해하는 조금 엉뚱한 소년입니다. 자연의 시간 순리 상 부모님과 형이 먼저 떠나게 될 것이므로 나중에 자신이 홀로 남겨졌을 때를 대비하여 휴가지에서 휴가보다는 외로움 적응 훈련에 더 집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던 와중 만난 소녀 테스!
만나자마자 샘에게 살사를 추자고 권하는 샘보다 조금 더 엉뚱하고 발랄한 이 소녀는 무언가 꿍꿍이를 감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테스의 엄마가 운영하는 민박집에 어른 남자인 휘호를 숙박 이벤트 당첨자로 초대하고, 어쩐지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같은 테스가 야속한 샘. 그런 샘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습니다. 그 비밀로 새로운 일들을 맞이하게 되는 두 사람. 생각지 못했던 테스의 비밀은 직접 확인해보시면 좋겠습니다. ?
(※ 아래부터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언젠가 혼자 남겨질 것을 걱정하는 건 어리석은 걱정일까?
아쉽게도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세상에 혼자 남겨질 운명입니다. 아마 샘처럼 가족 중 막내인 경우라면, 그럴 확률이 조금 더 높아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릴 때 제 기억으로, 저도 이런 두려움을 가졌던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턱대고 엄마에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엄마만큼은 무조건 나보다 하루 더 살아야 돼!라고 말한 적이 있었죠. 샘도 그런 두려움이 있었는지 외로움 적응 훈련을 하느라 하루의 정해진 시간만큼 혼자 바닷가에서 놀며 시간을 보냅니다. 그렇게 홀로 외로움 적응 훈련을 하던 도중, 밀물이 들어오는 갯벌에 발이 빠져 그의 노력과는 다르게 갑작스럽게 모두를 두고 가장 먼저 떠날 뻔하게 되죠. 그때 만난 바닷가 근처의 할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할아버지로부터 혼자이지만 기억할 수 있는 행복한 추억이 많아 괜찮으니, 더 늦기 전에 많은 추억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죠.
외로움 적응 훈련중이랍니다.
아이가 하는 걱정이나 어른이 하는 걱정이나 맥락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어른은 세상에 혼자 남겨질 걱정을 하며 외로움 적응 훈련을 하진 않지만, 그와 비슷한 부류인 일어나지 않을 일들에 대한 걱정,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등 매우 기우 스러운 걱정을 하며 현실을 충실히 살아내는 것을 방해 받습니다.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어른이 되면 이런 부류의 걱정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들에 노출되지만, 선택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아도 될 것들을 걱정하며 지금 시간을 충분히 즐기지 못하고 있지 않은지, 그렇다면 그 걱정을 지속할 것인지 벗어날 것인지를요. 영화는 매일에 충실하고 순간의 추억을 만들며 기억할 수 있는 추억들을 쌓아가는 것의 중요함을 샘을 통해 묻고 있는 듯합니다.
▶ 사랑스러운 배우,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이름도 어려운 두 배우, 소니 코프스 판 우테렌, 조세핀 아렌센은 영화 내내 사랑스러움 그 자체입니다. 이전 연기 경력이 없는 배우로 캐스팅했다더군요! 그래서인지 연기를 꽤 잘하는데도 불구하고 어딘가 서툴고 풋풋하고 싱그러운 느낌이 들어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주제와 잘 어울립니다.
주변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사춘기 소년소녀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또 또래이더라 하더라도, 그 나이 때 아이들은 여자아이들이 키가 더 큰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는데요,영화에서도 테스 역의 조세핀 아렌센이 키가 조금 더 큽니다. 감독의 디테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는 네덜란드 아동 문학가 안나 왈츠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2019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제너레이션 K플러스 부문 국제심사위원 특별언급상을 수상했고, 전 세계 영화제 통산 16개의 수상 경력이 있다고 합니다. (*제너레이션 K플러스 부문은 어린이 영화 대상으로,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제심사위원들이 선정하는 상이라고 합니다.)
또 영화를 보는 내내 눈에서 하트가 튀어나오게 하는 영화의 배경지, 테르스헬링 섬(Terschelling)도 분명 영화의 매력 포인트입니다. (전체 매력 포인트에서 약 1/3가량은 차지할 듯 ㅎ ) 네덜란드의 서 프리지아제도에 딸린 섬이라고 해요. 가져올 수 있는 이미지가 없는 게 아쉬운데, 그쪽으로 여행을 다녀오신 분들의 블로그에서 확인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정말 멋져요!
▶ 한 줄기 영화
두 소년 소녀의 이야기를 보고 있자니 떠오르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의 <조조 래빗>입니다. 2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 소년단에 입단한 소년 조조와 그의 집에 몰래 숨어있던 소녀 엘사의 이야기가 담긴 영화입니다.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2차 세계대전과 나치 통치하의 세상, 히틀러를 그려낸 작품입니다. 시종일관 밝은 톤을 유지하고 있으나, 찬찬히 관찰해보면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비극과 참상은 더 슬프고 잔인한 것 같습니다. 조조의 상상 속의 친구 히틀러를 연기한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의 유쾌한 연기가 더해져 제 기준 작년 최고의 영화로서 매우 강력히 추천해드리고자 합니다. ?
두 소년소녀의 싱그러움에 흐뭇하고, 그들을 보며 나의 모습을 생각해볼 수 있는 <테스와 보낸 여름>, 코로나로 따로 멋진 휴가지를 가지 못하셨다면 스크린 가득 펼쳐지는 예쁜 이야기들과 경치에 위로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처럼 좋은 영화를 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주관 가득 별점 : ★★★★
- 여름 휴양지, 못 다녀오셨다면 꼭 보세요!
- 음악, 색감, 연기 모든 요소들이 조화롭게 이루어져 눈도 마음도 즐겁습니다.
* 본 콘텐츠는 블로거 그린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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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 속에서도 계속된다
올해 <타이타닉>이 25주년인가를 기념해 재개봉했다. 친구가 같이 보러 가자 했을 때 “잘됐다. 나 <타이타닉> 아직 못 봤어!”라고 대답했더니 친구는 무척 놀랐다. <타이타닉>을 안 봤다고? 물론 누구에게나 ‘아니 그걸 안 봤다고?’의 리스트가 있다. 영화인들조차 (너도나도 모두 다 본 영화로만 구성된) 매우 의외의 리스트를 갖고 있을 것이며, “왜?”라고 묻는다면 거의 별 이유 없을 것이다. 그냥 어쩌다 보니. 내게 <타이타닉>도 그렇다. 스토리가 워낙 알려져 있다 보니 어영부영 스토리를 파악하는 바람에, 다른 거 먼저 보다가… 어쩌다 보니.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스크린에 몰려드는 물을 바라보면서, 등줄기에 불안한 땀이 흘렀다. 잊고 있던 이유를 깨달았다. 처음에는 스토리를 대충 알아서 볼 마음이 크게 안 났던 것 맞는데, 어느 순간 이유가 바뀌었지. 배가 가라앉는 영화를 볼 자신이 없었어. 배가 기울고 거기 있는 사람들이 나오지 못한 이야기를, 우리는 현실에서 보고 말았잖아. 그것도 실시간으로. 며칠씩. 잠을 자고 일어나서 보고, 밥을 먹고 돌아와서 보고. 너무 잔인하고 슬픈 형태로 목격했잖아.
그때 생각했다. 아마 이제 <타이타닉>은 영영 보지 못할 거라고. 어느덧 시간이 오래 지났고, 나는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도 잊고, <타이타닉>도 조금 땀 흘리면서 괴로워하면서도 보기는 볼 수 있게 되었구나.
내 주변에 세월호의 사고와 직접 관계된 사람은 없다. 그러나 나는 세월호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세월호는 우리 모두에게 어떤 생채기를 남겼다. 평이한 일상을 살다가 어느 순간, 작은 균열이 생길 때 깨닫게 된다. 살다가 문득 생명에 위협감을 느꼈을 때, 나도 모르게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던 단어가 부스스 일어났다. 슬프지만 그건 세월호 이후로 많이 회자된, 각자도생이라는 단어였다. 이 위기에서 나를 구해줄 누군가를 기다리기보다, 내가 박차고 일어나야 한다는 감각이, 생존 본능 바로 위에 덧입혀져 있었구나.
어떤 일들은 우리를 영원히 바꾼다. 우리는 코로나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그 차이는 마스크처럼 눈에 보이는 무언가가 아닌, 더 깊고 근본적인 데 도사리고 있다가 어느 순간 고개를 부스스 들어온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세월호 이전의 세상으로도 돌아갈 수 없다.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 죽음, 이유 모를 사고에 우리의 일부분이 매이고 말았다. 이제니의 시구처럼 “이제 우리는 영영 아프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영영 슬프게 되었다.”
4월이 되면 이런 시구를 이불처럼 끌어와 덮었다. 언제부터인가 4월이 슬펐다. 꽃이 피고 햇살이 화사해서 더 슬펐다. 툭 건드리면 눈물이 터질 것 같은 마음을 시로 끌어 덮으며 4월을 보내는 습관이 생겼다.
그건 슬픔도 아니었구나. <장기자랑>을 보면서, 솔직히 한번씩 숨이 턱 막혔다. 영화는 즐겁고 유쾌한 순간들을 많이 담았고 슬픔을 주목하지 않음에도. 그럼에도 짙은 슬픔이 읽힌다. 자식 잃은 부모의 심정을 헤아려 볼 길 없는 나로서는, 영영 낫지 않을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는 건 저런 거구나 하고 그 슬픔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세월호가 나오지 않는, 슬픔의 장면들을 제외한 영화여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느껴진다. 슬픔은 배경처럼 존재하고 그 위에서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이.
슬픔에 아둔한 나로서는 이제야 숨이 막혀오는 그 마음을, 어떤 이들은 일찍이 헤아리고 진작에 움직였다. 엄마들을 방 밖으로 끌어냈다. 어느 날 갑자기 유가족의 자리에 놓여 슬픔 외의 감정과 사건을 너무 많이 겪어야 했던, 그 모든 일들을 폭우처럼 맞은 후에 앓기 시작할 때. 이들은 방 밖으로 나왔다. 커피를 배우고, 서로를 만나고. 그러던 중 연극을 해보겠냐는 말에, 어영부영 고개를 끄덕였다가 연극이 시작된다. 세상 모든 일들이 그렇듯, 진짜 “너무 하고 싶어! 꼭 하겠어!”보다는, 애써주는 사람에게 미안해서… 혹은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사람이 부족하다고 하니까… 같은 이유로 연극은 아슬아슬 계속된다.
연극은 아이들을 기억하고 애도하기 위한 여정으로 시작됐다. 여전히 “누구 엄마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할 수 있는 소중한 자리라서 무대를 포기할 수가 없다. 무대에서는 밝고 사랑스러운 연기를 잘 (심지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잘) 해내는 엄마들이지만, 무대 뒤에서는 여전히 쉽지 않은 감정들이 몰려온다. 그래도 엄마들은 아이들을 기억하며 힘을 낸다.
영영 아픈 단어로 남아버린 ‘수학여행’이라는 단어를 무대에서 다시 꺼낸다. 아이들이 도달하지 못한 그 섬에 이르러, 어쩌면 가장 아팠을 말들을 입 밖에 낸다. 엄마들은 아이들이 입던 옷을 입고, 아이들이 좋아했던 피규어와 봉제 인형을 어루만지며 그 옷도 입어 본다. 아이들의 자리에서, 아이들이 사랑하던 것들의 자리에도 서 본다. 그렇게 타인의 자리에 서 보면서, 같이 극을 만들어간다.
평범한 극 영화처럼, “예술이 주는 치유력”을 만끽하며 “손 맞잡고 해내는 경험으로 성장”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엄마들은 연극을 하면서 변해 간다. 아이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아이들의 사진과 이름만 어루만지던 엄마들은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시에 자신의 마음도 함께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사람마다 그 농도는 달라서, “그냥 나는 멋지게 살고 싶을 때가 있어요.”라는 말도 함께 품고 무대에 오르는 엄마도 있다. 이미 배우의 마음으로 배역 욕심을 내고, 경쟁하고, 기대하고, 기뻐하고, 서운해하기도 한다. 그 모습이 상큼하고 사랑스럽고 유쾌하다. 제각기 다른 농도와 감정들을 다양하게 품고 무대에 오르지만, 이들을 근본적으로 묶었던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두 줄기 강처럼 두 마음이 흐른다. 하나는 빈 자리를 영영 되짚으며 살아가는 마음, 다른 하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마음. 통상적인 극 영화였다면 아마 전자로 시작해 후자로 나아가며 끝났을 것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아서, 씩씩한 걸음을 내일로 옮겨 가도, 어제의 슬픔 또한 사라지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가 ‘유가족’에게 기대하는 표정은 얼마나 일관적으로 납작한가. 사실 그 어떤 사고 이후라도 삶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밝은 얼굴로 무대에 오르는 모습과 무대 뒤에서 긴장과 눈물을 삼키는 모습, 덤덤하게 누군가를 위로하고 돌아서서는 자기 불안을 발견하는 모습이 첩첩 공존하면서.
앞으로도 오래 아프고 계속 슬프겠지만, 이 연극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또 다음 작품은 어떤 결을 품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서로 끌어안고 손 맞잡고 인사하면서 무대는 계속되고 있다. 그렇게 봄이 돌아오고, 아이의 생일도 돌아온다. 여전히 생일 케이크에 초를 꽂고, 아이들이 좋아하던 과일을 기억해 본다. 슬픔 속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이 영화처럼 사랑스러운 모양새로. 다음에는 이 배우 분들의 밝은 얼굴을 실제 무대에서 보러 가야겠다. 그땐 나도 지을 수 있는 가장 환한 표정으로 객석을 채우고 싶다.
*씨네랩의 초청으로 시사회에서 감상 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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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없이 실패하는 사랑에 관하여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사랑을 하는 순간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실패할 것이 눈에 뻔히 보여도, 그것이 나를 다치게 할지라도 일단 덤벼들고 보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 앞에 주춤할 수 있는가. 계산하는 마음을 사랑이라고 불러도 될까.
토베 얀손은 우리에게는 무민 원작자(또는 무민 엄마)로 알려졌다. 핀란드 국민 캐릭터 무민을 만든 사람. 어쩌면 그냥 거기까지.
조앤 K. 롤링이 해리포터 시리즈를 썼다, 같은 느낌이다.
무민에 대한 이야기는 책, 애니메이션, 전시 등 다양하다. 하지만 무민을 만든 사람이 대관절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는 알 길이 없다.
토베 얀손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온 영화 <토베 얀손>은 그런 점에서 작가론적 영화다.
토베는 조각가 아버지의 후광에 가려 의기소침한 화가다.
캔버스를 흰색 물감으로 뒤덮으며 그것을 '자화상'이라고 부르는 화가.
토베의 아버지는 토베가 하는 것마다, 그리고 실패할 때마다 '그러게 내 말을 들으라고 했지?' 같은 말만 한다.
토베는 아버지를 따라갈 수 없음에 좌절한다.
아버지는 토베가 그리는 무민 캐릭터에도 그런 식이다.
'이런 건 그림이 아니야'
아버지는 토베의 <담배 피우는 여자> 그림을 안 보이게 돌려놓는다. 그러나 토베는 숨쉬듯 담배를 피우는 애연가다.
아버지는 또한 국가이자 제도이자 관습이자, 그 모든 규범의 상징이다. 아버지를 거역하는, 아니 거역해야만 예술가가 될 것이다.
토베가 그린 그림들은 주목받지 못하고, 어릴 때부터 낙서처럼 그린 무민으로 만든 풍자만화가 조금씩 주목받는다.
그래도 수입은 불규칙하다.
토베는 예술가가 아니면 동정 뿐인 집안에서, 천재 아버지의 오점을 맡고 있다.
예술가 모임에서 만난 유부남 아토스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와 결혼할 만큼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러다 토베의 <담배 피우는 여자> 그림을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이 나타나고, 그 사람은 토베의 심장을 강타한다.
바로 비비카.
비비카는 시장의 딸이자 연출가이다. 시장의 고희연 초대장 삽화를 의뢰하면서 인연이 되었다.
토베는 거절할 수 없는 강한 끌림에 비비카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어떡하나. 비비카는 아무나 사랑한다. 혹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결혼을 했지만 남편을 사랑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토베만 바라보지도 않는다.
끝없이 다른 이들에게 추파를 던진다.
토베는 비비카의 부탁 반 강요 반으로 무민의 연극 각본을 쓰게 된다.
하기 싫지만 사랑하니까 한다. 그래도 다행히 무민 연극이 히트를 치면서, 토베는 꽤 유명한 작가가 된다.
화가는 아니고, 동화작가다.
누군가가 묻는다. 왜 동화를 쓰게 되었냐고.
토베는 대답한다. 화가로서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비비카를 사랑하지만 비비카는 이기적이다. 비비카에 대한 사랑은 영영 실패한다.
파리에서 우연히 비비카를 만나, 사랑한다고 말하는 토베에게 비비카는 '나는 파리를 사랑해'라는 말밖에 해줄 수 없다.
아토스는 토베와 결혼하기 위하여 이혼까지 불사한다. 토베 역시 비비카에 대한 좌절감으로 청혼을 승낙하지만, 결국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아토스 역시 토베와의 사랑에서 실패했다. 아무리 무뎌지려고 해도 안 되는 마음이 있다는 그의 말처럼.
무민의 인기는 고공행진한다. 당시 세계적인 일간지였던 <이브닝뉴스>에서 토베와 계약을 하는데, 그 기간이 무려 7년이다.
월급인 줄 알았던 금액은 주급이다. 집세도 못내서 전전긍긍하던 그가 하루아침에 인기작가가 되었다.
영화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까지를 다룬다.
아버지가 죽고, 유품을 정리하다가 신문에 연재한, 혹은 인터뷰한 무민과 토베의 모든 것을 모아둔 스크랩북을 발견한다.
그리고 토베는 별안간 치워두었던 물감과 캔버스를 꺼내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이가 있었으니, 토베의 평생 반려자인 툴리키다. 툴리키는 토베에게 무엇을 그리느냐고 묻는다.
토베는 말한다.
"새로 시작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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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무민의 탄생 배경이라든지 토베가 무민으로 얼마나 부자가 되었는지 등을 완전히 배제한다.
영화 안에는 예술가이자 여성인 토베 얀손만 존재할 뿐이다. 그의 고독, 그의 외로움, 우울이 펼쳐내는 행위들만 존재한다.
토베 얀손은 무민을 그리고 동화책을 읽어주는 인자한 할머니 이전에 시대와 관습에 저항하며 치열하게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던 한 명의 예술가였다.
또한 자신의 삶을 이끌어나간 한 명의 여성이었다.
이 영화의 감독 또한 여성인데, 한 인간에 대한 전기적 영화임에도 그의 연대기, 혹은 그의 위대함을 작위적으로 꾸미지 않았다는 점에서 전기적 영화의 긍정적인 방향을 제시한다.
토베는 화가가 되는 데도 실패하고 비비카와의 사랑도 실패했으나, 실패는 실패대로 의미가 있다.
끝없이 실패해도 다시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들, 그것이야말로 진짜 사랑이 아닐까.
무민으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음에도 다시 붓과 물감을 잡는 토베 얀손처럼.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은 늘 우리를 아프게 한다.
돈을 사랑하면 돈이 당신을 아프게 할 것이고, 반려동물을 사랑한다면 그것이 당신을 아프게 할 것이다.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것 때문에 몇 리터의 눈물을 쏟았는지 헤아릴 수도 없을 것이다.
사람을 사랑할 때는 말할 것도 없다. 반드시 그것 때문에 울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할 수밖에 없다.
장정일의 시,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처럼, 사랑을 끄고 켤 수 없기 때문이다.
실패할 줄 알면서도 거듭 사랑한다.
어쨌든 삶을 굴려가는 건 사랑이다. 실패하거나 말거나, 사랑이 우리를 죽이고 살린다.
* 시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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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은 이 길에 도착이란 건 없어'
멈춘다는 말이 뭔지 사실 잘 모르겠다. 내 인생에 있어 쉼이란 게 있긴 했을까? 자의인지 타의인지 휴대전화를 만지는 게 일상이 된 거 같다. 항상 하품하고. 공부할 생각하고. 언제는 메이플스토리릌 키고 싶기도 하고. 다 재밌어서 하는 일이라지만 이게 본질적으로 나를 채워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무기력감이 든다. 뭘까? 이 기분이. <소울>도, <루카>도, <드라이브 마이카>도 아닌 무언가가 나에게 있어 참으로 갑갑하다. 소중한 일상의 가치도, 든든히 나에게 어깨를 내어줄 누군가도, 일로 완성되는 행복의 실현도 나를 결국 완성시켜 주지 못할 거라는 막연함이 든다.
근데 이건 비단 나에게만 적용되는 말이 아닐 것이다. 왜, 노잼 시기라는 말이 있지 않아? 사람에게 무엇이든 재미가 없던 때가 올 수도 있는 거잖아. <인사이드 르윈>이나 비슷한 이름의 <인사이드 아웃>에도 마음이 속하지 않으면 이런 시기가 찾아오는 것 같다. 내가 살아갈 삶의 의미가 이제까지 겪어온 상처의 반복이라면 의미가 없는 것 아닌가. 멈추거나 달리는 의미도 찾지 못할 것 같을 때 과연 어떤 것에 기대야 할지 의문이다. 다음이 있을까. 내가 그토록 돌고 돌아온 다음 순간이 있을까. 없을 것 같다. 지금 생이 지옥의 연속이었던 과거의 반복이라면 굳이 이 관문을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 나에게 좋은 갈림길이 된 작품에도 회의감이 든다면 그것은 꽤나 고역일 것이다. 누군가가 말해주면 좋을 텐데. 분명 이다음에 좋은 순간이 온다고.
1. 어떤 것에 대한 작품인가요?
사람이 살아가면서 넘어가야 할 여러 가지 순간이 있다. 나 역시 어느 순간에 놓여있는 것 같다. 나는 지금 행복하지 않다. 그런데 매일 똑같이 자유가 억압되는 일상을 살아야 하니 고역이다. 같이 일하시는 분들이 좋아서 나의 단면의 성장을 이끌어내긴 하지만 이게 딱히 내 인생에 도움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삶을 지나가다 보면 어떤 지점에 도착할 거라고 믿는 것이다. 이 희망이 만약 내 인생에 아무 영향도 가지 않는다면 정말 질리도록 싫겠지. 근데 내가 살아본 바 사실 이걸 넘어간다고 해서 도착을 짠 하고 하는 게 아니었다. 계속해서 지루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이게 문제면 저게 오고. 저걸 끝내면 다른 문제가 찾아오고. 지긋지긋하게 계속해서 반복되는 게 나의 삶이지만 좋은 것도 있다. 잠깐잠깐 따라오는 즐거움이 하루를 버티게 도와주는 것 같다. 이 영화는 이 지점에 관한 영화다. 이렇게 반복되는 순간의 단면을 잘라서 보여준다. 인생은 이렇게 얻기만 하는 불편한 순간의 연속이 맞는 것 같다. 그러다가 가끔 행복해지는 순간이 오는 거지. 이 작품은 이런 인생의 반복되는 순간을 두 남자의 여행기로 축약해 보여준다.
2. 배우들의 연기 합은 어떤가요?
무난하다. 사실 이 영화에 나온 배우들의 이름을 이전부터 아는 경우야 있을 수야 있겠지만 극히 드물겠지? 1997년에 나온 영화고 독일 배우들을 잘 아는 분은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전 지식이 없어도 무난하게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뭐 누가 도드라지게 못하고 이럴 것도 없다.
3.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나요?
줄거리는 쉽다. 시한부의 인생을 살고 있는 두 남자가 각자 인생의 소원을 이뤄가는 내용이다. 둘은 사소한 소원을 이루기 위해 전진하다 결국 '바다를 본 적이 없다'라는 공통점을 찾게 되고, 이를 목적으로 잡고 모험을 떠난다. '두 남자의 버킷리스트 해결하기', 얼마나 쉬워? 코미디 장면도 있고 액션신도 있어서 무작정 어려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큰 여운을 남김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장면에서 엥? 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게 나름 중요하다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지만 나는 이 영화의 메시지가 그 장면 이전의 플롯에서도 충분히 찾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극의 이해가 어렵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신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보면 납득이 아예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4. 보기 전에 알아야 할 것이 있나요?
밥 딜런의 동명의 노래 <Knocking on heaven's door>를 한번 듣고 가는 것도 좋을 듯. 곡 자체가 원체 유명해서 안 들어본 분들이 극히 드물 것 같기도 하다. 아, 굳이 더 말해준다면, 영화에서 두 주인공이 처한 상황과 그에 따른 결과를 염두하며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난 그게 감독이 관객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메시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5. 어떤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나요?
음.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일상이 재미가 없는 사람들. 이런 분들에게 큰 감동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영화를 자연스럽게 따라가다 보면 두 상황이 같이 제시되며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나는 이런 걸 보며 생이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삶은 근사한 게 맞지 않을까? 이렇게 개 같은 순간이 전부 인 게 사람의 일생인데 가끔, 아니 자주 사람이 행복할 순간을 주기 때문이다. 또, 지옥 같은 현실에 시달리거나 그런 기억이 있는 분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왕따. 괴롭힘. 가정폭력. 내가 글로 쓸 수 없는 비극은 모두의 삶에 일어날 수 있다. 나는 그 순간이 2년이나 반복돼서 세상이 날 미워하는 것 같고 생각했다. 내가 이 영화를 볼 때는 그 상처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할 때였다. 이 모든 순간을 벗어날 수 있겠지. 그렇게 탈출할 때가 오겠지. 막연한 긍정을 조금이라도 품게 됐던 때가 이 작품을 보고 난 후였던 것 같다. 또, 꿈이라는 것에 고민하는 분들에게도 추천한다. 오래 걸려도 상관없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앞으로 전진한다면 언젠가 이상향에 닿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좋은 순간과 우울한 순간의 연속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아, <드라이브 마이카>에 감동을 느낀 분들이라면 (물론 작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다른 궤의 걸작이다.) 시간을 두고 나서 이 작품을 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 영화와 비슷한 점이 조금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작품의 엔딩이 생각난다. 그렇게 좋고 싫은 순간의 연속으로 살다가, 고통받았다는 걸 언젠가 위에 계신 분에게 말한다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순간이 오지 않을까. 천국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눈 뜨고 있는 이 현재에서는 닿을 수 없을 것이다. 근데, 우리는 언젠가 맞이할 천국의 문을 두드릴 순간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계속되는 불행과 지루함이 반복되도라도 말이다. 이 <노킹온 헤븐즈 도어>는 이런 작품이다. 어느 날 우리에게 말할, 그동안 노력해왔다는 말을 하게 도와주는 영화다. 또 이 모든 순간을 어느 정도는 긍정하게 도와주는 작품이다. 다들 포기하지 말자. 현실이 그렇게 개 같아도 우직하게 달려나가자. 언젠가 맞이할 천국의 문 앞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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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잘만든 수작인데 빛을 보지못한 숨겨진 비운의 명작
안녕하세요 빛을보지못한 숨겨진 명작을 찾아서....첫번째 2007년작 영화:스카우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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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미스> 티저 예고편
"미스 프랑스에 나갈 거예요"
동네 복싱장에서 청소부로 일하며 지긋지긋한 매일을 보내던 알렉스.
우연히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고, 자신의 오랜 꿈을 기억해낸다.
좌충우돌 미스 프랑스 도전기!
한계를 뛰어넘은 당당한 발걸음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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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미친 능력> 글로벌 예고편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컴백? 왕년에 잘나가던 슈퍼스타에서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빚쟁이 신세가 된 ‘닉 케이지’ 그런 그에게 생일 파티 참석을 조건으로 기꺼이 백만 달러를 주겠다는 슈퍼팬 ‘하비’(페드로 파스칼)가 등장한다. 스타로서의 자존심과 어마어마한 제안 사이에서 갈등하던 ‘닉 케이지’는 결국 생일 파티가 열리는 곳으로 향한다. 도착과 동시에 초호화 환대를 받고 행복한 휴양을 보내던 그는 의문의 CIA로부터 납치되고, ‘하비’가 악명 높은 수배범인 사실을 듣게 된다. CIA로부터 가족을 빌미로 위험한 미션을 강요 받은 ‘닉 케이지’는 설상가상 예기치 못한 사건들에 휘말리게 되는데… 감당 불가! 방심 금물! 참을 수 없는 초대형 코믹 액션이 온다! 레디 액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