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또비됴2024-09-11 22:51:09
우리~~하게 아픈 어느 3대 대가족의 초상
영화 <장손> 리뷰
우리~~~하게 아프다. 경북이 고향은 아니지만, <장손>을 보면 이 사투리가 절로 나온다. 약 2시간으로 압축된 대가족의 이야기를 보며 느끼는 다양한 감정, 특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지긋지긋한 애증 관계를 유지하다가 끝내 등을 돌리는 김씨 집안 가족의 모습은 그 자체로 쑤시고 아리는 듯한 고통을 전한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이 보편적인 가족은 마주하기 싫지만, 그래서 더 보게 된다. 이게 바로 우리 가족의 모습이라고 여기면서.
경북 시골에서 두부 공장을 운영하는 김씨 집안 식구들은 분주하다. 오늘이 제삿날이기 때문이다. 여느 가족처럼 남자는 놀고, 여자는 일한다. 한여름 제사라 에어컨도 틀법한데, 집 안의 안주인인 할머니 말녀(손숙)는 장손 성진(강승호)이 와야 틀 기세다. 서울에서 무명 배우로 활동하는 성진은 뒤늦게 고향 집을 찾는다. 오랜만에 내려온 터라 반가울법한데, 성진의 얼굴엔 그늘이 졌다. 아니나 다를까 제사 이후, 아버지 태근(오만석)이 할아버지와 자신의 대를 이어 두부 공장을 물려받으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에 반기를 든다.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다음 날 아침, 성진은 할아버지 승필(우상전)과 말녀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서울로 올라간다. 계절이 바뀐 가을 어느 날, 성진은 급히 고향으로 내려간다. 건강했던 말녀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 두부처럼 살아온 가족
<장손>은 겉으로 보기엔 별다른 것 없는 3대 대가족의 이야기로 보인다. 하지만 그 안은 우리 사회에 벌어지고 있는 세대, 젠더 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소리 없는 전쟁터나 다름없다. 어느 집안이나 문제는 다 있듯 김씨 집안도 마찬가지다.
“아이고 우리 장손 왔나!”라는 말녀의 말 한마디에서 알 수 있듯 장남을 최고로 여기는 이 집안은 여성들만 노동한다. 1990년대 드라마 <아들과 딸>에 나올법한 남녀 차별이 이곳에서는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그뿐인가. 한국전쟁 때 가까스로 살아남아 두부 공장을 운영하며 장손의 책임을 다한 할아버지 승필은 민주화 운동을 하다 다리를 절고 낙향한 아들 태근을 못 마땅해 한다. 태근 또한 자신을 빨갱이 운동에 가담했다고 미워하며, 두부 공장 운영에 일일이 간섭하는 아버지가 밉다. 성진은 술만 마시면 가슴 속 응어리진 울분을 토해내며 가족에게 피해를 주는 태근을 아주 아주 싫어한다.
가족 중 유일한 기독교 신자인 첫째 딸 혜숙(차미경)은 기도와 믿음으로 교통사고 후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보살피고, 성진은 그 사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여기에 막내딸 옥자(정재은)는 사업가 남편 동우(서현철)를 따라 승필이 그토록 싫어하는 공산국가인 베트남으로 이민을 간다. 가족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에서도 성진의 누나 미화(김시은)는 남편과 두부 공장을 물려받을 생각을 하고 있다.
김씨 집안 사람들은 가부장적 제도 안에서 혈연지간으로 뭉친 가족이지만, 알고 보면 실상 남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서로를 달가워하지 않는 관계다. 마치 자신의 의지 없이 억지로 뭉쳐져 네모반듯하게 나온 두부처럼 말이다. 김씨 집안의 가업이 두부 공장이라는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 자연의 섭리대로 사라져가는 가족주의
두부 같은 가족을 어떻게든 뭉치게 한 이는 바로 말녀. 영화는 그녀의 죽음 이후 바스라져 버리는 가족의 모습을 담는다. 결국 이들이 와해되는 건 돈 때문이다. 전조는 장례식장에서 각자 친구 지인이 전한 조의금을 나누는 장면부터지만, 문제의 촉발 지점은 혜경으로부터 시작한다. 헤경은 과거 말순에게 맡겨 놓은 돈을 장손인 태근에게 찾아보라고 강하게 요구한다. 이로 인해 촉발된 문제는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더 큰 사고가 발생하며 이들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혜경이 요구하는 건 돈이지만, 실상 원하는 건 그동안 이 집안을 위해 노력했다는 가족의 인정이다. 가부장적 가족주의에서 철저히 배제된 딸(혹은 여성)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처럼 인정을 바라는 혜경의 모습은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혜경의 남편이 두부 공장을 이어받지 못하고 교통사고로 병원 신세를 져야 하고 이를 돌봐야 하는 혜경의 상황은 한국 사회에서 딸이 짊어져야 하는 차별의 무게를 비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3대 장손의 이야기를 대변하듯 여름, 가을, 겨울이란 세 계절을 담는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가족주의는 해체가 되고, 관객은 이를 지켜본다. 그나마 화기애애했던 여름을 지나 냉기 서린 가족의 이면이 드러나는 겨울에 당도하면 왠지 모를 서글픔이 느껴진다. 이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상엿소리처럼, 한 가족으로서 이들을 마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감독은 계절이 변하듯 이 과정이 자연의 섭리라고 말하는 것처럼 연출한다.
<장손>의 또 다른 주인공은 바로 계절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자연이다. 이 풍광을 유려한 미장센으로 담아낸 화면은 그 자체로서 아름답고 매력적인데, 반대로 무섭게 다가온다. 인간으로서 자연의 섭리를 바꿀 수 없는 것처럼, 가족주의 해체 또한 막을 수 없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 모든 짐을 다 내려놓고 함박눈을 맞으며 하염없이 걸어가는 승필의 마지막 모습은 사라져가는 가족주의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축제>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떠오르다!
<장손>은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해 유수의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이 작품에 엄지척을 날린 평단의 공통된 의견 중 하나는 영화가 가부장적 3대 가족을 통해 우리나라 사회의 문제점을 다루고 있다는 부분이다. 한국전쟁을 시작으로 격동기를 겪은 근현대사, 압축성장에 따라 빠르게 변화한 우리 사회는 발전과 번영을 이룩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세대 간의 갈등을 낳았고, 서로 간의 이해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빼앗았다. 각 세대를 대표하는 3명의 장손은 서로 간의 오해만 쌓아놓고 산다. 저마다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가 있지만, 이를 툭 터놓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니 이야기하지 못한다. 장남으로서 해야 할 책임과 책무에 짓눌려 살아왔기 때문이다.
장손으로서 이들은 가족을 지키지 못하고 실망시키면 안 된다는 공포감에 점차 가족에게 보이지 않는 벽을 세웠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단단해진 벽은 허물 수 없게 되어버린다. 후반부 승필은 성진에게 자신이 왜 그렇게 살아왔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혜경이 그토록 찾는 돈의 행방을 알려주는데, 그 때야 성진과 관객은 이 할아버지의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한다.
늦었지만 비로소이해의 물꼬를 트는 장면은 과거 임권택 감독의 <축제>, 그리고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떠오르게 한다. 이 두 작품은 사뭇 다르지만, 서로 담을 쌓고 지냈던 세대가 ‘죽음’이란 계기를 통해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는 내용은 닮아 있다. 그리고 각각 동화책(<축제>)과 아버지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아버지의 해방일지>)가 그 촉매제 역할을 한다.
<장손>은 이제 사라져가는 윗세대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측면에서 그 의미가 크다. 계절이 변하는 것처럼 한 시대를 책임졌던 세대가 사라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 이 현상은 누군가에게는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한 일일 수 있지만, 감독은 마지막 승필의 뒷모습을 보여주며 왠지 모를 욱신거리는 고통의 슬픔을 안긴다. 사라진 후에야 그 세대를 오롯이 이해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이다. 승필이 전한 검은 지를 확인하는 성진은 그제서야 장손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려 애쓴 할아버지를 이해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모른척했던 장손의 역할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장손은 가족 중 가장 큰 수혜자가 아닌 가족을 이끌어야 하는 책임자라는 것을 말이다.
극 중에서 보이지 않는 계절인 봄은 출산을 한 미화의 아이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아이의 이름은 ‘봄’이다. 전 세대가 사라지고,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는 그 기점. 어떤 봄을 맞이할 것인가는 검은 봉지를 받은 성진, 그리고 또 다른 성진이들의 선택에 달렸다.
사진 제공: 인디스토리
평점: 4.0 / 5.0
한줄평: 우리하게 아픈 어느 3대 대가족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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