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4-10-02 09:44:52
‘관계성’에 관한 잊히지 않을 인장
영화 〈위국일기〉
두 장면이 있다. 여고생 ‘아사’와 친구 ‘에미리’가 텅 빈 학교 체육관에 둘이서만 있다. 두 사람은 넓은 체육관에서 때로는 가까이 앉아, 때로는 뛰어다니며 대화를 나눈다. 에미리는 아사에게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점을 알려주려는 참이고, 아사는 그런 에미리에게 실례가 될 수도 있는 반응과 질문을 던져 종종 민망해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불편한 긴장은 없다. 이 장면의 주요한 정서는 두 사람이 적당한 거리를 둔 채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면서 안전하고 편안한 거리감으로 신뢰와 애정의 관계를 형성하는 데서 나온다. 텅 빈 체육관에서 두 사람을 방해할 요소는 없다. 오롯이 둘만 마주해 말과 감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공간이다. ‘완벽한 접속’은 불가능할 테지만 상관없다. 타자를 완벽히 내 것으로 하는 관계는 공감이라기보다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거리는 있지만 결코 멀지는 않고, 서로를 온전히 믿을 수 있는 두 사람의 관계성. 텅 빈 체육관의 두 소녀는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관계, 애정이 깃든 관계의 모델이 무엇인지를 가늠케 해준다.
두 번째 장면도 그렇다. 이번에는 아사와 그의 이모 ‘마키오’다. 두 사람은 탁 트인 바닷가의 한적한 계단에 앉아 있다. 이번에도 딱 달라붙어 있는 대신 위아래로 몇 칸의 간격을 둔 상태다. 아사와 에미리가 그러했듯, 두 사람은 때로는 앉아서 때로는 일어서서 움직이며 말과 감정을 나눈다. 닫힌 공간인 체육관의 폐쇄성이 커밍아웃하는 에미리에게 안전하다는 감각을 주었다면, 탁 트인 바닷가는 뜻밖에 한 가족이 된 조카와 이모가 앞으로 만들어갈 관계의 양상이 무한히 깊고 푸르리라는 점을 암시한다. 하나가 될 필요 없는, 적당한 거리를 조정해가며 서로의 곁에 있는 관계의 모델이 다시 한번 아름다운 이미지로 재현된다.
〈위국일기〉는 관계성에 관한 영화다. 가장 주요하게 다뤄지는 건 아사와 마키오의 관계다. 하루아침에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아사는 자신의 엄마와 십수 년 전에 절연한 이모 마키오와 한 가족을 이룬다.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이 아사를 두고 내뱉는 무심하고 무례한 말에 분노해 홧김에 자신이 아사를 데려가겠다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조율해야 할 것은 무수히 많다. 서로 다른 생활 습관, 성격은 당연하고 돌봄을 어떻게 주고받을지도 협상해야 한다. 비혼 여성 마키오는 갑자기 생긴 조카를 돌보고 보호하는 일에 동반되는 책임감이 생경하면서도 때로는 부담스럽고, 아사 역시 자기 엄마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면서도 그 이유는 절대 말해주지 않는 마키오와의 관계가 쉽지만은 않다.
영화는 두 사람이 차이를 조율하며 일상을 맞추고, 새로운 관계 모델을 학습하며, 죽은 아사의 부모님을 애도하는 과정, 나아가 억압적인 엄마(아사)/언니(마키오)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담아낸다. 그러나 이뿐만이 아니다. 아사는 결혼하지 않는 여성 어른이 맺는 친구/연애 관계에서도 지금껏 모르고 지낸 관계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마키오 역시 아사를 돌보며 기존의 자기 관계망에 더욱 깊이를 더해나간다.
크든 작든 모든 등장인물의 관계성을 세심히 그려내는 〈위국일기〉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건강하고 행복한 관계, 서로를 북돋는 관계는 완벽한 이해와 공감이 아니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를 존중하며 곁에 머무를 때 나온다고.
공감과 이해라는 말이 너무 쉽게 쓰인다는 느낌을 곧잘 받는다. 그러나 자신만의 고유한 결을 축적해온 타자는 결코 누군가가 ‘완벽’하게 포착해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 일이 가능하려면 타자는 생동하는 존재이기를 멈춰야 한다. 완벽한 이해는 타자가 주체이기를 멈추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오롯이 희생해 내놓을 때만 가능하다. 심지어 이마저도 ‘해부학적’ 이해에 그친다. 죽은 동물과 곤충의 박제에서 우리가 그들이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행동하고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듯이 말이다. 우리에게는 누군가를 장악하듯 이해하려 하지 않고 적당한 거리감으로 은은하게 보듬는 관계의 모델이 필요하다.
〈위국일기〉가 공들여 보여주고자 하는 건 바로 이러한 관계성이다. 극적인 전개나 자극적인 요소로 관심을 끌지는 않지만, 자신뿐 아니라 서로의 일상을 지탱하며 함께 나아가는 건강한 관계의 양상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위국일기〉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관계가 그렇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두 장면은 영화가 그려내는 여러 인상적인 관계를 아름답게 재현하며 잊히지 않을 인장을 남긴다. 체육관과 바닷가. 서로 다른 속성을 지닌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미지화된 관계성은 ‘선을 넘는’ 관계에 지친 사람들에게 은은한 위로로 다가갈 것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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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의 리더십 그리고 거북선, 왜군을 박살 내다
좋은 리더는 좋은 팀을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좋은 팀은 회사나 국가를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런데 좋은 리더라고 하면 여러 가지 인물상이 떠오른다. 조금은 과격하지만 결과를 이뤄내는 타입이 있는가 하면, 조용하지만 차분하게 천천히 일을 진척시키는 경우도 있다. 모든 리더가 좋은 결과를 얻어내지 못하는 것처럼 좋은 리더가 되는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다. 그 말은 좋은 리더를 만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현대로 치자면 회사에서는 팀장이나 사장일 것이고, 국가로 치자면 각 장관이나 대통령이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리더 일 것이다.
좋은 리더에 대한 판단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역사적 인물들은 좋은 리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을지문덕이나 강감찬 그리고 세종대왕 같은 인물을 우리는 좋은 리더로 꼽는다. 한국의 역사 속 인물 중 가장 으뜸으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이순신 장군일 것이다. 임진왜란의 한가운데에서 조선의 적은 배와 무기로 수많은 왜군을 여러 번 물리친 그는 그야말로 한국의 영웅이라고 부를만하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한산대첩, 명량대첩 그리고 노량해전까지 여러 번의 해상 전투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얻어낸 그가 가진 리더십은 꽤나 대단했음에 틀림없다.
한국 최고 흥행 영화의 후속 편 <한산:용의 출현>
2014년에 개봉했던 <명량>은 본격적으로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영화였다. 배우 최민식의 얼굴로 이순신이라는 역사적 인물이 가진 고뇌를 담았다. 두려움에 갇혀있는 병사들을 꺼내기 위해 그가 할 수 있었던 선택들이 영화 속에 담겼고, 무엇보다 그가 사용했던 해상 전의 전략과 거북선은 스펙터클하게 관객에게 전달되었다. 클라이맥스에 신파가 너무 반복적으로 제시되며 아쉬운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1.700만 명이 넘는 관객들이 극장을 찾아 영웅 이순신과 거북선을 눈으로 확인했다. 그 흥행 기록 자체가 이순신이라는 영웅이 한국 사람들에게 단순한 역사적 인물 중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명량>보다 앞선 시기를 다루는 <한산:용의 출현>은 한산대첩을 다루고 있다. 한산 해상 전투가 있기 전 왜군의 장수중 하나인 와키자카(변요한)가 한산도를 침략하게 되는 과정을 차근차근 보여준다. 영화의 첫 장면부터 와키자카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그만큼 이순신의 적이 얼마나 집요하고 치밀하게 그 전투를 준비했는지를 보여준다. 임진왜란이 막 시작되었을 때 왜군들은 이미 한양까지 점령하고 기세를 몰아 명나라까지 가려고 한다. 이순신(박해일)은 그를 돕는 장군들과 함께 한산도 앞바다에서 결전을 벌일 준비를 한다. 이순신은 수세에 몰린 조선군의 사기를 걱정하면서 내부에 다른 목소리를 내는 원균(손현주)을 설득하여 전투를 자신의 방식대로 끌어가기 위해 애쓴다.
영화는 초반에 왜군과 조선군의 첩보전을 통해 극적 긴장을 끌어올리면서 조선 내부의 정치적 갈등과 선택 그리고 그 속에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이순신의 모습을 비춘다. 전작인 <명량>의 이순신에 비해 좀 더 과묵해진 모습을 보이는 그는 완전한 열세의 상황에서 왜군을 막을 최선의 방법을 고민한다. 영화 속 이순신은 주변 인물들에게 결코 감정적이고 공격적이지 않다. 전쟁의 의미를 묻는 준사(김성규)에게 '의'과 '불의'의 대결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전쟁에서 누가 옳고 그른지를 분명하게 정의하면서 아군들에게 싸울 명분을 선사한다. 영화 속 그의 말은 분명하고 단호하고 틀리지 않다. 그래서 더욱더 주변 인물들은 이순신을 신뢰할 수밖에 없다.
이순신의 리더십 그리고 거북선
<한산:용의 출현>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바로 거북선이다. 거북선은 영화 속에 몇 척이 등장하지 않지만 결정적인 순간 등장하는 거북선의 존재감은 상당하다. 무척 단단해 보이고 무너질 것처럼 보이지 않는 거북선은 왜군들에게는 두려운 무기다. 이순신과 거북선이 함께 만들어내는 두려움은 왜군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공포로 퍼져나간다. 적장 와키자카가 걱정하여 두려움이 퍼져나가는 것을 막았지만 그 두려움은 서서히 왜군들을 사로잡아갔다. 왜군들이 왜 그렇게 거북선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영화는 마지막 해상 전투에서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순신은 수적인 열세를 그의 리더십으로 극복해나간다. 그가 가진 전략인 학익진은 바다의 성을 만드는 전략이다. 매복을 하고 있는 적을 끌어내며 전투를 벌이거나, 결정적인 순간 출정하는 거북선 등 영화의 전투 장면은 풍부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이순신이라는 리더가 흔들리지 않으면서 주변의 장수들은 좀 더 사력을 다해 전투에 임하고 각자 맡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다. 영화 <한산:용의 출현>에는 이렇게 이순신이 가진 부드럽지만 강인한 리더십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순신 역할을 맡은 배우 박해일은 이번 영화에서 대사가 그렇게 많지 않다. 이순신의 과묵한 고뇌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 같다. 그래서 박해일이라는 배우가 가진 정적인 이미지와 잘 맞게 표현되었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배우는 변요한이다. 적장 와키자카 역을 맡은 그는 무시무시하고 욕망 넘치는 적장을 뛰어나게 묘사했다. 살기 넘치는 눈빛과 액션은 영화에 극적인 긴장을 불어넣고, 마지막 클라이맥스 전투에서도 전투의 통쾌함을 배가시킨다.
무시무시한 적장을 맡은 변요한의 명연기
영화를 연출한 김한민 감독은 원래 <핸드폰>이다 <최종병기 활> 같은 영화를 통해 쫄깃한 긴장감을 영화 속에 잘 불어넣었던 감독이다. 그는 <명량>의 흥행이 성공하면서 이순신 3부작을 야심 차게 만들고 있다. 이번 <한산:용의 출현>이 두 번째 이순신 영화인데, 전작인 <명량>의 단점을 보완하려는 노력이 보인다. 신파를 덜어내고 조금은 건조하게 이야기를 구성하였고, 풍부한 음악을 활용하여 영화의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의 다음 영화는 <명량> 이후의 시간대를 다루는 <노량>이다. 이순신 역으로는 배우 김윤석이 캐스팅되어 있다. 이번 <한산:용의 출현>의 완성도만큼의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이순신 3부작 모두가 좋은 흥행 성적을 거둘 것으로 보인다.
영화 <한산:용의 출현>은 여름 블럭버스터로 극장에서 보기에 좋은 영화다. 한국에서 자주 보기 힘들었던 해상 전투를 제대로 구성했으며, 교과서에서나 배우던 학익진의 실제 전투 모습과 거북선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관객들이 기대하고 있는 요소를 충족시키는 영화다. 무엇보다 이순신의 리더십이 어떤 것인지를 볼 수 있는 영화다. 리더십의 부재 속에 있는 한국의 현재 상황에서 꽤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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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부당거래〉의 세계에 갇힌 류승완
상업영화 감독으로서 류승완이 가진 위상을 고려했을 때, 〈베테랑2〉는 아쉬움을 남기는 영화다. 먼저 주제다. 〈베테랑2〉는 수년 전부터 범람하는 사적 제재물의 연장에 있다. 신자유주의 사회 이후 공동체 붕괴 속도는 가팔라졌고, 법과 공권력은 시민들의 법 감정을 충족하기에는 솜방망이처럼 가벼웠다. 단지 능력과 역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권력 친화적으로 뼛속까지 썩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적 제재 장르물은 법과 공권력은 만인에게 평등하게 집행된다는 믿음이 깨진 곳을 파고들었다. 〈베테랑2〉와 직접 비교되는 〈비질란테〉 시리즈가 아니더라도 하나하나 언급하기도 벅찰 정도로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이 문제를 다루었다. 심지어 2022년 작 〈경관의 피〉는 법의 테두리에서 범인을 잡는 경찰과 수단과 방법을 가라지 않고 악인을 검거하는 경찰의 대립을 다뤘다는 점에서 〈베테랑2〉의 문제의식을 한참 앞서 선보인 바 있다. 대중의 원한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찰이 마주한 딜레마라는 〈베테랑2〉의 문제의식이 영화 초반부터 도드라졌을 때 실망스러웠던 이유다. 이미 익숙한, 심지어 자극적‧선정적으로 활용되다 소진된 소재에 왜 굳이 류승완까지 뛰어들었을까 싶어서다. 몇몇 인상적인 액션신과 배우들의 연기만으로는 돌파할 수 없는 기시감을 내내 떨칠 수 없었다.
정작 흥미로웠던 건, 이 영화가 류승완이 지향하는 세계를 드러내 보인다는 점이었다. 〈부당거래〉에서 그는 감히 손댈 수 없는 자신들만의 카르텔을 구축한 법 기술자의 문제를 다뤘다. 체념과 무력감을 자아내는, 우리가 어떤 세계를 살고 있는지에 대한 냉소적 조망이었다. 그러나 〈베테랑〉에서는 이를 통쾌함과 짜릿함이 깃든 분노로 전환했다. 조태오(유아인)라는 희대의 악역과 그를 때려잡는 평범한 경찰 서도철(황정민)의 이야기는 〈부당거래〉가 그려낸 세계와는 분명 달랐다.
〈베테랑〉에서 류승완이 ‘무엇’으로 〈부당거래〉의 닫힌 세계를 돌파했는지에 주목해보자. 서도철이 거악 조태오와 맞설 때 가진 무기는 몸과 깡뿐이었다. 대중문화 담론으로 영역을 확장해보자면, 신자유주의 시대의 착취와 경쟁 격화로 초토화된 기존의 남성 연대를 지탱해온 건 ‘의리’였다. 굳이 김보성 배우의 캐릭터로 자리 잡은 ‘의리’ 열풍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즈음의 한국영화는 구원을 갈구하며 고뇌하는 남성 캐릭터의 독무대였다. 우정, 민족, 돈, 정의, 여성을 매개로 한 남성 연대를 모색한 이 시기의 영화는 이른바 ‘두 글자 영화’, ‘세 글자 영화’ 등으로 불리며 범람했다. 그중에서도 류승완의 〈베테랑〉이 천착한 건 몸과 깡이었다. 조태오에 비해 모든 게 열세인 서도철이 이들을 무기로 끝내 승리하는 영화의 서사에서, 평범한 남자라면 ‘누구나’ 단련하거나 가질 수 있는 몸과 깡은 분명 길 잃은 채 좌절하는 남성 주체에게 짜릿하고 통쾌한 위무로 다가갔을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시간이 흘러 〈베테랑2〉가 나왔다. 서도철은 여전히 몸과 깡으로 싸운다. 그러나 류승완은 그에게 하나의 무기를 더 준다. 바로 소시민의 평범한 윤리다. 전작에서는 하나하나 규정을 지켜가며 수사해야 하는 상황에 서도철이 답답함을 느끼고 이를 은근슬쩍 위반하며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 심지어는 누군가의 규정 '악용'으로 서도철이 곤경에 몰리는 장면도 있었다. 그런 서도철이 이번에는 원칙과 상식의 수호자로 돌아왔다. 서도철은 법이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다는 데 불만인 평범한 소시민 중 한 명이다. 그러나 공권력의 일원으로서 이 조류에 휩쓸리기보다는 원칙에 입각한 직업윤리를 택한다. 공권력을 사적 제재의 수단으로 삼는 경찰(정해인)에 대적하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부당거래〉의 검사들이 그러하듯 서도철이 기성 체제의 수호자로 둔갑하는 순간이다. 물론 차이는 있다. 〈부당거래〉의 검사들이 지키고자 한 건 자기 기득권이었지만 서도철은 법과 공권력에 담긴 상식을 옹호하고자 한다.
〈베테랑2〉는 이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 유독 공을 들인다. 이 영화에서 범죄자보다 더 악질적인 존재로 제시되는 인물군은 자극적인 가짜뉴스만 유포하며 수익을 내는 유튜버, 마찬가지로 폭력적인 방식으로 범죄자를 사적으로 처벌하고자 하는 ‘의인’ 등이다. 범죄를 저지르고도 그에 마땅한 죗값을 치르지 않는 건 문제지만, 그들을 합법적인 방식을 거치지 않고 처벌하려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이다. 소시민 서도철의 가족 이야기가 전편에 비해 더 자주 등장하고, 극의 서사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맡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전작에서 가족은 서도철이 현실에 발을 걸치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부각하기 위한 부수적 장치 정도로 활용됐지만, 이번에는 서도철이 지키고 보호해야 할 핵심 대상이라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서도철이 직업윤리를 배반하지 않으면서도 끝내 가족을 지켜내고 체제를 교란하는 악인을 검거하는 데서 직업적 상식을 지키는 일이 사회의 ‘근간’인 가족을 지키는 일로 확장되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사건을 해결한 서도철이 냉랭하던 아들과 라면을 끓여 먹고, 그의 아내가 무심한 듯 부자父子에게 다가와 어우러지는 장면은 서도철이 고군분투 끝에 지켜낸 직업윤리가 가족을 지키는 일과도 연결되어 있음을 강하게 환기한다. 불합리하더라도 자기 영역에서 직분에 맞는 윤리를 지키며 가정을 지키는 어느 소시민 남자의 윤리는 이렇게 몸과 깡 이후 서도철의 새로운 무기가 된다.
단순한 선악 구도에서 몸과 깡만을 무기로 강자를 들이받는 소시민의 이야기는 판타지일지언정 쾌감을 안겨준다(〈베테랑1〉). 하지만 칼로 무 자르듯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한 현실에서는 자기 윤리를 붙잡고 지탱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베테랑2〉). 그런 서도철에게 류승완은 소박한 정의로 소박한 삶을 지키는 남자야말로 가장 위대한 남자라는 위안을 건넨다. 일상의 작은 정의야말로 〈부당거래〉의 폐쇄적 세계와 〈베테랑〉의 판타지적 승리가 채워주지 못하는 허탈함을 온전히 채워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영화가 치열하게 모색한 남성성의 길이 돌고 돌아 다시 도달한 곳이다. 그러나 지금의 세계가 평범한 남성 가장이 답으로 제시될 수 있는 시대인가? 〈부당거래〉의 부조리한 세계는 과연 그토록 ‘쉽게’ 극복될 수 있는 것일까? 그것도 감독이 전작 〈밀수〉에서 선보였듯 여성들의 억눌린 목소리와 가려진 노동이 이제 막 포괄적 사회 공론장에 진입한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류승완 감독이 그토록 돌파해내고자 한 〈부당거래〉의 세계는 〈베테랑2〉로 인해 출구 없는 세계임이 다시금 확인되었다. 서도철에게는(그리고 남성들에게는) 다른 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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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슈퍼 히어로 3부작의 또 다른 정점
내 사랑은 일단 이 지구에 없어
얼핏 들어보면 주먹으로 누군가를 때리는 듯 한 소리가 난다. 드러머는 그웬이다. 펑펑펑펑..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의 드럼에는 한탄이 묻어 나오는 듯하다. 머릿속에 가득한 그 사람의 얼굴. 그 사람은 마일즈다. 스파이더우먼이 된 그웬. 그웬은 거미에게 물린 후로, 정확히 슈퍼히어로가 된 후에 스스로를 혼자라고 생각했다. 차원문이 열린 후에 만난 마일즈는 뭔가 다르다고 느꼈다. 마음이 잘 맞았던 두 사람. 사실 그웬에겐 첫사랑이 있었다. 이름은 피터 파커. 학교폭력 피해자였다. 하지만 그웬은 피터의 편이었다. 누구보다 친하게 지냈던 그웬과 피터. 그렇다고 해서 피터가 엇나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피터. 친구를 떠나보냈다는 아픔을 잊을 채도 없이 경찰인 아버지에게 살인범 누명이 써진다.
역시 혼자일 수밖에 없는 걸까. 차라리 거미한테 물리지 않았으면 다행일 텐데. 아버지도 속여야 한다. 여전히 외로운 그웬. 이런 입장에서 마일즈가 그웬 삶에 등장했다는 건 선물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소극적이었던 그웬. 별다른 인사도 못한 채로 마일즈를 다른 차원으로 떠나보냈다. 하지만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고 했었나? 갑자기 그웬의 지구에 어떤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르네상스 벌처'가 이쪽 세상에 침입한 것이다. 출동하는 스파이더우먼. 분전을 펼치지만 쉽지 않다. 이때 낯익지만 어딘가 신선한 얼굴이 들어온다. 파마머리에다 임산부인데, 분명히 스파이더우먼이다. 다른 차원에서 온 손님인가? 그웬의 호기심은 곧 사실이 된다. 안녕! 그웬? 난 제시카 드루! 다른 차원에서 왔어. 또 다른 멀티버스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이 멀티버스에서 그웬이 생각지도 못했던 대환장파티가 열린다. 과연 이곳에서 어떤 모험이 벌어질까?
숫자로는 4년 차
4년여 만에 돌아온 시리즈의 신작이다. 4년이면 뭔가 좀 된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이 '멀티버스'와 '스파이더맨'이 익숙하다. 왜 익숙한지 따지기 전에 우선 전작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시리즈의 1편이었던 <스파이더맨 : 뉴 유니버스>. 이 작품이 기존 스파이더맨 시리즈들과 차별점을 가져 호평을 들었던 이유는 클리셰 뒤집기라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 스파이더맨 시리즈 굉장히 익숙하다. 이미 미국에서는 코믹스가 대중적인 인기를 끌어서 두말할 필요가 없다. 실사영화 시리즈들도 우리가 잘 알고 있다. 호러 장인 샘 레이미가 연출했던 '스파이더맨' 3부작은 글쓴이 같은 90년대 후반생의 관객이라면 다들 알지 않을까 생각한다. 스파이더맨이 거미줄로 기차를 멈춰서는 장면은 히어로영화 역사에 남을 명장면이다. 또 앤드류 가필드가 피터 파커를 맡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엠마 스톤의 추락신이 역시 명장면으로 남아있다. 마지막으로 톰 홀랜드가 주인공을 맡은 마블의 스파이더맨 3부작은 가장 최근작인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이 기록적인 흥행을 기록하며 전 세계 히어로 무비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렇게 스파이더맨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만화/영화이기 때문에 시리즈의 필수요소 같은 것들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뿐일까? 멀티버스라는 소재는 근 몇 년간 영화판에서 핫했던 소재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한국 기준으로 2주 전에 개봉한 <플래시>, 올해 아카데미 7관왕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마블의 <닥터 스트레인지 : 대혼돈의 멀티버스>, <로키>가 그렇다.
전작 1편과 이 2편은 이 앞의 영화들이 갖고 있는 특징을 뒤집었다는 점에서 분명한 강점을 갖고 있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우선 1편을 간략하게 이야기해 보자면 스파이더맨 시리즈들의 캐릭터를 을 아주 잘 활용했다고 생각한다. 스파이더맨의 네 번째 리부트? 또 벤 삼촌 나오겠지? 빌런 벌처/닥터 옥토퍼스/일렉트로/미스테리오/그린 고블린/샌드맨/베놈같이 기존에 나왔던 캐릭터들 아니야? 보나 마나 히로인 또 죽겠지?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무조건 나올 거 같은데? 삼촌 어떻게 죽을까? 스파이더맨을 또 온 세계가 괴롭히겠지? 이거 전부 다 빗겨나갔다. 우선 1편의 메인빌런은 킹핀이다. 이 킹핀이 원래 북미에서 스파이더맨의 안티테제 중 하나로 유명하다고 알고 있다. 그 대신 한국에서의 인지도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한국판에선 '데어데블' 시리즈의 빌런으로 디즈니 플러스와 넷플릭스에서 선보인 바 있지만 그거 드라마 일일이 다 본 분들이 많지 않을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이 킹핀을 빌런으로 선정했다는 것은 코믹스 바탕이었던 영화 전개의 디테일도 살리고 신선함까지 갖추는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빌런 캐릭터를 변주하는 방식은 프라울러에게도 마찬가지다. 프라울러와 마일즈와의 관계, 그러면서도 기존 스파이더맨 시리즈와 어떤 공통점을 갖는 좋은 연출이 있었다. 이 외에도 멀티버스의 캐릭터들을 활용하는 방식도 신선했다. 닥터 옥터퍼스가 누구야? 에 대한 부분,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코믹스에서 튀어나온 스파이더맨의 세팅이 그렇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에서 세명의 스파이더맨을 봤기 때문에 애니메이션에서도 스파이더맨이 인간형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 영화는 이것마저 깼다. 스파이더맨 누아르나 피터 포커 같은 캐릭터는 그냥 만화에서 나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어색할 것도 없다. 기본적으로 애니메이션 장르니까. 이런 화술을 가진 1편은 가히 사람들에게 걸작이라는 평을 받기 충분했다.
2편인 본 작은 1편이 갖고 있던 장점을 그대로 승계한 것처럼 보인다. 우선 도입부쯤에 등장하는 벌처와 한 빌런이 그렇다. 벌처가 '르네상스 시대'에 그게 있었다는 상상부터가 신선하다. 이는 초반부 그웬 지구의 피터가 어떤 인물이었는가? 에 대한 부분 역시 마찬가지다. 빌런이 갖고 있는 이미지를 확 뒤집은 셈이다. 이 두 세팅은 결국 영화의 후반부에서 반복되면서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딜레마와도 이어지고 있다. 또한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빌런은 인지도가 상당히 부족한 편이다. 글쓴이도 이 영화에서 감독들이 가상으로 창조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빌런의 능력을 묘사하는 방식이 기존 멀티버스 소재 영화들과는 다른 특징이 있는데, 이 자체가 영화의 시각화와 분명하게 시너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비단 이 빌런뿐만 아니라 미겔 오하라 스파이더맨 / 제시카 드루 스파이더 우먼 역시 마찬가지다. 이 스파이더맨, 스파이더우먼은 각자의 명분이 확실하다. 이 덕에 인물의 개성이 죽지 않았는데,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분이 영화를 직접 보시길 바란다.
멀티버스 뒤집기
지난 아카데미에서 7관왕을 기록했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이 영화는 멀티버스 상상력의 극한을 찍으며 많은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다. 아직도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바로 핫도그가 손가락인 세상 묘사다. 또 뭐 모녀가 돌인 세상도 있고 나무인 세상도 있고 그렇다. 그러나 이런 시각적 묘사만큼이나 중요했던 건 이야기의 구성이다. '에에올'의 핵심이 뭐냐? 그 모든 가능성을 감수하고 현재를 선택하겠다는 로맨틱함이다. 이는 곧 '내가 성공하더라도 현재가 소중하다'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조부 투파키의 내적 세팅이 그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머니의 욕심 때문에 흑화 한 조부 투파키. 모든 가능성을 경험했다는 것은 시각적인 소재 '멀티버스'와도 이어진다. 이는 곧 혹시나 만약같이 '과거에 이렇게 되면 어땠을까?'를 붙여 더 나은 미래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손길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 모든 멀티버스에 모녀의 관계를 넣었던 점이 흥미로웠다. 비단 '에에올' 뿐만 아니라 <닥터 스트레인지 : 대혼돈의 멀티버스>와 <플래시>도 이와 비슷하다. 전자는 슈퍼히어로 완다가 다크 홀드에 의해 주화입마에 빠져 자기의 운명을 바꾸고자 하지만 결국 피할 수 없었고, 후자는 배리가 어렸을 때 겪었던 상처를 스스로 극복하려고 했지만 이를 받아들였다는 내용이 영화의 중심이다. 그러니까 '에에올'과 유사하게 정해진 운명을 슈퍼히어로들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다뤘다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이 영화는 정반대의 관점에서 멀티버스를 풀고 있다. 그러니까 '정해진 운명'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본다면 이 영화가 멀티버스를 활용하는 방식에 감탄이 나올 거라고 생각한다. 이는 왜 이 영화가 스파이더맨 시리즈여야만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이 성립한다. 또 슈퍼히어로라는 장르 특성에도 충족한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생기는 철학적인 대립도 흥미롭다. 마이클 샌델이 공리주의를 이야기하면서 기차에 대한 비유를 했던 기억이 희미하게 있다. 이 비유를 어떻게 치환시켰는지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통통 튀는 전개
멀티버스를 영화에서 어떻게 풀었는지와는 별개로 후반부의 이야기 전개는 아주 흥미롭다. 우선 이를 위해 미겔 오하라와 스팟, 그리고 '중간에 등장하는 어떤 스파이더맨'에 대해 쓸 수 있다. 3번째 인물은 등장만으로도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한다. 영화가 품고 있는 힙한 감성에 최적화된 인물이었다. 스팟은 기존 마블 영화 다 합쳐서 가장 위협적인 빌런처럼 등장한다. 갖고 있는 능력은 다르지만 '정복자 캉'과 궤를 같이 하는 감이 있다. 이를 위해 시각적으로 스팟의 능력 묘사를 어떻게 보여주는지가 영화에서 굉장히 두드러진다. 전체적으로 통통 튀고 힙한 시각화 방식에 기괴함이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를 보여주는 좋은 묘사였다고 생각한다. 추후에 데어데블 시리즈의 킹핀만큼이나 강력한 빌런으로 언급될 만하다.
미겔 오하라 스파이더맨은 굉장히 그럴듯한 인물로 보인다. 아니 사실 이 사람이 갖고 있는 동기부여는 옳다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인물이 갖고 있는 당위성에서 조금이라도 엇나가는 포스가 있다면 설득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에서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가 5대 5로 대립할 수 있던 이유는 기존 영화들이 심리적으로 그 둘에게 감정이입 할 수 있게끔 잘 설정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스파이더맨에게 감정적인 설득력을 부여했다는 점은 영화에서 핵심 딜레마를 묘사하는 데 있어 엄청난 강점으로 뽑힌다. 오스카 아이작의 목소리 열연이 이를 덧붙인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영화의 두 번째 강점이다.
눈호강의 최고점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 영화의 최고 가치 중 하나는 시각화다. 이 영화를 보고 느꼈던 눈호강은 <아바타> 1편과 맞먹는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훌륭한 시각화 중에서도 훌륭한 두 지점은 예고에서도 나왔던 부분이다. 바로 마일즈와 그웬이 서로 만나는 모든 신이다. 특히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는 장면이 있다. 글쓴이가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기도 한데, 그웬이 쌓아 올린 인물 서사와 감정선 또 마일즈가 쌓아 올린 감정선이 이 장면을 기점으로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중심으로 본다면 아주 흥미롭다. 영화에서 주요 인물들이 등장할 때마다 등장에 임팩트를 주는 방식도 쾌감이 어마어마했다. 특히 스팟과 어떤 나라에서 벌어지는 장면 모두 다 바스키아를 연상케하는 시각화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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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밀러의 '3000년의 기다림'
본 글은 씨네랩을 통한 시사회 관람 후 리뷰를 요청받아 쓴 글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야기의 역사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정답을 아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궁금하다. 왜 하필 3000년 전부터 이야기를 시작한 것일까. 원작 소설이 있기에 조지 밀러가 아니라 소설의 작가에게 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왜 하필 3000년 전 시바 여왕으로부터 시작했는가.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지 않았는가. 추측건대 시바 여왕의 시대는 정확한 역사적 기록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적 기록이 없던 그 시기에 내려오는 “이야기”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혹은 누군가가 사실을 바탕으로 지어낸 이야기거나, 아니면 허구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영화는 복잡해 보이지만 아주 단순하다. 두 장소에서 일어난다. 터키와 런던. 전반부는 터키, 후반부는 알리테아가 런던으로 돌아와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두 이야기는 겹쳐진다. 누군가 만약 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고 묻는다면 난 주저 없이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할 것이다. 누군가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사랑 그 자체가 아니라 이야기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천일야화 같은 이야기, 혹은 어른들의 알라딘 같은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되었건 이야기다.
다만 이 단순한 이야기에서 신기한 것은 영화가 시작될 때의 내레이션이다. 이 내레이션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보다 먼 미래에서 서술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는 아주 오랜 뒤에 전달되고 있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조지 밀러 감독은 이 이야기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확장시킨다. 이야기는 남는다는 것일까.
알리테아는 인류의 모든 이야기에 공통된 점을 찾으려고 하는 서사 학자다. 그녀는 강연을 위해 터키로 향한다. 그녀는 충분히 행복하고 외롭다. 하지만 그녀는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욕망을 부정한다. 지니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였을 때 자신은 갈망하는 것이 없다고 대답하거나 혹은 소원을 비는 이야기는 전부 교훈적인 이야기이며 해피엔딩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런 그녀가 공항에서 이상한 남자를 만난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남자. 이 남자는 강연에까지 찾아와서 그녀의 주장에 반박한다. 그녀의 주장은 이제 모든 이야기는 은유로 환원된다는 것이다. 그는 그녀의 갈망이다. 즉, 그녀는 이야기가 은유로 환원되는 사실에 거부감이 있다. 조지 밀러의 <3000년의 기다림>은 이야기가 온전히 이야기로서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녀는 남자의 반박을 듣자마자 쓰러진다. 그러고 난 다음 그녀는 병원으로 향하지 않고 골동품 가게로 향한다. 그곳에서 마치 “이야기”를 찾는 것처럼 호리병 하나를 구매한다. 그리고 호리병에서 지니가 빠져나온다. 여기서 지니는 그녀의 환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실재도 아니다. 지니는 이야기 자체다. 이 이야기인 지니는 알리테아에게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알리테아가 소원을 빌지 않자 자신이 호리병에 갇힌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첫 번째는 시바 여왕의 이야기. 두 번째는 오스만 제국, 세 번째는 르네상스 시기이다. 그리고 지니는 세 번 호리병에 갇혔다고 이야기하지만 정확히는 네 번 갇힌다. 이 숫자는 중요하다. 이 숫자가 중요한 까닭은 런던에서 페이드아웃 기법이 네 번 사용되기 때문이다.
시바 여왕의 이야기에서 지니가 호리병에 갇힌 까닭은 시바 여왕을 욕망한 벌이다. 솔로몬의 여자를 욕망한 벌. 두 번째는 노예 소녀가 죽기 직전 소원을 빌지 않아 갇힌 이야기, 세 번째는 오스만 제국의 왕가를 쫓다가 뚱뚱한 여인에게 발각되었지만 다시 갇힌 이야기, 네 번째는 자신이 시바 여왕보다도 더 사랑했던 소녀의 히스테리로 인해 갇힌 이야기다. 이 네 번의 갇힌 이야기에서 지니가 세 번이라고 이야기한 까닭은 뚱뚱한 여인에게 발각되어 갇힌 이야기는 셈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 같다. 여하간 이 갇힌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알리테아는 지니에게 소원을 빈다. “나를 사랑해 줘”
그녀가 왜 그런 소원을 빌게 되었을까. 그녀의 갈망이 깨어난 순간은 언제일까. 그건 아마도 네 번째 갇힌 이야기를 들으면서 소녀의 지식을 향한 갈망을 지니가 채워준 이야기를 하면서 갈망이 서서히 깨어났을 것이다. 시바 여왕이 솔로몬의 연주를 들을 때 그녀는 침을 꼴깍 삼킨다. 그리고 조지 밀러는 정확하게 그걸 찍었다. 그리고 네 번째 갇힌 이야기를 할 때, 특히 소녀의 지식을 향한 갈망을 충족시키는 이야기의 순간에서 알리테아는 침을 꼴깍 삼킨다. 그리고 솔로몬이 시바 여왕에게 여자들이 갈망하는 공통된 것을 들려주었을 때 그녀의 얼굴에는 화색이 돈다. 알리테아는 성공한 지식인 여성이다. 르네상스 시기 여자들에게 수없이 많은 억압이 있었던 그 시기의 소녀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녀는 그녀 자신이 갈망하던 첫 번째 것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역시 주체성. 잠시 샛길로 빠져서 이야기하자면 최근 현대 여성 영화는 계속해서 주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도 그랬고, <코르사주>도 그랬다.
그다음은 역시 “사랑”이었을 것이다. 지니와 사랑을 나눈 후 조지 밀러 감독은 이상하게 촬영했다. 알리테아의 호텔방에 마치 지니가 사라진 것처럼 묘사한다. 그리고 공항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니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일까? 여하간 여기서부터 이제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구분 짓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 지니는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옆집 할머니들과의 언쟁을 하는 알리테아와의 장면에서 지니는 잠시 사라진다.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알리테아의 욕망이 불러낸 환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나타난 지니는 세상의 시끄러운 모든 소음을 흡수한다. 알리테아는 그가 그 짜증스러운 소리들을 흡수하는 순간 흐느낀다. 이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지 않았던가.
두 번째 페이드아웃 장면은 옆집 할머니들에게 지니의 음식을 가져다주는 장면이다. 세 번째 페이드아웃 장면은 미움과 사랑에 대해 말하는 알리테아와 그에 대해 인간들은 모순 덩어리라고 말하는 지니의 장면이다. 네 번째 페이드아웃 장면은 사라져가는 지니에게 알리테아가 사랑은 선물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은 인간이 요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알리테아는 지니에게 돌아가라고 말한다. 이 네 개의 페이드아웃 장면과 지니가 호리병에 갇히는 네 번의 이야기는 완벽하게 맞아떨어지지는 않지만 묘하게 대구를 이룬다.
조지 밀러의 <3000년의 기다림>은 지니, 즉 이야기가 우리에게 준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니의 3000년의 역사와 런던에서의 짧은 기간의 이야기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선물한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물론 갈망과 사랑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지니)는 서사 학자 알리테아의 환상이 아니다. 환상이 아니라는 것은 옆집 할머니가 지니를 볼 수 있다는 점과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들에게 축구공을 차주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이야기는 은유나 환유가 아니며 그 자체로 실재한다. 누군가는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실재하면 만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에 대한 대답은 이 영화를 보고 느끼는 것에 달릴 것이다.
2023년 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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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춥고 두려운 감정을 이겨 내게 하는 누군가의 따뜻한 눈빛
푸른 빛의 작업복을 입고 서늘한 공기가 느껴지는 공장에서 매트리스를 만들고, 퇴근 후 공장을 나와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버건디 코트 깃을 여미며 자전거에 올라, 코 끝이 빨개진 채 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로 어디론가 가는 주인공으로 시작되는 영화 <앵그리 애니> 영화 속에서는 오랜 시간을 지나 여러 계절을 지나가는데도, 이상하게 이번 겨울 코 끝이 싸하게 추운 기분이 들때면, 애니가 코트를 입고 자전거를 타던 그 장면이 자꾸 생각났다. 춥고, 두려운 감정의 끝에 만나는 따뜻한 누군가의 기운.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추위를 함께 이겨내는 작은 빛이 떠올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결혼하면 아이는 셋을 낳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결혼 7년차에 첫째를 낳고 4살 터울로 마흔 넘어 둘째를 낳고 나니,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예민함과 넘치는 에너지를 둘 다 소유한 둘째는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노산의 엄마를 끝까지 몰아붙였다. 농담 삼아 둘째가 첫째였다면, 나는 둘째를 낳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란 말을 했다. 몸도 마음도 지쳐 눈물이 또르르 떨어지던 그즈음 생리가 늦어지면 겁이 덜컥 나곤 했다.
‘셋째가 생기면 어쩌지.’
아이를 원해 결혼 후 5년 넘게 애태운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뭐가 달라진 걸까? 그때보다 나는 오히려 아이라는 신비로운 존재에 대해 더 사랑을 품게 되었는데… 이런 마음이 들 수도 있구나. 죄책감과 혼란스러움이 함께 찾아왔던 경험이 있다. 복잡한 감정 속에서 임신과 임신 중단에 대해 생각해 보았던 순간이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애니는 1974년 프랑스 교외의 한 작은 마을, 매트리스 공장에서 일하는 두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이다. 몸에 밴 익숙한 손으로 바느질을 해 매트리스를 만든다. 그녀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되고, 어느 밤 자전거를 타고 한 서점을 찾아간다. 서점 한쪽 커튼을 젖히면 작은 공간이 나오고, 조용하고 차분하게 미소를 지으며 나타난 사람들의 안내로 모임이 진행된다.
당시 프랑스에서 임신 중단은 불법이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임신 중단을 결정한 여성들은 의료진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뜨개질바늘 같은 도구를 사용하여 ‘잘한다는 아주머니’에게 자신의 생명을 맡겨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애니가 찾아간 곳은 MLCA(임신 중지와 피임의 자유를 위한 운동)의 활동을 하는 곳으로, 의료진과 함께 안전하게 무료로 임신 중단을 할 수 있게 하는 단체다.
이들은 몸의 부담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수술을 진행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수술 전 한 번 더 만나 수술 도구를 하나씩 꺼내어 보여주며 수술 과정을 상세히 이야기해 준다. 은유나, 어떤 상징적인 이미지로 보여주는 영화적인 어떤 환상 같은 것은 없다. 마치 관객들도 알아야 한다는 듯 거의 다큐멘터리에 가깝게 하나씩 천천히 과정을 이야기하는 이 장면을 통해 우리는 이제 애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지 함께 알아간다.
설명의 과정만큼이나 수술의 과정 역시 거의 리얼타임에 가깝게 상세히 묘사한다. 수술대 위에 오르는 애니의 긴장감이 그대로 전해진다.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함께 숨을 고르고 노래를 불러준다. 편안한 선율의 노래를 부르는 눈을 마주치며, 애니는 손을 잡고 두려움의 시간을 함께 지나간다. 애니에겐 출산 경험 보다 더 편안했던 순간이 되었다.
고마운 마음을 뒤로 하고,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아이를 함께 키우던 옆집 친구가 임신을 중단하기 위한 비전문가의 시술 중 사망하게 되면서, 애니는 자신에게 도움을 주었던 MLCA(임신 중지와 피임의 자유를 위한 운동)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렇게 누군가 잃을 수는 없다는 생각, 어쩌면 그 누군가가 애니 자신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 그렇게 애니는 따뜻한 커피를 만들고, 두려움으로 찾아온 또 다른 자신의 손을 잡아준다.
임신 중단을 선택하는 사람의 사연은 다양하다. 낳고 싶지만, 남자친구가 안된다고 해서, 25살에 이미 다섯 아이를 낳아서, 이제는 더 이상 낳을 수가 없어서, 그리고 17살의 소녀까지. 두려움에 떨거나, 죄책감에 울부짖는 사람들. 임신을 중단하게 된다는 것은 영화 속 많은 여성에게, 두려움과 죄책감과 그리고 때때로 불쾌함과 고통이 뒤섞인 감정을 준다. 각자의 격동적인 감정을 애니와 활동가들은 가만히 안아준다.
“괜찮아. 내가 곁에 있어 줄게. 걱정되는 게 당연한 거야. 괜찮아. 괜찮을 거야.”
영화는 이런 사람들에게 임신 중단에 대해 논쟁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누구를 비난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눈맞춤과 다정한 말, 그리고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이라고, 옆에서 함께 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내 딸이 살아갈 세상은 달라져야 하기에’ 다정하고도 따뜻한 시선으로 손을 잡아주는 애니를 보며, 이러한 연대는 그 어떠한 것보다 따스한 위로가 되어, ‘낙태’ 라는 엄청난 경험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여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그 마음을 전해 받은 내가 바뀌고, 우리가 바뀌고, 나아가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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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후의 초상화 밖으로 뛰쳐나간 여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영화 <코르사주>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이름을 날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후 '엘리자베트(비키 크립스)'. 그런 그녀에게 남편인 '프란츠 요제프(플로리안 테히트마이스터)' 황제는 인형과도 같은 황후의 역할만을 요구한다. 이에 엘리자베트는 답답한 코르사주(코르셋)를 조인 채 무거운 머리를 지탱하며 그저 우아하게 앉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마흔 살이 넘어가면서부터 그녀는 아들인 '루돌프(아론 프리즈)' 황태자의 경고도 무시한 채 여행, 불륜, 마약에 손을 대며 한 명의 여성이자 개인의 삶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
2022년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공식 초청되어 최우수 연기상을 받았고, 2023년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 부문 오스트리아 공식 출품작으로 선정된 영화 <코르사주>. <코르사주>는 흔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후이자 ‘시씨’라는 애칭으로 잘 알려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사실 엘리자베트 황후의 이야기는 뮤지컬 '엘리자베트(엘리자벳)'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녀는 자유분방한 소녀였지만 황후가 되었고, 전통과 관습이 지배하는 궁정 생활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아름다운 미모로 전 유럽 사람의 찬사를 자아냈지만, 미모를 관리하던 중 거식증에 걸리는 등 온갖 고초를 거쳐야 했다. 그러면서도 궁전을 벗어나 자유를 갈망한 비운의 황후였다. 마치 다이애나 스펜서의 선배처럼 보이기도 한다.
<코르사주> 속 엘리자베트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영화는 그녀의 일대기를 그려내는 대신 '마흔이 된 황후 엘리자베트’의 변화에 주목한다. 특히 그녀가 어느 시점부터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착안해 왜 그러한 선택을 내렸을지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렇게 영화는 황후라는 이미지에 가려진 한 인간 엘리자베트의 얼굴을 세상에 내보인다.
영화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 숨을 참는 엘리자베트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목욕을 마친 그녀는 코르사주로 허리를 동여맨다. 준비를 끝내고 황제와 함께 미술관 개장 행사에 참여한 그녀는 코르사주를 지나치게 세게 묶은 나머지 돌연 정신을 잃고 기절한다. 하지만 그 후로도 그녀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녀는 계속해서 아름다운 인형으로 남아야 한다. 일례로 그녀의 식단은 만찬과 연회 중에도 철저한 관리 대상이다. 그녀는 남들이 먹는 화려한 음식들에 손조차 댈 수 없다. 황후에게는 황제 옆에 서서 인형처럼 웃는 것 외에 다른 일이 없으므로, 조금이라도 인형의 외관에서 벗어나는 일은 허락되지 않았다. 마흔 살 생일을 맞이하자 더 많은 압력이 가해진다. 황실 소속 화가가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자 주치의는 여성의 평균 수명이 마흔이니 더 각별히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충고한다.
오프닝은 엘리자베트라는 역사적 인물의 삶을 빌려 영화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려 하는지를 명확히 암시한다. 여성에게 요구되는 '아름다움'이라는 미적 기준이 개개인을 억압하고, 삶을 피폐하게 만들며, 수동적인 존재로 격하한다고 비판한다. 이전에 비해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고 권리가 보장되었는데도 여전히 아름다움이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고, 엘리자베트를 구속한 악습이 오늘날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탈코르셋’(탈코) 운동처럼도 보인다. 사회구조적 외모 강박 혹은 여성성 강요에 저항하려는 목적으로 화장이나 긴 머리, 여성적 옷차림 등 ‘사회적 여성성’을 부정하는 시도가 엘리자베트의 삶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는 한 개인으로서 엘리자베트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포기하는 선택과 황후로서 엘리자베트가 자신을 옥죄는 규범을 어기며 자유를 갈망하는 모습을 같이 위치시킨다. 그녀는 코르사주를 벗고, 길게 늘어뜨린 머리를 단발로 잘라버린다. 동시에 황제의 부인이라는 지위를 거부한다. 황제에게 정부를 소개하고, 영국인 승마 선수 조지 베이나 사촌 루트비히 2세와는 사랑과 우정 사이의 관계를 유지한다. 한편으로는 황후로서 참석해야 할 공무를 외면한 채 자유를 즐긴다. 또 고정된 이미지로 남아야 하는 초상화 작업은 거부하지만 자유롭게 들판을 거니는 순간을 기록할 수 있는 동영상 촬영에는 적극적으로 협조한다.
황후의 삶을 포기하고 여성으로서의 자유를 추구하는 엘리자베트의 노력은 그녀가 갖고 있던 또 다른 가능성 때문에 더 인상적이다. 그녀는 우울증에 시달린 자기 경험을 투사하며 정신병 치료와 정신병원 시설 개선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림을 그리는 예술적인 면모도 지녔고,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발칸반도 진출과 관련해 전황을 판단할 줄 아는 식견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만약 그녀가 미모를 가꾸는 데 열중해야 했던 시간과 노력을 다른 데에 투자했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하는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화의 지향점을 생각하면 꽤 의미심장한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영화는 황실의 모습을 비추면서도 화려한 궁전 내부를 기대보다 자주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각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칙칙하고 어두운 통로들을 더 자주 비춘다. 마치 겉보기에는 화려하나 실제로는 생기가 없는 엘리자베트의 외관과 내면을 한 공간에 담기라도 한 듯이. 또 그렇기에 <코르사주>가 완성한 황후 엘리자베트의 새로운 초상도 인상적이다. 황후로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바닷속에 몸을 던져 자유를 얻는, 비극적이면서도 엄청난 해방감을 선사하는 결말의 순간에 그 어느 때보다 살아 숨 쉬고 있는 엘리자베트를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미인과 황후라는 고정된 이미지에서 벗어나려는 엘리자베트의 변화를 <코르사주>가 과연 적절히 전달하는지는 의문이다. 영화는 엘리자베트라는 실존 인물을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요소만 부각해 원하는 인물상을 만들어낸다. 실제로 마리 크로이쳐 감독은 "영화적 내러티브로 전환하면서 내용과 형식적으로 많은 자유를 부여했다"면서 "이야기하거나 묘사하는 것에 있어 모든 역사적 ‘실수’는 모두 예술적 결정이었다. 나는 멋지고 깔끔한 전기 영화를 만드는 데 관심이 없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코르사주>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둘러싼 역사적 배경 또한 조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선택은 그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스트리아의 황후라는 지위가 얼마나 부담되고 무거운 자리였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엘리자베트의 고난과 시련이 구체적으로 와닿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쇠락기에 접어든 제국이었다. 1866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오스트리아를 통치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제국이 붕괴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헝가리의 요구를 일부분 받아들여 1867년에 오스트리아 황제가 곧 헝가리의 군주를 겸임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군주제 체제를 구축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나름 동등한 위치로 제국을 구성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제와 황실의 존재는 붕괴 위기에 빠진 제국을 지탱할 몇 안 되는 도구 중 하나였다. 마치 엘리자베스 2세와 영국 왕실이 영국이라는 국가와 영연방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어 유지한 것과 유사한 역할을 맡아야 했다. 즉, 당시 황제와 황후, 그리고 황실은 서로 다른 민족과 국가를 하나로 묶는 상징이자 실질적 제도로서 기능해야 했다. 실제로 엘리자베트의 막내딸 발레리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제국의 통합을 상징하는 공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아름다운 황후의 이미지를 유지하는 것은 단순히 미모를 관리하는 것 이상으로 무거운 책임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나 맥락을 알 수 있는 장치는 많지 않다. 특히 오스트리아 관객이 아니기에 더욱 부족하게 느껴진다. 그 결과 엘리자베트가 겪은 여러 어려움은 그저 막연하다. 짐작하고 동조할 뿐, 설득될 수가 없다. 황후로서 역할이 얼마나 막중했는지, 그녀의 역경이 얼마나 큰지, 또 그녀의 고통이 얼마나 강한지 명확히 드러날수록 해방되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큰 쾌감이 느껴질 것이고, 그녀에게 자유가 의미하는 바가 더 절실히 느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왜 승마를 그토록 사랑했는지, 왜 그토록 손쉽게 마약에 빠져들 수박에 없었는지 그 동기와 계기도 더 잘 설명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듯 보이기도 한다. 다음처럼 이해될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엘리자베트가 황후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다면, 그에 합당한 책임도 져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전자를 누릴 뿐, 후자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다. 배경이 어떻든 간에 작중 엘리자베트가 결국 무책임한 인물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몸이 약한 막내딸을 굳이 새벽에 외출시켜서 감기에 걸리게 하는 것, 그토록 엄중한 상황에서 자신의 스케줄을 마음대로 거부하는 것, 평생 여행을 다니며 황후의 역할을 회피하는 것도 마냥 동정을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제목인 코르셋(코르사주)이라는 상징에 담긴 <코르사주>의 메시지는 여전히 시의적절하다. 그 메시지를 현현한 엘리자베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도 충분히 흥미롭다. 하지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다소 부적절한 것도 사실이며, 그 결과 과연 이 영화가 원하는 대로 수용되거나 해석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결국 <코르사주>는 황후와 여성 사이에서 길 잃은 엘리자베트만큼이나 모호한 인상을 남긴 채 막을 내리고 만다.
A(Acceptable, 무난함)
평범한 여성이 되고 싶었던 황후. 실존적 불안과 치기 어린 불평 사이에서 길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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