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4-10-07 09:07:22
[BIFF 데일리] 맨 앞에 있었으나 조명되지 않았던 예술가들
영화 〈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 리뷰
부산국제영화제 커뮤니티비프 올데이시네마 상영작
*시놉시스
핑크 플로이드, 레드 제플린, 폴 매카트니, 피터 가브리엘 등 세계 최고 뮤지션들의 앨범 커버를 만든 디자인 스튜디오 ‘힙노시스’. 영감에 한계가 없던 두 천재 디자이너의 무모한 작업 스토리, 그리고 시대의 아이콘이 된 명반들의 탄생 뒷이야기
〈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은 음악이 상품이 아닌 예술이던 시대, MTV가 도래하기 이전 음악이 메시지를 던질 수 있던 시대, 록 음악이 가장 대중적이던 시대를 살아간 예술가 이야기다. 그러나 뮤지션의 이야기는 아니다. 핑크 플로이드와 레드 제플린, 폴 매카트니가 협업하고 싶어 한 LP 커버 예술가 ‘힙노시스’의 이야기다.
스톰과 포 두 사람이 힙하고, 쿨하고, 지혜롭고, 현명하다는 단어의 글자 일부를 따서 설립한 힙노시스는 LP 커버 이미지를 전문으로 제작한 회사다. 더불어 당시 사람들이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던 LP 커버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회사다. 골방에 모여 수다를 떨고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던 이들이 예술가가 되던 시대, 스톰과 포 역시 이들과 같은 궤적을 따라 LP 커버의 세계로 진입했다. 영화는 힙노시스가 걸어온 파격적 예술의 궤적을 당사자, 그들과 협업한 뮤지션의 회고를 통해 복기한다. 앨범과 커버의 ‘의미’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 지금, 음악과 커버로 메시지를 던지며 매 순간 혁신을 고민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매력적인 흡인력을 뿜는다. 커버 방향성을 놓고 비틀즈와 자존심을 건 신경전을 벌이는 대목은 스톰과 포가 어떤 태도로 커버 작업에 임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1968년부터 록의 시대가 저문 80년대까지 전성기를 구가한 힙노시스는 록의 쇠락과 함께 커리어의 절정에서 수직 낙하했다. 그리고 다시는 이전과 같은 명성을 누리지 못했고 록 음악 팬들의 기억 속에서만 예술적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시대의 변화에 더는 힙하고, 쿨하고, 지혜롭고, 현명할 수 없었던 이들은 되돌릴 수 없는 실패로 예술의 역사에서 퇴장했다. 고급 예술품을 소장할 수 없는 ‘가난한 이의 미술 소장품’이자 앨범 정체성의 표현으로서의 LP/커버의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누군가에게는 향수를, 누군가에게는 ‘이야기’가 된 지난 시절의 매력에 몰입시켜줄 영화다. 표지가 갖는 중요성이 점차 중요해지는 도서 시장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음악과 LP 커버를 동등한 예술로서 존중하는 영화의 태도가 인상깊기도 했다.
한편 부산국제영화제 커뮤니티 비프의 올데이시네마에서 이 영화가 상영된 후, 호밀밭 출판사 장현정 대표의 사회로 장정일 작가와의 대담이 진행되었다. 대담에서 장정일 작가는 자신이 록과 팝을 거쳐 재즈에 입문하게 된 과정을 영화와 연계해 들려주었다. 그는 80년대가 민중 문화의 시대라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가공된 현실일 뿐이라 일갈했다. 대학 운동권은 ‘탈춤’과 ‘김민기’를 시대의 문화로 제시했지만, 정작 ‘민중’들은 고고장에서 춤을 추었고 나훈아와 이미자를 들었다. 록과 팝은 대학에서 드러낼 수 없는 ‘죄스러운’ 취향이었다. ‘의식’이 부재하다는 가혹한 비판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때문에 장정일 작가는 자신이 대학을 경유해 팝과 록을 듣지 않은 것은 커다란 축복이었다고 회고한다. 대학에 진학했다면 ‘민족 문화’의 세례에 굴절된 상태로 팝과 록을 뒤에서만 몰래 즐길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후 영국의 풍요와 반항을 대변하는 음악이 한국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감상되었나에 관한 장정일의 설명은 그 문화를 향유했거나 사후적으로 회고하는 모두에게 문화의 수용에 둘러싼 물음을 촉발한다. 장정일의 해설은 낭만적 흡인력의 〈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에 ‘제3세계’를 둘러싼 권력관계를 더해 낭만 이면의 다층적 맥락에 주목하게 한다.
*영화 매체 〈씨네랩〉 초청으로 부산국제영화제 참석 후 작성한 글입니다.
*커뮤니티 비프 관련 정보는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biff.kr/kor/addon/10000001/page.asp?page_num=8624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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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센스가 왕이었던 시절, 두 소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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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찔이’라는 말이 있다. ‘힙합’과 ‘찌질이’를 합친 말이다. 힙찔이라는 말이 처음 나왔을 때, 이 단어의 적확성에 감탄해 마지않았던 기억이 있다. 언젠가부터 래퍼들이 집단적 중2병에 걸린 것만 같다는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학교 2학년 남학생들이 자기 주변에 예쁜 여자와 돈이 많다고 자랑하는 것 혹은 그런 상태를 욕망하는 것은 권장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는 일이다. 심지어 허세 넘치는 그들의 모습을 조금은 귀엽게 봐 줄 여지도 있다. 하지만 대중적 인기와 경제력을 갖춘 성인 남성 래퍼들이 이들과 똑같이 구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거들먹거리는 말투와 몸짓, 태도로 자랑할 것이 돈과 여자밖에 없다는 듯 구는 그들이 진심으로 한심하고 딱했다. 내게 ‘힙찔이’는 여전히 중2에 머무른 채 성장하지 못한 남성 래퍼와 그의 추종자들을 매우 적절하게 지칭하는 단어였다.
송주(좌)와 주연(우)
〈라임크라임〉은 힙찔이의 전사(前史) 혹은 균열을 탐색하는 영화다. 힙합 덕후였던 이승환, 유재욱 감독이 힙합에 빠져 지냈던 본인들의 학창 시절을 모티브 삼아 만들었다고 한다. 주인공은 송주와 주연이다. 송주는 그리 풍족하지 않은 집에서 자랐다. 아빠는 카센터 정비공으로, 엄마는 마트에서 계산원으로 일하는데 아빠가 술을 마시면 돌변하는 탓에 분가해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성적은 좋은 편이 아니고, 담배를 피우고 또래에게 돈을 뜯는 친구들과 어울린다. 반면 주연은 넓은 아파트에 산다. 그의 부모는 경찰서에 끌려간 송주를 빼 줄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가진 사람이고, 집은 가사노동자를 고용할 정도로 풍족하다. 성적도 좋아서 외고를 준비하고 있다. 이토록 다른 송주와 주연의 공통점은 하나다. 바로 힙합 그리고 래퍼 이센스를 좋아한다는 것.
수많은 차이에도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관계는 시작될 수 있다. 둘은 ‘라임크라임’이라는 힙합 팀을 결성한다. 자기들만의 아지트를 만들고, 작은 무대나마 공연장에 올라 환호를 받는다. 일련의 과정들을 거치고 함께한 경험이 쌓이면서 둘의 세계는 점차 공고해진다.
하지만 하나의 공통점으로 시작된 관계는 언젠가 서로의 차이를 마주할 수밖에 없고, 이를 조율해 내지 못하면 위기를 맞는다. 송주는 래퍼 형들과 어려운 용어를 써 가며 대화하는 주연에게 소외감을 느끼고, 주연은 송주가 왜 계속 껄렁한 친구들과 어울리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함께 랩을 하며 꿈을 키우는 송주와 주연
서로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는 송주와 주연
결국 관계는 두 세계를 조율하는 게 아니라 세계를 가로질러 이동함으로써 유지된다. 둘의 관계는 주연이 송주를 자신의 세계로 초대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주연은 송주에게 랩을 같이 해 보자고 제안했고, 명반으로 불리는 랩 음반을 빌려줬으며, 함께 공연에 오르자고 독려했다. 즉, 라임크라임의 모든 것은 주연의 세계에서 전개되었다. 라임크라임으로 시작된 둘의 관계가 주연의 세계를 토대로 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많은 것이 어그러진 후, 이번엔 주연이 송주의 세계로 들어간다. 지금까지 둘은 늘 주연의 깔끔한 아파트에서 작업을 했다. 주연이 수집한 수많은 음반을 듣고, 주연의 돈으로 산 피자를 먹으며, 주연이 틀을 잡은 방식대로 음악을 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다시 만난 둘이 모인 건 송주의 허름한 다세대 주택이다. 주연은 그곳에서 송주가 끓여 준 라면을 먹고, 송주가 만든 음악을 들으며, 송주의 제안으로 다시 라임크라임을 이어갈 용기를 얻는다.
이처럼 〈라임크라임〉은 청소년들의 성장과 꿈, 관계의 윤리 등이 결합된 영화다. 영화에는 힙합이 주류가 아닌 하위문화 시절이었던 때의 정서와 시대적 질감이 잘 묻어나며, 다소 어색한 듯 짧은 호흡으로 이어지는 장면들은 오히려 성장영화의 장르적 특성을 잘 살리는 연출처럼 보이기도 한다. 송주와 주연 사이에 오고 가는 내밀한 감정 묘사는 감독이 굉장히 세심한 관찰력과 회상으로 영화를 연출했음을 보여 준다.*
송주와 주연은 어떤 어른/래퍼로 성장했을까?
그러나 혼란, 상실 속에서도 꿈과 관계의 윤리를 모두 놓치지 않았던 송주와 주연이 어떤 어른/래퍼로 성장했을지를 상상했을 때 조금은 우울해졌다. 과연 그들은 자신들이 겪어 온 시절을 잊지 않고 좋은 어른/래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혹여나 그들이 혼란스러웠던 과거는 다 잊어버렸다는 듯이, 혹은 이제 나는 성공을 거머쥐었기에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듯이 구는 ‘힙찔이’가 되어 버리진 않았을까? 왜 어른/래퍼들은 자신의 취약함을 타인에 대한 다정함으로 전환하지 못하고 늘 강한 척 연기하는 걸까?
물론 이런 질문들은 다른 결의 힙합을 추구해 온 래퍼들의 존재를 비가시화하고 모든 래퍼와 힙합 팬들을 ‘힙찔이’로 환원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하지만 래퍼의 주류적 이미지가 여전히 거들먹거리고 젠체하며 자신의 ‘우월함’을 입증하려 드는 남자들이라는 점에서 위 질문들은 진지하게 고민될 필요가 있다. 송주와 주연이 경험한 그 시절의 모든 것들은 더 깊게 이야기되어야 하고 힙합 음악으로도 표현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야, 이센스가 왕이었던 시절 두 소년의 이야기를 담은 〈라임크라임〉은 ‘힙찔이’들이 자신의 과거를 낭만적으로 채색하려는 퇴행적 시도에 그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송주와 주연이 좋은 어른이자 래퍼로 성장했길 바란다.
*〈라임크라임〉이 감독의 자전적 경험을 다룬 영화라는 걸 모르는 채로 영화를 봤는데, 송주와 주연이 함께 장난치며 햄버거를 만들며 노는 장면에서 서로의 몸에 묻은 케첩, 머스터드를 스치듯 핥는 장면을 보며 이 영화가 감독의 경험을 반영한 영화란 걸 확신했다. 성인이 되기 전, 남성들 간의 우정(특히 둘 사이의 우정)에는 결코 동성애로 독해되지 않으나 명백히 동성애적인 순간들이 너무도 많다. 〈라임크라임〉의 햄버거신(scene)이 포착한 건 바로 이 순간이다. 이 정도의 세심함은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웬만해선 나오기 어렵다.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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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사랑 이야기는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뻔해진다
어떤 이야기를 단지 '사랑 이야기'라고 말한다면 그게 어떤 것으로 다가오는지. 영화 <반쪽의 이야기>(2020)는 대만계 미국인 감독 앨리스 우(Alice Wu)의 작품이다. 동양인 여성 감독인 그는 커밍아웃을 한 레즈비언이기도 하다. 영화 감독으로서는 조금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기도 한데 그는 MIT와 스탠포드에서 컴퓨터 공학 학사, 석사 학위를 받았고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잠시 소프트웨어 디자인을 했었다고 한다.
자전적인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것으로 알려진 <세이빙 페이스>(2004)가 토론토국제영화제와 선댄스영화제에 초청받으면서 감독으로 전업하나 싶었는데, 지금 소개할 <반쪽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기까지는 16년이나 걸렸다. 그동안 앨리스 우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감독의 트위터에는 어느 여섯 살짜리 아이가 말했다는 “Drawing is my favorite enemy.”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나의 친애하는 적. 감독은 이 말이 영화 만드는 일에 관해 자신이 느끼는 바와 비슷하다고 인용하고 있다. 그에게 영화를 만드는 일은, 다시 말해 이야기를 만드는 일은 스스로와의 싸움이며 동시에 즐겁지 않은 일, 때로는 고통스러운 일을 동반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할 수밖에 없는 일. 첫 번째 영화와 두 번째 영화 사이의 16년이라는 시간은 그런 것들로 채워지기도 했겠지.
<반쪽의 이야기>는 고등학생인 ‘엘리’(리아 루이스)가 같은 학교 남학생 ‘폴’(대니얼 디머)로부터 연애편지 대필을 부탁받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소위 ‘하이틴 로맨스’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 텐데, 그렇게 흔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감독의 전기적 특수성 때문만이 아니라 이 영화가 만들어진 방식과 전하고 있는 메시지 자체가 이런 종류의 10대들 사랑 이야기에서 나오기 쉽지 않은 쪽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배경에 대해 하나씩 풀어보겠다.
‘폴’이 부탁한 연애편지라는 건, ‘폴’이 좋아하는 동급 여학생 ‘애스터’(알렉시스 러미어)에게 쓰는 것이다. ‘엘리’는 평소에도 약간의 돈을 받고 학우들의 과제를 대신 써주고는 했다. 대필 이야기를 듣자마자 ‘엘리’는 “세 페이지 이하는 10달러, 열 페이지까지는 20달러, 그 이상은 안 해.”라고 아주 프로페셔널(!)하게 견적을 말한다.
‘엘리’는 저 말을 다른 학우들이 숱하게 부탁했을 과제 이야기겠거니 하고 꺼낸 건데 ‘폴’이 원하는 게 학교 과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는 편지라는 걸 알게 되자 그걸 단호하게 거절한다. 누군가의 진심은 대신 써줄 수 있는 게 아니라면서. 편지의 명목상의 발신인과 그 수신인을 아주 잘 안다고 해도 이야기가 아니라 마음을 꾸며낸다는 건 아주 천재적인 작가에게 조차 쉽지 않을 것 같다. 영화 <그녀>(2013)에서 ‘테오도르’(와킨 피닉스)가 쓰는 종류의 조금 간단한 대필 편지 정도면 모르겠지만. ‘엘리’가 편지 대필을 해주기로 하는 계기는 따로 있었다. 당장 50달러가 필요한 일이 있었는데 ‘폴’이 그 돈을 주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자신이 직접 써도 그게 전해질까 말까 할 텐데 다른 사람이 대신 써주는 편지. 마음이 전해질 수 있을까. ‘폴’이 자기가 일단 써봤다며 내민 편지를 읽더니 ‘엘리’는 거의 다 고쳐야겠다고 말한다. 이제 이 영화의 키워드는 흔하디 흔하지만 ‘진심’이 되었다. 사랑 이야기에 진심이라니. 우여곡절이 있지만 한 사람의 간절하고 지순한 마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전해지고 둘의 관계가 ‘결실’을 맺는 정도의 구조일까.
영화 '반쪽의 이야기' 스틸컷
“이건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누군가 원하는 걸 얻는 이야기도 아니다.” 영화 서두에서 ‘엘리’의 내레이션은 이미 <반쪽의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가 아님을 전제한다. 장르의 흔한 공식을 따르기를 애초부터 거부하는 이 영화의 실질적으로 중요한 발단은 따로 있다. ‘폴’의 편지를 대필해주던 ‘엘리’는 한 번이라고 생각했으나 ‘애스터’로부터 답장이 오면서 계속 이어지는 편지 속 이야기의 과정을 통해 ‘애스터’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한다. 기왕 쓰는 것 잘 쓰기 위해서 ‘폴’과 계속해서 ‘애스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애스터’의 일상을 몰래 관찰한다. 직접적으로 표현하거나 묘사하지는 않지만 ‘엘리’가 ‘애스터’를 좋아하게 된다는 정황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한 가지 더 언급해야겠지만, 이건 '흔한' 퀴어 영화도 아니라고 여겨진다. 사랑 영화도 아니고 퀴어 영화도 아닌데 하이틴 로맨스 영화이고 흔한 이야기는 아니라니. 정말 제목처럼 이야기의 반만 꺼낸 셈인데, 글 제목의 뜻에 대해서도 아직 말하지 않았으니, 어느 정도 밑그림을 그려낸 것 같다. <반쪽의 이야기>는 사랑이 그렇게 숭고하고 대단한 게 아니라고 말하는 영화다. 실은 아주 엉망이고 제멋대로인 게 사랑이라면서.
“
“Love is messy and horrible and selfish …and bold.”
그러니까, ‘엘리’는 사랑이 상대방에 대해 낱낱이 아는 거라고 믿고 있는 사람 같다. ‘폴’이 편지 대필을 부탁했을 때 처음 써준 편지에 의도치 않게 ‘애스터’의 답장이 오고 나서, ‘폴’과 ‘엘리’는 이제 정말 작정을 해야만 했다. ‘폴’은 이제 데이트 신청을 하자고 했지만 ‘엘리’는 “다른 남자애들과 똑같아지고 싶냐”라며 편지로 대화를 이어가기로 한다.
‘엘리’에게는 단서가 있었다. 복도에서 우연히 ‘애스터’와 마주친 일이 있었는데 ‘애스터’는 ‘엘리’가 들고 있던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남아있는 나날』을 보고 자기도 그 책을 좋아한다고 언급했다. ‘엘리’는 ‘폴’을 대신해서 그의 이야길 하고 있었다. 사랑이 뭔지 모른다는 핑계로 빔 벤더스 영화 속 대사 언급을 했더니 ‘애스터’가 자신 역시 빔 벤더스를 좋아한다고 답장을 한다든가... 이제 ‘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즈오 이시구로 소설을 좋아하고 빔 벤더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다.
영화 '반쪽의 이야기' 스틸컷
편지를 대신 써줄 것을 부탁한 이상 그건 자연스럽게 떠안아야만 했을 문제일지 모른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엘리’와 ‘폴’은 이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애스터’의 일상을 관찰하기 시작하는데, 일단 데이트 약속을 잡았으나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랐다. “그 애는 구상화보다 추상화를 더 좋아해. ‘남아있는 나날’ 얘길 꺼내면 영화가 나치 얘기를 줄이면서 얼마나 많은 걸 잃었는지를 말해.” ‘엘리’가 ‘폴’에게 해주는 조언은 대략 이런 것이었는데, 이런 건 ‘애스터’의 취향에 대해 ‘폴’이 학습하도록 하는 정보들이었다.
당연히 첫 데이트는 ‘엘리’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데, 그럼에도 ‘폴’은 두 번째 데이트 약속을 잡아낸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눈만 깜빡거리며 밀크셰이크에 든 빨대를 쪽쪽거리는 ‘폴’이 ‘애스터’에게는 나름대로 귀여워 보였던 모양. 실제로 ‘애스터’는 “넌 좀 이상하지만 그래서 귀여워”라고 언급한다.
영화 <반쪽의 이야기>의 중요한 대목은 이런 것에 있다. 이 일련의 데이트는 ‘폴’의 짐작대로도 되지 않고 ‘엘리’의 짐작대로도 되지 않는다. 가령 ‘엘리’는 ‘폴’ 대신 직접 ‘애스터’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등 이런저런 조력을 하지만 이건 마치 ‘글로만 배운 연애’ 같아서 가끔은 그것보다 투박하지만 자기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고 말하는 ‘폴’의 것이 통하기도 한다.
일단 제목의 의미 하나가 여기 있다. 꼭 사랑이 아니더라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 그리고 많이 영향 줄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그 영향들이 쌓이고 쌓이는 방식으로 완성되어가는 것 같다. 그러니, 영화 속 ‘반쪽’이라는 건 ‘폴’과 ‘애스터’의 관계를 말하기도 하고 ‘애스터’와 ‘엘리’의 관계를 말하기도 하며, 나아가 ‘폴’과 ‘엘리’ 아빠 ‘에드윈’(예성)의 관계도, ‘엘리’와 ‘에드윈’의 관계도 모두 포함한다. 반쪽의 이야기라는 것은 반쪽과 다른 반쪽이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라는 것.
영화 '반쪽의 이야기' 스틸컷
이것의 핵심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 앞에서 ‘사랑이 아주 엉망이고 제멋대로인 것’이라는 인용을 했는데 ‘엘리’의 말이다. 관찰하고 계산한 대로, 정해진 공식처럼 흘러가는 게 아니라 불확실함과 의외성이 통하기도 한다는 것. 그리고 완벽하지 않은 서로가 만나 각자의 고유함을 바탕으로 조금씩 관계를 다져가고 완성해 나간다는 것. <반쪽의 이야기>는 특정한 가치관에 따라 흘러가지도 않고 누군가의 가치관을 다른 누군가에게 주입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아주 똑똑한 영화다.
‘애스터’는 원래 미대에 진학하고 싶어했는데 어떤 사정으로 포기한 인물이다. 그래서 ‘폴’의 이름으로 ‘엘리’는 ‘애스터’와 그림 이야길 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나오는 대화 내용에는 어쩌면 <반쪽의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느끼게 된다. ‘애스터’는 미술 시간에 들었던 그림에 관한 이야길 꺼내고 그림에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선을 그려 넣는 일에 관한 대화가 이어진다.
“
“어쩌면 중요한 건 그거야. 그림을 망가뜨리더라도
그 괜찮은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다는 걸 알아야만 해.
하지만 대담한 선을 그려 넣지 않는다면…
훌륭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는 영영 모르겠지.”
사랑으로 한정해 볼까.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은 본래 서로가 만나기 전부터 각자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건 그것대로 ‘괜찮은’ 것이다. 굳이 서로가 관계를 맺지 않고 지나가도 괜찮을 일.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을 일. 그러나 한 사람은 용기를 낸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 사람을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걸 드러내기 위해 노력한다. 다른 한 사람이 거기 어떤 식으로든 반응한다. 이것이 어떤 흐름을 낳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경우 그건 훗날 서로가 서로가 아니면 안 되었으리라 믿을 만큼 삶 전체를 바꿔버리는 운명적 관계가 되기도 한다.
양귀자의 소설 『모순』에는 “그리고 결론을 내린다. 이렇게 생긴 사람을 사랑해준 그가 고맙다고. 사랑하지 않고 스쳐 갈 수도 있었는데,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걸음을 멈춰준 그 사람이 정녕 고맙다고.”라는 문장이 나온다. 말하자면 ‘훌륭한 그림’을 만드는 건 ‘괜찮은 그림’에 대담하게도 굳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어떤 선 하나를 그려 넣는 행위일 거다. 뚜렷한 정답이 없는. ‘엘리’는 ‘폴’과 ‘애스터’가 전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애스터’의 마음을 얻기 위해 졸린 눈을 비벼가며 가즈오 이시구로 소설을 억지로 읽고 그러면서도 자기 마음을 굳이 숨기지 않는 ‘폴’의 방식이 통하기도 하는 것처럼.
영화 <반쪽의 이야기>는 사랑이 누가 정해놓거나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마치 대단히 중요한 내용처럼 플라톤이나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인용하기도 한다. “사랑이란 완전함에 대한 추구와 갈망에 붙인 이름일 뿐이다.” 같은 이야기. 보통 영화에서 검은 화면에 자막으로 이런 식으로 뭔가가 적혀 있으면 그건 거의 반드시 중요하거나 상징적인 이야기인데 이 영화에선 별로 그렇지 않다. 전형적인 구성을 기반으로 하면서 그 안에서 영리하게 그걸 비트는 영화라고 해야할지.
가톨릭을 독실하게 믿는 조용한 동네의 고등학교에서 뻔한 하이틴 로맨스처럼 인물 관계를 구성해놓고 <반쪽의 이야기>는 ‘애스터’를 중심으로 ‘엘리’와 ‘폴’ 각자의 내면을 꽤 세밀하게 펼쳐놓는다. 게다가 주요 등장인물은 모두 10대니까, 이들은 얼마든지 삶의 가치관이 바뀔 수 있고 그래도 되는 존재들이다. ‘엘리’는 ‘폴’이 불쑥 내뱉는 “그게 사랑 아냐? 상대를 사랑하는 데 노력을 쏟는 거.” 같은 말에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되기도 한다. 사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삶이란 그런 것인지도. ‘나를 뺀 세상의 전부’가 내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걸 예상치 못한 채 쉽사리 뒤흔들어 놓기도 하는 일 말이다.
영화 '반쪽의 이야기' 스틸컷
10대 중반쯤 되면 보통 사랑에 관해 나름의 기준 내지는 목표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거나 조금씩 갖기 시작하는 것 같다. 가령 ‘폴’에게 사랑은 “치즈프라이를 하나 더 시키는 것”이다. ‘애스터’와 무슨 대화를 할지 말을 어떻게 걸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편지부터 쓰는 것이고, 편지에 대뜸 “맛있는 곳 아는 데 같이 먹으러 가자”거나 “나 트럭도 있고 풋볼 선수야” 같은 이야기나 꺼내보는 것이다. 졸음을 참아가며 가즈오 이시구로 소설을 읽는 것도 물론이고.
50달러를 받기 위해 편지를 정성들여 써주긴 했지만 ‘엘리’는 ‘폴’과 ‘애스터’가 서로 전혀 공통점도 없고 어울리지도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엘리’는 두 사람의 첫 데이트가 완전히 실패했다고까지 생각하지만 ‘엘리’의 생각과 달리 ‘폴’과 ‘애스터’의 두 번째 데이트가 성사되고 둘은 키스까지 하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듯 보인다. 물론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인간은 본래 둘이 하나여서 머리도 몸통도 둘 팔 다리도 넷이었는데 신이 하나된 둘의 완전함을 시기하여 둘을 갈라놓았고 평생 동안 서로를 계속해서 찾아다니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다. 영화 제목도 사실 거기서 따온 것인데, 아주 진지한 이야기인 양 플라톤도 인용되고 사르트르도 인용되는데, 아무리 이 영화의 ‘엘리’라는 캐릭터가 다른 학우들의 과제를 대필할 만큼 언어 능력이 뛰어나고 무엇보다 ‘주인공’이라고 해도, <반쪽의 이야기>는 주인공을 사랑에 관한 각종 문학적 인용에 통달한 지혜로운 인물로 그리거나 그가 깨달음 끝에 사랑의 결실을 맺는 이야기로 서사를 맺을 생각이 없다.
영하 '반쪽의 이야기' 스틸컷
그 근거 중 하나는 저 인용들의 대상이 후반에 가면 ‘엘리 추’ 자신이 된다는 점이다. ‘엘리’에게 어떤 좌절의 상황이 찾아오자 영화가 띄우는 인용은 사르트르의 “타인은 지옥이다.”이며, 속으로만 담아두고 있던 ‘엘리’의 어떤 진심이 발언되는 장면 직후에는 앞에서 소개한 “사랑은 엉망진창에 끔찍하고 이기적이고 대담한 거예요.”가 자막으로 등장한다. 시행착오를 거치며 계속해서 고쳐 써 내려가는 이야기를 만드는 게 <반쪽의 이야기>가 지향하는 바이며, 그 점은 효과적으로 성취된다.
<반쪽의 이야기>는 흔한 해피엔딩을 거부한다. 그러나 영화의 결말에 이르면 그 모두를 응원하는 방식으로 뭉클하고도 아름답게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갈등이나 오해는 대체로 해소되지만 그것이 사랑의 실현으로서 일어나지는 않는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엘리’는 물론이고 ‘폴’에게도 ‘애스터’에게도, 수많은 실패와 좌절, 상처들이 분명 찾아오고 어떤 것은 아주 오래 갈 것이다.
영화 '반쪽의 이야기' 스틸컷
앞에서 제목에 관하여 ‘반쪽과 다른 반쪽이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라고 언급했는데, 그 연장선에서 <반쪽의 이야기>는 주인공이 빈번하게 내레이션까지 하며 ‘폴’의 행동을 이끌고 자신도 움직이지만 전지적이지는 않다. 예컨대 전기 요금을 3개월 체납한 것에 대해 ‘엘리’는 아빠에게 전력 회사에 전화해봤는지 묻고 아빠는 동양인인 자기 억양을 못 알아들을 거라며 (통화) 안 해봤다고 한다. 이에 ‘엘리’는 시도는 해보았는지 되묻지만 다음날 자기가 직접 전화를 할 뿐 아빠를 나무라지 않는다.
‘폴’의 이름으로 쓰는 편지를 통해 ‘엘리’는 ‘애스터’와 꽤 여러 주제에 걸쳐 폭넓은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내용을 보면 취향을 강요하거나 설득하지 않고 서로의 것을 그 자체로 존중하고 인정하는 방식으로 짜여 있다. 무엇보다 ‘애스터’에게는 사실 이미 공인된 (약혼 직전의) 남자친구쯤 되는 ‘트리그’(볼프강 노보그라츠)가 있다. 보통의 영화였다면 그는 당연히 주인공과 갈등을 빚는 캐릭터로 쓰였겠지만 여기선 전혀 그렇지 않다. 갈등을 빚지 않는 정도를 넘어 아예 ‘애스터’와 ‘폴/엘리’의 관계를 모르기까지 하지만, 알았다고 해도 이 영화에서는 그것이 갈등 요소로 쓰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 더 짚자면 영화 속 스쿼하미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톨릭을 믿는 보수적인 동네지만 여성이 여성을 좋아한다는 것 역시 지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얼굴을 붉히거나 뺨을 때리는 등의 일이 살짝 일어나기는 하지만 그건 당사자만의 문제일 뿐 공동체의 것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영화 '반쪽의 이야기' 스틸컷
이 모든 건 놀랍게도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지적인 동양인 여성 캐릭터, 투박하지만 자기 마음 가는 대로 하는 백인 남성 캐릭터, 무엇인가 비밀을 감추고 있는 듯 보이지만 인기 많고 예쁘기까지 한 또 다른 여성 캐릭터라는 아주 전형적인 인물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좋은 영화는 전에 없는 것을 만드는 게 아니라 기존의 틀을 가지고도 선례를 답습하지 않고 활용과 변주, 시도라는 것을 할 줄 아는 영화라고 <반쪽의 이야기>를 보는 순간 생각하게 된다.
“난 늘 사랑은 한 가지 방식뿐이라 생각했어. 올바른 방식 하나. 하지만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아.”라는 ‘폴’의 말처럼 <반쪽의 이야기>는 사랑은 특정한 어떤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 모든 종류의 사랑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평등하고도 특별하게 보여준다.
괜찮기만 한 그림과 훌륭한 그림 사이에는 아름다운 실패가 있다. 어떤 그림은 잊히거나 사라지기도 하지만 우리는 한 번 그린 그림의 순간을 기억하고 다음 그림을 또 그릴 수 있기도 하다. 이 영화를 두 번 더 되풀이해서 보는 며칠 동안 사랑에 관한 시나 산문을 여럿 읽었다. 확신하지 않은 채로, 그리지 않아도 되었을 선을 그려 넣는 일도 가치 있는 것이라고 끌어안으면서, 낙관하지 않되 주인공을 성장시키는 이 영화를 보고 여러 문장들 중에서도 떠오른 대목이 있어 여기에 덧붙일까 한다.
“두근거리다가 터지는 풍선이 되어 내가 먼저 고백하려고 해요. 바람 앞에서 살랑거림을 주체 못하고 펄럭이는 내 쪽에서 먼저 고백하기로 해요. 달은 밤이라는 확신이 있어서 밤에 뜨는 건 아닐 테니까요. 해도 마찬가지로 아침이라는 확신이 있어서 아침마다 뜨는 건 아닐 테니까요. 확신과 의심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뒤늦게 뜨는 날이 더 많았을 테니까요. 늦어도 좋으니 일단 뜨기만 하면 세상이 밝아지는 일이니까요.”
(이원하, 『내가 아니라 그가 나의 꽃』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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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를 노래했던 카나리아
이 글은 영화 [엘비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를 풍미했다는 말이 엘비스 프레슬리보다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외설적이라는 표현까지 들어야 했던 특유의 몸짓과, 노래실력으로 단숨에 제왕의 자리에 올라간 그였지만. 모든 아이콘들이 그렇듯이 그에게도 그만의 어려움들이 있었고. 풍파를 겪으면서도 자신의 커리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영화 [엘비스]는 그 전설의 시작에서부터 쓸쓸한 마지막 모습까지를 세 시간에 걸친 이야기로 풀어낸다. 음악 영화라는 틀에 갖혀 노래에 치중된 영화이기보다는, 가수가 아닌 엘비스의 모습과 그의 인생에 존재했던 고뇌들에 대해서도 함께 하고 있어. 드라마적인 재미도 놓치지 않았다.
신예 오스틴 버틀러의 싱크로율 높은 연기와 톰 행크스의 안정적인 연기가 합해져 긴 러닝타임이 지루하지 않으며, 다양한 화면 전환 또한 늘어질 법한 분위기를 반등시키는데 한 몫 한다.
핑크 캐딜락과 지팡이;꿈과 현실을 색으로 표현하기.
사진출처:다음 영화엘비스의 어머니가 늘 꿈에 그리던 것은 핑크 캐딜락이었다. 살아가는 데 있어 필수품은 아니기에 소유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인생에 자괴감을 가져다주는 존재는 아니지만. 가끔 꺼내 보면 온 마음에 들어찬 퀴퀴한 현실을 한 번씩 쓸어내릴 수 있을 만큼 강한 바람 정도는 되어주는 것.
파커 대령(톰 행크스)을 만나기 전까지. 엘비스의 가족은 서로가 서로에게 인생을 견뎌내며 걸어나가는데 꼭 필요한 지팡이가 되어주고 있었다. 저 언덕 너머 어딘가에는 있을 것 같은 핑크 캐딜락을 향해 아주 더디지만 확실한 걸음을 내딛는 데 있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존재들.
대령은 이미 작은 캐딜락을 가지고 있었지만. 엘비스를 처음 본 순간 이제는 새로운 버전의 차를 몰아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완벽한 착각이었다. 엘비스는 그에겐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절대 놓아서는 안 되는 지팡이었다. 그것도 절대 부러져서도. 그렇다고 늘어나는 대령의 탐욕이 무거워 버티기 힘들다고 투덜대는 일이 없어야만 하는 고분고분한 지팡이여야만 했다.
그에 반해 늘 지팡이 같은 존재의 삶을 살아야 했던 엘비스를 지탱해 주는 것은 하나둘씩 자신과 멀어져 갔다. 캐딜락처럼 빛나는 삶을 사는 것은 누군가가 보기에는 번지르르하다못해 미끄러질 것만 같은 삶이었지만. 마음의 근간을 하나씩 잃은 엘비스의 삶은 점점 무너져내린다.
남들이 다 부러워할 것 같은 핑크 캐딜락의 삶을 살지만. 오히려 단조로운 현실에 겨우 발맞출 수 있었던 예전의 삶보다 색을 잃어 흑백으로, 혹은 빛바래지는 후반부의 엘비스를 보고 있으면. 그 반짝거림으로 자신의 초라하고 비어가는 마음을 가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파커가 미켈란젤로가 될 수 없었던 이유;원석과 보석 사이의 딜레마
사진출처:다음 영화세상 거의 모든 것은 원본이 개정본, 혹은 복제본 보다 가치 있다고들 말하지만. 반대가 되는 경우가 드물게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원석일 것이다.
소위 말하는 빵 뜬 연예인들에게 이제서야 발굴된 보석이라거나. 이런 원석이 대체 여태 어디에 숨어 있었냐는 말을 하는 것만 봐도. 원석과 보석 사이에 존재하는 가치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분명한 것은. 파커 대령은 원석에 가까웠던 엘비스를 발굴해냈고. 그 원석이 가장 빛나는 보석이 되도록 세공하는 방법 또한 알고 있었다. 덕분에 신경증 정도로 치부되어도 별말 할 수 없었을 다리(혹은 하반신)를 떠는 것조차도 사람들을 열광하게 하는 스타 엘비스 프레슬리로 만들어 냈다. 그렇다. 파커가 Nobody를 Somebody로 만들어준 것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파커는 세공 방법에 대한 지분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나 허락된 빛(Light)에 대해서도 소유권을 주장했다. 마치 엘비스는 자신이 아니었으면 암흑 속에 영원히 갇혀 있었어야 한다고 말하려는 듯이.
옹졸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엘비스의 고삐를 틀어쥔 그가. 모든 것을 무대에 쏟아낸 채 커튼 뒤에서 기진 맥진한 엘비스를 보며 눈물을 훔치는 장면에서. 문득 그가 미켈란젤로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각상을 만들 때. 돌 속에 숨겨진 형상을 해방시키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 믿었던. 이미 돌 안에는 완성된 무언가가 있었고. 자신은 그저 불필요한 것을 없애주는 역할만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는 세기의 예술가 말이다.
나는 그 장면에서 대령이 스스로가 그저 협잡꾼에 불과함을 깨달아서 울길 바랐다. 그렇게 유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노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채 무릎을 꿇은 저 엘비스를 사실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에. 원래 완성된 상태로 그저 현실에 가려진 상태였음을 느꼈기 때문에 울었기를 바랐다.
시대의 카나리아;노래로 할 수 없는 말을 대신하다.
사진출처:다음 영화지금은 모두 센서로 대체되었지만. 예전에는 석탄을 캘 때 발생하는 가스로 인한 인명 피해를 줄이기 위해. 광부들은 카나리아를 가스 탐지기처럼 이용했다.
투명한 새장 속의 카나리아가 픽픽 쓰러지는 것을 보면 더 이상 전진하지 않고 작업을 멈추었다. 물론 이렇게 죽어가는 카나리아의 비용과 그 죽음을 지켜만 보아야 하는 어려움을 덜기 위해 나중에는 새가 활기를 잃으면 공기를 주입해 되살리는 시스템까지 갖추어져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탄광의 카나리아.라는 말은 다가오는 위험을 먼저 알려주는 존재를 뜻하는 말로 지금까지도 여겨지고 있다.
시대의 모든 변화 앞에 서 있었던 엘비스를 보며. 마치 그 시대의 카나리아 같다는 생각이 영화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하다못해 쓰러져서는 안 되는 존재를 다시 살려내기 위해 각종 약물을 투여하는 장면까지도 말이다.
어차피 모든 위험. 혹은 비난은 엘비스가 감수할 테니. 엘비스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를 늘 극한까지 등 떠밀어댔고. 주변에 아무도 없이 모든 위험을 피부 하나로 다 느껴야 했을 엘비스는 그저 그 두려움을 노래할 수밖에 없었다. 말할 수 없는 이야기는 노래로 하는 것 외에 자신이 가진 수단은 없었을테니 말이다.
실제 엘비스가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 공연에서. 그는 더 이상 노래하고 있는 것이 아닌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자신은 이제 한계까지 왔다고 퍼덕이면서. 환호의 박수가 아닌 애처로움의 눈물이 먼저 터졌다.
이런 나의 감상도 어떻게 보면 이미 그의 마지막을 알고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같잖은 위로 같기만 했다. 만약 나 역시 그 시대에 있었다면. 그의 절규에 그저 잘한다며 손뼉을 치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의 마지막 공연 모습이 계속 눈에 밟힌다.
마치면서
빠른 전개와 눈을 사로 잡는 화면들. 그리고 엘비스가 음악이라는 것에 빠져드는 것을 묘사하는 초반 10분 시퀀스는 그 누구의 마음도 뺏을 수 있을 만큼 강렬하다. 또한 거의 세 시간에 달하는 런닝 타임도 잘 분배하고 조절해서 그다지 지겹다거나 영화를 감상하는데 있어 물리적 시간이 주는 괴로움을 선사하지는 않는다.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이토록 괴로운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다. 마치 [나이트 메어 앨리]를 보는 것 처럼 환각과 현실 사이에서 힘들게 균형을 잡으려고 하는 엘비스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황제의 뒤안길이 쓸쓸하게 느껴져 마음이 아프지만. 그가 우리에게 준 유산이 얼마나 대단한 것임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영화이기도 했다.
[이 글의 TMI]
1.독일어..갑자기 너무 어려워졌어요...
2. 하지만 포기하는건 부끄러워서 못하겠음.ㅠㅠ
3.그래서 엉엉 울면서 매일 하고 있는데.
4.근데 이제 거기 복숭아랑 망고를 잔뜩 끼얹은 공부를 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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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일루셔니스트》, 환상은 어디까지가 좋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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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일루셔니스트》는 다시금 내가 애니메이션 감상에 최적화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 작품이었다. 보는 내내 격하게 화가 나기도 했고, 안쓰럽기도 했고, 작품을 보면서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영화 《일루셔니스트》 시놉시스
세월이 흘러갈수록 설 자리를 잃어가는 일루셔니스트는 자신이 설 수 있는 무대를 찾아 이곳 저곳을 떠다닌다. 그러던 어느 날 스코트랜드의 한 선술집에 머물며 공연을 하다 그곳에서 앨리스라는 한 소녀를 만나게 된다. 일루셔니스트의 무대에 반한 어린 소녀 앨리스는 다음 무대를 찾아 떠나는 일루셔니스트와 함께 여행을 나서고 뒤이은 그들의 모험은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비언어극 같았던 영화 《일루셔니스트》
영화 《일루셔니스트》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언어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한국어가 아니기에 대사가 많은 영화의 경우네는 자막을 읽는데 집중을 하다보면 장면장면을 놓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을 수밖에 없다. 심지어 이 작품은 불어였기 때문에 자막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화 《일루셔니스트》는 일종의 비언어극처럼 대사보다는 인물의 행동과 주변 환경에 관객들이 조금 더 집중할 수 있도록 연출하고 있었다. 앨리스의 달라지는 모습과 함께 점점 낡아가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부각되는 장면들이 이어졌다. 앨리스가 빛이 날수록 오히려 영화 자체의 색감이나 조명은 점점 어두워지는 등 전체적인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도록 화면을 구성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동심은 언제까지 지켜줘야 하는 걸까?
영화 《일루셔니스트》를 보면서 화가 나고 답답했던 것은 도대체 왜 할아버지는 앨리스가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걸까? 였다. 자신의 생계를 위협하면서까지 앨리스의 세상을 마치 환상 속에 있는 것처럼 만들어준 것일까? 답답했다. 영화를 본지 꽤 됐지만 아직까지도 그 이유를 잘 알 수가 없다. 앨리스는 자신이 점점 화려해지면서도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마법으로 얻은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고, 할아버지는 결국 앨리스에게 마법사는 없다는 말을 남기면서 앨리스의 곁을 떠난다.
둘 모두에게 별로 좋지 않았던 방법인데 왜 그것을 고수했는지 의문이 들었고, 순간적으로 그렇다면 아이들의 동심은 언제까지 지켜줘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들었던 시간이었다.
처음부터 마법사로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앨리스의 곁을 떠난 할아버지는 기차에서 한 소녀를 만난다. 그림을 열심히 그리다가 연필을 떨어트린 소녀는 기차 의자 바닥에서 연필을 찾는다. 그 연필을 주운 할아버지는 기다란 자신의 연필과 비교하며 소녀가 원래 가지고 있던 짧은 연필 대신 긴 연필을 줄까 잠시 고민하지만 원래 소녀의 것은 소녀에게 전달한다.
여기서 나는 할아버지가 더 이상 마술을 이용해서 아이들을 환상 속에 두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마술 한번으로 아이들이 헛된 생각을 품을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을 알게되면서 마술을 보여주되 그 마술은 순간적인 재미일뿐임을 알려주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이 장면을 영화 《일루셔니스트》의 명장면으로 꼽고 싶었다.
영화 《일루셔니스트》는 대사가 많이 없어서 영화 그 자체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던, 그래서 작품의 여운과 의미가 많이 남을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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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네랩 홈시네마 추천작 3편
영화/OTT 콘텐츠 큐레이션 웹매거진 씨네랩입니다.
12월 마지막 주 씨네랩이 추천하는 홈 시네마 추천작 3편을 선정하는 콘텐츠입니다.
오늘은 넷플릭스 시리즈 <피어 스트리트>시리즈 속의 2편과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 다큐멘터리 <나의 문어 선생님>. 이렇게 3편을 선정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는 작품의 선정 이유와 간단한 콘텐츠 소개를 전해드리도록 할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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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NETFLIX <피어 스트리트 : 1978> 2편
<피어 스트리트 파트 2> 영화 - 공포ㅣ109분
- 콘텐츠 소개 : 세 편으로 구성된 시리즈를 한 번에 제작한 작품의 공포/ 호러 시리즈로 넷플릭에서 모두 볼수 있습니다. '셰이디사이드'라는 마을에서 뿌리내린 저주의 실체를 파헤치는 스토리.
- 선정 및 추천 이유 : 로튼 토마토 지수 89%, 팝콘 지수 82%, 그리고 IMDM 6.8점으로 꽤나 재미있다는 호평이 많은 작품입니다. 팝콘 무비로써 보기 알맞은 영화로 추천드립니다.
넷플릭스에서 1, 2, 3편 모두 공개되어있기 때문에 정주행 하기 좋은 영화인데요. 각 편당 러닝타임도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되어 지루하기 않게 볼 수 있는 공포/호러 영화입니다.
특히 2편을 추천드리는 이유는 1편은 영화에 등장하는 살인마 캐릭터가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장면에 치우쳐 슬래셔 무비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부담감이 있었다면
2편은 어떻게 마을에 저주가 내려오고 그럼으로써 어떻게 마을을 피폐하게 만들었는지의 스토리적 감상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NETFLIX <프라미싱 영 우먼>
<프라미싱 영 우먼> 영화 - 범죄ㅣ114분
- 콘텐츠 소개 : 7년 전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당한 비극적인 사건에 충격을 받고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카산드라'가 친구를 위해 완벽하고 치밀한 복수를 실행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 선정 및 추천 이유 : 먼저 배우 '캐리 멀리건'의 팬으로서 영화를 선정했고 또한 '캐리 멀리건'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추천드립니다.
그녀의 연기 변신 뿐만 아니라 하나의 영화로써 사회에 대한 메시지는 물론 독특한 이야기로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78회 골든글로브에서 여우주연상, 감독상, 작품상, 그리고 각본상까지 4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던만큼 인정을 받은 작품이니, 꼭 한번 시청해도 좋을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3. NETFLIX <나의 문어 선생님>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 다큐멘터리 ㅣ 90분
- 콘텐츠 소개 : 남아프리카의 바다에서 한 영화감독이 매일 특별한 문어를 만납니다. 경계에서 교감, 그리고 우정으로 발전하는 두 생명체의 관계. 그 세계의 숨은 신비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 선정 이유 : 일단 다큐멘터리의 장르를 좋아합니다. 허구의 세계를 이야기를 잘 구성하고 연출하는 극영화의 매력과는 또 다른
날 것 그대로의 있는 그대로의 현실 속에서는 감동과 충격을 선사하는 다큐멘터리의 특성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먼저 다큐멘터리 장르를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추천드립니다. 실제로 <나의 문어 선생님>을 본 많은 분들은 인생 최고의 다큐멘터리라며 호평하고 있는데요.
다큐멘터리 장르에서 조금은 생소한 동물 '문어'를 통해 우리 인간의 닮아있는 모습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의 고난과 역경, 아픔, 희생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과정 속에서 넘치는 감동을 느낍니다.
씨네랩 에디터 Hez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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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물망초의 꽃말을 아세요?
메이저 톤으로(The Major Tones)
잉그리드 포크로펙
Argentina, Spain | 2023 | 102min | DCP | Color | Fiction | Asian Premiere겨울 방학의 어느 날, 열네 살의 아나는 어릴 적 사고로 팔에 이식한 금속판이 모스 부호로 된 이상한 메시지를 수신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나를 잊지 마세요.
Don’t forget me.이름부터 잊지 말아달라는 하늘색 꽃, 물망초(勿忘草)의 꽃말이다.
‘방 천장의 별을 따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의 주인공은 열네 살의 소녀, 야나. ‘엄마’가 끼어들 공간은 없어 보일 정도로 유달리 화목해 보이는 부녀 사이는 오늘도 “이상 전선 무”인 듯싶다. 어딘가로부터 수신한 소리를 그대로 내뱉는 주인공과 그 소리를 악보로 받아적는 친구 사이에도 불완전함은 느껴지지 않고, 소녀의 인생은 굴곡 없이 잘 흘러갈 듯하다.
이윽고, 주인공 야나의 팔에 난 큰 흉터가 ‘그렇지 않아’라고 “뚠-뚠” 소리치며 이 빈틈없는 공간에 균열을 내버린다.
어릴 적 사고로 팔에 이식한 금속판에서 모스부호일 수도, 노래일 수도 있는 신호를 수신한다는 이 판타지 영화롤 보는 내내 최근 개봉한 한국의 성장 영화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 같은 듯 다른 두 작품은 소녀와 모스부호라는 공통 소재를 전자는 한국의 ‘입시’를 통해, 후자는 사회적 이슈를 통해 풀어낸다.
잉그리드 포크로펙 감독은 GV에서 아르헨티나의 현실에 판타지 요소를 가미한 ‘전통 판타지’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하며, 동시에 한 여자아이의 성장 서사를 담고 싶었다고 말했는데, 이는 ‘야나’가 뛰어다니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시 안팎과 특히 열두 시가 넘은 야심한 밤에 ‘야나’에게 ‘시 경계는 건너지 않으니 내려서 걸어가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택시 기사의 말을 통해 매우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씁쓸한 현실 속 담담한 ‘야나’의 모습에서 어딘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지는 <메이저 톤으로>는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기억하면서도 그 기억에 침몰되지 않고 간직하며 살아낼 수 있다는 희망을 찾아간다.
그리고, 영화는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국제경쟁 대상을 거머쥐며 ‘잉그리드 포크로펙’ 감독이 있는 아르헨티나 영화계 역시 희망차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5 BULL.T
9 Windmill등 모스부호를 통해 알아낸 단어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의 끝은 영화가 아닌 ‘엔딩크레딧’에 있으니, 만약 이 작품이 국내 극장에서 개봉한다면, (그렇게 되길 희망한다) 상영관 내에 불이 켜지더라도 자리를 지키고 엔딩크레딧 속 꽃말까지 감상하길 바란다.
국제경쟁 - <메이저 톤으로> -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스케쥴
2024.05.03(금) 17:00 | CGV전주고사 7관 (244) *GV
2024.05.06(월) 13:30 | CGV전주고사 7관 (527) *GV
2024.05.10(금) 13:30 | CGV전주고사 7관 (922)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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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지던트 이블 라쿤시티, 액션은 줄고 좀비도 줄고 지루함은 늘어난 리부트!
콘솔 게임을 원작으로한 영화 레지던트 이블의 새로운 리부트 영화죠.
레지던트 이블 라쿤시티가 개봉했습니다.
사실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는 영화인데요.
주인공 클레어 역할로 카야 스코델라리오가 주연을 맡았어요.
아직까지는 레지던트 이블 하면,
과거 밀라 요보비치가 앨리스로 출연했던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가 더 먼저 떠오르게 됩니다.
스타일리쉬한 액션이 중심이되었던 이전 시리즈와는 달리 이번 리부트된 영화는 액션이 줄었는데요.
그럼 어떤 부분이 달라졌고, 영화는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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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분노의 질주 : 라이드 오어 > 어셈블 영상
대한민국 전세계 최초 개봉 확정! 5월 17일, 시리즈 역대 최강의 캐스트로 컴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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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악인은 너무 많다 2 : 제주 실종사건의 전말> 메인 예고편
10년 전, 정적 '잠수함'에게 칼을 맞고 칩거하며 폐인처럼 살던 탐정 ‘강필'에게
친하게 지내던 동생 '병도'가 찾아온다.
제주도의 한 건설업자가 원하는 사람을 찾아주면 꽤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제안하고
재정적으로 어렵던 강필은 의뢰를 받아들여 제주도로 향한다.
그런데 건설업자가 찾길 바라는 실종된 감독은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K3리그 '승부조작'에 관여한 정황이 보이고
주니어 축구교실 학부형들을 대상으로 '성매매'까지 알선했다.
게다가 조사를 진행할수록 주변 사람들의 숨겨진 '이면'이 속속들이 밝혀지는데...
강필은 이 사람을 계속 찾아도 되는 걸까?
건드리면 안 되는 '진실'에 다가가는 것은 아닐까?
이 세상에 제대로 된 '정의'란 존재하긴 하는 걸까?
탐정 '강필', 또다시 얽히지 말아야 할 사건에 얽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