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저2024-10-24 10:52:25
“말러” 라는 음악가를 건네주는 영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영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남들이 다 하는 대로 피아노 학원을 등록했다. 음악에 별다른 재능이 없었던 나는 중도 포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시작했으니 일단 뭐라도 해야지 라는 마음으로, 성실함 하나로 바이엘을 지나, 체르니 100번, 체르니 30번까지 하나씩 마스터 한 후, 마침내 피아노를 그만둘 수 있게 되었다. 몇 년 동안 피아노를 쳤지만, 좋아하는 곡이나 음악가는 따로 없었다. 음악의 즐거움을 알기보다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해야 완수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가까웠던 건지도 모른다. 그런 나에게 음악이, 피아노 연주가 아름답다고 알려준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캠프에서 만난 친구였다. 각 학교별 몇몇이 선정되어 온 지역 캠프여서 처음 본 친구들과 조를 이루고 한방에 자게 되었다. 캠프 행사 내내 거의 말이 없어서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던 그 친구가 늦은 밤 소등한 뒤 내 침대를 툭툭 치고는 이어폰 한쪽을 건네주었다. 창밖으로는 달이 밝았고, 이어폰에서는 쇼팽의 녹턴이 흐르고 있었다. 별말을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조금 가까워진 것 같았다. 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내가 클래식이란 장르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요즘의 조성진이나 임윤찬처럼 나의 학창 시절엔, 장영주 장한나가 있었다. 장영주 바이올리니스트의 신보가 나오면 레코드 가게에 달려가 테이프를 사던 20년 전 그때부터 5월이 되면 장영주의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듣고, 겨울이 오면 장한나가 연주한 첼로 협주곡을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클래식을 좀 아느냐고 누가 내게 묻는다면 , 안다거나, 좋아한다라고 말하기엔 여전히 어려운 장르가 클래식인 것 같다. 친구 덕에, 장영주 바이올리니스트 덕에, 장한나 첼리스트 덕에 좋아하는 곡을 하나씩 발견해 가는 중이랄까?
오랫동안 천천히 발견하고 있는 클래식이란 장르에서 나에게 ‘말러’의 존재를 알려준 것은 영화였다. 이전에도 수없이 많은 영화에 등장했을 곡이지만, 아니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고 궁금증을 자아낸 영화는 <타르>였다. 말러의 교향곡 5번을 그토록 연주하고 싶었던 리디아 타르. 왜 감독은 리디아 타르에게 말러를 매칭 했을까? 라는 의문을 갖기 시작하자 다음 눈에 들어온 것은 영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이었다.
이 영화는 대표적인 말러리안*으로 알려진 레너드 번스타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로 브래들리 쿠퍼가 감독과 공동 각본뿐만 아니라 주연을 맡아서 열연했다. 제작에 마틴 스코세이지, 스티븐 스필버그 등이 참여하여,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었다.
*말러리안(Mahlerian) : 구스타프 말러의 음악을 추종하는 클래식 애호가를 이르는 말
레너드 번스타인 (1918~1990)은 우크라이나계 유태인 출신으로 뉴욕 필의 부지휘자가 되었다. 그러다 브루노 발터의 대타 지휘자로 운 좋게 데뷔를 하게 되며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이후 몇 년간의 삶은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이후 번스타인은 1957년 미트로플로스와 함께 뉴욕필의 공동 지휘자로 취임하게 되었고. 1969년까지 상임지휘자로 있으면서 뉴욕 필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다. 번스타인의 뉴욕 필 재임 기간 동안의 가장 큰 업적은 구스타브 말러의 교향곡 전곡 녹음이었다. 구스타프 말러의 음악이 철학적이고 연주하기 까다로운 특성으로 난해하다는 평 때문에 인정받지 못했던 교항곡 전집을 녹음하면서 말러를 재평가받게 만든 인물이었다. 이를 계기로 미국에 말러 붐이 일어나게 되었고, 그 영향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니까. 번스타인은 뉴욕 필 뿐만 아니라 빈 필, 암스테르담 콘서트허바우, 이스라엘 필의 지휘를 많이 했는데, 이때도 말러 교향곡은 주요 레퍼토리여서 번스타인은 자연스럽게 말러 지휘자로 자리 잡은 것 같다.
번스타인은 말러의 작품에 대하여 '마치 내가 쓴 것 같이 느껴진다'라고 할 정도로 애정을 많이 가졌다고 한다.
'나는 말러에게 매우 동정적이다: 나는 그의 문제를 이해한다. 마치 한 몸에 갇혀 있는 두 사람이 되는 것과 같다. 한 사람은 지휘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작곡가이다... 그것은 이중인격자가 되는 것과 같다.'
영화는 담담하게 레너드 번스타인의 생애를 짚어 간다. 대단한 업적을 가진 지휘자로만 알고 있었던 그의 사생활과, 가족들의 이야기를 지루할 정도로 천천히 보여준다. 조금 더 영화적인 영화를 기대한 사람에게도 아쉬움을 남고, 번스타인의 음악을 기대한 사람에게도 조금은 아쉬움이 남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대미를 장식하는 대성당에서의 말러 2번 연주 장면만은 압도적이었다. 영화가 그 장면을 위해 달려 온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씬 하나로 깊은 인상을 남겨주는 영화가 바로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이었다.
나에게 이어폰 한쪽을 건네 쇼팽의 아름다움을 알려준 친구처럼,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번스타인의 생애를 통해 ‘말러’라는 음악가는 내 삶에 건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