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4-11-25 07:46:26
흉측하게 그로테스크하고, 불쾌하게 교훈적인
영화 〈서브스턴스〉

메시지는 심플하다. 사회가 나이와 몸매, 외모를 기준으로 여성의 가치를 매기고 여성 스스로도 이 기준을 내면화했다는 것. 중요하지만 새롭지는 않은 주제다. 그렇다면 전달 방식이 중요해진다. 관객이 ‘알고 있다’고 여기는 주제를 다시금 각인시키려면 무미건조해서는 곤란하다. 혁신적 접근으로 관객의 머릿속을 충격적으로 갱신해야만 한다. 그래야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다른 영화를 압도하고 이 주제의 왕좌에 오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서브스턴스〉가 가는 길이다. 여성의 외모를 철저하게 위계화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은 여러 장르의 여러 영화가 천착해온 주제다. 선배들이 걸어온 길을 그대로 가서는 자신만의 특이성을 획득할 수 없다. 〈서브서턴스〉의 선택은 흉측하게 그로테스크하고 불쾌하게 교훈적인 심리 스릴러다.

전반적인 이야기 구조는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기본 이야기 구조에서 시대와 성별을 바꿨다고 보면 된다. 과거 오스카상을 수상했으나 지금은 TV 에어로빅 쇼 출연자로 근근이 활동을 이어가는 엘리자베스. 그녀 커리어가 쇠락한 가장 큰 이유는 나이와 그로 인한 외모 변화다. 50대에 진입한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또래보다 ‘월등한’ 외모를 가졌지만 업계 관계자는 이제 더 이상 그녀를 ‘매력적’으로 보지 않는다. 50세 생일, 엘리자베스는 에어로빅 쇼에서 해고당한다.
그러나 뜻밖의 반전 기회가 찾아온다. 엘리자베스는 은밀하게 한 약물(서브스턴스)을 권유받는다. 세포 분열을 촉진시켜 또 다른 나를 탄생시켜주는 약이란다. 엘리자베스를 모체로 한 또 다른 신체와 자아를 가진, 무엇보다 엘리자베스보다 ‘젊고 아름답고 완벽한’ 수는 이렇게 탄생한다.
규칙이 있다. 엘리자베스와 수는 일주일 간격으로 교체되어야 한다. 한 사람이 활동할 때, 다른 사람은 깊은 수면에 빠져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교체 기간을 어기면 상대방의 신체에 치명적 손상이 가해진다(이를테면 신체 일부가 ‘늙고 추한’ 상태로 변한다). 수의 탄생으로 자신이 젊었을 때 누린 커리어의 상승 곡선을 다시 시작하게 된 엘리자베스는 기분이 좋다. 일주일간 잠들었다 깨어날 때마다 길거리와 TV에 수의 얼굴이 점점 더 많이 나오는 데서, 업계 관계자와 남자들이 다시금 자신에게(수에게) 관심을 가지는 데서 오는 기쁨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수가 주는 기쁨은 엘리자베스의 슬픔과 좌절의 원천이기도 하다. 수와 대비되는 자신을 볼 때마다 자괴감에 빠지고, 자신의 시대가 완전히 끝났다는 데 박탈감을 느낀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존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승승장구하는 수에게 질투를 느끼기 시작한다. 불만은 수에게도 있다. 급속도로 자기 가치를 올리는 중인 수는 일주일마다 자기 몸을 엘리자베스에게 내줘야 한다는 게 불만이다. 그래서 조금씩 규칙을 어기고 교체 기간을 미룬다. 그러면 엘리자베스의 신체는 더 ‘흉해진다’. 점차 엘리자베스의 감정이 증오로 물든다. ‘기억하라, 당신은 하나다!’라는 서브스턴스의 가치가 흔들리고, 두 사람은 폭주를 거듭한다. 폭주의 끝은 파멸이다.
〈서브스턴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건 끔찍할 정도로 기괴한 이미지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늙고 추해지는’ 엘리자베스의 몸 이미지 말이다. 이 이미지는 우리를 고민케 한다. 늙은 몸이 추하기만 한가? 괴물이 연상될 정도로? 그러나 적어도 이 영화에 한정하자면, 이 질문은 적합하지 않다. ‘여성은 늙으면 외모가 쇠락하고 매력을 상실한다’는 명제는 영화의(그리고 우리 사회의) 절댓값이다. 극단적으로 ‘추한’ 엘리자베스의 몸은 사회가, 그녀 스스로가 나이 든 여성의 몸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고발하는 수단일 뿐, 노인 여성의 몸이 실재하는 방식과는 관계가 없다. 우리가(그리고 여성 자신이) 나이 든 여성의 몸을 얼마나 왜곡되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폭로하는 상징으로서 늙은 몸에 그로테스크함을 결부해 영화 이미지로 제시한 것이다. 그러니까, 변화한 엘리자베스의 몸을 보고 욕지기를 느끼는 관객은 왜 사회는/나는 나이 든 여성의 몸을 저런 방식으로 왜곡해 상상할 수밖에 없는지를 질문할 수 있다. 심리 스릴러 장르가 자아내는 불편한 긴장감과 결부한 ‘끔찍한’ 육체 이미지가 우리의 통념에 틈입해 머릿속을 헝클어뜨리는 것이다.

엘리자베스와 수는 서로 다른 자아와 신체를 가진 하나의 존재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또 다른, 그래서 의미심장한 맥락 역시 갖는다. 수는 엘리자베스에게서 태어났고, 두 사람은 교체 주기마다 서로의 피를 교환한다. 즉 인류가 탄생한 이래로 무수히 반복‧순환되어온 ‘모녀 관계’를 닮았다. 엘리자베스는 자기 몸에서 나온 수를 보고 크게 만족하지만 이내 자신을 방치하고 착취해 홀로 승승장구하는 수에게 배신감을 느낀다. 수는 엘리자베스가 자신을 물심양면 돕기는커녕 훼방만 놓기 일쑤라는 데 마찬가지로 분노한다. 전형적인 모녀 관계 갈등 양상이다. 이렇게 ‘나’이자 ‘타인’, 가장 친밀하고도 먼 존재인 ‘엄마와 딸’의 관계성 속에서 두 여성은 ‘기억하라, 당신은 하나다!’의 정신을 현실에서 구현하지 못한다(그랬다면 아마 〈서브스턴스〉는 두 여성이 성차별적, 외모 차별적 사회를 풍자하는 코미디 영화가 되었을 터다).
그 결과는? 여성들은 연대하지 못하고 서로를 적대한다. 여성을 위축시키는 왜곡된 통념은 안정적으로 재생산된다. ‘일부’ 남성들은 이 통념에 기생한다. 엘리자베스와 수처럼 적대적 관계성을 반복하는 개별 여성들은 명멸하다 사라진다. 〈서브스턴스〉가 선보이는 끔찍한 이미지들을 매개로, 우리는 다시금 훼손된 연결성을 복원해야 한다. 그런 후에, 우리는 비로소 ‘흉측한’ 엘리자베스의 몸과는 다른 나이 든 요성의 몸을 상상하며 기쁘게 늙어갈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
- 무너져 버린 사랑 뒤의 또 다른 사랑.
흔적도 없이, 실체도 없이 사라진 사랑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평생 '우리'라는 글자에 그 사랑은 더욱 큰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잃은 상실도 잠시 그 후에 맞이하는 사실이 그동안 믿어왔던 사랑과 헌신을 한순간에 무너지게 한다.
정착하지 못했던 그의 마음을 알면 알수록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며 메리의 표정과 사랑이 잔뜩 담긴 음성 메시지가 대비된다. 차오르는 감정과는 다르게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 평온한 얼굴에서 절망이 더 짙게 나타나며 영화의 중심을 잡아간다. 남편이 그토록 사랑했던 그 여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메리는 남편이 사랑했던 여자를 찾아가게 된다. 자신의 정체를 알리지 않고 쥬느와 마주치고 하고 싶은 말을 삼킨다. 그의 집에서 일하게 된 메리는 쥬느의 주변을 관찰하고 어질러진 집 곳곳에서 자신이 알던 남편의 흔적을 찾는다. 끊임없이 파고드는 순간을 반복하며 왠지 모를 긴장감을 자아낸다. 메리에겐 그런 긴장감이 통하지 않는지 거울에 자신을 비추고 또 자신의 몸을 어루만진다. 그 외에 쥬느의 침대에 누워 이들이 나누었던 추억을 바라본 후에도 그의 사랑을 놓지 않으며 마음이 내려앉을 때마다 메시지를 곱씹는다.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느끼는 것일까. 같은 사람을 사랑했지만, 누군가는 외면했고 누군가는 직면한 진실로 인해 그들의 엉킨 마음이 풀린다. 갈라진 벽은 점점 더 틈새를 벌어지게 하고 흩뿌려진 먼지는 시야를 가린다. 자각하지 못한 것들 것 한 번에 덮쳐오며 만료된 메시지와 급속도로 올라오는 감정들이 흘러가는 상황의 범위 위에 있는 선택을 결정한다. 온통 금이 가고 균열이 간 벼랑이 아닌 견고한 벼랑 위에서 사랑 후에 남겨진 그 감정이 나눠지지 않은 오로지 각자의 몫이 되어 돌아온다. 사랑 후의 두 여자는 새로운 시작 끝에 같은 곳을 바라보며 새로움을 맞이한다. 그는 하지 못했던 견고함을 해내는 순간이 이 영화의 곳곳에서 이루어진다.
영화는 사랑을 ‘하는 중’의 이야기가 아닌 ‘한 후’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렇게 상실 이후에 배신이라는 사실까지 맞이한 여자와 사랑이라는 불확실성에 자신을 던지며 속여온 여자가 손을 맞잡으며 또 다른 감정의 시작을 알린다. 사랑의 반쪽이라고 할 수 있는 아메드라는 존재가 죽음으로 인해 남겨진 두 여자의 감정들이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지지만 평이한 이야기 구성으로 갈 수 있는 소재를 감정 중심의 이야기 진행으로 몰입을 높인다. 감정이 아쉽지만, 감정이 좋은 그런 영화라 오래토록 마음에 남을 것 같다.
-
- 사이코패스와 사이코패스의 만남
3분 추천
스포일러가 싫은 사람이라면 전작을 보고 오는 것을 추천한다.
이사벨 펄먼 배우에 대한 논란이 많았으나, 역시 연기력으로 압살해버린다.
전작에 대한 연결성이 짙어서 전작을 본 사람에게는 기대만큼의 값어치를 한다.
후기길게 말할 필요 없는 확실한 스릴러 영화. 이미 반전 요소를 알만한 사람은 다 알 만큼 유명한 영화라서 프리퀄로 어떻게 재미를 줄까, 보기 전부터 기대가 앞섰다. '대체 저 아이가 숨기고 있는 비밀이 뭘까'를 궁금해했던 게 전작이라면, 이번 [오펀 : 천사의 탄생]에서는 '대체 저 비밀을 어떻게 숨길까'가 관건이었다.가족을 속이고 장악해가는 에스더를 기대했는데, 예상외의 반전이 등장하며 순식간에 영화에 빠져들었다. 솔직히 반전이 설득력 있지는 않지만, 빠른 전개 덕분인지 중후반 흡입도가 확 높아졌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이사벨 펄먼의 얼굴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영화 초반에는 얼굴이 너무 변해서 어색하긴 하지만, 집중하다 보니 눈에 익어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게다가 내용이 내용인 만큼 오히려 광기에 젖은 성인의 모습이 좀 돋보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스포일러 있음*
딸이 죽었음에도 아들을 싸고도는 엄마를 보니 이전에도 딸이 행복하진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트리샤에게는 자식보다는 안정된 가족이 더 중요했던 것이겠지. 그보다 더 앞선 것은 남편에 대한 애정이었을 테고. 그렇게 생각하니 이미 죽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딸을 데리고 온 그 속셈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내가 진짜 딸이라면 가출했을지도.
흥미로웠던 건, 에스더의 특이한 그림 기법이 앨런에게서 배운 것이라는 점이다. [오펀 : 천사의 비밀] 편에서 에스더의 숨은 비밀을 드러내고 충격을 주었던 요소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것 말고도 에스더의 러시아 억양이나, 정신병원에서 받은 성경 책이나, 옷 입는 취향 같은 것들이 등장해서 전작과 비교하는 재미도 있었다.
이렇게 보니 그녀가 어떻게 정신병원에 들어오게 된 것인지도 궁금해졌다. 이보다 더 앞선 이야기를 찍는 건 이제 무리일 수도 있겠지만, 가능하다면 찍어줬으면 좋겠다. 오펀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포영화이기도 해서. 이번 편은 평이 극명하게 갈리고 별로라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꽤나 재밌게 봤다. 만족스럽다.
-
- MBTI_INFJ 영화인들 모아보기
내일 놀래? / infj : 생각해볼게 (놀 의향 / 생각해볼의향 없음)
웃으면서 거절 잘하는 인프제. 친한 지인들은 안다는 인프제의 영혼리스 리액션.. 하지만 상대방을 배려해주는 마음은 정말 따숩답니다(?) 친구들의 고민 들어주기 장인, 도어슬램 장인, 혼자있기 장인.
알다가도 모를 인프제! mbti infj라고 밝혀진 영화인들 같이 만나보아요
✅ 친구들에게 내 성격 알려주기 (태그)
-
- 레이니 데이 인 뉴욕(A Rainy Day in New York/ 2018/ 미국)
(이미지 출처: 네이버이미지)
<뉴욕, 뉴욕>
개츠비와 애슐리는미국 뉴욕주 북부에 위치한 인문학의 명문, "야들리대학교" 캠퍼스 커플이다. 둘은 학교신문사에서 기자로 활동하다가 만났다. 야들리대학교를 좋아하는 개츠비의 어머니는 자신처럼 아들이 훌륭한 문학가가 되기를 원한다. 그뿐 아니라 피아노를 가르쳤고 뉴욕의 모모한 미술관에는 꼭 가도록 챙기면서 예술적 소양을 길러주었다.
개츠비는 문학가로 이름을 떨친 어머니가 속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가을마다 맨해튼의 집에서 파티를 열며 두 아들들이 꼭 참석하기를 원하나 순종적인 형과 달리 애슐리는 어머니의 '허세 가득한 버젓함'이 싫어 파티를 피할 궁리만 한다.
어머니의 파티가 열리는 주말, 애슐리는 예술 영화감독 롤란 폴라드를 뉴욕 맨해튼에서 인터뷰할 기회를 얻는다. 진작에 주말을 뉴욕에서 지내며 애슐리에게 여러 명소들을 구경시켜주고 싶었던 개츠비는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며 함께 보내게 될 특별한 주말에 마음이 설렌다.
그러나 뉴욕에 도착하여 애슐리가 롤란 감독을 만나게 되자마자 일은 걷잡을 수 없이 꼬이기 시작한다. 자신의 영화에 대한 평가에 매우 엄격한 롤란. 그의 신작은 애슐리가 보기에 훌륭하지만 롤란에게는 성에 차지 않는다. 시사회에서 완성된 영화를 보고 우울했던 그는 인터뷰 도중에 사라지고 만다. 시나리오 작가 테드에게 남겨진 애슐리는 어쩌다 테드 아내의 불륜 사건에 휘말려 개츠비와의 저녁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만다. 아내로부터 불륜이 사실임을 확인하게 되어 옥신각신하던 테드는 롤란이 있을 만한 곳의 주소를 애슐리에게 건네며 택시를 태워 보낸다.
주소대로 영화 스튜디오로 찾아간 애슐리. 간발의 차이로 롤란은 놓치고 그대신 매력적인 배우 프란시스코를 만난다. 그는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며 애슐리에게 접근한다. 프란시스코와 함께 있던 애슐리는 파파라치들에게 노출되어 방송을 타게 된다.
프란시스코가 초대한 영화인들 파티에 간 애슐리. 그 자리에서 롤란과 테드, 프란시스코 등 세 사람 모두와 어울리며 애슐리는 꿋꿋이 인터뷰를 이어간다.
한편 애슐리와 함께 지내려고 세웠던 계획이 모두 무너지자 개츠비는 맨해튼을 거닐며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난다. 뒷담화 킹 트롤러는 의대에 다닌다고 했고 영화학교에 진학한 조쉬는 길에서 학교 영화를 촬영 중이었다. 배우 구하기가 여의치 않아 이웃 친구들을 동원하여 만드는 영화에는 고교시절 개츠비의 여자친구였던 에이미의 동생, 챈이 출연 중이었다. 챈은 언니와 개츠비가 사귈 때 여느 남학생들과 많이 달랐던 개츠비를 몰래 좋아했었던 후배. 남자 배우가 궁했던 차에 급하게 캐스팅된 개츠비는 몇 번의 NG 끝에 화끈한 키스 장면까지 해치운 뒤 챈과 헤어져 형의 집을 방문한다. 그리고 엄마에게 자신이 뉴욕에 왔음을 비밀로 해달라고 약속하고 형 대신 포커게임을 하기로 한다.
비가 세차게 내려 택시를 잡은 개츠비와 거의 동시에 같은 차에 오른 챈은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동행한다. 챈은 의상디자인을 공부하는데 그림 속 옛날 인물들의 의상에 관심이 많았던 것.
그런데 미술관에서 개츠비는 파티에 참석하려고 뉴욕에 온 삼촌 부부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아 어쩔 수 없이 어머니에게 전화로 애슐리와 함께 파티에 가겠다고 알린다.
형대신 포커게임을 한 개츠비는, 언제나처럼 또 이겨서 수 만불을 손에 쥔다.
애슐리가 프란시스코와 함께 있는 장면을 TV로 보고 낙심한 개츠비는 애초에 그녀와 저녁을 함께 하기로 했던 칼라일호텔의 바에 들러 혼자 술을 마신다. 그러다가 에스코트 서비스를 하는 금발 미녀를 만나 거금을 주고 어머니의 파티에서 애슐리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집을 찾은 개츠비. 그의 어머니는 한눈에 금발의 미녀가 창녀임을 알아채고 내보낸다. 그리고 개츠비를 불러 가족의 비밀을 알려주는데 개츠비는 충격을 받는 동시에 어머니에 대한 반감에서 놓여나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깊이 고민한다.
문 닫을 시간에 칼라일 바를 다시 찾아 피아노를 치는 개츠비 앞에 비에 흠뻑 젖은 애슐리가 나타난다. 그렇게 토요일은 둘의 계획과 관계없이 전혀 로맨틱하지 않게 날아가고 말았다. 일요일 아침, 센트럴파크에서 애슐리의 원대로 마차를 타던 개츠비는 느닷없이 무언가 깨달은 듯, 특종 기사를 쓰게 되어 의기양양한 애슐리에게 돈을 쥐어주고 자기는 뉴욕에 남겠으니 혼자 학교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둘이 헤어지자 다시 비가 내리며 뉴욕은 안개 속으로 잠긴다.
노래하는 시계탑 아래에서 저녁 6시에 낭만적인 생각에 잠겨 서성이는 개츠비 앞에 그의 마음이 닿아있는 한 여성이 나타난다.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은 비내리는 뉴욕의 아름다움을 여실히 스크린에 담은 우디 앨런 스타일 영화이다. 우디 앨런의 다른 영화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배우들이 히스테리컬하게 쏟아내는 대사로 가득하다. 그런데 그 대사는 노골적일 정도로 솔직하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것으로 보이는 롤란은 애슐리가 그의 감정을 편하게 해주기를, 테드는 그녀가 그를 이해하고 그에게 영감을 줄 뮤즈가 되기를, 프란시스코는 육체적으로 그에게 쾌락을 주기를 매우 솔직하게 요구한다.
챈은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애슐리의 형은 약혼자에 대한 불만을, 애슐리 어머니는 가족의 비밀을 태연하게 애슐리에게 알린다.
영화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그가 싫어하는 것은 명확하게 안다.) 또 당당하게 주장하지도 못하며 우물쭈물하는 것은 애슐리 뿐이다.
애슐리는 학교신문 기자 일이나 문학 공부에는 시큰둥하고 오히려 승률이나 내기, 포커 게임과 술집에서 연주될 법한 피아노곡 연주에 매우 능하다. 그가 흠뻑 빠져 있던 애슐리가 그와의 연애보다 저널리스트로서의 성공에 열심을 내는 것에는 그러려니 할 뿐이다.
그러다가 어머니의 폭탄 같은 고백에 비로소 그는 문학과 별로 맞지 않으며 어머니 같은 야망도 없는 자기 자신에게 눈을 뜬다. 그리고 같은 예술적 소양을 지니고 있고 유대 문화를 배경으로 한 챈에게 마음이 향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당하면 우리는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아울러 엄청난 충격을 준 대상을 원망하며 자기 연민에 함몰되고 말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딛고 일어설 것인지를 선택해야만 할 형편을 맞는다.
애슐리의 선택은 후자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별로 힘들이지도 않고 그런 결정을 한 애슐리는 어쩌면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혹은 보이는 이상으로 강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있다가 잠깐 돌아와 보낸 주말 동안 그는 자신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된 후 그 깨달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부쩍 성장한 것 같다.
이 영화의 볼 거리는
첫째, 뉴욕이다. 불안과 신경증적인 고민이라는 성장통이 비와 안개에 젖은 아름다운 뉴욕에서 일어나고 잦아든다.
둘째, 호화 캐스팅이다. 캐릭터를 스크린 위에 살아나게 하는 그들의 연기가 빛난다.
셋째, 배경 음악이다. 비와 잘 어울리는 풍성한 재즈 선율은 모든 것의 첨단인 뉴욕이 매우 올드하게, 감성적으로 다가오게 만든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아들과 어머니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강한 유대감을 보이는 유대문화이다. 모계사회처럼 어머니를 중심으로 움직여지는 가정과 자녀교육이 우리문화와 비슷하여 흥미롭다. 영국인에게 직접 들었는데 영국의 전통에 따르면 아들은 어머니보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더 돈독하다고 한다.
이 영화를 보고나면 요즘 긴 장마로 매일 만나게 되는 비가 지루하거나 귀찮지 않게 느껴진다. 오히려 무언가를, 깨달음이나 신선한 만남을 기대하게 만든다. 역시 노장은 관객을 실망시키지 않았다(©2020.최수형).
-
- 영화가 가진 순기능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 하나
노 베어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이란에 살고 있는 영화감독 파나히(자파르 파나히 본인)이다. 파나히는 열심히 살고 있다. 영화감독이 열심히 살고 있다는 건 무엇? 바로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이, 큐!" 대사를 연이어 내뱉는 여배우(미나 카바니). 감독은 뭐가 맘에 안 들었는지 조연출에게 뭐라고 지시한다. 감독의 지시를 받는 조연출. 그러나 이 감독은 뭔가 특별하다. 바로 원격으로 촬영현장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파나히는 이란 정부에 의해 출국금지 상태고, 촬영지는 이란이 아니다. 답답한 파나히. 이런 파나히에게 여러 장애물이 날아든다.
주인공은 나
이 영화의 감독 자파르 파나히는 이란의 뒤틀린 현재를 묘사하기 위해 본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이 뒤틀린 이란의 현대사를 정통으로 맞는 파나히의 개인 이력을 이해해야 영화를 폭넓게 받아들일 수 있다. 필모그래피 초기 <써클>과 <오프사이드>로 베니스, 베를린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국제적 인지도를 올린 파나히는 2010년 당시 당국의 반체제 인사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파나히는 이때 20년 간 영화 제작 금지 처분과 징역 6년 형을 선고받는다. 파나히의 복역은 오래가지 않았다.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은 이란 정부는 파나히를 가택연금 상태로 전환시킨다. 파나히는 이에 대한 맞대응으로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베를린 영화제에 몰래 출품하는 등 영화감독 활동을 이어나갔다. 이후에 가택연금이 풀려 2015년, 2018년에 <택시>와 <3개의 얼굴들>로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 칸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란 정부의 출국금지 판결로 인해 상을 받으러 가는 데에는 실패했다.
<노 베어스>는 정치적인 이유로 발이 묶인 파나히의 이 상황을 관객이 체감하게 만드는 구조를 택하고 있다. 이 영화는 두 가지 이야기가 결합되어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파나히의 일상이다. 파나히는 현재 출국 금지 상태다. 그래서 영화를 찍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싶지만 발이 묶였다. 이 이야기를 표면적으로만 읽어도 파나히가 처해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외부의 이야기가 다루고자 했던 것은 이란 시민들의 일상이다. 한국 출생인 글쓴이가 봐도 이란에는 시민들을 억제하는 이상한 전통이 있다. <노 베어스>는 이 전통을 다루며 이란 사회가 주인공의 자유를 어떻게 억압하는지를 묘사하는데, 이를 건조하게 대하면서도 핵심을 놓치지 않는 감독의 솜씨가 돋보인다.
두 번째 이야기는 파나히가 만드는 영화다. 파나히의 영화 안에서는 커플이 등장한다. 이 커플은 터키에서 프랑스로 출국하고 싶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그냥 일반적인 로맨스물이다. 하지만 이 영화 안의 영화는 예술과 현실을 어떻게 규정하는지에 대한 경계선이 된다. 어떻게? 바로 두 주인공 배우다. 이 두 주인공 배우를 극 중 극과 이 영화 <노 베어스>가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가 플롯 안에서 밑줄 쳐져 있다. 두 인물을 활용하는 방식이 영화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심지어 이 형식에 의한 주제를 강조하는 방법은 <노 베어스> 외부에도 적용되어 있다. 바로 극 중 극의 여주인공 미나 카바니다. 미나 카바니는 특정 영화에서 누드 장면을 찍고 10년 동안 이란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 배우의 현실 역시 이 영화가 처한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영화의 액자식 구성이 철저하게 지켜진 사례가 된 것이다.
이 두 가지 형식을 엇갈리는 이유를 후반부의 두 장면에서 읽을 수 있다. 이 두 장면에서 영화는 그동안 보여줬던 여러 이야기들을 왔다 갔다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왜 이렇게 할까? 본질적으로 영화감독이란 이 경계를 어떻게 이야기로 관객에게 보여줄 것인지를 고민하는 직업이다. 감독의 자아를 플롯으로 보여준 것이다. 동시에 파나히가 살고 있는 현실(영화 안에서 묘사하는 것들)과 극 중 극을 어떤 식으로 대비하고 있는지도 보여주고 싶어 했다. 그런데 이 두 장면만 이를 구현했다? 그것도 아니다. 이 영화는 잔잔하면서도 서서히 이야기의 모든 순간에 대한 근거를 내세운다. 인물의 감정선이 모두 납득이 가는 것이다. 이 감정선을 모두 따라가다 보면 이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근본적인 질문에 도착하게 된다. 이는 영화감독으로서 이란사회에 살아남기 위해 어떤 태도가 필요한가?라는 질문과도 이어지는데, 엔딩에서 이를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닌 은근슬쩍 보여주는(?) 감독의 화법이 흥미로웠다.
언론을 소재로 한 영화 같기도
이 영화에 대해 생각할 때 글쓴이가 먼저 든 감상은 ‘영화감독이 기자로서의 역할도 할 수 있겠구나!’라는 점이다. 사실 그동안 영화를 봐오며 한 14만 번 정도는 느낀 생각이지만 이 <노 베어스>를 보고 더 강해졌다. 왜? 이 영화가 다루는 핵심은 두 이야기를 엇갈리며 ‘영화감독이 어떤 것을 다뤄야 하는가’라는 윤리적인 고민이기 때문이다. 이 고민은 어디에서 본 적이 있다. 바로 언론계 쪽에서 근무하는 분들이 한 번쯤 해볼 만한 고민이라고 느껴진다. 언론계 쪽에 종사하는 분이라면 주인공 파나히가 하는 고민을 따라갈 이유도 충분해 보인다. 당연히 언론사마다 다루는 소재란 것이 있어 파나히의 상황에 이입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대상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직업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책임감이 필요하다는 점은 영화감독과 언론인 모두 다 공감할 것이다.
먼 나라 이웃나라 시네필 편
영화에 대해 생각할 때 내가 느끼는 장점 중 하나는 다양한 세상에 대해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의 가치는 어마어마하다. 분명 글쓴이처럼 한국인이기 때문에 이란 사회에 생소할 관객분들 많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이란 민주화 운동에 대해 잘 몰랐다고 변명하고 싶다. 이 작품은 구조의 힘을 빌려 지금 현대의 이란이라는 나라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바쿠라우>나 <레미제라블>(2021) <성스러운 거미>처럼 영화가 가진 교양 함양의 힘을 믿는 분들이라면 이 <노 베어스>는 필관이다. 2024년이 되고 10일 만에 찾은 걸작이다.
-
- [SIWFF 데일리] 인간에서 인간까지
SYNOPSIS
다큐멘터리 촬영 감독 커스틴 존슨이 25년간의 촬영 경력 동안 포착해 낸 푸티지 영상을 직조하듯 풀어 낸다. 영상 제작자와 대상들 사이의 관계, 카메라의 객관성과 개입 사이의 긴장, 그리고 날것의 현실과 가공된 이야기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탐구하는 영화.
PROGRAM NOTE
감독으로서 영화는 곧 ‘이야기’로 정의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감독은 이야기 안에서 배제된 촬영 현장의 목소리에 대해 늘 아쉬움과 한계를 느끼고는 한다. 바로 이 점에서 영화 〈카메라를 든 사람〉은 무엇보다 예외적이며 뛰어난 작품이다. 이는 25년 동안 촬영감독으로 활동한 커스틴 존슨만이 가지는, 감독과는 다른 시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영화는 오랜 기간 촬영 현장에서 카메라를 통해 만난 사람과 감정을 주고받았던 순간을 엮어서 만든 커스틴 존슨만의 자서전이다. 마치 잘려진 천 조각들이 ‘퀼트’라는 하나의 예술품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본 듯하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 5년 만에 다시 찾은 보스니아의 한 가족과의 대화와 ‘작은 상영회’는 이야기에서 놓쳐버린 현장의 순간들이 어떻게 환생되고 의미화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다큐멘터리를 하다 보면 감독의 그릇만큼 세상이 보일 때가 많다. 현장에서 만난 이들에 대한 깊은 탐색과 교감이 쌓여 결국 자신의 아이들과 치매를 가진 어머니에게로 카메라가 향할 때, 어떻게 카메라가 한 개인에게 역사가 되어 성숙한 시선을 갖게 하는지, 또한 그것이 관객에게 어떠한 울림을 주는지, 이번 영화제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권우정]일전에 넷플릭스에서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주변에서 알음알음 추천을 받고, 왓챠피디아도 내가 4.1점을 줄 거라고 했으므로. 역시나 좋았다. 딕 존슨의 죽음을 다룬 페이크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딕 존슨의 딸이자, 다큐멘터리 촬영 감독으로 25년을 살아온 감독 커스틴 존슨의 작품이 상영된다고 해서,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첫 영화로 냉큼 골랐다. 그리고 역시나, 좋았다.
이 작품은 25년 동안 수많은 작품에 참여하면서 그가 촬영한 풋티지 영상을 모아모아 새로이 편집한 것이다. 커스틴 존슨 감독은 이것을 자신의 회고록처럼 여겨 달라고 했다. 타이틀이 떠오르기 직전 보이는 장면은 도로만이 펼쳐진 넓은 평원에 번개가 치는 순간과 우렁찬 천둥 소리가 포착되는 것, 그리고 관객인 나와 동시에 깜짝 놀란 숨을 들이켜는 촬영자의 소리. 기둥 뒤에 공간 있듯, 카메라 뒤에 인간 있음을 감추지 않는다.
굉장히 다양한 영상이 조각조각 모여 있다. 스레브레니차 집단 살해의 기억이 남아 있는 보스니아처럼 역사의 어떤 순간도 들어 있고, 복싱 경기를 준비하는 선수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담는 장면도 들어 있다. 복싱 코치는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가까이서 찍는 게 진리라고 말한다. 복싱도 촬영도 가까운 데서만 가할 수 있는 일격이 있는 것 같다. 이 영화는 그 가까운 촬영의 일격을 연타로 날리는 걸작이다.
얼핏 평이해 보이는 장소에서도 ‘흥미로운 요소’를 찾는 것이 카메라의 힘임을 느끼게 한다. 얼핏 단조로워 보이는 도시의 풍경에서, 벽의 포탄 자국이, 93-94년 사이에 사망한 사람들의 묘비가, 스레브레니차를 잊지 말라는 그라피티가, 카메라에 점점이 담기면 그곳은 더 이상 평이한 도시가 아니게 된다.
세계 곳곳, 각기 다른 세계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성실히 따르며, 카메라는 다양한 것을 담는다. 삶의 ‘흥미로운’, ‘독특한’ 이야기가 있는 단면마다 커스틴 존슨의 카메라가 있다. 그러나 그 다양한 조각조각들이 모인 곳, 소실점에 있는 것은 결국 인간이다. 바로 인간을 담기 위해 그의 카메라는 그토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유리창을 깨끗이 닦아 차창 너머로 찍을 수밖에 없는 나라들도 있다. 알 자지라 주요 인물들이 수감된 예멘의 감옥 앞이나 카불처럼 위험한 곳들이 있다. 그러나 거기서도 유리창을 닦는 손이 흥미롭게 담겼다고 말하는 ‘기술 전문가’인 동시에, 자신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잊지 않는 ‘예술가’가 있다.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의 익명성을 위해, 머뭇거리며 움직이는 손과 목소리만 담은 인터뷰 영상도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이 전해진다. 인터뷰의 가장 앞 단어를 건네주면서, 공감하고 경청한다. 카메라의 역할은 결코 응시에만 그치지 않는 것이다. 기술과 예술을 동원하여, 담고 전달하는 것이다.
알츠하이머를 앓는 어머니의 모습도, 집단 살해의 기억 이후에 살던 곳으로 돌아온 가족들이 거둔 알알이 보석 같은 열매도, 눈을 다쳤지만 똑똑한 소년으로만 보였던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증언도… 촬영자에게나 감상자에게나 뚜렷하게 각인되는 이런 영상들은, 카메라의 역할이 응시에만 그쳤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피가 흘렀던 역사의 기억들과, 그 자리들이 오늘날은 평화로워진 장면을 대조해서 보여주는 것도 카메라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편집한 손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영화의 보여주기는 사실 적극적인 말하기이다. 무수한 이들의 피가 흘렀던 초원에 오늘날 얼마나 햇살이 곱고 들꽃이 살랑거리고 있는지, 단지 고운 들판을 보여줄 뿐인데 왜 우리는 참담해지는지. 이 적극적인 말하기가 없다면, 다시 말해 기록의 행위가 없다면 우리 눈에 그저 예쁜 초원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그토록 거대한 기억도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기록하고 전달하는 한, 조각도 이야기가 된다.
커스틴 존슨의 작업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쩌면 이것이 팩트와 기록이 모여 역사가 되는 과정과도 비슷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각조각 모인 이야기들이 새로운 진실을 그려내고, 풋티지 영상이 모여 새로운 작품이 되는 과정이다.
영화는 이런 작업을 하는 사람들의 고민도 함께 담았다. 현장 프로듀서 겸 통역으로 보스니아에서 내내 동행한 이의 말처럼. 우리의 선택이지만, 더 오래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해소도 필요하다는 것을.
때로는 몰랐던 이야기 앞에서 눈물이 나기도 하고, 때로는 대답을 회피하는 인터뷰이에게 다른 주제로—이를 테면 옷 같은 얘기로— 말을 돌리기도 하는 커스틴 존슨의 모습을 보며… 전문가가 된다는 건 단순히 기존 하던 일에 노련해지는 일일 뿐만 아니라, 자기 하는 일 안에서 자기 감정을 정확하게 직면하는 일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흔히 전문가가 된다고 하면, 마치 감정은 무디게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감정을 잘 해소하고 정돈하는 것이 오히려 필요한 것 같다. 꼭 영화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배우나 소위 ‘감정 노동’으로 일컬어지는 일들이 아니어도, 우리는 인간이기에 대부분 감정을 사용하며 일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된다.
인간의 시선에서, 시선 끝의 인간까지. 다큐멘터리는 결국 그런 작업이 아닐까. 다큐멘터리뿐 아니라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일들도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의 경계를 넘어서서, 보여지지 않는 그 너머까지, 그 소실점에 있는 인간에까지 시선이 미친다면 그 사람이 어느 직군에 있든 전문가 소리를 들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때 나의 조각 모음은 어떤 회고록의 모양이 되어 있을까. 커스틴 존슨의 인생 thanks to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은 엔딩 크레디트가 쭉 올라가는 동안 생각했다. 나의 크레디트에 남기고 싶은 이름과 마음들을. 이 영화에서 보고 배운 아름다운 시선이 거기에도 한 자락 묻어나 있다면 참 좋겠다.
2023.08.25. 14:00-15:43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6관
2023.08.28. 19:30-21:13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8
-
-
- 댓글부대 - 밝은 화면속에서 활동하는 음지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재업로드)
-
*재업로드 된 영상입니다! :)
실력 있지만 허세 가득한 사회부 기자 ‘임상진’ 대기업 ‘만전’의 비리를 취재하지만 오보로 판명되며 정직당한다. “기자님 기사 오보 아니었어요. 다 저희들이 만든 수법이에요” 그러던 어느 날, 의문의 제보자가 찾아온다. 자신을 온라인 여론 조작을 주도하는 댓글부대, 일명 ‘팀알렙’의 멤버라고 소개한 제보자는 돈만 주면 진실도 거짓으로, 거짓도 진실로 만들 수 있다고 하는데… “불법은 아니에요. 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제보, 어디부터 진실이고, 어디까지 거짓인가?
-
- Apple TV+ <Dr.브레인> 공식 예고편
영화 '밀정', '달콤한 인생', '장화, 홍련'의 감독이자 뛰어난 독창성으로 인정받은 김지운 연출, ‘기생충’의 이선균 주연. 타인의 기억을 통해 진실을 파헤치는 뇌 과학자의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푹 빠져보세요.
-
- 영화 <슈퍼노바> 티저 예고편
여기, 우리의 별이 머물렀다.
오랜 시간 서로의 구세주이자 사랑하는 연인,
그리고 최고의 친구로 지내온 ‘샘’(콜린 퍼스)과 ‘터스커’(스탠리 투치).
기억을 잃어가는 ‘터스커’와 그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샘’은
마지막 여행을 떠나게 된다.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여행이 끝나갈수록,
그들의 감정은 점차 고조되는데…
차마 사라지지 못하고 우주를 떠돌 마음의 파편,
그곳에 가장 빛나는 사랑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