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4-11-28 12:36:56
히든페이스 | 에로스 뒤에 숨은 소유욕을 파헤치다
<히든페이스>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상 편지만 남겨두고 갑자기 자취를 감춘 첼리스트 '수연'(조여정). 수연의 약혼남이자 그녀가 속한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성진'(송승헌)은 그녀 자리를 비워둔 채로 고통 속에서 기다린다. 하지만 수연의 잠적이 길어지자 그는 그녀의 후배 첼리스트 '미주'(박지현)를 대체자로 뽑는다. 매일 같은 연습 중 서로에게 강한 끌림을 느낀 성진과 미주는 비 오는 밤, 성진과 수연의 신혼집에서 서로의 욕망에 휩쓸린다.

에로스의 두 얼굴, 성애와 소유욕
그리스 신화를 수놓은 신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있다. 바로 사랑의 신, 에로스(큐피드)다. 비록 12주신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그를 간과할 수는 없다. 에로스의 황금 화살이 아니었다면 파리스와 헬레네가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고, 트로이 전쟁도 없었을 테니. 그의 기원은 여러 전승이 전해진다. 일반적으로는 아프로디테와 아레스 사이의 아들로 알려졌지만, 때로는 카오스만큼 오래된 고대의 신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플라톤의 '향연'은 또 다른 기원을 소개한다. 그에 따르면 에로스는 풍요의 남신 포로스와 결핍의 여신 페니아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머니를 닮아 늘 결핍을 느끼기에 아버지의 풍요로움을 갈구했다. 즉, 자기 자신의 풍요로움을 위해 상대를 동경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인 셈이다. 그런데 이는 사랑과 탐욕이 한 몸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특히 자기 자신을 위해 사랑에 빠지는 순간, 상대를 가지려는 소유욕은 뒤따라오기 마련이니까.
<인간중독> 이후 10년 만에 공개된 김대우 감독의 신작 <히든 페이스>는 에로스의 또 다른 얼굴, 소유욕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세 주인공의 욕망이라는 관점에서 수연의 잠적을 조명하며 그들의 위계가 전복되는 과정을 긴장감 가득하게 풀어낸다. 그 과정에서 에로스가 소유욕에 의해 추동된다는 사실도 감각적으로 드러난다. 그렇기에 <히든페이스>의 관능미는 퍽 인상적이다. 마지막 순간 매력을 일부 잃었는데도 불구하고.

탁월한 에로스
<히든페이스>는 크게 세 시점으로 나뉜다. 수연이 성진을 떠나겠다는 영상만 남기고 잠적한 현재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가 하나다. 이 내용은 성진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3개월 전 시점도 있다. 수연과 성진이 독일에서 한국으로 입국한 순간부터의 이야기가 수연의 관점에서 진행된다. 마지막으로는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 되는 7개월 전의 이야기가 있고, 수연의 결혼 소식을 들은 미주의 시점에서 펼쳐진다.
현재 시점의 내용만 놓고 보면 <히든페이스>는 평범하고 에로틱한 불륜 이야기일 뿐이다. 수연은 갑자기 잠적하고, 성진은 그녀를 대신할 오케스트라 단원 미주에게 매력을 느끼고 그녀에게 조금씩 빠져든다. 수많은 우연을 핑계 삼아서. 미주의 차가 고장 났다며, 비가 았다며, 술에 취했다며, 대리 기사가 늦었다며. 여러 공통점도 발견한다. 알고 보니 둘 다 자수성가했고, 와인 맛도 커피 맛도 모르고, 넓은 집이 불편하다고.
김대우 감독의 절묘한 연출 덕분에 성진의 일탈에서는 불륜 이외의 함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성진과 미주의 눈이 맞는 순간이 대표적이다. 성진이 미주의 연주 녹음을 듣는 순간, 그전까지는 고정된 구도를 유지하던 카메라가 갑자기 흔들린다. 마치 미주라는 돌멩이 하나가 성진의 마음에 떨어져서 파동이 퍼져나가듯이.
전작인 <인간중독>과 겹치는 연출도 야릇한 분위기를 정점으로 이끈다. 성진이 차 뒷좌석에 앉아 대리 기사를 기다리면서 미주를 바라볼 때, 그가 오케스트라 연습 중 미주에게 반한 순간이 교차된다. 이 부분은 <인간중독>에서 회의 중인 김진평(송승헌)이 종가흔(임지연)과의 밀회를 떠올리는 장면을 똑 닮았다.

에로스라는 가면을 벗다
하지만 수연의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히든페이스>의 에로스는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그녀의 소유욕이 밝혀질 때, 다른 두 주인공이 감추고 있던 욕망도 비로소 구체화되기 때문. 수연은 미주와 성진 모두를 갖고자 한다. 수연과 미주는 고등학생이던 시절부터 연인이었다. 다만 서열은 분명했다. 미주는 수연의 노예였다. 첼로 레슨 선생님 집에 숨겨진 창고에서 미주가 자기 발목에 스스로 족쇄를 채운 뒤 수연에게 열쇠를 맡길 정도로.
그와 동시에 수연은 성진도 온전히 손아귀에 넣으려고 한다. 한국에 입국한 뒤 성진의 애정이 식었다고 느껴지자, 자기가 실종된 것처럼 상황을 꾸며서 성진을 시험하려고 한다. 예전 선생님 집을 리모델링해서 신혼집을 꾸민 점에 착안했다. 미주와 밀회를 나누던 창고에 숨은 뒤 성진의 반응을 지켜보려는 것. 흥미롭게도, 수연의 욕망이 가시화되자 성진과 미주의 행동 역시 소유욕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읽힌다.
일례로 성진은 지휘자이지만, 오케스트라 단장이 예비 장모인 관계로 그의 음악 취향과 선호도는 무시당하고, 오케스트라도 온전히 자기 뜻대로 이끌지 못한다. 신혼집도, 결혼 생활도 온전히 그의 소유는 아니다. 신혼집은 수연의 것이고, 집안 사정의 차이 때문에 그는 예비 장모 앞에서 당당할 수 없으니까. 반면에 미주는 그 누구보다, 무엇보다도 성진이 손쉽게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다. 자기 오케스트라 단원일 뿐만 아니라 고아니까.

소유와 지배의 역전
하지만 7개월 전 미주의 시점에서 보면 성진과 미주의 관계, 더 나아가 미주와 수연의 관계는 다시 한번 전복된다. 수연은 미주에게 일방적으로 성진과의 결혼을 알린다. 수연의 새 집 리모델링 공사도 맡아서 도와주던 미주는 이에 복수를 다짐한다. 그 일환으로써 미주는 성진을 포함해 수연이 소유한 모든 것을 빼앗으려 든다. 즉, 성진이 미주를 가진 것이 아니라, 실상은 미주가 성진을 소유한 셈이다.
특히 미주는 성진을 차지하는 모습을 일부러 밀실에 갇힌 수연에게 보여준다. 그 순간 그들의 주종관계는 완벽히 역전된다. <히든페이스>에서 밀실은 소유당하는 사람의 공간이다. 안방 거울 뒤에서 그저 밖의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고,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외부인의 호의에 기대야만 하니까. <히든페이스>는 밀실의 주인이 계속 바뀌는 스릴을 통해 에로스의 숨은 모습을 드러내고, 단순히 야한 영화라는 편견도 깨버린다.

예상 못한 씁쓸함
수연과 미주가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세 주인공의 에로스는 씁쓸한 지점도 있다. 밀실은 지배당하는 사람, 소유의 대상이 된 사람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여전히 용인받지 못하는 동성애 그 자체를 상징하기 때문. 단적으로, 수연과 미주는 교수님의 시야 밖이라고 생각했던 창고에서 사랑을 나눠야 했던 것만 보더라도 그 함의를 알 수 있다.
미주와 성진에 대한 소유욕도 수연이 레즈비언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됐다. 수연은 미주에게 결혼 사실을 알리면서 성진과의 결혼을 '진짜 삶'이라고 표현한다. 성진을 진정으로 사랑하지는 않지만, 그와의 결혼은 사회에서 용인하는 정상적인 형태의 가정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것. 미주와의 관계와 달리. 만약 동성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회였다면 수연의 독단적인 결단도, 그로 인한 미주의 복수도 불필요했을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수연이 성진과의 결혼 생활도 유지하고, 미주도 지배하며 그들 간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결말은 씁쓸하다. 정상화한 듯 보이는 그 상태가 애초에 정상이 아니기 때문. 동성애를 이성애와 같은 사랑의 한 형태로 대할 수 없고, 동성애인이라는 관계가 사회적 지위와 평판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밀실에 가둬야 한다는 의미니까. 이는 아직도 관용적이지 못한 사회상을 곱씹을 수 있는, 예상외의 깊이가 느껴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스스로 갑옷을 벗다
사실 <히든 페이스>는 다소 양식적인 영화다. 수연과 성진의 신혼집의 구조나 밀실의 존재 등은 사랑의 틀을 쓴 소유욕의 위계를 보여주려고 애초에 설계한 공간이다. 뒤집어 말해 <히든 페이스>는 영화적 허용에 기대는 작품이다. 특정한 의도를 지니고 특정한 소재를 다루려는 작품이기에 설령 몇몇 현실적이지 않거나 개연성이 부족한 지점이 있더라도 능구렁이처럼 넘어가 달라고 말하는 영화인 셈이다.
후반부의 급전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여지가 있다. 일례로 클라이맥스 직후에 성진과 미주의 태도는 급작스럽게 변한다. 성진과 예비 장모의 갈등, 경찰 수사 등도 유야무야 된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 의도적인 생략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영화의 의도를 고려하면 소유관계를 시작점으로 복구하면서 스토리의 형식을 갖추고, 성소수자의 현실을 반영하는 메시지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히든페이스>가 스스로 영화적 허용을 깨는 것. 밀실의 기원에 관한 설명이 등장하는 순간, 그 설정의 부자연스러움은 더 강조된다. 그전까지는 흐린 눈을 하던 사건이나 관계에 대해서도 같은 수준의 설명이 필요해지니까. 이는 인물 간의 관계나 사건을 급히 마무리하고 그 과정을 건너뛸수록 후반부의 빈 공간이 더 크게 느껴지는 이유다. 결국 <히든페이스>는 판만 벌여놓고 정리를 회피하는 모양새로 끝나 버린다.
후반부의 맥 빠지는 전개는 다른 장점을 희석시키기에 더욱 아쉽다. <히든 페이스>는 청소년 관람 불가 작품답게 도발적인 설정과 소재를 인간 본성과 사회상에 대한 성찰까지 확장시키는 영화다. 여배우의 과감한 노출이나 높은 수위의 연출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고, 야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다. 이러한 장점이 묻히고, 평범한 관능애적 영화로 격하시키는 인상을 주고 말았기에 마무리는 더욱 아쉽다.

Acceptable 무난함
본능적이라서 공감하고 특수해서 안타까운 에로스의 향연
Relative contents
-
- 눈빛으로 전하는 감사의 순환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지난 97회 아카데미 시상식을 비롯해 각종 영화제에서 장편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한 영화 <플로우>가 지난 19일 수요일 관객들을 찾아오게 되었다. <플로우>는 고양이X골든리트리버X카피바라X여우원숭이X뱀잡이수리라는 독특한 라인업을 캐치프레즈 삼아 홍보해온만큼 개봉 전부터 그 내용에 있어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바 역시 있다. 그렇게 영화관에서 만난 어느 고양이의 특별한 여정은 기대 이상으로 더 깊은 메세지를 내포하고 있었다.
인간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더 이상 그들이 살아있지는 않은 어느 자연. 우리들의 주인공 ‘고양이’는 영역동물답게 자신의 영역에서 때로는 물고기를 잡고, 때로는 개들에게 쫓기며 일상을 살아간다. 드문드문 보여지는 고양이 관련 상징물들은 이곳에 체류했을지 모를 인간에게 고양이가 존재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듯 보여지나 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과 공생하는 동물들 만이 삶을 이어 나가고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건은 본격적으로 해수면이 차오르며 벌어진다. 이미 오래전 떠난 이들을 기다리는 것인지 아님 그저 자신의 삶을살아가고 있었는지 모를 고양이의 모험은 물에 잠길 위험을 몇 번이나 거듭한 끝에 저 멀리서 떠내려온 배 한 척에서부터 비롯된다.
하지만 이미 배에는 낯선 존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관객은 하고 많은 동물 중 왜 고양이가 그 주인공 되었는지 짐작이 가능해진다. 경계심과 겁이 많고 영역에서 생활하는 동물, 물을 꺼리고 무엇이든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동물이기에 대사를 비롯한 장치가 굳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고양이라는 주인공에게 모험은 그 자체로 시련이 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물과 친근하지 않은 고양이의 특성을 십분보이며 그 모험이 쉽지 않을 것을 예고하기도 한다. 무던하지만 의젓하게 키를 잡는 카피바라, 물건을 수집하는 여우원숭이 그리고 다시합류하게 된 골든 리트리버까지 이 만남은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찾아온 홍수라는 재해에 운명적으로 찾아오지만 뱀잡이수리와의 만남 이후부터 이는 필연이 되기 시작한다.
누군가에게 구해진다는 것은 다른 말로 삶을 계속해서 이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동물의 삶은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단순하다. 생존아니면 놀이이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몸부림치면서 동시에 자신들이 처하게 된 상황에 비관하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거울에, 낮잠에, 공에, 반짝거리는 것에 눈을 빛내며 순간을 즐기기도 한다. 그런 고양이에게 찾아온 첫번째 구원의 순간은 리트리버로부터이나 아직은 이를 인식하지도, 특유의 관계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하지만 두번째 구원의 순간부터 고양이는 이를 인식하기시작한다. 거대한 몸집으로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고래는 물 속으로 가라앉던 고양이를 수면 위로 꺼내줌으로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게해준다. 단순 우연이었을지는 모르나 고양이는 그러한 도움을 점차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세번째, 뱀잡이수리가 고양이를 구하기 위해무리의 우두머리에게 대든 결과로 날개가 뜯겨 나가고 무리로부터 방출 당한 것은 자신을 구해준 행위 그 이상으로 여겨진다. 뱀잡이수리는 더 이상 날지 못해 그들과 함께 배에 오르지만 고양이는 그렇게 한 가지 경험을 체화하게 된다. 누군가에 의해 삶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말이다. 이는 후반부 고양이의 변화, 즉 성장과도 이어진다. 속절없이 물 밑으로 가라앉기만 하던 고양이는 이젠 처음 보는 물고기로 가득한 물 속에 뛰어들어 사냥감을 낚기도, 이를 뱀잡이수리와 나누기도 한다. 더 나아가 사이가 딱히 좋지만은 않았던 고향의 개들을 구해주자 뱀잡이수리를 설득하기도 하고 위기의 순간에서 카피바라를 구해주기도 끝에는 자신들과 달리 지상에서는 살 수 없는 고래를 다시 물로 돌려 줄 순 없지만 그를 기억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는 고양이에게만 찾아온 것이 아니다. 특유의 남다른 친화성을 가진 카피바라를 제외하고 모든 이들은 동료 내지는 생존의연대를 깨닫는다. 여우 원숭이들 사이에서는 보물과도 같이 취급되는 거울을 포기하고 고양이를 따라 나서기도 하고 골든 리트리버는 동족들보다 여정을 함께 했던 이들 곁에 남기도 한다. 집단을 이루게 되며 이들은 도움에 대한 개념을 깨닫는다. 이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인간이 애초에 공동체를 형성하고 서로 돕게 되며 점차 개념들을 깨우쳐 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그런 인간보다 더욱이 특별한 이유는 뱀잡이수리 무리와 마찬가지로 같은 종족만으로 꾸려진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들을하고 우연, 아니 이제는 필연에 의해 가족이 되어감에서부터 비롯한다.
뱀잡이수리와 고양이의 이별 장면은 해당 영화에 있어 남다른 지점이 되어준다. 인연을 맺은 상대와의 이별, 그리고 여전히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나와 소임을 다했다 여기는 이와의 차이는 그렇게 빚어진다. 뱀잡이수리와 고양이는 무언가를 공유했지만 가야 할 길은 결국달랐다. 마치 일종의 목적지로 보였던 높은 봉우리는 사실 목적지가 아니라 그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한 이별의 무대였다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영원한 목적지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굴곡만이 존재할 뿐, 그렇게 뱀잡이수리는 만남과 이별 통해 고양이에게 가장 값진 선물을 준 뒤 멋지게 날아오른다.
밀물과 썰물이 광범위하게 반복되는 이 행성 안에서 서로가 도우며 그 삶을 이어 나갔기에 특별했던 것처럼 영화도 아주 다정한 방식으로 고래의 끝만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쿠키영상에서 등장한 바와 같이 분명 지금도 어떤 고양이는 배 위에서 용감히 모험을 이어 나가고있을 것이고 또 어느 고래는 마음껏 바다를 누비며 거대한 자연의 순환 속에서 살아 나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 자연 앞에 순응하고 살아간다는 것앞에서 아마 인간이 이룩한 문명은 아주 작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
- [DMZ Docs] 어디에나 사람이 있다
빅 데이터의 축 The Axis of Big Data
감독: 저우타오 Zhou Tao
러닝타임: 58분
시놉시스: 〈빅 데이터의 축〉은 중국 귀주성 산악 지대에 위치한 대규모 데이터 센터의 주변 환경을 탐험한다. 이 영화는 데이터 센터 자체를 전면에 내세우는 대신, 이 시설을 품고 있는 산악 지형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영화는 풍경의 본질을 포착하며, 데이터 센터 인근과 그 너머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생활상을 보여준다.
*
4차 산업혁명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매일 인공지능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말을 듣곤 한다. 특이점에 도달했다, 학습하지 않은 내용을 스스로 깨달아 새로운 능력을 함양했다, 인간은 인공지능에게 지배될 것인가, 기타 등등.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이 인공지능이라면, 그 재료는 아마 데이터가 아닐까 싶다. 인공지능은 방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학습한다. 빅 데이터는 그 이름처럼 어마어마한 데이터일진대, 그 데이터를 보관하는 데이터 센터 역시 엄청난 전력을 소비한다.
2022년 카카오 데이터 센터 화재 사건을 떠올려 보면, 데이터가 인간을 얼마나 지배하는지를 알 수 있다. 고작 카카오가 잠시 멈추었을 뿐인데 큰일이라도 난 듯 호들갑스러웠다.
그러면서 동시에 생각하게 된다.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난 지금, 누군가는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최첨단을 달리는가 하면 또 누군가는 태어나서 스마트폰이라고는 만져본 적이 없다. 이는 증기기관이 발명되었는데도 걸어서 또는 가축을 타고 이동했던 사람들이나, 전기 시스템이 만들어져도 촛불을 켜고 살던 사람들이나, 컴퓨터의 전원도 켜 본 적 없는 사람이 존재함과 마찬가지다.
가끔은 그 괴리가 이상하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세대와 아예 그것을 만져본 적도 없는 세대가 공존한다는 사실이.
저우타오가 카메라에 담은 세계도 비슷하다. 데이터 센터 주변의 풍경을 섬세하게 탐방한다. 데이터 센터의 풍경으로 시작한 시선은 데이터 센터 밖을 향한다. 카메라는 가치 판단이나 평가 없이 그저 귀주성의 사람과 자연, 동물을 따라 횡단한다.
나무토막과 포대를 든 노인, 등이 굽은 노인, 허수아비, 일하는 노인, 사진을 찍는 관광객, 담배를 피우는 남자, 우비를 입고 사진을 찍는 관광객 가족, 잡초를 태우는 남자, 물가의 닭, 물고기, 흑염소....... 패치워크처럼 기워진 풍경이다.
푸른 농촌의 풍경과 희뿌연 안개, 그 속에서 점멸하는 데이터 센터의 불빛이 기이한 이질감을 만들어낸다.
챗GPT 등 인공지능은 사람도 아니면서 사람의 시늉을 한다. 물어보는 말에 재깍 대답하고, 답이 풀리지 않는 문제의 답을 알려 준다. 이제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그림을 그려 달라 하면 그림을, 노래를 만들어 달라 하면 노래를 만든다. 모르는 문제도 사람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다.
그러나 과연 기계만의 일일까. 모든 것의 뒤에는 사람이 있다. 챗GPT의 데이터를 걸러내는 작업은 케냐의 노동자가 시간당 2달러도 받지 못하고 처리했다. 최첨단 데이터 센터가 필요한 줄은 알지만, 그 데이터 센터가 건설된 주변에 마을이 있다는 사실은 간과한다.
우리가 누리는 혜택은 어쩌면 누군가를 착취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너무도 쉽게 잊힌다.
이번 DMZ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좋았던 부분은, 비극장 상영 프로그램이었다. <빅 데이터의 축>은 극장 상영도 했지만, 상영관이 아닌 곳에서도 볼 수 있었다. <빅 데이터의 축> 역시 레이킨스몰 2층의 전시공간에서 상시상영되어 오며가며 관람하게끔 설치되었다.
다큐멘터리가 어떠한 서사나 의미를 갖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어떤 지점에서의 균열, 일상적 풍경에서의 낯설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지점에서부터 사고하는 것은 인간의 일이다.
*
상영일정
9/28(토) 17:30-18:28
9/30(월) 14:00-14:58
그 외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기간(9/26-10/2) 동안 레이킨스몰 2층 마리나갤러리 연속 상영
-
- 길복순 (2023)
* <길복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길복순 (2023)
감독: 변성현
출연: 전도연, 설경구, 김시아, 이솜, 구교환, 이연
장르: 액션, 스릴러, 느와르
공개일: 2023.03.31
상영시간: 137분
'길복순(전도연)'은 중학생 딸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자 동시에 살인청부업체 'MK Ent'의 에이스 킬러다. 여느 엄마들처럼 평범하게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고, 학부모 모임에 나가 아이들의 학업에 대한 담소를 나누는 여성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를 얕잡아 봤다가는 큰코다친다. 3만원 주고 산 도끼 하나로 칼을 든 일본 야쿠자와 일대일 맞다이를 뜰 수 있는 실력자에 주어진 '작품(살인)'은 반드시 성사시키는 냉혹함을 지닌 프로 청부살인업자니까. 하지만 찔러서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그녀에게도 어쩔 수 없는 인간적인 면모가 있다. 바로 하나뿐인 딸, '재영(김시아)'을 대할 때면 도저히 수가 읽히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어렵다. "사람 죽이는 건 심플해. 애 키우는 거에 비하면."이라고 '복순'이 직접 말할 정도니까.
단지 질풍노도의 사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건만 딸 '재영'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 간단한 대화를 나누기도 버겁고, 마음의 문을 닫은 딸은 쉽사리 방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이러한 딸의 변화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던 천하의 킬러 '복순'의 마음을 흔들고,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스스로를 이끈다. 늘 그렇듯 영리하게 문제 해결을 위한 수를 찾아내는 '복순'이지만 한 번 꼬인 운명은 고달프고 귀찮은 일의 연속으로 이어진다.
한국의 액션 느와르 영화는 개인적으로 가장 선호하지 않는 장르에 가깝다. 소위 조폭·깡패 영화라고 불리는 전형적인 타입의 한국 액션물들은 대부분 내용들이 예상 가능한 대로 흘러가고, 지나치게 자극적이기만 하며 등장하는 배우들 역시 익숙한 얼굴들이 많아 도통 끌리지 않았다. 그런 내게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라는 작품은 이같은 장르에 관해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깨부순 작품이었다. 분명 조폭이나 살인 따위와 같은 뻔한 소재들이 쉼없이 범람하는 줄거리였지만 주인공들의 관계에 멜로적 색채를 더하고 서사를 탄탄하게 쌓아 스테레오타입을 뒤집는 전개로 상당한 몰입을 불러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한국 느와르 영화에 대한 반감이 줄어들었고,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되었으니 여러모로 내게 큰 영향을 준 작품이었다. 이 때문에 '변성현' 감독의 신작 <길복순>에도 기대를 걸어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그의 페르소나 '설경구'와 최고의 여배우 '전도연'이 주인공으로 출연한다니 그의 세련된 터치를 만나 세 사람이 어떠한 시너지를 보여줄지 개봉 전부터 궁금증이 크게 증폭됐었다.
하지만 <길복순>은 기대만큼 짙은 인상을 남길만한 작품은 아니었다. 이전 작품들에 비해 '변성현' 감독의 장점과 단점이 모두 크게 두드러졌고, 그에 따른 호불호도 더욱 크게 갈릴 것이라 느꼈다. 우선 '변성현' 감독 특유의 스타일리시한 연출, 그리고 색감과 촬영 로케이션을 감각적으로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이 탁월하게 발휘됐다. 사실 조폭·청부살인 류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배경들은 대개 틀에 박힌 공간들인데, <길복순>에 등장하는 공간들은 대체로 새롭고 아름답다. 화초들의 싱그러움과 차가운 대리석 인테리어가 '길복순'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듯한 그의 자택, 근대식으로 지어진 서양의 건축물이 떠오르는 '설경구'의 클래식한 사무실, 하물며 떡볶이집과 국수가게까지 냉기 가득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장면들이 하나같이 예쁘다. 미술과 소품에 굉장한 공을 들였음이 느껴졌고, 시각적으로 디테일한 요소에 열광하는 사람들이라면 더욱이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을 것이다.
작품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는 단연 주인공 '전도연'이다. 감독은 <길복순>의 개봉 전부터 '전도연'의 광팬임을 고백해 왔다. 실제로 '복순'이라는 캐릭터는 배우이자 엄마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전도연'과 닮은 부분이 많을 정도로 작품에 그의 영향력이 많이 들어갔다. '전도연'이 유능한 베테랑 배우인 덕도 있겠지만, 감독의 무한한 애정이 들어갔기 때문인지 그는 원톱 주연으로서 대단한 활약을 펼친다. 액션신에서의 디테일은 부족했을지 몰라도, 냉혹하고 스피디한 나이프 액션신을 끌고 가는 카리스마가 압도적이며 특유의 나긋나긋한 화법은 모든 것에 통달한 A급 킬러의 여유를 발산하는데 제격이다. '전도연에 의한, 전도연을 위한'이라는 표현이 적격할 정도로 엄청난 존재감을 보여주는 동시에 '전도연'을 보기 위해서라도 <길복순>은 꼭 감상해야 하는 작품이라는 의의를 남긴다.
주연의 대활약, 아름다운 미장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에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 <길복순>은 시종일관 킬러 '길복순'의 실력을 과시하고, 그의 눈부신 활약상만을 비춘다. 물론 '길복순'은 살인청부업자와 엄마 사이에서 이중생활을 하는 입체성을 지닌 캐릭터이지만 대부분의 캐릭터가 그를 돋보이게 해주는 장치로서만 활용된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변성현 감독'과 세 번째 호흡을 맞춘 '설경구'는 특히 이번 작품에서 쓰임을 제대로 알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한 포지션을 담당하며 '구교환'과 '이솜'의 역할도 이들의 역량을 십분 보여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작품은 연기 변신에 도전한 '전도연'만으로도 충분히 볼 가치가 있는 영화이지만, 이는 곧 '전도연'이 아니라면 볼 이유가 없다는 뜻으로도 받아들여진다.
다양한 기법으로 액션신을 표현하고자 한 감독의 시도도 눈에 띈다. 특히 '복순'이 상대의 수를 미리 읽으며 수싸움을 하는 장면을 수 차례 활용하는데, 이는 미국 코믹스나 해외 액션 영화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러한 연출의 활용 빈도가 높다 보니 개인적으로는 장면이 난잡해 보이고, 긴박하게 흘러가야 할 구간들이 지루해져 거슬린다는 인상을 크게 받았다. 그래도 국수가게에서의 잔혹한 액션신을 미국 B급 액션영화처럼 유쾌하게 연출한 것, '복순'과 '영지'의 일대일 대치 장면에서 템포에 불규칙한 변화를 준 것은 매력적이었다. 한국 액션영화에 없을 법한 작법을 사용하는데 거리낌이 없다는 점이 '변성현 감독'의 최대 강점 중 하나일 것이다.
요약하자면, 장르성을 돋보이게 하는 데는 출중했으나 내용의 긴밀성이 부족했다. 결국 '길복순'이 모든 위기를 홀로 헤쳐 나간 뒤 제손으로 모두를 죽이고, 딸과 함께 해피엔딩을 맞는다는 것은 개연성이 떨어지는 것을 넘어 유치하고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며, 마치 히어로 액션영화나 애니메이션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이는 장르성에 출중했다는 방증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긴장감은 다소 떨어지더라도 '길복순'이라는 킬러가 가차없이 사람들을 쓰러뜨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분명한 쾌감과 매혹을 일으킨다. 물론 이와 같은 감상을 느낄 수 있는 데는 배우 '전도연'이 가진 아우라와 연륜이 결정적이었겠지만. '전도연', 그리고 '길복순'을 위해 감독이 엄청난 애정과 욕심을 쏟았다는 게 여실히 드러나지만 배우로서 '전도연'의 도전 의식을 불태우는 횃불을 제공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남기지는 못했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 popofilm -
-
- 영화 웰컴투 동막골 | 다시보는 추천영화
영화 웰컴투 동막골을 아시나요?!
"꽃을 꽂으면" 돌+아이로 분류되는 순수한
시골마을에서 펼쳐지는 연합작전이 시작된다!
"뱀이 깨물면 마이! 아포~"라는 명대사가 아직도 회자가 되면서!
수류탄으로 팝콘을 만드는 순수한 영화!
지금 봐도 설레고 재미있는 영화 "웰컴투 동막골" 결말까지 볼게요~
"1950년, 지금은 전쟁 중...?"
기본 정보
장르 : 드라마, 전쟁, 시대극, 코미디, 액션
감독 : 박광현
각본 : 장진
출연진 : 정재영, 신하균, 강혜정, 임하룡, 서재경, 류덕환
개봉일 : 2005년 08월 04일
평점 : 8.89
스트리밍 : tvN , NETFLIX, 왓챠, 웨이브
기획 의도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한곳에 모인 그들.
1950년 11월,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그때...
태백산맥 줄기를 타고 함백산 절벽들 속에 자리 잡은 마을, 동막골
이곳에 추락한 미 전투기 한 대.
목숨을 걸고 사수하고 있었던 그곳, 동막골.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세 사람. (국군, 인민군, 연합군.)
총을 본 적도 없는 동막골 사람들 앞에서 수류탄, 총, 철모, 무전기, 이들이 가지고 있던
특수 장비들은 아무런 힘도 못쓰는 신기한 물건에 불과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세람은 목숨까지 걸고 동막골을 지키려고 한 것일까?.
여담
영화 웰컴투 동막골은 6.25가 일어났을 때
강원도 여량이라는 동네는 정말 전쟁이 끝날 때 가지 전쟁이 일어났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종종 예능 같은 곳에서 봐도 정말 오지이긴 하다)
실제 "동막"이라는 지명은 있지만
영화 웰컴투 동막골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한다.
영화의 하이라이트에서 나오는 수류탄이 옥수수 창고가 터지며
옥수수가 팝콘으로 변하는 장면을 예전 스펀지에서 실제 실험을 해봤는데,
결과는 수류탄이 옥수수와 만나면 그냥 타버린다는 결론이 나왔다.
(스펀지... 정말 대단해)
후기 및 결말
영화 웰컴투 동막골 결말을 살펴보자면...
부상당했던 외국인 스미스 대위를 구조하기 위한 공수부대의 파견과 더불어
무차별 폭격이 결정된다.
동막골과 먼 곳에 방공호를 만들어 연합군 전투기와 전투를 벌여
전투 기기를 격추하는데 성공하지만, 이후 다른 전투기들이 급습하면서
살아남아있던 주인공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을 허망하게 바라보며 전사한다.
동막골의 순수한 사람들은 산 너머의 폭발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지켜보며
눈에 덮인 총과 방탄모 위에 여섯 마리의 나비가 날아가는 것을 보여주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정말 어렸을 때 봤던 영화 웰컴투 동막골, 정말 우연한 기회로 다시 봤는데도
여전히 재미있게 감동이 그대로 밀려온다.
"뱀에 물리면 마이 아포"
"내레 꽃꼽았습네다"
"하늘에서 팝콘이 떨어지는 장면"
정말 무수한 명대사와 강렬한 장면을 남겼던 "웰컴투 동막골"
안 보셨다면 이 영화 추천드립니다! 정말 재미있거든요~
한줄평 : 띵작 영화는 언제 봐도 띵작인 이유가 있다.
-
-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모성에 관해
- 케빈은 왜 그런 선택을 하고 말았을까. 이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본대도 관객이 이를 정확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케빈과 어머니인 에바와의 유대감이 부족했다는 점 하나로 이 영화를 부족한 유대감이 만들어낸 파멸을 묘사해 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뭉스럽다. 보통 부모와 유대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파멸적이거나 극도로 공격적인 성향을 드러내지만은 않기 때문이겠다.그렇다면 이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 있나. 그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케빈에 대하여>를 거꾸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애초 영화는 이야기를 뒤집어 서사를 전개한다. 영화는 케빈의 어머니인 에바가 케빈을 낳기도 전, 즉 결혼 그 이전의 시간부터 현재 자신이 마주하는 현실의 순간까지를 계속해서 돌아보는 구조를 보여준다. 영화 속 서사로 봤을 때는 이 영화의 종반부에 모습을 드러내는 핵심적 사건이 가장 먼저 삽입되어야 한다는 시선을 거둘 수는 없다. 보통은 큰 줄기에서 시작해 곁가지를 뻗어 내는 구조가 많은 사람에게 익숙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재미있는 지점은 제목은 <케빈에 대하여>이지만 이 영화를 서술해 내는 주역이 케빈이 아니라 에바라는 점이다. 지극히 어머니의 시선에서 케빈과 그를 둘러싼 상황들을 전개한다. 이쯤에서 질문을 꺼내어볼 수 있다. 케빈의 시선에서 서사를 전개했다면 관객은 그의 심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지. 아마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케빈이 어렸을 때부터 보인, 어쩌면 이상행동이라 부를 수 있을 그런 행동들을 보이는 것을 대부분의 관객은 에바의 시선으로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결국은 어머니의 시선으로 보는 케빈으로 이 영화를 바라보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어머니의 시선으로 케빈을 생각하도록 한다. 에바는 이 영화 속에서 어떤 감정 상태를 보여주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크게는 영화 속 현재의 시점에서 ‘회상’하는 구조를 보인다는 점과 영화가 강조하는 ‘색’의 의미를 파악해 보아야 한다.
에바는 행복해 보일 수 없다. 남들과 같은 평범하거나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가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대뜸 그녀의 뺨을 후려칠 수 있다. 또는 그녀가 사는 집 외관과 승용차에 빨간색 페인트를 흩뿌려 버린다. 장을 보기라도 하는 날이 되면, 그녀가 사려고 담은 달걀 한 판을 모두 박살 내야 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그녀는 그렇게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에바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낙인과도 같은 화살들을 담담히 지고 나아가려고 한다.
어느 곳을 가든 자신을 감시하듯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는 집에 마구잡이로 뿌려진 붉은 페인트를 벗겨내려고 하는 것조차 감시하는 이들이 있다. 그 이유는 케빈이 그녀의 아들이라는 점일 것이다.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이 있다.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놔두는 것은 과연 옳은가?’ 그들이 케빈을 증오할 수는 있어도, 그 부모와 가족까지 증오하고 그들의 삶마저 모두 이 세상으로부터 들어내려고 하는 전복적 시도는 과연 정당한 것일까. 케빈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재활하게 됐지만 우연히 에바를 만났을 때 밝은 표정으로 먼저 인사를 건네는 한 소년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 케빈에게 해를 당했음에도 에바를 증오할 마음 없는 그 당사자와는 다른 태도를 보이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결국은 모성만이 남는다. 모성의 형태가 어떻다고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자식을 위하는 마음과 어떤 일이 있든 그를 이해하려 하는 마음 자체를 모성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의도치 않았지만 찾아온 케빈이라는 존재를 결국 낳았고, 후회했지만 결국 길렀다. 그 과정에서 여러 난관이 찾아왔지만, 에바는 포기를 선택하지는 않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신뢰를 저버리고 감옥에 수감된 케빈이지만 에바는 그를 이해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에바는 케빈에게 묻는다. 대체 왜 그랬으며, 무슨 생각이었느냐고. 그렇지만 케빈은 여전히 에바에게 명백한 답을 전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 영화가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아닐까.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아야 이 영화가 완성될 수 있다고. 그렇게 흐릿한 마음과 시선을 안았지만, 모성을 숨기지 않으며 에바는 살아간다. 모험가로서 책을 출판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지만 그 과거의 경험을 살려 여행사에 취직한다. 예전의 호화로운 저택은 더 이상 없지만 작은 주택에서 케빈을 다시 맞이하고자 한다. 이웃들이 자신에게 찍은 낙인을 지워내기 위해 조금씩 그 흔적들을 지워낸다. 영화는 에바를 주인공으로 선정함으로써 그렇게 ‘이해 불가능한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부모의 시선으로 서사를 읽게 한다. 그렇게 우리는 <케빈에 대하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모성에 관한 서사를 에워싸는 빨간색이 있다. 모험가이던 시절, 토마토 축제에 가서 자유를 만끽했던 순간의 빨강. 섣부른 판단으로 남편과 관계하고 아이를 가지게 됐던 순간 디지털시계가 시간을 알리던 그 빨강. 케빈이 에바의 개인 공간을 물감으로 더럽혔던 순간의 빨강. 그리고 케빈이 학교 친구들을 학살했던 그 순간을 목격한 에바를 감싼 빨강. 그 순간을 회상하고 모든 죄를 자신이 지고 살아가며 마주하는 모든 빨간색이 있다.
빨간색은 후회와 불안정한 과거에 대한 에바가 ‘속죄해야 할 것’들이다. 에바는 케빈을 낳은 것에 대해 후회했다. 후회는 계속해서 에바 자신을 칭칭 감아버린다. 후회에 둘러싸인 에바는 케빈이 일으킨 사건을 회상하면서 마치 자신이 그 화살을 맞고 죽는 것처럼 붉은빛 속에서 고통을 느끼기도 한다. 케빈에게는 그런 붉은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케빈은 후회하고 속죄하지 않기 때문일까. 모든 죄를 에바가 짊어지기로 선택했기 때문인 것일까.
결국 에바는 속죄하기를 택했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쏟아낸 혐오와 증오를 받아내고, 집과 자동차에 뿌려진 낙인과도 같은 페인트를 긁어내고 이내 파란색으로 그 흔적을 덮어낸다. 그 과정에서 케빈을 만나 그때를 이야기하는 것도 멈추지 않는다. 종반부에서 그 대화가 모습을 드러내지만, 결정적인 것은 여전히 에바는 이해하지 못하고 케빈은 말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말하고자 했던 것을 잊어버림으로써 그 일말의 여지마저 제거해 버린다. 그렇다고 에바는 케빈을 포기하지 않는다. 집의 한편에 있는 방을 과거 케빈의 방과 똑같이 꾸미고, 케빈의 옷을 다려 가지런히 캐비닛에 넣는다. 케빈이 어떤 행동을 하고 모습을 갖던, 에바는 있는 그대로 케빈을 볼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에바는 모성애가 강한 인물이다. 케빈에게 무관심했던 것은 에바가 그를 너무 사랑했기에 감싸지 못한 것이다. 사랑했기에 자신의 관심으로 그를 덮으려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집에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었지만 너무나 쉽게 망쳐버린 케빈의 흔적을 쉽게 뜯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런 에바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고 비난할 수 있다. 작 중에서 에바 자신마저도 그런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고 자기 자신을 ‘그 현장’으로 다시 소환시킨다. 그리고 고통스러워 한다. 케빈을 자식으로서 사랑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케빈이 영원히 에바가 납득하지 못할 행동을 이어간대도 에바는 그 자리에 서서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기다릴 것이다. 그것이 에바가 케빈을 ‘섣불리’ 낳았던 것에 대한 참회일 것이며 ‘서투르게’ 케빈을 교육했던 것에 대한 나름의 속죄다.
그러나 에바에게 그 속죄의 무게를 모두 짊어지게 하는 것이 옳은지는 고민해 봐야 할 지점이다. 사회에서 흔히 중범죄의 가족은 ‘연좌제’의 개념으로 낙인찍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이제는 고루한 개념이 돼 사라져 버린 그 연좌제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그들의 생각은 정말 납득 가능하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에바가 짊어질 수 있는 그 정도는 어느 정도라고 보아야 할까. <케빈에 대하여>는 미스터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끝없이 반복되는 미스터리를 다시 한번 전한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하겠느냐고. 그렇다면 생각해 볼 때다. 우리는 에바와 케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케빈이 악한이 된 것에 대해 에바에게 그 짐을 모두 짊어지게 할 것인가. 아니면 에바를 자유롭게 할 것인가.
-
- 죄책감과 균형을 깨부수는 서늘한 복수극
킬링 디어 (The Killing of a Sacred Deer, 2017)
개봉일 : 2018.07.12. (한국 기준)
감독 : 요르고스 란티모스
출연 : 콜린 파렐, 니콜 키드먼, 배리 케오간, 래피 캐시디, 서니 설직, 빌 캠프
죄책감과 균형을 깨부수는 서늘한 복수극
“선생님 가족도 죽어야 균형이 맞죠?” 뚝뚝하다 못해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눈빛을 가진 소년이 말한다. <킬링 디어>는 서로의 균형을 깨트리고 파괴하는, 차갑고 불쾌한 영화다. 깨진 균형을 다시 맞추기 위해 남아있는 것을 깨트리고, 또 깨트리는 파괴를 반복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를 보면 소리 없는 격렬한 파동이 느껴진다. 그의 영화는 차갑고 불편하고 딱딱하다. 하지만 그것이 가진 매력은 가히 강력해 영화를 본 후에도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만든 영화들은 나의 마음을 깨부수고 그 안에 깊숙이 침투한다. <킬링 디어>는 아주 천천히, 고요하게 나의 감정을 파먹고는 끝내 공허함만을 남겼다.
의외로 감정의 소모가 심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킬링 디어>를 볼까 말까 몇 달을 고민하던 찰나, <이터널스>가 개봉했고, 이를 통해 배리 케오간 배우의 얼굴을 제대로 보게 되었다. 상당히 독특한 느낌이었다.
앞서 <덩케르크>와 <그린 나이트>를 보면서 배리 케오간을 몇 번 만났음에도 핀 화이트헤드와 데브 파텔 배우에 눈길을 뺏겨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던 나의 시선을 탓하며, 이번엔 용기 있게 <킬링 디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차갑게 끓고 있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마주했다.
<킬링 디어>는 외과 의사 스티븐과 어느 날 그에게 불쑥 다가온 소년 마틴에 대한 이야기다. 처음부터 모든 걸 알려주지 않으며 미스터리하게 시작되는 이들의 사이는 점점 복잡하게 변화한다. 시간이 지나 궁금증의 실타래가 풀려갈수록 불편함이 쌓여간다. 시종일관 귀를 날카롭게 긁어대는 소리들과 깨져버리는 피아노, 팔 언저리를 박박 긁고 싶어지는 불협화음들의 향연이 가히 압권이다.
서서히 조여오는 무근거한 심판의 순간과 위협을 벗어나고 싶은 본능에 밀려 버려지는 죄책감. 죄책감과 인간성의 결여에서 오는 불쾌감. 한가득 늘어나는 문제들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며 마음이 앙상하게 말라가는 느낌을 받았다.
뜯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선 또 다른 피부를 뜯어내야 한다는 듯 거침없이 감정을 도려내는 소년 마틴의 앞에서 살기 위해 걷고, 빙빙 돌고, 또 기어가는 인물들의 모습이 강렬하게 뇌리에 박힌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다른 대표작, <더 랍스터>는 입문작에 해당할 정도겠다- 싶을 만큼 <킬링 디어>는 더 깊고, 불안하다. 눈으로 보기엔 완벽한 균형을 가졌음에도 말이다.
킬링 디어 시놉시스
성공한 외과 의사 스티븐과 그에게 다가온 소년 마틴. 미스터리한 그와 친밀해질수록 스티븐과 그의 아내의 이상적인 삶은 완벽하게 무너지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시발점을 알 수 없는 불쾌한 악몽
이건 악몽이다. 시발점을 알듯하면서도 정확히 정의할 수 없는 그런 악몽.
마틴의 아버지는 스티븐에게 수술을 받다 세상을 떠난다. 심장외과의인 스티븐은 음주 상태로 수술에 들어갔고, 수술에 실패한다. 스티븐이 음주 상태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운이 없었던 것인지 정확한 인과관계는 알 수 없으나 스티븐은 마틴에게 ‘아버지를 죽인’ 인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스티븐은 병원에 찾아오는 마틴을 앞에 두고 수술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둘러대고, 그의 앞에서 조금씩 쪼그라든다. 내가 아닌 다른 의사의 잘못으로 수술이 실패한 것이라는 죄의식 떠넘기기를 곁들이면서.
수술 실패라는 과오를 짊어진 스티븐은 마틴이 가하는 압박을 느끼며 극적인 선택의 기로로 걸어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죄책감 같은 사치스러운 감정을 하나 둘 내려놓는다.
복수를 선택한 마틴은 죄인의 오래된 손목시계를 받아들고서는 그의 자식들을 위한 작은 선물을 준비하고, 천천히 산책을 하듯 한 걸음씩 나아가며 죄를 청산하기 위한 높은 성전을 쌓는다. 16살 소년은 악의가 없는 민숭한 표정으로 다가와 문제가 가득한 자신의 가슴을 열어 보인다. 그 과정은 시종일관 불안해 보는 이를 신경질적으로 만들기 충분하다.
마침내 소년이 남자에게 스스로 과오를 청산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완벽한 균형을 이룬 가정을 깨트리라며 말도 안 되는 한 줌의 자비를 베푸는 순간. 불쾌감은 절정에 이른다. ‘이게 맞는 건가?’
스스로 균형을 맞추기 전까진 되찾을 수 없는 안정
“제 가족을 죽였으니 선생님 가족도 죽어야 균형이 맞죠?” 다리 마비와 거식증, 안구출혈, 그리고 사망까지. 마틴은 스티븐이 직접 가족 중 한 명을 죽이지 않는다면 이러한 비극이 차례로 일어나 결국엔 모두가 죽게 될 것이라 협박한다. 스티븐과 안나는 설마, 그럴 리가? 하는 불안감 반, 불신 반으로 선택을 미루다가 아이들이 쓰러지기 시작하자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게 된다. 안나는 결혼반지가 헐거워질 만큼 말라갔고, 스티븐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렇게 쭉 버틴다면 가족들이 모두 차례로 죽을게 뻔하지만 부모가 어떻게 살아있는 자식을 직접 쏠 수 있을까? 하지만 가족 모두를 구하려면 자식들 중 한 명을 죽여야 한다. 수학과 물리학을 잘하는 밥, 문학과 음악을 즐기는 킴.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각자의 삶을 살던 죄 없는 어린 아이들 중 한 명이 죽어야 한다.
“둘 중에서 골라야 한다면 누구를 고르시겠어요?” 이 질문에 흔쾌히 답할 수 있는 아버지가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분노와 죄책감의 딜레마 속에서 돌던 스티븐은 자신의 눈을 가려 죄책감을 외면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마틴은 이 과정을 철저히 즐겼을지도 모르겠다.
죽음과 그에 따른 복수. 그 사이에서 죄책감과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마틴의 아버지는 수술 중에 죽고, 피눈물을 흘리던 아들 밥은 스티븐의 총에 맞아 죽었다. 자신의 스파게티 먹는 모습이 아버지와 닮았다고 말하던 아들 마틴은 복수에 성공했다. 아버지처럼 심장 외과의가 되고 싶다던, 아버지를 닮고 싶다던 아들 밥은 아버지의 죄를 대신 사하는 희생양이 되어 죽었다.
밥의 죽음은 가족 모두를 구했지만 가족들 중 그 누구도 희생양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어머니인 안나는 극단적인 상황이 오자 누구든 죽여야 한다며 스티븐에게 책임을 떠넘겼고, 스티븐은 눈을 가리고 제자리를 돌며 자신이 쏘게 될 누군가에 대한 죄책감을 구겨버렸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돌다가 쏘게 된 것이니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고 변명하면서. 그리고 희생은 그렇게 잊혀진다.
만일 자명한 신이 존재한다면 누구를 벌하고 누구의 죄를 사하려나? 사실 잘 모르겠지만, 희생양에 대한 애처로운 마음만 명확히 남았다. 죽은 이도 분명한 죄도 희생양도 있는데 그 누구도 죄책감을 갖지 않는 이상한 원통 안에서 끝없이 돌고 돌며 불쾌감의 솜사탕이 만들어진다. 폭하고 찌르면 스르륵 갈라지는, 밀도가 높지 않은 아주 큰 솜사탕이.
-
-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리뷰/행복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
#찬실이는복도많지#강말금#독립영화
코로나 사태가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다들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영화는 제가 보고 올게요! 마스크 꼭 쓰고 다니세요~ 토요일엔 역사 컨텐츠가 올라갑니다. 참고로 엔딩곡 꼭 듣고 오세요!!
-
- ?씨나병의 영화정보 #4? ?외국 배우 내한이 궁금하다고?!?
?씨나병의 영화정보 #4? ⠀ ?네 번째 주제? ⠀ ?외국 배우 내한이 궁금하다고?!⠀
-
- 넷플릭스 <트렁크> 티저 예고편
호숫가에 떠오른 트렁크로 인해 밝혀지기 시작한 비밀스러운 결혼 서비스와 그 안에 놓인 두 남녀의 이상한 결혼 이야기 넷플릭스 시리즈 《트렁크》 11월 29일, 오직 넷플릭스에서
-
- 영화 <매미소리> 메인 예고편
여기 소리에 울고 웃는 부녀가 있다 매미소리만 들으면 곡소리를 내는 딸, '수남' 곡소리 나는 초상집만 다니면 신명이 나는 아버지, '덕배' 최악의 죽음을 맞이하려는 딸과 최고의 죽음을 찾으려는 아버지 진도의 어느 뜨거운 여름날 20년 만에 마주친 부녀의 듣그러운 불협화음 한 판이 울려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