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4-11-28 12:36:56
히든페이스 | 에로스 뒤에 숨은 소유욕을 파헤치다
<히든페이스>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상 편지만 남겨두고 갑자기 자취를 감춘 첼리스트 '수연'(조여정). 수연의 약혼남이자 그녀가 속한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성진'(송승헌)은 그녀 자리를 비워둔 채로 고통 속에서 기다린다. 하지만 수연의 잠적이 길어지자 그는 그녀의 후배 첼리스트 '미주'(박지현)를 대체자로 뽑는다. 매일 같은 연습 중 서로에게 강한 끌림을 느낀 성진과 미주는 비 오는 밤, 성진과 수연의 신혼집에서 서로의 욕망에 휩쓸린다.

에로스의 두 얼굴, 성애와 소유욕
그리스 신화를 수놓은 신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있다. 바로 사랑의 신, 에로스(큐피드)다. 비록 12주신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그를 간과할 수는 없다. 에로스의 황금 화살이 아니었다면 파리스와 헬레네가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고, 트로이 전쟁도 없었을 테니. 그의 기원은 여러 전승이 전해진다. 일반적으로는 아프로디테와 아레스 사이의 아들로 알려졌지만, 때로는 카오스만큼 오래된 고대의 신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플라톤의 '향연'은 또 다른 기원을 소개한다. 그에 따르면 에로스는 풍요의 남신 포로스와 결핍의 여신 페니아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머니를 닮아 늘 결핍을 느끼기에 아버지의 풍요로움을 갈구했다. 즉, 자기 자신의 풍요로움을 위해 상대를 동경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인 셈이다. 그런데 이는 사랑과 탐욕이 한 몸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특히 자기 자신을 위해 사랑에 빠지는 순간, 상대를 가지려는 소유욕은 뒤따라오기 마련이니까.
<인간중독> 이후 10년 만에 공개된 김대우 감독의 신작 <히든 페이스>는 에로스의 또 다른 얼굴, 소유욕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세 주인공의 욕망이라는 관점에서 수연의 잠적을 조명하며 그들의 위계가 전복되는 과정을 긴장감 가득하게 풀어낸다. 그 과정에서 에로스가 소유욕에 의해 추동된다는 사실도 감각적으로 드러난다. 그렇기에 <히든페이스>의 관능미는 퍽 인상적이다. 마지막 순간 매력을 일부 잃었는데도 불구하고.

탁월한 에로스
<히든페이스>는 크게 세 시점으로 나뉜다. 수연이 성진을 떠나겠다는 영상만 남기고 잠적한 현재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가 하나다. 이 내용은 성진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3개월 전 시점도 있다. 수연과 성진이 독일에서 한국으로 입국한 순간부터의 이야기가 수연의 관점에서 진행된다. 마지막으로는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 되는 7개월 전의 이야기가 있고, 수연의 결혼 소식을 들은 미주의 시점에서 펼쳐진다.
현재 시점의 내용만 놓고 보면 <히든페이스>는 평범하고 에로틱한 불륜 이야기일 뿐이다. 수연은 갑자기 잠적하고, 성진은 그녀를 대신할 오케스트라 단원 미주에게 매력을 느끼고 그녀에게 조금씩 빠져든다. 수많은 우연을 핑계 삼아서. 미주의 차가 고장 났다며, 비가 았다며, 술에 취했다며, 대리 기사가 늦었다며. 여러 공통점도 발견한다. 알고 보니 둘 다 자수성가했고, 와인 맛도 커피 맛도 모르고, 넓은 집이 불편하다고.
김대우 감독의 절묘한 연출 덕분에 성진의 일탈에서는 불륜 이외의 함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성진과 미주의 눈이 맞는 순간이 대표적이다. 성진이 미주의 연주 녹음을 듣는 순간, 그전까지는 고정된 구도를 유지하던 카메라가 갑자기 흔들린다. 마치 미주라는 돌멩이 하나가 성진의 마음에 떨어져서 파동이 퍼져나가듯이.
전작인 <인간중독>과 겹치는 연출도 야릇한 분위기를 정점으로 이끈다. 성진이 차 뒷좌석에 앉아 대리 기사를 기다리면서 미주를 바라볼 때, 그가 오케스트라 연습 중 미주에게 반한 순간이 교차된다. 이 부분은 <인간중독>에서 회의 중인 김진평(송승헌)이 종가흔(임지연)과의 밀회를 떠올리는 장면을 똑 닮았다.

에로스라는 가면을 벗다
하지만 수연의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히든페이스>의 에로스는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그녀의 소유욕이 밝혀질 때, 다른 두 주인공이 감추고 있던 욕망도 비로소 구체화되기 때문. 수연은 미주와 성진 모두를 갖고자 한다. 수연과 미주는 고등학생이던 시절부터 연인이었다. 다만 서열은 분명했다. 미주는 수연의 노예였다. 첼로 레슨 선생님 집에 숨겨진 창고에서 미주가 자기 발목에 스스로 족쇄를 채운 뒤 수연에게 열쇠를 맡길 정도로.
그와 동시에 수연은 성진도 온전히 손아귀에 넣으려고 한다. 한국에 입국한 뒤 성진의 애정이 식었다고 느껴지자, 자기가 실종된 것처럼 상황을 꾸며서 성진을 시험하려고 한다. 예전 선생님 집을 리모델링해서 신혼집을 꾸민 점에 착안했다. 미주와 밀회를 나누던 창고에 숨은 뒤 성진의 반응을 지켜보려는 것. 흥미롭게도, 수연의 욕망이 가시화되자 성진과 미주의 행동 역시 소유욕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읽힌다.
일례로 성진은 지휘자이지만, 오케스트라 단장이 예비 장모인 관계로 그의 음악 취향과 선호도는 무시당하고, 오케스트라도 온전히 자기 뜻대로 이끌지 못한다. 신혼집도, 결혼 생활도 온전히 그의 소유는 아니다. 신혼집은 수연의 것이고, 집안 사정의 차이 때문에 그는 예비 장모 앞에서 당당할 수 없으니까. 반면에 미주는 그 누구보다, 무엇보다도 성진이 손쉽게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다. 자기 오케스트라 단원일 뿐만 아니라 고아니까.

소유와 지배의 역전
하지만 7개월 전 미주의 시점에서 보면 성진과 미주의 관계, 더 나아가 미주와 수연의 관계는 다시 한번 전복된다. 수연은 미주에게 일방적으로 성진과의 결혼을 알린다. 수연의 새 집 리모델링 공사도 맡아서 도와주던 미주는 이에 복수를 다짐한다. 그 일환으로써 미주는 성진을 포함해 수연이 소유한 모든 것을 빼앗으려 든다. 즉, 성진이 미주를 가진 것이 아니라, 실상은 미주가 성진을 소유한 셈이다.
특히 미주는 성진을 차지하는 모습을 일부러 밀실에 갇힌 수연에게 보여준다. 그 순간 그들의 주종관계는 완벽히 역전된다. <히든페이스>에서 밀실은 소유당하는 사람의 공간이다. 안방 거울 뒤에서 그저 밖의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고,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외부인의 호의에 기대야만 하니까. <히든페이스>는 밀실의 주인이 계속 바뀌는 스릴을 통해 에로스의 숨은 모습을 드러내고, 단순히 야한 영화라는 편견도 깨버린다.

예상 못한 씁쓸함
수연과 미주가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세 주인공의 에로스는 씁쓸한 지점도 있다. 밀실은 지배당하는 사람, 소유의 대상이 된 사람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여전히 용인받지 못하는 동성애 그 자체를 상징하기 때문. 단적으로, 수연과 미주는 교수님의 시야 밖이라고 생각했던 창고에서 사랑을 나눠야 했던 것만 보더라도 그 함의를 알 수 있다.
미주와 성진에 대한 소유욕도 수연이 레즈비언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됐다. 수연은 미주에게 결혼 사실을 알리면서 성진과의 결혼을 '진짜 삶'이라고 표현한다. 성진을 진정으로 사랑하지는 않지만, 그와의 결혼은 사회에서 용인하는 정상적인 형태의 가정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것. 미주와의 관계와 달리. 만약 동성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회였다면 수연의 독단적인 결단도, 그로 인한 미주의 복수도 불필요했을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수연이 성진과의 결혼 생활도 유지하고, 미주도 지배하며 그들 간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결말은 씁쓸하다. 정상화한 듯 보이는 그 상태가 애초에 정상이 아니기 때문. 동성애를 이성애와 같은 사랑의 한 형태로 대할 수 없고, 동성애인이라는 관계가 사회적 지위와 평판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밀실에 가둬야 한다는 의미니까. 이는 아직도 관용적이지 못한 사회상을 곱씹을 수 있는, 예상외의 깊이가 느껴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스스로 갑옷을 벗다
사실 <히든 페이스>는 다소 양식적인 영화다. 수연과 성진의 신혼집의 구조나 밀실의 존재 등은 사랑의 틀을 쓴 소유욕의 위계를 보여주려고 애초에 설계한 공간이다. 뒤집어 말해 <히든 페이스>는 영화적 허용에 기대는 작품이다. 특정한 의도를 지니고 특정한 소재를 다루려는 작품이기에 설령 몇몇 현실적이지 않거나 개연성이 부족한 지점이 있더라도 능구렁이처럼 넘어가 달라고 말하는 영화인 셈이다.
후반부의 급전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여지가 있다. 일례로 클라이맥스 직후에 성진과 미주의 태도는 급작스럽게 변한다. 성진과 예비 장모의 갈등, 경찰 수사 등도 유야무야 된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 의도적인 생략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영화의 의도를 고려하면 소유관계를 시작점으로 복구하면서 스토리의 형식을 갖추고, 성소수자의 현실을 반영하는 메시지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히든페이스>가 스스로 영화적 허용을 깨는 것. 밀실의 기원에 관한 설명이 등장하는 순간, 그 설정의 부자연스러움은 더 강조된다. 그전까지는 흐린 눈을 하던 사건이나 관계에 대해서도 같은 수준의 설명이 필요해지니까. 이는 인물 간의 관계나 사건을 급히 마무리하고 그 과정을 건너뛸수록 후반부의 빈 공간이 더 크게 느껴지는 이유다. 결국 <히든페이스>는 판만 벌여놓고 정리를 회피하는 모양새로 끝나 버린다.
후반부의 맥 빠지는 전개는 다른 장점을 희석시키기에 더욱 아쉽다. <히든 페이스>는 청소년 관람 불가 작품답게 도발적인 설정과 소재를 인간 본성과 사회상에 대한 성찰까지 확장시키는 영화다. 여배우의 과감한 노출이나 높은 수위의 연출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고, 야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다. 이러한 장점이 묻히고, 평범한 관능애적 영화로 격하시키는 인상을 주고 말았기에 마무리는 더욱 아쉽다.

Acceptable 무난함
본능적이라서 공감하고 특수해서 안타까운 에로스의 향연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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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뤽 고다르 하고 싶은 대로
제목 <네 멋대로 해라>와 비슷하게 감독이 그 전에 본 고전 영화들과 다르게 기존 영화 문법을 깨트리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찍은 영화였다. 주인공도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영화의 흐름과 스토리도 어떻게 진행이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구성이었다. 영화의 컷들이 딱딱 끊기는 장면들이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다가 뒤로 갈 수록 장 뤽 고다르 만의 새로운 스타일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뉴 웨이브 영화라고 불려지는구나 깨달았다.
하지만 이런 점프컷이 너무 자주 나오고 뒤로 갈 수록 이 영화 속 스토리가 집중이 안되어서 나에게는 약간 지루하기도 하였다. 수업 때 보았던 영화들은 사회적인 의미가 있고, 대사가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면, 이 영화는 대사도 의식의 흐름대로 말을 하고, 개연성이 없다고 느껴져서 감독이 영화를 통해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미셸과 패트리샤가 호텔에 있는 장면은 ,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있고 대화를 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마지막 쯤 대사에서 각자의 얘기만 했다는 대사를 듣고 일부러 의도한 대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이 영화가 1960년대여서 미셸이란 캐릭터를 만들어도 좋은 작품이라고 칭송 받 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2021년의 시점에서 본 미셸 캐릭터는 자유분방함이 아닌, 허세가 있으 며, 여성을 외모와 성적인 존재로만 바라보는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여성의 치마를 들추거나 계속 여성의 외모 얘기, 잠자리 얘기를 해서 오히려 불쾌했던 캐릭터였고 굳이 필요한 장면 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주인공에 이입하는게 아니라 주인공의 불행을 더 바라면서 영화 를 보았다.
결말에서 미셸이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궁금했었다. 여성 캐릭터 패트리샤는 미셸이 자신의 몸을 만지면 똑같이 때려주고, 브래지어를 안하고, 남성을 신고를 했다. 고전 영화에서 단지 성녀,창녀로 쓰이던 여성 캐릭터가 이 영 화 속 에서는 행동하고 자신의 생각이 있는 여성으로 나온 점은 좋았다. 이 영화의 기법과 진행 방식은 기존의 영화와 다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영화로 자리매김했지만, 그 안의 스토리나 캐릭터들은 몰입하면서 보기 어려웠던 영화였다.
결말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다. 패트리샤의 대사와 표정이 좋았다. 패트리샤와 미셸이 이어지는 결말 로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미셸이 시키던 대로 하던 패트리샤가 미셸을 신고한다. 결 국 미셸은 총을 맞고 죽었지만, 패트리샤의 마지막 표정과 대사는 전혀 죄책감이나 미안함이 느껴지지 않아서 좋았다. 이 결말 이후 패트리샤의 삶은 사랑에 휘둘리는 삶이 아닌 진정한 자유를 누릴 것이다. 또 비도덕적이고 자유라는 면목하에 범법을 저지르고 다녔던 미셸이 죽음으로써 나에게는 오히려 통쾌한 결말을 맞이했다.
이런 스타일의 영화는 아직도 나에게는 어렵다. 개연성이 없고 틀에서 벗어난 영화는 나의 취향이 아니지만 , 이렇게 도전을 해보고 새로운기법을 창조하는 도전 정신은 예술 그리고 영화에 있어서 중요하고 그런 점에선 <네 멋대로 해라>가 가지는 상징성은 가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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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박스오피스를 한국 박스오피스를 견인한 영화
디즈니-마블의 액션 블록버스터 <블랙 위도우>가 개봉주 주말, 매출액 점유율 80.2%를 기록하며, 코로나 팬데믹 이후 국내 극장 최고 매출을 경신하였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KOBIS)에 따르면, <블랙 위도우>는 개봉일 당일에만 2,465개의 스크린에서 상영되어 1,975,849,660원의 매출을 기록하였는데요. 덕분에, 주말 3일 동안 국내 박스오피스는 전주 대비 60%가량 상승한 126억 원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함께, ‘디즈니’와 ‘여성 주연’ 영화라는 특성을 공유하는 <크루엘라> 역시 역주행 중에 있는데요. 개봉 2달 차에 접어든 ‘엠마 스톤’ 주연의 실사 영화 <크루엘라>는 꾸준한 관객몰이를 통해 누적 관객수 200만 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디즈니로 인하여 뜨거운 건 국내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7월 9일, 디즈니 자사 OTT 플랫폼인 ‘디즈니플러스’와 북미 극장에서 동시 공개된 <블랙 위도우>는 개봉 이후 3일 동안 북미 극장에서만 8,000만 달러(약 917억 원)을 쓸어 담으며 역시 팬데믹 이후 최고치를 경신하였는데요. 디즈니 플러스 측에서 처음 공개한 자료에 의하면, $30의 추가금을 지불하고 대여 가능한 <블랙 위도우>는 같은 기간 동안 6,000만 달러(약 688억 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하였으며, 지금까지 디즈니 플러스가 진출한 모든 나라에서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고 합니다.
나타샤 로마노프의 10년 만의 솔로무비 <블랙 위도우>는, 7월 11일 기준 총 46개국에서 7,800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하며 자국 박스오피스와 동등한 수치를 보였는데요. 북미와 세계 박스오피스 그리고 디즈니 플러스의 매출까지 합산하면 <블랙 위도우>는 개봉 첫 주에만 2억 1,500만 달러, 즉 2,466억 원이라는 매출을 기록한 것입니다. 게다가, 아직 ‘중국’ 시장에서 개봉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블랙 위도우>의 기록이 어디까지 상승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데요. 중국 시장은 ‘마블’ 영화가 가장 큰 수익을 내는 시장이기에 더 기대되는 바입니다.
이러한 성공과 함께, ‘디즈니’는 분노의 질주와 콰이어트 플레이스의 주연이 만난 <정글 크루즈>의 7월 30일 OTT&북미 동시 개봉을 앞두고 있고, 이후 개봉 예정인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의 경우는 디즈니플러스 공개에 앞서 45일간 극장 선공개를 택했는데요. 이 두 편의 성패가 11월 5일 개봉을 앞둔 마동석 출연의 <이터널스>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 밝혔습니다.
최근, 대작들의 개봉과 함께 매주 박스오피스 기록이 경신되고 있는 가운데
<블랙 위도우>가 어느 정도의 기록까지 낼 수 있을지 같이 지켜봐주시길 바라며,
<블랙 위도우>와 함께 영화로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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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브릭레이어>, 백인 남성의 시큼한 액션
나름 액션 영화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는 편이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스파이 영화를 찾고, 여름밤에는 누아르 영화가 끌린다. 와인이나 위스키 한 잔과 함께 마주하는 액션 영화는 서사와 대사로는 전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전한다.
물론 액션에도 다양한 스타일이 있고, 그만큼 관객의 취향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개인적으로 가장 선호는 스타일은 맷 데이먼의 ‘본’ 시리즈, 키아누 리브스의 ‘존 윅’ 시리즈다. 깔끔한 액션에 쓸모없는 대사는 많이 생략한, 그러면서도 영화 전반의 분위기에 스며드는 작품을 사랑한다. 그 외에도 많은 액션 영화를 선호하는 편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스파이 영화는 감사하게도 ‘007’,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를 보고 자란 세대로서 새로운 작품이 개봉했다면 영화관을 찾게 되는 장르다.
그런데 이번 <브릭레이어>는 백인 남성의 시큼한 땀 냄새가 그득한 영화였다.
* 씨네랩(cinelab) 크리에이터로서 참석한 시사회 후기입니다.
영화 <브릭레이어>의 한국 포스터와 주연 에런 엑하트 / (C) 한국 배급 ㈜플레이그램
<브릭레이어>는 은퇴한 CIA 첩보 요원이 다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소환되어 비밀리에 임무를 수행하는 스파이 액션 영화다. CIA 최고 요원들이 연이어 살해당하고, CIA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는다. 그 주범으로 추정되는 빅터 라덱을 처리하기 위해 전직 요원 스티브 베일(에런 엑하트)은 다시 작전에 소환되고, 현장 요원이 아닌 케이트 배넌(니나 도브레브)이 함께 투입된다. 과연 그들은 무사히 사건을 해결하고 평화를 지킬 수 있을까.
주연인 스티브 베일 역으로는 <다크 나이트>의 ‘하비 덴트’ 역으로 한국 관객에게도 잘 알려진 에런 엑하트가 출연한다. 그는 이번 영화를 통해 57세의 나이에도 뛰어난 액션을 보여준다. 케이트 배넌 역에는 드라마 ‘뱀파이어 다이어리’ 시리즈의 주연으로 잘 알려진 니나 도브레브가 출연했다.
(C) 한국 배급 ㈜플레이그램
서론이 길었지만 이번 영화에 대한 개인 감상을 공유하자면 <브릭레이어>는 말 그대로 백인 남성의 오래된 시큼한 땀 냄새가 그득한 영화다. 액션 장면은 일부 카메라의 구도에서 종종 흥미롭게 본 장면들이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다소 부산스러운 화면 전환이 액션의 매력보다는 긴박한 흐름에 좀 더 초점을 두고 있다. 또한 은밀히 침입하는 장면에서 주인공의 과한 호흡 소리는 장면에의 몰입을 깬다.
무엇보다 시대적으로 아쉬운 스토리가 영화 전반을 장악한다. ‘은퇴한 요원을 다시 불러들여 사건을 해결하는 스파이 영화’는 이제 너무 많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런 스토리는 다른 전개를 보여주거나 혹은 액션 그 자체로 승부해야 한다. 하지만 <브릭레이어>는 그러지 못했다. 여전히 러시아 마피아와 라틴계 악당이 등장하고, 벨트로 목을 조르는 진부한 액션이 연출된다. 영웅이 되고픈 감상적인 백인 남성 주인공의 모습도 진부하다. 감상적인 주인공의 모습을 뒷받침할 서사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 눈물을 빼려는 다소 당황스러운 연출이 보인다. 사이드킥으로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가 무능력하고 극히 보조적인 존재로 등장한 후 성장한다는 전개 또한 시대착오적이다.
정말 주인공을 의심하는 사이드킥 서사와 폭발을 뒤로 하고 걸어나오는 주인공 장면이 필요했나 (C) 한국 배급 ㈜플레이그램
영화에 대해 안 좋은 얘기는 참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세상에는 안 좋은 얘기가 너무 많기에, 거기에 내가 하나를 더해서 무엇하나’하는 생각 말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세상에는 너무 좋은 영화가 많은데, 안 좋은 영화를 한 편 더 볼 필요가 있나’하는 생각 또한 든다. 그리고 영화를 애정하는 한 사람으로서, 최소한 시대를 거슬러 가는 작품은 더는 만나고 싶지 않다.
영화 <브릭레이어> (2025)
감독 레니 할린
주연 에런 엑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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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린 너머 세계 속으로… 스웨덴] 한 여름의 힐링
스웨덴의 하지 축제 ‘미드소마’는 본래 가족과 이웃이 함께 모여 여름의 한가운데를 축하하는 밝고 따뜻한 축제다. 해가 가장 길고, 햇살이 풍성한 시기에 들판에 모여 춤을 추고, 꽃을 엮고, 음식을 나누는 모습은 스웨덴 하면 떠오르는 평화롭고 여유로운 이미지와도 잘 어울린다.
하지만 아리 애스터 감독의 영화 <미드소마>는 이런 실제 축제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비튼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자연 속, 오히려 그 안에서 벌어지는 기이하고 잔혹한 일들은 우리가 기대했던 북유럽의 정서와 충돌하며 강한 불편함을 만들어낸다. 환상처럼 맑은 풍경 안에서 무너져가는 인물들의 심리와, 그들이 목격하는 상식 밖의 의식들은 다양한 묘사와 메타포와 함께 묘한 긴장감을 더한다.
영화의 시작은 대니에게 닥친 끔찍한 비극으로 열린다. 여동생이 부모님의 방에 가스관을 연결해 부모님을 살해하고, 스스로도 가스를 흡입해 생을 마감한 것이다. 대니는 한순간에 가족 전체를 잃는다. 세상에 단 하나의 의지도, 이해자도 없는 상황. 그녀는 본능처럼 남자친구 크리스티안에게 매달리지만, 그는 이미 관계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고,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기댈 곳조차 없는 대니는 고립감 속에 갇혀 점점 더 외로워진다. 죽은 가족들의 환영은 그녀를 끊임없이 따라다니고, 마음은 늘 눈물로 가득 차 있다. 작은 자극에도 울음이 터질 듯한, 그런 상태로 대니는 간신히 일상을 버텨낸다.
그때, 크리스티안의 친구 펠레가 자신의 고향에서 열리는 축제, ‘미드소마’에 그들을 초대한다. 대니도 덜컥 따라나서게 된다. 그리고 도착한 그곳은 현실과는 전혀 다른 세계, 그들만의 규칙과 전통이 지배하는 마을이었다. 이곳은 이성이나 합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공간이다. 일정 나이가 되면 공동체를 위해 스스로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고, 때로는 제물을 바친다. 개인의 생명보다 공동체의 지속이 우선되는 사회. 개인이라는 주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하나의 톱니처럼 기능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놀랍게도, 대니는 이 기이한 마을에 점점 스며든다. 일행 중 유일하게 ‘선택’받으며, 마을의 축제의 여왕 ‘메이퀸’으로 추앙받는다. 처음엔 당황하고 두려워했지만, 그녀는 서서히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더 이상 버틸 힘이 없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로 돌아가 봐야 또 상처받고 외면당할 뿐이라면, 차라리 이 낯선 공동체 안에서 위안을 찾고 싶어졌던 건 아닐까.
그녀는 결국, 충격적인 장면을 통해 크리스티안에 대한 감정과 그간 쌓였던 울분을 폭발시킨다. 그리고 그 순간, 마을 사람들은 대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함께 울부짖는다. 그 울음은 그녀의 고통에 대한 진정한 공감이었을까? 아니면 단지 의식의 일부였을까?
<미드소마>에서 당혹스럽고, 기괴했던 장면이었다. 그 광경을 보며 “이래서 사람들이 사이비에 빠지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울음은 나에게 공허하게 느껴졌고, 진심이 담긴 공감이라기보단, 형식적인 흉내 같았다.
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대니는 어쩌면 그런 울음조차 내심 받고 싶었던 건 아닐까. 세상 밖에서조차 남자친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했던 대니. 그런 그녀에게는 ‘함께 울어주는 사람들’이 그저 형식일지언정 큰 위로였을 수 있다. 적어도 누군가는 나의 고통을 ‘보고 있다’는 느낌.
그래서일까?
난 대니의 마지막 웃음이 이상하리만치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영화 초반부터 대니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지, 얼마나 이해받고 싶었을지를 따라가다 보니, 그녀가 그토록 갈망하던 위로와 소속감을 이 낯선 공동체 안에서 얻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묘하게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물론 그 방식이 잔혹하고 기괴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현실에서조차 아무도 그녀의 고통을 진심으로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기에, 마을 사람들의 '함께 울어주는 행위'만으로도 대니에게는 그토록 간절한 공감이었을지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밝고, 하얗고, 꽃으로 가득찬 아름다운 영화의 비주얼은 그런 심리적 불안을 더 돋보이게 만든다. 잔혹한 장면들과 기괴한 의식들이 가득하지만, 끝없이 펼쳐진 초원, 화사한 햇살, 평화롭기까지 한 풍경. 마치 동화 속 마을 배경의 만남으로 공포영화로서 독특한 분위기를 선사한다. 오히려 대낮에 대놓고 보여지길 강조하고, 강요하기 때문에 <미드소마>만의묘하고 강렬한 분위기는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대니의 선택과 웃음이 완전한 해방인지, 혹은 또 다른 형태의 억압인지에 대해선 쉽게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공감받고 싶었던 순간들, 이해받지 못해 외로웠던 시간들, 그리고 어딘가에라도 속하고 싶었던 간절함.
<미드소마>는 그 모든 감정들을 환하게 빛나는 한낮의 태양 아래, 너무도 또렷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더 무섭고, 그래서 더 슬프다.
* 북유럽의 여름과 예쁜 꽃들로 가득찬 행복한 축제를 느끼고 싶다면 <미드소마>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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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상가들 / The Dreamers, 2003
인터넷 방송을 보다 보면, "나작스"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를 풀어보면, "나만의 작은 스트리머"로 흔히, '나만 알고 싶은 음악 혹은 가게'처럼 일맥상통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유명해지면 그만큼 나에게 쏟아진 관심이 덜해지는 것을 비꼬는 의미로도 활용되기도 하는데요.
이처럼 옛날 영화를 보는 느낌은 참으로 오묘합니다.
지금이야 유명한 배우들인데, 생각지도 못한 영화에 생각지도 못한 배역을 맡아 나타나니 신기할 따름이죠.
영화 <몽상가들>은 지금이야 모르는 사람이 없는 "에바 그린"의 데뷔작입니다.
워낙 나오는 영화들마다 인상들이 짙어 뭘 해도, "에바 그린"인데 이 영화는 이를 제외하더라도 평가가 좋더군요.
그래서, 보게 된 영화 <몽상가들>은 어떤 느낌을 남겼는지? - 한 번 감상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한창 시위로 열기가 뜨거운 1968년, 파리에 유학을 온 미국인 "매튜"는 그곳에서 쌍둥이 남매 "테오"와 "이사벨"을 만납니다.
서로의 취향이 맞았던 그들은 급속도로 친해지고, 같이 다니게 됩니다.
그리고 "매튜"는 "이사벨"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지만 이상하리만큼 "이사벨"은 "테오"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데요.
이에 세 남녀의 관계에도 급속도로 이상 조짐이 생기는데...제목부터 스포일러?
1. 진짜일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영화 <몽상가들>은 1968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시네마테크"라는 실존 사건을 가져온 영화입니다.
이는 즉슨, 역사적인 사건과 가상의 이야기를 덧붙인 "팩션"장르의 영화라는 것이죠.
이만해도 충분히 흥미로운 영화이겠지만, 영화 <몽상가들>로서는 이 실존하는 사건이 양날의 검일겁니다.
실존했던 사건을 가져와 관객들의 시선을 이끄는데 성공하나 문제는 결말도 이미, 예정되었기에 맥이 빠질 겁니다.
이에 영화 <몽상가들>은 해당 사건보다 캐릭터들의 관계와 이야기에 집중해 뒷이야기를 점점 궁금하게 만듭니다."팩션"은 진실일까, 거짓일까?
앞에서도 언급한 "팩션"은 진실을 뜻하는 "Fact"와 소설을 뜻하는 "Fiction"의 합성어입니다.
어찌 보면, 서로 상충되는 단어로 어울리지 않지만 영화 <몽상가들>은 이를 있을법한 이야기로 관객들을 설득시켜 나가는데요.
앞서 언급한 1968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시네마테크"라는 실존 사건을 크게 가져와 이에 있을법한 "매튜"와 쌍둥이 남매 "테오"와 "이사벨"이라는 캐릭터에 집약하는 것으로 말이죠.
그렇게, 시작한 <몽상가들>은 요즘 세대뿐만 아니라 앞으로 반복될 갈등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2. 반대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그동안 정치를 살펴보면 "보수"는 기성층, "진보"는 젊은 세대들이 선호하는 성향으로 생각하는데요.
이처럼 영화 <몽상가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극 중 쌍둥이 남매 "테오"와 "이사벨"의 아버지는 유명한 시인으로 등장하는데,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에 침묵만을 유지하니 "테오"는 이런 아버지를 비난합니다.
왜냐면, 자신은 시위를 통해서 목소리를 표출하니 그런 아버지와는 다르다는 것이죠.
이는 "이준익"감독이 연출한 <동주>의 "몽규"와도 크게 겹칩니다.
극 중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하려는 인물이나 온건적인 아버지 세대와 갈등이 있어 이와 반대로, 강경하게 나서는데요.근데, 네가 스스로 하는 건 있니?
다시 영화 <몽상가들>로 돌아와서, "테오"와 "이사벨"의 아버지는 아내와 함께 출장을 떠나게 됩니다.
이에 그들은 집이 비어있는 동안 자식들이 쓸 돈을 전하는데, 재밌는 건 이들이 이를 넙죽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다 쓰고도 모자랄 만큼 방탕한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그렇게, 아버지를 비난했는데 정작 아버지의 능력으로 살아가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인가요?
영화 <몽상가들>은 이미, 제목에서부터 관객들에게 말하고자는 바가 뚜렷한 영화입니다.
누구나 방구석에서는 그럴듯한 이상을 앞세우나 정작, 현실에는 한없이 위축되는 "몽상가들"의 실체를 고백하거든요.3. 이미, 예상된 결과로 간다.
1년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에 앞서 이전 대선은 사상 최초로 탄핵 정국에서 치러졌습니다.
이에 국민들은 반대되는 개념으로 투표를 했지만, 정작 받아들여진 인상은 색깔과 이념만 다른 똑같은 인상뿐입니다.
이처럼 영화 <몽상가들>은 그저, 아버지가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옳다는 "자기중심적 사고"에 갇힌 캐릭터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를 빗댄 건지 영화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캐릭터들이 갇혀있다는 인상을 끊임없이 줍니다.
해당 주택에서 크게 활동 반경이 벗어나지 않고, 시야는 언제나 영화가 상영되는 스크린에만 고정되었고 이들이 하는 행동들도 보았던 영화를 따라 하는 것에 국한되었으니 무엇을 보여주고 말하려는지를 아실 겁니다.무조건, 반대가 옳은 것은 아니에요.
그렇기에 영화는 더 파격적으로 나갑니다.
사회적인 미양을 해치는 행위로 느껴질법한 벌칙들을 제안하고, 이를 수행하여 우월감을 느끼는 장면은 누굴 지칭한 건지는 몰라도 쿡쿡 찔리게 되는데요.
이런 가운데, 영화 <몽상가들>은 "모택동"을 꺼내듭니다.
그리고 그에게 따라오는 단어로 "문화 대혁명"이 연상될 텐데, 이 표어가 상당히 재밌습니다. - "옛 것은 모조리 숙청하라. 문화, 교육, 정치, 가족 등 모든 것을."
과거의 역사를 지우고 앞으로 찬란한 미래를 채우겠다는 야심이 엿보이나 결과는 아시다시피, 한국을 비롯해 다른 나라들의 역사들을 탐내는 현재의 모습으로도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영화 <몽상가들>에 나오는 캐릭터들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미래를 추구하나 정작, 하고 있는 행동은 과거의 산물인 영화를 따라 하는 것이니까요.4. 각자의 판단에 따라서...
영화 <몽상가들>의 결말을 살펴보면, "테오"와 "이사벨"은 끝내 진압대에게 화염병을 던집니다.
그리고 "매튜"는 이들과 달리,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이에 "매튜"는 도망쳤고, "테오"와 "이사벨"은 자신의 의견을 실질적으로 표출함으로 대비적으로 보이나 사실은 그 반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미, 이전부터 이들의 모습을 본 "테오"와 "이사벨"의 부모가 그들을 떠납니다.
결국, 채워질 수 없는 간극의 차이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매튜"도 "테오"와 "이사벨"에게서 그랬을 겁니다.
이에 영화 <몽상가들>은 결말에서 옳고 그름과 같은 확답을 내려주지 않습니다. -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 각자의 판단에 맞게 선택했을 뿐이라고 그렇게 말할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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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MZ Docs] 어디에나 사람이 있다
빅 데이터의 축 The Axis of Big Data
감독: 저우타오 Zhou Tao
러닝타임: 58분
시놉시스: 〈빅 데이터의 축〉은 중국 귀주성 산악 지대에 위치한 대규모 데이터 센터의 주변 환경을 탐험한다. 이 영화는 데이터 센터 자체를 전면에 내세우는 대신, 이 시설을 품고 있는 산악 지형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영화는 풍경의 본질을 포착하며, 데이터 센터 인근과 그 너머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생활상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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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매일 인공지능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말을 듣곤 한다. 특이점에 도달했다, 학습하지 않은 내용을 스스로 깨달아 새로운 능력을 함양했다, 인간은 인공지능에게 지배될 것인가, 기타 등등.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이 인공지능이라면, 그 재료는 아마 데이터가 아닐까 싶다. 인공지능은 방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학습한다. 빅 데이터는 그 이름처럼 어마어마한 데이터일진대, 그 데이터를 보관하는 데이터 센터 역시 엄청난 전력을 소비한다.
2022년 카카오 데이터 센터 화재 사건을 떠올려 보면, 데이터가 인간을 얼마나 지배하는지를 알 수 있다. 고작 카카오가 잠시 멈추었을 뿐인데 큰일이라도 난 듯 호들갑스러웠다.
그러면서 동시에 생각하게 된다.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난 지금, 누군가는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최첨단을 달리는가 하면 또 누군가는 태어나서 스마트폰이라고는 만져본 적이 없다. 이는 증기기관이 발명되었는데도 걸어서 또는 가축을 타고 이동했던 사람들이나, 전기 시스템이 만들어져도 촛불을 켜고 살던 사람들이나, 컴퓨터의 전원도 켜 본 적 없는 사람이 존재함과 마찬가지다.
가끔은 그 괴리가 이상하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세대와 아예 그것을 만져본 적도 없는 세대가 공존한다는 사실이.
저우타오가 카메라에 담은 세계도 비슷하다. 데이터 센터 주변의 풍경을 섬세하게 탐방한다. 데이터 센터의 풍경으로 시작한 시선은 데이터 센터 밖을 향한다. 카메라는 가치 판단이나 평가 없이 그저 귀주성의 사람과 자연, 동물을 따라 횡단한다.
나무토막과 포대를 든 노인, 등이 굽은 노인, 허수아비, 일하는 노인, 사진을 찍는 관광객, 담배를 피우는 남자, 우비를 입고 사진을 찍는 관광객 가족, 잡초를 태우는 남자, 물가의 닭, 물고기, 흑염소....... 패치워크처럼 기워진 풍경이다.
푸른 농촌의 풍경과 희뿌연 안개, 그 속에서 점멸하는 데이터 센터의 불빛이 기이한 이질감을 만들어낸다.
챗GPT 등 인공지능은 사람도 아니면서 사람의 시늉을 한다. 물어보는 말에 재깍 대답하고, 답이 풀리지 않는 문제의 답을 알려 준다. 이제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그림을 그려 달라 하면 그림을, 노래를 만들어 달라 하면 노래를 만든다. 모르는 문제도 사람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다.
그러나 과연 기계만의 일일까. 모든 것의 뒤에는 사람이 있다. 챗GPT의 데이터를 걸러내는 작업은 케냐의 노동자가 시간당 2달러도 받지 못하고 처리했다. 최첨단 데이터 센터가 필요한 줄은 알지만, 그 데이터 센터가 건설된 주변에 마을이 있다는 사실은 간과한다.
우리가 누리는 혜택은 어쩌면 누군가를 착취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너무도 쉽게 잊힌다.
이번 DMZ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좋았던 부분은, 비극장 상영 프로그램이었다. <빅 데이터의 축>은 극장 상영도 했지만, 상영관이 아닌 곳에서도 볼 수 있었다. <빅 데이터의 축> 역시 레이킨스몰 2층의 전시공간에서 상시상영되어 오며가며 관람하게끔 설치되었다.
다큐멘터리가 어떠한 서사나 의미를 갖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어떤 지점에서의 균열, 일상적 풍경에서의 낯설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지점에서부터 사고하는 것은 인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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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일정
9/28(토) 17:30-18:28
9/30(월) 14:00-14:58
그 외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기간(9/26-10/2) 동안 레이킨스몰 2층 마리나갤러리 연속 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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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코멘터리 예고편
1957년 뉴욕, 라이벌 갱단인 제트와 샤크 사이의 갈등과 그 안에서 이뤄지는 '토니'와 '마리아'의 사랑을 그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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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굴뚝마을의 푸펠> 30초 예고편
새까만 연기로 뒤덮인 굴뚝마을에서는
1. 하늘을 올려다보지 말 것
2.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말 것
3. 함부로 믿지 말 것
별의 존재를 믿고 있는 외톨이 ‘루비치'와
쓰레기에서 태어난 ‘푸펠'
친구가 된 두 사람이
세상의 진실을 찾는 거대한 모험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