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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또비됴2024-12-18 22:30:43

신데렐라가 되고 싶었던 한 성 노동자의 꿈

<아노라> 리뷰

션 베이커는 한 우물을 파는 감독이다. <스타렛> <텐저린> <플로리다 프로젝트> 등 전작의 주요 인물들은 성 노동자들이다. 포장이 거의 없는 그들의 사실적인 삶을 통해 감독은 직업인으로서의 그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과 이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편협한 시선, 그리고 나아질 수 없는 현실의 무게다. <아노라> 또한 그동안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주제를 심도 있게 펼친다. 그리고 이전 보다 더 따뜻한 온기를 전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뉴욕의 한 클럽에서 스트리퍼로 일하는 애니(미키 매디슨)는 러시아 재벌 2세 이반(마크 아이델슈테인)을 손님으로 맞이한다. 이유는 그녀가 러시아어를 조금 할 줄 알기 때문.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반은 애니에게 빠져 비용을 지불하겠으니 일주일 동안 함께 지내자고 말한다. 달콤하고 화려한 일주일의 시간을 보낸 그녀는 이반을 통해 신분 상승을 꾀하려 하고, 이반은 부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그녀에게 청혼한다. 처음에 거절했지만,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 여긴 그녀는 이반과 함께 라스베이거스에서 식을 올린다. 하지만 이 결혼은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걸 이 둘만 몰랐던 것 같다. 아들의 결혼 소식을 들은 이반의 부모는 그 즉시 자신들의 하수인 3인방에게 연락하고, 이들은 이반의 집에 쳐들어간다. 갑작스러운 혼란과 더불어 러시아에서 부모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반은 그 즉시 줄행랑을 치고, 애니는 홀로 남겨진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와 3인방은 이반을 찾기 위해 함께 여정을 떠난다.

 

 

 

 


<아노라>는 한 성 노동자가 신분 상승을 꾀하려다 일장춘몽으로 끝나는 이야기다. 앞서 말했듯이 관객은 애니의 결혼생활이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애니와 이반이 만난 일자가 짧거나, 순간 달콤한 감정에 빠져 그릇된 선택을 했다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녀의 이름 자체가 거짓이기 때문이다.

제목이기도 한 아노라는 애니의 진짜 이름이다. 미국에서 돈을 벌기 위해 애니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그녀는 자신의 이름처럼 클럽에 오는 남자들에게 거짓된 환상을 선물한다. 자신의 본 모습을 잊은 채 판타지를 선물하는 그녀는 애초에 사람들과 진득한 관계를 이어 나갈 수 없다. 피상적으로 이반과의 관계를 지속하며 그를 통해 신분 상승이란 욕망을 투영한 그녀는 사랑을 통한 관계보단 제도를 통한 관계에 집중한다. 초반부 애니의 모습과 눈빛을 보면 그 욕망이 그득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는 애니가 잠시 잊고 지냈던 자신의 이름을 찾고 관계성을 회복하는 여정처럼 보인다. 솜사탕 같은 초반부를 지나 진흙탕 싸움이 나는 후반부로 갈수록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해야 하는 이반과의 공허한 관계를 돌아보는 그녀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사회적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짓된 삶을 살아갔던 자신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과 ‘빛’이라는 의미까지 되새긴다.

 

 

 

 

 

 

<아노라>가 특별한 건 이민자의 삶, 디아스포라 관점에서 이민자 3세인 애니와 하수인 3인방의 삶을 비춘다는 점이다. 이들은 고향이 아닌 타국에서 살면서 온갖 일들을 겪는다. 몸은 미국에 있고, 미국인처럼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노력하지만, 정작 현실은 러시아에 묶여 있다. 특히 하수인 3인방 중 형제인 토로스(카렌 카라굴리안)와 가닉(바체 토브마시얀)은 이반의 부모라는 족쇄에 묶이며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다. 아무리 미국인처럼 행동하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걸 보여주는 듯한 느낌이다. 오로지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먼 발취에서 이들의 우스꽝스러운 부조리함을 보는 이민자 3세 이고르(유리 보리소프)만이 정상적으로 보이고, 애니를 진심으로 대하는 유일한 인물로 그려진다.

 

감독은 성 노동자로서 받는 불합리함을 꼬집는 것도 잊지 않는다. 후반부 신분과 직업 때문에 애니는 자신의 목소리를 점점 잃어간다. 러시아 부호인 이반의 부모, 하수인 토로스와 가닉은 애니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무시해 버린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 상위 계층의 행태와 어떻게든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발악하는 하위 계층 간의 첨예한 대립은 영화의 뷰 포인트. 후반부 이 영화가 시끄럽고 번잡스러운 블랙 코미디 양상을 띠는 것은 흥미롭게 다가온다.

 

 

 

 

 

 

미키 매디슨의 연기를 빼놓을 수 없다. 영화 자체가 다큐와 흡사할 정도로 사실적이고, 객관화되어 있어 각 인물에 감정 이입을 하기가 쉽지는 않은데, 이 장벽을 허물고 끝내 관객의 마음을 동하게 만드는 건 그녀의 연기 덕분이다. 미키 매디슨은 애니와 아노라의 모습으로 판타지와 현실을 오가며, 극의 중심을 잡고 관객의 손을 계속 잡고 다닌다. 한 번 잡은 손을 뿌리치지 못하도록 달콤한 미소와 공허한 눈빛, 때로는 생떼를 부리며 관객을 이리저리 데리고 다닌 후, 마지막 눈물로 방점을 찍는다. 이고르 역을 맡은 유리 보리소프 역시 애니의 본모습을 인정하고 배려하며 그녀를 변화시키는 중책을 잘 소화한다. <6번칸>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의 연기가 우연이 아님을 증명한다.

 

<아노라>의 백미는 마지막 장면이다. 이고르의 낡은 자동차 안에서 벌어지는 애니의 모습, 진정 가슴을 울리는 감정을 토로하면서 자신도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럼에도 자신을 인정하고 품어주는 사람과 비좁지만 안정된 공간 안에서 누리는 온기를 마다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오랜 여운을 남긴다. 그녀의 진심 어린 눈물이 빛나는 순간, 우리는 그제야 애니가 아닌 제목 그대로 아노라를 만난다. 그리고 이고르처럼 그녀를 끌어안아 줄 것이다. 희망에 찬 온기를 전하기 위해서~

 

 

 

사진 제공: 유니버셜 픽쳐스 

 

 

 

평점: 4.0 / 5.0
한줄평: ‘귀여운 여인’이 아니라 ‘빛나는 여인’

작성자 . 또또비됴

출처 . https://brunch.co.kr/@zzack0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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