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12-20 16:05:40
끝내주는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방법 [2]
예비 홈프로텍트들 모여라!

이번 크리스마스 집콕하며 지내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접니다.
크리스마스에 홈프로텍터로 지낼 동지들을 위해 틀어두기만 해도 재미있는 영화들을 준비했습니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따뜻한 이불에서 영화 보며 끝내주게 즐겨보아요!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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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백으로 물드는 사랑, 영화 <로마>
- 로마 (Roma, 2018)
제작 : 멕시코, 드라마 │ 감독 : 알폰소 쿠아론
출연 : 얄리차 아파리시오(클레오), 마리나 데 타비라(소피아)
등급 : 15세 관람가 │ 러닝타임 : 135분뛰어난 색감 구현이 가능한 컬러영화 시대에 흑백영화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흑백영화인 <로마>를 보았을 때, 색을 볼 수 없으니 왠지 답답할 것 같다는 의구심이 들었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영화가 끝날 때까지 단 한차례도 답답함 같은 건 느끼지 못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흑백판으로 다시 개봉된 바 있고, 이준익 감독의 <동주>와 <자산어보>는 아예 흑백으로 제작되었다. 이에 대해 두 감독은 비슷한 이야길 한다. 봉준호 감독은 “색이 없으면 텍스쳐에 더 집중할 수 있다”라고 했으며, 이준익 감독 역시 “현란한 컬러를 배제하면 물체나 인물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형태가 더욱 뚜렷하게 전달된다”라고 말한다. <로마> 역시 그러했다. 이 놀라운 흑백영화가 다시 컬러판으로 재상영한다고 하면 이제는 왠지 배신감이 들 것 같을 정도다.
<로마>는 우리가 아는 이탈리아의 수도, 그 로마가 아니다. 멕시코시티에 위치한 동명의 작은 지역을 가리킨다. 그곳은 멕시코 출신의 감독 ‘알폰소 쿠아론’이 자란 곳으로, 영화는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의 멕시코, 즉 알폰소 쿠아론의 어린 시절이 담긴 자전적 이야기이다.
감독의 어린 시절에는 두 명의 여인이 있었다. 자신을 낳고 기른 엄마 ‘소피아’. 그리고 엄마 못지않게 자신을 사랑으로 보살폈던 여인 ‘클레오’. 중산층에서 태어난 그의 집에는 입주 가정부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극 중의 ‘클레오’라는 멕시코 여성이다.
가정부 클레오가 집을 이리저리 치우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네 명의 아이들과 엄마 아빠 할머니, 그리고 분명히 그들이 고용한 고용인이지만 어쩐지 가족처럼 친밀해 보이는 클레오까지. 화목해 보이는 이 중산층이 그려질 때만 해도 영화는 따스하기만 했다.
어느 날 아빠는 해외로 출장을 떠나게 되는데, 엄마 소피아가 떠나는 아빠의 등을 움켜잡고 울먹이는 게 왠지 심상치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길로 아빠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아빠에게 새 연인이 생겼고, 그래서 다시는 이 가족을 보러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우리 관객들은 알 수 있었는데, 천진한 아이들은 미처 이 상황을 모른다. 그 모습이 너무도 마음 아팠다.
그 무렵 가정부 클레오는 만나던 남자의 아이를 갖는다. 그러나 비겁한 남자는 이 사실을 알고 자취를 감추었다. 영화관 앞에 앉아 도망간 남자를 기다리는 클레오의 모습은 얼마 전 소피아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마찬가지로 그 남자도 돌아올 일은 없겠지. 온기가 맴돌던 집안에 남겨진 두 명의 여자. 과연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때는 1970년대다. 가장이던 남편이 떠난 후 네 명의 아이를 홀로 책임져야 하는 그 시절 여성의 삶은 너무도 막막하다. 내 뱃속의 애를 부인하고 내뺀 그놈 앞에 유전자 검사결과지를 뿌리며 인생을 조져주겠다는 용기도 쉬이 내기 힘들던 시절이다. 소피아는 양육비도 주지 않는 남편의 부재를 해결하기 위해 일을 구하고, 클레오는 비록 아빠는 없지만 뱃속의 아이를 낳을 생각으로 지낸다. 두 여성의 삶이 그 암흑 같던 시절에 얼마나 버거웠을지는 감히 헤아리기 힘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다행으로, 그 돌풍 속에서도 아이들만큼은 아버지의 부재를 크게 실감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 이유는 당연히도, 아버지의 자리를 메우는 두 여성의 눈부신 애정이 있었기 때문. 관객들은 알고 있었다. 그녀들만큼은 이 아이들, 이 집을 떠나지 않을 거란 걸. ‘부모와 아이들’로 구성되어있던 한 가족은, 그렇게 점차 ‘두 엄마(소피아와 클레오)와 아이들’이라는 새로운 가족형태로 자리 잡아가고, 고용주-고용인 관계였던 소피아와 클레오의 관계도 여성 간의 연대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아이들의 아버지가 자신의 물건을 챙기러 집에 들르기로 한 날, 가족은 여행을 떠난다. 물론 여기서의 가족은 엄마 소피아와 가정부 클레오 그리고 아이들이다. 제법 단단해진 엄마 소피아는 저녁을 먹으며 아이들에게, 이제 아빠는 오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아이들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말. “아빠가 더는 우리를 안 사랑하세요?” 아니, 많이 사랑하시지. “그럼 언제 볼 수 있어요?” 그건 엄마도 몰라.
경제적 지원마저 끊은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야 했을 아이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당시 쿠아론 감독은 고작 열 살이었다고 한다.)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왜 돌아오지 않는지, 넷 씩이나 자식을 낳아놓고도 왜 돈을 보내주지 못하는지, 아이들도 소피아도 나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런 비정한 남자를 대신해 그 옆에 앉아 아이들의 밥을 먹이는 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클레오다.
여행의 마지막 날. 아이들은 다소 파도가 거세 보이는 바다에서 수영을 한다. 위험하니 깊은 곳에 들어가지 말라는 말은 영 듣지 않으며. 결국 아이들은 파도에 휩쓸려 바다에 빠지고, 이를 지켜보던 클레오가 놀라 성큼성큼 바다로 들어간다. (클레오는 이 여행을 오기 전, 멕시코 독재정부를 타도하는 시위대가 정부의 총격에 맞아 학살당하는 것을 보고 유산을 했다.) 그녀는, 죽을 뻔한 아이를 건져내고는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그때 달려온 엄마 소피아는 그녀와 아이들을 부둥켜안으며 이렇게 말한다. “클레오, 우린 너를 사랑한단다. 정말로 사랑한단다.” 유산한 클레오의 곁에 있던 것도, 그 남자가 아닌 고용주 소피아와 그 가족들이었다.
그야말로 눈물이 주룩주룩. 지켜주겠다고 맹세했던 이 두 여인의 남자들은 어디 있는가. 바닷가에서 두 여인과 아이들이 오랫동안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을 보며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그들은 여지없는 분명한 가족이었다. 텍스트에 집중할 수 있다는 건 이런 것일까. 이 영화에는 색감뿐 아니라 음악도 없는데, 영화의 매력적인 두 요소가 빠졌다는 게 정말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사랑이라 표현하긴 진부하고, 가족애라 표현하기엔 편협한 어떤 커다란 감정이, 오로지 이 영화를 채우는 전부다. 하지만 모자람을 느낄 겨를 따윈 없다는 거.
새소리로 지저귀며 끝나는 이 영화의 엔딩을 통해, 쿠아론 감독이 두 여인의 사랑 속에 얼마나 따뜻한 삶을 살아왔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가족은 다시 그들의 일상을 영위해나간다. 아이들은 할머니에게 바다에서 빠져 죽을 뻔한 이야기를 전하고, 클레오는 유산 후의 실어증을 극복하며, 소피아는 새로운 직장과 새로운 삶을 꿈꾸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알폰소 쿠아론이라는 명 감독을 선물해 준, 감독의 두 여인에게 감사해야 할 것 같다. 그녀들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알폰소 쿠아론이 없었을지도 모르니까. 그녀들은 과연 엄마이자 아빠였고, 그 사랑은 가족애라는 개념을 넘어선 연대정신이었다. 쿠아론 감독이 연출하는 영화들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묵직하고 다정한 시선은, 자신을 키워낸 여인들의 그 따스한 품에서 피어났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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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켜 주고 싶은 마음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제대로 본 영화는 얼마 없어서 이 참에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정주행 하여 글을 남기고 싶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다. 짧은 장면들만 기억나는 영화였고 어떤 주제를 가진 영화인지는 잘 몰랐던 영화였다. 솔직히 지브리가 특유의 따뜻하고 감성적인 색채와 분위기를 보는 재미이고, 특별한 주제를 찾으려고 보는 장르는 아니지만 그래도 '왜 그들이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가?' 그 원인을 알고 싶었다.
#사진 밑으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스틸컷
전쟁
영화에서 등장하는 시기는 전쟁이 진행 중인 시대이다. 분위기를 보면 제1차 세계대전 시기와 비슷한 건축양식과 고풍이 느껴지지만, 그들의 무기는 현대 무기보다 발달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각종 무기들과 하울과 같은 마법사들까지 전쟁에 참전하여 화려해 보이는 도시들 사이로 하루하루 폭발 소리와 거친 잔해들이 난무한다. 영화 제목에서 알다시피 하울의 심장으로 만든 악마 켈시퍼가 조종하는 움직이는 성이 등장한다. 하지만 성은 고철들과 잡동사니 물건들로 덕지덕지 붙여 만든 성의 모습이다. 필자는 이런 모습을 전쟁으로 피난을 떠나는 피난민, 이재민을 의미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전투 비행정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숨는 성의 장면, 특정한 목적지 없이 돌아다니는 장면은 전쟁으로 갈 곳을 잃은 사람들을 떠오르게 한다. 뿐만 아니라 성에 붙어있는 고철은 전쟁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 철이다. 이런 철로 성을 만들었다는 점은 그만큼 전쟁의 참담으로 곳곳에 철이 쉽게 볼 수 있다는 걸 유추할 수 있다.
사랑과 심장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하울과 소피, 황야의 마녀의 삼각관계가 이루어진다. 황야의 마녀는 하울의 심장을 얻으려고 하울을 찾는다. 이는 하울의 마음을 얻기 위한 그녀의 행동이다. 하지만 하울은 소피를 좋아하고 소피 역시 하울을 좋아한다. 하울이 소피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그녀가 성 안에 들어온 뒤부터일 것이다. 하울의 성을 고철과 잡동사니로 뭉쳐진 외관처럼 내부도 먼지투성이와 잡동사니로 더러운 환경이었다. 그리고 소피는 그 내부를 청소하고 관리하며 성 내부를 깨끗하게 만들어준다. 하울의 심장으로 만들어진 켈시퍼가 성을 만든 것이니 즉, 하울의 마음을 소피가 치유해주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황야의 마녀가 켈시퍼을 갖고 있다가 소피한테 뺏겼을 때 황야의 마녀는 울면서 "소피가 또 마음을 뺏으려 해"라는 대사를 내뱉는다. 하울의 마음과 하울의 마음으로 만든 켈시퍼까지 소피가 가져갔다는 사실에 질투의 눈물이다. 이렇듯 사랑이라는 감정을 심장이나 성 내부 등으로 물체화로 표현한다.
동심(童心)
영화를 보면 동심을 지켜주고 싶고, 기억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느껴진다. 등장인물들은 성숙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소피는 장녀로서 가족들의 생계를 이으려고 하는 듬직함과 성숙함이 느껴지지만 그녀도 눈물이 많고 내면에 순수함이 있다. 하울은 전쟁도구의 수단으로 지쳐 보이고, 항상 완벽해 보인다. 하지만 설리번을 만나기 두려워하는 장면이나 그가 노랑머리를 고집하며 외모에 신경 쓰는 장면은 사춘기 시절 소년의 모습이 보이는 어리숙하고 귀여운 모습이다. 우리는 모두 겉으로 나이 들어 보이고 성숙해 보이기 때문에 마음까지 그렇게 변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라고 우리를 다독인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내면을 한 번쯤 보고 하울의 더러운 내부를 소피가 청소하여 말끔하게 차려놓은 듯 우리의 마음도 이 영화를 보며 마음의 청소를 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어쩌먼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아이들한테 순수한 동심(童心)을 보여주고 어른들한테는 동심(童心)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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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발 떨어지니 더 격렬히 끓어오른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592년 4월, 왜군은 단 15일 만에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점령하며 파죽지세로 북진한다. 그러나 '이순신(박해일)'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거북선을 앞세워 남해안을 장악하자 이내 왜군은 보급에 난항을 겪는다. 이에 용인 전투에서 10만 명의 조선군을 격퇴한 '와키자카 야스하루(변요한)'는 해전을 통해 이순신을 꺾고 보급품을 전달함과 동시에 명나라로 진격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부산포에 수군을 집결시키고, '나대용(박지환)'이 설계한 거북선의 도면을 훔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반면에 '이순신(박해일)'은 '원균(손현주)'의 방해에 맞서가면서 선조가 의주로 파천하는 등 수세에 몰린 조선을 구하기 위한 최선의 작전을 고민하며 한산도로 출전한다.
전쟁 이론을 다룬 유명한 경구들을 이야기할 때 프로이센의 군인인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속 다음 말을 빼놓을 수는 없다. 그는 "전쟁은 다른 수단을 동원하는 정치의 연장(延長)"이라며 전쟁이 대립하는 의지들의 충돌이라고 보았다. 모든 전쟁은 본질적으로 다른 국가에 자기 의지를 강요하려 하는 한 국가가 많은 수단 중 선택한 한 가지 옵션에 불과하다. 즉, 전쟁의 명분과 목적, 승패의 기준점은 그 전쟁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과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많은 전쟁 영화들도 단지 전쟁과 전투의 양상을 그려내는 것만큼이나 그 전쟁의 명분과 정치적 의미를 끄집어내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일례로 <300> 시리즈는 (비록 역사 왜곡 논란이 있지만) 러닝타임 동안 자유 대 압제라는 이데올로기적 대결에서 전자가 승리하는 쾌감을 관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해준 바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도 비록 패배한 전투이지만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분기점이 되었던 덩케르크 퇴각의 의미를 스크린 위에 온전히 재현해냈다. <고지전>은 아예 전쟁을 통해 전쟁의 무의미함과 아이러니함을 꼬집은 바 있다.
1700만 관객을 동원해 한국 영화 역사상 최고 흥행작의 반열에 오른 <명량>의 후속작이자 프리퀄로, <최종병기 활>과 <명량>의 김한민 감독이 다시 한번 메가폰을 잡은 <한산: 용의 출현>도 다르지 않다. 1592년 음력 7월 8일에 펼쳐진 한산도 대첩을 스크린에 옮긴 영화 <한산>은 전쟁의 두 주체, 조선과 일본의 의지를 각각 의(義)와 불의(不義)로 설명한다. 이는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사실과도 정합한다. 일본군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길을 빌려달라는 이유로 아무런 명분 없이 조선을 침략했기에, 조선과 일본은 순도 100%의 가해자와 피해자다. 그러니 임진왜란이 의와 불의가 싸우는 전쟁인 것은 명확하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의와 불의의 전쟁을 풀어내는 드라마적 측면이다. 특히 <명량>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은 <한산>의 선택이 인상적이다. <명량>은 전쟁을 왕과 종묘사직이 아닌 백성을 위한 싸움이라 규정하며,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메시지를 극대화했다. 실제로 왕에게 버림받았다가 다시금 전쟁에 나설 것을 명 받은 백전노장은 국가와 군주를 위한 충성심에 앞서 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울돌목으로 향했고, 역으로 백성의 도움을 받아 기적처럼 승리한다. 이러한 정치적 함의는 2014년 개봉 당시 <명량>이 기록적인 흥행을 기록할 수 있었던 부분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다만 이 민심의 중요성을 전하는 방식이 다소 올드하고 일차원적이었던 것이 문제였다. 말을 할 수 없어 치마를 흔들며 위기를 알리는 '정 씨(이정현)'의 모습이나 백성의 희생을 보여주는 캐릭터였던 '임준영(진구)'처럼 부자연스러운 캐릭터들의 이야기는 극의 흐름을 툭툭 끊었다. 이 고생을 몰라주면 후손들이 전부 후레자식이라던 대사 역시 영화를 평면적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한산>은 다르다. 오히려 형보다 더 낫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일본군의 시점을 강조하며 이순신으로부터 거리를 둔다.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한 영화는 가장 먼저 부산의 일본군 진영을 비춘다. 또 일본군이 이순신과 거북선에 대비하는 모습을 착실하게 그려낸다. 걸핏하면 조선인들을 죽이는 평면적인 악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 빈자리는 두려움이 곧 전염병이라면서 아군의 패잔병을 죽여 혹시 모를 불씨를 제거하는 주도면밀함, 간첩의 침투와 그로 인한 정보의 유출을 경계하는 치열한 첩보전, 군사적 약점을 지우기 위해 전력을 증강하고 작전을 가다듬는 철저함이 대신한다.
반면에 스크린 속 조선군은 취약하다. 거북선을 잃고, 거북선의 설계도를 탈취당하며, 학익진은 제대로 완성되지 않았다. 즉, 영화는 의롭지 못하다는 단편적인 인상 대신 신중하고 영리하며 강대한 불의 앞에 흔들리는 의로움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순신의 학익진은,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거북선의 등장은 역으로 더 큰 감동을 준다. 철저하고 신중했던 불의가 의로움으로 쌓은 바다의 성 앞에서 필연적으로 궤멸되는 모습은 이른바 품격 있는 '국뽕'으로 이어진다. 한산 바다에 수군 군영을 구축하며 단단한 방패를 만드는 모습으로 영화가 결말을 맺는 이유이자, 작중 최고의 씬스틸러인 거북선이라는 소재가 단지 눈요기에 그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로 거북선을 장님 배라는 의미의 '메구라부네'라고 줄곧 부르던 왜군 장수들은 거북선을 마주친 순간 영화 초반 패잔병들이 그러했듯이 해저 괴물이라는 의미의 '복카이센'이라고 말한다. 이는 일본군의 거북선에 대한 두려움을 단적으로 드러내며, 곧 의로움의 힘을 보여준다.
그래서 자칫 억지스럽거나 정서적으로 과장될 수 있었던 항왜 '준사'의 서사도 비교적 자연스럽게 한산도 대첩과 맞물린다. 아군을 보호하지 않는 왜군의 악의를 경험한 왜장 준사는 이순신을 만나 마음을 고쳐 먹고 의라는 글자가 새겨진 깃발을 들고 의병과 함께 전투에 임한다. 이 모습의 함의는 굳이 과장된 감정선이나 대사를 통하지 않아도 국가와 백성을 보호하는 강력한 성인 학익진과 자연히 오버랩된다. 그렇기에 전쟁과 전투에 담긴 의미를 전달하는 <한산>의 방식은 전작에 비해 상대적으로 세련되게 느껴진다. '정보름(김향기)'와 '안준영(옥택연)' 캐릭터의 분량이 전편에 비해 적어서 인위적이고 신파적인 연출이 줄어든 것도 영화의 담백함에 기여한다.
또 영화가 이순신의 활을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칼을 대조해 의로움의 필연적 승리와 그 쾌감을 강조하는 것도 흥미롭다. 와키자카의 칼은 명나라로 진격하려는 야욕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두려움을 제거한다는 목적으로 패잔병을 죽이는 그의 칼은 왜군끼리도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분열의 칼이며, 명나라까지 향하는 지도가 그려진 황금 부채로 변하기도 한다. 반면에 이순신은 죽을 위기에 처한 부하 나대용을 구하기 위해 총을 맞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활을 쏴 나대용을 보호하고, 약점이 드러난 거북선을 구해낸다. 그리고 나대용과 거북선은 찰나의 순간 이순신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것으로 보답한다. 그래서 와키자카의 칼도 조총도 이순신을 위협할 수는 없다. 의로움이 담긴 이순신의 활 앞에서 악의로 가득한 그의 무기는 무용하고, 패배할 수밖에 없다.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한산 대첩에서 갑옷에 화살에 맞았다는 역사적 기록을 영리하게 활용한 드라마의 힘이 돋보이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장수가 자신의 무기를 활용하는 방식이 대비되는 점도 드라마에 입체감을 더한다. 상대적으로 빈번하게 칼을 뽑는 와키자카와 달리, 작중 이순신이 활을 쏘는 장면은 딱 세 번 등장한다. 이는 신중함을 기하면서도 끝내는 자신의 경험을 답습하는 와키자카와 달리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신중한 이순신의 차이를 드러낸다. 와키자카는 한산도 바다가 용인 전투와 같은 지형이라는 이유로, 또 이순신의 학익진이 과거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드러난 학익진의 약점을 공유할 것이라고 판단해 과거의 전술을 반복한다. 반면에 꿈속에서 녹둔도에서의 전투를 다시 한번 마주한 이순신은 와키자카의 선택을 예측한 후 마지막까지 확실한 한 수를 기다리다 왜군의 공격을 되받아 역공한다.
이러한 차이점은 두 배우의 서로 다른 스타일의 연기가 빛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변요한은 본래 신중하고 치밀하지만 전투에 돌입하면서 야망에 부풀었다가 학익진 앞에서 좌절해 절망하는 와키자카의 입체적인 변화를 잘 짚어냈다. 이는 상대적으로 적은 대사와 비중에도 불구하고 박해일의 절제된 표정 연기가 지장(智將)으로서의 이순신을 표현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이유다.
물론 모든 드라마적 측면은 결국 전투와 전쟁의 양상을 알기 쉽게, 또 박진감 있게 펼쳐 보인 연출과 구성 덕분에 빛난다. 우선 당포에서 견내량과 한산으로 이어지는 전투의 흐름 속에서 매 순간 변화하는 조선 수군의 학익진과 일본 수군의 어린진이라는 진형을 넓고 수직적인 구도로 잡아내 그 형태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밑바닥이 둥근 일본군 함선과 밑바닥이 평평한 판옥선의 차이점을 활용해 전투의 변수를 만들기도 하며, 거북선들의 충파로 인한 박진감이나 전방위 포격으로 적을 섬멸하는 모습도 효과적으로 그려낸다. 또 전반적인 임진왜란의 흐름을 활용하는 측면에서도 영리함이 돋보인다. 지형적으로 유사한 용인 전투의 전황을 상세히 설명해 한산도 대첩의 전술적 가치까지도 부각하는가 하면, 선조의 몽진을 강조하며 한산도 대첩이 지니는 전략적 측면에서의 의의도 스크린에 담는 데 성공한다.
역사적 사실을 영화적으로 각색한 지점도 눈에 띈다. 일례로 영화는 역사 속 이치 전투와 웅치 전투의 특징을 합쳐 가상의 전투를 만들어 낸다. 본래 전주성이었던 일본군의 목적지를 전라좌수영으로 변경해 한산도 대첩 전후의 위기감을 더 고조하기 위함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역사적 서술을 충실히 따르며 서스펜스를 끌어올린다. 원균의 활용법이 대표적이다. 다른 미디어들과는 달리 무능하고 비겁한 원균의 캐릭터성을 온전히 묘사하면서 일본군과의 전투라는 외적 위기는 물론 진이 뚫릴 수 있다는 식으로 조선군 내부의 위기도 조성한다. 그 결과 거북선의 기습과 돌격 , 학익진의 위력, 평소와 달리 화약을 잔뜩 준비한 이순신의 지략 등의 임팩트는 모두 극대화된다.
특히 이는 영화를 제작할 때 한산도 대첩이 명량 해전에 비해 여러 핸디캡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인상적이다. 명량 해전은 이순신 개인에게도, 조선 수군의 입장에서도 절대적인 어려움이 있는 전투였다. 총지휘관은 억울하게 파직당하고 어머니를 잃은 상태였고, 조선 수군도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후 12척의 판옥선만 남아 있었다. 그 와중에 130여 척이나 되는 일본군을 패퇴시켰으니 명량 해전은 별다른 각색 없이도 충분히 드라마틱하다. 반면에 한산도 대첩 당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연전연승 중이었고, 전력도 온전했다. 이순신 개인 입장에서도 사천 해전에서 총탄을 맞아 부상당한 것 정도를 제외하면 일신상에 크게 특이한 부분이 없다. 즉, 한산 대첩은 전략적인 관점에서는 중대한 승전이지만 오히려 처절함과 승리의 쾌감이 덜 직관적인 전투다. 이러한 핸디캡을 강렬한 스펙터클이 돋보이는 긴 분량의 해전 씬과 영리한 각색을 통해 극복했기에 <한산>의 임팩트는 결코 <명량>에 뒤처지지 않는다.
아쉬움이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다. 시리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안준영과 정보름 캐릭터는 왜군과의 첩보전을 담당하면서 이번에도 일정 부분의 분량과 비중을 분배받는다. 그런데 그들은 전반적으로 담백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신파의 감정선을 유지하면서도, 시리즈의 연속성을 부각한다고 보기에는 역할이 작다. 그러다 보니 찰나의 순간 삽입된 그들의 마지막 장면까지도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영화의 최대 장점인 영리한 각색과 전투씬도 단점이 없지는 않다. 영화는 한산도 대첩 이후 조선 수군이 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기 위해 부산까지 진격하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그런데 정작 부산진 전투가 한산도 대첩이 포함된 3차 출정이 아닌 이순신의 4차 출정에 포함된다는 점에서 굳이 한 데 합칠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한편 거북선이 나타나는 전투씬은 배와 배가 충돌하며 원초적인 쾌감을 느끼게 해 주는데, 다만 거북선에 사용된 CG의 수준이 부자연스러운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유인 작전 도중 암초 바다를 해쳐 나오는 조선군과 그대로 좌초되는 일본군을 묘사할 때처럼 순간순간의 장면에서도 부자연스러운 그래픽이 튀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이순신 장군이 와키자카 야스하루에 비해 적게 등장하고, 인간적인 고민이 두드러지지 않는 점도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물론 김한민 감독이 이순신 3부작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명량 해전에서는 용장(勇將)을, 한산해전에서는 지장(智將)을 그려내고자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측면이기는 하다. <명량>이 영웅 이면의 고뇌에 주목했다면 <한산: 용의 출현>에서는 젊은 장군이자 리더인 이순신의 자질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노량: 죽음의 바다>가 인간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한층 원숙해진 현장(賢將) 이순신을 그려낼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는다면, 이 단점은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한산: 용의 출현>은 전편의 단점은 수정하고, 객관적인 접근법을 통해 같은 주인공의 또 다른 면모를 부각하면서, 품격 있는 사극이자 영웅전, 그리고 전쟁 영화로서 맡은 바 임무를 다해낸다.
A(Acceptable, 무난함)
온 국민이 아는 해전에 영화적 재미를 더하는 데 성공한 의와 불의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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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깔끔한 액션의 교본, 마무리를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는 타이머
📽️ 언젠틀 오퍼레이션 (2025)
감독: 가이 리치
출연: 헨리 카빌, 앨런 리치슨, 알렉스 페티퍼 외
서부극은 미국의 역사 중 서부 개척사를 소재로 한 영화나 극을 말한다. 그런데 미국도 아닌 영국, 그것도 땅 위가 아닌 바다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서부극의 향기가 난다면 어떨까. 서부극이 하나의 장르로 떠오른 것은 서부개척시대라는 배경 때문도 있겠지만, 한 시대를 바탕으로 둔 시원한 액션과 야성미, 의리와 배신이 절묘하게 섞여들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틀 오퍼레이션>에서 서부극의 향기를 느꼈던 것 역시 그러한 요소 때문일 것이라 추측한다.1940년대, 세계 2차 대전. 나치를 앞세운 독일은 유럽 전반을 집어삼키려고 하고 있었고, 영국의 함락 역시 머지않은 상황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미국군을 자국군에 합류시켜야 했던 영국은 하나의 비책을 낸다. 비밀 특수 부대를 보내 독일의 비밀 병기인 U 보트를 무력화시킬 것! 이 모든 일은 실제 사건에 기반하고 있다.비밀 특수 부대는 '거스 마치'를 필두로 만들어진다. 통제 불능의 미친개, 지옥에서 돌아온 근육질 군인, 냉철한 폭발물 전문가, 암살이 주특기인 미인계 특수 요원.... 뭐 하나 불필요한 캐릭터가 없다. 그들은 그들의 자리에서 묵묵히 제 몫을 해낸다. 제목에 붙은 '언젠틀(Ungentle)'의 의미처럼 그들은 다소 무자비하지만, 시원하고 깔끔하게 표현된 액션 덕분에 크게 잔인하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가속도가 붙은 액션에 통쾌함을 느낄 뿐이다.실제 사건에 기반한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어떤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가"보다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는가"에 더 초점을 맞춰 보아야 한다. 작전 중에 발생한 돌발 상황이나 통제 불가한 변수들을 돌파해 나가는 주인공들을 보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팀워크를 확인할 수 있고, 우리는 그런 원팀을 눈으로 지켜보며 우리 역시 그들에게 동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제리 브룩하이머의 원팀 전략은 이미 <캐리비안의 해적>과 <탑건>을 통해서도 증명된 바 있다. 관객은 점차 그들에게 동화되다가, 어느 순간 그들과 하나됨을 경험한다. 화면 안과 밖을 유대감으로 단단히 연결해 관객을 이탈하지 못하게 하고, 새로운 연출로 오감을 즐겁게 하면 관객은 만족하며 극장을 나갈 수 있다. 이러한 제리 브룩하이머의 전략에 <알라딘>, <셜록 홈즈>를 만든 가이 리치 감독의 깔끔한 연출이 붙어 탄생한 영화가 바로 <언젠틀 오퍼레이션>이다.세계 최초의 블랙 미션, 역사를 뒤집은 녀석들이 보고싶다면 바로 이곳이다.*해당 리뷰는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시사회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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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화 못지않게 울림 전하는 추적극
실화를 뛰어넘기는 쉽지 않지만, 이에 못지않게 울림과 희망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이것이 '시민덕희'가 극장을 찾아온 관객들을 사로잡는 방식이다.
영화 '시민덕희'는 보이스피싱을 당한 평범한 시민 덕희(라미란)에게 사기 친 조직원 '손대리' 재민(공명)의 구조 요청이 오면서 벌어지는 추적극이다. 실제 지난 2016년 보이스피싱 범죄조직의 총책을 잡는 데 큰 공을 세운 화성 거주 시민 김성자 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각색했다.
보이스피싱에게 당한 피해자가 총책을 잡기 위해 중국으로 직접 건너간다는 로그라은 영화 '보이스'와 비슷하다. '보이스'에 비해 허를 찌르는 두뇌플레이나 계획, 화려한 액션은 존재하지 않고, 감탄을 자아내는 반전도 없다. 중간중간 웃음 포인트가 간간이 나오긴 하나, 코미디물도 아니다.
다소 무거운 분위기에 예상 가능한 스토리이긴 하나, 모두가 기대하는 사이다가 후반부에 적절하게 터져 나와 속이 뻥 뚫린다. 또한 보이스피싱 피해로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그리면서 희망과 울림을 선물한다.
보이스피싱 조직원 재민과 피해자인 덕희가 공조하는 과정이 꽤나 몰입도를 높인다. 특히 재민이 각성하고 덕희와 본격 공조를 펼치는 부분부터 이야기에 탄력이 붙는다. 물론 그까지 도달하는 동안 살짝 지루한 감이 있다.
이 영화의 또 다른 강점은 믿고 보는 배우들의 합이 좋다는 것이다. 먼저 메인롤을 맡은 라미란은 직장을 다니며 두 아이를 키우는 평범한 소시민이자 동시에 사기당한 돈을 찾기 위해 보이스피싱 총책을 잡으려고 발 벗고 나서는 덕희의 모습을 강점인 생활 연기로 살리며 존재감을 자랑했다.
라미란을 중심으로 염혜란, 장윤주, 안은진 등 생활 연기에 일가견 있는 배우들이 한 팀을 이뤄 케미를 발산하니 볼 맛이 났다. 특히 염혜란은 덕희를 돕는 조력자이자 직장 동료인 봉림 역을 맡으면서 다시 한번 착붙 연기력을 펼치며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 외 사기 쳤지만 짠내 나고 구해주고 싶은 공명의 짠함과 확신의 빌런으로 섬뜩함을 드러낸 이무생의 활약도 인상 깊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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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를 의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현실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게임인 Free city의 유저들에게 새로이 강자로 자리매김한 플레이어가 있다. 그의 ID는 블루 셔츠 가이. 그는 과도한 폭력성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많은 이들에게 중2병 게임으로 치부되던 프리시티, 그리고 몸은 어른이지만 정신이 아직 성장하지 못한 어른이들에게 듣도보도 못한 새로운 캐릭터로 각인되어, 게임 규칙과는 달리, 선행으로 유명세를 타게 된다. 게임 유저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게 된 그는 게임 유저들 못지않게, 게임회사 직원들도 그의 정체에 대해 추적하는데, 알 길이 없다. 당연하다. 이 남자는 게임 유저가 아니기 때문이다. 프리시티의 배경 캐릭터 NPC이다.
게임 제작자들이 만들어준 세상에서 그들이 설정해놓은 행동 패턴으로 매일 쳇바퀴같은 삶을 살아가는데도 참 해맑게 살고 있는 이 남자, Guy. 이 남자의 정해진 루틴과도 같은 삶이 한 여자를 만나고 나서 균열이 생기게 된다. 그가 살고 있는 세상이 하나의 게임 세상임을 자각하고, 그가 프로그래밍된 언어와는 달리, 그의 행동에 자유 의지가 생겨나며, 게임 속 플레이어들과 대등하게 게임을 펼치면서 살아간다. 게임 제작자들도 예상하지 못한, 이 말도 안되는 상황 속에서 그에게 닥친 위기들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1.사람이 아닌데, 사람 같은, 수많은 군종 속의 한 사람,guy.
자신의 행동과 말이 인간이 설정한 기계어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가이는 자신의 행동의 진정성을 스스로 의심하게 된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우리의 삶은 가끔 누군가의 삶의 들러리가 될 때도 있고, 자신의 의지대로 결과가 녹록치 않게 나오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자기 자신의 쓸모없음에 필요 이상으로 절망하고, 자신의 한심한 모습에 끊임없이 파고들곤 한다. 그런 게임 캐릭터의 모습을 통해 자기 자신이 항상 주인공이 될 수 없음에 너무 절망하는 자존감이 현저히 낮은 현대인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일개 npc를 통해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을 투영하게 되다니, 정말 기묘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가이가 하는 행동에는 자유의지가 있어서는 안된다. 인간이 창조해낸 캐릭터이고, 게임 세상에서 플레이어의 행동에 상관없이 특정 행동만 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인생은 결국 인간 손아귀에 의해 놀아날 뿐이다. 그에게 자유의지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면, 짜임새있게 설계된 세상 속에서 그냥 생각없이 살아가도 행복했을 삶인데, 자유의지가 생기면, 자신의 의지와 현실 간의 간극을 이겨내야 하는 과제에 항상 직면해야 하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삶이 자신의 의지로 행해질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느끼는 방황을 보면서 우리네 삶이 우리 의도대로 흘러가지 못해 좌절하는 무수한 청춘들이 눈에 그려졌다. 그렇다. 가이, 영어로 하면, Guy, 또다른 의로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한 이 게임 캐릭터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찾을 수 없는 인물이지만 현실 속의 우리들을 반영하고 있는 캐릭터이기도 한 것이다.
2. 절망 속을 살고 있다면, 현재에 집중할 것.
난 여기 앉아서 내 절친이
힘든 시간을 이겨내게 돕고 있어
그게 진짜가 아니면 뭐가 진짜겠어?
하지만 자신의 현실이 가짜라는 사실에 충격받은 가이는 친구를 찾아가 조언을 구한다. 그 때, 친구가 한 말이그에게 경종을 울렸는데, 설사 자신의 현실이 가짜라는 사실이 맞을지언정, 자신이 지금 맞닥뜨린, 현재 상황까지 부정해버리면, 진짜 현실 세계는 그 어디에도 없음을 그에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가이가 상황적인 요소이든, 내면적인 요소이든 절망적인 감정에 허우적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라면, 가이 친구의 대사는 당신이 만들어낸 성과가 허무하게도 의미없는 일이었음이 확실하게 증명되었을지라도 아직 우리에게는 현재의 삶이 남아있음을 잊지 않아야 함을 일깨워주었다. 그의 대사를 통해 자존감이 낮은 수많은 현실 속 Guy들은 너무 과거에 매여있지도 말고,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환상, 두려움에 대해 신경쓰지 말기를, 더불어, 당신에게 닥친 현실 속 퀘스트를 하나하나 뚫어가야 함을 깨닫게 될 수 있었다.
현실 속 우리들은 생각보다 겁이 많다. 나이가 하나하나 들어갈수록 도전하기를 두려워하고, 과거의 패기넘치던 모습에서 점점 남들의 말에 위축되기도 하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다.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하게 될 때,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닥치고, 지금 해야하는 일이 뭐지? 나는 지금 누굴 신경써야 하지?"
그러면, 자신이 처한 현실이 가짜처럼 느껴질만큼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당신 옆에 있을 사람들은 계속 존재해 줄 것이고, 당신이 지금 당장 해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당신도 알고 있을 것이다. 어차피 나 하나 챙기면서 살기도 버거운 이 세상에서 우리 그냥 오지랖 넓은 소리들 다 개무시하고, 그냥 우리만의 속도로, 내 사람들이라도 철저히 챙겨가면서 그리고 조금만 덜 절망하면서 살아가자. 당신이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한 당신은 이미 주인공이니까.
3.총평
여태까지 나름 심각한 영화리뷰하는 것처럼 글을 썼지만 사실 이 영화는 오락 영화이다. 굉장히 오락 장르임을 대놓고 드러내는 아주 솔직한 영화이다. 그리고 조금 유치한 로맨스 영화이기도 하다(살짝 스포를 하자면, 이 영화에는 표면적인 로맨스와 영화를 끝까지 봐야만 알 수 있는 로맨스가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대놓고 오락 영화라고 해서 작품성이 없는 영화라고 평하고 싶지는 않다. 비록 게임 속 캐릭터이긴 하지만 인간이라면 한 번 정도는 느껴봤을 법한 혼란을 이겨내고, 성장하는 가이의 모습을 통해 우리네의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될 만한 영화라고 본다. 또한, 게임을 이용하는 사람 그리고 게임을 만드는 사람 모두의 입장에서 게임 산업의 이면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장을 열어줄 영화가 탄생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싶다. 오락성과 작품성 모두 평균 이상인 영화라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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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학교 가는 길> 티저 예고편
전국 특수학교 재학생의 절반은
매일 왕복 1~4시간 거리를 통학하며
전쟁 같은 아침을 맞이한다
장애 학생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특수학교
아이를 위해 거리로 나선 엄마들은
무릎까지 꿇는 강단으로 맞서는데…
세상을 바꾼 사진 한 장,
엄마들의 용기 있는 외침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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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키라> 메인 예고편
네오 도쿄가 또 한번 폭발한다! 미래를 예언한 혁신적인 명작 애니메이션! #아키라 예고편 공개